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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5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移葬)한 기록문으로 송용식 참전기를 대신한다. 6·25 전사 인천학생 묘가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중에는 비석도 없고 봉분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고향 인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잊혀져가지만, 후대에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해 달라고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활동 1996년 7월 15일 창립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가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은 208명이고, 전사 스승은 심선택 해병 소위 1명이다. 23년 동안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서 이름과 출신 중학교 등을 확인한 전사 인천학생은 105명뿐이다. 나머지 103명의 전사 인천학생은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전사 학생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 위패와 묘 그리고 고향 인천 여기저기 묻혀있는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기록되어있는 호적 제적등본을 일일이 다 떼어서, 최종적으로 전사를 확인한 결과 그 전사자는 105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명단에서 오빠의 이름을 찾아보고 통곡하던 할머니 자매 2001년 6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인천 중구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주최로 제3회 인천학생 625 참전 기록사진 전시회를 개최 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다. 첫날 두 분의 할머니께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에게 다가와 울면서 “저기 우리 오라버니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따라가 보니까 전사 학생 명단이 있는 참전 전시판에 할머니들이 가리키는 이름은 송용식이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이 “송용식 전사자의 묘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지금 오라버니는 서구 검암동 간재울 고향 땅에 묻혀 있으며 우리들은 동생 송옥림·옥란 자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6·25 참전 사진 전시회가 끝나고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 자매의 안내로 서구 검암동으로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가 있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438-18번지를 찾아갔으나 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묘지가 보이지 않는가?”라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들이 어릴 때 군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여 유골로 돌아와 아버지께서 이 근방 양지바른 곳에 묻고 봉분을 잘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드렸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봉분이 깎여 이리됐다”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 묘를 국립묘지로 우리가 옮겨 주겠으니 이장하겠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두 자매는 그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때부터 묘지 확인 작업을 위해 현장에 직접 검암동 동직원과 같이 유골이 묻혀 있는 지번(인천 서구 검암동 438-18)을 확인하였다.6·25 전사 학생 송용식 이장(移葬)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육군본부에서 이장 허가서를 발급받았다. 2003년 5월 27일 아침 일찍부터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게 6·25 참전 전사 학생 고(故) 송용식의 유골(遺骨)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어렵게 유골을 찾아 수습한 후 유골함에 담아 제(祭)를 올렸다.전사한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게나! 2003년 5월 27일 오후에 대전 현충원 봉안관 임시안치소에 모셨다가 2003년 6월 26일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이제는 편안히 잠들 유택(대전 현충원 2묘역 16129)에 안장되었다. 2003년 6월 26일 유골 이장에 참석하신 아버지(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께서 송용식 전사자 묘에서 “중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하여 전사한 친구여, 자 이제는 편히 쉬게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는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학생들 유골 6·25 사변 발발 후 한창 전쟁 중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화장을 한 뒤에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유골을 받은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심정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15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송용식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현재 인천기계공고)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송용식을 기억합니다. 송용식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송용식이 공부했던 인천기계공고 운동장 한편에 송용식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송용식을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육군 통신병으로 참전·전사송용식 전사자는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태어나, 인천공업중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자원입대 후 육군통신병(군번 0243043)으로 참전하여 1951년 5월 30일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함.
  • 산청군 국악인 박헌봉 기리는 국악제, 추모비도 제막

    산청군 국악인 박헌봉 기리는 국악제, 추모비도 제막

    경남 산청군은 14일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과 산청한방약초축제장에서 오는 28~29일 제12회 기산국악제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기산국악제전은 산청출신 국악인 기산 박헌봉(1906~1977) 선생을 기리고 국악 전승·보급을 위해 개최하는 국악축제다. 산청군이 주최하고 기산국악제전위원회가 주관하며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등이 후원한다.기산 선생은 대한국악원을 창설하고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국악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이론가이며 국악 대중화에 앞장선 국악 교육의 선구자다. 이틀동안 박헌봉 국악상 시상, 전국국악경연대회, 국악한마당 공연 등이 진행되며 특히 올해는 우리나라 국악발전에 박헌봉 선생이 기여한 업적을 재조명 하기 위해 기산 추모비를 세워 제막한다. 추모비는 박헌봉 선생의 제자 100여명이 뜻을 모아 박 선생의 고향인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있는 기산국악당에 건립해 28일 오후 3시 제막식을 한다. 기산 선생의 뒤를 잇는 국악인들이 29일 오후 6시30분 산청한방약초축제 특설무대에서 국악한마당 공연을 선보인다. 김성녀 명창의 ‘배 띄워라’, ‘산청아리랑’ 등의 공연과 왕기철 명창의 ‘사철가’ 비롯해 국립전통예술고 출신 가수 유지나 등 국악인들의 흥겨운 공연이 이어진다.풍물 남사당패의 연희 춤에 뿌리를 둔 최종실류 소고춤보존회의 전통무와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현대적 감성에 맞게 재해석한 전통창작타악그룹 ‘유소’의 연희 공연 등을 감상하는 무대도 마련된다. 앞서 29일 오전 10시 산청문화예술회관과 실내체육관에서 ‘전국국악경연대회’가 펼쳐진다. 기산 선생의 국악정신과 뜻을 이어 나갈 재능있는 국악인을 양성하고 발굴하기 위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는 300명이 넘는 유망한 국악도들이 참가해 열띤 경연을 펼친다. 기악, 성악, 타악, 무용 등 4개 종목에 걸쳐 초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3개 부문으로 나눠 열린다. 일반부 종합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만원과 문체부 장관상을 시상하고 학생부 종합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00만원과 교육부 장관상을 준다. 산청군 관계자는 “기산국악제전과 올해 기산 추모비 제막을 계기로 산청지역이 국악 성지로 널리 알려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北, ‘정몽헌’ 기일 맞춰 현대그룹과의 인연 강조

    北, ‘정몽헌’ 기일 맞춰 현대그룹과의 인연 강조

    북한이 정몽헌 전 회장의 기일에 맞춰 방북하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당일인 3일 현대 일가와의 인연을 특별히 강조하고 나섰다. 이날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남조선 현대 일가가 받아 안은 영광’이란 제목의 글에서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망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전을 보내고 조의 대표단에 조화를 들려 보낸 일화를 소개했다. 또 김정일 위원장이 2000년 6월 말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 명예회장을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라고 내세웠다고 전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2005년 7월 원산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정몽헌 전 회장의 사망을 애도하고 “우리는 북남관계에서 당국보다 훨씬 앞서 현대와 첫사랑을 시작하였다”고 말했다며 ‘첫사랑’이란 표현에 방점을 찍었다. 이어 “북과 남의 군사 무력이 첨예하게 대치된 최전연(최전방) 지역에 위치한 금강산지구에 대한 관광사업은 누구나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었다”라며 김정일 위원장이 ‘대용단’을 내려 현대그룹에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째로 맡겼다고 강조했다. 이 매체는 아울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 전 회장의 10주기를 맞아 현대그룹에 구두 친서를 보내 “정몽헌 선생은 김정은 동지의 민족 우선, 민족 중시 사상에 떠받들려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 있다”고 밝힌 일화도 소개했다. 현정은 회장과 이영하 현대아산 대표 등 15명은 금강산에서 정 전 회장의 15주기 추모행사를 치르기 위해 3일 방북하며, 앞서 통일부는 1일 이들의 방북을 승인했다. 정 전 회장의 추모식은 3년 만에 열리는 것으로, 현대그룹은 정 전 회장 사망 이후 매년 금강산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을 열었으나 2016년부터는 남북관계 경색 등으로 열지 못했다. 북한이 이처럼 현 회장의 방북 당일 현대그룹과의 인연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금강산 관광 재개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정몽헌 금강산 추모식 승인…현정은 회장 새달 4년 만에 방북

    현대그룹은 정몽헌 전 회장의 15주기 추모 행사를 금강산에서 개최하기 위한 방북 요청을 북한이 승인했다고 30일 밝혔다. 이에 따라 정 전 회장의 금강산 추모 행사가 3년 만에 재개될 전망이다. 현대그룹은 “현대아산이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정 전 회장의 추모식과 관련해 방문 동의서를 받았다”면서 “이에 따라 즉각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했다”고 밝혔다.통일부가 방북을 승인할 경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해 임직원 15명은 다음달 3일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에서 15주기 추모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현대그룹은 2003년 8월 4일 정 전 회장이 타계한 이후 매년 금강산 특구 온정각 맞은편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을 열었으나 2016년에는 남북 관계 경색으로 처음 방북 신청을 하지 않았고, 지난해에는 북측이 방북 요청을 거부하면서 행사가 무산됐다. 현 회장이 북한을 방문할 경우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금강산 관광 재개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눌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아산은 1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 북측으로부터 전력사업, 통신사업, 철도사업, 통천 비행장, 임진강댐, 금강산 수자원, 명승지 관광사업 등 7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권을 받았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현대그룹 “북, 정몽헌 15주기 행사 금강산 개최 승인…방북 신청서 제출”

    현대그룹 “북, 정몽헌 15주기 행사 금강산 개최 승인…방북 신청서 제출”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금강산 추모 행사가 3년 만에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이 고 정몽헌 회장 15주기(8월 4일) 추모 행사를 금강산에서 개최하기 위해 제출한 방북 요청을 북한이 승인했다고 30일 밝혔다. 그룹 측은 “현대아산이 오늘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정몽헌 전 회장의 추모식과 관련해 방문 동의서를 받았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이 방북 승인 의사를 통보해 옴에 따라 현대그룹은 우리 정부에 방북 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현대그룹은 추모식 개최를 위해 이달 초 통일부에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제출해 승인을 받아냈으며, 이후 북측과 협의를 진행해왔다. 방북 승인이 결정되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영하 현대아산 대표, 이백훈 그룹 전략기획본부장 등 임직원 15명은 다음달 3일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에서 15주기 추모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현대그룹은 2003년 8월 4일 정몽헌 전 회장 별세 이후 해마다 금강산 특구 온정각 맞은편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을 열어왔다. 그러나 2016년 남북 관계가 심각하게 경색되면서 처음으로 방북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북측이 방북 요청을 거부했다. 현정은 회장이 남편인 정몽헌 전 회장의 금강산 추모식에 참석한 것은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이후 2009년과 2013년, 2014년 등 모두 3차례였다. 방북이 이루어지면 현정은 회장이 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북측 고위 관계자들과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협의할 자리가 자연스럽게 마련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 주사업자이자 개성공단 개발사업자로, 남북 경협이 본격화할 경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 현대아산은 북측으로부터 전력 사업, 통신 사업, 철도 사업, 통천 비행장, 임진강댐, 금강산 수자원, 명승지 관광 사업 등 7개 SOC(사회간접자본) 사업권을 받은 바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김우종 ▲인천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 ▲해병 6기로 참전·전사 (군번 9210662) 김우종(17세 참전·18세 전사)1933년 4월 10일 : 인천 영종도 중산리 출생1947년 : 인천영종국민학교 졸업(제24회)1950년 12월 18일 : 인천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출발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감.1951년 1월 24일 :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해 참전.1951년 8월 31일 : 강원도 월산령 김일성고지에서 전사.아랫글은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월간 서해문화 2002년 1월호에 ‘불멸의 꽃!’으로 기고한 글이다. 고(故) 김우종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김우종 참전기’를 대신한다.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 학생 사연) 인천학생·스승 6·25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1996년 7월 15일 창립 이래로 그동안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 많은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을 찾았으나 아직도 미확인 6·25 참전 전사 인천 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확인된 전사자의 묘지를 기록에 담기 위해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그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바 있으며 전사자 위패 또한 일일이 확인하였다. 인천 각지에 흩어져 잠들고 있는 6·25 참전 전사 학생들에 대하여 월간 서해문화에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학생’으로 연재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점차 잊혀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우리들이 한 번쯤 함께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뜻 있는 길이라 기록한다.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 학생들 유골 1950년 6·25 사변 발발 후 전쟁이 한창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에 안기게 된 군대 갔던 아들들의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마음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부모님들은 거의 모두 돌아가시고 그 전사자의 형제들마저 노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전사자들의 형제들은 5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6·25 사변 때 전사한 동생이나 형의 무덤을 더 이상 관리하기가 어려워 자신들의 마음이 무겁다면서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길을 본 편찬위원회에 문의해 오는 것이었다. 육군본부 민원실에 알아보았던 바 이장(移葬) 양식(월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 게재)을 참고하여 대전 현충원까지 모시고 오면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첫 번째 6·25 전사 인천 학생 유골 이장 국방부 이장 양식에 따라 대전 현충원 문 앞까지 가기까지의 일은 유가족 입장에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어느 유가족이 국립묘지에 이장할 수 없는가 하는 물음이 있었다. 이에 본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원장은 국방부에 타진하여 이장 방법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에 자세히 게재한 바 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 있는 해병 6기 전사자 김우종의 묘를 2001년 5월 27일에 국립묘지로의 이장하는 첫 번째 이장 계획을 수립하였다.故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 고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18일 새벽에 김우종이 인천 영종도 집을 떠날 때 김우종 아버지는 “그 무거운 책은 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때 김우종은 “아버지 염려 마세요. 우리들은 남하하더라도 공부는 계속할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김우종은 영종 나루터까지 걸어가서,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 대원들과 같이 나룻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출정식을 마치고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가서, 해병대 신병 모집에 응하여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였다.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묘 이장1953년 가을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유골함을 받고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부친은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마을 뒷산(인천 영종도 중산리 월촌) 양지바른 곳에 묻으시고 해마다 아들을 기리는 제를 지내주셨다. 1998년 3월 29일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김우종 유가족의 협조하에 국방부와 대전 현충원 등에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이장하는 것에 대하여 승인을 받는 노력을 하였다. 2001년 5월 27일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묻혀 있는 김우종 전사자의 무덤을 열어 유골을 수습한 후 대전 국립 현충원 제1 묘역 제27구역 16129에 안치하였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의 이장 사업 계획 인천 학생·스승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기 위하여 창립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김우종 전사자와 같이 아직도 고향 땅에 묻혀 있는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기는 이장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11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인천중학교 4학년 김우종은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김우종을 기억합니다. 김우종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김우종이 공부했던 제물포 고교 운동장 한편에 김우종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6·25 참전사편찬위원장)이 사비 4억원을 들여서 6·25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관을 건립하여 인천 중구청에 기부채납하려는 제안을 인천 중구청은 거절하였다. 추모관 기부채납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현 85세)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참전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초대 관장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조선시대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를 보면 양주목(楊州牧)이 도성(都城)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에는 양주목과 함께 도성과 한성부에 속한 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그려 넣었다. 양주목과 한성부는 북쪽으로 연천과 마전, 동쪽으로 포천과 가평, 남쪽으로 광주와 과천, 서쪽으로 고양과 파주와 마주하고 있다.지도에서 읍치는 양주목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경기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남쪽이다. 지금 서울에서 옛 양주읍치에 가려면 의정부를 지나서도 한참을 달려야 한다. 그만큼 양주목이 관할하는 지역은 넓었다. 고양시 지축동 일대와 파주 광탄면, 구리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포천시의 일부, 서울시의 광진·노원·강북·도봉·성동·중랑·은평·성북구는 물론 종로구와 중구의 일부도 양주 땅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양주면(古楊州面)이다. ‘옛 양주’라는 뜻이니 과거 양주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서 고양주면은 망우면과 노원면 남쪽인 아차산 아래 한강변이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양주읍치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에 있었고, 1067년(고려 문종 21) 양주가 남경(南京)으로 승격하면서 북악산 아래로 옮겨 갔다는 연구도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의 ‘양주도호부’ 대목은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으로…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한산군으로 바꾸었다. 고려가 양주로 고쳤다’고 했다. 아차산 아래 한강은 오늘날 광진(廣津)으로 불리지만, 양진(楊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광주 땅인 남쪽은 광진, 양주 땅인 북쪽은 양진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양진에는 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양진당(楊津堂)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정종이 1399년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태종은 1404년 다시 서울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른다. 양주 땅이 수도가 된 만큼 읍치는 새로 물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1395년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이라 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때 옮긴 양주의 읍치가 오늘날의 고읍동(古邑洞)이다. 옛 읍치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옛 견주의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양주목은 1506년(중종 1) 치소를 유양동으로 옮겼다. 1922년 당시 양주군은 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했고, 2000년 지금의 양주시청 자리로 돌아갔다.양주는 큰 고을이었다.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유양동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바라보면 ‘교통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물류를 인력이 아니면 소와 말이 끄는 수레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은 달랐다. 양주 유양동은 임진강의 호로하에서 한강의 광진을 잇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 호로하 북쪽에는 고구려성인 호로고루, 남쪽에는 신라성인 칠중성이 있었다. 표주박 허리처럼 좁아진 물길이라는 뜻의 호로하는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하류다.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대부분 이 일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광진 일대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다. 호로하에서 임진강을 건넌 한반도 북부지방의 교통량은 다시 광나루에 모였고, 여기서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삼남지방의 물류는 당연히 역순으로 북부지방으로 올라갔다.그러니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당연히 양주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양주에는 별산대놀이와 소놀이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양주농악과 상여와 회다지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연희가 발달했다는 것은 물산이 풍부하고 돈이 도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다. 유양동 관아는 양주군이 의정부로 옮겨 갈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중심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은 것을 2000년부터 5차례 발굴조사를 벌였고, 지난달 동헌과 내아 복원을 마무리했다. 새 집 냄새가 물씬해 유서 깊은 유적이라는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기 시작하면 역사성도 차근차근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불곡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양주목 관아는 복원공사와 함께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됐다. 널찍한 주차장에 내리면 왼쪽에 제법 규모 있는 관아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탐방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정면의 비석거리다. 맨 앞에 있는 것이 ‘양주 관아지 유허비’다. 양주읍치가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다.그 옆으로 양주목사를 역임한 열여덟 분의 선정비와 불망비, 유방비, 추모비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유방이란 유방백세(流芳百世)를 줄인 말로 ‘명성을 후세에 길이 남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양주목사를 역임한 비석 주인공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백인걸(1497~1579)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에 스승을 잃고 을사사화에 파직됐으며 정미사화로 안변에 유배됐다. 학문에 뛰어나 파주 파산서원과 남평 봉산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정대년(1503~1578)은 ‘네 임금을 섬기며 아부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 차례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당대 명경(名卿)’으로 불리웠다. 무신 출신으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관여한 이완(1602~1674),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던 남용익(1628~1692), 제주목사 시절 ‘탐라순력도’를 남기고 ‘병와가곡집’으로 음악사에도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형상(1653~1733)도 양주목사를 지냈다. 양주목사란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다른 사람은 직함이 모두 ‘목사’지만 유일하게 ‘군수’인 사람이 홍태윤이다. 고종 시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주목이 양주군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 군수를 역임한 양주의 마지막 목민관이었다. 무인 출신으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여주까지 피신시켜 포천현감에 오른 인물이다. 홍태윤은 도성을 오가는 길목이었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쌍문2동주민센터 앞에도 선정비를 남겼다. 그런데 선정비는 1903년, 불망비는 1904년 세워졌으니 현직 양주군수 시절이다. 어쨌든 목민관으로는 선정을 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포천에도 선정비가 있다고 한다. 비석거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현대적 야외공연장은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다. 해마다 6월부터 9월까지 넷째 주 토요일에 상설공연을 했는데, 올해 일정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듯하다. 그 너머에는 양주향교가 있으니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5·18 38주년 함께 한 ‘푸른 눈의 목격자들’

    5·18 38주년 함께 한 ‘푸른 눈의 목격자들’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폭동의 도시’였고, 무법천지의 공간이었다. 국내 언론을 통해서만 소식을 접한 국민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주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신군부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다른 곳으로 알려지거나, 저항이 다른 도시로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고, 국내 언론을 통제했으며,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진실을 전하려던 이들이 있었고, 광주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알리는 데 ‘푸른 눈의 목격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18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8주년 기념식에는 계엄군 헬기 사격을 증언한 아놀드 피터슨 목사, 광주의 참상을 사진과 글로써 해외 언론에 기고해 알린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5·18의 참상과 진실을 가장 먼저 세계에 보도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등 광주를 알린 이들의 유가족이 자리를 함께 했다.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는 각각 남편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일을 기록해 직접 진실을 알리기도 했다. 이날 비가 내리는 날씨 속에서도 50분간 이어진 기념식 자리를 굳게 지켰다. 한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피터슨 여사와 헌틀리 여사는 애국가는 물론 ‘님을 위한 행진곡’도 시민과 함께 힘차게 불렀다.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는 한국어는 못 해도 ‘님을 위한 행진곡’의 일부 소절은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지난해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하고 타계한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는 이날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하며 기념사를 낭독했다. 헌틀리 여사는 기념사에서 “우리 부부는 광주에서 살았던 17년 동안 광주시민을 사랑했고, 배움을 얻었고, 경탄의 마음을 갖게 됐다. 특히 5·18 이후 그 마음은 더 커졌다. 제가 본 5월의 광주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인간애는 뜨거웠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38년째 아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이창현(당시 만 7세)군 아버지의 사연을 토대로 만든 기념공연을 지켜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망월도 5·18 옛 묘역으로 이동, 힌츠페터 추모비를 함께 참배했다. 힌츠페터 추모비 참배에는 영화 ‘택시운전사’ 속 만섭(송강호)의 실제 모델인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가 동행했다.브람슈테트 여사와 김승필씨는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 시사회가 열린 지난 15일 서울에서 만났다. 이날 역사의 현장인 광주에서 두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나란히 헌화하고 고인들을 기렸다. 브람슈테트 여사는 참배 뒤 “제 남편은 ‘내가 죽으면 5·18 때 희생됐던 대학생들 옆에 묻어달라’고 했다”면서 “이렇게 광주에 추모비라도 마련해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현장 행정] 용‘산’비어천가

    [현장 행정] 용‘산’비어천가

    “이봉창 의사는 용산 사람이에요. 일본 천왕을 죽이려다가 폭탄이 터지지 않아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어요.”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에서 진행하는 문화탐방프로그램 ‘용의 산을 찾아서’ 일일교사로 나서 이봉창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문화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용산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성 구청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 구청장은 “이봉창 의사는 효창동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효창공원에 묻혀 있다”면서 “여러분도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는 지난달부터 문화탐방 프로그램인 ‘용의 산을 찾아서’를 운영하고 있다. 오는 11월까지 50회에 걸쳐 지역 문화유적지 답사를 할 예정이다. 주민과 학생들에게 지역사를 제대로 알린다는 취지다. 연중 수시로 참가자를 모집하며 학생과 성인반으로 나눠 답사 일정을 맞춘다. 학급·모임별 단체 신청도 받는다. 탐방 코스는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 유관순 열사 추모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효창공원 의열사, 백범 김구 기념관, 이슬람 중앙사원, 남산성곽길 등이다. 코스는 참가 대상에 맞게 늘리거나 줄인다. 전문 해설사 설명을 들으며 장소의 역사적 의미와 맥락을 깨칠 수 있다. 올해 참가인원은 약 1000명으로 예상된다. 성 구청장은 “용산을 빼고서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 “용산 곳곳이 유적지고, 문화유산들이 있는데 이를 잘 발굴하고 갈무리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성 구청장은 민선 5기 시절인 2010년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2013년에는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2015년에는 이곳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했다. 2016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효창공원 의열사를 26년 만에 상시 개방했다. 구는 내년 이봉창 의사의 옛집이 있던 효창동 118 부근에 이봉창 의사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또 내후년에는 용산역 인근에 향토사 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성 구청장은 “용산에는 박물관만 11개이다. 앞으로 더 많은 박물관이 용산에 들어올 것”이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한글박물관과 연계해 용산을 ‘박물관 특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핵잼 라이프] 밀렵과 난개발에 결국… 미안해, 수컷 흰코뿔소야

    [핵잼 라이프] 밀렵과 난개발에 결국… 미안해, 수컷 흰코뿔소야

    지난달 19일(이하 현지시간)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최후의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을 추모하는 행사가 케냐에서 열렸다. 31일 케냐 울페제타 자연보호구역 측은 이날 오전 10시 수단의 추모비가 사람들의 애도 속에 구역 내 세워졌다고 밝혔다. 드넓은 초원 위 한 그루 나무 옆에 세워진 수단의 추모비에는 ‘수단’이라는 큼지막한 이름과 함께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라는 글귀가 새겨졌다.사육사 제임스 므웬다는 “수단은 코뿔소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전 세계에 심어 줬다”면서 “수단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또 마지막까지 수단의 터전이 됐던 케냐 울페제타 자연보호구역 측도 페이스북을 통해 “잘가 수단. 너는 전 세계적으로 코뿔소 종의 고통을 알린 큰 일을 해냈다. 이제 코뿔소가 지구상에서 번성하게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추모했다. 4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수단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수컷 북부흰코뿔소로 큰 관심을 받았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등 관계 기관은 북부흰코뿔소를 ‘멸종 위급’ 동물로 지정하고 유도만능줄기세포(iPSc)와 시험관 시술 등 첨단 기술로 종 보존에 나섰었다. 케냐 정부 역시 수단을 보호하기 위해 24시간 경비를 강화하고 수의사를 대기시키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이제 지구상에 남은 북부흰코뿔소는 수단의 딸과 손녀인 나진과 파투뿐이다. 종 보존을 위해 과학자들이 인공 수정을 계획 중이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아 사실상 가문의 멸종을 눈앞에 두게 됐다. 북부흰코뿔소의 멸종 위기는 인간 탓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서식지 훼손과 밀렵으로 종이 급감한 것이다. 특히 코뿔소의 뿔은 중간 상인을 거쳐 중국과 베트남 등으로 밀매되는데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고가에 거래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최후의 수컷 북부 흰코뿔소 수단…추모비 세워지다

    최후의 수컷 북부 흰코뿔소 수단…추모비 세워지다

    지난달 19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최후의 수컷 북부 흰코뿔소 수단을 추모하는 행사가 케냐에서 열렸다. 지난달 31일 케냐 울페제타 자연보호구역 측은 이날 오전 10시 수단의 추모비가 사람들의 안타까움 속에 구역 내 세워졌다고 밝혔다. 드넓은 초원 위 한 그루 나무 옆에 세워진 수단의 추모비에는 '수단'(Sudan)이라는 큼지막한 이름과 함께 '마지막 수컷 북부 흰코뿔소'(The last male northern white rhino)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수단의 사육을 책임졌던 제임스 므웬다는 "수단은 전세계의 코뿔소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줬다"면서 "수단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또 마지막까지 수단의 터전이 됐던 케냐 울페제타 자연보호구역 측도 페이스북을 통해 "잘가 수단. 너는 전세계적으로 코뿔소 종의 고통을 알린 큰 일을 해냈다. 이제 코뿔소가 지구상에서 번성하게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며 추모했다. 45세 나이로 안락사된 수단은 그간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수컷 북부 흰코뿔소로 큰 관심을 받아왔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등 관계 기관은 북부흰코뿔소를 ‘멸종 위급’ 동물로 지정하고 유도만능줄기세포(iPSc)와 시험관 시술 기술 등 첨단 기술로 무장한 생물학자들을 투입해 종 보존에 나섰었다. 케냐 정부 역시 수단을 보호하기 위해 24시간 경비를 강화하고 수의사를 대기시키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이제 남은 북부 흰코뿔소는 수단의 딸과 손녀인 나진과 파투 뿐이다. 종의 보존을 위해 과학자들은 인공 수정을 계획 중이지만 이마저도 쉽지않아 사실상 멸종을 눈 앞에 두게됐다. 북부흰코뿔소의 멸종위기는 물론 인간 탓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서식지 훼손과 밀렵으로 종이 급감한 것. 특히 코뿔소의 뿔은 중간상인을 거쳐 중국과 베트남등으로 밀매되는데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고가에 거래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수원시, 성추문 고은 시인 ‘흔적’ 모두 지운다

    수원시, 성추문 고은 시인 ‘흔적’ 모두 지운다

    경기 수원시가 후배 문인들을 성희롱·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는 고은 시인의 ‘흔적 지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안성에 사는 고은 시인을 ‘삼고초려’ 끝에 수원 광교산 자락에 주택을 마련해 이주시키면서까지 극진한 대접을 해오다 최근 불거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가해자로 고은 시인이 지목되자 그와 관련된 정책과 시설물을 없애고 나선 것이다. 8일 수원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 7일 오전 지동 벽화골목 담벽에 고은 시인이 쓴 ’지동에 오면‘이라는 시(詩) 를 지웠다. 벽화골목은 2013년 10월 고은 시인을 포함해 수원에 거주하는 시인 임병호·김우영씨, 아동문학가 윤수천씨, 시조시인 유선·정수자씨 등 30여명이 모여 자작시를 직접 골목길 담벽에 쓰며 붙여진 이름이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지동이 아름답고 밝은 마을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당시 고은 시인은 지동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와 갤러리, 벽화골목을 둘러보고 현장에서 직접 창작한 시 ’지동에 오면‘을 골목길 벽면에 자필로 썼다. 시는 앞서 지난달 28일 권선구 권선동 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설치돼 있던 고은 시인의 추모 시비(가로 50㎝·세로 70㎝)를 철거했다. 이 추모 시비는 고은 시인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해 쓴 시(‘꽃봉오리채’)를 새긴 것이다. 수원지역 시민·사회·종교단체로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현 수원평화나비)가 시민성금으로 소녀상을 만들어 2014년 5월 제막하기에 앞서 고은 시인에게 요청하자 고은 시인이 추모시를 써 헌납했다. 그러나 최근 고은 시인의 성추문이 불거지면서 수원지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철거여론이 커졌고, 결국 수원평화나비가 성추행 논란에 선 시인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수원시에 철거를 요청했다. 수원평화나비와 수원시는 시민 의견을 모아 고은 시인의 추모비 자리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한 다른 시설물을 설치할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수원시는 고은 시인의 추모비를 철거하던 당일 팔달구 장안동 일대 시유지 6000㎡에 추진하던 ‘고은문학관’ 건립사업의 철회도 발표했다.또 올해 고은 시인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각종 문학행사도 모두 취소했다. 수원시는 앞선 지난달 18일 고은 시인이 5년 가까이 거주해온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광교산 자락의 주거 및 창작공간(문화향수의 집)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옮기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고은 시인이 2013년 10월 수원 지동 벽화마을에 방문해 지동 주민에게 헌정하면서 친필로 벽화에 쓴 시(‘지동에 오면’)도 지워질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성추문 사태 이후 지동주민들이 고은 시인이 쓴 시를 벽화에서 지워달라는 요구해왔다”면서 “오늘 오후 수원지역 문학작가와 주민들이 벽화에 쓴 시를 지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원시 뿐 아니라 수원에 연고를 둔 프로야구구단 케이티 위즈도 고은 시인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다. 케이티 위즈는 고은 시인이 지난해 9월 27일 경기도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 시구자로 나서면서 헌정한 창작시로 만든 캐치프레이즈를 폐기했다. ‘허공이 소리친다 온몸으로 가자’라고 외치는 짧은 시다. kt는 지난 1월 이 시를 2018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선정했다고 발표했으나 고은 시인에 관한 미투 폭로가 나오자 이달 초 폐기를 결정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수원시, 성추문 고은 시인 ‘흔적’ 모두 지운다

    수원시, 성추문 고은 시인 ‘흔적’ 모두 지운다

    경기 수원시가 후배 문인들을 성희롱·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는 고은 시인의 ‘흔적 지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안성에 사는 고은 시인을 ‘삼고초려’ 끝에 수원 광교산 자락에 주택을 마련해 이주시키면서까지 극진한 대접을 해오다 최근 불거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가해자로 고은 시인이 지목되자 그와 관련된 정책과 시설물을 없애고 나선 것이다. 7일 수원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달 28일 권선구 권선동 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설치돼 있던 고은 시인의 추모 시비(가로 50㎝·세로 70㎝)를 철거했다. 이 추모 시비는 고은 시인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해 쓴 시(‘꽃봉오리채’)를 새긴 것이다. 수원지역 시민·사회·종교단체로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현 수원평화나비)가 시민성금으로 소녀상을 만들어 2014년 5월 제막하기에 앞서 고은 시인에게 요청하자 고은 시인이 추모시를 써 헌납했다. 그러나 최근 고은 시인의 성추문이 불거지면서 수원지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철거여론이 커졌고, 결국 수원평화나비가 성추행 논란에 선 시인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수원시에 철거를 요청했다. 수원평화나비 관계자는 “고은 시인이 문학적으로 훌륭한 분이어서 추모시를 헌납했을 때는 무척 기뻤고, 감사했다”면서 “그러나 최근 그런 사실(성추행 의혹)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평화나비와 수원시는 시민 의견을 모아 고은 시인의 추모비 자리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한 다른 시설물을 설치할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수원시는 고은 시인의 추모비를 철거하던 당일 팔달구 장안동 일대 시유지 6000㎡에 추진하던 ‘고은문학관’ 건립사업의 철회도 발표했다.또 올해 고은 시인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각종 문학행사도 모두 취소했다. 수원시는 앞선 지난달 18일 고은 시인이 5년 가까이 거주해온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광교산 자락의 주거 및 창작공간(문화향수의 집)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옮기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고은 시인이 2013년 10월 수원 지동 벽화마을에 방문해 지동 주민에게 헌정하면서 친필로 벽화에 쓴 시(‘지동에 오면’)도 지워질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성추문 사태 이후 지동주민들이 고은 시인이 쓴 시를 벽화에서 지워달라는 요구해왔다”면서 “오늘 오후 수원지역 문학작가와 주민들이 벽화에 쓴 시를 지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원시 뿐 아니라 수원에 연고를 둔 프로야구구단 케이티 위즈도 고은 시인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다. 케이티 위즈는 고은 시인이 지난해 9월 27일 경기도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 시구자로 나서면서 헌정한 창작시로 만든 캐치프레이즈를 폐기했다. ‘허공이 소리친다 온몸으로 가자’라고 외치는 짧은 시다. kt는 지난 1월 이 시를 2018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선정했다고 발표했으나 고은 시인에 관한 미투 폭로가 나오자 이달 초 폐기를 결정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커버스토리] 소록도, 아픔 품은 100년史… 희망 품는 200년史

    [커버스토리] 소록도, 아픔 품은 100년史… 희망 품는 200년史

    한 세기 가까이 격리·억압의 공간… 섬 전체가 병원… 2009년 소록대교로 삶의 모습 변화… 한센인 511명 평균 나이 75.5세지난 16일 국립 소록도병원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100년의 성찰’이 발간됐다. 개원 100주년(2016년)에 내지 못하고 두 해를 넘겼다.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서였을까. 이유를 듣고자 소록도를 찾았다. 지난 19일 찾은 섬은 아무 일 없었단 듯 조용했다. 서울 서초구 호남선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5시간 걸려 전남 고흥 녹동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뒤 차로 15분 정도 이동했다. 이곳은 섬 전체가 병원이다. 예전엔 한센인과 직원들만 오갈 수 있었다. 지금은 소록도 중앙공원과 한센병박물관 정도를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 자원봉사자들에 한해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까지 허용한다. 한센병박물관은 병원 본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2016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이곳에선 아직 새 건물의 냄새가 났다. 이곳에서 조명래 학예사에게 대뜸 “(책 발간이) 왜 늦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더 잘하려다 보니 그랬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한센인에 대한 학살 ‘84인 학살사건’ 한 세기 가깝도록 소록도는 격리와 억압의 공간이었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84인 학살사건’도 그중 하나다. 1945년 해방 직후 치안공백 상태에서 병원 내부 갈등이 직원과 한센인 갈등으로 번졌다. 당시 병원 직원들은 자신들이 끌어들인 외부 치안대와 함께 한센인 84명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나중에 밝혀진 희생자까지 공식 사망자만 85명이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반년 정도가 지나서다. 진상조사가 이뤄졌지만 직원들을 면직하는 데 그쳤다. 제대로 된 피해보상은 없었다. 2002년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시작됐다. 이들이 묻혔던 자리에 ‘애한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에야 이 사건을 직원들에 의한 한센인 학살사건으로 규정했다. 관련 피해보상법은 2007년 마련됐다. 한센인들의 인권보상 이야기는 1996년도에 편찬된 ‘소록도 80년사’에는 담기 어려웠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소록도가 우리 사회를 향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0년사 편찬에서는 이런 부분이 강조됐다.소록도로 들어가는 첫 관문 ‘소록대교’는 10년 전만 해도 어색한 풍경이었다. 2009년 소록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했다. 배가 운행하는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격리의 상징인 소록도에 연륙교가 놓인 것은 여느 다리가 갖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원래 이곳은 한 번 들어오면 죽어서밖에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젠 누구나 자유로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다. 박물관 소속으로 이번 100년사 편찬 작업을 한 강의원 소록도병원 주무관은 소록대교를 이곳의 가장 큰 변화라고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록도는 한센인들만의 공간이었습니다. 소설 제목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말처럼요. 다리가 놓이고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향해 열리게 됐달까요.”●한센인들을 괴롭히는 건 한센병이 아닌 ‘세월’ 한센인들은 ‘본병객병’이라는 말을 쓴다. 본병(本病)은 한센병을 뜻하고 객병(客病)은 그 이외의 병을 뜻한다. 현재 소록도에서 본병을 앓는 환자는 극히 드물다. 1982년 도입된 병형별 다제요법(MDT)으로 한센병은 거의 종결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높은 완치율을 보였다. 소록도에 가장 환자가 많았을 땐 6254명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달 기준 소록도병원에 등록된 한센인은 511명이며 이 중에서 활동성 한센병 환자는 한 명도 없다. 신체변형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으로 노환을 앓는 한센인이 대부분이다. 소록도병원 환자 평균연령은 75.5세다. 이제 한센인들을 괴롭히는 건 본병이 아닌 객병과 세월이다. 소록도에선 환자가 환자를 돌봤다. 환자가 5000~6000명에 이를 때에도 이들을 치료할 의사는 10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의료인력이 부족했다. 한센인 중에는 “소록도에 수십년 살았는데 의사선생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이도 있다. 1949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녹산의학강습소’는 시험을 통해 우수한 환자를 선발해 2~3년 동안 기초 의학지식을 가르쳐 의료조무원으로 양성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소록도에선 이들이 의사 역할을 도맡았다. 1952년 1기 졸업생 16명이 배출됐고 1971년 7기 졸업생은 45명이었다. 여기서 의학을 배운 뒤 섬을 나가 더 공부해서 실제로 의사가 된 사람도 있다. 의학강습소는 당시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커다란 배움의 기회였던 셈이다.●“소록도엔 아이가 없고 무덤이 없다” “소록도엔 두 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아이와 무덤이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오해로 소록도에선 오랜 시간 정관·낙태수술이 자행됐다. 이 때문에 어린아이가 없다. 또 오랜 섬 생활로 육지 가족과 인연이 끊겨 이곳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해 줄 무덤이 없다.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한 한센인 유골은 본관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만령당’으로 간다. 이곳에 안치된 유골은 10년이 지나면 만령당 뒤에 있는 봉분에 합장한다. 매년 10월 넷째 주 목요일에 합동 추도식이 열린다. 조 학예사는 이곳을 소록도에서 가장 뜻깊은 장소로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소록도병원엔 입원하는 사람만 있습니다. 퇴원은 어쩌면 불가능하죠. 한센인은 죽음으로써 이 섬을 떠납니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기에, 우리가 기억해 드려야 하는 거죠.” 섬 전체가 병원인 소록도에서 병원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원장이 펴는 정책에 따라 생활양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소록도 역사는 원장들의 역사”라는 말까지 나온다. 해방 이후 최초 한국인 병원장이었던 김형태 전 원장은 억압 일색이었던 소록도 분위기를 확 바꿨다. 이때부터 주민자치회가 결성됐으며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를 나누던 철조망이 사라졌다. 차기 원장 때 부활하지만, 이때 한센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던 단종수술도 폐지했다. 정관·임신중절수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건 1990년대 이후다. 김 전 원장 시기 소록도에선 일제의 관리체계가 무너졌으며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과 함께 현역 군의관 조창원 대령이 제14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소록도를 배경으로 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나오는 조백헌 대령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한센병이 다 나은 환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을 계획했다. 이 사업으로 조성된 330만평의 농토에서 경작하며 살 수 있을 거라 한센인들은 기대했다. 삽·괭이 같은 원시적 도구에 한 달 30원이라는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한센인들은 공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인근 고흥 주민들의 사업 반대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1964년 7월 사업권이 전남도로 이관됐다. 이에 따라 한센인들의 꿈도 같이 좌절됐다. 공사에 참여했던 한센인들은 6개월간 밀린 임금도 받지 못했다. 소록도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그냥 사랑하는 사이’ 원진아♥이준호, 애틋+설렘 선사하는 ‘단짠 로맨스’

    ‘그냥 사랑하는 사이’ 원진아♥이준호, 애틋+설렘 선사하는 ‘단짠 로맨스’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와 원진아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흔적을 껴안은 ‘단짠 로맨스’로 애틋함과 설렘을 동시에 선사했다.지난 1일 방송된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가까워진 강두(이준호 분)와 문수(원진아 분)의 일상을 담아내며 설렘을 자극했다. 그러나 강두와 문수의 일상에는 사고가 남긴 아픔도 여전히 존재했다. 이날 방송에서 강두와 문수는 감춰두었던 상처까지 털어놓으며 마지막 벽까지 허물었다. 문수가 먼저 추모비에 동생 이름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강두 역시 자신도 유가족임을 고백했다. 유가족 명단을 살피며 강두가 홀로 견뎠을 아픔과 깊이를 짐작하던 문수는 강두의 여인숙으로 찾아갔다.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듯 강두는 문수를 만나기 위해 산호장으로 향한 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로울 때 보고 싶은 사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이가 됐다. 완진(박희본 분)의 집에서 진영(김민규 분)과 실랑이를 벌이다 쓰러진 문수가 정신을 잃자 놀란 강두는 문수를 감싸 안고 다급하게 응급차를 요청했다. 완진은 “전에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날아간 적이 있다”며 정신이 든 문수에게 기억이 온전한지 확인했다. 사고 당시 강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하지만 여인숙 옥상에서 고기파티를 하던 문수는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불리는 축구 경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 들은 강두는 깜짝 놀랐다. 사고 현장에 함께 갇혔을 때 강두가 해준 이야기였던 것. 과거를 회상하던 강두는 “기적 같은 소리 하네”라고 비웃는 다시 시작된 환청에 고통스러워했다. 계단에서 홀로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있던 강두를 발견한 문수는 심상치 않은 상태에 걱정스러워했다. 강두는 절절한 눈빛으로 “넌 괜찮아?”라고 물으며 문수를 끌어안아 애틋한 엔딩을 장식했다. 강두와 문수의 달달한 핑크빛 무드는 시청자들의 설렘 지수를 높였다. 함께 있을 때 두 사람은 사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을 깨달아가는 평범한 청춘이었다. 그냥 문득 보고 싶어져 집 앞으로 찾아가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밥을 먹었냐는 의미 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강두가 다쳤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여인숙으로 달려간 문수가 “놀랐잖아. 내일까지 다 나아서 와”라고 화를 내도 강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문수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재영(김혜준 분)이 강두의 친동생임을 안 문수 역시 슬며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설렘을 자아냈다. 강두와 문수에게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관심과 애정의 척도를 알 수 있는 사소한 행동조차 설렘으로 다가갔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사고의 상처를 담담히 어루만졌다.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강두와 문수는 이제는 산산 조각난 축구선수라는 꿈과 동생 연수를 내심 미워했던 미안한 속내를 밝힐 수 있었다. 속에 감춰두기만 했던 죄책감, 아쉬움, 미안함과 후회를 편하게 나누며 “아깝다. 아까워”라고 털어내는 강두와 문수의 대화가 평범하지만 안쓰러웠던 이유다. 하지만 사고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있다. 강두는 지독한 환청으로 괴로워했다. 문수의 기억 속에 강두와의 추억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강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강두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할멈(나문희 분)의 비밀도 밝혀졌다. 검사 결과 뇌종양이었다. 재영은 수술을 권했지만 할멈은 이를 거부하며 강두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당부해 불안감이 가중됐다. 한편, 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2일 오후 11시에 방송된다. 사진제공=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원진아♥이준호 ‘그냥 사랑하는 사이’ 초밀착 심쿵 백허그 포착

    원진아♥이준호 ‘그냥 사랑하는 사이’ 초밀착 심쿵 백허그 포착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와 원진아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며 설렘 지수를 높인다. 첫 방송부터 시청자들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하며 호평을 이끌어낸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연출 김진원, 극본 유보라, 제작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 이하 ‘그사이’) 측은 12일 이준호와 원진아의 초밀착 백허그 사진을 공개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11일 첫 방송된 ‘그사이’는 기대에 부응하는 디테일 다른 감성 멜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믿고 보는’ 김진원 감독과 유보라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온기를 전했고, 설명이 필요 없는 연기 고수들의 내공이 곳곳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드라마에 안정감을 선사했다. 드라마의 감성을 살리는 영상과 음악은 시청자들의 감정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캐릭터에 녹아든 이준호, 원진아의 안정적이고 섬세한 연기가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며 앞으로 보여줄 두 사람의 연기에 기대감을 끌어 올렸다. ‘그사이’ 첫 회에서는 쇼핑몰 붕괴 사고에서 살아남은 강두(이준호 분)와 문수(원진아 분)의 담담한 일상이 그려졌다. 강두는 붕괴 사고 후유증으로 진통제를 달고 살며 거친 뒷골목에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청춘이었고, 문수는 동생 연수를 잃은 충격으로 술에 빠져 살아가는 엄마 윤옥(윤유선 분)을 싹싹하게 챙기며 씩씩한 일상을 살아갔다. 접점이 없어 보이던 강두와 문수였지만, 빗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골목에 쓰러진 강두를 문수가 구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 그런 가운데 공개된 사진은 한층 가까워진 강두와 문수의 모습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횡단보도 앞에서 문수의 어깨를 잡아 끈 강두는 작은 체구의 문수를 품안에 안고 백허그를 하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로 앞을 응시하며 거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강두와 갑작스러운 강두의 스킨십에 놀람과 떨림을 담은 문수의 눈빛이 대비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과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장면은 문수를 위험에서 구하는 강두의 모습을 담았다. 강두는 빗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알기 위해 문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국수집을 찾고, 그 앞 횡단보도에서 문수와 재회를 한 것. 강두는 청유건설이 쇼핑몰 붕괴 부지에 바이오 타운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리(윤세아 분)에게 부탁해 일자리를 구했다. 문수는 건축 설계의 부실을 꼼꼼하게 지적한 덕분에 서주원(이기우 분)과 함께 일을 하게 된 상황. 서주원의 건축 사무소가 청유 건설의 바이오타운 설계를 맡게 되면서 마치 사고 현장이 두 사람을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강두와 문수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사이’ 제작진은 “첫 회에서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강두와 문수의 일상이 각각 그려졌다면, 오늘(12일) 방송되는 2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강두와 문수의 운명적 이끌림이 시작되는 만큼 두 사람의 풋풋한 케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사이’는 첫 회부터 결이 다른 감성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웰메이드 멜로의 탄생을 알렸다. 쇼핑몰 붕괴 사고에서 살아남은 강두와 문수가 운명처럼 그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예정. 추모비를 내리치는 강두와 건축 모형을 부수는 문수의 모습에서 1회가 엔딩을 맞은 만큼,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남녀가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게 될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 2회는 오늘(12일) 밤 11시 JTBC에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X원진아, 운명적 빗속 만남 ‘탄탄 연기력+풋풋 케미’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X원진아, 운명적 빗속 만남 ‘탄탄 연기력+풋풋 케미’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와 원진아가 운명적인 빗속 만남으로 올겨울 시청자를 사로잡을 멜로 커플의 탄생을 알렸다. 첫 회 시청률 역시 수도권 유료가구 기준 (AGB 닐슨) 2.6%를 기록, 산뜻한 출발을 알리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11일 첫 방송된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연출 김진원, 극본 유보라, 제작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 / 이하 ‘그사이’)의 이준호와 원진아가 짧지만 강렬한 만남으로 설렘을 자극, 시청자들을 짙은 감성 멜로에 빠져들게 했다. 이날 방송에서 거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뒷골목 청춘 강두(이준호 분)는 물류센터에서 밀린 임금을 받으려다 일자리까지 잃게 됐다. 술집을 지나다 물류센터 관리를 만난 강두는 분한 마음에 괜한 시비를 걸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문수(원진아 분)는 붕괴 사고에서 사망한 동생 연수의 생일을 맞아 아버지 동철(안내상 분)의 국수 가게를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 빗속에서 쓰러져 있는 강두를 발견했다. 그렇게 같은 붕괴 사고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며 깊은 인연의 시작을 알렸다. 신선하고 파격적인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준호와 원진아는 첫 회부터 섬세하면서도 안정적인 연기로 제작진의 믿음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이날 방송에서는 붕괴 사고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강두와 문수의 삶을 차분한 시선으로 조명했다. 세상과 부딪히며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는 강두와 상처와 아픔을 꾹꾹 눌러 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문수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이준호와 원진아의 연기에 힘입어 감정의 한구석을 예민하게 찔렀다. 얼굴 가득한 상처처럼 굴곡진 인생을 공허한 듯 단단한 눈빛으로 표현한 이준호와 중저음의 보이스처럼 무게감이 느껴지는 안정적인 연기로 문수에게 녹아든 원진아의 연기가 몰입감을 선사했다. 두 사람이 첫 주연작에서 인생캐릭터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탄탄한 연기력 위로 더해진 아슬아슬하면서도 풋풋한 케미는 두 사람이 보여줄 멜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쓰러진 강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문수와 그런 문수의 팔목을 낚아챈 강두의 눈빛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 뜨겁고도 강렬한 눈빛의 마주침은 긴장감과 동시에 설렘을 자극했다. 거칠 것 없이 살아가지만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문수를 바라보는 강두와 온 몸을 떨면서도 쓰러진 강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문수의 말간 눈망울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찰나의 눈 맞춤만으로 팽팽한 텐션을 만들어낼 정도로 흡인력을 가진 이준호와 원진아의 존재감이 앞으로 어떤 폭발력을 발휘하게 될지 벌써 기대가 뜨겁다. 기대 이상의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어간 이준호와 원진아를 향한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첫 회 방송 이후 “이준호, 원진아는 그냥 강두, 문수 그 자체였다”, “120대1 경쟁률 뚫을 만했다. 원진아라는 배우를 발견하게 해준 드라마”, “이준호 눈빛에서도 거칠고 날 것 인생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원진아의 유니크한 매력에 빠져들었네”, “이준호, 원진아의 케미가 본격적으로 그려지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등 반응을 보였다. 한편, ‘그사이’는 첫 회부터 결이 다른 감성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완성도 높은 멜로의 탄생을 알렸다. 쇼핑몰 붕괴 사고에서 살아남은 강두와 문수가 운명처럼 붕괴 부지에 세워지는 바이오타운을 중심으로 만나게 될 예정. 추모비를 내리치는 강두와 건축 모형을 부수는 문수의 모습에서 1회가 엔딩을 맞은 만큼,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남녀가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게 될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 2회는 오늘(12일) 밤 11시 JTBC에서 방송된다. 사진=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 캡처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 이글거리는 눈빛 포착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 이글거리는 눈빛 포착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이준호가 첫 회부터 강렬한 에너지와 반항미 가득한 카리스마로 시선을 압도한다.JTBC 새 월화드라마의 포문을 여는 작품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냥 사랑하는 사이’ 측은 11일 첫 방송을 앞두고 이준호의 강렬한 모습이 담긴 스틸컷을 공개해 그가 선보일 선 굵은 연기 변신에 기대감을 한층 끌어 올린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거칠지만 단단한 뒷골목 청춘 강두(이준호 분)와 상처를 숨긴 채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건축모형제작자 문수(원진아 분), 인생을 뒤흔든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남녀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걷잡을 수 없는 이끌림으로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강두와 문수의 치열한 사랑이 시청자들에게 따뜻하고 가슴 먹먹한 울림을 선사할 전망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의 김진원 감독과 ‘비밀’의 유보라 작가가 의기투합해 감정선 짙은 감성 멜로의 탄생을 예고한다. 연기 변신을 선보일 이준호와 12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멜로 원석 원진아의 파격적이고 신선한 캐스팅은 ‘믿고 보는’ 제작진의 선구안을 입증할 탁월한 선택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공개된 사진 속 이준호는 강렬한 이미지로 화면 가득 존재감을 발산한다. 사진 속 거칠지만 그 안에 상처와 분노로 일렁이는 깊은 눈빛이 그가 첫 주연작에서 보여줄 선 굵은 연기 변신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허허벌판인 공사장 한 가운데에 놓인 추모비를 내려치는 이준호의 온 몸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항적이면서도 쓸쓸함과 슬픔이 묻어나오는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아우라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뒷골목 청춘 강두에 완벽 동화된 모습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당 장면은 과거 쇼핑몰 붕괴사고가 있었던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된 강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를 발견한 강두가 이를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어 궁금증을 유발한다. 강두와 문수, 주원(이기우 분) 등 주요 인물들이 인연을 맺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순간이자 세상을 향한 강두의 울분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첫 회부터 뜨거운 에너지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하며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제작진은 “캐릭터와 작품에 대한 이준호의 몰입감이 대단하다. 첫 회부터 그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했다. 한편, JTBC 새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이날 오후 11시 JTBC에서 첫 방송된다. 사진제공=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허기회 서울시의원, 정읍 6.25 참전 무명용사 묘역서 합동위령제 봉행

    허기회 서울시의원, 정읍 6.25 참전 무명용사 묘역서 합동위령제 봉행

    서울시의회 허기회 의원(더불어민주당, 관악3)은 13일 전북 정읍에서 6·25 참전 무명용사 묘역에 방문해 48번째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이 합동위령제는 6·25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에 잔류한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토벌작전에 참전한 학도병 150여명이 전북 정읍 하매마을 앞산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화력부족으로 전원이 장렬하게 산화한 호국용사를 위무하는 행사이다. 허 의원은 선친의 뜻에 따라 6·25 전쟁당시 신원불명의 참전용사 희생을 기리는 무명용사 위령제를 가족행사로 지속하며, 마을 주민들과 함께 현재까지 묘역을 정비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40여년 넘게 지내고 있다. 이날 위령제에는 김생기 정읍시장, 유진섭 정읍시의장, 보훈단체회원 및 군인, 지역시민과 학생, 관악구 6.25 참전용사 및 관악주민 등 약 500여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허 의원의 선친은 당시 150여명의 시신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46위를 마을주민과 함께 안장, 개인위령제를 지내다가 묘역정비의 필요성을 건의하여 1987년 10월 정읍군에서 묘역주변정비 및 추모비를 건립했고, 1992년 11월 본인소유 토지 193㎡를 기증했으며 자손들이 관리해 오고 있다. 한편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지역 최연소로 구의회에 진출했고, 현재 제9대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허기회 의원은 “선친의 깊은 뜻으로 호국용사를 기리는 가풍을 이어 받게 되어 자랑스럽다”며 “앞으로의 후손들에게도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잊지 말고 나라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울릉경비대장 추모비 제막

    울릉경비대장 추모비 제막

    울릉경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숨진 고 조영찬 총경 추모비가 세워졌다.경북지방경찰청 관계자는 29일 “최근 울릉읍 사동리 울릉경비대 연경장에서 조 총경의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제막식에는 박화진 경북지방경찰청장, 최수일 울릉군수, 정성환 울릉군의회 의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조 총경은 지난해 10월 12일 울릉경비대장으로 부임한 10일 뒤인 22일 오후 1시 30분쯤 성인봉에 간다며 울릉읍에 있는 울릉경비대를 나가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그는 실종 8일 만에 등산로에서 50여m 아래 낭떠러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인사혁신처는 조 총경이 업무연장으로 정찰 중 변을 당한 것으로 판단해 경정에서 총경으로 1계급 특진 추서했고, 사고 170여일 만인 지난 4월 순직 인정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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