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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네수엘라·볼리비아 비판 언론과 전쟁 선포

    남미의 좌파정부들이 이번에는 언론과 부딪치고 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자신의 암살을 암시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일간 누에보 파이스의 카라카스 사옥에 최루탄을 쏘았다고 AP통신이 15일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 신문이 전날 차베스를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처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나아가 이 신문사가 군법을 어긴 것이니 대가를 받는 게 마땅하다고 최루탄 발사를 정당화했다. 편집국장 라파엘 폴레오에게는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차베스와 함께 남미대륙의 대표적 좌파로 꼽히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이날 37명의 반정부 언론인 명단을 발표했다. 브라질 일간 에스타도 데 상파울루에 따르면 모랄레스는 블랙리스트 발표와 더불어 강제구인 및 추적에 나섰다. 대통령궁은 지난달 12일 유혈충돌이 발생한 북부 판도 주(州) 야권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언론인들이라고 말했다. TV방송 ‘카날 18’의 호르헤 멜가르 케테 기자는 이미 군인들에게 강제구인됐다. 볼리비아 정부는 판도 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브라질 북서부 브라질레이아 시에서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는 브라질 기자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도 주에는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로, 레오폴도 페르난데스 주지사는 과격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군경에 체포됐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전날 자신을 지지하는 농민단체대표와 만나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및 사유지 보유한도 규제 강화, 원주민 권익 향상, 에너지 산업 국유화 확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 개헌안의 국민투표 실시를 촉구하는 국민대행진을 선언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법원, 泰 PAD 지도자 7명 체포영장 기각

    태국 법원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지도자들에게 적용된 반란 혐의의 지명수배 및 체포영장을 9일 취소했다. 지난 8월 말 체포영장이 발부된 PAD 공동대표 9명 가운데 7명은 법원의 결정 뒤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밝혔다. 잠롱 스리무앙 등 2명은 지난 5일 이미 경찰에 체포됐다. 태국 영문일간 네이션과 방콕포스트는 항소법원의 결정을 소개하면서 “PAD 지도자들은 그러나 지난 5월부터 시작한 정부청사 점거농성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장기간 청사 점거 농성에다 시위 가담자 2명의 사망으로 태국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런 가운데 태국 의료진들은 다친 시위대 400여명의 치료를 하면서 진압 과정에서 부상당한 경찰의 진료를 거부하는 등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는 사례가 느는 추세다. 의료진들은 시위 도중 숨진 여성과 실명 또는 다리에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등 최루탄이 아니라 더 폭발력이 강한 폭약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반면 경찰은 숨진 여성이 탁구공만 한 폭탄을 나르다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라마티보디 병원 원장은 “이 여성의 몸에 가로 40㎝의 상처가 난 데다, 폐와 가슴에 구멍이 나 있었다.”면서 “최루탄에 맞았다면 화상 흔적이 남아야 한다.”고 증언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泰 반정부시위 유혈충돌

    태국의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이 7일 의사당 앞에서 두 차례 충돌해 2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다치는 등 사태가 격화되고 있다. 시위대는 이날 의사당을 봉쇄해 한때 의원 300여명이 갇히기도 했다. 정부와 시위대간 중재를 맡았던 차왈릿 용차이윳 부총리는 이날 충돌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7일 반정부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이끄는 시위대 수천여명은 방콕 피차이 거리에 위치한 의사당을 에워싸고 봉쇄했다. 이 바람에 새정부 정책설명회를 위해 임시회를 열던 집권정당연합 소속 하원의원 320명과 상원의원들이 건물 안에 갇혔다. 경찰은 오후 5시쯤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아 의사당 봉쇄를 뚫었고 의원들은 빠져나왔다. 솜차이 옹사왓 신임 총리는 이보다 먼저 인접한 공원 담을 넘어 의사당을 간신히 빠져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전날 시위대는 점거 농성 중인 정부청사에서 의사당까지 거리행진을 벌인 뒤 트럭 등을 동원해 도로 봉쇄를 시도했다. 경찰은 7일 오전 6시20분쯤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경찰이 오전과 오후에 걸쳐 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2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다쳤다고 방콕포스트, AFP가 전했다. 시위대가 쏜 총에 맞은 경찰 3명은 중태다. 시위대는 PAD의 핵심 지도자인 잠롱 스리무앙이 체포된 데 항의하는 뜻에서 의사당 봉쇄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한때 흩어졌으나 다시 모여들어 의사당을 에워싸고 막았다. 한편 용차이윳 부총리는 이날 사표를 제출하면서 “양측 충돌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부총리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몽골 부정선거 항의 유혈시위

    몽골 부정선거 항의 유혈시위

    몽골이 유혈 폭력시위로 혼란에 빠졌다. 시위가 확산되자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은 2일 새벽 국영방송 포고령을 통해 4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AP,AFP 등이 보도했다. 이 기간 동안 야간통행과 대중집회가 금지되고, 언론 취재활동이 제한된다. 또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발포 등 무력사용도 가능하다. 시위는 지난 주말인 29일에 실시된 총선에 대한 부정선거 시비로 달아올랐다.2일 BBC 등에 따르면 집권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6000여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충돌해 이 과정에서 최소 5명이 숨지고 시위대 등 300여명이 다쳤다.2명은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잠정 개표 결과 집권 인민혁명당이 전체 76석 중 46석을 획득하고, 몽골민주당은 26석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자 인민혁명당 당사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을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당사에 불을 지르고, 건물 내부를 약탈하는 등 폭력 양상을 보이자 경찰도 고무탄과 최루탄을 발사하며 강경진압에 나섰다. 야당인 민주당측은 “부패 정권이 매표 행위로 결과를 조작해 승리를 앗아갔다.”고 비난하면서 인민혁명당의 사과와 재투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산야긴 바야르 총리는 “선거는 자유롭고, 공평하게 치러졌다.”면서 “민주당이 공식 개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선거 결과를 비난하는 발언을 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야당에 책임을 돌렸다. 몽골에서 선거와 관련해 이처럼 대규모 유혈 시위가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1990년 옛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 전환한 이후 공산당 후신인 인민혁명당과 신생 민주당은 권력 투쟁을 벌여왔다.4년 전 연합정부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2006년 첨예한 대립으로 갈라섰다. 이번 총선에서 양당은 경제성장에 한목소리를 냈으나 고비사막에 매장된 구리, 금, 석탄 광산 개발의 지분 문제를 놓고 팽팽한 입장 차이를 보여왔다. 인민혁명당은 광산 개발 국제투자협정시 정부 지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민주당은 민간 기업이 과반 지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구 300만명의 몽골은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1500달러에 불과한 빈국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건국 60주년] 공권력에 대항한 민주화 세력들

    1960년 4월19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달려간 곳은 경무대였다.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저항의 본거지로 처음 찾아 나선 곳은 도청이었다. 광장에서 시작해 권력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시위의 양상은 2008년 촛불시위에도 이어지고 있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부정선거에 맞서 거리로 달려 나왔던 학생과 시민들은 군경의 총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로 향했다. 이른바 ‘피플 파워’는 한때 ‘국부’로 추앙받기까지 했던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전까지 집회·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경찰은 대학 내에 이른바 ‘학원CP(Command Post)’를 차려놓고 정보과 형사들과 사복으로 변장한 전경들을 상주시키면서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했다. 희생양이 되기로 각오한 한 명이 유인물을 뿌리면서 학교 광장을 내달리면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곧 최루탄이 터지면서 전투경찰의 곤봉세례가 이어졌다. 청와대로 달려갈 수 없었던 당시 대학생들의 분노는 독재정권의 탄생을 묵인했던 미국을 향했다.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3년 뒤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이어졌다. 산발적인 거리시위가 있었지만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선 것은 1987년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호헌철폐의 요구는 거리에서 시작해 명동성당으로 이어졌다.1980년 5월의 봄 이후 7년 만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안고 100만 시민이 다시 거리에 섰고, 이미 군사정권의 양보를 얻어낸 뒤였다. 그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건장한 팔뚝에 검푸른 작업복을 입은 남성노동자들이 시위의 전면에 나섰다. 주로 캠퍼스에서 시작해 거리로 나갔던 시위대는 이제 바리케이드를 쌓아 올리고 파업현장을 지키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후 1990년대 대학의 시위는 이적논쟁에 시달리며 잦아들었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국가경쟁력 논리에 부딪쳤다.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광장과 거리를 ‘밟는 맛’을 깨달은 대중은 미군 장갑차 사건과 2004년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다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 대신 공감과 나눔을 상징하는 촛불을 들었다. 올해 촛불의 행렬은 청계천과 서울광장을 출발해 거리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이번에 촛불을 들기 시작한 소녀들은 공권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조갑제 “촛불집회 참가자는 정신이상자들”

    조갑제 “촛불집회 참가자는 정신이상자들”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좌파의 선동에 놀아난 바보·천치·정신이상자들” 대표적 보수 논객인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씨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법질서수호-FTA비준촉구 국민대회’에서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강하게 비판해 논란이 되고 있다. 뷰스앤뉴스 등 언론에 따르면 조씨는 이날 대회에서 마지막 연사로 나서 “서울광장 안과 밖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 뒤 “안에는 좌파의 거짓 선동에 속지 않은 애국시민이 있고,밖에는 선동에 놀아나는 바보·천치·정신이상자들이 모여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밤에만 설치는 족속들이 지켜보고 있다.”며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당시 서울광장에서는 조씨가 참석한 행사가 한창이었고,경찰 저지선 너머 외곽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지난 6일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을 ‘6·6 난동자들’이라고 규정하며 “이들이 현충일에 서울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호로자식들’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말 안 한다.”고 거친 비난을 이어갔다. 조 대표는 또 가족 단위로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을 겨냥,“거짓을 가르치는 어린이 영혼 추행범”이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이어 MBC와 KBS에 대해서도 “기자생활을 38년간 하면서 MBC 기자 같이 악랄한 날조방송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며 “MBC와 KBS는 선동기관이다.이들에게 언론자유를 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투쟁의 방향을 옮겨 날을 잡고 MBC 앞으로 몰려가자.”며 “MBC의 엄기영,KBS의 정연주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래도 우리가 뽑은 민주정권이니 지켜야 한다.”면서도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진실을 지키지 못하고 밀려 이제 우리의 자유와 재산을 빼앗길 정도가 됐다.”고 좌충우돌했다. 연설 후 조씨는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을 사용하라’,‘국군은 국토방위와 헌법보장의 의무 수행에 나서라’,‘학부모는 어린이 영혼 추행범을 색출하라’는 등의 14개 요구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날 그의 발언의 대부분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인 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들이다.현재 이 사이트에는 ‘이런 짓을 하고도 MBC가 무사하겠는가?’ 등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집회를 규탄하는 칼럼과 기사들이 다수 실려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6·10 촛불집회] 386 사진기자가 본 ‘6·10 현장’

    [6·10 촛불집회] 386 사진기자가 본 ‘6·10 현장’

    “6월10일, 가자! 시청으로!” 기억 저편으로 아득히 멀어졌던 구호가 21년 만에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그것도 그때 그날처럼 뜨거운 서울시청 앞 아스팔트 위에서 말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만명의 입에서 일제히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솟구쳐 나와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낡은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가까스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다. 세월이 그리 흘렀건만 대학 초년생으로 돌아간 착각에 빠져든다. 다시 이런 광경을 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지 않았던가. 씁쓸하고 허탈하다. 바뀐 게 있다면 21년 전 학생 신분으로 정권퇴진을 요구하며 이 자리에 서 있었던 내가 지금은 기자의 신분으로 집회 참가자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 두 대를 양쪽 어깨에 메고 취재용 사다리에 올라서서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을 천천히 내려다본다.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군중의 커다란 함성이 귀에서 멀어지면서 그들의 표정과 주장이 눈에 들어온다. 쇠고기협상 타결 이후 계속된 몇주간의 축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비장함과 분노가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의 얼굴에 서려 있다. 문득 87년 오늘 서울시청 일대를 뒤덮었던 학생들,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온 회사원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쇠고기 재협상 요구가 어떻게 격이 같을까 반문해 본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민의를 거스르는 대통령과 정부 당국의 오만과 독선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최근 일련의 사태가 폭력과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 본다. 최루탄, 화염병, 돌멩이 같은 기억하기 싫은 모습들이 재연된다면 그건 비극이다. 흔히 386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대 중 기자처럼 간이 작은 사람들은 살면서 한두 번쯤은 그때 그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력에 가위눌려 본 이들이 있으리라. 고백하건대 당시 카메라를 들고 폭력의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은 내게는 든든한 힘이었다. 순진한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자들이 옆에 있으면 폭력적인 공권력도 주춤했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옆에 있었기에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힘이 났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또다시 한목소리를 내는 국민들 옆에 카메라를 들고 내가 서 있다. 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hojeong@seoul.co.kr
  • [6·10 촛불집회]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

    [6·10 촛불집회]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

    “만감이 교차합니다.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한열이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된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68)씨는 10일 서울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한열이가 죽은 지 21년이 됐는데 이렇게 큰 외침이 필요한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이한열(당시 21세) 열사는 87년 6월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평범한 어머니이자 가정주부였던 배씨의 인생은 이날부터 180도 달라졌다. 아들은 7월5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배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만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 나섰다. 아들을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은 배씨는 대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후 배씨는 민주화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다른 부모들과 함께 시위현장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배씨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매일 시위현장의 맨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최루탄도 직접 맞아보고 경찰의 방패 앞에 서서 대중들과 함께 싸웠다.”면서 “그렇게 듣고 보고 또 몸으로 느끼면서 한열이의 뜻도 차차 이해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배씨는 최근 촛불집회에도 빠짐없이 참가한다. 지난 5일부터 나흘간 계속된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에서는 ‘이명박 정부 규탄, 쇠고기 재협상,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철회’를 위한 천막농성에 참여했다. 배씨는 “촛불집회에서 어린 학생들이 자유발언을 통해 할 말 다하는 걸 보면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느낌도 든다.”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단히 성숙하고 그 힘도 강하다는 걸 요즘 다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군사정권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최루탄을 쐈는데, 앞으로 다시 최루탄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염려된다.”면서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이 성숙했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촛불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돼야 제2, 제3의 한열이가 나오지 않을 텐데….” 배씨가 말끝을 흐렸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20&30] 5월, 대학축제 추억 속으로

    [20&30] 5월, 대학축제 추억 속으로

    서울대 축제에 소녀그룹 ‘원더걸스´가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람이 깔릴 뻔했다는 뉴스가 눈을 간지럽힌다. 수년 전부터 대학에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하면서 대학 축제도 상업화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만, 그래도 축제에 대한 기억은 설렘이 대부분. 캠퍼스에 진동하는, 파전에 두른 기름 냄새와 물풍선에 흠뻑 젖은 채 까르르 웃는 학생들. 드럼과 베이스기타 소리를 등에 업고 어설픈 고음만 고래고래 질러대는 학내 ‘최고´의 밴드와 이에 맞장구치는 꽹과리와 장구소리 요란한 풍물패.5월만 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2030들의 대학 축제에 대한 추억을 되짚어 봤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90학번 윤모(37)씨는 대학 축제라면 이내 밤새도록 이어졌던 주점을 떠올린다. 동아리 풍물패에서 장구를 담당했던 윤씨는 축제 때마다 주점에서 파전 요리를 맡았다. 매년 ‘파가 동이나 잔디를 넣어 부쳤다.´는 억측이 돌았지만, 인기는 늘 최고였다. 윤씨는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 학교 주점에서 선·후배들과 어울려 한잔 두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장인이 된 선배들이 찾아와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던 당시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하도 파전을 굽다 보니 팔이 아프기도 하고 식용유가 몸에 튀어 찌뿌듯하긴 했지만 선·후배들, 친구들과 함께 젊은 날을 보내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요즘은 유명한 가수들이 공연하는 게 축제의 백미라던데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잔디밭에 누워 밤새 술을 마시며 축제를 즐기던 그때에 비견될 바가 아니지요.” 회사원 유모(34)씨에게도 축제는 곧 학과 주점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축제 때 갖가지 이벤트가 펼쳐지지만, 정작 유씨는 주점을 준비하느라 축제를 즐기지 못했다.‘하늘 같은´ 선배들이 오면 이리뛰고 저리뛰며 술 나르고 음식 차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배들이 사회 문제와 관련해 토론의 장을 벌이면 옆에 앉아 이것저것 주워 들으며 ‘지식´을 넓혀 갔던 기억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주점을 열면 막걸리가 동이 날 때까지 마시며 여기저기서 열변을 토하는 선배들도 많았다.“선·후배가 어울려 동이 틀 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던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학 시절의 낭만이죠.”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 중인 김모(25)씨는 축제 때 일일찻집을 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2000년대에 입학한 김씨에겐 사실 대학의 ‘낭만´은 과거 선배들의 얘기였다. 입학하자마자 취업 걱정에 토익과 자격증 시험에 매진하느라 도서관에 틀어 박혀 살았다. 하지만 축제기간에는 모처럼 학과 동기들과 뭉쳐 일일찻집을 열었다. 제대로 돈을 벌어 친구들과 맘껏 써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하루 종일 고생해 8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그 돈은 요구르트 30개를 1분에 다 마시는 게임에서 2명이나 성공하는 바람에 상금으로 다 나가고 말았다.“친구들과 맘껏 한잔하려 했더니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죠, 뭐. 그래도 그때만큼 즐거웠던 대학 시절의 기억도 없는 것 같아요.” ●축제 때 만났던 ‘잊지 못할 그 사람´ 회사원 김모(28·여)씨는 대학 축제 때 밴드 공연에서 한 눈에 반한 그 남자가 기억에 생생하다. 키가 크고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단발머리를 했던 그 남자는 공연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열적으로 드럼을 쳤다. 땀이 흘러내리지 않게 머리띠를 맨 그 남자가 열정적인 공연 끝에 윗도리를 훌쩍 벗어던지면 김씨는 벅차오르는 가슴에 두손으로 입을 막아야했다. 다음 학기 때 김씨는 그 남자가 어떤 수업을 신청하는지 눈여겨본 뒤에 같은 수업을 들었다.“그런데 글쎄, 수업 중에 결국 환상이 깨지고 말았어요. 늘 무표정한 얼굴로 우수에 잠긴 듯하던 그 남자가 친구랑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심한 사투리를 쓰더군요.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는 사투리에 그만 확 깨서 하루 종일 하숙집 안방에 껌처럼 눌러 붙어 식음을 전폐했던 기억이 나네요.” 신촌의 한 대학을 나온 윤모(32)씨는 축제 때 만났던 ‘그녀´를 잊지 못한다. 윤씨는 대학 3학년 때 축제에서 체크무늬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대생을 만났다. 응원 공연을 보다가 한 눈에 박힌 그녀에게 다가가 추파(?)를 던졌고, 둘은 그 후로 3년이나 같이 응원 공연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취직을 못한 윤씨를 뒤로 한 채 결별을 선언했다. 아픔을 담아 두고 살아가고 있지만 요즘 윤씨는 학원강사 일을 하면서 축제 덕에 인기가 올라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5월이면 학원 녀석들이 함께 대학 축제에 가자면서 난리가 나죠. 요즘에 가보면 고등학생도 즐길 정도로 대학 축제가 많이 젊어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 시간강사 백모(37)씨는 대학 1학년 때인 1991년 축제를 잊지 못한다. 그 해 축제는 ‘강경대 열사 정국´으로 음울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대부분 학생들이 학내에 머물지 않고 거리투쟁에 나섰다. 시위 참여를 주저했던 백씨는 축제를 빙자로 접근해 온 ‘열혈 운동권´ 선배와 밤새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국토론을 벌였고 결국 선배에게 설득돼 거리로 뛰쳐 나갔다.‘노태우 정권 퇴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집회대오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집회에 참여한 백씨는 매운 최루탄 연기에 당황해 그만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마음에서 나오는 건지, 최루탄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던 백씨에게 같은 신세의 동갑내기 여학생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영락없이 경찰에 잡혀갈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대어를 낚았죠. 때문에 1학년 대동제와 첫 거리집회는 제게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연예인 불러서 즐기는 요즘 대학 축제에서 저 같은 행운을 누릴 기회가 있을까요.” 서울 S대를 졸업한 이모(39·여)씨는 ‘대학 축제´하면 아쉬움부터 밀려 온다. 이씨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대학 시절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매년 봄과 가을 축제가 다가오면 ‘이번에는 꼭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다른 친구들처럼 멋진 추억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며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기 때문이다. 축제 때면 이씨는 늘 주변인으로, 다른 커플들이 즐겁게 지내는 것을 지켜 봐야만 했다. 남자친구 얼굴에 물풍선을 던지거나 밤에 열리는 커플 댄스파티에 참가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부러움에 마음만 졸였다. 친구들이 축제 때만 개방하는 남자 기숙사를 구경하러 간다고 할 때면 그들 틈에 끼어서라도 가보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시절 해보지 못했던 게 너무 안타까워요. 요즘은 대학축제에서 낭만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연인끼리 게임을 즐기거나 춤을 추는 이벤트 같은 건 보기 드물고요. 저녁에 모여 술 마시는 축제로 전락한 것 같아 가끔은 서글퍼져요.” ●축제가 남긴 얼굴 빨개진 기억들 서울 K대를 졸업한 박모(33)씨는 대학축제 하면 ‘빨간 고무장갑´이 먼저 떠오른다.1995년 모 여대 축제 때다. 박씨는 학과 친구들과 그곳을 찾았다. 여대생들이 학교 안에 차린 주점에서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오후 10시쯤부터 친구들과 서로의 허리를 양팔로 잡은 뒤 길게 한줄로 늘어서 행진하는 ‘기차놀이´를 시작했다. 친구 중 한 명은 빨간 고무장갑을 머리에 쓰고 호각을 불며 흥을 돋웠다. 문제는 놀이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발생했다. 일부 친구가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 위에 올라가거나 여대생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행사를 방해했다. 여대 쪽에서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뉴스에 나왔죠. 저도 당시 노래 부르며 함께 놀았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우리 행동이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학과 친구들 모두가 함께 어울려 잊지 못할 축제의 추억을 만들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죠. 그런데 요즘 축제 때 대학에 가보면 썰렁하더군요. 여행을 가거나 취업 준비 때문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다들 뿔뿔이 흩어져 지내더군요.” 직장인 황모(29)씨는 해마다 5월 축제철이면 앞니가 시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1998년 대학입학과 함께 맞은 축제에서 황씨는 묘한 긴장과 흥분에 과음을 했다. 황씨와 함께 한 학과 선배와 동기들은 잔뜩 취한 상태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캠퍼스를 누볐다. 황씨가 ‘아, 이게 내가 생각했던 대학 생활이야.´라며 행복에 젖어든 그 순간, 사단이 나고 말았다.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같이 놀던 선배·동기들이 교내의 연못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고민할 것 없이 연못에 몸을 던졌던 황씨는 정체모를 뭔가에 부딪히면서 두 앞니가 부러져 버렸다. 연못인 줄 알고 뛰어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한 것. 황씨는 선배·동기들의 보살핌 속에 신속한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황씨는 이 날의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고 졸업할 때까지 축제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친구들아, 우린 왜 그 때 연못에 뛰어 들었을까.” ●축제 무관심, 지금은 후회돼요.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최모(23)씨는 대학 축제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광고 공모전에 더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 생활의 마지막 축제인 만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가요제와 공연을 챙겨 봤다. 가요제는 최씨가 다니는 대학의 축제 가운데 하이라이트라 불릴 만큼 학생들의 숨은 끼를 맘껏 감상할 수 있는 행사인 데다 올해 공연엔 몇년 전부터 팬이었던 가수가 찾아 왔기 때문이다.“사실 4학년이기도 하고 축제에 큰 관심은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가요제나 가수들 공연 정도만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공짜로 공연을 즐길 수 있잖아요. 돈주고 그들의 공연을 보는 건 솔직히 아깝고 이럴 때 학교 축제를 이용하는 거죠.”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김모(29)씨는 학교 축제에 단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학업과 취직공부 때문이기도 했지만 밤이면 흥청거리는 술문화가 싫었다. 축제기간이 다가오면 강의실은 텅텅 비었고, 심지어 휴강하는 교수까지 있었다. 하지만 회사원이 되고 보니 당시 축제를 제대로 즐겨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곤 한다. 상관들은 잘 노는 직원이 일도 잘 한다고 치켜세운다. 그는 회식자리나 5월 회사 야유회만 가면 조용히 앉아 있기 일쑤다.“예전에는 노력만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세상은 여러가지를 잘 하는 사람을 원하더군요. 무언가를 즐길 줄 아는 능력도 사회 생활에서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사건팀 nomad@seoul.co.kr
  • [깔깔깔]

    ●미팅할 때 폭탄 분류하는 법 수류탄:여드름이 많거나 울퉁불퉁 생긴 얼굴. 야광탄:밤에만 예쁘고 잘생긴 사람. 밝은 곳에서 보면 폭탄. 최루탄:외모와는 상관없이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 원자폭탄:미팅 시작하자마자 파장 분위기 내는 상대. 시한폭탄:초반에 얌전하게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 유도탄:마음에 들지 않는데 계속 따라다니는 진드기 같은 상대.●요일별 술자리월요일:월래 마시는 날. 화요일: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수도 없이 마시는 날. 목요일:목이 터지도록 마시는 날. 금요일:금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 토요일:토할 때까지 마시는 날. 일요일: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마시는 날.
  • “아들의 트럼펫 소리 아직 생생 참민주주의 큰 울림 되었으면”

    “아들의 트럼펫 소리 아직 생생 참민주주의 큰 울림 되었으면”

    “왜 꼭 이날이면 날씨가 이토록 화창하고, 꽃들은 또 왜 이렇게 흐드러지는지…내 아들은 차가운 땅속에 48년이나 누워 있는데….” 할머니는 고(故) 송영근의 묘석을 어루만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집 밖을 나서며 “올해는 울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김순곤(86) 할머니는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 1구역에 잠들어 있는 아들의 묘석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민주묘지에 누워 있는 아들은 4형제 중 장남이다. 의협심이 강했던 아들은 1960년 4월 중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분개했다. 서울 경신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4월19일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연세 세브란스 병원 바닥에 총에 맞아 숨진 채 누워 있었다. 총알은 머리를 관통했다. 어머니는 말 그대로 잠시 미쳤고, 진통제와 안정제를 먹고 정신없이 잠만 잤다. 며칠 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남편이 이미 아들을 화장한 뒤였다. 아들이 사망한 뒤 김씨는 신장병으로 몸무게가 30㎏이나 불었다. 남편은 아내 탓에 아들이 죽었다면서 공연히 화를 냈다. 김씨의 동생이 군대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는데 그 귀신이 아들을 앗아갔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그 비난에 힘들어하면서도 오히려 악착같이 살았다.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남은 세 아들을 키웠다. 이제는 한 달에 93만원씩 국가유공자 가족지원금도 나온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 때문에 나오는 돈이라서 좋은 곳에 써달라고 매번 절에 기부한다. “밴드부에서 활동했던 아들이 트럼펫을 멋지게 불었지. 이곳에 오면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잃은 내 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바람은 그것뿐이야.” 눈물 짓는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제각각 한을 품고 살아온 4·19혁명희생자유족회원들이 피워 놓은 향(香)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왔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문화마당] 사월혁명에 생각나는 대중가요/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학 교수

    [문화마당] 사월혁명에 생각나는 대중가요/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학 교수

    사월혁명이 나던 해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대구의 2·28을 도화선으로 해서 마산을 거쳐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던 사월혁명. 이후 나는 사리분별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학생들이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들이 뿌렸던 깨끗하고 순결한 피의 의미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차츰 알게 되었다. 4·19를 겪으며 문단이 정신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오히려 대중문화의 첨단이라 할 수 있는 가요계에서 놀라운 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가수 남인수가 취입한 음반 ‘사월의 깃발’은 지금 들어도 놀랍다. 당시 학생들이 뿌렸던 혈흔을 강하게 연상시키려는 듯 음반의 상표를 붉은 빛깔로 처리하였다.SP음반으로 발매된 이 음반을 들어보면 마치 씩씩하고 격렬한 분위기의 행진곡을 듣는 듯하다. 사월의 깃발이여 잊지 못할 그 날이여/ 하늘이 무너져라 외치던 민주주권/ 그 주권 찾은 날에 그대들은 가셨나니/ 임자 없는 책가방을 가슴에 고이 안고/ 눈물 눈물 눈물 속에 어린 넋을 잠재우리 손인호가 불렀던 ‘남원 땅에 잠들었네’도 사월혁명을 다룬 특별한 노래이다.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다. 흉흉한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4월11일, 그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전국의 학생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가요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이러한 역사적 경과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사월혁명을 다룬 가요가 썩 드문 현실 속에서 이런 작품의 출현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수 손인호의 거의 절규에 가까운 창법과 호소력이 느껴지는 애절한 분위기로 이 노래는 취입되었다. 대개 구체적 사건이나 실명을 다룬 노래들은 그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거나 유행을 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노래 또한 앞의 ‘사월의 깃발’과 마찬가지로 가요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대중적 유행을 탔건 못 탔건 간에 우리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당대의 삶을 얼마나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진지한 삶을 살아갔던가 여부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가요는 때로 민중의 갈망이나 당대 정치현실을 은근한 풍자와 암시의 수법으로 담아서 구체적 내용을 반영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손인호가 불렀던 ‘비나리는 호남선’과 박재홍이 불렀던 ‘유정천리’의 경우가 바로 그 표본이 아닌가 한다.‘비나리는 호남선’은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된 작품으로 대중들은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유세 중 세상을 떠났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정치적 불운을 담아서 추모곡으로 노래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오늘의 우리 가요들은 이런 역사와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 서서 나는 돌덩어리에 새겨진 다음 구절을 큰 소리로 읽어본다.‘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학 교수
  • 佛 고교생 시위 갈수록 격화

    |파리 이종수특파원|‘68혁명´ 40주년을 앞둔 파리의 4월이 청소년들의 시위속에 술렁이고 있다. 교육공무원 감원 계획에 반대하는 프랑스 고교생들의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8일(현지시간) 프랑스 최대의 고교생 단체인 ‘전국 고교생 연맹(UNL)’과 고교자주민주연맹(FIDL) 등이 주도한 파리 도심 시위에서 수도권 지역 1만여명의 고교생이 참가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 고교생들은 오는 9월 학기부터 교원 1만 1200여명을 줄이겠다는 정부 방침에 항의, 지난달 28일과 31일, 지난주 1일과 5일 등 매주 두 차례 시위를 벌여왔는데 갈수록 시위 규모가 커지고 있다. 8일은 수도권만이 아니라 남동부 도시 그르노블에서도 인근 12개 고교의 4000여명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그러나 교육부는 교원 감원 계획을 강행할 방침이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날 파리 도심 시위 현장에는 ‘새로운 68혁명이 필요하다’는 벽보까지 나붙어 일각에서는 더 큰 소요사태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저소득층과 이민자 청소년들까지 합세, 과격 폭력 시위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고교생 시위가 2005년 학교교육개혁안,2006년 최초고용계약제(CPE)에 반발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2시 파리 뤽상부르 공원 앞에서 시작한 도심 시위는 갈수록 가열됐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교사들을 돌려달라.”“참 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외치며 교육부 건물이 있는 앵발리드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해산에 나서자 고교생들은 돌 등을 던지며 맞섰다. 한편 파리 서쪽 마른-라-발레 지역의 크레퇴유에서는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시위대의 돌에 맞아 부상을 입고 학생 20여명이 체포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플로랑 르쿨트르 UNL회장은 “정부가 우리의 주장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비난했다.FIDL 소속의 아나 부아송도 “교원 감축을 거부하는 주장을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고교생들의 시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원 감축계획을 추진할 예정이어서 마찰이 커질 전망이다. 자비에 다르코스 교육장관은 “교원 감축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학생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정부가 늘 재원을 늘리는 방안에 골몰하기보다는 학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vielee@seoul.co.kr ■용어클릭 ●프랑스 68혁명 1968년 5월 대규모로 일어난 학생운동. 그해 3월 파리 근교 낭테르 대학 학생 8명이 불을 댕겼다. 이들은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을 습격했다.5월 들어서는 노동자들도 총파업으로 동참했다. 그래서 5월 혁명으로도 불린다. 중산층 자녀들의 대거 대학 진학 등 젊은 중산계층의 확산에도 불구, 변화하지 않고 구태를 고집하는 대학 및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베트남전을 계기로 분출됐다는 분석이다. 시위는 미국과 일본 등 국제적으로 번져 이탈리아에선 10여년 동안 계속됐다.
  •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봄 기운이 완연한 요즘,30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는 ‘벚꽃 구경’과 함께 ‘백골단’이 단골 메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불법 시위 엄단 조치의 하나로 발표한 ‘체포 전담반’이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에서 흰색 헬멧을 쓰고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던 ‘백골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곤 했던 대학가 시위와 ‘백골단’을 둘러싼 30대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90학번인 조모(37)씨는 봄만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린다. 실제 상처가 남아 있다기보단 그저 화인처럼 남아 있는 곤봉 폭행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이던 90년은 수업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진압에 픽픽 쓰러지고, 농민들은 시장 개방에 비쩍 말라갔다. 책을 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절 조씨에게 ‘백골단(白骨團)’은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991년 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학과 동료를 위해 법원 마당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 앞에 전·의경들이 서 있었고, 경찰 기동대장은 해산을 요구했다.“평화시위를 해산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 지 10여분 뒤. 청재킷과 흰 운동화,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전·의경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확 튀어나오더니 시위대를 마구 팼다.“몸집이 참 큰 사람들이었죠. 그저 공포였습니다. 철거예정지에 가면 가끔 조폭들과 연계해 나타나기도 했죠. 대학생들이 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냐고 말들 많지만, 배우는 학생들이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게 21세기가 원하는 협동심과 리더십을 공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죠.” 직장인 이모(36)씨도 봄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벚꽃놀이 갈 생각에 설레는 게 아니라 대학 새내기 시절인 91년 봄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학교 앞 집회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매일 집회가 계속 됐죠.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굉음과 강의실까지 스며드는 최루가스가 절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집회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강씨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생 김귀정씨도 을지로 골목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숨졌다. 이후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매일 대규모 집회가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렸다.“서울시청 광장을 놓고 백골단·전경과 매일 싸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꼭 서울시청 광장만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9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바지·청재킷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명동, 시청, 종로, 을지로 거리에서 숨바꼭질을 계속했다.“백골단은 전·의경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보유했죠.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경찰이 바로 백골단이었습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은 전·의경은 그저 특정 장소를 지키는 일에 주력했지만, 백골단은 검거가 목적이었죠. 백골단에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뛰었던지….” 최근 경찰이 체포 전담반을 꾸린다고 하자 이씨는 가슴이 벌렁거린다.“지금이 대체 어떤 때입니까. 진짜 과거의 백골단을 다시 만든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통일운동가 황선(34·여)씨도 씁쓸한 추억담을 털어놨다.92학번인 황씨는 같이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백골단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참 많이 닦아냈다고 돌아본다.“87년 민주화 이후에 집회시위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골단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죠. 당연히 집회 참가자들은 더욱 분개했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운동가 안진걸(37)씨도 백골단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안씨는 백골단이 단순히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존재’였다고 말한다.“무작정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백골단이 누가 시위대고 누가 시민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죠. 이유도 모른 채 다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96학번인 대학생 황모(31)씨는 백골단의 끝물을 맛봤다.97년 노동절 집회 때 한양대 근처에서 당한 토끼몰이식 폭행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집회는 80년대와는 달리 선배의 강압 없이, 자기 생각대로 나가든 말든 결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찰은 96년 있었던 한총련 집회 뒤 또다시 강경 진압을 남발했다. 집회에 갔다가 여자 후배 한 명과 함께 백골단에 쫓겼고 여자 후배를 멀리 피신시킨 뒤 자신만 집중 폭행을 당했다.“백골단은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생겼던 조직입니다. 해외에도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들이 있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유지하다 시위대가 흥분해 주변 시민을 위협하면 그제서야 곤봉을 듭니다. 무조건적인 체포와 폭력진압을 위주로 하는 백골단과는 성격이 다르죠.” 중학교 교사가 된 96학번 이모(31·여)씨는 같은 대학, 같은 학번 노수석씨를 기억한다.96년 초 새내기였던 이씨는 선배들의 권유로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 이씨는 “당시에도 등록금은 치솟고 있었고, 신입생 때는 무엇이든 참여하고픈 생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대문에 다다르자 ‘등록금 투쟁’ 구호는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최루탄이 터졌다. 이씨는 남자 동기의 손을 잡고 서울역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백골단이다. 남대문엔 골목이 많다. 큰길로 뛰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대부분 서울역으로 뛰었죠.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노수석씨를 비롯한 몇몇이 골목으로 뛰었다는 거예요. 골목은 목격자도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결국 노씨는 백골단에 폭행당해 숨진 채 발견됐다.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유모(32)씨는 백골단하면 촌스러운 청재킷이 떠오른다.96년 여름, 신분증 검사도 떠오른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측은했다고 말했다.“연세대에서 8월 사태가 있었죠. 그리고 교문을 들어갈 때면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서 시킨다고 폭력까지 휘둘렀던 백골단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백골단으로 불리는게 너무 싫었어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백골단’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던 전남지방청 소속 한모(44) 경사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누가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당시엔 초임 경찰관 가운데 덩치가 좋고 날렵한 사람들이 대거 검거전담반으로 차출됐죠. 백골단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진압복도 입지 않은 채 대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를 막느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더이상 그런 아픔은 없어야 겠죠.” 회사원 이모(32)씨는 98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그가 기억하는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의경 입장에서는 하얀 헬멧과 청재킷만 봐도 힘이 났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대학생들 앞에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백골단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씨에게 대학 시절 백골단은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전·의경 복무 시절 시위 현장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갑자기 시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싫어졌어요. 어떤 생각도 뛰어넘은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었죠.” 사건팀 nomad@seoul.co.kr ■ 백골단을 아시나요? “백골단이요? 알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골부대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백골단이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벌써 어엿한 대학생과 직장인이 됐다. 그들에게 백골단은 그저 생소한 이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회사원 김모(25·여)씨는 백골단을 백골부대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백골단, 유명한 부대잖아요. 여자인 저도 아는 걸요. 해골 부대 마크 있고…. 철원에 있잖아요. 백마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 아닌가요.” 백골단은 80∼90년대 활동했던 사복 시위 진압대라고 알려주자 김씨는 몹시 당황했다.“그런 진압대가 있었나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그 당시 유치원생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의 일부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네요. 인터넷에서 좀 찾아봐야겠어요.” 새내기 대학생 정모(19)씨도 백골단을 부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글쎄요. 왠지 군대쪽에 관련된 거 같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백골단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아직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돼 잘 모르겠네요.” 정씨는 기자로부터 백골단의 의미를 알게 되자 되레 의아해했다.“정말 그런게 있었나요. 진짜 조선시대 이야기 같습니다. 당당하게 경찰복을 입고 진압하지 왜 치사하게 사복을 입고 진압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직장인 최모(26)씨도 백골단은 금시초문이었다. 최씨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화려한휴가’를 본 뒤 관련 책 등을 읽어봤지만 백골단은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복경찰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들이 백골단이란 이름으로 움직인 조직원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고작 20여년밖에 안 된 일인데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나네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부고] ‘김주열 사진’ 특종 허종씨 별세

    자유당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채 발견된 김주열(당시 17세)군의 사진을 처음으로 보도했던 전 부산일보 기자 허종씨가 22일 오전 6시쯤 별세했다.85세. 고인은 부산일보 마산주재 기자로 1960년 4월11일 마산시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숨진 채 떠오른 김주열군의 사진을 찍어 다음날 신문에 보도함으로써 4·19혁명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언론인이다. 이 사진은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고인은 마산문화방송 보도부장, 마산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고 제1회 마산시민상을 수상했다.빈소는 마산시 자산동 마산의료원 신관 1호실이며, 발인은 24일 오전 8시.(055)249-1400.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中, 올림픽 성공개최 차질 ‘초비상’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14일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는 중국의 목표에 큰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20년만의 최대규모인 이번 폭동은 베이징 올림픽을 불과 5개월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가적 위상을 과시하겠다는 중국에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 또한 중국이 이번 폭동을 유혈 진압함에 따라 중국의 반인권적인 행위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단 다르푸르사태에 대한 중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는 이에 기름을 끼얹을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탄압정책을 이유로 전세계적인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사태도 우려된다. 더불어 이번 폭동이 중국군의 강력한 탄압과 철저한 감시를 뚫고 발생했다는 점에서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티베트 내 주요 사원에 군과 경찰을 배치, 주변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라싸의 드레스풍 사원은 군인들이 3중으로 에워싸고 있었으며 세라 사원엔 200명의 경찰을 배치해 승려들을 외부와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봉쇄조치도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티베트인들은 올림픽이 미디어와 세계의 이목을 끌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올해는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을 감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해로 판단하고 있다.”는 자유티베트 캠페인 간부의 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번 폭동은 중국의 일방적인 강압정책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해석된다. 중국은 1950년대 초반 티베트를 강제로 합병한 이후 잇단 독립 요구 시위를 무력 진압해 왔다.1959년 3월10일 대규모 독립시위와 1989년 3월5일 대규모 독립시위의 강제 유혈 진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폭동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최소 베이징 올림픽까지는 계속되리란 전망이다. 티베트인들은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올림픽을 계기로 지난 57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티베트에서는 지난 10일부터 ‘티베트 봉기’ 49주년을 맞아 티베트와 인도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인 시위가 시작돼 5일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11일엔 라싸에서 세라 사원 승려 600명이 체포된 승려 12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중국은 공안 2000여명을 투입해 최루탄을 발사해 강제 해산했고 60여명을 연행했다. 앞서 10일에는 칭하이 북서부의 루창사원 승려 400여명이 시위를 벌이며 티베트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주장했다. 또한 티베트 망명자들로 구성된 5개단체 회원 100여명은 지난 10일부터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를 출발, 베이징 올림픽이 폐막하는 8월 말까지 약 6개월간 걸어서 고향인 티베트까지 가는 대장정시위에 돌입한 바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中, 올림픽 성공개최 차질 ‘초비상’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14일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는 중국의 목표에 큰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20년만의 최대규모인 이번 폭동은 베이징 올림픽을 불과 5개월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가적 위상을 과시하겠다는 중국에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 또한 중국이 이번 폭동을 유혈 진압함에 따라 중국의 반인권적인 행위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단 다르푸르사태에 대한 중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는 이에 기름을 끼얹을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탄압정책을 이유로 전세계적인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사태도 우려된다. 더불어 이번 폭동이 중국군의 강력한 탄압과 철저한 감시를 뚫고 발생했다는 점에서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중국은 티베트 내 주요 사원에 군과 경찰을 배치, 주변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라싸의 드레스풍 사원은 군인들이 3중으로 에워싸고 있었으며 세라 사원엔 200명의 경찰을 배치해 승려들을 외부와 차단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봉쇄조치도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티베트인들은 올림픽이 미디어와 세계의 이목을 끌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올해는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을 감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해로 판단하고 있다.”는 자유티베트 캠페인 간부의 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번 폭동은 중국의 일방적인 강압정책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해석된다. 중국은 1950년대 초반 티베트를 강제로 합병한 이후 잇단 독립 요구 시위를 무력 진압해 왔다.1959년 3월10일 대규모 독립시위와 1989년 3월5일 대규모 독립시위의 강제 유혈 진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폭동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최소 베이징 올림픽까지는 계속되리란 전망이다.티베트인들은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올림픽을 계기로 지난 57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티베트에서는 지난 10일부터 ‘티베트 봉기’ 49주년을 맞아 티베트와 인도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인 시위가 시작돼 5일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11일엔 라싸에서 세라 사원 승려 600명이 체포된 승려 12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중국은 공안 2000여명을 투입해 최루탄을 발사해 강제 해산했고 60여명을 연행했다. 앞서 10일에는 칭하이 북서부의 루창사원 승려 400여명이 시위를 벌이며 티베트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주장했다. 또한 티베트 망명자들로 구성된 5개단체 회원 100여명은 지난 10일부터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를 출발, 베이징 올림픽이 폐막하는 8월 말까지 약 6개월간 걸어서 고향인 티베트까지 가는 대장정시위에 돌입한 바 있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티베트 독립 요구 대규모 폭동

    티베트 독립 요구 대규모 폭동

    중국의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14일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시위대는 중국인 상점과 차량에 불을 지르고 중국군이 이에 맞서 시위대에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우려된다. CNN,AP 등 외신들은 이날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전하면서 1000여명의 시위대가 돌과 콘크리트를 던지고 군용차량을 파손하며 한때 시위진압 경찰들을 시내 외각으로 몰아냈다고 전했다. 시위대는 특히 중국 최대 부족인 한족 소유 상점과 차량을 타깃으로 공격했다. 이번 폭동은 1989년 3월5일 라싸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벌어진 이후 최대규모다. 특히 8월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5개월도 채 남기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의 유혈 진압으로 사태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인권단체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발과 함께 인권탄압 등을 이유로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전세계적인 보이콧이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폭동은 조캉사원 인근의 바크호르 광장 부근에서 발생했으며 티베트인 상점 주인들은 시위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상점 바깥에 티베트의 스카프를 내걸었다. 지난 10일 티베트 봉기 49주년을 맞아 티베트 현지는 물론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시작돼 중국군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5일째 이어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 무력진압 중단 촉구 인도에 망명중인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이날 “티베트 주민들의 뿌리깊은 분노의 표현”이라면서 중국 당국의 무력진압 중단을 촉구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남아共 흑인학대 비디오 파문

    흑백통합정책을 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엽기적인 인종차별 비디오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백인 대학생들이 흑인 직원에게 소변을 갈긴 음식물을 먹이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시위가 거세지고 대규모 폭력사태도 우려되고 있다. 27일(이하 현지시간) 남아공 SABC 등 현지언론과 CNN 등에 따르면 26일 공개된 문제의 비디오는 남아공 사법수도인 중부 내륙 블룸폰테인의 프리스테이트 대학(UFS)의 남학생 기숙사에서 지난해 9월 촬영된 것이다. 남자 백인 대학생 4명이 기숙사 행사인 묘기경쟁대회에서 남성 1명과 여성 4명 등 흑인 직원들을 데려다 차마 먹지 못할 음식물로 모욕을 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한 백인 대학생이 쇠고기 스튜가 담긴 그릇에 소변을 갈긴 뒤 흑인들에게 먹도록 강요하고 흑인들은 무릎을 꿇은 채 먹는다. 이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과정에서 구토를 하기도 했다. 화면의 마지막에는 아프리카어로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흑백)통합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깔린다. 학대를 당한 이들은 지난해 인종 통합 프로그램에 따라 이 학교 기숙사에 고용돼 일하고 있던 직원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영상이 공개되자 27일 블룸폰테인에선 격앙한 흑인 대학생 400여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진압했지만 남아공 전역에서는 항의가 빗발쳤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노숙자로 전락한 퇴역미군 실상

    MBC ‘W’는 18일 오후 11시50분 ‘무방비 도시, 케냐 나이로비를 가다 외’편을 방송한다. 위기를 맞은 아프리카 케냐의 민주주의, 최초의 백인 게이샤, 퇴역 미군의 생활 등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아프리카의 모범생’이라 불리는 케냐. 아프리카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통했던 이 나라가 폭동에 휘말렸다. 지난해 12월27일 네 번째 대통령 선거일 이후,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이 최루탄과 총으로 맞서 지금까지 600여명의 사망자와 4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같은 소요의 원인은 케냐 대통령의 부정선거 논란 때문이다. 케냐 국민들은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도둑맞았다.”고 외치고 있다. 얼마 전 백인 게이샤 관련 기사가 인터넷을 달궜다. 게이샤 사회의 400년 전통을 깨고 정식 게이샤로 데뷔한 호주 출신 여성이 화제의 주인공이었다.일본에서도 신비에 싸여 있는 게이샤 사회에 이방인이 발을 들이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도쿄 아사쿠사에서 게이샤 생활을 시작한 최초의 백인 게이샤 사유키를 만난다. 미군의 퇴역 후 생활을 살펴보는 코너도 흥미롭다. 오늘날 미군은 전세계에 손길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퇴역 이후 생활은 안정적이지 않다. 한창 일할 나이임에도 사회로 복귀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허드렛일뿐이다. 그나마도 여의치 않은 퇴역군인들은 노숙자로 전락하기까지 한다. 전쟁터에서의 스트레스로 정신 장애를 앓는 사례에서부터 사회부적응자로 내몰린 사례까지 미국 사회의 또다른 그늘이 돼버린 퇴역 군인들의 실상을 조명한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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