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홧발에 짓밟힌 민주주의, 끝내 사과는 없었다
행정안전부, 국가장 예우 여부 검토역사적 과오 사과 표명 없어 국가장 쉽지 않을 듯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신군부’는 시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국민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의 계속 될 것으로 봤지만 이는 얼마 가지 못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정치 과도기적 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고 빗댔다. 1980년 2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였다.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무너져 곧 민주화가 이뤄지고 김대중 또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소한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 김종필 총재나 최규하 대통령이 상당 기간 정권을 이끌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3김 회동’에서 김 전 국무총리는 ‘춘래불사춘’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석 달도 되지 않아 광주 유혈진압을 통해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이 지역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된 ‘5.18 유혈진압’은 9일 뒤인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의 전남도청 접수로 ‘악몽의 10일’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열흘의 기억은 훗날 전두환 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된다.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됐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해 3월 역시 체육관 간선제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신군부 독재’ 5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시행하며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에 주력했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신군부 정권의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아울러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하에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공포 정치를 펼치기 위해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했다.
정치인은 물론 재야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면 가차 없이 잡아들여 고문을 자행했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기도 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폭력상은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경찰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군을 불법 체포한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 사망케 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도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했다.5개월 뒤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대정부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6·10 민주항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학생, 회사원 할 것 없이 전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다.
앞서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전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해 6월 2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5공화국의 종식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다시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의 치적이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던 데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라는 미국의 압박 등에 결국 물러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이라는 큰 역사적 과오를 짊어지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사과 표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의 발언으로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이후 2003년 방송 인터뷰를 통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하는 등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선고받은 추징금 2205억원을 완납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이 이날 사망하면서 그의 장례 절차에도 관심이 쏠리지만 ‘국가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살다 지난달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 전례가 있지만, 전 씨의 경우 과거의 과오에 대해 나름의 반성의 뜻을 표한 노 전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여온 만큼 장례와 관련한 예우도 다를 가능성이 크다.
행정안전부는 이날 전 씨의 사망 소식을 확인한 직후 국가장 등 예우 대상이 될지 여부에 대한 검토에 돌입했다.
국가장법은 2조에서 전·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사망시 국가장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중대 범죄를 저질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의 목적을 담은 1조는 “이 법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사회에 현저한 공훈’이 있거나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을 국가장의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국가장법은 국가장 여부의 결정 절차에 대해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해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적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노 전 대통령 사망 때는 고심 끝에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는 예우를 하기로 하면서 비판 여론을 고려해 정부 차원의 분향소를 차리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에 조기 게양을 독려하지 않았다.
전 씨는 법이 정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대상이 아니기도 하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7조)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되긴 했지만 이런 ‘결격 사유’를 해소할 요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전 씨의 반성 없는 행보에 여권 등 정치권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지난달 노 전 대통령의 장례 때부터 이미 전 씨의 국가장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왔다.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은 지난달 28일 CBS라디오에 나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국가장이나 국립묘지 안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케이스“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