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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혁명의 불씨 김주열군…영·호남 화합 상징으로

    4·19혁명의 불씨를 지폈던 김주열(金朱烈)군이 영·호남화합의 상징으로거듭 태어난다. 당시 김군이 입학예정이던 마산상고(교장 崔英百)와 출신교인 남원 금지중학교(교장 張正燮)는 23일 마산상고 강당에서 두 학교 교직원과 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매결연식을 가졌다.김군을 선배로 둔 영·호남의 중·고교생들이 ‘형제의 연(緣)’을 맺게 된 것이다. 지난달 중순에는 마산시민 70명이 ‘동서순례단’을 구성,김군이 잠들어 있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소를 참배했고 남원시민 10여명도 같은 시기에마산을 찾아 김군의 시신이 인양된 중앙부두와 3·15기념탑,마산상고 등을둘러보는 등 양지역 시민들이 지역감정을 뛰어넘는 우애를 다졌다. 마산 3·15정신계승 시민위원회(위원장 金永滿)는 다음달 중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를 발족,3·15의거 40주년이 되는 내년 3월15일 남원 금지중학교와 마산상고 교정에 김군의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또 2001년에는 남원과 마산지역 학생 190명을 선발해 남원~마산간 190㎞ 구간에서 ‘민주성화 이어달리기’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지난 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김군은 이듬해 마산상고에 진학,입학식을 기다리다 3·15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37일만인 4월11일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발견됐었다.
  • 石吾 李東寧선생 59주기 추모식

    상해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石吾 李東寧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은 선생의약사보고와 추모사,추념사,추모노래 제창,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姜 회장은 추모사에서 “독립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신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우리는 남북대치 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4대 강국과의 다원적 관계 속에서 국가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면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의 과업을 완수하며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모범국가로 건설·발전시키는 민족과업 성취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 ㈜대우 상담역을 비롯,尹慶彬 광복회장,생존 최고령 독립투사인 李康勳선생,국민회의 張在植의원,鄭大哲 전 의원,한나라당 李漢東의원,崔圭鶴 국가보훈처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金光旭 천도교 교령,金錫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全永祐 ywchun@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민주열사 열전:14/신흥정밀 사원 朴永鎭(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 외치며 분신/열악한 근무환경 맞서 사업장 조직강화 전력/과학적 노동운동에 헌신… 새로운 지평 열어 평화시장 노동자 全泰壹의 분신 자살은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다. 그는 1970년 11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며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분신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86년 3월17일 한 젊은 노동자가 또 다시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을 ‘한국의 예수’로 존경했던 27살의 朴永鎭이었다. 볼펜 생산업체인 신흥정밀에 몸담고 있던 그는 인간다운 삶에 더해 사회 주체로서의 노동자 권리를 선언한 뒤 분신,12시간만에 병원에서 숨졌다. 다음날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 ‘임금인상 요구 농성 근로자 분신자살’이란 제목의 1단 짜리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1단 짜리 조그만 기사의 가치밖에 없는 그렇게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그의 죽음 뒤에는 노동자 권리를 위한 처절한 투쟁,노동운동의 경직성,경찰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등 그당시 시대상황이 복합적으로 내재돼 있었다. 박영진은 농성 전 임금투쟁을 4·5월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역량이 미미해 싸움의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사업장의 실상보다는 공동보조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지역연대차원의 모임에서 3월17일의 공동투쟁이 결정됐다. 신흥정밀에서의 다른 활동가들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투쟁을 늦추어야 한다는 그는 주장을 접어야 했다. 3월17일의 공동투쟁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투쟁의 승리를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고위 관리사원 몰래 각 작업장을 돌며 싸움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동료들을 조직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미리 결심하지는 않은 듯하다. 누구에게도 그런 뜻을 비치지 않았고,분신 3일전 회사 여공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도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쫓아온 경찰 불끄는 동료 제지 노조가 없던 상황에서 3월17일 박영진 등 30여명은 지역 연대모임의 결정에 따라 임금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17일 낮 식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다 옥상으로 쫓겨 올라갔다. 박영진은 이미 식당에서 난로 석유통을 머리에 들어부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쫓아 올라온 구사대와 경찰에게 열을 셀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외쳤다. 피를 토하듯 그의 입에서 숫자가 흘러나왔다. “하나,둘,셋,넷,…” 그러나 곤봉과 각목을 든 경찰과 관리직 사원들은 이를 조롱하듯이 다가왔다.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에 숫자를 세는 외침마저 묻혀버린 순간,뜨거운 불길이 눈부신 햇살을 태우며 허공에 치솟았다.깜짝 놀란 동료들은 옷을 벗어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낚아챘다. 불에 타는 사람을 우선 구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불을 끄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이다. 박영진은 시뻘건 불길속에 엎어진 채 10여분간 방치됐다. 경찰의 행위는 독재권력의 정권유지 도구로 전락했던 일그러진 자화상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박영진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껌팔이,구두닦이 등 잡초같은 삶을 살았다.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은 83년 검정고시를 위해 지역야학이던 ‘한얼야학’에 다니면서부터. ‘전환시대의 논리’‘나의 라임오렌지나무’‘노동법해설’‘미국노동운동사’등을 읽으며 점차 억눌렸던 것이 새로운 힘으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특히 ‘전태일평전’은 그가 검정고시냐,노동운동이냐를 놓고 갈등하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그는 84년 시흥에 있던 동도전자에 입사한다. 입사하는 날 쓴 일기에 ‘어머니,더많은 다른 부모와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혼자만의 이기를 위해 안일하게 행동한다면 돈 많이 가진 악덕기업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이제 내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장의 갖가지 비열한 횡포에 항의해 회사를 나오고 만다. 조직적인 대응을 못하고 개인적 분노에 휩싸여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3개월후 구로공단의 동일제강에 입사한다. 여기서 동기회 및 친목회,독서회 등을 조직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한다. 하지만 구청의 노조설립 신고서 접수 거부와 회사의 어용노조 기습 설립 등으로 또 한번 실패를 맛본다. ○하루 두세시간 자며 동료 설득 박영진이 85년 9월 들어간 신흥정밀은 근무환경이 열악했던 구로공단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기본 근무시간을 9시간으로 정해 1시간을 공짜로 부려먹고 있었고,월급은 하루 평균 3,080원으로 월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월차수당, 특근·잔업수당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종업원들에게 하루 3시간 이상의 잔업을 강요했다. 그는 하루 두세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조직강화에 전력했다. 동료에 대한 애정과 의리는 보증수표였으며,이를 바탕으로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직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치 않은 노동투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소수의 주장을 존중하는 노동운동의 유연성만 있었어도,기업주가 작은 협상의 자세만 보였어도,정권이 생명 존중의 정신을 조금만 가졌어도,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노동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없지않았을까. 이봉우 전 구로노동연구소 소장은 “자기 견해와 다른 다수의 결정을 위해 목숨을 던진 조직적이고 의식적이었던 참노동자”라고 박영진을 평가했다. 또 “과학적 노동운동의 새벽을 열었던 첫 닭”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약력 ▲1960년 충남 부여에서 박창호·이미선씨의 3남2녀중 장남으로 출생 ▲76년 서울 배문중 3년 중퇴 ▲79년 방위병 입대 ▲83년 한얼야학 입학 ▲84년 동일제강 입사 ▲85년 신흥정밀 입사 ▲86년 3월17일 분신 ◎노동운동의 흐름/신군부 폭압에 정치투쟁 전환 연대투쟁 나서/현장서 유리된 서노련 쇠퇴… 노조중심 정착 신군부 세력은 80년 5월17일 계엄의 전국 확대와 함께 그때까지 힘들게 자라왔던 우리 노동운동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민주노조 관계자들은 노동운동의 대응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폭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이들은 임금을 주 타깃으로 하던 ‘경제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 노동자를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정치투쟁’에 눈을 돌렸다. 쓰라린 패배를경험했던 학생운동가들도 노동현장을 토대로 하지 않은 민주화투쟁은 ‘사상누각’이라는 인식하에 노동야학과 위장취업의 형태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은 이러한 물줄기를 그대로 타고 있었다. 70·80년대 20여만명의 노동자를 두고 한국수출의 메카 역할을 했던 구로공단에서 85년 6월 공단내 10여개 사업장이 참여한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는데 노동조합 연대투쟁의 형태를 띠었지만 노동운동 학습을 받은 지역활동가들 역할이 컸고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동맹파업은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구속이 도화선이 됐다. 구로동맹파업의 산물임을 자처하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창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85년 탄생,각종 가두·점거투쟁,지역연대투쟁을 주도해 나간다. 박영진이 분신했던 3·17투쟁은 이런 지역연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노동자가 단순한 경제적 만족을 넘어 사회의 주체가 되는 노동운동을 주장했지만 그 바탕엔 현장노동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현장의 조직역량이 약했던신흥정밀의 동조투쟁에 반대했던 것이다. 정치투쟁을 지나치게 중시했던 이러한 흐름은 86년 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현장으로부터 유리된 활동가 중심의 조직활동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노련도 86년 5·3인천사태를 고비로 해소된다. 85·86년의 이런 쓰라린 아픔을 겪고 나서 노조를 중심으로 대중적 경제투쟁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가운데 노동자의 정치의식 고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투쟁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 자리잡게 됐다. ◎분신현장 동료 姜文英씨/당시 정권수호대 인명 경시/죽음 몰아붙이던 모습 충격 “충격이었어요. 永鎭의 독한 희생도 그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목숨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몰아붙이는 정권 수호대의 모습에 치가 떨렸습니다” 분신 당시 옥상에 함께 있던 姜文英씨(37·사업)의 말이다. 박영진은 그가 건네준 유인물에 불을 붙여 분신했다. “그냥 겁만 줄테니 걱정말라”는 말에 건네주었지만 아직도 자책과 아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점버를 벗어 불을 끄려다 경찰에 나꿔채여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지독한 사람이었지요. 항상 단결을 해야한다고 했어요. 구구절절히 옳았지만 부담을 느꼈어요. 그가 조직강화를 위해 제방에 왔을때 문을 잠그고 모른척하다가 밤새워 문앞에 서 있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며 “다시는 그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姜씨. 그는 87년 박영진추모사업회 결성에 참여하다가 박영진의 여동생 현이씨(34)를 만나 결혼해 살고 있다.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유신정권에 항거하다 73년 의문사/崔鍾吉 교수 명예 되찾는다

    ◎17일 서울대 백주년기념관서 25주기 추모식/선·후배 100여명 모임 결성… 진상규명 나서 유신 정권에 항거하다 지난 73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 서울대법대 崔鍾吉 교수의 25주기를 맞아 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를 아끼는 선·후배 100여명이 ‘崔鍾吉 교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오는 17일 서울대 교내 근대법학교육 백주년기념관에서 추모식을 갖고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진상규명에 앞장서기로 했다. 모임을 주도한 裵載湜 서울대 명예교수는 “침묵을 강요하던 유신독재 시절 崔교수는 불의에 항거한 참 지식인이었다”면서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지 어느덧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지난 날의 반성과 함께 과거 어둠에 가렸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崔교수는 지난 73년 10월16일 오전 8시30분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당시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다가 19일 오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崔교수가 간첩혐의를 인정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밝혔지만 이듬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전기 고문기 조작 실수에 의한 심장파열’이라고 사인을 주장하는 등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돼 왔다. 추모식은 裵교수의 개식사와 金裕盛 서울대법대학장,咸世雄 신부 등의 추모사에 이어 추모시,분향·헌화 등이 이어진다. 서울신문은 지난 8월20일자 민주열사 열전에 ‘유신사죄 외친 참지식인’이란 제목으로 崔교수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 민주열사 열전:10/분신 택시기사 朴鍾萬(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운동 탄압 항거 84년 분신/군사정권 反노동자적 행태에 격분/민주노조 파괴공작 목숨 바쳐 제동 84년 11월30일 오전 11시30분. 조인식 여사(46·국민회의 민원부국장)는 문밖에서 나는 자동차 급브레이크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남편 회사차였다.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았구나”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들어선 순간 조여사는 눈을 감았다. 시커멓게 그을리고 온몸이 부풀어오른 알몸의 사내는 바로 자신의 남편 朴鍾萬이었다. 물을 달라고 소리지르던 그는 부인을 알아보고는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할일이 남았으니 퇴원시켜달라고 떼를 썼고,옆에 있던 동료들에게는 빨리 회사로 가 일을 수습하라고 재촉했다.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동료기사들의 희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몸에 불을 붙였던 택시기사 朴鍾萬. 그는 저녁 8시50분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회사 노조어용화 기도 무엇 때문에,누구를 위해서 그는 죽어야 했을까. 노조대의원이었던 朴鍾萬은 소속회사인 민경교통이 노조사무장 이태길씨를부당 해고하자 이에 항의하는 단식농성 끝에 분신자살했다. 당시 이씨는 조합주택 기금 유용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노조위원장을 대신해 노조를 열성적으로 이끌고 있었고 회사는 사소한 이유를 들어 그를 해고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노사간에는 몇가지 요인으로 갈등이 쌓여 있었고,여기에 노조위원장의 비리의혹과 어용화,노조의 분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회사는 그 이전부터 3차례에 걸쳐 노조간부를 해고하고 정상적인 성과급 지급을 거부하는 등 상습적으로 부당 노동행위를 자행해 왔었다. 또한 고참기사들 중심인 상조회 회원들을 노조에 가입시켜 노조 분열을 조장하고 노조의 어용화를 기도했다고 한다. 朴鍾萬은 노조위원장도 사무장도 아닌 대의원에 불과했지만 그런 부당해고를 통한 노조파괴공작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해고통지서가 게시판에 붙자 鍾萬이는 격분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자신들만이 아닌 전국의 택시기사들이 당하는 문제라고 보았어요”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안을환씨(48·개인운송조합 은평지부 차장)의 회고다. 안씨는 그가 숙직실에서 운행일지 뒷면에 무언가를 적고 있어 무얼 쓰느냐며 다가가자 “알 필요 없다”며 찢어 잠바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다. 그때 쪽지 앞부분에 “내 한목숨 희생되더라도…”란 글귀를 분명히 보았으며 안씨는 쓸데 없는 생각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유서로 보이는 그 쪽지를 찾으려고 잠바를 뒤졌지만 없었다고 했다. 당시 동료들은 朴鍾萬이 유달리 의협심과 동정심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동료 일이라면 발벗고 뛰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그를 먼저 찾았고 따라서 동료들로부터 ‘대장’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고 한다. 동료 부인이 중병이 걸리자 아이를 자신의 부인 조씨에게 맡겼고 적금을 깨 급한 일을 당한 동료를 돕기도 했다. 과로로 2개월간 쉬고 나온 동료가 한푼의 월급도 받지 못하자 자기일은 팽개치고 동료일에만 매달려 당사자가 그만두자고 하기까지 했다. ○갖은 회유·협박 물리쳐 회사는 모든 기사들이 따르는 그를 회유하려고 새 차를 우선 배정하기도 했지만 즉각 거절당했다. 역시 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배철호씨(48)는 “朴鍾萬은 진실 하나로 조합에 참여한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무장의 해고가 결정되기전 전무를 찾아가 ‘해고’가 아닌 ‘자진사퇴’만이라도 허락해달라고 빌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당시 택시회사에서 해고되면 회사마다 비치돼 있는 이른바 ‘취업카드’에 기록됐고 ‘불순분자’로 찍혀 택시를 몰 수가 없었다. 그는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회사정문 앞에 가마니를 깔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동료기사인 배철호 안을환씨도 곧 합류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던 한 회사 고위간부는 추위때문에 동료들이 갖다준 담요까지 빼앗아 갔고,“너희들도 오래 못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분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함께 농성을 하던 두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노조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석유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배씨가 낌새를 채고 그를 부른 순간 朴鍾萬은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어 창문을 깨고 튀어나왔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이 사건의 배경으로 노사대립을 적절히 수렴할 만한 제도적 장치 미흡과 분규 해결과정에서의 기업과 정부의 진지하지 못한 자세를 꼽았다. 그러나 이것은 핵심을 벗어난 ‘점잖은’ 분석이었다. 실은 독재정권 유지의 자양분인 정경유착에 의한 착취구조와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적 시각이 근본 원인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그 이전부터 노동자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왔다. 정보기관이나 행정관청의 노동운동에 대한 눈에 띄지 않는 감시와 통제,신규노조 설립 신고 반려 및 어용노조 결성 유도,임금인상투쟁에의 경찰 개입 및 민주노조 파괴행위 등이 일상화돼 있었다. 朴鍾萬 열사는 민경교통 노조사무장 이태길씨가 아닌 전국 택시회사의 부당해고와 노조탄압,독재정권의 반노동자적 행태에 항의해 분신했던 것이다. □朴鍾萬 열사 연보 ▲1948년 부산출생 ▲68년 서라벌고교 3년 중퇴 ▲82년 (주)민경교통 입사 ▲83년 노조 복지부장 ▲84년 11월30일 분신 ◎가족·동료들 그후/부인 조인식 여사 민주화투쟁 혼신/동료 이태길씨 충격 딛고목회의 길 朴鍾萬 열사의 죽음이후 부인 조인식여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가 죽었을때 31살의 평범한 운전기사 아내였던 조여사는 지금 집권여당 민원부국장으로,국민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같이 고민하며 해결점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당시 장례식때까지만 해도 기가막히고 경황이 없어 죽음의 의미 같은 것에는 크게 신경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을 일산공원묘지에 묻고 돌아오면서 억울함이 복받쳐 올라왔다고. 그때 노동부는 남편 죽음의 배경을 단순한 노조 내분과 朴鍾萬의 개인적인 결함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조합장과 사무장의 실권 장악 다툼에서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하고 朴鍾萬이 전과 3범이라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전과라는 것이 하나는 고등학교때 열차역 앞에 있는 자재를 엿바꿔먹은 행위였고,나머지는 간이매점을 운영할때 옆집 사람과 물품인수과정에서 싸움이 붙었던 것,민경교통에서 동료운전사의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로 회사측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었다. 조여사는 그때부터 남편의 명예회복에 직접 나섰다. 같은 처지에 있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민주화투쟁 및 노동운동 현장에 악착같이 나갔다. 또 박종만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추모사업과 함께 운수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담는 ‘운수노보’를 발행했다. 당시 朴鍾萬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던 안을환씨는 그의 죽음이후 노조위원장을 맡아 근무여건 개선에 앞장서다 4년후부터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분신의 직접적 원인제공자가 됐던 사무장 이태길씨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노동 자체가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 그를 평상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 영안실에 朴鍾萬이 내걸었던 요구조건을 내걸다 경찰서 정보과로 붙들려 갔던 그는 1년여 동안 기도원을 돌며 기도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 신학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서울 응암동 응암중심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하고 있다. ◎당시 택시기사 근무여건/회사마다 ‘취업카드’ 비치 노조활동 방해/사납금 과중으로 사고율 다른 車의 4배 당시만 해도 택시기사는 구조적으로 회사측에 한없이 무력했다. 사용자와 근로자의 종속관계에서,‘돈은 주는 대로 받고 일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전근대적인 의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곳중의 하나가 택시회사였던 것이다. 우선 노조원들은 해고 앞에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가 회사마다 비치돼 있던 ‘취업카드’에 ‘해고’라는 단어가 기록되면 택시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朴鍾萬씨처럼 해고가 아닌 ‘자진 사직’을 시켜달라고 애원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 운전사들,특히 고참 운전기사들이 기업주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대부분 기사들의 꿈인 개인택시에 대한 욕심때문이다. 개인택시를 몰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무사고 운전기록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하는데 회사측의 협조나 배려가 꼭 필요한 것이다. 또 회사에 노조가 있으면 회사를 팔아먹기도 힘들고,따라서 값도 깎이기 때문에 업주들은 기를 쓰며 노조설립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조를 통해 업주에게 대항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사들은 상당히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했다. 다른 차량에 비해 교통법규 위반이나 과속, 난폭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고빈도가 매우 높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택시는 다른 차량에 비해 4배 정도 높은 사고율을 보였는데 과중한 사납금이 주요 원인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운전사들은 병도 많아 78.5%가 위장병을 앓고 있으며,시력장애는 40%,신경성 질환 38.5%,성욕감퇴 23.1%라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 민주열사 고귀한 희생 기려/범국민추모제

    ◎유족 등 각계 1,500여명 참석 제9차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지난 19일 오후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유가족과 시민·학생 등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약칭 열사범추위)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민주화 및 노동운동 과정에서 독재권력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331명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李昌馥 열사범추위 상임대표는 대회사를 통해 “열사정신의 본질은 민중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며 “그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연내에 반드시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趙世衡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은 추모사에서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로 형식적 민주화는 달성됐지만 내용적 민주화인 사회개혁은 그렇지 못하다”며 “열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도 개혁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민주열사 명예회복 학술회의 주제발표(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재에 왜곡된 현대사 재정립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학술회의가 1일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열사 유가족들과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범추위) 주최로 열린 98년도 2차 학술회의에서 李昌馥 열사범추위 상임대표는 기조연설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과 열사들의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특별법 제정 및 범국민 추모사업의 조기 현실화를 강력 촉구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마련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표됐으며 ‘각국의 사례에서 나타난 과거청산의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李昌洙 한국 국제문제연구소 대표),‘국가 보훈사업의 문제점과 개선방향’(金三雄 서울신문사 주필) 등의 발제 강연과 토론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채택했다. ◎기조연설/과거 청산돼야 국민 대통합/李昌馥 열사 범추위 상임대표 우리 현대사는 외세에 편승하여 국민을 배신하고 독재를 행사해 온 세력들의 불의에 항거한 위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4·19민주혁명과 5·18광주민중항쟁,6월항쟁,87년 노동자 대투쟁,그리고 50년만의 민주적인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국민대중은 민주발전과 통일,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한결같이 싸워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열였고,통일을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의 ‘제2의 건국’ 선언이 의미하는 바 역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가 민주·통일시대를 향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면 올바른 과거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 총체적 개혁을 통해 독재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깨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지역과 계층간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여 사회통합적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남북간 화해와 협력,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통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민주·통일시대의 역사를 개척하는 요체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은 꼭 이루어내야 한다. 열사들의 죽음은 개인차원이 아닌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사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은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되어졌던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는 성스러운 일이고,의문사 진상 규명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국가차원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며 민간차원에서는 열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염원을 실현하는데 범국민적인 사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각국 사례로 본 과거청산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청치세력화된 시민사회가 주체로/李昌洙 한국국제문제연구소 대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94년 4월 흑인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란 헌법기관을 만들어 인권침해 조사,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인권침해 및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문제,국민 통합과 화해 촉진법 제정 등과거 청산 과제를 수행했다. 그러나 남아공 국민감정과 국가주도의 과거청산 활동간에는 일정한 괴리가 생기고 있다. 정치세력간의 타협성 때문이다. 또 흑빈백부(黑貧白富)의 구도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과거 독재정권이 구조적으로 수행했던 인종차별 정책을 해소시키는 데는 법적인 해결과 진실규명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과거청산 작업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와 공동체내의 빈부격차 해소 등과 같은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과거청산 문제는 주로 실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76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조직적인 인권침해 과정에서 3만여명의 실종자를 낳았다. 83년 과도정부는 그러나 ‘국민화해법’을 통과시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형사적 범죄에 사면을 단행했다. 89년 메넴 정권도 거의 대부분의 군인들을 사면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과거 청산문제가 번번히 무산된 것은 군부의 조직적 반대 때문이다. 남아공과는 달리 아르헨티나는 군부중심의 구세력이 여전히 정치적실세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본다면 과거청산 작업은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요구 수준을 벗어나 정치세력화 해 그 흐름을 주도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보훈법 문제점과 개선방향/국가유공자 예우 특별법 제정을/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우리나라 역대 정권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각급 보훈대상자와 그 유가족들을 홀대해 왔다. 특히 민주화와 통일운동,노동운동으로 희생된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는 이제라도 보훈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친일경력자의 독립운동가로의 둔갑 사례를 바로잡고 4·19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가운데 유신을 지지한 사람이나,5·18 광주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훈장을 받은 쿠데타 주역들의 서훈을 치탈해야 한다. 아울러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예우하거나 광주민주항쟁 희생자와 똑같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밖에정부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첫째,열사·희생자 중 긴급조치·반공법·보안법·계엄법 등에 의해 ‘범죄자’로 기록된 경우 유죄선고를 무효화해야 한다. 둘째,정부와 국회 주관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우는 한편,마석 모란공원을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성역화해 산재된 시신을 모셔야 한다. 셋째,희생자들의 정신을 승화시키기 위해 교과서에 사실을 기록하고 추모주간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국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다섯째,진실 규명과 국민화합을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그리고 국민대표로서 ‘과거청산과 미래창조를 위한 국민화합 위원회(가칭)’ 같은 것을 만들어 피해자의 한과 가해자의 참회가 한마당에서 융화되도록 해야 한다. ◎民辯 작성 2개 특별법 시안 열사 범추위는 민주열사 유가족 및 민족민주 운동단체들의 최대 현안인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민족민주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등 두가지 특별법이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제정되도록 힘쓰고 있다. 범추위는 이달말까지 자체 시안을 확정해 여야당에 보낼 예정이다. 이의 초기작업으로 민변이 작성한 두 특별법의 시안골자는 다음과 같다.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안) △의문사란 사인이 명백히 자연사로 확인되지 않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대통령 직속하에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두며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각 3인씩 선출.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 검찰총장 등 관련기관의 장에게 수사협조 요청 및 소속공무원의 파견 등을 요청할 수 있음. △위원회가 관할 지방검사에게 영장청구를 요청하는 경우,검사는 이를 관할 지방법원에 신청하여야 함. △사건 조사기한은 2년 한정. △위원회는 혐의가 인정될 경우,관련자를 검사 등에 고발해야 하며 검사 등이 공소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관할 고등법원에 재정신청해야 함.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조사 사건과 관련된 공소시효는 정지되며,발효이전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에도 이 법률 적용.◆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안) △‘민족민주 유공자’는 해방 이후부터로 시기 제한. △민족민주 운동의 정의에 관해 전문가 의견 참고후 확정. △민족민주 운동을 위한 활동과 관련하여 사망했거나 상이를 입은 자와 함께 민족민주 운동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사망한 자도 유공자 적용. △유족의 범위,등록 및 결정,예우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국가유공자등 예우및 지원에 관한 법률 5조를 적용. △보상은 공헌과 희생의 정도 및 생활정도를 고려하여 달리할 수 있도록 하고 구체적 내용은 시행령으로 정함. △유공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는 9인으로 하고 대통령,국회,대법원장 각 3인씩 추천.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한 유죄 확정판결에 대해 형사소송법 420조 및 군사법원법 46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음.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요시찰인 명부 등재,여권발급 절차 예외적 취급 등 불이익 행위를 당한 자는 서면으로 위원회에 불이익 행위의 판정을 신청할 수 있다. 심의 결과 불이익행위로 인정된경우 위원회는 수사기관에 고발해야 함. △정부는 민족민주 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함. 위원회의 의결에 의햐며 정부는 유공자를 추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에 사업비 등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음.
  • KAL機 괌추락 참사 1년­현지 추모행사 표정

    ◎不歸의 넋 위로… 위령제 준비 분주/오늘 유족 352명 참가 추모비 제막/사고뒤 심야노선 폐지… 관광객 격감 6일은 대한항공 801편이 괌에 추락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희생자 229명의 유족 대부분은 아직도 당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괌 현지에서는 5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유족들의 지난 1년과 보상 문제,지금까지 드러난 사고 원인과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 1주기 추모위령제가 5일 상오 괌 현지에서 열린다. 추모식에서는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도 갖는다. 추모비는 괌 한인회가 괌 주정부의 일부 지원을 받아 모두 19만달러를 들여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희생자와 부상자 명단,추모시,추모비 제작에 기부한 괌 한인회의 기부자 명단 등이 새겨졌다. 추모식은 추모사에 이어 기독교,불교,천주교식의 종교 행사와 함께 헌화 및 분향 순서로 진행된다. 이에 앞서 4일 하오 유족 352명과 건설교통부 관계자,대한항공 직원 등 승객 396명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가 괌 현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2박3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6일 하오 서울로 돌아온다. 한편 지난해 8월6일 사고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한항공측은 세계 70개 취약 공항을 집중 점검,이 가운데 심야에 도착하는 항공노선을 폐지했다. 괌의 아가나 공항을 비롯,중국 삼아(三亞) 공항,몽고 울란바토르 공항,튀니지 제르바 공항,마카오 공항 등 심야에 도착하는 5곳이다. 또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기준에 따라 조종사들의 야간 비행에 따른 업무 부담도 대폭 줄였다. 대한항공은 또 현재 A­300,F­100 두 기종에만 적용하던 비행분석관리시스템(AIMS)을 연말까지 B­747을 비롯한 전 기종으로 확대,안전도를 높일 계획이다. 사고 항공기처럼 기령이 20년 이상된 항공기 12대의 매각도 추진중이다. 사고 이후 괌으로 떠나는 관광객도 크게 줄었다. 괌정부 관광청 한국사무소에 따르면 사고 전 한달 평균 1만5,000∼2만명에 달하던 여행객이 사고 이후 90%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괌현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됐던 50여개의 여행사도 3∼4개로 줄어든 것으로알려졌다.
  • ‘의로운 희생’제자리 찾기 첫 발/민주열사 명예회복委 결성 의미

    ◎의문사 규명·묘소 성역화·배상 함께 추진/특별법 제정 목표… 추모제·서명운동 전개 40여개 재야 및 시민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3일 출범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 범추위)는 지금까지 유가협 등 일부 단체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희생자 명예회복운동을 범(汎)재야 차원에서 본격 추진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열사 범추위는 이를 위해 올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참여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마련한 초안을 기초로 각계 단체의 의견을 수렴한 뒤 다음 달 초에는 공청회도 가질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韓忠穆 집행위원장은 “지난 달 24일 일부 국회의원들과 특별법 제정취지를 설명하는 간담회를 가졌다”면서 “10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특별법 취지에 동감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기국회가 개회되면특별법 제정을 청원한 뒤 국회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는 방안도 강구중”이라고 덧붙였다. 특별법에는 △민주민족열사 명예회복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 구성 △민주민족열사 묘소 성역화 △국가의 배상규정 등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열사 범추위는 또 유가협 등 일부 재야단체가 매주 금요일 서울역 광장에서 펼쳤던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1인당 1,000원의 광고기금 모금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유관단체나 유가족의 행사에 그쳤던 열사 추모 및 기념사업도 범국민적 행사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밖에 다음 달 14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되는 제3차 열사 추모 및 기념주간 행사에서는 희생자들이 죽음을 맞은 장소에 희생자의 이름을 붙여 ‘열사의 거리’로 지정하는 선포식도 갖는다. 19일에는 범국민 추모제도 거행된다. 참여 단체들은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열사 범추위를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사업회’로 발전시키기로 하고 다음 달 중순쯤 준비위를 구성할 계획이다.
  • ‘삼풍 참사’ 어제 3주기 추모식/유족들 위령탑 제막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3주기 추모식이 29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유족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희생자 502명의 위패가 도착하면서 시작된 이날 추모식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조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묵념,위령탑 제막,추모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유족들은 추모사에서 “차가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가족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사회에 만연한 부실과 부정을 추방하자”고 호소했다. ‘횃불탑’으로 이름 붙여진 위령탑은 하늘을 향해 움트는 새싹의 모습과 태양이 어둠을 밝혀주는 형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白凡 재조명:3­1(정직한 역사 되찾기)

    ◎통일사상의 정수/“自主없는 통일 허구” 날로 새로워/列强 간섭 배제하고 ‘민족의 힘으로’ 역설/지역·이념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 일깨워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다.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시대의 흐름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의 벽은 넘지 못했다.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가는 일은 이 시대 우리들의 소명이다.그 일의 출발점을 金九 선생의 민족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론에서 찾으면 어떨까. 백범이 추구한 이상의 완결편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그는 생의 마지막 부분을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1948년 2월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백범은 냉전이라는 불리한 국제정세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구성하려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했다.북측에 의해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그러나 남북협상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민족의 자주적 힘에 의한 평화통일 노력 그 자체도 중요했다.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 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역사다. 백범은 한반도가 분단의 위기에 빠지자 정치·이념적인 반대세력과도 손을 잡았다.그의 통일노력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백범은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화됐다.한반도에는 이념적 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쪽에는 정치·지역감정에 의한 또 하나의 분단이 있다.그 ‘마음의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다시 확인됐다. 지역감정·혈연·이념 등에 의한 분열은 민족의 화합으로 바뀌어야 한다.백범의 애국적 민족사랑은 좋은 전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념과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백범의 민족사랑 정신은 세속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오늘의 유효한 통일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통일은 물론 우리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변수다.강대국들은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노력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백범의 자주적 통일론이 오늘의 통일정책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러한 변화를 남북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박제’됐던 백범의 민족화해와 통일론에 생명을 불어넣어현재화해야 하지 않을까. 백범은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걸어간 자국은) 遂作後人程(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휘호로 즐겨 썼다.그가 넘었던 38선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다시 넘는다.반세기만에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그의 더 큰 소망인 민족의 화해와 통일도 가까워질 것이다. ◎DJ와의 인연/상대후보 백범암살 배후 드러나 3選 의원에/효창공원 골프연습장 공사 중단시켜 “報恩”/기념사업회 이사… 동상 건립 적극 재정 지원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민족의 큰 지도자 백범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金대통령은 20대 초반이었다.그러나 두사람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그들의 인연은 60년대 중반 金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존경하던 백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며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67년 7대 총선에서 힘겨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朴正熙 정권은 야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당시 金大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집권당인 공화당의 물량공세로 金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목포는 흥청거렸다. 집권당의 전략적인 집중 공세로 金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상대방 후보였던 김병삼(당시헌병 대위)씨가 백범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측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金洙振(66·현재 국민회의 당총재 특보)씨는 선거 열흘전쯤 김병삼씨 관련 내용을 담은 책을 준비했던 金龍熙(77)씨를 찾아가 金大中 후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상대방 후보가 김병삼이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기로 했다.金씨는 李承晩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를 잡아 검찰에 넘긴 사람이다.그는 안두희의 고백과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병삼씨의 관련 내용을 담은 ‘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을 준비했다. 金大中 후보 진영은 절판됐던 이책을 비밀리에 다시 제작했다.투표 나흘전인 6월4일 목포역에 1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박순천 초대 신민당당수는 “공화당후보 김병삼씨는 백범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입니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폭로했다.‘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 3만5,000부가 즉석에 배포됐다.선거분위기는 급변했다.6월8일 투표결과 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金大中 대통령은 백범 추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그때의 간접적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백범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67년 서울시가 효창공원내 백범묘소와 3의사(義士) 묘소중간에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했었다.국회건설위 소속이었던 그는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는 백범기념사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매년 백범 추모제에 참석해 왔다.남산에 백범동상을 세울 때도 자금지원을 했다. ◎초라한 ‘묘역 성역화’/담장교체·소나무 식재 기념관 건립 예산 부족/구청 녹지과 관리맡아 “국가관리 필요” 여론 金九 선생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다.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 선생의 묘도 함께 있다.많은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였던 백범을 비롯 7명의 애국지사가 안장돼 있는 선열들의 묘를 국립묘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금 효창공원의 장·단기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단기계획(97년∼99년)에 따라 담장 교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용산구청의 유동렬씨는 1,326m에 이르는 담장공사는 연말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나무 600그루도 새로 심었다.호국이념을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높이 11.7m 폭3m)도 공원입구에 세울 예정이다.장기계획은 7명의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다.하지만 예산이 문제라고 유씨는 말한다. 성역화 작업이 진행중인 효창공원은 그러나 국립 현충원(국립묘지)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하다.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하지만 효창공원은 용산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관리한다.기능·고용직 공무원 7명이 관리인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金九 선생이 귀국후 45년 12월부터 49년 6월 암살당할 때까지 3년6개월간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세계화시대의 백범/都珍淳 창원대교수·한국현대사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엄항섭은 그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자신의 모습을 도장처럼 박아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표현하였다.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길 민족주의자 백범의 월인천강은 남아 있는가. ○개방과 주체 선택 강요 한반도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에 휩싸여 있어 선진 문물의 수입 등에서 적지 않은 장점도 있지만,사대와 식민 그리고 분단의 역사가 증거하듯 늘 강한 원심력이 작용하였다.따라서 한반도의 ‘역사적 화두’는 늘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어느 하나로 편향되는 경향을 띄었고,그 극단에 민족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개방과 선진만 쫓아가면 사대·식민·분열의 굴레로,주체와 자주만 강조하면 후진과 망국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지난해 말 나라가 환란(換亂)위기에 빠진 이후,이제 우리는 진정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른다.삼척동자도 IMF을 운위하고,뉴스는 언제나뉴욕 월가(Wall Street)의 동향을 전하며,국내 증시 또한 이에 따라 춤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현실에 굳건히 뿌리 내린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때문에 작금의 현실은 백범이나 민족주의를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과거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현재적 생명력으로 되살려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남북의 화합과 통일이라고,누구나 이야기한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습적·수식적 문구(文句)에 지나지 않고 생활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 위해 최근 외국의 한반도 문제 권위자나 기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느니,‘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유엔 관리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느니,‘남·북한이 민주적 분단관리체제로 영연방과 같은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 필요하다’는 등의 언급은 다름아닌 ‘분단체제에 대한 균형적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근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발언’이 아니라,역사와 구조를 지닌 ‘전략적 개념’들이다.북한이 강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통일하려 했던 한국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소련·동구권의 붕괴 이후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도 북한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력하고 일방적인 통일 한반도의 출현을 열강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분명 ‘냉전적 대립’에서 ‘평화적 교류’로 나아가고 있지만,그것이 통일의 기초가 될지 분단의 장기 지속을 초래할 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두번 깨어나야 한다.먼저 남북 사이에 누가누구를 삼킬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다음에는 평화를 넘어 통일에 이르는 길은 자주적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강대국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보장이다. ○강대국 역할 제한적 해방 직후 백범도 좌우·남북의 체제 대립적 정치구도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민족 분단의 위기가 박두하는 것을 목도하면서,그는 좌우·남북 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민족을 위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것이야 말로 백범이 남긴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그의 죽음도,그리하여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 민주화 희생자 재조명 활발

    ◎고귀한 희생에도 300여명 아직 ‘범법자’ 낙인/추모단체 학술토론·대학 명예졸업장 추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민주열사’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70년대 이후 분신이나 투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음을 당한 민주화 희생자는 300여명에 이른다.이들의 재조명 작업은 ‘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와 80여개의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희생자들이 아직도 범법자로 낙인 찍혀 있다”면서 “5·18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유공자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는 노동운동 분야가 85명으로 가장 많고 학생운동 81명,재야·빈민·농민분야 및 일반시민 41명,사형·옥사하거나 출옥 뒤 사망한 장기수 등이 83명이다. 추모 단체들은 올초부터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을 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연대회의는 지난 4월 ‘민주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학술제’를 개최하고 한달동안 5만여명의 서명을받았다. 서울대 국민대 숭실대 전남대 등은 재학 중 희생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다.서울대는 87년 6·10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던 朴鍾哲씨를 비롯,75년 유신반대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金相眞씨 등 재학중 숨진 10여명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 중이다.국민대도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다 89년 노조탄압에 맞서 분신자살한 金윤기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줄 계획이다. 88년 5월 ‘군사독재타도’를 외치며 숭실대에서 분신 자살한 朴래전씨의 추모사업회는 지난 1일부터 1주일 동안 숭실대에서 10주기 추모제를 열고 그의 뜻을 기려 동화(冬花)문학상을 신설했다. 서울 평화시장의 노조 투쟁과정에서 분신자살한 全泰壹씨 추모사업회는 지난달 23일 고려대에서 민가협 및 민주노총 등이 참석한 가운데 ‘98 다시 만나는 全泰壹’행사를 열었다. 88년 ‘조국통일과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할복·투신자살한 趙城晩씨 추모사업회와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88년 분신자살한 崔덕수씨 추모사업회,91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姜慶大씨의 추모사업회 등도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우조선 노조는 87년 8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李錫圭씨 추모사업회를 결성했다.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80년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자살한 서강대 金의기씨에 대해서는 학교민주동우회에서 추모 활동을 펴고 있다.
  • 光州 2만명 숙연한 전야제/망월동 참배객 추모의 열기

    ◎5월 정신으로 우리 하나 되리라 【광주=南基昌 기자】 ‘광주의 아픔을 전 국민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제 18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전남 도청 앞에서 전야제가 열리고 5·18 묘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등 추모 열기가 높았다. 하오 7시30분부터 2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야제는 ‘민주를 위한 투쟁’ ‘오월 민주정신으로 살아’ ‘우리 하나 되리라’ ‘생명,희망의 나라로’ 등 4부로 나눠 3시간 남짓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5월의 노래와 민요·가요를 불렀으며 김자연무용단의 넋풀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어 5·18단체 대표와 어린이의 5월 횃불 점등식과 당시 도청 앞 차량시위,6·10항쟁 모습 등을 담은 영상물을 지켜보았다.또 노래패와 인기가수 공연이 계속됐으며,인권과 화합·평화를 주제로 한 희망의 메시지가 낭독되고 시민 학생들의 5월의 노래 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아들 손을 잡고 도청 앞에 나온 文碩虎씨(36·광주시 북구 운암동 운암아파트 42동 101호)는 “5·18 당시 고교 3학년이었는데 50년만에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상오 5·18 묘역에서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5·18 민중항쟁 유족회 주관으로 추모제가 열려 가신 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宋彦鍾 광주시장은 추모사에서 “불의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외치다 스러져 간 영령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5·18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현재의 국가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했다.한편 18일 상오 10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 묘역에서는 金鍾泌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해 정부 주요 인사와 유족회원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 정산종사 탄생 100돌 앞으로 3년/원불교 대대적 추모사업

    ◎탄생지 경북 성주군일대 성지 조성/법어 번역·대규모 학술대회 추진도 원불교는 오는 2000년 첫 종법사 정산종사(1900­1962)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추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준비한다. 우리 고유의 민족종교인 원불교는 최근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기념사업회’(회장 김삼용·전 원광대총장)를 발족,정산종사(본명 송규)의 뜻을 기릴수 있는 각종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1943년 열반한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에게 법통을 이어받은 정산종사는 해방 전후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원불교의 기반을 탄탄히 다져 오늘의 교단을 육성한 주역.기념사업회는 정산종사 탄생지인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일대를 교단의 성지로 지정하고 부지 1만1천여평을 매입,‘정산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오는 2000년 완공될 이 기념관은 순례자의 훈련관과 기도실,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원불교 제2의 성지로 태어난다. 사업회는 또 2000년안에 영남지역에 대규모 공원묘지도 조성하는 한편 청소년 훈련소도 건립하고 문제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도 대구 인근에 세운다.전북 익산에 중앙총부를 두고있는 원불교가 올해를 계기로 과거 전남·전북지역의 포교에서 벗어나 영남지역 교화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사업회는 또 학술과 편찬,역경사업에도 전에 없는 관심을 쏟기로 했다.98년 익산에서 99년 대구에서 차례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2000년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연다는 것.또 기념논문집인 ‘정산종사와 원불교사상(가제)’ ‘삼동윤리와 종교협력운동(가제)’ 등을 펴내고 정산종사 법어도 영어와 일어·중국어·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한다. 탄생 100주년 해당년도인 2000년에는 대규모 기념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원불교예술제 사진전서예전 미술전시회 등도 개최하고 정산종사의 전기집필과 삼동윤리의 사회화운동 전개 등도 계획중이며 3년전부터 추진중인 FM라디오방송국인 ‘원음방송국’설립도 추진한다. 정산종사는 9살때 ‘통감’을 읽고 나라를 바로잡는 큰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은뒤 스승을 만나기 위해 1917년 전북 정읍을 찾아 ‘불법연구회’라는 교단을 창설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고 원불교 교단을 창건했다.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그의 유지에 따라 교단발전에 진력,원광대학을 설립하고 원불교역사 ‘불법연구회 창건사’,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시 ‘원각가’,해방후 국가건설 강령을 제시한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열반때 남긴 게송 ‘삼동윤리’는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소태산 대종사의 일원주의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실천이념이 잘 드러나 있다.삼동윤리란 ‘한 울안 한 이치’라는 뜻의 동원도리,‘한집안 한권속’의미의 동기연계,‘한 일터 한 일꾼’이라는 뜻의 동척사업을 일컫는다.
  • 무산읍선 3만명 운집 울부짖기도/중 접경서 본 북녘

    ◎TV 이례적 낮방송… 김일성 일대기 등 방영 무산과 혜산 등 북한과 중국 접경지대의 북한지역에서는 8일 김일성 사망 3주기 및 탈상을 맞아 성대한 추모대회가 열렸다.또 북한 관영 중앙TV도 지난 7일 밤에 이어 이날 상오 6시부터 추모 특집을 대대적으로 편성,북한 주민들의 추모열기를 고취시켰다. 중앙TV는 7일밤 김일성 일대기와 지난 94년의 마지막 신년사,김일성의 유훈 관련 방송,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한 증언 등을 방송한데 이어 이날 새벽부터 ‘김일성 수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은 조선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견결히 투쟁하자’는 등의 본격적인 김일성 사망 3주기 추모프로그램을 방영. 조선족 경모씨(48)는 “북조선(북한)에서는 공휴일과 일요일을 빼고 낮에 TV방송을 하는 경우가 없다”며 “오늘 거의 24시간 가까이 김일성 추모특집을 하는 것을 보니 북조선의 극심한 식량난 빌미를 제공한 김일성은 죽어서도 행복한 인물” 이라고 한마디. ○무산읍 운도앙 꽉 메워 ○…중국 노과향과 마주보고 있는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인민체육장에서는 이날 상오 8시 시보가 울리자 평양과 동시에 3만여명의 북한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김일성 추모3기 대회를 성대히 거행. 무산읍 및 인근 농촌지역에서 몰려든 3만여명의 북한주민들은 무산읍 인민체육장의 운동장과 스탠드를 꽉 메운채 사회자의 김일성 업적에 대한 추모사가 계속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특히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나올때는 거의 신들린듯 울부짓기도. ○헌화후 추모행진 벌여 ○…중국 장백현 맞은편에 있는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서도 수만명의 북한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추모행사를 열렸다.추모행사를 마친 1천여명의 추도객들은 보천도 전투 기념탑에 헌화하고 묵념을 한뒤 김일성 추모행진을 벌였다. 북한은 중국의 조선족및 무역일꾼들이 김일성 추모행사에 참가하도록 하기 위해 북한·중국 접경지대 해관(국경세관)중 유일하게 혜산해관을 개방했는데 이날 추모식장으로 가는 조선족 및 무역일꾼들의 모습은 거의 없어 한산한 분위기.
  • 북,김일성 탈상 공식선언/어제 3주기 추모대회

    ◎“후계수령” 지칭 김정일시대 전환 시사 북한은 8일 상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에서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3주기 중앙추모대회를 개최,김의 3년상이 끝났음을 공식 선언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이날 중앙추모대회에는 당중앙위 위원들과 후보위원을 비롯해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의 추모사,당중앙위 비서 최태복·군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의 보고에 이어 각계 대표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외교부장 김영남은 국방위원장 겸 군최고사령관 김정일의 위임에 따른 추모사를 통해 “김정일을 결사옹위하고 김정일의 영도에 따라 사회주의 조국을 굳건히 사수해온 승리의 3년이었다”면서 “김정일 동지의 영도밑에 주체의 한길을 따라 드팀없이 전진해 나갈것”을 촉구했다.당비서 최태복은 “수령님의 사상과 위업의 충직한 계승자이신 김정일 동지를 단결의 중심,영도의 중심으로 확고히 모셔야 한다”고 강조했다.군총정치국장 조명록도 “우리 인민군은 최고사령관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수령님의 위업을 총대로 끝가지 완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중앙추모대회는 상오 7시55분부터 1시간동안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중계됐다. 한편 통일원은 이날 김일성 3주기와 관련 “북한은 이날 평양에서 열린 ‘중앙추모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서 김정일을 ‘후계수령’으로 지칭,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시사했으나 직접적인 승계관련 언급은 없었다”면서 “그러나 1,2주기때에 비해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계승 발전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번 3주기 탈상을 계기로 공식적인 김정일시대로 전환시켜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 김일성 3주기 추모행사 이모저모

    ◎행사장마다 “김정일에 대이어 충성”/떡·옥수수 이틀분 배급… 주민불만 무마/승계식 행사용 간부선물 준비로 법석 김일성 사망 3주기인 8일을 전후해 북한전역과 해외에서 각종 추모행사들이 개최됐다.내외통신과 외신 등을 종합한데 따르면 올해 행사는 주민들에게 떡과 옥수수 등 이틀 배급분을 나누어 주는 등 지난 1,2주기때보다 더 성대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이는 탈상 분위기와 함께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덮으려는 의도로 보인다.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극심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3주기 행사에 맞춰 금수산기념궁전에 92.52m나 되는 ‘김일성 영생탑’을 건립하는등 김부자 우상화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8일 상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에서 열린 중앙추모대회는 당중앙위 위원들과 후보위원을 비롯해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의 추모사,당중앙위 비서 최태복·군총정치국장 조명록의 보고에 이어 각계대표들의 연설이 이어졌다.김정일은 이어 부주석 이종옥 박성철 김영주 김병식과 정무원총리 강성산,외교부장 김영남,당중앙위비서 계응태 전병호,인민군 원수 이을설,총정치국장 조명록,총참모장 김영춘 등 고위간부들을 대동하고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참배했다.지난해부터 와병설이 나돌던 강성산은 지난 4월 25일 군창건 65주년 행사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며 김일성의 처 김성애도 참배에 동행했다. ○…북한은 김일성 3주기가 끝남에 따라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 행사에 대비해 당간부 및 군간부들에게 줄 선물을 일본 등 해외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도쿄의 한 북한 소식통은 김정일의 측근인 북한 낙원백화점 간부가 오는 10일부터 일본을 방문,수백명분의 고급 속옷등을 주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고 밝혔다. ○…3주기 행사들은 김일성의 영생을 기원하는 외에도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촉구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북한은 지난 5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추모모임을 개최해 주민들에게 “김정일을 충성으로 받들어 나갈 것”을 요구했다.3일에는 중앙연구토론회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김정일에 ‘대를 이은 충성’을 강요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양 만수대 언덕 김일성동상에만도 “김일성 사망후 지난 3년간 6천6백35만여명의 인민들과 7천7백7십여개 단체의 9만9천80여명의 외국인들,3만5천8백여명의 해외동포들이 참배했다”고 중앙방송은 선전했다. 문화·예술계에서도 김일성 우상화 선전이 재현됐다.‘김일성동지의 명언’6권,‘김일성전집’18권 등 도서들이 잇따라 출간됐다.
  • 또 폭발한 「안전 불감증」(사설)

    우리 사회의 고질인 안전 불감증이 재발했다.한낮 서울시내 한복판 공덕동 로터리 지하철공사장에서 또다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엄청난 참사가 빚어졌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넘겨서는 안될 일이다.또 수천 가입자의 전화선이 끊기고 몇 시간 교통이 막힌 사회적 간접피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가장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안전수칙만 지키면 막을수 있는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94년12월 이번 사고현장에서 불과 몇백m 떨어진 아현동에서 가스 중간공급기지가 폭발,60여명의 사상자를 냈었다.또 2년전인 95년4월 대구 상인동 지하철공사장에서 이번 사고와 같은 유형의 도시가스 폭발 참사가 발생,1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그럼에도 우리는 어느새 이들 참사의 교훈을 까마득하게 잊고 『설마』하며 안전수칙을 무시하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적당히 만든 부정확한 가스관 매설도,가스관 부근 공사는 조심스레 삽으로 한다는 안전수칙을 어기고굴착기를 들이댄 무신경이 이번 사고의 공범이다. 대구 가스폭발사고 현장에 인접한 영남중학 교정에는 폭발사고로 숨진 이 학교 어린학생 43명 등을 기리는 추모관 「세심관」이 지난 3월말 세워졌다.추모관에는 『님들은 가셨지만 천근 침묵속에 남긴 가르침은 이 시대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먼 내일을 밝힐 것』이란 추모사가 헌정됐다.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이들 희생의 교훈을 잊고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유족들 가슴의 쓰라림은 오늘도 생생하지만 당시의 사고 책임자들은 대부분 벌금형으로 풀려났다. 어떤일이 있더라도 이런 무의미한 희생은 막아야 한다.시민보호를 위해 안전관리 책임자의 사전점검 소홀,현장 안전 책임자의 직무유기 등에 대한 처벌강화가 불가피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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