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총성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 액체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 15-1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34
  • 궁정동 안가터 공원 “변신”/「10·26」16주기… 지금 그곳은

    ◎박 대통령 시해됐던 자리엔 석조상이… 「탕 타 탕」 16년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18년 독재역사의 거목은 배신한 측근이 뿜은 총탄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지난 93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 55의 3 3천2백평 필지에 조성된 「무궁화 동산」은 공작정치회동과 밀실연회의 산실인 청와대 안전가옥터다. 일본풍 향나무는 모두 뽑아내고 옮겨심은 수령 30년된 무궁화나무와 은은한 향기가 1백리까지 풍긴다는 울룽도 섬백리향이 새벽 공원을 찾는 인근 주민을 반갑게 맞이한다. 풍수발복의 땅 북악산 아래 무속헌터를 지켜온 3백년된 회화나무는 총성이 울린 인왕산 아래 안채를 굽어보며 덧없는 권력무상을 느낀다.헐린 안가 5채중 최고권력자가 술상앞에 쓰려졌던 이 터에 지금은 높이 3m의 석조물이 바위가 무너져내리는 형상으로 서 있다.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운동삼아 이곳을 거니는 상훈(65·서울 종로구 옥인동)씨는 『30여년을 이곳에 살았지만 79년 당시 이곳이 청와대 안가인지 몰랐다』며 『국민의 뜻을 저버린 통치자가 겪은 역사적 교훈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되새겨진다』고 10·26 16주기 감회를 밝혔다.
  • 빨치산의 최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1)

    ◎지리산 본거지로 군사시설 파괴·후방 교란/휴전협정뒤 숙청·토벌로 조직 “지리멸렬”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일단 마무리 됐다.그러나 남한 곳곳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흔히 빨치산 또는 유격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는 「공비」라 부른 공산주의자 무장집단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 「전선없는 전쟁」은 1956년까지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부터 활동 했다.처음에는 남로당 출신이 주축을 이뤘지만 1949년 3월 북한이 간부들을 파견,빨치산부대를 직접 지휘케 하면서 빨치산은 정규군에 버금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이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내 공산당 조직을 재가동,전쟁 때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한 민중봉기」 염두 이어 전쟁 직전인 50년 6월 북한은 남한 각 도에 「정치공작대」5∼6명씩과 일부 무장병력을 다시 침투시켰다.6월10일 김달삼이 이끄는 유격대 2백50여명이 경북 청도 운문산에 유격구를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남하했다.24일에는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766군부대(7백66명으로 구성)가 해군 함정을 이용,포항 쪽으로 상륙했다.같은 날 또 다른 유격대 2백50여명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이 부대들은 뒷날 북한 정규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다음날인 6월26일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승리를 위해 남한 주민들은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특히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는 더욱 강력한 주문을 했다.곧 『해방구를 확대·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구체적으로는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과 전신·전화선등을 절단,파괴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염두에 둔 김일성의 이같은 요구는 당시 남한실정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김일성의 기대에 찬 독촉이 쉴새없이 방송됐지만 어느 곳에서도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지하당원들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무산됐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벌어졌다.가장 널리 알려진 빨치산부대인 지리산 이현상부대는 8월10일 대구 주변인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미군통신부대를 기습,미군 20여명을 살상하고 무전기 14대,소총 20정을 빼앗아갔다.이들은 8월25일에는 경남 거창 미군사령부를 습격,1백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탱크 3대,화물차 30여대를 부쉈다.9월6일에는 경북 청도에서 북한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 경남 백운산유격대,경북의 배철이 지휘한 유격대,전남 빨치산,남해안유격대들이 미 공군기지를 점령하거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고 마을 청년들을 끌고가 빨치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또 북한군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적극 나서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이같은 활동은 전쟁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박헌영·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빨치산은 민중과 괴리돼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게다가 전쟁전 한국정부가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여 기본조직을무너뜨린 것이 빨치산 세력약화에 결정적 요소가 됐다. 빨치산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밀리면서 뿌리잘린 풀잎처럼 역사의 틈바구니를 떠돈다.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쫓겨간 10월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군사위원회는 남한 각 지방당 조직에 『(북한군의)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각 도당이 책임지고 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김일성도 이틀 뒤 방송에서 전세가 불리해 「전략적으로」후퇴하니 빨치산은 뒤에서 유엔군의 발목을 잡아 북진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이 이용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입산경험자와 입산이 가능한 자는 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강원도로 후퇴할 것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빨치산은 지역별로 유격대를 재편성,산악지대에 들어갔다.이들은 나중에 완전 소탕될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한」처절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당시 입산자들은 민청원·자위대원등 남로당 계열과 북에서 파견한 내무서원·정치보위부원·정치공작대원이 대부분이고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도 적잖게 끼어 있었다. ○이승엽 당정 총 지휘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 이현상 부대는 잠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달아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는 이현상부대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도망해온 빨치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이곳에는 당시 남한내 당·정을 총지휘한 이승엽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승엽은 이곳에 모인 빨치산으로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이현상을 부대장으로,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삼았다.이때 새로 편성된 이현상부대는 직속부대원 1백50여명 말고도 승리사단 4백여명,혁명지대 1백여명,인민여단 1백50여명등으로 구성됐다.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을 본거지로 정하고 남하했다.먼저 태백산맥을 타고 1950년 12월 말쯤 충북 단양에 이르러 문경경찰서를 기습하는등 유격전을 벌였다.다시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러서는 남한내 6개 도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이 자리에서 빨치산은남부군을 결성,통일된 지휘체제를 구성했다.이현상이 총사령관을,이영회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빨치산은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남부군을 해체하고 6개 유격지대 체제로 바꾸는등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했다.또 북한에서 지도부와 북한군을 남파하는등 안간힘을 썼고 가끔 경찰서·열차를 습격하지만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11월 말 한국 정부는 토벌전투사령부를 전북 남원에 설치,빨치산 소탕에 적극 나서 영호남 일대 빨치산은 치명타를 입고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이후 거듭되는 토벌작전에 몰린 빨치산은 「보급투쟁」이란 명목으로 산간마을에서 생필품을 약탈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지도자 대부분 피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남한내 빨치산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박헌영·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에서 버림받게 된다.휴전협정에서도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어 이들에게는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1953년 4월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계 숙청계획에 따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8월에는 이현상이 지리산 빗장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됐다.54년 초 김지회·이영회부대가 각각 전멸당하고 빨치산의 마지막 지도자 남도부가 대구에서 체포돼 남한 빨치산은 사실상 소멸됐다.한국정부의 기록에는 1954∼5년에도 「공비 출현,소탕」사실이 가끔 등장한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공비 1명 사살,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기록에서 사라졌다. 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전략 계획에 따라 조직돼 활동한 집단이었다.이들의 투쟁은 민족사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결국 빨치산은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긴 역사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빨치산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로 잠복해 남아 있다. ◎「빨치산 신문」 한국전중 10여종 발행/남부군 「승리의 길」 등 타블로이드판 지면 대부분 전투원 선동­선무 할애 우리 학계의 빨치산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그동안 「빨치산」이란 말조차 금기처럼 여겨온 사회 분위기에 비추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관련자료는 이우태씨(필명 이태)의 「남부군」을 비롯한 수기 3∼4종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실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빨치산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간행한 신문 10여종을 찾아냈다.국내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빨치산신문들은 그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따라서 학계는 이 신문들이 빨치산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1951년 5월5일자로 발행한 「승리의 길」10호는 타블로이드판 한장에 양면으로 기사를 실었다.앞면 머리기사는 「총사령관 로명선」이 쓴 「5·1절을 맞으면서」란 논설.『5월1일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력량과 국제적 단결을 시위하는 날』이란 의미 부여와 함께 그 내력을 소개하고 『남부군 전체 군무자 동무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또 신문 사고의 형태로 『남부군 산하 각부대들이 3월21일부터 4월14일까지 수안보·칠성·청천·봉화·립석을 공격하여 이를 해방시켰다』고 전했다.아울러 「적 사살 1백25명,부상 30명,포로 48명,각종 무기 37정,탄약 2천2백37발」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1951년 11월23일자 「승리의 길」27호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의 보고를 실었다. 이밖에 빨치산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전투원 선동에 할애 했다.즉 『용감하고 귀중한 빨치산들이여,적들의 지휘처와 참모부를 기습 소탕하며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하라』『리승만의 반동적 지방의회선거를 철저히 파탄 분쇄하자』는 등으로 채웠다.이따금 이명제의 서사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29호)따위 문학작품이나 감상문,외신,전투실기,정찰기,여순병란 회고기등도 실었다.
  • 보스니아 일부 지역선 총성/어제 휴전 발표

    ◎유엔 요원들 평화 이행 감시 【사라예보·런던 A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전역에 60일간의 한시적인 휴전이 공식 발효된 12일 일부지역에선 여전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휴전이 준수되고 있다고 유엔 관계자들이 밝혔다. 크리스 버논 유엔 대변인은 이날 『일부 전선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그같은 적대행위는 종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현지상황을 전했다. 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는 이날 휴전을 축하하는 포성이 울려퍼지는 등 축제분위기가 이어졌으며,유엔 평화유지요원들은 내전세력간의 휴전이행 감시에 들어갔다. 브뤼셀을 방문중인 해리스 실라지치 보스니아 총리는 이날 유럽연합(EU) 관계자들과 보스니아 전후복구계획을 논의한뒤,기자들에게 이번 휴전발효로 마침내 『평화정착에 접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북서부 지역에서는 회교 정부군과 크로아티아 연합군이 세르비아계와 영토 장악을 위해 11시간째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등 양측간의 적대행위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스니아 라디오 방송은 『세르비아계 탱크부대와 포병대가 보스니아 정부군이 포진한 전선과 회교 정부군이 장악한 지역등 도시지역에 포탄을 퍼부었다』고 보도했다. 한편 내전 당사자 대표들은 이날 하오 사라예보 공항에서 휴전이행 방안을 협의하기위한 회의를 개최했다.이번 회의에서는 유엔군의 자유로운 통행이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42개월만에 총성 멎은 보스니아·「세」계 표정/사라예보 곳곳 “휴전 자축” 축포/「보」 시민 “또 한번의 휴전일뿐”… 평화정착 회의적/「세」계,모든 학교에 휴교령… 음식점도 철시 명령 ○…보스니아 정부와 세르비아계가 12일 새벽을 기해 60일간의 휴전에 들어감으로써 2차대전 후 유럽지역 최악의 전쟁으로 일컬어지던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예보 시민들을 들뜨게 하는 모습. 그러나 밤 10시부터 시작되는 야간통행금지가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 탓에 시내에는 보안군 병력들이 순찰을 도느라 오가는 것 외에는 대체로썰렁한 분위기. 목격자들은 그러나 통행금지 이후에도 시내 곳곳에서 휴전을 자축하는 총소리가 들리는 등 축하분위기가 계속됐다고 전언. ○…사라예보 시민들은 휴전을 크게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르비아계가 완전한 평화조약에 서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으로 생각. 보리스 미지크라는 한 시민은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세르비아계는 교활하다.지금은 그들이 휴전에 순순히 응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숨돌릴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휴전으로 전기공급이 재개돼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산책하던 벨마 물라소마노비치라는 여인은 『이것이 끝은 아니며 또한번의 휴전일 뿐이다.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며 어두운 표정. 19세된 즐라탄 하산베고비치라는 소녀도 『지난 3년간은 지옥이었다.너무나도 고통스러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나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다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알 뿐』이라고 말했다. 티토 거리의 한 검문소를지키고 있는 경찰관도 휴전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더 기다리고 지켜봐야 한다』고만 대답. ○…이날 양측이 휴전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 개시 40분 전까지도 폭발음이 들리는 등 긴장이 계속되는 모습. 이에 대해 경찰은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고 전쟁 때문에 파손된 지하 가스관이 터지는 소리일 것』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반응. 그러나 정부군과 세르비아계가 휴전 개시에 앞서 한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혹시나 휴전 합의가 어그러진 것은 아닌가 하며 불안해 하는 모습이 역력. ○…휴전이 개시되자 반야루카와 프리예도르를 통치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당국은 각급 학교에 대해 휴교령을 내리고 주류판매 금지 및 몇몇 호텔의 음식점들을 제외한 모든 음식점들에게 문을 닫도록 명령. 이와 관련,프레드래그 라지크 반야루카 시장은 『세르비아계는 시내의 모든 건물과 거리를 통제 하에 둘 것』이라고 말했다.
  • 「10·26 최후만찬」 재현

    ◎심수봉씨,M­TV 「4공화국」 현장 고증/배우들 연기·소품배치 자세히 지도/공판기록 잘못된 내용도 바로잡아 10·26의 총성이 울리는 궁정동 만찬현장이 18일 상오 여의도 MBC 스튜디오에서 MBC­TV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제작팀에 의해 재현되었다. 이날 촬영현장은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가수 심수봉씨가 현장고증을 맡아 배우들의 연기와 소품,순간적으로 벌어진 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지도해 눈길을 모았다. 그는 긴박하게 돌아가던 그 순간,그 자리에 참석했던 면면들의 미묘한 반응을 마치 바로 눈앞에 펼쳐진 사건인양 리얼하게 증언했다. 또 공판기록에 잘못 기재돼 있는 당시 역사의 주역 사이에 오갔던 대화내용도 바로잡아 주었다.공판에는 김재규가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당기며 내뱉은 말이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기록돼 있으나 사실은 『넌 너무 건방져!』였다는 것. 이밖에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꽁무니를 보이며 냅다 달아난 비서실장 김계원의 비열한 행동,총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을 붙잡고 화장실에 갔다 온 차지철이대통령 박정희에게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괜찮다』며 대답하는 박정희의 곧은 자세와 지그시 감은 눈,그리고 곧이어 옆으로 쓰러지며 가래가 차오르는 듯 마지막 숨을 그렁그렁 몰아쉬며 숨져가던 독재자의 말로가 그의 입을 통해 되살아났다. 심씨는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나오게 됐다』고 증인으로 서게 된 심정을 밝혔다.
  • 아! 발칸반도(외언내언)

    발칸반도를 「세계의 화약고」라고 한다.6백여년 간 민족·종교가 얽히고 설켜 피의 보복이 계속되는 땅이다.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뇌관이 됐던 바로 그 반도다. 13세기 동진하던 게르만민족과 서·남진하던 남부슬라브족간에 민족적 충돌의 현장이 됐던 발칸은 14세기에 들어서 융성하던 오스만 터키제국의 힘이 북진하면서 천형의 땅으로 변했다.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등 게르만계의 기독교와 세르비아 동방정교회,보스니아 중심 남부권의 회교 등 3개종교와 5개민족 4개언어,2개의 문자권이 뒤섞여 반목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 잠시나마 이들의 갈등을 묶어두었던 것은 티토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국제공산주의 이념.티토가 죽고 공산권이 붕괴되자 분열과 대립은 자연스럽게 재현됐다.구유고연방은 91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가 각각 독립하고 92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연방을 결성했으며 같은해 보스니아가 독립했다.3년을 끌며 20여만명이 희생되고 3백만명의 난민을 낸 「인종청소」가계속되고 있는 보스니아내전은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다수 회교도와 세르비아계간의 핏줄전쟁.세르비아계는 인구의 32%밖에 안되나 경제권을 쥐고있으며 세르비아공화국의 지원을 받는다. 지난 4일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반군에 전면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전쟁은 발칸반도 전역으로 확산될 기세다.크로아티아 정부는 지난 91년 6개월간의 전투에서 국토의 5분의 1을 세르비아계에 빼앗긴 후 절치부심 해왔다. 크로아티아의 반세르비아계 공세가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확대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세르비아계 뒤에는 러시아가 있고 세르비아계의 발칸석권을 막으려는 서부유럽은 그 반대편에 서있다.「신냉전」구도다.인간이 인간인 것을 부끄럽게 하는 핏줄전쟁이 지금 발칸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타국에서 부른 노래(두만강 7백리:23·끝)

    ◎민족의 한 서린 「선구자의 무대」/연변 원로 음악인 김종화씨,윤해영·조두남에 얽힌 이야기 들려줘/해란강변 말 달리던 선구자 간 곳 없고/일송정 그 자리엔 기념비만 외로이… 중국 동북3성.이른바 만주라고 불렀던 북지에는 민족의 한이 어디 못지않게 서려있다.그리고 그 한을 노래로 달랬던 사연도 숱하게 간직했다.오늘날까지도 민족이 널리 애창하는 애수 어린 가곡과 구슬픈 유행가들이 여기서 잉태되었다. 용정시 시가지에서 4㎞ 떨어진 비암산과 일송정,비암산에서 바라본 해란강은 유명한 가곡 「선구자」노랫말의 무대다.지금으로부터 58년전만해도 돌기둥에 흡사 청기와를 덮은 듯 싶은 두 아름드리나 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일송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그 자리에 지금은 일송정 기념비와 정자가 들어섰다.또 근래에 정자로 올라가는 길에 「선구자탑」이 세워졌는데,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곧 폭파되었다. ○노래유래 등 사라져 그 바람에 탑에 새겨두었던 「선구자」의 노랫말도,노래의 유래도 사라졌다.그러나 1990년 「선구자탑」을 세운다고 했을 때 꼬깃꼬깃 접어 간직했던 「선구자」노래와 작사자 윤해영,작곡자 조두남에 얽힌 사연을 증언한 분이 생존해 있다.1921년 화룡시 용문향 태생의 연변 원로음악인 김종화(74)선생이 그 분이다.연길시 흥안향에 사는 그를 찾았다.지금도 틈틈이 기타를 칠 정도로 아주 건강했다. 『1939년 이른 봄이었디요.부친과 함께 일곱식구를 거느리고 훈춘 양수를 떠나 흑룡강 목단강시에서 80여리 떨어진 신안진으로 이사를 한 것입네다.신안진은 60리 넓은 벌판이라 18개나 되는 큰 마을들이 자리잡은 반도시 반농촌이었댔는데,학교만 해도 10개에 병원도 3군데나 됐드랬디요.내가 꾸린 동양사진관 같은 사진관도 5개나 되고….벌판을 질러 흐르는 해랑강에 뗏목을 띄워 해림을 거쳐 목단강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디요.그래서 여관이며 식당이 흥청대고 기생집들도 적잖았수다.그런데 신안진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의사 한 분이 안전병원이라는 병원을 경영하셨댔디요.기타연주와 작곡법을 배우던 나도 그 병원을 드나들던 사람중의하나였습네다』 그는 신안진에서 1942년 겨울 조두남을 먼저 만났다.자그마한 유랑극단에서 아코디언 주자였던 조두남의 첫 인상은 키가 커 보이고 깡마른 것이었다.「라 콤파르시타」와 「마리네라」를 연주하면서 정서전환점에 다다르면 으레 히죽 웃곤 했다.깡마른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음악이 나오나,하는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조두남의 왼손엔 붕대가 감겨있었다.할머니의 강권으로 일찍 고향 평양에서 장가를 들었던 조두남은 이참저참 집을 뛰쳐나왔던 것으로 김종화선생은 기억했다. 안전병원을 개업한 안의사댁은 음악을 한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조두남도 그 집에 묵었다.1943년 가을 목단강시 유랑극장에서 「동만총성 추기 민족예술전」을 열 때 신안진악단연주로 조두남 창작이 모두 무대에 올랐다.「한 사나이의 반평생」「농촌의 사시절」「고향생각」이 인기를 끌었다.그 무대에서 「고향생각」을 불렀던 남수억(74)은 지금 화룡시 팔가자진에 살고 있다. ○「용정의 노래」로 불러 김종화 선생이 윤해영을 만난 것은 1944년 봄의 일이다.조두남이 집에 찾아와 영안에서 갖는 신곡 발표공연에 나와 기타를 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영안에 갔다가 만났다.물론 조두남의 소개를 받았다.그 발표공연에서 오늘날 「선구자」로 더 널리 알려진 「용정의 노래」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이밖에도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목단강의 노래」 「산」 「흥안령 마루에 서운이 핀다」등을 선보였다. 윤해영과의 첫 만남을 쉽게 떠올린 김종화 선생의 얼굴에는 연민의 그늘이 스쳐갔다.김종화선생의 말을 들으면 윤해영은 매우 불행한 삶을 산 것 같다. 『작사자 윤해영 선생은 조두남 선생 보다 두 세살 위이었디요.키는 작았지만 아주 친절합데다.학교에서 선생질을 하다가 영안 협화회에서 일을 보고 있다고 기랬어요.그날 신곡발표공연이 끝나고 윤해영 선생 집에서 소박한 술자리를 벌였디요.다가 「목단강의 노래」를 합창한 기억이 납네다』 그 「목단강의 노래」에는 윤해영이 인간적으로 겪었던 불행한 사연을 담았다는 것이 김종화 선생의 설명이다.윤해영의 집 술자리에서 「목단강의 노래」합창이끝나자 윤해영은 벽에 걸린 사진액자를 거두어 한 없이 흐느꼈다고 한다.아이를 안고 있는 윤해영의 부인 모습이 든 사진액자였는데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쓴 가사가 「목단강의 노래」라고 실토하더라는 것이다. 1945년 9월 윤해영은 신안진 대성백화점 김광호의 여동생을 후처로 맞았다.후처는 소학교 선생이었다.처가에 왔을 때 김종화선생을 불러 「해저문 마을」의 작곡을 부탁했다.김종화선생은 신문에 난 윤해영의 시 「동북인민 행진곡」에 곡을 붙여 발표한데 이어 1946년 7월 목단강시 서장안회관에서 같은 방법으로 윤해영 작사 「동북인민 자위송가」를 내놓았다.윤해영은 「동북인민 자위송가」발표 마지막 날 김종화선생을 찾아와 술을 마셨다.그 술자리에서 윤해영으로부터 후처가 결혼 일곱달만에 아이를 낳아 이혼했다는 것과 혼자 떠돌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윤해영이 떡국 장사를 했는지 어느 식당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김종화선생의 판단은 그가 북한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왜냐하면 1949년 우연히 입수한 북한 노래집에서 윤해영 작사의 「분여받은 땅」인가 하는 노랫말을 보았기 때문이다.「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북한정책 찬양노래라 했다.윤해영의 소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사도 조금 달라져 김종화 선생의 이야기는 다시 조두남에게로 이어졌다.1944년 봄 신곡발표회 이후 평양 고향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신안진으로 다시 돌아온 조두남의 인생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그것은 조두남의 두번째 결혼이었다. 『첫번째 부인은 남편이 밖으로만 돌자 개가를 했더라고 기래요.그런데 새로 맞은 부인은 늘씬한 서울나기 여성이었디요.그때 조두남선생은 목단강시에서 극단을 조직하고 있던 관계로 태평양레코드 전속가수 서태림과 조두남선생이 손수 키우던 21살 짜리 손풍금수 안향락을 데리고 와 함께 만났댔습네다.날 더러도 극단에 가자는 것을 식구들 생계 때문에 사양했디요.기리고 나서 1945년에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에 와서 안전병원 안원장과 내가 사진을 찍은 것이 마지막이야요.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 우연히 서울방송을 듣다가 「용정의 노래」가 나와 귀를 번쩍 떴디요.그런데 가사도 좀 바뀌고 곡목도 「선구자」로 바뀌었습데다.이 말을 다 한 것은 역사는 언젠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국제 차세대지도자 포럼」 참관기/윤청석 국제2부차장

    ◎해외에 우리문화 새롭게 각인 시킬때/각종 무역장벽 철폐 등 세계화 전략에 큰 관심/“지방선거운동 인상적… 활기찬 민주화” 입모아 『한국은 외국에 물건을 팔기만 하는가요』 『서울시내에는 왜 교회가 많습니까』 『대통령 임기가 단임 5년인 이유가 뭐지요』­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롯데호텔에서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 국제교류재단의 공동주최로 열린 국제 차세대지도자 포럼 현장에는 「한국의 참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중견 엘리트들의 토론 열기로 가득했다.차세대 포럼은 40대 전후의 각국 정부 의회 재계 언론 및 학계등 차세대 엘리트들이 모여 세계의 주요 공통관심사를 논의하는 자리로 이번 포럼에서는 「세계화와 한국경제」등 3개 주제가 논의됐다. 참석자 전원은 이번 행사기간중 포럼과 병행해 판문점을 둘러보고 포항제철과 경주를 방문하기도 했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중국·일본·호주·러시아등 주요 11개국에서 기업인 공무원 변호사 교수 언론인등 19명,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숫자의 각계 전문가들이참석했다. 이들 외국인들은 「한국의 실상」에 대해 성가실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었다.한국은 이미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것으로 보며 국제무대에서의 경쟁상대국으로 경계하기도 했다. 당연히 한국의 세계화전략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개방화·국제화 질문내용을 요약하면 『30여년간 정부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체제로 급성장한 한국이 어떻게 단기간에 각종 무역장벽과 규제를 철폐할 수 있는가』에 모아졌다.이를테면 서울시내에 국산차만 굴러다니는게 시장개방에 소극적인 좋은 실례라는 것이다.문민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해서도 이들 외국인들은 궁금해 했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인 필리페 시트로엥씨는 『현재의 당신 수입만으로 여름휴가때 하와이나 방콕·싱가포르등 동남아국가에 여행할 수 있느냐』며 넌지시 우리의 생활수준을 떠보았다.파리 교통관리청 국제담당이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북경∼상해(7백㎞) TGV프로젝트를 따내기위해 금년들어 중국을 3차례나 찾아갔다고 귀띔했다. 국제협력증진 방안과 관련,경제분야 분임토론장에선 중국언론인이『최근들어 중국은 3년연속 10%이상 고속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중국의 장래는 무척 밝다』며 『60년대 이후 대약진운동·문화혁명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중국은 지금쯤 한국을 따라잡았을 것』이라고 한국경제성장 과정과 중국의 실정을 비교하기도 했다. 판문점 시찰때는 한반도 주변정세,쌀원조,핵문제등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다.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는 북한에 쌀을 보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우리 참석자들의 의견에 대부분 공감했다.반면 미국인 카렌 슈터씨(여·미국대서양협의회 태평양담당)등 일부 외국인들이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미국과 북한의 외교관계진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한국 보수층그룹이 외교정책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지적한데 대해 우리 참석자들이 『예측불허의 북한이 핵무기 야심을 버리고 「의미있는」 변화를 보일때까지 미국측이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논란을 빚었다. 판문점에서 돌아오면서 들른 경기도 벽제의 한 음식점에서는 마음을 터놓은 대화가 오갔다.우리 참석자들은 『한국이 아직 신기술에서는 뒤떨어지지만 정보·통신분야 기술에는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했으며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 가입한 직후 캐나다에서는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나 요즘은 늘어나고 있다』고 캐나다 공무원이 전했다.WTO,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이 NAFTA만큼 구심점과 단결력을 보일지 의문스럽다는 대화도 있었고 『한국기업 입장에서는 태국·말레이시아등 동남아지역의 인건비가 요즘 너무 올라 공장을 유럽으로 이전하는 추세』(고영열 대우중공업 종합기획실 차장)라는 말에 유럽출신들의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서툰 젓가락질을 연신 해대던 독일 참석자가 『차창 밖에 비친 피켓을 흔드는 지방선거 입후보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벽안의 이방인들은 입을 모아 활기찬 한국의 민주화과정에 관심을 보였다. 이번 차세대지도자 포럼에선 「비즈니스」는 국경을 초월한 총성없는 전쟁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특히 포항제철 홍보센터에서는 한꺼번에 4∼5명의 질문이 꼬리를 물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독일인은 포철과 광양제철소의 조강능력과 관련,포철관계자가 밝힌 수치를 구체적으로 밝혀 달라고 요구했고 호주산업노조 부장은 포철의 호주 원자재 수입량이 자신의 자료와 다르다며 덤빌듯 따졌다.참석자들은 해가 저물 무렵까지 열연공장의 자동화시설 전공정과 용광로에서 쏟아지는 시뻘건 쇳물을 살펴보며 최근의 엔고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경주 유적 방문길엔 우리나라가 앞으로 초일류국가로 발돋움하려면 국제사회에 우리 문화와 역사를 심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다가왔다.기술개발도 중요하지만 해외소비자들에게 우리 문화를 인식시키지 않고는 결국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 승전 50주년과 미·러의 새역할(해외사설)

    유럽에서 파시즘이 패배한지 반세기가 지났다.우리가 승전50주년을 축하하기는 쉽다.하지만「승리의 날」「얄타회담」「아우슈비츠 해방일」 등 당시 비극의 시대가 남긴 기념일들은 보다 다른 방법으로 기념돼야한다.50여개국 지도자가 유럽에서 총성이 멎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모여든다.그러나 지금 세계는 히틀러가 어떻게 권좌에 오를 수 있었나,승리에 가장 큰 공헌자는 누구인가,전후 평화를 망친 주범은 누구인가 하는 논쟁에만 매달려 있다. 앞으로 수일간 모스크바에서는 정치인들의 입에서 그럴듯한 명연설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다.그들은 2차대전 당시 소련시민이 겪었던 희생,고통,그리고 영웅적 행동,영광에 대해 열광적으로 찬양할 것이다.정치인들은 떠들고 퇴역 참전용사들은 그들의 연설을 잠자코 듣고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이번 기념식과 관련,가장 잘못된 일이다.이와관련,한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다.2차대전으로부터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정치가·지도자들의 단견에 의해 가장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상대는 바로 병사들과 민간인들이라는 사실이다.붉은 광장의 단상에서 세계지도자들은 늙고 찌든 참전용사들의 퍼레이드 장면을 지켜볼 것이다. 모스크바시당국은 이번 50주년 기념식 준비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항공기 편대,21발의 예포,폭죽놀이,그리고 파클라나야 고리에 새로 건설된 전쟁박물관 등등…그러나 진짜 기념식은 병사들의 퍼레이드를 향해 박수치는게 아니라 끔찍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세계의 지도자를 찾아내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8일 소련을 찾는 클린턴 미대통령은 옐친 대통령은 「새 냉전시대의 정상회담」을 통해 마주앉는다.단순히 기념물을 둘러보고 승리를 자축하기 보다는 과거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전쟁을 피하고 보다 안정된 세계를 위한 노력에 힘이 기울여졌으면 좋겠다.
  • 보스니아내전 다시 격화/세계,사라예보외곽 집중포격

    ◎사용 금지된 섬광탄까지 발사/휴전 내일만료… 시한연장 협상 실패 【사라예보·파리 외신 종합】 보스니아의 회교도정부군과 세르비아계는 내달 1일 만료되는 휴전연장을 호소하는 국제여론에도 아랑곳없이 29일 수도 사라예보 주변과 북부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휴전종료를 이틀 앞둔 이날 사라예보시내와 주변지역에서는 강력한 총성과 포성이 울렸으며 유엔이 안전지대로 설정한 북부 비하치지구의 남부 외곽지대에서도 전날밤부터 이날 낮까지 세르비아계의 포격이 계속됐다. 사라예보 라디오방송은 시외곽의 흐라스니차지구와 이그만대로에 여러 발의 전차포탄이 떨어졌다고 보도하면서 세르비아계가 곡사포와 탱크,기타 야포를 동원해 비하치주변의 보스니아 회교도정부군 방어선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고 전했다. 한편 유엔보호군의 에르브 구르멜롱 대변인은 세르비아계가 전날 북부 마글라이의 한 민간인 가옥에 2발의 섬광탄을 발사,2명이 중화상을 입었다고 밝히고 이는 제네바협약을 분명히 위반한 것이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한편 미국등 5개 접촉국은 28일 파리에서 회의를 갖고 휴전연장을 위한 막바지 노력을 전개했으나 새로운 내용 없이 기존 제안을 되풀이함으로써 보스니아의 전면전 재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5개 접촉국 대표는 4시간여에 걸친 회담 끝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접촉국은 교전당사자간의 상호승인을 통한 휴전연장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고 빠른 시일내에 각료급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외무부의 한 관리는 이와 관련,접촉국 전문가회의가 내달 3일 런던에서 열리고 이어 5일에는 파리에서 정치지도자간의 회담이 개최될 것이라고 전했다.
  • 캄보디아/20여년 내전 서서히 종막

    ◎크메르루주 이탈 속출… 올9천명 투항/4천여명 잔존… 밀림에 숨어 최후저항/폴 포트 등 지도자들 망명여부가 완전평화 변수 내전의 상처로 얼룩진 캄보디아에 평화는 오는가. 지난 75년 크메르 루주군의 프놈펜 점령으로 시작된 캄보디아 내전이 20년간의 질긴 도전과 응전 끝에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밀림을 자욱히 덮었던 포연도,목청을 카랑카랑 높였던 총성도 지겨웠던 지난날에 비하면 거의 잦아들었다. 아직 간간이 계속되고 있는 전투는 캄보디아의 새 정부와 여기에 저항하는 크메르 루주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93년 5월 유엔의 중재하에 실시된 총선에 크메르 루주가 참여를 거부하면서 평화정착의 꿈은 흐려지고 내전은 재발했다.이에 따라 총선에서 승리한 노로돔 시아누크국왕의 푼신펙(민족연합전선)이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과 연합하여 구성한 현정부는 크메르 루주군 토벌에 나섰다. 중국의 무기공급 중단과 정부군의 압박으로 크메르 루주는 총선 직전 4만명에 이르렀던 병력과 국토의 20%에 이르렀던 점령지를 거의 다 잃었다.현재 크메르 루주군의 영토는 캄보디아 서북부의 바탐방지역과 태국과의 접경지에 있는 밀림 일부 등 전국토의 5%미만으로까지 줄어들었다. 지난해 7월 정부는 크메르루주를 불법화 하면서 동시에 이탈자들에게 사면령을 선포했다.불법화 법안이 통과된 뒤 이탈자가 속출해 크메르 루주군 병력은 와해상태로까지 위축됐다.올해 들어서만 9천명의 크메르루주군이 이탈해 정부에 투항했다. 정부의 공격강화와 불법화에 대항해 지난 해 10월 이후 크메르 루주의 저항도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강렬해졌다.위기에 몰린 쪽이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어서 크메르 루주쪽은 계속되는 양민학살과 가혹한 병력통제로 이탈자를 더욱 크게 늘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정부군의 추정에 따르면 현재 크메르 루주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4천명이 채 안된다.훈센 총리가 최근 르 피가로지에 밝힌 바에 따르면 크메르 루주의 전체병력은 2천명 아래로 떨어졌다.이 통계는 크메르 루주의 실질적인 군사적 영향력이 이 땅에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크메르 루주가 집권기간동안 저지른 범죄행위는 여전히 국제적인 관심사이다.미국 국무부는 지난 1월 앞으로 2년동안 폴 포트 정권하에서 자행된 집단살인을 문서화하기위해 70만달러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이 문서화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크메르 루주의 집권 4년동안 대략 1백만명이 처형과 질병·기아로 죽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숫자는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7분의1에 해당한다.시아누크국왕을 포함해 이 나라 거의 모든 가정에서 희생자가 났다.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은 모두 60대의 할아버지가 됐다.국가원수였던 키우 삼판,크메르 루주의 제1인자 폴 포트,제2인자 이엥 사리,크메르 루주군 부사령관 타 목­이들은 지금 남은 병력을 이끌고 밀림에 숨어들어가 칩거하고 있다.재판은 이들이 잡히지 않는 한 별 의미가 없는 행위다.시아누크국왕은 이들이 차라리 국외로 망명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완전한 평화상태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간헐적인 총성뿐이다. 한 정부군 지도자의 말은 이 상황에서 꽤 시사적이다.『아무도 그들을 밀림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다.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들이 다 죽고 없어져야 총성이 완전히 멎으리라는 이야기다.
  • 클레이사격/동호인 4만… 새 레포츠 정착

    ◎사격장 10곳… 누구나 쉽게 배우고 명중률 높아/비행접시 맞힐때 쾌감 “짜릿”… 스트레스 해소 「창공을 가르며 솟아 오르는 접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접시와 함께 산산조각나는 스트레스」 요란한 총성과 함께 날아가는 목표물을 명중시켰을 때의 짜릿한 쾌감은 클레이사격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다. 지난 2월말로 수렵기간이 끝나고 날씨가 포근해지면서 클레이사격장을 찾는 동호인들이 크게 늘고 있다. 생활체육 전국사격연합회 염홍철 사무국장(41)은 『클레이사격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워 즐길 수 있어 주말이면 주부,직장인,대학생등 많은 사람들이 사격장을 찾고 있다』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목표물을 따라 정확한 사격을 해야하므로 집중력과 결단력,민첩성과 안정된 자세를 요구하며 이를 배양시켜 주는 레포츠』라고 말했다. 클레이 사격은 시속 60∼90㎞로 공중을 비행하는 흙(Clay)으로 만든 접시모양의 목표물인 피전(Pigeon)을 총으로 쏘아 맞추는 레포츠.사수가 사대를 옮겨가며 날아오르는 표적을 맞추는 스키트와 사수가자리를 옮기지 않고 한 곳에서 기다리다 솟아오르는 접시를 깨뜨리는 트랩경기로 구분된다.클레이사격은 라이플·피스톨을 사용하는 라이플사격과는 달리 산탄총을 이용하기 때문에 배우기 쉽고 명중률이 높아 일반인들사이에 레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산탄총으로 이동표적을 맞추는 사격의 발상지는 영국.18세기 영국에서 야생조수는 모두 국왕의 소유물로 취급돼 수렵은 국왕과 귀족들에 한해 사교경기로 이뤄졌다.따라서 일반 시민들은 수렵대신 살아있는 비둘기를 날린 뒤 총으로 쏘아 맞추는 경기를 즐겼는데 이후 비인간적이란 비난이 일면서 진흙으로 빚어 만든 표적을 이용한 클레이사격이 등장하게 된 것. 우리나라에는 지난 55년 대한사격연맹 발족과 함께 스포츠로 도입됐으며 88올림픽이후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엘리트스포츠에서 레저로의 전환을 가져와 현재 동호인수만도 4만을 헤아린다. 클레이사격은 태릉사격장을 비롯해 전국 10여곳에서 즐길 수 있으며 총은 시·도지사의 허가로만 구입이 가능하고 소지절차가 까다로울 뿐만아니라 가격(초보자용은 1백50만원선)이 비싼편이어서 우선은 대여해 쓰는 것이 좋다.복장은 활동성있는 옷차림이면 된다.실탄은 25발 1박스에 2만5천원정도. 염홍철국장은 『이 레포츠가 총기를 다뤄야하는 만큼 안전수칙과 교습자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태릉사격장내에 위치한 생활체육 전국사격연합회(02­971­94 18)는 초보과정을 강습하며 회원은 싸게 이용할 수 있다.또 레저이벤트업체인 코니언(723­7237),한국종합레포츠(516­2042)등에서도 강습회가 있다.
  • 국제금융첨병 총집결「머니게임」/현지르포/“세계최대”시카고 선물시장

    ◎두곳서 하루 1천억달러 거래/1백년전 곡물거래서 출발… 이젠 80%가 금융상품/호가 소리·뜀박질 뒤엉켜 “후끈” 세계는 지금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돈 놓고 돈 먹는」 선물거래라는 머니게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선물거래의 투자 실패로 2백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영국의 베어링그룹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도,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오렌지 카운티가 재정파산 선고를 받아도,머니게임의 「전사」들은 개의치 않는다.돈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불을 좇는 「불나방」이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좇아 우리나라도 오는 96년 주가지수 선물시장을 열기로 하고 지난 3일부터 시험시장을 개설,운영에 들어갔다. 세계 금융시장의 첨병들이 모여있는 시카고 선물거래소에서는 브로커(매매 중개자)와 트레이더(거래자),메신저(매매주문 전달자)들이 숨가쁘게 움직인다.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대부분 20대 중반에서 30세 전후의 혈기왕성한 나이이지만 거래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는 사람이종종 나온다.때문에 거래소마다 바퀴가 달린 「간이 들것」이 마련돼 있다. 동양선물(주)의 미국 현지법인 구한서 소장은 『이들에겐 점심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갈 시간마저 없을 정도』라며 『매매 중 장내에서 「실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귀띔한다. 아침 7시20분의 시카고 상업거래소(CME).개장을 알리는 부저 소리와 함께 장내에 모여 있던 브로커나 메신저,트레이더들이 일제히 큰 소리를 지르며 매매 전쟁에 들어간다. 쌍용투자증권 미국 현지법인의 주식옵션 브로커 최병욱 과장은 『장내는 브로커와 트레이더들이 매매 체결을 위해 지르는 호가 소리,매도·매입 의사를 표시하는 손짓(수신호),주문 용지를 받아 뛰어다니는 메신저들의 발걸음이 뒤엉켜 순식간에 후끈한 열기로 달아오른다』고 말한다. 거래는 입찰 경매가 아니라 개인 공매 방식으로 이뤄진다.먼저 브로커들이 호가와 손짓을 통해 가격과 매수·매도 의사를 표시한다.살 때는 손바닥을 안 쪽으로,팔 때는 바깥 쪽으로 향한다.수직으로 세운 손가락 수는 수량을,수평으로 표시된 손가락은 가격을 뜻한다. 옆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럽지만 브로커들은 사냥개처럼 자신의 물건을 사줄 트레이더를 찾아낸다.이들 사이에 매매 수량과 가격이 서로 일치하면 곧바로 가격 기록수에게 전달돼 장내의 가격 전시판에 게시되는 동시에 컴퓨터 통신망을 타고 세계 80여개국으로 전파된다. 시카고 상업거래소는 세계 최대의 선물거래 시장.1874년 시카고 식품상인들이 버터와 달걀,닭고기 등의 농산물을 거래하기 위해 처음 설립한 뒤 1919년 시카고 상업거래소란 오늘의 명칭을 내걸었다. 지금은 삼겹살 등 7개 종목의 상품 선물,일본 엔화 등 10개 종목의 통화 선물,3개월짜리 유로달러 등 6개 종목의 이자율 선물,스탠더드 엔드 푸어스(S&P) 500지수 등 2개 종목의 주식 선물 등 25개 종목이 거래되고 있다. 선물시장은 유가증권·소·돼지·원목·금 등을 당장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점에 일정한 수량을 일정한 가격에 사고 파는 「권리」를 거래하는 곳이다. 마이클 국제담당 부사장은 『미래의 가격 변동에 따른 손해를 방지(헤징)하기 위해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의 가격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 선물거래』라고 설명한다.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는 1848년 82명의 시카고 곡물상인들이 설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 선물거래소이다.옥수수·귀리·대두·소맥 등 곡물의 선물과 금·은 등 상품 선물,미국 재무성이 발행한 장기 국채인 T­본드와 중기 국채인 T­노트,지방채 등 금융 선물 등이 거래된다.하루 평균 거래량은 40만∼50만건이며 거래대금은 4백억달러 수준이다. 레프코 증권사의 케빈 볼드윈 자산운용 및 교육담당 과장은 『70년대까지만 해도 곡물이 전체 거래량의 80%를 차지해 한국에는 곡물 거래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며 『그러나 지금은 거래량의 80% 이상이 T­본드 등 금융선물 거래』라고 소개했다. 이밖에 뉴욕에도 원유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뉴욕 상업거래소(NYMEX),뉴욕 커피·설탕·코코아 거래소(CSCE),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뉴욕 상품거래소(COMEX),뉴욕 면화거래소(NYCE),주가지수 선물이 주로 거래되는 뉴욕 선물거래소(NYFE) 등이 있다.그러나 규모에서 시카고와는 상대가 안 된다. 또 필라델피아 증권거래소도 세계 최대의 통화 옵션거래 전문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옵션 거래는 선물 기일에 매도자 또는 매입자에게 거래의 실행 여부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변형된 선물 거래이다. ◎“리스크 관리 노하우 축적 힘써야”/시카고 사업 거래소 고램 부사장/감각에 의한 투자전략은 실패 자초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와 함께 세계 선물거래의 성지로 불리는 시카고 상업거래소(CME).이 곳의 마이클 고램 국제담당 부사장(50)을 만났다. 『한국 사람들은 슬기로운 데다 선물시장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 내년부터 개설되는 주가지수 선물시장도 잘 운영할 것으로 봅니다』 선물시장의 기초 이론을 강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국내 금융시장 환경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에 선물시장을 견학하기 위해 찾아오는 한국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한글판 카탈로그도 준비해 놓았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우리나라에도 개설되는 주가지수 선물시장에 관해 물어보았다.『투자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사항은 리스크(투자 위험) 관리 기법입니다』 선물거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이 예측이 빗나가면 손해가 발생하는데,손해 발생 가능액을 일정 범위 이내로 관리하는 기법들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선물거래는 감각에 의존하는 투자전략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며 『선물거래의 후발국인 한국은 무엇보다 수리·통계학적 분석에 밑바탕을 둔 리스크 관리의 노하우를 쌓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되풀이한다. 『2백여년의 전통을 지닌 영국의 베어링 금융그룹을 하루 아침에 몰락시킨 트레이더인 닉 리슨이 투자에 실패한 이유는 기대 이익만 지나치게 좇다 보니,손해도 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했기 때문』이라며 『기대 수익률을 15% 정도로 잡고,5% 정도는 손해 본다는 여유 있는 투자 자세를 견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비 회교반군,도시 습격 방화/은행7곳·백화점 등 도심곳곳 화재

    ◎경찰과 충돌… 1백명 사망 【마닐라·잠보앙가 AP 로이터 연합】 회교반군으로 추정되는 일단의 무장괴한들이 4일 필리핀 남부의 한 도시를 급습,7개의 은행과 백화점등에 방화하는 한편 보안경찰과의 충돌로 약 1백명이 사망했다고 현지 라디오방송이 보도했다. 목격자들은 약 2백명의 중무장한 테러분자들이 배와 버스를 이용,해상과 육상을 통해 동시에 민다나오섬의 잠보앙가 북쪽 1백㎞ 지점의 해안도시 이필 타운을 공격해 도시 중심가가 불타고 있으며 곳곳에서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민간 마닐라 라디오방송인 DZXL은 이들 무장 괴한들이 회교 반군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소속원들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군복을 입은 이들 반군들이 시내 중심가의 업무용 빌딩과 백화점등에 무차별 방화를 자행했다고 덧붙였다. 한 여성 목격자는 이번 테러 공격으로 1백명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생방송중인 라디오를 통해 말했으며 또 다른 목격자는 시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경찰과 시민등 5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전했다. 한편 필리핀 남부군사령부의 대변인인 프레데스빈도 코바루비아스 소령은 현재까지 무장괴한 2명이 사망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 경기대 이적서클 적발/김일성 찬양서적 탐독·불법시위

    ◎군인 6명 포함 13명 검거 경찰청 보안국은 17일 대학에서 이념서클을 결성,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한 경기도 경제학과 대학원생 송재환(27·가명)씨 등 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방위병 노준창(25·가명)씨 등 군인 6명을 국군기무사령부에 인계했다. 송씨 등은 90년 3월 「경기대학 자주대오 활동가 조직」을 결성,최근까지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찬양하는 내용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각종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김일성주차사상을 강령·규약으로 채택한뒤 북한방송을 녹음해 「김일성 신년사」 등 50여종의 이적 문건을 작성·배포했으며 「주체사상만세」라는 혈서를 써 조직에 총성을 맹세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이적 문건 작성에 사용한 컴퓨터 2대와 디스켓 25장,이념도서 및 유인물 2백18종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러기,체첸대통령궁 폭격/“공습중단” 옐친명령 불구 도심서 격전

    ◎서방,「러의 침공」 첫 비난 【그로즈니 AP AFP 연합】 러시아 공군기들이 5일 옐친 대통령의 공습 중지 명령에도 불구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대한 폭격에 나서는가 하면 야포와 탱크를 동원한 지상전이 계속되고 있어 체첸 사태는 다시 가열되고 있다. 러시아 전투기들과 무장 헬리콥터들은 이날 그로즈니 상공을 계속 맴돌았으며 그로즈니 서부지역 마을에서도 지상전이 치열함을 알리는 강력한 포성과 총성이 계속 들려왔다. 영국 스카이TV방송 기자는 체첸공화국 대통령궁과 의사당이 자리잡고 있는 광장에서 약 1.5㎞ 떨어진 철도역 부근의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고 말했다. 【그로즈니 AFP 연합 특약】 러시아의 전투기 한대가 5일 체첸공화국의 대통령궁에 폭격을 가했다. 러시아 전투기는 이날 하오 3시45분(현지시각)11층 규모의 대통령궁에 1발의 폭탄을 투하,6층에 명중시켰으며 이 공격으로 대통령궁이 불길에 휩싸였다. 【빈·파리·런던 AFP AP 연합】 러시아의 체첸자치공화국 무력침공으로 양측의 민간인및 군인 사상자가 계속 느는 가운데 그동안 이를 러시아의 「국내문제」로 간주,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오던 서유럽국가들은 더 이상의 군사적 행동은 러시아와 서방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협상과 대화로 이 문제를 풀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유럽국가들도 무력충돌이 심화되는 것에 실망과 우려를 표시했다.
  • 해방거리 김활란식 개량한복 “물결”/유행으로 본 세태변화

    ◎6·25땐 밍크코트·귀금속 걸치면 처벌/드럼통펴 만든 첫 국산차 「시발」 등장/군낙하산으로 만든 여성속옷 “불티”/45∼50년대/붕어빵 먹고 걷는 「재건데이트」 유행/정전·단수 빈번… 집마다 양초필수품/60∼70년대/5공시절 9시 TV 「땡전뉴스」에 국민 “신물” 역사란 거창한 사건의 나열만은 아닐 것이다.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란 역사의 책갈피 속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투영일 뿐이다.우리의 현대사도 마찬가지다.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뭉뚱그리면 아마 책에 씌어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엄하게 씌어진 역사책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지 못한다.흔히 흥미거리로만 치부되기 쉬운 과거의 생활상은 이처럼 깊이있는 역사인식을 위해 더없이 훌륭한 보조수단이 된다.광복 50주년을 맞아 그 반세기 동안 생활상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보기로 한다. 1945년8월15일 일왕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터져나온 것이 가수 남인수의 「감격시대」였다.그 시대 한일관계는 곧 「너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셈이었다. 광복은 여성들의 의복에도 왔다.「김활란 스타일」의 개량한복이 거리를 휩쓴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물자가 귀했던 만큼 일본식 「몸뻬」도 사라지지 않았다.「몸뻬」차림의 여자들이 왜색을 일소하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부대 주변을 전전하는 새로운 여성층이 등장했다.이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민족의 체면을 팔아먹는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는 담화를 냈다.이 담화는 「말소」해야 할 여성을 「외인 승용차에 동승하는 여자,껌을 씹으며 거리를 방황하는 여자,괴상한 두발(파마머리)과 화장을 하는 여자」로 예시했다.요즘 이 기준을 적용하면 삼천리 강산에 남아있을 여성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 아래 6·25가 일어나자 「감격시대」를 불렀던 남인수는 다시 「가거라 삼팔선」을 지어야 했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자라」가 전우를 잃은 슬픔과 함께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면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이산가족의 아픔 그 자체였다.그 아픔은 다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이어졌다.또 전국 각지에서 임시수도로 모여든 피란민의 애환을 담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이북 출신의 이른바 「삼팔 따라지」들에게는 더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그 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판에는 사사오입,막걸리 선거,피아노 표가 판을 쳤다.시중에는 또 마카오 복지 등 사치스런 옷감이 범람해 당시 신문에는 「당신의 옷차림은 전시생활에 알맞습니까」라는 글이 실리고 「전시생활 개선법」이 만들어져 밍크목도리와 귀금속을 착용하면 처벌당하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극도의 내핍에 적응했고 이에따라 유엔군으로부터 흘러나온 「유엔잠바」와 「KJP패션」이 가장 유행하는 옷차림이었다.「KJP」란 바로 「구제품」의 약자였다. 1953년경에는 나일론이 들어왔다.값싸고 질긴 나일론은 순식간에 보급됐고 반투명의 흰 나일론으로 된 군용 낙하산 기지가 젊은 여성들의 블라우스와 속옷으로 「화려한 변신」을 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국산자동차 제1호인 「시발」이 나왔다.「시발」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뼈대에 드럼통을 펴서 씌운 차였다.엔진과 변속기 등 중요부품은 물론 미제 지프 것을 썼지만 국산화율은 50%나 됐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3월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당시 야당의 구호는 『썩은 정치 물러가라』.이에 대한 자유당의 반응은 『썩었으면 어떠냐,별 놈 다봤다』라는 한마디로 「막가는」것이었다.이같은 후안무치는 곧 이승만 자신의 외침처럼 「한데 뭉친」 국민들에 의해 4·19로 응징됐다. 4·19는 1년만에 「중단없는 전진」을 내세운 박정희의 5·16으로 물거품이 된다.「혁명정부」는 「재건」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이 때 유행하던 「재건 데이트」는 기껏 붕어빵이나 먹으며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데이트를 의미한다.그 만큼 국민들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출범 2년이 채 못된 1963년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다.최초의 국산차 「시발」이 운명을 다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한창 인기를 끌던 국산차 「시발」은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를 조립한 세단형 「새나라」가 나오자 운명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박정희 정권은 당시 국내사업가도 아닌 재일동포에게 자동차공업을 독점하는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김종필씨가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외유길에 오르며 남긴 「자의반 타의반」은 지금 고사성어의 반열에 들만한 고전이 됐다. 60년대는 아직 전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다.지금은 몇시간만 정전이 되어도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 되지만 당시는 정전이나 단수는 항다반사였다.집집마다 양초가 필수품이었고 밤에만 물이 나오는 고지대 주부들은 물을 받느라고 새벽을 밝혀야 했다. 그런가하면 70년대까지 입석버스에는 문이 두개로 차장도 둘이었다.여차장들은 저임금속에 끊임없이 수입을 가로챈다는 이른바 「삥땅」의 의심을 받으며 버스회사의 남자직원들보터 몸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래서 어느차장의 『청량리 중랑교가요』라는 외침이 『차라리 죽는게 나요』라는 절규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본격화되었다.「새마을노래」를 귀가 따갑게 듣기시작한 것도 이 때다.「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마을의 새마을회관에 높이 내걸린 스피커를 통해 국민들의 새벽잠을 깨웠다.이 노래는 어느 틈엔가 폐차 직전의 낡은 쓰레기차에서나 가끔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국민들을 더욱 옥죄어 나갔다.1975년에는 금지곡이 양산됐다.「아침이슬」은 물론이고 『자 떠나자 고래잡으러…』로 시작하는 「고래사냥」까지 묶였다.박대통령을 「고래」로 착각했던 것일까. 박정권은 마침내 「그 때 그사람」이라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울린 몇발의 총성으로 1979년10월26일 막을 내렸다.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1980년9월1일이었다.TV에서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곧 『전두환대통령께서는…』하는 「땡전뉴스」가 시작된 것도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금지인물」이 된 탤런트도 있었다.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도 이 시기에 나왔다면 금지곡이 되었음은 물론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가 보안사가 운영하는 「서빙고호텔」에서 한동안 숙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군 출신 대통령에 대한 편치 않은 국민감정은,당시 청와대에서는 영화 「사관과 신사」를 「토관과 신토」로,미당 서정주선생을 「말당선생」으로 읽는다는 우스개를 낳았다.연희동에서는 아직도 「신사불이」를 위해 수입식품을 먹지 않는다던가. 전대통령으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노태우대통령과 그 이후 시대는 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현실이다.그러나 이 시대도 불과 얼마뒤면 다시 과거사가 될 것이다.한 시대의 평가는 이처럼 공식적인 역사기록 속에만 남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불 여객기 납치범 진압 “긴박의 순간”

    ◎기내교전→인질구출 「15분 섬광작전」/출입문 폭파… 검은 복면 요원들 진입/조종실앞 수류탄 공방… 납치범 소탕 전광석화같은 진압작전은 불과 10여초,인질들이 모두 기내를 탈출해 상황이 끝날때까지도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GIGN으로 불리는 프랑스 특수진압부대요원들의 에어프랑스여객기 인질구출작전은 범인들이 파리로 가기 위한 연료를 넣으라고 요구한 최후통첩시한인 26일 하오5시(한국시간 27일 상오1시)가 조금 지나 개시됐다.이 시각 발라뒤르 프랑스총리가 최후통첩을 무시한채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최후통첩시간까지 연료를 넣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모두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던 범인들이 마침내 인질 한명을 사살하고 이어 관제탑을 향해 수발의 총격을 가했다. 순간 갑자기 활주로상 비행기주변에는 연막탄이 떨어졌고 곧이어 비행기의 오른쪽 앞과 뒤·중간 출입문쪽에 검은색옷에 복면을 한 50여명의 진압요원들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비행기를 감쌌다.시간은 하오 5시15분. 앞쪽 출입구에는 트랩이 놓여있었는데 요원 6∼7명이 그위를 사뿐이 올라 한사람은 출입문을 열기 위해 앉은 자세로 손을 움직였고 나머지는 총을 비행기안쪽으로 겨눈채 수초동안 긴장된 순간을 보냈다. 이 사이 중간과 뒤쪽의 출입문에도 요원들은 순식간에 비상문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곧이어 짧은 폭발음이 나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요원들이 총격을 가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앞문으로 올라간 요원들도 잽싸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2∼3명은 즉각 안으로 총을 쏘며 뛰어들었다. 인질을 잡고 있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마음놓고 있던 범인들은 급작스런 폭음과 총격에 놀라 진압요원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 순간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한사람이 인질상태로 있다가 범인들이 놀란틈을 이용,창문으로 몸을 날려 활주로바닥에 떨어져 탈출했다.그는 다리와 팔에 골절상을 당했음에도 절뚝거리며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범인가운데 앞문쪽에 서있던 한명이 수류탄을 던졌다.먼저 들어간 요원 한명이 피할 겨를도 없이 폭발과 함께 팔이 잘린채 그자리에 쓰러졌다. 범인들의 완강한 응사에 잠시 멈짓하던 앞쪽의 특수대원들은 조정석의 승무원 인질이 안전하게 탈출한 것을 알고는 조정석부근에 몰려있는 범인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그러나 첫번째 수류탄이 불발이 되고 범인들도 순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요원들은 재차 2·3번째 수류탄을 던졌고,이 수류탄들이 문틈을 통해 조정석안으로 들어가 터지면서 오렌지색 섬광이 번쩍였다.비행기 앞쪽내부가 파괴되면서 이곳에 몰려있던 3명의 범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동시에 중간문으로 올라간 요원들은 승객들을 향해 『업드려!』라고 외치며 앞쪽의 복도중간에 서있던 범인 한명을 향해 응사하는 사이 또다른 요원은 총격속에서도 승객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문을 열고 비상슬라이드를 폈다. 총격속에 몇분이 지나지 않아 승객들은 열어진 총성속에서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고 비행기주위에서 경계중이던 요원들이 이들을 호위했다. ◎인질구출 주역 GIGN 알제리 과격파 회교원리주의 납치범들에게 억류된 에어 프랑스여객기를 기습,인질들을거의 완벽하게 구출해낸 특공대는 프랑스 국방부산하 헌병대의 최정예 특수작전부대. 정식명칭이 GIGN(GROUPED’INTERVENTIONDELAGENDARMERIENATIONALE)으로 알려진 이 특수테러진압부대는 지난 72년 뮌헨올림픽 선수촌학살사건이 있은후 74년 은밀하게 창설됐다.지휘관은 드니 파비에소령.파리근교 사토리에 본부가 있는 GIGN은 작전요원 60명을 포함,87명의 4개 작전단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예작전요원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인질·테러사건들을 분석하고 이러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다. 프랑스가 마지막 순간에 비장의 카드로 활용하고 있는 이 부대는 지금까지 비행기 납치,프랑스 옛식민지의 게릴라전,흉악범및 교도소폭동등 6백50여차례의 특수상황 진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오며 5백20여명의 여객기승객을 구출해냈다.과학적인 작전계획과 엄청난 병참지원으로 아직까지 작전에 실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지구촌 성탄절 표정/정정따라 웃고 울고

    ◎팔 자치권 경축… 순례객 1만명/베들레헴/임시휴전속 음식·땔감 이중고/보스니아 아기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아 성지 베들레헴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특히 올해는 하루도 쉴틈없이 계속된 분쟁으로 인해 아직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지역이 많아 성탄이 주는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고 할수 있다. ▲베들레헴=이스라엘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에 위치한 베들레헴에서는 지난 87년 팔레스타인 유혈봉기 이래 가장 흥겨운 축제분위기가 연출됐다. 올해 이스라엘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낸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기를 흔들고 국가를 연주하며 성탄의 기쁨을 만끽했으며 1만여명의 순례객들이 캐럴을 부르고 폭죽을 터트리는등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들은 또 팔레스타인 국가를 부르며 감격해 했으며 국기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의 초상화를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사라예보=32개월째 내전이 계속돼온 보스니아에서는 성탄 기념행사는 엄두를 내지 못할 형편이지만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의 중재로 임시휴전이 발효돼 그나마 이번 성탄을 총성없이 보내게된 것에 위안을 삼고있다. 그러나 내전에 지친 이들에게는 성탄행사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을 면할 음식과 추위를 막을 땔감의 확보가 절실해 처절감까지 감돌고 있다. 사라예보의 상점과 슈퍼마켓은 텅빈 상태이며 사람들은 총탄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감때문에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 거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크리스마스 트리로 쓸 나무는 이미 장작불로 사라진지 오래다.사라예보 시민들이 성탄절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평화를 위한 기도뿐이다. ▲워싱턴=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24일 국내외 주둔 미군 10명에게 전화를 걸어 성탄절에도 근무에 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감사의 뜻과 성탄 축하인사를 전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북한에 억류중인 미군병사가 조속히 가족의 품에 돌아올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날 저녁 딸 첼시아와 함께 성탄선물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벨파스트=북아일랜드공화군(IRA)과 영국정부간의 평화협정 체결에 따라 25년만에 처음으로 기독교도 지역 아이들과 카톨릭 지역 아이들이 함께 모여 캐럴을 부르며 성탄을 축하했다. 성탄절을 맞아 이곳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 갈등으로 빚어진 분쟁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으로 종식되기를 소망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바티칸 시티=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탄 전야의 자정미사에서 성탄의 기쁜 소식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세계 50개국 2억5천만명이 시청하는 가운데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이날 미사에서 교황은 감옥,수용소,병원등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용기와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고 강론했다. ▲바그다드=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24일 발표한 성탄절 메시지에서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지 않고있는 서방국가들을 비난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한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어린이와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이는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우 데 자네이루=브라질의 리우의 빈민들은 이번 성탄절을 한 사회운동가의 기아퇴치운동으로 좀더 따뜻하게 맞이했다.그동안 많은 봉사활동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데 소우자씨가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6백t의 식량을 마련,5만여 빈민가족에게 성탄선물로 나눠주었다. 혈우병환자로 수혈과정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인 그는 『배고픈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는 것이 노벨상을 타는 것보다 즐겁다』고 말했다. 소우자의 이같은 구호운동은 리우 외에도 브라질 전역 16개 도시로 확산돼 이번 성탄절은 그 어느해보다 훈훈한 인정이 감돌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