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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반민족행위 708명 명단(2)

    ◇1911년∼191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권중현 ▲이근상 ▲이근택 ▲이재곤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한창수(이상 고문) ▲강경희 ▲남규희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박중양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조영희 ▲홍승목(이상찬의) ▲권태환 ▲김필희 ▲민건식 ▲박제환 ▲성하국 ▲송헌빈 ▲신태유 ▲어윤적▲오제영 ▲유흥세 ▲이항식▲이만규 ▲이봉노 ▲이항식 ▲정동식 ▲정병조 ▲조병건 ▲조원성 ▲조재영 ▲최상돈 ▲허 진 ▲홍운표 ▲홍재하(이상 부찬의). ◇1916년∼1920년 중추원. ▲민상호 ▲조민희(이상 고문) ▲강경희 ▲박중양 ▲조희문(이상 찬의) ▲김낙헌 ▲김한목 ▲민원식▲서회보(이상 부찬의). ◇1921년∼192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이상 고문) ▲김현수(부찬의)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제빈 ▲서상훈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노 ▲이건춘▲이겸제 ▲정진홍 ▲조민희▲조영희 ▲조희문 ▲강병옥▲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필희 ▲김현수 ▲노창안 ▲나수연 ▲민건식▲민영은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열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오재풍 ▲유기호 ▲유빈겸 ▲유흥세 ▲윤치소▲이근우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학 ▲이택현 ▲이항식 ▲장 도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상황 ▲한영원 ▲허명훈 ▲현 은 ▲구연수 ▲김춘희 ▲현기봉(이상 참의). ◇1926년∼1930년 중추원. ▲박영효 ▲이완용(이상 부의장)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영진 ▲민상호 ▲민영찬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박중양 ▲백인기 ▲상 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조진태 ▲조희문▲한상룡 ▲한진창 ▲권태환 ▲김갑순 ▲김명규 ▲김명준 ▲강병옥 ▲김상설 ▲김상섭 ▲김창한 ▲노창안 ▲박경석 ▲박기동 ▲박종렬 ▲박흥규 ▲선우순 ▲송지헌 ▲송종헌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익환 ▲유흥세 ▲이강원 ▲이기승 ▲이동우 ▲이병열 ▲이택규 ▲이항식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상철▲장응상 ▲장직상 ▲정난교 ▲정순현 ▲정태균 ▲정호봉 ▲최석하 ▲한영원 ▲한창동 ▲홍성연 ▲김윤정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이상 참의). ◇1931년∼1935년 중추원.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윤정▲남궁영 ▲민상호 ▲박영철 ▲박용구 ▲어 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이진호 ▲장헌식 ▲조성근 ▲최 린 ▲한규복 ▲한진창 ▲고일청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영택 ▲김정호 ▲김종흡 ▲김한규 ▲김한승 ▲박기석 ▲박종렬▲박철희 ▲박희옥 ▲석명선 ▲선우순 ▲송지호 ▲신희연 ▲오태환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우▲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병렬 ▲이선호 ▲이충건 ▲이택규 ▲이희덕 ▲장대익 ▲정관조▲정난교 ▲정대현 ▲정석모 ▲최양호 ▲최윤주 ▲최인국 ▲최창조 ▲한영원 ▲현헌 ▲현준호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성준 ▲진희규 ▲홍종철(이상 참의). ◇1936년∼1940년 중추원. ▲민병덕 ▲민병석 ▲윤덕영(이상 부의장)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영진 ▲남궁영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 담 ▲엄준원 ▲유정수 ▲유혁노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장헌근▲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 주영환 ▲한규복 ▲한상룡 ▲홍종국 ▲강심 ▲강동희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상회 ▲김신석 ▲김정석 ▲김진수 ▲김창수 ▲김한목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안종철 ▲오세호▲원덕상 ▲유태설 ▲이경식 ▲이근수 ▲이기찬 ▲이승우 ▲이은우 ▲이종섭 ▲이진호 ▲이희적 ▲인창환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난교▲정석용 ▲정대현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 윤 ▲최남선 ▲최준집 ▲최지환 ▲하준석 ▲현 헌 ▲현준호 ▲홍치업 ▲홍종국 ▲유만겸(이상 참의). ◇1941년∼1945년 중추원. ▲박중양 ▲이진호(이상 부의장)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용(이상 고문)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난교 ▲정연기 ▲진학문 ▲최 린 ▲한규복▲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준 ▲김화준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용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 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 한정석 ▲ 현준호 ▲황종국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이상 참의) ▲엄창섭(서기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강원수 강필성 계광순 고안언 구연수 구자경 권중식 길원봉 김대우 김덕기 김동훈 김병욱 김병태 김성환 김시권 김시명 김영년 김영배 김영상 김우영 김진태 김창영 김태동 김태석 김화준 김희덕 남궁영 노영빈 박규원 박용구 박재홍 손영목 송문헌 송문화 송찬도 양재하 엄창섭 유만겸 유시환 유홍순 윤상희 윤종화 윤태빈 이계한 이기방 이동진 이범승 이범익 이병석 이성근 이원보 이종국 이창근 이해용 이현전 임문석 임승수 임헌평 장기창 장수길 장윤식 장헌식 전지용 정교원 정규봉 정민조 정연기 정용신 조경하 조종춘 주영환 진염종 차윤홍최경진 최병원 최익하 최창홍 최하영 한동석 한종건 현석호 홍승균 홍영선 홍종국 홍헌표. ◇조선총독부 판사.검사. ▲김락헌(조선총독부 판사) ▲민병성(京城復審법원검사) ▲이선종(조선총독부平壤覆審법원검사) ▲홍승근(조선총독부大邱覆審법원검사). ◇밀 정. ▲강락원 김동한 김인승 박두영 박석봉 배정자 선우갑 선우순 오현주 이종영 이준성 장문재 장우형 정병칠 최정규. ◇친일단체. ▲김명준 김한규 민영기 민영휘 박제빈 박춘금 선우갑 선우순 송병준 신석린 염중모 윤갑병 윤시병 윤치호 이동우 이병열 이완용 이용구 이윤용 조중응 조진태 한상용. ◇조선총독부 군인. ▲김석원 김창용 박두영 어 담 이병무 정 훈 조동윤. ◇경 시. ▲강경희 강보형 강진풍 계광순 구연수 구자경 권오용 권중익 권태형 길홍경 김계현 김극일 김대원 김덕기 김동선 김명환 김상순 김상욱 김소직 김승련 김영배 김영수 김영찬 김우종 김윤복 김은제 김인영 김종원 김준권 김창영 김창림 김태석 나구하 노기주 노덕술 노인국 마현희 문진상 박근수 박인종 박장환박재수 박정노 박준호 박희정 변영화 서기순 서상용 소진은 손석도 안경선 안형식 엄주면 연태윤 오석유 오세윤 윤병희 윤종화 이계한 이성근 이원보 이재붕 이종국 이종식 이창우 이헌규 임호영 임흥재 장강선 장기창 장우근 장우식 장헌근 전봉덕 전영찬 전창림 정기창 정충원 조성구 조연광 조종춘 조종훈 조창현 주익상 채규병 최 연 최 탁 최경진 최기남 최석현 최지환 최창홍 최태현 표한용 한동석 한석명 한정석 한종건 허 섭 현기언 황신태 황태근. ◇군수산업 관련자. ▲고원훈(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 중심인물) ▲고한숭(송도항공기주식회사사장 개성경방부단장) ▲김계수(비행기헌납,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문명기(비행기헌납)▲박두영(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고문) ▲박흥식(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설립) ▲방의석(애국기 2대 헌납) ▲배영춘(비행기 1대 헌납) ▲백낙승(비행기 1대 헌납) ▲신용옥 (비행기 헌납) ▲이영개(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최주성(비행기 1대 헌납). ◇조선총독부 판사. ▲김준평 노상구 문택규 백윤화 양원용오승근 오완수 원종억 윤성보 이명섭 이상기 이우익 이충영 장기상 조진만 한상범. ◇고등형사 ▲김병태 김석기 김영기 배만수 심량체 오세윤 이대우 이종하 장인환 홍사묵. ◇기 타. ▲고일청 김기진 김길창 김동환 김문집 김연수 김용제 김태흡 김희선 박석윤 박영희 박춘금 박흥식 박희도 방의석 배정자 서 춘 서범석 서병조 서정주 손영목 신용옥 신태악 신흥우 양주삼 원덕상 유진순 윤치호 이각종 이광수 이산연 이석규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영근 이영찬 이인직 이종욱 이종린 이진호 이회광 이희적 임창수 임흥순 장석원 장우식 장인원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부일 전필순 정교원 정국은 정인과 정인익 정춘수 조병상 주요한 진학문 차남진 차재정 최 린 최남선 최승렬 최재서 최정묵 최준집 한상룡 허영호 현영섭 현준호 홍승균.
  • 57년만의 명단발표 의미/ 친일청산 ‘역사 바로세우기’

    범국민적인 일제잔재 청산작업의 신호탄이 될 것인가. 28일 일부 여야의원들에 의해 발표된 친일인사 708명 명단은 전체 국회차원은 아니지만,해방후 57년만에 공신력 있는단체에서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그동안 민간차원에서는 친일인사들을 단죄하자는 운동이 간헐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나 지난 50년 반민특위가 활동도중해산된 이후 정부나 국회차원에서는 공식적인 청산노력이 구체화되지 못했다. 광복회 관계자는 “그동안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실력자로 버티고있어 감히 추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면서 “16대 총선에서 젊은 개혁파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해 ‘총대’를 메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친일인사 면면] 이번에 공개된 명단은 한일합방전인 1890년대부터 광복된 1945년까지의 친일행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이완용처럼 한일합방에 앞장섰거나 일제총독부에서 활동했으며,이광수나 최남선등 사회문화계에서 일본강점을 합리화했던 인물들로 분류된다. 현역의원중에는 한나라당 최돈웅(崔燉雄) 의원의 부친(최준집)이 포함됐는데,1936∼40년 당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여성박사 1호 김활란(金活蘭) 등 17명의 경우 “우리사회에 끼친 공적을 감안해야 한다.”는 내부 이견 때문에진통을 겪은 끝에 1890년대 친일행적으로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판단된 ‘김인승’만을 제외한 16명이 모두 명단에 포함됐다. 200여쪽에 달하는 명단 발표자료는 “김활란이 친일의 길을 걸은 여성지도자의 대명사로 이화여전과 이화교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애국자녀단을 조직했고,고황경(高凰京)은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사회학자로 일본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교육하는 데 앞장서 왔다.”고 밝혔다. 또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毛允淑)은 임전대책 강연 등에서 ‘일본여성의 갈길’을 부르짖었고,여성계몽운동가로 알려진 박인덕(朴仁德)은 매일신보 등을 통해친일선동 글들을 발표했으며,덕성여자실업학교장을 지낸 송금선(宋今璇)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강사로 활동했고,경성가정여숙 창립자인 황신덕(黃信德)은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로 평가됐다. 이어 화가 김은호(金殷鎬)는 ‘금채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했고,심형구(沈亨求)는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선봉장’으로,현제명(玄濟明)은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로,‘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는 친일가요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음악활동을 했고,이능화(李能和)는‘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로,정만조(鄭萬朝)는 ‘친일유림의 거두’라고 밝혔다. [논란] 명단에 포함된 인사의 직계가족들이 명예훼손 혐의로 법적 대응을 할 소지가 있다. 또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명단 발표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김희선 의원은 그러나“모든 법적 소송에 대응할 것이며,증빙자료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상연기자 carlos@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6시그마 경영혁신’

    코스모스 피었던 길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동경하며 손을 흔들어주던 어릴적 아련한 향수처럼 기차는 늘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차만큼이나 국민과 애환을 함께한 수단이 또 얼마나 있을까? 일제시대는 강제수탈의 도구로,6·25전쟁 시에는 수많은피란민들의 피란 수단으로,70년대에는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철도는 국민의 생활 속에 묵묵히 함께 하고 있었다. 이 땅에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 육당 최남선은 “그 기적소리가 천둥과 같고,그 빠르기가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못하더라”고 경이로움을 표현했듯이 철도는 근대화의 기수로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다.그러나 우리가 간직한 기차의 모습은 시골 할머니가 서울 사는 자식들을 위해 가져가는 선반 위의 씨암탉과 찐계란·오징어·사이다가 왔다고외쳐대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정감있게 어우러진 열차 내풍경,전당포와도 같은 역창구에서 표를 사기 위해 꾸러미를 이고 기다리는 아낙네의 모습 등등,그런 것들이 아닐까한다. 그렇게 지난 100년의 역사가 언제나 회색빛 색깔로 인식되던 철도가 이제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여 컬러풀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산만하게만 보였던 시설과 환경이 말끔하게 정리되었고,대합실이 문화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열차내 서비스또한 첨단 시설로 편안함과 고급스런 분위기로 항공서비스를 능가하는 한편 정동진 해돋이열차,환상선 눈꽃열차,달빛소나타열차 등 자연과 꿈, 감성에 호소하는 다양한 열차상품이 선풍을 일으키며 관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이와 함께 열차의 고장 감소,안전도 및 승차감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 등에 대한 노력으로 민간기업을 능가하는 경영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지금까지의 불합리한 관행과 낭비요인을 제거하여고객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철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업무를 개선하려는 6시그마경영혁신에 대한 노력으로 ‘2001고객만족 및 6시그마경영혁신 전국대회’에서 민간기업을제치고 최우수상을 수상,여러 곳에서 철도의 대변혁을 전수받고자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6시그마란 100만번당 3∼4개의 결점만을 허용하는 경영 전반의 품질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철도의 성공체험이 다른 공공기관은 물론 우리나라 산업계에 확산되어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바탕이 되어야 하겠기에 어깨가 더욱 무거워짐을 느낀다. 손학래 철도청장
  • SBS FM 광복 특집 ‘실록 조선사편수회’

    “2,500년 우리 상고시대 역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그 누구도 알지…흠흠…이거 까다롭네.” SBS 러브FM(103.5㎒)의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드라마 ‘실록 조선사편수회’(13∼15일 오전11시)의 녹음이 한창인스튜디오.MBC라디오 ‘격동 50년’으로 유명한 성우 김종성씨가 굵직한 목소리로 해설을 해 나가지만 오랜만에 라디오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진과 신호가 안 맞아 여러차례 NG가난다. “전하∼”“뭬야?”등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이크를 점검하던 성우들은 일단 녹음에 들어가자 안타까운 일제 시대역사 왜곡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실록 조선사편수회’는 SBS라디오가 ‘실록 김두한’이후 3년만에 만드는 드라마.우리 민족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날조,말살시키려 했던 조선총독부 산하 역사왜곡기관인조선사편수회의 16년간 회의 자료를 토대로 드라마를 구성했다. 1부 ‘너희가 역사를 아느냐’는 조선사편찬위원회의 활동과 조직,임직원 명단과 직무 등을 상세히 공개하고,2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는 친일학자 최남선과 역사학자이병도 등이 식민사관 형성에 기여한 바를 폭로하며,3부 ‘그래도 역사는 흐른다’는 일제의 조선 역사 왜곡에 맞선박은식,신채호,정인보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의 외로운 역사투쟁을 평가하고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해부한다. 해설을 맡은 김종성씨 외에도 고조선 관련 사서를 수십만권 불태웠던 구로이타 동경제대 교수역은 드라마·연극 등을 통해 낯익은 성우 주호성씨가 맡았다. 조선사편수위원으로 10여년이 넘도록 역사 왜곡에 일조한최남선은 ‘메가패스’광고의 이순신장군 목소리로 유명한김태성씨가 연기한다.오순제 한국고대사연구소장,김호석 중앙대 사학과 교수 등 역사학자들이 참여,충실하게 고증했다. 10년전부터 자료를 수집하며 드라마를 기획했다는 곽노흥작가는 “단군조선 등 우리의 2,500년 고대사가 일본에 의해 신화로 전락했다”면서 “청소년들이 꼭 이 방송을 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윤창수기자 geo@
  • [대한광장] 친일파 논쟁을 보면서

    필자는 월간중앙 8월호에 임정 국무위원 김승학 선생이 작성한 친일파 명부에 해제를 붙이면서 이 문제가 아직도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느낄 수 있었다. 1945년 8월15일,일본 ‘천황’이 떨리는 음성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수많은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어디에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알 수없는 태극기가 새 하늘에 펄럭였다. 반면 친일파들은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한 순간에 뒤바뀐 세상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운명은 사형,장기구금,재산몰수로 구체화될 민족의 심판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1944년 8월25일,불과 5년간의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대대적인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나섰다.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나치하의 비시 정권의 총리를 지낸 라발 총리 등에게 사형을 선고 집행했고,일반법원은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779명의 사형을 집행했다.지방법원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약 3,000여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보다 수십배의 나치 협력자들이 종신 강제노동형 등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이광수와 최남선을 비롯한 일부 친일지식인들이서둘러 반성문을 쓴 것은 프랑스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한 공포감도 작용한 것이다.이런 지식인들보다 더욱 공포에 떨었던 일단의 반민족 행위자들은 일제 고등계 경찰들과 친일 검사·검사보들이었다.이들은 실제로 독립운동가를 직접 체포,고문한 독립운동가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포가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고 다시 독립운동자 박해에 나서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효용성과 반공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등용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박해하게 한 것이다. 48년 국회가 개원하면서 설치된 반민특위는 온 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친일 경찰들에게 특위 사무소가 습격당하는 등 수난을 겪다가 문을닫고 말았다.그리고 이 땅에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담까지 생겨나는 가치관의 혼돈이 난무하게 되었다.이런 점에서 친일파 명단을 작성했던 김승학 선생이 64년그의 마지막 유고가 된 한국독립사 서문에 쓴 글은 아직도 심금을 울린다.“무릇 한국가를 창건하거나 중흥시키면 가장 먼저 유공자를 논공행상하고 반역자를 엄격하게 치죄하는 것은 후세 자손들에게 유공자의 우국충정을 본받게 하고 반역자의 그 죄과와 말로를경계케 하여 국가주권을 길이 반석 위에 놓고자 함이다…건국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를 범한 것은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던 항일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전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施政)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執政)10년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 ‘이 중대한 실정’의 과오가 오늘까지 이어져 대다수 국민들이 창씨개명했으니 모두가 죄인 아니냐며 친일행각을 두둔하는 가치전도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지하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자손들이 살아야 할 이 나라가 ‘항상 악이 승리하는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친일파 문제를 둘러싼말장난만큼은 즉각 중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한 말장난에 분개하는 것은 지하의 독립운동가들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시대의 증언’채록 2권 출간/ 현대사 공백 메우는 ‘구술역사’

    한국 근세사를 치열하게 산 ‘시대의 증인들’의 구술이기록돼 단행본으로 나왔다. 도서출판 선인은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과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김석형 구술,이향규 녹취·정리)를 동시에 펴냈다.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은 정신문화연구원이 구술자료총서 제1권으로 독립운동가,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정치인,군 원로,비전향장기수,원로 음악가 등 8명의 ‘예사스럽지 않은’ 개인사를 기록한 것이다. 조문기(75) 선생은 일제하 마지막 국내의열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는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다.그는 작년부터 친일파 전문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월 타계한 송남헌 선생은 1943년 ‘경성방송국 단파방송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미군정 당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낸 우사 김규식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1948년 남북협상때 우사를 모시고 방북한 인물. 교사출신으로올해 91세인 김선 할머니는 해방후 정당에서 활동한 기억을 증언하고 있으며,일본 니혼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로 해방을 맞은 백남권(79)예비역 장군은 1943년 11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도툐로 건너와 “학병 나가라”고 권유연설을 하길래 춘원에게“옛날의 이광수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증언했다. 3공 당시 내무장관 3회,체신장관 1회,교통장관 1회 등 한정권에서 무려 다섯번이나 장관을 지낸 박경원(78)전 장관은 창군시절,한국전쟁,5·16과 정치참여 등을 비교적 진솔하게 토로했다. 함북 학성 태생으로 북한 김책공대 출신의 비전향장기수 최하종씨(74)는 1963년 5·16주체세력이자 당시 현역 사단장이었던 숙부 최주종씨(작고)를 만나 통일문제를 협의하려왔다가 체포돼 반공법위반으로 35년간 감옥생활을 마치고지난해 9월 평양으로 송환된 인물이다.이밖에 남쪽출신의비전향장기수 허영철씨(81),음악계의 원로 박용구씨(87) 등의 숨가쁘게 살아온 생애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었소!’는 이규향 박사(경남대 북한대학원 객원교수)가 작년 9월 2일 평양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63명 가운데 한 사람인 김석형씨(87)의 구술을 5년간에 걸쳐 채록,정리한 것이다. 김씨가 자신이 죽거나 북으로 송환된 뒤에 공개해 달라고요청해 그동안 이박사의 서랍속에 잠자고 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정신문화연구원의 구술채록작업 실무책임자인 정용욱 교수(민족문화연구팀장)는 “구술자료는 기억의부정확성,주관성 등으로 인해 검증과 치밀한 비판이 필요하다”면서 “새로운 자료제공과 묻혀진 과거사 복원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역사적 인물의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은 공식적인역사기록의 ‘사각지대’를 메운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면서 “특히 외세지배와 분단상황으로 점철된우리 현대사의 경우 곳곳에 공백지대가 남아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김지하씨 용기와 왜곡언론

    김지하씨가 10년 전 잘못 쓴 글에 속죄하고 1980년 광주학살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 양심선언을 했다.반가운 일이다.과오는 인간 실존의 한계이기도 하다.문제는 참회하지 않거나 숨기고 계속 자행하는 데 있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김지하씨는 저항과 고난의 상징이었다.그런 김씨가 어둠의 두께에 눌렸던지 어느 날 독재를 비호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군사독재가 마지막 발악으로 치닫던 1991년 5월,명지대 강경대군 사건 이후 대학생의 분신 자살이 잇따르고 민주세력과 독재정권의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그 무렵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는 김씨의 칼럼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비수였다.이어서 박홍 서강대총장이 “최근 발생하는 죽음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고 가세해 민주진영을 위협했다. 김씨의 변신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그래서 긴급 소집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46대1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김씨를 제명했다.이 단체는 김씨를 비롯,투옥 중인 작가들의 석방운동을펴면서 자유문인실천협의회로 출발했다. 이렇게 구성된 단체가 김씨를 제명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이다. 연세대의 ‘연세춘추’는 “수십만의 민중들에게 지하는 이제 의식화 아닌 세뇌를 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홍익대 ‘홍대신문’은 “아! 당신은 당신이 쓴 시 속의 오적”이라고분노했다. 김지하씨는 ‘죽음의 굿판…’ 외에도 ‘다수의 침묵 그 의미를 알라’는 또 다른 칼럼을 썼다.앞의 글과 크게 다르지않은 내용이었다. 우리의 오적(五賊) 시인은 이렇게 변신해 갔다.그리고 생명사상이니 율려사상이니 하며 거창한 담론을 생산해도 ‘동지’로서 김씨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마치 육당 최남선이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따위를 쓴대서 별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분위기와 흡사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던 김씨가 마침내 참회하고 해명했다.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젊은이들 가슴에 아픈 상처를 준 것 같아 할 말이 없다”는 김씨는 △‘말썽많은’ 조선일보에 칼럼을쓴 것 △흥분해 있는 학생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점 △정권에 이용당할 만한 빌미를 준 사실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 김씨는 자신의 칼럼 제목이 ‘젊은 벗들,역사에게 무엇을배우는가’에서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로 바뀌었다고 공개했다. 편집자가 제목을 고칠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엉뚱하게 변조한 의도는 무엇 때문이었을까.그런 언론인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필자는 김 시인과 ‘작은 인연’을 갖고 있기에 남달리 그의 행적을 지켜봐 왔다.사상계에 실렸다가 판금된 담시(譚詩)‘오적’을 ‘민주전선’에 게재해 신문이 압수되고,유신정변 때는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다른 문제와 함께 이 시를싣게 된 과정과 김씨와의 관계를 추궁받고 당할 만큼 당했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김 시인의 굴절에 안타까워했던것은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70,8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존재는 많은 국민에게 큰 자랑이고 긍지였다.담시 ‘오적’에서 시작된 그의 길고 긴 고행(苦行)은 당대 민족양심의 고행,바로 그것이었다.이 때문에 그에 대한 애정과 증오가 겹쳤다. 김지하씨는 용기 있는 지식인이다.보통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 한다.벌써 10년 세월이 흘렀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생명사상가로서 새 영역을 넓히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양심과 역사에 충실하고자 10년 묵은 응어리를 스스로 풀었다.참용기의 모습을 보여준다.이참에 80년 5월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았던 언론인들도 참회하고 용서를빌면 어떨까.공수부대원도 하는 일을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IPI 등 국제 언론기관에 ‘주문생산’까지 하면서 제 나라 얼굴에 먹칠하는 일부 족벌언론 사주,여기에부화뇌동하는 젊은 기자들도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김삼웅 주필 kimsu@
  • 독자의 소리/ 청소년에 ‘3·1독립선언서’ 원문 읽게해야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 및 3·1독립선언서 등 3개가있다. 이 선언문들은 모두 한자를 모체로 해 작성된 것이어서 읽기에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래서 알기 쉽게 한글로 바꿔 사실상 번역이 되다시피 했는데 3·1선언서의 경우 시류에 따라 여러번 고친 결과 4개의 선언문이 나돌고 있다. 지금 우리가 행사때마다 낭독하는 선언문은 가장 최신의 것으로 문장이 쉬워졌다. 그러나 심오한 내용이 희석되어 흔한 결의문처럼 쇠락하고말았다.한자만 섞이면 청소년의 이해 문제를 거론하면서 쉽게 고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원문을 익혀야 한다.조소앙,이광수,최남선 등 당대의 대문장가들이 기초한 이 선언문들은 읽을수록깊은 뜻을 깨닫게 되는데 당장 어렵다고 쉬운 것만 추구한다면 훗날 청소년들은 못배운 것을 후회할 것이다.억지로라도익히도록 독려하여야 한다. 황현성 [경기 수원시 권선구]
  • [김삼웅 칼럼] 당쟁과 정쟁 그리고 민생

    일본인 시데하라 히로시가 대한제국 정부의 학정참여관으로 조선에와서 ‘조선정쟁지(朝鮮政爭志)’를 펴내고, 이책에서 당쟁을 조선정치의 특징이라고 규정한데 이어 호소이(細井肇)같은 자가 “조선인의혈액에는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당파싸움이 계속되었으며이는 결코 고칠 수 없는 것이다”란 극언을 한 것을 알고는 분노를삼키기 어려웠다. 일제 관학자들이 한국인을 업신여기면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자만든 궤변이고 억설로 치부했다. 이광수나 최남선이 이를 받아들여동족을 비하하는 글을 쓴 것을 읽고는 친일파들의 상투적 수법으로접어두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최근에 많이 바뀐다. 정녕 우리 민족은 당파심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시데하라가 지적한 “조선시대의 정당들은 주의(主義)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 공당(公黨)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서로 배제하는 사당(私黨)”이란 모습이 요즘 상황과 겹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기호와 영남지방으로 갈려 싸우던 당쟁이 지금은 영남과호남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그래도율곡과 우계(牛溪)사이에 벌어진 ‘율우논변(栗牛論辨)’이나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그리고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등이 있었다. 비록‘예송논쟁’이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服喪)문제를 둘러싸고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따위의 ‘하찮은’시비로 시작되었으나 논쟁의 대부분이 당시 최고의 담론이 화두가 되었다. 본질은 권력싸움이지만 명분은 학구적인 논쟁이었다. 적어도 요즘 우리 정쟁처럼 명분도 실익도 없는 ‘개판싸움’과는 달랐다. 경제회생의 ‘몸통’을 잡는 정치는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가 황폐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지각있는 지도층이라면 관민이 힘을 모아 국난극복과 민생을 위한 정치에 매진했어야 옳다. 그런데 아니었다. 선조가 죽자 영특한 세자 광해를 두고 두살배기영창을 후계로 삼으려고 정파간에 싸움이 붙고 결국 광해가 집권하여피바람이 불었다. 그 여파로 인조반정이 이루어지고 또 한차례 보복전이 나타났다. 민생은 뒷전이었다. 임진·병자양란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백성을 돌보고자 ‘대동법(大同法)’이 마련되었지만 정쟁으로 100년 뒤에야 전면 실시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지역별로 실시하는 시험과정으로 평가하지만사실은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충을 위한 세력과 양반지주의 입장과 기득권만을 보호하려는 세력과의 분쟁 때문이었다. 율곡이 당쟁을 없애려고 나섰지만 허사였다. 율곡은 사사건건 대립하는 동인과 서인을 양시론(兩是論)으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즉 “무왕(武王)과 백이숙제의 일은 둘다 옳고 춘추시대의 전쟁은 둘다 그르다”는 식이다.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할 때 백이숙제는주왕이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신하가 임금을 축출하는 것을 옳지않다고 거사를 말렸다. 그러나 무왕은 만류를 무릅쓰고 주왕 축출에성공했다. 이에 백이숙제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들어가 고사리만 먹다가 굶어 죽었다. 무왕과 백이숙제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것이 율곡의 양시론이다. 오히려 반대세력이 율곡을 모함하고 나섰다. 젊었을 때의 입산(入山)을 두고 계모와 싸우고 가출하여 머리깎고 중이된 것은 불효이자 이단이란 것이다. 모친을 잃은 슬픔에 출가한 것이 ‘사상논쟁’의 배경이다. 당시 ‘불교도’의 낙인은 요즘 ‘용공좌경’처럼 치명적이었다. 영조는 어떻게 해서라도 당쟁을 없애보고자 노론의 영수 민진원과소론의 영수 이광자를 불러 두사람의 손을 맞잡고 화해를 종용했다. 그리고 노론을 한사람 기용하면 소론도 한사람 기용하는 식으로 탕평책을 적극 실현했다. 이런 인사방식을 ‘쌍거호대(雙擧互對)’라고했다. 이같은 영조의 노력도 당쟁을 뿌리뽑지 못했다. 조선사회는 쓸 만한 인재를 그냥 두지 않는 못된 병폐가 있었다. 조금 우수하다 싶으면 모함하여 쫓아냈다. 우암 송시열을 기호지방에서는 극존칭인 ‘송자(宋子)’라 높이고 영남지방에서는 ‘시열이’란개이름으로 불렀다. 최근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지역별로 평가가 다른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한달만에 국회가 정상화됐다. ‘설민심’의 실천이 국회에서 나타날것이다. 정쟁을 접고 경제살리기와 대미외교,남북문제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 김삼웅 주필 kimsu@
  • 현대시조 작가 100인의 작품선

    서점에서조차 시조집 구하기가 어려운 이때 도서출판 태학사는 ‘열린시조’사와 함께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간행에 나섰다.최남선 이병기 이은상 정인보 시인을 비롯 월북작가 조운 조남령,그리고 이호우 이영도 박재삼 유제하 김상옥 이태극 윤금초 시인이 포함됐다.90년대 신예 시조시인도 들어있는 이 시리즈는 2년여의 선정작업을 거쳐 최근 8권이 출간되었으며 내년 상반기까지 100권 전체가완간될 예정이다.편집위원은 이지엽 최한선 장경렬 신범순 이경호 이문재 등.
  • 단풍에도 품격이… 때깔이 다르다

    일주일만에 달려나간 영동고속도로는 ‘때깔’부터 달랐다.그야말로화염 바다,온 산을 불태울 듯 단풍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충주호에서 단양쪽으로 내쳐 10여분을 달리니 금수산 아래 능강구곡이펼쳐진다.노란색과 붉은 색 단풍의 경염(競艶)이 요사스럽기까지 하다.그러나 호남고속도로는 아직 푸른빛으로 넘쳐났다.하지만 산속깊은 곳,장성 백양사의 애기단풍은 붉은 빛의 옷으로 갈아입느라 여념없었다.이곳 단풍은 이번 주말에 절정을 이룬다. ■제천 능강계곡. ‘높음이 하늘보다 높은 곳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담수보다맑은 것 없으나 깊으니 오히려 검도다/스님은 불국정토에 있으니 조금도 욕심이 없고/객이 신선사는 곳에 들어오니 늙음 또한 슬프지 않구나’충주호는 물론,건너편 월악산과 왼편에 산자락을 늘어뜨린 소백연봉을 한눈에 굽어보는 천년고찰 정방사 주련(柱聯)에 새겨진 싯귀.절집뜰에 서면 이 싯귀가 가슴에 다가온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세운 이 절집은 현재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 뜰이랄 것도 없다.크고 널찍한 바위가 뒤에 떡 버티고 서있어 인파의북적임을 막고 있다. 보살이 미소 짓는 저편에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우리네 인심이 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능강계곡에 흰 구름이 학처럼 내려앉는다.능강계곡은 제천시 수산면과 단양군 적성면 경계에 서 있는 금수산(1,016m)의 서북사면에 자리한 계곡으로 남북으로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햇볕드는 시간이 짧다.그래서 능강계곡 오른쪽,한양골이라고도 불리는 얼음골에는 한여름 복날에도 얼음이 언다.초복에 얼음이 가장많고 중복에는 바위틈에 있으며 말복에는 바위를 들어내고 캐내야 한다.이곳 얼음은 만병통치약으로 이름있다.왕복 4시간 소요. 맑고 청명한 가을 아침,계곡은 온갖 색의 향연을 풀어헤친다.단풍나무와 갈참나무,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볼만하다. E.S리조트를 지나 조금만 달리면 들머리가 나온다.단풍터널로 이루어진 3㎞를 1시간동안 오르면 정방사. 여기에서 절집 뒤로 20분 내쳐 오르면 족두리봉.가파른 경사면을 10분 정도 내려가면 암릉지대가 나타난다.여기에서 청풍호반을 바라본다.큼직한 호반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감은 가히 환상적이다. 다시 족두리봉으로 나와 한숨 돌린 뒤 리조트 위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날듯이 내려온다.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폭신하다.산길은 편안하고 넉넉하다.단지 길이 쉽다는 게 아니라 마음을 느긋하게 다림질하는 매력이다. 정방사 그루터기에서 산하를 내려다본다.“늙음도 슬프지 않구나”.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서제천 들머리에서 나와 사과로 유명한 금성단지를 지나 청풍면을 거쳐 청풍대교로 향한다.청풍대교에서 청풍문화재단지쪽을 버리고 10분 정도 내쳐 달리면 E.S리조트가 나온다. 동서울고속터미널에서 제천까지 간 뒤 제천시에서 청풍까지(하루 20회) 온 다음 청풍∼수산면 상천까지 하루 3회 운행된다. □E.S리조트 지난 96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회원 전용 콘도로 알프스식 별장콘도 개념을 도입했다. 110여개 콘도하우스 중 어느 하나 같은 설계가 없을 정도로 개성을살린 공간으로 이름높다. 결고운 잔디가 깔린 바비큐 파티장에서 주말마다 파티가 열리고 영화도 상영된다. 닭·오리·토끼·사슴 등이 뛰어놀아 어린이가 뛰어놀기에 그만이다. 콘도 구석구석에 그네식 벤치가 놓여있어 충주호와 월악산,금수산 등을 바라볼 수 있고 전망탑에서 맥주와 커피를 즐기는 맛도 일품이다. 서울사무소(02)508-0118. ■백암산 백양사. 정말 아기 손바닥만 했다. 얼마전 무차대법회(스님과 일반 신도 구별없이 불법(佛法)을 논의하는 법회)가 열린 조계종 고불총림의 본사인 장성 백양사.뜰에 핀 단풍나무 잎새 크기는 꼭 아이 손처럼 작았다.이름하여 애기단풍. 단풍잎 사이로 학바위가 얼굴을 드러낸다.때마침 지는 해에 반사돼붉은 빛을 띠는 학바위는 학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정상에 오르면 변산반도 곰소가 발아래 펼쳐진다. ‘백암산 황매화야 보는 이 없어/저 혼자 피고 진들 어떠하리만/학바위 기묘한 경 보지 않고서/조화의 솜씰랑은 아는 체 마라’노산 이은상은 이곳 백양사를 품고 있는 백암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연 리드미컬한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꽂힌다.“아따,내장산이 최고라 하지만 여그 백양사만 헐까요이.산세나 뭘로 보나 백양사가 최고지라.”육당 최남선도 그랬던가 보다.학바위 봉우리를 보고 “흰 맛,날카로운 맛,맑은 맛,신령스러운 맛이 있다”했으니. 조화미다.내장산이 온통 붉은 빛 일색으로 아줌마·아저씨부대들의얼굴을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들여 놓는다면,이곳 백양사 단풍은 비자림의 푸른 빛,은행나무의 노란 빛,감나무의 선홍빛과 어울려 애기단풍이 더욱 붉게 빛난다.번쩍거림이 아니라 질감있는 붉음. 절집 맞은편.마치 백암산 계곡이 양팔을 벌리고 앉은 듯한 곳에 옛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는 쌍계루가 있다.그 아래 물이 흐른다.주위를 빙 둘러 단풍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예전에 물이 넘쳐 흐를 땐 그만한 절경이 없었단다.물에 비친 단풍과 누각,학바위의 붉은빛, 가히 절경이었다.고려말 목은 이색이 ‘참으로 좋은 경치’라는찬사를 보냈단다.하지만 지금은 물이 없다.진입로에서 쌍계루까지 단풍터널도 혼을 빼놓기 십상. 다시 백양사 경내를 나와 절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비자나무 군락이 푸르게 펼쳐져있다.천연기념물 153호인 비자림은남방계 식물로제주도와 전남 경상도에만 있으므로 여기 백양사는 북방한계선에 해당하는 셈.애기단풍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조연을 이 가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들머리를 나와 9㎞ 달리면 약수리 3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면 백양사 진입로가 나온다.기차를 이용할 경우 백양사역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27일부터 단풍축제가 열린다.28일 오후11시40분 서울역을 출발하는내장산등산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하거나 오는 30∼11월5일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내장산단풍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할 수도 있다.오전8시55분 서울역 출발.축제추진위원회(061)390-7224□들러볼 곳 한나절 거리인 내장산에 이르는 길이 좋다.하루 정도를각오해야 한다. 자신없으면 한여름 물놀이로 유명한 남창계곡을 들어서면 좋다.백양사 2㎞ 못미친 곳에 진입표시가 있다.몽계폭포로 유명한 계곡과 암석이 무너져내린 너덜의 조화미가 빼어나다.백양사 매표소 바로 지나왼편에 있는 가인마을에서 민박할 수도 있다.이곳 꿀은 품질 좋기로유명하다.황룡면 금곡마을의 영화촌도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 촬영지로 이름짜하다. 장성 임병선기자.
  • [대한광장] 反美를 넘어 미국 바라보기

    최근 주한미군 문제에 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SOFA 개정,한강독극물 투하,매향리 폭격장,숱한 주한미군의 범죄 등으로 부터 미군철수,통일후 미군주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논의되고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반영하듯 국회에서도 SOFA의 전면적 개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발표되었다.대통령까지 맹목적인 반미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야당총재는 “급진세력의 선동적 반미운동이 전통적한미 우호선린과 안보동맹을 위협하고 있다”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활발한 시민사회의 논의는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한지 55년만에 처음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진전을 상징하는것으로 반가워 할 일이다.그런데도 이러한 민주적 논의를 반미=용공=친북=급진세력=불순세력=탄압대상(무조건)이라는 낡은 올가미로 덮어씌우려는 일부의 움직임은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고 있다. 과연 최근의 시민사회 움직임이 반미이고 또 낡은 반공매카시즘을불러와야 할 성격의 것인가? 최근의 논의는 불평등하고 비정상적인한미관계를 대등한 한미관계로 바꾸자는 평등권,서울시민의 식수인한강에 독극물을 투하한 것에 대한 환경권과 생존권,국제 폭격장이되어버려 주민들의 삶이 원천적으로 파괴된데 대한 생활권,주한미군범죄에 희생된 한국인의 인권,외국군을 철군시켜 자주권을 높이자는주권,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미군을 철군하자는 통일권,주한미군이전쟁억지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오히려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갈 위협이 있다고 철군을 주장하는 평화권과 생명유지권 등 제반 권리요구운동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과 운동이 맹목적인 반미로 흐르는 경향이 일부 있기는 하다.이에 대해 우려는 할 수 있겠지만 배격은 할 수 없다.더구나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급진불순으로 타도의 대상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도 해서는 안되는 극단의 논리이다. 우리의 제반 권리요구에 관한 문제라면 주한미군 뿐 아니라 어느 누가 관련되더라도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주한미군 문제를신성불가침으로 논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까지 짓밟는 행위이다. 물론 주한미군이 아직도 필요하고 한미관계가 이대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쟁을 통해서 할 일이지 시대 역행적인 반공매카시즘을 통해서 시민사회에 강제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사회는 마땅히 주한미군을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치할 것이 아니라 공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물론 주한미군에 국한시키지 말고 한미관계 자체에 대하여도 이러한끌어내리기는 필요하다. 과거 55년동안 우리들 대부분은 일부 근거없는 신화 속에 미국과 주한미군을 안치시키고 흠모와 동경의 대상으로만 보아왔다.동시에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고유의 귀중하고 자랑스런 것들까지도 단지 미국의 것과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민족 비하주의에 빠져 왔다. 심지어 일부는 어린 시절 왜 저 넓고 힘세고 강한 미국나라에서 흰둥이로 태어나지 않고 이 조그만 한국땅에 노란둥이로 태어났는지 한탄하며 태생에 대한열등의식까지 가지기도 하였다.미국은 때로는 진정한 우방과 친우였지만 때로는 내정간섭과 점령군이었다는 점을 부정 할 수는 없다. 과거 일제 식민통치기간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총독부와 내통하여 민족개량주의라는 이름아래 나라 빼앗김을 일본이라는 외세에탓으로 보기보다는 우리 민족 스스로에게 돌림으로써 더 심대한 친일행위와 반민족행위를 해왔다. 이제 통일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도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완용, 최남선, 이광수 등이 저지른 친일행위와 너무나 유사성을띤 행위와 사고를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또 이제까지의 숭미주의와 감정적인 반미주의를 넘어 미국과 주한미군의 실체를 꿰뚫어보는 지미주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강정구 동국대교수·사회학
  • 한국서예 대가 원곡 김기승씨 별세

    한국 서예의 대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씨가 14일 오전 3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91세. 1909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국 상하이공대를 졸업,1947년 이후 대화약품 대표를 지냈다.한국서예대전을 창립,서예발전과 후진양성의 토대를 마련했고 자신의 모든 작품을 사회에 기증하는 등예술의 대중화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고인은 원곡체라는 자신의 호를 딴 한글서체를 개발했으며,한문서예에도 일가를 이뤘다.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 등 각종 한자체에능통했던 고인은 육당 최남선의 독립선언서,안창호 선생 비문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성경구절을 담은 작품 수백점을남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차인실(車仁實)씨와의 사이에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장남 명호(明鎬)씨등 1남4녀가 있고 김성재(金聖在)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은 사위다.발인은 16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02)362-0899.
  • [대한시론] 백년전의 세 金씨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세 김씨라는 말만 들어도 독자들은 넌더리를 내겠지만,나는 지금의 얘기를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년 전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그때에도 3김이 있었는데 김옥균(金玉均,1851∼1894),김홍집(金弘集,1842∼1896),그리고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그들이다.하기야 그리 흔치도 않은 허(許)씨 셋이서 나라를 떡 주무르듯 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 인구의 22%를차지하고 있는 김씨가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이상할 것도 없지만 어쩌면 역사는 이토록 반복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역사는반복한다”고 말한 토인비의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세 김씨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너무 다른 길을 갔다.김옥균은늘 남보다 앞서 생각하고 과격하여 사상을 의심받았고 결국에는 잔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저자의 주검이 되었다.김홍집은 사람은 진국이었으나 무능하여 한 시대를 위기로 몰아넣고 결국 자신도 덕수궁 돌담길의 시체가 되었다.그리고 재승박덕(才勝薄德)했던 김윤식이다.그런데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은 바로 세번째 김씨인 김윤식이다.명문청풍 김씨의 후손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장차 대제학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으며 젊은 날을 보낸 그의 전도는 그야말로 막힐것이 없었다.그는 영선사가 되어 청국으로 들어가 한·미 개국 교섭의 막후실력자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외무대신과 중추원 의장을 거쳐 그의스승의 기대대로 대제학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김윤식의 일생은 그 훗날이 문제였다.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긴자(銀座)에서 호강도 했고 한일합방이 되자 자작(子爵)의 칭호와 함께 합방축하금 5만원을 받았으며,시서화에 능해 그의 문집인 ‘운양집(雲養集)’은 1915년에 일본학사원 상을 받았으니,만약 그에게 후손이 없고 이 나라가 영원히 일본의 속방이 되었던들 그의 일생은 누릴 것 모두 누린 셈이요 욕되거나 후회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192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신문들은 한국의 셰익스피어가 서거했다고 법석을 떨었고,최남선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조사를 썼고,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를 유월장(踰月葬)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그러나 그때가 일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은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결국은 사회장이 취소되고 가족장으로 양주 땅에 묻혔다. 필주(筆誅)의 뜻을 아는지? 내가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재주이다.그는 너무 오래 살았고,늙어서도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세속을 탐냄으로써(老貪) 그의 살아 생전의 공을 모두 묻어버렸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김옥균인들 허물이 없었을까만 그는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허물을 덮었고,김홍집은 한창 일할 쉰 넷에 죽었으니 한이야 없을까만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윤식은 김옥균보다 두 배를 더 살고 욕을 열 배로 더 먹었으니 옛 성현의 말씀대로 ‘오래 산 것이 욕(壽則多辱)’이었다.왜 가장 늦게 태어나 가장 이른 나이에 가장 먼저 죽은 김옥균은 역사의 사면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오래 살다가가장 늦게 죽은 김윤식은 그토록 욕을 먹는것일까? 첫번째 김씨는 너무 과격했으나 역사에 공적을 남겼고,두번째 김씨는 다소무능했으나 자신을 탐하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역사에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지만,세번째 김씨는 그 경륜이 일세를 풍미했으나 너무 때묻었기 때문에역사의 오명을 벗을 길이 없다.그런데 나는 지금 김윤식을 필주하는데 왜 자꾸 김종필의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지 참으로 이상하다.원내 교섭단체가 뭐기에….
  • 국정교과서 실린 3·1독립선언서 “당일 낭독한 공식본 아니다”

    현행 국정교과서에 실린 3·1독립선언서는 의거 당시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낭독한 공식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또 독립운동단체에서 낭독용으로 사용하는 선언서 역시 공식본의 내용과 차이가 있어 이 역시 바로잡아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재야 서지 연구가 오수열씨(63)는 29일 “현행 교과서에 실린 3·1독립선언서는 문제가 있어 거사 당일 공식 선언용으로 사용되지 못한 것”이라며 “당시 선언서 운반책이었던 이병헌(李炳憲)선생 등이 확인해준 공식본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의거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제작된 선언서는 두 종류다.육당 최남선이 선언서 초고를 기초한 후 자신이 경영하던 신문관에서 조판,천도교 산하 보성사에서 인쇄한 것과 위창 오세창(吳世昌)의 지시로 처음 제작된 선언서의 활자를 키워 보성사에서 새로 조판,인쇄한 것.그런데 2차로 제작한 것은 배포 직전 내용 가운데 국호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잘못 인쇄된 것이 발견돼 의거 당일 민족 대표들의 공식본으로 사용되지 못했다.이공식본은 75년 이전 교과서에 실렸으나 이후 개정된 교과서에서는 2차본으로 교체됐다. 또 두 ‘선언서’는 분문의 내용 가운데 용어 자체가 다른 것은 물론 같은용어라도 한자 표기가 달라 해석상 차이는 물론 맞춤법도 일부 차이가 있다. 공식본 내용 중 ‘剝奪(박탈)’ ‘宣揚(선양)’ 등이 2차본에서는 ‘剝喪(박상)’ ‘宣暢(선창)’으로 바뀌었다.이밖에도 ‘合倂(합병)’이 ‘倂合(병합)’으로,‘陰祐(음우)’가 ‘음우(陰佑)’로 바뀌었는데 바뀐 용어들 또한해석상 다소 차이가 있다. 오수열씨는 “현행 교과서에 실린 선언서는 월탄 박종화(朴鍾和·75년 당시 교과서편찬 부위원장)씨가 1946년 2차본을 재인쇄한 것을 습득,소장해오던것을 실은 것”이라며 “그 이전에 출판된 교과서나 ‘독립운동사’ ‘3·1운동 비사(秘史)’ 등 3·1의거 관련 문헌에는 모두 공식본이 실려 있다”고 밝혔다.서울대 국어교육과 윤혜원 교수는 “4,5차 교과서 개편때도 ‘박종화본’ 게재 여부를 두고 문제가 제기됐었다”며 “이번 6차 개편때 선언서판본 사진이 빠진것은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 기관,독립운동단체에서 3·1절 기념식 행사용으로 사용하는 선언서 역시 공식본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광복회의 경우 공식본과 2차본의 내용이 혼용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한 독립운동가는“교과서에 실린 3·1독립선언서가 공식본이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각 기관·단체의 행사용 선언서 역시 공식본으로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2·8독립선언과 노애국지사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서리고 서린 산맥 가운데 위연히 솟은 한 고봉(高峰),이 봉우리 위에 서서 보면,외세의 침노 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생성 발전해온 우리 민족의 발자취가 멀리 가까이 제자리를 드러내면서 부각된다.3·1운동은 우리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호수,이 이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이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천관우,‘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편집후기) 3·1운동은 근대 민족운동사의 거대한 호수다.그렇다면 3·1운동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한다.재일 유학생들은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오전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도쿄 주재 각국대사관,일본정부,중의원,조선총독부에 보내고 오후 2시 500여 회원의 환호속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유학생 거의 전원이 모인 이날 독립선언회의에서 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토의하려다가 일경에 강제해산당하고 실행위원들은 체포되었다.이에 앞서 송계백과 최근우가 선언서 일부를 국내로 반입하여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게 전달,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재일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YMCA 건물은 그동안 부채로 존폐의 위기에 있던 것을 지난 연말 정부가 21억6,000만원을 지원하여 은행빚과 건물지하공사비를 갚게 되었다. 스가모감옥터의 노애국지사들 2월 8일 도쿄 YMCA 회의실에서는 2·8독립선언 81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재일본 한국 YMCA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에서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과 이강훈(李康勳) 전 회장 등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후손 40여명이 참석하여 기념식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동경한국학교 초등부 어머니합창단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불러 참석자들을 숙연케 만들었다.행사후 가진 간담회에서 유학생 대표들은 활자로만 읽었던 노애국지사들과의 대면을 감격스러워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학생운동의 진로 등을 물었다. 다른 외국에 비해 ‘재일유학생’의 존재는 유별하다.그것은 한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유학생중에 매국노로 변신하거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학생중에 악질 친일파가 된 경우, 일제시대 많은 유학생들이 총독부 관리나 법관이 되어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해방후에는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때문이다.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유학생들은 이 부분에서 갈등을 느낀다고 했다.그래서 말했다.같은 물을 소가 먹으면 젖을 만들지만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든다,어찌 일본유학생들뿐이겠는가.국내외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친일파가 되고 독재의 주구노릇을한 다른 쪽에서는 의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다,역사가 어느 쪽을승자로 기록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라고. 방일 첫날 노애국지사들은 일제식민지 시대 많은 한인애국자를 수감하고 처형한 스가모(巢鴨)형무소를 방문했다.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이봉창·김지섭 의사 등이 옥고를 치르다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이강훈 옹도 13년 옥살이를 했다.노애국지사들은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살피고, 우리 애국선열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에는 생존 지사들의 흐느낌이 배어 2월의 차디찬 스가모 공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이곳에서 숨진 선열들을 기리는돌비석 하나라도 세웠으면. 도쿄헌책방의 노애국지사들 유학생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한 학생이 물었다.생존애국지사들이 대부분7,80 고령인데 사후 광복회의 존립문제와,일제와 맞서 싸운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독립운동사가 먼 망각의 역사로 퇴락하고 있는 터에 이를 잇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찌 일본유학생들만의 의문일까만 나는 예상외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다.행사를 마치고 도쿄 번화가에 즐비한 헌책방에서 삼삼오오로 만난 우리 노애국지사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찾는 일제시대의 자료와 일본을 알아야 한다면서 푼푼이 모은 용돈으로 일본현대사의 신간을 사는 모습에서,“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것을.-일본 도쿄에서[김삼웅 주필]
  • 돈화문길 ‘걷고싶은 거리’ 새단장

    창덕궁 돈화문에서 남산 한옥마을에 이르는 돈화문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푸른 녹도(綠道)로 조성돼 ‘걷고싶은 거리’로 탈바꿈한다. 서울시는 2일 올해 돈화문에서 종로3가∼청계3가∼을지3가∼퇴계3가를 거쳐남산 한옥마을에 이르는 1.99㎞의 돈화문길을 현행 4차로에서 2차로로 축소하고 대신 녹지로 꾸며 보행로를 조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충무로역에서 돈화문에 이르는 전구간이 일방통행로로 바뀐다.또종로3, 을지로3, 퇴계로3가 등의 횡단보도가 복원돼 시민들이 돈화문길 전구간에서 지하보도를 오르내릴 필요가 없게 된다. 보행로 구간은 마사토,점토블록 등 미관이 아름다운 재료로 포장되고 녹지에는 교목 560그루와 관목 3만그루 등 가로수를 심을 계획이다. 또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 주변,명보프라자와 스카라극장 교차로에 ‘영화인의 탑’,영화마당 등이 설치돼 영화의 거리로 꾸며지고 금호음악당앞은 국악마당,공구상이 결집한 종로3가 남측 지역은 공구마당으로 꾸며진다. 충무로역 주변은 화장실이 있는 쉼터로,최남선 생가터는도시소공원으로,남산 한옥마을 입구는 전통가로공원으로 조성된다. 이들 거리에서는 귀금속축제,인쇄·출판·미디어축제,한복축제,국악거리축제,공구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정례적으로 열리며 행사구간은 주말에 차없는거리로 운영된다. 한편 서울시는 돈화문길 녹도와 연계해 올해 8개소,내년에 12개소 등 모두20개소의 자치구별 시범가로를 조성하기로 했다. 올해는 ▲용산 효창공원길▲성북 개운사길▲서대문 신촌길▲양천 로데오거리▲금천 한우물길▲영등포 여의도공원길▲송파 석촌호수길▲강동 방아다리길 등 8곳이 조성대상이며 내년에는 ▲광진 광나룻길▲동대문 회기로·홍릉길▲중랑 중랑천길▲강북 4·19길▲도봉 도봉산길▲노원 화랑로▲은평 진흥로▲강서 우장공원길▲구로 구로큰길▲동작 노량진공원길▲서초 강남대로▲강남 압구정로 등 12곳이다. 심재억기자 jeshim@
  • 서울도 한자표기 있다

    서울로 보내는 편지 겉봉에 주소를 쓸 때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바로 ‘서울’이다.중국인들은 서울을 ‘한성(漢城)’으로,일본인들은 일제때 자기들이 사용하던 ‘경성(京城)’이나 혹은 일어로 ‘ソウル’라고 표기한다.그렇다면 과연 ‘서울’은 순한글 지명인가? 그동안 서울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순한글 지명으로 알려져 왔다.그런데 최근 한 재야 서지연구가가 ‘서울’도 한자표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고서연구회 이사 김시한씨(金時漢·69·경안서점 대표)는 30일 서울중랑구 중랑문화원에서 열린 서울문화사학회(회장 김영상)주최 학술발표회에서 “‘서울’ 관련 고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서울’의 한자표기는‘徐 ’”이라고 주장하고 그동안 자신이 수집한 ‘徐 ’ 한자표기 관련 고문헌 12종을 공개했다. 김씨가 공개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조 정조때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단군조선∼고려때까지의 고도(古都) 21곳을 시로 회고한 ‘21도(都) 회고시(懷古詩)’.이 시집의 신라편에서유득공은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 ‘서야벌’을 훗날 사람들이 도읍지를 지칭하는 ‘서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徐 文獻備考 新羅國號徐耶伐 後人稱凡京都曰 徐伐 轉爲 徐 )”면서 ‘徐 ’에 대한 기록의근거를 밝혔다. 또 1830년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서울의 대표적인 지지(地誌)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서울 ‘연혁’부분에도 서울을 ‘徐 ’로 표기하고 “사람들이 수도를 부르기를 ‘서울’이라고 했다(人稱京師曰 徐 者)”고 적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한글학자가 쓴 책에서도 확인된다.한글사전 편찬위원과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이중화(李重華)가 1918년 육당 최남선이 경영한 신문관에서 출간한 ‘경성기략(京城記略)’ 제1권에는 “경성(京城)은 조선어에 ‘셔울’(徐 )이라 하니 이는 경도(京都)의 의의(意義)라.徐 은 신라의 방언이니…”라며 신라의 국호가 나중에 수도의 이름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4년(1922년)에 출간한 ‘배달민족사(倍達民族史)’ 제4과(課) ‘서울의 부여(扶餘)’편에는 “혁거세를 추대하여 거서간을 삼고 도읍 (慶州)을 서울사노(徐 斯盧)라 칭하니 서울은 도읍의 이름이요, 사노는 부여의 음전(音轉)이라…”고 나와있다. 월간잡지 ‘신지식(新知識)’(1928년 출간)의 서울특집엔 “서울을 한문으로 쓰면 徐 로…옛 신라시대의 방언이라.지금 우리가 말하는 서울은 그때의 徐 을 칭함이 아니라 이조(李朝)창업 한성부(漢城府)때 부터의 서울을 칭하는 것이다”고 하였다.이밖에도 ‘서울대관(大觀)’(1955년 출간),‘수도사적(首都史蹟)’(1956년 출간) 등에서도 서울을 ‘徐 ’로 표기하고있다. 김씨는 그동안 ‘서울’의 한자표기가 알려지지 않은 배경을 두고 “‘徐 ’의 ‘ ’자를 ‘원’자 등 다른 글자로 잘못 읽은 탓”이라며 “서울시가 편찬한 ‘서울육백년사’ 제1권 색인부분에서 ‘徐 ’을 ‘서원’항목에 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이중화의 ‘경성기략’에서는 ‘徐’을 ‘셔울’로 표기하였으며 또 ‘전운옥편(全韻玉篇)’‘자전석요(字典釋要)’등에 ‘울’자가 ‘무성할 울(茂也)’로나와있어 김씨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은 “서울의 한자표기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얘기”라면서 “서울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차음(借音)한 것 같다”고 밝혔다.또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편찬위원은 “서울의 한자표기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어학 등 관련학계에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과소평가 된 민족주의자 홍명희

    대하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해방후 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문학적 업적마저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됐던 홍명희가 우리 앞에 되살아나고 있다.상명대 국어교육과 강영주(姜玲珠·47)교수가 지난 10여년동안에 걸친 자료수집과 연구끝에 최근 ‘벽초홍명희 연구’를 펴낸 것. 춘원 이광수,육당 최남선과 함께 ‘조선3재(三才)’로 불린 벽초의 인생역정은 물론 그의 다양한 면모까지 관련자료와 증언을 통해 복원했다는 점에서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대이후 우리의 역사인물 가운데 벽초만큼 민족적이고 흥미로운 인물도 많지 않다.그동안 그의 면모는 분단 장벽 때문에 많은 부분이 왜곡,내지 축소돼 알려져 왔다.그러나 근대이후 식민지 시대와 해방공간에서 문학인·독립운동가·언론인·학자·정치인으로서 일관된 민족주의 노선과 자세를 견지한그의 삶은 절대로 과소평가될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벽초의 삶을 아우를수 있는 단어는 ‘민족주의자’다.이는 그가 경술국치때 자결로 순국한 홍범식(洪範植)의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 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말년에 그는 자녀들에게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홍범식의 아들,애국자이다.일생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쓰며 살아왔다”고 토로한 바 있는데 이는 그가 명예와 지조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사상과 생활신조는 식민지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일본 유학후 상하이를 무대로 민족진영에 발을 들여놓은벽초는 1919년 충북 괴산에서 3·1의거를 주도,1년여 실형을 살았다.출옥후20년대 초반 동아·시대일보 등에서 편집국장,사장 등을 지낸 그는 27년 민족진영의 첫 좌우합작체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일생동안 그는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했는데 해방후 그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중간파 세력을 규합,민족독립당의 대표로서 남북연석회를 추진한 것도이 연장선 상에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양반집안 출신으로 양반계급을 비판하면서도 선비정신은 고스란히 간직한인물이 바로 벽초였다는 것.저자 강 교수는 “벽초는 지나친 결벽 때문에 글을 잘 쓰지 않았으며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이외에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조선조말에 태어나 식민지시기를 거쳐 해방과 분단시기를 살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열정을 쏟아낸 벽초. 강 교수는 “벽초의 삶의 복원을 통해 격동기 우리역사의 한 중대한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고 말했다.96년부터 매년 ‘홍명희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또 작년 가을에는 벽초의 향리 괴산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졌다.뒤늦은 일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본사 정운현차장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출간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그러나우리의 현대사는 권력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 얼룩져 있다.현대사의 왜곡은해방 후 당연히 단죄됐어야 했던 친일세력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불행한 일로부터 시작됐다.많은 것을 희생하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애국투사들은 독립된 조국의 무대에서 밀려나고,친일세력이 옷을 갈아입고그 무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민족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부끄러운자화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나왔다.(개마고원 8,500원) 이 책은 정운현 대한매일 문화부 차장이 1998년 8월14일부터 올 4월26일까지 대한매일(98년 11월11일 이전에는 서울신문)에 ‘친일의 군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에다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만들어졌다.친일파 문제가 일간지에 연재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친일파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온 지은이는 일본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등을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뛰어넘는 알찬 내용을 담아 이 책을 꾸몄다.강화도조약 체결 때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1호’ 김인승,조선인 출신신직(神職) 이산연,만주 특무공작의 거두 김창영 등은 ‘친일의 군상’ 연재를 통해 처음 공개된 친일파들이다.지은이는 또 최남선의 친일 행적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 먼저 시작됐음을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 책은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근택,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공주갑부 김갑순,박흥식,이선근,이항녕,김활란,윤치호,윤보선 일가,최남선,김성수,방응모,주요한,김동환,이광수,여자 밀정 배정자,무용가 최승희,승려 이종욱,최린,이갑성,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고등계형사 선우순·갑 형제 등많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인물별로 소개한다. 저자는 집필동기를 이렇게 말한다.“친일파 문제는 법적·역사적 청산이 안됐다.많은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권력 엘리트로 군림해 옴에따라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민족사를 더럽힌 사람은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된다는 엄숙한 경고를 보여줘야한다”. 친일파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현장은 우리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 민족의 성지인 국립묘지에도 백낙준·진의종·백두진·엄민영·황종률·이은상·이선근·조진만·이응준을 비롯,10명이상의 친일경력자들이 국립묘지에묻혀 있는 것이다. ‘위대한 3·1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된 3·1문화상 예술분야 수상자중에도 조연현·안수길·백철·모윤숙·최정희·이상범·김인승·김기창·김성태 등 모두 13명의 친일파가 포함돼 있다.정부차원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친일파가 포함됐는가 하면 ‘동인 문학상’‘난파 음악상’등 친일파 인사들의 이름은 딴 여러가지 상이 만들어졌다.최근에는 이화여대에서 친일파인 김활란의 이름을 딴 ‘우월 김활란상’을 제정하겠다고 밝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겼다. 저자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친일문제의 청산은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중요한 작업이다.그 작업은 역사의 시계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창순기자 c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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