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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옴부즈맨 칼럼] 신정아 보도와 언론의 품격/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신정아가 아동 유괴범이나 연쇄살인범,1000억대 사기범 그 이상의 취급을 받는구나. 따져보면 대학졸업장 가라(가짜)로 만들어서 대학교수한 잡범에 불과한데…민생이 어려운데 무슨 과거사냐 어쩌냐 그러더니 막상 주요 언론들이 한달내 붙들고 난리치는 사건은 이런 잡범이구나.” 신정아의 자진 귀국 소식을 전하는 지난 16일 한 신문의 인터넷판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번 사건이 문화계, 지식층, 정치권력이 연루돼 있는 데다 일탈적이고 기이한 구석이 있어 상당 정도 기사거리가 되겠지만 이렇게까지 언론이 ‘난리’를 칠 만큼 큰 기사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지난해 일본의 베스트셀러 1위는 후지와라 교수가 쓴 ‘국가의 품격’이었다고 한다. 여러 이유로 국가와 민족의 품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일본인들의 위기감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에서는 남성의 품격, 여성의 품격, 기업의 품격, 변호사의 품격과 같은 품격이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신정아 사건은 분명 이땅에 존재하는 대학의 품격, 지식인의 품격, 고위관료의 품격, 나아가 국가의 품격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언론이 스스로 품격 문제에 걸려들고 말았다. 대한민국 언론은 품격없는 신정아 사건을 보도하면서 선정, 왜곡, 추측, 공격, 심지어 마녀사냥식 보도와 같은 스스로의 품격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정론지를 자처하려면 아무리 추문 보도라 할지라도 객관적 사실보도 원칙을 지키면서 그때그때 권력 감시를 위한 문제제기 보도를 했어야 했다. 초기 신씨의 가짜학위, 권력층의 비호 의혹을 제기할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절제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마도 변양균 전 정책실장과 신씨와의 부적절한 관계 의혹이 나오면서 신문은 객관보도, 정론, 품격, 절제, 배려, 공정보도와 같은 소중한 저널리즘 가치를 너무도 쉽게 내팽개쳤다. 왜 이럴까. 신정아 보도는 어느새 의혹과 추측 보도, 공공의 영역을 넘어 사생활 영역을 침범하는 성추문식 보도, 싸구려 소설 같은 허구 보도로 상당부분 채워지고 있다. 어떤 신문사는 신씨의 누드사진을 실어 스스로 더 이상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과열경쟁체제에서 좀더 선정적으로 좀더 소설처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강박과 상업주의적 히스테리가 한국 언론들을 사로잡고 있다. 신정아 같은 사건이 터지면 신문들은 상당한 분량의 지면을 거의 매일 독자를 사로잡을 기사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이런 과열과 강박의 상업주의 공간에서 신문들은 객관과 품격 보도가 오히려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럴 때일수록 품격을 유지한 객관 보도는 양식 있는 시민 독자의 신뢰를 받는다. 서울신문은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사표 보도 이후 비교적 차분하게 보도했다.11일자 1면 “변양균 ‘신정아 해명’ 거짓말”, 다음날인 12일자 1면 “변양균 영향력 수사”, 그리고 15일자 3면 “눈덩이 의혹…변씨 개입 어디까지”와 같은 기사들은 담담한 제목과 객관적인 기사쓰기가 돋보였다. 하지만 13일자 1면 “홍기삼씨, 신정아 옆동 입주” 제목의 기사와 관련 기사들은 홍기삼 전 동국대 총장의 오피스텔이 신씨의 옆동에 있다는 사실이 마치 큰 의혹인 양 대서특필해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같은 날 5면 “신씨, 진짜애인 따로 있다?” 제목의 가십성 기사는 별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신씨는 사귀는 두명의 남자를 숨겨놓은 채 변 전 실장과 만났던 셈이다.”라고 해 기사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추문, 지저분한 소문이 나돌 때일수록 언론이 스스로의 품격을 세우면, 독자인 국민의 품격도 살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품격도 좋아진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 [옴부즈맨 칼럼] 아프간 피랍사태와 언론의 국제경쟁력/최영재 한림대 교수

    아프가니스탄 한인 피랍 및 피살 사건은 우리에게 충격과 분노, 우려, 당황, 기대, 절망과 같은 복잡하고 착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게 만들고 있다.21세기 세계화의 대표적인 부작용 현상인 테러의 희생자 대열에 우리 국민 23명이 연루된 위기사태 앞에서 정부와 언론, 시민들은 엄청난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다. 2001년 9·11 테러에서 보듯 테러는 세계화시대에 목격할 수 있는 일종의 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탈레반에 의한 한국 국민 피랍사태는 따라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세계화 공간에서 매우 소규모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탈레반을 압도할 물리적인 힘이나 외교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한국 언론은 관련 정보를 취재할 능력은커녕 테러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보를 적절히 걸러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나라밖 분쟁지역에서 발생한 국가적 위기사태에 관한 국내 언론의 취재력 부재는 우리 언론의 취약한 국제경쟁력을 드러냈다. 한국 언론은 외국 언론의 오보를 확대 재생산할 뿐 아니라 탈레반의 언론보도 전략에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 되고 있다. 한국 언론의 취약한 국제 취재망은 국가적 차원에서 투자해서 보완하면 된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사건에 관한 우리 언론의 근본문제는 사태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아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는 ‘희생양 찾기’ 보도의 문제를 반복하고 있는 데 있다. 가령 이번 납치 및 살해사건의 범인은 누가 뭐래도 탈레반이다. 어찌 됐든 범인이 명확한 마당에 피랍자와 그 가족, 정부, 그리고 국민 모두 피해자 일 수밖에 없다. 납치자이자 살인자인 탈레반을 처벌할 능력도, 엄두도 못 내고 괴롭힘만 당하고 있는 우리는 안타깝게도 피해자인 우리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다. 7월20일 경 피랍 뉴스가 날아들자마자 일부 시민들과 언론은 피랍자들의 위험지역 입국문제 등을 지적하며 피랍을 자초한 꼴이라고 성토했다. 서울신문도 7월21일자 3면 기사와 7월25일자 사설 등에서 피랍의 “주원인으로 일부 개신교회의 무분별한 해외선교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피랍자들이 사전에 좀 더 신중했더라면 불행한 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명백한 마당에 우리편 희생자를 공격하는 것은 내부의 갈등과 불신을 키우는 적전 분열 효과를 초래하므로 언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적지 않은 언론들이 또한 피랍의 원인을 아프간 입국 제한조치를 엄하게 하지 않은 한국 정부, 인도주의적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된 아프간 주둔 한국 부대, 심지어 아프간전쟁을 일으킨 미국 등에서 찾으려 했다. 이런 예들은 피랍이 발생한 정황은 될지언정 진정한 피랍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서울신문도 피랍자의 조속한 석방에 대한 염원이 지나쳐서인지 피랍에 관한 엉뚱한 원인을 나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과적으로 탈레반의 요구사항에 동조하는 결과를 빚는 비논리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7월23일 사설은 아프간 주둔 부대가 “아무리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테러의 표적이 된다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7월30일과 8월1일 사설에서는 탈레반이 요구하는 수감자 맞교환을 위해 아프간 당국과 배후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있을 수 있는 주장이지만 논리와 전략이 빈곤하여 탈레반에 이용 당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몇가지 해결방안이 서울신문안에서 발견된다.“네 탓, 내 탓 공방은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해도 된다(7월28일 사설).”는 것이고,“미국의 역할을 주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임론을 주장는 것은 온당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8월4일 사설).”는 것이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
  • [사고] 오피니언 필진 일부 바뀝니다

    서울신문 오피니언면의 ‘CEO칼럼’ ‘녹색공간’ ‘문화마당’ ‘옴부즈맨칼럼’ ‘지방시대’의 필진 일부가 7월1일부터 바뀝니다. ‘CEO칼럼’은 경영현장 리더들의 생생한 경험을 소개하며,‘녹색공간’은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환경칼럼입니다.‘문화마당’은 문화현장을 다각도로 조명하며,‘옴부즈맨칼럼’은 서울신문을 비롯한 언론보도를 날카롭게 분석·비평합니다.‘지방시대’는 지역별 전문가들이 중앙과 지역의 균형발전을 모색합니다.■ 오피니언면 필진 명단(무순)●CEO칼럼 신상훈(신한은행장) 조영주(KTF 사장) 박창규(대우건설 사장) 송진철(현대엘리베이터 사장) 이영하(LG전자 사장) 유용종(워커힐 사장)●녹색공간 민경석(경북대 교수·물환경학회장) 한면희(녹색대학 대표) 김제남(녹색연합 정책위원) 안준관(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팀장)●문화마당 이태동(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방민호(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신경숙(소설가) 허동현(경희대 교수·사학)●옴부즈맨칼럼 심재웅(한국리서치 상무) 김사승(숭실대 교수·언론) 최영재(한림대 교수·언론) 전혜영(고려대 학보사 편집국장·국문과 3년) 황용석(건국대 교수·신문방송) 금희조(성균관대 교수·신문방송)●지방시대 임정덕(부산대 교수·경제) 오창균(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김준태(조선대 교수·시인) 방은령(한서대 교수·아동청소년복지) 김선범(울산대 교수·건축) 최형재(전주아름다운가게 대표) 남기헌(충청대 교수·행정) 송재호(제주대 교수·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 [옴부즈맨 칼럼] 대통령 보도는 공정했는가/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어렵고도 쉬운 것이 보도의 공정성이다. 쉽게 얘기하면, 공정한 보도는 어떤 사안을 놓고 갈등관계에 있는 이해 당사자들을 최대한 억울하지 않게 보도하는 태도이다. 언론이 공정해지려면 갈등 사안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 언론의 공정성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나 주장들을 최대한 이해하는 마음으로 경청하고, 이를 충분히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일부터 출발한다. 언론의 공정한 보도는 이해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갈등 사안에 대해 건전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게 만드는 공론장을 만들어 낸다. 역으로 억울한 당사자들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공론장을 망가뜨리게 만드는 것은 언론의 섣부른 판단과 어설픈 공격 저널리즘 때문인 경우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평가포럼과 원광대 명예박사 수여식에서의 발언을 둘러싼 선거법 위반 논란 문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언론의 공정보도 문제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측도 밝혔지만, 대통령의 문제 발언들은 야당의, 그리고 야당의 편을 드는 일부 정파적 신문들이 지난 4년간 행했던 대통령에 대한 부당하고 공격적인 보도에 반론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발언들이 그동안의 억울한 평가에 대한 대통령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해당된다는 청와대측의 주장도 이해할 만하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선거법 위반 논란이 예상되는 문제의 발언들이 대통령이 꼭 발언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많은 언론들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 대통령이 자극적인 표현이 담긴 정치적 발언을 하기보다는 침묵이나 자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할 때에 정치적 발언들을 행하고, 헌법 소원까지 제기한 것은 선거 전략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언론으로서 한번쯤 제기해 볼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정당한 문제제기는 생각만큼 정당하게 비춰지지 못하고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대통령의 문제 발언에 대해 언론이 공정보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판하기 이전에 대통령을 보도하고 이해하는 일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 신문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객관보도 대신 비난과 공격으로 일관했다. 서울신문은 다소 객관적인 편이었지만 섣부른 판단과 비판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6월4일자 1면에는 “노대통령 ‘선거법 위반’ 논란” 정도로 객관보도를 하는가 싶더니,3면에 들어서는 “과대망상” “제발 조용히 계시는 게…”라는 정치권의 부정적 반응 일색의 해설기사를 싣고,31면 사설에는 “노 대통령의 대선 개입 정말 두렵다”는 제목으로 노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중립 위반이라는 중앙선관위의 판단을 서울신문이 미리 내리고 있었다. 객관기사와 의견기사의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6월6일자 1면의 ‘盧 의 전쟁’ 제하의 기사에서 “한치의 물러섬 없이 정면 충돌하는 ‘치킨 게임’을 스스로 연출하고 있다.”면서 이 기사를 정쟁의 시각에서 작성했다. 기사 중간에는 청와대가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할 테면 해보자.”라는 식이라고 했다. 아마도 기자가 추정했을 법한 문구는 보도윤리 위반 논란의 소지가 있다. 서울신문의 대통령 발언 보도는 대통령의 주장을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미흡해 그다지 공정하지 못했다. 경직된 선거법과 대통령의 표현자유의 충돌이라는 꽤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공간은 아예 마련되지 못했다. 서울신문의 문제제기와 비난은 정당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억울했으며, 상당수의 시민들은 소외됐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 “보복 폭행사건, 사회적 의미 보도 미흡”

    “보복 폭행사건, 사회적 의미 보도 미흡”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사건의 보도에서 초기에 익명 보도하다가, 실명으로 전환한 것은 적절한 보도 태도였다. 그러나 사건이 주는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데 다소 미흡했다.”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회 제8차 회의가 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 6층 회의실에서 열려 서울신문의 독자권익 보호 노력을 주제로 다각도로 의견을 나눴다. 이날 회의에는 위원장인 차형근 언론소송 전문 변호사를 비롯해, 서영복 행정개혁 시민연합 사무처장, 유선영 언론재단 연구위원, 최영재 한림대 교수, 임효진 중앙대 신문 전 편집장 등 위원과 박재범 서울신문 미디어지원센터장 등이 참석했다. 최영재 교수는 “서울신문이 김 회장 관련 기사를 너무 신중하게 접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의 의의에 대해 칼럼 등을 통해 다룰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서울신문은 관련 사설이 3개, 관련 칼럼이 2개로 다른 신문에 비해 다소 부족했다.”면서 “무엇보다 공인인 김 회장이 거짓말을 한 부분이 강조되지 않아, 사회적 교훈을 남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차형근 변호사는 “사건 보도에서 인명보도는 익명의 원칙이 사법부에는 수립돼 있다.”면서 “그러나 공적가치 및 공인 여부를 감안해 실명을 적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신문이 보도 셋째날부터 실명으로 전환한 것은 이미 사람들의 관심사로 부각됐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의 회장으로 이론의 여지없이 공인이기에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서영복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의 관련 보도는 좀 ‘분절(分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편집국 전체 차원에서 보도의 규모 강도 지속성 등 지면의 경제성과 차별성을 살리는 데 주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효진 전 편집장은 “이번 사건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돌이켜볼 계기였으나 단순 사건 보도로 성격이 국한됐다.”면서 “예컨대 지난 12일 김 회장이 종업원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술집에서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었다는 기사를 실었으나, 이 기사는 이번 사건의 맥락과 거리가 먼 내용으로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 전 편집장과 서 사무처장은 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서울신문은 적었으나, 맞춤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면서 “신문으로서는 외래어 표기가 매우 중요한 과제이므로, 표기에 좀더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주문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후원 신문발전위원회
  • [옴부즈맨 칼럼] ‘보복폭행 뉴스’의 사회적 가치/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어떤 뉴스든 신문에 실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신문에 보도된다. 시의적절하고 뭔가 돌출되고 의외적인 내용이 있으며, 유명한 사람이나 사건이 연루돼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데다 갈등을 일으키는 뉴스라면 신문에 실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것을 뉴스의 가치라 부른다. 언론은 이런 뉴스의 가치를 거의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빠른 시간 내에 취사선택을 하고 보도 방향을 정하는, 말하자면 뉴스의 냄새를 가장 잘 맡는 조직이다. 언론이 관행적 본능으로 수행하는 뉴스가치 결정은 그러나 항상 옳거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언론사간의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결정되는 뉴스가치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고, 기사도 그렇게 선택되고 기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언론이 놓치기 쉬운 것은 스스로 보도하는 뉴스가 사회에 미치는 진정한 사회적 가치이다. 요컨대 뉴스의 사회적 가치는 ‘나쁜 뉴스’를 사실대로 보도함으로써 ‘좋은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비뚤어진 부정(父情)에서 비롯된 보복폭행 사건은 액면 그대로 뉴스가치가 높은 기사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번 뉴스는 단순한 범죄보도나 스캔들, 구설수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이 결과 언론은 이번 사건보도를 통해 적지 않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해 냈다. 우선 경찰의 늑장 수사 등으로 축소 은폐, 누락될 뻔한 김 회장의 범죄행위가 사회의 공론장으로 옮겨져 논의되고 처벌대상이 된 것은 언론의 정의의식과 근성있는 취재보도의 공이 크다. 언론은 사건발생과 경찰의 늑장수사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4월말 첫 보도 이후 김 회장의 보복폭행 행위와 경찰수사의 문제점 등을 진실추구 차원에서 객관 보도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재벌회장도 범죄를 저질렀으면 예외없이 적절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정의 가치를 피력했고, 경찰의 소극적 수사 가능성을 경계하고 질책하는 보도로 경찰의 적극적인 정의실현을 유도했다. 서울신문은 사건보도 초기인 4월25일과 26일 연이틀 사회면에 “대기업 회장 ‘보복폭력’ 의혹”과 “경찰,‘회장님 보복폭행’ 눈감나?” 제목의 2단 기사를 ‘모 대기업 회장’이라는 익명으로 내보냈다. 익명 처리는 당시 혐의사실이 분명치 않고 입건조차 되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문제될 게 없다. 다만 초기 이틀간 2단으로 작게 처리한 것은 이 사건의 사회적 가치와 파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보도는 김 회장의 린치(사적 처벌) 범죄의 사실적 구성과 처벌의 당위성, 그리고 경찰수사의 문제점 등을 적절한 크기와 강도로 보도했다. 사설과 칼럼, 오피니언도 사건의 의미와 해결방향을 적절하게 다뤘지만 다소 부족했고 일부 기사와 불일치·모순의 문제를 낳았다. 가령 5월3일자 사설 “한화가 김승연 회장 사유물인가”는 김회장 부자의 개인적인 잘못을 해결하는 데 주식회사 한화의 인적 물적 자원이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일반기사에서는 그룹법무팀 등을 동원한 한화측의 움직임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중계보도하는 모순이 발견된다. 육철수 논설위원의 5월5일자 칼럼 “회장님 주먹이 날린 것들”은 “김 회장이 아들에게 돈과 특권과 폭력의 위력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번 사건에서 나타난 재벌, 아니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교육 가치를 제대로 꼬집고 있다. 반면에 5월1일자 3면의 “전문가가 본 ‘보복폭행’ 사건 문제점” 기사는 “부모를 잘 만나서 별 어려움 없이 젊은 나이에 거대 그룹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이같은 사태를 초래했다.”는 등의 전문가답지 않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기사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옴부즈맨 칼럼] 포털·댓글·UCC, 신문의 역할/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신문이 사실보도, 아니 진실보도를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멀지 않은 과거에는 정치권력이 입을 막고 사실을 비틀었다. 요즘은 자본이 언론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도 신문에 유언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권력과 자본은 정직한 편이다. 권력과 자본보다 훨씬 무섭게 신문의 귀와 입을 틀어막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래야만 되는 것으로 믿어버리는 지배적인 신념이다. 수십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무수한 사람의 인권과 생명을 앗아갔지만 신문은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의 횡포에 완장을 차고 나서기까지 했다.‘황우석 논문조작’ 사태가 터지기까지 발동한 국익이데올로기를 보라.‘국익’이란 이데올로기에 압도당한 신문은 진실추구가 아니라 신화와 환상, 허위를 만드는 데 급급했다. 요즘 유행하는 ‘포털’ ‘댓글’ ‘UCC’에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우려스럽다. 이들 신매체는 시민이 적극 참여하는 쌍방향의 하의상달식이기 때문에 분명 ‘민주적’이다. 하지만 ‘민주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따라서 해야 하고, 또 ‘민주적’이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면 자칫 몰매를 맞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매체가 종종 부화뇌동을 부르는 전체주의와 비판을 불허하는 독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포털은 국내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 등 대부분의 언론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언론공간을 창출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댓글과 토론광장 공간도 갖춘 포털은 제법 ‘민주적’이다. 하지만 인터넷공간에서 상업적 이해를 추구하는 포털은 뉴스사이트를 연예, 오락, 스포츠물 위주로 선정적으로 편집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이상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포털을 찾는 이들이 많은 경우 공공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민주적 시민이 아니라 선정과 흥미 위주의 포털뉴스의 소비자일 뿐이다(3월28일자 1면 ‘e권력 포털 대해부, 통제되지 않는 언론’). 엉겁결에 다수의 포털 뉴스공급자의 하나로 전락한 신문들은 독자들이 포털로 이탈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스스로가 이탈의 원인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있다. 정치권도 포털의 영향력을 관찰하면서도 우려보다는 편승에 관심이 더 많다(3월30일자 1면 ‘e권력 포털 대해부, 대선 주무르는 제5권력’). 소위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댓글’이 가장 비민주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댓글이 남의 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자기 말만 ‘지껄이고’ 공격과 비방, 욕설을 ‘내뱉는’ 악성 감정의 분출구가 된 지 오래다. 신문들은 저간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댓글이 ‘민주적’ 공간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경쟁사들도 하고 있기 때문에 악성 댓글공간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댓글제도가 없다. 여론마당(forum) 공간만 열고 그것도 욕설, 비방, 명예훼손 발언 등은 삭제·관리한다. 관리의 이유는 민주적 시민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제 이용자 창작 콘텐츠(UCC) 열풍이 불고 있다. 신문들은 또 ‘민주’의 꼬리를 달며 UCC를 선전하고 있다. 댓글 도입 때처럼 많은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UCC를 자사 서비스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과연 UCC는 민주적인 매체인가? 최소한 신문들의 UCC 보도는 민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신문들은 UCC를 보도하기보다 선전하고 있고, 감시하기보다 옹호에 급급하다. 이러한 정황에 비춰볼 때 지난주 서울신문이 시작한 ‘e권력 포털 대해부’란 탐사보도 시리즈는 용기있고 의미있는 기획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들 “소비자 중심의 기획기사를”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들 “소비자 중심의 기획기사를”

    서울신문 제 6차 독자권익위원회가 지난 2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 6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위원들은 지난 한달 서울신문의 보도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제기했다. 회의에는 차형근 변호사, 김경원 서정법무법인 상임고문, 이문형 산업연구원 해외산업협력팀장, 임효진 중앙대 신문 전 편집장, 장영란 한중문예진흥원 이사장과 새로 위원으로 위촉된 서영복 행정개혁 시민연합 사무처장, 유선영 언론재단 연구위원, 차병직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최영재 한림대 교수 등 9명이 참석했다. 박재범 서울신문 미디어지원센터장이 간사로 참여했다. 위원들은 이날 차형근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차형근=서울신문은 제호 대로, 전국민의 절반쯤이 사는 수도권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수도권 기사가 칭찬일색으로 다뤄져 방향을 조정하는 게 필요하다. ●임효진=서울신문 인터넷에는 사진이 없을 때가 많아 아쉽다. 또 기사 중 일부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이 ‘그냥 그렇다더라.’는 식의 중계에만 머물고 있어 아쉽다. 기사와 맞지 않는 제목도 있다. 일례가 지난 22일자 ‘17년 만에 소비 최소’라는 기사는 제목을 보면 ‘경제가 위축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내용은 국가경제 외형은 성장했지만 국민 호주머니 사정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장영란=최근 과천청사 앞을 지나다 보니, 의료법 개정을 둘러싸고 시위가 있었다. 다음날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찾아봤으나 기사가 없었다. ●김경원=최근 정치인 관련 기사를 너무 확대해 다루고 있다. 일반 독자로서는 그다지 관심 없는 부분까지, 시시콜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신문들마다 어떤 주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또 기사를 다룰 때, 홍보성으로 흐를 때가 많다. 팩트에 입각해 기사를 써주길 바란다. ●이문형=기업관련 기획이 있기를 바란다. 지난 한달 서울신문을 보니,1면에 거의 매일 6자회담 관련 기사가 실렸다. 소비자는 북핵에 이미 관심이 없다. 독자로부터 5분의 관심을 빼앗기가 쉽지 않은데 타 신문과 차별화하려는 시도가 적어 아쉽다. 무엇보다 소비자 중심의 기획기사를 바란다. ●최영재=서울신문은 너무 점잖게 간다. 다른 신문에 비해 덜 선정적이라는 점은 장점이다. 그러나, 이슈를 제기하는 데 미흡하다는 것은 약점이다. 이슈를 지속적으로 끌어가는 노력이 적다. 또 기획기사도 단발성으로 흘러간다. ●서영복=관급, 홍보성 기사를 신문에서 다루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신문을 보다 보면, 간혹 팩트 자체가 다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점은 삼가야 한다. 또한 최근 서울시의 공무원 퇴출 등을 다룰 때, 단순전달에 치우치고 있다.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 ●차병직=독자권익위원회의 기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독자란 현재의 구독자뿐 아니라 잠재적인 독자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신문은 독자와 시민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하며 신문법에 의해 설립된 독자권익위원회는 공정성에 중점을 두어 기사를 살펴봐야 한다. ●유선영=독자권익은 독자가 원하지 않는 기사가 지면에 많이 할애될 때에도 침해된다고 봐야 한다. 이 같은 유형의 침해 사례 등을 앞으로 주된 논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수도권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방향과 맞지 않는 기사가 좀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후원 신문발전위원회)
  • [옴부즈맨 칼럼] 종이신문의 경쟁력/최영재 한림대 교수

    거의 실시간으로 뉴스를 제공하는 24시간 TV뉴스 채널, 독자와의 쌍방향 교감이 가능한 인터넷 뉴스, 여기에 이동중에 뉴스 정보를 시시각각 제공하는 모바일 뉴스,DMB 서비스 등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뉴스매체의 미래는 이동중에 인터넷을 검색하고 동영상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동형 인터넷 멀티미디어 뉴스’의 형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전망은 신문에는 결코 좋은 뉴스가 될 수 없다. 속속 등장하는 경쟁 매체들은 신문의 입지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생존전략은 너무나 자명하다. 새로운 매체환경 변화를 감안하여 신문의 정체성을 적절히 변화시켜 ‘신문’으로 당당히 살아남거나, 아니면 새로운 매체와 기능통합을 단행하여 다른 이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후자는 요즘 너무나 자주 목격되는 매체간 인수·합병 현상이다. 좀 극단적이지만 신문이 포털 사이트에 완전히 편입되는 시나리오도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텔레비전의 등장에 따른 라디오의 생존전략 구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라디오는 텔레비전 등장 이후 음악, 토크쇼, 뉴스 채널 등 장르의 전문화를 통해 ‘라디오’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했다. 라디오의 이동성과 소지의 편리성은 무거운 텔레비전과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은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위축되고 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구독률이 크게 하락했다고 하지만 하락속도는 잦아들 것이고, 어떤 신문들은 구독자가 늘기도 한다. 신문은 그만큼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천년의 문자문화는 신문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종이신문은 낡았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저력을 가지고 있다. 종이신문에 담아야만 빛이 나는 기사들이 분명히 있다. 텔레비전, 포털,DMB와 같은 뉴미디어는 새롭고 빠르고 화려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묵직한 기사를 담기에 부담이 된다. 속보 경쟁은 더 이상 신문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신문은 충분히 진지할 수 있고, 그래서 중요한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저널리즘 고유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기획기사, 심층보도, 탐사보도는 그 어느 매체보다 신문에서 다룰 때 제 맛이 난다. 서울신문 1면의 기획 기사들은 신문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일부 보수 신문의 1면 기사와 달리 정파적이거나 값싸게 선정적이지 않아서 좋다.2월15일자 1면 “5월에 피던 산괴불 요즘은 3월에 ‘활짝’”은 기상청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봄이 지난 10년 사이 2주 이상 빨라지는 등 지구온난화 징조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알리는 기사였다. 1월7일자부터 실은 탐사보도 “1·11 대책 뒤집어 보기”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분석이 아니라 현장의 분위기와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구체적 분석이 들어간 뉴스였다.2월5일자 1면 “국내체류 외국인 범죄건수 선진국이 개도국보다 많아”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자료를 단독취재해 동남아 등 개도국 이주노동자보다 선진국 출신 외국인의 범죄율이 높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동남아 노동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켰다. 2월16일자 1면 “증권사 4년간 1조 3000억 꿀꺽”은 고객들이 투자를 위해 일시적으로 맡겨 놓는 예탁금의 운용 수익을 증권사들이 80% 챙기고 고객에겐 20%만 돌려준다는 고발성 기사였다. 다만 이 기사는 취재원과 기자간에 통용되는 전문 용어 중심으로 서술돼 일반독자를 위한 쉬운 글쓰기 노력이 아쉬웠다. 심층-탐사-기획 기사야말로 뉴미디어 시대 신문의 활로를 열어주는 경쟁력이다. 심층-탐사-기획은 어렵고 품이 많이 들어간다. 그만큼 기획기사는 자칫 일단 해치우고 보는 일과성이 되기 쉽고 글쓰기도 도식화되기 쉽다. 하지만 기획기사를 기획기사답게 쓰는 것만큼 신문을 살리는 길도 많지 않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
  • [옴부즈맨 칼럼] 신문 읽는 재미와 도식적 기사/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올해 중앙지 신춘문예 작품들을 분석한 1월5일자 25면의 기사 제목은 ‘밥상은 커졌지만 맛은 별로’이다. 이런 비유적인 제목은 요즘 한국 신문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다. 한국 신문의 지면은 많이 늘었는데 지면의 내용은 오히려 황폐해졌다. 신문들은 지난 10여년간 경쟁적으로 지면을 늘려 갔지만 독자들은 신문 읽는 재미가 별로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급기야 신문 읽는 시간이 형편없이 줄어들면서 신문을 떠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 신문 구독률은 40%를 밑돌고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신문이 사람들에게 신문 읽는 재미를 예전만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취향이 변하고 인터넷과 같은 경쟁 매체가 속속 등장했는데도 신문은 별로 변한 게 없다. 관급 기사와 도식적인 기사 쓰기가 여전하다. 아침에 신문을 펼쳐 보면 대부분 이미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문자를 통해 접한 뉴스여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분석기사나 기획기사에서도 참신한 시각이나 예리한 분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주장을 담은 사설이나 칼럼도 제목만 봐도 뻔한 경우가 많다. 또다시 해가 바뀌었지만 신문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신년특집을 편집하고, 연중 시리즈 기사를 기획한 뒤, 곧이어 일상적인 취재와 보도로 돌아간다. 지난해에 했던 신문사의 일은 올해도 반복된다. 관행과 도식이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라 편리하고 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진정한 위기는 위기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찾아오는 법이다. 새해 들어 신문들이 지난해 했던 것처럼 도식적인 뉴스를 무심코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나는 신문 위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서울신문도 예외가 아니다. 새해 들어 서울신문을 읽으면서 나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많지 않았고 눈에 띄는 기사도 정작 기사 본문을 읽다 보면 예의 식상한 뉴스의 도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1월 1·2일자 ‘신년특집 여론조사 분석기사’와 8년간 파리 특파원을 역임한 함혜리 논설위원이 시리즈 기사로 쓰고 있는 5일자 16면의 ‘프렌치 리포트’-나랏빚 늘어도 복지축소는 ‘NON’, 연세대 허경진 교수를 외부필자로 해서 2일자부터 시작한 특집기사 ‘조선의 테크노크라트, 한양의 중인들’은 다른 신문에서 읽을 수 없는 분석과 재미를 제공했다. 언뜻 사회적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기획기사처럼 보이지만 도식적인 기사 쓰기에 빠져 식상해진 사례는 5일자 9면 ‘대학생 46% 여친폭행한 적 있다’ 기사이다. 이 기사는 최근 신혼 탤런트 부부의 폭행 결별 사건을 계기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칫 은폐되고 사회적 문제가 되기 어려운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좋은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기사는 그러나 데이트 중인 남자가 행하는 언어적 모욕까지 포함한 데이트 폭력 경험을 조사한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제목을 ‘46% 여친 폭행’으로 달아 마치 남자 대학생의 절반 정도가 폭력을 행사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고,“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데이트 폭력’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서술함으로써 사실상 선정·과장·왜곡 보도가 됐다. 이처럼 심각하고 구조적인 사회적 문제를 금방 눈에 띄는 큰 사건처럼 보도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해묵은 사건보도 관행으로 신문사 편집국에서 능력있는 기자가 되는 길이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제 이런 기사로 문제가 진정 해결된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더구나 이러한 과장과 선정·왜곡 보도에 관심도 흥미도 없다. 독자들은 신문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기사에 목말라하고 있을 뿐이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사고] 오피니언 필진 바뀝니다

    [사고] 오피니언 필진 바뀝니다

    서울신문 오피니언면의 ‘CEO칼럼’ ‘녹색공간’ ‘문화마당’ ‘옴부즈맨칼럼’의 필진 일부가 새해부터 바뀝니다. 이와 함께 중앙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지역별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내용을 담은 칼럼 ‘지방시대’가 신설됩니다. 기존 ‘CEO칼럼’은 경영현장 리더들의 생생한 경험을 소개하며,‘녹색공간’은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환경칼럼입니다.‘문화마당’을 통해 전문가들이 문화현장을 다각도로 조명할 예정이며,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가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옴부즈맨 칼럼’ 필진들은 서울신문 지면을 날카롭게 분석·비평할 것입니다. ■ 오피니언면 필진 명단(무순) ●CEO칼럼 문국현(유한킴벌리 대표) 정이만(63시티 대표) 한기선(두산그룹 주류BG 사장) 이종수(현대건설 사장) 박종원(코리안리 사장) ●녹색공간 박정임(KEI 책임연구원) 이기영(호서대 식품미생물학과 교수) 김제남(녹색연합 사무처장) 안준관(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팀장) ●문화마당 코디 최(문화이론가·화가) 한명희(예술원 회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김지우(소설가) ●옴부즈맨 칼럼 민영(경희대 언론학부 교수) 심재웅(한국리서치 상무) 남재일(언론재단 상임연구위원) 김사승(숭실대 언론학부 교수) 최영재(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전혜영(고대신문사 편집국장) ●지방시대 임정덕(부산·경남·부산대 경제학과 교수) 오창균(대구·경북·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김준태(광주·전남·조선대 교수·시인) 방은령(대전·충남·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과 교수) 김선범(울산·울산대 건축학부 교수) 최형재(전북·전주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 남기헌(충북·충청대 행정학부 교수) 송재호(제주·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제주대 교수)
  • 괴물 드디어 정상 서다

    괴물 드디어 정상 서다

    개봉 초부터 타이틀 그대로 각종 기록을 괴물처럼 내뱉던 ‘괴물’(제작 청어람)이 최다관객 기록을 2일쯤 세울 것으로 보인다..‘괴물’은 지난달 31일까지 1223만 8450명의 관객을 모아 지난 4월 ‘왕의 남자’가 세운 최다관객 기록 1230만 1289명에 바짝 다가섰다.2일부터는 일본에서 250개 스크린을 통해 개봉하는데 벌써부터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 기록제조기 ‘괴물’이 남긴 것은 ‘괴물’은 괴수 영화의 장르적 특성, 할리우드에 비해 미숙한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불신 등에도 불구하고 개봉일 최다관객동원 기록을 세우기 시작해 기록을 줄줄이 경신해왔다. 여름방학을 낀 개봉 시기, 국내외 영화 중 유례가 없이 전국 1640여개 스크린 중 620개에 걸린 점, 괴수영화 속에 녹인 ‘가족애’ 코드,12세 관람가의 낮은 등급까지 흥행의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단시간에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왕의 남자’ 기록을 넘어 13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 총매출액은 900억원 정도가 예상된다. 제작비의 9배에 달하는 규모다. 해외 수출액은 70억원, 지상파·케이블 등 부가판권 수익은 35억원을 냈다. # 괴물을 통해 풀어야할 숙제는 ‘괴물’에 대해 좋은 영화다, 나쁜 영화다라는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 ‘괴물’이 던진 여러 논란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에 쌓인 숙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은 스크린쿼터 문제다. 최영재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국장은 “한 해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를 2개나 냈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이것을 한국영화 경쟁력의 근거로 삼고 스크린쿼터 축소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산업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해 “스크린쿼터를 20%로 축소하면 한해 매출 1277억원, 고용 2439명의 감소 효과가 난다. 매해 1000만 관객 동원 영화가 나와도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영화시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형기 시나리오작가는 “거대배급사의 스크린 점령, 마케팅의 힘이 아니었다면 괴물의 연이은 성공이 가능했을까 생각해볼 문제”라고 화두를 던졌다.‘괴물’이 스크린을 독점했다는 것은 관객에게 그만큼 선택의 폭이 제한된다는 의미를 갖는다.‘시간’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이 “국내 개봉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도 ‘괴물’의 독식 논란에 불을 질렀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옴부즈맨칼럼] ‘몰아가기’식 부동산 보도/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짧은 기간에 폭등한 부동산 가격과 관련, 언론의 보도태도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언론의 부풀리기 보도나 과장보도가 가격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언론으로서는 투기바람이든 무엇이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을 사실 그대로 보도했을 뿐이라는 말로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있는 그대로, 사실 보도를 한 것일까. 진실은 오히려 언론이 부동산과 관련된 보도를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몰아가기’를 하고 있다는 쪽에 가깝다. 최근의 부동산 관련 기사만 들여다봐도 왜곡보도 관행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언론은 부동산 가격의 상승, 그것도 급등 쪽을 뉴스로 삼는 경향이 있다. 언론은 지면과 시간의 제한으로 인해 전국의 부동산 가격 동향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뉴스가치가 떨어지는 부동산 가격의 보합세 또는 하락보다는 좀더 흥미로운 뉴스일 수 있는 가격상승 쪽에 초점을 맞춘다. 부동산 가격은 단기적으로 폭등할수록, 특정지역에서 돌출적인 현상을 보일수록 뉴스가치가 높아진다. 서울 주변 일부지역의 부동산시장에서 나타난 단기간 가격 폭등을 언론들이 일제히 크게 보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신문은 30평짜리 아파트가 처음으로 10억원대를 넘어섰다며 마치 스포츠 경기의 기록을 중계하듯 보도한다. 이런 보도는 그 자체로는 사실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일부지역의 특이한 현상을 전달한 기사가 마치 전국 부동산시장이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많은 언론들이 실제로 부동산 관련 기사에 “전국 투기 광풍” “땅값이 춤춘다”와 같은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로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부동산 가격동향 보도는 많은 경우 사실보도의 요건을 위배하고 있다. 신문에서 보도하는 부동산 가격은 부동산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 실제가격이기보다는 파는 측에서 부르는 호가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기사들을 보면 전반부에 실제 가격이 급상승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다가 후반부에 “실제 거래가 이뤄지지 않아도 호가 중심으로 들썩일 수 있다.”며 슬쩍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기사에 쓴 가격이 호가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건설교통부는 최근 급등하는 서울 강남의 부동산시장에서 호가와 실제 거래가격 사이에는 최고 2억원 이상의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호가를 중심으로 한 보도가 그만큼의 오보를 낸 셈이다. 언론이 이처럼 부동산 가격 상승 쪽에 초점을 맞추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호가를 중심으로 보도하는 것은 취재원을 부동산업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는 산재된 실제 부동산시장을 취재하는 대신에 부동산업자를 찾아가 가격동향을 묻는 것이 손쉽고 효율적일 것이다. 이때 가격이 오를수록 유리한 부동산업자들의 입장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부동산 기사가 몰아가기식 보도를 일삼는 것은 취재보도 구조와 관행이 고착돼 있기 때문이다.176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신문들은 지방의 부동산시장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다(서울신문 6월25일자 3면-‘들썩거리는 지방 부동산시장’). 이와 같은 보도는 이전의 부동산 관련 보도에서 보듯 매우 도식적이다. 기사 내용도 공공기관 이전이 발표된 시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예측보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투기바람이 불어 닥칠 것으로 보인다.”라고 서두에 서술한 뒤, 기사 내용은 “전국적으로 땅값이 올랐다.”고 보도하고 있다. 실제 오른 것이 거래가격인지 호가인지 구별도 모호하다. 그러고는 말미에 “오를 수 있으며” “호가 중심으로 들썩일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언론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집중적으로 보도할수록 실제 가격상승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다.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 언론은 이제 객관적인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주역의 하나가 되고 있다. 언론이 부동산 가격 폭등에 적극적인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객관보도를 위한 반성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옴부즈맨칼럼] 신문의 위기… 뉴스의 위기/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요즘 신문업계의 주요 화두는 ‘신문의 위기’이다. 위기의 핵심은 신문 구독자들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는 것이다.5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 열명 가운데 여섯명이 가정에서 신문을 구독했는데, 이제는 열명 가운데 네명만이 구독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구독률 하락이 가속화되고 있어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은 인터넷 등 다른 매체에서도 공공문제를 다루는 뉴스를 좀처럼 읽지 않는다. 읽어도 연예나 스포츠 정보를 보는 정도이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는 사람은 역시 신문을 읽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뉴스를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신문 위기의 심각성은 이처럼 사회 전체로 볼 때 뉴스를 읽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뉴스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뉴스를 읽지 않을수록 사회 공공문제에 대한 관심도 줄어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뉴스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된다. 신문업계와 언론학계는 요즘 왜 신문 구독률이 하락하고 있는지 분석과 진단에 나서고 있다. 필자가 참여한 한 연구는 최근 5년 동안 신문을 구독하다 중단한 구독 이탈자와 신문을 중도에서 바꾼 구독 전환자를 분석해 봤다. 분석결과의 일부를 요약하자면, 최근 5년간 중소형 신문에서 소위 ‘조중동’으로 불리는 대형신문으로의 전환이 반대의 경우보다 많아 대형신문의 상대적 시장 지배력은 더욱 강화됐다. 대형신문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한 중요 요인은 경품과 구독료 할인 등 경품마케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신문이든 중소형 신문이든 최근 5년간 심각한 구독 이탈을 경험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대형신문에서는 그만큼 더 많은 구독이탈자가 나왔다. 구독자가 줄어드는 이유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경품 마케팅이 한몫을 하고 있었다. 신문을 지속적으로 구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사의 내용이나 편집, 논조가 마음에 들어서 구독한다고 응답한다. 반면에 구독 전환자들은 절반 이상이 경품과 구독료 할인 등 신문 외적인 이유를 전환 사유로 든다. 그러다 인터넷이나 무가지 등 유사상품이 있으면 구독을 중단하는 것이다. 결국 신문의 저널리즘 가치를 평가하기보다 경품이나 할인에 현혹되기 쉬운 사람들이 신문 구독을 중단하기 쉽다는 얘기다. 신문의 불공정 편파보도도 신문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인 것으로 밝혀졌다. 신문구독을 중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도 신문들이 전반적으로 정치권력화 되었으며, 특히 조중동 등 대형신문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상대로 불공정 편파보도에 대한 반발과 냉소가 구독 중단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신문의 경우는 최근 5년간 전반적으로 심각한 구독 이탈을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서울신문 구독자 대부분은 이전부터 구독해온 사람들이다. 서울신문의 구독자들은 경품이나 구독할인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구독한 사람이 많고 다른 신문에 비해 신뢰도가 높다. 결국 신문은 신뢰성과 공정성을 파는 저널리즘 상품이다. 시대를 읽는 신속 정확한 기사, 깊이 있는 분석, 고품질의 논평을 제공하는데 만족하는 독자는 신문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독료를 깎거나 경품을 받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경품 마케팅의 영향력에 일단 휘둘리게 되면 모두 그렇고 그런 종이신문으로 전락해 버린다. 한동안 우리 사회는 신문을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몰두해 왔다. 일부 시장지배적 신문들이 특정 정파를 부당하게 편드는 편파 보도를 일삼고 신문배급 시장에서 경품과 구독료 할인 등 부당한 거래를 한 만큼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문의 몰락으로 인한 뉴스의 위기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신문 비판과 함께 신문읽기 운동을 함께 해야 할 판이다. 물론 신문이 먼저 공정과 신뢰가 있는 저널리즘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아마도 개혁의 고통이 곧 밀려 올 것이다. 신문이 사회의 문화적 자산에서 싸구려 할인상품으로 전락하기는 빠르고 쉽지만 반대로 신뢰와 공정을 되쌓으려면 더디고 어렵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옴부즈맨칼럼] 性문제의 통계와 오보/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얼마 전 서울주재 외교관, 외국회사원 등과 함께한 한 모임에서 한국인들의 성문란 풍조가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외국인들은 모임에 참여한 한국사람들을 붙들고 영자신문에 난 성풍조에 대한 여론조사 보도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보도 내용은 기혼남녀 가운데 약 40%가 배우자 외에 다른 성관계 상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외국인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신문에 났다는 이유로 일단 사실로 치부해 버린 뒤 낄낄대며 즐기는 안주로 삼아 버렸다. 돈 문제와 함께 성과 관련된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이기 때문에 그만큼 뉴스가 되기 쉽다. 돈 문제는 사실관계가 틀리면 금전적인 손해로 연결될 수 있지만 성문제는 조금 사실에 어긋난다 해도 바로 경제적 손실이나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언론은 그래서 성문제를 다룰 때 조금은 과장해서 흥미롭게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내용 때문에 꼼꼼히 사실 관계를 따질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문제의 ‘40% 외도’는 한 성인 인터넷사이트가 설문조사한 결과를 연합뉴스가 보도했고, 이를 영자지 등 일부 신문들이 그대로 받아서 기사화하면서 번져 나갔다. 그러나 이는 성인사이트의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이었으므로 당연히 그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보도는 설문에 답변한 성인사이트 회원이 대한민국 남녀를 대표하는 것처럼 기사화했기 때문에 명백한 오보이다. 이처럼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문제와 관련해 과장과 왜곡, 선정적인 내용의 검증 없는 보도가 난무하고 있다. 지난달 말 대부분의 언론이 크게 보도한, 부부 스와핑 사건도 경찰이 발표한 스와핑사이트 유료 회원수를 근거로 마치 우리 사회에 변태적인 스와핑이 꽤 만연한 것처럼 묘사됐다. “경찰은 회원들 중 사회지도층과 부유층도 다수 있는 것으로 파악돼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서울신문 3월23일자)는 표현은 이런 종류 기사의 어떤 도식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사이트의 회원이 실제 스와핑 행위자들인지, 다른 성인 사이트의 회원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노력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극소수 일탈적 행위자들의 문제를 커다란 사회문제로 둔갑시킨 과장보도의 혐의가 짙다. 이런 보도는 대체로 조금 지나면 잊혀지는 일회성 기사이기 때문에 통계수치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사람도 많지 않다.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보도는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올해부터 바로잡아 가고 있다. 이혼율과 관련한 대표적인 오보는 결혼한 두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한다는 통계수치다. 지난해 대부분의 언론들은 47.4%의 이혼율을 제시하는 오보를 냈다. 이 수치는 주로 20∼30대인 그 해 결혼한 쌍들과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이혼하는 쌍을 비교하는 식의 엉터리 통계인데, 언론들은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보도해 버렸다. 이 통계대로라면 한국은 이혼 왕국이 된다. 성이나 결혼문제에 관한 보도가 진실한지의 여부는 기사 안에 인권문제가 내재돼 있느냐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인간의 권리를 염두에 두는 기자의 의식은 성문제 보도를 선정 왜곡보도의 함정으로부터 구해낸다. 서울신문에서 노인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는 특집 ‘큐! 아름다운 노년’ 가운데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기사(4월11일자)는 성과 인권을 적절히 연결시킨 좋은 기사이다. 우리는 노인을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그 같은 호칭 자체가 늙었음을 강조함으로써 노인들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설자리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기사는 약 60%의 노인들이 성생활을 하고 있다는 통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노인들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복원하고 있다. 노인들은 실제 체험하고 있지만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문제의 한 단면을 인권의 시각에서 사회문제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 기사이다. 그러나 “62%가 성생활…뜨거운 황혼”이라는 제목은 노인의 성문제를 한순간에 희화적인 얘깃거리 정도로 추락시킨 것은 아닌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옴부즈맨칼럼] 대통령과 언론의 ‘거리’/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지난달 초 있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의회 연설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광경이 하나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든 의원들이 대통령 연설을 열심히 경청하다가 주요 대목마다 박수를 치는 것은 물론, 때로는 기립 박수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국정연설 장면을 유심히 보니 역시 우리나라 야당 의원들의 박수는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이날 연설을 중계했던 국정TV는 이런 장면이 민망했는지 나중에는 밝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여당 의원석 쪽을 주로 편집해서 보여줬다. 과거 여야의 입장이 지금과 반대일 때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여당의원들은 언제나 박수를 치고 야당쪽은 시큰둥하다. 치열한 선거판에서 적수였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동안 쌓였던 감정적 앙금 같은 것을 일단 접어두고 최소한의 존경을 표시하는 일은 나름대로 세련된 정치문화의 소산이다. 거기에는 상대를 높임으로써 나도 높아진다는 상생의 지혜가 깔려 있다. 더불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예우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식이 내재돼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상대를 배려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입장에만 솔직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후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야당에서는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발언이 튀어 나왔다. 노 대통령도 있는 그대로 표현을 하는 성격 때문에 구설수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다 싶었는지 일부 언론은 드러내 놓고 대통령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참에 빗나간 언론을 손봐주겠다고 나섰다. 지난 2년간 이처럼 너무 적나라하게 자기 목소리만 내는 바람에 모두가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은 올해 들어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가 한결 원만해진 느낌이다. 우선은 노 대통령의 정치적 호흡이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다. 국회 국정연설에서는 몇 가지 유머로 의원들의 폭소를 자아내면서 연설장 분위기를 바꾸더니, 언론관계에 대해서도 최소한 권언유착은 사라진 것 같다며 모처럼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서울신문 2월26일자 보도). 청와대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언론의 대통령과 관련된 보도가 전보다 덜 공격적이게 된 것은 대통령의 행동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무차별적인 언론 노출이 자제되고 정책 발언들이 실용적인 민생문제에 많이 할애되면서 언론의 공격 빌미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계획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면 청와대의 공보 기능이 제대로 작동된 것일 테고, 우연한 것이라면 서둘러 새로운 언론관계를 제도화시킬 일이다. 꽤 오래전에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연극의 제목처럼,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에서도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짐으로써 권력간 유착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져서 척을 지는 관계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언론은 국가의 상징이자 국정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대통령은 언론의 부당한 공격을 공박할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권력 감시에 나서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정하는 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대통령과 언론 사이에 아름다운 거리가 유지돼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두 기관 사이에 국민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여야간의 야합도 정쟁도 원하지 않듯이 권력과 언론간의 유착도 소모적인 다툼도 바라지 않는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옴부즈맨 칼럼]희망 주는 언론을 기대한다/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시간의 바뀜에 누구보다 민감한 것이 언론인가 보다. 다시 맞은 새해에 언론들은 하나같이 기대와 희망, 비전과 혁신, 그리고 미래를 노래하고 있다. 바로 엊그제까지 지면을 채웠던 갈등과 반목, 비난과 공격, 분열과 증오의 목소리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해맞이 언론 보도와 같기를 기원하고 싶다. 하지만 새해의 신선한 공기가 시들해질 무렵이면 다시 분열과 갈등의 보도가 고개를 쳐들고 일어날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언론이 이제 화합과 비전을 전달하는 파수꾼이 될 때가 됐다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비록 그것이 새해벽두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희망을 주는 언론을 고대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동안 정치권력과 언론, 시민 모두 할 만큼 했다. 애당초 서로 적당한 선에서 공존의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를 죽일 듯이 덤벼들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갈 데도 없다. 보수언론과 야당의 대통령 인정 안 하기는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까지 몰고갔다. 노무현 정부와 진보언론의 보수언론 손봐주기는 일부 언론사를 조직폭력 수준의 집단으로 몰아붙였고 언론사의 소유권까지 문제삼았다. 지식인층과 시민단체들은 정치권과 언론의 균열구조 속에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함몰되어 무모한 편가르기에 열중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자성의 공간이 없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킬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편을 나누고 선전과 공격을 일삼은 소모전은 서로의 손에 이렇다 할 소득을 안겨주지 못했다. 죽어라 싸운 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새해 새 출발을 하는 권력과 언론은 다시금 소모전에 빠질 것인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싸움에 지쳐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화합에 나설 수밖에 없는 ‘지침의 미학’ 같은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모두 지쳤기 때문에 원색적인 싸움을 계속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한동안 권력과 언론의 싸움에 편들기를 하며 응원과 비난전을 즐겼던 시민들 역시 눈에 띄게 심드렁해져 버렸다. 대신에 사람들은 힘든 국민을 달래고 화합과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를 바라고, 희망과 긍정을 전달하는 언론에서 감동을 받는다.(서울 신문 1월1일자 여론조사) 때마침 지난달 초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자이툰 부대 방문은 대통령과 언론 관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보수든 진보든 대부분의 언론은 먼 곳까지 달려가 파병 장병을 챙기는 대통령을 환영했다. 평소 노골적으로 대통령을 비방하던 보수신문 인터넷판의 대글들은 감동과 기대로 채워졌다. 그 순간 대통령은 우리의 대통령으로, 언론은 우리의 언론으로, 시민은 우리들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분명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대한민국호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은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저편을 없애버리고 싶은 심리, 또는 저편을 제거하려는 목표와 전략은 틀렸다는 것이다. 저편이 잘못했고 틀려먹고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서로 적당히 충고해서 고쳐 쓸 수밖에 없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로 공격할 형편도 안 된다. 우선은 불황 속에서 민생 챙기기가 정치권력과 언론 모두의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은 대통령이 밉더라도 존중하는 자세를, 대통령은 언론이 못마땅하고 혼내주고 싶어도 인정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가 배려와 관용으로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와 언론 모두로부터 희망을 고대하고 있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오피니언 필진 바뀝니다

    새해부터 서울신문 오피니언면의 ‘CEO칼럼’ ‘토요일 아침에’ ‘녹색공간’ ‘문화마당’ ‘옴부즈맨 칼럼’ 등 5개 칼럼의 필진이 바뀝니다. ‘CEO칼럼’은 어려운 경제를 극복하는 방안과 경영혁신의 생생한 현장체험을 다룹니다. 명상칼럼 ‘토요일 아침에’는 종교인이 들려주는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환경칼럼 ‘녹색공간’은 삶과 생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문화마당’에서는 우리사회의 문화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합니다. 각계인사가 참여하는 ‘옴부즈맨 칼럼’에서는 비판자의 시각에서 서울신문을 분석·평가하고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제안도 하게 됩니다. ●CEO 칼럼 기옥(금호폴리켐 사장) 김범수(NHN 대표) 이해익(리즈경영컨설팅 대표) 윤창번(하나로텔레콤 사장) ●토요일 아침에 원철(스님,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박기호(천주교 서울서교동성당 신부) 하용조(온누리교회 담임목사) 권도갑(원불교 도봉교당 주임교무) ●녹색공간 이현주(목사) 조연환(산림청장) 오한숙희(여성학자) 안병옥(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이상헌(지속가능발전위원회 에너지산업팀장) ●문화마당 강주헌(전문번역가) 이보아(추계예술대 교수) 전경린(소설가) 진희숙(음악칼럼니스트) 문흥술(서울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옴부즈맨 칼럼 홍의(언론지키기 천주교모임 고문) 염희진(성균관대신문사 전 편집장) 김춘식(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최영재(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박상건(서울여대 겸임교수) 천원주(한국언론재단 출판팀 차장)
  • [자문위원 칼럼] 정파적 언론의 함정/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들의 관심사, 얘깃거리를 반영하는 공간이 바로 언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언론은 시민생활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곳에서 파당과 균열의 정치판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때로는 아예 정치판에 직접 뛰어들어 춤을 추는 ‘정치하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한국언론은 이제 누가 정파적 언론이라 불러도 별로 대꾸할 말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북한의 핵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부시 행정부를 겨냥한 전략적인 외교적 수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과의 외교적 조율에 정통하지 못한 요령부재의 실언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전쟁 반대 뜻을 전한 것”이라며 “우리 입장을 밝히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북한 입장을 대변”했다면서 “경솔”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제 어떤 신문과 방송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하는 점을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선거나 대통령 탄핵, 헌법재판소 판결 때마다 언론사간 편갈림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언론의 큰 문제는 이편저편으로 갈라진 정파적 언론들이 거의 필연적으로 공격 저널리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데 있다. 공격 저널리즘의 폐해는, 언론이 상대편 정파를 때리고 못살게 굴고 언론간에도 서로 비방하는 데 골몰하는 동안 지켜야 할 아름다운 제도나 문화·사회적 유대 그리고 언론 자신의 미덕도 파괴하고 만다는 데 있다. 노 대통령의 북핵 발언의 경우, 전략이든 실언이든 별로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설사 실언이었다 해도 그렇게 대서특필할 일은 아니었다. 실언은 실언이기 때문에 가십이지 뉴스는 아니다. 가십이 대단한 뉴스처럼 둔갑할 때는 필시 신문의 정파적 이해와 공격심리가 도사리고 있기 십상이다. 어떤 신문은 노 대통령의 발언 보도 직후, 미국의 반대 의견을 찾아 나서는 괜한 순발력까지 발휘했다. 대통령을 공격하고 싶은 억하심정이 발동한 결과이다. 거기에는 제도로서 대통령을 존중하는 성숙한 태도, 국가적 외교 전략에 대한 애정 어린 이해나 다른 의견을 가진 국민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올 들어 탄핵과 총선,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거치면서 언론들은 노골적인 정파성을 드러내 왔다. 좀 과장해서 한국 언론은 이제 친노무현 언론과 반노무현 언론만 있을 뿐이다. 이런 언론의 정파적 분열현상은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온갖 사회제도와 시민의 신뢰를 파괴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한번은 여당을, 또 한번은 야당에 유리한 판결을 함으로써 양 진영 언론의 공격을 받아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있다. 대통령이나 정당들도 정파적 언론의 비방과 선전, 공격의 희생 제물이 된 지 오래다. 언론사 간에도 서로 손봐주겠다고 물고 싸우는 바람에 스스로의 신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정쟁은 민생과는 무관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유권자로부터 냉소와 외면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분열과 갈등, 공격의 정파적 함정에 빠져든 한국 언론은 일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로부터 점차 외면을 받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 언론과 언론은 서로 “너 때문이야.”를 외치며 공격과 비방에 몰두하느라 정파적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위기는 무엇이 위기인지 모를 때 찾아오는 법이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자문위원 칼럼] ‘선전 저널리즘’의 위기/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소위 불편부당한 정론을 표방하는 언론에 ‘선전하고 있다.’고 하면 중대한 모독에 해당할 것이다.언론은 오히려 정치적 선전을 경계하고 필요에 따라 선전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진실 보도에 충실할 책임이 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작금의 한국 언론은 선전 저널리즘의 유혹과 함정에 빠져들어 스스로 신뢰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선전은 정치적 목적과 목표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편향적으로 묘사하는 행위이다.따라서 선전은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그럼에도 국가보안법 폐지와 수도 이전,과거사 청산 등 중요한 정치 보도에 선전 저널리즘이 만연하고 있다.이러한 선전 보도에는 보수와 진보 언론이 따로 없다.아니,한국 정치의 균열만큼이나 갈등관계에 있는 한국 언론은 서로 공격 비방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선전 저널리즘의 함정에 더욱 깊숙이 빠져 들고 있다. 선전 저널리즘의 징후는 우선 인용보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인용은 원래 보도되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는 뉴스작성 기법이다.그러나 보도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주장이 사전에 우선적으로 자리잡을 때,인용은 한낱 정치적 목표를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한다.언론은 이때 남의 말을 따옴표 받아 보도하는,이름뿐인 객관보도의 그림자속에 정파적 이해관계를 은폐시키려 한다. 얼마 전 어느 신문은 국보법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원로들의 시국 성명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물론 성명에 참여한 원로들이 주로 보수 쪽을 대변하는 일부의 원로라는 사실이 생략돼 있다.반면에 어떤 방송은 같은 성명을 단신으로 작게 다뤘다.이 같은 확대와 축소 보도를 놓고 에누리 없이 언론사의 공정한 뉴스가치 판단의 결과로 받아들일 독자는 얼마나 될까.요즘 수도 이전 논란,과거사 규명 이슈,그리고 국사교과서 친북성향 주장 등 민감한 정치이슈에 관한 언론의 인용 보도는 헛갈리고 종을 잡기 힘들 때가 많다.느닷없고 엉뚱한 언론의 인용보도는,그러나 해당 언론사의 정파적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는 순간 의외로 쉽게 설명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선전 저널리즘은 안타깝게도 언론이 스스로 소모적인 정쟁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는 정치판을 닮아 가고 있다.정적의 실수와 실언을 침소봉대하여 공격하는 정쟁 행위를 언론이 그대로 보도해 버리거나 때로는 앞서 나가기도 한다. 가십기사에 불과할 정치인의 실언이나 실수가 신문의 1면에 버젓이 대서특필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지난 17대 총선에서 보수 신문들은 여당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을 확대 보도했고 진보 신문들은 모 교수의 군사쿠데타 발언을 크게 보도했다.아무런 정치나 정책적 맥락이나 발언의 실효성이 없는 실언들을 대단한 일인 양 과장해서 보도하는 것은 정치적 선전비방이지 보도가 아니다. 언론이 이처럼 선전 저널리즘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은,특히 영향력 있는 언론사들이 지난 몇 차례 큰 선거에서 해서는 안 될 정치적 도박에서 실패한 뒤 그 여파에서 탈출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언론은 현실정치의 정파적 균열에 그대로 편입돼 때로는 ‘정치하는 언론’이 되어 갔다.여기에 보수든 진보든 나름대로 편향 뉴스를 만족스럽게 소비하는 독자시장이 존재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전 저널리즘이 기대고 있는 정파적 독자시장은 어디까지 한쪽 정파에 의존하는,기껏해야 반쪽짜리 시장에 불과하다.더욱이 좌든 우든 극단의 정파들은 위축 소멸되듯이 정파적 신문의 선전 저널리즘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요즘의 신문위기의 실체는 바로 정파적 신문의 신뢰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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