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총영사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1차대전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5적·5공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분노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민간인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868
  • 러,새달 팀스피리트 참관/한·러 본격군사교류

    ◎4·6월 해군함정 상호방문 러시아가 3월중순에 실시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에 참관하기로 하는등 한·러시아간의 군사교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하기로 발표하면서 북한 러시아 중국과 4개 중립국등 7개국에 훈련을 참관해줄 것을 초청했으며 이중 러시아는 지난주 외교루트를 통해 참관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9일 알려졌다. 지난91년 팀스피리트훈련때도 정부는 북한을 비롯,구소련에 참관해줄 것을 초청했으나 북한과의 군사동맹조약에 따라 이 훈련을「대북기습공격훈련」으로 규정,참관을 거부했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외에도 오는4월중순 한국의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 개소식에 우리의 해군함정이 입항하며 6월 러시아의 부산총영사관 개소식에 러시아해군함정이 방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같은 군함의 교환방문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바탕으로한 실질적인 유대차원의 군사교류가 본격화된다는 신호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 총영사 3명 발령

    ◎샌프란시스코 이정하/함부르크 박춘범/카이로 정태익 정부는 3일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에 이정하 대통령공보비서관,주함부르크총영사에 박춘범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주카이로총영사에 정태익 외무부 미주국장을 각각 임명했다. 외무부 미주국장에는 장재용 대통령의전비서관이 임명됐다. ◇이총영사 ▲서울·53세 ▲서울대 외교학과 ▲미가톨릭대 정치학박사▲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 ▲세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박총영사 ▲서울·58세 ▲육사 14기 ▲주멕시코 공사 ▲주엘살바도르 대사 ◇정총영사 ▲충북 진천·50세 ▲서울 법대 ▲주일 일등서기관 ▲총무과장 ▲주미 참사관
  • 한­베트남 경제협정 체결/어제 외무회담/베트남총리 5월방한 합의

    한국과 베트남은 2일 서울에서 양국외무장관회담을 갖고 경제기술협력협정에 서명했다.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방한중인 웬 만 컴 베트남외무장관간에 서명된 이 협정은 경제통상분과위와 과학기술분과위로 구성된 경제공동위의 설치와 경제기술정보및 과학자의 교류촉진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양국은 경제공동위를 매년 개최키로 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하노이에서 제1차회의를 갖기로 했다. 이날 회담에서는 이밖에 5월하순 보 반 키에트 베트남총리의 방한을 추진키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외교경로를 통해 추후협의키로 했다. 또 빠른 시일내에 호치민시에 한국 총영사관을 설치키로 합의하는 한편 블루 드래건유전등 베트남의 자원개발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장려하기로 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6)

    ◎대한매신의 애국계몽/“축채 갚자” 전국적 담배끊기 전개/의연금 기탁자 명단·사연 연일 보도/「반지빼기」계기 여성동참 적극 유도/“통곡으로 실업가에 고한다” 사설로 참여 촉구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 시작했다.이에따라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권수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신민회 충실 대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가 민족의 목을 죌수록 배일논조를 통해 항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었다.그것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등을 주도한 민족지도자들과 국민들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 나타났다.또 국채보상운동과 같이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해 국민운동을 주도해나가기도 했다.특히 1907년 양기탁주필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었을때 신보는 역할 하나를 더맡았다.신민회 주관 각종 국민운동의 충실한 대변지로서 신민회 활동을 날카로운구국언론활동을 통해 뒷받침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김광제 서상돈등 10여명이 주도하고 나서는 것으로 불을 댕겼다.1907년 1월31일 당시 일본에 빚지고 있던 국채 1천3백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그것이었다.「국채 1천3백만원 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한데서 발단한 이 운동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구국운동 이기도 했다. 그 하나로 2천만동포들이 배를 끊자는 방안이 제시됐다.한사람이 한달 담뱃값 20전을 3개월만 모으면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무난히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이는 전국민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아 마침내 20여일만인 2월22일 한성에 중앙총괄기구인 국채보상기성회를 결성시켰다.국채보상서도의성회·국채보상부인회·국채보상경남찬성회·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대구국채담보회·제주의성회·황해도재령군보성소등 전국적으로 지역별뿐 아니라 직능별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결성됐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어느 신문보다도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다뤘다.의연금 기탁자의 명단을 보도함은 물론 기탁에 얽힌 사연들도 소개했다.이들 보도 가운데는 어려운 노동자들까지도 동참하는데 정부관리나 부유층들이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도 있었다.『국채보상을 위해 3개월씩만 단연하자는 서상돈의 발기에 한성안의 병문(길가)노동인이 충분소격에 연초대금을 서로 다투어가면서 모으고 있다는데 현금 정부대신은 노동자 보기가 어떠할 것인가』(1907년 2월24일자). 이 운동이 단시일내 전국적으로 확산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문들의 이같은 적극적인 보도에 힘입어서였다.그러나 신보는 초기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드는 의연금을 여러 곳에서 다룸으로써 혼선이 빚어질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그래서 의연금을 한곳으로 모을수 있는 중앙수합처가 결정되기 전에는 수전소 역할을 맡을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러면서도 3월1일자에는 「한인충애」 표제의 사설로 이 운동을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로 규정하고 나섰다.이 큰일의 성취를 돕는 것은 신문이 할수 있는 즐거운 일이라고 적극적인 지지를 밝혔다. 대한매일신보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는 3월31일자에 특별사고로 다루었다.「이제까지와는 달리 국채보상 의연금을 동사에서 직접 수령키로 했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나선 것이다.이에따라 신보는 일부 유지들을 규합,4월1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그 사무소를 사내에 설치했다.간부진용으로는 양기탁총무를 회계로 하고 윤웅렬소장,김종한부회장,박용규재무등이 추대됐다.전국각지에서 작게는 5전부터 10전·1환·10환,크게는 1백환 이상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2월말부터 4월말까지 불과 두달 사이에 4만명이 넘게 참여하는등 큰 호응을 얻었다.신보를 비롯,각 언론기관들도 이들 명단게재및 보도에 호외를 발행하는등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남자들을 위주로한 단연운동으로 시작했던 국채보사운동은 5월들어 신보에 의해 시작된 반지빼기운동등 여자들의 참여로 확산돼 나갔다.신보는「국채보상에 나선 여인의 대열」이라는 반지빼기모임 취지문의 논조는 사뭇 흥미롭다.「우리 2천만중 여자가 1천만이요,1천만중 반지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반지 한쌍 2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할수 있다.이 운동에 동참을 계기로 남녀동권을 찾자」(4월22일자). 통감부는 이 운동 초기에는 흡연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단연운동이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대수롭지않게 비웃었다.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자 통감부는 3월 들어서면서 영문판 기관지인 「서울프레스」를 비롯한 친일지들을 동원,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빚진 사람이 압제하는 채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는 논조를 폈다.또 3월24일자 「통곡고대한실업가」 표제의 사설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있던 실업가들에게 자극을 주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통감부는 급기야 공안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을 영국총영사에게 제소한데 이어 1908년 7월12일에는 의연금 3만환 횡령의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였다.영국측은 전날 배설 공판때 통감부 외무부장이 영국인피고의 증인으로 출두했던 어떤 한국인도 한제국및 통감부로부터 방해 내지는 탄압을 받지 않는다고 확약한 사실을 내세웠다.그러면서 양기탁의 즉각 석방을 요청,영국과 일본 양국간의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2백여만원 모금 양기탁은 이른바 국채보상금사기취재사건의 다섯차례 공판끝에 9월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되었다.그러나 그의 구속과 이후 법정공방으로 비화된 보상금 횡령사건등으로 모금활동은 더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1년반 가까이 계속된 모금운동에서 걷힌 돈은 모두 2백31만9백89원13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그러나 이 액수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국채 1천3백만원에는 먼 액수였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한국민주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을유문화사 1985)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
  • 베트남 외무 1일 방한

    웬 만 컴 베트남외무장관이 이상옥외무부장관의 초청으로 오는 2월1일부터 5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고 외무부가 28일 발표했다. 지난해 12월22일 한·베트남 수교이후 방한하는 베트남 최고위인사인 컴장관은 우리나라에 머무는동안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차기대통령을 예방하는 한편 이장관과 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기술협력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다. 정부는 컴장관의 방한기간중 호치민시에 총영사관을 설치하는데 합의할 계획이다.
  • 초대 베트남대사 박노수씨 임명

    정부는 28일 초대 주베트남대사에 박노수 전주베트남연락대표부 대표를 임명했다. 정부는 또 지난 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해체됨에 따라 민병석 주체코슬로바키아대사를 주체코대사로 발령,주슬로바키아대사까지 겸임토록 했다. ◇박대사 약력 ▲충북 청주·59세 ▲서울법대 ▲상공부 해외시장과장▲외무부 통상1과장 ▲주이란·스위스 참사관 ▲주제네바 공사 ▲주중앙아프리카 대사 ▲주휴스턴·오사카 총영사 ▲주베트남연락대표부 대표
  • 화남경제권/“한국의 장기투자 유망”/중국의 개발현황과 발전 잠재력

    ◎우리기업 활용가치 몰라 조사·연구 등한/플랜트수출·해외 생산기지로 손색 없어 홍콩과 남중국연해 광동·복건성·,대만,마카오,나아가 중국 해남성을 포함하는 화남지역경제가 21세기 아·태지역의 경제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화남지역경제는 아시아 최고의 금융·운송·통신·정보서비스산업 중심지인 홍콩을 핵으로 지리적 인접성과 혈연에 기초한 문화적 동질성으로 경제일체화 내지 경제권으로 형성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이곳에 참여·진출하기위한 우리의 경제교류대책수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은 화남경제권이 EC(유럽공동체)나 NAFTA(북미자유무역지대)못지않게 큰 실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인식부족으로 그 핵이라 할 수 있는 홍콩과 아직 경제협의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이와관련,업무협의차 일시귀국한 정민길 홍콩총영사는 『화남지역은 장기적·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가장 유망한 교역및 투자대상』이라면서 『지금부터라도 화남지역에 관한 연구와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80년 8월 제정된 광동성 경제특구조례에 따라 심수·주해·▦두에 각각 경제특구가 설치되면서 본격화된 화남경제권은 85년 중국이 홍콩과 대만자본의 집중적 유치를 위해 광동성내 주요지역을 망라하는 주강삼각주지역과 복건성의 하문경제특구및 그 주변 장주·천주지역을 민남경제개방구로 지정하면서 활성·가속화되기 시작했다. 91년 현재 화남경제권내 상품교역액은 홍콩·대만·중국등 3개 지역경제 주체들의 대외무역 총액 3천3백85억6천6백만달러의 20%에 상당하는 6백56억3천만달러를 기록했다. 또 91년 현재 홍콩의 대중국 일반상품교역액 2백56억2천6백만달러 가운데 79%에 이르는 2백1억7천만달러가 광동·복건·해남성과 이루어졌다.홍콩과 광동·복건·해남성간 교역액은 이들 3개성 대외상품교역액의 80%·47%·53%를 각각 접했다. 투자에 있어서는 80년대 제조업부문 직접투자와 호텔업등 자본회임기간이 짧은 소액투자가 주종을 이루던 것이 90년대 들어 부동산 개발투자와 사회간접자본 등 대형투자가 증가세를보이고 있으며 주식등 금융부문의 투자도 활기를 띠고 있다. 광동·복건·해남성은 노동집약상품 생산기지,홍콩과 대만은 기술·지식·자본집약상품 생산기지및 서비스산업기지로 고도의 분업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은 97년 7월 마카오,99년 12월 홍콩의 중국 귀속으로 자연스럽게 커질 전망이다. 홍콩·대만에 비해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국과 화남지역과의 경제관계는 상품교역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서비스산업분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지역적으로는 홍콩과 대만에 편중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이 상품및 플랜트 수출시장과 국내 한계생산기업의 해외생산기지로서의 화남지역의 활용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화남지역은 92년 광동성과 복건성의 경제성장률이 각각 18.7%와 16.1%에 달할만큼 높은 경제신장을 보이고 있어 상품수출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이 무한하다. 홍콩은 1백70억달러 규모의 신공항건설과 1백억달러 규모의 사회간접자본설비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대만은 3백억달러 규모의 공항및 컨테이너 부두·발전소·신시가지 건설을 추진중에 있고 광동·복건·해남성은 교통운송시설·발전소·통신설비·도로·항만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최우선투자순위를 두는 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제주도 면적의 2배가 넘는 4천3백㎦에 이르는 주강삼각주경제개방구를 비롯해 사회간접자본이 비교적 잘 갖춰진 광동·복건·해남성은 낮은 임금때문에 국내에서 이미 한계에 부딪힌 기업들의 해외생산기지로서도 활용가치가 크다. 정부는 화남지역경제의 발전전망으로 보아 그 핵이라 할 수 있는 홍콩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홍콩 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해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을 증진하고 ▲교역·투자를 심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민·관 합동조사단을 파견하며 ▲정부내에 화남경제권을 담당하는 실무작업반의 설치를 적극 검토중이다.
  • 카자흐 대사관 설치 상해 총영사관 신설/정부

    외무부는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재외공관의 신설및 관할구역 변경을 내용으로 하는 직제개정안이 의결됨에 따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번 주내에 공포절차를 거쳐 시행할 예정이다. 이에따라 외무부는 독립국가연합(CIS)내 카자흐공화국에 상주대사관,중국 상해에 총영사관을 각각 신설하고 베트남 하노이의 연락대표부를 주베트남대사관으로 변경키로 했다. 또 올해 1월1일자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체크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됨에 따라 주체코슬로바키아대사관을 주체크대사관으로 변경하고 슬로바크에 별도의 대사관을 설치해 주체크대사관에서 겸임토록 할 예정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5)

    ◎매신의 수난과 저항/배설 상해투옥에도 항일필봉 건재/일제,영국과 손잡고 공작… 유죄 판결/양기택 등 민족언론투사들이 맥이어/정간 2회·압수 45회 맞서 고종퇴위 기도 등 폭로 일제의 탄압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신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민족지를 짓밟기 위한 술책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신문조례를 만들도록 하는 외교적 강압으로 나타났다.특히 을사보호조약 체결뒤의 언론탄압은 더욱 심한 양상을 띠었다.한반도 침략정책에 방해가되는 기사나 그 부당성을 비판하는 글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그래서 신문을 압수하거나 정간시키는 동시에 편집인 문책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편집인 문책 일쑤 이 시기에 일제의 민족지에 대한 탄압은 황성신문의 정간및 주필 장지연의 구속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수 있다.그러나 민족언론탄압에 서슬 퍼런 칼을 갈았던 일제도 배설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는 손을 쓸수가 없었다.치외법권의 보호가 늘 걸리적 거렸던 것이다.따라서 일제의 사전검열없이 발행되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한 신문으로 남게 되었다.그 논조는 말할나위도 없이 반일로 일관된 예봉이기도 했다. 핍박과 강압을 외면한채 강경한 논조를 굽히지 않는 신보.그 존재는 마침내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고만다.신보를 무력화 시키려는 일제의 탄압은 외교경로를 통한 배설의 추방공작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배설에 대한 추방공작은 이미 1905년 9월에 제기 되었으나 통감부가 본국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기는 이듬해 7월부터이다.이에따라 일제는 본국외무성을 통해 동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배설을 추방하거나 신보를 폐간토록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영국측은 1904년에 제정된 「청국및 한국에 대한 추밀원령」을 적용키로 했다.그러나 배설을 제재하기에는 그 근거가 미약했다.그래서 제5조를 개정하여 1907년 2월1일 이를 공포하기에 이른다.개정된 내용의 골자는 『영국국민과 본령시행구역내에 있는 영국과 친선국의 소요 혹은 그 국민과의 사이,그리고 청국정부와 그 국민 또는 한국정부와 그 국민 사이에 불화를 도발하려하는 사항은 본조에 규정하는 선동적인 사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배설과 신보를 제재하려는 일제의 책동에 영국이 동조한 것이다.그러나 배설은 일제의 억압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일제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의 선언은 신보의 한글판 7월17일자 1면 머리에 『일본이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제를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케 하려한다』는 폭로기사로 반영됐다. 이어서 이튿날짜 신보는 논설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황실을 강핍하고 대신을 종으로 부리며 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동이 극도에 달했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다.날이 갈수록 강도 높은 논조로 맞서는 신보의 자세에 통감부는 급기야 1907년 10월 서울주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외교적 탄압을 본격화 한다. 배설은 10월14일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영사 재판정에 출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재판이 열린 다음날 코번은 배설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신보의 논설이 추밀원령 제83조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항에 해당된다 하여 6개월간의 근신에 처한 것이다. 배설에 대한 일제의 책동은 이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나 사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특히 배설의 근신기간이 만료된 직후부터 신보는 더욱 강경한 논조로 돌아섰다.민족주의운동을 탄압했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이등박문에 비유한 「백매특날이 불족이압 일이태리」며 「정부당국자의 기량」등의 글로 일제를 규탄하고 통감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히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통감부는 또 다른 탄압의 칼을 빼어들었다.1908년 4월29일 이완용내각으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 발행되는 외국인의 신문까지도 발매·반포금지 또는 압수할수 있도록 한것이다.광무신문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신문지법(1907년 7월제정)은 신문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벌칙이 골자로서 민족지를 탄압하는데 적용된 악법이라 할수 있다.법이 처음 제정 공포된 때에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해외에서 교포들이 발행하는신문에 대한 규제조항이 없어 이를 새롭게 보완한 것이다. 신문지법을 이처럼 개정토록 한데에는 신보탄압이 근본목적이었으나 반일논조의 해외교포신문들이 국내에 유입되는것을 막자는 계략도 포함됐다. ○이완용내각 통박 통감부는 신문지법이 개정된 직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신보를 압수하기 시작했다.5월1일자 논설 「불필랑경」을 비롯,5월13일자「한국내의 일본」,5월16일자「학계의화」가 통감부 기휘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신보는 잇따라 압수됐다.당시 일제가 집계한 신보압수건수를 보면 1908년 한해동안만도 국한문판 8회,국문판 7회에 이른다.일제는 이같은 신문압수방법외 신보의 구독을 방해하는 행적적 탄압도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통감부 기관지 서울프레스를 동원하여 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등 다각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신보의 논조는 좀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일제는 배설에 대해 어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공작을 벌였다.그리고 영국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펴기 시작했다.이른바 양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영국은 마침내 배설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키로 하고 배설을 재판에 회부한다는데 동의했다.이렇게 해서 배설의 2차재판은 1908년6월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리게 됐다.재판을 진행하기위해 상해고등법원의 판사 본과 검사 윌킨슨이 서울에까지 왔다.이는 한·영·일 3국이 관련된 동양역사상 처음 있는 특이한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판사는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언도했다.유죄판결을 받은 배설은 잠시 한국을 떠나 상해에서 복역하게 됐다. 그러나 배설이 신보를 떠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에도 이 신문의 항일논조는 변함없이 이어졌다.양기탁을 비롯한 민족언론 투사들이 본래부터 신보의 제작을 주도해온 때문이었다. 배설의 재판직후 통감부의 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또한 집요하게 지속됐다.7월2일자 논설 「확실한 언론」을 치안방해로 규정,이날자 신보를 발매금지 처분하는 한편 또 다른 탄압계획을 실행했다.신보사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로 전격 구속한 것이다. 신보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신보의 제작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전국 규모의 민족운동이던 국제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을 와해시키려는 2중효과의 탄압책략이었다.궁국적으로는 신보를 중심으로한 항일민족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일제의 신보에 대한 탄압은 이 신문이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에 매수되기까지 줄곧 이어져 국한문판 24차례,국문판 21차례의 압수와 2차례의 정간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항일구국지 대한매일신보는 이처럼 끝없는 수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역사를 살았다. 정진석저)
  • 한국기업들 활기(변화하는 베트남:6·끝)

    ◎“싼 임금 매력” 삼성 등 52개사 진출/34개사는 무허영업… 단속땐 속수무책/호치민시 등엔 교포식당 속속 문열어 베트남정부의 개방정책에 따라 한국기업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베트남내의 한국」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도 하노이와 최대도시인 호치민(구사이공)에는 한국기업·지사 간판이 하나둘씩 늘고 있고 한국어로 된 대형 입간판도 눈에 띈다. 특히 한국기업들이 다수 모여있는 호치민에는 호주·싱가포르등 제3국 국적을 가진 교포및 한국계 혼혈 2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호치민무역관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8월말 현재 베트남에 지사 또는 대표사무소를 설치한 외국기업은 대략 3백여개에 달한다. 이가운데 한국기업은 총 52개로 베트남정부의 허가를 받은 업체가 18개,허가없이 임의로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업체가 34개다. 삼성·대우·현대·럭키금성·포철·쌍용등 6개사는 하노이와 호치민에 모두 지사를 두고 있다. 조영복 KOTRA 호치민무역관장은 『KOTRA 무역관은 물론,베트남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는 임가공형태의 봉제업체들을 합치면 숫자는 이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대베트남 진출규모는 대만·홍콩등에 이어 전체 24개국 가운데 7번째.그러나 대만·홍콩에 비해 투자액수가 적을 뿐아니라 대부분이 불법으로 영업하고 있는 중소업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들 업체는 외자유치의 측면에서 현재 불법영업을 묵인하고 있는 베트남정부가 불법임을 내세워 단속에 나설 경우 속수무책이다. 또 베트남인 근로자들이 임금증액을 요구하며 일손을 놓을 경우 이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다.제3국 바이어들의 납기를 맞추지 못할 경우 심지어 도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관장은 이들 업체대표에게 현재의 싼 임금을 이용해 올리는 짭짤한 수입에 안주하지 말고 베트남정부의 정지조치에 대비해 언제라도 보따리를 쌀 준비를 하라고 충고한다는 것이다. 한국기업의 진출에 따라 주재원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겨냥한 한국식당이 성업중이다. 사이공함락 이틀전인 지난 75년 4월28일 문닫은 「블루 다이아몬드」를 끝으로 호치민에서 자취를 감춘 한국식당은 지난 89년 12월 베트남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영화씨(27·여)가 이모와 함께 동호이대로에 개업한 「코리아 푸드」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내 이제는 10여개에 이른다. 가라오케바를 겸하고 있는 이들 한국식당들은 한국노래보급을 통해 베트남속에 한국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베트남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국의 모습은 기업과 식당뿐만이 아니다. 호치민 중심부에서 북서쪽 외곽으로 가다보면 「따이한노」라고 쓴 표지판이 서 있고 호치민시 평화공원에는 아직도 팔각정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 월남전의 기억을 더듬어 이곳을 찾은 한국사람들을 맞는다. 그러나 한국계 혼혈 2세와 같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베트남인들로부터 경멸하는 뜻을 지닌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리는 한국계 2세는 줄잡아 3천명선.2만∼3만명으로 추산된다는 국내보도는 월남전 당시 영외거주가 가능했던 군인들의 수를감안할 때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상사주재원들의 설명이다. 김호태 주베트남공사는 『멀지않아 호치민구엔 두가에 있는 전주월대사관자리에 호치민 총영사관이 개설되면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베트남인들과 섞여 한국계 혼혈이라는 표시를 내지 않고 잘 살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아버지의 나라」 운운하는 것은 그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국계 혼혈 2세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

    ◎여명기의 민족지/“항일구국” 염원안고 대한매일신보 탄생/국운 기울어 암울했던 1904년 창간/주권수호 앞장서며 숱한 고난/해방직후 서울신문으로 속간/초대사장에 오세창 취임… 권동진·홍명희 고문에 영입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그 시대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1904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암담한 나라 운명속에서 한가닥 빛으로 창강된 대한매일신보.그 항일구국지가 1945년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살았다.당시 민족의 생존이 그렇듯 일제의 모질고 간교한 탄압에 쓰러진 대한매일신보의 맥락은 서울신문이 잇고있다.일제 강점기 사이에 변화도 없지 않았으나 서울신문의 뿌리는 분명히 대한매일신보에 두었다.그 위대한 항일구국지 창간 1세기를 불과 1년 앞둔 오늘,그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신문의 연륜을 다시 헤아리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민족주권 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가히 전설적인 신문이었다.근대 언론사에서 「다시 없는민족의 대변기관」으로 평가 받는 이 신문은 나라 안팎이 매우 복잡한 시기에 발행됐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때이기도 했다.그리고 국내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불길처럼 치솟던 시기였다. 특히 나라안에서는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을 막으려는 민중운동과 함께 의병 무장투쟁,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창간되어 항일구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1702∼1909년)이다. 러·일전쟁때 취재차 한국에 왔던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인 그가 한글전용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짜는 89년전인 1904년7월18일로 돼있다.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동시에 창간했다. 창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모를 보아도 쟁쟁하다.당대의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이자 우국지사였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옥관빈등이 그 주역들. 나중에는 안창호·이갑등 구국운동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뛰어들었다. 창간호(타블로이드판)는 한호의 지면이 6면으로 4면은 영문,2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다.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분리,2종을 발행했다.1907년5월에는 한글전용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 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황실(고종)의 은밀한 재정적 뒷받침과 민족진영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처음부터 반일구국일수밖에 없었다.그 첫 지탄공격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이를 시발로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전재,샌프란시스코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보도,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밀서사진 전재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언론의 횃불을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신문의 강력한 반일논조야말로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경성일보」(일어)「Seoul Press」(영어)등 통감부의 기관지를 직접 발행하여 언론대응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또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인 탄압을 가했다.외교적 압력은 영국측에 대해 배설의 추방요구로,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압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언론 자세는 좀체 꺾이지 않아 국한문판 24차례,한글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지속됐다.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이처럼 항일언론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신문에 몸담고 있던 항일언론투사들의 민족사상과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족적중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신문이 주동이 되어 벌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이는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으로부터 얻은 나라의 빚 1천3백만원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아 일본의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일대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우국지사 대거 참여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던 시기에 사세를 크게 신장,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1907년 9월3일 기준 국한문 8천,한글3천부).이같은 발행부수는 그때까지 한국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조를 터뜨리던 이 신문은 일본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물이 꺾이기 시작했다.그후 배설이 숨지면서 이 신문은 더욱 기울어졌으며 영국인 만성(Alfred Marnham)이 사장직을 인수받았다.그러나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 영국총영사 보나르(Bonar)와 통감부의 회유및 압력을 받아 1910년 5월21일 결국 통감부에 팔리고 만다.국권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것이다.그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두글자 「대한」을 빼앗겨 버린다.「대한」이 없어진 「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한글판은 제939호부터) 이 날짜의 사설제목은 「동화의 주의」로 나온다.제국주의 36년간의 일본 전위역할을 이렇게 상징하고 일제 선전기관으로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는 이틀만인 9월1일 대한제국의 기관지 성격이던 한양신문(전대한신문)까지 합병한다.국한문판과 한글판의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한국인이 만드는 한국의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이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내건 일제의 어용언론활동의 전주곡이었다. 경영의 측면에서 경성일보사에 흡수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철저하게 총독부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매신은 그후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표면상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1920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 승격됐다.그리고 1929년에는 한국인 편집국장이 임명된데 이어 1930년 한국인 부사장이 처음 기용되어 다소 편집제작의 재량권이 이루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매신은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위주로 했으나 민족민간지들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민족진영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비호속에 이같은 논조로 일관하던 매신은 기구를 확대,경성일보사에서 분리하게 됐다.1938년 4월16일 독립된 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고쳐 새로 출발한 것이다. 매신이 경일과 맞붙은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4층 콘크리트 사옥을 짓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하지만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았고 여기에 총독부 소유의 주를 포함한다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셈이었다.매신의 일제옹호논조 또한 해방직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매신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됐다.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청이 그해 10월2일 매신을 접수,매신 한인주주총회를 열어 새중역진을 구성토록 종용했다.이에따라 10월25일 주총이 열려 「서울신문」이라는 새로운 제호와 오세창을 사장으로하는 간부진용이 결정됐다.이 무렵은 사장 이성근이 지난날의 과오를 전사원에게 사과하고 자퇴한뒤 사원자치위원회에 의해 신문이 발행되던 때였다.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을 만들어오던 6백명의 자치위는 그러나 주총의 간부진용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주총결정은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게 그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가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당국은 11월10일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렸다.매신이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 한뒤 일단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개편실무진과 자취위 사이에 얽혔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총독부 기관지로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매신개편의 대업을 새로 위임받은 이관구와 하경덕은 재원확보문제와 함께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는 인사들로 경영·편집진을 구성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초대사장에 위창 오세창이 추대됐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지조높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사회적·정치적 덕망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울신문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었다.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격인 홍명희가 고문에 영입됐다. 서울신문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저명교육자 하경덕이 부사장에,그리고 사려 깊은 논조를 감당할 주필에는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이관구가 선임됐다. 이러한 일사천리의 준비작업은 21일 5층 옥상에서 가진 오세창사장의 취임식으로 그 결실을 보게됐다.해방의 감격과 함께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 지면을 이 땅에 선보인 것이다. 이날이 1945년11월22일이었는데 신문은 11월23일자로 발행됐다. 이때의 서울신문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를 그대로 계승,제13738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 고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련의 역사를 향해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연보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 ▲1904년 7월18일 창간 ▲편집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취임 ▲1910년 5월21일 통감부가 매수 ▲1910년 8월28일 국한문판 1461호,한글판 938호로 종간 ◇매일신보(1910·8·30∼1938·4·28)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대한매신을 계승) ▲경성일보사장 길야태좌위문 취임(매일신보사장 겸임) ▲1912년 3월1일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한글전용으로 합간 ▲1938년 4월28일 매신의 제호로 최종발행(지령11 012호) ◇매일신보(1938·4·29∼1945·11·10) ▲경일에서 분리독립,제호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취임 ▲1945년 11월10일미군정에 의해 정간 ◇서울신문(1945·11·23∼현재) ▲1945년 11월23일 매신을 서울신문으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초대사장 오세창,고문 권동진 홍명희,부사장 하경덕,전무 김동준,주필 이관구취임
  • 미·중간 인권문제 갈등을 주목한다(사설)

    미의 대대만 신예전투기판매가 직접적인 도화선이다.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권과 민주화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클린턴대통령등장과 그에대한 중국의 긴장과 경계심이 맞물린 결과라 할수 있다.자칫하면 화해와 협력의 중국·구미관계가 파국을 맞게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느끼게 하는 불길한 조짐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중국은 경제개방과 개혁의 성공을 위해 구미의 협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하고 있다.그러나 경협을 구실로하는 체제간섭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다.영국의 홍콩민주화와 구미의 대대만신예전투기공급도 결국은 바로 그러한 대중국체제간섭의 일환이라 보는 것이 중국의 시각이다. 대만을 지원한다는것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대만흡수통일을 방해하는 일일뿐 아니라 중국내부의 정치민주화욕구를 부채질하려는 의도로 중국은 받아들이고있다.결과적으로 홍콩민주화의 영국과는 정면대결도 불사했으며 미라주기60대의 대만판매를 강행키로한 프랑스에 대해선 광주주재 총영사관폐쇄등의 이례적인 강경조치로 대응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지금 체제도전의 가장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상대는 미국이다.미국도 이미 대만에대해 1백50대의 F16전투기판매를 결정하고있을 뿐아니라 차기미국대통령에 당선된 클린턴은 중국인권의 개선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있다.그렇지 않으면 대중무역의 최혜국대우를 보장할수 없다는등 노골적인 압력의 발언도 서슴지 않고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미국에대해선 최혜국대우를 내정간섭의 구실로 이용치말라는등 엄포만 놓고있지 이렇다할 행동의 반격은 가하지 않고있다.중국의 개혁에대한 미국의 비중때문이다.중국이 올리고있는 연1백50억달러의 대미무역흑자는 중국의 성공적인 개혁가속의 절대적인 밑천이 되고있다.최혜국대우의 상실은 그러한 흑자의 결정적 감소를 예고하는 것이며 그것은 중국경제는 물론 개혁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을 필요로 하고있는 것은 사실이나 미국도 중국의 개혁을 결정적인 궁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중국지도부도 알고있다.때문에 중국의 이번 대영불강경자세와 조치는 미국의 클린턴대통령취임이후 예상되는 인권공세에대한 경고와 견제에 주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있다. 그런 점에서 정말 주목되고 우려되는 것은 클린턴 취임후 본격화될것이 틀림없는 미중간의 인권갈등이라 할수있다.어느선에서 타협이 가능할지 아니면 파국을 맞게될지 93년의 가장 중요한 세계적관심사가 될것이 틀림없다.그 향방은 중국개혁의 앞날을 좌우하게될 것이며 세계내지 한반도적 파장 또한 클수밖에 없을것이다.우리에게도 비상한 주목거리가 아닐수 없는 것이다.
  • LA폭동피해 한인/99%가 “복구 미완”/한미봉사단체연 설문조사

    ◎“완전정상화” 전체 0.4% 13업체뿐/발생후 8개월… 한·미 정부차원 지원 절실 지난 4월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한인 사업체들이 해가 바뀌는데도 피해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미봉사단체연합이 3백22개 한인피해업체를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결과 폭동발생이후 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0.4%에 해당하는 13개 사업체만이 재정난을 극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1백12개 사업체는 「조금 어렵다」 ▲1백8개 사업체는 「어렵다」 ▲53개 사업체는 「매우 어렵다」고 응답했다. 한인업체들이 이처럼 폭동피해극복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은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보상금액이 제한된 보험에 가입,보험회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으로는 피해를 충분히 복구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많은 한인사업체들이 폭동피해의 원상회복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한 교민관계자는 『전체 한인사업체가운데 화재보험에 가입한 곳은 절반수준에도 못미치는 41.79%에 불과하다』고 전하고 『폭동피해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정부의 과감한 예산지원과 함께 주미 한국대사관 및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의 측면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인 상점주인들과 흑인주민들사이에 생활터전의 복구를 둘러싸고 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어 어려움이 더하다. 한국인들은 폭동으로 파괴된 주류판매상점을 다시 재건,이를 계속하겠다는 것이고 흑인들은 이 지역 주류판매상점이 결과적으로 매춘,마약,부랑아등을 조장했다고 주장,한인들의 주류판매상점 재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 공관장 11명 이동

    ◎필리핀대사 이창수씨/인니대사 장명관씨/멕시코대사 이상진씨/루마니아대사 박종상씨/아일랜드대사 박남균씨/체코대사 민병석씨/LA총영사 김항경씨/미얀마대사 김정환씨/우크라대사 안현원씨/탄자니아대사 박부열씨/피지대사 강근탁씨 정부는 24일 주필리핀대사에 이창수외교안연구원 연구위원,주인도네시아대사에 장명관연구위원,주멕시코대사에 이상진연구위원을 각각 임명하는등 공관장급 11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정부는 또 주루마니아대사에 박종상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주아일랜드대사에박남균본부대사,주체코대사에 민병석대통령 외교안보비서관,주미얀마대사에 김정환국방정보본부장 특보,주우크라이나대사에 안현원주독공사,주탄자니아대사에 박부열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주피지대사에 강근탁외교정책기획실 심의관,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에 김항경주미얀마대사를 각각 임명했다. 김재춘주인도네시아대사,이복형주멕시코대사,이현홍주루마니아대사,이승곤외교정책기획실장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노정기주필리핀대사,선준영주체코대사,민형기주아일랜드대사,백영기주피지대사는 외무부 본부대사로 발령받았다. 정부는 또 주독공사에 김재섭국제기구국장을 임명·발령하고 외무부 외교정책기획실장에 권병현연구위원,외교정책기획실 제3정책심의관에 김명배씨,국제기구국장에 금정호심의관,여권관리관에 황규정연구관을 각각 임명했다.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에는 황길신여권관리관,기획관리실 심의관에 임대택 중동아프리카국 심의관,국제기구국 심의관에 황용식 주필리핀공사,국제경제국심의관에 이태식연구관을 각각 발령했다. 이날 임명된 신임대사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 주필리핀대사(경기 성남·61)=▲서울대 정치학과졸 ▲외무부 통상1과장 ▲통상국장 ▲주홍콩총영사 ▲제2차관보 ▲주스웨덴대사 ▲주호주대사 ◇장 주인도네시아대사(전북 전주·61)=▲서울대 법대졸 ▲외무부 의전과장 ▲아프리카국장 ▲주세네갈대사 ▲의전장 ▲주스페인대사 ◇이 주멕시코대사(경남 고성·59)=▲부산대 영문과졸 ▲외무부 통상2과장 ▲구주국장 ▲주일공사 ▲주터키대사 ▲주아르헨티나대사 ◇박 주루마니아대사(경북 청도·63)=▲고려대 정치학과졸 ▲외무부 통상2과장 ▲주토론토총영사 ▲중동국장 ▲주미공사 ▲주쿠웨이트대사 ◇박 주아일랜드대사(강원 명주·58)=▲서울대 영문과졸 ▲외무부 여권과장 ▲통상1과장 ▲주멕시코공사 ▲주휴스턴총영사 ▲주말라위대사 ▲주그리스대사 ◇민 주체코대사(서울·49)=▲서울대 외교학과졸·미신시내티대 정치학 박사 ▲외무부 안보과장 ▲주서베를린 총영사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비서관 ◇김 주미얀마대사(서울·54)=▲육사졸(19기)·미참모대 수료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주미 국방무관 ▲국방정보본부장 특보 ◇안 주우크라이나대사(함남 함주·56)=▲서울대 법대졸 ▲외무부 통상1과장 ▲주독공사 ▲조약심의관 ▲영사교민국장 ▲주마이애미총영사 ◇박 주탄자니아대사(광주·54)=조선대 경제학과졸·서울대 행정대학원졸 ▲외무부 정보2과장 ▲조약심의관 ▲감사관 ▲주트리니다드토바고대사 ◇강 주피지대사(경남 진양·47)=▲서울대 외교학과졸 ▲주영1등서기관 ▲대통령비서실파견근무 ▲외무부 안보과장 ◇김 주로스앤젤레스총영사(서울·52)=▲서울대 법대졸 ▲외무부 동남아과장 ▲국무총리 의전비서관 ▲주뉴욕부총영사 ▲외무부공보관 ▲영사교민국장
  • 중국,광동주재 불영사관 폐쇄/대만에 미라주기 등 무기판매 보복

    【북경 AFP 로이터 AP 연합】 중국이 프랑스의 대대만 전투기 판매에 대한 보복으로 광동성 광주시소재 프랑스 총영사관을 폐쇄키로 결정,23일 프랑스측에 공식 통보함에 따라 중국과 프랑스간의 관계가 급속 냉각되고 있다. 중국관영 중앙TV는 이날 정오 뉴스를 통해 중국외교부의 강은주 부부장(차관)이 이날 클로드 마텡 북경주재 프랑스대사를 중국외교부로 초치,프랑스가 26억달러상당의 미라주 전투기 60대(2000­5시리즈)와 1천5백기의 공대공미사일을 대만에 판매키로 한데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대중국 시장진출 최대교두보중의 하나인 광주 총영사관을 1개월내로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이곳 외교소식통들은 중국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지난 81년 네덜란드가 대만에 2척의 잠수함을 판매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경주재 네덜란드대사를 귀국 조치시킨이후 11년만에 서방국가에 대해 취한 가장 강경한 대응조치로 보고 있다. 프랑스는 현재 북경주재 대사관외에 상해와 광주에 각각 총영사관을 두고 대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 있는데 광주총영사관이 폐쇄됨으로써 대중국시장 진출에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됐다.
  • 한·베트남 수교서명/외교단절 17년만에/실질협력 확대 합의

    【하노이=문호영특파원】 한국은 지난 75년 구월남공화국의 패망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17년만에 베트남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공식 수립했다. 베트남을 방문중인 이상옥외무장관은 22일 상오 하노이 시내 정부영빈관에서 구엔 만 캄 베트남외무장관과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한뒤 회담을 갖고 이번 수교를 계기로 실질협력을 더욱 확대,모범적인 남남협력관계를 추구해 나가기로 했다. 이장관은 특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문제와 관련,『양국간에 과거 일시적으로 불행한 시기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두 나라 국민에 주어진 과제』라고 지적,양국간 과거사를 정리했다. 양국 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차관보급을 위원장으로 한 경제공동위 설치에 합의하고 실질협력 증진을 위해 항공협정,투자보장협정,이중과세 방지협정,무역협정 등을 빠른 시일내에 체결키로 했다. 양국 장관은 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고위지도자의 인적교류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고 이장관은 캄장관이 빠른 시일내에 한국을 방문해 주도록 초청했다. 양국은 호지명(구사이공)시에 한국총영사관을 설치키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외교채널을 통해 협의키로 했다. 이장관은 이날 회담을 마친뒤 하노이 시내 보스호텔에 있는 한국대사관 현판식에 참석했다. 이장관은 이어 보 반 키에트총리를 예방,수교후 양국간 관계증진 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장관은 23일 상오 레 둑 안대통령을 예방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한편 한·베트남 두 나라는 외무장관 회담에 앞서 김석우 외무부아주국장과 웬반 키우 베트남외무부동북아국장 사이에 경제기술 협력협정에 가서명했다. 재인자
  • 대사 2명 이동/주우루과이 박태진/주에콰도르 오채기

    정부는 10일 주우루과이대사에 박태진 외교안보연구원연구위원을,주에콰도르대사에 오채기 외무부본부대사를 각각 임명했다. ◇박대사 약력 ▲서울·57세 ▲육사 15기 ▲주말레이시아 무관 ▲주일무관 ▲육군방공포병 사령관 ▲소장 예편 ▲주요르단대사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오대사 약력 ▲광주·60세 ▲외대 영어과 ▲주미참사관 ▲주인도네시아공사 ▲영사교민국장 ▲주상파울루총영사 ▲주나이지리아대사 ▲경기도 국제관계자문대사
  • 마이애미총영사 최근배씨/주불공사 김동호씨

    정부는 5일 주마이애미총영사와 주프랑스공사에 최근배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과 김동호 주마이애미총영사를 각각 임명,발령했다. ◇최 총영사=▲서울·57세 ▲고시 14회 ▲서울대 법대졸 ▲주인도참사관 ▲미주국심의관 ▲주부르키나파소대사 ▲주영공사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 ◇김 공사=▲전남령암·55세 ▲서울대 불문과졸 ▲주부르키나파소참사관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 ▲주유엔참사관 ▲주카메룬대사 ▲주마이애미총영사
  • 바르셀로나 총영사관 철수 재고를(해외에서)

    한국정부가 바르셀로나총영사관을 연내에 철수시킬 방침이어서 이곳 교민들은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우리는 이미 한국정부에 철수반대입장을 전달한 바 있으며 현지 매스컴을 이용,스페인정부가 외교적 대응을 하도록 유도하려는 노력도 아울러 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교민수가 적고 올림픽이 끝나 바르셀로나의 외교적 필요성이 줄어들었음을 철수이유로 내세우고 있다.그리고 연초 아프리카의 6개 대사관을 비슷한 이유로 폐쇄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또한 유엔가입으로 더이상 표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협력가능성이 큰 나라와의 관계증진에 역점을 두는 현실외교에 기인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 대한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중요성을 망각한 것이다.바르셀로나는 ▲황영조선수의 올림픽마라톤제패가 이루어진 곳이고 ▲애국가를 작곡한 고 안익태선생의 유가가 이웃해 있는 곳이며 ▲스페인정부 세수의 40%를 부담하는 카탈루냐주의 주도이다. 바르셀로나의 비중이 단지 교민수로 평가돼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한국정부가 철수방침을 재고해줄 것을 거듭 촉구한다.
  • 오늘 무역의 날… 상공부 통상정책 재조정(국정탐방)

    ◎무역환경과 과제/“그래도 수출뿐” 산업고도화에 전력/NAFTA·EC 등 장벽강화 대응/고부가제품 개발로 경쟁력 높이기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 연말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던 당시 장충체육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3부요인,수출유공자및 수출업체 종업원등 7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출 1백억불」 달성을 기념하는 행사가 치러지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전국의 기업인과 근로자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수출 1백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민족중흥의 창업도정에 획기적 이정표가 될 자랑스러운 이 금자탑을…』 ○64년 첫 수출 1억불 최각규 당시 상공부장관의 경과보고에 이어 박대통령의 치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15년이 지난 지금,국정의 비중이 수출에 쏠렸던 그때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수출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식어있다. 「1백억불 수출」의 사령탑이었던 당시 상공장관이 현재 「1백억불 무역적자」시대의 경제팀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라는 사실이 묘한 대조를 이룰 만큼 그때와 지금은 여러가지로 변해 있다.개방파고와 경제블록화,경쟁력약화등 수출환경도 물론 좋지 않다. 이른바 개발연대인 60·70년대에는 수출이 밥줄이었다. 빈약한 기술과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싼 임금으로 물건을 많이 만들어 내다파는 길밖에 없었다. 때문에 수출은 지상명제였고 모든 경제정책의 잣대였다.수출제일주의,수출입국이라는 말도 그래서 탄생됐다. 64년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고 7년만인 71년 10억달러,77년 1백억달러를 달성했다.86년엔 대망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88년에는 흑자가 1백41억달러에 달하는등 쾌속질주를 해왔다. 교역규모는 64년이후 연간 20%를 웃도는 성장을 지속,지난해 교역규모 1천5백억 달러로 세계 11위의 대국이 됐다.수출로는 64년 1억달러 달성이후 6백4배가 증가한 셈이고 수입은 2백2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무역의 날(11월 30일,87년이전에는 수출의 날)을 맞는 올해 수출업계의 분위기는 차분함을 넘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각종규제 거세질듯 올 수출은 지난해보다 9·9% 증가한7백80억달러,수입은 8백25억달러내외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따라서 무역수지 적자는 통관기준으로 지난해 절반수준인 40억달러정도에 그칠 것이라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무역수지가 다소 개선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나 주력시장인 미국과 일본 EC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매우 부진하다.대일역조개선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올 대일무역적자가 80억달러에 달하리라는 전망이 하나의 실증사례다.북방과 중남미시장이 그나마 버텨주고 있다. 그렇다고 내년이후 수출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세계교역의 틀을 새롭게 결정지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그동안의 교착상태에서 최근 미국과 EC의 의견접근으로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UR이라는 새로운 다자규범은 국내시장의 개방확대를 요구하고 각종 정책금융성격의 보조금 지급도 못하게 하는등 수출전선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여기에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와 EC(유럽공동체)통합등 국지적 블록화추세와 함께 환경규제등 각종 규제도 강화돼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 분명하다.미국의 클린턴정부도 우리에게 공정한 무역을 요구하고 개방약속의 이행을 철저히 따질 것으로 보인다. 높은 임금과 금융비용,인력수급의 불균형,사회간접자본시설의 부족등 국내적으로도 구조적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경쟁력강화가 하루아침에 이룩되기 어려운 과제이고 보면 구조개혁의 노력이 일층 강화돼야 하고 저부가가치 산업의 과감한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견인역할 다시 해야 정부도 노동집약에서 기술·지식집약으로 산업정책을 고도화시키는 일에 정책비중을 높혀나간다는 방침이다. 기업가나 근로자 모두가 작더라도 우수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없이는 험난한 교역환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다. 지난 26일 「무역의 날」 기념세미나에서 『불확실한 대내외여건아래 우리 수출이 다시금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하기위한 길은 결국 수출경쟁력강화밖에 없다』고 한 한봉수 상공장관의 언급은 다시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상역국의 발자취/상무국으로 출범,60∼70년대 최고 전성기/30대 신국환 현공진청장 등 32명 거쳐가 상공부 상역국. 경제기획원의 경제기획국이나 재무부 이재국만큼 비중있는 정책부서가 상공부의 상역국이다. 수출입국의 기치아래 한때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던 실무주체가 바로 상역국이고 개방화시대를 맞이한 요즘엔 나라의 무역정책을 개방과 자율에 맞춰나가는 조율사 역할을 하는 곳이 상역국이다. 수출제일주의를 외쳤던 시절의 영화는 많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무역정책의 총괄부서로서의 위상과 역할에 흔들림이 없다. 48년 상무국으로 출발한 상역국은 무역국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50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출범초기는 변변한 산업이 없었던 때였고 생필품과 외환부족으로 정상적인 무역이 어려워 상역업무의 대종이 정부보유 외환에 의한 수입과 원조수입이었다.때문에 수입할당작업이 업계 이해로 막바로 연결돼 상역국의 파워가 그만큼 막강했다. 수입할당을 받기위해 상역국 복도에 기다리고 있다가 외환배정이 확정되면 업자들이 환호성을 올리곤 했던 시절이 그때다. 60년대들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함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추진되면서 상역국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수출증대를 위한 진흥책이 잇따라 마련되고 각종 수출지원시책이 줄을 이었다. 수출이라면 정책지원에 아낌이 없었고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도 수출에 주어져 그만큼 각광받던 시절이다.수출업체가 전력부족으로 납기를 지키기 어려우면 상역국이 한전에 부탁해 전력을 추가로 공급해주고 수송수단이 모자라면 대한항공의 특별기를 내서 공수를 했었다. 그러나 시장개방화 추세속에 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면서 수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고 이에 따라 상역국의 위상도 상대적으로 약화됐다.그러다 최근 국제수지의 악화로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부서이기도 하다. 실무사령탑인 상역국장은 그동안 현 장석환 국장을 비롯,모두 33명이 거쳐갔다.장국장이 34대이나 박충훈 전 상공부장관이 3대와 4대 상역국장을 연임한 때문이다. 역대 상역국장의 평균재임기간은 1년 4개월.18대인 엄익호씨가 3개월로 가장 짧았고 30대 신국환 현 공업진흥청장이 4년 10개월로 제일 길었다.그러나 자리에 비해 승진운은 적었던 편. 상역국장 출신으로 장관에 오른 이는 박충훈씨(전상공장관)와 심의환씨(총무처장관)뿐이다.차관급까지 오른 인사는 박상운(12대·전상공차관) 김송환(13대·〃) 김우근(20대·〃) 김형배 중진공이사장 (25대·전공진청장) 홍성좌 무역협회 부회장(26대·전상공차관) 박홍식 산업기술정보원 원장(27대·전특허청장) 이동훈 수출보험공사사장(28대·전공진청장)등이 있다. 정민길 홍콩총영사(22대),유득환 상공부 제1차관보(31대) 김기배 민자당의원(29대),정해주 민자당 전문위원(33대)등도 상역국장 출신이다.재계에는 특허청 차장을 지낸 이은탁 한일방직사장(24대)이 상역국장을 지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