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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안전관리 강화 시급/공사뒤처리 소홀로 사고 빈발

    ◎직원들 근무자세 고비 조여야 민선자치 출범 1주년을 앞둔 서울시의 안전관리체계에 구멍이 뚫렸다.지하철공사장 등 대형공사장에 대한 안전관리가 소훌해 불필요한 예산이 낭비되고 어린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져도 무신경하다. 지난 10일 연말 개통예정인 지하철 5호선 여의도 하저터널 4백여m구간이 1m깊이로 물에 잠겼다.수방대책소홀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지하철공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하수관이 넘쳐 인근에 있는 공덕역사 출입구를 통해 흘러들었다.밤시간에 비가 내려 미처 출입구를 막지 못해 물이 흘러들었으나 구조물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어 지하철은 예정대로 개통된다는 게 시 관계자의 변명이다. 지난 2일에는 영등포구 양평동 3가 지하철 5호선 13공구 공사현장에서 김모군(5)이 15m깊이의 환기구에 빠져 숨졌다.철저한 안전관리가 요구되는 지하철 공사장에서 공사를 마친 뒤 정리정돈만 제대로 하고 기본적인 안전관리만 했더라도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 50㎜남짓 비가 내린 지난 10일의 출근길 교통대란도 안전 불감증이 가져온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양천구 오목교 지하차도에 물이 찬 것은 지하철공사를 하면서 흘러내린 토사가 배수구를 막아 일어났다.용산구 이태원동 크라운호텔앞 도로침하도 하수관 매설공사를 한 뒤 뒷처리가 매끄럽지 못해 빚어졌다.11일 현재 이런 공사장이 서울시내 25m이상 간선도로에만 3백60곳이나 된다. 지난달 23일 서울의 민방위 경보체계에 구멍이 뚫린 것 역시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근무태도가 불러온 인재였다.이러한 사실은 현충일인 6일 일부 지역에서 추도사이렌이 먹통이 된 것으로도 다시 입증됐다. 지난 8,9일 이틀연속 발령된 오존주의보도 해당 주민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연락체계가 미흡했다. 조순 시장은 『시민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을 시정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겠다』고 공언했다.그러나 조시장의 이같은 소망은 이를 집행해야 할 공무원들의 무사안일한 태도로 헛구호에 그칠 공산이 크다. 시 관계자는 『서울시에서는 어디에서 무슨 사고가 발생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며 『공무원들이 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을다하는 것만이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강동형 기자〉
  • 신한국당 「망월동 참배」 이모저모

    ◎젊은 넋들에 “5·18특별법 제정” 보고/역사 바로 세우기­부패 다짐/묘비 헌화·분향… 남총련 일부학생 시위 『실로 15년이 지나서야 영령들 앞에 저들을 단죄하노라고 아뢸 수 있게 됐습니다』 22일 80년 광주항쟁이후 집권당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망월동 5·18묘역을 공식 참배한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차가운 12월 바람을 맞으며 누워있는 젊은 넋들 앞에 참배단은 숙연히 고개를 떨구었다.강총장은 『어처구니 없는 만행의 진상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을 가려내 역사의 심판을 가하고자 마침내 5·18특별법을 제정했다』고 「보고」한 뒤 『너무 늦었지만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도 많은 고비가 있었다』고 용서를 빌었다. 강총장은 『영령들의 거룩한 투쟁과 희생이 오늘의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고 김영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부각시킨 뒤 『역사바로세우기와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피흘리지 않는 혁명에 저항과 반발도 있지만,힘들고 고독한 대업을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참배단에는 강총장 외에 손학규 대변인과 특별법기초를 맡았던 현경대·강신옥 의원과 박주천·김형오·김기수 의원,김찬진·정태윤·김영춘·맹형규·이원복·김문수씨 등 개혁성향의 민주계 원외위원장들,정시채·이환의·양창식 의원을 비롯한 호남지역 지구당위원장들이 끼여 있었다. 참배단은 80년 5월 당시 임신 8개월된 몸으로 집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계엄군의 총격에 숨진 주부 최미애씨를 비롯한 영령들의 묘비에 헌화·분향했다.묘역 입구에는 대학생 등의 시위를 우려,전경차량이 출동해 있었을 뿐 큰 시위도,그렇다고 특별한 환영인파도 없었다.신한국당은 이날 「5·18특별법 제정을 고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재야·시민단체들의 특별법 제정촉구 플래카드 옆에 내걸었다.팔순의 한 노파는 묘역을 내려오는 참배단 앞에서 당시 실종된 딸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안타까운 호소의 눈물을 흘렸다. 집권당의 광주방문은 그동안 몇차례 있었으나 망월동 참배는 시민·학생들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었다.최근 김윤환 대표위원도 광주비엔날레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시위를 우려,포기했었다. 신한국당의 이날 참배는 5·18특별법제정과 전두환·노태우씨 기소를 계기로 광주·전남북 지역에 대한 신한국당의 「악연」을 불식시킬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강총장은 참배행사에 이어 시내 금수장호텔에서 지역 언론인들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광주문제는 이제 특정 정파의 정략대상이 아니라 민주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강조했다.또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지시를 받았을 때 정기국회회기안에 무난히 처리될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다』고 고백한뒤 『이제 압도적 합의로 이를 이루어 그동안 마음고생이 컸던 이 곳 지구당위원장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게 됐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참배단이 5·18관련단체들과 면담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호텔 어귀에서는 학내시위를 마치고 나온 남총련(광주·전남 지역 총학생회 연합) 소속 일부 대학생들이 「특별검사제 없는 특별법으로 광주를 분열시키려는 신한국당의 참배를 반대한다」는 등 유인물을돌리며 산발적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시내에는 2천8백여명의 경찰병력이 동원돼 경계를 펼쳤으나 시민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오고 갈 뿐이었다.
  • 신한국당 대표단 「망월동」 참배/“5·18학살자 철저 단죄”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은 22일 야당측의 5·18특검제 요구와 관련,『특검제 없이도 5·18특별법에 따라 훨씬 철저하게 수사,학살자들을 단죄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강총장은 이날 광주 금수장 호텔에서 현지 언론인단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이에 관한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고 덧붙였다. 강총장은 이에 앞서 집권당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공식참배단을 이끌고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헌화·분향했다.강총장은 이 자리에서 추도사를 통해 『우리는 지금 역사바로세우기와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피흘리지 않는 혁명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저항과 반발도 있으나 굳건한 역사의지와 영령들의 보살핌으로 창조적 대업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밝혔다. 한편 강총장은 이날 「5·18유족회」등 광주항쟁 관련단체들과 면담을 갖고 명동성당 시위로 연행된 회원들의 석방과 5·18배상·기념사업등의 요구사항에 대해 『최대한의 성의있는 검토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무학교정에 드리운 슬픔/박성수 사회부 기자(현장)

    ◎「성수」 붕괴 8명 앗긴 아픔 아직도 『교정에 가을꽃은 다시 피는데…』 21일 상오11시30분 서울 성동구 행당동 무학여고 강당에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시 등교하다 희생된 이 학교 학생 8명에 대한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무학여고 교정은 아직도 정신적 생채기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하루전까지도 해맑은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서로를 격려하며 학창시절의 고운 꿈을 펼치던 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지도 어느덧 1년의 시간이 지났구나.그래도 오늘만큼은 이곳에 와 함께 있을 너희를 생각하며 조용히 이름을 불러본단다』 학생회장 이선명(18·여고3)양의 추도사가 떨려 나오자 식장은 온통 흐느낌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에게 그날의 아픔을 씻어주기 위해 학교측은 이날 행사를 되도록 간소하고 조용히 치르기로 다짐했으나 막상 식장에 나온 교사들마저도 끝내 울음을 터뜨려 식장은 또다시 1년전의 장례식장처럼 슬픔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고 최양희양(18)의 친구인 2학년3반 위경자양은 격한오열을 삼키다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담임선생과 친구들의 부축 속에 식장을 떠났다. 추모식에 참석한 고 배지연양(17)의 담임 임영훈교사(38)는 『8송이 무악의 꽃망울이 하늘에서 편히 잠들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출석부에 이름을 그대로 놔두었으나 올해초 모두 지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1년전 사고로 같은 반 친구 이연수양을 잃은 무학여고 3년 김미경(18)양은 책상서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연수양의 쪽지편지가 든 조그만 플라스틱상자를 들고 나와 주위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연수양의 담임이던 송태훈(54·영어)교사는 『학생들이 모이면 그날의 얘기를 다시 할 것만 같아 남몰래 앨범만 펼쳐보고 있다』며 『애꿎은 연수의 죽음이 내탓인 것만 같아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남모르는 고충속에 빠진다』고 털어놨다.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김여옥 교장은 추도사를 통해 『그날의 악몽을 저주하고 가신 이들을 그리는 마음 하염없지만 하루빨리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서는 우리에게 그들은 뜨거운 박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남아 있는 학생들을 다독거렸다.
  • 성수대교 참사 1주기 위령제/한강에 국화던지며 원혼 달래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숨진 희생자 31명에 대한 1주기 합동위령제가 21일 상오 11시 서울 성수대교 남단 진입로에서 유가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수대교 붕괴사고 유족회」(회장 성운경·40)의 주관으로 열렸다. 유가족들은 이날 다리 남단에 고인들의 위패와 생전의 사진으로 임시빈소를 차려놓고 헌화,분향하며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은 고인의 사진을 부여안고 통곡했으며 일부 유족들은 한강에 흰 국화꽃송이를 던지며 원혼들을 달랬다. 이날 유족대표로 나온 김학윤씨(30·회사원)는 추도사에서 『비참하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께 삼가 명복을 빌며 가슴에 스며드는 슬픔을 참을 길이 없다』면서 『작지만 소박한 꿈을 안고 착하게 살아가던 우리 부모·형제·아들딸들을 이제 어디서 다시 보아야 하느냐』며 오열했다. 한편 이날 일부 유족들은 유족회측이 서울시에 위령제 참석을 요청했는데도 불참한 것에 분노,조순 서울시장이 보내온 화환을 부수는 등 한때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 서울 빅3/「흠집내기」 공방 가열

    ◎“병역 기피·좌익 성향” DJ·조 후보 맹비난­민자/이 민자대표 군경력·박 후보 삭발쇼 거론­민주/“조 후보 유신­5·6공 가담 자료 갖고 있다”­박찬종 선거일이 불과 닷새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여야와 무소속후보들은 서로 상대당 지도부와 후보들의 전력을 거론,해명을 요구하고 나서는등 전력시비가 막판 선거쟁점으로 떠올랐다. 전력시비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의 선거개입,김종필 자민련총재의 지역감정자극등에 따라 각당이 판세뒤집기의 일환으로 자격시비를 부각시킨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서울시장선거에서의 백중세를 뒤집기 위해 김이사장,이춘구 민자당대표,조순 민주당후보,박찬종 무소속후보등의 전력을 놓고 물고 물리는 비방전이 계속되고 있어 상당부분이 득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진다. 민자당은 김이사장이 연일 정부와 김영삼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서자 특별당보를 통해 『선생님께선 5·18 6주년 추도사에서 「옥중에서 죽기를 결심했다」고 밝혔지만 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국가안보에누를 끼쳐 책임을 통감하며 정치엔 일체 관여하지 않겠으니 미국에만 보내주셔서 치료를 받게 해주신다면」하고 목숨을 구걸하고 계셨다』고 지적했다. 민자당 이춘구 대표도 『한때 대통령선거에 나섰고 정계원로를 자처하는 그분이 일생동안 군에 한번 가봤느냐.나라 지킬 걱정 한번 해봤느냐』고 김이사장의 병역문제를 거론했다. 박범진 대변인은 『나라를 위해 총도 들어보지 않은 병역기피자가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위』라고 공격했다.또 조순후보에 대해서는 『민주당이 박찬종 후보의 유신경력을 문제삼는다면 조후보의 6·25당시 부역설등 경력상의혹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서 『민주당은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의원등 당내 유신세력을 먼저 축출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박지원 대변인은 이춘구 대표의 전력을 거론,『신군부에 붙어 사회정화위원장으로 죄없는 시민을 무고하게 억압했다』고 되받았다. 설훈 부대변인도 『이춘구씨는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자행한 「하나회」핵심이며 이제 김영삼정권의 나팔수로 자리잡아 세대교체 운운하며 날을 새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지원 대변인은 박찬종 후보에 대해서도 『박후보는 TV토론에서 거짓말을 연발,진실성과 도덕성이 이미 땅에 떨어졌다』면서 『이렇게 거짓말을 밥먹듯하면 박후보의 지난 행적은 모두 정치쇼 아니면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비난했다.또 87년 대통령선거 후보단일화를 추진한 조순형·이철·장기욱 의원등은 성명을 통해 『삭발이 「정치쇼」로 비쳐질 우려가 있어 이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는데 혼자서 삭발한 채 다른 정치인들이 위약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면서 박후보의 삭발관련 주장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자신에 대한 전력시비가 쏟아지자 박찬종 후보측은 『조순 후보는 유신에 실질적으로 가담했고 5공 신군부에도 협력했고,6공에 가담했다』면서 『조후보를 비롯한 민주당내 반민주인사들에 대한 전력검증자료를 김대중 이사장과 민주당 주요인사,조후보진영 책임자들이 참고하도록 보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박후보측이 파악하고 있는 조후보의 전력은 고교시절 좌익서클 가입설이나 6·25당시 부역설,지난 72년 모신문에 난 유신찬양 기고문과 청와대 국기강하식 증명자료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 어른들 잘못 용서를…/한찬규 전국부 기자(현장)

    ◎영남중 합동추모식장엔 흐느낌만 『상화·승호·민철·병광·석술·성호·지훈·삼곤·재형·동훈…우리는 오늘도 그 지옥같았던 사고현장을 지나다니며 너희들을 생각한다』 대구 도시가스폭발사고로 숨진 43위의 합동추모식이 치러진 6일 상오10시 영남중학교 운동장. 학생회장 나형진군(15)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안주하는 어른들을 용서해라.너희들이 못다한 효도,공부는 우리들이 대신하겠다』며 추모사를 읽어내려가자 유가족과 학생,교사 등 4천5백여명이 자리한 교정에 흐느낌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길우 교장은 『아무리해도 고칠줄 모르는 어른들의 나쁜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 너희들이 온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지금 너희들의 고귀한 희생을 계기로 자성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너희들의 희생이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타오르고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로 울리고 있다』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 교장은 『사랑하는 제자들아,함께 가신 이종수 선생님과 그 곳에서 더 좋은 학교를 만들어 못다한 공부,못다 펼친 꿈을 가꾸고 다듬어 커다란 열매를 맺길 두손 모아 빌고 있다』며 제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교문밖으로 아스라히 떠나던 너희들의 모습,무엇으로 잡을 수 있으랴.한없이 포근한 엄마 아빠의 품으로도,스승의 간절한 말씀으로도,눈물어린 친구들의 우정으로도 잡을 수 없어…』구본석 교사는 42명의 제자들을 보낸 심정을 추모시로 대신했다. 『친구야,우리는 영남에서 만났지.영남의 동산에 청운의 꿈 심었지.우리가 함께 한 그 자리,그 교실.아 봄날 햇살속 꽃피고 새우는데,친구야 너는 왜 보이지 않니.푸르른 봄하늘 너의 모습 피우리』 구석봉선생이 작사 작곡한 추모가가 울음속에 메아리졌다. 「동생들아 친구들아 모두 잘 가,너희들 모습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거야」 모든 학생들이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교정밖 사고현장에선 이 날도 크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 “못다핀 꽃들 당신이 인도하소서…”/사고후 첫 등교 영남중 표정

    ◎희생된 교사 영결식장 또한번 통곡의 바다로/슬픔딛고 열심히 공부… 사고없는 세상 만들자 대구 가스폭발 사고 4일째인 1일까지 피해복구가 웬만큼 이뤄졌으며 장례식도 이어졌다. ○…42명의 희생자를 낸 영남 중학생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1일 사고 후 처음 등교.그러나 정상 수업 대신 자율학습을 했다. 담임 선생님과 친구 2명을 잃은 3학년 8반 교실에는 교단과 빈 책상을 국화꽃이 대신한 가운데 학생들의 흐느낌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3명이 희생된 2학년 1반 교실은 『친구를 잃은 슬픔을 딛고 열심히 공부해 이런 사고가 없는 세상을 만들도록 하라』는 담임 교사의 당부에 한동안 울음바다를 이뤘다. ○…영남중 교정에서 열린 이종수 교사(39)의 영결식장은 통곡의 도가니였다.『우리는 압니다.당신과 마흔두명의 우리 아이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한 것은 잘못이 거듭되어도 반성할 줄 모르는 불성실과 뻔뻔스러움이라는 것을…』 이길우 교장이 추도사를 읽는 중 50여명의 교사와 1천6백여명의 학생들이 함께 오열했다. 가랑비까지 뿌린영결식에서 총학생회장인 나형준군(15·3학년9반)은 『어처구니없는 참변이 이 땅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세상을 바로 잡아가는데 선생님의 남기신 뜻이 큰 힘이 돼 주시옵소서…』라고 추도. ○…대구시와 자매결연이 된 미국 애틀랜타시와 중국 청도시 등 외국 지방자치단체들이 대구 가스사고 희생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대책본부는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끝나는 2일부터 유가족을 방문,위로하기로 했다. 구청 과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애도의 뜻을 전하고 유족들의 요구사항을 청취,수습대책의 요구사항을 청취,수습대책에 적극 반영키로 했다. 한편 대책본부에 이날까지 1백70여건에 42억3천여만원의 성금이 접수했다.
  • “김정일 강등 당해 승계 지연”/북한문제 권위자 이명영교수 분석

    ◎김일성이 작년 정치국상무위원 자격 박탈/“정일 수련필요” 김일성 「징계」가 유지로/일부서 집단지도체제 거론… 권력다툼/9일 중대방송 해프닝은 정일계기습 실패 북한의 김정일이 숨진 김일성으로부터 당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을 박탈,강등됐기 때문에 권력승계가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돼 국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주장을 한 북한 김일성문제 권위자인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김일성이 죽은지 다섯달로 접어든다.그런데도 평양은 당과 국가의 최고책임자 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있다.민주국가 같으면 권한대행이 나왔거나 보궐선거를 한다해도 두번은 너끈히 했을 세월이다. 평양의 당규약이나 헌법에는 최고책임자의 유고시에 대비한 규정이 없다.「수령」의 유고를 상정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일찍이 1974년2월의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해 놓은 이래로 20년동안 세습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온갖 정력을 쏟아왔었다.당권과 국권을김정일이 세습토록 한 결정은 지난 7월20일의 김일성사망 중앙추도대회에서 한 김영남의 추도사대로 「어버이 수령님께서 우리 혁명의 미래를 위하여 이룩하신 가장 특출한 공적」이었을 터인데 왜 그 정해진 사람이 정해진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평양에서 나오는 소리는 김일성 사망전이나 후나 똑같이 당과 국가의 영도자는 김정일로 되어있다.그러나 정식취임은 아니 하고 있다.일당독재의 전체주의국가에서 당과 국가의 최고책임자가 비어 있다는 것은 대단한 비상사태이다.이미 김정일체제로 되어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는 것이 급하지 않다느니,또 무슨 인민들이 아직도 슬픔에 잠겨 있는데 축하분위기로 바꾼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느니 하는 식의 소리들은 사사집에서나 통할 말이지 당과 국가의 논리로는 도저히 통용될수 없는 것이다. 김정일의 정식취임이 늦어지는 데는 곡절이 있다.김일성의 교시가 매사의 최고원리로 되는 것이 평양이었다.그 강대한 힘이 홀연히 사라지고만 허탈상태에서 모든 결정에서 기본기준으로 되는 것은 그의 유지일 수밖에 없다.그런데 그 김일성이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는 놓았으나 나라 일을 맡기기에는 더많은 수련을 쌓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대한 일은 평양은 발표하지 않는다.그러나 세밀히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1993년 6월을 고비로 김정일의 직함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있다.그 전단계에서는 예컨대 조선인민군 창건60돌 행사(92년4월25일),조선지식인대회(92년12월9일),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4차회의(92년12월11일),동 제5차 회의(93년4월7일) 등등 공석상에서의 김정일의 직함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시며 중앙위원회비서이시며」하는 당의 직책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이신」이라고 하는 군의 직책이 반드시 붙어 있었다. 그랬는데 93년6월 후단계에서는 예컨대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6차 회의(93년12월9일),동 제7차회의(94년4월6일),전국노병대회(93년7월24일),전승40돌행사(93년7월27일),당창건 48돌행사(93년10월10일),김정일 생일행사(94년2월16일) 등등 공석상에서의 그의 직함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시며 중앙위원회 비서이시며」는 빠지고 그냥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만으로 된다.김일성의 영결식에서도 그랬고 1백일 추도대회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직함이 길어서 짧게 부르느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국가위에 당이 있는 나라에서 당의 직함을 뺀다는 것은 여간 딱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아니된다.가능한 분석은 93년6월경에 있었던 정치국회의에서 김정일은 한단계 강등되어 그냥 「정치국위원」으로 되었다는 것이다.이를 그대로 발표하면 후계자의 위신에 여간 큰 상처가 되지 않는다.그래서 당직은 빼고 군직만을 쓰기로 한 것이다.마침 국방위원장이 국가서열로는 주석 다음 자리이니 그런대로 체모는 지킬 수 있었다. 김일성은 과거에도 김정일을 견책처분한 일이 있다.70년대 중반에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를 거느리고 전국을 휩쓸 때 젊은것들이 행동이 지나쳐서 노년 간부들과의 사이에 마찰이 심했고 사회에 불만·비난이 비등했다.그래서 김일성은 김정일을 나서지 못하게 하고 부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던 것에서 아들 사진을 철거시켰다.민심을 수습하고 아들을 반성·수양케 하는데 있어서 김일성은 민첩한 대응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을 하방했다가 상당한 기간뒤에 복권시키는 일을 예사로 했다.그의 처 김성애,동생 김영주,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광등도 이런 일을 당했다. 강등의 이유는 알수 없다.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제3차 7개년계획을 총괄할 때 사상 처음으로 당은 그 실패를 자인했다.그 책임을 물었을 수도 있겠으나 다른 여러가지 사연이 겹쳤을 것이다.지난 4월에 김일성과 면담했던 미국의 전략연구소 윌리엄 테일러 부소장은 후계체제의 완결이 아득히 멀다는 심증을 얻었다 했고 6월에는 김일성이 카터에게 10년은 더 일을 해야겠다고 했다니 김정일이 신임을 얻는데 실패한 것은 확실하다. 지금 평양은 김일성의 유지대로 김정일을 최고책임자로 하되 전권을 맡길수는 없고 집단지도체제로 하자는 유지파와 전권을 쥐겠다는 김정일파와의 갈등의 와중에 있다.무슨 회의든 전원일치로 결정을 보는 저들인지라 군계일학이 없는 오늘에서는 건강상 이유로 김정일이 양보하든 아니면 유지파가 양보해야 한다.또 아니면 김일성의 장기를 빌려 선제기습공격으로 일거에 상대편을 침묵케 하는 쪽이 이긴다.이에 있어서는 호위총국장 이을설,제8특수군단의 지휘관등이 중요 변수다. 지난 11월 9일에 있은 「중대방송」예고는 김정일이 이 수를 쓰려다 불발로 그친 사건이지 다리를 놓으라는 것이 중대방송일 수는 없다.어차피 오는 12월 10일 전후에 있을 제6기 제22차 전원회의와 제9기 제8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당 총비서와 국가주석의 선출이 있을 것이다.그때까지 결론이 없으면 평양정권의 망조는 돌이킬 수 없으며 김정일이 수위에 오르더라도 권력의 독점은 있을수 없고 공유가 있을 뿐이다.
  • 최·전·노전대통령 첫 참석 눈길/박전대통령 15주기추도식 안팎

    ◎3남매중 차녀만 나와… 고인업적 기려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박정희 전대통령의 15주기 추도식은 「유신과 개발독재」라는 고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조국 근대화」의 논리로 반박하는 구 여권인사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이날 추도식에는 박 전대통령의 뒤를 이어 격동의 정치사를 장식한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이 처음으로 나란히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추도식은 제3공화국 인사들의 친목모임인 「민족중흥동지회」(회장 백남억)를 중심으로 준비됐다. 민족중흥동지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는 추도사에서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고인의 발자취를 훼손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어른이 남긴 오늘의 기반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최규하 전대통령도 추도사에서 『남북관계가 복잡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는 때에 국가 안전을 위한 그분의 철석 같은 의지와 경륜이 우리 가슴속을 흐른다』고 고인의 「지도력」을 기렸다. TK(대구·경북출신)세력의 대부로 불리는 신현확 추도위원장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재의 어느 곳에도 뚜렷한 리더십이 없다」는 슈미트 전서독수상의 말을 인용하며 「현실」을 겨냥했다. 12·12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 방침이 보도된 이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은 추도식 도중 간간이 대화를 나누어 눈길을 끌었다.특히 전두환 전대통령은 10·26직후의 정치상황에 대해 끝까지 침묵하고 있는 최전대통령과 귀엣말을 주고 받기도 했다. 추도식에는 이만섭 박준규 채문식 전국회의장,민복기 김용철 김덕주 전대법원장,남덕우 황인성 김상협 전국무총리와 민관식 김치열 최광수 김계원 백선엽 최재구 김기춘 김용식씨등 구여권인사를 비롯,정석모 권익현 장영철 박명근 구자춘 박준병 김길홍 김해석 이택석 이환의(이상 민자당),김용환의원(무소속)등 현역의원등을 포함,2천여명이 참석했다.이철승 유치송 고흥문씨등 구야권인사와 정주영 조중훈씨등 재계인사,한경직목사등의 모습도 보였다. 고인의 자녀로는 육영재단이사장인 둘째딸 서영씨(옛이름 근영)만 참석했으며 맏딸 근혜씨와 아들 지만씨는 불참했다.
  • 「10·26」 15주 대대적 추도식

    ◎전대통령·총리­정당대표 등 거물급 대거 참석/고문직 수락한 김대중씨,행사참석은 “사양” 26일 상오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전대통령의 묘소에는 여야 정치권을 비롯,각계의 전·현직 거물급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박전대통령의 15주기 추도식을 위해서이다. 지난 해까지는 「제3공화국」 인사들의 친목모임인 「민족중흥동지회」(회장 백남억) 주최로 조용히 치러졌던 박전대통령 추모 행사는 지난 4월 동지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올해는 「범국민적 추도식」으로 변경됐다.당연히 참석대상자들의 면면도 각계를 망라하게 됐다. 79년 국장 때 집행위원장을 맡은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추도위원장을 맡아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들을 고문으로 위촉,참석을 약속받았다.이기택 민주당대표는 본인이 고사해 빠졌지만 김종필·김동길·박찬종·이종찬씨등 여야정당대표들도 모두 고문직을 수락했고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도 다른 일정을 내세워 행사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했지만 고문직은 수락했다. 이들을 포함,김재순·강영훈·김덕주씨등 전직 3부요인과 이철승·이민우씨등 전직정당대표,최종현 선경그룹회장등 재계인사,김수환 추기경·한경직목사·탄성스님등 종교계 원로등 모두 49명이 고문으로 위촉돼 있다. 박전대통령과 정치적 신조를 달리했거나 적어도 무관심 그룹에 포함돼 있던 각계 원로들까지 자리를 함께 하는데 대해 추도위측은 『79년 치러진 고인의 국장을 기준으로 추도식 참가인사들을 구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 주최측은 초청장에서 「어른의 위대한 치적 속에 살면서도 그 치적에 걸맞게 모시지 못하는 우리들…」이라는 표현으로 이번 추도식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백남억회장도 미리 배포한 식사에서 『오늘날의 우리 국력을 배양해 주신 그 어른의 높은 경륜과 탁월하신 영도력』이라고 박전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그 무렵 역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도 『남북관계가 복잡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국가안전을 위한 그 분의 철석같은 의지와 경륜을 그린다』는 요지의 추도사를 준비해 놓았다. 반면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은 공식적발언을 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중흥동지회 명예회장인 민자당의 김종필대표는 『겨울이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세한후 지송청)고 고인의 「지도력」을 기리는 인사말을 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식은 최근 잇따른 대형 사고의 근원을 「부실한 개발독재 정권의 유산」으로 여기고 있는 현정권 핵심인사들의 생각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도 사실이다.
  • 김용순·김영남·계응태 두각/김정일 뒷받침 인물들

    ◎조문대표 접견·추도대회 주도… 활동 활발 서열이 중시되는 북한 권력상층부에 아직 이렇다할 변화가 감지되지않고 있는 가운데 김일성사망이후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등 몇몇 사람의 행보가 두드러져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김용순과 함께 주목되는 인사는 부총리겸 외교부장인 김영남,노동당 공안담당비서인 계응태,인민무력부 부부장인 김광진등. 이중에서도 그동안 활동이 활발했던 사람은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 북측단장이기도했던 김용순.대남및 대외업무를 다루어온 그는 김일성의 장의위원 서열로는 29위에 불과하나 김일성의 시신이 처음으로 공개됐을때 참배하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를 부축함으로써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으며 북한 지도부를 대표해 조문차 방북중이던 조총련대표들을 만나는등 가장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그는 김정일이 김일성사망이후 처음으로 만난 외국인인 이탈리아의 국제관계연구소 총서기 면담때도 배석했을 정도.또 최근엔 외국방송으로 김일성사후 평양에서 첫 실황방송을 했던 미국의 CNN방송의 대표단과 만나고 5일엔 방북중인 독일자유민주당 간부들을 만나기도 했다. 김영남은 지난달 20일 치러진 김일성추도대회에서 김정일의 위임에 의해 대표 추도사를 하면서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그를 후계자로 옹립하고 나온 김정일의 핵심측근.이날 군을 대표해서 나온 차수 김광진도 『김정일을 당정군의 최고수위로 받들자』는 내용의 추도사를 낭독해 주목을 끌었다. 김일성 추도대회때 사회를 본 계응태는 지난달 27일 열린 「전승기념일」행사에서 보고를 해 관심을 집중시켰는데 그 역시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곧 모습을 드러낼 김정일체제의 권력핵심부에서 요직을 차지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김정일 정권의 5가지 취약점

    ◎①확고부동한 추종세력이 없다/②「김일성후광」 활용∼차별화 상충/③개혁·개방하면 체제동요 우려/④핵카드 효력 거의 소진돼간다/⑤꼬리무는 김정일 건강이상설 20일의 김일성 추도대회를 기점으로 북한 김정일후계체제의 앞날을 낙관하는 쪽보다 비관하는 관측들이 우세해지고 있다.김정일이 안고 있는 취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통일원 등 정부내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일체제의 취약요인을 크게 5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우선 그의 전도를 어둡게 하는 최대의 약점은 김일성 만큼 확고한 추종세력이 없다는 점이다.이는 20일 김정일의 추대식 성격을 띠었던 김일성추도대회에서 일차 입증되었다는 지적이다.즉 권력서열 8위인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이 추도사를 한 것은 그의 실세 부상을 뜻한다기 보다 2∼7위의 상위서열 핵심인물들이 추도사 낭독을 꺼린 탓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김이 명목상의 「수령」으로 옹립되더라도 실제 정책방향은 오진우·강성산·박성철 등 당정치국위원들의 합의,즉 이른바 「당적 지배체제」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다.따라서 왕조시대에 왕이 허약할 때 몇몇 권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것과 같은 형태가 됨으로써 그 만큼 권력투쟁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그는 아버지 세대인 「혁명1세대」와 20년간의 후계수업시 심어둔 만경대혁명학원 및 김일성대학 선후배를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들의 지원을 받고 있긴 하다.하지만 이들은 특혜를 나눠 갖는 데는 익숙해져 있으나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와 같은 「혈맹」관계는 아니므로 세불리할 경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김이 당면하고 있는 또 다른 난제는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선 주체사상과 같은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최대한 계승해 아버지의 카리스마를 최대한 우려먹어야 하지만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 등 대내외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선 이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해야 하겠지만 실제 내용 면에선 부분적이나마 대외 개방과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는등 차별화를 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이 경우 대를잇는 혁명의 계승 논리,다시 말해 권력세습의 설득력은 훼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행보를 제약하는 제3의 아킬레스건은 체제유지를 위해 개혁·개방을 해야하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체제동요를 우려해 이를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없는 딜레마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수령의 지위와 함께 유산으로 물려받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최소한 부분적인 경제개방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이를 위해선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포함한 두만강지역개발 추진의 본격화를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특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어차피 그 지역에 평생 가둬둘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바람과 외부정보는 북한전역에 시간을 두고 확산될 수 밖다.이 경우 김의 통치기반은 발밑에서부터 조금씩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지금까지는 북한이 재미를 본 「핵카드」의 효력이 거의 소진되고 있다는 점도 그에겐 비극적 요소다.즉 김일성만한 카리스마가 없는 그로선 국제적 압력을 자초할 핵개발 강행도,군부내 강경세력의 도전을 야기할 지도 모를 포기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다 추도대회에서 눈에 띄게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신빙성이 높아진 건강이상설도 그의 운명에 드리워진 불길한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 북,김정일 「후계자」 추대/김일성 추도대회

    ◎당·정·군의 수령… 충성 다짐 북한은 20일 상오10시 평양시내 김일성광장에서 가진 김일성 추도대회에서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사실상 추대했다. 이날 추도대회에서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및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차수)과 노동자 농민 해외동포등 각계 대표들은 차례로 나서 김일성의 업적을 찬양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김정일의 「위임」에 의해 먼저 등단한 김영남은 추도사에서 『김일성동지는 수령의 후계자,혁명의 영도자를 잘 모실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말하고 『오늘의 비통한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꿔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전당·전군·전민이 일심단결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빛내어 나가자』면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고 나섰다. 김영남은 대외문제와 관련,기존의 자주·평화·친선의 외교정책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해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에 입각해 통일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해 김일성노선을 답습할 것임을 밝혔다. 김영남에 이어 나온 화력발전소의 한 노동자는 김정일에 대해 『친애하는 김정일지도자는 곧 수령이며 지도자동지를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하고 김정일을 「수령」으로 호칭했다. 북한군 차수인 김광진도 추도사에서 『김정일을 당정군의 최고수위로 받들고 김정일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충성으로 받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에따라 김정일은 곧 당중앙위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소집등 요식 절차를 거쳐 총비서와 국가주석직에 취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관련,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21,22일쯤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해 김일성사망으로 공석인 국가주석에 김정일을 선출할 가능성이 많다고 전망했다. 이 당국자는 또 북한이 최고인민회의 소집을 전후해 김정일이 당총비서에 취임하는 요식절차를 거칠 가능성도 있다고 관측했다.
  • 당중앙위 중심 「집단지도체제」 가능성/추도사로 본 김정일체제·노선

    ◎“김일성 주체혁명 유지 계승” 천명/대미·일 비난 자제… 고립탈피 시도 20일 열린 김일성 추도대회는 사실상의 김정일 추대식의 성격을 띠었지만 동시에 김정일체제의 불안한 앞날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북한은 이날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김정일체제의 출범을 사실상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추도사를 통해 권력서열 8위인 김영남정무원부총리겸 외교부장이 당정을,혁명1세대의 막내격인 김광진인민무력부 부부장이 군을 대표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데서 분명해진다..즉 북한정권이라는 한배를 탄 핵심 기득권 세력들이 북한체제의 난파를 막기 위해 일단 김정일 후계구도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김영남이 읽은 추도사에는 종래의 수령 중심이 아닌 「당중앙위」를 중심으로 하는 단결을 강조한 데서 김정일체제가 과거 김일성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즉 모든 권력이 김정일로 집중되기 보다는 1백45명의 실력자로 구성되는 당중앙위원회,그중에서도 핵심권력자 10∼15명정도로 구성되는 정치국을 중심으로 권력이 행사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다.결국 김정일은 일단 권력의 정점인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를 맡더라도 실질적 정책방향은 당정치국의 원로급들의 합의에 의한 이른바 「당적 지배체제」방식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인 것이다. 이날 추도사에서 천명된 김정일체제의 대내외적 정책노선에서 새로운 방향제시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김정일의 이같은 취약한 입지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있다. 북측은 이날 대내적으로 이른바 「주체혁명 위업」이라는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할 것임을 천명했다.노동당 중심의 단결과 사상·기술·문화 등 3대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이미 「배고픈 사회주의」로 판명된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할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측은 또 이날 대남 노선에서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등 평화통일 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의 실현을 거듭 주장했다. 이는 분단 이래 북한의 지상목표였던 적화통일이 당분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남한으로부터의 흡수통일 우려를 없애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다.그러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대남 혁명이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통일전선전술,즉 우리 정부와 민간을 분열시키는 공세적 측면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10대 강령」에는 우리측이 수용하기 힘든 주한미군 철수 등의 실천적 요구가 부가되어 있고,북한이 주장하는 민족대단결도 우리의 당국과 비당국을 갈라놓으려는 「통일전선」형성을 염두에 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날 추도사의 대외정책 기조도 김일성이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했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이같은 기조를 구체화하는 각론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이 없었다.다만 종래 「주적」으로 설정했던 미·일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예의 「핵카드」를 통해 대미·대일 관계개선으로 고립 탈피를 시도할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 정오 북전역서 3분 묵념/김일성 추도대회 이모저모

    ◎김정일 「교시」없이 참관만 북한 김일성의 추도대회는 20일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 18분동안 평양 시내 중심부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일을 비롯한 당정군핵심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북한방송은 이날 추도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행사진행상황을 생방송으로 북한전역에 중계했고 이를 수신한 미CNN이 세계로 송출. ○…추도식이 진행되는 동안 김일성광장과 연결된 모든 대로와 주체사상탑앞 광장,전승광장등 평양시내 곳곳에는 대형스피커가 설치돼 수백만명의 주민들이 이를 청취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보도.또한 평양시내 모든 경기장과 체육관,학교운동장에는 수많은 시민들과 북한군 장병들이 운집해 인산인해. ○…추도대회 참석 규모는 김일성광장에 20만명,대동강 건너편의 주체탑 아래 10만명등 약 30만명에 이른다고 평양주재 한 외교관이 추산.이들 북한주민은 김정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이 외교관은 덧붙였다. ○…추도대회에서는 김영남 부총리겸 외교부장이 김정일의 위임으로 대표추도사를 낭독했으며 이어 근로자대표,농민대표,군대표 김광진인민군차수,해외동포대표등의 순으로 추도사를 낭독. 이들의 추도사는 하나같이 반제혁명투쟁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김일성의 혁명투쟁을 열거,추앙한 데 이어 김정일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자는 내용.특히 추도사 내용가운데는 과거 「미제국주의」를 극렬히 비방하던 내용이 없어 북·미3단계 회담 등 향후 북한의 대미외교 노선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모습. ○…김정일은 김일성 광장 앞면에 마련된 주석단 단상 중앙에서 검은색 상하의에 왼쪽 팔에 검은색 완장을 차고 선 채로 추도대회에 참석.그는 전날 장례식때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상체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서 있었는데 무척 초췌한 모습.당초 추도대회장에서 김정일이 새 지도자로서 북한 인민들을 향해 추도사를 겸해 「교시」를 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한 마디 말 없이 묵묵히 참관. ○…북한 주민들은 이날 김일성참배나 장례식때처럼 광적으로 울부짖는 모습과 달리 비교적 엄숙한 표정으로 대오를 지키며 질서있게 참석.그러나 추도대회가 1시간이 넘도록 진행된데다 날씨가 무척 더운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비틀고 자리를 벗어나거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기도.이들은 남자의 경우 검은색 상하의,여자들은 검은색 치마에 흰색 저고리로 동일한 복장이며 군인들은 인민군 제복 차림. 이어 낮 12시에는 북한 전역에서 추모경적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북한주민들은 3분간 묵념을 올렸다. ○…김일성 추도대회는 예정보다 40분 일찍 끝나 참가자들은 11시30분부터 해산하기 시작. 평양 주재 외교관들은 이처럼 추도대회가 예정보다 빨리 끝난 것은 무더운 날씨로 인해 대회장 곳곳에서 여성들이 쓰러지고 대형 스탠드에 있던 일부 초청 손님들도 견디지 못해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추측.
  • 「장례식」 보다 관심끄는 「추도대회」

    ◎김정일지지 과시용… 주민 대거 동원/“새진용 윤곽… 어떤정책 내밀까” 촉각 북한당국이 김일성장례식과 분리시켜 20일 별도로 열기로 한 추도대회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추도대회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김일성사후 북한의 새로운 지도부가 어떤 진용으로 짜여질 지 그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장례식에서 추도대회를 분리한 것은 장례는 김일성에 중심을 맞춰 충성심을 유발하고 추도대회는 후계자인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로 활용하려는 의도라는게 북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에따라 추도대회는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사후 북한내부의 정정불안 요소를 제거하는 방편으로 대규모 종교행사처럼 장중하면서도 군중들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성격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추도대회에서는 특히 김정일이 북한권력체제의 밑그림을 엿볼수 있는 「공개연설」을 할 것인지가 주목된다.왜냐하면 동양윤리상 장례식에서 상주가 등장해 인사말 이외의 말을 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장 큰 관심사항은 김정일의 총비서직및 국가주석직 취임을 공식 선언하느냐의 여부다.여기에 혁명1세대와 군부등 주요 인물들의 권력서열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는 것도 이번 행사의 중요한 변수다. 특히 새 지도부가 대남정책등 향후 정책노선에 관해 어떤 원칙이나 입장을 밝힐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이때문에 우리 정부당국 뿐 아니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변국들도 이날 열리는 김일성추도대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추도대회 장소로는 대규모 군중동원이 가능한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광장이 유력한 것으로 관측된다.이곳은 평양시내에서 1백만명 이상을 집합시킬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추도행사의 상징성도 살릴수 있기 때문이다. 추도대회는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의 1인자 등극을 기정사실화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1인자로 추대하는 행사로 진행될 것으로 예측된다. 추도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누가 어떤 내용의 추도사를 할 것이냐에 모아지고 있다. 추도사를 할 인물은 차기 권력질서 재편과정에서 새로운 실세로 부상할 가능성이 큰데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박성철부주석과 강성산정무원총리,최광군참모장등이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당·정·군대표들은 정책노선에 대해 언급하더라도 김일성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발전시키겠다는 식의 원칙적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대외정책도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 여러나라 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할 것』이라는 원론을 되풀이 하겠지만 대미관계나 대남관계 등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게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일성사후 사실상 권력승계절차를 마친 최고권력자 김정일이 어떤 말을 할지도 큰 관심사이다.전문가들은 그가 추도식 성격상 주민들의 허탈감을 달래주는 모종의 메시지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정일은 그러나 구체적인 시정방침을 발표하기 보다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계승·발전시키자』는 내용의 원론적인 발언을 하는 선에 머물 것으로 관측된다. 어쨌든 이번 추도대회는 김일성의 「권위의 공백」을 메우며 10일 남짓만에 김정일이 권력을 얼마나 확고하게 장악했는지를 가늠할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 「모택동식 절차」 준용 전망/장례식­추도대회 어떻게

    ◎추도대회 모보다 더 큰 규모로 치를듯 북한은 당초 17일로 예정된 김일성의 장례식 계획을 번복,19일에 장례식을 거행하고 이와별도로 20일에 추도대회를 갖기로 했다. 이같이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분리한 것은 장례식날에는 「눈물의 인산인해」를 이루고 추도대회는 소위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높이 평가하고 이의 계승이 중요하다며 김정일중심의 일심단결을 촉구하는 분위기 전환의 추대대회로 만들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추도대회의 여세를 몰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등을 개최,노동당 핵심지도자들이 비밀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추대」를 추인하려는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이 김일성의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어떻게 치를지는 알려지지않고 있으나 상당부분 중국 모택동주석의 예를 따를 것 같다는게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모의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 10일 뒤인 76년 9월18일 천안문광장에서 1백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북한당국은 김일성 사망 이후 12일 뒤에 열릴 추도대회를이보다 더 큰 규모로 치를 것으로 보인다. 김의 장례식행사는 대략 19일 상오10시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10시부터 주석궁(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됐던 유해가 김일성광장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이때 김의 사망이후 허탈감에 빠진 북한주민들의 오열을 유발,「울음바다」로 추모무드를 이끌어갈 것 같다. 이어 20일 거행되는 추도대회는 「민족의 태양」이라고 떠받들던 그의 위상을 감안,12시 정각 3분간의 묵념으로 시작할 것 으로 보인다.이때 평양시와 각도 소재지에서는 조포를 쏘고 기관차와 선박들이 일제히 고동을 울리게 되며 묵념이 끝나면 고인의 업적보고와 추도사 순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추도사는 한사람이 대표로 하기 보다는 당·정·군 뿐만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대표로 1명씩 나서 『김일성주석에 이어 김정일동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 우리식 사회주의를 완성하자』는 등의 충성다짐대회의 성격을 띠게 될 것 같다.물론 추도사를 맡는 사람은 향후 북한 권력의 중추가 될 실력자들이다. 추도대회가 끝난뒤 김일성의 시신은 일단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됐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시점에 평양교외 단군릉 근처에 조성된 김일성기념관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많다는 관측이다.
  • 권력안정·대남교란 “다목적 책략”/북은 장례식 왜 연기 했을까

    ◎「후광」 더 이용 세습체제 구축 강화/「조문파문」 부추겨 국론분열 속셈/김정일 권력승계에 이상기류 관측도 북한이 16일 돌연 김일성장례식을 연기한다고 발표해 그 배경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이 그토록 우상화해온 신성불가침적 존재인 김일성의 장례식을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이틀이나 연기한데다 그간의 사회주의국가 최고지도자들의 장례식에서 일정이 연기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북한 국가장의위원회는 『전국각지의 각계인민들의 김일성수령에 대한 조의참가가 날로 늘어남에 따라 이같은 인민들의 절절한 심정과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그 배경을 밝히고 있긴 하다.하지만 북한정권의 종래 행태나 속성으로 보아 이같은 피상적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때문에 정부당국과 북한전문가들은 ▲세습체제구축강화를 위한 내부결속 다지기 ▲조문파문확산을 겨냥한 대남교란목적 ▲김정일후계체제의 이상기류 등 크게 3가지 측면에서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 있다. 다만 현재로선 외부보다는 그들 내부의 필요성에 따라 장례식을 연기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한 편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우선 김일성장례식을 김정일의 후계체제강화에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연기했다는 시각이 제기된다.아직 입지가 불안한 김정일로선 그에게 권력을 물려준 아버지 김일성의 「후광」을 좀더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주민들의 조문행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바랄 것이라는 관측이다. 장례식을 영결식(19일)과 추도대회(20일)로 2원화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수도 있다.즉 일단 실제장례식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주석궁 등에서 간단히 치르고 김정일의 후계체제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군중집회성격의 대규모추도대회를 별도로 갖기 위한 계산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양의 김일성광장 등에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등을 총망라한 가운데 열릴 추도대회는 곧 김정일추대식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이 경우 1백만명이상의 군중집회를 소집하기 위해선 북한의 원시적 교통체계 등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준비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장례식일정의 연기가 불가피한것으로 추측된다.물론 김정일의 요즈음 건강상태가 무더운 날씨속에 2∼3시간을 버틸 형편이 아니라는 점도 또 다른 연기배경일 수 있다. 북한의 과거행태로 보아 김일성조문과 관련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는 우리측을 겨냥해 교란 내지 선동을 더욱 부추기려는 복선도 상당히 깔려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이는 북한이 최근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재개하고 학생운동권등에 대해 조문단파견을 선동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북측이 장례식을 주사파등 남쪽의 극렬반정부운동권행사와 연계해 치르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첩보도 있다.이는 경직된 북한식 사고로는 남한이 그 정도의 선전선동에는 흔들리는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외로 간과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일로의 권력승계의 이상기류를 반영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즉 김정일이 김일성만한 권력장악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핵심요직인사문제에 대한 북한 권력핵심부간 내부적 합의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김정일이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직을 모두 차지할 것인지,아니면 국가주석직은 이른바 혁명1세대에게 물려줄 것인지 내부입장정리가 덜 끝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결정적 이상이 생겼다고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장례식연기발표 이후에도 북한방송들을 통한 김정일받들기 분위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김정일이 장례식추도사 등을 통해 밝힐 향후 북한체제의 지향노선에 대한 당정치국위원들간의 이견해소차 좀더 시간을 갖기 위해 장례식이 연기됐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장례식연기의 정확한 진상은 폐쇄적인 북한사회의 속성상 어차피 시간이 지나야만 드러나게 마련이다.다만 정부로선 이 여러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장례식이 미뤄졌을 경우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이 그만큼 확대될 것으로 보고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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