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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4월참변’ 한·러 공동 재조명

    연해주 ‘4월참변’ 한·러 공동 재조명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위한 양국 합동추모제가 최초로 열린다.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우수리스크 민족문화자치회, 우수리스크 시정부 등은 1920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있었던 ‘4월 참변’ 희생자들을 위한 한·러 합동추모제와 학술대회를 3∼6일 나흘간 개최한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이번 행사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면서 “우리 정부에 의한 ‘4월 참변’ 희생자 추모식은 있었지만 러시아와 함께 하는 행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4월 참변’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군 7만여명이 1920년 4월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연해주지역 러시아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신한촌(新韓村)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두 나라 투사들과 민간인을 학살·체포하고 마을을 불지른 사건이다. 일제는 시베리아 출정군이 러시아와 조선독립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연해주지역 민족지도자들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는 등 한인·러시아인 5000여명이 희생됐다. 합동추모식은 씻김굿 명인인 대불대 박병천(인간문화재 72호) 석좌교수의 진혼제를 비롯해 러시아군 오케스트라, 러시아 라도가 무용단, 고려인 아리랑 무용단의 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추모사진전과 러시아혁명,4월 참변, 한국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두 나라 학자들의 학술회의도 열린다. 한국측에서는 반 교수를 비롯해 국가보훈처 황원채 공적심사과장, 러시아측에서는 우수리스크 부시장과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 엔 아 부체닌 교수, 한인이민사 권위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민족고고학연구소 알렉산더 페트로프 박사 등이 참가한다. 반 교수는 “일제에 대항해 한국과 러시아가 함께 투쟁했던 역사적 경험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는 연해주지역 고려인들에 대한 러시아 사회 내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우리구 최고야!] 동작구 區문화원 지역문화 발전 선도

    [우리구 최고야!] 동작구 區문화원 지역문화 발전 선도

    동작문화원은 취미교실과 교양강좌 등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해 ‘지역문화 발전의 구심체’로서 지역 주민들에게 삶의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우리구의 자랑입니다. ●‘전국 최우수 기관´ 영예 1998년 12월 창립한 동작문화원은 문화대학과 사육신 추모 문화제, 동작주부 백일장 등 문화행사를 개최,2000년 1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정문화 학교’로 지정된데 이어 ‘전국 최우수 문화원’으로 선정됐습니다. 2004년에는 전국문화원연합회 주관으로 실시된 지방문화원 관리운영평가에서 전국 최고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2005년에는 서울시에서 주최한 ‘2005 하이서울 페스티벌 퍼레이드’에서 문화원 수강생 320명이 참여, 동작구의 상징성·역사성을 담은 사육신 승천 재연과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킨 가장 행렬의 퍼레이드로 당당히 최우수상을 수상했답니다. ●문화대학 35개 강좌 10만여명 수료 대표적인 사업은 첫번째로 ‘문화대학’입니다. 전문 강사진과 쾌적한 현대적 시설의 교육장을 갖춰 서예, 한국무용, 컴퓨터, 생활영어, 국악 등 35개 강좌를 열어 현재 ‘제 27기 문화대학’까지 10만 1564명이 수료했으며, 기수별(3개월 과정)로 평균 5000여명이 수강했습니다. 컴퓨터 강좌의 경우 문화원내에 41대, 사당문화회관 동작문화원 분원에 22대 컴퓨터를 설치, 컴퓨터 기초학습, 인터넷 활용 등 지금까지 8개반 9000여명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두번째로 사육신 추모 문화제 등 각종 문화행사입니다. 각종 기념·축하 공연, 전국 문화유적답사, 우수영화 상영, 주부 백일장, 사진공모전, 명사 초청 강연, 우수 예술단 초청공연 등 총 600회의 문화행사를 열어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 관람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찾아가는 문화활동으로 이웃의 소외되고 어려운 계층을 돕자는 취지에서 문화대학 민요반, 한국무용반, 국악반의 수강생과 수료생 ‘동아리’ 등 연인원 1400여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소재 시립영보자애원 등 불우시설을 매년 14차례 방문, 문화대학에서 배운 기예 연출로 위문공연과 봉사를 했습니다. ‘문화유적답사’도 빼놓을 수 없군요. 혼자 또는 몇 명이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것보다 탐방 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안내를 받으며, 문화원 수강생 또는 수료생 동아리들이 함께 현장 학습 체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매회 답사시 참여 희망자가 넘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봉사, 문경새재, 현충사, 법주사 등 115회 1만 3475여명이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내고장 변천사 등 향토사 연구에 박차를 가해 동작구내 문화유산 편람, 고사찰 편람 등 향토사 자료집도 간행했습니다. ●토요예술무대 등 자랑거리 수두룩 사회적으로 주 5일 근무제가 본격 실시됨에 따라, 구민에게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향수 기회를 확대 제공하고,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문화학교를 중심으로 참여하는 ‘토요예술무대’를 정기적으로 마련, 열린 문화공간으로 정착하여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제고하고 지역문화 진흥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1999년 9월 17일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박사를 내고장 인물로 선정, 표석을 설치하고 동작구내 문화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책자를 발간하는 등 지역향토문화를 재조명하는 문화사업에도 앞장 서 왔으며, 청소년을 위한 독서실을 운영해 지역 청소년들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에도 기여했습니다. 앞으로도 청소년과 노년층을 위한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하고 강좌 과목도 더욱 확대할 계획입니다. 문화대학 수강생 또는 동아리를 중심으로 장애인복지관 등 불우시설 위문공연과 자원봉사활동을 더욱 활성화할 예정입니다. 문화행사도 지역 동네에서도 수준 높은 예술을 볼 수 있도록 세계적인 공연단 초청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유치, 개발할 계획이며, 전통문화를 현대적 감각과 접목해 이른바 장승소재 연주 등 ‘대방 장승제’, 충절의 선비정신을 기리는 ‘사육신문화제’, 순국선열·호국영령 추모사업인 ‘현충 문화제’를 지역문화 특화사업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이윤선 동작문화원 사무국장
  • 與 사무총장 염동연 대변인 우상호 의장비서실장 박명광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20일 당 사무총장에 염동연 의원을, 대변인에 우상호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의장 비서실장에는 박명광 의원을 임명했다. 정 의장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에서 이같은 당직 인선안을 보고했다고 우 대변인이 전했다. ●염동연 사무총장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총지휘했던 ‘금강캠프’ 사무총장 출신의 초선 의원.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해 17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지난해 4·2전대에서 상임중앙위원에 선출됐지만 4·30재·보선 패배 후 사퇴했다. 부인 김희선씨와 1남1녀. ▲전남 보성(60) ▲미 퍼시픽 웨스턴대 석사 ▲수자원공사 감사 ▲노무현 후보 정무특보 ▲우리당 상임중앙위원 ●우상호 대변인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 초선의원. 연대 총학생회장이던 1987년 6월 항쟁 시위에서 숨진 이한열씨를 위한 장례식 집행위원장을 맡았다.16대 총선 때 서울 서대문갑에서 고배를 마신 뒤 17대에 당선됐다. 정세균·유재건 전 임시의장의 비서실장을 역임. 부인 이현주(39)씨와 2남1녀. ▲강원도 철원(44) ▲연세대 국문과 ▲이한열추모사업회 사무국장 ▲국회 문화관광위 열린우리당 간사 ●박명광 비서실장 2·18전당대회에서 정동영 의장 당선에 앞장섰던 초선 의원. 정 의장의 ‘싱크탱크’인 나라비전연구소 이사장. 학계 출신으로 초대 열린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 폭넓은 인간관계에다 친화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인 현창란(61)씨와 1녀. ▲충남 홍성(61) ▲경희대 ▲산토토마스대학원 경제학박사 ▲경희대 부총장 ▲경실련 국제연대운영위원장 ▲우리당 상임고문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백남준씨 문상 400여명 파격퍼포먼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고(故) 백남준씨의 마지막 가는 길은 그의 예술세계처럼 파격적이었다. 3일(현지시간) 오후 백남준씨의 장례식이 열린 뉴욕 맨해튼의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은 저마다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잘랐고, 잘린 넥타이를 한복을 입고 평온하게 누워 있는 고인의 시신 위에 올려놓았다.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 지난 1962년 독일에서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요제프 보이스를 만난 뒤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던 백남준씨를 추모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이날의 넥타이 자르기는 그의 조카 하쿠다 겐의 제안이었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가 하쿠다의 넥타이를 자르면서 시작됐고, 이어 400여명의 참가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미리 준비된 가위를 이용해 서로의 넥타이를 잘랐다. 오노 요코는 추모사에서 “지난 1963년 (일본에 있는 나의)집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근감이 느껴졌다.”면서 “그가 너무나 그립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존 헨하트 수석 큐레이터는 “백남준은 항상 영감을 준 사람이었고 항상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인생은 계속되는 움직임 속에 있었다.”면서 “그는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 같은 예술가였다.”고 추모했다. 마지막으로 추모사를 한 하쿠다는 자신과의 오랜 인연,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린 일이 있은 뒤 전세계에서 전화가 쇄도했던 일 등 삼촌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장례식에는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를 비롯한 유족과 비디오 아트의 차세대 선두주자인 빌 비욜라등 유명 문화예술인이 참석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4일(현지시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씨는 기존의 심미적 관념에 대한 반란자로 성공적인 삶을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뉴욕 연합뉴스
  • 윤이상 10주기 남북한 동시 추모식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인 고(故) 윤이상 선생의 10주기인 3일 서울 조계사와 북한 보현사에서 추모식이 동시에 열린다. 지난달 26∼28일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윤이상 10주기 행사위원회는 윤 선생의 10주기 추모식을 남북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열기로 합의했다고 2일 밝혔다. 이에 따라 3일 오후 4시부터 서울 조계사 대웅전, 같은 시각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 두 곳에서 추모식이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위원회 측은 윤 선생과 그의 유족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점 등을 고려해 행사 장소를 사찰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도 추모 행사가 열리는 것은 그가 평생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살아 왔던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조계사 추모식은 추모사,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의 축원, 안숙선 명창의 회심곡 등에 이어 독일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의 연주회가 열리게 된다.이날 행사엔 유족 대표로 윤 선생의 딸 윤 정씨를 비롯해 박형규(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 목사, 미카엘 가이어 주한 독일 대사, 신낙균 민주당 수석부대표, 박재규(윤이상 평화재단 이사장) 경남대 총장,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각계 인사 15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02)723-0364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목포의 눈물’ 이난영 40년만에 고향품으로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고 이난영(1916∼1965)의 유해가 40여년만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다. 25일 이난영기념사업회와 목포시에 따르면 경기도 파주의 한 공동묘지에 방치된 이난영의 유해가 내년 3월쯤 목포로 옮겨진다. 기념사업회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난영의 유가족으로부터 이장 동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목포시도 이난영의 이장과 기념사업 관련 예산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등 ‘묘지 이장사업’이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기념사업회는 현재 옛 모습으로 복원 중인 삼학도에 이난영의 유골을 안치하고, 기념탑 건립과 추모공원 조성도 추진키로 했다. 추모사업 기금마련을 위해 오는 11월30부터 이틀 동안 극단 ‘갯돌’을 초청, 이난영의 삶과 예술세계를 그린 뮤지컬을 공연할 계획이다. 내년 3월 중에는 유품전시회, 음악회, 학술대회 등을 마련, 지역사회의 관심을 유도할 방침이다. 정태관(46)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은 “일제 때 민초들의 애환을 노래해 ‘국민가수’로 떠올랐던 이난영의 유해가 타향에서 ‘무연고 묘지’로 방치돼, 이장을 추진키로 결정했다.”며 “목포시와 협의, 구체적 추모 및 기념사업 일정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난영은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태어난 뒤 어릴적부터 극단생활을 전전하다가 1934년 ‘불사조’를 불러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 손목인이 작곡한 ‘목포의 눈물’을 불러 대히트했다. 그후 ‘해조곡’‘울어라 문풍지’‘목포는 항구다’ 등 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불렀던 ‘이천오백만 감격’‘이몸이 죽고 죽어’ 등은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광복 후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과 함께 악극단을 결성, 활약하였으나 6·25전쟁 때 김해송은 납북되었다. 이난영은 지난 1965년 49세의 나이로 사망,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107 공동묘지에 묻혀있다.광주 최치봉기자cbcho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한번 들어서면 뒤를 볼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김호연(50) 회장의 경영 ‘일방 통행론’이 진행된지 횟수로 13년째.1992년 ‘미운오리 새끼’였던 빙그레는 2005년 확실한 ‘백조’가 됐다. 당시 부채 비율 4000%대는 50%대로,230억원대의 시가 총액은 무려 20배 가까이 늘어난 430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10년간 누적적자 100억원은 놀랍게도 2004년에 순이익 350억원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변신은 빙그레와 김 회장이 처했던 극한의 조건들이 이뤄낸 절묘한 조화 덕분이다. 그룹 신규 투자에서 항상 ‘찬밥 신세’였던 빙그레는 김 회장이 취임한 이후부터 한화와의 단절을 통해 자력 갱생의 계기를 만들었고, 한때 경영능력에 대한 오해를 뒤집어쓴 김 회장은 처절한 구조조정으로 수익성과 성장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빙그레의 뛰어난 경영 성적표는 일방적으로 제기됐던 김 회장의 ‘자질 오해’를 깨끗이 불식시켰다. 내성적이며 말수가 적은 ‘충청도 양반’ 스타일인 김 회장에게 10년 이상의 기나긴 구조조정을 성공케 한 원동력은 뭘까. 불명예를 안고 무너지기엔 너무나 억울해서였을까. 아니면 성공해서 반드시 보여줘야만 했던 오기였을까. ●형제 분가 김승연-호연 형제의 분가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92년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될 당시 시작된 형제간의 재산권 분할과 관련된 소송은 여론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의 사장인 김호연 회장을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명예 퇴진시킨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김 회장으로서는 공격적으로 유통업을 확장시키려는 순간에 경영 감사에서 이런 사실을 통보받자 너무나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한양유통은 인수 시절부터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데다 증자가 없어 한층 악화됐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회사에서 저를 밀어낸 것은 사실상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이 사건 이후 6개월 가량 두문불출했다.‘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 낙인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였다. 이 때문에 그는 2004년 4월에 수상한 ‘한국의 경영자상’에 유독 애착이 간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일련의 사태 이후 재산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자, 약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루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3년 6개월의 법정 공방을 거치면서 김 회장은 모친인 강태영(78) 여사를 비롯한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강 여사의 칠순을 맞아 대학 은사인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이 형제간 화해를 권유하자 김 회장은 이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했다. 강 여사는 당시 “칠순 잔치보다 가족들의 화합이 더 중요하며, 형제들의 잔치 비용을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좀 서먹해진 것도 있지만 과거 형님과의 갈등은 해소됐다.”면서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형제간 모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10년 구조조정 92년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될 때 빙그레의 부채 비율은 4183%,10년간 누적적자가 100억원이나 되는 자본잠식 상태였다. 당시 기업 평균 부채비율이 420%대였던 점과 비교하면 무려 10배나 높은 수치였다. 한때 한화그룹의 ‘캐시카우’로서 그룹의 투자 자금을 조달했던 옛 위용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았다.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다. 시장 점유율 1위는 의미가 없다. 수익성을 개선시킬 여지가 없는 사업은 과감히 잘라야 한다.”는 김 회장의 경영판단 아래 강도높은 사업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김 회장은 우선 가지치기를 시작했다.‘썬메리’ 베이커리 사업을 삼립식품에 매각했으며, 냉동식품과 초코케이크 등 비주력 사업은 시장 철수를 단행했다. 특히 초코케이크 사업 철수로 인해 유휴 상태였던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기 위해 아이스크림 경쟁사인 롯데제과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도 받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았다. 빙그레 구조조정의 핵심은 주력 사업인 라면과 스낵사업 부문이었다.80년대 중반 겨울철 비수기 주력 사업으로 시작한 라면과 스낵사업은 매년 30억∼40억원씩의 적자를 기록하는 빙그레의 ‘두통거리’였다. 김 회장은 2003년 3월 라면사업 철수와 스낵사업의 국내 영업권 위탁이라는 고강도 처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매수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회장의 이같은 구조조정과 현금 흐름의 개선 노력은 92년 부채비율 4183%에서 외환위기 당시인 98년 360%,2004년에는 53.7%로 줄어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학구파에서 몽골 인연까지 김 회장은 재계의 학구파로 유명하다. 경기고와 서강대 무역학과를 나온 김 회장은 일본 히도쓰바시(一橋)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외교안보 석사 학위도 땄다. 또 지금은 서강대에서 경영학과 박사 학위를 밟고 있다. 그의 독서량은 경영인들 중에서도 다독으로 손꼽힌다. 하루에 한 권 이상을 읽는 편이니 그야말로 ‘독서광’이다. 또 빙그레의 구조조정이 만들어준 김 회장과 몽골의 인연은 각별하다. 서울 압구정동 사옥을 매각하고 남양주시 도농동으로 본사를 옮긴 빙그레는 남양주가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와 자매결연을 맺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몽골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 등의 잦은 방문이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은 김구재단을 통해 몽골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몽골 정부는 2001년 김 회장을 명예영사로 임명했다. 김 회장은 또 ‘몽골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후원했으며, 특히 최근에는 차남 동만의 아이디어로 몽골 수흐바토르 테뮤렐 종합학교에 어학실습실 설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김 회장은 바가반디 몽골 전 대통령의 딸인 바야르마씨와 서강대 동문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2005년 3월 한국과 몽골의 우호 협력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몽골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북극성 훈장은 몽골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러브 레터로 결혼하다.’ 김 회장과 김미(48)씨는 떠들썩한(?) 연애 결혼으로 유명하다.‘끼리 문화’가 지배적인 재벌가에선 이례적이다. 보통 정략 결혼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더러 연애 결혼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커플은 정말 뜨거운 사이였다. 한화 김종희가(家)의 2세 가운데 유일한 연애 결혼 케이스다. 김 회장과 김미씨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간다. 서강대를 다니던 김 회장과 이화여대를 다니던 김미씨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던 사이. 호감을 갖고 데이트를 즐기다가 김 회장의 공군장교 입소 훈련으로 한층 각별해진 사이로 발전했다. 김미씨의 ‘러브 레터’로 김 회장은 당시 연애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훈련생으로 부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편지와 함께 김미씨가 곱게 접어 보낸 종이학은 김 회장의 군 생활 내내 함께 했다고 한다. 이들은 5년 넘게 연애를 했다. 김 회장의 군 생활이 길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형인 김승연(53) 회장의 ‘싱글’도 이들 연애를 길게 했다. 김 회장의 얘기다.“훈련소에서 저의 연애 스토리는 꽤 유명했습니다. 아내에게 답장을 쓰는 것도 중요한 하루 일과였죠. 지금도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나 종이학들은 아내가 추억으로 잘 보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엔 형님 결혼이 어서 이뤄지기를 기다린 적이 많았습니다.” 김승연 회장이 백두진 전 국회의장의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1982년 10월 서영민(44)씨와 결혼식을 올리자, 김 회장도 그 다음해 2월 김미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회장과 김미씨는 장남 동환(22)-장녀 정화(21)-차남 동만(18) 등 2남1녀를 뒀다.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처가는 독립운동가(家) 산실 김 회장의 처가는 국내 독립운동가(家)를 대표할 만한 명문가다. 김미 여사의 조부가 민족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이며, 큰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고 안미생 여사다. 김 여사의 부친은 교통부 장관과 타이완 대사, 공군 참모총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김신(83)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이다. 김신 회장은 임윤연(작고) 여사 사이에 김진­김양-김휘-김미 등 3남1녀를 뒀다. 김진(56)씨는 동서통상과 글로볼씨스텍 대표이사를 거쳐 DJ정권 시절인 98년 대한주택공사 감사를 역임했다. 또 참여정부 들어서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미국 남가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행정학 석사 학위를 땄다. 차남 김양(52)씨는 최근 주중국 상하이 총영사에 임명됐다. 이로써 그의 집안은 4대째 상하이와 인연을 맺게 됐다. 김구 선생은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이듬해는 선생의 모친인 고 곽낙원 여사와 부인인 최준례 여사가 상하이로 갔다. 김 총영사의 부친 김신 백범 기념사업협회 회장 역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김 총영사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외국계 회사 근무와 기업체 운영 등으로 경제 경험이 풍부한 데다 상하이가 갖는 독립운동의 상징성을 감안해 발탁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젖소 사료를 제조·판매하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EBT 네트웍스의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시티뱅크 서울지점 부장과 컴퓨터 코리아 부사장 등을 거쳤다. 3남 김휘(50)씨는 광고인으로 나라기획 이사와 멕켄 에릭슨 상무를 거쳐 지금은 광고대행사 ㈜에이블리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한국관광공사 비상임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김구 선생의 손녀사위라는 인연으로 독립운동가 추모사업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회장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며 서울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기념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범 사상의 학술연구과 관련 출판물 발간도 지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또 후손 없이 서거한 이봉창 의사의 기념사업회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이봉창 의사의 업적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0월9일 ‘광복 60주년 기념 이봉창의사 마라톤 대회’를 연다. 이밖에 김 회장은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김구재단을 통해 매년 150여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천재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커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고…. 하지만 저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가장 큰 자산은 균형 잡힌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천재로 키우기보다 평범하지만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김호연 회장) 김 회장과 김 여사는 자식들에게 유난히 사회봉사 활동을 강조한다.‘우리’라는 단어의 참 의미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다. 독립운동가(家)의 후손다운 자녀 교육법이다. 큰 아들 동환군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보낼 때다. 김 여사가 아들 손을 잡고 찾은 곳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한 맹인교회. 설거지나 청소 등 맹인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도우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아들에게 가르쳤다. 모자(母子)는 동환군이 중3이 될 때까지 6년간 매년 여름을 맹인교회에서 봉사하며 지냈다. 또 외환위기가 한창인 98년에는 성공회 ‘푸드뱅크’ 주관의 노숙자 돕기 자원봉사에 김 여사와 3남매가 함께 참가해 서울역 광장에서 석달간 식사 배식과 설거지 등을 하기도 했다. 김 회장도 해비탯(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자녀들을 참여시켜 함께 집을 짓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 김구선생 손녀 김미 여사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사치 안 하고, 겸손하고, 얘들 교육에 관심 많고요. 또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나서는데, 일은 조용히 하려고 해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굉장히 쑥스러워하고 꺼려합니다.” 김호연 회장이 보는 부인 김미 여사의 평이다. 김 여사도 국내 여느 재벌가의 며느리처럼 공식적인 바깥 활동을 거의 안한다. 김 여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봉사 활동도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도 모르게’ 하는 식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대외 활동을 한다.6년간 맹인교회의 도우미로서 활동했고, 여전히 어린이 교육사업에 앞장서고 있지만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 여사의 이런 배경에는 국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家)로서 사회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과 조부 백범 김구 선생의 명예에 혹시나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신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또 김 회장과 자녀들이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나서는 것도 김 여사의 영향이 크다. 특히 김 여사의 봉사 활동은 살아있는 자녀 교육이 됐다. 김 여사는 자녀들에게 명문가의 사회적 책임을 가르치며, 균형 잡힌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여사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지인의 설명이다.“김 여사의 모친인 임윤연 여사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김 여사는 중2 때부터 집안 살림을 챙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어린 시절부터 주부 역할을 해오신 거죠. 그래서 그런지 차분하고, 조용할 뿐 아니라 일처리도 깔끔합니다.” 김 여사는 현재 국내·외 아동의 건강과 교육을 비롯해 결손·빈곤 가정 어린이 지원사업 등을 펼치는 국제 어린이 보호재단인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한편 백범 김구 선생은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05년 11월부터 1907년 2월까지 황해도 장연에서 대한매일신보 지사장으로 민족신문 보급에 애썼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음악가 정율성을 아시나요

    중국 인민 해방군가인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광주 출신 음악가 정율성(1914∼1976)을 기리는 음악제가 열린다. 5일 광주시 남구에 따르면 오는 11월11∼12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중국문화부 대외문화협력국과 공동으로 ‘제1회 광주 정율성 국제 음악제’를 개최한다. 이번 음악제는 고국에서 잊혀진 이름이 된 정율성을 부활시켜 한국과 중국간 문화적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획됐다.이번 행사는 정율성의 대표곡을 우리나라와 중국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합창단·광주시립교향악단·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소프라노 박선영·베이스 김명지·피아니스트 임미정 등이 참가한다. 중국에선 중국교향악단합창단과 지휘자 엄량곤(嚴良坤) 등 중국의 유명 음악인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또 그가 남긴 다양한 곡들이 연주되며 추모사진전과 학술대회 등 부대 행사도 열리게 된다. 남구는 음악제뿐 아니라 정율성의 생가(양림동)복원,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키로 했다.정율성은 ‘인민 해방가’외에도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 등 수많은 유명 노래를 작곡해 13억 중국인의 영혼을 사로잡은 인물이다.중국 국민의 80% 이상이 그의 노래를 한곡 이상 알고 있을 정도로 위대한 음악가인 동시에 항일투쟁가이자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다. 1914년 8월13일 광주시 양림정(현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노아에게서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안(延安)으로 옮긴 정율성은 루쉰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연안송’‘팔로군 대합창’ 등을 작곡해 발표했다. 특히 ‘팔로군 대합창’에 나오는 ‘팔로군 행진곡’은 1988년에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비준을 받았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소설가이자 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서기원(75)씨가 30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1930년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1956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서울신문 주일특파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73년부터 공직에 몸을 담아 경제기획원 대변인,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 등을 맡았다. 이어 서울신문 사장을 비롯,KBS 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한국신문협회장,‘문학의 해’조직위원장,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언론계와 문화계를 이끌어왔다. 소설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56년 ‘현대문학’에 단편 ‘암사지도’를 발표, 이듬해 소설가 황순원씨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데뷔작과 함께 ‘오늘과 내일’(60년) ‘잉태기’(60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61년) 등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가치관의 혼란, 세태와 풍속 등을 주로 그렸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근대 역사와 인물을 소재로 정치ㆍ사회의 변화상과 사회적 비리 등을 강하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혁명’(64년) ‘조선백자 마리아상’(71년), 단편 연작 ‘마록열전’(71년) ‘왕조의 제단’(82년),‘광화문’(94년) ‘징비록’(96년) 등이 있다.91년 KBS 사장으로 재직시 평소 즐기는 취미인 낚시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엮어 ‘물따라 고기따라’를 펴내기도 했다. 현대문학상(60년), 동인문학상(61년), 한국문학상(75년), 은관문화훈장(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2004년) 등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언론계와 문단의 후배들이 줄줄이 고인을 방문, 술자리를 나눌 정도로 포용력과 인간미를 갖춘 이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유족으로는 성기원 여사와 3남1녀.3남 동철(현 사업기획부장)씨가 서울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고인의 뒤를 잇고 있다. 장남 동준씨는 미국 연방기상청 책임연구원으로, 차남 동한씨는 도시공영 이사로, 사위 조일영씨는 교원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02)2072-2016. 발인 2일 오전 7시. 장지는 충북 옥천 선영.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소설가 이호철의 추모사 서기원 형. 서기원 인(仁)형. 지금 이 시각 저는 지난 50년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노상 스스럼없이 익숙하게 불러왔던 이 호칭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진정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섞어 당신을 향해 부릅니다. 어찌 하루 사이에 별안간 형과 나 사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로 이렇게도 멀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제 이 시각을 끝으로 그렇게 늘 익숙했던 그 호칭,‘기원 형, 기원 형’ 호칭을 이제부터 그 어디에서도 이전처럼 쓸 수가 없다는 이 크나큰 상실감을 대체 무엇으로 채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몇년 전 황순원 선생과 신동문 형 등 50,60년대 그 어렵던 명동시대를 살았던 선배 동료들이 줄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만 이제 서기원 형,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고 보니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제 몸뚱이의 어느 반쯤이 뎅겅 잘려나가는 듯 갑자기 싱숭해지지 않을 수 없고 새삼 우리 주위를 휘둘러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은 1957년 폐허 속 명동의 돌체 다방이었지요. 시인 박시진의 소개로 형과 첫 대면했을 때, 첫 악수를 나눴을 때 형의 그 따뜻하고 기품 있었던 손아귀의 감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도 선연하게 떠오르고 약여(躍如)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형은 26세로 동화통신사에 몸담고 있었으며 저는 24세였습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저녁 술타령이었지요.4·19,5·16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별 상흔 없이 이어졌습니다. 형은 언론계에 몸담으며 서울신문 주일특파원으로 혹은 서울신문 사장으로,KBS사장으로, 관계에까지 뻗으며 활동무대가 넓어져 갔고, 저도 저대로 소위 재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혹은 구치소를 드나들기도 하였습니다. 웬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50년대에 처음 만났던 그 피차의 인연만은 깊이, 끈질기게 이어올 수가 있었지요. 우리 사이는 본원적으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죠. 우리 사이에는 바로 문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원 형. 서기원 형. 바야흐로 형을 영겁의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저 1957년 명동의 널찍했던 그 지하다방에서 처음 형을 만났을 때의 그 드물게 예쁘고 균형잡혀 있던, 무척 품위있게 생겼던 그 당신의 손, 열 손가락과 그 손톱 끝까지 새삼 절절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아픔으로, 그리움으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손모아 빌면서….
  • 故 정세영회장 영결식…1300여명 조문

    ‘포니 정’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영면했다. 25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잔디광장에서 1300여명의 조문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 보고, 영상물 상영, 추모사, 조전 소개, 헌화 및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영상물은 고인이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취재진에 포니를 설명하는 모습과 수상 스키를 즐기는 모습 등 왕성하게 활동하던 모습을 압축해 담았다. 고인의 비서를 지냈던 이유일 아이서비스 사장은 약력 보고에서 “한국 자동차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이며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라고 울먹였다. 특히 불모의 땅에서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일궈낸 분이라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추모사는 이춘림 전 현대중공업 회장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고희석 일정실업 회장이 낭독했다. 이 전 회장은 “1970년 어느날 광화문 앞 거리를 가득 메운 차들을 국산차로 바꿀 수 없을까 하고 안타까워했을 때 고인이 ‘내가, 현대가 꼭 이루고 말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고 회장은 “고인은 항상 국가 경제를 걱정하며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며 “한국 최대의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모나지 않았고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넋을 기렸다. 이어 “이승에서 겪은 희로애락과 마음에 안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애착과 사랑, 미움을 놓아두고 영면해 달라.”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달랬다. 고인의 유해는 수상스키를 즐겼던 양평군 양수리 북한강이 바라보이는 선영에 묻혔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식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 제49주기 추모식이 5일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유치송) 주관으로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 선생의 묘소 앞에서 거행됐다. 추모식은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민주당 한화갑 대표, 송방용 헌정회장, 국민대 김문환 총장, 이철승 서울평화상이사장, 민관식 조병옥박사기념사업회장,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등 각계 인사와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와 분향에 이어 추모사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 관제, 정부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선포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광복 후 국민대 초대 총장을 지내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돼 1947년 의장이 됐다. 이어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중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창업정신 다시” 현대家 뭉친다

    “창업정신 다시” 현대家 뭉친다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현대가(家)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매개체는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그룹의 모태에 뒤늦게나마 정 명예회장의 흉상을 세우고 추모 사진전을 여는가 하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창업주의 추모사업이지만 ‘경영권 분쟁’ 등을 거치면서 분열된 현대가의 결속력을 다지고 뿌리를 되찾으려는 ‘현대 바로세우기’ 작업으로 풀이된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는 그룹의 뿌리인 현대건설과 정 명예회장이 말년에 가장 애착을 가졌던 서산농장에 ‘정주영 흉상’을 세운다. 현대건설은 오는 5월24일 서울 종로구 계동사옥 1층 로비에서, 서산농장은 다음날인 25일 간척지내 영빈관에서 각각 제막식을 갖는다. 현대건설 창립 58주년(5월25일)에 맞춰 ‘현대건설 고향지킴이 모임’이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행사다. 이 모임은 자금난으로 현대건설이 채권단 손에 넘어가자 “현대 정신 만큼은 지키자.”며 현대건설 전·현 임직원이 주축이 돼 결성했다. 회원수만 3000여명으로 그동안 2억여원의 성금을 모았다. 정 명예회장의 흉상은 7남 몽윤씨가 이끄는 현대해상 사옥에도 세워져 있지만 현대건설과 서산농장은 창업주의 물질적·정신적 고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정 명예회장의 4주기 기일에 맞춰 21일부터 열고 있는 공동 ‘추모 사진전’에 현대백화점(3남)·현대상선(다섯째며느리)·현대중공업(6남)·현대해상(7남)·현대건설 등 범 현대가가 참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뿌리찾기와 무관치 않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은 개막 첫날 전시회장을 직접 둘러보며 고인의 창업정신을 기렸다. 정 명예회장의 기념관을 세우는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6남인 정몽준 의원은 전날 형수인 현 회장 등과 함께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 선영을 찾은 자리에서 “아버님의 사진과 편지, 유품 등이 잘 정리돼 체계적으로 관리됐으면 하는 생각”이라며 “가족들간에 이미 의견을 나누고 공감대를 갖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기념관 건립은 실질적 장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맡고 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기념관 건립용’ 서산간척지 부지 매입이 땅주인(채권단)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불발에 그친 것으로 드러나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올해도 형제간의 공동 성묘는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갈수록 합류하는 인원이 늘고 있어 ‘봄기운’이 감돌고 있다. 다음달 초 또다른 가족 회동도 추진하고 있어 주목된다.‘현대건설 고향지킴이 모임’ 임동진(현대건설 노조위원장)회장은 “가족이나 현대맨이나 정 명예회장의 창업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정주영회장 추모사진전 연다

    정주영회장 추모사진전 연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4주기를 맞아 현대가(家)가 공동 추모 사진전을 연다. 모든 회사가 다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룹 분리후 처음으로 시도되는 범 현대 행사여서 눈길을 끈다. 기일(21일)이 월요일이어서 제사는 20일에 지내기로 했다. 17일 현대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의 9남매가 이끄는 범 현대가 그룹들은 창업주의 기일에 맞춰 21일부터 일주일간 ‘정주영 명예회장 4주기 추모 사진전’을 연다. 청년 정주영에서부터 ‘왕회장’ 시절에 이르기까지 고인의 사진들과 어록이 전시된다. 참여회사는 3남 정몽근 회장이 이끄는 현대백화점, 다섯째며느리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상선,6남 정몽준 국회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7남 정몽윤 이사회 의장이 이끄는 현대해상화재보험, 채권단으로 주인이 바뀐 ‘그룹의 모태’ 현대건설 등이다. 각자의 회사 사옥 로비에 전시 공간을 만들어 일반시민들에게도 개방할 방침이다. 추모전에 앞서 현대가 사람들은 고인의 서울 청운동 자택에 모여 20일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경기도 창우리 묘지를 찾아 성묘할 계획이다. 현정은(고인의 5남인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대그룹 회장은 이날 다른 시댁식구들-정 명예회장은 형제만 여섯이다-과 함께 성묘를 다녀올 예정이다. 하지만 9남매의 공동 성묘는 올해도 어려울 듯싶다. 각자 그룹을 이끌고 있어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장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주에 이미 임원들과 함께 성묘를 다녀왔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사환 입사후 평생 타임지 혁신

    |뉴욕 연합|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시각을 보수파에서 중도적으로 혁신하고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헨리 A 그룬월드가 26일 맨해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고 유족이 밝혔다.82세. 그룬월드는 타임의 편집이사직을 맡아 처음으로 기사 실명제를 시행하고 행동, 에너지, 섹스, 춤 등에 관한 새로운 부서들을 만들었으며 지난 1966년에는 ‘신은 죽었는가?’라는 철학적인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올리는 혁신을 감행했다. 1973년 11월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와중에서 사설을 통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사임을 종용하기도 한 그룬월드가 기자와 편집자, 해외 편집자 등을 지내면서 남긴 업적은 타임 설립자 헨리 R 루스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먼 펄스타인 편집국장은 타임 최신호에 실린 추모사에서 “그는 우리 잡지를 당파성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았고 국내 및 세계 문제에서 독립적인 논조를 강화했다.”고 밝혔다. 그룬월드는 11년간 포천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피플, 머니 등 타임사가 출판하는 모든 간행물들의 편집이사를 지낸 뒤 87년 퇴직했으며 88∼90년 모국인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2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룬월드는 10대 시절 나치 치하에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뉴욕대학에 재학중 타임사에 사환으로 입사한 이래 평생을 이 회사에서 일했다.
  • [기고] ‘생명사랑운동’으로 자살예방을/하상훈 서울 생명의 전화 원장

    우리는 한 명의 전도양양한 사랑스러운 여배우를 잃었다. 그녀는 죽어 이제 한줌의 재가 되었지만 아직도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의 앞에 서있다. 가족과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 앞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비탄을 느낄 새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연예계에서 일하는 동료 선후배들에게 큰 슬픔과 고통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고 따랐던 수많은 팬들의 일손을 놓게 했다. 일부 언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는 실시간으로 이 여배우가 스스로 생명을 끊은 원인을 좇는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거의 모든 사이트가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행적을 상세하게 올려놓고,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추모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팬들의 추모사와 애도의 글들이 사이버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일순간에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된 이 여배우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다소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꽃다운 나이에 가버린 그녀의 죽음을 놓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 갈등, 우울증 같은 정신과적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복잡한 삶의 문제를 안고 해결을 위해 투쟁해 오던 그들의 노력이, 이와 같은 유명인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 ‘저런 사람도 죽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일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주던 저항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참 망각을 잘하는 국민들 같다. 자살이 무거운 주제라서 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2003년부터 잇따른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살을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OECD국가 중 자살률 4위로 연간 1만명 이상 자살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방관자적 입장에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더 늦지 않도록 우울증과 같은 정신건강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예방 교육과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더욱이 많은 연구들에 우울증과 자살은 그 상관관계가 높다는 결론이 나와 있기에 더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또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자원봉사를 하며 진력하고 있는 민간단체의 활동이 더 확산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과 관심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제 민관이 함께 노력하여 종합적인 자살 예방에 관한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자살은 잠시 관심을 끄는 일과성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살은 끝이 아니다. 그 시작은 개인적이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자살을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 공동책임을 져 나가야 한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금보다 더 요구되는 시기가 없는 것 같다. 이 여배우도 자신의 많은 문제들을 여러 사람에게 토로하고 싶었지만,‘도와 달라는 외침’이 그녀의 화려함 속에 숨어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자살은 더 이상 안 된다. 우리의 생명은 어떤 이유로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범국민적으로 ‘우리의 생명이 세상보다 소중하다.’는 생명 사랑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생명의 존엄이 보장되는 희망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도 위기와 자살 등 복잡한 삶의 문제에 처한 사람들이 한 가닥 희망을 찾아 상담실 문을 두드린다.365일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를 가지고 그들을 아무 비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의 고민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격려할 때 절망적인 그들의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삶에로의 새로운 용기를 갖게 할 수 있다. 이 여배우의 영결식이 치러진 오늘,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져본다. 하상훈 서울 생명의 전화 원장
  • [재계 인사이드] 현대家 ‘왕회장 추모’ 엇박자

    옛 현대그룹 관계사들이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관련 추모사업에 소극적인 가운데 현대건설이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관심사가 되고 있다. 현대건설은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 별관 사옥 1층에 120여평, 좌석 200석 규모로 조성한 세미나실을 ‘아산홀’로 명명하고, 현판식을 가졌다. 이 세미나실의 이름을 아산홀로 한 것은 현대건설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호인 ‘아산(峨山)’에서 따온 것이다. 현대건설은 개관에 앞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난달 21∼26일 6일 동안 명칭 공모에 나섰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응모자 200여명 가운데 50여명이 아산이라는 이름으로 공모해 추첨을 통해 당선작을 뽑고 수상자에게 상품을 제공했다.”면서 “창업주인 정 명예회장을 기리고, 그의 진취적인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아산홀로 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은 이에 앞서 지난 3월 정 명예회장의 3주기를 맞아 충남 서산 간척지에 60여평 규모의 기념관을 조성했었다. 이 기념관에는 정 명예회장이 지난 1985년 아산 물막이 공사때 입었던 외투와 92년 대통령선거때 입었던 한복 두루마기, 대선패배 이후 칩거할 때 읽던 책, 농기구, 메모노트 등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현대건설은 앞으로 별관 입구에 정명예회장의 흉상을 건립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 명예회장은 지난 2001년 3월21일 타계한 이후 3년이 지났지만 현대건설 외에 관계사 어느곳도 기념관 건립이나 추모사업에 나서지 않고 있는 상태다. 당초 정 명예회장 타계 이후 유족들은 대지 600평, 건평 200평 규모의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기념관으로 꾸미고, 서산 간척지 200여만평에 기념관을 조성키로 했었으나 아직 움직임이 없다. 또 계동 사옥 15층 정 명예회장 집무실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명예회장 타계 이후 모든 자료는 자동차 그룹에 넘겼다.”면서 “우리가 나설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장자그룹인 현대차 그룹의 경우 3년 탈상이 끝난 후 청운동에 기념관을 만들고 흉상 제작방안 등을 논의했으나 아직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또 금강고려화학(KCC)그룹의 정상영 명예회장도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직후에는 추모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현대그룹과의 경영권 분쟁 이후 일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동작구 9일 사육신 추모제향

    서울 동작구는 사육신 순절 제548주년을 맞아 사육신의 선비정신과 업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사육신 추모제향’을 9일 오후 12시 사육신 묘지 의절사에서 봉행한다. 사육신헌창회와 함께 여는 이 행사는 사육신 후손과 유림,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하며 헌작례,추모사,송축사,일동배례 순으로 진행된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제

    국가보훈처는 27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구 국립 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에서 광복회 주관으로 대한독립군 무명용사들에 대한 위령제를 연다. 위령제는 독립운동관련 단체장,광복회원,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우전 광복회장의 개식사,안주섭 국가보훈처장의 추모사,독립군가 제창,헌화,분양,조총 및 묵념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은 이름없는 애국 선열들의 혼백을 위무하고,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복회가 5억원의 국비를 들여 지난 2002년 5월 건립했다.
  • 초선의원들 “돈 가뭄에 목탄다”

    ‘돈 가뭄’에 허덕이고 있는 여야 초선의원들이 탈출구 모색에 혈안이다.후원회 조직에 온 신경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지난 20일 600여만원의 두번째 세비를 받았지만,적자인 살림살이가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A의원은 “의원들이 둘만 모이면 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고 소개한 뒤 “특히 교수출신 의원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교수나 하고 있을 걸’이라며 후회와 푸념을 늘어놓는다.”고 전했다.국회의원의 세비가 사립대 교수의 월급과 비슷하거나 적은데,교수 때와 달리 씀씀이는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비교적 여유가 있다고 알려진 한나라당 비례대표 나경원 의원은 “두달째 개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후원회를 빨리 꾸려야 하는데….”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나라당 한선교(경기도 용인) 의원은 “세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후원회는 가을에 발족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개인 돈을 털어서 지역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벌써 2000만원 이상은 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열린우리당 백원우(경기 시흥갑) 의원의 6월 수입·지출 명세서를 살펴봤다.총 수입 1311만 9350원,총 지출 1702만 7074원으로 390만 7724원이 적자였다.지출부문에서 비중이 큰 의원활동비와 가계생활비는 백 의원의 ‘공개거부’로 제외했는데도,역시 ‘마이너스’였다.때문에 그는 지난 6월 500만원씩 두 번,1000만원을 대출받았다. 백 의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총선 선거비용을 70% 밖에 보전받지 못해 미변제 선거비용으로 현재 1700만원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고(故) 제정구 의원 추모사업회’를 꾸리려는 그에게 돈 문제는 이처럼 골칫거리다.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은 “최근 5000만원을 대출했다.”면서 “초선 의원들 중 은행대출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이렇게 적자가 누적된다면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그는 지난 4년 간 원외지구당위원장 시절 1500만원 가량의 빚이 있었는데,국회의원이 되고서는 5000만원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B의원은 “한달에 포장마차에서 3번 정도 술을 마시면 ‘파산’”이라고 한다.또 C의원은 “선관위가 금하고 있기도 하지만,국회의원이 된 뒤 밥값을 계산한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열린우리당 초·재선 의원들의 모임인 ‘새로운 모색’은 회원 30명 중 절반이 연회비 100만원을 내지 못하고 있다.우상호 의원은 “과거에 국회의원이 100만원이 없다고 하면 믿지 않았겠지만,이제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초선 의원들이 1개월째부터 ‘빚’을 지고 있는 데는 우선 중앙선관위가 법정 선거비용을 전액 보조해주지 않고,일괄해서 70% 수준으로 깎아 지급했기 때문이라는 볼멘소리들이 나온다.우 의원은 “대출 5000만원 중 2000만원은 선거비용을 변제했다.”고 말했다.까닭에 백원우 의원 등 열린우리당 의원 19명은 선관위에 선거비용을 전액보전하지 않는 법적 근거를 요청하는 항의성 질의를 보내기도 했다. 두번째는 초선들이 후원회 조직을 아직 꾸리지 못해,재선 이상보다 안정적으로 정치자금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재선 의원인 김부겸 의원이 “후원금 모으기가 어렵다.”면서 “후원금을 은행계좌로 직접 넣어야 하기 때문에 후원회 모임을 할 때보다 5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고 밝혔다.그는 “오세훈 전 의원이 자신은 정치를 더이상 안한다고 너무 이상적인 법안을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나마 지역구 관리가 필요없는 비례대표나,남편이 있는 여성의원들은 비교적 형편이 낫다.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은 “맞벌이할 때 가계에 내던 생활비를 돈 쓸 일이 많은 국회의원이 된 후로는 면제받았다.”고 소개했다. ‘적자 초선의원’들은 그래서 세비 인상이나,후원회 활성화에 목을 메고 있다.그러나 세비 인상문제는 반론이 만만찮아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있다.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세비를 왜 올리나요?”라며 “초선들이 수입에 지출을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대신 후원회비 상한액을 늘리는 등의 정치자금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의 김희정 의원은 “(당직자때)월급이 넉달 동안 안나온 적도 있었는데,20일마다 나오는 세비는 엄청난 호사”라면서 “좋은 차,비싼 음식을 피한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원우 의원도 “모든 국민이 불경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세비 인상은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이라며 “정치자금법을 현실적으로 개정해,초선들이 부정부패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소영 박지연기자 symun@seoul.co.kr
  • “이라크를 용서합니다” 故 김선일씨 영결식

    “이라크를 용서합니다.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고 김선일씨의 영결식이 30일 오전 10시 부산 동래구 사직동 사직실내체육관에서 3000여명의 가족·친지·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유족대표로 나선 김씨의 형 진국(38)씨는 영어와 아랍어로 통역되는 가운데 “한국이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세계가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것 안에 선일이가 꽃피우고자 했던 꿈이 있었다.”고 ‘이라크를 향하여 전 세계로’라는 용서의 메시지를 전 세계를 향하여 읽어내려갔다.영결식장은 오전 9시50분쯤 경찰의장대의 호위를 받는 운구행렬이 경찰악대의 장송행진곡에 맞추어 들어서면서 한꺼번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유가족들은 울음을 참으며 말없이 운구형렬을 뒤따랐으나,자리에 앉자마자 아버지 김종규씨가 끝내 비통한 표정으로 고객를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고,어머니 신영자씨도 조용히 “선일아,선일아.”를 부르며 울먹였다. ‘고 김선일 형제 기독연합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은 최홍준 목사의 사회로 임보혜(24·여)씨의 추모시,허남식 부산시장과 기독교 대표 길자연 목사 등의 추모사,이동수 목사의 약력 소개,유족대표의 추모사,헌화 등의 순으로 3시간동안 진행됐다. 고인이 이메일편지에서 ‘보혜가 해주는 음식을 마음껏 싶다.’고 친근감을 표시했던 임씨는 “당신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해야만했던 우리는 할말이 없다.”고 추모했다.임씨는 특히 고인이 테러범들 앞에 무릎꿇고 외쳤던 “나는 죽고싶지 않다.나는 살고 싶다.(I don’t want to die.I want to live)”를 다시 절규하여 영결식장의 분위기를 더욱 숙연케했다.영결식장의 단상 가운데는 김씨의 대형영정과 한국어·영어·아랍어로 ‘나는 이라크를 사랑합니다’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2개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고인이 이라크 테러단체에 납체된 직후로 추정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소개되면서 ‘그의 피가 이라크를 새롭게 하기를 기도한다.’는 메시지가 자막으로 전해졌다. 가수 윤형주씨는 이 자리에서 고인이 이라크에서 사용하다 유해와 함께 돌아온 손때 묻은 기타로 ‘순례자의 노래’를 불렀다.장로인 윤씨는 “고인이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떠돌다 고향인 하늘나라로 가라는 뜻으로 이 노래를 추모곡으로 골랐다.”고 밝혔다. 영결식을 마친 고인의 유해는 구덕체육관을 출발,거제교회∼양정로터리∼시청앞∼연산로터리∼온천장∼금정문화회관∼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오후 1시쯤 장지인 영락공원에 도착했다.이어 오후 2시 영락공원 제7묘원 39블록에서 박의영 목사의 하관예배로 안장됐다.고인이 묻힌 묘역은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씨의 무덤에서 10m 정도 떨어져 있다. 한편 이날 서울·부산·울산 등 전국 26곳에서 1만여명의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밝혔다.또 국내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이라크 민정 이양을 규탄하는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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