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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헌화하는 北 김정은 위원장

    [포토] 헌화하는 北 김정은 위원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전쟁영웅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 2차 북미정상회담과 베트남 공식친선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날 귀국길에 올랐다. AP 연합뉴스
  • 안산에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

    정부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경기 안산시에 ‘4·16 생명안전공원’(가칭)을 건립한다. 정부는 최근 ‘4·16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희생자 추모위원회’ 의결을 통해 안산시 추모시설 건립 기본방향을 확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추모 시설은 경기 안산시 초지동 화랑유원지 남쪽 2만 3000㎡ 규모에 추모공원, 추모기념관, 추모비 등으로 구성된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민 친화적 휴식공간과 생명과 안전 존중을 일깨우는 문화공원의 콘셉트로 조성된다. 정부는 오는 6월까지 추모시설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내년 중 디자인 공모·설계를 거쳐 2021년 1월 착공할 계획이다. 한편 정부는 위원회 의결을 통해 국가 재정지원 대상 재단으로 ‘4·16재단’을 선정했다. 4·16재단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와 피해자 지원, 안전문화 확산 등을 목표로 지난해 7월 설립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재단은 사업 수행에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향후 추모시설 위탁운영 등도 맡는다. 정부 관계자는 “재단과 공원 설립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민간사업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여기는 남미] 마약황제 에스코바르의 초호화 자택, 결국 폭파

    [여기는 남미] 마약황제 에스코바르의 초호화 자택, 결국 폭파

    전설의 콜롬비아 '마약황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자택이 결국 철거된다. 콜롬비아 정부가 22일(현지시간) 에스코바르의 자택을 폭파할 예정이라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건물이 철거되면 이 자리엔 마약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진다. 에스코바르의 자택은 콜롬비아 메데진의 최고급 동네인 엘포블라도에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에스코바르가 5000제곱미터의 땅을 사들여 1986년 완공한 8층 건물이다. 마약황제의 자택답게 겉에서 보면 건물은 투박한 요새를 방불케 한다. 튼튼한 콘크리트로 지어져 웬만한 공격은 너끈히 견딜 것처럼 보인다. 내부는 초특급 호화판이다. 각종 편의시설과 박물관, 초대형 차고, 긴급 상황 발생 시 탈출할 수 있는 비밀통로까지 갖추고 있다. 박물관엔 에스코바르가 사들인 고가의 예술품, 차고엔 고급 수입차가 가득했다. 하지만 건물은 마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같았다. 메데진을 장악하고 승승장구하는 에스코바르의 마약카르텔을 곱지 않게 보고 있던 칼리의 마약카르텔이 선전포고를 하면서다. 칼리 카르텔은 1988년 건물에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건물 입구에서 폭발한 폭발물은 무려 80kg. 폭발지점으로부터 4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의 유리창이 모두 깨질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었지만 에스코바르의 자택은 끄떡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콜롬비아에선 양대 마약카르텔 간에 무자비한 전쟁이 시작됐다. 양대 마약카르텔은 주로 폭탄테러를 주고받았다. 1989년 10~12월까지 불과 3개월 동안 메데진과 칼리에선 100여 건의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마약카르텔 전쟁은 장장 5년간 지속됐다. 1993년 에스코바르가 사살되기까지 양대 마약카르텔은 서로 폭탄테러를 자행하며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을 포함해 5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에스코바르의 죽음으로 그의 마약카르텔이 몰락하면서 건물은 여러 번 손바뀜을 거쳤다. 하지만 마약투어가 유행하면서 건물은 일종의 성지가 됐다. 콜롬비아 정부는 "마약전쟁 희생자에 대한 모욕"이라며 고민 끝에 건물을 폭파-철거하기로 했다. 사진=자료사진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현대아산 “금강산관광 재개, 북·미회담에 달려”

    “금강산관광 재개 가능성은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북한 금강산을 방문했다 지난 9일 돌아온 현대아산 배국환 사장의 설명이다. 배 사장은 이날 오후 강원도 고성 동해선출입사무소를 통해 귀환하면서 관광 재개 가능성에 대해 “북측이나 우리 모두 기대가 크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북측과의 추가 접촉 계획과 관련해서도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본 이후에 필요하면 진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배 사장은 또 금강산 현지의 관광 시설물 현황에 대해 “관광 노정 등 기본 시설들은 비교적 양호하지만 10년 이상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시설물들은 개·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대아산은 창립 20주년(2월 5일)을 맞아 지난 8일 북한 금강산에 있는 정몽헌 회장 추모비 앞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 뒤 이날 배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금강산 구룡연 코스도 시찰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세이프 코리아 리포트-화재, 불감증에서 탈출하라] “수면제 없인 힘든 일상…그 고통 보고도 어찌 비상구 막나요”

    [세이프 코리아 리포트-화재, 불감증에서 탈출하라] “수면제 없인 힘든 일상…그 고통 보고도 어찌 비상구 막나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가주세요. 기자님 보면 그날 생각이 나서 다들 힘들어해요.” 충북 제천 복합건물화재 유가족 총회가 열린 2018년 11월 4일. 제천시청 한 회의실에 모인 유가족들을 만났다. 참사 1주기(2017년 12월 21일)를 코앞에 두고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아픔이 생생해 보였다. 대학 입학식을 앞두고 운동을 하러 갔다가 참변을 당한 여고생의 어머니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팔순의 어머니와 이제 쉰이 된 여동생, 열아홉 살 조카까지 3대의 가족을 모두 잃은 민동일 유가족 공동대표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5시간을 차로 달려 찾아간 그곳에서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지만, 한마디도 물을 수가 없었다. “인사도 없이 비명에 간 내 자식이, 내 동생이, 내 부모가 혹여나 언론을 통해 사람들 입에 쉽사리 거론될까 두렵다”며 누구도 기자와 쉽게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직 교감인 류건덕 유가족 대표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문밖에서 기다리기를 2시간. 한 유족이 동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참사 당일 숨진 한 피해자의 목소리였다. 전 지방 사립대 교수였던 김인동씨가 우연히 그날 아내와 통화한 게 녹음된 것이었다. 김씨 부부는 그날 같이 헬스장에 운동하러 갔다. 화재가 난 것을 알고 김씨는 거의 끝까지 남아 피해자들 탈출을 도우며 구조활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빠져나간 줄 알았던 아내는 건물 안에 있었다. 당시 눈앞에서 아내를 보내며 절규했던 그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녹음에 남았다. 김씨는 인터뷰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말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자책 - 날 살린 아내 못 구한 난 죄인 대학 강단에 섰던 김씨는 심한 간경화 탓에 서둘러 은퇴했다. 의사도 치료가 어렵다며 가망이 없다고 했단다. 약만 먹으면 어지럽고 속이 따가워 약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그를 위해 아내는 산이고 들이고 부지런히 다니며 약초를 뜯어 달이고 그 물로 죽을 끓이고 밥도 지어 먹였다. 그렇게 지극정성 보살핀 아내 덕에 김씨는 거의 정상인에 가깝게 몸이 회복됐다. 부부는 그 과정에서 제천으로 내려왔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펜션을 열어 제2의 인생을 오순도순 건강하게 살아보잔 생각이었다. 땅을 사고 설계부터 건축까지 부부가 자그마치 5년간 발품을 팔아 2015년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7년 12월 그날도 김씨 부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4층 헬스장에서 운동을 했다. 근력이 약한 아내에게 김씨가 웨이트 동작 몇 개를 알려주고 뒤이어 아내가 옷을 갈아입으러 5층으로 올라간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4층 남성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느낌에 김씨는 점퍼와 바지 등 겉옷만 대충 챙겨입고 4층을 나섰다. “따르릉, 따르릉.” 그때야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2, 3, 4층에서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아비규환이었다. 그나마 연기가 심하지 않아 눈으로 식별되자 김씨는 안 열리는 문 대신 1, 2층 중간 정도의 열린 창문으로 사람들을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연기가 심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저절로 몸이 앞으로 풀썩 기울었다.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찾아 몸을 내밀었더니 배꼽 밑으로 창틀에 걸린 상태가 됐다. 그래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살겠다 싶었다. 양팔을 휘저으며 간신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때부터 집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문 열고 나간 것을 봤으니 어디 있나 하면서.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통화가 됐다. 거기서부터 잊을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됐다. 공포 - 사라진 출구, 안 깨지는 유리창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 아직 4층에 있어요. 마트 앞에 당신 차가 보여요. 연기가 올라오는데, 유리창이 안 깨져요.” 다급해진 김씨가 소리를 질렀다. “일단 엎드려! 입을 막아봐.” 김씨는 경찰관과 소방관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저기 사람이 있다, 우리 아내가 저기 있다. 유리창 좀 깨달라”고 애원했다. 아내는 오히려 “나 아직 살아 있어. 괜찮아”라고 김씨를 다독였다. 이후 김씨가 구조를 요청하러 다니는 동안 말소리가 끊겼다. 숨을 헐떡이는 마지막 음성까지 전화기에 고스란히 남았다. 김씨의 아내는 통화가 되지 않은 그 상태에서도 20분 뒤에나 숨졌다고 했다. 시신은 4층이 아닌 7층에서 발견됐다. “비상구가 막혀 있지 않았다면, 바로 유리를 깨라고 지시했다면, 건물 근무자들이 대피를 유도하고 빠져나왔다면 더 많이 살지 않았을까요?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같이 데리고 나가줬어야 하는데 길도 모르는 고객들이 캄캄한 연기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겠어요.” 그는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날 참사 이후에도 김씨는 여전히 아내와 함께 문을 연 그 펜션에서 산다. 둘이서 소박하게 평생 먹고 살자던 그곳을 문 닫은 채로. 그래서 김씨의 하루는 아내의 납골당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음이 편해서란다. 그렇게 사진으로나마 얼굴 한번 보고 제천 시내에 가 혼자 또는 지인들과 늦은 식사를 하고 주인 잃은 펜션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빵이나 떡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어디 빨래 한번 제대로 합니까. 음식 해줍니까. 고생만 죽어라 시키고 보냈습니다. 수고했어. 고마워. 이 말 한마디를 못해주고 보냈습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없이 김씨는 잠을 이루기도 어려워졌다. 부실한 식사 탓에 약을 먹으니 어지러워 걸음은 비틀대고 멍한 상태가 됐다. 기억이 선명하면 괴로워 그게 더 낫다고 했다. 가끔 자녀가 김씨를 찾아오면 더 슬프다고 했다. “자기들도 힘들고 아플 텐데 나까지 짐이 되면 안 되잖아요. 사회에도 짐이 되면 안 되니까. 그저 집사람을 못 구한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지”라며 “그때 같이 죽을 걸, 나 살린 사람도 못 구하고 나만 살아가지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은 다 그대로 있는데, 내가 꼭 필요로 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내 옆에 없으니까. 어디 아프고 노력이라도 해보고 그렇게 마음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몇 번이나 집사람을 따라가려고도 했어요. 나까지 그리하면 자식들한테 더 못할 짓 하고 상처주는 거 같아서 내 할 도리는 다 하고 뒷정리는 하고 그러고 가려고”라고 덧붙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후회와 슬픔이 한숨과 섞여 나왔다. 기억 - 기본기만 지켜도 참사 없을 것 그는 “다시는 이런 사고 안 나게 제발 적어달라”고 했다. 김씨는 “지금도 비상구 표시가 계단에나 있지, 건물 안에는 안 보여요”라고 지적했다. 제아무리 시설 좋고 장비 좋은 건물이라도, 그 안에서 일하는 이들의 교육과 훈련은 없다고 했다. “다른 목욕탕을 가도, 좋은 식당을 가도 비상구 쪽은 밀폐돼 있어요. 비상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건물 실내에서부터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야광으로 큰 띠만 연결해놔도 사람들 그렇게 안 죽어요. 돈도 많이 안 들어요. 외국처럼 잘 깨지는 소재의 창문을 하나 만들고 연기 속에서도 식별 가능하게 X자 표시를 해서 여자들도 깰 수 있게 알려줘야 해요. 또 건물 종사자들은 불이 나면 소리만 지르고 도망갈 게 아니라 비상시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내하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해요. 이런 기초적인 훈련과 시설이 갖춰져야 이런 참사를 줄일 수 있어요.”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 총회 날 먼저 펜션으로 돌아간 김씨를 빼고 유가족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어떤 유족은 오래 살았던 제천을 그날 이후 떠났다고 했다. 혹시나 웃으면 ‘가족 잃고도 웃는다’라고 남들이 흉볼까봐서라고 했다. 화재로 탄 시신을 가족 대신 확인한 친구는 지금도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2018년 12월. 제천시 하소동 체육공원 인근에는 높이 1.2m 크기의 추모비가 건립됐다. 유가족들은 29명의 희생자 이름과 함께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는 글을 리본, 국화와 함께 새겨 넣었다. 그날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Remember 2017. 12. 21’라는 참사 당일 날짜도 아로새겼다. 한 유족이 말했다. “엄마를 잃은 유치원생 어린 딸이 이모만 보면 같이 살자고 한다더라고요. 화재는 고인뿐 아니라 이렇게 남은 가족에게도 화상을 남겼습니다. 이 끔찍한 일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됩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임정 수립 100주년 역사서 옥석 가리기

    올해는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부에서 지난해부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분위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출판계도 최근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관련 서적이 간간이 보이더니, 최근에는 인문·사회 분야뿐 아니라 어린이 책과 소설 분야에서 활발히 책이 나옵니다. 관련 정보는 물론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직접 좇은 책,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이 눈에 띕니다. 책을 접하면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다들 별 관심 없었으니까요.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책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최근 경향에 맞춰 이벤트성으로 낸 책들도 눈에 보입니다. 역사는 역사가만 다루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불분명한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기술하거나 왜곡하는 일,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자료를 마구 짜깁기해 책으로 내놓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책일수록 재미가 없고 구성도 투박합니다. 이벤트에 맞춰 급하게 내놓으려면 자료 조사도 미흡했을 것이고, 당연히 재미가 떨어질 겁니다. 기본적인 사실이 어긋나고 주장을 내세우면서 결국 엄숙하고 비장하라고 강요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자들은 이런 분야 자체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주 읽었던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반비)은 역사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보여 준 책이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예술관이라 불리는 독일 베를린시의 역사 기억 방식을 보여 주는 조형물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조형물, 광고물 하나에도 오랜 기간을 들인 까닭에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버스 광고 형식으로 소개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정보라든가, 2700여개가 넘는 유대인 추모비 등은 직접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100주년이어서, 그저 광풍처럼 한 번 쓸고 가는 게 아니라 오래 노력하고 공들인 책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행히 출판사 몇 곳이 이런 책을 준비 중이라 하니, 책골남이 옥석을 골라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gjki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1부>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①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우리는 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해방을 맞게 됐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정은 1919년 여러 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세워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전쟁을 병행한 독립 운동의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1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역사 탐구에는 김원봉(1898~1958년)과 김산(1905∼1938년), 조봉암(1898∼1959년) 평전을 쓴 이원규(72) 작가와 독립운동가 김연방(1881~1919년)의 증손자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신한촌碑, 고려인 독립운동 중심지 일깨워 지난달 초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몰려왔다. 서울보다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았다. 기자를 안내한 교포2세 권세라(27) 가이드는 “그래도 여기는 연해주 다른 도시보다는 따뜻한 편”이라며 “러시아에는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며 웃었다. 공항에서 남부 루스키섬 쪽으로 50여분쯤 달리자 시내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직사각형 모양 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놓여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묶어 놓은 태극기와 노란 리본도 눈에 들어왔다. 신한촌 기념탑이었다. 3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인 3을 형상화한 것이다.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명분 삼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고려인 마을 구(舊)개척리를 철거했다. 한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의 신한촌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우리 민족이 세운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때 1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여기에 살았지만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을 모두 파괴했다. 지금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구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3·1운동은 세계 각지에 임시정부 설립을 촉발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여기저기서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위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년)은 열강의 제국주의 책동을 비난하며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우리도 반제국주의 흐름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같은 해 5월 문창범(1870~1938년)과 최재형(1860~1920년)이 중심이 돼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의미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25일 중국 간도 지역 동포들과 함께 총회를 열었다. 이때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연해주와 간도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의회 의장에 문창범을 선출하고 외교부장 최재형, 군무총장 리동휘(1873~1935년) 등을 임명했다. 공식 선포는 20일쯤 뒤인 3월 17일에 이뤄졌는데, 이는 3·1운동과 궤를 맞추려는 의도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노서아(러시아) 영토에 있던 임시정부’라는 뜻으로 ‘노령정부’라고도 한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가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집행하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다. 단시일 내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정부 조직 과정을 다수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선포 직후 각국 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일본 제국주의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간도 뤄쯔거우(나자구)에 군사 훈련소도 마련했다. 신한촌 옛터에서 이원규 작가는 “전 세계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독립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아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노령정부는 이런 임정의 본령을 구현할 최적지에 있었다”고 평했다.다만 이 정부는 상하이·한성 정부와 달리 별도의 헌법을 발표하지 않아 조직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고려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유산계급인 원호인(러시아 귀화자)들이 무산계급인 여호인(미귀화자)들을 차별해 한인 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러·韓 어느 곳에도 최재형 추모비 하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 발해성 등 2개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쌍성자’로 부르던 곳이다. 민가가 즐비한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가자 단정히 정돈된 최재형 생가가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러시아 인부들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느라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집은 그가 1919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살던 곳이다. 권 가이드는 “최재형을 빼놓고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이나 러시아 어느 곳에도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노령정부 태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들자면 단연 ‘연해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최재형이 꼽힌다.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를 저격할 수 있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건넨 인물이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형백과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9살이던 1869년 가족들이 배고픔과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라스키노(연추)의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에 집을 뛰쳐나왔다가 포시에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러시아 선장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는 이 부부와 전 세계를 항해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양문명을 체험했다.187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군수업자로 변신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이 지역 노동자 한 사람의 급여가 월 10~15루블 정도였는데, 그는 포시에트항을 근거지로 여러 사업을 벌여 매달 1만루블 이상을 벌었다. 거부가 되자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고국을 돕고자 발벗고 나섰다. 1909년 10월 안 의사의 하얼빈역 저격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의 회고록에는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실행 전 우리 집에 기거하며 사격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는 애칭도 얻었다.●전 재산 독립에 쓰고… 日 헌병대에 총살당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러시아혁명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상륙해 대대적인 체포·학살에 나섰다. 조선 독립에 전 재산을 쓰고 어렵게 살던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4월 5일 처형됐다. 63세였다. 당시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지만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봐 담담히 앞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죽음을 맞으러 발걸음을 내딛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외로웠을까. 블라디보스토크·바라바시·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제천화재 1주기 추모식장 눈물바다

    29명이 숨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1주기 추모행사가 21일 화재 현장에서 500m쯤 떨어진 체육공원에서 열렸다.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추모식은 유가족이 만든 추모곡이 흘러나오자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자원봉사를 마치고 잠시 목욕탕에 들렀다가 변을 당한 이항자(당시 57)씨의 남편 류건덕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추모비 앞에서 오열했다. 유가족이 직접 디자인한 높이 1.2m의 추모비에는 ‘이별도 아픔도 없는 따사로운 햇살만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잊지 말자는 뜻의 리본이 새겨져 있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써 있다. 어머니(당시 80세), 여동생(49세), 조카(19세)를 한꺼번에 잃은 민동일 공동대표도 흐느껴 울었다. 꽃다운 나이에 화마 속에서 목숨을 잃은 김다애(당시 18)양의 친구들도 참석해 소중했던 친구를 기억했다. 유가족들은 충북도를 향해 쓴소리도 쏟아냈다. 최근 있은 보상 협상은 도가 ‘민형사상 절차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단서조항과 함께 소방공무원 불기소 처분에 대한 항고를 취하하고 재정 신청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면서 결렬됐다. 류 대표는 “고인들의 죽음은 돈으로 덮을 수 없다”며 “도민 화합이란 명분으로 모든 진실을 돈으로 덮으려는 충북도에 강력히 유감을 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대책위는 지난 10월 검찰이 ‘인명 구조와 화재 진압을 동시에 해야 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구조 지연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며 참사 당시 진화에 나섰던 소방 지휘부 2명을 무혐의 처분하자 거세게 반발하고 지난달 29일 항고장을 제출했었다. 제천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히말라야의 별이 된 직지원정대 추모 조형물 제막

    히말라야의 별이 된 직지원정대 추모 조형물 제막

    “준영아, 종성아 보고싶다” 9년 전 히말라야에서 등반도중 실종된 직지원정대 소속 고(故) 민준영(당시 36)·박종성(당시 42) 대원의 추모조형물이 청주에 설치됐다. 직지원정대와 충북산악구조대는 21일 청주 고인쇄박물관 내 직지교 옆에서 추모조형물 제막식을 가졌다. 동료 대원과 유가족 등 20여명이 함께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추모 조형물은 이들의 땀이 녹아있는 직지봉과 히운출리 북벽을 본떠 제작됐다. 높이 1.2m, 길이 1.8m다.직지원정대는 현존하는 금속활자 인쇄본 중 가장 오래된 직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2006년 30여명으로 구성된 등반대다. 두 대원은 2008년 히말라야 차라쿠사지역 미답봉(해발 6235m) 등반에 성공하며 히말라야에 처음으로 한글 이름을 가진 ‘직지봉’을 탄생시켰다. 두 대원이 히말라야의 별이 된 것은 2009년이다. 그해 9월 히말라야 히운출리 북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가 그달 25일 오전 5시 30분 해발 5400m 지점에서 베이스캠프와 교신 후 실종됐다. 직지원정대는 신루트를 ‘직지루트’로 명명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직지 홍보를 위해 산과 싸우다 실종된 이들의 희생을 잊지않고 있던 청주시는 이번에 조형물 제작비 2000만원을 전액 지원했다. 당시 직지원정대장이었던 박연수(54) 충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은 “내년 1월 히말라야에 가 두 대원들에게 추모비 제막을 알려줄 계획”이라며 “직지봉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청주시민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직지봉도 찾아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 잔인한 고문에도 독립운동가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초인적인 저항 정신을 보여 준 독립운동가가 있다. 육신의 일부가 절단돼 선혈이 쏟아지는 중에도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친 윤형숙(1900~1950) 열사. 열사를 흔히 ‘남도(南道)의 유관순’이라 부른다. 전남 여천역에서 내려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78)씨를 만나 여수 이순신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둘러보았다. 2014년 건립된 기념탑 옆에는 팔이 잘린 열사의 모습이 담긴 부조물이 있다.윤씨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평생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인물”이라고 열사를 소개했다. 윤씨의 할아버지 윤자환(1896~1950·대통령 표창) 선생도 3·1 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윤씨는 10여년 동안 기록 발굴에 매달린 끝에 알려지지 않은 열사의 공적을 찾아냈다고 한다. 열사는 닥쳐올 운명을 암시하듯 혈녀(血女)라는 이명(異名)으로도 불렸다. 학적부와 판결문에는 ‘윤혈녀’로 적혀 있다. 윤씨는 윤혈녀와 호적상의 윤형숙이 동일인임을 어렵사리 확인했다.●윤 열사 조카, 10여년간 관련 공적 찾아 내 타오르는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번졌던 1919년 3월 광주에서도 민중과 학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윤 열사는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는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박애순(1896~1969·건국훈장 애족장) 교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 안팎의 사정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광주 만세운동은 3·1운동 전부터 움트고 있었다. 일본 도쿄 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2·8 독립선언을 청년들에게 알렸다.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와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례하고 서울 시위에 참가한 김철도 귀향해 남궁혁의 집에 모여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등을 밤새 만들어 장날인 8일 서울과 똑같은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아 다시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거사일을 바꾸고 학생들과 읍민들에게 참가를 독려했다. 이에 박 선생도 김복현,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통을 받고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당연히 참가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학생들은 수피아홀에 숨어 밤새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농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기독교인, 주민 등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 윤형숙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시장 안을 돌아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 앞으로 행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본정통을 돌아 경찰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헌병들은 실탄 사격을 하고 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일본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 열사의 왼팔 상단부를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잘려나간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남은 팔에서도 피가 쏟아졌고 윤 열사는 정신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열사의 몸 일부였던 팔이 땅에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은 태극기를 꼭 붙잡고 있었다. 유혈이 낭자한 몸으로 열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팔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높이 흔들었다. 그러면서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했다. 군중은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 자리에서 100여명이 구금되었다.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 열사의 행동에 일본 군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육군성에 다음날 보고됐다. 열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심문을 당했다. 일경은 굽히지 않는 열사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을 멀게 했다. 팔이 잘린 열사는 재판정에도 나가지 못했고 결석재판으로 4개월 형에다 4년 연금형을 더한 판결을 받았다.●팔 잘려 재판 못 나가… 결석재판 징역 4개월 이후 열사는 함남 원산 마르다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열사는 요양차 전북 전주로 내려가 전주기전야학교 사감으로 일하고 고창군의 한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1939년 고향 여수로 내려갔다. 왼쪽 눈의 시력마저 거의 잃었지만 열사는 봉산학원 교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던 열사에게 더 큰 비극이 닥쳤다. 열사는 평소 반공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다. 지인의 집으로 피신했던 열사는 뒤를 캔 내무서원에게 붙잡혔다.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북으로 퇴각하기 직전 북한군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열사를 총살했다. 파란만장한 20세기의 전반을 헤쳐 온 열사의 나이 50세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 손양원 목사도 함께 총살당했다. ●잘린 팔 무등산에 묻혔다 전하지만 못찾아 열사는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치홍씨와 택시를 함께 타고 30여분쯤 가니 확장 공사 중인 도로 옆 비탈에 열사의 묘소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작은 공장이 있고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쓸쓸한 모습이었다. 도로 너머로 추수를 마친 창무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창무리는 조선시대에 말을 방목해 기르던 목장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 순교자윤형숙전도사지묘’(故殉敎者尹亨淑傳道師之墓)라고만 씌어 있다. 윤씨는 이 비석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열사가 총살당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고향 친지들은 20리 길을 걸어 학살 현장을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 한쪽 팔이 없는 시신을 수습해 그날 밤 고향 뒷산에 가매장했다. 이듬해 4월 교회 사람들이 묘비를 만들어 고향 마을로 가져왔으나 마을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항일 운동에 몸바친 열사에게 단순히 ‘순교한 전도사’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석은 방치돼 소고삐를 매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가까운 친지들과 마을 유지들이 모여 묘를 이장하고 조촐한 묘비 제막식을 열어 열사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 열사의 팔은 누군가 광주 무등산 자락에 따로 묻어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팔을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는데 팔무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추모비엔 이렇게 썼다. “당신의 충령(忠靈)을 천추(千秋)에 길이 전하게 될 것이며 당신의 거룩하신 충절을 값없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부, 2004년에야 건국포장 추서 열사에게도 한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젊음은 일제에, 생의 마지막은 북한군에게 희생된 열사의 일생은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었다. 2004년 정부는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새로 만든 묘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JSA 관광객, 민사경찰·가이드 인솔로 북측 지역 이동

    남북한과 유엔군사령부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에 따른 관광객의 자유 왕래 허용과 관련해 남북 민사경찰 및 가이드의 인솔과 안내에 따라 JSA 지역을 왕래하는 방안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13일 “남과 북, 유엔사는 어제부터 이틀간 판문점에서 ‘3자 감시장비 실무협의체’ 회의를 열어 JSA 내 감시장비 조정을 비롯한 관광객과 참관인 자유 왕래, 공동경비근무규칙 제정 등을 협의했다”며 “앞으로도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 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3자 실무협의체는 우선 남측 민간인과 관광객이 JSA 북측 지역으로 이동할 때 우리 측 민사경찰이나 가이드가 인솔하도록 했다. JSA에는 남북 비무장 군인들이 ‘판문점 민사경찰’ 완장을 착용하고 근무한다. 북측 관광객도 민사경찰이 인솔한다. 이는 JSA 지역을 민간인이 자유롭게 관광하게 될 때 월북·월남 등 만약의 사태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풀이된다. 3자협의체에서는 관광객들의 동선도 구체적으로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JSA 남과 북 지역에서는 각각 상징성을 지닌 기념비가 있다. JSA 북측 지역 판문각 왼쪽에는 김일성 친필비가, 남측 지역에는 1976년 북한군이 미군을 도끼로 사망케 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의 터와 미군 추모비가 있다. 북한은 JSA를 방문한 자국 관광객이 김일성 친필비에 반드시 참배하도록 하고 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도 미군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어서 두 기념물이 철거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따라서 향후 남북 관광객들이 왕래하게 되면 이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기념비 코스를 제외하고서 관광이 이루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다. 반면 이들 기념물의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해 확실한 통제 아래 관광이 허용될 수도 있다. 3자 실무협의체는 또 지난 12일부터 이틀간 JSA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경비근무 수행과 방문객 왕래 보장을 위한 감시장비 조정 및 상호 정보공유 방안 등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3자는 서로 운용 중인 감시장비 영상정보를 공유하기로 하고 송·수신을 하기 위한 기술적 문제들에 대해 협의했다. 현재 3자가 논의 중인 ‘공동경비근무규칙’ 방안과 함께 감시장비 재배치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협의가 이뤄지면 빠르면 이달 중으로 JSA 왕래 허용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3·1절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발원지였던 러시아와 중국 지역은 사실상 잊힌 상태다. 통일을 바라보는 지금, 북한 접경 지역인 이곳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연해주·동북 3성 항일독립 유적지 한민족순례’에 동행해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좇았다지난 22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40분을 날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10월 중순을 넘겼지만 바람이 선선했다. 먼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던 ‘신한촌’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루스키섬 방향으로 50여분 떨어진 라게르산 정상에 있다. 검은색 철 울타리에 둘러싸인 이곳에는 직사각형 모양 3.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자리한다. 3개의 기둥은 남북한과 재외동포를,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각각 상징한다.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1999년 8월 15일 해외한민족 연구소가 한국에서 석재를 가져와 세웠다. 연해주 지역에는 1863년 한국에서 건너온 13가구가 지신허에 자리를 틀며 한인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했다. 새로운 한국이란 이름의 ‘신한촌’은 1911년 5월 구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와 건설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권업회와 한민회, 한민학교 등이 생겨나며 항일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때까지 연해주에 한인들이 17만명이 넘게 있었고 신한촌에만 1만여명이 거주했다고 알려졌다.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 치열하게 살며 항일운동을 펼쳤지만, 지금은 기둥 세 개짜리 탑만 흔적으로 서 있다. 철 울타리에 걸린 태극기 정도가 이곳에 한인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4㎞ 정도 떨어진 곳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있다. 모스크바까지 꼬박 1주일이 걸리는 전체 길이 9288㎞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 역이다. 강제로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열차에 태워진 채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쪽으로 100㎞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밤 동안 머릿속에 당시 풍경이 그려졌다.다음날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연해주 한인 동포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친선을 도모하고자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2009년 건립한 박물관이다. 입구 오른쪽에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는 글귀가 적힌 추모비가 서 있다. 현지 가이드는 “블라디보스토크 의과대 학장이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 만들었는데, 학장이 바뀌면서 학교에서 버린 것을 7년 전쯤 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고려문화센터를 나와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들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려문화센터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한국 정부가 10년쯤 전 사들여 현재 기념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860년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아홉 살 때 연해주 지신허로 와 정착했다. 이후 열한 살에 가출했다가 포시예트 항구에서 만난 러시아 선장의 배려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많은 돈을 번 그는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에 첫 한인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한인들을 돕기 시작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에는 빨치산을 조직하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왕바실재 언덕에 다다른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5일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로 이곳에 끌려와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한인과 러시아인 240여명이 이곳에서 잔혹하게 죽었다. 이른바 ‘4월 참변’이다. 10분 남짓 언덕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봤다. 함께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하모니카를 꺼내 아리랑을 연주했다. 동행한 고려인들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었다. 소 이사장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이곳을 유적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 집에서 5㎞ 정도 떨어진 수이푼 강변에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특사, 1914년 결성된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으로 잘 알려졌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국권회복을 위해 파견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하던 그는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내가 죽거든 불태워 유해를 강에다 뿌려 달라’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이곳 수이푼 강변에 뿌려졌다. 연해주에서 190㎞ 정도 떨어진 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있다. 높이 4m 정도 큰 비석에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 높이 1m 정도 작은 비석에는 ‘200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고 쓰여 있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이 훼손하는 사례가 잦았다. 비석을 옮긴 지역이 국경지대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당국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돼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사방이 허허한 벌판에 핏방울 모양의 비석이 홀로 서 있다. 목숨 바쳐 항일운동을 펼친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잊힌 역사인가, 아니면 잊은 역사인가. 중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차디찬 바람에 가슴이 시렸다. 글 사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러시아)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포토] 슈뢰더 전 총리 부부, 힌츠페터 추모비 참배

    [포토] 슈뢰더 전 총리 부부, 힌츠페터 추모비 참배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부부가 26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에서 영화 ‘택시운전사’ 속 독일 기자의 실제 주인공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의 추모비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민주열사 발자취 따라 ‘관악민주올레길’ 걸어요

    민주열사 발자취 따라 ‘관악민주올레길’ 걸어요

    뜨거운 변화의 열망이 깃든 민주화 현장과 민주열사들의 고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 체험 행사가 올 가을 서울 관악구에서 펼쳐진다.관악구는 ‘관악 민주주의 길을 걷다’ 마을관광사업추진단과 (사)박종철기념사업회와 함께 오는 11월 3일 관악민주주의 길을 따라 걷는 ‘관악민주올레’ 행사를 연다고 26일 밝혔다. 마을관광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걷는 ‘관악민주올레’는 서울대학교 4·19 기념탑에서 출발해 이준 열사와 김세진·이재호·박종철 열사 추모비 등 우리 현대사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민주열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이후 대학동으로 이동해 ‘그날이 오면 옛터’와 녹두거리를 거쳐 박종철 거리까지 약 3.5㎞를 걸으며 치열했던 과거의 인물과 시간을 되새겨보고 미래를 건너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구는 민주주의의 중요성과 올바른 역사 재현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해 ‘1987년 6·10항쟁’ 30주년을 맞아 서울대학교와 대학동 인근을 ‘관악 민주주의의 길 관광코스’로 개발해 운영해 오고 있다. 오는 31일(오후 7시)에는 관악청소년회관 소극장에서 역사 강연과 문화 공연을 접목한 ‘K-CONCERT’가 열린다. 책 ‘강남의 탄생’의 저자인 한종수 작가가 ‘관악 민주주의 역사’에 대해 역사 해설 특강을 진행하고 가수 손현숙 등이 공연을 선보인다. 박준희 구청장은 “이번 역사 콘서트와 관악민주올레 행사를 통해 구민들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되짚어보고 관악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JSA 관광객 이르면 새달 자유 왕래…‘민사경찰’ 완장 차고 내부 공동경비

    JSA 관광객 이르면 새달 자유 왕래…‘민사경찰’ 완장 차고 내부 공동경비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25일부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의 무기와 초소가 모두 철수되면서 비무장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JSA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Q&A 방식으로 알아본다.→관광객들이 바로 자유로운 JSA 왕래를 할 수 있나. -당장 가능하지는 않다. 비무장화에 따라 월북·월남 등 돌발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만큼 남북·유엔사 3자협의체에서 이에 대한 추가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관련 대책이 마련되고 근무형태에 대한 논의가 완료된 다음 이르면 다음 달부터 자유로운 관광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JSA에서 근무하는 남북 병사는 25일부터 총을 소지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 남북과 유엔사는 26일부터 공동 검증을 통해 상호 무기의 철수 여부를 꼼꼼히 검증할 계획이다. →판문점 남측 지역에 있는 ‘도끼 만행 사건’ 추모비와 북측 지역에 있는 김일성 친필비는 그대로 두나. -두 기념비는 현재의 상태로 보존될 것으로 보인다. JSA 북측 지역 판문각 왼쪽에 세워진 김일성 친필비는 북한에서 상징성을 지닌 것이다. JSA를 방문한 북한 관광객은 이곳에서 반드시 참배를 해야 할 정도다. 남측에는 도끼 만행 사건 관련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에 나무의 터와 당시 사망한 미군을 추모하는 비석이 있다. 미군도 아직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만큼 앞으로 양 기념물이 철거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남북의 관광객도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향후 이를 피해 관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비무장화된 병력은 어떻게 근무하게 되나. -26일부터는 JSA에서 모든 인원이 철수하고 잠시 JSA 바깥에 위치한 초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어 남북·유엔사 3자협의체가 26~27일 양일간 무기 철수에 대한 공동 검증을 마치고 근무 형태 등에 대한 논의가 완료되면 다시 JSA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공동 경비를 하게 된다. 예정대로 이달 말까지 남한군 초소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한 지역에 새로 설치되고 남한 지역 판문점 입구에는 북한군 초소가 새로 설치되면 남과 북의 군인이 인접한 거리에서 근무한다. 협의 진전 여부에 따라 예정보다 시기가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3자협의체에서 경계근무 방식, 임무 등이 구체적으로 결정되면 남북 각각 35명의 장병이 팔에 ‘판문점 민사경찰’이란 완장을 차고 판문점 내부를 돌아다니며 경비를 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씨줄날줄] 알파인 대장 김창호/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알파인 대장 김창호/김성곤 논설위원

    주말인 지난 13일 히말라야 해발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49) 대장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이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 구르자히말(7193m)에 ‘코리안 웨이’를 개척하던 중 눈보라와 눈사태로 조난을 당해 숨졌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원정대를 이끈 김 대장은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고봉 14좌를 무산소 등정에 성공, 세계 산악계에 그 이름을 드높였다. 그는 대규모 원정대를 구성, 고산 캠프를 설치하고, 셰르파와 산소탱크 등의 도움을 받아 정상 등정조를 정상에 올리는 ‘극지법’보다는 6인 이하로 구성해 스스로 장비를 지고 등반 루트를 개척하고, 산소탱크 등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오르는 ‘알파인 등반 방식’을 고집했다. 등반 시 “셰르파와 짐을 똑같이 나누라”고 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짧은 역사에 비해 한국은 등반 강국이다. 고(故) 고상돈 대원이 1977년 세계에서 58번째, 한국에선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이후 40여년 만에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 완등자를 6명이나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 성공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1971년 마나슬루(8163m) 등정에 나섰다가 빙하 틈으로 떨어져 숨진 김기섭 대원을 시작으로 한국인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던 지현옥 원정대장이 1999년 안나푸르나(8091m)에 오른 뒤 하산하다가 실종됐다. 영화 ‘히말라야’의 주인공인 박무택은 2004년,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한 고미영 대장은 2009년 히말라야의 별이 됐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1993년)에 성공한 박영석 대장이 이끈 원정대도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에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눈사태로 실종됐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근처에서는 히말라야 등반이나 트레킹 도중 숨진 사람들의 추모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는 박영석 대장과 지현옥 대장 추모비도 있다.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그대들이여,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곳에서 산이 되다’라는 글이 새겨진 박영석 원정대 추모비와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당당했다’라고 적힌 지현옥 추모비를 보면서 한국 트레커들은 막걸리를 올리며 눈자위를 붉히곤 한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 도전 정신이 발전을 이끌었다. 그것이 산이든 어디든 인간 한계 극복을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2억원이면 일반인도 수많은 셰르파와 장비들의 도움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등정시키는 상업 등반이 설치는 판이다. 알파인 방식을 고집한 김 대장과 그 팀의 비보가 안타까운 이유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 진선미 장관 “화해치유재단 빨리 처리”...취임후 첫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방문

    진선미 장관 “화해치유재단 빨리 처리”...취임후 첫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방문

    “화해·치유재단을 빨리 처리하는 것을 할머니들께 보여드리고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상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11일 취임 후 처음으로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났다. 진 장관은 할머니들의 안부를 묻고, 화해·치유재단을 비롯한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화해·치유재단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으로 설립됐으나 기능이 중단된 상태다. 진 장관은 “제가 7년 전 국회에 들어왔을 때 (살아계신) 할머니가 59명이었는데 이제 28명 남아 죄송한 마음이 많다. 잘 견뎌주시고 건강한 모습을 뵈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진 장관과 만남에는 이옥선·박옥선·강일출·이용수 할머니 등 4명이 함께 했다. 할머니들은 화해·치유재단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후손들에 넘어간다. 반드시 해결해달라”며 진 장관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진 장관은 나눔의 집에 1시간여 동안 머물며 역사관, 추모 동상, 추모비 등을 둘러봤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원폭 피해자에게 무릎 꿇은 하토야마 前 일본 총리

    원폭 피해자에게 무릎 꿇은 하토야마 前 일본 총리

    일본 정계 내 대표 지한파인 하토야마 유키오(왼쪽) 전 일본 총리가 3일 오전 경남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있는 위령각을 참배한 뒤 2층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 무릎을 꿇은 채 위로를 전하고 있다. 총리를 지낸 일본 고위 인사 가운데 위령각을 참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합천에는 국내 원폭 피해 생존자 2000여명 가운데 가장 많은 600여명이 산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2015년 찾아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이 있다. 합천 연합뉴스
  • 하토야마 전 일본총리, 합천 원폭 피해자에 무릎 꿇고…첫 위령각 참배

    하토야마 전 일본총리, 합천 원폭 피해자에 무릎 꿇고…첫 위령각 참배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지한파로 꼽히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3일 경남 합천을 찾아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사과를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원폭피해자 입주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있는 위령각을 참배한 뒤 복지회관 2층에 있는 피해자 30여명을 직접 만났다. 합천에는 국내에 있는 원폭 피해 생존자 2000여명 가운데 가장 많은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직은 아니지만 총리를 지낸 일본 고위 인사가 국내 원폭 피해자 위령각을 참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하토야마 전 총리는 원폭피해자들에게 “안녕하세요. 하토야마 유키오라고 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 뒤 일본어로 “식민지와 미국 원폭 투하에 따른 이중 피해자인 여러분들께 사과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일본 정부가 제대로 배상이나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부분에 대해 상당히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어 “2·3세 분들도 피해를 많이 봤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여러분들 고민을 들으며 여러분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게 지원책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하토야마 전 총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고령인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채 일일이 위로를 전했다. 그는 복지회관 방명록에 ‘우애의 마음으로 원폭 피해자들에게 다가가겠다’는방문 기록을 남겼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합천 원폭 자료관을 방문한 뒤 원폭 피해 2세 환우 쉼터인 합천 평화의집도 찾았다. 그는 합천 평화의집에서 “일본에서 피폭자 후손 문제에 대해 질의했지만 법 정비가 안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현직에 있지 않아 제약이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취재진 인터뷰에서 “총리 재임 시절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구상이 있었지만 재임 기간이 짧아 실현되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퇴임 이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인정·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앞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2일 부산에서 유엔평화공원에 이어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 묘역을 참배했다. 합천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러시아 공동묘지에 아이폰 형태 묘비 등장

    러시아 공동묘지에 아이폰 형태 묘비 등장

    러시아의 한 공동묘지에 특이한 묘비가 등장해 추모객들을 놀라게 했다. 26일(현지시간) 러시아 매체 프로우랄(ProUral)에 따르면, 러시아 바슈키리아 공화국의 수도 우파에 있는 유즈노예 공동묘지에 152cm 높이의 아이폰 모양으로 제작된 묘비가 들어섰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묘비는 지난 2016년 1월에 불분명한 사인으로 숨진 여성 리타 샤미바(25)의 것으로 최근 그의 아버지 라이스 샤미바가 일찍 숨진 딸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추모비다. 생전에 리타가 좋아했던 아이폰 형태로 만들어진 묘비에는 리타의 사진이 새겨져있으며, 공동묘지에서 어느 묘비보다 훨씬 높이 솟아있다. 아버지 라이스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인이 불명한 딸의 죽음을 비통해했으나 특이한 묘비를 세우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지역 비석 제작자 갤리울린은 “우리는 주문에 따라 묘비를 만드는 편인데 지난 추 처음으로 독특한 기념비를 보았다”며 신기해했다. 조문객 니콜라이 예브도키모프도 “처음에 환각인줄 알았다”면서 “지금까지 많은 묘비를 보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현지 언론은 “이전에 디자이너 파벨 칼리유크가 광고의 일환으로 비슷한 묘비를 만든 적이 있다”며 “실제 장의 전시회에서 그가 작품을 전시한 후 특이한 묘비에 대한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이 사례를 계기로 고인 추모차원에서 다양한 묘비가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사진=프로우랄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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