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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인폭동 재발 우려/LA총영사 귀임령

    정부는 10일 미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재발 우려와 관련,재외공관장회의에 참석중인 김항경 주LA총영사를 12일 현지에 급거 귀임토록 했다.
  • 공관장 13명 임명

    ◎주미대사 한승수/주일대사 공로명/주중대사 황병태/주영대사 노창희/주러시아 김석규/주독대사 김태지/주제네바 허승/주브라질 변정현/주핀란드 김내성/주알제리 권인혁/주가나 황부홍/주홍콩총영사 남홍우/주시카고총영사 이창호 정부는 8일 주미대사에 한승수 전상공부장관,주일대사에 공로명 외교안보연구원장,주중대사에 황병태 전국회의원,주영대사에 노창희 전외무차관,주러시아대사에 김석규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을 임명하는등 공관장 13명을 임명했다. 주독대사에는 김태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주제네바대사에는 허승 전외무부 제2차관보,주브라질대사에는 변정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주핀란드대사에는 김내성 본부대사,주알제리대사에는 권인혁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주가나대사에는 황부홍 전외무부 문화홍보심의관이 각각 발령됐다. 또 주홍콩총영사(대사)에 남홍우 주일공사,주시카고총영사에 이창호 외무부 조약국장이 임명됐다. 주미 공사에는 김정기 주시카고총영사,주일공사에는 윤지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총기획이사가 임명됐다. 정부는 이밖에 외교안보연구원장에 박수길 주제네바대사,외무부 조약국장에 신효헌 주가나대사를 발령했다.
  • 총영사 5명 등 인사

    정부는 17일 주호놀룰루 총영사에 양세훈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초대 주상해 총영사에 윤해중 외무부 아주국심의관,주아가나 총영사에 박경태 주인도공사,주후쿠오카 총영사에 우종호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주함부르크 총영사에는 황길신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을 각각 임명했다. 정부는 또 외무부 제2차관보에 선준영 통상담당대사,의전장에 최동진 외교안보연구원연구위원,중동아프리카국장에 변종규 대통령외교안보비서관을 각각 임명했다. ◇양 주호놀룰루 총영사=▲서울·52세 ▲서울대법대 ▲주일참사관 ▲정보문화국장 ▲주고베 총영사 ◇윤 주상해총영사=▲전남 함평·48세 ▲외대 외교학과 ▲동북아 2과장 ▲주북경 대표부 대표보 ▲아주국심의관 ◇박 주아가나 총영사=▲충북 청주·52세 ▲고대 정외과 ▲동구과장 직무대리▲주핀란드 참사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우 주후쿠오카 총영사=▲충남 청양·54세 ▲서울대 중문과 ▲여권1과장 ▲주대만 참사관 ▲주에티오피아 참사관 ◇황 주함부르크 총영사=▲전북 김제·51세▲서울대 독문과▲주뉴질랜드 참사관 ▲경제협력과장 ▲여권 관리관 ◇선 외무부 제2차관보=▲서울·54세 ▲서울대 법대 ▲통상2과장 ▲주브라질·제네바·미국공사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주체코대사 ◇최 의전장=▲경기 시흥·58세 ▲서울대 정치학과 ▲주일참사관 ▲아주국장 ▲주케냐대사 ▲주스웨덴대사 ◇변 중동아프리카국장=▲경남 합천·53세 ▲서울대 외교학과 ▲정보1과장 ▲주오만 참사관 ▲주브라질공사
  • LA한인갱은 사기수배자/14억 횡령후 도주/인터폴에 신병확보 요청

    경찰청은 11일 거액을 사취한뒤 미국으로 달아난 김진범씨(43)가 로스앤젤레스공항에서 채홍찬씨(37·무역업)를 납치,돈을 강탈하고 1억원을 국내계좌에 송금하도록 강요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국내연계조직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을 통해 김씨등 범인의 신병확보와 인도를 인터폴에 요청하는 한편 11일 대한항공편으로 귀국한 채씨에 대해 피해자 진술조서를 받았다. 채씨는 지난 5일 낮12시50분쯤 로스앤젤레스공항에 도착한뒤 공항에서 김씨등 7명에게 납치돼 코리아타운의 한 아파트에서 미화 5천달러를 빼앗기고 권총으로 얻어맞은뒤 감금돼있다 사흘만에 도망쳐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채씨는 『김씨는 고교선배로 한때 같은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인데 내가 자금동원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범인 김씨는 부인 탁모씨가 대표로 있는 동륭물산을 경영하며 14억6천만원을 횡령하고 지난해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났다가 해외도피경제사범으로 검찰에 수배됐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3)

    ◎길림시절:2/체류시기의 왜곡/육문중 재학기간 실제보다 1년 늘려/마적활동설 등 평단중시절 비행 은폐/27년 8월 입학을 1월로 주장 김일성이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1927년 1월 17일이 아니라 사실은 그 해 8월이다.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그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26년8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맹했다」고 쓰고 있는데 26년이나 입학,공청동맹 가맹 같은 것은 다 사실이 아니지만 8월이란 날짜만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의 27년8월 길림행은 3가지근거로 증명할 수가 있다. ○사실확인의 세 근거 그 첫째는 앞에서 말한 이선일 증언이다.그는 27년8월 심양 평단중학교 입학 때 그 직전 김일성이 이 학교를 중퇴한 소문을 들었다.그리고 그는 30년에 최덕현 오가자에서 김일성과 같이 있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직접 본인으로부터 확인하고 있다.27년 당시 심양의 한인 인구는 적었으므로 중학생 김일성의 동향은 곧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김일성이 29년 5월에 길림 육문중학교를 중퇴한 사실을 들 수 있다.이 때 허소가 만든 「조선공산청년회」란 조직에 길림의 정의부계통 청년들이 망라되고 있었다가 일본 길림총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었다.그 속에 김일성도 있었는데 그는 도망쳐서 길림을 탈출하고 체포를 면하였다. 그는 이에 따라 육문중학교도 중퇴했다.최형우는 김일성이 다닌 중학교를 잘못 알고 있었지만 중퇴사실 자체는 다음과 같이 정확히 말하고 있다. 「…김일성은 졸업기를 목전에 둔 제오중학의 교문도,소년탐험대의 자리도 떠나서 단신 방랑에 가까운 여인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본 기록과 최형우의 서적으로 우리는 김일성이 29년 5월,3년제인 길림초급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필자가 평단중학교 문제 때 소개한 중학교 학년학기 일정표이다. ○방학기간 이용 이동 이 일정표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2학기 마감은 6월 28일로 되어 있다.따라서 졸업식은 그후 며칠 안가서 진행되는데 김일성은 바로 「졸업을 목전에 둔」5월 중순에길림성성을 탈출하여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다. 또 이 일정표는 1학기 수업개시가 8월 24일로 되어 있다.그래서 이 날짜를 가지고 그의 재학 가능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926년 8월 24일 1학년 입학 1927년 8월 24일 2학년 진학 1928년 8월 24일 3학년 진학 1929년 5월 중순 3학년 중퇴 그런데 이상의 표에서 26년 입학 가능성은 그것이 길림 육문중학교 같으면 현재 김일성이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그는 1학년 시절은 대체로 심양 평단중학교에 있었다.또 일정표를 보면 당시 여름 방학은 6월 29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약 2개월이었다.이선일의 증언과 같이 그는 이 방학기간에 심양으로부터 길림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길림시절을 사실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중학교에 있었던 1927년 8월부터 29년 5월까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그는 육문중학교에 가기 직전에 심양에서 길림으로 왔고 20개월 후 일종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에 있었다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길림을 떠났다.이 1년 10개월동안이 김일성이 길림에 있었떤 전 기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는 이같이 주장하지 않고 있다.그들은 김일성이 27년 1월에 무송에서 와서 29년 가을 길림감옥에 투옥될 때까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길림체제기간을 27년 1월부터 8월까지의 6개월간과 29년 5월부터 가을까지의 약 6개월간씩 넓히게 되었다.모두 1년 정도 김일성이 길림에 더 있었던 것으로 꾸민 것이다. 여기서는 김일성이 넓힌 이 「활약기간」중 그의 길림 입성을 둘러싼 문제만 다루어 놓았다.그가 8월에서 1월로 반년이나 길림 입성을 앞당긴 것은 그의 전기 작성상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⑴그는 평단중학교 시절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할 수 있게 되었다.그의 이 시기 생활이란 학생 기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슨 상궤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그가 일종의 마적떼에 있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므로 학교생활도 짐작이 갈 것이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은폐한 것이다. ○「주체형 조직」강변 ⑵이 시절을 은폐하는 것으로 그는 26년 가을부터 27년 여름까지 10개월 정도 우상화를 위한 어떤 날조물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는 세월을 획득하게 되었다.그는 이 기간을 26년과 27년으로 양분하고 26년에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새날소년동맹,반일부녀회 등 대체로 2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의 하부조직이나 변두리조직을 「주체형」의 조직으로 제멋대로 왜곡,변형해왔다. ⑶따라서 육문중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인 27년 상반기란 텅 비운 시일도 김일성이 앞으로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①동서 232면 ②평전 212면 이하 ③29면 ④평전 107면종
  • 대사급 대폭 교체

    ◎주미대사 한승수/주일대사 공노명/주중대사 황병태/주러대사 김석규 정부는 9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요국가 주재대사를 내정하고 상대국에 아그레망(임명동의요청서)을 발송한것으로 알려졌다. 주미대사에는 한승수전상공부장관이 내정됐으며 주일대사에는 공로명외교안보연구원장,주중대사에는 황병태 전민자당의원,주러시아대사에 김석규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이 각각 내정됐다. 또 주영대사에는 노창희 전외무부차관,주프랑스대사에 장선섭외무부의전장,주독일대사에 김태지외무부본부대사,주제네바대사에 허승외무부제2차관보가 각각 전보,발령될 것으로 알려졌다. 유종하주유엔대사는 유임되고 특임공관장이었던 현홍주주미,노재원주중,이홍구주영,신동원주독대사등은 이번에 모두 퇴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특혜시비를 불러일으켰던 특임공관장중에 한철수주브라질,이시용주스웨덴,김재수주불가리아대사,박춘범주함브르크총영사등도 퇴임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외교안보연구원장에는 박수길주제네바대사가,외무부제2차관보에는 선준영통상대사가 각각 내정됐다. 한승주외무부장관은 8일 인선내용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재가를 받은뒤 9일상오 임시국무회의에 보고했다.
  • 외교에도 문민­전문화 물결/해외공관장 대거 교체 배경

    ◎낙하산인사 관행 탈피 특임대사 축소/주미대사 전 상공 임명… 통상비중 반영 9일 단행된 정부의 해외공관장 인사는 외교의 문민화와 전문화를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또 범위가 대폭적(28명)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대목이다. 홍순순 외무부차관은 『미·일·중·러등 4강국 대사의 경우 전문성이 크게 고려됐으며 그밖의 공관장들은 해당국 언어구사능력과 지역전문성,그리고 경제지식이 인사의 기준이 됐다』고 밝혔다. 예를들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출신인 한승수 전상공부장관의 주미대사임명은 최근 통상문제가 한·미간 최대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추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또 미국과 함께 우리나라 동맹의 축인 일본주재 대사에 외무부내 제1의 일본통으로 알려진 공로명외교안보연구원장을 발령한 것도 적재적소의 배치라는 설명이다. 이번 인사에서는 새정부의 캐치프레이즈인 문민화가 특히 강조된 느낌이다. 군출신 특임공관장이 한꺼번에 4명이나 공관장직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시용 주스웨덴대사,한철수 주브라질대사,김재수 주불가리아대사(이상 특1급상당),박춘범 주함부르크 총영사는 특임을 2번이상 한 사람들로 직업외교관 세계에서 원성의 대상이 돼왔다.따라서 지난 2일 특2급(차관보급)이상 재외공관장에 대한 사표 제출지시가 내려질때부터 특임 해제가 예고됐었다. 이 가운데 김대사의 경우는 임기 만료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김대사 역시 나머지 3명과 마찬가지로 직업외교관제도 확립을 위해서는 군을 비롯한 권력 주변인사들의 낙하산식 자리차지를 지양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특임공관장들에 대한 사표수리는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대통령 또는 권부 실력자의 입김에 의해 출신이나 경력이 전혀 고려됨이 없이 일방적으로 임명돼온 특임공관장제도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이날 인사가 단행되기 전까지는 군출신 특임공관장은 전체 18명가운데 절반인 8명이 해임된 셈이다. 이와함께 신동원(독일),노재원(중국),이홍구(영국),현홍주씨(미국)등 4명의 특임공관장이 퇴직하고 한승수·황병태씨등 2명에게 대사특임이 부여돼 전체특임공관장은 종전의 18명에서 12명으로 줄어들었다. 홍차관은 『4명의 특임공관장에 대한 사표수리는 특임 2회이상자는 임기에 관계없이 조기 소환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는 새정부의 「고통분담」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외무부는 앞으로 현재 내규로 되어있는 특임공관장제도를 외무공무원법상에 명문화,특임을 1회 3년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외무부 관계자들은 이번 인사가 문민화·전문화 방침에 따라 통상적 대사임기인 3년이 되지 않은 경우라도 많이 소환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폭이 넓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주미·주중대사가 정치인출신 중에서 임명됐지만 모두 경제에 밝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전문화 취지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외무부 관계자들은 전문화와 문민화는 결국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라면서 이번 인사가 직업외교관제도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김태지 주독대사(주요 신임대사의 면모)

    ◎낙천적 성격의 「장관 군번」 작고 단단해보이는 체구에 안경 너머로 유난히 동그래 보이는 눈이 마음씨 좋은 아저씨같은 인상을 준다.낙천적인 성격에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다. 대사보다는 장관 또는 차관을 해야 할 군번으로 주제네바·주이탈리아 3등서기관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 유럽 근무경험이 없어 독일대사 기용은 다소 뜻밖.취미는 등산과 바둑.부인정경임씨(55)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서울·58세 ▲서울대법대 ▲주홍콩총영사 ▲주뉴욕총영사 ▲주인도대사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0)

    ◎36세의 죽음/배설,“신문 살려 한민족 구하라” 유언/대일마찰 꺼린 영측 통감부에 매도/양기탁 “손 뗀다” 광고 게재후 떠나가/한·일합방 이틀후 「매일신보」개제… 일제기관지로 배설은 1908년 5월27일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및 편집인의 명의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편집일을 보던 만함(Alfred Weekley Marnham)으로 바꿨다.이 무렵은 일본측의 집요한 외교적 탄압으로 영국측이 배설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상해고법의 판·검사가 한국에 막 도착한 때였다. ○한때 암살까지 거론 그러나 만함은 형식상의 발행인일뿐 신보는 여전히 배설의 영향아래에서 제작됐다.신보의 논조 또한 변함없이 이어져 반일로 일관된 것은 물론이다.당시 워싱턴포스트지는 『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배설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쓸 정도였다. 한국민족의 편에 서서 기자정신을 불태우던 배설이었지만 옥고를 치른뒤로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이로인해 1909년 3월초 자리에 눕게 되었고 두달뒤인 5월1일 36세의 젊은 나이에그만 세상을 떠났다.의학적인 사인은 심정확장이었다.일제와 맞서 신보를 지키고 이끄는 투쟁과정에서 끊임없이 핍박받은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결국은 죽음을 몰고왔을 것이다. 1904년 3월 이 땅을 밟은이후 줄곧 일제와의 투쟁으로 삶을 이어온 그는 이렇게 파란의 인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늘 『한국을 위해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 나의 직책인 만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명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배설이었다.그리고 이를 실행했던 진정한 한국인들의 벗이기도 했다. 운명하기 하루전날 남긴 유언에서도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는 간곡한 한마디였다고 한다. 한국을 자신의 조국 이상 사랑했던 그의 죽음은 많은 한국인들을 애도케 했다.박은식은 5월5일자 신보1면에 이런 글을 남겼다. 「천견공래우탈공(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또다시 데려갔네)구주의혈쇄명동(구주의 의혈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내고자)편편일지 삼천리(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지를 뿌렸네)유득방명조불궁(꽃다운 이름이 남아서 다함없이 비추리). ○합정동 외국인묘에 양기탁 또한 그의 타계를 애통해 하는 글을 썼다.「대영남자대한충(대영남자가 대한에 와서)일지광명흑야중(한신문으로 어두운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내불우연하거탈(온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욕장차의문창궁(하늘에 그뜻을 묻고자 하노라)』. 배설은 이처럼 한국인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뼈를 묻혔다.그가 세상을 떠난뒤 신보에서 차지하는 양기탁의 역할과 비중은 더욱 커질수밖에 없었다.신보의 소유자는 만함이었으나 그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어 신문제작 일체를 양기탁에게 의존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 주한영국총영사 헨리 보나르(HenryBonar)는 만함에게 신보의 제작을 한국인들에게 맡기는데 따른 위험성을 경고하기 시작했다.보나르의 경고는 신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영국이 만함에 대한 보호를 철회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특히 새로 개정된 추밀원령이 곧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만함도 배설처럼 영국법정에 서게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추방사태를 빚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덧붙였다. 보나르는 신보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토록 선동하는 것은 『바보 같고 배은망덕한 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신보로 인해 야기되는 영·일간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자는 것이 그 저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보나르는 급기야 만함에게 『한국을 위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신문을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까지 충동질 했다. ○보나르 영대사 주도 결국 만함의 동의를 얻어낸 보나르는 통감부와도 신보처리문제를 협의,통감부의 신보매수를 제의하고 나섰다.통감부의 신보매수는 영속적인 공안방해이자 귀찮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임을 내세워 신보를 매수토록 종용한 것이다.이와함께 보나르는 주일영국대사 맥도널드에게 자신의 소견을 보고하고 이를 지지해 줄것도 건의했다. 보나르가 이러한 내용의 전문을 보낸것은 1910년 3월25일로 돼 있다. 한편 보나르가 일본당국에 제안한 신보처분의 조건은 신보를 일본측이 인수하는 대신 만함은 앞으로 한국에서 신문사업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이 요지였다.또한 통감부가 신보를 매수하고 난 뒤에는 한국에 영국인 소유의 신문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도 강조했다.이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신문을 새로 발행하는 경우 한국의 신문지법을 영국인 소유의 신문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신보를 일본당국이 매수하면 한국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보나르는 이러한 내용을 상세히 작성,각서형식으로 일본측에 전달했다. 이같은 신보처리방안에 대해 맥도널드는 찬동하는 편이 아니었다.일본당국의 신보매수는 일본당국과 만함이 직접 교섭할 사항일뿐 영국총영사관이 공식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더구나 영국 외무성을 이 문제에 관여케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그러나 보나르는 자신이 제안한대로 신보처분을 통감부와 절충해 나갔다. 마침내 통감부는 만함에게 7백 파운드를 지불하고 신보를인수했다.신보의 인수절차는 주한영국총영사관에서 일본당국과 만함이 약정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통감부가 신보를 매수하기는 한·일합병을 약3개월 앞둔 시기였다. ○사원들 구사운동도 통감부는 합병조약이 성사될때까지 신보의 매수를 비밀에 부쳐둔채 1910년 6월14일 발행인 및 편집인의 명의만 한국인 이장훈으로 바꿔놓았다.신보가 통감부에 팔렸다는 소문은 이보다 앞서 나돌기 시작했다.그러나 신보는 6월14일자 사설을 통해 이는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통감부 매수설을 부인했다. 『발행인 만함이 무슨 사단이 있었는지 신문을 폐철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사원들이 거대한 자금을 불석하고 활자와 기계 등 제반 십물을 매수했다』는 것이 이날자의 사설 내용으로 돼 있다.또 발행인은 외국인이 한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편집인이나 기자가 모두 그대로 있으니 논조도 달라질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신보가 일본의 손에 들어간것은 더이상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신보의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신보의 발행인 명의가 이장훈으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보를 떠나고 말았다.그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의 두자를 뗀 매일신보로 개제,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해 버렸다.이날은 한일합병이 된지 이틀만인 1910년 8월30일이었다.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뜨겁도록 구국의 혼을 불사르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가 비극적인 종언을 고하고 만것이다. *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이상 정진석저)
  • 이병태 보훈처/치밀하고 논리적인 만능스포츠맨

    솔직담백한 성격이나,업무추진에 있어선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명쾌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92년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한달반만에 호놀룰루 총영사로 전격발탁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부인 김성기씨(55)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모든 운동을 좋아하며,독서에 열중한다.
  • 부총리 이경식(기획원) 한완상(통일원)씨

    ◎조각발표/외무 한승주/내무 이해구/재무/홍재형/법무 박희태/국방 권영해/교육 오병문/문화체육 이민섭/농림수산 허신행/상공자원 김철수/건설 허재영/보사 박양실/노동 이인제/교통 이계익/체신 윤동윤/총무처 최창윤/과기처 김시중/환경처 황산성/공보처 오인환/정무1 김덕용/정무2 권영자/법제처 황길수/보훈처 이병태 김영삼대통령은 26일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이경식한국가스공사사장,부총리겸 통일원장관에 한완상서울대교수를 임명하는등 문민정부 24개 부처각료와 안기부장·서울시장·평통사무총장등을 발표,조각을 완료했다. 김대통령은 황인성국무총리와 협의를 거쳐 내각을 인선했다.김대통령은 외무장관에 한승주고려대교수,내무부장관에 이해구민자당사무부총장,재무부장관에 홍재형외환은행장,법무부장관에 박희태민자당대변인을 각각 임명했다. 또 국방부장관에는 권영해국방부차관,교육부장관에는 오병문전남대교수,문화체육부장관에는 이민섭민자당의원,농림수산부장관에는 허신행한국농촌경제연구원원장을 임명했다. 김대통령은 상공자원부장관에 김철수무역진흥공사사장,건설부장관에 허재영국토개발연구원장,보사부장관에 박양실전한국여의사회회장,노동부장관에는 이인제민자당의원,교통부장관에는 이계익전관광공사사장,체신부장관에는 윤동윤체신부차관을 각각 임명했다. 총무처장관에는 최창윤전공보처장관,과기처장관에는 김시중과학기술재단총연합회장,환경처장관에는 황산성변호사,공보처장관에는 오린환민자당총재정치특보,정무1장관에는 김덕용민자당의원,정무2장관에는 권영자여성개발원장,법제처장에는 황길수변호사,보훈처장에는 이병태주호놀룰루총영사가 임명됐다. 김대통령은 이와함께 서울시장에 김상철변호사,국가안전기획부장에 김 덕외국어대교수,민주평통사무총장(장관급)에 유경현전민정당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이날 조각을 발표한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은 이번 조각에 대해 신한국창조를 위해 착실하게 개혁을 추진할수 있도록 참신하고 유능한 개혁지향적인 인사를 기용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이번 인사에서는 각계각층에서 고루 기용했고 특히 젊은층에서 과감히 발탁하고 여성을 크게 배려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대변인은 안기부장에 학자출신 김교수가 발탁된데 대해 『김대통령은 문민정부에 걸맞도록 안기부의 위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역사적 요청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다』면서 『이에따라 군출신이나 법조출신을 기용하던 관행을 바꾸어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북한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김교수를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대변인은 또 서울시장에 김상철변호사가 기용된데 대해 『우리의 모든 행정이 관료적·관행적으로 이행되어와 행정경험은 없지만 젊고 유능한 분이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울시 행정개선을 과감히 추진해보라는 뜻인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대변인은 지역적인 배려여부를 묻는 질문에 『인사내용을 분석해보면 국민화합적 차원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화합은 지역개발등 실질적인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철서울시장 약력=▲평북 태천·46세 ▲서울대법대 ▲서울민·형사지법 판사 ▲변호사 ▲대한변협인권위원 ▲대한정의당총재 ▲한미우호협회장 ◇김 덕안기부장 약력=▲경북 선산·58 ▲서울대법대 ▲외대대학원장▲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외무부·통일원 자문위원 ◇유경현평통총장 약력=▲전남 순천·54세 ▲서울대법대 ▲동아일보정치부차장 ▲공화당부대변인 ▲민정당대변인 ▲10·11·12대의원
  • 오늘 새 내각 발표/안기부장·서울시장 포함/내일 첫 국무회의

    김영삼대통령은 26일 상오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통일원장관등 새정부의 24개부처장관과 안기부장,서울시장의 명단을 일괄 발표한다.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에는 한완상서울대교수,안기부장에는 이병대 주호놀룰루총영사(예비역중장·육사17기),법무부장관에는 박희태 민자당대변인,교육부장관에는 박영식 전연세대총장,외무부장관에는 신동원 주독대사,국방부장관에는 박희도전육참총장,정무1장관에는 김덕용민자당의원이 유력시되고 있다. 안기부장이 유력시되는 이총영사는 24일 하오 급거 귀국했다.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에는 강경식전재무,내무장관에는 민자당 김용태총무의 기용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가운데 최인기차관의 승진가능성이 엿보인다. 공보처장관에는 남재희전민자당의원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전의원은 최창윤전민자당총재비서실장과 함께 문화체육부장관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재무장관에는 서상목민자당의원과 홍재형전외환은행장이,상공장관에는 김기배민자당의원,강진구삼성전자회장,김철수무역진흥공사 사장이 오르내리고 있다.건설부장관에는 김재기주택은행장과 김한종 전건설부차관,농림수산부장관에는 조익래 전경남지사,과기처장관에는 이면우서울공대교수,노동부장관에 오린환 전민자당총재정치특보,총무처장관에는 최창윤 전민자당총재비서실장,정무2장관에 황산성변호사와 이인호서울대교수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서울시장에는 김명윤대한무역진흥공사이사장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수여한뒤 27일 상오 새정부 첫 국무회의를 주재할 예정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9)

    ◎64일간의 대립/“양기택 석방하라” 영,대일압력/배설 추방 실패… 일제,양 총무 전격구속/대영보복 간주… 총영사 강력항의/양국 외교관 경질요청으로 비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의 통감정치 5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야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던 시기였다.매국적 친일인사들로 들어찬 대한제국정부는 이미 꼭두각시로 전락돼 있었다.국제적으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무적의 상황을 맞은 일제는 기고만장했다.이무렵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병합 걸림돌” 한국병합이 착착 진행돼가고 있던 시점에서 의표를 찌르는 신보의 예리한 보도와 논설은 일제를 당황케 만들었다.또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의병운동,교육구국운동,민족산업육성등 신보가 앞장선 일련의 항일구국계몽운동은 일제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까지 받아들여졌다. 일제가 신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정책상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일제의 신보탄압정책은 엉뚱하게 영국과 일본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당시 영국과 일본은 두차례의 영 일동맹(1902·1905)을 통해 중국에서의 영국의 배타적 권리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럼에도 일제의 신보탄압을 위한 양기탁총무의 구속사건에서 비화된 양국간의 외교마찰은 전시에나 가능한 외교관대표 사이의 「통신기피」 단계에 까지 이를정도로 악화되었다. 1906년 2월 정식으로 발족된 통감부는 적극적으로 배일논조를 펴온 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기 위해 2단계 공작을 폈다.첫단계로는 사장 배설의 추방을 시도,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한 영국측이 그에게 두차례의 근신형과 3주의 금고형등을 가했다.그러나 배설은 상해에서 형을 복역한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신보는 폐간은 커녕 오히려 배일논조를 더욱 강화시켰다.더욱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이 되어 이운동을 진두지휘했다.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다음 단계로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양기탁이 경시청의 와타나베경부에 의해 전격 연행된 것은 1908년7월12일밤 회사안에서 였다.국채보상운동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내용이다.급보에 접한 당시 신보사장 만함(A W Marnham·그해 5월27일 부임)은 이를 곧 헨리 콕번 영국총영사에게 알렸다.이 사건을 배설의 영구추방에 실패한 일제의 영국에 대한 보복행위로 간주한 콕번총영사는 통감부 외사과장에게 즉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동시에 화이트서기관을 직접 보내 다음날인 13일 하오7시까지 석방할것을 통보하는등 강력하게 항의했다. ○약속 위반에 분노 콕번이 양총무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할수 있었던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불과 27일전에 열렸던 배설재판에서 재판장이었던 자신이 통감부 외무부장 나베시마로부터 확약을 받아낸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배설의 증인으로 출두한 어떤 한국인도 대한제국정부나 통감부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확약을 일제가 파기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영국측의 뜻밖의 강경태도에 당황,본국에는 양기탁이 자진출두한 것이라고 허위보고하고 경시청으로 하여금 양의 기소를 서두르게 했다.이에따라 경찰은 18일 양을 정식기소,황급히 경성재판소에 송치했다.영국정부는 이같은 일본측의 행위에 항의,다음날인 19일 도쿄의 맥도날드대사를 데라우치외상에게 보내 공판 전이라도 양기탁을 바로 보석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양기탁구속사건이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휴가차 본국에 와있던 통감 이등박문은 22일 부통감 소네에게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 영·일양국간에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종로서 유치장에 수감중이던 양기탁을 면회한 만함이 감방의 위생불량과 양기탁의 쇠약을 콕번총영사에게 호소했다.콕번은 8월1일 경성이사청의 미우라이사관에게 감방 상황및 양기탁의 건강상태를 공문으로 조회하면서 인도적 입장에서 즉각 보석허가를 요청하고 나섰다.도쿄의 맥도날드대사도 이등박문에게 이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양기탁의 보석을 요구했다. 마침내 이등박문은 만약의 경우 양기탁이 사망할 경우를 우려,입원치료 허락 뜻을 밝혔다.그러나 미우라이사관이나 소네부통감등 한성의 보고는 한결같이 『감방상태도 많이 좋아졌으며 양기탁의 건강도 전과 다름없으므로 보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결국 이등박문이 단안을 내려 8월10일 양기탁의 입원을 긴급지시,11일 하오5시 양기탁은 대한의원에 입원하기 위해 종로서에서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 발생되었다.양기탁이 호송경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그길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했던 것이다.발칵뒤집힌 통감부와 경성이사청은 만함 사장과 콕번 총영사에게 양총무의 인도를 정식으로 요구했다.그러나 콕번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15일로 예정돼 있던 양의 공판을 연기해달라고 미우라와 맞섰다. 그 유명한 콕번과 미우라 사이의 이른바 「미우라기피사건」은 이때 양기탁의 인도를 둘러싼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미우라는 콕번에게는 공판연기 불가를 밝혔으나 막상 사건을 담당한 검사장에게는 공판연기를 청구해놓았던 것이다.이때문에 15일 하오영국정부로부터 훈령이 도착,콕번이 양기탁 인도를 미우라에게 통고했을때는 이미 공판은 연기된 뒤였다. 여기서 콕번은 미우라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라고 규정한뒤 당일인 8월15일부터 그와의 통신을 일체 기피했다.또 17일에는 통감부로 공한을 보내 대화상대를 교체해줄 것도 요청했다.그러자 통감부는 즉각 반발에 나섰고 일본의 언론들도 영국총영사에 대한 신임장을 취소해야 한다는등 여론을 일으켰다.통감부는 21일자 보고서에서 『미우라이사관의 행동에는 비난할 점을 발견치 못했기 때문에 미우라의 경질을 요구하는 영국측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콕번의 경질을 영국측에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두달뒤 무죄선고 그러나 당시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양국간에는 이같은 문제로 인한 긴장관계 발생을 서로 원치않고 있었다.결국 영국정부가 한발 양보,콕번총영사에게 양기탁의 공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림으로써 양은 21일 대한의원에 입원케 됐다.그는 이 병원에서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고 27일 경찰서로 다시 이감되었으며 8월31일 첫공판이 개정되었다.그후 다섯차례의 심리가 더있은후 9월29일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선고를 받았다.이로써 양기탁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일 양국간의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일제의 문화침탈사」(한기언외·민중서관 1970)
  • 1백년 우리외교사 한눈에/외교박물관 개관… 일반 공개

    구한말에서 현재까지 우리 외교의 변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교박물관이 16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 2층에 개관돼 17일부터 일반에게 공개된다. 이 박물관에는 ▲한·영수호조약서영인본(1883년) ▲최초로 미국땅을 밟은 우리 공관원 부인 사진 ▲1883년 3월 푸트 주한미공사가 고종황제에게 제출한 신임장 ▲이범진 대한제국 주러시아공사의 명함 ▲1902년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이민선사진 ▲시대별로 정리한 주미대사관 전경 사진 ▲60년 6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방한등 정상외교 장면 사진 ▲초창기와 현재의 여권 ▲65년 한·일협정 비준때 박정희대통령이 사용한 만년필 ▲지난 53년 이래 사용해온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 현판 ▲훈장·외교관복장·외교행낭등 1백41점의 외교사상 뜻있는 기념물과 역사적 자료가 전시돼있다. 특히 이 가운데에는 새로 발굴된 이한응 대한제국 주영공사가 19 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직후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글과 그해 5월13일 이공사의 자살을 전한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의 기사도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또 고종황제가 을사호보조약체결뒤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는 서한,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장,고종황제가 루스벨트 미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등 고종황제의 을사보호조약 저지노력및 임시정부 요원들이 벌인 독립외교운동관련자료가 다수 전시돼있다. 특히 이 가운데에는 새로 발굴된 이한응 대한제국 주영공사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직후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글과 그해 5월13일 이 공사의 자살을 전한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의 기사도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 새정부 요직인선“초읽기”돌입/17∼19일 발표 예상속 하마평 무성

    ◎당내 역학관계 맞물려 비서실장지명 다소 순연/총리에 화합형호남인,안기부장엔 외교통 유력 김영삼차기대통령은 지난 12일 상오 김용태민자당총무에게 『내주초 까지는 인선발표가 없을것』이라고 말했다.김차기대통령의 이날 언급은초읽기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진 비서실장을 비롯한 「빅4」인선과 관련된 최초의 공식 발언이었다. 때문에 김차기대통령 주변과 민자당안팎에선 지금 인선의 「D데이」를 빠르면 17일,늦으면 19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김차기대통령은 당초 인선과 관련, 이 보다는 일찍 한다는 방침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김차기대통령의 한 측근은 『김차기대통령은 처음 지난 11일쯤 인선을 단행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그러나 여러 사정을 감안,이를 순연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차기대통령이 이처럼 인선을 늦춘 것은 우선 비서실장이 조기에 선정될 경우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김차기대통령은 최근 모인사와의 회동에서 인선발표가 늦어지는데 대해 『비서실장인선을 빨리 할필요가 없다.너무 빨리 하면 그 사람이 힘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주위에선 김차기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좀 늦게 인선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고있다.즉,기존 청와대비서실과의 합동근무나 다음달 초의 독일 콜수상방한준비를 지금부터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비서실장인선이 늦춰진 또다른 이유는 당내 역학관계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비서실장인선은 향후 당직개편과도 맞물려 있는 사안인 만큼 이를 순연시킨다는 것이다. 김차기대통령의 한 측근은 『한사람을 중용하면 1명의 배신자와 9명의 불만인사가 생겨난다는 말이 있다』며 인선을 늦추는 배경을 설명했다. 김차기대통령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서실장인선과 관련,「편제문제」를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즉,청와대는 「YS컬러」로 하고 당은 민정계를 통해 관리할지,아니면 당도 민주계를 통해 장악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정리됐다는 후문이다. 인선의 첫 뚜껑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수석비서관이 함께발표되고 이어 총리와 감사원장 ,안기부장의 발표가 뒤따를 전망이다. 또 청와대비서실장은 실무형으로,총리는 화합형으로,감사원장은 강직형으로,안기부장은 외교관출신의 민간형으로 각각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주목을 끌고있는 비서실장인선은 현재 의외의 인물은 아닌 쪽으로 방향이 잡혀가고 있다는 관측이다.그리고 김차기대통령과 호흡을 같이 할수 있는 민주계인사, 그중에서도 원내인사의 발탁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와관련,당내에선 김덕용·박관용의원의 이름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본인들은 『사실과 다르다.지역구를 포기할 수는 없다』며 표면상 고사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와함께 최창윤현비서실장의 재기용설도 나타나고 있다. 또 경호실장에는 현직 김모소장(육사17기)과 변모소장(육사22기)및 신모씨(육사21기)가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총리와 관련해선 지역화합이란 측면에서 호남인사의 기용을 적극 모색중이며 광주 또는 전남출신을 찾고 있는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상당히 난항을 겪고있어 타지역 출신도 알아보고 있다는 후문이다.지금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로는 홍남순·오병문·이중재·박권상·황인성·이회창씨 등이다. 감사원 기능강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게 사정을 총괄하게될 감사원장에는 법조인 출신이 적임이라는 판단하에 이용훈변호사 김석휘전법무장관등이 하마평에 들고 있다. 한편 안기부장에는 군·검출신을 배제한다는 원칙하에 이병대호놀룰루총영사등 몇몇 외교관출신이 거론되고 있다.한때는 이홍구주영대사의 기용설이 유력했으나 최근 잦아들고 있다.
  • 러,새달 팀스피리트 참관/한·러 본격군사교류

    ◎4·6월 해군함정 상호방문 러시아가 3월중순에 실시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에 참관하기로 하는등 한·러시아간의 군사교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하기로 발표하면서 북한 러시아 중국과 4개 중립국등 7개국에 훈련을 참관해줄 것을 초청했으며 이중 러시아는 지난주 외교루트를 통해 참관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9일 알려졌다. 지난91년 팀스피리트훈련때도 정부는 북한을 비롯,구소련에 참관해줄 것을 초청했으나 북한과의 군사동맹조약에 따라 이 훈련을「대북기습공격훈련」으로 규정,참관을 거부했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외에도 오는4월중순 한국의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 개소식에 우리의 해군함정이 입항하며 6월 러시아의 부산총영사관 개소식에 러시아해군함정이 방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같은 군함의 교환방문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바탕으로한 실질적인 유대차원의 군사교류가 본격화된다는 신호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 총영사 3명 발령

    ◎샌프란시스코 이정하/함부르크 박춘범/카이로 정태익 정부는 3일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에 이정하 대통령공보비서관,주함부르크총영사에 박춘범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주카이로총영사에 정태익 외무부 미주국장을 각각 임명했다. 외무부 미주국장에는 장재용 대통령의전비서관이 임명됐다. ◇이총영사 ▲서울·53세 ▲서울대 외교학과 ▲미가톨릭대 정치학박사▲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 ▲세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박총영사 ▲서울·58세 ▲육사 14기 ▲주멕시코 공사 ▲주엘살바도르 대사 ◇정총영사 ▲충북 진천·50세 ▲서울 법대 ▲주일 일등서기관 ▲총무과장 ▲주미 참사관
  • 한­베트남 경제협정 체결/어제 외무회담/베트남총리 5월방한 합의

    한국과 베트남은 2일 서울에서 양국외무장관회담을 갖고 경제기술협력협정에 서명했다.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방한중인 웬 만 컴 베트남외무장관간에 서명된 이 협정은 경제통상분과위와 과학기술분과위로 구성된 경제공동위의 설치와 경제기술정보및 과학자의 교류촉진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양국은 경제공동위를 매년 개최키로 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하노이에서 제1차회의를 갖기로 했다. 이날 회담에서는 이밖에 5월하순 보 반 키에트 베트남총리의 방한을 추진키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외교경로를 통해 추후협의키로 했다. 또 빠른 시일내에 호치민시에 한국 총영사관을 설치키로 합의하는 한편 블루 드래건유전등 베트남의 자원개발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장려하기로 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6)

    ◎대한매신의 애국계몽/“축채 갚자” 전국적 담배끊기 전개/의연금 기탁자 명단·사연 연일 보도/「반지빼기」계기 여성동참 적극 유도/“통곡으로 실업가에 고한다” 사설로 참여 촉구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 시작했다.이에따라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권수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신민회 충실 대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가 민족의 목을 죌수록 배일논조를 통해 항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었다.그것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등을 주도한 민족지도자들과 국민들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 나타났다.또 국채보상운동과 같이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해 국민운동을 주도해나가기도 했다.특히 1907년 양기탁주필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었을때 신보는 역할 하나를 더맡았다.신민회 주관 각종 국민운동의 충실한 대변지로서 신민회 활동을 날카로운구국언론활동을 통해 뒷받침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김광제 서상돈등 10여명이 주도하고 나서는 것으로 불을 댕겼다.1907년 1월31일 당시 일본에 빚지고 있던 국채 1천3백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그것이었다.「국채 1천3백만원 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한데서 발단한 이 운동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구국운동 이기도 했다. 그 하나로 2천만동포들이 배를 끊자는 방안이 제시됐다.한사람이 한달 담뱃값 20전을 3개월만 모으면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무난히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이는 전국민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아 마침내 20여일만인 2월22일 한성에 중앙총괄기구인 국채보상기성회를 결성시켰다.국채보상서도의성회·국채보상부인회·국채보상경남찬성회·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대구국채담보회·제주의성회·황해도재령군보성소등 전국적으로 지역별뿐 아니라 직능별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결성됐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어느 신문보다도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다뤘다.의연금 기탁자의 명단을 보도함은 물론 기탁에 얽힌 사연들도 소개했다.이들 보도 가운데는 어려운 노동자들까지도 동참하는데 정부관리나 부유층들이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도 있었다.『국채보상을 위해 3개월씩만 단연하자는 서상돈의 발기에 한성안의 병문(길가)노동인이 충분소격에 연초대금을 서로 다투어가면서 모으고 있다는데 현금 정부대신은 노동자 보기가 어떠할 것인가』(1907년 2월24일자). 이 운동이 단시일내 전국적으로 확산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문들의 이같은 적극적인 보도에 힘입어서였다.그러나 신보는 초기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드는 의연금을 여러 곳에서 다룸으로써 혼선이 빚어질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그래서 의연금을 한곳으로 모을수 있는 중앙수합처가 결정되기 전에는 수전소 역할을 맡을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러면서도 3월1일자에는 「한인충애」 표제의 사설로 이 운동을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로 규정하고 나섰다.이 큰일의 성취를 돕는 것은 신문이 할수 있는 즐거운 일이라고 적극적인 지지를 밝혔다. 대한매일신보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는 3월31일자에 특별사고로 다루었다.「이제까지와는 달리 국채보상 의연금을 동사에서 직접 수령키로 했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나선 것이다.이에따라 신보는 일부 유지들을 규합,4월1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그 사무소를 사내에 설치했다.간부진용으로는 양기탁총무를 회계로 하고 윤웅렬소장,김종한부회장,박용규재무등이 추대됐다.전국각지에서 작게는 5전부터 10전·1환·10환,크게는 1백환 이상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2월말부터 4월말까지 불과 두달 사이에 4만명이 넘게 참여하는등 큰 호응을 얻었다.신보를 비롯,각 언론기관들도 이들 명단게재및 보도에 호외를 발행하는등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남자들을 위주로한 단연운동으로 시작했던 국채보사운동은 5월들어 신보에 의해 시작된 반지빼기운동등 여자들의 참여로 확산돼 나갔다.신보는「국채보상에 나선 여인의 대열」이라는 반지빼기모임 취지문의 논조는 사뭇 흥미롭다.「우리 2천만중 여자가 1천만이요,1천만중 반지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반지 한쌍 2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할수 있다.이 운동에 동참을 계기로 남녀동권을 찾자」(4월22일자). 통감부는 이 운동 초기에는 흡연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단연운동이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대수롭지않게 비웃었다.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자 통감부는 3월 들어서면서 영문판 기관지인 「서울프레스」를 비롯한 친일지들을 동원,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빚진 사람이 압제하는 채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는 논조를 폈다.또 3월24일자 「통곡고대한실업가」 표제의 사설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있던 실업가들에게 자극을 주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통감부는 급기야 공안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을 영국총영사에게 제소한데 이어 1908년 7월12일에는 의연금 3만환 횡령의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였다.영국측은 전날 배설 공판때 통감부 외무부장이 영국인피고의 증인으로 출두했던 어떤 한국인도 한제국및 통감부로부터 방해 내지는 탄압을 받지 않는다고 확약한 사실을 내세웠다.그러면서 양기탁의 즉각 석방을 요청,영국과 일본 양국간의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2백여만원 모금 양기탁은 이른바 국채보상금사기취재사건의 다섯차례 공판끝에 9월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되었다.그러나 그의 구속과 이후 법정공방으로 비화된 보상금 횡령사건등으로 모금활동은 더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1년반 가까이 계속된 모금운동에서 걷힌 돈은 모두 2백31만9백89원13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그러나 이 액수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국채 1천3백만원에는 먼 액수였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한국민주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을유문화사 1985)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
  • 베트남 외무 1일 방한

    웬 만 컴 베트남외무장관이 이상옥외무부장관의 초청으로 오는 2월1일부터 5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고 외무부가 28일 발표했다. 지난해 12월22일 한·베트남 수교이후 방한하는 베트남 최고위인사인 컴장관은 우리나라에 머무는동안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차기대통령을 예방하는 한편 이장관과 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기술협력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다. 정부는 컴장관의 방한기간중 호치민시에 총영사관을 설치하는데 합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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