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료계에서 여성 의사는 어떤 존재일까’
‘한국의 현재 의료계에서 여성 의사는 어떤 존재일까’ 이 뜬금없는 질문이 유효한 것은, 일반적인 성비로 따져봐도 전체 인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는 일반론이 시대의 인식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서 여성의 파워가 증대되고 있는 사실도 세상이 다 알고 체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길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마초적 기질과는 대비되는 성향을 갖도록 훈육되어 구심력적으로 섬세함을 체득하게 됐고, 이런 소양이 의료 분야에서 남성들과는 다른 특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남성이 크고, 무겁고, 중후한 질병을 잘 다루는 기질을 가졌다면, 반대로 여성은 작고, 가볍고(가볍다는 것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님), 단소한 분야를 잘 다루는 기질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질병은 크고, 무겁고, 중후한 특성과 작고, 가볍고, 단소한 특성을 모두 가져 어느 한 쪽의 특성만으로는 전모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질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도 어렵다. 여성 의료인의 위상이 결정적으로 자리매김 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바꿔 말하자면, 적어도 한국 의료나 의학 부문에서 여성은 수가 적어 잘 드러나지 않아도 절반의 몫은 감당하고 있다고 봐야 하고, 그래서 그들을 조감하고 조명하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지점은 박효순 경향신문 의학전문기자가 주목한 지점이기도 하고, 그가 여의열전(女醫列傳·경향신문 발간, 336쪽·1만 8000원)을 통해 여성 의학자 46인의 이야기를 풀어낸 실마리이기도 하다. 그는 이 저서로 한국과학기자협회가 선정한 2014년 ‘GSK의학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선, 그 책에 등장하는 여성 의료인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인 세계’로 바라보는 의료인식에 큰 허점이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소아 수술의 박귀원, 항암전선 협진 분야의 서창옥, 이종장기 이식 분야의 안규리, 심장초음파의 고감도 센서 분야 심완주, 시각재활 분야의 문남주, 완성형의 리더상을 보여준 김윤덕, 이명·난청 분야의 박시내, 소아 간이식 분야의 이남준, 난치성 근육병의 박영은, 소아알레르기 분야의 편복양, 맞춤 암치료 분야의 최은경, 항암 연구 분야의 라선영, 간경화 줄기세포 치료 분야의 박정화, 비뇨기 분야의 윤하나 등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라성 같은 인맥에 놀라게 된다.
필자는 시덥잖은 말들로 지면을 매축하지 않았다. 여성 의료인 개개인의 진료 및 연구 동향과 비전은 물론 한 의료인의 존재감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곁들여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아 선천성 기형 수술 분야의 박귀원 교수. 엄친딸이었던 그는 법대에 가고 싶었지만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법대에 가면 등록금을 안 대주겠다”고 으르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의대에 진학했다. 또 소아알레르기 분야의 편복양 교수는 언론인 아버지와 소녀시절부터 청진동으로 해장국을 먹으러 다닐 정도로 부녀간의 정이 남달랐다. 이종이식 분야의 권위자인 안규리 교수가 가진 ‘규리’라는 이름의 내력도 재밌다. 노벨상을 탄 퀴리부인의 이름과 영문이 같다. 과학자였던 아버지가 딸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그런가 하면 건양대 김안과병원의 김용란 원장은 전공의 시절, 아버지가 설립한 김안과에서 야간 당직을 서며 의사로서의 자질과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키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식으로 한국 의료를 이끄는 46인의 여의학자들을 낱낱이 검진하고 있다.
한국 의료계는 최근 들어 여의사들의 숫자가 늘고, 역할이 커지면서 바야흐로 여풍(女風)의 시대를 맞고 있다.
박효순 기자는 이들 여의사 46인을 錦上添花(금상첨화), 囊中之錐(낭중지추), 愚公移山(우공이산), 漸入佳境(점입가경), 靑出於藍(청출어람) 등으로 나눠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다. 여전히 남성들과 경쟁하고 있고, 아직도 도전을 이어가는 이들의 끈기와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개인의 업적 알리기나 의학 정보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 숨겨진 뜨거운 휴머니즘과 여의사로서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면서 “이제 여의사들은 국민건강과 의학발전에 기여하는 의료의 또다른 중심”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어 “여성 의료인들이 단순한 숫자의 증가를 넘어 한국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책은 질환 지침서로도 마춤하다. 일반인들이 진료 선택 시 참고하면 좋을 내용들이다. 또 의사국시 합격자, 수련 과정에 있는 전공의, 그리고 전문의 자격을 딴 의사들이 자신의 세부 전공분야를 정하는 데는 물론 청소년들이 꿈을 키우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도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과 이순남 이화여대 의료원장 등은 추천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여의학자들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랐음을 확인시켜준 드문 저술”이라거나 “글로벌 시대를 맞는 여의사들의 역할과 비전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심재억 의학전문기자 jesh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