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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독립운동가에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

    국가보훈처가 31일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활약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한인애국단은 일제 인사를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다.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 사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1918년 국내에 가족을 모두 남겨둔 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 선생은 운남강무학교 졸업 이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김구 선생 신변 보호를 맡았다. 이덕주 선생은 1932년 3월 조선 총독을 처단하라는 김구 선생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서 의거를 준비하다가 경찰에 체포됐고 그해 7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최흥식 선생은 1932년 5월 중국 다롄에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처단하려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안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 선생과 최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1990년, 1991년 추서해 공훈을 기렸다.
  • ‘득점왕’ 손흥민, 히딩크·김연아 받은 청룡장 받는다…尹 직접 수여(종합)

    ‘득점왕’ 손흥민, 히딩크·김연아 받은 청룡장 받는다…尹 직접 수여(종합)

    손, 亞최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尹 “아시아 축구계 모두가 축하할 경사” 축전손기정, 히딩크, 박세리, 김연아 등이 받아돌아온 태극전사 손흥민, 팬서비스도 최고윤석열 대통령이 아시아 선수 최초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른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에게 체육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직접 수여하기로 했다. 그동안 스포츠 선수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룡장을 대신 수여해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30일 언론에 “지난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손흥민 선수에 대한 청룡장 상훈 결정이 났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번에 직접 손흥민에게 청룡장을 전달하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윤 대통령은 손흥민에게 축전을 보내 “득점왕은 손흥민 선수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축구계 모두가 축하할 경사”라고 밝혔다.윤 대통령이 지난 10일 취임 이후 스포츠 선수에게 보낸 첫 축전이었다. 청룡장은 맹호장·백마장·기린장 등 체육훈장 중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이다. 마라토너 고 손기정 옹을 비롯해 엄홍길, 히딩크, 박세리, 김연아 등 주요 체육인이 받거나 추서됐다. 손 “득점왕 됐다고 달라진 것 없죠!”  손흥민은 이날 6월 A매치 기간을 맞아 축구 대표팀에 소집돼 파주 NFC(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첫 훈련을 소화했다. 훈련에 앞서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EPL 득점 1위(23골)에 오르고 ‘금의환향’한 뒤 처음으로 국내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손흥민은 “저는 달라진 게 전혀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손흥민은 EPL 득점왕으로 한국에 돌아온 소감을 묻는 말에 “대표팀에 들어오는 마음은 똑같다. 득점왕이 된 것은 대표팀을 위해서 한 것은 아니다. 좋을 일이지만, 대표팀에서는 내가 해야 할 다른 역할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득점왕이 되면서 달라진 게 무엇인지를 묻는 말에 “전혀 없다. 전혀 없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득점왕이 된 것보다는 토트넘이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본선 무대에 나갈 수 있게 돼 기쁜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고 말했다. 손흥민은 이어 “대표팀 생활 10년 가까이 하면서 평가전을 4경기 연속으로 치르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까지 6개월이 남은 만큼, 팀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기회로 삼겠다”고 힘줘 말했다.손흥민, 팬 서비스도 단연 최고밝은 미소로 한 명씩 눈 마주치기 손흥민은 팬 서비스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이날 훈련 첫날인 만큼 오후 팬들에게 훈련 모습을 공개하는 ‘오픈 트레이닝 데이’ 행사를 진행했다. 대표팀의 오픈 트레이닝 데이 행사는 2019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선수와 코치진의 목소리만 들리던 훈련장에선 약 2년 반 만에 팬들의 응원이 울려 퍼졌다. 팬들은 손흥민(토트넘)과 황의조(보르도) 등의 이름을 쉬지 않고 외쳤다. 가장 많은 환호성을 받은 손흥민은 중간중간 팬들을 바라보며 밝은 미소로 화답했고, 훈련이 끝나고도 마지막까지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손흥민은 1시간 30분의 훈련 뒤 마지막으로 팬들의 앞을 지나갔는데, 5분이 넘도록 팬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방역 지침 때문에 팬들과 접촉을 할 수 없는 만큼 선물을 전달하려는 이들에게는 “정말 받고 싶은데, 못 받게 돼 있다. 죄송하다”며 연신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대신 전매특허인 ‘찰칵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팬들의 아쉬움을 달랬다. 대한축구협회는 28일 선착순으로 오픈 트레이닝 데이에 참가할 300명의 팬을 선착순 모집했는데, 신청 시작 후 1초 만에 마감됐다.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2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과 맞대결한다. 이어 남미 강호인 칠레(6일 대전월드컵경기장)와 파라과이(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 손흥민과 EPL ‘공동 득점왕’에 오른 무함마드 살라흐(리버풀)를 앞세운 이집트(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와 차례로 맞붙는다. 손흥민, 英현지 평점 유일 10점 만점“손흥민, 최고의 시즌…놀라운 공헌” 손흥민은 영국 현지 매체의 시즌 평점에서 토트넘 선수 중 유일하게 ‘10점 만점’을 받았다. 영국 풋볼런던은 지난 26일(현지시간) 토트넘 선수단의 2021-2022시즌 평점을 매기며 손흥민에게 가장 높은 10점을 줬다.풋볼런던은 “손흥민은 토트넘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언제나 거기 있었다.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며 극찬했다. 이 매체는 손흥민이 이번 시즌 리그 35경기에 출전해 23골을 터뜨려 무함마드 살라흐(리버풀)와 공동 득점왕에 오르는 등 기록을 상세히 전했다. 그러면서 “손흥민은 이번 시즌 해리 케인과 리그 최다 합작골 기록을 갈아치움과 동시에 페널티킥 골 없이 득점 행진을 이어갔다”고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또 “손흥민은 자신감이나 폼이 다소 떨어질 때조차도 팀에 기여했다. 12월 이후엔 골이나 도움이 없는 경기는 7경기에 불과했다”면서 “놀라운 공헌”이라고 강조했다.
  • [월드피플+] 생후 2개월 아들과 마지막 인사…하늘의 별이 된 ‘우크라 영웅’ (영상)

    [월드피플+] 생후 2개월 아들과 마지막 인사…하늘의 별이 된 ‘우크라 영웅’ (영상)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우크라이나 영웅이 생후 2개월 아들을 뒤로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동유럽매체 ‘비셰그라드24’는 18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투기 조종사 세르히 파르코멘코(25) 대위의 장례식이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공군 제299전술항공여단 항공부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 세르히 파르코멘코(25) 대위는 이번 전쟁에서 미그(MiG)-29기를 몰고 38차례 출격했다. 그간 러시아군 탱크 20대, 장갑전투차량 BBM 50대, 군용차량 55대, 연료탱크 20대를 박살 내고 적군 수백 명을 무찌르는 등 활약했다.  대위는 그러나 지난 14일 자포리자 훌리아이폴레에서 임무 중 전사하였다. 아내와 생후 2개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 85일째였던 지난 19일 파르코멘코 대위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하고 ‘우크라이나의 영웅’ 칭호를 추서했다. 대위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다른 전사자 47명과 국군 162명에게도 각각 사후 훈장과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한 대위의 장례식은 18일 빈니차 공군기지에서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대위의 부모와 아내, 생후 2개월 된 아들과 전우들이 모여 대위의 죽음을 슬퍼했다. 빈니차 하늘에선 대위의 업적을 기리는 전투기 추모 비행이 진행됐다. 대위의 유족과 전우들은 생전 고인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그 사이로 영문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는 대위의 아들은 전쟁의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냈다.사망한 대위는 개전 직후인 지난 3월 아들을 얻었다.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혔지만, 국가를 위해 전투기를 몰며 전장을 누비다 전사했다. 아기는 할아버지 품에 안긴 채 아버지와 기억하지 못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영정사진 앞에서 버둥거리는 아기를 보고 곳곳에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주말 사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 지휘 본부와 탄약고 등을 목표로 동부 전선과 남부 미콜라이우주 등에 미사일과 로켓포 공격을 퍼부었다. 우크라이나군도 교량을 파괴하는 등 러시아군 진격을 막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돈바스 상황이 매우 어렵다. 러시아의 공격을 매일 힘겹게 막아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투를 중단하면 러시아가 더 강하게 반격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번 결사 항전 의지를 보였다.
  • 오늘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

    오늘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

    사라질 뻔한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강대한 일제에 저항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순국 100주기 추도제’가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18일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가 19일 오전 9시 서울 강북구 봉황각과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된다고 밝혔다. 손 선생은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속한 독립운동가다. 손 선생은 천도교 측 대표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22년 5월 19일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으로 눈을 감았다. 천도교(교령 박상종)와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옥) 주관으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는 유족, 천도교 회원, 기념사업회원, 이남우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일반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다. 1부는 의암성사 묘소 참례와 추모제, 2부는 2022년 동학학회 춘계 학술대회와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의암성사 묘소 참례는 묘소가 위치한 봉황각에서 오전 9시부터 90분간, 추모제는 중앙대교당에서 11시부터 50분간 이어진다. 2022년 동학학회 춘계 학술대회는 ‘의암 손병희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다. 이후 일반 시민이 동참해 열리는 손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의 공연을 끝으로 추도제가 마무리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보훈처는 손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수유리 묘역을 지난해 1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으며 올해 순국 100주기를 맞아 묘역 정비 공사를 이달 중 마무리할 예정이다.
  • “영정, 소품 같아 실감 안 나”… “등대 같은 분, 너무 일찍 가셨다”

    “영정, 소품 같아 실감 안 나”… “등대 같은 분, 너무 일찍 가셨다”

    임권택·봉준호 감독 등 발길영화인장… 영결식 11일 열려강수연이 세상을 떠난 지 이틀째이자 조문 첫날인 8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도 고인에 대한 추모가 이어졌다. 전날에 이어 이날 오전 다시 빈소를 찾은 임권택 감독은 고인에 대해 “워낙 영리한 사람이라 그 많은 세월 일하면서도 영화 촬영에 지장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제 입장에서는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영화가 좀더 빛날 수 있었고, 여러모로 감사한 배우였다”고 추모했다. 임 감독은 고인을 ‘월드 스타’로 만든 ‘씨받이’(1987) 때부터 인연을 이어 온 사이다. 전날 큰 충격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는 임 감독은 이날 두 시간 넘게 빈소를 지키며 “좀더 살면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이인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먼저 가니 안타깝다”고 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역시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지켰다. 지난 5일 고인이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직후부터 병원에서 곁을 지킨 김 전 이사장은 최근까지 고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비보라 모두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영화계 분위기를 전했다. 봉준호 감독은 “종종 뵙고 이야기도 길게 나누곤 했다”며 “그래서인지 영정 사진도 영화 소품같이 느껴질 정도로 실감이 안 난다”며 애통해했다. 이 밖에도 문소리·문근영·박정자·김혜수·이미연·김윤진·한지일·류경수·예지원·김학철·전노민·홍석천 등 동료 배우와 연상호·윤제균·류승완·배창호·이장호·임순례·민규동·정지영 감독 등 수많은 영화인이 고인을 찾았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훈장 추서 계획을 밝히고 “지금보다 더 크게 대한민국 영화사에 큰 역할을 하실 분인데 이렇게 일찍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김부겸 국무총리,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배우 전도연·강동원·마동석 등도 조화를 보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경마장 가는 길’(1991)의 상대역이던 문성근은 소셜미디어에 “대단한 배우”라며 “씩씩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했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글을 남겼다. 배우 김규리는 2015년 부산영화제를 회상하며 “저에겐 등대 같은 분이셨습니다. 빛이 나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던 선배님을 아직 어떻게 보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슬퍼했다. 영화감독 겸 배우 양익준도 “누나 같았고, 따뜻했고, 사랑스러웠던 분이 돌아가셨다”며 명복을 빌었다.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는 장례 절차는 유족 뜻에 따라 사진 촬영 등 언론 취재에 일부 제한을 뒀지만 오는 11일 오전 10시 영결식은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된다.
  • ‘잘 다녀오라 했는데’...순직 해경 합동분향소 친척·동료·시민 조문 행렬

    ‘잘 다녀오라 했는데’...순직 해경 합동분향소 친척·동료·시민 조문 행렬

    제주 마라도 앞 먼 바다에서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항공대원 3명을 추모하기 위해 부산시민장례식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추모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10일 오전 부산시민장례식장에는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부기장 정두환(50) 경위, 정비사 차주일(42) 경장, 전탐사 황현준(27) 경장의 빈소가 마련됐다. 앞서 사고직후인 지난 8일 오전 2시 10분쯤 정 경위와 황 경장이 구조됐지만 숨진데 이어 실종됐던 차 경장도 사고 이틀째인 9일 오전 11시 18분쯤 바다 밑에 뒤집힌 상태로 가라앉아 있던 헬기 동체안에서 숨진채 발견돼 인양됐다. 해경은 동료 해양경찰관과 외부인사 등이 순직한 이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부산시민장례식장에 이날 오전 합동 분향소를 차렸다. 분향소에는 이날 아침부터 친척과 해경 동료, 일반 시민 등의 조문과 분향이 이어졌다. 고인들의 친척과 지인 등은 침통한 모습으로 분향소에 들어섰고, 유족은 친척들을 만나자 오열했다. 유족과 친척 등의 울음소리가 분향소 밖까지 들려 조문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친척들은 유족을 부둥켜 안으며 위로했다. 동료를 떠나보내기 위해 제복을 차려입고 방문한 해경 직원들은 분향소 안으로 들어서면서 동료를 잃은 슬픔에 울먹이며 조문과 분향을 했다. 사고가 나기 전 제주에서 차 경장을 만났다는 황성호(39) 제주소방안전본부 소방장은 “헬기 연료를 받기 위해 제주에 왔다고 하길래 잠시 만났는데, 불과 몇 시간 뒤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면서 “야간에 멀리까지 비행을 가니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이봉환(48) 호남119특수구조대 전문경력관은 “해경 동기인 차 경장은 항상 끝까지 현장에 남아 일을 했던 친구였다”며 “언제 어디서든지 불평이나 불만 한마디 없이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 본받을 부분이 많았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그는 “차 경장과 조만간 밥을 먹기로 약속 했는데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됐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민들도 국가를 위해 현장에 투입됐다가 순직한 고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분향소를 찾았다. 분향소에서 만난 A씨는 “뉴스에서 헬기 추락사고 소식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파 분향소를 방문했다”며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직한 고인들이 부디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8일 대만 해역에서 실종된 ‘교토 1호’ 수색에 투입됐다가 복귀하던 헬기(S-92)가 추락하면서 정 부기장 등 남해해경청 항공대원 3명이 순직했다. 순직한 해경대원 3명의 장례는 해양경찰장으로 12일까지 진행된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10시 부산 강서실내체육관에서 엄수된다. 해경은 순직한 대원 3명에게 1계급 진급을 추서할 예정이다.국립묘지 안장과 국가유공자 지정 등 예우절차도 진행한다.
  • 제주 추락 해경 헬기 인양 재개···부산에 오늘부터 합동분향소 운영

    제주 추락 해경 헬기 인양 재개···부산에 오늘부터 합동분향소 운영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남서쪽 370㎞ 해상에서 추락한 남해해경청 항공대 소속 헬기(S-92) 인양작업이 사고 셋째날인 10일 재개됐다. 전날 오후 해군 잠수사들이 헬기 동체에 와이어를 설치한 뒤 오후 8시부터 해군 광양함의 크레인을 이용해 동체를 갑판 위로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40여분 만에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기체가 다시 해저로 가라앉았다. 날이 밝은 오전 7시쯤 수중 탐색 장비(ROV)를 투입해 사고 헬기 동체를 확인한 해경은 잠수사들이 동체에 와이어를 설치한 뒤 크레인을 이용해 인양을 하고 있다. 헬기 인양 작업은 사고 둘째날 해군 심해잠수사들이 수중 수색을 벌여 헬기 안에서 차주일(42) 경장 시신을 수습한 뒤 시작됐다. 인양된 헬기 동체는 사고 원인 조사를 위해 부산의 해경 정비창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이송에는 만 하루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정확한 사고 원인 파악을 위해 헬기 동체에서 블랙박스를 회수해 조사할 방침이다. 조사는 국토교통부 항공사고철도조사위원회 주관으로 진행된다. 앞서 지난 8일 오전 1시 32분쯤 대만 해역에서 실종된 ‘교토 1호’ 수색에 투입돼 복귀하다가 추락한 헬기 사고로 탑승자 4명 중 부기장 정두환(51) 경위, 전탐사 황현준(27) 경장 등 3명이 순직했다. 부상을 당한 기장 최모(47) 경감은 제주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사고 헬기는 지난 7일 교토 1호 수색에 투입된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대원 6명을 해경 경비함정 3012함에 내려주고 항공유를 보충한 뒤 제주공항으로 복귀하기 위해 이륙 후 30∼40초 만에 추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기장 최 경감은 24년간 3155시간, 순직한 부기장 정 경위는 23년간 3238시간 비행 이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사고 당시 해당 해역의 기상은 남동풍 초속 2∼4m, 파고 1m, 시정거리 약 9.3㎞로 기상악화에 의한 추락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순직한 해양경찰관 3명의 합동 영결식은 오는 12일 오전 10시 부산소재 강서실내체육관에서 해양경찰장(葬)으로 엄수된다. 남해지방해양경찰청은 희생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릴 수 있도록 오늘(10일)부터 합동분향소를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시민장례식장에 설치했다. 해양경찰청은 순직자들에 대해 국립묘지 안장,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등 예우 절차를 진행중이다. 해경 관계자는 “순직한 대원 3명에 대해 1계급 진급을 추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헬기추락 순직 해경 항공대원 3명 12일 해양경찰장 영결식

    헬기추락 순직 해경 항공대원 3명 12일 해양경찰장 영결식

    대만 해역에서 실종된 ‘교토 1호’ 수색에 투입돼 복귀하다가 발생한 헬기(S-92) 추락사고로 순직한 남해해경청 항공대원 3명의 장례가 해양경찰청장장으로 엄수된다.10일 해경에 따르면 전날 오후 부산시민장례식장에 사고 헬기 부기장 정두환 경위(50), 정비사 차주일 경장(42), 전탐사 황현준 경장(27)의 빈소가 마련됐다. 해경은 장례를 해양경찰장(葬)으로 엄수하기로 하고 장례 기간은 10일부터 12일까지로 정했다. 영결식은 장례 마지막 날인 12일 부산 강서실내체육공원에서 진행된다. 해경은 순직자들에 대해 국립묘지 안장과 국가유공자 지정 등의 예우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해경 관계자는 “순직한 대원 3명에 대해 1계급 진급을 추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빈소인 부산시민장례식장에는 이날 오전 10시 합동분향소가 마련돼 동료 해양경찰관을 비롯해 외부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사고 헬기는 지난 7일 대만 해역에서 조난신고가 접수된 교토 1호 수색에 투입된 경비함정 3012함에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대원 6명을 내려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헬기는 대원들을 내려준 뒤 항공유를 보충한 다음 제주공항으로 복귀하기 위해 이륙했지만, 이륙 후 30∼40초 만에 활주 중 추락했다.추락 사고로 탑승자 4명 가운데 3명이 숨지고 기장 최모 경감(47)은 중상을 입고 구조돼 치료를 받고 있다. 사고직후 해경은 해경 3012함에서 고속단정을 내려 구조에 나서 8일 오전 1시 47분쯤 기장 최 경감을 구조한데 이어 오전 2시 10분쯤 부기장 정 경위와 전탐사 황 경장을 차례로 구조했으나 부기장과 전탐사는 순직했다. 실종됐던 차 경장은 9일 오전 11시 18분쯤 수중 수색중에 바다밑에 가라앉아 있는 헬기 동체 내부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 베델로 왔다가 ‘배설’로 묻힌 영국인… 그는 왜 대한독립을 외쳤나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베델로 왔다가 ‘배설’로 묻힌 영국인… 그는 왜 대한독립을 외쳤나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매혹과 공포 공존한 이방인 향한 시선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을 보면 신기해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주춤하거나 흘깃거리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세상이 바뀐 건 확실하다. 텔레비전만 틀면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등장해 퀴즈를 풀고 노래도 하고 전통시장과 오지 마을까지 간다. 여전히 외부자의 입을 통해 듣는 한국 사회의 이모저모에 부끄러워하거나 뿌듯해하는 시선이 교차하지만, 회회아비가 쌍화점에서 만두를 팔던 고려 이래 도래자(渡來者)가 보통 사람들과 가장 밀착해서 살아가는 시대는 지금이 아닌가 싶다. 낯선 존재, 이방인에 대한 감정에는 매혹과 공포가 공존한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됐던 전근대에 이방인은 수준 높은 문명의 전파자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신라의 왕이 된 박·석·김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는 새로운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매혹의 빛을 더하는 신비의 장치였다. 반면 19세기 중반 조선은 “양이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하는 것이고, 화친을 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기치를 드높인 난공불락 국가였다. 서양 오랑캐, 양이(洋夷)로도 모자라 서양 귀신, 양귀(洋鬼)라는 비속어가 공공연해질 정도로 이방인에 대한 공포가 컸다. 대한제국, 이름은 드높았으나 위상은 그에 반비례했던 때에 세계를 향한 문은 열렸다기보다 ‘벌려’졌다. 불가항력적인 개방의 회오리바람을 타고 돈과 명예와 이국적인 문화 향유와 귀족 같은 생활과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시키는 사명감 등등을 좇는 이방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외교관과 선교사와 대한제국의 고문(顧問)부터 박물학자와 여행가와 도굴꾼까지, 제각기 품은 욕망에 따라 할딱할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다. 경멸과 연민, 그 또한 매혹과 공포만큼이나 간극이 컸다.●머나먼 브리스틀에서 온 한 남자 세계 지도에서 잉글랜드 남서부의 작은 도시 브리스틀을 찾아본다. 과거 대영제국의 무역 거점이자 노예무역의 전초기지였던 그곳은 현재 인구 46만명으로 제주시나 경기도 파주 정도의 규모다. 서울에서 가려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비행기로 13시간 이상 걸린다. 낯설고 머나먼 그곳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1904년 대한제국에 닿았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로 태어나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땅에 묻혔다. 국한문·한글·영문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최초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베델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보도문이나 기사문을 쓰는 기본 원칙인 육하원칙은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이다. 37년이라는 길지 않았던 베델의 생애에 대해서는 바로 이 지면,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 수차례 특집·기획기사가 나간 바 있다. 기사를 통해 육하원칙 중 다섯은 상세히 밝혀져 있을진대, 4월 7일 신문의 날을 기억하며 베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동안 내가 품었던 의문은 ‘왜’라는 마지막 수수께끼였다. 왜, 무엇 때문에, 그는 한국인들을 도왔을까?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라고 독려하며 응원했을까? 돈벌이로 삼는 대신, 구경거리로 여기는 대신, 경멸과 혐오 대신, 값싼 동정을 베풀고 등 뒤에서 비웃음을 흘리는 대신.꽃샘잎샘이 알알한 날, 특별한 이방인을 만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집을 나서기 전 지도를 펴 놓고 방문할 순서를 정하는데 아무래도 동선이 꼬인다. 삶의 궤적을 좇자면 집터를 확인하고 일터에 들렀다가 사망지와 박물관을 방문하는 순서가 좋을 듯한데, 걸어서 움직이기에는 지하철역 근방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게 맞춤하다. 하긴 언제라고 마음먹은 대로 삶의 행보가 딱딱 맞아떨어지던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일본에 갔던, 축구를 좋아하는 천생 영국인이 생뚱맞게 종군기자가 돼 조선에 왔다가 신문을 창립하고 항일운동을 벌인 것처럼 말이다. 급발진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애당초 안전 운행의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무릇 인생길이 꽃길보다는 울퉁불퉁 돌길이거나 질퍽질퍽 진창길에 가깝기 때문이다.●베델 만나러 가는길… 홍난파 가옥도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와 길을 건너 사직터널 위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193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홍난파가 소프라노 이대형과 재혼해 새살림을 차린 붉은 벽돌집이 나타난다. 이 집에 사는 동안 홍난파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은 끝에 전향했고, 이후 대동민우회에 가입해 친일 행적을 이어 가다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두부모 베듯 자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홍난파는 나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봉선화’와 ‘고향의 봄’의 작곡가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친일파 ‘모리카와 준’일 테다. 그런가 하면 시시비비에 염증이 난 누군가는 열여덟 살의 홍난파가 처음 쓴 곡이자 한국 최초의 야구 응원가인 ‘야구가’로 그를 기억할지 모른다. ‘배팅 들고 썩 나서니 원 스트라이크. 다시 한번 갈겨 보아라, 홈런으로. 세컨드야 주의해라 공 굴러간다. 어화 홈인이로다!’ 홍난파 가옥을 끼고 돌면 오래된 빌라들 사이로 한양도성의 복원과 함께 주변을 정비해 만든 월암근린공원 입구가 나타난다. ‘어니스트 베델 집터’ 표석은 인터넷 지도의 표시와 다르게 공원으로 들어오는 오르막길 왼편, 성벽 아래쯤에 자리하고 있다. ‘어니스트 베델 집터: 1904년 조선에 온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은 이해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힘껏 지원하였다. 이곳은 그가 조선에 와서 정착해 사망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산 한옥 터이다.’●국적·인종 떠나 ‘양심적 삶’ 오롯이 조선인들을 선동했다는 치안 방해 혐의로 열린 재판의 결과가 6개월 근신에 그치자,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한편이었던 영국은 기어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유용했다는 공금 횡령 혐의를 덧붙여 베델에게 3주간의 실형을 선고한다. 조선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어 선편으로 중국 상하이까지 실려가 수감 생활을 한 베델은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 채 돌아왔다. 베델의 생애를 연구해 온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에 따르면 베델의 집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살던 서양식 가옥이 갖추고 있던 전기와 수도 시설이 없었다. 서울역 연세재단빌딩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기 위해, 베델은 병원 가까운 호텔에 방을 얻고 ‘홍파동 2-16번지’ 집을 떠난다. 그리고 살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베델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 터에는 농협중앙회 본점이 자리하고 있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은 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한가로이 오가는 거리에서 1909년 5월 1일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어 간 서른일곱 살 젊은 영국인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화단에 지지대를 짚고 위태롭게 서 있는, 수령이 오백 살은 족히 돼 보이는 아름드리 회화나무는 혹시 기억하려나.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저 양심적인 한 인간이었던 그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지인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남긴 짧은 유언을.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오!”(㉻에 계속) 소설가
  • ‘이제 하늘에서 행복하길’...공군 훈련기 훈련중 순직 조종사 4명 영결식 엄수

    ‘이제 하늘에서 행복하길’...공군 훈련기 훈련중 순직 조종사 4명 영결식 엄수

    경남 사천시 정동면 하늘에서 비행훈련 도중 사고로 순직한 비행 교수 2명과 학생조종사 2명의 영결식이 소속 부대인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4일 거행됐다.이날 부대 안 안창남문화회관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박인호 공군 참모총장, 고인의 유족, 동료 조종사, 동기생, 부대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部隊葬)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경례에 이어 고인 약력 보고, 조사, 추도사, 종교의식, 헌화 및 분향, 조총 및 묵념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박종운 제3훈련비행단장은 조사에서 “고인들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의 푸른 하늘에서 조종사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 보라매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굳건히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면서 “순직한 조종사들의 무한한 헌신과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순직한 학생조종사의 동기생 대표는 추도사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어딘가에서 웃는 모습으로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서 “하늘을 꿈꾸었던 너희가 이제 하늘에서 행복하기만을 기도할게”라며 애통해 했다. 조사와 추도사가 이어지는 동안 영결식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부대를 떠난 순직 조종사들은 이날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거행했다. 공군은 영결식과 안장식 모든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유족측 뜻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했다. 순직한 이장희(52·공사40기·예비역 대령) 교수와 전용안(49·공사42기·예비역 중령) 교수는 공군 베테랑 조종사 출신으로 전역한 후에도 후배 조종사 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참된 스승이었다고 공군은 소개했다. 이 교수는 임관해 30년간 2900시간 이상 비행경력을 쌓았다. 전 교수도 임관한 뒤 대통령 전용 헬기를 조종할 만큼 뛰어난 비행실력을 인정받았다. 순직한 정종혁(24) 대위와 차재영(23) 대위(이상 ‘추서 계급’)는 2021년 공사 69기로 임관했다. 공군은 순직한 학생 조종사 2명은 생도 시절부터 맡은 바 임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해 동료는 물론이고 선후배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우수한 인재였다고 전했다. 지난 1일 오후 1시 37분쯤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이륙한 KT-1 훈련기 2대가 비행기지 남쪽 약 6km 지점 상공에서 공중 충돌한 직후 추락했다. 이 사고로 학생조종사와 비행교수 등 탑승자 4명이 모두 순직했다. 공군은 사고 현장 수색 과정에서 추락한 훈련기 2대의 비행기록장치(DVAR)를 모두 수거해 정밀 분석하는 등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 대통령 헬기 몰던 교관도 탔는데… ‘공중 충돌’ 미스터리 풀릴까

    대통령 헬기 몰던 교관도 탔는데… ‘공중 충돌’ 미스터리 풀릴까

    지난 1일 경남 사천에서 비행훈련 중 공중 충돌한 뒤 추락한 공군 제3훈련비행단 소속 훈련기 2대의 비행기록장치(DVAR)가 모두 발견돼 사고 원인 규명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3일 공군에 따르면 전날 공군 훈련기 충돌 사고 현장 수색 과정에서 추락한 KT1 한 대의 DVAR가 수거됐다. 공군은 현장에서 수거한 KT1 두 대의 DVAR 자료들을 정밀분석 중이다. 당초 1대의 DVAR만 수거된 것으로 전해졌으나, 공군의 한 관계자는 “앞서 수색팀은 다른 훈련기의 DVAR도 현장에서 발견·수거해 조사 중이었다”고 전했다. 수거된 DVAR들은 KT1 조종석에 장착돼 전방 카메라를 통해 획득되는 영상정보, 비행 중 오고 가는 음성정보, 세부적인 고도·속도·자세·방위 등 각종 비행자료를 저장하는 장치로, 흔히 ‘블랙박스’로 불린다. 앞서 1일 오후 1시 32분쯤 경남 사천에 있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KT1 훈련기 2대가 비행훈련 중 충돌해 탑승자 4명이 순직했다. 추락한 KT1 2대는 복좌(2인승) 형태로, 각각 학생조종사 1명과 비행교수 1명 등 2명씩 총 4명이 탑승했다. 사고 직후 비상탈출이 시도됐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순직했다. 사고 훈련기에 탑승해 조종 실습 교육을 맡았던 고 이장희 교수(맨 왼쪽·52)는 1992년 공군사관학교 40기로 임관해 30년간 2900시간 이상의 비행경력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다. 대령으로 전역한 뒤 2019년부터 제3훈련비행단에서 비행교수로 근무하며 후배 조종사 양성에 전념해 왔다. 이 교수와 함께 탑승해 ‘마지막 비행’을 한 고 차재영(왼쪽 두번째·23·공사69기) 대위는 생도시절 공사 철인3종대회에 4년 연속 참가해 기록을 매년 단축하는 등 ‘지덕체’를 겸비한 인재로 안타까움을 더했다. 고 전용안 교수(왼쪽 세번째·49)는 1994년 공사 42기로 임관한 뒤 대통령 전용 헬기를 조종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던 베테랑이다. 중령으로 전역 후 2015년부터 제3훈련비행단에서 비행교수로 근무하면서 조종사들을 양성해 온 고인은 특히 배려심 많은 스승이었다고 후배 조종사들은 회고했다. 전 교수와 비행을 함께하다 순직한 고 정종혁(맨 오른쪽·24·공사69기) 대위는 공사 시절 중대장 생도 직책을 수행하는 등 남다른 리더십을 평가받았다. 공군은 순직한 두 학생조종사의 계급을 중위에서 대위로 추서했다. 영결식은 4일 오전 10시 소속 부대인 공군 제3훈련비행단 안창남문화회관에서 비공개로 거행된다. 이들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5·18 진압 거부 故 안병하 치안감 의원면직 취소

    5·18 진압 거부 故 안병하 치안감 의원면직 취소

    경찰청, 유족 만나 통보..급여 정년까지 소급해 지급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해 고초를 겪고 사직한 고 안병하 치안감에 대한 의원면직 처분이 취소됐다.진교훈 경찰청 차장은 31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안 치안감의 부인 전임순씨 등을 만나 이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위로했다.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24일 안 치안감에 대한 의원면직이 불법 구금과 고문 등 강박에 의한 것으로 보고 이를 취소한다고 경찰청에 통보했다. 육사 출신인 안 치안감은 6·25전쟁에 참전하고 중령으로 예편해 1962년 치안국 총경 특채로 경찰에 입문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전남경찰국장(경무관)이었던 그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라는 신군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다친 시민들을 치료했다. 이 일로 안 치안감은 그해 5월 26일 직위해제됐으며 군 보안사에 구금돼 조사를 받은 뒤 6월 2일 사표를 내고 의원면직됐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1988년 10월 10일 숨을 거뒀다. 경찰청은 2017년 안 치안감이 시민의 생명과 재산, 인권 보호를 위해 힘쓴 공로를 인정하고 2017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 추서했다. 유족은 지난해 6월 안 치안감의 사직 의사표시는 고문 등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해 명예를 회복하고 그에 따른 미지급 급여를 지급하라는 고충민원을 국민권익위원회에 제기했다. 권익위는 이를 받아들여 지난달 김창룡 경찰청장에게 안 치안감의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하고 미지급 급여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급여 미지급 기간은 계급정년이 아닌 당시 61세였던 연령정년으로 보고 고인이 사망한 1988년 10월 10일까지 100개월분 급여를 소급해 지급한다.
  • 한기영 서울시의원 “김익상 의사의 얼과 정신 기억… 불의에 저항, 헌신하는 삶 살아가겠다”

    한기영 서울시의원 “김익상 의사의 얼과 정신 기억… 불의에 저항, 헌신하는 삶 살아가겠다”

    서울시의회 한기영 의원(행정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 28일 상해 황포탄의거 100주년 기념식으로 거행된 아현동 주민센터 자리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지석 제막식에 내빈으로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상해 황포탄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던 의열단과 김익상 의사의 독립투쟁을 기리고 항일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사)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여 현재의 마포구 아현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진행됐다. 한 의원은 인사말을 통해 “의사의 얼과 정신을 기억하면서 불의에 저항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익상 의사는 1895년 출생으로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아현동 주민센터 일대)이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바 있다.
  • 이세열 서울시의원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하고 순국선열 나라사랑정신 이어지길”

    이세열 서울시의원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하고 순국선열 나라사랑정신 이어지길”

    서울시의회 이세열 의원(더불어민주당·마포2)은 지난 28일 상해 황포탄의거 100주년 기념식으로 거행된 아현동 주민센터 자리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지석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상해 황포탄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에 맞서 싸웠던 의열단의 독립투쟁을 기리고 항일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사)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해 개최됐다. 표지석의 주인인 김익상 의사는 의열단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폭파(1921년)로 일제의 문화통치의 허황됨을 알리고, 재차 상해 황포탄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1922년)하는 등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출생으로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286번지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아현동 주민센터 일대)이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 의원은 “이번을 계기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의 나라사랑정신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세계적 조각가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상 공모

    세계적 조각가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상 공모

    경남 창원시와 창원문화재단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1923~1995)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문신 학술상’을 오는 9월 30일까지 공모한다고 23일 밝혔다.창원시는 거장 문신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관심을 유도하고, 다양한 관점의 학술연구와 저술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문신 학술상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공모는 문신의 생애와 예술세계, 업적 등을 주제로 국내외에 발표됐거나 미발표된 연구 논문 및 저술(출판)물을 대상으로 한다. 자격 제한은 없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본인이 직접 지원하거나 추천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부문별 심사를 거쳐 대상 1편과 우수상 2편을 최종 선정해 대상에게는 1000만원, 우수상에게는 각 300만원의 시상금을 수여한다. 수상작과 우수 논문은 문신예술연구 확산을 위해 학술 자료집으로 발간해 배포할 계획이다. 공모 관련 자세한 사항은 창원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문신은 창원이 고향으로 국제무대에 조각가로 명성을 떨치며 잘 알려져 있지만 초기에는 회화를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1961년 파리로 가 조각을 시작했다. 1965년 귀국해 2년간 서울에 머물다 1967년 다시 파리로 간 뒤 조각작업에 열중했다. 영국에서 1980년 귀국해 창원 마산합포구 추산동 언덕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직접 설계·건축하고 창작에 전념해 다양한 조각 작품을 남기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프랑스 정부는 문신의 한국과 프랑스 문화 교류 공로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예술문학기사(騎士)’ 훈장을 수여했다. 한국 정부도 문신이 우리나라 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려 1995년타계한 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과로사 30대 경찰관 순직 처리...공무상 사망 인정

    과로사 30대 경찰관 순직 처리...공무상 사망 인정

    부산경찰청은 뇌출혈로 숨진 고 이종찬(당시 36세·경찰대 24기) 경감에 대해 최근 인사혁신처가 공무상 사망을 인정해 순직을 승인했다고 22일 밝혔다.경찰에 따르면 이 경감은 지난해 2월 12일 아침 집에서 출근 준비중 갑자기 쓰러진 뒤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5일뒤 숨졌다. 이 경감은 2019년 2월부터 부산 중부경찰서 정보계장으로 근무했다.관할 지역에 집회와 행사가 많아 주말에도 현장을 찾는 등 격무에 시달린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임용된 이 경감은 서울경찰청에서 근무하다 2019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근무 중이었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4살 딸, 3살 아들이 있다. 부산경찰청은 이 경감의 사망과 업무 연관성이 크다고 보고 지난해 8월 말 순직 신청을 했었다. 이날 오후 인사혁신처로부터 순직 승인 통보를 받았다. 이번 순직 승인에 따라 이 경감의 유족에게는 매월 순직유족연금이 지급되고, 일시금으로 유족보상금 등도 지급된다. 경찰은 1계급 추서를 신청할 예정이다.
  • 역사의 주춧돌 위에 미래 쌓아 올리는 용산 [현장 행정]

    역사의 주춧돌 위에 미래 쌓아 올리는 용산 [현장 행정]

    효창공원 등 근현대 명소 곳곳에이봉창 등 독립투사 기념관 건립23일 용산역사박물관 개관 앞둬박물관 인프라 연계 시너지 효과“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의 가르침은 역사라는 물줄기를 타고 흘러 후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근현대사 유물을 바탕으로 ‘역사문화도시’ 용산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겠습니다.”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이 평소에도 자주 들르는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지난 11일 찾았다. 서울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인근에 있는 이곳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1932년 일본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를 기념하는 곳이다. 성 구청장은 “용산에서 나고 자란 이봉창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지만 1등급 대한민국장이 아닌 2등급 대통령장에 머무는 등 업적에 걸맞은 예우가 부족했다”며 “의사의 업적을 더 널리 알리고 숭고한 독립 정신을 기리고자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15일 구에 따르면 2010년 민선 5기부터 3선 연임한 성 구청장은 일찍이 용산의 경쟁력을 ‘역사문화관광’에서 찾았다. 용산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7명의 유해가 모셔진 효창공원과 승전기념관, 미군 기지 등 근현대 역사 명소가 곳곳에 있다. 성 구청장이 2016년 효창원 의열사를 재정비하고 같은 해 9월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한 데 이어 2020년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개관하는 등 역사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역사도시로서의 용산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용산구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4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역사문화르네상스특구’로 지정됐다. 특구는 한강로3가 약 57만㎡ 규모로 용산구 면적의 3분의1에 해당한다. 2024년까지 510억원을 투입해 4대 주요 특화 사업을 추진한다. 성 구청장은 “특구로 지정된 지 1년 만에 외형적인 인프라를 상당 부분 갖췄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한 박물관 9곳과 미술관 4곳 등 기존 역사문화 인프라와 연계해 ‘박물관 도시’로서의 가치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특히 성 구청장은 오는 23일 개관을 앞둔 ‘용산역사박물관’이 특구를 이끌 주춧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구는 1928년에 지어진 옛 용산철도병원(등록문화재 제428호) 건물을 개보수해 지역사 박물관을 만들었다. 성 구청장은 “민선 6기부터 역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으로 유물을 수집해 현재까지 4000여점을 모았다”며 “멀지 않은 훗날 국내외 관광객들이 박물관 투어 버스를 타고 용산 곳곳을 돌아보며 용산이 지닌 역사 문화 콘텐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마흔 살에 등단해 맹렬한 글쓰기연이어 가족 잃은 슬픔에도 집필암 투병 중에도 후배 작가 챙기고부의금 받지 말라던 시대의 어른 사후 문학관·문학마을 건립 반대도서관에 세워진 자료실이 유일소설·수필·동화 등 치열한 흔적둘러보기만 해도 마음 놓이는 곳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산했던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있다. 선생께서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앞서 ‘엄마’가 놓이는 것은 그의 너른 품과 손맛 그리고 그가 쓴 문장의 힘에 모두들 기대어 산 덕분이 아닐까. 선생에게 천둥벌거숭이 같은 이들과 무자비한 세상을 향해서 날카로운 문장으로 단도리를 해 주던 큰엄마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누군가의 슬하에 놓아두어야 한다면 최소한 한국 문학의 자리에서 그 주인은 ‘박완서’다. 나는 입때껏 그리 믿고 읽고 써 왔다. 이 또한 나만의 일일까.소설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세 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조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선생은 훗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손녀와 집안 사람들의 창씨개명을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박완서’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딸을 사대문 안의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했다.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소개령으로 인하여 개성으로 이사한 후에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갔다. 개성에서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0년 6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한다. 스무 살의 박완서는 전쟁 중에 숙부와 오빠, 올케를 잃는다. 어린 조카와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기에 학업에 복귀하는 대신 미8군의 PX 초상화 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던 박수근 화백을 만나게 되고 이는 훗날 등단작 ‘나목’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선생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졸지에 가장이 된 처지였던 터라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후에 서울의 동화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측량기사와 결혼을 한다. 1남 4녀의 자식을 둔 채로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던 중에 1968년에 열린 박수근 유작전을 보고 그와 함께 일을 했던 때의 이야기를 쓴 수필을 소설로 개작해 ‘신동아’ 장편소설에 응모를 한다. 첫 소설 집필작으로 당선이 된 선생은 그때의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중략)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내가 막 보태는 거야. 그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나이 마흔의 늦깎이 등단이었다. 그 이후의 엄청난 창작열은 데뷔하던 해 작가의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셈이다. 선생은 끝까지 현역 작가로 살다 가겠다는 뜻을 품었고, 마침내 이루어 내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이렇게 말했다. “늦깎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보여요. 일단 냉정하고 현실적이에요. 문인이기 때문에 삐딱함이나 낭만이 없을 수 없지만, 세상과 삶을 보는 방식에는 낭만기가 없어요. 냉정하죠. 냉소적이기도 하고요. 젊지 않은 나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양상은 다르지만, 늦깎이가 지니는 맹렬함 같은 것도 보여요.”(서영채, ‘왜 읽는가’에서) 그야말로 맹렬하게 써 내려갔다. 왕성하다는 말로도 부족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서영채의 말대로 ‘냉정하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간을 엄마의 시간에서 떼어 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등단 이후에도 작가와 엄마의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해 나갔던 터라 집안은 평화로웠고 작가로서의 치열함은 매해 출간되는 작품집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8년 5월에 암투병을 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일이 벌어진다. 연이어 가족을 잃은 선생은 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산의 분도 수녀원에 요양을 하러 내려가기도 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아픔 속에서도 선생은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그 당시의 심정을 수필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 토로했다. “걔는 또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하느님 당신도 실수를 하는군요. 그럼 하느님도 아니지요. (중략) 행복했을 때는 아침이 좋았는데 요샌 정반대다. 내 앞에 펼쳐진 긴긴 하루를 살아낼 생각이 지겹도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탈진하도록 실컷 울면 그동안이라도 시간을 주름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는 하루 동안이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한 말씀만 하소서’에서)부산 수녀원을 나와서 미국에 살던 딸네 집으로 갔던 선생은 머지않아 서울로 돌아와서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전과 다름없이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 내었고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별세 후에는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우스갯소리로 ‘박완서 선생이 타지 못한 문학상은 젊은작가상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만큼 현존하는 문학상을 거의 다 수상했다. 수상하지 못한 젊은작가상은 ‘심사’를 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어느 정도 연관은 있게 된 셈은 아닌가. 선생은 암 투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젊은 후배들의 작품을 읽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도 즐겼고 간간이 후배들을 만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고. 등 뒤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촉을 놓지 않으려는 어른의 배려를 받은 작가들은 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그립다고들 한다. 해마다 쏟아낸 작품의 종수와 그의 빼어남은 육신의 나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을 적에 오죽하면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문학평론가 신형철)고 했을까. 게다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치고 박완서 선생의 글을 곁에 두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다작이면서도 빼어난 작품들을 스스럼없이 써내는 선생을 귀감으로 삼는 후배 작가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 사람으로서도, 소설가로서도 모든 것을 알고 읽고 있는 듯하던 선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돌아보았다.“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다른 이도 아닌 ‘박완서’의 말이었기에 더 수긍이 가고 또 그의 수백 편의 소설들 덕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병석에서 후배들의 병문안을 극구 사양하고, 별세하기 전에는 가난한 후배 문인들에게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말을 남겼던 시대의 어른. 미처 다 읽지 못한 ‘젊은작가상 심사 원고’가 선생의 곁에 놓여 있었다는 병실의 풍경은 너무도 많이 되뇐 탓인지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본 것 같다.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중략)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소설가 정이현의 편지 중에서) 너른 품으로 감싸 안아 줬던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른 아니 엄마의 자리에 있던 선생의 부음을 들었을 문단과 독자들의 상실감은 아직도 너무 크다. 선생이 기거하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 집에는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다. 자신의 사후에 집이 문학관이나 문학마을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박완서의 이름이나 유물의 전시가 아닌 오로지 작품으로만 후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작가의 유지였지만 작가 박완서를 기리는 후대의 갈망은 더 컸던 모양이다. 구리시에서 문학관 건립을 승인했고 착수 절차에 돌입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그리하여 2009년 인창도서관에서 문을 연 박완서 자료실이 현존하는 유일한 박완서의 기념관인 셈이다. 박완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서울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전쟁통에 그만둔 학교에서 훗날 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열기까지 선생의 삶의 면면들이 한눈에 펼쳐진 공간이기도 했다. 소설, 수필, 동화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엄혹할 정도로 치열하게 썼던 흔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자료실 곳곳에 놓인 선생의 사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마음이 놓이는 장소였다. 다시 한번 선생의 소설을 펼쳐 보고 싶어지는 공간이었달까. 한 작가의 자료를 모아 둔 곳이 꼭 그가 살던 터는 아니어도 될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음 한자리에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새겨 놓은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이니. 게다가 그 작가가 박완서라면 살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너지고 다리가 꺾일 때마다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든든한 의자 하나 마련한 것과도 같을 터이다.우리에게는 박완서가 있었다. 손맛 좋아 밥을 두 공기씩 먹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려주어 밤마다 채근하듯이 그의 곁으로 모이게끔 하는.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박완서의 소설이 남았다. 종종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집의 가장 첫 번째 주인 같은 박완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가 만든 소설 속에서 상처받고 헤진 마음을 놓아두어도 되는 가장 큰 이유다. 엄마의 품에서는 그래도 된다. 소설가 이은선
  • 안미생 선생에게 뒤늦게 건국포장 추서

    국가보훈처는 제103주년 3·1절을 맞이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로 활약한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 안미생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는 등 총 219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27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선생의 딸인 안미생 선생은 1940년대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당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로 활동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에 밝았던 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때 경유지인 상하이 공항에서 밝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사진 촬영에 임했다. 안정근 선생과 오빠 안원생, 남편 김인 선생 등은 앞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1960년대 미국 이주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다가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2008년 쓸쓸히 사망한 사실이 최근에야 확인됐다. 포상 대상에는 호주인 마거릿 샌더먼 데이비스(건국훈장 애족장) 등 부산 일신여학교 3·11 만세시위를 이끈 호주인 3명도 포함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84명(애국장 20명, 애족장 64명),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105명이며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다.
  • 고 안병하 치안감 미지급 급여 지급해야

    고 안병하 치안감 미지급 급여 지급해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 경찰국장으로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의 의원면직 처분은 강압에 의한 것으로 취소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왔다. 국민권익위원회 경찰옴부즈만은 22일 불법 구금과 고문 등에 의한 사직 의사로 이뤄진 면직 처분은 위법하므로 이를 취소하고 미지급 급여를 지급할 것을 경찰청장에게 권고했다. 권익위 경찰옴부즈만은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보상 심의위원회,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관련 기록을 토대로 고인이 고문 등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한 사실이 인정돼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고인은 당시 시위대 강경진압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해 5월 26일 직위 해제됐다. 이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불법 구금돼 조사 받고 6월 2일 의원면직된 뒤 석방됐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숨졌다. 고인의 유족은 지난해 6월 “사직의사 표시는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미지급 급여를 지급해 달라”며 권익위에 고충민원을 제기했다. 권익위 경찰옴부즈만은 “위법·부당한 처분은 소급해 취소할 수 있다는 행정기본법 제18조 1항에 따라 고인에 대한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또 미지급 급여에 대해서는 당시 61세였던 연령 정년을 적용해 고인의 사망일까지 100개월분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현재 고인은 5.18 민주유공자, 국가 유공자(순직 군경)로 등록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경찰청은 고인을 ‘2017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고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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