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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의 아버지 모택동/부국의 선각자 등소평/누가 더 위대한가

    ◎모 탄신 100주년 계기 중국서 논란/“민중해방 시킨 혁명가” 모 찬양/학생층/“중국사상 첫 기아 추방” 등 칭송/장년층 『모택동과 등소평중 누가 더 위대한가?』­요즘 중국신문들을 보면 오는 26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는 모와 내년이면 90장수를 누리게되는 등간에 누가 더 위대한가를 놓고 경연이라도 벌이는 것 같다.최근 들어 모에 관한 연구토론회 미술전 기념서적발행등 각종 추모행사들이 쏟아져나오면서 그동안 등의 독무대였던 중국신문들의 지면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11월중순까지만해도 중국신문들 지면은 등소평에 관한 기사로 홍수를 이루었다.82년 이후 등의 각종 연설 담화문을 모은 「등소평문선(제3권)」이 나오면서 매일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며 등이론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소 동구와는 달리 망당망국의 위기로부터 중국사회주의를 구출한 등의 선견지명에 모두가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것 같았다.그래서 일부 서방신문들은 등에 대한 신격화를 추진하고 있지않은지 의심하기도 했다.이보다 앞서 2∼3개월동안은 또 등의 막내딸이 쓴 「나의 아버지 등소평을 각 신문들이 경쟁적으로 발췌,연재하며 등의 과거를 미화하는데 정신 없었다. 그러던중 11월 중순부턴 모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주로 『모택동과 티베트』『내 마음속의 모택동』등과 같은 제목의 토론회로부터 시작된 모추모사업은 『일대의 위인 모택동』이란 제목의유화 전시회,모 관련 영화 감상평가회,각종 기념도서출판,『중국에 모택동이 나타나다』란 제목의 기록영화 제작 방영,『모사상 연구토론회』등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각 신문마다 경쟁적으로 모에 대한 회상록등을 게재해 오고 있다. 모에 대한 찬양은 그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는데도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그래서 19세기 중엽부터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천하를 통일하고 봉건주의 노예상태나 다름없던 민중들을 해방시킨 그 공적은 아무리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식이다.다만 그가 집권후반 10년동안 문화혁명을 통해 중국사회,중국전통을 초토화시켜버린 과오에 대해서는 그다지큰 목소리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의 20대 젊은학생들은 모의 혁명사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문화혁명을 경험하고 굶주림을 경험한 장년층에서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기아를 추방하고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될만큼 중국의 경제력을 키워놓은 등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는것 같아 보인다. 어쨌든 모에 대한 추모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모택동과 당외친구들』을 비롯한 모관련 서적 수십권이 쏟아져나와 북경에서 가장큰 왕부정 신화서점에서는 「모서적 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전시판매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회주의 우방인 북한이 모탄신 100주년기념우표를 발행한데 이어 반공의 선봉에 서 왔던 한국에서도 「모택동탄신1백주년기념」이란 글이 새겨진 2천원짜리 공중전화카드를 5백장 발매했다고 이곳 광명일보가 보도했다. 모의 얼굴이 새겨진 접시나 시계 기념메달 사진포스터등도 발매되고 있는데,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통한 잘살기운동을 벌인 덕분에 중국 주민들이 이것들을 사들일 여유가 생겼다고 한 홍콩 신문은 지적했다. 그러나 1백주년기념행사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중공고위 간부 전원이 참석하는 24일밤의 문화예술제에 이어 26일 인민대회당 기념대회때 강택민총서기의 연설이 될것 같다.그런가하면 모의 고향인 호남성의 소산에서는 지난 20일 모동상 제막식을 비롯,지금까지 무려 27차례나 각종 기념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모에 대한 이같은 대대적인 추모행사에 비하면 모를 흠모하는 열기가 그렇게 높은것 같지만은 않다.모두가 등이 제창해온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매달려 돈벌이에 정신을 쏟다보니 그런지도 모른다.그런데도 이같이 많은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대해 한 중국기자는 『모는 정신적 측면의 사상가인 반면에 등은 물질적인 경제의 반영을 중시하는 지도자다.요즘 중국사회가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나가니까 당중앙에서는 정신분야의 영양보충을 통해 균형을 잡겠다는 생각이 든것 같다』고 풀이했다. 어쨌든 모는 『혁명의 천재요.건국의 아버지』인 반면에 등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부국의 선각자』라는 두지도자의 서로 다른 역할이 모탄신 1백주년을 맞아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
  • 임난 코무덤 봉안/26일 전북 부안서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사업위원회」는 17일 코무덤 환국 1주년이 되는 오는 26일 상오 11시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임진왜란 전적지인 호벌지에서 불교·기독교·천주교의 종교의식으로 비총 봉안식을 거행한다고 밝혔다.
  • 김귀정양 유족들 국가상대 손배소

    고 김귀정추모사업회준비위원회는 25일 국가를 상대로 서울민사지방법원에 김씨의 어머니 김종분씨(54)등 유가족 3명에게 모두 1억1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해 줄것을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 장진홍의사 기념관 동상건립 추진

    ◎일제에 항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추모사업회,의거 66주년 맞아 왜관에 1927년 10월 18일,단신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식민지지배에 신음하던 2천만동포들에게 독립의지를 다져준 창려 장진홍의사(1895∼1930년)의 의거 66주년을 맞아 기념관과 동상건립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사업은 장의사추모기념사업회(위원장 박세직)가 지난해 8월 의거65주기에 맞춰 발간한 장의사의 일대기 「창려 장진홍 의사」에 이은 2번째 추모사업.이를위해 관련인사들은 기념사업회재발족준비위원회(위원장 윤복수)를 구성했다.기념관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 세워진 기념비각옆에 건립될 계획이며 규모,착공일등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다. 장의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뒤 도피생활 14개월만에 일경에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집행 바로 전날 자결했다.이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8년전의 3·1운동과 2년뒤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 장렬한 항일무장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왜관문화원 장재영원장(80)은 『일대기발간을 계기로 뜻있는 사람들끼리 우리 향리를 빛낸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해 후세에 선생의 애국의지를 남기려 하고 있으나 사업비마련에 차질이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 고 오지호화백 추모사업 활발/10주기 맞아 생가에 기념관건립 추진

    ◎국어학자로서의 업적 기린 책도 출간/광주시 「오지호미술상」 운영… 각계서 적극 참여 남농 허건과 함께우리나라 남도화단에서 한국화와 서양화의 양대산맥을 이룬 고 오지호화백(1905∼1982)의 10주기를 맞아 기념미술관건립등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그가 타계한 24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16일 광주 무등온천장호텔에서 「10주기 추모및 출판기념회」가열렸다.유족과 화단의 동료·후배,제자및 국문학관계자,지역유지등 4백여명이참석,한국 서양화단에 우뚝선 고인의 업적과 국어학자로서의 한글사랑에 대한그의 정열을 기린 모임.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이번에 출간된 책은 「미와 회화의 과학」「지산동초가와 화실」등 2편이다. 「미와 회화의…」는 단지 화가로 머물지 않고 미의궁극적인 본질을 구명한고인의 미학이론을 한데 모은 저술.고인의 손자이자 원광대교수인 병욱씨(35·미학과)가 정리했다.「지산동초가…」는 유정기 김기창 유경채 천경자 이구열 고건 남광우 홍남순 문순태등 고인과 생전에 인연을 맺었던 각계각층의인사 85명이 쓴 회고문집이다.순수의빛을 찾아서,우리시대의 사표,국한자혼용교육의 부활,우리것 보존에 앞장서니,지산동의 춘풍화기등 전5부로 구성됐다. 오지호선생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 탁상리에서 태어나 전주고보와 휘문고보를거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뒤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와 국전초대작가,국전심사위원,예술원회원,국전운영위원등을 지낸 한국서양화단의 개척자.그는 또 한자폐지운동에 앞장서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했으며 국한자혼용 국교1,2학년 교과서를 자비로 출간하는등 국어학자로도 이름높았다. 이에따라 선생의 뜻을 기릴 미술관등을 세우자는 계획이 4∼5년전부터 발의돼 지난7월 개관된 광주시립미술관내에 50평규모의 「오지호기념관」을 설치,유작등 10점이 전시되고 있다.또광주시주관으로 「오지호미술상」을 제정,운영중이다.이와함께 지난해부터는 고인의 생가가 있는 동복면에 기념관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이 사업은 고인의 뜻을 이어 형제화가로 활약하고 있는 고인의 두아들 승우화백(63)과 승윤화백(52)주도로 이뤄졌다. 유족측에서는 기념관부지와 경비 1억원을 내놓았으며 전라남도에서 2억원,문예진흥원이 1억,전남 화순군이 5천만원등 모두 4억5천만원을 들여 건평60평규모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그것.기념관에는 평소 선생이 사용하던 화구등 고인의 손때가 묻은 유물과 장롱,문갑,서적등 유품,그림등이 전시될 예정이다.그러나 당초 내년봄에착공해 연말안에 개관한다는 목표가 전남도측의 예산지원이 늦어짐에 따라 벽에 부딪쳐 지역주민들과 이 지역 예술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오늘 의거 83주년… 한·중·일 3국 입체취재

    ◎안중근의사/“동양평화 지켰다” 중국인이 더 추앙/이등 저격 하얼빈시선 해마다 확술대회/기념비 곧 건립… 여순감옥엔 유품 보존 우리는 해마다 10월이 저물어가면 의사 안중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19 09년 10월26일 하얼빈역두에 터뜨린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더 이상 침략책동자로 세워두지 않은 의거의 그날이 돌아오기 때문이다.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매도,끝내는 교수대에 세웠다.그러나 안의사는 지금 영원한 휴머니스트이자 또 평화론자로 추앙받고 있다. 1909년 10월26일 상오 10시가 막 지나는 시각.모두 6발의 총성이 중국 흑용강성 하얼빈시 하얼빈역두에 울려 퍼졌다.의장대 사열을 끝내고 귀빈열차를 향해 몸을 돌리던 일본의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향한 안중근의사의 육혈포가 불을 뿜는 소리였다.그날의 총성이 사라진지 83돌을 맞은 하얼빈역은 신역사를 짓는 건설현장의 굉음과 종종걸음치며 플랫폼을 오가는 중국인들의 말소리만이 어울려 요란할 뿐이다. 이등박문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 1번 플랫폼앞 현장에는 뜰이 조성돼 대형플라스틱에 담긴 화분이 몇개 놓여 있었다.피격지점에서 10m쯤 떨어진 러시아군 사열대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었던 안의사의 저격장소는 이곳에 새로 지어진 1등 대합실건물에 편입돼버렸다.이등이 쓰러진 곳은 몇년전만해도 피살지점을 표시하는 둥근 녹쇠판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등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의사가 5개월에 걸친 수감생활끝에 1910년 3월26일 상오10시15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여순형무소.당시 악명 높았던 이「인간지옥」은 요령성 대연시 서쪽 40㎞지점에 「여순일아감옥구지」라는 현판아래 지난88년부터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안의사가 복역한 지하감방은 간수사무실부속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감동 복도벽에는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이라고 쓴 액자속에 안의사의 수감당시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이밖에 유화초상화·족자·유시「장부가」가 담긴 액자등이 걸렸다. 안의사에게 교수형이 행해졌던 교형실은 감옥 동북쪽 구석에 감춰진채 15평남짓의 좁은 공간으로 남아있다.교수대는 2층으로 꾸며져 있고 시체처리통까지도 보존됐다. 현재 6만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하얼빈시에는 2개의 안중근연구회가 있다.안의사추모사업은 지난89년 의거80주년을 맞아 한·중·일의 학자들이 하얼빈역에서 추모회를 가진 이래 학술대회를 잇따라 열어 왔다.또 안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대형오페라가 공연되는등 추모붐이 대단했다.최근에는 새로 발굴된 자료를 모은 안중근사료집발간을 준비중이며 안의사기념비를 피격현장에 세우기위해 중국정부와 교섭도 벌이고 있다.당초 하얼빈역 광장에 안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었지만 일본과의 불편한 입장을 고려한 중국측의 소극적 태도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얼빈시내 동북열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근대사소개부문에도 안의사의 영정과 기념자료등을 손문다음으로 다루는등 안의사에 대한 중국현지의 평가와 연구열기는 그 어느때보다 높다. ◎국내/국내연구 활기­일선 “평화주의자” 새 시각/학계 동향/대중수교 계기 새 자료발굴 기대 우리나라에서의 안중근연구는 올해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계기를 맞고있다.그 이유는 중국이 「역사의 현장」인데다 그동안 우리측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도 가능해졌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에따라 그동안 한정된 자료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학계의 상황도 크게 개선되어가고 있다.또 안의사의 의병활동기지였던 러시아측의 연구성과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여서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림성 조선연구소가 국내에서의 안중근연구를 희망해오는가 하면 러시아사회과학원 동방연구소에서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우리나라에 와서 발표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최석우신부)에서는 안의사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점을 고려,프랑스측이 소장해오던 자료를 입수,연구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은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로 안중근연구에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때일수록 연구자들은 일과성이 아닌 체계적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새로 입수된 자료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해석이 나올 경우 안의사연구에 자칫 흠집을 남길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다.안중근의사에 대한 저술은 물론 연구결과를 집약한 논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기존의 학술자료로는 「한국독립운동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안에 수록된 공판기록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 기록등이 정리돼 있다.또 논문은 신용하교수(서울대)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등이 꼽힌다.저술은 주로 전기류인데 안의사 의거 이후에 쓴 박은식의 「안중근전」이 있고 해방후에는 「의사 안중근」(만수사보존회·1964년)과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 숭모회·1970년)등이 나왔다. 그리고 안의사를 기리는 단체는 사단법인 안중근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안중근의사장학회등이 있을 뿐이다. ◎일본/올 전기 등 2권 출간… 사당건립도 안중근에 대한 가해자쪽인 일본에서 안의사 평가는 「암살자」와 「휴머니스트」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시각으로 나타났다.테러리스트 시각을 가진쪽은 안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정권담당자들이다.그리고 휴머니스트로 보는쪽은 안의사의 재판에 참여한 판사와 검찰관,여순감옥의 형리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 일본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다.안의사를 휴머니스트로 보는 시각도 두 갈래로 나뉜다.그 하나가 중천팔양교수(축파대)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이끌려지는데,여순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이 『한일관계의 원전으로 오늘날 더욱 빛나는 혜안이었다』고 극찬한다.동아시아의 제국이 우방과의 신의를 축으로 한 동맹관계를 수립,러시아에 대응방위를 해야한다는 안의사의 주장은 오늘날 일본에 좋은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형무소장과 변호사는 물론이려니와 검찰관·재판관들이 서 있다. 재판과 수형생활등의 과정에서 안의사의 높은 지적수준과 고결한 인품이 자신들을 매료시켰다고 회고한다.오늘날 남아있는 안의사의 유묵은 그들에 의해 고이 간직되어 온 것이 많을 정도다.또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어 일본안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현재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와카야나키의 대림사에 세워지고 있는 안의사의 기념사당도 그러한 경우다. 「테러리스트아닌 독립운동가」라는 시각에 따라 「안중근 무죄론」까지 제기되어 주목을 끌었다.특히 올들어 최근 일본에서는 안중근관계 저술이 2권이나 새로 출간됐다. 그 하나가 중야태낭교수(아세아대교수·국제관계학)의 「안중근」(아기화방간행).한국관계의 원상이라는 부제로 간행된 이 저술은 이토를 저격한 안의사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생애와 사상/의병투쟁땐 일군포로 석방/「동양평화론」 저술한 선각자 안중근의사는 1879년9월9일 황해도 해주 한 향반의 집에서 태어났다.그리고 나서 31살을 일기로 1910년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까지의 삶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 생애에서 안의사가 평화론자였다는 사실은 여러군데서 찾아진다.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고종 양위와 함께 군대가 해산됐을 때 독립전쟁을 주장하면서 의병활동에 뛰어든다.그는 의병전투기간에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그러나 이 사실은 오히려 의병활동을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이라는 국제공법에 근거,포로를 인도적으로 처리한 사례로 평가 되고있다.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힌 뒤 쓴 미완성원고 「동양평화론」은 그의 이같은 사상적 배경을 구체화한 것이다.「독립한 청국 한국 일본이 일심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게 된다」는 논리를 편다.그래서 개화의 역으로 진보,구주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할 때 동양평화가 실현되고 또 유지된다고 주창했다. 이토는 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에도 역행했다는 것이 안의사의 주장이다.그의 자서전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등의 15개조의 죄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안의사는 자신의 행동을 『한국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토를 공격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 “명성황후 시해 일제정부가 주도”

    ◎범인들,만행성공뒤 “출세가도” 질주/어제 97주기… 「역사연구서」 발간 1895년10월8일 새벽6시가 조금 지나는 시각.명성황후 민비가 거처하고 있는 경복궁 건청궁 곤령합에 일본군복을 입은 장교가 지휘하는 20여명의 낭인들이 일본도를 들고 난입했다. 8일은 바로 명성황후시해 97년이 되는 날.일본의 역사말살과 조작으로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에 묻혀져 있던 이 문제를 재조명한 역사연구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출판기념회가 이날 하오4시 경북궁내 구민속박물관 시해현장에서열렸다.「만행을 자행한 자들은 누구였으며 이를 배후에서 주모한 시해의 주범은 과연 누구였나」를 이 책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시해를 모의하고 지휘한 주범은 이노우에 가오루(정상 형)전주한전권공사를 중심으로한 일본정부였다. 또 일본인 낭인으로만 알려진 폭도의정체도 단순한 깡패가 아닌 미국 하버드대학과 일본 동경대학법학부를 졸업한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들은 그후에 내상,브라질공사,중의원 의원,루마니아전권공사등을 지냈다는 가공할 사실도 추모회를 겸한 출판기념회에서 새롭게 폭로됐다. 미국공사관의 10월10일자 보고서와 영국영사보고등 당시 외국공사의 보고서와 목격자진술을 토대로 97년전 오늘에 일어난 사건현장을 재구성해보면 치가 떨린다.일본정규군의 엄호하에 건청궁을 통해 들어온 이들 무리는 곧바로왕비가 피신해있던 곤령합내 옥호루로 몰려들었다. 곧바로 왕비를 시해한 이들은 시신을비단 홑이불천에 싸서 근처 숲속으로 끌고가 시관도 주저하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10년에 걸친 연구를 뒷받침한 명성황후추모사업준비회(대표 이영숙)가 마련했다.참석자들은 준비된 제단에 꽃을 봉정하고 논문을 영전에 바쳤다.조완규교육부장관,고병익방송위원장,김옥균대주교,알렉산드러 파로프주한러시아공화국대사를 비롯,논문의저자인 최문형한양대교수등 2백여명의 각계참석자들은 97년전 이곳에서 비명에 간 왕비의 넋을 기렸다.
  • 「얇은사 하얀고깔」 고이 접은지 3년/한영숙 선생 추모공연 열린다

    ◎벽사춤아카데미·전통춤연 등서 마련/제자들 승무·살풀이·학춤 등 선보여 벽사 한영숙선생 3주기 추모공연이 잇따라 가을·겨울무대에 올려진다. 「벽사춤 아카데미」를 이끌어온 정재만교수(숙명여대)가 오는 10월16일 하오7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한영숙의 달 기념공연」을 가지며 이애주교수(서울대)등 「전통춤연구회」도 오는 12월13일 국립국악원에서 벽사 3주기 추모공연을 갖는다. 이번 공연들은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40호 학무 예능보유자였던 고 한영숙선생의 3년 탈상을 추모하는 무대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어 제자들의 남다른 정성으로 준비되고 있다. 「춤의해」운영위원회가 10월을 한영숙의 달로 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정재만교수가 여름내내 준비해온 공연에는 「벽사춤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정재만무용단,국립무용단,국악원무용단,서울예술단등이 참가해 범무용계 차원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기념공연」에는 참가단체들이 별도로 준비한 작품들이 공연되며 정재만무용단은 한성준제 훈령무를 군무로 춘다.또 한영숙선생이생전에 할아버지 한성준씨로부터 춤을 배우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구성해 공연한 적 있는 「마지막 잎」을 다시 공연할 예정인데 정교수가 한성준옹역을 맡는다. 정교수는 이와는 별도로 승무와 태평무등을 독무로 공연한다.또 공연후에는 제2회 벽사 무용상 수상자에 대한 시상식도 가질 예정인데 올해 벽사무용상 수상자로는 문일지씨등 3명이 선정됐다. 한편 이애주교수를 비롯해 승무 이수자 14명도 7월초부터 여름내내 대학교 연습실에서 겨울추모공연 준비를 해오고 있다. 「전통춤연구회」는 이번추모공연을 통해 이수자 14명이 한무대에서 승무를 군무로 선보인다.공연시간은 40분정도로 압축할 계획이다.이번공연에는 승무이외에 춤의 사군자로 꼽히는 살풀이와 학춤·태평무등도 공연된다. 이교수는 이번 추모공연이 『무엇보다도 북가락을 선생님께서 하신대로 재현하고 이수자들사이에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춤사위를 통일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승무의 법고가락은 현재 이수자들사이에 「창조적인 전수」라는 차원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왔다. 「전통춤연구회」회원들은 이밖에도 그동안의 한영숙선생 무보정리작업을 마무리짓고 내년부터는 승무에 대한 책과 함께 논문도 펴내 선생의 추모사업을 다져나갈 계획이다. 한편 이들은 모두 지난 89년10월7일 70세를 일기로 명무 한영숙선생이 타계한 뒤로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아 3년째 승무의 전승맥이 끊기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각자 「승무보존회」와 「전통춤연구회」를 중심으로 승무강습회를 열어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 찬불가 작곡가 김용호씨 1주기/불교계,대규모 추모음악제

    ◎오늘 하오 7시30분 서울 호암아트홀서/청룡사등 3개합창단 공동주최/고인 작품 24곡 합창·관현악연주/성악가 오현명·김학남씨등 특별출연 14일 하오7시30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는 불교음악인을 위한 첫 추모음악제가 열리게 돼 화제다. 청룡사합창단(단장 정옥녀)과 대한불교관현악단·합창단이 공동으로 마련하는 작곡가 고 김용호씨의 1주기 추모음악제가 바로 그것. 지난해 타계한 고금용호씨는 지난 20여년간 찬불가 작·편곡과 지도를 통해 불교음악의 현대화·대중화에 앞장서 왔던 불교인 작곡가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남긴 찬불가는 「부처님오신 날」「제등행진곡」「연등」「임의 말씀」「원왕생」을 비롯해 3백여 곡에 이르며 이 가운데 상당수가 불교신도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을 정도. 찬불가 보급에 있어서 김씨와 함께 고서정업,한상림씨가 외로운 노력을 폈으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직까지 이들을 위한 추모음악제는 한번도 열린 적이 없다. 이같은 현상에서 고인과 생전 교류했던 스님과 제자·동료들이 추진해와 14일 마련하는 추모음악제는 불교계 첫 행사여서 뜻깊은 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음악포교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면서 찬불음악 창작이 급증하고 사찰마다 합창단이 잇따라 결성되는등 불교음악계가 급변하는 시점에서 이 분야의 「선구자」격인 불교음악인을 위한 추모음악제가 규모있게 마련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날 추모음악제는 고인의 작품 및 유작중 가곡8곡과 찬불가 16곡이 1백여명의 합창단과 관현악단에 의해 합창·독창·관현악으로 연주되며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부른 「스스로 밝은 곳에」와 「소나무」도 합창으로 불려진다. 합창무대에 참여하는 청룡사 합창단은 고인으로부터 관현악지휘와 음악이론을 사사받은 불교인 정옥녀씨가 창단한 불교합창단이며,대한불교합창단과 관현악단은 바로 고인이 지난 86년 만든 단체들이다.이 가운데 대한 불교관현악단은 현재 17명 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불교관현악단이다. 이 단체들이 하나가 되어 마련하는 이번 무대에는 특히 음악계의 거목인 성악가 오현명씨(베이스)김학남씨(메조소프라노)이영구씨(바리톤)가 특별출연해 가곡 「사모곡」「승무」「사슴」등을 각각 부른다. 또 고인의 제자로 성악가 임수연씨와 강태복씨(법련사·강남포교원·여래원 지휘자)가 「휴식」「야슈다라가 설산의 싯달타에게 띄우는 편지」와 「밤비」「반달」등 찬불가를 각각 독창한다. 한편 이날 음악제에서는 박지성스님이 고인의 유작집인 「나의 연꽃」제2집 테이프 1천개와,정옥녀씨가 고인의 일반 가곡 24곡을 담은 테이프 1천5백개를 관객 모두에게 보시할 예정이다. 이번 음악제 마련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정옥녀씨는 『단지 제자라는 개인적이 입장뿐만 아니라 불교계 전체를 위해서도 당연히 마련해야 할 행사』라며 『매년 열지는 못하더라도 5년에 한번씩은 반드시 추모음악제를 마련하고 싶은 생각이며 각 단체가 지속적인 추모행사를 확대해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와 함께 『고인의 추모사업으로 제자들이 주축이 돼 내년 화갑을 맞아 2백여곡의 어린이찬불가등 미발표 작곡집 출간을준비중』이라고 덧붙였다.
  • 오늘 상해임시정부 수립 73주년/7요인영정 효창원에 봉안

    ◎「추모사업 40년」… 남다른 감회의 김재홍위원장/석오·백구선생등 초상/영정모실 의열사건립에만 12년 진력/“임정기념관 건립이 꿈… 정부수립일 재조정 돼야” 13일은 1919년 중국의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지 73주년이 되는 날. 이날을 맞아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자리잡은 효창원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의정원장과 주석을 지낸 석오 이동령선생과 역시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선생등 이곳에 묻혀있는 임정요인 7인을 기리는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그동안 썰렁하기만 했던 사당 의렬사에 일곱분 선열들의 영정이 이날 비로소 봉안되는 것이다. 지난 52년부터 순국선열들의 추모사업에 헌신,78년 「효창원 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만들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이 위원회 위원장 김재홍씨(66·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에겐 눈물이 나올만큼 흐뭇한 일이다. 이날 14번째 합동추모대제전과 함께 봉안식을 갖는 영정의 주인들은 석오선생과 백범선생을 비롯,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조성환·차리석선생과 일본왕을 저격했던 이봉창의사,일본군 장성등 10여명을 살상시킨 윤봉길의사,주중 일본공사를 폭살시키려 했던 백정기의사 등이다. 이들 선열의 일생이 조국의 수난사와 운명을 같이 한 파란만장한 것이었던 것처럼 선열들이 잠들고 있는 효창원의 역사 또한 우여곡절이 이만저만 아니다. 효창원은 원래 조선왕조 정조대왕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및 영온옹주의 묘가 있던 곳. 그러나 조선왕조를 침탈한 일본은 서울 도심에 있는 이같은 사적을 제거하기 위해 공원법을 만들어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뜯어 고치고 세자묘도 경기도 고양군의 서삼릉으로 이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백범선생등은 46년 7월 아끼고 사랑했던 3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봉환,안중근의사의 가묘와 함께 이곳에 안장해 일본인들의 잘못을 꾸짖었다. 이어 48년 9월에는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순국한 석오선생과 차선생의 유해도 옮겨왔고 다음달에는 환국해 활동하던 조선생도 운명,이곳에 안장됐다. 그리고 이듬해 6월26일 백범선생마저 흉탄에 서거,7월5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봉안됨으로써 오늘의 선열묘역을 이루게 됐다. 47년 육사를 졸업하고 6·25동란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예편한 뒤 순국선열들의 추모사업에 뛰어든 김씨는 자유당정권때 효창공원운동장이 개설되면서 울창했던 공원안의 나무들이 마구 베어지고 철없는 아이들이 선열들의 묘위를 올라가 뛰어노는 등 놀이터로 변해가는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더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게된 지난 78년 이인·이희승·이항령씨 등 40여명과 함께 「효창원 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이듬해부터 해마다 임정이 수립된 4월13일이면 추모행사를 가졌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요로에 건의를 거듭하기 10년 넘어 마침내 지난 88년 사당이 착공됐고 89년에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으며 90년 11월 의렬사가 준공됐다. 그러나 사당에 모실 제대로 된 영정이 없어 또한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7억원가량으로 추산되는 영정제작비를 마련할 길이 막연한 것이었다.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5천만원 이상의 지원은 어렵다고 했다. 이리뛰고 저리뛰던 끝에 재일동포실업가 신해성씨(56)가 거금 5억원을 냈고 한국역사인물연구회장 옥문성씨가 그 돈으로 영정을 모두 새로 그려 이번 추모식에서 봉안식을 갖게 됐다. 효창원에 사당을 짓는데만 12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후 7인의 여정을 준비하는데도 2년이 걸렸다. 『이곳에 임정기념비와 기념관을 세우는 등 앞으로 할일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나라 민주공화제의 제1공화국을 임시정부로 재정립하는 일과 이에 따른 정부수립일 및 제헌절을 재조정하는 일도 이뤄져야 한다』는 김씨는 『선열추모사업은 몇몇 개인이나 유족들에게만 떠맡겨질 일이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속에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미 결정된 일” 조기귀환 강행/북 여성 참가단 평양행 이모저모

    ◎여씨,“가는 곳마다 막았다” 퉁명스레 불평/군사분계선 다시 넘어와 동창생과 포옹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 북측 참가단 15명은 29일 상오 11시52분 승용차편으로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 집」앞에 도착,환송나온 남측 참가자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눈뒤 7분만에 북으로 귀환. 남측 이효재씨와 함께 도착한 여연구씨는 마중나온 북측 연락관들과 악수를 나눈뒤 이씨에게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작별인사. 이에 이씨가 『또 만납시다』라고 화답하자 여씨는 『그럼요.자주보면 뭔가 이뤄지겠지요』라며 서운한 표정. 이어 정명순 조평통참사등 북측 여성참가자들도 남측 참가단과 일일이 포옹하며 『사랑합니다.평양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 ○…여대표는 북측지역으로 돌아가면서 일정단축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소 퉁명스런 어조로 『다 참았다.동창들도 못 만나게하고 가는 곳마다 다 막았다.우리 여성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통일을 하러왔다』며 불만을 토로. 그러나 북으로 향하던 그는 이화여대 동창인 이효재 윤정옥씨등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듯 군사분계선을 다시 넘어와 이들과 포옹하며 거듭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남측 윤정옥씨가 여씨를 껴안으며 『미워 죽겠다』고 하자 여씨는 『밉지,미우면 꼬집으라우』라고 응답. ○…28일 하오 북한참가단의 조기귀환을 통보받은 주최측은 이날 자정부터 29일 상오3시30분까지 조기귀환결정을 번복하도록 마라톤 설득을 벌였으나 끝내 실패. 설득작업에 나섰던 이우정씨는 29일 상오 피곤한 모습으로 『북측참가자들은 「한번 결정된 입장이라 바꿀 수 없다」고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며 『그들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 이씨는 특히 『북측참가자들이 미리 주최측에 불만사항을 전해줬더라면 사전에 시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그러나 이번 일정동안 남과 북 사이에 사고및 표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실감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덧붙였다. ○…여연구씨는 출발에 앞서 이날 상오10시25분쯤 토론회장인 올림피아호텔 1층 로비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사무국직원들과 포옹한 뒤 사촌동생 여명구박사와 몽양선생 추모사업회 관계자들과 작별인사. 이 자리에서 여명구박사는 여씨에게 『언제 또 다시 만나냐』며 눈시울을 붉혔으며 여씨는 이우정씨를 가리키며 『내년봄 평양에서 3차토론회가 열릴 때 같이 오라』고 응답. 또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여씨에게 26일 몽양묘소 참배때 찍은 기념사진액자를 선물. 여씨는 상오10시50분쯤 호텔앞에 대기중이던 서울1가7859호 감색 그랜저승용차에 우리측 이효재씨와 나란히 타고 판문점으로 출발. 여씨의 사촌동생 명구박사는 차가 떠나기 직전까지 뒷문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기약없는 이별의 아쉬움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이 글썽.
  • 몽양 묘소에 선전성 김일성 화환/북한여성들 서울 오던날

    ◎철거요구 우리측과 옥신각신/개회식선 「그리운 금강산」 축가 ○…25일 하오 여연구씨가 검은색 비로드천의 한복에 흰색 베일 차림으로 서울 도봉구 우이동 여운형 묘소를 참배하는 동안 북측 일행이 갑자기 김일성 명의의 화환을 묘소앞에 배열하고 정치선전극을 벌여 이의 철거를 요구하는 우리측과 마찰을 빚었다. 북측 참가자일행은 참배도중 미리 갖고온 커다란 상자에서 「고 몽양 려운형선생을 추모하며 김일성」이라는 내용의 글씨가 쓰여진 화환과 「아버님을 추모하며 려연구·려원구·려붕구」라는 2개의 화환을 꺼내 묘소앞에 내세운 것. 이들 대형조화 2개는 이른바 「김일성화」와 「김정일화」,국화 등으로 장식한 것으로 누가 보아도 정치선전의도가 짙은 것으로 보였다. 이에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이 『민간차원의 순수한 행사에 꽃만 놓으면 됐지 굳이 김일성 휘장을 걸 필요가 있느냐』고 항의하자 북한측은 『여성들끼리 하는 일을 왜그럽니까,2분만 기다려 주시지요』라며 대꾸,우리측과 10여분간 옥신각신. 북측은 기록용 사진을 찍고 마지못해 철거. ○…『아버님이 귀여워해 주시던 소녀 둘째딸이 40여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섰습니다』 25일 하오 서울 도봉구 우이동 106번지 몽양 여운형씨의 묘소를 찾은 여연구 북측 대표는 묘지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여씨는 이날 하오 2시55분 남측 이효재씨와 승용차편으로 아버지의 묘에 도착,하얀 스카프를 머리에 덮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20여분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날 몽양의 묘에는 여명구씨(64·의학박사)와 올케 오세연씨,몽양선생 추모사업회원 등 30여명이 미리 대기. 특히 여씨의 증조할머니뻘 되는 여귀옥씨(대한기독교 여자절제회)와 그의 두딸은 추모사와 추모곡을 준비하기도. 또한 몽양선생 추모사업회측은 미리 향을 피우고,여대표에게 전달할 선물 등을 빈틈없이 준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에 참석하는 북측 참가단 15명은 25일 상오 11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를 통해 남녘땅에 첫발을 디뎠다. 여연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비롯한 세미나 참석 북측 참가자 5명은최봉춘 북측 책임연락관 안내로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을 넘어서자 마자 미리 대기중이던 이효재씨(한국여성단체 연합회장)등 우리측 영접위원 5명으로부터 각각 꽃다발을 전달받은 후 서로 가볍게 포옹. 특히 47년 이화여전 재학중 월북해 44년만에 남녘땅을 밟은 여부의장은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도 만감이 교차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오 6시 호텔 2층 임페리얼룸에서 열린 개회식에서는 윤정옥 대표가 개회선언을 했으며 이어 이효재 대표가 경과보고,이우정 대표가 환영사,참가대표와 영접위원 소개,축가 등의 순서로 진행. ○…개회식 마지막 순서로 평양범민족통일 음악제에도 참가했던 윤인숙 교수(단국대 음대)가 축가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 분위기를 돋우었다. ○…북한측 일행이 몽양 묘소를 참배하고 다소 늦는 바람에 기자회견은 30분 늦게 시작됐으며 여연구 대표는 선친묘소 참배때 무리한 탓인지 불참. 이 자리에서 북측 정명순씨는 『서울 방문 기간중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씨,문규현 신부,유원호씨를 만나고 싶다』고 불쑥 제의하면서 선물까지 가져왔다는 말을 끝내 잊지 않았다.
  • 외언내언

    일제때도 우리민족에겐 애국가가 있었다.국내에서야 숨어서 몰래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던 교포들은 일요일마다 한인교회에 모여 소리높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그러나 그때의 애국가는 오늘의 애국가가 아니었다.가사는 지금것과 같지만 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으로 남의 것이었다.◆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던 20살의 청년 안익태가 커다란 첼로 하나만 달랑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난 것은 1930년.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교포30여명이 이 청년음악도를 환영하는 모임을 갖고 슬프디 슬픈 남의 곡조에 맞춰 애국가를 합창했는데 이때부터 이 청년은 웅장하면서도 힘찬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오늘의 애국가가 악보로 나타난것은 그로부터 6년뒤인 1936년이었고 이것이 대한민국의 공식애국가로 지정된 것은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그러나 스페인에서 살고 있던 안익태선생이 이 사실을 안 것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라디오 뉴스와 함께 울려퍼진 애국가가 바로 자신의 곡임을 알고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세계 각국의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극동의 숨겨진 나라 코리아를 빛냈던 그는 1944년 스페인 귀족의 딸 롤리타 부인과 결혼하면서 이 나라에 정착했고 1965년 9월16일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생전에 고국에 돌아가기를 그렇게도 열망했던 안익태선생은 그가 죽은지 12년만인 77년6월15일 이땅에 안장됐다.그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히던날 시인 모윤숙은 이렇게 읊었다.「넋이여! 들으소서/민족의 한목소리를/정든땅에 울려 퍼지는/영원한 애국가를」◆문화부는 안익태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하고 애국가탑 건립 등 다채로운 추모사업을 펼친다고 한다.반가운 마음과 함께 그의 유족(부인과 세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 고 이철규군 2주기/조선대생 추모집회

    【광주=최치봉 기자】 조선대생 1천여 명은 6일 하오 4시30분 교내 민주로에서 「고 이철규 열사 정신계승 및 학원자주화투쟁 4주기 계승대회」를 갖고 『열사의 반미·반독재투쟁을 계승해 노정권 퇴진투쟁에 앞장설 것』을 결의한 뒤 5백여 m 떨어진 전남대병원 앞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이에 앞서 조선대 총학생회(회장 윤영덕·21·정외과 4년)는 이날 상오 11시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묘역에서 학생과 시민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회장 문병란 조선대 교수)와 공동으로 「고 이철규 열사 2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 “건강나빠 동생에 이사장물려줬다”/박근혜씨,「육영재단」파문관련회견

    ◎“내가 동생에 먼저 제안… 불화설 사실무근”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의 이사장직과 「박정희 전대통령ㆍ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회장직을 갑자기 사퇴,세간의 화제에 오른 박전대통령의 큰딸 근혜씨(39)는 7일 기자회견을 자청,『그동안 부모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데 많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며 이제 건강도 좋지않아 동생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줬다』고 밝혔다. 박근혜씨는 이날 하오 양장차림에 담담한 표정으로 서울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회관 이사장실에서 기자들과 만났으며 동생 근영씨와의 불화설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언제부터 이사장직을 그만두려 했는가. 『동생 근영이와 전에도 여러차례 의논을 해오다 지난달 아버님의 11주기 추모식직후 「재단을 맡아보겠느냐」고 제안했더니 동생도 「부모님의 유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향을 보여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동생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결정했다』 ­지금까지 기념사업회의 성과라면. 『사업을 통해 아버님의 업적을 담은 「조국의 등불」을 제작하고 「겨레의 지도자」라는 책과 많은 인터뷰를 통해 잘못된 국민의 인식을 바로잡았다. 지난해 10주기추모식에는 15만여명의 인파가 모여 부모님의 뜻을 기리는 등 성심성의껏 일해온 것이다』 ­6일 근화봉사단원들이 이사장직의 사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절대 반대시위가 아니었다. 동생 근영이를 재단간부들에게 소개하고 부탁하는 조촐한 상견례자리를 마련하려 했는데 나를 마지막으로 보려는 봉사단원들이 찾아온 것이 일부 회원들에 의해 반대운동으로 오해된것 같다』 ­일부에서는 최태민목사(69)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내가 누구로부터 조종받는다는 말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목사는 청와대시절 새마음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지난 88년 기념사업회를 만들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개월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 그동안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재단의 개편을 요구하는 「숭모회」의 모임은 어떤것이며 동생과는 무슨 관계인가. 『그 모임에 대해서는지난달 28일 이곳(어린이회관을 지칭)에서 발족대회를 가졌다는 것을 알뿐 그 이외에는 전혀 모른다. 그때 돌던 유인물을 보았지만 모두 잘못된 거짓말로 꾸며져 있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최근들어 어린이회관의 운영이 어려워 이사장직을 내놨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사실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최근에는 많이 알려져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 원래 육영사업은 손익이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외부에서는 동생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데. 『전혀 사실 무근이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많은사람들에게 알리며 직접 사업일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도와왔다. 동생과는 어느 자매 부럽지않게 사이가 좋다』 ­앞으로의 계획은. 『겉보기와는 달리 많이 지쳐있고 피곤해 당분간 쉬면서 동생이 하는 일을 뒤에서 도와줄 계획이다』
  • 백범 묘소 찾는 귀국동포/서동철 사회부기자(현장)

    ◎중국서 영주 귀국… 「그때」기억 생생히 『영구 귀국한뒤 세번째 참석하는 백범선생 추모제이지만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 나오게 돼 더욱 뜻깊게 생각합니다』 26일상오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선생 41주기 추모예전에 참석한 유수송씨(53ㆍKBS교향악단 트럼펫주자)는 외아들 승남씨(25ㆍKBS교향악단 트럼펫부수석)를 추모제에 나온 백발이 성성한 노독립투사들에게 소개하기에 바빴다. 유씨의 부친 평파씨(지난47년 43세로 작고)는 중동임시정부의 경호대 대부(부장)이자 김구선생의 경호부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는 지난 88년2월 중국 상해에서 트럼펫 주자로 일하던 유씨를 한국에 초청했고 유씨는 귀국하자마자 영주 귀국을 신청,그해 6월23일 영주권을 받은뒤 부인 하유신씨(51ㆍ중국기공의사)까지 불러 KBS교향악단 주자로 일하며 고국생활을 시작했다. 유씨는 이때 아들 승남씨도 같이 불렀으나 당시 상해교향악단의 트럼펫 주자로 있던 승남씨는 『89년 일본순회연주를 마친뒤 귀국해 달라』는 악단측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지난해 10월 이 교향악단의 일본연주가 끝날 때까지 귀국을 늦춰야만 했다. 이 연주가 끝나자 바로 귀국한 승남씨는 아버지가 평단원으로 있는 KBS교향악단에 부수석으로 들어갔고 현재 우리나라 젊은 세대의 트럼펫 연주자로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유씨에게는 김구선생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로보다는 「자상한 큰어른」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유씨는 『지난45년 중경임시정부의 주석이던 백범선생이 중경교외에 있던 우리집으로 자주 찾아와 어머니의 요리를 맛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백범선생은 당시 유씨의 어머니 송정헌씨(76)가 만든 만두와 국수를 특히 좋아해 자주 찾아 왔었다는 것이었다. 이날 추모식장에 나온 중경임시정부시절 백범선생의 비서 선우진씨(69ㆍ김구선생 추모사업협회이사)는 유씨를 만나자 『백범선생은 수행원들과 함께 유대부의 집을 자주 찾아가 음식을 들며 광복군의 입국항전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말하곤 했다』면서 『당시 겨우 국민학교 2∼3학년이던수송씨를 여기서 다시보니 마치 유대부를 다시보는 것 같다』고 반가워 했다. 이날 추모제에 처음 참석한 승남씨는 『여기에서 주위분들로부터 백범선생과 할아버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니 할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 훈련중 부하2명 구하고 순직/고 정재훈중위 영결식

    ◎대전국립묘지 안장 훈련중 강물에 빠진 소대원 2명을 구하고 순직한 고 정재훈중위(25·ROTC27기)의 안장식이 23일 하오 대전국립묘지에서 육본 인사참모부장및 관계장병,유가족등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정중위의 유해는 이날 현충관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육군군악대의 진혼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장교묘역에 안장됐다. 고 정중위는 지난달 16일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일대에서 벌어진 연대 전투단훈련중 이웃 소대원 김명소상병(22)등 2명이 북천강을 건너다 골재채취로 생긴 웅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물에 뛰어들어 이들을 구하고 순직했다. 이날 영결식에서 고 정중위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이 추서됐고 소속부대였던 제5861부대측은 고인의 소속중대를 「재훈중대」로,종합체육관을 「재훈관」으로 명명했다. 한편 고 정중위의 출신학교인 단국대학은 「고 정재훈중위 추모사업추진회」(위원장 한명석 단국대학교총동창회장)를 구성,추모비와 동상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장학회를 설립하여 정중위의 희생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 “위대한 몽골리안”… 칭기즈칸 복권운동 한창(깨어나는 몽고:2)

    ◎민족혼 “재점화”/민주화 바람 타고 “민족적 영웅” 추앙/“침략자”로 격하 70년만에 명예회복/배지ㆍ달력등 기념품 불티…묘찾기 작업 본격화 영하 15도에 매서운 한풍까지 심하게 몰아치던 4월1일 정오 울란바토르 시중심가에 자리한 야달트(승리) 극장앞. 약 5백명의 군중이 마이크 앞에서 외치는 연사들의 연설 내용을 듣고 있었다. ○행사장마다 추모행렬 군중이나 연사 모두가 추위에 아랑곳 않는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칭기즈칸은 우리 몽고민족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2백만 몽고 인민공화국 국민은 물론 중국의 내몽고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민족들은 이제 칭기즈칸의 정신밑에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연사의 말이 끝나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또 다른 연사가 등장. 『늑대를 잡으려고 초원 한 곳에 불을 질렀으나 그 늑대는 다른 넓은 초원으로 달아 났습니다. 소련은 칭기즈칸 정신을 말살시키려고 그에 관한 책이나 사적을 없애고 한낱 전쟁 미치광이로만 선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신,몽고인의민족적 자긍심은 초원을 끝없이 달리는 늑대처럼 굳세고 힘차게 우리 가슴속에 살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칭기즈칸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칭기스칸 만세!』 『만세!』 ○“칭기즈칸 정신” 강조 곧이어 쇼열엘덴(발전하는 사회)이란 록그룹이 등장,칭기즈칸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자 군중들도 모두 따라 합창을 했다. 추운 날씨속에 계속된 이 집회는 「칭기즈칸 추모사업회」 발족을 위한 것이었다. 연단앞에 걸린 거대한 그의 초상화가 후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몽고의 저명작가 도초도르치를 비롯,시인ㆍ언론인ㆍ학자 등 지식인들이 주관했다. 흔히 외국인들이 「칭기즈칸」(Khan)이라고 부르는데 대해 몽고 사람들은 틀린 발음이며 「칭기즈한」(한)이 정확하다고 했다. 칭기즈는 몽고말로 강성하다라는 뜻이며 한은 왕ㆍ지배자를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요즘 몽고인들의 칭기즈칸 추모 열풍은 대단하다.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시킨 민주화가 민족혼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국민적 영웅인 칭기즈칸의 복권운동으로 점화된 것이다.○관련서적ㆍ사적 없애 추모사업회를 이끄는 작가 도초도르치는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ㆍ기념탑등을 건립하고 그의 무덤을 찾아내 기념박물관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에 두 곳 뿐인 관광호텔과 단 하나의 외국인 백화점에선 칭기즈칸 배지ㆍ달력 등 그에 관한 기념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지난 1921년 몽고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이후 칭기즈칸은 철저히 무시당해 왔다. 몽고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소련으로선 역사적으로 칭기즈칸에 대해 매우 굴욕적인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러시아를 1240년 멸망시킨 것이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이며 이들 몽고 기병은 불과 일주일만의 맹공으로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고 킵차크한국을 세워 무려 2백40년 동안이나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것이다. 몽고의 지배로 러시아는 서구의 르네상스ㆍ종교개혁 등 근대화에 필요했던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정체의 역사를 밟을 수 밖에 없었다. 울란바토르의 몽고 국립역사박물관장 다바삼부는 『칭기즈칸을 극도로 혐오한 스탈린의 영향을 받아 몽고의 민족 영웅인 칭기즈칸이 지나치게 천대받아 왔다』면서 앞으로 그의 유물과 유적을 모으고 보관하는데 여생을 보내겠다고 강조했다. 이 역사 박물관에는 3층 맨구석에 칭기즈칸의 초상화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 더 이상 그에 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동상ㆍ기념탑 건립계획 박물관 안내를 맡았던 튤스양에 따르면 몽고라는 표기도 현재 중국ㆍ한국ㆍ일본 등 한자권의 국가에서만 쓸 뿐 다른 곳에선 몽골(Mongolㆍ용감하다는 뜻)로 부른다고 했다. 몽고의 정식 국명도 몽골인민 공화국이다. 몽고란 명칭은 원래 한족 중심의 중국인들이 주변 이민족을 몽매한 야만인라고 경멸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 했다. 또 몽골은 칭기즈칸이 속했던 부족 이름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테무친(철목진)으로 불렸던 그가 타타르,나이만 등 다른 부족을 평정,대초원에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몽골이란 말이 국명으로 채택됐다는 것이다. ○초상하나만 덩그렇게 튤스양은 또 역사상 모스크바를 점령한 사람은 칭기즈칸과 나폴레옹 두 명 뿐이나 나폴레옹은 그나마 며칠 후 퇴각하면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비교가 안된다며 칭기즈칸을 추켜세웠다. 아시아에서 유럽에 거쳐 대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진 칭기즈칸은 1227년 여름 서하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재 중국의 감숙성 진주 육반산에 갔다가 그해 9월 65세로 풍운 가득찬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땅으로 옮겨져 울란바토르 동북쪽 케룰렌강 주변에 묻혀졌다고 한다. 때문에 최근 몽고에선 그의 묘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정확한 지점이 어디인가는 아직 어림조차 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몽골리아지는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디인가?」란 제목의 기사에서 몽고인들이 과거 봉분의 풍습이 없었던 데다 후세 이민족이 시신을 훼손할 것을 우려,칭기즈칸의 묘지 소재를 비밀에 부쳤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잡지는 당시 칭기즈칸이 묻힌 자리를 1천마리의 말이 밟아 흔적을 없앴으며 그자리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 3년동안 몽고기병들이 파수를 보았다고 했다. 또 묘지 넓이는 직경이 30리에 이르고 귀중한 부장품이 엄청나게 많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 노래 유행 칭기즈칸의 아들과 동생들은 몽고대제국을 킵차크ㆍ오고타이ㆍ차가타이ㆍ일한국등으로 나눠 통치했으며 손자인 쿠빌라이는 원나라를 세워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방대한 대제국도 원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기 시작한다. 『용서해주세요 칭기즈칸/우리는 당신의 어두운 면만을 얘기했답니다/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당신을 민족최고의 영웅으로 받들겠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칭기즈칸 노래의 내용이다. 비록 소련의 입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조국에서 조차 제국주의자ㆍ전쟁광으로 낙인 찍혀 멸시 당했던 칭기즈칸. ○낙후 몽고에 새 활력 그러나 초원을 휩쓸고 있는 민주개혁의 열풍으로 다시 몽고 국민들의 우상이 된 그가 공산주의로 찌들리고 낙후된 이 나라의 내일에 어떤 형태든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울란바토르=우홍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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