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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 핵실험 항의시위 전세계 확산/프랑스·미·영서도 수천명 참가

    ◎타히티 총파업… 유혈사태 【파리·파페에테(타히티) AFP AP 연합】 5일(현지시간)전격적으로 실시된 프랑스의 핵실험에 항의하는 시위가 6일 핵실험지인 무루로아 환초 인근의 파페에테와 핵실험 당사국인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과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졌다. 파페에테에서는 노동단체들이 프랑스의 핵실험에 항의,5일 총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폴리네시아 독립당 소속인 4백여명의 과격한 시위대가 이날 인근 타히티국제공항에 불도저를 앞세우고 난입,활주로를 점거하고 공항청사에 방화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공항점거 시위」에 이어 이들 시위대와 시위에 동조한 수백여명의 시민들은 몽둥이 등을 들고 수도 파페에테 중심가로 몰려나와 경찰과 대치하고 있으며 중심가 이웃 상가들은 거의 모두 철시,도시기능이 마비상태에 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경찰은 이날 핵실험에 참가한 기술자가 타고 있던 프랑스 AOM항공사 소속 여객기에 진입을 시도하던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여객청사 등에서도 진압경찰과 투석전을벌인 시위대간의 충돌이 발생,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편 파리에서는 이날 저녁 거물 좌파정치인들이 포함된 수천여명의 시위대가 무루로아 환초에서 실시된 자국의 핵실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에서는 60여명의 시위대가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시라크 대통령의 처벌과 프랑스 상품불매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런던에서도 3백여명의 시위대가 프랑스 대사관앞에서 3m 크기의 대형 시라크대통령 허수아비를 들고 항의집회를 열었다. 한편 유럽 수개 국가의 국회의원들도 7일 유엔여성회의가 열리는 북경의 인민대회당 계단에서 핵실험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외교관들이 전했다.
  • 불­그린피스 남태평양서 대치/핵실험 앞둔 무루로아섬 주변

    ◎프랑스­군함·외인부대·특공대 출동/그린피스­선박20척·헬기 동원 “저지 태세” 9월부터 시작될 프랑스의 핵실험이 임박한 가운데 실험장소가 될 남태평양의 무루로아섬 주변에는 전운마저 감돌고 있다. 프랑스의 핵실험을 저지하려는 국제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는 요원들의 목숨을 건 활동으로 유명하다.그들중에는 미국과 옛소련의 핵잠수함에 고무보트를 타고가 부딪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마저 서슴지 않는 전사들도 꽤 많다. 그린피스는 지휘선인 「MV 그린피스」호를 지난 27일 현지에 도착시켜 핵실험 저지의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또 「레인보 워리어 Ⅱ」호 등의 선박들이 무루로아섬 주변에 집결해 있으며 핵실험 저지에 참여할 선박은 모두 20여척인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무지개전사들과의 충돌로 이미 4천만프랑(약 60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준 바 있는 프랑스로서는 이들을 막기 위해 군함을 비롯,그야말로 육·해·공군을 총동원한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다.국제적인 용병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랑스 외인부대의 제5용병대가 동원됐고 15명의 특공대가 증원군으로 비밀리에 무루로아 환초에 도착해 있다.타히티 소재 항공편대도 현지에 급파됐다.또 헬기를 소유한 군함 2척,초계함대 4척,핵실험 연구소 소속 견인선 6척,기술지원선 1척,경수송선 1척에다 공군 수송헬기 슈퍼 퓨마도 출동했다. 프랑스 당국은 그린피스의 선박들이 12마일 전관수역밖에서 시위를 할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전관수역내로 들어오면 곧바로 「조치」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프랑스가 「번개작전」으로 그린피스를 무력화시키는 시나리오도 준비했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우선 주요대상은 MV 그린피스호와 레인보 워리어 Ⅱ호다.견인선을 개조해 헬기착륙장까지 갖춘 MV 그린피스호는 슈퍼 퓨마가 발진해 선박의 5∼6m높이까지 접근,특공대를 투하해 불과 몇초만에 그린피스 전사들을 진압한다는 것이다.어선을 개조한 레인보 워리어 Ⅱ호는 커다란 닻이 세개나 있어 헬기 접근이 쉽지 않다.따라서 2척의 고무 보트로 접근한 뒤 갈고리로 선박에 오르게 되며 이 경우 최루탄을 사용한다는 작전이다.
  • 시위­진압의 악순환/박찬구 사회부 기자(오늘의 눈)

    시위대와 공권력 사이의 「힘겨루기」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16일 밤늦게까지 도심 곳곳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격렬 시위와 경찰의 과잉 진압은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만큼이나 시민들을 답답하게 했다. 시민의 공간인 장충단 공원이 최루탄으로 뒤덮였고 이에 질세라 학생들은 도심 곳곳에서 과격시위를 벌였다.1백90개 중대,2만여명의 전경들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6천여명의 학생 시위대는 「시민생활 보호」와 「잘못된 역사의 심판」이라는 타협점없는 명분을 내세워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치렀다. 악순환의 고리는 이어져 학생·전경 50여명이 진압봉과 쇠파이프에 부상을 입었고 시위 현장을 촬영하던 기자 4명이 전경에 폭행당하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일어났다.숨을 헉헉대며 도심의 이곳 저곳을 쫓고 쫓기는 학생과 경찰의 공방은 시위 후진국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무더위와 짜증으로 인한 경찰의 과잉진압도 무리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경찰과 시위대사이의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경찰은 올해초 바람직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경찰통제선」(폴리스 라인)제도를 도입했다.평화시위를 보장하는 대신 다른 시민이나 교통흐름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통제선을 정하는 것으로 시위대와 공권력간의 신사협정인 셈이다. 경찰은 그러나 이번 집회에서는 이를 무시했다.대학생들이 쇠파이프와 화염병까지 준비해 과격 시위가 뻔한 마당에 어차피 무너질 통제선을 설정한다면 공권력의 체면이 뭐가 되냐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한 경찰 간부는 이를 두고 『법을 무시하는 시위대에게 법의 논리로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강경한 논리를 폈다.그는 또 『경찰이 진압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이날 시위 진압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학생들도 당초 주최측이 취소한 거리행진을 강행하려해 경찰의 강제 진압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처럼 경찰과 학생의 틀에 박힌 시나리오는 우리시대의 현주소일 수 밖에 없다.이성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에서 「통일」과 「미래」로 가는 광복 50주년의 참된 의미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 최루탄 맞은 대학생 실명/한대앞서 시위하다

    16일 하오 한양대 정문앞에서 「5·18관련자 기소촉구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왼쪽눈을 맞은 장원호(24·단국대 경영 2)씨가 17일 상오 한양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시력을 상실했다. 병원측은 이날 상오6시30분부터 3시간동안 장씨의 왼쪽눈에 대한 수술을 실시,파열된 수정체 일부를 제거했으나 시력회복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이 지난 16일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등에서 열린 「5·18책임자 기소촉구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중경상을 입은 학생과 시민은 모두 30여명이며,경찰도 42명이 부상을 입었다.
  • 「5·18」불기소 항의 격렬시위/6천명 도심 곳곳서

    ◎경찰,진압과정 기자 넷 폭행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와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시민·대학생 7천5백여명은 5·18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16일 하오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에서 「5·18 학살자 불기소처분 규탄과 기소관철을 위한 제3차 국민대회」를 갖고 『특별검사제와 특별법을 도입해 반드시 관련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집회가 끝난 하오 4시10분쯤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의 집이 있는 연희동쪽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은 장충체육관 앞 네거리를 전면 통제하고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한총련 소속 대학생 6천여명은 하오7시40분쯤부터 3시간여동안 지하철 신당역,종로5가,을지로6가,한대앞 등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날 하오 4시40분쯤 중앙일보 장문기(32)기자가 경찰이 휘두른 진압봉에 배와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지는 등 중앙일간지 사진기자 4명이 부상을 입었다.이에 앞서하오 1시30분쯤에는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전철역 구내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백여명이 경찰에 강제 해산당하는 모습을 촬영하던 서울대 학보사 기자 김병기(19)군이 전경 10여명의 군화발에 밟혀 입술이 터지는 상처를 입었다.
  • 한총련 1만5천명 격렬시위/판문점진출 무산

    ◎경찰과 공방… 하오 늦게 하산 「한국 대학 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정태흥) 소속 대학생 1만5천여명은 15일 낮 12시쯤 경기도 고양시 동산동 삼송리 검문소 앞에서 범청학련이 판문점에서 개최키로 한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판문점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10시40분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내려 집결한 뒤 구파발쪽으로 가려다 경찰의 저지를 받자 왕복6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시위를 벌였으며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며 이에 맞섰다. 이어 학생들은 삼송리 검문소 부근까지 진출,이곳에서 경찰과 다시 대치해 가로수 철제 받침대를 뽑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시위를 계속했으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막혀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연신내역에서 구파발,삼송리에 이르는 6차선도로가 2시간30분 동안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또 시위과정에서 조선대생 나철원군(22·경영학과3년)이 머리가 찢어지는 등 학생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연신내와 구파발역,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 등 시내 곳곳에 경찰 1백48개 중대 1만7천여명을 배치,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민족공동행사」 폐막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공동대표 이창복)는 15일 하오 서울대에서 8·15 민족공동행사 폐막 기자회견을 갖고 『민족공동행사가 추진됨에 따라 남북간 대결구도와는 무관하게 남북대중들은 화해와 통일을 바라고 있는것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남측준비위원회는 지난 4월22일 민족공동행사 발족 이후 4개월 동안 통일기행,통일자전거대회,거북이마라톤,통일음악회 등의 행사를 가진데 이어 이날 「남북해외의 7천만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북측준비위원회,해외준비위원회와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검찰,“「5·18 위증고발」 수사”/기소촉구 결의대회·시위 잇따라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22일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주영복 전 국방장관 등 5·18사건 관련자 7명을 위증혐의로 고발한 것과 관련,5·18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정밀검토작업에 들어가는 등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위증여부를 가리기 위해 당시 국회 청문회자료와 수사결과를 면밀히 비교,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피고발인에 대한 조사일정과 방법은 5·18사건 고발인들의 항고와 재항고등 법적 불복절차가 남아 있어 이를 먼저 마무리한 뒤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민변이 위증혐의로 고발한 5·18사건 관련자는 전 전대통령과 이 전계엄사령관,주 전 국방장관등 3명을 포함,최웅 11공수여단장,안부웅 11공수여단 61대대장,권승만 7공수여단 33대대장,임수원 3공수여단 11대대장 등이다. 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 등에 관한 법률상 위증혐의가 드러나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공소시효는 7년으로 89년말 증언한 전 전대통령은 96년 12월30일,나머지 피고발인들은 올 12월에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1백36개 단체 참가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전남지역의 1백36개 재야단체로 구성된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공동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조비오 신부)는 22일 하오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시민과 학생 등 3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5·18 책임자 기소관철을 위한 광주시민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에 앞서 전남대·조선대 등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남총련) 소속 대학생 5백여명은 이 날 상오 6시 40분쯤 광주지검 앞에 몰려가 「5·18 책임자 재수사」 등을 요구하며 최루탄으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5일째 격렬한 시위를 했다. ◎연희동 진출 시도 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 소속 대학생 1천8백여명은 22일 하오 6시30분쯤 서울 연세대에 모여 5·18 광주사태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뒤 전두환·노태우 두 전대통령의 집이 있는 연희동 쪽으로 가려다 경찰이 막자 학교앞 도로를 점거하고 3시간여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전경과 학생 20여명이 다쳤으며 경찰이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며 신촌세브란스 병원 앞마당에 최루탄을 마구 쏘아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 “5·18 기소하라” 무기농성/광주·전남 공대위

    ◎“관철안되면 정권퇴진 운동”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전남지역 1백36개 단체로 구성된 「5·18 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공동대책위」(공동대표 문병란조선대교수)소속 인사 등 30여명은 21일 하오7시부터 광주시 동구 계림동 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실에서 5·18 학살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공대위는 이날 상오 기자회견을 갖고 『특별법제정 및 특별검사제도입과 5·18진상규명을 위해 전국의 모든 민주세력과 연대해 투쟁하겠다』며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김영삼 정권의 퇴진운동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남총련 6백여명/4일째 격렬시위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남총련)소속 대학생 6백여명은 21일 하오7시 30분쯤 광주시 북구 중흥동 민자당 광주시지부앞에서 『5·18 진상규명과 특별검사제도입』등의 구호를 외치며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4일째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대검 사용·「최루탄 살해」 확인/5·18 해소된 의문점

    ◎계엄군의 시위 과잉진압 사실로/「헬기사격」,충돌방지 위한 불빛/「별도세력」 군부대 지휘 없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대가 대검을 사용했으며 광주 외곽지역의 무고한 시민에게도 총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무장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하거나 「별도의 세력」이 사전계획에 따라 군부대를 지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18일 80년 5·18 당시 군부대가 착검상태에서 위력시위를 하던 중 투석공격을 당하자 시위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검으로 피해를 입힌 사실이 인정된다며 대검 사용사실이 없다는 군관계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검찰은 특히 손옥례씨등 12명의 사망자 또는 부상자에게 자상(나상)이 발견된 점에 비추어보면 설혹 지휘관의 의사와는 무관하더라도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공수여단 5개 대대가 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 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연행하면서 최루탄을 터뜨려 5∼6명을 질식사하게 하고 다수의 화상환자를 발생시키는 등 무력시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민간인 피해사례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부대가 교도소근처를 지나가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해 총상을 입혔으며,철수 및 교전과정에서 숨진 시신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나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없는데다 사격장면으로 보이는 사진상의 헬기 아래쪽 불빛은 사격에서 발생한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용 불빛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검찰은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물론 시신의 검시기록에서도 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점도 이같은 사실을 뒷바침한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또 5월18일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공수부대원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에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이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것일 뿐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세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당시 계엄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시간과 각 부대가 자위권발동을 지시한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계엄사령관이 발표하기 전에 자위권발동을 승인받은 사례등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최초발포경위에 대해서는 5월19일 광주고교근처의 시위대가 장갑차에 불붙은 짚단을 던지려 하자 한 장교가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을 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학생 1명이 부상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나 21일 전남도청앞에서는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사람은 물론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거나 심지어 구경 나온 사람에게까지 발포한 것으로 조사돼 당시 실탄제공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 팔 자치확대 곧 타결/페레스­아라파트 가자서 회담

    【나블루스·가자지구 AFP 로이터 연합】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25일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간의 충돌로 팔레스타인인 3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오는 7월1일 이전에 팔레스타인 자치확대 문제를 타결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서안지구에서는 2천여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단식농성중인 팔레스타인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나블루스 인근 제니드 형무소로 향하다 이스라엘군과 충돌했으며 이스라엘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총기를 발사했다고 목격자들이 밝혔다.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예정대로 가자지구에서 3시간여에 걸친 회담을 갖고 이스라엘 점령지내의 PLO 자치확대 문제를 논의했다.
  • 말연서 시위벌인 4천명 베트남전민 수용소 복귀

    【콸라룸푸르 AP 연합】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외곽 베트남 난민수용소에 수용된 난민 4천명 중 3천명이 5일 자신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며 한때 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나와 시위를 벌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경찰,그리고 미국대사관측과 회담을 가진 후 난민수용소로 복귀했다고 정부관리들이 밝혔다. 난민들은 『우리는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베트남으로 송환하면 집단자살하겠다』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시위를 했으나 경찰이 물대포와 최루탄을 발포하자 최루탄을 참지못해 철조망을 뚫고 외부로 나갔고 이들중 수백명은 인근 고속도로변까지 행진했다. UNHCR측의 에리카 펠러는 『우리는 다음주까지 그들과 대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난민들을 오는 8월31일까지 본국으로 송환하고 수용소를 폐쇄하려는 말레이시아정부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연대서 화염병 시위/학생 천여명 경찰과 충돌/노동탄압 중단요구

    4일 하오 2시쯤 서울 연세대에서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집회를 마친 「전국학생 특별위원회」(위원장 김성훈 연세대 총학생회장) 소속 대학생 1천3백여명이 교문밖으로 나가려다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 3백여개와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하오 1시30분쯤부터 2시간 동안 연세대앞 10차선 도로가 심한 교통체증을 보여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고 경찰과 학생 10여명이 다쳤다. 학생들은 집회를 마치고 서울역까지 가두행진을 벌이려다 경찰이 막자 화염병등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앞서 이들 학생들은 3일 하오 11시 연세대 강당에 모여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전학특위」발족식을 가진뒤 이날 낮 12시쯤 「전국학생 3자개입 실천대행진」을 위한 집회를 가졌다. 한편 경찰은 이날 시위에 참가한 성균관대 서정보군(22·산업심리4년)등 32명을 연행했다.
  • 서총련 도심 격렬시위/5천여명 「5·18」책임자 처벌 요구

    ◎퇴근실 시민 큰 불편 「서울지역 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학생 5천여명은 18일 하오2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이른바 「5·18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려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도심 곳곳에 흩어져 시위를 벌였다. 이날 하오 7시쯤 학생 3천여명은 탑골공원 앞에 모여 종로3∼4가 왕복8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최루탄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길가 가판대와 노점의자등을 집어던지는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이광래군(20·국어교육 1년)과 정성필씨(31·목사)등 20여명이 부상했으며 경기대 김범진군(21·행정학 2년)등 25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시위로 명동 을지로 종로일대 교통이 3시간동안 마비돼 퇴근길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 바른 시위문화 정착 기대한다(사설)

    경찰이 각종 집회나 시위장소에 경찰통제선(Police Line)을 설정,평화적인 시위는 적극 보호하되 이를 이탈할 경우에는 강력히 대응키로 한 것은 건전한 시위문화의 정착을 위한 시의적절한 발상이다.복잡다기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표출되기 마련이고 그러한 표출방법의 하나가 집회나 시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민주와 반민주의 이분논법에 의해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집회가 주류를 이루어 자연히 격렬시위와 과잉진압으로 맞서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다.그러나 문민정부들어서는 투쟁적 시위가 사라진데 비해 이해집단들의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민원성 집회가 크게 늘어났다. 집회와 시위는 민주제도에서는 당연한 의사표현 수단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다만 그것이 교통체증을 유발시키거나 생업에 지장을 주는등 시민생활에 불편이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시위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평화적이고 시민들의 호응을 받는 시위문화의 정착은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통제선은 시위자들로 하여금 선을 넘어설 경우 엄한 제재를 받는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주는데다 경찰에게는 단호한 처벌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도입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우리는 미국 백악관 앞에서,영국 다우닝가에서 피켓을 들고 경찰통제선안에서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우리사회에도 언제쯤 저런 성숙한 시위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까」하고 부러워했었다. 경찰통제선의 도입은 질서있는 시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이 제도가 뿌리 내리려면 이를 운영하는 경찰이나 시위참여자들의 원칙준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이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위반자들에 대한 일벌백계의 처벌이 뒤따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경찰통제선 관련 조항을 추가하는 법개정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 화염병 화상 “치료비 누가 대나”

    ◎동국대앞서 불벼락 맞은 시민 박동희씨 병상 호소/학교/“불법 집회… 책임없다”/경찰/최루탄 쏜적 없어 외면 회사원 박동희(27·서울 용산구 갈월동)씨는 지금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였다. 그는 25일 하오6시쯤 서울 중구 필동 동국대 후문앞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산하 「진보를 향한 연대」소속 10여개 대 학생 2백여명이 시위를 하다 던진 화염병에 맞아 한쪽 눈가가 찢어지고 얼굴과 목에 2도화상을 입고 필동 중앙대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하오6시쯤 직장인 필동 「만영문화사」(인쇄·복사업체)이웃 가게로 물건을 사러가다 졸지에 당한 변이다. 그러나 박씨의 병실에는 남동생만 병간호를 하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다.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대학시위로 부상한 학생은 학교측에서 치료비를 다소 보조해준 예가 있으나 일반시민에게는 대책도,하소연할 길도 없다. 경찰은 시위대의 교문 밖 진출을 막는 데 주력했을 뿐 최루탄을 쏜 적도 없어 이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말한다. 집회장소가 됐던 동국대에서도 집회를 허가한 적이 없는데다 집회신고도 하지 않는 불법시위이기 때문에 학교가 보상할 책임이 없다고 한다. 동국대 총학생회는 자기들이 이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고 「진보를 향한 연대」소속 대학생들이 규탄대회를 동국대에서 열지 말도록 만류까지 했다면서 사건이 동국대와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결국 시위현장을 지나가다 졸지에 병원신세를 진 시민의 억울한 사정은 제쳐두고라도 치료비마저 피해자 혼자 책임져야 하는 지경이 됐다.
  • “김귀정양 사망 과잉진압 탓”/국가서 1억4천만원 배상

    ◎서울고법 판결 서울고법 민사5부(재판장 강완구 부장판사)는 25일 성균관대 불문과 3년 재학중 시위를 하다 숨진 김귀정양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국가는 유족들에게 모두 1억4천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원심대로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양이 최루탄을 쏘는 전투경찰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시위군중에 깔려 숨진 점이 인정된다』면서 『국가는 시위를 진압할 때 가능한 한 최루탄 사용을 억제하는등 최대한 안전하고 평화로운 방법을 써야 하는데도 이를 어기고 과도한 방법으로 진압해 사고가 났으므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김양도 시위에 참가해 사고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30%의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유족들은 91년 5월 서울 중구 퇴계로에서 열린 「강경대군 사망사건 범민족대책대회」에 참석한 김양이 경찰의 진압을 피해 골목길로 들어갔다가 시위군중에 깔려 흉부압박 질식사로 숨지자 소송을 냈다.
  • 민주 서울시장후보 경합 홍사덕 의원(인터뷰)

    ◎“서울시장 경선 절대 포기 안한다”/당선 가능성 조순씨 보다 내가 훨씬 높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민주당내 서울시장후보 경합의 최대 관심은 나름대로 당내 득표력이 강한 홍사덕 의원이 과연 「끝까지 버틸것이냐」 하는 점이다.실제로 당안팎에서는 동교동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온 홍 의원이 「조순 세몰이」의 일환으로 경선 투표에서 중도 사퇴할 것이라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21일 하오 막 서울 은평구 대의원들과 만난뒤 광화문의 「홍사덕 서울시정연구실」로 돌아온 홍의원을 만났다. 당연히 첫 질문은 사퇴여부였다.홍 의원은 단호하게 『나의 의지는 내말을 통해서만 살펴달라.사퇴의 「ㅅ」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아마도 부드러운 매너 때문에 생긴 오해같은데 한번 정한 것은 결코 바꾸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그는 『1차투표에서는 조 전부총리가 최다득표를 하겠지만 과반수가 안돼 2차투표까지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의원들은 본선의 당선가능성이 높은 나를 지지해줄 것』이라고 승리를 자신했다.『대의원들이 생각이상으로 현명하며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게 자신을 지지하게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였다. 화제를 바꿔 대의원 접촉결과를 묻자 『지금까지 아우(자기를 돕는 중소기업인들을 지칭) 32명이 각자 지구당을 할당,5차례정도씩 대의원들을 만났고 이를 토대로 아내(임경미 여사)와 함께 대의원들을 직접 집으로 찾아가 지지를 당부하고 있다』면서 깨알같이 적어가지고 다니는 대의원 신상카드를 보여줬다.그는 『동교동계는 너무 현장감각이 없고 조순 카드가 전혀 뜨지 않고 있는데 대해(일반의 인기가 높아지지 않고 있는데 대해) 소홀한 것 같다』고 한마디했다.이 대목을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자 『대의원들은 조순 영입에 불만이 많더라.우리가 최루탄을 마실때 그가 무엇을 했었느냐고 묻는다.무엇보다 조 전부총리의 당선가능성에 대한 깊은 회의가 가장 큰 문제다.이러다간 박찬종씨만 도와주는 것아니냐고들 한다』고 설명했다.『20,30대 젊은 표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그는 논란거리인김심(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의 의중)의 중립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엄정중립을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으며 비켜나갔다. 자신이 늘 수위를 달리는 여론조사 결과를 누누이 강조한 그는 『지구당위원장들의 지지와 대의원표의 향방과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며 자신있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 불신의 벽 허무는 대학캠퍼스(사설)

    대학가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신학기초에는 연중행사처럼 되풀이되면서 화염병과 투석·최루탄가스로 대학캠퍼스를 뒤덮게 하던 극렬학생들의 과격시위가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췄다.문민정부 출범이후 투쟁대상이 사라지면서 학생운동은 정상과 평온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지난 수십년동안 지속돼온 난폭시위와 강력진압 악순환의 고리가 단절되고 비로소 대학의 참모습·제모습을 찾게 되었다.꽃피는 4월을 맞는 캠퍼스에 「대학의 봄」이 만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30일 하오 서울대 관악캠퍼스 민주광장에서 열린 총학생회 출범식에는 이수성 신임총장이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등단,격려와 축하인사말을 했다.교정에서 예사롭게 볼 수 있어야 할 이 광경은,그러나 실로 11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대통령의 서울대졸업식 참석이 중단되고 총장실이 학생들에 의해 불법점거되기도 했던 지난날이 아닌가. 총장의 학생회행사 참여는 학교와 학생들이 더이상 갈등과 대립,불신과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화합과 신뢰의 사제관계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었다.일그러지고 왜곡됐던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대다수 학생들의 관심은 이념적 투쟁이나 체제의 파괴가 아닌 학생들의 복지문제,여가선용,동아리(서클)의 활성화등 자신들의 문제에 쏠리고 있다고 한다.면학분위기 조성등 학생운동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방향전환은 학생운동의 대세이며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그동안 학생운동의 방향이 잘못됐음을 인식한 바탕위에서의 새출발이라 더욱 믿음직스럽다. 주사파 등 운동권의 핵심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학생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소수로 전락해 있다.그렇다 해서 한총련 등의 시대착오적인 과격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도 안될 것이다.이제 캠퍼스는 학문과 진리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평화로운 요람이 되어야 한다.
  • 대학생 등 천여명 화염병 격렬시위/분신 노점상 장례

    지난 8일 당국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자살한 장애인노점상 최정환(36)씨의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25일 경찰이 행사를 원천봉쇄,장애인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다.또 올들어 처음으로 경찰이 대학교내에 진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 최정환 빈민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상오11시 연세대 노천강당에서 장애인·노점상연합회회원·대학생등 1천5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가진뒤 하오 3시쯤 장례식을 마친뒤 노제가 예정됐던 시청앞 진출을 시도하며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3백여개의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히 맞섰다. ◎“폭력시위 엄단”/이 총리 이홍구 국무총리는 25일 『공공질서와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불법 폭력시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밝히고 『불법 폭력시위를 철저히 막고 법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라』고 김용태 내무부장관에게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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