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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北미사일 발사땐 금융제재”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주한 일본대사는 16일 북한 미사일 재발사 준비설과 관련,“재발사가 이뤄지면 일본 정부는 북한에 취하고 있는 제재조치를강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이날 오구라 대사는 대한매일과 가진 특별인터뷰를 통해 일본 정부 내에서검토되고 있는 대북(對北) 제재조치 강화대상으로는 “인적,물적 왕래와 금융이 해당된다”고 말했다.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가 대북 제재조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이는 한·미·일의 거듭된 미사일 재발사 포기 경고를 북한이 무시할 경우방북 조총련 인사의 일본 재입국금지,조총련계 자산 동결 및 대북 송금 금지 등의 초강경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와 관련,요미우리(讀賣)신문도 이날 “북한이 미사일 재발사를 단행하면일본 정부는 대북 송금중지와 수출규제,KEDO 지원동결 등의 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기본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日의 北 미사일재발사 저지 전략과 예상효과

    일본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재발사를 상정해 검토하고 있는 대북(對北) 제재 강화조치는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대한 일본측 10억달러 분담금 지원의동결이다.이 지원금은 일본 정부와 국회의 승인을 받아놓은 상태다. 일본 정부는 제네바합의에 따른 KEDO 지원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과는분명히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미사일발사가 현실화하면 국민여론 악화를 들어 KEDO 지원동결을 단행할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과는 별개의 문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상태다.경수로 자금 지원동결이 가져올 파장이 크고 북한이 이를 트집잡아 핵 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금융 및 물적교류 제제조치가 꼽힌다.북한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부분이다.현재 검토되고 있는 것은 대북 송금 중단과 수출규제다. 송금제재는 금융기관을 통해 북한의 기업,단체,개인에게 지불되는 무역결제 때 외환관리법을 적용,대장상과통산상의 허가를 얻도록 하는 방법이다.일본측이 허가를 해주지 않으면 송금은 불가능하게 되며 제3국 경유 송금에도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수출규제의 경우 외환법과 수출무역관리령에 따라 대북 수출 가운데 일정품목에 대해 통산상의 승인을 받도록 할 방침이다. 일본의 대북 송금은 96년 28억6,000만엔,수출총액은 98년 전기,기계류 등을 중심으로 227억8,300만엔이었다.그러나 실제로 조총련계의 불법 송금까지더하면 한해 600억엔(5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돼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으로선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인적 왕래를 제한하는 조치다.북한을 방문한 조총련계의 일본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거나 정기 화물선의 입항을 거부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지난해 8월 북 미사일 발사 직후 ▲식량지원 중단 ▲직항 전세기 항공기 운항금지 ▲국교정상화교섭 중단 등의 대북 조치를 내리고 있는 일본으로선 새로운 제재조치를 공공연히 언급함으로써 북한측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있다.일부에선 북 미사일이 일본 영토나 영해,영공을 침범할 때는 ‘준전투 행위’로 간주,미일안보협력지침에 의거해 보복수단을 발동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금융 및 물적 교류 제재는 북한을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조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북 미사일발사땐 원조중단…한-미-일 공동대응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은 12일 북한의 미사일 추가발사때의 한·미·일 3국의 대응과 관련,“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간 차원의 경협과 각종 원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홍장관은 이날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 등 부정적행동을 할 경우 식량지원 등 기존의 지원 중단은 물론 추가적인 불이익을 가할 수 있다”며 “예를 들어 일본 조총련계의 대북 송금을 중단한다고 생각해 볼수 있으며 이같은 내용들이 페리보고서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장관은 이어 “미사일 발사시에도 4자회담,북·미 미사일회담,유해송환회담 등 북한과의 대화창구는 계속 열어 놓을 것”이라며 “그러나 북한 미사일 발사는 안보와 안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인 만큼 금강산 관광은 그대로 진행될수 없다”고 덧붙였다. 홍장관은 또 “올해 상반기에만 식량,원유,비료,금강산 관광을 통한 현금등을 합쳐 5억∼6억달러 상당이 외부세계로부터 북한에 지원됐다”며 “북한은 이것을 끊으면 당장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벼랑끝 외교도더 이상 통하지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정부 北미사일 대응 원칙

    북한 미사일 해법의 핵심은 ‘분리대응’이다.큰 틀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는 유지하겠지만 북한 경제에 돌이킬수 없는 치명타를 입히는 이중포석이다.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의 12일 언급도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시험발사를 강행할 경우 한·미·일 3국의 최우선 제재는 북한 경제의 ‘젖줄’을 차단시키는 일이다.북한 경제를 ‘고사(枯死)’시킬 수도 있다는 강력한 경고가 담겨 있다.홍장관은 “외부세계가지원을 끊으면 북한은 당장 생존이 어려워진다”며 심각한 타격을 예상했다. 한·미·일 3국이 ‘달러 유입선’에 주목하는 이유는 북한 경제에 대한 파급효과 때문이다.현재 북한의 ‘달러 유입선’은 대략 4가지.▲금강산 관광사업 ▲조총련계의 대북송금 ▲미사일 수출 ▲마약 밀거래 등의 ‘외화벌이’로 요약된다.대체로 연간 10억달러에 달한다.그중 미사일 수출과 외화벌이는국제사회의 강력한 통제로 액수가 미미하다. 이 때문에 한·일 양국은 달러박스인 금강산 관광사업 및 조총련계의 대북송금 중단을 경제제재 1호로 꼽고 있다. 금강산 사업의 경우 2002년까지 9억4,000만달러가 북한에 들어가는 프로젝트다.올 6월까지 1억5,000만달러가 북한에 송금됐다.조총련 대북송금은 연간 1억달러 규모다. 미국의 경우 50만t의 식량지원 중단과 함께 북·미관계 개선 동결을 계획하고 있다.경제적으로 허덕이는 북한으로서 ‘북·미 대결구도 회귀’ 자체가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이다. 하지만 한·미·일 3국은 경수로 사업 지속 등 ‘제네바 합의’ 이행과 4자회담,북·미 미사일회담,유해송환회담 등의 ‘대화 문호’는 그대로 열어둘계획이다.형식적으로 포용정책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지만 북한의 ‘벼랑끝 전략’을 사전에 무력화시킨다는 의미도 크다. 이러한 한·미·일 3국의 미사일 해법은 ‘페리보고서’ 공개를 통해 북한에 ‘간접 전달’될 가능성이 크다. 당초 예상시기보다 다소 늦어져 7월보다는 내달 6일 미 의회 휴회 전에 공개될 것으로 관측하는 분위기다. 오일만기자 oilman@
  • 北 “옥류관 냉면 서울분점은 가짜”

    평양 옥류관 냉면 서울 분점 개설 계약의 유효성을 놓고 남북한 당사자들이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북한 옥류무역회사 대변인은 지난 5월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문을 연 ‘평양 옥류관 서울분점’과 분점개설을 합의하거나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고 지난 11일 밝혔다. 대변인은 관영 중앙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평양 옥류관은 그 위치나 건물양식,냉면 맛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고 전제,옥류관의 이름을 도용한 것을 ‘사기모략행위’로 규탄한다면서 서울분점 간판을 당장 내리고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옥류관 서울분점’ 김영백 사장은 13일 “조선옥류무역과는 직접 계약을 하지 않았으며,조선옥류무역과 계약을 맺은 조총련계 기업 파르무역과 대한민국내에서 옥류관 분점 사업계약을 체결했다”고 해명했다. 김사장은 “파르무역과의 계약 체결에 따라 북한은 계속적으로 메밀·유기그릇·조선화 등 관련 식자재를 공급하고 있다”며 “중앙통신 보도의 정확한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구본영기자 kby7@
  • 군인 낀 이적단체 적발

    서울경찰청은 11일 ‘반미구국 한양’ 조직원 22명을 붙잡아 김모군(22·한양대 4년) 등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7명을 입건했다. 구속자 중에는 군 입대 후에도 동료 병사들을 상대로 북한의 주체사상과 연방제 통일방안의 우월성을 선전해온 이모(23) 상병 등 현역 사병 8명이 포함돼 있다. 지난 89년 2월 결성된 ‘반미구국 한양’의 조직원인 이들은 민족해방(NL)계열 후보를 한양대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 학생회장,한총련 의장 등에 당선시키고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28일 경희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과 지난 1월5일 한총련반미투쟁 선포식 등의 불법집회를 주도하고 출소한 미전향 장기수를 초청해강연회를 갖는 등 의식화 활동을 해왔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성수기자 ss
  • 학생운동 주역들 사회개혁 나섰다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이른바 ‘386세대’들이 영·호남 화합과 부패방지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청년연합회(KYC)’라는 이름으로 창립대회 및 총회를 갖고 의식·생활개혁운동에적극 앞장서기로 했다. 이들이 연합회를 조직하기 위해 모인 것은 지난 98년 10월.이인영(李仁榮·35)·오영식(吳泳食·34)·임종석(任鍾晳·33) 등 전 전대협 1,2,3기 의장을 비롯,김재용(金在容·31) 전 한총련 1기 의장,우상호(禹相虎·37)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등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 전국적으로는 30대 직장인 1,00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과거 반(反)정부 투쟁 및 통일운동을 벌이다 투옥까지 경험했던 이들이 의식·생활개혁 쪽으로 운동 목표를 바꾼 것은 ‘현장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앞으로 의식을 개혁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올해 운동목표를 ▲새로운 생활운동 ▲새로운 의식문화운동 ▲제도개혁운동으로 정하고영호남 화합사업,자원봉사활동,반(反)부패학교 개설,재테크강좌등 지역 및 사회개혁을 위한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김재용 연합회 조직위원장은 “군사독재정권과 맞대응했던 운동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직장·가정에 기초해 의식을 변화해 나가는 생활운동을 펼쳐나갈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공안대책 협의회 어떤 기구 인가

    진형구(秦炯九)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으로 진전 부장이 직권면직되고 법무부장관이 경질된 가운데 검찰이 주도적으로 운영해온 ‘공안대책협의회(공대협)’의 실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대협은 학원·노사분규 등 각종 공안 현안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설립된 유관기관 상설 협의기구다.‘공안사범합동수사본부’라는 이름으로운영되다가 지난 3월12일 대통령 훈령으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면서 공식출범했다. 검찰은 지난 96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연세대 학생회관 등을 점거한 ‘한총련사태’때 관계기관끼리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좌익사범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좌익사범’이라는 용어가 논란을 빚자 ‘공안사범’으로 명칭을 바꿨으며,‘초법적인 기구’라는 비난이 제기되자 다시 ‘공대협’으로 법제화했다. 공대협은 출범 당시 공안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던 자세에서 탈피,적극적·예방적 역할을 강화하겠다며 ‘예방공안체제’ 확립을 표방했다. 공대협은 검사장급인 대검 공안부장을 의장으로 통일부·국방부·행정자치부·노동부·경찰청·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 등 13개 유관기관의 차관보 또는 국장급 인사들이 참여,주요 공안사건에 대한 협의 및 조정활동을 총괄,지휘해왔다.학계나 민간단체의 전문가를 지도위원으로 위촉,자문을 받고 있다. 공대협의 하위 기구로 부장검사급인 대검 공안기획관이 주관하는 ‘실무대책회의’와 지방검찰청의 공안부장이 주관하는 ‘지역대책회의’가 있다. 박홍기기자 hkpark@
  • 한총련 오늘 경희대서 출범식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尹奇鎭 명지대 총학생회장) 소속 대학생 1,800여명이 29일 서울 경희대에서 제7기 출범식 행사를 강행하기로 해경찰과의 충돌이 예상된다. 한총련은 28일 연세대에서 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원천봉쇄하자 개최 장소를 경희대로 바꾸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경희대 주변 및 인근 지하철역 등에 115개 중대1만2,500여명를 배치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인터넷으로 北에 동향 정기보고

    서울경찰청은 27일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남측본부 정책실장 이우신(27·가명)씨를 국가보안법의 간첩 및 회합·통신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97년 이후 인터넷을 이용,북한측과 160차례에 걸쳐 전자우편(E­메일)을 주고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지방 D대학 출신인 이씨가 북한에 보낸 전자우편에는 국내 언론에보도된 군사동향 요약,한총련 투쟁계획 및 각종 시위상황,노동계 동향 등이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이종락기자 jrlee@
  • 한총련 출범식 원천봉쇄

    대검 공안부(秦炯九 검사장)는 26일 한총련 제7기 출범식이 28일부터 사흘간 연세대에서 개최됨에 따라 대규모 불법 폭력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출범식을 원천봉쇄하기로 했다. 검찰은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대회를 강행하면 즉각 공권력을투입,참가자 전원을 국가보안법의 이적동조 등 혐의로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임병선기자
  • 金총리 경호팀 전원 교체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의 경호팀이 전원 교체됐다. 총리실은 지난 주말 김총리의 경호팀장을 박모 경위에서 이모 경감으로 한계급 높여 교체했다.또 근접 경호팀과 삼청동 총리공관 지원팀 13명을 모두새 인물로 바꿨다.총리실 관계자는 16일 “분위기 쇄신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호팀 교체는 지난 7일 충남대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결정적인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김총리는 충남대에서 강연을 마치고 대기중인 버스를 타려다 한총련 소속 대학생 30여명에게 둘러싸여 소매를 붙잡히는 등 5분여 동안 봉변을 당했다.김총리는 지난 2월 서울대 졸업식 참석길에서 학생들에게 승용차가 발길질을 당하는 등 한차례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는데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다.또 최근에는 신원불명의 남자가 세종로청사 9층의총리 접견실까지 무단으로 들어와 김총리의 사진을 찍으려다 발각된 사건도있었다. 새로 파견된 경호팀은 경험도 많고 무술실력도 뛰어난 정예 요원들로 알려졌다.
  • [외언내언] 옥류관 서울분점

    북한 최대 냉면음식점인 평양 옥류관(玉流館) 서울분점이 3일 서울 역삼동에서 문을 열었다.서울분점은 평양냉면 맛을 내기 위해 사리·육수·양념은물론 냉면그릇과 수저 등 일체를 북한에서 계속 들여온다고 한다.냉면 관련재료를 모두 북한에서 공수해 오고 평양냉면의 비법을 전수받은 조총련 소속 재일동포 조리사가 서울에 상주하며 직접 조리한다고 하니 마침내 냉면 본고장 평양의 옥류관 냉면맛을 보게 됐다.92년 9월 제8차 총리회담 지원단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옥류관 냉면맛을 잊지 못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크다. 이번 서울분점 개설은 남북교역업체인 ㈜옥류관과 조선옥류무역의 독점계약 체결에 따른 것이며 서울분점은 북한측에 상표이용과 기술을 제공받는 대가로 매출액의 1.5%를 로열티로 지불하기로 했다.또한 북한당국은 상호(商號)이용 권리를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 특허청에 상표등록까지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비록 냉면분점 개설이라는 작은 부분이지만 남북경제협력의 형식과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성과로 여겨진다.서울에 북한 영업점이 들어서는 것은 이번 옥류관 서울분점이 처음으로 남북교류 활성화에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더욱이 아무런 협의채널이 없는 상황에서‘남북간 지적재산권 보호’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열게 됐다는점을 고려하면 서울분점 개설은 값진 의미로 평가된다.냉면 사리와 육수의원활한 공급을 위해 평양에 식품공장을 설립하고 양강도에 메밀 계약재배 농장을 만드는 방안까지 북측과 협의하고 있어 단순한 냉면분점 이상의 남북교류 효과도 갖는다.이번 옥류관 냉면분점 개설은 민족음식인 냉면을 분단민족이 같이 맛봄으로써 단일민족의 공감대를 다지고 남북한 음식문화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됐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특히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반세기 전에 먹었던 평양냉면을 직접 먹어볼 수 있어 망향의 그리움을 덜어주는 정서적 효과도 기대된다.고향은 갈수없어도 고향냉면을 먹으면서 향수를 달랠 수 있기 때문에 실향민들에게 인기가 대단할 것으로 예상된다.우리의 전통혼례에서 국수가락을먹는 것은 국수가 갖는 화합동류(同類) 의식의 친밀성 때문이다.지난 69년 미·중 관계를작은 탁구공으로 뚫었듯이 냉면가락에 남북관계 개선과 화합을 위한 한가닥기대를 거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평양 옥류관 냉면의 서울 등장이 민족정서 복원과 화해와 화합의 상징적 이정표가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평양 옥류관 냉면 서울서 맛본다

    평양냉면 전문점으로 북한 최고의 음식점으로 평가받는 평양옥류관의 냉면맛을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됐다. 조총련계 기업의 중개를 통해 평양옥류관과 분점개설 계약을 체결한 주식회사 옥류관(대표이사 김영백)은 3일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823번지에 옥류관서울점 개점식을 갖고 4일부터 정상영업을 시작한다. 옥류관 서울점에서는 평양냉면을 비롯해 평양온반,평양불고기 등 약 20여종의 메뉴가 제공된다.메밀을 비롯한 식자재와 식당운영에 필요한 수저,냉면그릇 등 집기류,비품,소모품 등은 모두 북한에서 직반입했다.평양옥류관에서수차례 조리기술을 연수받은 재일교포 박수남(43)씨가 주방고문역을 맡아 평양옥류관 냉면의 진수를 선보인다. 구본영기자 kby7@
  • 불법파업 손해배상 청구…지하철 미복귀자 면직

    정부는 서울지하철 파업근로자 4,000여명이 농성중인 서울대에 이르면 24∼25일 중 경찰력을 투입,강제해산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또 오는 26일 오전 4시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는 서울지하철 노조원들에 대해서는 직권면직 조치와 함께 불법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할 방침이다. 정부는 23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이규성(李揆成)재경,박상천(朴相千)법무,김기재(金杞載)행정자치,이기호(李起浩)노동 등 4개 부처 장관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서울지하철노조의 불법파업과 관련,이같은 방침을 천명했다. 4부 장관들은 “서울지하철 파업 가담 노조원들이 사규에 따른 복귀시한인26일 오전 4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직권면직시키겠다”면서 “불법파업으로 발생한 손해는 반드시 배상토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서울지검 공안2부(申泰暎부장검사)는 이날 서울지하철 근로자 4,000여명과‘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농성중인 서울대 학생회관과 노천극장 등 2곳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법원으로부터 발부받았다. 검찰은 24일 오전 서울시,노동부,국방부,경찰청 등 유관기관 실무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안대책협의회를 갖고 강제해산 방안 등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다. 이에 맞서 이갑용(李甲用) 민주노총위원장은 농성중인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가 대화를 거부한 채 초강경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오는 27일부터 금속산업연맹 산하 모든 사업장이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파업투쟁을 민간제조업 부문으로 확대하겠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지하철 노조지도부와 노조원들은 파업 닷새째인 이날도 명동성당과 서울대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시민단체의 중재로 파업을 유보했던 부산지하철 부산교통공단 노조도 해고자 복직 등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26일 오전 4시부터 전면파업에돌입키로 했다. 대우조선 노조는 거제시 옥포동 매립지에서 ‘대우조선 매각 저지를 위한노동자 및 시민 결의대회’를 갖는 등 4일째 파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노조 부산지부와 동래지부는 이날 예정된 파업을 김우중(金宇中)회장과의 면담 후로 유보했다.한편 서울대는석치순(石致淳)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을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김명승기자 mskim@
  • 밀입북 한총련여대생 특수잠입 혐의 무죄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金大彙부장판사)는 22일 한총련 대표로 밀입북해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은 황선(黃羨·25·여)피고인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의 특수 잠입·탈출 혐의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및 회합·통신죄를 적용,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특수 잠입·탈출죄가 규정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은 우월적 또는 종속적 관계가 요구되는 데다 지령내용도 구체적으로 특정돼야 한다”면서 “그러나 피고인은 한총련 및 범청학련 남측본부와 북측본부와 대등한 지위로 서로 연락을 통해 입국했을 뿐 북측의 지시에 의해 활동했다고 볼 수 없는 만큼 무죄”라고 밝혔다.하지만 “국가의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밀입북한 점은 일반 잠입·탈출죄에 해당하고 북한에서의 행사에 참석한 사실관계가 인정되기 때문에 회합·통신 및 찬양·고무 혐의는 유죄”라고 덧붙였다.
  • 양노총 지도부 움직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정부의 불법파업 엄정대처 방침 발표에 겉으로는 초연해 하면서도 각종 대화채널을 통해 진의를 파악하는 한편,집행부를 중심으로 대책을 숙의하는 등 바쁜 움직임을 보였다. 민주노총 서울지하철 노조로부터 시작된 공공연맹 파업이 갈수록 세를 얻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파업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예상에 없던 대우조선 노조가 전면 파업으로 가세하고 서울지하철 노조원들의 복귀율이 극히 저조한 등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게 지도부의 판단이다. 이갑용(李甲用)위원장이 “정부가 민주노총 고립작전을 계속한다면 정권에대한 무한투쟁도 불사하겠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오는 26일과 새달 12일로 예정된 한국통신 노조와 금속산업연맹의파업이 실현된다면 정부의 ‘양보’도 얻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즉,지금의 투쟁 분위기를 5월1일 노동절 행사로 연결시킨 뒤 5월 초·중순의 대기업 연대파업으로까지 끌고 간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인 것 같다.대부분 노조의 임·단협이 5월에 시작되는 것과 한총련 등 운동권 학생들이 측면지원에 나선 것도 플러스 요인으로 보고 있다. 집행부는 승패의 핵심이 조직 결속력에 있다고 보고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을 서울지하철 노조원들이 농성중인 명동성당으로 집결시키는 등 핵심조직이탈 방지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노총 정부로부터 노사정위원회법 제정을 약속받은 상태여서 운신의 폭이 극히 좁은 상황이다.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사태에 대해서도 “이번 파업은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과 노동탄압 정책에서 비롯됐다”고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면서도 “성의있는 협상을 통해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기를 기대한다”는 원론적 수준의 성명을 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지하철 파업사태가 경찰력 투입이라는 최악으로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여론,특히 노동계의 풍향에 따라 파업에 동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없다. 김명승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한총련집회 참가 전원 사법처리

    대검찰청 공안부(秦炯九 검사장)는 14일 공안대책 실무협의회를 갖고 16∼18일 홍익대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7기 한총련 대의원대회를 원천봉쇄,참가자전원을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동조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키로 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7기 한총련 대의원 전원과 검거되지 않은 5·6기 대의원76명 등 모두 299명에 대해 검거전담반을 편성했다. 검찰은 또 한총련이 노학연대 차원에서 민주노총 등과 연계,서울지하철공사파업 등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사전 차단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최근 한총련이 20여차례에 걸쳐 투석전 등을 전개하면서본격적으로 조직재건에 나서고 있다”면서 “대전지법의 무죄 판결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배치되는 만큼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보는 검찰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제2공화국과 張勉](14)분출하는 욕구(中)/교원노조

    4월혁명후 활발해진 각계의 움직임 가운데 노동운동은 특히 두드러졌다.이승만(李承晩)정권에서 체제유지의 첨병 노릇을 한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등 기존의 노동관련 단체들은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갔다.반면 노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노동조직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고 쟁의도 크게 늘어났다. 4·19직전 전국의 노동조합은 621곳,조합원은 30만7,000여명이었다.하지만다섯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60년 9월1일 현재 조합 수는 821군데로 32.2%,조합원 수는 33만3,000여명으로 8.6%가 각각 늘어났다. 노동쟁의도 1958년에 50건,59년에 109건이던 것이 60년에는 218건으로 급증했다.노동운동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활력을 보인 것이다. 그 격렬한 흐름 속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교원노조 운동이었다.교직(敎職)이 갖는 가치지향적 성격에,학생·학부모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도 컸지만 무엇보다 교원노조가 합법성을 얻고자 벌인 투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다. 교원노조 운동은 4월혁명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된다.대구에서는 4월29일 경북여고에 중고교 교사 60여명이 모여 학원 자유화와 교사의 권익옹호를 위해 ‘교원조합’을 결성키로 합의한다. 이어 ▲5월1일 동성고에서는 ‘서울시 교원노조결성 준비위원회’가 ▲5일에는 전주고에서 교원노조가 ▲12일에는 부산 동광초등학교에서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각각 출발한다.5월 말이면 학교 단위로,또는 시·군 단위로 교원노조가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지 한달만에 이처럼 교원노조가 전국적으로 자생하게된 토양은 무엇일까.그것은 ‘속죄와 책임의식’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독재권력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는데 그들을가르친 교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그리고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저지를지도 모르는 권력 앞에 무방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사실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정권이 교육계에 저지른 만행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교육감·교장들이 나서 교사들을 자유당 비밀당원으로 입당시킨 일은 기본이었다. 환경미화를핑계로 이승만·이기붕(李起鵬)의 사진,업적을 교실에 장식토록해 그 결과로 교사의 근무성적을 평가하거나 ▲교장·교감이 가정방문에 나서 자유당후보 지지를 직접 호소하고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켜 이승만을찬양토록 하는 일들이 예사로 벌어졌다. 교육계 지도자들도 총동원되다시피 했다.60년 1월26일자 서울신문 1면에 난자유당의 ‘정·부통령선거중앙대책위원회’공고를 보면 지도위원에 백낙준(白樂濬)김활란(金活蘭)임영신(任永信)김연준(金連俊)유석창(劉錫昶)등 사학(私學)의 거물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을 정도였다. 교원노조 운동은 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를결성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통일된 체제를 갖춘다[별표 참조].이때 노조에 참여한 교사는 이미 1만9,883명이었다.교조총련은 위원장 자리를 당분간 공석으로 두는 대신 서울지구 부위원장인 강기철(姜基哲)을 대표로 지명했다.얼마전 타계한 재야인사 계훈제(桂勳梯)도 서울지구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정부측 대응도 곧바로나왔다.허정(許政)과도정부의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은 “교원노조 결성을 권장하지도 막지도 않겠다”고 밝혔다.그러나 곧이어 이병도(李丙燾)문교장관은 5월19일 “교원노조를 불허한다”고 신문지상에 발표했다. 교원교조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이 곧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교사들은 53·57년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합법’을 주장했고 대한변호사회도 이를 지지했다.‘7·29총선’을 앞둔 민주당의 장면(張勉)주요한(朱耀翰)조재천(曺在千)등 신파 지도자들도 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교원노조와 행정권의 정면충돌은 60년 8월 대구에서 발생했다.조준영(趙俊泳)경북지사가 대구·경북의 노조간부 25명을 산간벽지로 전근시킨 것이다.대구·경북 노조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8월25일 오후6시 조합원 8,000명 전원이 퇴직한다’는 마지노선을 확정한다. 조합원들은 11일부터 연좌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16일에는 경북지사의 부당한 인사조치를 중단시켜 달라는 ‘행정처분 집행정지명령 가처분신청’을 대구고법에 냈다. 이 와중인 8월23일장면내각이 정식 출범한다.교조총련의 강기철 대표를 비롯한 수뇌부는 오천석(吳天錫)문교장관,윤택중(尹宅重)문교부 정무차관과 협의를 계속한다. ‘교사 8,000명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러나 의외로 손쉽게 해결된다. 교조가 정한 시한인 8월25일 대구고법이 경북지사의 인사가 잘못됐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그 이유는 ▲교원노조 결성이 합법이며 ▲경북지사의 인사권 행사는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것으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이 사태후 장면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교직단체법 개정’을 통해 교원노조 운동의 흐름을 바꾸려고 애쓴다.그렇지만 교원노조는 9월 말 단식투쟁에 돌입해 결속을 과시한다.교원노조 운동은 1960년 당시 한국 노동운동을대표했다.이 운동은 ‘5·16쿠데타’후 사실상 사라졌다가 결국 1980년대 ‘전교조운동’으로 되살아난다. 이용원- 교사40%가 자발적 참여 교원노조 운동에서 노조를 대표한 인물은 강기철(姜基哲·74·전 평택대교수)씨.강씨는 19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가 발족할 때 대표를맡았다.그는 ‘5·16쿠데타’로 교조총련이 용공·불법 단체로 낙인 찍힌 다음에도 지금까지 그 대표직을 유지해 왔다. 강대표는 교원노조가 설립될 당시 한양대 강사였다.그는 “‘3·15부정선거’당시 교육자는 독재권력의 하수인 내지는 시녀 노릇을 해왔다”면서 그 당시를 “정신적인 노예상태”라고 기억했다. “교원노조는 자주적인 힘으로 탄생했다”고 강조하는 그는 “당시 전국의교사가 10만명이 채 안됐는데 그 가운데 4만명 가량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강교수는 허정(許政)과도정부 당시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김학묵(金學默)보사차관 들이 처음 교원노조 결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음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들이 입장표명을 한 지 며칠만에 현직에서 쫓겨나더라는 것. 강교수는 “장면(張勉)정부는 교원노조 운동에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고 평가하면서 “그래도 쿠데타 세력보다는 장면정부의 죄가 엷다”고 말했다. - 노조측 쟁의권 자진포기 교원노조 설립 당시 윤택중(尹宅重·86)옹은 장면내각의 문교부정무차관이었다.윤옹은 전북 학무국장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장면내각에 문교부 정무차관으로 들어갔으며 나중에 문교장관을 지냈다. 그는 교원노조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강대표 등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간부들을 만나 장면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이다. 윤 전장관은 “당시에도 교사들의 노동운동은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다는 인식이 깊었다”고 회고했다.교사들에게 단체행동권 등을 인정하는 것은 좋으나 굳이 ‘노동조합’이란 명칭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반감이 있었다는 것. 윤 전장관은 “교원노조 대표들과 상의할 때도 일반 노동조합과는 다르다는사실에 뜻을 같이했다”고 공개하면서 “그들도 파업 등 쟁의권을 실제로 포기했다”고 밝혔다.그는 교원단체 명칭을 ‘교원노조’가 아니라 교원연구단체나 교원친목단체로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다 ‘5·16쿠데타’를 당했다”고도 기억했다. 장면내각에 들어올 당시 신·구파 어느쪽도 아니라 중도파로 인정받은 윤 전장관은 “다만 민주당원으로서 새 정부 출범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신·구파 갈등이 혁명을 불렀다는 주장은 쿠데타세력이 조작한 명분”이라고 단정했다. 이용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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