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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일호 “빚 보증 잘못 서 집 경매 한때 알거지… 피눈물 월세살이”

    유일호 “빚 보증 잘못 서 집 경매 한때 알거지… 피눈물 월세살이”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연대보증’을 잘못 서 과거 빈털터리가 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후보자는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예금 전액을 압류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고, 지금도 빚을 다 갚지 못해 부인의 예금 계좌가 압류당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유 후보자는 1996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재직 시절 부인의 친척 부탁으로 부인과 함께 셋이서 연대보증을 섰다. 채무액은 수십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친척의 동업자는 거액의 빚에 쫓겨 잠적했다. 그는 현재 캐나다로 도피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유 후보자 부부에 대한 채권 추심이 시작됐고, 2003년 아파트가 법원 경매로 넘어갔다. 보유했던 예금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추심이 중단됐다. 유 후보자는 연 25% 이자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수십억원을 갚았다. 일단 본인부터 빚을 털었다. 하지만 유 후보자 부부가 주채무자가 아니다 보니 갚아야 할 총액이 얼만지도 모른 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계속됐다. 현재 상환이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갚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연대보증제도가 자기 몫을 다 갚으면 다시 다른 보증인의 빚까지 떠안게 되는 ‘연좌제’이다 보니 도주한 동업자가 갚지 않는 한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빚을 평생 털어내지 못한다고 한다. 정부는 2013년 연대보증제를 폐지했지만 기존 채무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유 후보자는 월세와 생활비를 지인들에게 빌려 충당했고, 전당포 신세까지 졌다. 유 후보자는 10일 “당시 재산 0원의 ‘알거지’로 전락해 피눈물을 삼키면서 살았다”면서 “채권 추심을 견디다 못해 채권자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송에서는 연대보증서에 적힌 자필 서명이 발목을 잡아 패소했다. 이후 유 후보자는 꼬박꼬박 모은 월급과 은행 대출 등을 더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현재 지역구인 송파구에 전세를 얻었다. 현재 총 재산은 10억원 정도다. 현재 부인의 빚으로 알려진 1억 5000만원은 채무액이 아닌 ‘압류금액’이었다. 때문에 해당 계좌에 입금하는 대로 돈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홍종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유 후보자 부인은) 압류가 가능한 예금 채권은 감소한 반면, 압류가 불가능한 보장성 보험 액수는 꾸준히 늘었다”며 “우리나라 경제를 총괄하는 경제부총리가 되려면 배우자의 금융 부채를 갚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 후보자 측은 “보장성 보험은 매월 내는 암보험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후보자는 민주한국당 총재였던 유치송 전 의원의 아들이다.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현 정부에서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文, 인재 영입·조기 선대위 ‘마이웨이’

    文, 인재 영입·조기 선대위 ‘마이웨이’

    더불어민주당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탈당을 선언한 3일 문재인 대표는 ‘인재 영입’ 카드로 맞불을 놓았다. 또 탈당한 의원의 지역구에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겠다는 방침을 밝히며 ‘연쇄 탈당’이 예고되는 당내 비주류 진영을 향해 ‘정면 승부’를 선포했다. 새해 첫날 공식 일정을 마치고 경남 양산 자택에 머물렀던 문 대표는 이날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의 입당식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로 복귀했다. 김 의장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에 이어 일주일 만에 공개한 문 대표의 인재 영입 2호 인사다. ‘안철수 신당’이 더민주를 탈당한 인사들 위주로 진용을 갖추는 데 비해, 정치권 밖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을 끌어들여 차별화를 두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김 의장은 벤처기업 솔루션홀딩스 공동 창업, NHN게임스 대표이사, 웹젠 대표이사 등을 지낸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정보기술(IT)기업인이다. 김 의장의 주식 평가액은 2231억원으로 현역 의원 재산 1, 2위인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과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번 영입은 안 의원 탈당 이후 부재하는 IT 전문가를 충원한다는 성격이 짙다. 40대인 김 의장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젊은 피 수혈’에 공을 들이고 영입 결과를 연쇄적으로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문 대표는 “표 전 교수가 정의를 상징한다면, 김 의장은 혁신을 상징한다”며 “특히 경제 혁신에 중점을 둬 벤처 신화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당을 더 유능한 경제정당으로 만들고, 대한민국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 나갈 주역”이라고 소개했다. 문 대표는 탈당으로 당 소속 의원이 비는 지역구에 새로운 인물을 공천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밝혔다. 이 때문에 전북 정읍 출신인 김 의장을 더민주를 탈당한 유성엽(정읍) 의원의 지역구에 배치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김 의장은 ‘벤처 창업 1세대’인 안 의원에 대해 “그분이 사장님인 회사는 의사 결정의 투명성 등 부분이 제가 납득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견제구를 던졌다. 한편 문 대표는 비주류 의원들의 잇단 탈당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조기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문 대표는 “호남 (인사를) 포함한 공동선대위원장 체제에 대체로 당내 공감대가 모아졌다”며 “위원장 후보에 대해서는 압축이 돼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번 주 내 선대위 구성을 목표로 4일 열리는 최고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하지만 공동선대위원장 물망에 오른 김부겸 전 의원을 비롯해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이용훈 전 대법원장 등은 모두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힐러리 美 대권 잡고 獨 메르켈 총리는 연내 퇴임”

    “힐러리 美 대권 잡고 獨 메르켈 총리는 연내 퇴임”

    “힐러리는 뜨고 메르켈은 진다. 위안화 가치는 떨어지고 유가는 회복된다. 그리고 영국은 유럽에 남을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31일(현지시간) 미국 대선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부터 위안화와 유가의 움직임까지 2016년에 있을 세계 주요 이슈에 대해 이같이 전망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미국 대선의 승자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테드 크루즈와 맞붙어 승리해 백악관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상원도 민주당이 다수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대선 후 미국 정치는 더욱 극단화될 것이며 클린턴 전 장관은 임기 초 의회 및 언론과의 ‘허니문’을 누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반면 타임지가 2015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퇴임할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새해에도 끊임없이 유입되는 난민을 감당하지 못한 지방 정부들이 메르켈 총리의 관용적인 난민 정책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당에서도 도전이 거세지면서 메르켈 총리가 총리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FT는 내다봤다. ●올여름 브렉시트 선거 ‘EU 잔류’ 가능성 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난민 위기에 이어 유럽 통합의 악재였던 브렉시트는 현실화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FT는 올여름에 실시될 브렉시트 선거에서 영국인은 ‘상식’에 기반해 EU 잔류를 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르헨·남아공·브라질 중 한곳 구제금융 신청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올해 세계 경제 성장세가 실망스러운 수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9년 만의 첫 미국 금리 인상으로 신흥국들의 신용 상황이 위축되고 부채 서비스 비용이 높아질 것이라며 달러 중심으로 부채를 쌓은 기업들도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FT는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중 한 곳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들을 비롯한 신흥국은 원자재 가격 하락과 재정적자 증가, 막대한 공공부채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선진국 가운데 공공부채 비율이 높은 이탈리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이 있으나 유럽중앙은행(ECB)의 도움으로 IMF에까지 손을 벌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 위안화 약세 이어지고 유가는 회복될 듯 중국의 위안화는 새해에도 약세 기조를 이어 갈 전망이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중국은 올해 금리를 최소 두 차례 이상 인하할 것으로 보이는 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금리 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기에 외국 자본은 빠르게 중국 시장을 이탈할 것이며 위안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박은 강화될 것으로 FT는 내다봤다. 원화도 평가절하될 전망이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투자은행들의 환율 전망 자료에 따르면 새해 4분기의 환율은 달러당 1218원으로 예상됐다. 코메르츠방크와 모건스탠리는 원화 가치가 1300원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투자은행들의 예상은 1090∼1300원으로 나타났다. 반 토막 난 유가가 2016년에는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지난 30일 북해산 브렌트유는 2015년 최고점(배럴당 67.7달러)의 절반 수준인 배럴당 36.4달러였다. FT는 2016년에 경기 회복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전제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를 회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12·21 개각] 주형환 산업부 장관 후보자, 국내금융·대외경제 등 섭렵한 정통 경제관료

    기획재정부에서 재정정책, 국내금융, 대외경제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정통 경제관료 출신. 행정고시 26회다. 미주개발은행(IDB) 근무 당시 뛰어난 업무추진능력으로 당시 루이스 알베르토 모레노 총재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재부 대외경제국장 시절 국가 성장동력을 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발탁됐다가 지난해 7월 기재부 1차관에 임명됐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극복을 위한 경제활력 회복 대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조직 장악력이 좋고 책임감도 강해 직원들의 업무 성과를 끌어올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54) ▲덕수상업고, 서울대 경영학과, 미국 일리노이대 경영학(석·박사) ▲행시 26회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추진단장 ▲녹색성장위원회 녹색성장기획단장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대외경제국장, 차관보, 1차관
  • 이만섭 前국회의장 별세(1932~2015 )…소신의 Mr. 쓴소리 한국 정치의 산증인

    이만섭 前국회의장 별세(1932~2015 )…소신의 Mr. 쓴소리 한국 정치의 산증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14일 오후 4시 35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83세. 대구 출신인 이 전 의장은 1951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 정치부 기자를 거쳐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31세의 나이(최연소 국회의원)로 국회에 입문했다. 이 전 의장은 7·10·11·12·14·15·16대 의원을 지내며 8선을 기록하고 14대와 16대 두 차례 국회의장을 지낸 대표적인 정치원로다. 이 전 의장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정치적 굴곡도 상당했다. 7대 의원 시절인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후락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했다가 약 8년간 정치활동의 공백기를 맞았다. 14대 때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다시 원내로 돌아온 이 전 의장은 국회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93년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재산 공개 파동으로 낙마하자 그 뒤를 이어 입법부 수장에 오른 것이다. 또 그해 12월 통합선거법 등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97년 신한국당 대표서리였던 이 전 의장은 당내 대선후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며 국민신당에 합류했다. 이후 이 후보의 대선 패배 뒤 98년 9월 6명의 국민신당 의원을 거느리고 여당인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 창당준비위원장을 지냈고 그 다음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뒤 16대 국회에서 두 번째 국회의장을 지냈다. 5공 당시 국민당 총재와 97년 대선 이후 국민신당 총재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여당생활만 했다. 하지만 ‘꼿꼿하고 바른말 잘하는’ 원로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앞선다. 2004년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등을 맡아 정계 원로 역할을 다했다. 여야는 이날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새누리당은 “고인은 소신과 뚝심이 강한 강골의 정치인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평가했고 새정치민주연합도 “국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한 의회주의자였다”고 기렸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평생 의회주의의 한 길을 걸으신 한국정치의 거목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영결식은 오는 18일 국회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윤복씨와 장남 승욱, 딸 승희·승인씨 등 1남2녀가 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LPGA 신인왕 김세영 태권도인상 받는 사연은

    LPGA 신인왕 김세영 태권도인상 받는 사연은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데뷔 첫해에 3승을 거두고 신인상까지 거머쥔 ‘슈퍼 루키’ 김세영(22)이 자랑스러운 태권도인상 특별상을 받는다. 세계태권도본부 국기원은 태권도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태권도인들을 선정해 자긍심을 높이고 화합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올해 처음 도입한 자랑스러운 태권도인상 수상자를 선정해 9일 발표했다. 시상식은 오는 15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리츠칼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등에서 추천받은 후보를 놓고 세 차례 선정위원회 회의를 열어 포장(국기장) 2명, 포상 3개 부문(국내·해외·특별상) 수상자 3명을 확정했다. 김세영은 특별상 수상자로 뽑혔다. 김세영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김정일씨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수련했으며 현재 국기원 공인 3단을 보유하고 있다. 국기장은 국기원 초대 원장 및 세계태권도연맹(WTF) 창설 총재인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과 엄운규 전 국기원장이 받는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독재자의 딸” 독설 퍼붓다가 2012년 대선 지지 ‘지독한 애증’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영면에 든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조문했다. 박 대통령이 예를 갖춰 애도를 표했지만 그동안 두 사람은 악연에 가까웠다. 정치적 앙숙 관계가 대를 이은 탓이 크다. 1998년 2월 대통령직 퇴임을 계기로 일선 정치 현장을 떠난 YS와 같은 해 4월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박 대통령 사이에 직접적 연결 고리는 없다. YS 입장에서는 정적이자 박 대통령에게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갈등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YS는 대통령 퇴임 직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 헌정을 중단시킨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날 선 비판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박근혜 부총재는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맞받아쳤다. YS는 박 전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YS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MB)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이어 YS의 측근들도 잇달아 ‘MB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국 박 대통령은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YS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서도 김문수 후보를 격려하면서 경쟁 상대였던 박 대통령을 “칠푼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당시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 치러진 총선에서는 YS의 차남인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새누리당에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당의 수장인 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이때 YS가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고, 현철씨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무자비한 정치 보복”이라면서 탈당했다. 그러나 YS는 2012년 대선 직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도 당선 직후 YS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1926~2009)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쌍두마차’였다. 바른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호인 거산(巨山)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의 ‘거’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산’을 따 지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통영중 재학 시절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했고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 이어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으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는 장녀 혜영(63), 차녀 혜정(61), 장남 은철(59), 차남 현철(56), 삼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이 중 현철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에서 출마해 최연소 의원(27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9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7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을 쏟아냈다. 그의 정치 행보는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고, 이는 야당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지만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자택 앞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도 당했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줬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한 것이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선 후보로 탈바꿈했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에도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은 상도동계가 핵심이다. YS는 특유의 ‘인물 발탁’으로 한국 정치사에 수많은 ‘정치적 자손’을 남겼다. 이 중엔 YS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여의도를 호령하는 인물들도 있다. ●‘정치인 양성 사관학교’ 상도동계 1세대인 ‘좌(左)동영 우(右)형우’를 비롯해 서석재·김덕룡 전 의원,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4선 정병국·이병석 의원 등은 모두 YS와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거나 YS가 발탁한 인사들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가 발탁했다. 진보 진영의 야권 인사들도 YS가 제도권 정치로 흡수했다. ●김무성 1987년 막내로 입문 김 대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거쳐 1987년 상도동계 막내로 입문한 뒤 김영삼 정권 초대 민정수석비서관, 최연소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서 최고위원은 YS의 야당 총재 시절 비서실장, 문민정부 정무장관을 역임했다. 최형우 전 의원은 고 김동영 의원과 함께 민주화 운동 시절 YS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정치적 동지다. 문민정부 2인자로 내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1997년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고문과 여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한 4선 김동영 전 의원은 1991년 55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북고 동기로 민정당 출신인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은 당시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공을 세운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으로 불렸다. 164㎝ 단신으로 별명이 ‘작은 거인’이었던 그는 조직의 귀재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설을 제기한 뒤 총무처 장관직에서 8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2012년 대선후보 놓고 갈려 상도동계는 2012년 대선 때 지지 후보를 놓고 갈렸다. 전북 익산 출신으로 상도동계의 드문 호남 인맥인 김덕룡 전 의원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하며 다른 길을 걸었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며 YS와 갈라서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깜짝 발탁됐다. 세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YS 정부 최연소 노동부 장관 출신인 이인제 최고위원도 YS가 발굴했다. 특히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정권에서 감사원장·총리로 중용되는 등 YS가 직접 대권 가도를 놓아줬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서강대 교수 시절 광명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 1996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민중당 소속 운동권 정치가였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총재였던 YS가 영입했다. 15대 총선 때는 ‘YS 키즈’가 대거 배출됐다. 정의화 국회의장,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경남도지사, ‘박종철 검사’ 안상수 창원시장, 이완구 전 국무총리 모두 신한국당 초선 동기다. ‘YS의 영원한 입’ 박종웅 전 의원, 홍인길 전 총무수석도 YS 직계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상도동 가신그룹] ‘킹메이커’ 김윤환에 좌는 김동영 우는 최형우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 계보는 상도동 가신 그룹이 핵심이다.  상도동계 핵심은 최형우·서석재·김덕룡·김윤환 전 의원, 김동영 전 장관, 서청원·김무성 의원 등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YS 집권을 전후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사이 정치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인 김윤환 전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정무수석을 역임한 그는 문민정부 출범 때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호 허주(虛舟)로 더 유명한 그는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대권을 노렸으나 이회창 후보에게 투항하면서 꿈을 접었다. 이 후보의 대선 패배 뒤에는 “권력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발언을 남겼고, 2000년 한나라당 공천 탈락 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지만 낙선, 2003년 말 신장암으로 별세했다.  상도동의 ‘좌동영 우형우’ 가운데 한 명인 최형우 전 의원은 일찍 세상을 뜬 김동영 전 장관과 함께 YS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1971년 야당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 첫 배지를 달며 YS와 인연을 맺은 그는 YS 당선 이후 민자당 사무총장으로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주도하는 등 변화와 개혁의 선봉에 섰지만 1994년 부천세무서 탈세 사건으로 경질됐다. 1996년 15대 총선에 당선돼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1997년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이었다. 164㎝의 단신인 탓에 ‘작은 거인’이란 별명으로 불린 그는 조직의 귀재였다. 1992년 대선 당시 나라사랑실천본부란 사조직을 이끌며 YS 당선에 일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총무처 장관에 발탁했으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설을 주장해 8개월 여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덕룡 전 의원은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지지를 선택하며 상도동계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앞서 2007년 대선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지지 핵심멤버인 6인회 멤버로 박근혜 당시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1970년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정계 입문해 5선을 지낸 관록의 정치인이다.  반면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낙천, 총선 공천헌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정치적 암흑기를 겪다 최근 복권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부활했고, 10·30 재보선을 통해 원내 복귀에도 성공했다. 기자 출신으로 민한당 국회의원 시절이던 1981년 YS와 처음 만난 그는 1989년 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1996년 신한국당 원내총무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2002년 한나라당 불법대선자금 사건을 책임지고 탈당, 실형 선고를 받는 등 부침을 겪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연을 맺고 친박(친박근혜)계 원조 좌장 역할을 해 왔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현재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4·24 재보선으로 복귀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상도동계의 막내다. 1992년 대선에서 정책보좌역을 맡으며 YS와 첫 인연을 맺었다.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명도 보스 정치의 한복판이었던 상도동에서 정치 역정을 겪으며 얻게 됐다.  YS의 가신이자 대변인격으로 불렸던 박종웅 전 의원은 현재 대한석유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는 YS 퇴임 이후에도 대립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연대21이라는 조직을 주도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원했지만 18대 총선 때 부산 사하구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천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한때 건강이 악화됐지만 최근에는 기력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대선 때도 고인과 함께 투표소에 나와 한 표를 행사했다. ‘YS 황태자’로 불렸던 차남 현철씨(전 여의도연구소장)는 지난해 총선 공천 때 경남 거제에서 낙천한 뒤 탈당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시절 ‘소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권부의 핵심에 있었지만 집권 말기 조세포탈 혐의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에서도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과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함께 갖고 있다.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됐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양김의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역사를 이끌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한 바 있다.그러나 이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박철언 전 의원과의 대결 끝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는 ‘군정 종식’을 선언했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칼국수’를 즐겨먹는 것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에 비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고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는 등 임기 초반에 누렸던 절대적인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이자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대부’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88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긴급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하면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인 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 검진 차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한 뒤 퇴원했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된 이후 9선(5·6·7·8·9·10·13·14) 의원을 지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했고, 박철언 전 의원과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둘은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해 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으로 하기로 유족 측과 행정자치부가 합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정부는 22일 낮 12시 30분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를 공식 결정할 예정이다.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장 진행, 장례위원회 구성, 장지, 영결식과 안장식 등 장례 절차 전반을 심의한다. 국가장 절차는 정부와 유족의 협의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제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결정한다. 5일간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면 김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1927 경남 거제 출생  -1950 학도의용군 입대,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요원  -1951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졸업   손명순 여사와 결혼  -1952년 장택상 국무총리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  -1954 만 26세 최연소로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5·6·7·8·9·10·13·14대 국회의원(9선)  -1954 자유당 탈당  -1963 군정 연장 반대 데모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1965 야당 원내총무 5선  -1969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다 초산테러 당함  -1972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 반유신투쟁 전개  -1974 신민당 총재로 선출  -1979 ‘YH사건’ 등으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뉴욕탐임스 회견을 빌미로 국회의원직 제명  -1980 1차 가택연금  -1981 민주산악회 발족  -1982 2차 가택연금  -1983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  -1984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공동의장  -1985 신한민주당 창당, 2·12 총선에서 선거혁명  -1987 통일민주당 창당, 총재 취임 이후 6월항쟁 주도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출마해 낙선  -1989 한국 정치인 최초로 소련 방문  -1990 민주·민정·공화 3당 통합 선언,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2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92 제14대 대통령에 당선  -1993 문민정부 출범  -1993~1998 금융실명제 도입,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군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1998 대통령 퇴임 이후 상도동 자택에 머물며 정치활동  -2013년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 푸틴? 박근혜 대통령 43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순위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사람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3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박근혜 대통령이 40위와 43위를 기록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45위와 46위에 이름을 올렸다.  포브스는 4일(현지시간) 정치인, 경제인, 자선사업가 등 세계를 움직이는 엘리트 74명을 선정해 영향력 순위를 발표했다. 포브스는 푸틴 대통령을 3년 연속 1위로 선정하며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도 책임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어 “지난 6월 지지율이 사상 최고인 89%를 기록했고 시리아 공습을 단행해 중동에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고 덧붙였다.  2위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제치고 차지했다. 포브스는 메르켈 총리가 올해 시리아 난민 사태와 그리스 부채 위기에서 단호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2위에서 3위로 한 계단 내려 앉았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포브스 순위에서 2위 밖으로 밀려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어 프린치스코 교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레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가 10위 내에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43위를 기록해 지난해에 비해 3계단 상승했다. 여성 중에서는 11위를 차지했다. 포브스는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이완구 전 총리 등 측근의 뇌물수수 스캔들로 부담을 지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처럼 한국의 임금, 소비, 수출도 하향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늘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최근 한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했고 중국 및 일본과 환경 협력을 이끌어 냈으며, 동북아원자력안전협의체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외교적 성과를 평가했다.  올해 순위에 새로 오른 사람으로는 마이클 델(59위) 델 최고경영자, 중국 최고 부자인 왕젠린(68위) 완다그룹 회장, 이번달 4일 공식 취임한 쥐스탱 트뤼도(69위) 캐나다 총리,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70위) 아이칸캐피탈매니지먼트 창업자, 도널드 트럼프(72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등 5명이 있다. 최연소는 19위를 차지한 31세의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였으며, 32세의 김정은 제1위원장이 바로 뒤를 이었다.  순위에 오른 74명 중 30명은 미국인이었고, 중국인은 8명이었다. 여성은 9명이 올랐다.  포브스는 영향력이 미치는 사람 수와 영역, 영향력의 강도, 자본력 등 네 가지 기준으로 순위를 매겼다고 밝혔다. 4위를 기록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우 12억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에 첫 번째 기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38위를 차지한 엘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및 스페이스엑스 최고경영자의 경우 자동차산업과 우주산업 두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에 두 번째 기준을 충족해 순위에 올랐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2500만명의 북한 국민들에게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에 영향력의 강도가 세다고 판단해 46위에 올렸다고 포브스는 밝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 반대… 스냅사진 같아 조작 가능”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 반대… 스냅사진 같아 조작 가능”

    최근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등 총선 공천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문제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빚어진 가운데 김행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여성 월간지 ‘퀸’ 11월호 인터뷰에서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여론조사 전문기자로서 우리나라 정치와 선거 분야에 여론조사를 통한 국민 여론의 반영을 선도했던 김 원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여론조사에는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부정적 측면도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김 원장은 “여론조사는 (조사) 당시의 스냅사진과 같은 것으로, (수시로) 변해 지속적이지 못하며 정치적 목적으로 쓰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철학을 갖고 특정 정책을 펼 정치인을 낼 테니 국민들이 뽑아 달라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데 여론조사가 이런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 대변인으로서 여론조사를 통해 열린우리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를 이뤘으나 선거일 직전 단일화를 파기한다는 발표를 직접 했던 김 원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여론조사가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몰랐다는 걸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로서의 여론조사는 과학으로서의 여론조사와 크게 다르고 위험하다.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면서 “정치적 목적이 옳다고 해도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꼽았다. 김 총재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해 절대빈곤 퇴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보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왜 그를 세계은행 수장자리에 앉혔는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김 총재의 열정적이고 진지하며 겸허한 설명을 듣고 나 역시 절대 빈곤의 현실에 책임 의식을 느끼게 됐고 내 인생의 좌표가 바뀌었다”면서 “리더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번 퀸 11월호에 인터뷰뿐 아니라 표지모델로도 나섰다. 그는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공직자가 여성지 표지모델로 나선 것은 이례적인 것 같다’는 질문에 “표지모델로 연예인만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과거의 고정관념”이라며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여성지 표지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했다”고 답했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불가리아 출신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선두 주자

    “유엔 사무총장을 할 만한 여성이 없다는 변명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훌륭한 후보들이 너무나 많다.” 세계 여성 인사 20여명이 조직한 웹사이트 ‘여성 유엔 사무총장을 뽑기 위한 캠페인’(www.womansg.org)은 차기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성 30명을 선별해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캠페인 측은 “내년 말 차기 유엔 사무총장을 뽑기 전까지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지역의 고위급 자리에서 활동해온 능력 있고 경험 많은 여성들을 알리기 위해 뛰어난 여성들의 프로필을 시리즈로 게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출신은 후보가 될 수 없게 돼 있지만 그들 국가 출신의 여성들도 소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캠페인 측은 후보들의 경력과 자질, 언어능력, 자신감, 도덕성, 투명성, 다양성, 존재감 등 다양한 분야를 고려해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들 가운데는 대통령과 총리, 장관, 국제기구 수장, 유엔 사무차장급 출신 등이 다수 포함됐다. 연령대도 1938년생부터 1973년까지 다양하며, 미주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모든 대륙이 망라됐다. 이들 중 여성단체와 유엔 전문가, 언론 등이 주목하는 후보는 8명 정도로 추려진다. 그동안 배출된 남성 사무총장 8명과 같은 규모다. 뉴욕타임스는 캠페인 사이트를 인용, “다양한 여성 리더들 중 엘런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알리시아 바르세나 이바라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CEPAL) 사무총장,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 등이 포함된다”고 전했다. 빌 리처드슨 전 유엔 미대사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불가리아 출신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다양한 요구 기준을 충촉해 선두주자로 거론된다고 전했다. 유엔 사무총장 선출의 ‘지역별 교대’ 전통에 따라 반기문 사무총장을 배출한 아시아의 뒤를 이어 유럽, 특히 한 번도 총장을 배출한 적이 없는 동유럽 출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불가리아 정부가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내세운 보코바 사무총장의 경력과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리처드슨 전 대사는 또 베스나 푸시치 크로아티아 외교장관도 크로아티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어 동유럽 출신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동유럽 출신이 유력 후보가 되지 못할 경우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전 총리,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등도 후보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독도 도발·고노 담화 부정’ 극우들, 日내각 요직에

    ‘독도 도발·고노 담화 부정’ 극우들, 日내각 요직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7일 개각을 단행했다. 내각 각료 19명 가운데 10명을 바꿨지만 경제부총리, 외무, 국방 등 국정운영의 핵심 자리는 손대지 않았다. 지난달 19일 안보법안을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통과시키고, 지난 5일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합의를 이뤄내는 등 주요 역점 사업 2가지를 손에 넣은 뒤 취해진 개각이다. 정책 연속성과 ‘안전 운행’에 방점을 뒀다. 내년 7월 참의원 선거 때까지 경제 중심의 안정적 국정운영과 후속조치들을 위해 주요 ‘장수’들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입각 인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부정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온 하세 히로시 중의원 등 국수주의적 인사들이 포함되는 등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이 더 도발적이어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정권의 핵심 동반자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을 비롯해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 나카타니 겐 방위상 등 주요 유임 각료들은 정권 핵심 사안들을 지속성을 갖고 추진하게 됐다. 아소는 법인세율 인하 등 주요 세제 변화를, 나카타니는 집단 자위권 법제화에 뒤따를 자위대 체제 정비를 추진해 왔다. TPP 협상을 맡아온 아마리 아키라 경제재생담당상은 국회 비준 등을 책임지고 있다. 교도통신은 “안보 법안을 처리하며 손상된 정권의 권위를 경제 중심의 ‘방어적 국정운영’으로 회복하려는 ‘수비형 개각’”이라고 분석했다. 개각의 다른 핵심은 아베 총리의 ‘측근 중용’이다. 2차 아베 정권 출범의 발판이 된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때부터 핵심 참모로 활약해 온 가토 가쓰노부 관방 부장관이 신설된 ‘1억 총활약 담당상’을 맡은 것도 그렇다. 가토는 아베의 생각을 폭넓은 영역에서 실천·추진하는 정권의 ‘리베로’ 역할을 하게 됐다. “역할이 모호하다”는 비판 속에 활동 영역이 넓은 정무적 임무를 수행할 전망이다. “고노 담화의 역할은 끝났다”는 발언을 일삼아 온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총재 특보가 관방 부장관으로 기용된 것도 측근 전진 배치다. ‘포스트 아베’의 유력한 후보인 이시바 시게루 지방창생담당상이 자리를 지킨 것은 ‘안전 운행’을 위해 내각의 ‘울타리’에 묶어두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성인 시마지리 아이코 참의원과 아나운서 출신 마루카와 다마요 참의원이 각각 오키나와·북방영토 담당상과 환경상으로 기용된 것은 ‘여성 중용’의 일환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무상과 함께 여성 각료 수는 3명을 유지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흔들리는 여권 권력 지형] 朴대통령과 친밀감 과시… 때 기다리는 반기문

    [흔들리는 여권 권력 지형] 朴대통령과 친밀감 과시… 때 기다리는 반기문

    유엔 창립 70주년 기념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25일 미국 뉴욕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의 첫 일정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만찬이었다. 이날 만찬은 반 총장 측의 제안이었다. 25일 만찬과 26일 오찬을 제시했는데 청와대는 25일 만찬을 선택했다. 이날 만찬에서 눈에 띈 점은 김용 세계은행(WB) 총재가 합류한 것이다. 세 사람은 나란히 사진도 찍었다. 김 총재는 최근 미국 정부의 고위 인사에게 “반기문은 국제사회의 롤로덱스(Rolodex·유명 인사)”라면서 “반 총장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총재는 “반 총장은 국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서로 모르는 인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네트워크가 좋다”면서 “그것이 앞으로 한국의 안보와 경제 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 총장이 박 대통령, 반 총장과의 만찬에서 그런 취지의 얘기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는 상관없이 이날부터 29일까지 이어진 유엔총회 기간 동안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은 7차례에 걸쳐 자리를 함께하며 새마을운동과 다른 국제 이슈에 대해 좋은 말을 주고받았다. 박 대통령이 반 총장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청와대가 반 총장을 잠재적인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정치권에 알려져 왔다. 반 총장은 지명도가 거의 100%에 가깝고 이른바 ‘안티(반대) 그룹’이 없다. 또 우리나라 선거의 전략적 요충지인 충청도 출신인 데다 공직 생활을 오래해 와 주변 관리도 철저한 편이다. 특히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음에도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국내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들이 청와대가 반 총장을 선호하는 이유에 들어 있다. 반 총장은 그동안 정치 입문에 대해 세 가지 ‘불가론’을 제시해 왔다. 첫째, 권력 의지가 없고 둘째, 평생 쌓아 온 명예를 잃을까 두려우며 셋째, 부인 유순택씨가 반대한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서는 이 가운데 적어도 두 가지 문제는 해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25일 만찬을 통보하면서 거기에 더해 20분간의 ‘독대’를 추가로 요청했다. 박 대통령과 반 총장 간의 독대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국내 정치 얘기가 오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양쪽 모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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