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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신비의 세계 서아프리카의 역사

    아프리카.베일 안에 감춰진 이 은둔의 대륙은 글로벌시대라는 요즘에도 우리에게 생경하고 먼 곳으로 존재한다.이런 아프리카 서부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 ‘신비의 세계 서아프리카의 역사’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주 히로시마 총영사인 박승무씨가 지난 97년 가나 대사로 부임한 뒤 손수 모은 자료와 역사서 등을 망라해 펴낸 아프리카 입문서.저자의 말마따나 ‘수준높은 학술서도,재미나게 쓴 책도 아니지만’ 아프리카 역사자료가 너무 귀한 우리에게는 그 곳을 알 수 있는 매우 요긴한책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서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중에서도 전형적인 아프리카인,즉 니그로가 거주하는 곳.사막을 제외하면 고온다습한 지역에 말라리아가 창궐해 자연환경이 열악하기로 유명한 땅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현지에서 체험한 아프리카의 환경과 인종,생활관습은 물론 10세기를 전후해 이곳을 통치했던 강력한 가나제국 붕괴 이후 아프리카를 짓밟은 유럽 열강의침탈사와 노예무역,식민지화와 독립 과정 등이 주제·연대기별로 잘 정리돼 있다. 박씨는 아프리카의 역사자료가 빈곤한 이유로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한 점 외에 이곳에 진출한 유럽인들의 왜곡과 침탈을 든다. 열강이 각축하던 개화기를 거쳐 일본 강점을 체험한 우리가 아프리카 역사를 결코 가볍게 봐넘길 수 없는 이유가여기에 있다.그는 “만약 가나제국이 근세에까지 존재했다면 오늘날 아프리카의 지도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는 이제 시작”이라고 부연했다. 도서출판 아침.1만5000원. 심재억기자
  • ‘탈북자 추방’ 日대사 지시 파문

    [도쿄 황성기특파원] 중국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 탈북자 연행사건 직전 아나미 고레시게(阿南淮茂) 주중 일본대사가 “비디오 카메라에 찍혀도 괜찮으니 (탈북자를)쫓아내라.”고 지시했다고 마이니치(每日)신문이 22일 보도,다시 파문이 일고 있다. 아나미 대사는 사건 발생 직전 베이징 대사관에서 열린 내부회의 때 “수상한 사람을 들이지 말고 쫓아내라.”고 지시한 것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신문은 “아나미 대사의 발언은 탈북자의 공관진입 모습이 촬영될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주중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 8일 대사관 회의에서 경비담당 서기관이 올 3월 스페인 대사관 탈북자 진입사건 이후 같은 사건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탈북자 지원단체가 인도적인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카메라 촬영을 하는사례가 있어 “대응이 어렵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아나미 대사는 “카메라에 찍혀도 괜찮다.쫓아내라.나중에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명령했다.이어“(공관)부지 내에 들어왔다고 해도 망명이 신청되기 전까지는 수상한 사람이다.(탈북자는)대체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탈북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또한 도쿄신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주변 인물이 선양 사건발생 이틀 전 탈북자를 지원하는 비정부기구(NGO) 대표로부터 사건발생 가능성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를 방치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NGO는 ‘구하라,북한의 민중,긴급행동네트워크(RENK)’.대표인 이영화(李英和) 간사이(關西)대학 조교수는 총리 주변으로부터 4월 말 탈북자의 각국 대사관 진입에 대해 배경설명을 듣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지난 6일 1시간 가량 전화로 설명했다는 것. 이 교수는 “일본 대사관에도 (탈북자 진입이)있을까”라는 총리실측 질문에 “선양은 난민이 많아 (사건이)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경비를 강화해도 탈북자들은죽을 각오로 찾아 오기 때문에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에 대해 외무성 관계자들은 “모른다.전달되지 않았다.”고 밝혀 모처럼의 중요한 정보가 실제진입사건을 다루는 외무성 해당 부서에는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비판했다. marry01@
  • 탈북자 외교, 中 웃고·日 울고

    [베이징 김규환·도쿄 황성기특파원] 지난 8일 중국 선양의 일본 총영사관에서발생한 탈북 주민 5명의 망명시도 좌절사건은 사건발생 2주일만에 필리핀 경유 한국행으로 결말이 났다. 그동안 중국과 일본은 중국 공안들이 탈북자들을 일본 총영사관에서 끌어내는 과정의 진상을 놓고 첨예한 이견을 보여왔다.두 나라가 자칫 장기전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이던외교마찰을 해결한 것은 양측 모두 실리외교라는 큰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되돌려보내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한편,국제사회에서 인권중시국이라는 평가를 얻는다는 실리를 노렸다. 일본도 탈북자들의 한국행이 이루어짐으로써 사건발생 초기 이들을 중국 공안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넘겨줌으로써 입은 외교적 실점을 어느 정도는 만회하게 된 셈이다. 일본외교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적지않은 상처를 입었다.일본 언론들은 이번 사건 처리를 놓고 일본의 외교적 패배로간주하고 있다.탈북자들을 일본 총영사관으로 돌려보내 원상회복시키라는 요구를 중국이 끝까지 무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막판까지 원했던 탈북 주민들에 대한 자체 신원확인 및 망명희망지 확인작업을 중국은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일본 언론들은 일본 외무성측이 탈북 주민들의 경유지인 마닐라에서 신원확인 작업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보도하고 있다. 일본은 결국 탈북 주민들의 제3국행이 지연되는데 따른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의식해 중국측에 내세웠던 요구를 포기했고,중국은 일방적으로 탈북 주민들을 내보내지는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21일 밤 일본에 사전 통보를 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일본 정부는 중국 경찰들의 선양 총영사관내 진입이빈 협약 위반이라는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일본이 탈북 주민들의 인도적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앞으로 중국측에 사과등을계속 요구,실점 만회에 나설 가능성은 있다. 이럴 경우 중·일간의 외교마찰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수도 있다. marry01@
  • 길수친척 5명 입국

    [도쿄 황성기·베이징 김규환특파원 김수정기자] 지난 8일 중국 선양(瀋陽)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망명요청을 위해 들어갔다가 중국 경찰에 의해 연행돼 중·일간 외교 분쟁까지 야기했던 장길수군 친척 5명이 23일 새벽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22일 오후 중국 남방항공 377편을 이용,베이징을떠났으며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해 23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이와 관련,중국 정부가 신병을 확보하고 있던 탈북자의제3국행을 공개적으로 결정함으로써 탈북자 문제 해결에전기가 마련됐다는 분석이다.그러나 이들의 한국 도착으로 신병처리 문제는 일단락됐음에도 불구하고 빈협약 위반등을 둘러싸고 빚어진 중·일간 외교분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이에 앞서 필리핀 정부에 탈북자들에게 경유지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사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필리핀 외무부는 이날 10시30분(현지시간)쯤 기자회견을 통해 탈북자들의 필리핀행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21일 밤 탈북자들을 필리핀으로 출국시킨다는 사실을 일본정부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탈북자들을 태운 비행기가 중국을 떠난 후 기자회견을 갖고 탈북자들의 제3국 출국은 일본 입장이 고려된 것으로 평가한다고밝혔다.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일본 정부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앞으로의 여론 추이가 주목된다. marry01@
  • 고이즈미 지지율 급락

    [도쿄 황성기특파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지난해 4월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40% 밑으로 떨어졌다. 아사히(朝日)신문은 20일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이같이 전하면서 특히 중국 선양(瀋陽)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가려던 장길수군 친척 5명이 중국 경찰에 강제연행된 사건과 관련해서는 국민의 75%가 일본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가 18∼19일 이틀간 전국의 성인 남녀 2044명을 상대로 실시한 전화설문조사 결과 고이즈미 내각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38%에 그쳐,처음으로 40%를 밑돌았다.
  • [帝政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4)새로 밝혀진 사실들

    러시아 문서보관소는 구한말 역사의 보고(寶庫)였다.발굴된 문서중에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졌던흥미진진한 사실들이 수두룩했다.특히 고종의 해외망명기도와 헤이그밀사 파견의 좌절,아관파천의 진실 등은 근세사를 새로 고쳐 써야 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헤이그밀사사건의 전말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주권불가침을 인정하며 국제회의에서 상기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하였다.초청장은 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에게 외교문서로 전달되었다.러시아 정부는 이범진 공사를 합법적인 공사로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그곳에있는 고종황제의 밀사에게 이 뜻을 전해도 무방하다.(1905년 11월1일 외무장관이 베이징주재 러시아공사 파그딜로프에게 보낸 지시문) 이 지시문은 고종이 서울의 프랑스어학교교사 마르텔을베이징주재 러시아공사에게 극비리에 파견,헤이그회의에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토록 요청한 데 따른 러측의 공식 답신이다.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외교적 입장은 대한제국의 독립국가유지였으며 헤이그회의 참가지원이었음을 알수 있다.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니콜라이2세가 주창해 열렸고 러시아는 이 회의의 의장국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을사늑약체결(1905년 11월17일)이후 새로운 국제정세가 전개되면서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혼선과 모순을 노출했다. 1907년 6월30일 회의가 막상 개막되자 러시아는 대한제국 대표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여론의힘을 빌려 국권을 되찾으려 한 고종의 마지막 시도가 무참하게 꺾이는데 러시아가 일조한 것이다.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이처럼 방향을 튼 이유는 무엇일까.일본과의 비밀협상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양국은 1907년 7월30일 체결한 협약에서 대한제국과 만주,몽골 등 3개 지역에 대한 이해득실을 각각 정리했다.두나라는 ▲만주에서 양국간 분계선을 확정하고 ▲러시아는 일본과 대한제국간에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결속에 대해 간섭과 방해를하지 않으며 ▲일본은 외몽골에서 러시아의 특수권익을 승인한다 ▲쌍방은 협약체결을 비밀로 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러·일비밀조약 체결 한달전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자당황한 러시아 외무부는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전 파리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부랴부랴 전문을 보내 입장을 거부토록 지시했다.넬리도프도 “한국인들이 왔지만 접견을거부했다”는 보고문을 본국에 띄웠다.뿐만 아니라 러시아 외무부와 주일 러시아대사 등은 대한제국의 헤이그밀사파견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일본측에 흘렸다.밀사들의 회의장 입장이 좌절된 뒤 이토(伊藤博文)가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양위를 요구한 것이 그 방증이다. 고종황제의 측근인 윤택영(순종의 장인)과 권신목(영어통역원)이 총영사관으로 찾아와 헤이그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으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설득해보냈다.또 이종호(이용익의 손자)를 위시한 일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지사에게 헤이그에 갈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해 왔다는 주지사의 전보를 받고 저지하도록 조치했다.(1907년 7월25일 플란손 총영사가 헤이그밀사사건과관련,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국제정세에 어두워 러·일비밀협상이 진행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러시아 외무부는 밀서를 서류철속에 보관해 놓았을 뿐이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포츠머스조약(1905년 9월5일 러·일전쟁후 양국이 미국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을엄격히 준수하려고 한다.이 조약으로 외무부는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지원이나 협조를 얻어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려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때문에 러시아 지방당국은 전고종황제(헤이그밀사사건으로 1907년 7월19일 순종에게 양위)정부의 지시에 의거,러시아 국경안에서 투쟁하는 한인폭도(의병)의 기도를 분쇄하고 있다.…한인들은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투쟁을 바란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갑작스러운 대한제국 밀사의 출현은 서울에무질서를 발생시켰으며 일본은 이 기회를 활용해 분명한 본보기(고종의 퇴위)를 보였다.일본에 구실을 주는 한인들의 항일투쟁 고무발언을 삼가야 한다.(1908년 10월6일 외무장관이 새로 취임한 소모프 총영사에게 보낸 훈령) 니콜라이2세는 이 훈령문 상단에 “공감한다.”는 친필의견을 남겼다.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밀사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밀사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아관파천의 막전막후 1896년 2월2일 전문으로 보고한 바와 같이 신변의 위협을느낀 고종이 밀지를 보내 수일안에 왕세자와 함께 공사관에 피신하겠다는 희망을 밝혀왔다.전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보호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궁중을 떠나는 날짜와 시간을 사전 통보해줄 것을 부탁하고 고종의 밀지를 전해온 이범진에게 궁중에서 러시아공사관까지 오는 도중 예상되는 위험성을 지적해 주었다.이범진은 고종이 궁중에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미 모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다음날(2월3일) 고종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2월9일 저녁 공사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이날 결행하지 않고 경비병 증원을 요청해왔다.공사관은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 긴급요청,2월10일 해군대령 몰라스가 100명의 수병을 인솔하고 서울에 왔다.고종은 2월11일새벽 7시30분에 공사관에 왔다.(1896년 2월11일 스페이예르 대리공사가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결심한 뒤 측근 이범진을 통해 밀지를 보내고 당초 결행키로 한 날짜를 어겨가면서 피신하기까지 10일동안의 급박했던 순간을 보고한 비밀전문 내용이다.당시 서울에는 전임 베베르 대리공사도함께 있었다.멕시코 공사로 발령을 받은 베베르가 업무인수인계를 위해 서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히토로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러시아는 고종과의 친분을 고려,스페이예르를 도쿄로 보내고 베베르를 유임시켰다. 문서내용에 따르면 아관파천은 대한제국에서의 주도권을노리고 고종과 친러파들의 공사관 피신요청을 모르는 척들어준 러시아의 ‘기획외교’의 결과물처럼 보인다.물론서울에 부임해온 지 한달밖에 안된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의 입장에서는 주재국 국왕의 공사관 피신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맞아 다소 흥분,실체를 부풀렸을 수도 있다.당시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10년가까이 근무한 베테랑 외교관이던베베르는 1903년에 쓴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에서 “뜻밖의 정변이 발생했다.러시아공사관 경비해군은 160명이었으나 서울주둔 일본군 수비대는 1000명이 넘었다.러시아는 이때부터 이전 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하게되었으며 한·러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외교적으로 해석했다.스페이예르는 러시아공사관에 375일동안 피신해 있던 고종이 환궁한 지 1년도 채 안된 1898년 2월21일 전문에서도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권했다.라고 보고하는 등 제2,제3의 아관파천을 꾀했다.이에 대해 베베르는수기에서 “스페이예르가 대한제국 정부와 독립협회,그리고 일본과 자주 충돌하는 경솔한 행동을 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상실됐다.”고 질책하고 있다. ■고종의 러시아 망명기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이후에도 여러차례 거론된다.최근 이범진 공사가 수차례에 걸쳐 고종황제가 친일파의새로운 간계 때문에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필요할경우 다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려 한다고 하며 친일파들은 의친왕 이강을 제위에 오르도록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한다.(1902년 5월15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파블로프 대리공사에게 보낸 비밀전문)고종황제가 위험에 처했다는 어떠한 증후도 현재 포착하지 못했다.(1902년 5월19일 파블로프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답신) 이처럼 러시아공사관으로의 재피신 가능성이 오가는 가운데 러시아망명에 대한 비밀보고서는 1903년에 처음 등장한다. 오늘 고종황제가 신임하는 환관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점령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서울주둔 일본군은 궁정을 포위하고 있고 그들에게 매수된 시위대가 자신을 살해할 것 같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 러시아정부의 조언을 요청했다.아마 고종황제는 자신이 위기에처하면 공사관이 러시아로 망명을 할 수 있도록 은신처를제공하겠다는 약속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1903년 12월30일 파블로프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대한제국 황제가 일신상에 위험이 있을 경우 불가피하게러시아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거나 아니면 러시아로 탈출하는 문제에 대해 러시아측의 협조가능성을 은밀하게 타진해왔다.고종은 대궐을 빠져나오기 쉽고 피신을 예상할 수없도록 하기위해 대비(1904년 1월2일 서거)의 시신을 이장할때 사당에서 공사관 담장의 샛문을 통해 오겠다는 것이다.(1904년 1월21일 파블로프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서) 하지만 이에 대한 러시아 본국의 답신은 없었다.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으로 퇴위하고 난 뒤인 1908년부터 합병직전인 1910년 사이에 망명설이 집중적으로 꼬리를 물고 나오기 시작했다. 전 고종황제가 배편으로나 육로로 러시아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고종이 러시아영토에 출현하면 다시 극동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어 대한제국 문제를 둘러싼 한·러관계는 긴장이 조성될 것이다.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조치는 극동정세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고종황제의 망명계획을 거부하는 것이 좋다.(1908년 11월20일 도쿄주재말레비치대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전 고종황제가 러시아나 청국으로 피신할 마음을 갖고 있다.이는 황제자신이나 백성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권고를 했다.(1909년 1월8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핍박과 잇따르는 시해기도에 몸도 마음도 망신창이 상태였던 것 같다.심지어 “차라리 해외에나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소모프 총영사에게 했을 정도였다.의병의 도움을 받아 일본 감시요원을 따돌린 뒤 러시아나 청국국경까지 탈출할 기회를 엿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은 없다지만한일합병이전에 고종의 러시아 망명이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어디로 흘러갔을지 자못 궁금한 장면이다. 노주석기자 joo@
  • 선양 탈북자처리 왜 늦나/ 중·일 외교갈등 ‘후유증’

    중국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에서 연행된 탈북자 처리가 당초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 중국측이 제3국 출국을 허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으나 ‘주내 출국’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사건 발생(지난 8일)으로부터 2주일 가량 소요되는 늑장 처리임에 틀림없다.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도 19일 이들이 제3국으로 출국하려면 시일이 좀더 걸릴 것임을 시사했다.탕 부장은 “일본정부에 바라는 것은 중·일관계를 고려하고 비우호적인 열기를 식혀 달라는 것”이라고 말해 양국간 외교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출국이 지연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동티모르를 방문중인 탕 외교부장은 아울러 “일본 정부는하나의 외교 사건을 둘러싼 갈등이 중·일 관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측은 이들 5명의 출국과 중·일간 갈등의 일괄 타결을 주장하고 있으나,일본측은 길수 친척을 먼저 출국시키고 갈등은 나중에 해결하자는 분리 해결 방안과 길수 친척에 대한 접견 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자국의 주권에 관계되는 문제로 일본측이 간여할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이에 반발하고 있다.중·일간의 날카로운 신경전에는 탈북자 연행에 일본측 동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어 일본이 요구하는 절차가 생략된 채 제3국 출국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탈북자 처리는 탕 부장이 귀국하는 20일 이후가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탈북자 처리가 시일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가 탈북자 기획 망명에 관련된 비정부기구(NGO)단체에 대한 중국 당국의 조사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중국 정부는 탈북자 문제가 중국을 비판하는 국제여론의 새로운 재료가 될 것을 경계해 이번 기회에 NGO 단체와 탈북자간의 연결고리를 분명하게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베이징 김규환·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日 난민인정’ 아프간 청년 자살

    일본에서 난민 인정을 기다리던 아프가니스탄 청년(27)이 자살해 충격을 주고 있다.중국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 탈북자 연행사건에 이어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일본 정부의 난민 정책 부재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6시 30분쯤 이 청년이 살고 있는 중고차판매회사의 기숙사에서 숨져 있는 것을 이 회사 사장(63)이 발견했다. 지난 해 2월 일본에 온 이 청년은 같은 해 7월 도쿄 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인정을 신청했다. 그는 그러나 지난 3월 교통사고를 내 중상을 입었으나 난민이라 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입원·치료비가 90만엔에달했다는 것.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완치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퇴원한 그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일본당국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고 결국 자살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 정부가 1981년 난민지위에 관한 조약에 가입한 이후 20년간 난민으로 인정한 것은 284명에 불과하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사설] 주먹구구식 탈북자 처리

    탈북자로 추정되는 30대 남자가 지난 17일 베이징 주재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들어와 영사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총영사부측이 되돌려 보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탈북자 처리에 관한 정부의 태도가 또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최소한의 확인사항인 신원이나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고서 돌려보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총영사부 직원이 “월요일(20일) 다시 오라고 했다.”니 다시 나타나면 다행이지만,그러지 않으면 한 인간의 자유를 향한 절박했을지도 모르는 노력을 배신한 꼴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탈북자 처리문제가 어지럽다.선양 일본영사관에 진입했다가 일본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강제로끌려나와 중국공안에 잡혀있는 길수군 친척 5명의 장래도예측불허의 상황이다.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만일 이들의 신변처리가 장기화된다면 정부는 무엇이라고 항의하겠는가.자국 공관에 도움을 요청하려 온 사람도 사실상 ‘내쫓아 놓고서’ 일본과 중국측에 탈북자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국제적 웃음거리다. 또한 그동안 많은 탈북자들이 우리와 외국 공관의 협조를 통해 한국행을 성사시켜왔다.그런데도 기초적인 질문마저 없이 돌려보냈다는 것은 여태껏 탈북자 문제를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 이렇다 할 원칙이 세워져있지 않다는 방증이 아닌가.워낙 돌발적이고 기습적이어서 저마다 상황논리가 다르긴 하지만,기본 원칙은 세워놓아야 한다.탈북자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려는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하지만 이제 탈북자 처리문제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의 중요 업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언제까지 ‘조용한 외교’라는 미명아래 쉬쉬하면서 중국의 눈치를 살피고,찾아온 탈북자를 돌려보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국제기구와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논의하는등 공론화하고 비정부기구와의 협조채널도 강화해야 한다.또 공관 직원들에게는 최소한의 조치요령이라도 숙지시켜야 할 것이다.
  • 길수친척 제 3국행 난항

    [도쿄 황성기특파원] 중국 선양(瀋陽)의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가려다 체포,연행된 북한 주민 5명의 제3국행 문제에 관한 중국과 일본간 절충이 난항을 겪고 있다. 중·일 양국은 이번 사건의 일괄타결 여부 및 주민 5명의 출국 요건 등을 놓고 이견을 보여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못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16일 보도했다. 일본은 ‘선(先) 주민 제3국행,후(後) 중국 경찰들의 총영사관 내 진입 문제 해결’이라는 분리대응을 주장하고있으나,중국은 주민들의 제3국행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지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주일 중국 대사관측은 탈북자들의 제3국 추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일본이 중국 무장경찰의 총영사관진입에 동의했다는 중국측 수사 내용을 수용해야 하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제3국행은 불가능할 것이라고말했다.
  • “”탈북자 문전박대 日 무책임””

    [도쿄=연합뉴스] '난민의 어머니'로 불리는 일본의 오가타 사다코(緖方貞子) 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이 중국 선양(瀋陽)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일어난 북한 주민 망명좌절 사건에 대한 총영사관 측의 태도를 비판했다. 오가타는 최근 LA타임스와 신디케이트를 맺은 ‘글로벌 뷰 포인트'와 한 회견에서 “”망명 희망자가 오면 그들이 얘기하는 것을 음미하고, 망명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간단히 문전박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16일 전했다. 오가타는 또 “”(공관은) 모든 사안을 조사할 의무가 있으며, 기계적으로 쫓아내서는 안된다.””면서 난민문제는 지금이야말로 정면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오가타는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방치하게 되면 위기는 점점 커지게 되어 있다며 “”정치적 박해를 받은 망명자는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나, 경제 난민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은 되돌려 보내진다는 자세를 명확히 하면 사람들의 유출은 멈추게 된다””고 진단했다. 중국 경찰이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한 문제와 관련해 오가타는 빈협약 위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쁘게 얘기해서 협약 위반이며, 좋게 말해도 협약의 의무를 지키려고 힘쓰지는 않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오가타는 옛 동독 국민이 동구의 여러나라 대사관에 들어간 것이 동독의 붕괴를 재촉한 것과 북한 주민의 잇따른 망명 러시 간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는 “”옛 동독과 같은 상황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제는 그간 안에서 끓어오르다 지금 터져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 [사설] 일본의 한심한 인권불감증

    아나미 고레시게(阿南惟茂) 주중 일본대사가 선양 총영사관의 북한주민 진입 좌절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지난 8일 “북한 탈출 주민이 대사관에 들어올 경우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해 쫓아내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고 일본언론들이 보도했다.아나미 대사는 또 “인도적인 면에서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면서 “그들이 들어와서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쫓아내는 게 낫다.”고 했다고 한다.아나미 대사가 일본을 대표하는 특명전권대사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나 지시는 일본 정부의 방침과 다름없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아나미 대사의 지시가 사실이라면 일본은 인도주의를 외면한 처사로 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주중 일본대사의 발언은 사실과 틀리며 대사관 경비를 강화하라는 차원의생각을 밝힌 것이라고 해명했다.가와구치 외상의 해명을믿고 싶지만 선양 총영사관에서 벌어진 탈북자 체포에 대한 영사관 직원들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의 탈북자들에 대한 인식이 인도적이 아니라는 데서는 크게 벗어나지않을 것이다.생명의 위협을 받고 보호를 요청하는 난민들을 인도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다.그런데도 자국의 공관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 난민들을 잔인하게 쫓아낼 수가 있는가. 탈북자들의 총영사관 진입 좌절 이후 일본이 보여준 태도도 일본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일본측은 짐짓 중국 공안원들이 치외법권 지역에 들어와 탈북자들을 체포했다며 인도를 요구하고 있다.하지만 일본 외무성의 보고서도 영사관 직원들이 중국 공안들의 체포를 묵인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솔직하게 인정을 했으면 몰라도 중국 당국과 마찰을 빚어가면서까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어느 국가든 망명객이나 난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나라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보호를 요청하는 난민들을 쫓아내거나 체포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국가정책과는차원이 다른 문제다.일본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같은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사과하고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 中·日, 길수친척 5명 제3국행 합의

    [베이징 김규환·도쿄 황성기특파원] 중국 주재 캐나다대사관에 지난 11일 진입한 탈북자 2명이 한국 시간으로 15일 자정 직후 싱가포르로 출국했다고 중국 소식통들이 말했다. 이들 탈북자 2명은 16일 오후 서울에 도착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당국은 또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하려다 중국무장 경찰에 연행된 장길수군친척 5명은 빠르면 이번 주말전,늦으면 다음주 필리핀을거쳐 한국으로 보내기로 방침을 확정했다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이들의 출국 시기가 결정되지 못한 이유는 중국 무장경찰의 일본 총영사관 진입과 이들의 연행을 둘러싸고 일본측의 동의 여부,사과 요구 등과 관련하여 일본과 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앞서 다케우치 유키오(竹內行夫)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우다웨이(武大偉) 일본 주재 중국 대사는 15일 오전 도쿄에서 회담을 갖고 인도적 차원에서 탈북자들을 제3국으로출국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한편 아나미 고레시게(阿南惟茂)주중일본 대사가 지난 8일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들어올 경우 이들을 쫓아내라는취지의 지시를 한 사실이 15일 언론에 보도되며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15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을 통해 아나미 대사가 그런 지시를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가와구치 외상은 “아나미 대사가 대사관 경비를 한층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생각을 밝혔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marry01@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두얼굴의 日외교/ “”실리 우선”” 궁지몰린 탈북자 외면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 외교가 또다시 실리를 좇아 인권을 외면한 소아적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나미 고로시게(阿南惟茂) 주중 일본 대사가 탈북자를 염두에 두고 “수상한 사람은 관내에 들이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냉혹 외교’에 비판이 쏠리고 있다. ■아나미대사 발언 파문 [경위] 아나미 대사의 지시는 탈북자 5명이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에서 체포되기 불과 4시간 전인 지난 8일 오전10시 대사관 정례 회의 때 내려졌다. 그는 “중국에 불법체류 중인 탈북자가 많다.”고 전제,“수상한 사람이 대사관에 허가없이 침입하려고 할 경우 침입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이같은 지시가 즉각 중국 내 총영사관에 시달됐는지 여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사건 당일 중국 경찰이 탈북자들을 연행하기 전 선양 총영사관의 부영사가 다카하시 구니오(高橋邦夫) 주중 공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한 결과 “무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어떤 경로로든 대사의 발언이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일본 내각부의 한 관계자는 15일 “아나미 대사의 발언은지극히 우연”이라고 연관성을 부정했으나 회의에 참석한다카하시 공사가 대사의 ‘지시’를 염두에 두고 선양 총영사관측에 연행에 동의하는 지시를 내렸을 개연성이 크다.이 관계자는 “아나미 대사가 (탈북자가)일단 관내에 들어오면 인도적 견지에서 보호해 제3국 이동 등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도 했다.”고 해명했으나 아나미 대사의 발언의 중점이 ‘탈북자 관내 진입 저지’쪽에 실려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나미 대사는 1996년 공사 시절에도 대사관 직원들에게비슷한 지시를 한 일이 있다고 한 소식통이 15일전했다. 당시 대사관에서 일했던 이 소식통에 따르면 아나미 대사는 한 북한 과학자가 일본대사관에 들어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한 직후 대사관 정례회의에서 “만일 난민이나 망명신청자가 들어오면 그들을 대사관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사실일 경우 이는 중국주재 일본대사관측이 이미 그때부터 탈북자들과 망명신청자들에 대한 불관용 입장을 채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큰파장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의 방침인가] 아나미 대사의 발언이 개인적 소신인지 일본 정부의 내부 방침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그렇지만 차관급에 해당하는 주중 대사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무게를 가진다. 일본 정부는 중국 경찰의 총영사관 진입에 초점을 맞추고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나미 대사의 지시로미뤄볼 때 “일본측 동의를 얻어 총영사관에 들어간 탈북자를 체포,연행했다.”는 중국측 주장이 보다 현실성을 띤다.결국 아나미 대사의 ‘지시’대로 탈북자의 진입을 저지하지 못한 총영사관측이 뒤늦게나마 중국 경찰의 총영사관 진입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난민이나 망명 수용에 극히 냉혹하다.난민지위 조약에 가입한 1981년 이후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이 284명에 불과하고 지난해의 경우 353명이 난민신청을 했으나 7%에도 못미치는 24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을 뿐이다. 망명에는 더욱 인색하다.외무성 보도관은 지난 8일 일본 정부가 받아들인 망명 건수를 묻는 질문에 “1996년의 북한 과학자 망명신청 1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은폐 의혹] 아나미 대사의 발언도 사실상 은폐된 상태에서 사건 발생 1주일만에 드러났으나 총영사관이 1차로외무성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일부 사실 은폐가 있었다. 중국측은 일본측 조사결과에 대해 “부영사가 체포된 탈북자로부터 편지를 받아 읽었다.”고 반박했다.다시 말해 일본 총영사관 직원이 탈북자들의 연행직전 이들이 미국 망명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 관계자는 “첫 보고에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은 없었으며 외무성에서 파견된 영사부장의 조사결과 이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중국측 주장을 일부 시인했다.그러나 이 관계자는 “부영사가 영문 편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발뺌함으로써 의혹을 증폭시켰다. marry01@ ■약점잡은 中, 對日공세 '고삐'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중국 정부는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의 동의를 얻지 않고 중국 무장경찰이 탈북자 2명을 강제로 끌고나왔다는 일본측의 주장에 대해 지난 11일에 이어 14일 또다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일본측의 주장을 강력반박하고 나섰다. 쿵취안(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측이 13일 발표한 선양 일본 총영사관에 대한 조사결과중 일련의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맞지 않아 중국 정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정부가 일본측의 발표내용중 사실과 동떨어진다고 지적한 부분은 무장경찰의 진입에 대한 동의여부.쿵 대변인은 무경 대대장이 일본 부영사에게 “우리가 영사관내 진입해 이들 2명을 데리고 나와도 되느냐.”고 물으니 부영사는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을 하며 동의를 표시해 관내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특히 관내로 진입한 대대장이 “데려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부영사는 허리와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시하면서 “커이(可以·그렇게 하십시오)”라고대답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이러한 외교 공세를 통해 탈북자들을 강제로 끌어낸 데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이번 사건이 중·일관계에미치는 파장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인 데다 오는 9월 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양국이 물밑 교섭을 통해 수습에 나설것이라는 게 베이징 외교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중국은 이에 따라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했다 중국 당국이억류중인 장길수군 친척 5명의 탈북자들에 대한 신병처리를 최대한 신속히 처리키로 방침을 정했다. 중·일 외교문제와 이들의 신병처리를 분리처리하는 전략인 셈이다.이들의 억류가 중국의 대외적 인식에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계산 때문이다.그러는 한편 중국은 일본에 대한 외교 공세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해 앞으로 이번 사건을 일본을 상대로 외교적 입지 강화의 호기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khkim@ ■아나미대사는 누구 지난주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들어오면 쫓아내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로 물의를 빚은 아나미 고로시게(阿南惟茂·61) 주중 일본 대사는 현직 외교관으로서보다 아나미 고 레치카(阿南惟幾) 전 육군대신의 막내아들로 더 유명하다. 아나미 대신은 일본 우익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지난45년 일본의 2차대전 패전 당시 육군대신으로 8월15일 일왕이 항복을 시인하는 라디오 음성(일본인은 이를 옥음(玉音)이라고 함)을 들으며 할복자살한 사람이다.그는 가족들 앞에서 자살했으며,아나미 대사는 당시 4살이었다. 아나미 대신은 패전 하루 전날인 8월14일 일본의 항복을결정한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끝까지 본토 결전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죽음으로 대죄를 씻고자 한다.천황폐하의 깊은 은혜를 입어 남길 말은 없다.신국불멸을 믿으며…”라는유서를 남겼다. 아나미 대사는 도쿄대 법대를 나와 67년 외무성에 들어왔다.아주국 심의관,아주국장,내각 외정실장을 역임했다.보수·우익 외교관으로 분류된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길수군 친척등 8명 미국行 정말 원했나

    중국 선양 주재 미 총영사관에 진입했다 지난 14일 한국에 들어온 송용범(40)씨 등 3명의 탈북자와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하다 실패,중국 공안에 억류돼 있는 장길수군 친척 5명이 ‘미국행’을 원했을까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이들의 총영사관 진입을 도운 국내외 비정부기구(NGO)의‘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길수군 친척 5명은 지난 8일 총영사관 진입 전 배포한 영문 서한에서 “미국에 친척이 있고,한국에서는 좌익으로부터 테러를 받을 우려가 있다.”며 미국행을 희망했다. 이들이 ‘미국행’을 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언론들까지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들의 처리가 예상보다 늦어지자 한국정부가 난민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미국’의 심중을 헤아려 이들에게 ‘한국행’을 설득 중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도 미국의 ‘인권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며 사태를 주시했다. 송씨 등 3명도 ‘미국행’을 원한 것으로 미 언론은 보도했었다.이들은 인천공항에서 ‘미국행을 원하는이유’를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중에 이야기하자.”면서 답변을 회피했다. 외교소식통들은 ‘미국행’은 이들의 진심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미국을 개입시키기 위한 NGO들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북한과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국을 끌어들였다는 분석이다. 탈북자 문제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길수군 가족 등 탈북자들이 의사소통조차 어려운 미국행을 원할 리 없고,한국은 신변이 위험하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그는 “길수군 가족 중 이성희씨의 외삼촌이라고 NGO측에서 소개한 남모(미국 거주)씨도 친척이 아닌 것으로안다.”고 말했다.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북한민중구조행동네트워크(RENK) 등이 나서서 ‘미국행’요구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주장도 나온다. 외교부는 지난 13일 송씨 등 3명을 면담한 뒤 “이들로부터 한국행을 원한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日 ‘탈북자처리’ 비판, “”난민인권 냉담 日본색 드러나””

    “무리하지 마.”중국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 탈북자 강제 연행 사건때 일본측의 연행 동의 여부와 관련해 주목되는 사건 당시 주중 일본 공사의 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난 8일 오후 탈북자 5명을 체포한 중국경찰이 이들을 연행하려 하자 부영사는 허겁지겁 휴대전화로 ‘상부’에 대응조치를 문의했다.‘과연 누구냐.’로관심을 불러 모았던 이 상부 직원은 베이징(北京) 대사관에 있던 다카하시 구니오(高橋邦夫) 공사였다. 그의 지시에 영사관 직원은 연행을 제지하는 뜻으로 들고 있던 두 팔을 내렸으며 중국 경찰은 이를 동의의 신호로받아들이고 이들을 차량에 태워 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이 장면이 바로 중국측이 “일본측이 연행에 동의했다.”고 해석한 대목으로 추정된다. 일본측 보고서는 중·일간에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체포와 연행에 대해 동의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탈북자들이 많은 선양이라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영사관직원들의 안이한 의식 등을 지적하고 있다. 또 중국인 경비원이 사증 대기실에 있던 2명의탈북자를감시할 때 일본인 직원에게 즉각 보고를 하지 않았고 바깥에서 연행 상황을 보고 있던 부영사와 직원간에 충분한 연락이 없었다는 ‘지휘명령계통’의 허술함도 지적했다. 이밖에 영사관측이 현장에서 즉각 중국측에 체포와 연행에 항의한 것이 아니라 사건 발생 1시간40분이나 지난 시점에 선양 공안당국을 방문해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드러나 이래저래 일본 당국의 허술한 초동 대응은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됐다. 도쿄신문은 14일“이번 사건으로 난민과 망명자에 냉담한 일본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日대사가 탈북자 축출 지시

    아나미 고로시게(阿南惟茂) 주중 일본대사가 북한 주민들이 대사관으로 들어올 경우 “쫓아내라.”고 사전 지시한 사실이 새로 밝혀져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문이 예상된다. 또 중국 랴오닝성 선양(瀋陽) 소재 일본총영사관측이 지난 8일 총영사관에 진입하다 체포된 장길수군 친척 5명이 북한 사람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이같은 사실을 적은 편지까지 전달했는데도 이를 묵살,중국 공안들이 끌고가도록 용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나미 주중 일본대사가 선양총영사관 사건이 일어난 지난 8일 오전 대사관 직원들에게 “북한 탈출 주민이 대사관에 들어올 경우,수상한 사람으로 간주해 쫓아내라.”고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교도(共同)통신이 14일 보도했다.아나미 대사의 이같은 지시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명백히 인권을 도외시한 처사여서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문을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아나미 대사는 선양총영사관 사건이 일어나기 4시간 전인 8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전 11시) 대사관 정례 전체회의에서 직원들에게 “인도적인 면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그들이) 들어와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쫓아내는 게 낫다.”며 이같이 지시했다고 통신은 전했다.일본 주중대사관은 선양총영사관 사건 발생 직전 총영사관측에 “(탈북자들이) 뛰어들어오는 것에 주의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쿵취안(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4일 브리핑에서 지난 8일 선양 일본총영사관의 부영사가 길수 친척 5명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고 이중 한 명이 중국어로 “우리는 일가족이고 북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편지까지 전달했으나 본 뒤 돌려줬다고 말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베이징 김규환 khkim@
  • 탈북 3명 서울 도착, 2명은 오늘 입국예정

    지난주 중국 선양(瀋陽)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3명이 싱가포르를 거쳐 14일 오후 4시15분쯤 싱가포르항공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지난 8일과 9일 미 총영사관에 진입한 송용범(38)·차광복(36)·최광철(21)씨 등 탈북자 3명은 이날 새벽 선양을출발,싱가포르에서 잠시 머문 뒤 서울로 들어왔다. 지난 11일 베이징 주재 캐나다대사관에 진입했던 20대의 탈북자남녀 2명도 이날 저녁 베이징을 떠나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며,이르면 15일 한국에 올 것으로 전해졌다. 14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송용범·차광복·최광철씨 등 탈북자 3명은 정부로부터 국내 정착지원금으로 각각 3700만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길수 친척도 한국 올듯

    중국 정부는 14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 소재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하다 체포된 장길수군 친척 5명에 대해 제3국을 경유한 한국행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쿵취안(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뉴스브리핑을통해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하다 체포된 탈북자 5명에 대해 신분을 조사하고 있다.”며 “이들 5명은중국 국내법,국제법,국제관례,인도주의적 정신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k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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