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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경남 산청 금서면 가현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경남 산청 금서면 가현마을

    두어 차례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처음엔 ‘이런 시골 외딴 도로변에 뜬금없이 큰 건물’쯤으로 치부해 버렸고, 건물의 위치를 안 다음엔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요량으로 일부러 들른 게 전부였다.4년 전 준공된 이 추모공원이 ‘1951년 2월7일, 육군 11사단9연대3대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산청군 금서면 가현과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주민 400여명의 영령을 모신 합동묘역’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건 안내소에 비치된 팸플릿 한 장 때문이었다. ●폐허의 땅에 3년 전부터 하나 둘 민가 늘어 음력으로 정월 초이틀, 그러니까 새해의 흥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 지리산 고동재를 넘어 가현으로 들어온 국군 병력은 주민과 가축을 강제로 내몰고 가옥을 불살랐다. 동네 앞 논에 모인 주민들에게는 무차별적인 총살을 감행했고, 이후 인근 마을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 시체 위에다 불을 지른 건 물론이요, 총검으로 확인 사살까지 했다. ‘견벽청야’라는 작전명 하에 이뤄진 이 사건으로 빨치산의 끄나풀로 몰린 인근 주민 400여 명(유족회 주장 700여명), 더 나아가 거창군 신원면 주민 700여명까지 제 나라 군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불과 며칠 사이 1000명이 훌쩍 넘는 지리산 주민들이 학살당한 셈인데, 이 잔인한 사건의 첫 희생지가 산청군 금서면 가재마을, 지금은 ‘아름다운 언덕’이란 뜻으로 이름이 바뀐 가현마을이다. 마을 언덕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6·25전쟁의 끔찍한 기억과 산사태 등으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마을에 민가가 늘어난 건 겨우 3년 전쯤. 그때까지만 해도 가구 수라곤 서너 집이 전부였다. 대전에서 서점을 하다 고향에 돌아온 형남열(50)씨의 설명에 의하면 가현은 산중 분지다. 지리산 고산습지 왕등재(1048m)와 왕산(925m)이 지척이고, 서쪽 능선 너머엔 오지마을로 유명한 ‘오봉’이 있다. 일부러 오지를 찾아온 외지인들을 위해 그곳 오봉엔 민박집이 생겼지만 이곳 가현에는 정년퇴직 후 노년을 보내려는 이들이 속속 정착해 본래 주민보다 그 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다행히 주민간 유대 관계가 좋아 며칠 전엔 1박 2일로 천왕봉 등정까지 하고 왔단다. ●천궁·당귀 등 넘쳐나는 약초가 농가 소득 이장을 맡고 있는 형남열 씨는 군청과 면에서 실시한 교육을 꼬박꼬박 참석하며 받은 덕에 오미자, 천궁, 당귀, 시호 등 약초 재배에 재미를 붙였다. 실패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 산청군 한방약초축제 때 내놓을 수준이 되었다. 부인 허승주(52)씨는 단오 때 채취한 쑥과 솔잎으로 만든 효소를 더 치켜세운다. 인터넷도 올해 겨우 개통됐고 아직 쇼핑몰 사이트도 없지만 약초 재배에 더 주력해 고향에 멋진 농장을 여는 것이 꿈이다. 더 나아가 마을을 약초 동산으로 가꿀 계획이라고. “왕산에서 발원한 물을 식수로 쓰고 있는데 비누로 머리를 감아도 매끌매끌해요. 해발 약 400m에다 공해가 없으니 된장 발효도 잘 되고, 보시다시피 사방이 곧 풍경화나 마찬가지잖아요.” 강원도 친정행을 내심 바랐던 부인 허씨도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온 걸 후회하지 않는 눈치다.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으니 그이의 이장직은 당분간 유지될 터, 이 부부의 열정대로 마을 곳곳에 질 좋은 약초가 넘쳐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글 사진 황소영 자유기고가 ●가는 길 경남 산청군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을 이용한다. 아래 지방은 남원이나 진주, 부산 등을 거쳐 산청으로 갈 수 있다. 군내버스가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오가지만 가현마을까지 가는 버스는 없다. 자가용의 경우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생초 나들목으로 나와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와 엄천강변을 따른다. 중간중간 추모공원 이정표가 보인다. 추모공원 지나 15번군도 마지막 지점에 시멘트길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은 오봉마을로, 왼쪽은 가현마을로 각각 이어진다.
  • 한국전때 부당 즉결처분 배상 판결

    6·25전쟁 때 상관에게 억울하게 사살된 육군장교의 유족들에게 국가가 손해를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58년 만에 나왔다. 대법원 민사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1950년 전쟁 당시 상관에게 부당하게 즉결처분된 허모 육군 대위의 부인과 아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국가가)1억 7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1950년 8월쯤 모사단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허 대위는 당시 연대장인 김모씨의 즉결처분으로 총살됐다. 김 연대장은 허 대위가 군사재판을 거쳐 적법하게 사형당한 것처럼 고등군법회의 판결문 등을 위조했다. 하지만 유족이 낸 재심을 통해 2003년 12월 허 대위의 사망이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유족들은 재심이 끝난 뒤 2005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국가는 손해배상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배상을 거부해 왔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채무자(국가)가 시효 완성 전에 채권자(허 대위 유족)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곤란하게 했거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권리행사에 장애사유가 있는 경우 등에서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할 수 없다.”면서 “국가의 주장이 이유 없다.”고 원심대로 판단했다. 앞서 1·2심 재판부는 “허씨가 숨진 1950년 8월부터 10년이 지난 1960년 8월 손해배상 소송의 소멸시효는 완성됐지만, 유족들은 2003년 12월 법원의 재심판결이 선고된 때 비로소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됐으므로 신의칙상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부인에게 1억원, 아들에게 70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선고했다.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원정화는 누구… 절도 무마하려 공작원 활동

    여간첩 원정화는 북한 내 범죄 사실이 적발된 뒤 이를 무마하는 차원에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으로 포섭돼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시 탈북자 신분으로 위장해 남한에 온 원정화의 의붓아버지 김모(63·구속)씨는 북한 군에서 고위직을 지냈고, 특히 김씨의 누나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는 사돈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정화는 고등국민학교 5학년 때인 1989년부터 3년 동안 특수부대에서 남파공작 훈련을 받다가 부상으로 제대했다. 노동당 중앙당이 출신 성분이 좋은 원정화를 엘리트 간첩으로 키우려고 발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후 6년 동안 마땅한 일거리가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등 절도를 일삼다가 교화소(교도소)를 전전했다.1998년 북한 내에서는 1㎏만 빼돌려도 총살형에 처해질 수 있는 아연을 5t이나 훔치기도 했다. 원정화는 친척의 도움으로 아연 절도 사건 등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에 연결됐다. 원정화는 공작원 훈련시 대남 교육도 받았으며, 당시 교관이 1984년 군복무 중 월북한 이모씨로 추정된다고 검찰 등은 덧붙였다. 하지만 원정화는 주요 지령의 실행에 실패하자 북에서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집에 자물쇠 4개를 설치한 채 생활하고 3년 전부터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간첩 연루 장교 총살시켜라” 질타 이어져

    ‘원정화 여간첩 사건’에 현역 장교들이 연루됐다는 소식에 네티즌들이 “군대가 제대로 썩었다.”며 군 기강해이를 질타하고 나섰다. 27일 합동수사본부 발표에 따르면 직파간첩 원정화(34·여)는 군사 기밀을 빼내 북측에 넘긴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됐다.이 과정에서 현역 장교 3∼4명이 사건에 연루돼 큰 충격을 주고 있다.특히 육군 소속 황모(27) 대위는 원정화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군 안보강사로 활동 중인 탈북자 명단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뉴스 댓글 및 각 포털게시판에 ‘군 기강 해이’를 지적하는 글을 잇따라 올리며 비난하고 있다. 네티즌 ‘kill_dochin’은 “안보의식이 실종된 ‘군바리’들의 잘못”이라며 황모 대위를 강한 톤으로 비난했다.아이디 ‘nexus_corea’는 “장교들을 모두 해임시키고 장교직 영구박탈과 함께 불명예 퇴진시켜 군인연금 등을 한푼도 받지 못하게 하라.”며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yjscool2002’는 “성로비 받았다는 장교를 즉각 총살시켜 군기강을 바로 잡아라.”며 한층 격렬한 의견을 개진했다. 이와 관련,국방부는 “국민들에 심려를 끼친 것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사과했다.이상희 국방장관은 이날 고위급 간부회의에서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군 간부들의 복무기강 확립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 ‘cjfdnd2’ 등 일부 네티즌들은 해당 사건이 발표된 시점을 문제삼으며 “범불교도 집회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정부의 물타기”라고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 페루 국회의원, 이웃집 애완견 총살 논란

    이웃집 개를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인 페루의 한 국회의원이 60일 의정활동금지 징계를 받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페루 국회는 지난 7일 비공개회의를 열고 ‘애완견 사살’ 혐의로 고발된 미로 루이스 국회의원을 징계했다고 현지 언론이 10일 보도했다. 페루 국회는 “동물을 향해 총을 쏜 것은 국회의원 윤리규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징계를 결정했다. 사건이 발생한 건 3개월 전인 지난 5월. 자신이 길러온 새가 사라지자 흥분한 문제의 국회의원은 이웃집 개를 범인(?)으로 추정, 총격을 가했다. 18개월된 슈나우져종 개는 총탄 3발을 맞고 죽었다. 애견이 죽자 이웃 주인은 “마티아스(개의 이름)가 새를 잡아먹었다는 증거도 없는데 이성을 잃은 국회의원이 발포를 했다.”며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미로 루이스 의원은 사과성명을 내고 “경솔하게 총질을 한 건 실수였다.” 며 “애완견을 잃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총기류를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던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국회는 징계위원회를 소집했다. 미로 루이스 의원은 “인간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사과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손영식 nammi.noticias@gmail.com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일요영화]제17포로수용소

    [일요영화]제17포로수용소

    ●제17포로수용소(KBS1 명화극장 밤 12시50분) ‘전쟁 포화’와 ‘코미디’. 이들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포로수용소의 비극과 유머도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는 마찬가지. 빌리 와일더 감독이 ‘명장’이란 소리를 듣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1953년작 ‘제17 포로수용소’는 이질적 재료들을 배합해 절절한 감정을 묘파해낸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겨울, 다뉴브강 기슭. 이곳에 자리잡은 독일군측 제17포로수용소 제4막사에서 어느날 밤 심상찮은 기운이 흘러나온다. 미군 포로들이 두 명의 동료를 탈출시키기 위해 비밀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던 것. 두 사람이 막사를 빠져나간 뒤, 세프턴(윌리엄 홀든)은 탈출이 실패할 것이라며 내기를 건다. 결국 두 포로는 총살을 당하고, 세프턴은 이긴 대가로 담배를 챙긴다. 세프턴은 그러니까 처세의 달인이었다. 온갖 요령을 부려가며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조차도 편히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머지않아 세프턴은 동료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만다. 동료들은 제4막사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일들이 죄다 독일군에게 새어나가자, 스파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 장본인으로 세프턴을 지목한다. 포로수용소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자유를 향한 포로들의 의지와 탈출과정에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기둥은 아군 포로들끼리의 갈등 과정에 세워져 있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차별점은 주인공 캐릭터가 통상적인 개념의 영웅주의에서 비켜나 있다는 대목. 흔히 영화 속 영웅들은 선의와 정의가 넘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 영화의 결말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세프턴은 동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대의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개인주의자일 뿐이다. ‘선셋대로’‘뜨거운 것이 좋아’‘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을 연출한 와일더 감독 특유의 장기인 위트에 이 영화도 크게 기댔다. 자칫 칙칙하게 가라앉을 수 있는 수용소 영화에는 신통하게도 유머정신이 도드라져 있다. 포로들이 러시아 여성 포로들을 구경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 스타를 향한 애끓는 연정으로 괴로워하는 모습 등에서 흔히 전쟁영화가 내세우는 엄숙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군상을 때론 우스꽝스러운 불협화음의 주체로, 때론 감동적인 화음을 빚어내는 주체로 자유자재로 묘사해 공감을 더한다. 뛰어난 명연기를 선보인 윌리엄 홀던은 1954년 아카데미에서 말론 브란도, 리처드 버튼, 몽고메리 클리프트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원제 ‘Stalag 17’.120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어쩔래 인생이 클리셰인걸?

    이런 표현은 웬만하면 정말 지양하고 싶지만 인생은 정말 젠장 맞을 정도로 드라마틱 하다. 나도 이 문장이 수사적인 클리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래? 삶이 클리셰인걸. 내가 렉서스의 지붕 위로 붕 하고 날았던 다음날, 지나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어나서 몇 발자국을 걷다가 다시 쓰러졌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머리 속에 조그만 폭탄을 넣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뇌정동맥 기형, 혹은 AVM은 뇌 속에 흐르는 동맥이 모세혈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정맥으로 연결되어 있는 선천적 기형으로 1만 명분에 3명 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아니 동맥이 정맥과 연결되어 있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됐나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런 사람은 뒷마당에 있는 수도꼭지를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가 쉽다. 할 일 없는 아버지가 수도꼭지에 PVC호스를 연결해서 마당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근데 장난기 많은 아들이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힘껏 돌려버린 거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당연히 PVC호스가 빠져버리겠지 바보야. 아직이야? 더 말해줘야 된다면 내가 바로 그 장난기 많은 아이였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수도꼭지는 동맥, PVC호스는 정맥이었으며, 하필이면 0.03%의 확률로 지나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고 거기엔 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내가 가서 수도꼭지를 돌려주겠다. 시속 60Km로 달리던 차에 치어놓고도 고작 뇌막 바깥쪽에 손톱만한 출혈밖에 없이 한 달 만에 깁스도 풀고 퇴원한 내가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의 아버지가 울지 않고 해준 말이 아무 일없이 잘 자던 아이의 머리가 폭파해 버렸다는 얘기였으니 이젠 내가 왜 삶이 클리셰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생각해 보니 아깐 내가 너무 흥분해서 조금 거칠게 말한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막말을 해야 할 상황들이 있을 테니 이 정도는 익숙해지시길. 여하튼, 심지어 같은 병원이었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 꼭지도 돌아버렸겠지만 다행히 같은 병원은 아니었고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시킬 만큼 먼 곳이었다. 한 달치 낯설어진 지하철을 타고 지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병원은 마치 거대한 공룡 같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냥 봐서는 그게 병원인지 오페라 하우스인지 정부 관청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하필이면 빌어먹을 렉서스 같은 병원에 지나가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두 명의 스튜어디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서서 안내를 해줄 정도로 많았고 층수를 표시하는 버튼은 네 줄이었다. 그 정도면 왜 전화기 다이얼로 만들어 놓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아직 의식이 없던 지나는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정해진 면회시간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근데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조금 있다가 이중으로 된 중환자실 문을 10분간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어디로든 가야 하나? 그때 나는 문득 지나가 신고 있던 에메랄드색 외투가 생각이 났고, 바보같이 뭉툭했던 신발이 생각났고 타르코프스키의 에세이에 실린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형 집행 명령 위반으로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병원의 담벼락 앞, 더러운 물구덩이 한가운데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이었다. 사형수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무리 중의 한 명이 무리에서 벗어나 구멍투성이의 양말을 신은 채 한참을 물구덩이 속을 걸어갔다. 그는 1분 후면 아무 필요가 없을 자신의 외투와 장화를 내려놓을 마른 땅을 찾고 있었다. 지나의 아버지에게 열쇠를 달라고 한 다음에 지나네 집에 가서 신발을 가져다가 내 방에 갖다 놓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양말을 벗고 물구덩이로 들어가 볼까? 아냐 그러려면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일단 외투를 하나 사볼까? 그리고 저 안에서 자고 있는 애한테 덮어주는 거야. ‘baby it’s cold out side’라고 멋지게 말해주면서. 야 이거 죽이는데? 주식이 티셔츠에 씌어 있는 걸 봐두길 잘했다. 아직 겨울이니까 설득력 있잖아? 그래 어차피 외투 가져 갈 거면 그때 신발도 가져가서 다시 신겨 주자. 내 방에 있어봤자 냄새만 날 테니까. 가족밖엔 면회가 안 된다곤 했지만 나는 그냥 좀 아는 사람인데 애가 추워하니까 외투랑 신발을 가져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글 박세회 월간 <삶과꿈> 2008년 5월호 구독문의:02-319-3791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촌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촌마을

    백두대간 종주 산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지나쳤을 지리산 고기리 고촌(高村)마을은 1000고지 이상을 힘차게 달려온 고산준령이 고리봉(1304.8m)에서 급격히 해발 고도를 낮추며 처음으로 숨을 고른 땅이다. 대간 종주자들에겐 한 구간의 마지막 지점이자 다음 구간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 서북릉 산행에 나선 이들 중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부러 하산하는 경우도 많은 터라 고리봉 아래 고촌마을은 백두대간 종주꾼이나 지리산 산꾼들에겐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구룡·선유·비폭포 인접… 찾는 발길 이어져 원래 남원군 상원천면에 속했던 고촌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랫마을 내기(안터)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딴 ‘고기리’가 되었고 이후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전라북도의 산중마을이지만 1680년경 영남에서 이주해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달성 서씨 등에 의해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1950년대 이전만 해도 130호에 달하던 면내 최대 마을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소각돼 한 가구도 남지 않았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한두 사람씩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 도시로 떠나는 가구가 많아 지금은 30여 집이 조금 못 된다. 빈집은 7가구쯤 되는데 거의 다 외지인에게 팔린 상태다. 주천면 마을 중 지대가 제일 높은 고촌의 주민들은 산나물, 상추, 감자, 오미자 등을 재배 혹은 채취하며, 인접한 구룡폭포 최상류 계곡과 선유폭포, 비폭포 등을 찾는 등산객은 물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민박과 식당도 겸하고 있다. 따라서 마을 풍경만 놓고 보면 해발 600여m의 높은 산지임을 쉽게 실감하기 어렵다. 고촌에서 태어나 결혼해 여태껏 살고 있는 정오분(75) 할머니 역시 마을이 불에 탔을 때 고향을 떠났다가 3년쯤 후에 돌아왔다. 그때는 돈 없는 사람만 들어와 살았던 척박한 산골이었다. 남의 논을 져먹으며 쌀 석 되로 시작한 반세기의 기억들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다. 눈이 ‘겁나게’ 많이 오는 곳이지만 성삼재, 운봉, 남원 등으로 삼거리가 뚫릴 만큼 도로 사정이 좋아 겨울에도 버스가 다니지 못하는 일은 없다. 다만 여느 집처럼 자가용이 있는 게 아니어서 벌써 몇 번이나 119 신세를 져야 했다고. ●주말이면 산행객 100여명 묵어가 남원 시내에 거주하다 11년 전 고촌으로 들어와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 양해거(62)씨는 마을 속사정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다. 이번 주말에도 100여 명의 산행객들이 고촌에서 묵어간다. 간혹 양 이장에게 숙박 문의전화가 오면 집집마다 번갈아 공평하게 소개해 주기도 한다. 아예 ‘반달곰 산채마을’이란 브랜드로 특성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고랭지 상추는 인근 대도시 청과시장에서 가져가니까 가격만 정해지면 판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조용하고 공기 좋고, 부지런하면 약초며 산채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몇 년 전만 해도 외지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분뇨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요즘은 성숙해진 산악문화 덕에 속상한 일이 덜하다. 쓰레기봉투를 무료 배포하면 그 봉투에 차곡차곡 담아 길가에 내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끔씩 양 이장이 직접 쓰레기를 수거하러 다니기도 한다. 마을 위쪽엔 올해 완공 예정인 고기댐이 있다. 반대도 해봤지만 정부 사업을 농민이 이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폭우 시 홍수를 조절하고 농수와 생활용수로 유용하게 쓰이길 바랄 뿐이다. 고기댐 앞엔 상처 입은 노거송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주민들을 묶어두고 무차별 총살이 자행된 나무란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이들은 조금씩 잊히겠지만 아직도 탄환 자국에 시름하는 늙은 나무는 묵묵히 그때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www.emountain.co.kr) ▶가는 길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88올림픽고속도로에서 남원IC로 나온 다음 19번 국도와 60번 지방도를 타고 고기리까지 갈 수 있다. 지리산IC로 나왔다면 인월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온 후 역시 60번 지방도를 타고 고기리로 이동한다. 남해고속도로에서는 진주분기점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따라 함양분기점으로 들어서 88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남원과 고기리를 오가는 시내버스는 하루 8회 운행한다.
  • 노대통령 “보도연맹사건은 현대사 비극”

    노무현 대통령은 24일 울산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 영상메시지를 보내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했다. 개별 과거사에 대해 노 대통령이 공식 사과한 것은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 이후 두번째이며,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행위에 대한 포괄적 사과는 처음이다. 노 대통령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으로,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6·25 전쟁 속에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면서 “유가족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수십년을 지내야만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아울러 지난날 국가 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된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8월 군·경에 의해 407명이 집단 총살된 사건으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총살 보도연맹원 명부 첫 공개

    한국전쟁 당시 집단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의 명부가 최초로 공개됐다.‘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0년 수백명이 집단 총살된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27일 제60차 전원위원회)을 29일 발표하고, 희생자 명단을 기록한 보도연맹원 명부를 공개했다.‘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50년 8월 국군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울산지구CIC와 울산경찰서 경찰이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407명을 좌익혐의자란 이유로 울산 온양면과 청량면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고창 월림사건’ 진실규명 결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고창 월림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20일 제59차 전원위원회)을 내렸다고 26일 밝혔다. ‘고창 월림사건’은 1951년 5월10일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전북경찰국 제18전투경찰대대 제3중대가 죽림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이자, 김씨와 천씨 양 성씨 간 갈등과 이념 대립이 빚은 참극이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색,계’ 실제주인공 사진 전시회 中서 열려

    ‘색,계’ 실제주인공 사진 전시회 中서 열려

    영화 ‘색, 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국 광둥(廣東)미술관에서 ‘색, 계’의 실제 주인공의 사진이 전시돼 영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영화 ‘색, 계’는 중국 여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이 1939년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쓴 소설 ‘색계’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1937년 일본의 상하이 점령 이후 각 정권간의 치열한 첩보전 속에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정보원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영화 속 여주인공 탕웨이(湯唯)가 연기한 ‘정핑루’(鄭蘋如)다. 국민당 소속 정보기관의 정보원이었던 정핑루는 19살 때인 1937년 ‘량유’(良友)라는 종합잡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랑유’는 당시 기사에서 “정핑루는 눈동자가 매우 아름답고 얼굴빛이 복숭아 꽃과 같으며 웃을 때 살짝 보이는 보조개가 매우 인상적인 여인”이라고 묘사했다. 정보원이 된 후에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위장했어야 했기 때문에 20살의 정핑루는 ‘정 샤오제’(小姐·미혼인 여성을 부르는 호칭)가 아닌 ‘정 뉘스’(女士·기혼이거나 높은 지위의 여성을 부르는 호칭)로 불린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20살때부터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고급 정보를 수집해오던 정핑루는 영화 속 ‘이선생’의 실제 인물인 딩모춘(丁默邨·1901~1947)을 암살하려다 결국 신분이 발각돼 상하이 교외의 황량한 벌판에서 22살의 나이에 총살을 당했다. 빼어난 외모로 ‘징옌’(경염·驚艶·놀랍도록 아름답다)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는 정핑루는 그녀를 모티브로 한 영화의 흥행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으며 데뷔했던 잡지와 사진들로 이루어진 전시회에는 연일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xkb.com.cn(사진 왼쪽,가운데는 정핑루, 오른쪽은 정핑루를 연기한 탕웨이)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9일 쿠바혁명 주역 체 게바라 40주기

    9일로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혁명의 전설적 영웅인 체 게바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40돌이 된다. 쿠바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볼리비아로 건너가 게릴라 활동을 하던 게바라는 지난 1967년 10월8일 한 정글 마을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힌 후 그 다음날에 총살당했다. 죽은 지 벌써 40년이 됐지만 그에 대한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검은 베레모,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 등으로 묘사되는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며 지금도 지구촌 좌파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와 영화는 지금도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다. 쿠바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긴 머리에 베레모를 쓴 체게바라의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꼽히고 있다. 게바라가 죽기 직전 누볐던 볼리비아 남동부 정글은 그의 숨결을 느끼려는 전세계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그가 처형당했던 볼리비아 그란바예에선 ‘월드 체 게바라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남미 각지에서 수천명의 ‘게바라 숭배자’들이 몰려든다. 이 기념식엔 에보 모랄레스(47) 볼리비아 대통령도 참석한다. 독신으로 인디언 출신 대통령인 그의 궁 한 벽엔 게바라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쿠바에서는 게바라의 시신이 안치된 혁명도시 산타 클라라에서 40주기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기념식에는 병상의 피델 카스트로(80)대신 제2인자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75)국방장관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쿠바와 볼리비아뿐만 아니라 좌파정권인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에서도 게바라는 혁명영웅으로 인기가 높다. 게바라는 이제 남미대륙의 대표 문화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게바라의 정치적 동지이자 두번째 부인인 알레이다 마르치(71)가 남편에 대한 회고록을 내년 3월에 펴낼 예정이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마주로(마셜제도)윤설영 특파원| “아버지. 막내딸이 왔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아버지….” 65년 전 백일을 갓 넘긴 막내딸은 어느덧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이원순(67)씨의 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징용돼 1944년 마셜제도 콰잘린 섬에서 사망했다. 이씨는 목놓아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코발트빛 바다는 출렁대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당시 함께 조성된 추모공원인 ‘아리랑 공원’은 폐쇄되고 추모비는 현지 교민인 지용유(67)씨의 자택 계단 아래에 옮겨져 방치돼 있다. 가로 60㎝, 세로 170㎝의 크기의 추모비는 앞면에는 ‘마셜 아일랜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망망대해 향해 “아버지”절규 지씨는 “공원이 없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면서 “그동안 국회의원과 대사들이 찾아와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마주로 섬에 조성한 ‘평화의 공원’을 방문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진영씨는 “여기까지 와서 일본의 추모비만 보고가야 하느냐.”면서 “한국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족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행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측은 “외교부 등과 협의해 추모비 재건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snow0@seoul.co.kr ■용어클릭 ●마셜제도와 한국인 강제징용 남태평양에 위치한 마셜제도는 태평양전쟁 막판까지 격전지였다.1944년 2월과 3월 사이 약 1만 9000명의 전몰자가 발생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도 4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이 밀리 섬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겨놓지 않아 현재까지 사건의 진상이나 정확한 피해규모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마셜군도 추도순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당시 함께 조성된 추모공원인 ‘아리랑 공원’은 폐쇄되고 추모비는 현지 교민인 지용유(67)씨의 자택 계단 아래에 옮겨져 방치돼 있다. 가로 60㎝, 세로 170㎝의 크기의 추모비는 앞면에는 ‘마셜 아일랜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망망대해 향해 “아버지”절규 지씨는 “공원이 없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면서 “그동안 국회의원과 대사들이 찾아와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마주로 섬에 조성한 ‘평화의 공원’을 방문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진영씨는 “여기까지 와서 일본의 추모비만 보고가야 하느냐.”면서 “한국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족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행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측은 “외교부 등과 협의해 추모비 재건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마주로(마셜제도) 윤설영 특파원 snow0@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Local] 제주 4·3사건 유해 발굴 나서

    제주도는 21일 제주국제공항구역내 ‘정뜨르 비행장’ 일대에서 개토제 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유해 발굴작업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 일대는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최대 암매장터로 알려져 있다. 발굴 작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예비검속 과정에서 끌려와 학살된 사람들이 암매장된 곳으로 알려진 제주공항 남북 활주로의 북쪽 끝지점이다. 또 49년 제2차 군법회의를 통해 총살된 사형수가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어영마을’ 남쪽지점 등 2곳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4·3연구가들은 이 지역에 예비검속 희생자 500여명, 군법회의 희생자 248명의 유해가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어떻게 지내십니까] 베트남에 5년 억류 이대용 前 주월공사

    [어떻게 지내십니까] 베트남에 5년 억류 이대용 前 주월공사

    한국인 23명을 납치한 탈레반 세력의 인질극이 장기화하고 있다. 이미 2명이 희생된 가운데 여성 피랍자 일부가 가까스로 풀려났으나, 나머지 인질의 석방은 아직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온국민이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낭보가 들려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가운데 이대용(83) 전 주월공사를 만났다. 그는 월남 패망 후 공산 베트남 정권에 만 5년간 억류됐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제3국에서의 ‘최장기 인질’이었다. 그로부터 아프간 인질들을 구해 낼 묘책과 근황을 들어봤다. ●“그들도 탈레반이었다.” 월남이 사실상 패망한 1975년 4월30일. 이 주월 경제공사는 운명처럼 대사관 직원과 교민을 본국으로 안전 귀환시키는 철수 본부장직을 맡게 됐다. 김영관 당시 주베트남 대사 등 대부분의 공관원과 교민들이 이미 사이공을 떠난 뒤였다. 사이공 공항까지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받는 위기일발 상황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안전하게 귀국시키려 안간힘을 쓰다 베트남 정보공작특별경찰조직인 안녕내정국에 체포됐다. 그는 “생각해 보니 그들은 아프간에서 무고한 외국인들을 납치·감금하는 탈레반과 다름 없었다.”고 회상했다. 치화 형무소에 수감된 그에게 외교관의 치외법권을 규정한 빈협정은 한낱 휴지조각이었다.1평도 안되는 독방에서 10개월 동안 햇빛 한번 못 보고 지낼 때도 있었다. 체중이 78㎏에서 42㎏으로 줄어들 정도로 참기 어려운 고통에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이 전 공사는 “아프간 한인 인질들이 기습적으로 납치되는 바람에 충격이 클 것”이라면서 “국가가 구출할 것이라고 믿고 침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목숨을 담보로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상전향 요구였다. 그는 공산 베트남 측의 ‘가이따우’(인간개조) 공작에 꿋꿋이 버텼다.‘극한 상황에서 강요에 의한 거짓 전향은 무죄’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물론 이를 알았더라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납치세력들로부터 이슬람교로 개종 압박을 받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인 피랍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개종하는 척이라도 하며, 생명을 보전하는 게 우선”이라고. 이 전 공사와 서병호·안희완 두 영사가 억류되자 본국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외교 공관망을 총동원해 석방교섭을 펴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베트남과 외교관계가 단절된 데다 냉전하의 남북관계가 큰 걸림돌이 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 통일후 ‘남조선 해방´을 부르짖고 있는 가운데 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휘하는 노동당 제3호 청사가 북송 공작에 뛰어든 것이다. ●석방 교섭, 그때와 지금 78년 인도 뉴델리에서 남북한과 베트남간 비밀 3자회담이 열렸지만,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북한이 이 전 공사 등의 북송을 최대치 목표로, 여의치 않으면 남한내 수감 간첩과의 교환을 추진하려 한 까닭이었다. 이 전 공사는 “탈레반이 피랍자와 탈레반 죄수들을 맞교환하려는 것과 너무 유사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북측은 “중남미 테러세력들도 자국내 미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고 수감중인 도시게릴라들과 맞교환을 요구한다.”고 억지 사례를 들었다.“국제법의 보호를 받는 외교관과 간첩을 바꾸는 건 어불성설”이란 남측 주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금언과 함께 석방의 전기는 왔다. 베트남이 미제 및 소련제 무기 등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위협을 느낀 중국이 견제에 나서면서다. 중국과 입장을 같이한 북한도 베트남에 캄보디아 철수를 요구하며 틈이 벌어졌다. 이때 한국정부는 거상 아이젠버그를 활용해 석방교섭을 성공시켰다. 그는 베트남의 외자유치를 도우며 커미션을 챙기던 유대계 미국인이었다. 물론 이는 이 공사가 생지옥 같은 긴 수감생활을 견뎠기에 가능했다.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비밀 루트를 개척해 억류 외교관들과 접촉선을 유지하려 한 한국정부의 노력도 주효했다. 부패한 베트남 관리들을 구워삶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탈레반과의 공식 접촉 못지않게 다양한 비공식 통로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아프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사우디 등의 이슬람기구와 단체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요하다면 장사꾼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베트남에도 현지 공장이 있는 한 기업체의 이사로 있다.(주)선진의 장학재단 고문격으로 일선에선 한발 비켜나 있다. 그는 베트남식 개혁·개방 노선인 도이모이 정책과 관련,“86년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웬반린이 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반세기 동안 외세 배격을 부르짖던 원로급들을 예우하면서 은퇴시킨 것은 사실상의 쿠데타”라고도 했다. 반면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해선 얼마간 비관적 전망을 했다.“주체사상을 포기, 개혁·개방하면 체제가 무너질 판인데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북한의 웬반린’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었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그는 누구인가 1925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난 이대용 전 주월 공사는 고향의 인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김구 선생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리자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이후 육사 7기로 임관한 뒤 한국전쟁을 맞아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유엔군 참전으로 북진이 시작된 이후엔 압록강에 맨 먼저 손을 담근 제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 활약했다. 63년 주베트남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면서 베트남과의 굴곡 많은 인연이 시작된다. 소장으로 예편한 그는 67년 베트남 대선서 미 육군지휘참모대학에서 함께 수학한 웬 반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 이듬해부터 주베트남 대사관 정무공사로 4년간 근무한 것이다.73년 다시 주베트남대사관 부공관장격인 경제공사로 부임해 베트남과의 질긴 인연을 확인했지만,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된 직후 체포돼 사이공의 치화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특별경찰과 사이공의 북한대사관 정보원들에 의해 전향과 귀순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했다. 이때 나중에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해진 박영수 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국장과도 악연을 맺었다. 박 전 부국장은 억류 중인 그에게 투항을 강요했던 북한 대사관의 정보원이었다. 80년 4월12일 베트남서 풀려난 이 전 공사는 화재보험협회 이사장과 생명보험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99∼2003년 육사총동창회장과 명예회장을 역임했다.96년 한·베트남친선협회 회장을 맡아 베트남과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었다. ■즈엉 찐 특 前 주한 베트남 대사와의 인연 이대용 전 주월공사가 베트남 억류 후유증을 털어내고 있던 2002년 초 어느 날. 생지옥 같았던 수감생활의 악몽을 되살릴 일이 생겼다. 그를 치화 형무소로 밀어넣은 장본인 중의 한 명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주한 베트남 대사로. 즈엉 찐 특 제3대 주한 대사.1975년 월남 패망 당시 베트남의 특별경찰조직인 안녕내정국 요원으로서 이 공사를 신문했던 인물이었다. 이 전 공사는 한국말이 능통하고 얼굴이 유난히 하얀 그를 ‘튀기’라는 별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전 공사는 걸핏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하던 그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만나면 죽이고 싶다.”는 게 당시의 솔직한 심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특 대사가 이 전 공사가 회장을 역임했던 서울남서로타리클럽의 조찬특강 연사로 나오면서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27년 만에 만난 이 전 공사에게 특 대사는 “(신문을 받을 때)‘국제관계에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선견지명이었다.”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미 한-베트남 관계가 북한-베트남 관계보다 더 밀접하게 됐으므로 원한을 누그러뜨리려는 공치사만은 아니었다. 이 전 공사도 “양국이 철천지 원수였던 당시 각자 자기 나라를 위해 충성했을 뿐, 개인적 원한은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화답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지기처럼 지내며 서로를 돕는 사이가 되었다. 구본영 논설위원
  • [아프간 군사작전 돌입] 탈레반 “인질위독” 왜 공개?

    “우리에게는 충분한 약품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죽을 것 같다.” 카리 유수프 아마디 탈레반 대변인은 1일 한국인 인질 가운데 여성 2명이 위독하다며 AFP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프간 이슬라믹 프레스(AIP)도 아마디의 같은 말을 전하면서 “그러나 약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만 아마디 대변인은 “탈레반 수감자 2명이 석방된다면 병든 여자 인질들을 풀어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약은 받지 않겠다” 이어 “이들이 풀려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우리의 요구(탈레반 수감자 석방)를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해당 인질의 이름과 병명은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일각에선 탈레반측이 두 명의 여성 인질이 위독하다고 지적하고 나온 것은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성 인질에 대해 위해를 가하기 위한 사전 포석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압박수위 높이고 ‘위해´ 포석 지금까지 탈레반이 외국 여성 인질들을 직접 살해한 전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납치됐던 프랑스 여성 구호요원은 26일 만에 풀려났다.2005년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이탈리아 여성은 20여일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2004년 이라크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된 국제구호단체 케어 인터내셔널의 이라크 책임자인 영국인 여성 마거릿 하산은 총살된 바 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탈레반, 피랍 심성민씨 추가 살해

    탈레반, 피랍 심성민씨 추가 살해

    정부의 끈질긴 탈레반과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31일 오전 1시 30분쯤 한국인 인질 심성민(29)씨가 살해됐다고 AFP 통신 등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카리 유수프 아마디 탈레반 대변인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 정부가 우리가 정한 협상시한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하지 않아 한국인 인질 1명을 추가로 살해하게 되었다.”며 “우리가 살해한 인질은 성신(심성민씨로 추정)으로 오후 8시 30분(한국시간 31일 오전 1시)에 AK-47 소총으로 살해했다.”고 밝혔다. 시체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 버렸다고 아마디 대변인은 덧붙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동생 심모씨는 울음을 터트리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머지 인질들의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던 샘물 교회 관계자와 유가족들도 심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 관계자도 “사실을 확인중”이라면서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에 앞서 정부는 30일 한국인 피랍자 22명의 무사 귀환을 위해 백종천 대통령 특사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2차 면담을 추진하기로 했다. 익명의 탈레반 사령관은 이날 오후 “아프간 정부와의 협상이 완전히 실패했다. 인질 처형을 시작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아프간 이슬라믹 프레스(AIP)가 보도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AP통신은 그러나 밤 늦게 탈레반이 협상 시한을 이틀 더 연장했다고 아프간 관리의 말을 인용, 보도해 협상이 계속 진행중임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현장에서 이틀 연장됐다는 정보가 보고 됐다.‘압박’보다는 ‘협상’에 무게를 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중요한 이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후 피랍사태 이후 14번째로 열린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처음으로 주재하고,“백 특사가 현지에 2∼3일 더 머물며 추가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백 특사를 통해 “추가 인질 살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아프간 정부와 현지 지역원로 등을 통해 탈레반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피랍자 22명의 석방을 위해 군사작전을 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아프간 정부측에 거듭 전달하고 협조 요청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아프간 정부가 ‘한국인 피랍자-탈레반 수감자 맞교환’에 난색을 표하는 등 사태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여성인질 선(先)석방 제안에 대해서도 탈레반측은 거부했다고 아프간 정부협상단의 일원인 가즈니주 출신 국회의원 마무디 가일라니가 AFP 보도를 통해 전했다. 아프간 소식통은 “현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탈레반측이 추가 협상 시한으로 정한 이날 오후 4시30분부터 70분 동안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주재,“피랍자의 안전과 조속한 석방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보다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회의 주재가 상황의 긴박함에 따른 것은 아니며, 회의 참석자들을 격려하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백 특사와 카르자이 대통령의 1차 면담 결과가 민족스럽지 못하다고 결론짓고,2차 면담 시기를 판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탈레반측이 명단을 제시한 8명의 인질과 관련, 아프간과 미국 정부와 물밑으로 전략을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테러단체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아프간이나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아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정부는 탈레반측이 정권을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을 중시, 아프간 재건을 위해 한국 정부가 기여해왔고, 대규모 경제 원조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적극 부각시킬 방침이다. 이와 함께 억류 지역으로 추정되는 아프간 가즈니주와 수도인 카불에서 지역 원로와 지도자를 폭넓게 접촉, 현지 봉사활동 중인 한국인 납치의 부당성을 알리고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한편 고 배형규 목사의 시신은 이날 오후 4시45분 아랍에미리트항공편으로 국내에 운구돼 경기 안양 샘병원에 임시 안치됐다. 박찬구 김미경 구동회기자 ckpark@seoul.co.kr
  • “6·25 전후 좌익 등 민간인 학살도 규명”

    북한군과 좌익세력 등 6·25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에 대해 첫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양평적대세력사건’과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0일 밝혔다.‘양평적대세력사건’은 1950년 9월26일에서 30일 사이 후퇴하던 인민군과 정치보위부 내무서원에 의해 양평군 주민 600여명이 집단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주로 우익단체원이나 공무원 및 부농 등으로, 국군과 유엔군에 협조했다고 판단한 적대세력이 이들을 양평면 한강변 백사장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들 중 대한청년단원이 31명, 공무원 12명,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원이 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또 50년 4월5일 양봉열씨 등 대한청년단원 4명이 인민군에게 의해 산채로 매장당한 ‘주문진 지역 양봉열 외 4인의 희생사건’에 대해서도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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