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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따라 맛따라-이강주

    “신은 물을 만들고,인간은 술을 만들어 생명의 물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지구촌 어디에나 그곳의 환경에 알맞은 술 문화가 있지요.우리의 민속주가 우리 스스로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전주 이강주 대표 조정형(62)씨는 우리의 전통주가 처한 현실을 매우 가슴아파했다.우리 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부족,정부의 무관심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다가 거듭된 요청에 마지못해 이강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강주는 조선시대 양반층이 즐기던 술이었습니다.구한말 한·미통상수호조약에서부터 남북적십자회담까지 국가간의 중요 행사때 단골로 쓰였지요.” 이강주(梨薑酒)는 이름 그대로 배와 생강으로 담근 술.쌀과 누룩으로 담근 전통 증류소주에 배와 생강,울금,계피,꿀을 첨가해 숙성 여과시킨 약소주다.특이한 것은 울금이란 중국 남방지방의 약초가 들어간다는 것. 울금은 숙취제거 효과와 함께 혈압 조절,신경 안정 등에 좋아 조선 왕실에서도 특수한 시설을 갖추어놓고 울금을 재배해 음식이나 약재,술 재료 등에 썼다고 한다.이강주는 울금이 주로 재배된 전주와 황해도 지방에서 빚어졌다고 전해진다. 이강주에 대한 문헌상 기록은 조선 중엽 때 이후 볼 수 있다.봉산탈춤의 6과장(양반춤)에 보면 ‘이강주 가득 부어놓고’란 대목이 나오는데,이로 미루어 이 때 이미 이강주가 상당히 대중화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씨 집안에선 200여년 전부터 이강주를 가양주로 빚어마셨다고 한다. “완산골(지금의 전주) 부사를 지내셨던 6대조 할아버지께서 이강주를 아주 좋아하셨다고 해요.그 때부터 집안 대대로 이강주를 빚은 것으로 짐작됩니다.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술 빚기를 금하면서 사실상 그 맥이 끊겼던 것을 제가 재현해 대를 잇고 있는 셈이지요.” 조씨는 전주 이강주 제조 기능 보유자다.지방문화재(전북 제6호) 겸 전통식품 명인 제9호로 지정돼 있다.그는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한 후 삼학,보배소주 등에서 1급 주조사로 25년간 근무하면서 현대의 술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섭렵했다.그러나 40대 이후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술을 만들어보겠다며 전국을 돌며 민속주를 연구했다. “민속주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어요.200여종의 술을 맛보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지요.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을 그렇게 날려버렸고,집안에선 한때 미친놈 취급도 받았습니다.” 우리술을 향한 20여년의 방랑끝에 조씨는 결국 집안의 가양주였던 이강주를 재현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이강주의 맥이 영원히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 91년부터 큰형님의 허름한 창고에 솥을 걸고 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소량 주문 생산하는 이강주는 연노랑 술빛이 신비롭고 맛과 향이 독특해 애주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여름밤 초승달 같은 술’이란 소문이 돌았다.또 우리술과 수십년간 동고동락한 조씨의 이야기가 한 공중파 방송의 특집방송으로 나가면서 서울의 유명백화점들은 거액의 선금을 주고 이강주를 주문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씨는 생산과정을 기계화할 수 있었고,지금은 연간 5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이는 전통 민속주 업계에선 최고 수준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3대 명주로 이강주와 문경 호산춘,죽력고를 꼽았어요.증류주이면서도 주도 25도로 너무 독하지 않고,숙취가 없다는 점,계피와 생강을 넣어 톡 쏘는 듯하면서도 배에서 우러난 감칠맛이 이강주의 자랑입니다.” 이강주 제조와는 별도로 조씨는 민속주 보존에 누구보다 열심이다.삼한시대 이후 내려온 우리의 술 역사와 제조법 등을 묶은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이란 책을 펴내는 등 지금도 전통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또 전남 완주 소양면에 술박물관을 지어 그가 지금까지 빚어온 수백여종의 술과 술빚는 도구 800여점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063)212-5765. 글 전주 임창용기자 sdragon@ ●따라 빚어보세요 재료:누룩,백미,배,생강,울금,계피,꿀 1.백미 5되(4㎏)로 고두밥을 지어 식힌다. 2.고두밥을 누룩 1되와 섞어 항아리에 넣고 물 8ℓ를 부어 잘 섞는다.누룩은 햇밀을 거칠게 빻아 반죽해 띄운 것을 쓴다. 3.1주일 정도 술이 숙성하면 소주고리나 증류기에 넣고 소주를 내린다.처음엔 도수가 높은 술이 나오다가 차차 알코올 도수가 떨어진다.30도 정도로 도수를 조절한다. 4.배와 생강,울금,계피를 베보자기에 싸서 술 항아리에 3개월 이상 침출시킨다. 5.마지막으로 꿀을 가미한다. ˝
  • 강북구, 3·1운동 재현

    의암 손병희 선생 등 독립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는 삼각산 자락의 봉황각 일대에서 3·1운동이 재현된다.강북구(구청장 김현풍)는 제85주년 3·1절을 맞아 주민 5000여명이 참석하는 ‘3·1 독립운동’을 재현한다고 25일 밝혔다. 재현 장소는 손병희 선생이 독립운동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던 봉황각이라 의미를 더한다.특히 이번 행사는 주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행사는 오전 10시30분 우이동 성원아파트∼도선사입구∼봉황각으로 이어지는 ‘길놀이’로 시작된다.주민들은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다.봉황각 경내에서는 2시간여동안 손병희 선생의 행적과 한용운·최남선 등 민족대표 33인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재현극도 펼쳐진다.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은 스카프,광목 등에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하고,독립선언서에 서약하는 손도장 찍기를 체험하며,그날의 함성을 다시 새기게 된다.3·1운동의 전개과정을 소상히 보여주는 사진 전시회와 독립군가 메들리,깃발무 등의 공연에 이어 오후 3시쯤 참가자 전원의 만세삼창으로 독립운동 재현행사는 마무리 된다.김 구청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봉황각과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삼각산 자락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구(구청장 김충용)도 3·1절에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길과 인사동길에서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되새기는 거리축제를 펼친다. 행사는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독립투사 33인으로 분장한 김충용 구청장을 비롯,구의원,지역 인사 등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삼창을 한다.3·1운동 당시 복장을 한 500여명의 학생들이 태극기 물결행진을 벌인다.남인사마당 특설무대에서는 기념음악회도 열린다. 최용규 이동구기자 yidonggu@˝
  • 전국 해넘이·해돋이 명소/지는 해 보고 한해 마무리 뜨는 해 보고 새해 설계를

    한 해를 마무리할 때다.해가 뜨고 지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자연의 섭리지만,연말 연시에 감상하는 일출·일몰은 보통 때와 달리 각별함을 준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어지러웠던 한 해를 마무리짓고,뜨는 해를 보며 새해를 설계하는 여행을 떠나보자.동해안의 일출 명소와 서해안의 일몰 명소,일출·일몰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 서해안 일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있다.붉은 햇덩이가 물 위에 닿으며 황금빛 잔영을 드리우는 오메가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 곳.해수욕장 앞바다에 정겹게 박힌 할아비바위와 할미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해넘이 풍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 풍광으로 꼽힌다. 방포항과 꽃박람회장 주차장 사이를 연결한 이른바 ‘꽃다리’ 위가 감상 포인트다.일몰 감상과 함께 수백년 수령의 해송 수만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선 안면도 휴양림 일대의 소나무 숲이 둘러볼 만하다.특히 눈 온 뒤의 소나무 숲은 따뜻한 겨울의 운치를 느끼기에 그만이다.태안군청 문화관광과 (041)670-2225. ●변산반도 격포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은 수려한 경치와 함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수많은 책들을 겹겹이 쌓아놓은 듯한 채석강쪽에서 위도 방향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격포해수욕장 끝에서 시작되는 해안도로도 멋진 드라이브코스. 이곳 말고도 곰소항쪽으로 가다가 모항이나 솔섬 등에서 보는 해넘이도 장관이다.인근의 내변산 산행,천년고찰 내소사 답사,변산온천 등과 연계해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부안군청 문화관광과 (063)580-4449. ●강화 분오리 수도권에서 당일로 다녀오기 좋은 곳.강화도 분오리∼장화도 해안에서 바라보는 해넘이가 아름답다.서쪽으로 동막리∼장화리 바닷가에 늘어선 카페에 들아가 차를 마시며 해넘이를 즐겨도 좋다.30∼40년 전 학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교육박물관,강화역사박물관 등이 인근에 있어 들러볼 만하다.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221. ■ 동해 일출 ●포항 호미곶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은 한반도를 호랑이 모습이라고 할 때 꼬리 끝부분에 해당하는 곳.일찍이 최남선이‘조선 최고의 일출’이라고 했을 정도로 이름난 해돋이 명소다. 호미곶 해맞이광장에선 31일 밤부터 새해 첫날 아침까지 전야제 공연 및 대형 솥에 떡국을 끓여 나누어 먹는 행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인근 등대박물관이 들러볼 만하다.포항시청 (054)245-6114. ●동해 추암해변 강원 동해시 북평동 추암리는 우뚝 선 촛대바위 끝으로 솟는 해돋이가 유명하다.삼척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애국가 영상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곳이다.추암해변에서도 31일 밤부터 동해시가 주관하는 해돋이 축제가 다채롭게 열린다.주변 볼거리로 설경이 아름다운 무릉계곡,천곡천연동굴 등이 있다.(033)530-2227. ■ 일몰·일출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 ●당진 왜목마을 충남 당진군 석문면 교로2리.해변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일출·일몰은 물론 월출까지 볼 수 있다.당진 화력발전소 앞 선착장에서 멀리 석문면 장고항 노적봉과 국화도 사이로 해가 떠오른다. 해넘이는 여기서 5분 거리인 대호방조제 중간에서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여수금오산 금오산 중턱의 향일암은 예부터 일출로 유명한 곳.하지만 여기서 30분 정도 더 올라가 금오산 정상에 오르면 장엄한 일몰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광활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가막만 뒤로 펼쳐진 수많은 섬 너머로 지는 해넘이는 황홀함을 안겨준다. 해 떨어진 뒤 반대편 바다에서 쟁반 같은 달이 둥실 떠오르는 월출도 볼 만하다.향일암 종루 처마에 달린 풍경 너머 떠 있는 달 구경도 좋다. 금오산 아래 임포마을에서 정상에 올라 일몰을 감상하고 향일암을 거쳐 마을까지 내려오는 데 3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하다.여수시 관광홍보과 (061)690-2225. 글·사진 임창용기자 sdragon@
  • 책 / 샤먼 이야기

    양민종 지음 정신세계사 펴냄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알려진 한반도 북방 시베리아의 숲과 초원.그리고 그곳에 깃들어 살던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솟대,돌무더기,하늘제사터,신목(神木),신조(神鳥),오색천….이런 상징물의 중심에는 으레 현란한 옷차림의 인물이 있다.샤먼이다. 신라 금관 같은 쇠모자를 쓴 채 북을 들고 춤을 추거나 불을 지피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혹은 주문을 외며 생로병사에 관해 기원하는 인물.그의 허리띠에는 숫돌과 곡옥(曲玉),쇠방울,약병,물고기,칼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그 존재이유가 범상치 않음을 대번 짐작케 한다.우리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 북방에서 비롯됐고 그것이 바로 이같은 샤먼문화라면,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는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육당 최남선이나 남창 손진태,간정 이능화 등 국학의 거두들은 한결같이 한반도 북방의 샤머니즘에서 우리 고대 문화의 뿌리를 찾았다. ‘샤먼 이야기’(양민종 지음,정신세계사 펴냄)는 이런 국학담론의 맥을 잇는 노작이다.저자(부산대 노문과 교수)는 샤먼의 본향인 북방 시베리아 지역을 직접 찾아 우리의 잃어버린 신화,샤먼의 세계를 복원했다. 루마니아 출신 미국 종교학자 엘리아데를 비롯,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샤머니즘을 범세계적인 종교문화현상으로 본다.그러나 저자는 샤머니즘은 알타이 산맥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고유한 문화양태임을 강조한다.샤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서구를 통해 들어왔지만,샤머니즘은 한반도에서 수천년의 토착화 과정을 거쳐 민중의 신앙으로 자리잡았다.단군 한배검을 비롯한 여러 신화들은 샤먼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샤머니즘은 ‘야만의 종교’가 아니다.고대인의 철학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저자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우월감과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그리스 신화만을 과대포장하고 동아시아인들의 신화와 샤머니즘의 의미는 깎아내리고 사장시켜온 측면이 없지 않다.동아시아 샤머니즘의 심장부인 바이칼호 인근에 사는 부리야트 샤먼의 경우 우주는 하늘과 지상,지하의 삼계(三界)로 이뤄져 있다.각각의 세계에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신들이 고유한 기능을 지닌 채 존재한다. 저자는 샤먼의 세계에서 인간이 사는 지상을 주재하는 주요 신이 여성이라는 점은 동양의 샤먼 신들이 고대 그리스 신과 같은 서구적 개념의 신들보다 남녀평등이 더 잘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밝힌다. 대화체 형식으로 씌어져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1만3000원. 김종면기자
  • 책꽂이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서성란 지음,실천문학사 펴냄)96년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작가의 장편.각 장마다 자폐아를 둔 어머니를 등장시키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모성애의 힘을 강조한다.방황,다른 자폐아 부모를 격려하는 모습,사회적 대응 등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9000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지음,한겨레신문사 펴냄) 문학동네 신인상과 한겨레문학상을 동시에 거머쥔 무서운 신인의 작품. 초등학교 4학년때 가입한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 회원의 추억을 바탕으로 80년대의 사회상을 재미있게 그린다.8500원. ●검은 꽃(김영하 지음,문학동네 펴냄)신세대의 감각을 자랑하던 작가가 100년 전인 1905년 멕시코 농장에 끌려간 11명의 조선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장편.작가는 “그들의 고생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에 무게를 두었다.”고 말한다.8800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한강 지음,열림원 펴냄)94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등단,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는 작가의 첫 산문집.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그렸다.8000원. ●항해지도(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조구호 옮김,시공사 펴냄)스페인 대표적 작가의 해양 스릴러.18세기 계몽주의에 반발한다는 이유로 추방위기에 놓인 예수회 지도부가 왕실을 매수하려고 에메랄드를 싣고 오다가 침몰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다루었다.1만 2000원. ●한국 현대시 해설-이해와 감상(홍윤기 지음,한누리미디어 펴냄)한국현대시문학연구소 소장인 저자가 7년 동안 자료를 모아 정리.육당 최남선의 1908년 작품부터 올해 시집을 낸 손호택의 작품 등 시인 250명의 작품을 망라했다.2만 5000원. ●창랑지수(옌전 지음,박혜원·공빛내리 옮김,비봉출판사 펴냄)중국 대표적 현대작가의 두번째 장편.중국인들의 사고방식,행동 양식,처세술,관계 중시 등을 주제로 한 사회소설.모두 3권,각 9500원. ●시간의 옷(아멜리 노통 지음,함유선 옮김,열린책들 펴냄)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는 벨기에 여성작가의 장편.79년 폼페이시의 화산 폭발을 누군가의 계획 범죄로 가정하면서 전개.1996년 공쿠르상 후보작.7500원.
  • [씨줄날줄] 적과의 동침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적과 내통했다.후세인이 바그다드 호화 주택가에서 비밀 회의를 한다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내 벙커버스터라는 신무기로 폭격하게 유도했으나 실패했다.종전 후 견원지간이던 미국과 시리아는 테러 척결에 손을 맞잡았다.독일 나치 친위대장이던 히믈러는 2차 대전 종전 직전 미·영 연합군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의 드골 장군에게 화친을 제의했다고 한다.지난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의 만남은 금전적 뒷거래로 빛이 바랬지만 감동적이었다.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상대와의 만남과 거래를 ‘적과의 동침’이라 일컫는다.지난 1991년 세기적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에서 유래한다.의처증이 심한 남편을 피해 죽은 것으로 위장해 새 삶을 찾는 부인의 성공담을 그린 스릴러 영화처럼 적과의 동침은 극적이다.저항 시인과 정보원이,그것도 서슬 푸른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대에 만나 쿠데타를 꿈꾸었으니 놀랄 일이다.이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적과의 동침’이 따로 있을까. ‘오적’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김지하씨가 최근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을 냈다.김씨는 여기서 1972년 무렵 육사를 나와 중령 예편을 하고 중앙정보부 국제국에 근무하던 이종찬(민주당 고문)씨와의 쿠데타 모의설을 털어놨다.1972년 가을 어느 날 서울 수유리 육당 최남선의 별장 앞 잔디밭에서 둘이 만났다.당시 학생 운동이나 민중 운동이 효과적인 쿠데타에 의해 관철돼야 한다며 의기투합한 뒤 괜찮은 인물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요량이었다는 회고다.스승인 장일순씨와 이씨가 쿠데타를 준비하고,대통령은 김대중씨를,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2는 ‘우리 세력’이 차지한다는 것이었으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한때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이씨도 이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않으며 한때의 추억을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돌렸다.드골 대통령이 시위를 일삼던 사르트르를 보호한 사례에 비유하며 김씨의 열정과 혼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 사회는 요즘 정치권을 비롯해 여러모로 둘로 쪼개져 있다.불편한 동거를 청산하려악다구니와 떼쓰기에 여념이 없다.적과 동침하려면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먼저다. 박선화 논설위원
  • [맛 에세이] “죄송합니다”

    3년 전,열흘 정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커피를 따라주던 스튜어디스가 실수로 제 옷에 커피 한 방울을 흘렸습니다.그때부터 난리가 났습니다. 바비 인형처럼 예쁜 스튜어디스가 물수건을 들고 제 옆에 앉아 ‘sorry’를 연발하는데 나중에는 제가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잖아도 10년 전에 사서 오래도 입었고,출장 기간 중에 줄곧 입고 있던 재킷이라 도착하면 이제는 그만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옷이라는 설명을 하자 그제야 그녀는 돌아가더니 그 항공사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갖고 왔습니다. 청진옥에서 해장국을 먹다가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생각났습니다.하루 종일 푹 고아낸 쇠뼈 국물에 뚝배기 하나 가득한 선지에 양지,내장이 너무 푸짐해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앗!’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종업원이 어떤 손님의 발에 물을 좀 흘리고 당황해서 소리를 냈나 봅니다. 그런데 좀 있다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카운터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손님에게 물수건을건네며 “손님한테 실수를 했으면 ‘죄송합니다.’ 해야지 ‘아싸!’는 뭐냐.”고 그 종업원을 나무라는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으니까 그 손님 눈 꼬리가 단번에 내려가더군요.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습니다. 음식점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납니다.종업원이 접시를 떨어뜨리거나,손님이 물을 엎지르거나,종업원이 손님에게 피해를 주거나,손님이 종업원에게 함부로 대해서 말 싸움이 시작되는 등의 일 말입니다.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간난신고 희로애락처럼 당연한 일입니다.하나의 작은 사회 안에서 사람들끼리 부대끼다 보면 늘 일어나는 일이죠.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는 것이지요.대응 방법이 음식점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게 신기하죠.음식 스타일도 그렇고 분위기도 캐주얼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종업원이 실수로 컵을 떨어뜨려 컵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면 그 ‘랑’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방과 홀의 종업원들이 한목소리로 동시에 “죄송합니다!”고 외치죠.때론 컵 깨지는 소리보다그 죄송합니다라는 소리에 더 놀라 웃곤 합니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코스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종업원이 웬만큼 서툴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어쩌다 실수가 일어나면 지배인이 홀을 한 바퀴 돌며 손님들과 눈을 맞추면서 분위기를 읽죠. 한식당에서요? 기대 안 합니다.유명하다고 해서 가면 손님 대접은커녕 그집 음식 얻어먹는 것도 고마울 지경이니까요.앞 사람이 하는 얘기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설렁탕 집에서는 컵이 아니라 쟁반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니 제 옷에 깍두기 그릇이나 안 엎어지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지요. 이런 현실에서 청진옥 아주머니가 건넨 한마디가 저에게는 참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60년을 한결같이 해장국만 끓여내면서 이광수나 최남선 등의 문인들을 비롯해 문화 예술인,언론인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알겠더군요.‘사람다움’에 쉽게 빠져버리는 글쟁이들이 숙취를 한 번에 풀어주는 그 국물 맛도 국물 맛이지만 손님을 손님으로 대우하는 그 국물만큼 따뜻한 마음에 더 빠져버렸기 때문인 듯합니다. 신혜연 월간 favor 편집장
  • ‘신시의 효시’ 김여제 詩2편 발굴

    한국 최초의 자유시인 ‘불노리’ 등과 함께 초기 신시의 효시로 알려진 김여제의 ‘만만파파식적’(1916년)과 ‘세계의 처음’ 전문이 발굴돼 문학사상 7월호에 공개된다. 두편의 시가 발굴된 것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교수,심원섭 와세다대학 강사 등 와세다대 어학교육연구팀이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찾아낸 ‘학지광’8,11호를 통해서였다. 김여제는 1910년대 초 근대시 개척단계에서 최남선의 뒤를 이어 1916∼1917년 동경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이번에 발굴된 2편의 시를 발표했다.김여제는 상해임정 망명생활 때 흥사단에 가입,도산 안창호의 측근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가 10여년 머물며 교육학을 전공했다.귀국 후에는 오산학교 교장(1931)을 지내며 미국식 교육을 펼쳤다.동인지 ‘창조’의 후신인 ‘영대’에서 김소월 등과 함께 활동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서울대) 교수는 “김여제의 시편은 한국 근대시의 여명기라 할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최남선과 ‘불노리’의 주요한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정도로 시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당시 시편을 읽어본 주요한 등 문인들은 “획기적인 자유시의 대담한 실험적 작품”으로 평했으나 반일(反日)적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학지광’이 판매금지 되면서 묻혀버렸다.이번 발굴로 한국 근대시문학사에서 신시의 효시 등을 놓고 있어온 논란을 보완하는 의미를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종수기자 vielee@
  • 이사람/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우리 서커스 지키기’광대인생 40년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한강변 아파트 동춘서커스단 숙소 겸 사무실에는 이순(耳順)을 코앞에 둔 중늙은이 대신 다부진 체격의 40대 같은 호남형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신산(辛酸)한 삶의 궤적은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눈과 입가에 촘촘히 접혀 있는 잔주름과 옛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촉촉히 젖어드는 회한 어린 눈빛에서 40년 유랑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동춘서커스 박세환(59) 단장.존재조차 잊혀져가고 있는 국내 서커스의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다. 박 단장의 고향은 경북의 고도(古都) 경주 탑정동 260번지.그의 집안은 신라 왕릉 제사를 손수 모시는 경주 명문가였다.할아버지는 육당 최남선과 교류를 갖고 성균관대와 대구대 이사를 지낸 영남 한학자였다.그에 대한 집안의 기대 역시 남달랐다.그러나 ‘끼’를 숨기지 못했다.당시 지역 명문인 경주고에서 반장까지 할 정도로 공부 잘하던 학생이었지만 배우의 꿈은 저버릴 수 없었다.봉건적인 조부의 생활방식 역시 반항기 넘치는 18세 청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금 버무린 보리밥으로 끼니 때우고… 그러던 어느날,박 단장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일이 있었다.당대 최고의 서커스단인 동춘 서커스단이 고향에 찾아온 것이다.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공연장 무대 위에는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검은 신사복과 하얀 실크 머플러를 하고 좌중을 휘어잡으며 사회를 보던 고(故) 동춘 박동수 단장이 있었다.그의 모습에 그만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조부의 불호령도 어쩔 수 없었다.어머니의 눈물도 그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 길로 동춘서커스단을 따라 나섰다.서커스단에 몸을 맡긴 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접시돌리기,공중곡예,모창,코미디 등 안해 본 게 없었다.소금에 버무린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텐트 조각을 이불 삼아 자는 생활이었다.목과 다리의 통증 때문에 잠자리를 설치는 날도 숱하게 많았다.하지만 ‘박동춘처럼만 된다면…’하는 생각에 고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는 “입단 당시에는 200여명의 단원이 있었다.무대에 오르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그러나 운 좋게도 귀공자 스타일의 얼굴로 타고 나서 금세 사회를 맡게 됐다.”고 회상했다. ●어린 단원들 호적에 올려 자식 돌보듯 60년대 초반은 서커스단의 전성기였다.그는 천성적인 끼와 외모,성실함으로 몇 년 만에 최고의 서커스단인 동춘에서 주연 배우 겸 사회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한때 TV 탤런트로도 진출했지만 ‘의리’ 때문에 다시 동춘으로 돌아왔다.박동수씨의 양아들이 되고서는 동춘 서커스단에 그의 인생을 완전히 맡겼다.지금까지 그의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던 부인 신경옥(53)씨도 서커스장에서 인연이 닿았다.60년대 말 서커스가 TV에 밀려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 이후에도 동춘은 그의 실질적인 고향이었다.명절 때 경주 본가에 들러도 하루 이상 머문 적이 없었다.어린 단원들은 그의 양아들로 호적에 올리고 자식처럼 대했다.그도 단 한번의 외도는 있었다.결혼 후 화장품사업에 나서 큰돈을 벌기도 했다.하지만 박동춘 단장이 사망한 뒤 ‘동춘이 파산하게 됐다.’는 소문을 듣고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커스는 점점 외면받고 있었다.한때 30여개에 이르던 서커스단은 서너개만 빼고 모두 문을 닫았다.동춘 역시 해체 위기에 빠졌다.서커스단의 마스코트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코끼리 제니도 지난 81년 겨울,광주에서 영하 20도의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그래도 동물을 다시 살 돈이 없었다. “2개월 동안 같이 먹고 자며 링거와 항생제를 보통 사람의 30배 이상 놓아줬지만 결국 살리지 못했습니다.제니를 차디찬 땅에 두고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박제를 해 서커스단 옆에 항상 두고 있지요.” ●서커스 전용극장서 사회 보는게 꿈 하지만 동춘은 죽지 않았다.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회생하기 수차례.동생,친구,아내 등 주위의 희생도 큰 힘이 돼 생명을 이어갔다.박 단장은 나라가 버려 놓은 동춘을 국민들이 살려 줬다고 여긴다.그래서 공연 시작 때마다 “여러분이 내신 돈은 단순한 입장료가 아니다.바로 동춘서커스 후원금이다.이 돈으로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서커스를 선사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그의 희망은 2005년 완공 목표로 올해경기도 부천에서 착공되는 서커스 전용극장에서 사회를 보는 것.단원들이 안정적으로 첨단 시설의 전용극장에서 공연을 펼친다면 세계 유수의 서커스단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서커스 중흥기’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한다.그리고 마음 놓고 동춘을 맡길 수 있는 ‘똑바른 후계자’ 하나 나타나는 것이다.여유가 된다면 고향에 집안의 유물들을 간수할 집을 마련했으면 하는 소망도 있다.올해 2학기부터 강단에도 서게 된다.서커스 곡예가 격렬한 현대무용인 아크로바트와 유사한 점이 많아 서울예전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칠 예정이다. 박 단장은 “내 돈 들어가고 주위 사람들만 힘들게 하는 서커스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예전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커스장을 찾았을 법한 아들이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를 업고 다시 찾아와 함께 웃는 모습을 뒤로 한 채 떠날 수 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서 피에로처럼 꿋꿋하게 지켜왔던 40년 ‘광대 인생’의 자부심이 배어나왔다. 이두걸기자 douzirl@
  • 유승훈학예사 풍속 연구/도박,조선시대 투전 성행. 양반 쌍륙·골패 즐겨

    정선카지노에서 며칠전 2억 5000만원짜리 ‘잭팟’이 터졌다는 소식이다.또 지난주에는 당첨금이 200억원이 넘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로또’를 사느라 숱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카지노도,로또도 국가가 합법화한 일종의 도박이다.그러나 조선시대에 도박은 불법이었다.고종 28년(1891년)에 영의정 심순택은 “도박한 사람은 죄가 무거우면 효수하고 가벼우면 형장을 쳐서 귀양 보내겠다.”고 보고했다.도박의 확산에 따른 병폐가 그만큼 극심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금(禁)도박’정책에도 불구하고 노름은 근절되지 않았다.유승훈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그 이유를 “도박이 공식적인 놀이로서 허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완전한 규제를 이룰 수 없었다.”고 분석한다.심지어 조선의 왕들도 연말·연초에는 공식적으로 도박을 했다.따라서 도박은 오락성·투기성의 이중성과,금도박 정책의 사각지대를 따라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렇듯 조선후기의 도박풍속을 연구한 유 학예사의 ‘투전고’(鬪錢考)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민속학연구’제11호에 실렸다. 조선 시대 도박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는 다산 정약용의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 기록한 대로 ‘목민관의 책무 가운데 하나가 투전으로 빚을 진 백성의 시름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여유당전서’에서는 ‘저포(쌍륙)놀이로 3000전을 따서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논 일’을 회상했다.다산 개인의 치부가 아니라,상가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밤 새우는 것이 윤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당시 사대부에게는 보편적인 일상이었을 것이라고 유 학예사는 해석한다. 쌍륙이나 골패를 양반가에서 주로 즐겼다면 투전은 가장 대중적이고 남성적인 도박이었다.‘투전에 손대면 친구도 몰라본다.’고 쉽게 큰 돈이 오갔고,골몰하는 사람이 많았다. 투전은 중국에서는 투패(鬪牌)·투엽(鬪葉)이라고 한다.작은 손가락 너비에 길이 15㎝ 정도 크기로 한면에 인물이나 새·짐승·벌레·물고기 등의 그림이나 글귀로 끗수를 표시했다.60장,80장이 한 벌이 되기도 했지만,40장을 쓰는 투전이 가장 성행했다.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투전은 숙종대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 장현이 중국의 마조(馬弔)를 바탕으로 고안했다.장씨 집안의 역모에 연루된 장현이 옥중에서 만들었다는 것. 투전은 그러나 처음엔 투기성 강한 도박이 아니었다고 한다.수투전(數鬪錢)은 돈내기라기보다는 우열·승부를 결정하는 놀이로 양반들이 많이 즐겼다. 그러나 규칙이 간소화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도박시장’을 잠식했다.최남선은 “인텔리성인 수투전이 망각당하고,기호적인 투전이 도박판을 독단하고 있음은 결국 대중성의 승리”라고 표현했다.투전놀이 가운데 끗수로 순위를 정하는 ‘돌려대기’는 ‘섯다’로,‘우등뽑기’ 또는 ‘단장대기’는 ‘짓고땡’으로 오늘날 화투에 이어지고 있다. 유 학예사는 “그동안 민속놀이 연구가 생산과 결합된 놀이나 대동놀이에 치우쳤다.”면서 “민속놀이의 부정적 성격까지 밝힘으로써 전체적인 놀이문화의 성격을 규명코자 했다.”고 도박을 연구과제로 삼은 이유를 설명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사설]한용운·현진건 古宅도 사라지나

    우리 역사 문화 공간의 멸실을 걱정하는 한숨 소리가 가득하다.지난 27일 연세대 연신원 건물이 반대 여론 속에 기습 철거되더니 같은 날 서울 우이동의 육당 최남선 고택이 처참하게 뜯겨졌다.그런데 이번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만해 한용운선생이 15년간 기거했던 서울 계동 고택이 문화재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이다.사실주의 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서울 홍지동의 빙허 현진건 고택,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원서동 고택도 버려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건물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니 더욱 놀랍다.만해 고택의 경우 15년 기거 정도로는 역사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서울시에서 문화재 지정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그러나 3·1만세운동의 거사 계획 현장,‘님의 침묵’구상 현장 만큼 당당한 보호 명분이 어디 또 있겠는가.당국은 예산도 이유로 내세우고 있으나 이 또한 건물들의 훼손 속도를 생각할 때 팔짱만 끼고 있을 일은 아니다. 미국 역사는 기껏 200년 남짓이지만역사의 현장을 가보면 우리보다 훨씬 오랜 전통의 나라로 느껴질 때가 많다.사소한 것도 보존하고 후손들이 그 정신을 되새기기 때문이다.우리는 과연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가. 당국은 법규나 예산 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대상들을 긴급히 보호할 수 있는 적극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문화재 지정대상도 단계나 종류를 다양화해 법규 때문에 지정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또한 최근 횡행하고 있는 문화재 반달리즘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보호 논란이 있는 건물을 일단 훼손하고 보자는 식의 무지한 대처방식은 쐐기를 박아야 한다.
  • 방치된 ‘님의 침묵’서울 계동 만해 한용운 한옥 파손 심각

    만해 한용운이 15년 동안 기거하며 나라잃은 슬픔과 독립의지를 담은 시 ‘님의 침묵’을 구상했던 옛집이 지자체와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계동 43.현대건설 사옥에서 계동길을 따라 중앙고등학교 방면으로 100m쯤 올라가면 중앙목욕탕을 끼고 도는 골목길 안쪽에 35평 남짓한 ‘ㄷ’자형 한옥이 자리잡고 있다.1919년 3·1운동 당시 만해가 천도교 신파의 거두였던 최린(崔麟)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중앙학교 강사로 활동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만해의 옛집을 처음 발굴한 소설가 오인문(60·종로구 홍지동)씨는 29일 “1월 초 처음 발견했을 때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쁨보다 참담함이 앞섰다.”면서 “지자체나 시민들이 나서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인 여규평(46)씨는 “1988년 이사온 뒤 몇 차례 손을 댔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보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차라리 재건축업자에게 팔아넘기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종로구나 서울시는 집이 ‘사유물’이라는 점을 내세워 보존에 소극적이다.종로구청 관계자는 “근현대 건축물의 경우 뚜렷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으면 문화재로 지정되기 어렵다.”면서 “홍지동의 빙허 현진건 고택도 수차례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으나 예산문제 때문에 거부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시민들은 관계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을 주문하고 있다.서울문화예술인 유적보존회 관계자는 “우이동의 최남선 고택과 원서동의 고희동 고택도 당국의 무관심으로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작가가 잠시 머물며 집필활동을 했던 온천장까지도 기념관으로 활용하는 이웃 일본의 문화재 정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세영기자 sylee@
  • [우리고장이 원조]땅끝마을

    한반도 최남단은 어디일까.백두산 천지에서 용틀임한 한반도 정기는 백두대간을 타고 힘차게 내뻗어 노령산맥 줄기가 다하는 곳에 똬리를 틀었다.민선이후 지방자치단체마다 관광상품 개발과 성과를 단체장 치적으로 내세우면서 ‘땅끝논쟁’에 불이 붙었다.전남 해남의 ‘원조 땅끝론’에 완도군이 ‘신 땅끝론’으로 맞받아치고 있다.뭔가 각오를 다지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제 ‘땅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자 출발점이 되고 있다.연말과 새해벽두면 국토순례단이 찾는 단골 출발점이자 수학여행단과 단체관광객이 몰려와 셔터를 눌러대는 물좋은 관광상품이다. ★해남 갈두마을 대한민국 전도를 펼쳐보라.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땅끝)마을은 보다시피 육지의 맨끝에 놓여 있다.각종 문헌에도 한반도의 땅끝으로 공인돼 있다.흔히 땅끝마을로 불리는 곳이 갈두마을이다.순 우리말로 칡머리라는 뜻이다.원님이 마을 진상품인 칡을 보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땅끝마을 끝에 있는 86년에 세워진 땅끝탑이 위도상으로 북위 34도17분21초로 기록돼 있다.한반도 뭍에서 이보다 더 낮은 위도는 없다.땅끝마을에서 12대째 사는 이장 김유복(55)씨는 “주민들이 국립지리원에 요청해 토말이란 한자말 대신 94년부터 순우리말인 땅끝으로 공인받았다.”고 말했다. 땅끝이 알려지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윤선도 유적지인 완도 보길도를 찾는 사람이 급증함에 따라 땅끝마을이 뱃길(1시간)로 가는 최단항로로 개발되면서부터다. 땅끝에 가면 땅끝을 알리는 기념물이 3개나 버티고 있다.땅끝마을 바닷가에 서있는 땅끝탑(높이 10m)과 갈두산 사자봉 전망대 아래쪽에 땅끝비(1.2m)가 있다.삼각형의 땅끝탑에는 ‘우리나라 맨 끝의 땅,갈두리 사자봉 땅끝에서 서서 길손이여….’라고 새겨져 있다.사자봉 아래쪽에 묘비석처럼 생긴 땅끝비에는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니….’라는 시를 우록 김봉호선생이 남겼다. 군은 사자봉에 있던 기존 땅끝 전망대를 헐어내고 지난해 33억원을 들여 전망대를 새로 세웠다.남북통일을 염원하고 21세기 세계로 뻗어가는 대륙의 출발점을 지향,‘동방의 횃불’을 형상화한조형물이다.지하 1층 지상 9층에 높이 39.5m로 전망탑과 소망 새기기 판 115개가 부착돼 있다. 해남군은 86년 송호리에 460억원을 들여 2006년까지 20년 계획으로 ‘땅끝 관광지’를 만들고 있다.조금 떨어진 통호리 9만 8000㎡에는 100억원으로 2004년까지 조각공원을 조성중이다.기반공사를 마치고 올부터 장승 30점,조각작품 20점,미술관 1동을 설치한다. 해남군 공보계 조충범(50·6급)씨는 “지난해 땅끝에서 마련한 해맞이에 관광객 1만 5000명이 몰려와 소원을 빌었고 지난 한해동안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128만여명으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황도훈 해남 문화원장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서 한반도 남쪽의 끝을 ‘갈두’로 표기했고 현재도 이 지명이 남아 있다.‘갈두’를 ‘토말’로 하다가 지금은 ‘땅끝’으로 부른다. 여기서 한양까지 1000리,한양에서 함북 온성부까지 2000리로 잡아 한반도를 3000리로 보았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만국경위도에서 남쪽 기점을 해남현으로 잡았다.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도 “3000리 금수강산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해남 땅끝에서 함북 온성까지로 잡아 3000리 금수강산이며,대륙에서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겨레를 이루었다.”고 적었다. 반도의 끝이란 모름지기 대륙에 이어진 곳이라야지 바다를 건너서 땅끝이 있다면 제주도를 한반도의 땅끝으로 봐야 한다. 한마디로 완도가 땅끝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억지다.또 국민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다.다리가 연결된 섬이 육지라면 그런 육지는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완도 넉구지 지난해 광주와 전남 도심 곳곳에 내걸린 ‘신 땅끝 완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이라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끌었다. 완도에서는 ‘원조 땅끝론’ 시대는 가고 ‘신 땅끝론’ 시대가 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주민들은 “시시각각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바다가 육지가 되고,있던 섬도 사라진다.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완도읍 중도리 고갯마루인 넉구지는 북위 34도16분59초다.해남 땅끝보다 1분이상이 적으니까 말하자면 직선거리로 따져도 1850m나 아래쪽에 있는 셈이다. 2대째 고향을 지키는 중도리 이장 최광채(48)씨는 “70년대까지 넉구지에 5∼6가구 사람이 살았으나 간첩이 출몰한 이후 지금은 군부대 초소만 있다.”며 “2∼3년전부터 신 땅끝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 68년 섬과 뭍을 잇는 완도대교가 놓이면서 완도는 도서촉진법상 육지로 분류되고 있고 지도상으로도 맨아래쪽이다. 이 때문에 완도군은 정부로부터 도서개발비를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97년 개정된 도서개발촉진법 시행령 제1항에 ‘도서(섬)는 만조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고 규정돼 있다.하지만 2항에서 방파제나 교량으로 육지와 연결된 때부터 10년이 지난 섬은 더 이상 해상의 섬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공박하고 있다. 완도군은 넉구지에서 3㎞ 떨어진 정주산 일대 5만 6000여㎡에 60억원을 들여 전망대와 진입도로,주차장,산책로,조각공원을 조성한다.다음달 공사에 들어가 내년까지 마무리한다. 전망대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전망대 바닥 부분을 50.7m로 높여 총 높이는 57.7m로 한다.1층에는 특산품 판매장과 휴게실·식당·전시장 등을 갖추고 2층에는 망원경을 갖춘 전망실로 꾸민다. 완도군 경제정책팀 김승조(40·7급)씨는 “완도(청해진)는 장보고 대사의 찬란한 해양문화를 꽃피운 역사유적지가 산재하며 이를 신 땅끝 관광지와 연계해 해양역사의 체험 및 휴양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해남·완도 남기창기자 kcnam@kdaily.com ★김희문 완도문화원장 연륙이 된 뒤 완도는 지도상에서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주민들은 해남 땅끝보다 아래쪽에 있으므로 당연히 완도가 새로운 땅끝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위도상으로 볼 때 ‘넉구지’는 왕두산 끝자락이다.한때는 넉구지를 산의 이름을 따 왕머리라고도 불렀다.그 옛날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뭍이 가장 가까운 이곳 넉구지에 배를 대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1605년 가리포진(현 군청자리)의 방어를 책임진 최광 첨사가 완도 앞바다에서 왜구를 전멸했다.이후 한 많은 왜구의 시신이 밀려서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가 되면 떠올라이들의 넋이 운다고 해서 넉구진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다. 지난해 군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신 땅끝인 이곳을 널리 알리고 관광상품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아무튼 완도대교 개통 이후 이제 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옛날 사고방식대로 해남만이 땅끝이라는 고집은 접어야 한다.
  • 육당 최남선 생가 철거된다/서울시, 문화재 지정않기로

    육당 최남선이 10여년간 살았던 서울 강북구 우이동 고택이 될전망이다. 서울시는 10일 강북구 우이동 5의 1에 위치한 육당의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구청과 육당기념사업회 등에 통보했다. 지난 1939년에 지어진 이 집은 대지 462평,건물 56평 규모의 단층 한옥으로 최남선이 일제말기인 1941년부터 52년까지 기거하며 문학활동을 한 곳이다. 이같은 역사성으로 관할 강북구와 육당기념사업회,유족 등이 지난 95년부터 ‘서울시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지금까지 문화재 지정이 이뤄지지 않은데다 최근 모 건설회사에 매각돼 조만간 사라질 처지에 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시 문화재위원회가 그동안 육당의 인물평가와 역사적 가치를 놓고 심도있는 논의를 펼친 결과 이곳이 육당의 친일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로 평가됐다.”고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이동구기자 yidonggu@
  • [우리고장이 원조] 해돋이

    ★강릉 정동진 “우리지역이 원조” “명백한 우리고장 출신” 지방자치단체들 간에 ‘원조,으뜸’ 다툼이 치열하다.한강 발원지와 땅끝마을 논란에서 심청·홍길동 출생지 문제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물론 이들 지역간 다툼의 배경에는 지역 명소 상징물 조성으로 내고장의 얼굴을 알리고,캐릭터사업 등을 통한 관광수입 증대도 겨냥하고 있다.해마다 연말에 되풀이 되는 전국에서해가 가장 먼저 뜨는 해돋이 지역 논란을 계기로 대표적인 ‘원조,으뜸’ 다툼을 시리즈로 짚어 본다. 검푸른 파도와 하얀 포말 속에 맞는 강원도 강릉 정동진의 해맞이는 어느곳보다 감동적이다. 정동진은 조선시대 한양의 광화문밖 정동쪽에 위치해 있는 바닷가라 해서 붙여진 이름에서부터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드라마 ‘모래시계’로 일약 시골 간이역이 명소가 되면서 새해 등연초에는 한해에 수백만명씩 찾는 순례지가 되다시피하고 있다.붉게 솟아 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새벽시간 서울 청량리 등에서밤새 열차로 달려와 바다에 내리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정동진이 유명세를 타는 또다른 이유는 이곳이 바다와 백사장,기암절벽,깨끗한 포구 등이 어우러지고 주변에 볼거리 가볼만한 곳이 널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사장에서 해돋이를 보고 정동진역 바로 옆 호물지산(고성산)이라 불리는야산에 오르면 산새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좀더 넓은 정동진의 이곳저곳을조망할 수 있다.높이가 100m도 안되는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야트막한 산은등산로까지 갖춰져 있어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정동진 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 있는 등명해수욕장도 오염되지 않은 조용한 곳이다.정동진역을 끼고 등명해수욕장까지 승용차를 이용하면 절벽과 바다가 연출하는 풍광이 장관이다. 이곳에서 200m쯤 북쪽으로 이어지며 서울에서 가장 동쪽,푸른 동해를 바라보며 웅장하게 자리한 등명낙가사 사찰이 손님을 맞는다.동해바다를 바라보고 금당터 아래에서 사시사철 콸콸거리며 쏟아지는 등명약수로 목을 축이면극락이 따로 없다. 이밖에 기암괴석과 함께 자갈로 뒤덮인 바닷가조그만 어촌마을 ‘심곡’과 해안을 따라 적갈색 흙과 모래 자갈로 700여m에 걸쳐 발달한 해안 단구,북한 잠수함과 해군 함정 등이 전시된 통일공원,정동진 조각공원 등 볼거리 가볼만한 곳이 손에 잡힐듯 곳곳에 펼쳐져 있다.그래서 정동진은 해돋이 관광명소의 원조로 자부한다.강릉시는 새해 1월1일 해돋이 행사를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해 놓고 있어 새해 소원을 기원하려고 찾는 가족 또는 연인끼리의 여행에 또다른 즐거움을 줄 예정이다. ★포항 호미곶 한반도의 동쪽 끝으로 지형상 호랑이 꼬리 부분인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 해맞이 행사는 전국에서 단연 으뜸이다. 지난 2000년 새해를 앞두고 대통령 특별자문기구인 ‘새천년 준비위원회’가 전국에서 개최된 37개 각종 해맞이 행사 가운데 유일한 국가공인 행사로지정했을 정도다.우리나라의 최동단으로 가장 해가 먼저 뜨는 곳이며,역사적·지리적 상징성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새 천년 첫 국가 행사로 열린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바로 이를 입증한다.호미곶은 쪽빛 바다와 흰 파도,갈매기들의 힘찬 날갯짓,우뚝 솟은 하얀등대,항로를 찾아드는 고기잡이배 등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새천년 해맞이 행사와 때를 맞춰 채화된 전북 변산반도의 ‘20세기 마지막 불씨’와 남태평양 피지섬(지구의 날짜 변경선)의 ‘지구의 불씨’,울릉군 독도의 ‘즈믄해의 불씨’,호미곶의 ‘새 천년 시작의 불씨’가 합화(合火)된 ‘영원의 불’이 안치된 곳으로 유명하다.또한 영원의 불 성화대로거대한 청동조형물(가로 15m×세로 20m)인 ‘상생의 손’ 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이밖에 인근에 1903년에 건립된 호미곶 등대와 항로표지 용품과 바다 관련 유물 3000여점을 전시한 국내 유일의 국립 등대박물관,풍력발전기 등이 있어 연중 150만여명의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포항시는 새해 전야(저녁 8시)부터 계미년 첫 아침(오전 11시)까지도 30여만명의 관광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농악·사물놀이와 춤 공연 등을 곁들인 ‘한민족 해맞이 축전’을 다채롭게 펼친다. 호미곶의 일출은 예부터 유명하다.육당(六堂) 최남선은 이곳을 호랑이 꼬리라 이름하고 영일만(지금의 호미곶 일대)의 일출을 조선 십경(十景)중의 하나로 꼽았으며,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迎日縣)편’에는 해맞이 고장으로적고 있다. 김정호도 ‘대동여지도’에서 호미곶을 한반도 최동단으로 표기했으며,대동여지도 제작을 위해 호미곶을 7번이나 다녀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포항시 관계자는 “호미곶의 새해 일출은 다른 지역보다 다소간 늦고 빠른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운 상승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말했다. ★울주 간절곶 자연경관이 뛰어난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의 바닷가 간절곶도 해맞이 관광명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푸른 바닷가에 우뚝 솟은 등대가자아내는 낭만적인 분위기,새천년 해맞이 행사때 조성해 놓은 조각공원 등주변 경관이 수려해 평소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한해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는다. 특히 울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등대 옆 직원숙소 1층에 일반인들을 위한 휴양·숙박시설을 마련해 일년 내내 관광객들이 싼값에 이용할 수 있다. 울주군은 2003년 새해 아침에도 많은 해맞이 관광객이 몰려들 것으로 보고간절곶에서 오전 7시31분 22초,해 뜨는 시간을 앞뒤로 다양한 해맞이 이벤트를 갖는다. 간절곶은 지난 2000년 새해를 앞두고 ‘새천년 준비위원회’가 전국 ‘새천년 일출행사 지역’ 가운데 한곳으로 선정,전국 규모로 다채로운 해맞이 행사가 열린 것을 계기로 해맞이 관광명소로 전국에 널리 소문이 났다. 당시 새천년 첫날 솟는 해를 우리나라 바닷가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쇄도하는 바람에 주변 도로가 마비,주차장으로 변해 차안에서 새해맞이를 하는 진풍경이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간절곶은 해마다 새해 첫날 우리나라 바닷가 지역 가운데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천문연구원측은 간절곶과 울산 동구 방어동 방어진의 새해 첫날 일출시간이 오전 7시31분대로 우리나라 바닷가 지역에서는 가장 빠르다고 밝혔다. 포항시 호미곶은 오전 7시32분대,강원도 정동진은 오전 7시39분대로 이보다약간 늦은 편이다.해안가에서는 간절곶이 새해 해가 뜨는 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해맞이 ‘원조’지역인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천문연구원 정보실 안영숙(安英淑) 책임연구원은 “각 지역일출시간은 해발 고도 0m에서 보는 것을 기준으로 지도상으로 계산한 시간이기 때문에 해당지역의 해발 고도나 기상상태 등 보는 여건에 따라 실제 해뜨는 시간은 차이가 날 수 있다.”며 “따라서 이론상 계산한 시간을 몇초까지 따지며 해돋이가 빠르거나 늦다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전국종합 정리 강원식기자 kws@
  • 책꽂이/ 소설 문 外

    ■소설 문(황보탁 지음)= 지난해 ‘한국소설’신인상으로 문단에 발을 디딘 저자의 예언적 정치소설.치열한 대통령선거의 심층에 스며 있는 놀랄 만한 풍수학과 관상학의 비법들이 흥미를 더한다.이를 테면 명당을 가지지 못한 이가 명당의 유골을 파낸 뒤 자기 조상의 뼈를 몰래 묻는 ‘환골’이라든가,청와대 위치에 대한 풍수적 해석,남녀 성기를 통해 미래를 보는 양물·음물상 등이 그것.그런가 하면 작가는 왕도사들의 견해를 빌려 차기 대통령 당선자를 예언하는 소설 이상의 시도를 하기까지 한다.도서출판 형상.9500원. ■작가 김영수(김유미 지음)= 희곡 및 드라마작가·소설가로 활동하다 지난 77년 타계한 김영수의 삶과 문학세계를 그의 딸인 소설가 김유미씨가 재조명한 전기소설.해방 후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 연속방송극 ‘똘똘이의 모험’을 비롯해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연극 ‘혈맥’,드라마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의 대본을 쓴 그의 문학행적을 고스란히 담았다.민음사.전2권각 8500원. ■몽유도원도(최인호 지음)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전’을 소재로 삼은 소설.지난 95년 출간한 것을 화가 박항률의 그림을 곁들여 새로 꾸몄다.백제 개로왕과 평범한 백성 도미,도미의 아내 아랑이 펼쳐내는 설화가 작가의 손을 거쳐 눈부신 사랑의 전설로 거듭났다.이 작품은 뮤지컬 ‘명성왕후’를 연출한 윤호진에 의해 뮤지컬로 공연될 예정이며,중국 출신 영화감독 첸 카이거가 한·중·일 합작영화를 만들기로 해 화제를 낳고 있다.열림원.7500원. ■현대시와 삶의 진실(김재홍 지음)= 경희대 교수의 비평집.최남선 한용운 이병기 서정주 윤동주 고은 김지하 등의 시세계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근대성과 종교성,민족어의 완성과 진정성의 시학 등을 분석했다.문학수첩.1만5000원.
  • 미사여구 분칠한 ‘친일문인 행적’, 민족작가회의 참회의 고백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印)씨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중략)/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그대,몸을 실어 날았다가 내리는 곳/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같은 미국군함/수백 척의 비행기와/대포와 폭발탄과/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같은 병정을 싣고/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미당 서정주가 카미가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청년을 위해 썼다는 ‘송정오장송가(松井伍長頌歌)’를 읽으며 시방 우리는 슬프다.고운 시심으로 ‘질마재 신화’를 빚어낸 미당이,자살특공대로 나섰다가 산화한 조선 청년 ‘마쓰이 오장’의 죽음을 찬양한 이 시를 읽으며 문학사에 커다란 여백 하나를 남겨야 하는 일 때문에 참으로 슬프다.그러나 그의 재능이 아무리 준절하고 시심이 아름다워도 그를 ‘아름다운 시인’이라고찬양할 수는 없다. 이렇게 민족의 아픔을 등지고 입신양명의 길을 내달은 친일문인들의 반민족행위가 최근 공개됐다.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현기영)가 선배 문인들의 훼절과 반민족적 문학행각을 반성하는 참회와 함께 공개한 친일문학의 실체는 광복후반세기를 넘긴 지금에도 새삼 낯뜨겁다 친일단체 일진회의 수령을 지낸 송병준이 일개 일본군 참모에게 보낸 ‘삼가 재배하고 아뢴다.’는 편지글이나중추원 고문 출신인 윤치호의 ‘반도학도 출진독려문’은 오히려 가소롭다. 우리에게 신체시로 잘 알려진 최남선은 ‘보람있게 죽자’는 글을 통해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 중의 대운임이 다시 의심없다.(중략)순정의 청년들아,공론을 집어치우고 대운에 들어서서 신선하게 역사적 임무를 담착하여 보세나.’라며,내놓고 조선인들의 참전을 독촉했다.소설가 김동인은 문인들에게 “스스로 내 손으로 총을 잡지 못하고 대포를 잡지 못하였다고 퇴축(退縮)치 말고 이 전쟁을 좌우할 중차대한 열쇠를 잡았노라는 자각과 긍지 아래 우리의무기인 문필을 가장 효과있게 이용할 것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카프(KAPF)결성에도 참여한 팔봉 김기진은 ‘신전에 맹세하네 무엇부터 맹세할까/열가지 백가지를 한목 용서 못하리라/천황께 이 한몸 바쳐 뒷일 걱정 안하오.’라며 차마 못할 부끄러움까지 고백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런 친일 아첨 행각은 대구 출신 김문집이란 자의‘조선민족 발전적 해소론 서설’에서 극치를 이룬다.그는 “내선의 민족적일원화는 분수식으로 ‘A+c(조선민족)/A+b(대화민족)=1’로 표현된다.”며“1은 대화(大和)민족이나 조선민족이 아니라 양 민족의 우생학적 합명제,즉 한만(漢滿)남양(南洋)등의 외래 혈액을 약간 조미한 동근적(同根的)내선고대민족(內鮮古代民族)의 일대 재창조”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끌어대기까지 했다.그는 결국 일본에 귀화했다. ‘사나운 국경에도/험준한 산협에도/네가 날아가는 곳엔/꽃은 웃으리 잎은춤추리라’라고 한 모윤숙의 시가 장산곶매를 노래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그에게는 불의의 시대에 맞설 지조가 없었다.그래서 광강소년항공장(廣岡少年航空兵)에게란 제목의 이 몹쓸 글을 남긴 것이다.민족문학작가회의는 “선배문인들의 역사적·문학적 과오에 대해 후진들이 속죄하고 자성하는 ‘과거사에 대한 문단의 고해성사’”라고 이번의 친일작가 선정과 그에 따른 참회선언문 발표에 의미를 부여했다. 심재억기자
  • [대한광장] ‘순수문학’ 등뒤에 숨은 친일

    개혁적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발표한 친일파 명단을 두고 국민들이 놀라고 있다.각계의 내로라하는 지도층인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는 우리의 일그러진 현대정치사를 조금이나마 관심있게 들여다본 이에게는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던 이승만 등의 세력에 의해 ‘반민특위'가 비열한 방법으로 무참히 좌절된 이후,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세력은 어느 누구도 반성이나 참회 한번 없이 신생 대한민국의 주류세력으로 성장했다.협력의 대가로 부와 권세를 장악한 이들의 후손들이 해외유학 등으로 실력을 다지는 동안 바람마시며 한뎃잠을 자야 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은 대물린 가난으로 아예 대가 끊기거나 생존해야 ‘도배장이' 등이 고작이었다. 필자는 1986년,당시 5공정권이 폐간조치했던 실천문학사가 발간한 ‘친일문학선집'을 접했던 때의 충격을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화사집' ‘귀촉도' 등과 같은 시로 모국어의 연금술사로 ‘시인부락의 족장'이요 ‘시의 정부'라고서슴없이 칭송하던 서정주.‘사슴'의 시인으로 고고한 노천명,김소월의 스승이자 서정의 극치인 가곡 ‘꿈길'의 시인김안서 등등.그뿐인가.현대소설문학의 시조이자 지사였던이광수를 비롯해 최남선,김동인,박종화,최재서,김동환,백철,김팔봉,주요한….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들의 친일 작품을 확인하던 때의 충격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식민지의 통한을 지닌 우리들에게 모국어는 남다른 ‘민족혼의 거처'이며 문학 또한 그러하다.해방 후의 국어교육에서는 그래서 유난히 모국어를 절차탁마한 작품을 문학의귀감으로 가르치고 배웠다.청소년들은 그들의 ‘문학'만을읽고 모범으로 삼았다.‘조선의 학도여' ‘모든 것을 바치리' ‘아세아의 해방' ‘일장기의 물결' ‘총동원의 태세'를 역설하며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성전찬가'를 외치던 그들의 ‘삶'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적어도 20세기 한국에서는 ‘위대한 생애가 위대한 문학을 낳는다.'는 괴테의 지론은 통용되지 않으며,‘사상의 종점은 실천에 있다.'라는 네루의 명언도 수정되어야 한다.필자는 부끄럽게도 교단에 서서 위에 열거한 시인들을 ‘순수문학'이라 가르쳤다.사회주의운동에 몸담았던 카프 문인에 대한 대항개념이었으리라 본다. 1986년에 출간된 ‘친일문학선집'에는 우리 현대문학의 초창기를 일구어낸 대다수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거침없는제국주의 예찬이 화인처럼 선명히 박혀 있다.그들 지식인의 수사는 압제와 침탈로 신음하는 식민지 민초들의 고통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아직 우리 교과서는 이들을 ‘순수문학'이라 부르는가? 아직도 우리의 교사들은 문인의 작품과 삶은 별개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문민숭상의 전통이 강력했던 시대에 과연 문학은 ‘순수'할 수 있을까? 조선청년을 제국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독려했던 그 사실만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감히 필자는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늦게태어난 자의 운명이 그저 축복일 뿐.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공론의 장에서 밝히는 데에 무려 반세기가 걸릴 수밖에없었던 현실이 답답하다.하물며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들이 나서고 있는 역사 바로 보기 노력에다가 계급투쟁 어쩌고하는 선동을 일삼는 데에는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친일문인의 기록은 분명 부끄러운 역사이며,단죄하기 이전에 민족사의 아픔이며 아직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이다. 평가는 훗날의 역사가 할 일이다.그러니 제발 이들을 두고 ‘순수문학'이라는 엉터리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또한 이런 준열한 말을 남긴 유명한 서양문인도 있음을 기억하자. ‘순수문학'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알베르 카뮈). 유시춘 작가·국가인권위원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2)친일파 청산운동

    친일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는 정말 불가능한것인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친일파명단 발표를 통해 쏘아올린 ‘친일청산’의 첫 신호탄이우리 사회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친일파 후손들의 거센반발에 부닥쳐 또다시 불발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자아내고 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가려내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돈과 권력을 움켜쥔 친일파와 그추종자들의 저항에 밀려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역사적 심판 노력 번번이 좌절. 친일 청산 작업이 처음으로,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9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면서부터였다. 당시 22조로 구성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범주를 협소하게 규정한 것으로,이는 최소한의 처벌을 위한것이었다.수십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친일부역자중 죄질이 심한 7000여명 정도를 심판대에 올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49년 1월8일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특위는 국민들의 지지 속에 일제의 주구로 활동했던 친일파들을 검거,단죄해나갔다.그러나 특위 출범 초기부터 ‘시기상조’ 운운하며 마뜩지 않게 여겼던 대통령이승만은 특위가 일제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급기야 같은해 6월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조사요원들을 불법체포했다. 민족의 염원을 담아 국회가 구성한 반민특위는 이런 곡절을 거쳐 허약해진 뒤 실로 허무하게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친일청산 작업이 무산된 것이다.반민특위는 1949년 8월31일 해산 때까지 박흥식 노덕술 이광수 최남선 등 682명을조사해 모두 221명을 기소했다.그러나 특위가 해산된 후 1950년 봄까지 실형 선고자 7명을 포함해 모든 친일행위 관련자는 풀려나고 말았다. 친일 연구가들은 “당시 군과 경찰의 요직을 차지한 친일파들과 친일 자본가들이 이승만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민특위 해산으로 친일세력은 아무런 제지없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 뿌리를 내렸다.또 당시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반민특위에 적극 참여하고 지지했던 국회의원들이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돼 대거 구속되면서 국회나 정부 차원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아예 기대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후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친일파 청산노력은 더욱 어려워졌고,전두환·노태우정권 하에서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별다른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93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김원웅(민주당) 의원이 94년 반민법의 취지를 이어받은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안’ 제정을 추진했으나 이 역시 저항에 밀려 무산됐다. 김원웅 의원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법안 제안 서명을 받으면서 국회·관료·언론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친일적 기반으로 기득권을 형성한 세력이 얼마나 막강하게버티고 있는지를 절감했다.”고 말한다.친일파 청산작업의 실패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다. 민간 차원에선 친일파 청산을 위한 연구와 운동 정도의노력이 간간이이어졌다.60년대 이후 재야 사학자인 임종국씨가 이광수 최남선 모윤숙 김동환 등 문학행위를 통해일제에 적극 부역한 인사들을 집중 조명한 ‘친일문학론’을 제기,주목을 받았다. 95년엔 독립유공자협회가 해방후 첫 공식행사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학술대회’를 열어 친일파 청산문제를본격적인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으며,97년엔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의 재산몰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87년 ‘제2의 반민특위’를 내걸고 출범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는 학술·출판 등을 통해 친일청산 작업을 벌여왔으며,지난해 친일파 3000∼4000명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는 대작업을 시작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반민법·반민특위도 태생적 한계. 일부 언론에선 이번 ‘친일파 명단’발표를 놓고 1948년제정했던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선정 기준에 어긋난다며 크게 반발했다.결국 친일파들을 척결하기 위해 제정한반민법이 오히려 그들의 후손에 의해 악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반민특위는 과연 반민법을 근거로해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심판하기에 충분했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원은 “사실 그때도 힘의 논리에 의해 반민법과 반민특위가 일정한 한계를 지닌 채 탄생했다.”고 말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선정에서 관료의 경우 칙임관(부이사관상당) 이상으로 한정해 놓아 그 아래 주임관(당시 일선 군수)이하의 관료들은 조사할 근거가 미약했다.군인과 경찰도 영관급,서장급 이상만을 대상으로 했다.그러나 일제하에서 한국인중 이러한 최고위직을 가진 관료는 극소수에불과했다. 물론 주임관 이하라도 죄적이 ‘현저’한 자는 반민족행위자로 구분할 수 있도록 했으나 적용하기가 애매해 실제로 조사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 언론이나 문학행위를 통해 일제미화나 전쟁을 선동한경우도 포함시켰으나 역시 선정기준이 애매해 최남선 이광수 김동환 등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조사조차 벌이지않았다. 그나마도 친일반역행위자로 선정된 사람들은 대부분 1930년대 이전의 부역자들이었다.그 이후의 친일행위자들은 반민특위구성 당시 이미 새 정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708명 명단에 1930년대 이전에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이 대거 포함된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임창용기자.
  • 친일 반민족행위 708명 명단(2)

    ◇1911년∼191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권중현 ▲이근상 ▲이근택 ▲이재곤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한창수(이상 고문) ▲강경희 ▲남규희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박중양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조영희 ▲홍승목(이상찬의) ▲권태환 ▲김필희 ▲민건식 ▲박제환 ▲성하국 ▲송헌빈 ▲신태유 ▲어윤적▲오제영 ▲유흥세 ▲이항식▲이만규 ▲이봉노 ▲이항식 ▲정동식 ▲정병조 ▲조병건 ▲조원성 ▲조재영 ▲최상돈 ▲허 진 ▲홍운표 ▲홍재하(이상 부찬의). ◇1916년∼1920년 중추원. ▲민상호 ▲조민희(이상 고문) ▲강경희 ▲박중양 ▲조희문(이상 찬의) ▲김낙헌 ▲김한목 ▲민원식▲서회보(이상 부찬의). ◇1921년∼1925년 중추원. ▲이완용(부의장)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이상 고문) ▲김현수(부찬의)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제빈 ▲서상훈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노 ▲이건춘▲이겸제 ▲정진홍 ▲조민희▲조영희 ▲조희문 ▲강병옥▲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필희 ▲김현수 ▲노창안 ▲나수연 ▲민건식▲민영은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열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오재풍 ▲유기호 ▲유빈겸 ▲유흥세 ▲윤치소▲이근우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학 ▲이택현 ▲이항식 ▲장 도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상황 ▲한영원 ▲허명훈 ▲현 은 ▲구연수 ▲김춘희 ▲현기봉(이상 참의). ◇1926년∼1930년 중추원. ▲박영효 ▲이완용(이상 부의장)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영진 ▲민상호 ▲민영찬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박중양 ▲백인기 ▲상 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 맹 ▲유성준 ▲유정수 ▲조진태 ▲조희문▲한상룡 ▲한진창 ▲권태환 ▲김갑순 ▲김명규 ▲김명준 ▲강병옥 ▲김상설 ▲김상섭 ▲김창한 ▲노창안 ▲박경석 ▲박기동 ▲박종렬 ▲박흥규 ▲선우순 ▲송지헌 ▲송종헌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익환 ▲유흥세 ▲이강원 ▲이기승 ▲이동우 ▲이병열 ▲이택규 ▲이항식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상철▲장응상 ▲장직상 ▲정난교 ▲정순현 ▲정태균 ▲정호봉 ▲최석하 ▲한영원 ▲한창동 ▲홍성연 ▲김윤정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이상 참의). ◇1931년∼1935년 중추원.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이상 고문)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윤정▲남궁영 ▲민상호 ▲박영철 ▲박용구 ▲어 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이진호 ▲장헌식 ▲조성근 ▲최 린 ▲한규복 ▲한진창 ▲고일청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영택 ▲김정호 ▲김종흡 ▲김한규 ▲김한승 ▲박기석 ▲박종렬▲박철희 ▲박희옥 ▲석명선 ▲선우순 ▲송지호 ▲신희연 ▲오태환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우▲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병렬 ▲이선호 ▲이충건 ▲이택규 ▲이희덕 ▲장대익 ▲정관조▲정난교 ▲정대현 ▲정석모 ▲최양호 ▲최윤주 ▲최인국 ▲최창조 ▲한영원 ▲현헌 ▲현준호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성준 ▲진희규 ▲홍종철(이상 참의). ◇1936년∼1940년 중추원. ▲민병덕 ▲민병석 ▲윤덕영(이상 부의장)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영진 ▲남궁영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 담 ▲엄준원 ▲유정수 ▲유혁노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장헌근▲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 주영환 ▲한규복 ▲한상룡 ▲홍종국 ▲강심 ▲강동희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상회 ▲김신석 ▲김정석 ▲김진수 ▲김창수 ▲김한목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안종철 ▲오세호▲원덕상 ▲유태설 ▲이경식 ▲이근수 ▲이기찬 ▲이승우 ▲이은우 ▲이종섭 ▲이진호 ▲이희적 ▲인창환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난교▲정석용 ▲정대현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 윤 ▲최남선 ▲최준집 ▲최지환 ▲하준석 ▲현 헌 ▲현준호 ▲홍치업 ▲홍종국 ▲유만겸(이상 참의). ◇1941년∼1945년 중추원. ▲박중양 ▲이진호(이상 부의장)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용(이상 고문)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난교 ▲정연기 ▲진학문 ▲최 린 ▲한규복▲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준 ▲김화준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용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 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 한정석 ▲ 현준호 ▲황종국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이상 참의) ▲엄창섭(서기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강원수 강필성 계광순 고안언 구연수 구자경 권중식 길원봉 김대우 김덕기 김동훈 김병욱 김병태 김성환 김시권 김시명 김영년 김영배 김영상 김우영 김진태 김창영 김태동 김태석 김화준 김희덕 남궁영 노영빈 박규원 박용구 박재홍 손영목 송문헌 송문화 송찬도 양재하 엄창섭 유만겸 유시환 유홍순 윤상희 윤종화 윤태빈 이계한 이기방 이동진 이범승 이범익 이병석 이성근 이원보 이종국 이창근 이해용 이현전 임문석 임승수 임헌평 장기창 장수길 장윤식 장헌식 전지용 정교원 정규봉 정민조 정연기 정용신 조경하 조종춘 주영환 진염종 차윤홍최경진 최병원 최익하 최창홍 최하영 한동석 한종건 현석호 홍승균 홍영선 홍종국 홍헌표. ◇조선총독부 판사.검사. ▲김락헌(조선총독부 판사) ▲민병성(京城復審법원검사) ▲이선종(조선총독부平壤覆審법원검사) ▲홍승근(조선총독부大邱覆審법원검사). ◇밀 정. ▲강락원 김동한 김인승 박두영 박석봉 배정자 선우갑 선우순 오현주 이종영 이준성 장문재 장우형 정병칠 최정규. ◇친일단체. ▲김명준 김한규 민영기 민영휘 박제빈 박춘금 선우갑 선우순 송병준 신석린 염중모 윤갑병 윤시병 윤치호 이동우 이병열 이완용 이용구 이윤용 조중응 조진태 한상용. ◇조선총독부 군인. ▲김석원 김창용 박두영 어 담 이병무 정 훈 조동윤. ◇경 시. ▲강경희 강보형 강진풍 계광순 구연수 구자경 권오용 권중익 권태형 길홍경 김계현 김극일 김대원 김덕기 김동선 김명환 김상순 김상욱 김소직 김승련 김영배 김영수 김영찬 김우종 김윤복 김은제 김인영 김종원 김준권 김창영 김창림 김태석 나구하 노기주 노덕술 노인국 마현희 문진상 박근수 박인종 박장환박재수 박정노 박준호 박희정 변영화 서기순 서상용 소진은 손석도 안경선 안형식 엄주면 연태윤 오석유 오세윤 윤병희 윤종화 이계한 이성근 이원보 이재붕 이종국 이종식 이창우 이헌규 임호영 임흥재 장강선 장기창 장우근 장우식 장헌근 전봉덕 전영찬 전창림 정기창 정충원 조성구 조연광 조종춘 조종훈 조창현 주익상 채규병 최 연 최 탁 최경진 최기남 최석현 최지환 최창홍 최태현 표한용 한동석 한석명 한정석 한종건 허 섭 현기언 황신태 황태근. ◇군수산업 관련자. ▲고원훈(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 중심인물) ▲고한숭(송도항공기주식회사사장 개성경방부단장) ▲김계수(비행기헌납,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문명기(비행기헌납)▲박두영(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고문) ▲박흥식(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설립) ▲방의석(애국기 2대 헌납) ▲배영춘(비행기 1대 헌납) ▲백낙승(비행기 1대 헌납) ▲신용옥 (비행기 헌납) ▲이영개(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 ▲최주성(비행기 1대 헌납). ◇조선총독부 판사. ▲김준평 노상구 문택규 백윤화 양원용오승근 오완수 원종억 윤성보 이명섭 이상기 이우익 이충영 장기상 조진만 한상범. ◇고등형사 ▲김병태 김석기 김영기 배만수 심량체 오세윤 이대우 이종하 장인환 홍사묵. ◇기 타. ▲고일청 김기진 김길창 김동환 김문집 김연수 김용제 김태흡 김희선 박석윤 박영희 박춘금 박흥식 박희도 방의석 배정자 서 춘 서범석 서병조 서정주 손영목 신용옥 신태악 신흥우 양주삼 원덕상 유진순 윤치호 이각종 이광수 이산연 이석규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영근 이영찬 이인직 이종욱 이종린 이진호 이회광 이희적 임창수 임흥순 장석원 장우식 장인원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부일 전필순 정교원 정국은 정인과 정인익 정춘수 조병상 주요한 진학문 차남진 차재정 최 린 최남선 최승렬 최재서 최정묵 최준집 한상룡 허영호 현영섭 현준호 홍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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