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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대통령과 40년 인연 최순실 “언니라고 부르지만 절친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40년 인연 최순실 “언니라고 부르지만 절친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 의혹’ 당사자인 최순실 씨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순실 씨는 박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로 알려진 고(故) 최태민 목사의 다섯 번째 딸로 최 씨와 박 대통령은 40년 인연을 맺고 있다. 박 대통령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됐는데, 당시 최 목사가 상심에 빠진 박 대통령에게 ‘위로 편지’를 보내면서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최 목사는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를 맡고, 박 대통령이 명예총재를 맡기도 했다. 최 목사는 지난 1990년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을 때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박 대통령의 동생 근령 씨는 최 목사의 전횡을 비난하며 “최태민 씨에게 포위당한 언니 박근혜를 구출해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도 했다. 최 목사는 1994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최 목사가 숨진 이후 최순실 씨는 항상 박 대통령 곁을 지켰다. 1952년생으로 박 대통령보다 네 살이 어린 최 씨는 1975년 단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이어 같은 대학원 영문학과를 수료했으며,최근 최서원으로 개명했다. 최 씨는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 원장을 지냈고, 1990년대에는 강남구 신사동에 몬테소리 교육으로 유명한 초이유치원을 열었다. 최 씨는 정윤회 씨와 결혼해 딸 정유라를 뒀으며 2014년 5월에 정 씨와 이혼했다. 최 씨는 박 대통령이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에도 박 대통령 곁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박 대통령이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당시 습격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최 씨의 언니가 병실에서 박 대통령을 간호한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핵심 친박(친박근혜계)계 의원들 조차 사석에서 최 씨를 만나거나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최 씨가 주도해 설립한 미르재단의 이성한 전 사무총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 씨가 대통령에게 시키는 구조”라며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없다.최 씨한테 물어보고 승인이 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폭로성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최 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 씨 역시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정 씨는 지난 2002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에는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공개적으로 박 대통령을 보좌했다. 또 ’문고리 3인방‘으로 통하는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도 정 씨가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최 씨 일가는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비선 실세‘라는 단골 공격 대상이었다. 특히 지난 2014년 11월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 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은 당시 정 씨를 수사한 뒤 국정 개입 의혹은 허위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청와대 감찰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며 “최순실 씨가 1위, 정 씨 2위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해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때까지 공식캠프 외에 ’삼성동팀‘, ’논현동팀‘ 등의 비선 조직을 가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 가운데 최 씨가 삼성동팀의 몸통이라는 설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에 대해 “아는 사이인 건 분명하지만, 절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라면서 “(최 씨가)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고 40년간 절친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날 박 대통령이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 있다”고 밝히면서 박 대통령이 최 씨의 조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로 드러나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국방부 보도자료 논란 “박정희, 광복군 활동” 5·16 군사쿠데타는 생략

    국방부 보도자료 논란 “박정희, 광복군 활동” 5·16 군사쿠데타는 생략

    국방부 산하 기관인 국립서울현충원이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37주기 추모식 보도자료에서 ‘박 전 대통령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다’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명시해 논란을 빚고 있다. 24일 국방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이력에는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3년간 재직했으며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써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광복군에서 활동했다는 내용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다. 일각에서 박 전 대통령의 ‘비밀 광복군’ 가담을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서 활동하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시류에 편승해 광복군에 잠시 가입한 기록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 만주군관학교를 가기 전 혈서를 쓴 것은 만주신보에도 나와 있다’며 광복군 활동 근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 주도 부분은 빠져있다. 자료에는 “정부수립 이후 국군장교로 복무, 1963년 대장으로 예편해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고만 적혀 있다. 지난해 자료에는 “1961년 육군소장으로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다”고 기재됐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의 37주기 추모식은 오는 26일 오전 11시 서울 동장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다. 민족중흥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박 전 대통령의 유족, 정·관계 인사, 추모객 등 5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나이 차별이 없는 사회를 위하여/이창길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나이 차별이 없는 사회를 위하여/이창길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새파랗게 젊은 것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못해 먹겠다.” 얼마 전 국정감사를 받던 70대 한 기관장의 말이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멸시와 비하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질문한 사람들은 50대 중반의 국회의원이었음에도 오직 나이라는 잣대 하나로 그들의 지위와 역할, 지식이나 능력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정작 나이를 이유로 수모당한 직접적인 피해자는 오히려 그 ‘젊은 것들’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태도와 언행은 노인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연령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일상이다. 10여년 전 40대 초반에 취임한 행정자치부 장관이 국회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당시 60대 중반의 국회의원으로부터 “젊은 나이에 장관 됐는데 기분 좋지요?”, “아직 장관이 젊어서 잘 모를지 모르지만”, “내가 나이도 장관보다 많고” 등 무수한 조롱을 받았다. 그는 결국 6개월 만에 물러나고 만다. 나이를 들먹이며 행해지는 부당한 차별은 직장에서 더 심각하다. 20·30대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하게 되면 직장에는 모두 ‘어른들’뿐이다. 10년 이상 자신을 낮추고 온갖 잡일 다 해가며 나이 든 선배와 상사를 모시다가 40대가 돼야 겨우 한숨을 돌린다. 오죽하면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입사 후 마흔이 되기 전까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서 “나이 차별이 있는 한 한국은 성공할 수 없다”고 했겠는가. 그래서인지 50대를 넘기면 이제부터 ‘내 맘대로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나이 차별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사회적 편견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고 성인의 권리를 훼손하기도 한다. 또한 인간 관계를 수직적으로 서열화함으로써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을 가로막는다. 나아가 젊은 세대에게는 부당함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고 약자로서의 비굴함을 키운다. 최근 5년간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행위 상담 건수를 보면 나이와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이 장애인과 성희롱 다음으로 많았다. 두 유형의 진정 접수 건수를 합하면 매년 200~300건으로 성희롱 진정 접수 건수를 능가한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잘못된 편견은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새파랗게 젊은’ 세대를 위한 ‘나이차별금지법’을 만들자. 고령자를 부당하게 차별하는 노인차별주의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청년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고용상의 연령차별금지’만이 아니라 업무와 생활상의 차별 행위도 금지해야 한다. 양성평등법의 성희롱 규정과 같이 젊은 세대들이 연령에 의한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모든 영역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도록 하자. 또한 나이 ‘차별’만이 아니라 나이 ‘괴롭힘’도 금지하자. 영국의 연령차별 규칙도 나이를 이유로 적절치 못한 언행, 모욕적인 농담, 사회적 모임으로부터의 배제 등의 괴롭힘을 모두 차별금지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연장자 중심의 제도와 관행도 바꾸어야 한다. 직장에서 보수 지급 기준은 여전히 직무나 직급보다 나이와 근속연수가 먼저다. 20대 후반에 입사해 30대, 40대까지 어렵고 힘들게 살다가 근속 호봉이 빵빵한 50대에 도달하면 악착같이 기득권을 지키는 세대 간의 차별적 악순환을 끊을 수는 없을까. 지난해 논란 끝에 확정된 공무원연금제도의 개혁 역시 젊은 재직 공무원이나 신입 공무원들의 희생과 부담만을 더욱 키웠다는 평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모두 인정하고 선관위까지 나서 제안한 선거 연령 18세 인하 법안은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 한윤형은 “20대는 386 부모 세대의 훼방만 이겨 낸다면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정상회담’ 프로그램 미국 대표였던 타일러는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도 참아 내는 우리들의 비정상을 “참지 말고 항의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나이 중심의 위계질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계급과 권위가 아니라 존경과 감사의 상징이 될 수는 없을까.
  • 대통령도 제1야당 대표도 여성… 한번도 가지 않은 길 가는 한국

    대통령도 제1야당 대표도 여성… 한번도 가지 않은 길 가는 한국

    지난 27일 추미애(오른쪽)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로 선출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헌정 사상 초유의 ‘여성 여야 영수(領袖) 시대’가 열렸다. 현직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동시에 여성인 경우는 우리 정치 사상 처음으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나아가 지나치게 정쟁적인 특징을 보이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여성 정치 리더십이 기존의 남성 리더십과 어떤 차별성을 보일지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과 함께 대한민국이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새달 박대통령-여야 지도부 회동 전망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 대통령(왼쪽) 취임 이후 새누리당에서 한번도 여성 대표가 나온 적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추 대표 선출은 여야를 막론한 ‘첫 여성 대통령-첫 여성 유력 정당 대표’라는 의미 부여도 가능하다. 2014년 당시 박영선 의원이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을 2개월간 임시로 이끈 적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정식 당 대표는 아니었다. 또 추 대표 이전에 이미 정의당에서 여성인 심상정 대표가 뽑혔지만 정의당은 원내교섭단체가 아니다. 과거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했던 권위주의 정치 시절이라면 여성 대통령과 여성 야당 당수가 청와대에서 만나 담판을 짓는 ‘여성 여야 영수회담’도 가능해진 셈이다. 영수회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은 다음달 중으로 여야 3당 지도부와 회동할 것으로 보여 여성 대통령과 여성 제1야당 대표의 만남이 임박해 있는 상황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여야 3당 원내대표와 만나 당 대표 회동을 분기별로 정례화하기로 합의했었다. 돌발 변수가 없는 한 박 대통령은 다음달 초 해외 순방과 중순의 추석 연휴가 끝난 이후인 하순쯤 3당 대표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女장관 2명뿐… “여성 정치시대” 일러 여성 여야 영수 시대는 대통령제 대표 국가인 미국을 비롯해 우리보다 민주정치 역사가 앞선 대부분의 선진국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사례여서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을 만하다. 지극히 남성 위주의 유교적 왕조시대에서 벗어나 민주정치가 도입된 지 불과 68년 만에 이뤄진 변화라고 보면 드라마틱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반면 현재 17개 광역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전무하고, 박근혜 정부 내각 19명 중 여성 장관은 2명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여성 정치시대’라고 부르기엔 한참 이른 측면도 있다. 20대 총선 당선자 300명 중 여성이 51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건 그나마 고무적인 부분이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추미애 대표 선출…역대 여성 당수 계보 보니?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추미애 대표 선출…역대 여성 당수 계보 보니?

    더불어민주당의 새 대표로 추미애 의원이 27일 선출되면서 한국 정당사에서 여성 당수 계보가 새로 쓰여질 전망이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당 대표는 야당 소속이었던 고(故) 박순천 여사다. 서울 종로를 지역구로 한 제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국회에 몸을 담았던 박 여사는 1963년 민주당, 1964년 통합야당인 민중당 총재를 각각 역임했다. 그는 당시 야당의 최고 원로이자 최다선(5선) 여성이기도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남성 의원들의 공격에 “나랏일이 급한데 암탉·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 쓰겠냐”고 응수하기도 했다. 박 여사는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87년 대선 패배 뒤 평화민주당의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고 박영숙 여사가 총재 권한대행을 맡은 적이 있다. 한국 여성운동계의 대모로 불린 박 여사는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에 따라 안철수재단의 전신인 동그라미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도 새누리당 계열의 보수정당 사상 첫 여성 당수로 기록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진두지휘하며 당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역할을 자임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며 ‘천막당사’라는 한 수로 ‘탄핵 역풍’을 맞았던 한나라당의 침몰을 막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으로 1당을 차지했지만 맥도 못 출 것이라던 한나라당은 개헌 저지선인 100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은 대선 직전이었던 2011년 말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또 한 번의 구원등판으로 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 이후 아직 새누리당은 여성 당 대표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이다. 네 번째 여성 당수는 참여정부 때 사상 첫 여성총리를 지낸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다. 한 전 대표는 2006년 총리로 발탁된 데 이어 2012년 당 대표를 맡았다. 한 전 총리는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과반 의석을 내주면서 취임 89일 만에 물러났다. 작년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확정판결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보냈다. 박 대통령과 한 전 총리가 각각 여야 양대 정당의 당수였을 당시 군소정당이었던 통합진보당에서도 심상정·이정희 공동대표가 당을 지휘해 그야말로 ‘여성대표 전성시대’였다. 이번 전대를 통해 선출된 추 대표는 ‘민주당’ 역사상 첫 TK(대구·경북) 출신 대표이다. 헌정 사상 첫 지역구 5선 여성 의원으로 정치사에 이름을 올린데 이은 기록이다. 박 대통령도 5선이지만 마지막 19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이 밖에도 2014년 박영선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겸했지만 약 2개월 만에 문희상 의원에게 비대위원장 자리를 넘겼다. 2006년 박근혜 당시 대표에 이어 최고위원 승계 서열에 따라 대표직을 물려받은 김영선 전 의원은 전당대회까지 24일간 대표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베 4년째 가해책임 회피… 일왕은 2년째 ‘깊은 반성’

    아베 4년째 가해책임 회피… 일왕은 2년째 ‘깊은 반성’

    정부 “각료·의원 참배 강행 유감” 아키히토 일왕이 15일 일본 종전일(패전일) 희생자 추도식에서 2년 연속 ‘깊은 반성’을 표명했다. 그는 이날 도쿄 지요다구 부도칸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메시지를 또박또박 낭독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또 “전화(戰禍)에 쓰러진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가 한층 더 발전하길 기원한다”며 추도사를 마쳤다. 그가 지난 8일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뒤 왕궁 이외에서 공무에 나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고베여대 가와니시 히데야 교수는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서 일본의 가해 책임 등 과거를 잊으면 안 된다는 일왕의 생각을 느꼈다”며 “국민뿐 아니라 차세대 왕실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아베 신조 총리는 같은 추도식에서 “전쟁 참화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며 “역사를 겸허하게 마주해 세계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2012년 말 취임 뒤 열린 네 차례 종전일 추도식에서 가해 책임과 관련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부전(不戰) 맹세’ 표현도 없었다. 그의 전임자들은 추도식에서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큰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며 가해 책임을 언급했다. 한편 다카이치 사나에 총무상과 마루카와 다마요 올림픽 담당상 등 아베 내각의 각료들이 이날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자민당 총재 자격으로 대리인 니시무라 야스토시 총재특별보좌를 통해 공물료를 납부했다. 니시무라 특보는 이날 “(총리로부터) 공물료를 내고 참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전사한 분들의 영령에 애도를 표하고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직접 참배하지 않은 것은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70여명도 예년처럼 참배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에서 “일본 정부 및 의회의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침략전쟁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또다시 공물료를 봉납하고 참배를 강행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韓 여야 의원들 독도 방문…日의원들은 ‘야스쿠니 참배’

    韓 여야 의원들 독도 방문…日의원들은 ‘야스쿠니 참배’

    15일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여야 의원 10명이 독도를 방문하는 가운데 일본 여야 의원 수십명은 이날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한다.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여야 의원 수십명은 이날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기로 했다. 이들은 매년 종전기념일과 야스쿠니신사 봄ㆍ가을 제사 때 신사를 참배해왔다. 지난해 종전기념일에는 70명가량이 이 신사를 찾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날 오전 자민당 총재 자격으로 대리인인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총재특별보좌를 통해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했다. 이는 2차대전 책임을 물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은 침략 원흉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경우 이에 반대하는 한국과 일본 등의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달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베 총리가 2012년말 총리 취임 후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것은 4년 연속이다. 정부 인사 가운데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장관은 이날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한국과 미국의 새로운 조합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한국과 미국의 새로운 조합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와 2017년 12월 한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두 나라 정부의 새로운 조합이 결정된다. 아마도 21세기 중반까지의 양국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등 한반도 문제와 미·중·일·러 등을 포함하는 동북아의 지정학·지경학적 변화, 여기에 신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국제 정치·경제 질서까지 맞물려 국가, 지역, 세계 정세가 요동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이어 오던 관성적인 한·미 관계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 이념 같으면 협력, 엇갈리면 갈등? 한·미는 그동안 군사동맹으로서 기본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양국 정부의 이념 조합에 따라 크고 작은 갈등이 오고 갔다. 양국 정부가 보수-보수, 진보-진보 등 이념적으로 동질성이 있으면 관계가 더 좋았다. 전두환-로널드 레이건, 김대중-빌 클린턴 등의 조합이 그랬다. 반면 양국 정부가 이념적으로 엇갈리면 사이가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박정희-지미 카터, 김영삼-빌 클린턴, 노무현-조지 W 부시 등의 조합이 그랬다. 올해 미 대선과 내년의 한국 대선 결과 나타나는 조합은 기존의 이념적 조합과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동맹도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자가 아니어서 그 정책을 예상하기 쉽지 않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상대적으로 일관되게 진보적 가치를 유지해 왔지만, 월스트리트 등 미 주류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인물이어서 전통적인 진보 진영 후보로 보기 어려운 면도 많다. # 문재인도 보고 싶어 하는 미국 미국 측에서는 2017년 한국 대선 이후의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한 검토가 오래전부터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의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의 롤로덱스(명함철: 주요 인사를 많이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면 한국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김용 세계은행(WB) 총재의 발언을 한국 기자들에게 전한 바 있다. 한국 정치 지도자로서의 반 총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미국을 방문하려다 연기했는데,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무척 서운해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방미하면 좋겠다는 뜻을 표시했다고 한다. 미국 측으로서는 진보 진영의 대선 후보로 유력한 문 전 대표가 어떤 인물일지 궁금할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한번도 미국에 오지 않았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386 참모들에 대한, ‘서로 몰라서 어렵고 불편했던’ 감정 같은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 미국에 먼저 아이디어 제시해야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 언론인 몇 명이 워싱턴과 뉴욕을 방문했다.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국무부, 국방부, 의회, 싱크탱크의 한반도 관련자들과 양국 관계에 대해 편하게 토론해 보자는 자리였다. 국무부의 한반도 담당자들은 “박근혜 정부가 어떤 대북 정책을 제시해도 우리는 들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현상을 타파할 아이디어가 없었고, 버락 오바마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남·북, 미·북 관계는 악화되고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강화됐다. 미국의 새 정부는 임기 초반에 북한 핵 등 한반도 정책을 새로 검토할 것이다. 우리나라 새 정부가 미국의 전략을 최대한 우리 쪽으로 끌어오려면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1953년에 조인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제안하는 것이다. 한·미 관계는 군사 동맹에서 시작했지만, FTA를 통한 ‘경제 동맹’으로 업그레이드됐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드물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의 성격도 갖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조약문을 다듬고, 특히 핵과 테러 공격에 대한 대응을 명시한다면 북한 핵에 대한 한국인의 불안을 해소하고, 국제 테러에 공동 대응을 하는 데도 유용할 것으로 본다. dawn@seoul.co.kr
  • 日 사상 첫 여성 도쿄도지사

    “제2 한국학교 재검토”… 설립 난항 아베 신조 총리와 소원한 관계인 집권 여당 자민당의 8선 중진 여성 의원이 일본의 수도 도쿄도의 수장이 됐다. 고이케 유리코(64·여) 후보는 31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여당 후보, 야당 연합 후보 등을 각각 따돌리며 당선을 확정 지었다. 최종 개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고이케 후보는 2위 득표자와 표차를 크게 벌리며 여유 있게 당선됐다. 여성 후보의 도쿄도지사 당선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쿄도지사는 광역시인 도쿄시의 수장으로 직원 16만명을 거느리며 해마다 13조 3000억엔의 예산을 집행하는 막강한 자리다. 그는 소속 정당인 자민당의 지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뒤 무소속으로 나와 고군분투하며 아베 신조 정권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공동으로 지원한 마스다 히로야(65) 전 총무상을 여유 있게 눌렀다. 또 민진·공산·사민·생활당 등 4개 야당이 단일 후보로 민 도리고에 슌타로(76) 후보와도 큰 표차를 내며 승리했다. 고이케 후보는 유세 기간 동안 “전임 지사의 도쿄 제2 한국학교 설치 지원 약속을 백지상태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취임 이후 그의 결정 여부가 주목된다. 앞서 전임 마스조에 요이치 지사는 도쿄 신주쿠 옛 도립고교 부지를 제2 한국학교로 활용하도록 한국 정부에 유상 대여하기로 약속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고이케 후보는 참의원 1선(임기 중 사퇴), 현역 중의원 8선 의원으로 방위상, 환경상, 오키나와·북방영토담당상 등을 지냈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 아베 총리의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 지방창생담당상을 지지해 제2차 아베 정권에서는 집권층과 소원한 관계였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韓, 나이·성차별 없애야 성장”

    “韓, 나이·성차별 없애야 성장”

    젊은이 발언 기회 막지 말아야 인문학·사회과학, 성공 밑거름 변화 이뤄지면 상상 못한 발전 김용(57) 세계은행 총재는 한국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면 연령차별·성차별·외국인 혐오 등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인문학, 사회과학 등 기초학문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주문했다. 25일 오후 연세대 학술정보관 장기원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미래교육 소사이어티 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김 총재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굉장히 철저한 성과 중심주의로 운영된다”며 “누구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중심이 돼 조직이 돌아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사회는 젊은이들이 윗사람들에게 자유로이 의견을 피력하기가 어려운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40~50대가 될 때까지 발언할 기회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저출산으로 노동력 부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이를 극복하려면 여성 인재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외국인들을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장 혁신을 이루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변화가 이뤄질 때 한국 사회는 상상 못할 방식으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 대학교육에서 기초학문이 축소되는 기조가 이어지는 데는 우려를 드러냈다. 김 총재는 “타인에게 열려 있는 사회일수록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런 태도는 공학이 아닌 인문학에서 배울 수 있다”며 “한국은 인문학 등 기초학문에 투자할 여력이 있는 국가”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도 경제학, 사회과학 등 사회 분야를 탐구하는 인재가 늘어야 한다고도 했다. 김 총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 아이오와주로 이민했다. 2009년 7월 한국계 최초로 아이비리그 대학 다트머스대 총장에 올랐고, 2012년 7월 세계은행 총재에 취임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구조조정 영향” 성장률 2.8→2.7%로 내린 한은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8%에서 2.7%로 소폭 낮춰 잡았다. 경기 부양 조치의 덕을 다소 보겠지만, 오는 9월 시행되는 ‘김영란법’이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파장, 조선·해운업계 구조조정, 중국의 성장 둔화 등 대내외 불확실성도 하향 조정의 이유가 됐다. 내년 성장률도 당초 3.0%에서 2.9%로 하향 조정해 지난해(2.6%)를 포함해 3년 연속 2%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4월 1.2%로 전망했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1.1%로 내려 잡았다. 기준금리는 연 1.25% 수준으로 동결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4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두 차례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이 총재는 “지난달 금리 인하와 재정 보강(추가경정예산 편성)이 우리 성장률을 0.2% 포인트 끌어올리는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금리 인하와 추경 편성이 없었다면 올 성장률은 2.5% 수준에 그칠 것이란 의미다. 하반기에는 민간 소비가 더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총재는 “김영란법이 정착돼 가는 과정에서 관련 업종의 업황과 민간 소비에 분명히 어느 정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민간소비 증가율이 상반기 2.7%에서 하반기 1.9%로 큰 폭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내수는 사실상 ‘정부 재정의 힘’으로 굴러갈 것으로 분석됐다. 경상수지 흑자는 지난해 1059억 달러에서 올해 950억 달러로 줄고, 내년엔 800억 달러로 축소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 1~6월 소비자물가가 0.9% 상승에 그친 데는 저유가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이 총재는 이날 취임 이후 가진 첫 물가안정목표제 설명회에서 “석유제품 가격 하락이 상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8% 포인트 끌어내렸다”고 밝혔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박승 前 한은 총재 ‘인생경제학’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박승 前 한은 총재 ‘인생경제학’

    나이를 무색하게 했던 10년 전의 ‘혈기방장’은 아직도 그대로일까. 팔순에 접어든 그가 어떤 모습으로 손님을 맞을지 그려보며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빌라의 초인종을 눌렀다. “아유, 많이 덥지? 어서 와, 어서 와.” 문을 여는 그의 말투와 표정. 10년 전의 그가 다시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 시절(2002~2006년) 어떤 전임자들보다 시장과의 소통을 강조했던 박승(80) 전 총재는 여전히 세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이봐 학생, 기껏 어려운 시험 봐서 합격해 놓고 왜 포기하려는 거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54년 2월 어느 날, 해군 제복을 입은 군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입교 절차를 밟지 않자 ‘등록을 서두르라’는 독촉장이 날아오더니 이마저도 반응이 없자 저 멀리 경남 진해에서 전북 김제의 깡촌까지 직접 사람이 달려온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에 가고 싶어요.” 이리공고 수석 졸업 예정자를 반드시 데려와 입교시키라는 해사 교장의 ‘특명’을 받은 그 군인은 나의 고집에 아주 난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가 끝내 임무 완수를 못 하고 돌아간 그날은 나의 힘겨운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1936년, 호남 벽촌 마을에서 어느 집이라고 여유가 있었겠냐마는 우리 집은 특히 더 어려웠다. 아버지는 원래 한의사였는데 그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고, 나를 보셨던 44세 때의 아버지는 가족의 기초 생계도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었다. 치료하던 환자가 급사한 뒤 의술의 길을 포기했던 아버지는 그 후 평생을 한글 초서체 연구에 바치셨다. -194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7㎞ 떨어진 이리공업중·고에 진학했는데,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어떤 때는 모심고 김매느라고, 어떤 때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해서 학교에 못 갔다. 어머니 혼자 새벽엔 보리방아 찧고 낮에는 논일하고 저녁엔 길쌈해서 생계를 꾸리시다 보니 중·고교 6년 동안 수업료 때문에 가슴 졸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당시에는 교문 앞에서 선생님이 불시에 수업료 납부 영수증 검사를 해서 영수증이 없으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잦았는데, 그런 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돈을 못 내서 공부를 못 한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그렇게 터덜터덜 집에 와 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한글 서체와 씨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깨, 콩, 닭, 토끼를 이고 지고 5㎞ 떨어진 읍내에 가서 고생을 하시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중3 때 6·25전쟁이 났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후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 인민군들은 학생단체를 만들어 고등학생들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김일성 찬양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다. 학생들 중 6명은 나와 같이 아침마다 기차로 통학하던 고2, 고3 형들이었다. 얼마 후 유엔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퇴각했는데, 그 형들은 천생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판이었다. 결국 다들 산으로 도망쳤는데, 나중에 빨치산이 돼서 경찰서를 습격했다가 결국엔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몇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렇게 개죽음을 했겠구나.’ 좌우 이념 대결의 허망하고 참혹한 결과를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이 집 아들 빨리 결혼해서 부모님 모시고 농사지어야 되겠네.” 동네 아낙이 무심결에 던진 말이지만 고3 졸업반인 내가 피해 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 아니면 예순 넘긴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 2남 4녀 중 형은 일찍 돌아가셨고 누나 3명은 출가한 상태였다. 하지만 농사꾼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게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군 사관학교였고 나는 그 중에서도 해사에 시험을 쳤다. -해사 입교를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했던 그해, 가을 수확을 하니 먹고살 것 빼고 딱 쌀 다섯 가마가 남았다. ‘이 정도면 일단 대학에 등록할 수준의 돈은 되겠다.’ 이듬해 초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시험을 봤다. 어머니가 싸 주신 찐 고구마 5개를 손에 들고 난생처음 서울행 기차를 탔다.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서울역과 남대문 주변의 살풍경은 60년이 지난 현재도 머리에 또렷하다. 곰탕집 간판을 보고는 ‘곰고기를 파는 곳’, 복덕방 간판을 보고는 ‘떡 파는 곳’으로 오해했던 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됐다. -55학번으로 서울대 합격을 했는데, 입학 때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그래서 고등교육받는 게 가당치도 않은 시골 출신의 고학생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가정교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러자니 고향집의 농사가 문제였다. 수시로 서울과 김제를 농사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이어졌고, 중·고교 6년 동안 그랬듯 학비와의 전쟁이 대학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입학 때 가졌던 경제학 교수에 대한 바람은 더 절실해져 갔다. 그러려면 대학원에 진학해야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나의 선택은 돈을 벌면서도 배움을 이어 갈 수 있는 한국은행 조사부 근무였다. -1961년 한국은행 배지를 달았다. 만 25세였다. 양복 한 벌을 18개월 할부로 사 입으니 세상이 마치 내 것 같았다. 얼마 후 5·16 정변이 났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동국대 옆에 중앙공무원교육원을 만들고 여기에서 사무관 이상 공무원과 교사, 교수, 기업인들에게 소정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입행 첫해의 내가 여기에 강사로 위촉됐다. 매주 3~5시간씩 강의를 했는데, 모교의 교장 선생님과 대학 총장, 학장도 나의 강의를 듣는 상황이 됐다. 대학 은사 박희범 교수님께서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란 건 강의를 시작하고 얼마가 지난 후에야 알았다. 경제기획론과 경제발전론을 가르치셨던 박 교수님은 비교적 진보적인 색채의 학자이셨는데, 혁명정부에서 새로운 경제의 틀을 짜는 역할을 맡으셨다. 교수님은 나중에 교육부 차관과 충남대 총장을 지내셨다. -운명을 바꾼 미국 유학은 뜻하지 않은 기회에 찾아왔다. 1968년 나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몇 날 며칠을 심하게 취조당했다. 일인즉슨 이랬다. 당시 우리나라는 무역적자가 대단히 심했는데 한국은행은 환율을 올려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폈다. 그러나 정부는 환율이 오르면 물가도 같이 뛴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서봉균 재무장관을 초청해 환율 인상 정책을 펴도록 설득시키기 위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원고 작성과 발표를 대리급 조사역에 불과했던 내가 담당했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신문 1면 톱에 당장이라도 정부가 환율을 대폭 올리는 듯한 기사가 났다. 국민과 기업들 사이에 혼란이 왔다. 얼마 후 중앙정보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행원부터 부총재보까지 담당자들을 모조리 연행해 갔다.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가 멋대로 신문사에 원고를 넘겨줬느냐”는 추궁이 이어졌는데, 작성자인 내가 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후배 행원이 신문기자 친구에게 발설한 사실이 드러나 나의 혐의점은 벗겨졌지만, 어쨌든 나는 후배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으로 감봉 징계를 받았다. 이게 한국은행 간부들에게 마음의 빚을 안겼다. “자네 혼자 책임을 지게 해서 미안해. 다음에 확실히 보상해 줄게.” -보상을 받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1년 한국은행 최초로 국외에 유학생 2명을 파견하게 됐다. 전체 행원을 대상으로 시험을 봤는데 나는 통계학에서 과락이 나와 탈락했다. 그런데 재시험 공고가 떴다. “어떻게든 박승 대리는 합격시키라”는 상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1972년 1월 미국 뉴욕주립대(올버니캠퍼스)로 유학을 떠났고 2년여가 흐른 1974년 4월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아 왔다. 유학을 마친 뒤 은행에 복귀하고 나서 얼마 지나 두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를 하게 되는 이경식 당시 경제수석이 청와대에 들어와 함께 일을 하자고 했다. 이 수석은 한국은행 재직 때 나의 직속상관이었다. 또 하나는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김재익 경제기획국장을 통해 타진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자문단’의 단장 역할이었다. 당시 사우디는 ‘1차 오일쇼크’로 막대한 달러를 벌게 됐지만 경제 개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디 국왕은 경제 개발을 도와줄 자문단 파견을 한국에 요청했다. 나의 선택은 사우디였다. -사우디에서 1년 만에 돌아와 1976년 9월 한국은행에 사표를 내고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갔다. 교수 부임 직후에 쓴 ‘경제발전론’은 지금도 일부 대학에서 교재로 쓰고 있다. 교수가 되고 이듬해인 1977년부터 3년 동안은 서울신문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경제 관련 사설을 썼다. 한 편 작성에 30분 정도밖에 안 걸렸는데 이게 소문이 나면서 다른 언론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 나와 함께 김학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정치 관련 사설을 서울신문에 썼다. 교수로서 경력을 쌓아가며 학교 안에서는 정경대학장과 대학원장을, 학교 밖에서는 국제경제학회장과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냈는데 1988년 뜻하지 않은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박 교수, 나랑 같이 한번 일해 봅시다.” 노태우 대통령이 그해 2월 취임을 앞두고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만 52세였다. 노 대통령과는 이전에 일면식도 없었지만 다양한 언론 기고와 강연 활동 등으로 몇몇 경제단체에서 나를 천거했던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내가 맡았던 첫 번째 과제는 ‘200만호 주택 건설’ 공약의 실현이었다. 말이 200만호이지 엄청난 물량이었는데 막상 아파트를 지으려고 보니 서울 시내에는 땅이 없었고, 서울시 외곽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린벨트 밖으로 나가자.” 지도를 펴놓고 서울 세종로 사거리의 측량원표를 중심으로 반경 25㎞를 컴퍼스로 동그랗게 돌려 봤다. 25㎞ 이내로 한 것은 ‘지하철 1시간 이내’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지역이 경기 분당, 산본, 평촌, 인천 중동 등 4곳이었다. 4대 신도시 추진이 확정되자 1988년 12월 노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박 수석, 이제는 건설부 장관으로 고생 좀 해야겠습니다. 계획을 세웠으니 실행까지 맡아 주셔야지요.” -건설부 장관이 되고 나서 이듬해 서울 북쪽의 일산이 추가돼 5대 신도시 계획이 확정됐다. 그러나 그해 여름이 되면서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심각한 마찰에 부딪치게 됐다. 당시 아파트 분양가가 평당 평균 130만원대였는데 건축비는 170만원, 시장 가격은 250만~300만원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분양 당첨만 받으면 막대한 이익이 남는 구조였고, 건설회사는 낮은 분양가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날림 공사를 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분양가를 올려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경제수석실의 반대가 심했다. 분양가를 올리면 집값이 더 뛴다고 했다. 대통령을 만나 건의했지만 “그 얘기는 이미 경제수석한테 들었다”고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사표를 냈다. 다음날 사실상 경질 통보를 받았다. 그게 1989년 7월이었고 이듬해 3월 신학기부터 다시 강단으로 돌아갔다. -2001년 3월 정년퇴임을 하고 이듬해 초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숱한 공직을 거쳤지만 2006년 3월 퇴임할 때까지의 한국은행 총재 4년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성취를 이룬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한국은행을 가장 사랑한 총재,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위상을 높인 총재, 경제와 민생을 위해 고뇌한 총재’의 3가지 이미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5남매를 결혼시키면서 4명을 청첩장 없이 보냈다. 첫째와 둘째 아이의 결혼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치렀더니 친구들이 “축의금 낼 기회를 좀 달라”고 해서 셋째 때는 200장을 찍었다. 그런데 역시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았다. 다시 넷째, 다섯째의 결혼은 순수 가족 행사로 치렀다. -내가 모은 재산은 언젠가는 전부 사회에 내놓고 갈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한국은행 총재 재임 시절부터 월급의 20%를 가난한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을 위해 써 왔다. 모교인 백석초등학교에 도서관도 만들었다. 오래전에 장기 기증 서약도 마친 상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된 데는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의 이익을 중시하는 자세가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박승 前 총재 중앙은행(한국은행)과 정부(청와대·건설부·공공기관)에서, 또 대학 강단(중앙대 경제학과)에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굽이굽이마다 굵직한 족적을 남겨 온 경제계의 원로다. 한국은행 총재 때 소신 있고 선제적인 통화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김제 백석초, 이리공업중·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뉴욕주립대(올버니) 경제학 석사·박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신문 논설위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청와대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주택공사·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공적자금관리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 [공기업 사람들 (35)한국주택금융공사] 주금공 이끄는 실무형 전문가들

    [공기업 사람들 (35)한국주택금융공사] 주금공 이끄는 실무형 전문가들

    주택금융공사는 주택과 부동산,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무 경험과 지식을 쌓은 전문가들이 이끌고 있다. 수장은 2014년 10월 취임한 김재천 사장이다.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은행에서 35년간 일하며 금융시장국장과 조사국장, 부총재를 지낸 금융·경제 전문가이다.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 조직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용배(59) 부사장은 인천 제물포고와 인하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기술고시(18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정 부사장은 경기도 주택과장, 도시주택실장을 거친 주택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부천시 부시장, 화성시 부시장을 역임한 행정 전문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주택금융공사 부사장으로 임명돼 공사 살림과 인사, 홍보를 총괄하고 있다. 합리적인 성격에 원칙과 소신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평을 얻고 있다. 유동화사업본부를 이끌고 있는 권인원(58) 상임이사는 한국은행을 거쳐 금융감독원에서 리스크검사지원국장, 감독총괄국장, 부원장보를 지냈다. 금감원에서 ‘실생활 맞춤식 저축·보험길라잡이’라는 재테크 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주택저당증권(MBS) 발행과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인 ‘보금자리론’ 등 정책모기지 업무를 담당하며 꼼꼼하고 정확한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언론인 출신인 유상규(56) 상임이사는 2004년 주택금융공사 설립 당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홍보실장, 주택연금부장, 인사부장, 감사실장, 수도권 본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 원년 멤버로 가세해 ‘주택연금’을 일반에게 알리는 데 크게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고객가치경영본부장으로 기획조정실과 성과평가 등 대외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김성수(56) 기금사업본부 상임이사는 기획예산처 출신으로 2007년 주택금융공사로 자리를 옮겨 홍보실장, 기획조정실장, 영업부장을 맡았다. 이름도 어려운 ‘적격대출’ 출시 시점에 홍보실장을 맡아 히트상품 탄생에 기여했다. 리스크관리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준녕(62) 상임이사는 코오롱건설 해외관리부, 체이스맨해튼은행 수출입부, 신영증권 영남본부장 등을 거치며 건설과 금융 분야에 경력을 쌓았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으로 리스크관리가 중요시되는 요즘 금융시장에서 풍부한 지식과 경험 덕분에 최고 적임자라는 얘기가 나온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올 성장률 전망 줄줄이 하향… “2.4~2.9%”

    올 성장률 전망 줄줄이 하향… “2.4~2.9%”

    올해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메르스 사태’를 겪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도 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낮출 것으로 보이고 현대경제연구원은 기존 2.8%에서 2.5%로 0.3% 포인트 내렸다. 이는 지난해 성장률(2.6%)보다 0.1% 포인트 낮은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경기 침체와 저유가 여파 등으로 수출이 부진하고 내수도 도통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다. 여기에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로 기업 구조조정도 쉽지 않아 보인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19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 가계부채가 심각하고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큰 만큼 기준 금리를 동결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관심은 기준금리보다 한은이 이날 함께 발표하는 올 성장률 전망치가 얼마나 떨어질지에 쏠린다. 3개월마다 수정치를 내놓는 한은은 지난 1월에 올 성장률을 3.0%로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경제성장률이 3%를 다소 밑돌 가능성이 있다”며 하향 조정을 예고했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올 성장률 전망치를 2.7∼2.9%로 하향 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럴 경우 오는 26일 발표되는 올 1분기 성장률도 1% 미만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2일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올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2%에서 2.7%로 0.5% 포인트 내렸다. 14일에는 금융연구원이 2.6%로 낮췄고 LG경제연구원도 국내 기관 중 가장 낮은 2.4%를 제시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與 공약 ‘한국판 양적완화’ 현행법상 불가…유일호 “통화정책은 韓銀의 독립적 권한”

    새누리당이 총선 공약으로 ‘한국판 양적완화’(시중에 유동성 공급)를 내놓은 것에 대해 경제수장들은 말을 아꼈다. 한국은행의 산업은행 채권 직접 인수 등이 가능하려면 정부의 보증 또는 법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 ‘2016 코리아 나라장터 엑스포’에서 기자들과 만나 “당의 공약은 존중하지만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유 부총리는 “통화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면 당과 달리 통화당국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면서 “통화정책은 한은의 독립적 권한이며 협의는 할 수 있지만 된다 안 된다 말하기 시작하면 월권이고 간섭”이라고 말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이날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중앙은행이 특정 정당의 공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한은도 우리 경제가 활력을 회복하도록 하고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 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한은이 구조조정 그다음에 가계부채를 해결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행 한은법 76조에 따르면 한은은 정부가 원리금상환을 보증한 채권만 인수할 수 있다. 즉 발행 주체에게 자금을 직접 지원하는 형태인 인수가 가능하려면 정부의 보증이 필요하다. 산업은행 채권이나 주택담보대출증권은 정부의 보증이 없다. 한은법을 바꾸든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정부가 보증하는 방법이 있지만 두 방법 모두 국회 통과가 쉽지 않다. 주택담보대출증권이나 산업은행 채권은 한은이 유통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채권도 아니다. 한편 이 총재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연초에 전망했던 3%를 밑돌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은은 다음달 19일 수정 경제전망을 발표한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자치단체장 25시]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우리 사회가 겪는 ‘고립’과 ‘빈곤’의 문제에 대해 구청만의 힘으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찾을 수는 없죠. 하지만 문제 해결의 시작점은 찾을 수 있습니다. 서대문구는 그 해결 방법을 공동체 의식과 주민들 간의 연대에서 찾고 있죠.”(문석진 서대문구청장) ‘키다리 아저씨’.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의 별명이다. 180㎝의 큰 키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만 그 별명이 유명해진 것은 취임 뒤 그가 시작한 ‘100가정 보듬기 사업’ 덕분이다. 100가정 보듬기 사업은 복지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가정에 후원자를 연결해 경제적 지원을 주는 정책이다. 문 구청장은 “2010년 구청장에 당선된 뒤 지역을 다니는데 기존 복지 시스템에선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부모, 조손, 홀몸노인, 청소년 가장이 너무 많았다. 구청장이 법을 고칠 수도 없고, 예산이 부족해 자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없고 해서 고민 끝에 지역 주민에게 호소했다”고 말했다. 반신반의하며 시작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문 구청장은 “2011년 시작 당시 이름 그대로 100가정만 후원자를 찾아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주민들을 몰랐다”면서 “6년째 사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벌써 후원을 받는 가정이 360집 이상”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이어 “주민들의 ‘함께 살자’는 생각이 우리 구의 가장 큰 자산”이라며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 주는데 구청장이 한 것은 없다. 그냥 거간꾼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주민들을 치켜세웠다. ●대형 보험사 임원 지냈지만 민주화에 부채 의식 문 구청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대형 보험사의 임원까지 지내다가 정치에 나섰다. ‘혼자’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일 많은 구청장에 나선 이유가 뭘까. 문 구청장은 “누구는 나에게 권력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분석하지만 권력욕 때문이었다면 공천 헌금을 내고 국회의원 되던 시절에 국회의원을 했지, 야당 자치단체장을 하겠다고 계속 나섰겠느냐”고 반문했다. 문 구청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굳이 정치를 시작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부터 계속 가지고 온 부채 의식이 한몫한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정치를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니었고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고 고생한 선후배들을 돕다가 발을 깊숙하게 담그게 됐다”고 털어놨다. 1974년 대학 신입생이 된 그는 학교 수업보다 한국 사회의 모순에 관심이 더 많았다. 문 구청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선포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9호는 청년들에겐 커다란 굴레로 느껴졌다”며 “거기에 1974년에 민청학련 같은 사건이 터지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문 구청장은 1학년 때 ‘목하회’라는 연세대 사회과학동아리에 가입한다. 소위 운동권 서클이다. 2학년 2학기 때는 목하회 회장도 했다. 1975년 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던 이들이 돌아왔다. 학교는 문교부의 지침을 어기고 이들의 복직·복학을 허락했다. 문교부는 즉각 계고장을 발부했고, 당시 연세대 총장이던 박대선 총장은 사임했다. 그해 4월 3일, 연세대 재학생 8000여명 중 7000여명이 데모를 벌였다. 그리고 연세대에는 2개월간 휴교령이 떨어지고 문 구청장이 회장을 맡고 있던 목하회는 공식적으로는 해체된다. 문 구청장은 이후 민주화 운동보다 사회 진출을 고민했는데, “내가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동안 선후배·동기들 중 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50명만 뽑던 공인회계사 시험에 졸업과 함께 합격한다. ‘금수저’로 사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문 구청장은 “나만 눈 딱 감고 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난 전문직이라 밥걱정은 없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위안하며 대학 시절 가진 부채 의식 청산에 나섰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3수 끝 구청장 당선… 청년 빈곤 문제 해결 추진 ‘부채 청산’은 각종 단체의 회계·감사 역할을 맡는 것으로 시작됐다. 문 구청장은 “처음에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회계 일을 도와줬는데 이후 크고 작은 시민단체의 일들이 몰려왔다”고 밝혔다. 그 정도면 부채 청산 이상이 아니냐 싶은데, “그래도 나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노조 등의 회계 일을 하다 보니 그의 이름이 어느덧 김대중(DJ) 신민당 총재에게도 알려졌다. 1991년 지방의회선거를 앞두고 인재 영입에 나선 김 총재는 그에게 서울시의원 선거에 나가라고 했다. 문 구청장은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법도, 조직을 꾸리는 일도 몰랐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는데 당시 출마를 권유한 DJ가 “회계사는 부자 아니냐”면서 지원을 해 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낙선했고, 1995년에 결국 서울시의원이 됐다. SH공사 이사와 세종문화회관 감사 등을 거쳐 2002년부터 구청장에 도전해 3수 끝에 민선 5기 구청장이 됐다. 어렵게 구청장이 돼서일까. 문 구청장은 하루가 아깝다. 서대문구 대표 복지사업인 ‘100가정 보듬기’를 비롯해 올해는 서울형 혁신교육지구로 선정되면서 서대문구의 교육 문제 해결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 동주민센터 기능을 행정에서 복지로 바꾼 ‘동 복지허브화 사업’은 중앙정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문 구청장은 “외부에서 알아주는 것도 기분 좋지만, 주민들이 동주민센터 이용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전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은데 문 구청장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더 많다”고 한다. 그는 “서울의 체감 청년 실업률이 21.8%다. 30세 미만 부채 가구도 11.2%나 늘었다. 청년 1인 가구의 주거 빈곤율은 36.3%”라면서 “두 번째 임기인 2018년까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문 구청장은 서울시, SH공사 등과 함께 청년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준비하고 있다. 또 서대문구의 9개 대학과 연계한 취업 지원 프로그램도 추진하고 있다. ●‘문화’ 신촌·‘창업’ 이대… 노후 인프라 개편 박차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노후한 도시 인프라를 바꾸기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한때 서울 최고의 상권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침체한 신촌·이화여대 일대 상업구역을 살리고자 연세로를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조성한 데 이어 이곳을 문화허브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 구청장은 “신촌 골목은 문화의 공간으로, 이화여대 골목은 창업의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면서 “아현·서대문권역과 홍제권역, 가좌권역도 각각의 특성에 맞게 인프라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며 “특히 청년 일자리 창출을 통해 청년들이 서대문에 모이게 하고, 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해 지역 전체가 살아나게 하는 것이 목표”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문 구청장은 이런 사업의 주체가 주민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구청 혼자 한다면 못 할 일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지역 주민의 강한 공동체·연대 의식이 있다”며 “대학을 비롯한 지역의 자원을 100% 활용하고, 주민들과 함께 뜻을 모아 가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문 구청장의 손목에선 십수년은 돼 보이는 10만원 짜리 낡은 시계가 째깍거린다. 문 구청장은 “결혼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 예물은 거의 생략했고, 이 시계는 십수년 전에 샀는데 시간이 잘 맞는다”며 “좀 없어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입은 양복도, 스웨터도 연식이 좀 됐다. 양복 팔꿈치 부분엔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다. ‘너무 아끼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문 구청장은 “워낙에 낭비, 허례허식 이런 것을 싫어한다. 장례식을 간소화하는 운동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청장이 행정을 잘해야지, 옷을 잘 입고 멋 잘 낸다고 주민들이 행복해지느냐”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우상민, 세계 프리스타일 축구연맹 초대 총재로 취임

    우상민, 세계 프리스타일 축구연맹 초대 총재로 취임

    세계프리스타일 축구연맹은 우상민(61)씨가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고 23일 밝혔다. 우 총재는 지난 16년간 미국 버지니아 주정부 경제성 한국대표와 호주 퀸즈랜드 주정부 한국대표를 거쳐, 유니세프 초대상무관‧레고코리아 최연소 마케팅이사‧현대엘리베이터 해외사업본부장 등을 두루 거친 국제통상 전문가다. 세계프리스타일 축구연맹은 세계적인 프리스타일 축구 창시자인 우희용(53)씨가 영국에서 처음 만들었고, 한국에 연맹본부를 두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동남아 韓流산타… 태권도로 국제사회봉사 ‘기부 하이킥’

    동남아 韓流산타… 태권도로 국제사회봉사 ‘기부 하이킥’

    지난달 29일 필리핀 마닐라 니노이 아퀴노 국제공항 입국장에서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미(24·여·필리핀)를 만났다. 처음에는 아이미가 다음날 마닐라 국군회관에서 열린 부영그룹 이중근(74·세계태권도평화봉사재단 총재) 회장의 디지털피아노 및 칠판 기증식에 참석하는 한국 취재진을 위해 고용된 현지 코디네이터인 줄 알았는데 가이드를 하기에는 유창한 영어에 비해 한국어가 많이 서툴렀다. 아이미는 “한국 유학생 시절만 해도 한국어가 괜찮았는데 필리핀에 돌아와서 많이 잊어버렸다”며 쑥스러워했다. 아이미는 이 회장이 국내로 유학 온 아시아·아프리카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해 2008년 자신의 아호를 따 설립한 우정(宇庭)교육문화재단의 장학생 790명 중 한 명이었다. 아이미는 2011년부터 3년간 한국의 공주대학교 천안공과대학에서 에너지시스템공학을 공부한 뒤 2년 전 고향 마닐라로 돌아와 한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현재 어엿한 직장인으로 자리잡은 아이미는 이 회장이 기부를 위해 필리핀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작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휴가를 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러다가 회사 잘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 “수력발전 관련 전공을 했는데, 내 전공은 수요가 많아 갈 곳이 많다. 괜찮다”고 여유 있게 받아쳤다. 아이미는 첫날 이른 아침부터 이튿날 오후 기증식 행사가 끝나는 동안 한시도 한국에서 온 일행 곁을 떠나지 않고 통역부터 행사 진행 등을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아이미뿐만이 아니었다. 이 회장이 필리핀 정부에 교육용 디지털피아노 5000대와 칠판 5만개를 기증하기 위해 치러진 기증식 행사에서는 필리핀의 또 다른 우정교육문화재단 출신 장학생들이 통역과 사회를 맡았다. 평소 “교육에 투자하면, 한번 사용하고 사라지지 않고 오랜 기간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가 최고의 기부 활동”이라고 말해 온 이 회장을 기증식이 끝난 뒤 만났다. “음악과 태권도처럼 아무런 마찰 없이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게 어딨습니까.” 이 회장은 동남아시아에서 ‘산타클로스’로 통한다. 2003년부터 교육 시설이 열악한 동남아 14개국에 디지털 피아노 6만대와 칠판 60만개를 기증했고 학교가 부족한 캄보디아, 라오스, 동티모르, 스리랑카, 태국 등에는 600개의 초등학교 건립을 지원했다. 이 중 부영그룹이 사업적으로 진출한 곳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세 나라뿐이다. 이 회장이 기부한 피아노와 칠판만 돈으로 환산해도 5000억원이 훨씬 넘는다. 부영 관계자는 “현재 베트남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서 이 회장이 기부한 칠판을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어릴 적 고향 사람들과 우물물을 나눠 마시고 자랐어요. 교육 관련 기부는 우물을 파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성장 밑거름이 되는 제일 가치 있는 투자가 교육이니까요.” 이 회장은 기부를 하는 것을 ‘우물 파는 일’에 비유했지만, 이 ‘우물’에 한국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디지털피아노를 기증할 때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아리랑’ ‘고향의 봄’ 등 반드시 한국 노래가 녹음 돼 있는 피아노를 보낸다는 겁니다.” 2009년 6월 한·아세안 정상회의때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부아손 라오스 총리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졸업식 노래가 없다”는 얘기를 들은 이 회장은 디지털피아노를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이왕이면 동남아 각지에 한국 노래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한국의 졸업식 노래를 녹음해 피아노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 노래가 들어간 피아노를 기부하는 것이 자칫하면 문화 침략이 될 수도 있어서 항상 현지 교육부의 승인을 받은 뒤 피아노를 보냅니다. 동남아 학생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여러번 봤지만 볼 때마다 감동적입니다.” 지난달 6일 세계태권도평화봉사재단 총재로 취임한 이 회장은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로 국제 사회에 봉사를 하는 일이 평소 해 온 ‘기부를 통한 한류 전파’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에 총재직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세계태권도평화봉사재단은 ‘태권도를 통해 인류의 평화와 상생에 이바지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2009년 9월 출범해 현재까지 337개국에 1579명의 단원을 파견했다. 그동안 이 회장은 교육 기부뿐만 아니라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에 태권도훈련센터를 건립해주고 이들 국가에 태권도협회 발전 기금을 지원하는 등 꾸준히 동남아 지역에 태권도 기부 활동을 펼쳐 왔다. 이러한 지원 덕에 캄보디아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로 건국 이래 처음으로 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까지 1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글로벌 스폰서 협약을 맺고 태권도 세계화를 위한 적극적인 후원에 나서고 있다. “제가 능력은 없는데 저 보고 (총재를)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웃음). 현재는 (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앞으로 예산도 더 확보해서 제대로 한번 해볼 예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인프라가 없어 태권도를 배우지 못하고 있는 나라들을 찾아 더욱 지원을 늘려 나가고 싶습니다. 음악이나 태권도를 전파하는 것처럼 순수한 국위선양은 없으니까요.” 이 회장은 “태권도뿐만 아니라 피아노, 칠판 등 교육 기자재 기부도 교육재단을 만들어 앞으로 더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에티오피아 같은 경우는 디지털피아노를 기증하기로 협약까지 맺었는데 현지 운송 사정이 좋지 않아 보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6·25전쟁 때 얼마나 많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 국가로 성장했으니 나눠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업 오너로서는 이례적으로 6·25전쟁 요약본 등 3질의 역사서를 직접 쓰기도 한 그는 동남아뿐만 아니라 르완다, 세네갈 등 아프리카의 6·25 참전국 학생들에게도 피아노와 칠판을 기증하고, 장학생을 선발해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아이미와 같은) 장학생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엘리트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견해요. 저의 기부 활동을 통해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었음을 전 세계에 알려주고 싶습니다.” 마닐라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이중근 회장은…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고려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1992년 학교법인 우정학원 이사장 ▲1994년 ㈜ 부영그룹 대표이사 회장 ▲1999~2001년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제20대 이사장 ▲2000~2004년 한국주택협회 회장 ▲2012년 (재)우정교육문화재단 이사장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 부의장 ▲2016년 세계태권도평화봉사재단 총재 ▲1995년 금탑산업훈장 ▲1996년 국민훈장 동백장 ▲200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9년 전경련 IMI경영대상 사회공헌대상 ▲2009년 대통령표창 ▲2007년 캄보디아 국왕 수교훈장 ▲2007년 베트남 우호훈장 ▲2007년 라오스 일등훈장 ▲2011년 동티모르 공훈훈장 ▲2013년 캄보디아 국왕 대십자 훈장
  • [경제 블로그] 어느 틈에 요직 꿰찬 ‘캠프 인맥’

    [경제 블로그] 어느 틈에 요직 꿰찬 ‘캠프 인맥’

    지난달 중순이었습니다. 모처에서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의 평판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 자리가 예약돼 있던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의 후임 선출 작업이었죠. 당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금융권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설마 이제 와…” 하며 반신반의하는 부류와 “언젠가는 챙겨 줄 줄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부류였지요. ●집권 말 슬그머니 부활한 ‘보은인사’ 전자의 근거는 “챙겨 줄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한자리 차지했을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이 전 부회장은 2014년 신한금융과 KB금융 회장 자리에 도전했다가 줄줄이 쓴잔을 마셨습니다. 후자 진영은 최근 슬그머니 부활한 ‘보은 인사’에 주목했습니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권이 반환점을 돌면서 일각에선 “캠프 출신 인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정권 창출에 기여했는데 ‘지분’을 챙겨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었지요. 이 때문인지 캠프 출신들이 다시 잇따라 중용되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취임한 이동걸 산은 회장을 비롯해 신성환 금융연구원장, 김선덕 주택도시보증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국책은행이나 주요 공기업의 감사, 이사 자리는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죠. 산은 부실경영 논란을 뒤로한 채 AIIB로 자리를 옮기는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은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중용된 캠프 출신입니다. 최근 물러난 정찬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재출격설’도 돕니다. 다소 주춤하는 듯했던 ‘낙하산’들이 다시 펴지기 시작하자 금융권은 한숨이 깊습니다. 한 은행원은 “제2 리먼 사태(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라 안팎 금융시장이 심상찮은데 정권과의 인연 등에 따라 인사가 이뤄지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능력 위주의 중용이 금융개혁 첫걸음 올 들어 정부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금융권 성과주의 도입입니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월급을 가져가고 승진 기회에도 차별을 두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과주의의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이 바로 낙하산 인사입니다. 정부의 이 ‘이율배반’을 지켜보면서 선뜻 월급봉투 수술(성과연봉제)에 동의할 은행원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부가 구태를 먼저 포기하는 것이 금융개혁의 첫걸음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한림대 총장에 김중수 전 한은 총재

    한림대 총장에 김중수 전 한은 총재

    학교법인 일송학원은 김중수(69) 전 한국은행 총재를 한림대 제9대 총장으로 선임했다고 12일 밝혔다. 김 신임 총장은 2007년 한림대 총장에 선임됐으나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1년 만에 학교를 떠났다. 다음달 초 취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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