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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 깨나 밝히는 러시아 스파이 여인, 트럼프도 만났다고?

    총 깨나 밝히는 러시아 스파이 여인, 트럼프도 만났다고?

    총 깨나 밝히는 이 러시아 여인, 크렘린 스파이란 의심을 받고 있는 마리아 부티나(29)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사법당국에 체포돼 18일 저녁 워싱턴 DC 연방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性)을 미끼로 미국의 특정 이해단체에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 러시아 정보기관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데보라 로빈슨 판사는 정부의 범죄 소명이 충분하며 석방시키면 법원에 출두해 재판 진행에 협조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구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변호인들은 몇개월 동안 미국 정부와 협력했기 때문에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티나는 해외 정보요원임을 등록하지 않았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음모를 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아직 간첩죄로 기소된 것은 아니다. 이날 러시아 외무부는 부르티나의 체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5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가진 정상회담의 “긍정적인 성과”를 훼손할 의도로 기획된 것이라고 지적했다.법원에 제출된 문서들에 따르면 부티나는 이름 대신 ‘1번 미국인’으로 명명된 56세 남성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개인적 관계”라고만 표현했다. 또 사우스다코타주에서 보수주의 정치 운동가로 알려진 폴 에릭슨이란 남성과도 함께 촬영한 사진들을 소셜미디어에 많이 올렸는데 이 남자의 나이도 56세로 확인된다. 부티나는 이렇게 “미국 남자들과 계속 지내야 하는 것에 경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미 연방수사국(FBI)은 밝혔다. 둘을 진지한 관계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제3의 남성에게 특정 이해단체의 일자리를 달라며 성 거래를 제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법당국은 이해단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부티나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자주 미국총기협회(NRA) 행사에 자주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윗선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온라인 메시지로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2년 전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 날 자신의 윗선에게 문자를 보내 “자러 간다. 여기는 새벽 3시다.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고 적었다. 2015년 7월 타운홀 미팅에서 트럼프 당시 후보를 만나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기도 했으며 다음해 아들인 트럼프 주니어를 NRA 전국대회에서도 많았다. 스콧 워커 위스콘신주 지사 등 숱한 정계 지도자를 만난 사진들을 페이스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2016년 F1 유학 비자로 미국에 입국한 그녀는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했으며 미국의 보수주의 인사들에게 어필할 만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여성이었으며 화려한 인맥을 자랑했다. 2015년 미국 라디오쇼에 출연해 시베리아 삼림에서 자랐으며 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웠고, 잠깐 가구점 체인을 운영하다가 모스크바로 이사해 러시아에서의 총기 자유화를 옹호하는 단체 ‘Right to Bear Arms’을 창설했다고 주장했다. 현지 매체들은 그녀의 윗선이 러시아중앙은행 부총재이며 푸틴 대통령과 같은 정당 출신 상원의원을 지낸 알렉산데르 토르신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 4월 미국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토르신과 함께 찍힌 사진도 여러 장 눈에 띈다. 그녀의 비자 신청서에는 토르신의 특별 보좌관으로 고용된 적이 있다고 기재돼 있다. 하지만 미국 관리는 토르신이 기소된 것은 아니며 아마도 다른 러시아 관리인 것 같다고 했다. 사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우리는 이 사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꽤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이국종 교수가 “이런 식이니까 한국당 저 지경된 것” 격앙한 이유

    이국종 교수가 “이런 식이니까 한국당 저 지경된 것” 격앙한 이유

    자유한국당의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던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 참다못해 10일 “이런 식으로 하니까 자유한국당이 저 지경이 된 것”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국종 교수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아닌 비대위 구성을 주도하고 있는 안상수 비대위준비위원장 때문이다. 안상수 위원장은 같은 날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이국종 교수가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의 지역구 주민이다. 그래서 평소에 좀 알고 지내는데 아마 준비위원회 출범 전에 본인(김성태)도 답답했던지 서로 만나서 얘기나 해 보자 이랬던 것 같다”면서 만남의 경위를 해명했다. 그러면서 “아마 이국종 교수가 재미로 생각했는지 그걸 언론에 흘렸다”면서 “나는 만나는 것을 알지도 못 했고 약간 해프닝성이다”라고 말했다. 안상수 위원장은 지난 6일 이국종 교수와 김성태 권한대행과의 만남이 다음날 세간에 알려진 것이 이국종 교수가 ‘재미로 언론에 흘렸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이에 이국종 교수는 채널A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내가 김성태 권한대행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을 언론에 흘린 듯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너무 화가 났다”면서 “이런 식으로 하니까 자유한국당이 저 지경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자유한국당은 비대위원장을 맡을 명망 있는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후보군을 언급해왔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후보군에 올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농담이죠?”라며 의문을 표시했고,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거론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회창 전 총재도 본인 동의 없이 이름이 언급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안상수 위원장은 문제의 발언을 했던 인터뷰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이런 분 어떠냐, 저런 분은 어떠냐 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흘러간 것”이라고 해명하고는 “그분들한테 혹시 저희들이 실례가 됐다면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서 용서와 유감을 표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국종 교수에게 또 다시 실례를 저지르는 셈이 됐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이국종 교수,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제안 거부

    이국종 교수,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제안 거부

    자유한국당이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 겸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7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성태 자유한국당 대표권한대행은 전날 저녁 여의도 모처에서 이국종 교수를 만나 자유한국당의 혁신을 이끌 비대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이국종 교수는 “역량이 부족하다”면서 거절했다. 이국종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성태 대행이 저처럼 정치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일반 국민의 시각과 의료게에서 쌓은 추진력으로 비대위원장을 해주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특히 김성태 대행이 “당 내부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관성대로 가려 한다. 이국종 교수가 신선한 시각과 과감함을 갖고 당이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이국종 교수는 전했다. 그러나 이국종 교수는 “저는 그 정도 역량이 되지 않고 내공이 부족하다고 답했다”면서 “김성태 대행과 같이 월등히 뛰어난 분들이 그냥 맡아서 하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거론된 후보 중 이국종 교수 외에도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 이회창 전 총재,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전원책 변호사, 이문열 작가, 김종인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 등이 줄줄이 비대위원장직 제안을 거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국당 비대위원장 거론 이문열 “생각해 본 적 없다” 하마평 난색

    자유한국당의 혁신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외부 영입 대상 인물 가운데 대다수가 난색을 표하고 있다.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된 이문열 작가는 4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이 있어야 사실은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데 죽어야 할 것이 남아 엉겨서 모색을 도모하는 것이 답답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죽는 것도 답답한 일”이라며 “평범한 구경꾼으로 궁금해하면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후보로 거론된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도 “비대위를 만드는 순간에 한국당은 더 망할 수 있다”며 “총선이 1년 10개월 남은 마당에 외부 비대위원장이 온다고 해도 의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김종인 전 의원은 “그쪽(한국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혁신 비대위원회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장을 맡은 안상수 의원은 “(위원장 후보로 언급됐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측이 명단에서 이름을 빼 달라고 연락해 왔다”고 말했다. 후보군 중 몇몇은 직접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전 총재는 비대위원장 후보로 언급된 데 대해 불쾌감을 나타내면서 맡을 의사가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반 전 총장 측도 “한국당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이 전 재판관은 준비위에서 다양한 후보를 내자는 아이디어 차원으로 언급됐지만 정식으로 명단에 오르지는 않았다. 비대위원장 인선 혼란에 당내 비판도 제기됐다. 친박계 김진태 의원은 “위원장으로 이 전 재판관과 김용옥 교수가 거론되는 것은 당을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 모욕·자해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안 의원은 “다음주까지 후보를 5~6명으로 압축해 나갈 것”이라며 “오히려 유력한 분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친박계 김태흠 의원은 이날 “(김무성 의원이) 비박계 수장 역할을 해 온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국민이 다 안다”며 “탈당으로 논란의 불씨를 제거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해 계파 갈등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김규환, 김순례, 성일종, 윤상직, 이종명, 이은권, 정종섭 등 초선 의원 7명도 성명서를 통해 “책임져야 할 분들의 결단을 촉구한다”며 사실상 김무성 의원의 탈당을 요구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한국당 “비대위원장 후보 반기문·전원책·이문열 포함”

    자유한국당이 지방선거 참패로 위기에 빠진 당을 구원할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나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 이문열 작가 등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방안도 고려 중인 것으로 3일 확인됐다. 비대위 준비위 관계자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현재까지 논의된 명단엔 반 전 총장을 비롯해 전 변호사, 이 작가 등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며 “특별한 영역을 고려하지 않고 모신다는 차원에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고 했다. 앞서 한국당은 비대위원장 후보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 도올 김용옥, 이국종 아주대 교수,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 파격적 인물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방위적으로 ‘구원투수’를 물색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김종인 전 의원, 김황식 전 국무총리 등 옛 정치권 인사들도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당은 이와는 별도로 이날부터 새 비대위원장 후보에 대한 ‘국민공모’도 시작했다. 8일까지 국민으로부터 비대위원장 및 비대위원들을 자천타천으로 추천받아 보다 폭넓은 인재를 고려한다는 방침이다. 준비위는 다양한 방면에서 추천되는 명단을 토대로 추후 의원총회를 통해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이번 주말까지 5~6명의 후보군을 압축해 17일 전후로 예정된 전국위원회에서 비대위 구성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이정미 “한국당 비대위원장, 제 이름 안 나왔으면”…최장집 “농담이죠?”

    이정미 “한국당 비대위원장, 제 이름 안 나왔으면”…최장집 “농담이죠?”

    자유한국당이 당 쇄신을 위한 혁신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수많은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는 가운데 그 중 하나로 거론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정미 전 재판관은 3일 국민일보의 취재에 문자 메시지로 “(자유한국당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면서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전했다. 이어 “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정미 전 재판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당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직접 읽었던 바 있다. 이 때문에 국정농단 사건과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몰락해 온 자유한국당으로서는 역발상의 차원에서 당을 재건할 인물로 이정미 전 재판관이 거론됐다. 그러나 대표적인 친박계인 김진태 의원이 “당의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면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는 등 친박계의 거센 반발도 예상됐다. 결국 당사자가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정미 카드’는 쓸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이정미 전 재판관 외에도 여러 인사가 잇따라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농담이겠지. 자유한국당과 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제의가 와도 수락할 생각이 없다”고 여러 매체에 밝혔다. 최장집 교수는 정당 민주주의를 강조해 온 정치학계 거두로,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두번이나 나섰던 이회창 전 총재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데 대해 측근을 통해 불쾌감을 표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된 인사들에 대해 본인의 의사 타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이름만 흘러나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도 도올 김용옥 교수,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 김황식 전 국무총리, 소설가 이문열, 전원책 변호사,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 박관용·김형오·정의화 등 자유한국당 출신 전 국회의장, 심지어 이번 지방선거에서 떨어진 김태호 전 최고위원,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 그리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까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비대위원장 후보군을 줄여가는 기준이 있냐는 질문에 안상수 비대위 준비위원장은 “아직은 없다”면서 “참신한 분을 찾고 있지만 당 현실을 감안했을 때 통합을 추진할 인사가 먼저”라고 말했다. 안상수 위원장은 “주말까지 인터넷 등을 통해 국민공모로 받은 의견까지 고려해 5~6명 선으로 압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DJP연합으로 정권교체 이뤄” “명암 엇갈리지만 큰 족적”

    “DJP연합으로 정권교체 이뤄” “명암 엇갈리지만 큰 족적”

    JP 영정 좌우 文대통령·MB 조화 2007년 틀어진 박근혜 조화는 없어 靑 “文대통령 조문 여부 안 정해져” 충청 출신 반기문·이회창 등 찾아 與도 “선배 정치인 떠나는 길 지원” 27일 발인… 자택서 노제 뒤 화장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24일에도 각계각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빈소를 정면으로 가장 왼쪽에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시작으로 정세균 전 국회의장, 황교안·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조화가 줄지어 놓였다. 오른쪽에는 이명박·노태우 전 대통령의 조화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명의로 조화를 보냈다. 병상에 있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조화도 눈길을 끌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조화는 보이지 않았다. 김 전 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씨의 장녀다.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사촌 형부다. 두 사람은 2007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사이가 틀어졌다. 빈소에는 박 전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 부부가 발걸음했다.여권 인사들은 공과에 관계없이 ‘선배 정치인’인 김 전 총리가 평안히 떠날 수 있도록 장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빈소를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후대에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거인이시라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고 말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김 전 총리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DJP 연합으로) 정권교체라는 큰 시대적 책무를 다한 어르신”이라고 했다. DJP 연합 당시 정치적 동지였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명암이 엇갈리지만 족적이 크다”고 평가했다. 문희상 의원,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날 낮 러시아에서 귀국한 문 대통령이 발인(27일) 전에 빈소를 찾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정의당 심상정 전 대표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동시에 우리 현대사에 짙은 그늘과도 작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조문했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을 비롯해 홍준표 전 대표와 정우택·이명수·홍문표·성일종 의원 등 충청권 의원들, 김무성·나경원 의원 등 중진 의원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한동 전 총리도 빈소를 지켰다. 김 권한대행은 “대한민국 경제가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토대를 세운 업적을 기려 저희가 환골탈태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박주선·유승민 전 공동대표, 손학규 지방선거 상임선거대책위원장, 김동철 비대위원장 등도 일제히 고인의 넋을 기렸다. 한승수 전 총리, 이철우 경북지사 당선자, 남경필 경기지사, 김문수 전 경기지사, 김용채 전 국회의원, 한갑수 전 농수산부 장관,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이태섭 전 과기부 장관, 이긍규·김종학 전 국회의원,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도 조문했다. 충청 대망론을 업고 지난 대선에 도전했다가 포기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빈소를 찾아 “우리 민주 정치의 발전과 산업화 과정에서 참 큰 공적을 이뤘다”고 했다. 생전 고인과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JP가 현역으로 있을 때 서운한 점도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과거의 일이고 상가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JP와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들도 조문했다. DJ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은 “찾아뵙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YS의 차남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버지와 김 전 총리는 오랜 정치생활 동안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를 때도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두 분이 정말 각별한 사이라 애석하다”고 했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 방송인 송해, 가수 하춘화·김추자씨, 배우 정혜선, 성우 고은정씨도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준상주 역할을 맡은 정진석 한국당 의원은 장례 일정에 대해 “27일 오전 6시 30분에 빈소에서 발인제를 간단하게 지내고 영결식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27일 오전 9시 김 전 총리의 자택이었던 청구동에서 노제를 지내고서 오전 11시 서초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할 예정이다. 이후 고향인 부여의 가족 묘원으로 가는 길에 고인이 다녔던 공주고 교정을 잠시 들를 계획이다. 장례위원장은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 부위원장은 정우택·정진석 의원과 심대평 전 충남지사 등이 맡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휠체어 타고도 고향 찾았는데…충청의 거목 잃었다”

    부여에 분향소…주민 발길 줄이어 “2인자의 삶, 충청의 족쇄” 평가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고향인 충남 부여군과 충청 지역 주민들은 “큰 인물을 잃었다”며 안타까움과 함께 애도를 표했다. JP가 태어난 부여군 규암면 외리2구의 이장 이일건(62)씨는 24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80대에도 휠체어를 타고 부여 행사에 참석할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면서 “마을에 오면 금일봉을 내놓거나 동답(洞畓·마을 공동 논)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1987년 김 전 총리가 창당한 신민주공화당 후보가 선거에 나오면 부여에서 90% 이상 지지율이 나왔다”며 “그러면 득표율이 전국 1등이라며 당에서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는데 김 전 총리 부부가 당 간부들을 데리고 참석했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아직 김 전 총리의 생가가 있다. 이씨는 “김 전 총리가 생가에 공원을 만들려다가 당시 소유주가 팔지 않아 무산됐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호남에서 ‘김대중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 부여에서는 김 전 총리를 ‘김종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주민도 적지 않았다. 최근 들어 ‘JP가 고향에 한 게 뭐가 있느냐’고 꼬집는 사람도 있지만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다. 부여 토박이 이재만(59)씨는 “지금 와서 그러지만 숙원사업 해결에 JP의 공이 많다”며 “정치적 평가야 엇갈릴 수 있지만 지역에서는 어쨌든 큰 인물”이라고 했다. 부여군은 부여중학교 내 군민체육관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오는 27일 발인이 끝날 때까지 운영한다. 이날도 분향소에는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JP가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로 있을 때 부여군수를 지낸 유병돈씨는 “한 달 전에 자택을 찾아갔을 때 반갑게 맞아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더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분향소를 찾은 박정현(더불어민주당) 부여군수 당선자는 “부여군민은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충청 지역 정치권도 일제히 애도했다. 김 전 총리는 충청권 기반의 자민련을 창당하며 ‘충청의 맹주’로 불렸다. 양승조 충남지사 당선자는 “제2인자라는 삶이 충청에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의 별세를 도민과 함께 애도한다”고 밝혔다. 부여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김종필 약력]초대 중정부장에서 ‘영원한 2인자’로

    ▲1926년 1월= 충남 부여군 출생 부여국민학교 공주중학교 서울사대 중퇴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1951년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인 박영옥씨와 결혼(슬하에 1남 1녀) ▲1961년 5월= 5·16 군사혁명 참여, 초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1월= 육군 준장 예편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자의반 타의반’ 외유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부여), 민주공화당 의장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부여)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전국구) ▲1971년 6월= 국무총리 취임 ▲1973년 2월= 9대 국회의원(유정회) ▲1975년 12월= 국무총리 퇴임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부여) ▲1979년 11월= 공화당 총재 ▲1980년 6월= 정계은퇴,도미 ▲1987년 9월= 정계복귀 선언 ▲1987년 10월= 신민주공화당 창당,총재 ▲1987년 12월= 13대 대선 출마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부여) ▲1990년 1월= 3당 합당,민주자유당 최고위원 ▲1992년 3월= 14대 국회의원(부여) ▲1992년 8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3년 2월= 민자당 대표위원 ▲1995년 2월= 민자당 탈당 ▲1995년 3월= 자유민주연합창당 총재 ▲1996년 4월= 15대 국회의원(부여) ▲1997년 11월= 15대 대선후보 DJP 단일화 선언, 자민련 명예총재 ▲1998년 2월=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김대중 정부 출범) ▲2000년 1월= 자민련 명예총재로 복귀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전국구) ▲2001년 9월= DJP 공조 파경(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가결시킴) ▲2004년 4년월= 17대 총선서 자민련 4석 확보에 그쳐 비례대표 1번 탈락. 정계은퇴 선언 ▲2008년 12월= 뇌졸중 발병 ▲2013년 12월= 운정회 창립 ▲2015년 2월= 부인 박영옥 여사와 사별 ▲2016년 3월= <김종필 증언록> 발간 ▲2018년 6년 23일= 노환으로 별세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100명씩 일회성 상봉… “나는 언제쯤” 애끓는 이산가족들

    100명씩 일회성 상봉… “나는 언제쯤” 애끓는 이산가족들

    전례 따라 두 차례로 나눠 진행될 듯 무작위 컴퓨터 추첨으로 3~5배수 뽑아 생사확인 등 거쳐 8월 4일 최종 결정 南점검단 27일 면회소 보수 위해 방북 北억류 6명·탈북 女종업원도 논의한 듯남북이 22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적십자회담을 통해 오는 8월 20~26일에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갖기로 함에 따라 2년 10개월 만에 금강산 면회소에서 ‘눈물의 상봉’이 이뤄지게 됐다. 다만 이번에도 남북 각각 100명으로 일회성 상봉에만 합의했다. 애가 타는 이산가족들에게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남측 수석대표인 박경서 대한적십자사(한적) 회장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인도주의적 원칙에 의한 이산가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만나기로 합의했다”며 “숫자(상봉 규모)보다 더 깊은 장기적인 문제들이 합의됐다”고 밝혔다. 또 “생사 확인부터 정례적으로 만나고 성묘도 가고, 화상 상봉을 하든지 고향 방문단을 만든다는 것까지 얘기하고 과거 총재들이 합의한 문제들까지 어떻게 할지 말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덧붙였다. 2015년 9월 적십자 실무 접촉 이후 약 3년 만에 열린 이날 남북 적십자회담은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7시 20분에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박 회장은 북측에 억류 중인 우리 국민 6명과 중국식당에서 집단 탈북한 북한 여성들의 송환 문제와 관련한 질문에 어느 정도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하면서도 분명한 언급은 자제했다. 양측 간에 논의는 있었지만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해 무드가 지체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 남북 양측이 공감한 것으로 해석된다. 공동보도문에 따르면 오는 27일 남측 시설 점검단은 금강산 면회소를 보수하러 방북한다. 2015년 20차 상봉 행사(10월 20~26일) 이후 운영을 하지 않았고, 2008년 7월 완공 이후 10년간 특별한 보수도 없었다. 따라서 남측은 건물 안전 상태, 통신 시설, 전력 공급 상황 등과 관련해 상당 수준의 보수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한적은 상봉자 선정을 위해 바로 후보자 선정 기준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중 무작위 컴퓨터 추첨으로 상봉 인원의 3∼5배수를 먼저 뽑은 뒤, 당사자에게 상봉 의사 및 건강 상태 등을 확인해 2배수를 선정한다. 다음달 3일까지 북측과 교환키로 한 생사확인의뢰서에 이들이 찾는 가족의 명단이 오른다. 이후 7월 25일까지 생사 확인 결과를 담은 회보서를 교환하고, 마지막으로 남북은 최종 대상자 명단을 8월 4일 맞바꾼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전례에 따라 두 차례로 나뉘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8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각각 2박 3일 내지 3박 4일간 남측 상봉단 100명이 금강산 면회소에서 북측의 가족들을 만나고, 이어 북측 상봉단 100명을 만날 남측 가족들이 금강산 면회소를 찾는 식이다. 지난 20차 상봉 행상에서도 이런 식으로 총 972명이 가족을 만났다. 다만 남측의 이산가족 5만 6890명 중에 63.2%(3만 5960명)가 80세 이상인 상황임을 감안하면 상봉 규모는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보도문에 ‘적십자회담과 실무접촉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한 인도적 문제들을 계속 협의’키로 하면서 상봉 규모 확대 및 정례화,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고향 방문, 화상 상봉 등 이산가족 문제의 전면적 해결 가능성은 남아 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금강산 공동취재단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월드 Zoom in] 日의 ‘대물림되는 금배지’…자민당, 개혁 추진했지만…

    [월드 Zoom in] 日의 ‘대물림되는 금배지’…자민당, 개혁 추진했지만…

    아들 위해 선거 코앞서 은퇴해 기득권 반발에 개선안 유야무야지난해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465명 중 26%(120명·마이니치신문 집계 기준)는 이른바 ‘세습의원’이었다. 세습의원은 부모나 조부모 등 3촌(친가·처가·시댁·외가) 이내 친족이 의원을 지낸 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을 뜻한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손자 나카소네 야스다카, 고무라 마사히코 전 자민당 부총재의 장남 고무라 마사히로 등이 지난 선거에서 새로 국회에 입성했다. 여당인 자민당의 세습의원 비중은 전체의 34%에 이른다. 3명 중 1명꼴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물론이고 당권 경쟁자인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고이즈미 신지로 수석부간사장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세습의원이다. 이들은 ‘지반’(아버지 등이 닦아 놓은 지역기반), ‘간반’(간판·지명도), ‘가반’(돈가방·자금력) 등 이른바 ‘3반’의 프리미엄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용납되기 힘든 ‘기울어진 운동장’의 정치 입문 환경이다. 자민당 정치제도개혁실행본부는 지난 15일 당 소속 의원의 지역구 세습을 제한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확정하고 이달 중 아베 총리에게 제출하기로 했다. 개혁실행본부는 “의원 세습은 정당성의 증명과 유권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 당 전체에 마이너스가 된다”고 밝혔다. 개선안의 핵심은 ‘세습 후보가 중의원 소선구에 입후보할 때에는 비례대표에 중복 입후보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현직 의원이 친족을 후계자로 내세울 경우에는 임기 만료까지 일정 기간 여유을 두고 사퇴 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초 내걸었던 개혁의 기치에 비해서는 턱없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는 의견이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의원직 사퇴 표명 시한의 경우 당초 원안에는 ‘의원직을 가족 등에게 세습할 경우에는 본인의 임기가 끝나기 최소 2년 전에 반드시 은퇴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들 등에게 의원직을 물려주기 위해 선거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사퇴를 밝히는 관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촉박한 사퇴를 통해 공천 후보자들을 다양하게 검토할 시간을 당에 주지 않음으로써 가족·친족 공천을 유리하게 이끄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세습의원들이 “의원이 너무 일찍 은퇴 의사를 밝히면 재임 중 힘이 약해진다”는 등의 이유로 반발했고, 결국 개혁실행본부는 ‘은퇴 전 2년’이라는 시한을 삭제하고 ‘공모에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시기’로 애매하게 후퇴했다. 세습의원의 부작용을 완화하려고 추진한 개선안이 결국 세습의원들의 힘에 밀려버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세습되지 않은 ‘자수성가’형 의원들일수록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도 세습의원들의 기득권 방어에 유용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제2차 아베 내각 출범 직전인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초선 의원들이 각종 비리나 실언 등을 많이 저질렀다. 당시 초선 의원들은 대부분 (세습이 아닌) 공모로 선택된 사람들이었다”고 전했다. 비세습의 한 중진의원은 “세습의원들은 별로 고생을 모른다”며 “정치 입문의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반면 자신의 친족에게 의원 자리를 물려줄 계획을 갖고 있는 한 중견의원은 “선거구마다 사정이 다 다른데 부정확한 잣대로 의원 세습을 재단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日 니가타현 지사 선거 與 깜짝 승리

    이른바 ‘모리가케 스캔들’(모리토모학원과 가케학원에 대한 부당한 지원 의혹)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여당이 중요한 선거에서 승리를 했다. 사실상 여야 총력전으로 관심을 모았던 니가타현 지사 선거에서 여당이 지원한 후보가 당선됐다. 10일 실시된 니가타현 지사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지원한 무소속 하나즈미 히데요(60) 후보가 5개 야당이 추천한 이케다 지카코(57) 후보 등을 누르고 당선됐다. 54만 6000여표를 얻은 하나즈미 후보는 3만 7000여표 차이로 이케다 후보를 눌렀다. 지난 4월 요네야마 류이치 지사가 여성 문제로 중도 사퇴를 하면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등을 앞두고 민심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여야 모두 이번 선거를 내년 여름에 있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 성격으로 규정짓고 적극적인 후보 지원 활동을 폈다. 특히 5개 야당은 ‘아베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이케다 후보에 대한 거리 지원유세를 했다.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은 이번 결과가 당 총재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아베 총리에게 호재”라며 아베 총리의 3연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야당도 손해 본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투표 전 여론조사 때 나타났던 하나즈미 당선자와의 격차가 최종 결과에서는 상당폭 좁혀진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 측은 “모리토모와 가케학원 문제에서 보였던 정부의 문서조작 등 국민의 불신감을 증폭한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투표에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아베 지지율 최악… 고이즈미 “6월 국회 임기는 채울 듯”

    ‘정치 스승’ 고이즈미 사임 전망 “아베, 내년 참의원 선거에 걸림돌” 안팎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지지도가 취임 이후 최악으로 떨어졌다. 아베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지난달보다 4% 포인트 상승하면서 제2차 아베 내각 출범(2012년 12월) 이후 5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주말인 지난 14일 도쿄 중심부 국회의사당 앞에서 3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인 가운데 열린 아베 내각 퇴진 시위에서 나타난 싸늘한 민심이 여론에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한 4월 여론조사(14~15일 전화설문) 결과에 따르면 아베 내각 지지율은 31%로, 2차 아베 정권 출범 이후 가장 낮았던 지난달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2%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66%는 최근 아베 총리의 언행에 대해 “신용할 수 없다”고 했고, 59%는 “장기 집권의 폐해를 느낀다”고 응답했다. 정권 지지율 하락의 결정타가 되고 있는 ‘모리토모 학원’과 ‘가케 학원’ 등 두 사학재단 파문과 관련한 아베 총리 측의 설명에 대해서는 76%가 “납득할 수 없다”고 반응했다. 전날 보도된 교도통신의 여론조사에서도 내각 지지율이 보름 전 실시했던 동일한 조사보다 5.4% 포인트나 떨어지면서 37.0%로 내려앉았다.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7.5%에서 52.6%로 5.1% 포인트 높아지며 과반을 넘어섰다. 여성 응답자만 놓고 보면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29.1%까지 떨어졌다. 일본 정가에서는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20%대에 진입하면 총리가 사퇴해야 하는 수준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는 9월 차기 자민당 총재에 어울리는 인물에 대한 물음에서 아베 총리는 아사히신문 조사와 교도통신 조사에서 각각 2위와 3위로 밀렸다. 아사히신문 조사에서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27%, 아베 총리가 22%였다. 교도통신 조사에서는 이시바 전 간사장 26.6%,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 25.2%, 아베 총리 18.3%로 나왔다. ‘아베 총리의 정치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고이즈미 전 총리는 주간지 슈칸아사히와 가진 최신호 인터뷰에서 아베 정권의 전망에 대해 “위험해졌다. 아베 총리의 (총리직) 사퇴는 현 국회가 끝나는 때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소집돼 있는 통상국회(정기국회)는 오는 6월 20일까지 지속된다. 아베 총리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2002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관방장관으로 수행하는 등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아베 총리가 스캔들과 관련이 있으면 그만둔다고 했지만, 지금은 들통날 거짓말을 뻔뻔하게 하고 있다고 국민은 생각한다”고 말했다. 6월 사퇴를 전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리토모·가케 학원 문제에 깊이 연루돼서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영향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회가 끝나면 1년 전부터 참의원 선거운동 준비를 하므로 공천할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며 “아베 총리로는 선거를 할 수 없다고 후보들이 불안해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신동욱 “이인제 충남지사 출마, 올드보이 아닌 계륵보이”

    신동욱 “이인제 충남지사 출마, 올드보이 아닌 계륵보이”

    자유한국당 이인제 전 의원이 3일 ‘6·13 지방선거’ 충남도시자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이 전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충청을 가장 젊은 희망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저보다 더 유능한 인물이 후보가 되어 침체된 충청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고대했지만, 당 안팎의 어려운 상황이 저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다.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오랜 정치 경험에서 단련된 역량을 다 바쳐 반드시 선거를 승리로 이끌겠다”고 말했다. 경기도지사와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이력이 있는 이 전 의원은 그간 여러 차례 정치적 고비를 겪으면서도 불사조(피닉스)처럼 재기해 ‘피닉제’(피닉스+이인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이날 트위터에 “한국당 이인제 충남지사 출마 선언, 올드보이 아니라 계륵보이 꼴이고 피닉제 아니라 박물관용 후보 꼴이다. 돌려막기 카드 꼴이고 울며 겨자 먹기 꼴이다. 버리긴 아깝고 먹으면 탈나는 후보 꼴이고 흘러간 레코드 꼴이다. 한물간 빅매치 꼴이고 총알받이로 안성맞춤 꼴이다. 유통기한 끝난 후보자 꼴”이라는 평을 남겼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6·13 선거현장] 지킨다는 서병수·벼르는 오거돈…부산시장 4년만의 리턴매치 되나

    [6·13 선거현장] 지킨다는 서병수·벼르는 오거돈…부산시장 4년만의 리턴매치 되나

    서병수 한국당 후보 재선 도전 민주 인지도 앞선 오거돈 유력 정경진·최옥주 맞서 경선 3파전 바른미래 이성권 세대교체 노려 ‘서병수 대(對) 오거돈 4년 만의 리턴매치 성사될까.’25일 정치권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서병수 시장을 확정했고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력한 상황에서 2014년 6월 지방선거가 재현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 서 시장은 새누리당(현 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오 전 장관은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민주당을 포함해 범야권 단일 후보였다. 서 시장은 오 전 장관에게 1.4% 포인트 차이의 득표율로 이겼다. 부산 해운대구기장군갑에서 16~19대 국회의원을 했던 서 시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한때 서 시장을 배제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후보로 고려됐던 이들이 잇따라 불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결국 서 시장이 최종 낙점됐다. 민주당 부산시장 경선은 오 전 장관과 정경진 전 부산시 행정부시장, 최옥주 대한민국옴부즈맨총연맹 총재의 3파전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오 전 장관은 부산시에서 쭉 공직을 맡아왔고 시장 권한대행까지 맡으며 지역에서 인지도가 높다. 민주당 부산 지역구 현역의원이 출마 준비를 하면서 한때 오 전 장관 출마에 빨간불이 켜질 수도 있었지만 현역의원이 모두 불출마하면서 오 전 장관으로 정리된 상황이다. 오 전 장관은 1000만 자립형 해양도시권 건설, 동북아 해양수도 타운 조성 등을 공약했다. 오 전 장관에 맞서는 정 전 부시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대역전극을 만들겠다며 당내 경선을 위해 시민 선대위원장을 모집했다. 노 전 대통령과 같은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던 정 전 부시장은 “노 전 대통령처럼 흙수저로 태어났고 부산상고를 다니고 어렵게 공부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며 “노 전 대통령처럼 부산의 적폐를 청산하고 부산을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 가는 대장정에 나선다”고 각오를 밝혔다. 바른미래당의 부산시장 예비후보인 이성권 전 의원은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부산 진구을에서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전 의원은 서 시장과 오 전 장관 등에 맞서 40대 젊은 이미지를 강조하며 세대교체를 내세웠다. 정의당에서는 부산시의원을 지낸 박주미 부산시당위원장이 “우리 사회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며 출마 선언을 했다. 한국당을 탈당한 이종혁 전 최고위원은 무소속으로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이주열 한은 총재, 사실상 첫 연임

    이주열 한은 총재, 사실상 첫 연임

    금리를 조율하는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겸하는 한국은행 총재의 첫 연임이 결정됐다.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21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한은 총재 연임은 1974년 김성환 전 총재 이후 44년 만이며 전체적으론 세 번째다. 그러나 1998년 이전엔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첫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기재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이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한 뒤 곧바로 여야 만장일치로 ‘적격’ 의견을 담은 청문보고서 채택 안건을 의결했다. 새 정부 들어 대통령 지명을 받은 후보자 가운데 청문회 당일 경과보고서가 채택된 사례는 이진성 헌법재판소장과 권순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에 불과했다. 여야 의원들은 이 후보자 개인의 도덕적 흠결보다는 정치적 독립성 등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과 관련된 질의에 집중했다. 현직 한은 총재에서 연임 지명된 데다 그간 대과 없이 한은을 끌어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후보자는 4년 전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한은 총재 후보자로는 처음으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총재에 임명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230만원 상당 옷·명품백… 이팔성의 ‘초호화 로비’

    1230만원 상당 옷·명품백… 이팔성의 ‘초호화 로비’

    檢 “李, MB에 19억 뇌물 건네” 김여사 ‘공모’ 적시…조사 불가피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가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부터 22억 6230만원 상당의 ‘초호화 로비’를 받은 정황이 포착됐다.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인사 청탁 명목으로 금품 외에도 고가의 맞춤 의류와 명품 가방 등을 이 전 대통령 측에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혐의에 대해선 김윤옥 여사를 ‘공모 관계’로 규정했다. 20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2008년 1월 김 여사를 통해 모두 4회에 걸쳐 현금 3억 5000만원과 함께 1230만원 상당의 의복을 이 전 대통령 측에 제공했다. 검찰은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100만원을 호가하는 맞춤형 양복 7벌과 코트 1벌까지 총 8벌의 의복이 제공된 걸로 파악했다. 이처럼 이 전 회장은 2008년 1월부터 같은 해 4월까지 우리금융지주 회장, 산업은행 총재 등 주요 금융기관장 직책이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바라며 이 전 대통령에게 19억 6230만원에 달하는 뇌물을 건넨 걸로 전해졌다. 이 전 회장은 이 전 대통령의 사위인 이상주 삼성전자 전무와 작은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통해 현금과 선물을 정기적으로 건넸다. 나아가 이 전 회장이 2010년 12월 회장직 연임을 앞두고 240만원 상당의 루이뷔통 가방에 담은 현금 1억원을 비롯해 도합 3억원을 전달한 정황에 대해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김 여사와 이 전무와 함께 공모했다’고 봤다. 이 전 대통령은 연임 전례가 없음에도 2011년 2월 이 전 회장을 우리금융지주 회장추천위원회에 단독 후보로 내정시켜 연임을 확정 지었다. 김 여사가 이 전 대통령의 영장에 공모 관계로 적시됨에 따라 검찰 조사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검찰은 김 여사가 다스 법인카드를 통해 유용한 4억원과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통해 건네받은 10만 달러(약 1억 500만원)에 관한 정황도 살펴보고 있지만, 이번 영장엔 기재하지 않았다. 특히 10만 달러 불법 수수 의혹은 수사 초기부터 김 전 실장의 폭로로 드러났으나 이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대북 공작용으로 내가 직접 받았다’는 취지로 진술함에 따라 향후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걸로 보인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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