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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지 날린다” 골재업자 엽총살해

    골재 공장에서 먼지가 자신의 식당으로 날리는 것에 불만을 품은 60대 식당 주인이 골재공장 임원을 엽총으로 쏴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했다.27일 오전 10시20분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S부동산 사무실에서 주인 이모(62)씨가 엽총으로 S골재공장 이사 김모(36)씨의 목과 가슴을 쏴 살해하고 공장 사장 임모(41)씨의 배를 쏴 중상을 입혔다. 이씨는 이어 자신의 가슴에 엽총 1발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씨는 병원에서 “이씨가 평소 비산먼지를 문제삼아 ‘물 좀 뿌려달라.’고 해서 몇번 뿌려줬는데 이날 사무실로 오라고 해 식당 종업원이 갖다 준 커피를 마시다가 이씨가 갑자기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면서 벽에 세워놓았던 엽총을 꺼내 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식당 문을 열고 식당옆에 2평 정도의 부동산중개업소를 차려 영업을 해왔다. 골재공장은 5년 전부터 운영돼 왔다.아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나주 동박굴재 학살 진실규명”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8일 ‘나주 동박굴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한국전쟁 전후 우리나라 군인·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사건 가운데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는 “그동안 유족과 마을주민 진술로 전해오던 동박굴재 사건을 관련 증언과 자료를 확보해 조사한 결과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인 만큼 피해 회복을 위해 국가가 나설 것을 권고했다. 동박굴재 사건은 1951년 2월26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뒷산 동박굴재에서 나주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인민군 점령기 때 부역했다는 이유로 주민 2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생존자 김모씨는 “사건 당일 새벽 4시쯤 ‘공비가 마을에 숨어들었으니 마을 앞으로 집합하라.’는 방송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였는데 경찰이 무작위로 30여명을 지목해 뒷산으로 끌고 가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이명곤 진실화해위 부대변인은 “정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규명에 나선 거창양민학살사건과 제주4·3사건을 제외하면, 민간인학살 사건 7500여건 가운데 과거사법에 의거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문을 수정, 보완해 빠른 시일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길섶에서] 너무한 엉터리/송한수 출판부 차장

    아무리 경각심을 높이겠다는 뜻이라고 주장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음주단속에 관한 글들을 읽고서다. 어떤 나라에서는, 술 마시고 시동이 꺼진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기만 해도 총살형을 선고 받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온라인으로만 떠도는 게 아니라 활자로도 옮겨졌다. 출처가 한 방송 프로그램이라던가. 말레이시아에선 음주운전을 하다 들키면 곧장 감옥으로 보내진단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멀쩡한 부인까지 함께 처넣었다가 이튿날 훈방한단다.‘아내의 바가지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지 않겠지 해서 짜낸 잔꾀’라는, 그럴듯한 해석까지 양념으로 곁들인다. 터키에서는 음주운전자를 적발한 장소에서 30㎞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걷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관광청이나 대사관은 “그런 말이 있다는데, 웃지도 못할 일”이라고 단칼에 잘랐다. 엉터리가 사실로 굳어져 입에 오르내린다면 너무 허망하다. 퍼다 옮기는 데에도 책임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 송한수 출판부 차장 onekor@seoul.co.kr
  • 20세기이후 순교자 첫 성인 추대 추진

    가톨릭계가 20세기 이후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8일 천주교 인천교구(교구장 최기산 주교)에 따르면 6·25전쟁 때 순교한 평신도 선교사 송해붕(세례자 요한)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 추진위원회’를 구성,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공식 절차에 돌입했다. 천주교에선 선구자적인 삶을 산 이들에게 성인(聖人) 혹은 복자(福者)라는 명예호칭을 준다. 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복’,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이 ‘시성’이라고 한다. 이미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성인과 현재 추진 중인 순교자 123위 외에 한국 교회가 병인박해(1866∼1879) 이후 순교자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것은 처음이다. 인천교구는 송해붕 선생에 관한 기초자료 수집 및 검증을 한 뒤 올해 안에 바티칸 교황청에 보고할 방침이다. 교황청에서 수 년에 걸친 엄밀한 조사를 통과하게 되면 교황의 조서를 통해 복자로 인정된다. 복자로 인정받은 뒤에 확실한 기적이 두 가지 이상 있을 때 성인으로 받들어진다. 1926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송해붕 선생은 44년 덕원신학교에 편입, 사제 공부를 하던 중 광복 이후 신학공부를 포기하고 김포 고촌 은행정 마을로 들어가 야학을 운영하며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마을 주민 밀고로 1950년 10월11일 공산주의자로 몰려 마을 주민들에 의해 총살을 당했으며, 유해는 고촌성당에 안치됐다.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차동엽 신부는 “선생이 남긴 업적이나 순교 사실을 감안하면 성인 반열에 오를 가능성은 90% 이상”이라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사료 부족 탓에 주목받지 못했던 일제강점기나 6·25 때 순교자에 대한 추가 청원의 물꼬가 트여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후세인사형 파문] 후세인 출생부터 사형까지

    [후세인사형 파문] 후세인 출생부터 사형까지

    전쟁광인가, 아랍 민중의 영웅인가. 세상을 떠난 세계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30일 사형이 집행된 사담 후세인도 이중적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복잡한 아랍 정세를 차치하더라도,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 학살을 비롯, 그의 손에 묻은 ‘피’의 양은 아랍권 패권을 손에 쥐려 한 냉혈 독재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저항자’란 뜻을 지닌 사담은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외곽의 오우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됐는데, 양부로부터 구타를 당하며 자랐다는 말이 있다. 그를 길렀다는 외삼촌이 구타를 일삼은 양부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외삼촌은 반(反) 영국 투쟁을 하던 군 장교였다.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1956년 바트당에 입당, 핵심분자로 성장한다. 그해 이라크 국왕 파이살 2세 제거를 노린 불발 쿠데타에 참여했고,3년 뒤 왕정붕괴 후 집권한 압델 카림 카셈 대통령 암살모의에도 개입했다가 시리아·이집트로 도피생활을 했다.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그의 정치적 위상은 자리를 잡는 듯했으나,9개월 뒤 정권이 바뀌면서 1966년까지 수감되기도 했다. 1968년 쿠데타로 바트당이 재집권한 뒤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급속히 부상하던 후세인은 마침내 1979년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의 뒤를 이어 이라크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의 이름을 따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주 이름을 살라후딘주로 개명한 그는 19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을 일으켰다. 이 사이 후세인은 1983년 두자일 마을 주민 148명을 학살했고,1988년엔 쿠르드의 마을에 생화학가스를 살포,5000명을 사망케 했다. 8년 전쟁 이후 후세인은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핵 기술 등 군비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또 전쟁 부채를 벗기 위해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를 받았고,1991년 1월 미군 주도의 걸프전에서 패퇴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폭압정치로 1995년 10월과 2002년 10월 대선에서 100%에 가까운 찬성표를 얻어 권력을 강화했다. 유엔의 경제제재와 미·영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권력을 유지해온 후세인은 결국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예방전쟁’ 명분속에 공격을 받고 몰락했다.2003년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생포된 그는 지난 2004년 미군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돼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주도’ 혐의로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의해 기소됐다. 재판관과 그의 변호사 2명이 피살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법원은 “총살형을 받겠다”고 말했던 후세인에게 교수형을 확정 선고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후세인사형 파문] 교수형 직전 “나를 희생물로 바친다”

    30일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재판정에서도 당당함과 고집스러움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이라크의 대통령”이라며 판사를 준엄하게 꾸짖고 “총살형을 바란다.”고 주문했다. 아랍어로 ‘맞서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중동의 패자로 미국에 대항하다 몰락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남긴 말들이다.●나는 나를 희생물로 바친다. 내 영혼이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면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교수형 직전)●당신들은 이라크 국민이 아닌 점령자의 이름으로 재판하고 있다.(2006년 8월 쿠르드족 학살 첫 재판에서)●나는 35년간 당신들의 지도자였는데, 나가라고 명령하느냐.(2006년 1월29일 재판에서 퇴정명령을 받고)●우리의 적은 미국인이 아니라 이라크를 파괴하고 있는 미국 정부다.(2005년 12월21일 재판에서)●내 이름은 사담 후세인이다. 나는 이라크의 대통령이다. 협상을 하자.(2003년 12월 체포된 뒤)●범죄자인 아들 부시가 인간성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2003년 3월 미국이 침공한 첫 날)●미국은 중동 석유를 손에 쥐기 위해 이라크를 파괴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원유와 경제뿐 아니라 정치까지 손에 넣으려고 한다.(2002년 9월 유엔 총회의 경고 메시지에 대해)●미국은 그동안 자신의 지도자들이 세상에 뿌린 가시를 거두고 있다.(2001년 9ㆍ11테러에 대해)
  • [토요영화]

    ●프리즈 프레임(KBS2 밤 12시25분)‘큐브’(1997)나 ‘메멘토’(2000)처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저예산 스릴러 영화.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누명 때문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디오카메라에 담는 강박증을 지닌 남자의 이야기다. 독특한 설정에다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아가는 퍼즐 스토리가 눈여겨 볼 만하다. 숀 베일(리 에번스)은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또 다시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은 물론, 집에 90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1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일과를 기록한다. 카메라 기록만이 자신의 생존 방법이 되어버린 숀은 범죄의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털도 밀어버린다. 숀은 어느 날 경찰로부터 5년 전 발생한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당시 알리바이를 증명할 테이프가 사라지는데….2004년작.99분. ●피오릴레(EBS 오후 11시) 세계 영화계를 들여다보면 공동 작업을 하는 형제 감독들이 많다.‘바톤핑크’(1991)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코언 형제,‘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형제,‘아메리칸 파이’(1999)의 웨이츠 형제 등이 유명하다.‘피오릴레’를 연출한 비토리오(1929∼), 파올로(1931∼) 타비아니 형제는 이들보다 훨씬 앞선 세대로 이탈리아 뉴시네마의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출발한 이들은 1962년 ‘불타는 남자’로 장편영화 신고식을 치른다.‘파드레 파드로네’(1977)로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비평가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세계 거장 반열에 올랐다. 마술적이고 신화적인 관점을 네오리얼리즘과 결합시키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화면을 연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네데티 집안의 어린 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베네데티 가문에 얽힌 전설을 듣는다. 황금에 얽힌 비극은 1797년 시작된다. 나폴레옹 군대에서 금화를 운반하던 장(마이클 바르탄)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 농부의 딸인 엘리자베타(갈라테아 란치)와 사랑에 빠지지만 엘리자베타의 오빠가 금화상자를 훔쳐 달아나고 장은 총살당한다. 장의 아이를 임신한 엘리자베타는 오빠가 범인임을 모른 채 복수를 맹세하지만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엘리자베타의 맹세는 10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뒤 훔친 황금으로 부자가 된 베네데티 가문에서 실현되는데….1993년작.117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로버트 김 희망메시지] “대한민국 맞습니까”

    [로버트 김 희망메시지] “대한민국 맞습니까”

    요즈음 이곳에서 “대한민국 맞습니까.”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왜 이런 말을 듣게 되는가도 알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매우 우려됩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교포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 몇 자 적어봅니다. 대한민국은 그냥 생긴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선배들이 피땀 흘려 이룩하고, 목숨 바쳐 지켜 온 나라입니다. 그리고 유엔 회원국 16개국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파병해 남한의 적화를 막아 주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희생이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북한 형제자매들처럼 헐벗고 굶주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총살 당했거나 정치수용소 신세를 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고귀한 희생하에 지켜져 왔습니다. 그런데 남한정부는 이러한 희생을 유발한 그들과 더 가까이 하려고 현금과 물자를 조건 없이 갖다 주기만 하는 것 같아 국민의 세금을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북한은 남한이 그들의 돈주머니 관리자인 양 옷을 보내라, 구두를 보내라, 비료를 보내라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있으니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갑니다. 이뿐 아닙니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 무역을 하기 위해 철도를 보수하는데 왜 남한이 세금을 써가면서 투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북한은 지금 117만명의 육해공군을 전진배치해서 남한을 침공하기 위해 항시 전쟁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북한 전체 경제의 70%를 군사비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한은 반공법을 폐지하자고 하니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들은 노동당 규약에 아직도 한반도 공산화를 그들의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한 번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남한을 주적이라고 하고 있는데 남한은 북한이 더 이상 주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남한의 젊은이들이 몇 년씩 귀한 시간을 완전히 희생해 가면서 조국을 위해 군복무를 하는데 주적 없는 군복무가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슨 정신무장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해보는 것입니까. 또 납북자를 납북자라고 부르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니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말까지 바꿔야 합니까. 최근 서울에서 막을 내린 ‘요덕 스토리’ 연극을 통해서 북한의 인권 참상을 고발하려는 문화행사를 정부가 저지하려는 것도 이상합니다. 금강산이 좋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나왔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조물주가 공짜로 준 금강산을 상품화해서 돈을 벌고 있으니 이 또한 이해가 안 갑니다. 나아가 남한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으로 입장료를 대신 내 주고 있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입장료 아닙니까. 이곳에서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세계가 보는 관점을 여과 없이 듣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탈북자들을 미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미 의회가 가결했다니 무슨 창피입니까. 그리고 유엔에서 북한 인권을 논하자고 하는데 우리가 앞장서서 주도해도 힘들 터인데 기권했다니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북한에서 위폐가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우리나라는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증거를 대라고 하니 남한이 북한의 보호자가 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맞습니까.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반미를 부르짖으면서도 동경하는 나라는 미국이라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수를 감금하고 농성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장래를 맡겨야 한다니 두려워집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않겠지만 대한민국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국에서 희망찬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 연해주 ‘4월참변’ 한·러 공동 재조명

    연해주 ‘4월참변’ 한·러 공동 재조명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위한 양국 합동추모제가 최초로 열린다.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우수리스크 민족문화자치회, 우수리스크 시정부 등은 1920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있었던 ‘4월 참변’ 희생자들을 위한 한·러 합동추모제와 학술대회를 3∼6일 나흘간 개최한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이번 행사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면서 “우리 정부에 의한 ‘4월 참변’ 희생자 추모식은 있었지만 러시아와 함께 하는 행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4월 참변’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군 7만여명이 1920년 4월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연해주지역 러시아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신한촌(新韓村)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두 나라 투사들과 민간인을 학살·체포하고 마을을 불지른 사건이다. 일제는 시베리아 출정군이 러시아와 조선독립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연해주지역 민족지도자들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는 등 한인·러시아인 5000여명이 희생됐다. 합동추모식은 씻김굿 명인인 대불대 박병천(인간문화재 72호) 석좌교수의 진혼제를 비롯해 러시아군 오케스트라, 러시아 라도가 무용단, 고려인 아리랑 무용단의 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추모사진전과 러시아혁명,4월 참변, 한국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두 나라 학자들의 학술회의도 열린다. 한국측에서는 반 교수를 비롯해 국가보훈처 황원채 공적심사과장, 러시아측에서는 우수리스크 부시장과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 엔 아 부체닌 교수, 한인이민사 권위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민족고고학연구소 알렉산더 페트로프 박사 등이 참가한다. 반 교수는 “일제에 대항해 한국과 러시아가 함께 투쟁했던 역사적 경험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는 연해주지역 고려인들에 대한 러시아 사회 내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獨 “AI감염고양이 인간전염 가능”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전세계로 빠르게 퍼지는 가운데 미국 대륙에 상륙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왔다. 독일에선 포유류도 AI 바이러스에 노출되면서 애완동물 관리에 비상이 걸리는 등 유럽 전체가 AI 공포에 휩싸였다.●獨 “애완동물 떠돌면 총살” 특히 독일 당국은 2일 북부 뤼겐섬의 고양이에서 검출된 AI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될 수 있는 강력한 성질의 H5N1 바이러스라고 발표했다. 프리드리히-뢰플러 수의학 연구소는 이 H5N1 바이러스는 아시아에서 인간에게 전염돼 사망자를 발생시킨 강력한 AI 바이러스 변종이라고 밝혔다.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이날 독일 빌트지와의 인터뷰에서 “AI 인간 감염자가 나온다면 월드컵 대회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AI가 월드컵을 망칠 수도 있다.”며 독일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전날 H5N1 바이러스가 검출된 독일 뤼겐섬의 고양이가 이 바이러스에 걸린 새를 먹었다는 소식에, 지금까지 AI가 발견된 독일의 5개주는 고양이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또 목줄을 한 개만 돌아다닐 수 있다. 만약 개와 고양이가 떠돌아다닐 경우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경고도 함께 내려졌다. 애완동물을 통해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美보건장관, 美 전파 가능성 언급 마이클 리빗 미국 보건장관은 1일(현지시간)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미국 전파 가능성과 관련,“AI 바이러스가 언제쯤 위협을 줄지는 잘 모르나 이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밝혔다.그는 “치명적인 H5N1형 바이러스 감염만으론 비상 상황이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전될 정도로 강한 전염성을 가질 경우는 긴급 상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이라크·印 사망자 1명씩 늘어 H5N1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곧 100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AI 감염자는 7개국에서 174명이며 사망자는 94명이다.1주일 전보다 인도네시아와 이라크에서 각각 1명씩 사망자가 늘었다. 한편 AI에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건강한 연소자’라고 호주 과학자가 경고했다. 시드니 웨스트미드 밀레니엄 의학연구소는 아시아 사례를 분석한 결과 “15세 이하 연소자의 AI 사망률은 90%였다.”고 밝혔다. 젊고 건강한 사람은 강력한 면역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AI에 감염되면 폐나 다른 기관이 더 빨리 손상될 수 있다고 한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학살 도시’서 ‘화해 도시’로

    세르비아인 보스코 브루킥과 보스니아인 아드미라 이스믹은 연인이었다.1993년 5월.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사라예보의 한 거리에서 두 연인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총살됐다.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사랑은 허용되지 않았다. 연인의 사랑은 로이터통신 쿠르트 쇼르크(2000년 시에라리온 내전 취재 중 사망)기자를 통해 전 세계에 타전돼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보스니아 내전(1992∼95년)당시 세르비아는 무슬림인 보스니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여,20만여명을 학살했다. 최근 학살 주범들이 연이어 체포되어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영국 BBC는 28일(현지시간) ‘죽음의 도시’ 사라예보가 발칸반도의 화해와 공존의 다인종 수도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살을 목격한 젊은 전쟁세대들이 분노와 적대, 인종과 종교를 뛰어넘은 사랑을 꽃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8개월된 아기를 둔 무슬림인 알딘 아르나토빅과 그리스정교회 신자 몬테네그로인 마리아 부부 이야기를 전했다. 둘다 기자인 알딘과 마리아는 2000년 보스니아 선거를 취재하던 중 만났다. 내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났지만 당시 사라예보에서 상생과 살육은 진행형이었다. 알딘은 마리아를 만난 첫날 저녁 청혼했고 사라예보와 몬테네그로를 오가며 사랑을 키웠다. 아들 이름은 ‘페드야’. 이름으로는 보스니아인지, 세르비아인지를 알수 없다. 알딘 부부는 내전 당시 군인들이 ‘이름’만으로 인종을 구별, 학살했던 악몽을 갖고 있다. 마리아의 조국인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함께 사라예보에서 남편과 같은 보스니아 무슬림 1만 1000명을 학살했다. 2003년 마샤와 결혼한 카짐 데르비세빅도 인종과 종교가 다른 부부다. 카짐은 무슬림, 마샤는 가톨릭이다. 둘은 한 파티에서 만난 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사랑을 키워나갔다.BBC는 2006년 사라예보의 연인들은 더 이상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순교자나 반역자로 낙인찍히지 않게 됐다고 전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강화·아산등서도 6·25때 양민학살

    6·25전쟁 중 거창지역 외에 강화·아산 등지에서도 군·경찰·사설단체 등에 의해 양민 520여명이 집단 학살된 사실이 정부 공식문건에 의해 확인됐다. 국가기록원은 26일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등 123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요 기록물 보존실태 조사에서 경찰·검찰 등 보고계통을 통해 법무부장관과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양민학살사건이 다수 발견돼 향후 과거사 규명에 새로운 전기가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거창외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보면 1951년 5월12일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서 60여명이 총살됐다. 같은 해 7월21일에는 충남 아산군에서 좌익분자와 그 가족 등 183명 전원이 총살돼 부근 금광에 버려졌다. 또 같은 해 1월엔 강화도 교동도 주민 212명이 부역자라는 이유로 총살됐고, 같은 해 6월16일에는 전남 해남경찰서 형사가 부역자 19명을 살해한 기록도 나왔다.같은 해 10월9일 충남 서산군 일대에서 경찰이 28명을 총살했고 10월20일에는 전남 경찰 소속 경찰관이 부역 자수자 25명을 총검으로 살해한 기록도 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후세인 “교수형보다 총살형 원해”

    “나는 군 통수권자다. 군인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맞고 싶다.” 인권유린 및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최근 변호인과 만난 자리에서 만약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교수형보다는 총살형을 원한다는 심경을 밝혔다고 워싱턴 타임스가 3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후세인은 지난달 7일 사형 선고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책을 묻는 변호인단의 이심 가자위 변호사에게 “이라크의 대통령이자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교수대보다는 군인들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드 법원 지하의 피고인 대기실에서 마련된 접견에는 미국 법무장관 출신인 램지 클라크 변호사도 동석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伊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세계

    1977년 ‘빠드레 빠드로네’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뉴시네마의 거장 타비아니 형제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은 19일부터 형제 감독의 대표작 ‘로렌조의 밤’(1982년)과 ‘피오릴레’(1993년) 등 2편을 상영한다. 이번 작품들에도 형제의 주특기인 탁월한 서정성, 팬터지를 섞어 현실을 역설하는 서사기법 등이 진하게 묻어 있다. ‘로렌조의 밤’은 삭막하고 잔인한 전쟁을 어린 소녀의 눈을 빌려 다분히 환상적인 터치로 그려낸 작품.1944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 마르티노를 지배하던 독일군은 철수를 계획하고 주민학살에 나선다. 그러나 독일군의 속셈을 알 길 없는 순진한 마을사람들은 피란을 가야할지 마을에 머물러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한다. 여섯살짜리 주인공 체칠리아는 엄마와 피란행렬에 끼어들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총성이 계속되는데도 체칠리아의 눈을 통해 증언된 영화 속 풍경은 공포로 일관하지만은 않는다. 노총각과 야릇한 눈길을 섞는 엄마, 신분차이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늙은 농부와 귀부인의 때늦은 만남 등으로 스크린은 점점 체온을 보태간다.1982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로렌조의 밤’이 포연 속에서도 식지 않는 인간애를 동화풍으로 그렸다면 ‘피오릴레’에는 비극적 전설을 소재로 한, 한층 강렬한 레서피가 동원됐다.18세기 나폴레옹 군대의 금화상자를 운반하던 프랑스 군인은 토스카나의 작은 시골마을을 지나다 농부의 딸과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금화상자를 잃어버린 군인은 총살당하고, 그의 유복자를 낳은 여자의 집안은 대대로 저주를 받는다. 감독의 자의식에 지나치게 충실한 탓에 감상이 편치 않으리란 유럽영화의 편견을 깬다. 이탈리아의 수려한 자연풍광을 담요처럼 깔고, 전설과 팬터지의 아련한 흥취를 두루 맛볼 수 있는 작품세계에는 장인정신이 묻어난다.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탈북자 증언으로 본 북한인권

    ‘남한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지원미는 인민들한테는 돌아오지 않는다.’ ‘중국 건너갔다 잡혀온 아주머니를 몽둥이가 세 토막 날 정도로 힘껏 내리쳤다.’ ‘총살 전에 누구누구, 죄명 뭐, 군중심판한다는 포스터가 붙는다.’ 국가인권위가 동국대 북한학연구소에 용역 의뢰한 보고서 ‘탈북자 증언을 통해서 본 북한인권 실태조사’의 내용이다. 지난해 10월∼올해 1월 탈북자 50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탈북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로 북한의 참담한 인권현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먹는 문제’였다.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을 직접 본 사람은 응답자의 64%에 이르고 소문을 들은 이도 26%다. 의료 서비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북한은 ‘무상의료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경제난으로 일반인들은 혜택을 보고 있지 못했다. 환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58%가 ‘시장에서 약을 사서 먹는다.’고 답한 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8%에 그쳤다. 북한 인권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공개처형과 관련해서는 설문자의 75%가 실제로 목격했으며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도 17%나 됐다. 탈북자들이 강제송환되는 무산보위보와 청진도집결소 인권 유린 상황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난해 10월 입국한 A(55·여·유치원교사)씨는 청진도집결소에 대해 “애기를 낳으면 애기 코를 땅에 닿게끔 엎어놓아요. 이렇게 엎어놓으면 애기가 울잖아요. 살겠다고, 버둥거리면서 울고 정말 그럴 때면 엄마는 애기가 죽기를 기다리는 게…”라고 증언했다. 또 A씨는 “병원에 약이 없어 낙태를 시키기 위해 배를 차서 아기를 조산 또는 유산시킨다.”고 했다. 한편 인권위는 용역보고서를 제출받고도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이를 두고 ‘지나치게 북한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자 인권위는 “내부 참고자료로 의뢰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특종] 나는 모국의 스파이였다

    [특종] 나는 모국의 스파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개인 임업장을 사재를 털어 꾸며놓은 전 내무부장관(제6대) 장석윤(張錫潤)(65)옹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미군에 협조한 국제「스파이」였다. 그는 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을 어기고 김종원(전 치안국장)씨의 기용을 거부한 경무대의 반항투사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10만 공무원 대신 10만 그루의 나무를 호령하는 나무장관이 되었다. 동남아 휩쓸던 청년 시절 이젠 10만 그루 나무 호령(號令)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마산리 15번지 3만 5천 평의 땅에 1백 50종의 나무를 질서정연하게 심어놓고 하루 4시간씩 잠자면서 10만 그루의 각종 나무를 돌보는 장석윤(張錫潤)옹-. 그는 횡성군 둔내면에서 태어나 서울 제일고보(경기고교 전신)를 졸업한 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테네시」주「벤트·빌드」대학을 졸업했다. 유색인종 박해 속에서 갖은 고생을 겪으며 장옹은 이승만(李承晩)박사와 함께 교민생활 지도를 해오던 중 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당시 미국대통령「루스벨트」씨의 부인과 친교가 두터웠던 이박사의 소개로 비밀히「루스벨트」대통령이 조직한 COI(OSS 및 CIA 전신) 제1기생으로 조직에 가담, 소정의 교육(스파이 교육)을 마친 장옹은 한국인으로서는 단신 미국 21명과 함께「파키스탄」의「카라치」시에 공수되어 첩보 활동에 나섰다. 2차대전 때 미의 COI 대원 「버마」전투에 참가, 활약해 「히말라야」산맥을 낀「버마」전투에 참여한 장옹은 일본군 전선에 잠입, 정보를 수집하여 무전으로 미「셰넬」장군에게 타전, 작전계획을 세우도록 했으며 또한 일본군 포로 신문, 포로수용소 안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007을 방불케 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사선을 넘나드는 활동 속에서도 장옹은 이박사 김구(金九)주석 간의 비밀문서 연락을 맡아「티베트」고원지대를 넘어 중경(重京)을 넘나들었으며 때에 따라 미군 장교와 일본군 장교 및 외교관 신분을 마음대로 붙이고 활동했다. 45년 조국해방과 더불어「하지」장군과 함께 귀국한 장옹- 군정 당시 좌익계열의 만행을 낱낱이 파헤쳐 치안을 유지하도록「하지」장군에게 건의해 왔으며 이박사를 측근에서 도왔다. 6·25동란이 일기 며칠 전 1950년 6월 18일 당시 내무부장관 백성욱(白性郁)씨의 권유로 치안국장에 기용된 장옹은 서울이 괴뢰들의 발굽에 짓밟히던 날 노동자로 변장, 가족을 서울에 둔 채 홀로 적정을 살피고 한강을 넘어 아군 진지로 탈출했으며 대전에 도착한 장옹은 일선 경찰 정보망을 통해 괴뢰군의 선발대 동태를 파악, 육군에 정보를 제공, 큰 공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때의「에피소드」로 당시 괴뢰군이 천안, 온양을 거쳐 공주 방면으로 대전을 침공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치안국장 장옹은 그 사실을 국방부장관에게 연락했으나 국방부장관은 허위정보라고 대발노발, 정보제공자인 온양경찰서장을 총살하겠다고 으르렁거리다가 후에 정확한 정보임을 확인한 장관이 사과하기도 했다는 것. 치안국장 재직 30일만에 사표를 낸 후 52년 1월 내무부장관에 발탁된 장옹은 국군이 당시 총부처장의「지프」와「프란체스카」여사의「지프」를 강제징발하였음을 폭로했고 국군 장병들의 가슴에 명찰을 달도록 권유, 실행케 했음을 회고하면서 부산 정치파동 때 장총리(장면(張勉)박사)의 사표를 직접 받아 오기도 했다는 장옹의 회고담. 또한 지방자치제를 실행했으며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하는 산파 역할도 맡아 했다고 밝혔다. 특히 내무부장관 때 거창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온 김종원(金宗元)씨의 경무관 기용을 이박사로부터 세 번이나 명을 받은 장옹은 매번 공무원 자격문제를 들고 거절했었다는 것. 국민을 과신한다고 이박사의 약점을 밝히는 장옹은 그래도 이박사는 부모와 같이 섬겼다면서 미국에서의 인연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뒤 국도신문(國都新聞)사 사장을 역임했고 3대 국회의원으로 향리 횡성군에서 당선된 무소속 민의원으로서 자유당의 만행을 보면서도 이박사와의 인간관계로 말 못하는 벙어리 국회의원으로 생애에 오명을 남겼다는 장옹…. 그래서 4대에는 자유당 공천 국회의원으로 역시 벙어리 의원을 지냈다는 장옹은 3년 뒤쯤 나올 자서전을 통해 모든 것을 해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4·19 의거 후 고향에 내려온 장옹은 현재의 마산리 15번지 3만 5천 평을 구입하여 자신이 밥을 지어먹고 빨래를 하면서 나무를 심기 시작, 태기산(泰岐山)의 정목 등 1백 50종 10만 그루의 나무를 가꾸며 살아 가고 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나무와 씨름하면서 찾아드는 농민들에게 일일이 접목, 전지 방법을 비롯 이식재배, 시비방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각종 수목이 자연스럽게 꽉 들어찬 장옹의 임업장에는 멀리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의 관광객들이 찾아들 뿐 아니라 인근 각급 학교 어린이들의 소풍터로 알려졌고 심지어 미군들까지 찾아와 놀다가는데 하루 보통 1백 여명의 구경꾼이 오고 많은 학생들이 실습을 위해 찾아들고 있다. 잣나무 4년 만에 결실케 산림 물려줄 젊은이 찾아 임업과 목축업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고된 줄을 모르고 일한다는 장옹은 지난 해 목초로는 최고의 영양가를 지녔다는「코리언·레이스·패스자」라는 풀을 발견, 재배하고 있다. 이 풀은 30년 전 미국 선교사가 개성 지방에서 채취하여 본국에 보냄으로써 영양가가 제일 많은 목초로 밝혀져 현재 미국에서는 목초지의 20%가 이 풀을 재배하고 있으며 자꾸 번지고 있다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아직 풀 이름조차 없다는 이야기. 장옹은 앞으로 임업장에 5백종의 수목을 더 심고 농림학원을 세워 자신이 직접 후배 양성을 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15~2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 잣나무들이 장옹의 임업장에서는 불과 4년 만에 잣이 달리도록 비배관리 및 이식재배 기술을 보여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으며 넓은 초원과 하늘이 안보이는 숲길은 관객들의 환성을 사고 있다. 임업장은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진 젊은이에게 넘겨주는 것이 소망이라는 장옹의 가족으로는 현재 서울에 부인과 딸 셋이 있다. <원주 = 정준교(鄭俊敎) 기자> [ 선데이서울 68년 11/3 제1권 제7호 ]
  • 79년 10월 7일 파리 외곽 숲에서 총살

    다음은 국정원 진실위가 발표한 김형욱 실종사건의 중간조사 결과를 기초로 구성해 본 내용이다. 1979년 9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프랑스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이던 이상열 공사에게 김 전 부장 살해를 지시했다. 이 공사는 9월 말쯤 파리에 머물고 있던 중정 연수생 가운데 신현진·이만수(가명)를 적임자로 선택했다. 이 공사는 신현진에게 “중정부장 출신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국가 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면서 “김 부장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운을 뗐다. 신현진은 “목표가 김형욱이죠.”라고 대답했다. 중정부장 출신이 개인 영달을 위해 국가 기밀을 폭로한다는 얘기에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된 그는 김 전 부장을 살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0월1일, 이 공사는 비밀리에 귀국해 김 부장을 만나 김형욱을 살해할 도구로 쓰기 위해 소련제 소음권총과 독침을 넘겨받았다. 신현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살해 음모에 가담할 것을 약속받았다. 살해 당일인 1979년 10월7일. 이 공사는 김 전 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카지노 자금을 빌려달라는 전화였다. 이 공사는 급히 신현진을 불러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을 오라고 했으니 오늘 처치해야 한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신현진은 즉시 이만수와 3국인 친구 2명을 샹젤리제 거리로 불렀다. 이들은 이 공사가 몰고 나온 관용차 ‘푸조 604’안에서 살해계획을 확인한 뒤 이만수는 미화 1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개선문 근처 호텔 바로, 나머지 4명은 김형욱을 만나러 리도극장으로 향했다. 이 공사는 나와 있던 김 전 부장에게 3국인 2명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속이고 김 전 부장을 차에 태운 뒤 자리를 떴다. 차량이 어두워진 파리시내를 뚫고 외곽순환도로를 건너던 찰나, 뒷좌석에 앉아 있던 3국인 중 한명이 김 전 부장의 머리를 수차례 가격했고, 김 전 부장은 정신을 잃었다. 어느새 승용차는 인적이 드문 작은 숲속에 도착했다. 신현진은 차에서 대기하고,3국인 2명은 실신한 김 전 부장을 끌고 도로에서 50m정도 떨어진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김 전 부장을 내려놓은 뒤 방아쇠를 7번 당겼다. 이들은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 나왔다. 이들은 김 전 부장의 바바리코트에 여권과 지갑, 시계를 넣은 뒤 벨트로 묶어 차에서 대기 중이던 신현진에게 건넸다. 사흘 후인 10월10일, 귀국한 신현진이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한테 들으십시오.”라는 이 공사의 보고문을 김 부장에게 보여주자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김 부장은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씩이 든 봉투를 신현진의 두 손에 쥐어 주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형, 사촌형을 용서합시다”

    “계엄군이었던 사촌형이나 시민군이었던 친형 모두 시대가 낳은 희생자입니다.” 채수광(46)씨는 80년 5·18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친형 수길(사망 당시 23세)씨와 당시 계엄군으로 활동한 고종사촌형 김모(48)씨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수길씨가 사촌형 김모씨 부대원에 의해 즉결처분된 불행한 과거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광씨의 형 수길씨는 80년 5월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행방불명됐다. 수광씨는 형이 계엄군에 의해 사망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20여년간 형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던중 5·18 당시 11공수여단 하사관으로 광주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고종사촌형 김모씨가 2000년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하면서 5·18유족회원들에게 털어놓은 ‘기막힌 사연’을 접해야 했다. 당시 11공수여단 산하 부대가 주남마을에서 시민군이 타고 있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생존했다. 부대원들은 생존자 가운데 여성 1명은 헬기로 후송하고,2명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 총살하고 주민등록증을 챙겨왔다. 부대원들이 가지고 온 주민등록증을 본 김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촌형 수길씨가 부대원들의 손에 즉결처분된 사실을 안 것이었다. 이같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5·18유족회 관계자에게서 접한 수광씨는 2002년 국립 5·18묘지에 가매장돼 있던 11구의 시신 가운데 DNA 대조를 통해 형의 시신을 찾았다. 현재 사촌형 김씨는 수광씨와 20년간 연락을 끊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혼자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광씨는 17일 “당시 계엄군에 의해 총살당할 때 형의 처절한 몸부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한때는 사촌형을 증오했으나, 이젠 용서하려고 한다.”고 눈물을 훔쳤다. 광주 연합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이라크 또 폭탄테러

    |바그다드 연합|바그다드 남부에 위치한 수와이라의 한 시장에서 자살폭탄차량 테러가 발생, 적어도 22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경찰이 6일 밝혔다. 경찰은 이른바 ‘죽음의 삼각지대’에 속한 수와이라에서 자살폭탄차량이 폭발했다면서 사상자는 모두 이라크인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라크 주둔 미군측도 수와이라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확인했으나 이번 폭발이 자살공격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또 이날 바그다드 교외에서 총살된 14구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라크 방위군 관계자는 “눈이 가려진 시신 가운데 일부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며 저항세력이 처형하는 방식으로 살해한 것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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