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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군, 골동품시장 ‘큰손’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무기 대신 골동품을 사들이는 까닭은? 세계 골동품시장에서 중국군이 ‘큰 손’으로 등장했다. 해외에 유출돼 있는 중국 골동품 등 문화재들을 중국군 직속 국영기업인 바오리(保利)그룹이 전면에 나서 해마다 수억달러씩 쏟아부으며 되찾아오고 있어서다. 바오리 그룹은 현역 장성들로 경영진이 구성돼 있고 중국군의 무기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다. 14일자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IHT)은 블룸버그통신을 인용, 이같이 전하면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세계 주요 경매시장에 나오는 고가 중국 골동품의 싹쓸이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지난 5월 홍콩서 열린 크리스티의 중국 골동품 경매장에선 바오리 그룹의 구매에 힘입어 9000만달러 어치가 팔렸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바오리 그룹이 청동 항아리 단 한개에 800만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해외 경매시장서 중국 골동품의 거래액은 연간 10억달러 수준. 바오리 그룹을 앞세운 중국군은 해마다 수억달러씩을 퍼부으며 ‘문화재 탈환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또 에스티 로더그룹의 로란드 로더, 투자자문회사 모건스탠리의 고문 잭 워스워드, 알포로 자문의 창업주 리언 블랙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중국 골동품 소장가들과 개별적으로 접촉, 건당 수백만달러씩을 제시하며 문화재 되찾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군당국이 직접 해외경매시장에 뛰어들어 문화재 탈환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반식민지 상태에서 총칼로 빼앗긴 문화재를 공산당의 군대가 되찾아온다는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인민해방군이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군에 대한 신뢰와 위상을 높이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셈이다. 바오리 그룹은 중국군의 무기 수출입뿐 아니라 건설업, 호텔경영 등도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는 총참모부 산하 직속 사업체로 덩샤오핑 사위인 허핑 장군 등 권력 실세들이 관여해 온 중국군의 자금 줄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中 군사훈련 실전능력 강화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군부가 실전능력에 초점을 맞춰 군사훈련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14일 보도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최근 확정한 신년 군사훈련 계획을 통해 전군의 일체화, 정규화, 실전화에 역점을 둔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타이완의 독립 추진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동시에 유사시 무력사용도 불사한다는 의지를 구체화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총참모부 관계자는 2005년 군사훈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전화 훈련이라고 소개하고 전군이 실전과 유사한 조건 아래에서 지휘와 협동, 방어의 종합적인 실전 능력을 점검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은 또 합동 군사작전 수행 능력을 키우는 일체화 훈련에도 중점을 둬 전군이 총참모부의 통일된 지휘에 따라 연합훈련과 합동훈련을 전개할 방침이다. oilmanseoul.co.kr
  • 中 중앙군사위 11명으로 늘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은 오는 가을 개최되는 당 제16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16期 4中全會)에서 군 통수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정원을 8명에서 11명으로 확대하는 등 조직개편과 함께 군사 개혁을 단행한다고 베이징(北京)의 군사 소식통들이 21일 밝혔다. 중앙군사위는 해군 사령원(사령관) 장딩파(張定發) 중장, 공군 사령원 차오칭천(喬淸晨) 상장, 제2포병(미사일) 사령원 징즈위안(靖志遠) 중장 등 3명을 11인 중앙군사위 위원에 내정, 16기 4중전회와 내년 3월 열리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3차 회의에서 각각 당과 국가 중앙군사위 위원 선출과 임명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육군 중심이었던 중앙군사위가 정원을 확대하고 처음으로 해·공군과 제2포병 사령관을 위원으로 영입하는 것은 타이완과의 양안 전쟁 등에 대비,조직을 현대화하고 이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고 있다. 중앙군사위는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겸 국가 주석,차오강촨(曺剛川) 국방부장,궈보슝(郭伯雄) 등 부주석 3명,그리고 쉬차이허우(徐才厚)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량광례(梁光烈) 총참모장,랴오시룽(廖錫龍) 총후근부 부장 등 위원 4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에 앞서 중앙군사위원회는 20일 인민해방군 부(副) 총참모장인 거전펑(葛振峰), 장리(張黎) 장군을 비롯해 15명의 장성과 무경관(武警官)을 한국의 대장에 해당하는 상장(上將·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이번에 상장에 진급된 장성과 무경관은 거전펑,장리 부총참모장,여우시구이(由喜貴) 총참모부 경위국(경찰국) 국장 겸 중앙경위단장,장원타이(張文臺) 총후근부 정치위원,후옌린(胡彦林) 해군 정치위원,정선샤(鄭申俠) 군사과학원장,자오커밍(趙可銘) 국방대학 정치위원,주치(朱啓) 베이징(北京)군구 사령원(사령관),리첸위안(李乾元) 란저우(蘭州)군구 사령원,류둥둥(劉冬冬) 지난(濟南)군구 사령원,레이밍추(雷鳴球) 난징(南京)군구 정치위원,류전우(劉鎭武) 광저우(廣州)군구 사령원 등 15명이다. oilman@seoul.co.kr˝
  • 국제 플러스 / 中인민해방군 20만 감군 착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인민해방군이 정예화와 정보화를 목표로 20만 감군에 착수했다고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3일 보도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이미 일부 부대의 간소화 개편 작업에 들어갔고 간소화되는 부대의 사병과 장교들의 제대를 위한 규정을 만들었다. 오는 2005년 이전 완료를 목표로 한 이번 제3차 감군 계획에 따르면,간소화 개편되는 부대의 경우 의무 복무 연한을 채우치 못한 장병들도 전문 기술인력을 제외하고는 이번 겨울부터 모두 퇴역 대상이 된다.
  • 中 반쪽짜리 ‘후진타오 시대’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지난 15일 중국 공산당의 대권을 거머쥔 후진타오(胡錦濤·60) 당 총서기는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과거 2인자 시대의 ‘몸낮추기’ 행보가 계속되고 있는 분위기다. 반면 16대 전대에서 당 군사위 주석을 고수한 장쩌민(江澤民·76) 국가주석은 인민일보와 CCTV 등 관영매체에서 여전히 1면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아직 ‘후진타오 시대’가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중국 지도부의 메시지인 것이다. ◆최고지도자는 장쩌민 주석 이번 전대를 통해 공산당 당헌(黨章)은 “장쩌민 동지를 주요대표로 하는공산당원들이 3개 대표라는 주요 사상을 형성했다.”고 명기,장 주석을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권력이양 이후에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이 중국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최근 군수뇌부 인사에서도 장 주석의 측근인 차오강촨(曹剛川)·궈보슝(郭伯雄) 상장(上將)이 각각 당 정치국 위원과 당 군사위 부주석에 올랐다.군의 4대 핵심인총참모부·총정치부·총후근부·총장비부 수장도 장 주석 사람들로 채워졌다. ◆후진타오의 충성 맹세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후진타오 총서기는 16대 전대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비공개로 행한 수락연설에서 장 주석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그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장 주석의 지도를 구할 것이고 그의 의견을 경청할 것”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뉴욕 타임스는 최근 “장 주석이 당의현자(賢子)로서 누리는 특별한 지위에 있다.”고 전했다. 중국 소식통들은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을 이양받은 이후에야 언론에 자주 얼굴을 비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 외교무대 데뷔 후진타오 총서기는 다음달 1∼3일 중국을 방문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외교 무대에 화려한 데뷔식을 가질 예정이다.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는 중화(中華)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각인시킬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장쩌민 주석은 지난달 중순 사석에서 “(은퇴 후) 외교분야에서 자문역할을 맡고 싶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장 주석이 원로자문회의인 국가안전회의를 구상하고 있다는 설도 그럴듯하게 나돈다. 당분간 장 주석이 외교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후진타오 총서기가 일선에서 실행하는 역할 분담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여전한 태자당의 위세 최근 5개성 당서기 인사에서 태자당(太子黨) 출신이 3명이나 나왔다.저장(浙江)성은 시진핑(習近平·49),하이난(海南)성은 왕치산(王岐山·54),허베이(河北)성은 바이커밍(白克明·59) 등이 각각 임명됐다.장 주석의 심복이자태자당의 영수로 불리는 쩡칭훙(曾慶紅) 정치국 상무위원이 이번 인사에 어느 정도 관여됐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후진타오 총서기에 대한 ‘견제 포석’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평민방(平民幇) 출신의 후진타오 총서기가 태자당의 포위망을 뚫고 어떻게권력을 장악해 나갈지 주목된다. oilman@
  • 中해방군 4개총부 지도부 전원 교체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 인민해방군 지휘부인 총참모부와 총정치부,총후근부,총장비부 등 4개 총부 지도부가 모두 교체된다. 중국 군사위원회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20일 푸취앤여우(傅全有) 총참모장 후임으로 량광례(梁光列) 난징(南京)군구 사령관이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또 제3세대 지도부로 총정치부 주임을 맡아온 위융보(于永波)는 쉬차이허우(徐才厚) 총정치부 상무 부주임으로 교체된다. 왕커(王克) 총후근부장과 차오강촨(曹剛川) 총장비부장 후임에는 랴오시룽(廖錫龍) 청두(成都)군구 사령관과 리지나이(李繼耐) 총장비부 정치위원이 임명됐다. 중국 최고 지도부가 대만 독립 반대론자인 량광례를 신임 총참모장으로 임명한 것은 대만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oilman@kldaily.com
  • 젊어진 중국/ 장쩌민 군사위주석직 유지 의미 - 덩샤오핑식 수렴청정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중국 정권의 핵심 포스트인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유지한 채 당 총서기직만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양함으로써 수렴청정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지난 1989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장 주석에게 총서기직을 이양하면서도 군사위 주석 자리만은 내놓지 않았다.‘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경구대로 세계 최대의 250만 대군을 통솔하는 군사위 주석직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틀어쥘 수 있는 포스트였기 때문에 쉬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차 전대(全大)를 앞두고 장 주석이 군사위 주석마저 내놓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자 군부는 일순 동요했다. 지난 5일 홍콩의 명보(明報)는 “5년동안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군의 현대화를 완수하고 타이완 통일의 기초를 닦기 위해 장 주석이 계속 군사위 주석직을 맡아야 한다는 게 군부의 뜻”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군부의 뜻이 이번에 관철된 셈이다. 후 총서기는 군부의 배경이 전혀 없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장 주석은 그에게 99년부터 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맡겨 군부내 인맥을 쌓도록 배려해 왔지만 아무래도 못 미더운 게 사실이었다. 장 주석은 후 총서기의 군사위 부주석직을 유임시켜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덩샤오핑식 집권 교육’을 시키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이에 따라 후 총서기는 장 주석의 손아귀에 장악된 군부를 상대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져야 하는 껄끄러운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군부의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이뤄진 점이 그나마 후 총서기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장완녠(張萬年·74) 군사위 부주석,츠하오톈(遲浩田·73) 군사위 부주석 겸 국방부장,푸취앤요우 총참모부장,우융보 총정치부주임,왕커 총후근부장 등 70대 원로들이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에서 완전 제외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퇴진은 한반도 외교에 실리주의 쪽으로 무게가 실릴 가능성을 높여준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대신 중앙위원에 오른 차오깡촨(67·曺剛川) 총장비부장,궈보슝(60·郭伯雄) 상무 부참모부장,쉬차이허우(60)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슝광카이(62) 부참모부장 등은 장 주석이 상장(대장)으로 승진시켜놓은 인물들이어서 후 총서기로선 장 주석의 손을 빌려야 할 상황이다. 따라서 후 총서기는 당·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장 주석 인맥의 틈바구니에서 균형과 조화를 꾀하며 군부를 자신의 고유한 색깔로 보듬어야 하는 이중의 난제에 맞닥뜨려 있다. 임병선기자 bsnim@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7)불꽃튀는 러,日 첩보전

    러시아 문서보관소 서고속에 묻혀있다 100년만에 햇빛을본 제정 러시아시대의 비밀문서중에는 군사첩보와 관련된전문이나 보고서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만주에서의 주도권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은 외교라인과 군부를 총동원,첩보전을 전개한 것이다.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연해주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는 이점이 있었다.러시아의 대일(對日) 첩보전은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첨예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이후 일본군의 동향 관찰과 대한제국군의 개편 상황을 감지하기 위한 상주 군사첩보원의 필요성이 긴박해지고 있다.이 비밀첩보 임무로 제2시베리아 보병사단 포병여단의 비류코프 대위를 일본주재 군사무관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보내기로 되어 있다.비류코프는 10년간 대한제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1906년 2월13일 러시아군 총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보낸 공문) 비류코프가 군사무관 사모일오프의 부관으로 부임하게 되면 일본이 바로 의심하게 되어 첩보활동이 어렵게 될 것이다.(1906년 7월14일 도쿄주재 바흐메티예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두 건의 비밀문서에 등장하는 비류코프는 대표적인 군사첩보원이었다.1907년 그가 서울로 오자 당시 서울주재 총영사였던 플란손은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서울에서러시아학교교사로 일하던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에 소집돼 근무했으며 포츠머스 평화회담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돼 정들었던 서울에 다시 와 교사직을 알아보려고 왔다.”고 소개했다.이토는 비류코프에게 동정적으로 대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류코프는 서울의 러시아학교 교사 신분으로 국내에서 10년동안 암약하면서 알게된 한인학생 10여명을 러시아의하사관학교 등에 국비유학생으로 입교시켰고 전쟁이 나자소집해 예하의 비밀첩보원으로 활용했다.이후 1911년까지4년동안 원산주재 영사로 근무하면서 첩보수집활동을 했다.그는 1904년 1월 “한국어를 말하고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은 전쟁이 나면 러시아군을 감시할 것이며 또 통역이나 안내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할 수 있다.일본인은 용모 등이 한인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그러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한인은 성큼성큼 걷는 반면 일본인은 촘촘히 걷는다.”는 첩보를 공사관에 올릴 정도로 한국과 한국인에 정통했다.또 러시아군이 만주와남우수리지방에서 대한제국으로 진격할 수 있는 3개의 길과 그에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생도 출신들의 첩보활동에 대해 “생도들은 고종황제와 조국을 위해 열심히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한군과 강군은 나와 함께 활동하고 있고 이군은 북청에서,현군은 노보키예프스크,구군은 경성(鏡城)에서 각각 정찰임무를 맡고 있다.”고 1904년 10월19일 보고했다. 서울 불어학교교사로 고종의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러시아 극동총독부에 알렸던 프랑스인 마르텔과 프랑스 신문‘저널’지의 도쿄특파원 발레,블라디보스토크주재 프랑스상무관 플라르 등 프랑스인들이 러시아의 비밀첩보원으로활약했던 사실도 흥미롭다. 발레가 페테르부르크에 왔다.그는 전쟁중의 일본의 정세에 관해 흥미있는 정보를 러시아에 전해 주었으며 이제 외무부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1905년 5월22일외무부에서 육군장관에게).발레의 정보제공 제의는 수락되었다.정보비로 그에게 매월 600루블이 책정되었다.(1905년 6월15일 육군장관이 외무장관에게). 러시아는 일본과의 첩보전에서 대단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첩보의 통로인 우편 및 전신시설과 전달수단인 철도등 교통시설을 일본이 선점,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 니콜라이2세가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서울주재 파블로프 대리공사의 보고서가 늦게 상신되는 이유가무엇이냐.”고 묻자 람즈도르프는 “파블로프의 보고는 비밀스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일반 우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믿을 만한 기회(인편)나 아니면 가끔 대한제국 항구에입항하는 러시아 선박을 통해 발송해 오기 때문”이라고해명하기도 했다.다음 문건은 러시아측의 애로사항을 잘보여준다. 고종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궁정(덕수궁)화재로소실됐다.혹시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1904년 5월16일 서울주재 파블로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서울에서 파블로프 공사가 보낸 전문을 받았지만 내용이훼손돼 읽을 수가 없다.일본전신국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비밀전문을 파손시켜 배달하고 있으며 이는 우연한 왜곡이라고 볼 수 없다.일본은 통신문을 제때에 배달도 하지않는다.모든 우편,전신국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일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제국과의 교신도 불가능하다.배달과정에서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손상시켜 놓은 몇통의 전보문을 첨부한다(1903년 12월7일 일본 나가사키 주재 가가린영사가 도쿄주재 공사에게 보낸 보고문) 대한제국의 우편시설을 장악한 일본이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에서 보내는 외교행낭을 손상시키거나 배달을 지연시키는 일이 잦아지자 러시아는 임시방편으로 제물포에서 상하이노선을 운항중인 동청철도(東靑鐵道) 소속 여객선을 이용해 외교문서를 발송하고 수신하기도 했다.2주에 1회 왕복운항하는 이 여객선도 비밀문서 수발에는 지장이 많았다.두만강 인접 도시 노보키옙스크지역과 한국간의 전신선을 육상으로 연결하려고 계획했으나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실패했다.러·일전쟁 이후 한-러간의 통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저선을 통했다.러·일전쟁의승패는 통신을 장악한 일본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앞으로 러·일간에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대한제국에서 러·일은 사활을 건 혈전을 벌일 것이며 영국이 가담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대한제국이 전쟁터가 될 경우 러시아의 남우수리지방은 후방작전 기지가 될 것이다.일본의 병력을 고려할 때 러시아는 10만명이상의 병력과 2만명분 이상의 식량을 확보,비축해야 한다.연해주,아무르주,자바이칼주에는 1년간 공급할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일본군의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1899년 3월9일 알프탄 대령이 ‘러·일충돌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 이 보고서는 4년후 러·일전쟁 발발을 이미 예측하는 등러시아측 정보의 정확성과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이후 육군장관에 오르는 사하로프 중장이 1902년에 작성한 보고서도 일본 수비대의 주둔지와 규모,철도 및 전신성 공사 현황,저탄장,거주자들의 취득부동산 등 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보고하고 있다. 무기도입 및 밀수와 관련된 첩보도 자주 등장한다.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유해 만주로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고물 함정을 거액에 대한제국에 팔았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은 사용하지 않는 구형 총기를 만주로 수출하고 있다.어느 지방을 통해 어디로 보내고 있는지 추적하라.청국에무기를 공급해 주는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이 청국의 여러 성(省)에 18만정의 구식 소총을 매입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1902년 3월29일 하바로프스크의 그로드스키 장군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비밀전문) 주한공사관 쉬테인 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미쓰비시사는 8문의 함포가 장착되고 200명의 해군을 태울 수 있는 순양함을 대한제국 정부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1903년 2월3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도쿄주재 이즈볼스키 공사에게 보낸 전문). 순양함은 오는 4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때 축포를 발사할 목적으로 석탄선을 개조해 함포만 탑재시킨 것으로 외형만 해군함정으로 보일 뿐이라고 한다.일본의 고무라(小村) 외무상은 고종황제의 순양함 도입계획이 일본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같은해 2월9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전문) 모스크바와 서울,도쿄를 오간 이들 비밀전문을 보면 순양함을 도입하려던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국제무기거래 사기극에 속은 것을 알 수 있다.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 순양함의 가격은 55만엔이었고 3년 분할상환 조건이었다.대구경 대포 4문과 소구경 대포 4문이 장착되고 장교 25명과해군 200명이 승선하게 돼 있었다. 일본의 첩보망도 만만찮았다.1903년 제물포 부영사 팔야오프스키의 서북지역 출장보고서에는 “평양에는 일본의첩보기관이 있다.일본인들은 시내의 모든 약국을 운영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고 있다.이곳에는 약 3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지방행정권은 일본영사의 수중에 있다.”고 보고하는 등 일본첩보조직의 촉수가 대한제국의 정부는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뻗어있음을 알리고 있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에는 비밀첩보과가 있다.그 과에는일본인,청국인,그리고 한인이 암약할 것이다.통감부와 헌병사령부 소속의 밀정만도 약 760명에 이른다.이들의 주요 임무는 의병을 추적하는 것이다.밀정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대부분 기생이다.벌써 많은 의병을 경찰에 밀고하였다.(1909년 10월23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보고서) 새로 발굴된 문서에는 이밖에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일본비밀첩보원으로 활동한 한인 명단(1898년),대한제국내 비밀첩보망 구축안(1905년),흑룡강지방의 조선인 첩보원 명단(1912년) 등도 들어있다. 대한제국을 독식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스파이전쟁에 이용당하거나 희생된 한국사람들의 이름이다. 노주석기자 joo@ ■러 문서에 나타난 대한매일 보도 인용 전 서울 불어학교 교사 마르텔을 비밀첩보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했다.그는 일어에도 능통하다.그에게 첩보임무와개인암호를 주었다.그에게 The Korea Daily News(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제호)를 늘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1904년12월4일 중국 상하이에서 파블로프 서울주재 대리공사가그루세스키장군에게 보낸 보고서)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러시아는 이후 2∼3년동안은 그동안 심어놓았던 첩보망과 청,일주재 외교라인 등을 통해 극동정세를 그럭저럭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하지만 한일합병시기를 전후해서는 ‘정보부족증’에 걸렸다.그래서인지 1908년 이후에는 국내 언론과 일본 신문 기사를 발췌해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00년 00일부터 00년 00일까지의 일지’‘대한제국내 폭동에 대한 신문스크랩’ 등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수백건의 정보보고가 그것이다.이중 80% 이상 인용된 신문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1904년 발간)였다. 서울주재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만주로 건너가 극동지역첩보수집총책임자로 일한 파블로프가 프랑스인 비밀첩보원 마르텔에게 “대한매일신보를 잘 살피라.”고 지시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26일 하얼빈역에서 5명의 한인이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이토는 곧 절명했다.전 고종황제는 식사중에 이 소식을 듣고 수저를 상에 떨어뜨렸다.(1909년 10월28일자).안응칠(안중근의사의 아호)은 항일운동을 하며 이강,유동설 그리고안창호와 비밀연락을 했다.(1909년 10월30일자).오늘 관보에 지난 9월4일 청·일이 간도에 대해 체결한 조약문이 발표됐다.(1909년 11월9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러시아와 중국,그리고 일본인의 간담을서늘하게 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을 “고종이 수저를 떨어뜨렸다.”는 촌철살인의 한 문장으로 전달하고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 간도를 청국에 통째로 넘긴일본의 외교술책도 간도협약 체결 기사를 통해 짚어내고있다.무엇보다 대한매일신보의 의병활동 보도는 러시아문서가 인용하고 있는 국내외 신문의 보도를 내용이나 횟수,정확도 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경기도에 군사훈련을 받은 2000명이상의 의병이 집결해 있다.(1908년 2월19일자).대한제국에는 모두 5만명의 의병이 있다고 한다.결정적인 의병소탕을 위해 일본군이 또다시상륙한다고 한다.(1909년 7월29일자).이토가 사살된 이후러시아로 한인이주가 급증하고 있다.(1909년 11월27일). 대한매일신보 1911년 2월15일자와 2월21일자에는 의병장강기동(姜基東)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기사 2건이 실려있다. 지난 2월12일 원산의 한 일본식당에서 의병대장 강기동이체포됐다.(1911년2월15일자)그는 4년동안 경기도에서 의병 200명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강기동은 여객선편으로 서울로 이송된 이후 지금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체포당시 주머니에는 일본돈 2엔 밖에 없었으며 손과 발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1911년2월21일자) 노주석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김정일 軍 앞세워 黨·政 완전장악

    임동원(林東源) 대통령 특사는 지난 3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을 방문,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한반도위기 예방과 남북관계의 원상 회복에 합의했다.임 특사 일행은 방북 초기 ‘주적론’에 대한 북측의 공방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모든 것을 타결지었다.전문가들은 “이러한 과정은 예견됐던 것으로 김위원장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는 북한 특유의 권력구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김 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북한의 권력구조를 알아본다. ■북한의 권력구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를 겸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국가를 대표하지만,실질적으로는 김 위원장이 국방위원회와 노동당을 장악,‘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다. 국방위원회는 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독립,최고 권력의 군 통수기구로 자리잡았다.이어 98년개헌을 통해 ‘국가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국방관리기관’으로 격상됐다.국방분야의 주권뿐 아니라‘행정권’도 갖는 북한 최고의 권력기구가 된 것이다. 국방위원회는 인민무력부 총참모부를 직접 통제하며,군령·군정권을 동시에 행사한다.‘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다는 국가안전보위부도 휘하에 두고 있다.김 위원장은 필요시 총참모부 작전국장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 단독지휘축선도 갖고 있다. 92년 본격 출범때는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위원장을 맡았으며,김정일이 제1부위원장,오진우(吳振宇)·최광(崔光)이 부위원장,전병호(全秉鎬)·김철만(金鐵萬)·이하일(李河一)·이을설(李乙雪)·김광진(金光鎭)·김봉률(金奉律)이 위원이었다. 김정일은 92년 4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뒤 이듬해 국방위원장직을 맡으며,‘원수’ 칭호와 함께 군 통수권을 공식 승계했다. 인민군 총참모장인 최광이 제1부위원장이 됐다.김 주석의 항일유격 활동을 국가의 ‘정신적 뿌리’로 삼고 있는 북한에서 군을 장악한다는 것은 최고 통수권자가 됐음을 의미한다. 김 위원장은 98년부터는 ‘선군(先軍)정치’란 구호와 함께 군을 최전방위에 내세우며 북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국방위 위원 대부분의 권력 서열이 당 비서들보다 앞서며 주요 당·정 직책을 겸하고 있다.선군정치는 미국의압박 등 ‘외세’에 맞서는 국가 차원의 대응책이다.아울러 당·정·군에 대한 직할 통치를 가능케 함으로써 안정적인 유일지배 체제를 보장하는 토대이기도 하다.김 위원장은 또 사찰기관인 보위부를 최대한 활용,경제·식량난으로 심화된 사회일탈 현상을 제어하는 기반도 구축했다. 김 위원장은 앞서 97년 10월 당 총비서에 취임했다.북한은 각 도당(道黨)과 시당(市黨) 등의 결의와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공동 결정을 통해 김 위원장을총비서에 추대했다.이는 김 주석 사망 뒤 ‘3년상(喪)’이 끝난 시점에 김 위원장이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 권좌에 올랐음을 뜻한다. 특히 북한의 행정기관은 당이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에 불과하다.이 때문에 당 관료가 행정관료를 겸직하기도 하고,또 당에는 행정기관 및 부서에 상응하는 조직이갖춰져 있다.따라서 당 총비서에 올랐다는 것은 곧 행정부인 내각까지도 통제하게 됐음을 뜻한다. 김 위원장은 98년 국방위원장에 취임하면서도 ‘주석직’을 폐지했다.그러나 실제로는 김 주석을 ‘선대수령’으로 지칭함으로써 자신은 ‘후대수령’으로 군림하고 있다.특히 95년 ‘붉은기 사상’,98년에는 ‘강성대국론’ 등을새로운 사회건설의 이념적 좌표로 제시하면서 경제·식량난으로 무너진 사회를 복구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전영우기자 anselmus@ ■김정일의 사람들…측근 '권력 엘리트' 곳곳 포진. 북한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를 보좌하는 수많은 권력엘리트들이 있다.이들은 당·정과 군부,친인척 및 당 외곽인물로 나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힘은 군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만큼군이 권력의 핵심축이다.군부에서는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 제1부위원장,김일철 인민무력부장,김영춘 인민군 총참모장,이을설 국방위원 겸 호위사령관,현철해 인민군총정치국 부총국장,이용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박기서 평양방위사령관,원응희 보위사령관,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명수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측근으로 들 수 있다. 특히 이을설 호위사령관은 1921년생으로 김일성 주석의 전령병으로 만주에서 항일유격 활동을 벌였다.김 위원장의 ‘방패막이’이던 오진우·최광 인민무력부장이 각각 95년과 97년 사망한 뒤 김 위원장의 병풍 역할을 하고 있다.최측근인 조명록 총정치국장은 2000년 10월 특사로 미국을 방문,빌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과 만나 ‘공동코뮈니케’에 서명하기도 했다. 당에서는 전병호 군수담당 비서,한성룡 경제담당 비서,계응태 공안담당 비서,김국태 간부담당 비서,김기남 교육담당 비서,김용순 대남담당 비서 등이 김 위원장을 떠받치고 있다. 자강도 책임비서인 연형묵도 핵심 측근이다. 최고인민회의에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양형섭·김영대 상임위 부위원장,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국제담당 비서,여원구 부의장,박성철 상임위 명예부위원장 등이 포진해 있다. 양형섭은 김일성 주석의 종매부(고종사촌 동생의 남편)이며,여원구 부의장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이다.박성철 명예 부위원장은 1913년생으로 항일유격대출신의 원로다. 내각에는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들이 주류다.홍성남 총리를 중심으로 백남순 외무상,백학림 인민보안상,이광근 무역상 등이 관료사회를 이끌고 있다.최근 대외관계의 중요도에따라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실세로 자리매김중이며,김계관 부상도 북·미 대화에 나설 실력자로 꼽힌다. 이밖에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여동생 김경희의 남편)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도 주요 인물이다.김 위원장이 속내를 털어놓는 몇 안되는 인물로 당의 핵심인 조직지도부를 관리하고 있다.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인 송호경 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 등도 김 위원장의 사람들이다. 전영우기자 anselmus@ ■김정일 체제 성립되기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98년 명실상부하게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지만 그의 권력 승계작업은 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됐다. 1942년 2월16일 하바로프스크 인근 소련 극동군 제88특별여단 브야츠크 야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맏아들로 태어난 김 위원장은 남산인민학교,만경대혁명학원,평양제1중,남산급중,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뒤 64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정치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했다. 67년 당 선전선동부 과장,69년 선전선동부 부부장,71년문화예술부장,73년 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등을 거쳐 74년 2월 당 중앙위 정치위원으로 선출됐다.당 중앙위는 또 ‘경애하는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위대한 수령님의 후계자로 추대하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채택,권력승계의 발판을 마련했다.이때부터 김 위원장은 ‘당중앙’이란 신비스런 이름으로 불렸다. 김 위원장은 아울러 73년부터 ‘3대혁명소조운동’을 이끌며 요소 요소에 자기 사람을 심어왔다.3대혁명소조란 ‘사상·기술·문화의 3대 혁명을 힘있게 밀고 나가기 위한당 핵심과 청년인텔리’를 뜻한다.다시 말해 김정일 권력승계의 기반 구축에 앞장서는 행동대원들이었다. 김정일은 75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호칭을 받았으며,80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비서국 비서,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88년에는김일성 주석의 전유물이던 ‘현지지도’라는 용어가 김 위원장에게도 사용됐다. 92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인민무력부장이던 오진우에게 원수 계급장을 달아주는 등 군장성 664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며 군 최고 책임자에 올랐음을 내외에 알렸다.
  • “中 2년내 병력 50만 감축”

    세계 최대의 병력을 보유한 중국이 2년내 현병력의 20%인50만명을 감축하고 절감 비용을 하이테크 장비 도입에 충당할 방침인 것으로 밝혀졌다. 홍콩 영자지 아이메일(iMail)은 16일 대만 ET 투데이 TV보도를 인용,인민해방군 총참모부가 지난 5월 비공개회의에서 2003년 6월말까지 50만명을 ‘일시 해고’ 형식으로 전역시키기로 확정했다고 보도했다.이 TV는 대만의 군사정보소식통 말을 빌려 이같이 전하고 인민해방군 당국이 지난달부터 장병들을 대상으로 전역을 장려하는 등 이미 감축안이 마련됐으나 장병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비밀리에 진행해왔다고 전했다. 홍콩 연합
  • 北, 장성급 승진인사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지난 4일 대장급 1명을 포함한군 장성 44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8일 알려졌다. 김위원장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00133호’를 통해 총참모부 작전국장인 리명수 상장(남한의 중장)을 대장으로,북한군 판문점대표부 대표인 리찬복 중장(〃 소장)과 김금선 중장을 상장으로,김승범 등 6명의 장성을 소장(〃 준장)에서 중장으로,한승로 등 35명을 좌관(영관)급에서 소장으로 각각 승진시켰다고 조선중앙방송이 8일 보도했다. 이번에 승진한 장성은 다음과 같다. ▲대장=리명수 ▲상장=김금선 리찬복 ▲중장=김승범 김을룡 김춘삼김연주 박병욱 노경준 ▲소장=한승로 리태봉 김성학 조상률 한봉수리성룡 전창길 박명훈 김창덕 박용철 김진철 동대산 박수만 림도엽한복만 리철후 김경찬 라용길 리문철 김동준 리원정 김익룡 장창호최상진 손광섭 천무룡 백만화 김홍국 오형선 강덕삼 최윤순 윤종문김현섭 박해국 김교철연합
  • 김일철부장 일행 청와대行 “화해 분위기 확인”

    남북 국방장관회담 북측 대표인 김일철(金鎰喆)인민무력부장 일행이26일 오후 청와대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예방했다. 김 부장은 그동안 청와대를 방문한 북한군 수뇌부 가운데 최고위급 인사다.박준영(朴晙瑩)대변인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평가했다. 청와대 예방에는 김 부장을 비롯해 박승원 총참모부 부총참모장,김현준 인민무력부 보좌관,로승일 인민무력부 부국장,유영철 판문점대표부 부장 등 회담 대표 5명이 참석했다.우리측에서도 회담 대표인조성태 국방장관과 김희상 차석 대표,김국헌 국방부 군비통제관,이인영 합참과장 등이 배석했다. 김 대통령은 남북 양측이 국방장관회담 정례화와 경의선 철도·도로복원을 위한 군사실무위원회 설치 등 긴장 완화를 위한 기초적인 조치들을 이룬 것을 치하하고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긴장 완화와 경제,교류협력 분야 등 3개 축에서 동시에 가동되기 시작한 것을 높이평가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군사 핫라인등 3개항 중점논의

    남북국방장관 회담과 제1차 남북경협 실무접촉이 25일과 26일 제주와 서울에서 열린다. 김일철(金鎰喆·64) 북한 인민무력부장 등 남북국방장관회담의 북측대표단일행은 24일 오후 3시 판문점을 통해 남측 땅을 처음 밟았다. 이들은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CN235 수송기편으로 회담장소인 제주에 도착했다.북측의 군사대표단이 판문점을 거쳐 한국에 입국한 것은분단 55년만에 처음이다.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경의선 복원과 관련해 비무장지대 공사를위한 남북한 군사실무단 구성 ▲평양 2차회담 등 국방장관회담 정례화 ▲군사 직통전화 개설 등에 합의할 전망이다. 북측 대표단은 김 부장을 수석대표로 박승원(총참모부 부총참모장)중장,김현준(인민무력부 보좌관) 소장,로승일(인민부력부 부국장) 대좌,유영철(판문점대표부 부장) 대좌 등 대표 5명과 수행원 5명,지원요원 3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됐다. 남측 대표단은 조 장관과 김희상(金喜相·육군중장) 국방장관 특별보좌관,김국헌(金國憲·육군준장) 국방부 군비통제관,송민순(宋旻淳)외교통상부 북미국장,이인영(李仁永·육군대령) 합참작전계획과장 등5명이다. 남북 경제협력의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한 제1차 남북경협 실무접촉은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 사무국에서 열린다.북측 대표단은 이날 중국 베이징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남북 양측은 이번 접촉에서투자보장,이중과세방지,분쟁 해결절차,청산결제 등 4개 합의서 체결문제를 협의하게 된다. 노주석 김성수 김상연 전영우기자 joo@
  • 남북 국방·경협 오늘부터 회담/군차원 긴장완화 첫 조율

    *국방장관회담 성사되기까지.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우여곡절끝에 성사됐다.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전 과정을 북측의 친서가 전달된 13일부터 날짜별로 재구성한다. ■9월13일 오후 1시쯤 판문점에서 북한군 관계자가 군사정전위 안광찬(연합사 부참모장·소장) 수석대표를 찾았다.북한군이 군정위 수석대표를 찾은 것은 지난 94년 판문점에서 대표단을 철수시킨 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때마침 미국 출장중이던 안 장군을 대신해 정철호(공군 준장)차석대표가 전달받은 이 문서에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명의로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서한에는 홍콩이나 베이징 등 제3국에서 회담을 갖되 편리한 안을 제시해 달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국방부는 지난 11일 송이를 전달하기 위해 김용순 비서와 함께 서울에 온 박재경(총정치국 선전담당)대장에게 조성태 국방장관이 장관회담 개최를 독려한 것이 약효를 본 것으로 분석했다. ■9월14일 “제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오는 25일과 26일 이틀간 홍콩에서 갖자”고 제의한 조 장관 명의의 친서가 북측에 같은 방식으로 전해졌다.판문점을 통한 양국 군사당국자 간의 채널이 복원되는순간이었다. ■9월17일 하오 3시쯤 국방부 김종환(육군 중장) 정책보좌관은 기자회견을 자청,“북한측이 오전 10시쯤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오는 25일과 26일 홍콩이 아닌 제주도에서 갖자고 제의해 왔으며,우리도 이에동의키로 했다”고 밝혔다.북측이 회담장소를 제주도로 바꾼 것은 제3국 개최에 따른 준비 부족과 경비문제 외에도 회담개최 장소에 연연치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24일 판문점 입국까지 양측은 판문점을 통한 4차례의 직접접촉과서신교환 등을 통해 대표단 명단을 교환하는 한편 회담의 의제와 일정,이동 경로,의전 및 경호문제 등을 협의했다.북측은 이 과정에서방한 이후 대표단의 모든 일정을 비공개로 하자고 우겨 자칫 회담이무산되는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노주석기자 joo@. *남북 수석대표 비교.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회담의 양측 수석대표인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과 김일철(金鎰喆·차수)인민무력부장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조 수석대표는 국군수뇌부의 인적 모태라 할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북측 김 수석대표 역시 북한 당·정·군 수뇌부를 배출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다.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조명록(趙明祿·차수)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김영춘(金英春·차수) 인민군 총참모장 등이 동문이다. 조 수석대표는 군사교리를 비롯,국방정책 개발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68년 동해함대사령부 참모장 시절 미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의 협상실무진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김 수석대표는 지난 80년 해군사령관에 임명됐으며,해군 작전 및 전술전문가로통한다. 군사외교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조 수석대표는 99년 8월 중국을 방문해 츠하오톈(遲浩田) 중국 국방부장과 회담을 가진데 이어 러시아,일본 등을 잇따라 방문,군사협력 및 친선확대의 물꼬를 텄다.김 수석대표도 소련 해군대학 유학경험을 바탕으로 중국,러시아와의 군사교류 확대에 기여했다. 한편 이번회담의 북측 대표단은 인민무력부, 인민군 총정치국 및 총참모부에서 골고루 선정됐다. 부단장인 박승원 중장은 김일철 수석대표와 함께 이번 국방장관 회담에서 북측의 전략과 의제를 짜내고 조율하는 등 실질적으로 북측대표단을 이끌 것으로 관측된다.두뇌회전이 빠르고 외교감각이 뛰어나 북한군내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인사로 평가받는다. 김현준 소장은 지난 11일 송이 전달차 서울에 온 박재경(朴在慶·대장)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수행했다. 노주석기자 joo@. *북한군 대표단 예상밖 판문점 통과. 김일철(金鎰喆·차수) 인민무력부장 등 북한군 대표단은 항공편을이용하리라던 예상과는 달리 24일 오후 판문점을 통해 남한땅을 밟았다. 북한이 그동안 존재 자체를 무시해온 군사정전위원회를 국방장관회담의 실무접촉 창구로 활용한데 이어 군대표단을 유엔군이 관할하는판문점을 거쳐 남한에 파견한 것과 관련,갖가지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군당국은 북측의 이같은 움직임이 판문점의 역할과 기능을 일부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북한은 지난 94년 5월24일외교부대변인성명을 통해 정전협정 관리기구인 ‘군정위’를 대신해 ‘조선 인민군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하고 닷새뒤인 5월29일에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폐쇄했다. 그후 북한은 남북한의 군사문제나 비무장지대(DMZ)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판문점대표부를 전면에 내세우고,유엔군사령부와의 연락·협의업무도 이를 통해 처리하는 등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안에 대해서만 판문점을 이용해왔다.따라서 북한군 대표단의 판문점 통과도 같은맥락에서 판문점 기능의 완전 복원보다는 경의선 복원 때까지 한시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이해된다. 이밖에 북한군 대표단의 판문점 통과는 군사적 긴장완화의 또다른제스처로 해석될 수 있다. 노주석기자
  • 영토분쟁 쟁점화로 ‘실리 챙기기’

    *北 ‘통항질서’ 속셈. 북한 인민군 해군사령부가 23일 서해상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한 것은대미·대남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영토분쟁을 쟁점화해 미국과 남측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고 현재 진행중인각종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수단,즉 협상카드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북미협상이 중요한 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서해의 안전을 담보로미국을 압박,북측의 명분을 강화하면서 실리도 거머쥐겠다는 계산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동안에도 핵 또는 미사일로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연출,이를외교적 협상자원으로 활용하며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외교적 실익을 챙겨왔다. 이같은 시각에서 북측의 발표도 입장과 명분을 강화하고 협상력을 높이기위한 포석이지 실제적인 행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북측은해당 지역이 남측에 의해 확보돼 있는 상황을 무시하고 물리력을 동원,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란 분석도 같은 맥락에서다. 북측이 이번 발표에서 해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우리측 섬들의 해로를이용할 수 있도록 설정한 것도 국제사회를 의식한 합리성 확보 노력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에선 이번 발표가 지난해 9월 북측의 북방한계선(NLL) 무효화 발표 이후 후속 조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대내적인 체제결속과 합리화를 위한 성격도 갖고 있다는 평가다.경제난과 체제붕괴 위기에 직면해있는 북한으로선 정권 차원에서 대남·대외관계의 성과를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또 지난해 6월 ‘서해해전’에서의 ‘참패’를 어떤 식으로든합리화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필요했다는 해석이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북측이 이 문제를 대남 관계정상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주목하고 있다.북측이 이번 발표와 관련,행동에 어느 정도의 강도와 무게를 부여할지 남북관계 진전의 새로운 풍향계란 해석이다. 이석우기자 swlee@. *정부 대응 어떻게. 군은 23일 북한 해군사령부가 ‘백령도·연평도 등 서해 5도 출입은 지정된 수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내용의‘5개섬 통항질서’를 선포한 데 대해 즉각 ‘절대 수용불가’ 입장을 천명했다.또 현행 북방한계선(NLL)을 그대로 사수하겠으며 북측이 이를 침범할 경우 도발로 간주,응징하겠다는 단호함도 보였다. 군의 이같은 입장은 이날 예정돼 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에서폭넓게 논의된 끝에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지난해 9월 북한군 총참모부가이른바 ‘조선 서해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하자 곧바로 합동참모본부 명의로 대응했듯이 이번에도 북측의 발표기관과 ‘격’을 맞춰 해군본부 대변인명의로 정부의 입장을 천명했다. 북측이 이날 방송을 통해 서해안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하자 국방부와합참은 곧바로 김종환(金鍾煥·육군 중장)정책보좌관과 정영진(丁永振·육군중장)합참작전본부장 주재로 각각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군의 대응태세를 점검했다.주한미군과의 긴밀한 협의절차도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군은 북한의 ‘엄포’가 꽃게잡이철과 4·13 총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 내부의 혼란을 조성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하고일단 맞대응은 하되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하면 북한의 전술에 휘말릴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즉 북한의 ‘5개섬 통항질서’ 선포는 정치성 짙은 계산된 행위로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첩보위성과 정찰기 등을 통해 북한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북측의 도발유형에 따른 대응태세 시나리오를정밀 재점검하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정 합참작전본부장은 “오늘자로 서해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린 것 외에 별도의 군사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은 6월부터 시작되는 꽃게잡이철을 앞두고 지난해의 연평해전과 같은 북한군의 도발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만반의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北 발표 ‘통항질서' 요지. 조선 인민군 해군사령부가 23일 발표한 ‘5개섬 통항질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백령·대청·소청도 주변수역을 1구역,연평도 주변수역을 2구역,우도 주변수역을 3구역으로 한다.제1·2·3구역에서의 미군측 함정들과 민간선박들은 우리측에 적대적인 통항이 아닌 이상 통항 자유를 가진다. 2.제1구역으로 드나드는 모든 미군측 함정들과 민간선박들은 제1수로를 통하여,제2구역으로 드나드는 모든 미군측 함정들과 민간선박들은 제2수로를통해서만 통항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우리측 영해에 있는 미군측 관할하의 섬들에 비행기가 드나들수 없으며 부득이한 경우 모든 비행기들은 이 수로상공을 통해서만 비행할수 있다. 3.제1·2·3구역과 제1·2수로들에서 미군측 함선들과 민간선박들은 공인된 국제항행 규칙들을 엄격히 준수하여야 한다. 4.미군측 함정들과 민간선박 및 비행기들이 지정된 구역과 수로를 벗어나는 경우 그것은 곧 우리측 영해 및 군사통제수역과 영공을 침범하는 것으로 된다. 5.제정된 수로통항시 우리측의 행동에 그 어떤 위협이나 지장을 주어서는안되며 이 수로들과 통항구역이 우리 함정들과 민간선박들의 통항을 가로막는 구역이나 수로로 될 수 없다. 6.이번에 제정한 통항구역과 수로는 어디까지나 미군측 관할하의 섬들이 우리측 영해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설정한 것이며 이 구역과 수로가미군측 수역으로는 될 수 없다. *서해교전이후 北 움직임. 서해의 남북 긴장이 다시 고조되는 양상이다. 북한군 해군사령부는 23일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 확정(99.9.2 군총참모부특별보도)에 대한 후속조치로 서해 5도의 통항 내용을 규정한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했다.지난해 서해교전(6월15일) 보름만인 7월2일 북한당국은해상 경계선 재확정을 위한 5개안을 유엔사령부측에 제안했다. 같은달 21일 북한 당국은 북·미 양국과 남한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실무급접촉을 요구했으며 다음달인 8월17일에도 북·미 실무접촉을 8월 하순에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북한과 유엔사측은 수차례에 걸친 북·유엔사 장성급 회담에서도 전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북한은 지난해 9월1일 ‘결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다음날인 2일 군총참모부 특별보도를 발표,NLL 무효를 선포하고 서해 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후 남북한 간에는서해 해상분계선과 관련해 몇차례의 공방이 오갔으나별사건없이 해를 넘겼다.그러나 지난달말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북한당국은 남한 전투함들이 지난달 22,25일 NLL을 넘나들었고 23,24일에는 백령도·연평도 일대에 배치한 155㎜ 신형 자주포의 실전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우리 군 당국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이어 북한 해군사령부는 지난 2일 대변인 담화를 발표,지난해 9월2일 ‘특별보도’를 통해 밝힌 ‘해상 군사분계선’을 공명정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석우기자
  • 파키스탄 비상선포 계엄통치

    [이슬라마바드 AFP AP 연합]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은무혈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한지 3일만인 15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권을장악하는 등 사실상의 계엄통치를 선언했다. 무샤라프 참모총장은 이날 새벽 1시쯤 관영 APP 통신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날 선포된 비상사태는 이와 함께 내각 각료 전체의 직권을 정지시키고 상하원,지방의회의 활동도 중단토록 했다. 이에 따라 상하 양원과 지방의회의 의장,부의장 및 4개 지방정부 주지사와지방장관,보좌관 등도 직무정지 조치를 당했다.다만 무하메드 라피크 타라르 대통령은 그대로 현직에 남을 것이라고 성명은 밝혔다. 성명은 “육군 총참모부와 파키스탄 군 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 겸 합참의장은 파키스탄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하며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맡는다”고 밝혔다. 성명은 또 “파키스탄 전체는 파키스탄 군의 통제하에 놓여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이날 성명은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사법부도 종전처럼 기능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키스탄 군부는 군총사령부에서 지난 이틀 동안 여러 정치인 및 헌법전문가들과 잇따라 만나 쿠데타 이후 내놓을 조치에 대해 숙의한 뒤 비상사태를선포했다. 파키스탄 중앙은행은 이날 쿠데타로 축출된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정부 고위 관리,의원 및 보좌관,그 가족들의 은행 계좌를 모두 동결했다고 정부 소식통이 말했다. 이 조치는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몇 시간만에 취해진 것이다. 이에 앞서 군 병력은 쿠데타 발발 이전에 소집돼 있던 국회가 당초 예정대로 15일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14일부터 국회의사당에 병력을 증강배치,입구를 철저히 봉쇄했다.
  • [오늘의 눈] NLL과 인터넷홍보

    지난 7일 한 인터넷사이트(www.mailbase.ac.uk)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관련된 자료가 떠올랐다.북한 인민군총참모부가 ‘NLL의 무효와 자위권발동’을 밝힌지 닷새만이었다.‘인트-바운더리스’(int-boundaries)라는 제목의 이 사이트는 영국 더햄대학이 운영하는 지리전문가 사이트.전세계 수백여명의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가입해있다. 호주 멜버른대학의 브렌던 휘트가 올린 이 자료는 북한 중앙통신(kcna)의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그는 일본내에 개설된 kns(korea news service)에서 자료를 얻었다.자료는 “NLL은 국제법상 12해리 원칙에 맞지 않아 무효”라고 주장한다.또 국내의 한 영자지에 실린 관련기사도 띄웠다.기사는말미에 “한국의 NLL관련 주장은 국제법상 입증되기 매우 어렵다”는 익명의 전문가 코멘트를 담고 있었다. 사이트에는 이어 모두 4차례에 걸쳐 kcna의 주장을 담은 자료가 떠올랐다.반면 한국측 견해는 간단한 외신 두어건으로 처리됐다.이 사이트는 한동안 관계자의 코멘트를 기다렸다.그러나 당사자인 한국 관계자의 의견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해양대 김영구 교수가 나흘만인 11일 의견을 올린 것이 유일했다. 그는 “12해리 원칙 등은 ‘평온공연’할 때 적용될뿐 지난 53년 전쟁의 와중에는 적용될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뚜렷한 원칙”이라고 강조했다.이는해당국가 사람의 첫 의견이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 전문가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한 외국인은 김교수에게 관련지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국내에는 한창 인터넷열풍이 불고 있다.정부와 연구소,대학마다 홈페이지를 두고 있다.그러나 이런 전문가 사이트에 국가적 문제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왜일까. 외국인이 NLL에 관해 알아보려 할 때 그는 먼저 정부 홈페이지를 찾을 것이다.그럼에도 정부 홈페이지에는 보도자료,말씀,간단한 소개 등이 고작이다.NLL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해군 사이트에만 ‘연평해전’이라는소제목 아래 설명이 떠있다.이나마 한글이어서 외국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아무래도 우리의 인터넷 접근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박재범 특집기획팀 차장 jaebum@
  • 北 “서해분계선 침범땐 강력 조치”/정부 원론적 입장 재확인

    북한은 지난 2일 일방적으로 선포한 서해상 군사분계선을 침범할 경우 이를 도발로 간주,“강력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7일 경고했다.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북측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할 경우 강력 대응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거론하며 “이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별보도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북한이 선언한 서해상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정과 국제법 요건에 부합되는 정당하고 확고한 것”이라며 “남조선 호전광들은 불법적인 NLL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는 남조선 호전광들이 서해상 군사분계선을 도발할 경우 온갖수단과 방법으로 강한 자위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남조선측에 있다”면서 “남한 당국자들은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가 설정한 군사경계선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와함께 우리의 ‘자위 발포선’안에선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란 위협도덧붙였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북한측의 발표는 NLL 침범시 강력 대응하겠다는 우리측 입장 천명에 대한 답신 성격으로,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대미협상용으로 계속 활용하려는 의도로 관측된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노동당 산하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등의 기관 명의가 아닌 언론기관을 통해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고 밝혔다. 이석우기자 swlee@
  • “北 NLL침범 도발간주 응징”

    합동참모본부는 3일 북한의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무효화 주장과 관련,성명을 내고 북한이 NLL을 침범하면 강력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황동규(黃童奎) 합참 공보실장은 ‘북한군의 소위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 선포 관련 우리 군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북한이 2일 총참모부 명의로 선언한 서해상 군사분계선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면서 “북방한계선은 지난 46년간 엄연히 존재해 왔고 현재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임을 분명히밝혀둔다”고 강조했다. 성명은 “우리 군은 앞으로도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지켜나갈 것이며 북한이북방한계선을 침범할 경우 도발로 간주,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성명은 이날 오전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관계부처의 의견조율을 거쳐 합참 명의로 발표됐다. 우득정기자 djwoo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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