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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50돌 기념사업 대폭 축소/당초 90개서 48개로

    ◎예산도 1백50억으로 반감 정부는 내년에 있을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을 경축식등 중점사업 18개,독립유공자의 발굴과 포상등 관련사업 30개등 모두 48개로 잠정 확정했다. 이는 처음에 계획했던 90개에서 대폭 축소된 것이며 이에 따라 예산도 3백억원에서 1백50억원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정부는 대신 민간차원의 기념행사를 보다 확대하기로 하고 민간단체들의 자발적인 기념행사 추진을 적극 유도할 방침이다. 정부가 잠정 확정한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은 다음과 같다. ▷중점사업◁ ▲광복 50주년 중앙경축식 ▲구총독부 철거행사·미술전 ▲광복길놀이 ▲중경임시정부청사 복원행사 ▲독립유공자위문 격려행사및 해외유공자 초청 ▲광복 50주년 기록영화제작 ▲근대백년 민속풍물전및 생활사 전시 ▲전통음악대공연및 창작 국악무용극 ▲경제전시관 설치및 수출상품 전시회 ▲세계한민족 삶 소개 영상자료 제작 ▲세계한민족 총서 제작 ▲95세계한민족 축전 ▲독립기념관 대축제 ▲예술의 전당 종합예술축전 ▲농어촌 한마당 전진대회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 ▲세계속의 한국경제 대토론회 ▲TV기획 민족통일 대토론회 ▷관련사업◁ ▲독립유공자 대대적 발굴 포상 ▲독립유공자 관련 추모사업 ▲해외선열 유해봉환및 묘소단장 ▲국내외 독립운동 사적지 순례 ▲독립운동 관련 해외사료조사및 문헌발굴 보급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재조명 ▲한국독립운동사 재조명학술대회 ▲제3차 한·중 국제학술대회 ▲일제식민지 정책 학술대회 ▲광복반세기 경제사회상 책자발간 ▲국내외 순회 사진전 ▲광복50주년 기념 민족예술경연대회 ▲무궁화 우수품종 전시회 ▲한국미술의 오늘 전시회 ▲광복50주년 기념교포행사 ▲세계적인 대형뮤지컬 창작 순회공연 ▲광복 50주년 기념 시·도별 통일문제 대토론회 ▲95미주한민족 통일포럼 ▲세계한민족 통일문제 대토론회 ▲전국대학생 통일논문 현상공모 ▲국립중앙극장 창작예술 특별공연 ▲광복50주년 기념 종합학술대회 ▲재외한국인 초청 청소년 과학경진대회 ▲한·일 문화 온고이지신 ▲통일한마음 달리기 대회▲국민체육문화축제 ▲KOREA CUP 국제축구대회 ▲21세기 10대우주강국 도약을 향한 우주주간 선포 ▲기념우표 발행
  • 정자:하(서울 6백년 만상:58)

    ◎창덕궁 후원엔 아직도 15개 정자 그대로/부용정·관람정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존/부암동 석파정,대원군 별장으로 유명 정자의 보고인 창덕궁 후원에는 지금도 관람정·애련정·승재정·능허정·청심정등 무려 15개의 정자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자리잡고 있다.방형·육각형·다각형·부채 모양의 다양한 정자는 연못,그리고 누각등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전체면적이 약 9만여평에 이르는 창덕궁 후원은 북악에서 내려뻗은 완만한 언덕과 여기저기에 맑은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어 연못과 정자를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태종때 창건됐다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창덕궁에 이처럼 많은 정자가 지어진 것은 후원의 대규모 조성공사가 벌어진 광해군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원 중심에 있는 연못인 부용지 남쪽에는 사방에 창살문까지 꾸며진 부용정이 마치 물위에 뜬 형상으로 있고 북쪽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주합루가 자리잡고 있다.또 한반도 모양의 연못 반도지 동쪽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부채꼴형 정자인 관람정이,남쪽에는 육모지붕의 존덕정이,연못 반대편 언덕위엔 마치 절간같은 승재정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임금들이 산책을 하는 도중 들러 정사로 복잡해진 심신을 식히거나 대소신료와 외부 손님을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기에 정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였다.또한 조정 중신들이 한가한 시간을 틈내 독서를 하거나 강론을 펴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등박문등 일본의 대신들을 접견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가는 길목인 부암동동사무소에 인접한 종로구 부암동 316의1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이 있었다.석파정은 본래 철종때의 권신인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대원군이 이 별장을 빼앗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철종이 승하한 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등극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그동안 수모를 주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골몰했으며 특히 그 권문의 한 사람인 김흥근을 미워했다.대원군은 주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의 물이 맑아 그야말로 별천지인 석파정을 김흥근으로부터 빼앗기로 하고 꾀를 냈다. 일단 자신의 부인 병요양을 핑계로 임시로 석파정을 빌려쓰던 대원군은 어느날 『대궐에만 갇혀 계시니 좀 갑갑하시겠냐』며 고종을 석파정으로 초청했다.고종이 도착한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원군은 대전 내시를 통해 상감께서 오늘밤 이곳에서 유숙하기로 했다는 담화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국왕이 한번 유숙한 곳은 민간인의 소유를 금하는 국법을 이용해 김흥근으로 하여금 석파정을 포기케 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사연을 지닌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에도 계속 왕실에 세습돼 오다 일제때는 총독부 소유로 변했으며 6·25 직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터를 잡기도 했다. 지금 석파정에서 세검정쪽으로 2백m 내려간 홍지동 125에는 옛날 석파정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대원군별장」으로 불리는 사랑채 하나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석파정은 서울시 지정문화재 26호로,대원군별장은 23호로 지정돼 개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 일 총회 마친 김윤환 한일의원련회장

    ◎“일 「데라우치문고」 반환 곧 성사”/진정한 과거정리 공감대 확산/한·중·일의원협의체 구성 활발/행정구역 개편 논란불구 불가피성 인정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21세기의 진정한 아시아·태평양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인식을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이 공유한 자리였습니다』 지난주 일본 토쿄에서 열린 한일의원연맹총회에 47명의 우리측 대표단을 이끌고 다녀온 김윤환연맹회장은 『일본에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내각이 들어선뒤 과거에 대한 정리없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객관적인 역사관이 정립돼 가고 있다』면서 『「데라우치문고」를 포함한 문화재의 반환이나 일왕,왕세자의 방문등을 통해 과거사를 사죄하는 구체적인 역사 정리작업이 곧 이뤄질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데라우치문고」는 일제의 초대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가 조선에서 수집해간 문화재를 고향인 야마구치현의 여자대학에 기증한 것으로 김생,최치원,정몽주,김정희의 서화와 서간집등 1천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김의원은 『일본측과 반환협의가 계속되고 있으며 소장자인 야마구치여대측에서도 부정적이지는 않다』고 전하고 『역사학자들이 현지를 방문,고증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일단 반환에 앞서 문화재 전부를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우리측에 보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김의원은 또 『데라우치문고 말고도 일본 정부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밝히고 『일본측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이고 성의있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김의원은 일본측이 해방 50주년,한일기본조약 체결 30주년이 되는 내년의 역사적 의미를 매우 중시,두 나라가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이같은 사업을 뒷받침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의원은 『물론 일왕이나 왕세자의 방문은 오히려 우리국민의 정서를 그르치게 할 우려도 있다』고 짚고나서 『그 때문에 일본의 국회가 동아시아 국가들을 향해 과거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공식결의하고,일왕이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지금까지의 수사학적 변명이 아니라 「이만하면 과거문제는 정리됐다」고 납득할만한 수준의 사죄를함으로써 역사를 정리하자는 의견이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김의원은 이번 총회에서 한,중,일 3국이 의회차원에서의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직접 제안,구체적인 실무협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도이 다카코 일본 중의원의장은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맞아 정부차원의 APEC뿐만 아니라 북한과 러시아를 포함한 아시아국가 의회간의 회의체 구성이 필요하다』고 동감을 나타냈다고 소개했다. 민자당의 경북도지부위원장이기도 한 김의원은 일본 체류기간중 국내에서 계속 전개된 행정구역 개편 논란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칙을 갖고 추진했어야 했다』고 지적하면서도 『대구가 경북에 편입되지 않으면 확장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범위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종합청사 신관」 짓는다/옛 치안본부 자리에 연건평2만평 규모

    서울 세종로 제1 정부종합청사 맞은편 정부합동민원실 부지(옛 치안본부 자리)에 정부종합청사 신관이 들어선다. 정부는 9일 정부합동민원실 부지 2천6백70평에 연건평 2만평 가량의 지상 12∼15층 안팎짜리 새 청사를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이 건물 지하에는 4층에 걸쳐 8천평 규모의 주차장도 마련된다. 정부청사 신관 건축작업에 드는 예산은 1천2백억원 가량이다.내년에 공사를 시작해 3∼5년안에 공사를 마무리짓는다는 계획을 짜고 있다. 정부는 우선 내년 정부 예산안에 설계비 20억원을 잡아놓았으며 곧 관련 전문가로 설계심사위원회를 구성한 뒤 내년초 설계를 공모할 예정이다. 청사 신관에 입주가 확정된 정부기관은 총리실과 외무부.두 기관이 들어가고도 여유공간이 남으면 정무장관실등 총리 직속 부처들이 입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가 사무실 부족및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옛 치안본부 자리에 새 청사를 지어보겠다는 구상을 한 것은 사실 상당히 오래전이다.특히 외국의 주요 인사를 많이 맞이하는 외무부는 깨끗한 단독청사를마련해줄 것을 강력히 희망해왔다.정부는 현재의 여건에 비추어 외무부 단독청사는 어렵다고 보고 비교적 민원인의 발길이 뜸한 총리실과 함께 청사를 쓰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외무부가 단독청사의 기분을 내도록 배려했다. 이번에 신축이 결정된 정부청사 신관건물은 우리의 국력에 걸맞게 장중한 건물로 설계될 것이라고 총무처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대규모 동시통역 회의장이 설치되는 등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이 되리라는 설명이다. 정부청사 신관이 건축되면 현재 국립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옛 조선총독부건물이 철거되고 경복궁이 복원되는 것과 아울러 세종로 관청가가 새 모습으로 태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세종로 전체의 분위기를 바꾼다는 차원에서 제1청사도 오는 10월부터 1년동안 40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하기로 했다.제1청사는 지은지 25년이 지나 보기도 흉하거니와 낙석의 위험까지 있다는게 청사운영실측의 판단이다.
  • 일제총독 데라우치 수집 우리문화재/1천여점 내년 돌아온다

    ◎김생·최치원·정몽주·김정희 등/신라∼조선시대 서화·고문 포함/한·일의원연맹 주선… 반환성사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가 수집했던 우리 문화재 1천여점이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윤환)의 알선으로 곧 우리나라에 돌아올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데라우치문고」로 불리는 이들 문화재는 신라의 김생,고려의 유신·탄연·최우등 「신품4현」과 신라의 최치원을 비롯,고려말기의 정몽주,조선후기의 김정희·한호(아호 석봉)·강희맹·정약용등 각 왕조시대를 대표하는 명필과 화가 대학자들이 남긴 저서와 고문서 서한집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으로 재임할 때 조선과 중국등지에서 수집한 문화재를 고향인 규슈(구주)야마구치현의 여자대학에 문고로 기증했다. 올해초 이를 처음으로 발견한 박영석전국사편찬위원장은 「데라우치문고」의 반환문제를 정부측에 제기하려고도 했으나 공식적인 반환이 사실상 어려운 점을 감안,민간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한일의원연맹에 이 사실을 알렸다.이에 따라 한일의원연맹은 일본측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회장과 가와무라 다케오(하촌건부) 21세기위원장,일한친선협회의 다나카 다츠오(전중용부)회장등을 통해 반환교섭을 벌인 결과 이들은 최근 늦어도 광복 50주년과 한일재수교 30주년이 되는 내년 안에 「문고」를 반환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는 것이다. 「문고」를 소장하고 있는 야마구치여대측도 내년부터 문학부가 폐지됨에 따라 기증형식으로 문고를 돌려준다는 원칙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한일의원연맹의 김영광운영위원장과 지철민사무총장은 지난 7월 문화재 전문가들과 함께 야마구치여대를 방문,문화재의 종류와 보관상태를 확인했다. 이 때 일행으로 갔던 임창순태동고증연구소장과 문화재관리국의 최순희전문위원은 『소장된 문화재의 규모가 워낙 방대해 자세한 목록까지는 살펴보지 못했다』고 밝히고 『신라 때부터 조선후기에 이르는 대표적인 문인과 명필의 작품이 시대순으로 잘 보관돼 있으며 작품의 폭도 넓어 서도사 뿐 아니라 시대적사회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문화재의 반환이 이루어지면 프랑스등 외국에 반출된 우리의 문화재를 환수하는데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97년 홍콩 인수뒤 현입법기구 폐지

    【북경 로이터 연합】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오는 97년 홍콩의 주권인수후 홍콩의 현 입법기구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입법기구를 세우도록 하는 내용의 안건을 의결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31일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전인대 상무위가 이날 오는 97년6월30일로 홍콩의 입법국,정청과 지역정부 등을 폐지키로 하는 안건을 표결에 부쳐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전하고 『중국은 홍콩주권 인수후 크리스 패턴 홍콩총독의 민주화개혁계획에 근거한 홍콩의 정치구조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구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 중,「홍콩개혁 무효화」 본격 나서/전인대상무위에 법안 제출

    【홍콩 UPI 연합】 중국은 홍콩의 민주개혁조치를 무효화시킬 새로운 법안을 마련,공식으로 법제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관영 신화 통신이 24일 보도했다. 신화 통신은 이날 8일간의 일정으로 시작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에 홍콩과 접해있는 남부 광동성 출신 대의원 32명이 연명으로 제출한 문제의 법안이 심의 안건으로 공식 상정됐다고 전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홍콩의 현행 정치구조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오는 97년 주권 반환시 크리스 패튼 홍콩 총독이 도입한 민주개혁조치를 철폐할 것임을 다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은 중국 수뇌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어서 다른 법안과 달리 심의과정을 무난히 통과,전인대 상무위원회의 폐막일에 채택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 국내최초 국민학교/서울교동국교 개교 1백돌

    ◎새달 18일 기념식… 준비 한창/백년사 발간·학술발표회 계획/초등교육의 산역사… 3만명 배출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효시이자 산역사인 서울 종로구 경운동 교동국민학교(교장 유춘근·57)가 개교 1백주년기념일(9월18일)을 한달 앞두고 개교기념 학술발표회,교동1백년사 발간,사료관 시설확충등 행사준비가 한창이다. 구한말 「소학교령」이 선포된 때보다 10개월 앞선 1894년 왕실자녀들을 대상으로 신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관립교동소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이듬해 「한성사범부속소학교」로 교명이 바뀐 것을 비롯,그동안 「관립교동보통학교」 「교동심상소학교」등 여러개의 교명을 거치며 꿋꿋이 맥을 이어왔다. 교동국교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기념행사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교동의 역사를 생생히 담아내는 「교동1백년사」의 발간.이미 3년전부터 기초작업을 해온 이 사업은 사학자들의 철저한 문헌검증뿐만 아니라 교사들이 직접 도서관과 언론사 자료실을 뒤지며 관련자료들을 찾아내 연도별로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클 것으로 보인다. 8백쪽 분량의 이 책자에는 특히 일제시대 말기 전쟁에 광분해 있던 조선총독부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지어야 하는 치욕의 역사가 처음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교동국교는 또한 이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전쟁의 와중에서 졸업장을 받지 못한 51년과 52년 졸업생들을 수소문해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추가졸업규정」까지 마련,신청을 받고 있으나 4백여명의 대상자 가운데 아직까지 30여명만이 신청을 한 상태여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초의 초등공교육기관으로 격동의 한세기를 거쳐오면서 지금까지 이 학교가 배출한 졸업생은 3만3백여명. 이 가운데는 윤보선전대통령과 초대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씨,아동문학가 윤극영선생등이 있으며 이밖에 소설가 심훈,아동문학가 윤석중·조풍연,연극인 이해랑등 사회 각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많다. 한성사범부속소학교 시절 1백36명이던 전교생수는 학교규모가 가장 클 때인 63년 5천2백50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그 당시의 10%정도인 5백12명이 66년전에 지은 낡은 철근콘크리트 3층 건물에서 공부하고 있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초등교육환경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교장은 『교동의 1백년역사가 곧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역사』라며 『개교1백주년을 계기로 과거의 뿌리와 전통을 되살려 앞으로의 교육이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밑거름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 김계수 광복5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인터뷰)

    ◎“왜곡된 역사 재평가에 역점”/민족정신 되살리고 향후 비전 제시/내년 8·15전 총독부건물 철거 노력/남북관계 진전되면 기념사업 공동개최 가능 『내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김계수광복50주년기념사업위원장은 서울신문과의 단독 회견을 갖고 『지난 50년간을 재정리하고 앞으로 50년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위원회의 할 일』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우선 광복 50주년의 의의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우리의 광복 50주년은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 프랑스의 혁명 2백주년과 다릅니다.우리는 광복뒤 지금까지 분단과 6·25를 경험했습니다.또 정치적 사건으로 따지자면 4·19 5·16 12·12 5·17등 기구하고 참을 수 없는 시련이 많았습니다.다시 말해 해방의 벅찬 감격이 곧 사라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광복 50주년이 다른 나라의 기념일과 다른것은 이 때문입니다.특히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미국은 그동안 전통을 잘 확립해온 반면 우리는 분단등 우여곡절로 인해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국민의식의 형성과 통합에도 실패했습니다.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재평가하고 재확립해야 합니다.그리고 그런 다음에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친일인사들이 독립운동가로 둔갑돼 민족사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민족정신 왜곡의 결과입니다.그런 주장은 지난 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국민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의식할 수 있는 역사를 재정립한다면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거듭 강조하지만 해방후 50년간의 역사를 바로잡고 비판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우리사회 여러 분야의 공통분모를 추출해 지금의 상황을 종합분석하고 모든 국민이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또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서 국민들이 한 덩어리가 돼야 합니다.그런 다음에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50주년은 남북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광복을 기리는 것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입니다.남북관계가 진전돼 판문점이나 개성에서 공동으로 행사를 개최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남북이 함께 기념사업을 거행하는 몇가지 안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공동 개최를 제의할 생각은 없습니다.설사 공동으로 사업을 개최하더라도 현안이 해결되지 않고 화해무드가 조성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원회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위원회가 직접 관여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광복 50주년에 맞춰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돼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절대로 안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위원회에서는 내년 8월15일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더라도 광화문 앞에서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가질 작정입니다.그런데 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옛 모습 그대로 서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습니다.총독부 건물이 해체되지 않으면 광복 50주년의 의의가 퇴색할 뿐아니라 행사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위원회의 활동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 3월28일 발족한 이래 25명의 위원 전원이 참석하는 본회의를 5차례 열었고 10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도 11차례나 가졌습니다.분과위 회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하지만 기념사업 성공의 관건은 정부에서 파견된 기획추진반원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사업을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위원회는 범국민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국무총리자문기구로 돼있어 정부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올해 49주년 행사와 달라지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지난 50년간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민족선언」의 발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또 책자와 논문의 발간도 고려중입니다.마음이 든든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까닭에 과거를 재평가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큰 힘이 된다는 점입니다.정권의 합리화에 몰두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정신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도덕적으로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 광복절 49돌/민족 자존심 살리기 행사 풍성

    ◎문체부,「국악의 해」·「동학농민운동 1백돌」 사업과 연계 추진/창극 「윤봉길·안중근의사가」 공연/국립국악원,수원에서 국악의 밤/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청소년 음악축제 정부는 10일 광복절 49주년을 맞아 우리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살리고 국민적 화합과 공동체문화 진작을 위한 다양한 경축문화 행사를 갖기로 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는 뜻깊은 해로서 구 조선총독부건물 해체 및 국립박물관신축을 추진하는 등 민족문화의 발전 토대 마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어느 해보다 의미있는 해이다. 문화체육부는 특히 올해 광복절 경축문화 행사를 「국악의 해」와 「동학농민운동1백주년」사업과 연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적 축제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마련,전국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행사는 오는 13일 하오 6시에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꾸며지는 국립창극단 단원 명창 김영자씨의 창극 「윤봉길 의사가」와 「안중근 의사가」공연과 한국전통 택견연구회장인 이용복씨의 전통무예택견 한마당. 이 자리에는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 국립조선극장 가무단소속 조균화씨의 우리가요 열창도 있다. 이보다 앞서 12일 수원연무대 특설무대에서는 국립국악원과 수원문화원이 주최하는 국악의 밤 행사가 펼쳐진다. 이날 공연에는 명창 김일구씨의 판소리 한대목과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강강술래 부채춤 등이 공연되며 사물놀이와 경기민요연창 등도 있을 예정이다. 15일부터 10월30일까지 독립기념관 전시실에서는 동학농민운동1백주년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는 동학군의 사발통문 고종과 초토사 홍계원의 문답기록,조석헌이 쓴 북접일기와 최덕기가 쓴 동학일기 등이 전시된다. 또 오는 20일 하오 5시 덕수궁 특설무대에서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경축 청소년 음악축제가 열리며 이날 하오 7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당에서는 한국페스티발 앙상블이 주관하는 「재즈와 국악의 만남」「재즈와 클래식의 만남」등의 야외 무대가 펼쳐진다.하성호씨가 지휘하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축제에는 채주병씨의 거문고와 김청만씨의 장구연주가 펼쳐지고 소프라노 박미혜씨와 가수 최성수씨가 나와 우리 가곡과 가요를 부른다. 또 국악의 해를 맞아 지방국악 활성화로 민족음악에 대한 범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을 위해 제주문예회관과 춘천 종합문화 예술회관에서 제주민요와 강원민요 열창이 펼쳐진다.
  • UR비준­당정개편 결단 내린듯/궁금한 김 대통령 휴가구상

    ◎8월국회로 가닥… 당·정갈등 정리/대폭 개편 예상속 TK포용책 관심 김영삼대통령이 지난 2일부터의 여름휴가를 끝내고 7일 서울로 돌아온다.대통령이 휴가기간동안 무슨 구상을 했으며 그를 어찌 펼쳐놓을 지에 모두의 촉각이 쏠려 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이 청남대에서 보낸 휴가일정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푹 쉬고 있다고만 알아달라』는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그렇지 않은 듯 싶다.청와대 비서실이나 각 부처,민자당에서 올린 보고문건이 매일 청남대로 보내지고 있음에도 김대통령은 수시로 직접 업무를 파악하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식 일정만 없다 뿐이지 실제로는 대통령의 업무를 모두 챙기는 셈이다.청남대를 휴가처가 아니고 「하계집무실」이라 지칭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김대통령의 「핫 라인」전화가 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면 그의 관심의 방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대통령의 불시전화 때문에 24시간 긴장한 대표적인 곳은 청와대의 비서실장실과 정무및 외교안보수석실이다.김대통령이 휴가기간에도 정치문제와 외교·국방·남북문제는 직접 다루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 가운데서도 정무수석실은 더욱 바빴다.정치문제가 가장 큰 현안임을 시사한다.이원종정무수석은 대통령과 같은 기간 휴가일정을 짰으나 결국 휴가를 반납하고 말았다.대통령이 하루에도 몇차례씩 찾으니 서울을 벗어나기 힘든 처지였다.차라리 집무실을 지키는게 속편하다고 여겼는지 계속 청와대에 출근했다. 김대통령은 지난해에도 8월 8일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9일 옛조선총독부건물의 철거,11일 구조선총독관저철거를 지시했고 12일에는 금융실명제라는 메가톤급 조치를 단행했다.어찌 보면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결단들이다. 하지만 올해는 정치문제에 있어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많다.당장 8월 임시국회의 소집여부를 교통정리해주어야 한다.청와대와 민자당이 미묘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들 대통령의 「처분」만 바라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으로서는 임시국회를 여는 쪽이 우세하다.김대통령과 상시보고채널을 가동시키고 있는 이정무수석이 일관되게 8월말 임시국회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비준안의 처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여름휴가를 끝낸 김대통령에게 주어진 정치적 숙제는 또 있다.「8·2 보궐선거」뒤의 여야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며 이른바 「TK민심이반」을 다독거릴 묘책은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정치스타일은 어려움이 있으면 더 큰 사안을 터뜨려 그를 극복하는 형태로 많이 나타났다.「깜짝쇼」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정면돌파」라는 평가도 받았다. 따라서 보궐선거에서의 사실상 패배와 UR비준안 처리를 둘러싼 경색정국을 일거에 푸는 고단위 조치가 나올 수 있다는 관측도 대두한다.금융실명제 같은 정책적 충격조치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에 대대적 당정개편이 선택되리라는 예상이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통령이 당정개편을 한다해도 UR파동을 덮는 식의 졸속개편은 아닐 것』이라면서 『내년의 자치단체장선거에 대비,출마 예상인사들이 공직에서 물러나고 선거관리내각이 구성되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그리고 9월 정기국회라는 정치일정을 감안하면 대대적 당정개편시기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인이 됩시다/지건길 국립경주박물관(굄돌)

    우리나라 근대박물관은 1908년 창경궁 안에서 문을 연 이왕가 박물관을 효시로 친다.이어 경복궁 안에 총독부박물관이 세워지고 경주와 부여,공주 등 지방고도에도 분관이 들어서면서 영세하나마 박물관이 점차 사회교육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그러다 최근에는 경향 각지에 새로운 박물관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신축중인 곳을 포함해 멀지않아 열군데가 넘는 국립박물관이 제 몫을 할 것이고 여기에 이보다 훨씬 많은 공·사립박물관이 가세할 것이다. 박물관의 증가에 못지 않게 관람객도 해마다 늘어나 제철에는 서울이나 경주 같은 곳은 제대로 관람이 어려울 정도로 붐비게 되었다.철마나 관람객의 성향도 달라서 여름과 겨울 같은 휴가철에는 주로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그런대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게 관람할 수가 있다.그러나 봄,가을의 수학여행철에는 북새통이 되고 만다.가지런히 줄을 서서 열심히 들여다 보는 학생들을 만날 때면 가슴 뿌듯한 보람 같은 것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밀려드는 인파와 함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는 아연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러저리 뛰어 다니며 목청껏 떠드는 학생들과 이들을 큰소리로 말리는 인솔교사들로 해서 진열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입구에 주의사항을 써붙여 놓고 그때 그때 타일러도 보지만 별무효과이다. 도저히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 도대체 누구를 탓할 것인가 하는 한심스런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이곳이 박물관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질서를 박물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겪어야 만 하는 것이다. 궁리 끝에 현관 앞에다 다음과 같은 순 한글로 된 경고문(?)을 써붙여 보았다.『박물관에서는 문화인이 됩시다』
  • 이달의 독입운동가 양세봉장군/압록강 순시한 사이토총독 저격

    ◎조선혁명군 이끌고 만주서 항일투쟁/일군과 2백차례 혈전… 밀정에 살해돼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조국광복군과 동만백만동포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1932년 조선혁명군사령관 벽해 양세봉장군(1896년6월5일∼1934년8월12일)이 만주 흥경현에서 일제 관동군과 대회전을 갖기에 앞서 동료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연설의 일부다. 양장군은 이 전투를 포함,일제와 밀정들에게 붙잡혀 순국한 34년까지 2백여차례이상 혈전을 치른 신화적인 무장항일투사였다. 선생은 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최후의 독립군 명장으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6세때인 22년부터.이전에도 3·1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는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즈음부터 무장독립운동가로 본격 활약하게 된다.선생은 의주·삭주 경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단체 천마산대(대장 최시흥)에 가입,창성군 대유동 경찰서와 금광사무소·영림창을 습격하고군수물자를 빼앗는등 기염을 토했다. 5백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마산대는 유격전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일제에 위협을 가하던 단체였다. 선생은 천마산대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활동불가능 상태에 빠지자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구성한 대한통의부등에서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발전해 참의부가 결성되자 제3소대장에 임명된 선생은 24년5월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평북 초산군·강계군에서 일경과 교전해 수명을 사살했으며 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일행에 총격을 퍼부어 일제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선생은 일제의 배후조종을 받은 마적단의 습격으로 통의부 신팔균총사령이 전사한뒤 통의부·대한군정서·의성단등이 정의부로 확대통합되자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에 임명돼 일경·친일분자의 처단에 앞장섰다. 정의부는 김동삼선생을 의장으로 지역군사·재정·행정·교육·사법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맞춰 틀을 짰다. 선생은 이어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정의부를주축으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이 동맹이 다시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자 소속 부대인 조선혁명군 부사령의 중책을 맡게 된다. 조선혁명군은 30년대 적기관을 습격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대중조직및 거점확보를 위해 특수공작원을 국내로 특파하는등 독립운동사에 맹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선생은 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 공동대응을 위해 중국인 실력자 왕동헌의 요령 농민자위군과 협의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런 가운데 32년 조선혁명당은 비밀간부회의를 열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급습으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혁명당의 총사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혁명투사 양성을 위해 조선혁명당이 설립한 속성사관학교 명예교장에 추대된다. 선생은 또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과 요령 민중자위군 결성 협정을 체결,일제와 2백여차례에 걸쳐 혈전을 치렀다.32년3월 신빈현 남쪽에서 벌어진 일제 관동군과의 접전에서선생의 부대는 일군의 주둔지를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달 하순 일제가 폭격기까지 동원해 반격전을 펼치자 선생은 한중연합군 1만여명을 투입,치열한 전투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 억센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중연합군은 그러나 관동군이 두달후 세력을 재결집,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옴에 따라 10월까지 5개월동안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일제 공군력에 밀려 주공격력을 잃게 된다. 선생은 이에 따라 다음해인 34년1월 조선혁명군 재건을 위해 총사령에 취임,같은해 5월 황해도 사리원경찰서를 습격하는등 유격전에 나선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흥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병력수송기차를 습격,수십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대포등을 노획하기도 했다.또 1개 대대병력으로 기습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추격전을 펼쳐 일군 80여명을 사살한다. 선생은 그러나 34년 평소 혁명군을 지원해온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 환인현 소광구 골짜기로 나갔다가 일제 밀정등의 총격을 받고 장렬하게 순국한다.이 중국인은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변절하고 선생을 인적드문 골짜기로 유인한 것이었다. 일제는 후에 선생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에세 목을 떼어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르는등 잔악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조선혁명군은 선생의 순국이후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소규모 유격전으로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선생은 동지는 물론 주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은 명장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김좌진·홍범도등과 함께 3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침◁ 7월의 독립운동가 이준열사는 1859년1월12일 출생,1907년7월14일 순국했기에 바로 잡습니다.
  • 1910년 남북한 총인구1,331만명/통계로본 구한말 경제·사회상

    ◎60명이던 인구밀도 작년 4백44명/일인이 판검사 74%·경찰 40% 장악/외국인수 184,237명… 93년도의 2.7배/쌀 1가마 현재돈 4만6천원·쇠고기 1근 699원/서울 수도보급률 18%… 전화가입자 6,448명 오는 30일은 갑오경장이 일어난 지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이때를 기점으로 근대적인 문물제도가 본격도입되면서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제도는 일대변혁을 맞는다.국가통계도 의정부에 기록국이 설치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통계가 시작됐다. 통계청은 28일 이날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통계연감 등 당시의 각종 통계자료를 종합한 「개화기의 경제·사회상」이라는 책자를 펴냈다.변혁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한세기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알아본다. ▷인구◁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남북한을 합친 전국인구는 2백89만4천7백77호구에 1천3백31만3천여명.올해 남북한의 19%,남한의 30%수준이다.그러나 인구밀도는 60명(93년 남한 4백44명)수준으로 지난해 세계평균 41명보다 높아 당시에도 인구가 조밀했다.경북이 1백57만7천명으로 가장 많았다. ○외국인 90%가 일인 현재 남한인구의 4분의 1이 몰려 있는 서울은 당시 27만8천9백58명으로 전체의 2.6%에 불과,그동안의 인구집중추세를 여실히 알려준다.그동안 38배가 늘었다.당시 서울의 가옥은 초가집이 주종으로 기와집과 반기와집은 30%정도였다. 전체호구수의 84.1%가 농업에 종사했고 상업 6%,광공업 0.8%,날품팔이 0.2%였다.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양반과 유생은 2.5%였다.양반이 가장 많은 곳은 충남으로 전체호구수의 10.3%가 양반이었다.「충청도양반」이 헛말이 아닌 셈이다. 당시 외국인수는 18만4천2백37명으로 93년의 6만6천6백88명보다 2.7배나 많다.90%가 넘는 17만1천5백43명이 일본인으로 한반도쟁탈전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이 떼지어 밀려왔다.창기와 작부도 4천여명이나 됐다. 식수체계의 미비와 의료시설의 낙후로 수인성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많아 1909년에는 인구 10만명당 12·2명이 콜레라에 감염됐고 치사율은 79.2%나 됐다.지금은 거의 사라진 천연두도 기승을 부려 1910년에는 4백45명이 이 병으로 숨졌으며 56%가 10세미만의 어린이였다.특히 이 해에는 발육 및 영양부족으로 죽은 어린이가 2천81명이나 됐다. ▷산업◁ 1909년의 농가당 경지면적은 1.03㏊로 지난해의 1.29㏊와 큰 차이가 없다.논은 전남이,밭은 평북이 가장 넓었고 전국 논밭의 43%가 관청과 향교 등에 소속돼 면세혜택을 받았다.쌀생산량은 7백45만8천섬으로 지난해의 23%수준.반면 보리·조·수수 등은 지금보다 수확량이 많아 잡곡이 주식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0년의 가축수는 소와 돼지가 각각 현재의 25%와 10%수준인 62만8천마리와 57만6천마리였다.주요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말은 3만3천마리로 지금의 6배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형태의 공장들도 들어섰다.1910년의 공장수는 전국에 1백51개,종업원은 8천4백77명이다.한 공장에 56명이 근무한 셈이며 공장당 건평은 현재의 33%인 1백62평이다.정미·인쇄·방직·철공장이 주종이고 전국 공장의 38%가 몰린 경기도가 전국생산량의 58%를 차지했다. 상거래는 5일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시장수도 1908년 8백46개에서 3년 뒤 1천84개로 늘었다.농수축산물이 60%,직물이 21.7%로 거래품목의 대부분이었다. 1910년의 개인사업자는 14만여명으로 한국인 83·7%,일본인 15%였다.한국인은 음식점과 여인숙 등을 주로 했으며 일본인은 총포상과 화약상 및 고철상 등 13개 업종을 독점했다. ▷수도·철도·통신◁ 1910년까지 부산과 경성 등 4곳에 상수도시설이 갖춰지면서 1만6천여가구에 식수가 공급됐다.그러나 경성의 수도보급률은 18%에 그쳤다. ○전화 한통화에 2전 1899년 인천∼노량진 간 경인선을 시작으로 깔리기 시작한 철도망은 10년 뒤에는 1천86㎞(현재의 35%수준)로 늘어났다.하루평균 5천7백30여명의 여객을 수송했고,2천5백여t의 화물을 운송했다. 전화가입자는 1902년 3백10명에서 1910년에는 6천4백48명으로 21배가 됐다.경기(46.8%)와 경남(15.6%)이 전체의 60%를 넘었다.1구역의 전화요금은 한 통화에 2전으로 달걀 1개(1.5전)보다 비쌌다.요즘 달걀값과 비교하면 당시의 전화요금이 지금보다 비싼 셈이다. 교육·의료 보통학교도 있었지만 여전히 서당이 교육기관의 중심이었다.1910년 전국의 서당수는 1만6천5백40개로 한 서당에서 평균 9명이 배웠다.보통학교는 1백73개교로 학급당 학생은 34·3명이었다.여학생은 6%에 불과했다.결석률은 1911년의 경우 11·6%,중퇴율도 30% 가까웠으며 만학도가 많아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병원은 1백25개가 있었지만 한국인 소유는 고작 14개였다.그러나 1천7백38명의 의사 가운데 한국인이 1천3백44명으로 77%였다.의사 1인당 인구는 현재의 10분의 1수준인 7천6백60명이었다. ○목수 일당 쌀한말값 ▷물가·임금◁ 1898년 서울시장의 1등미 1섬의 가격은 8원(한가마 4원)이었다.닭 한마리는 0.2원으로 쇠고기 한근(0.12원)보다 비쌌다.요즘 화폐로 환산하면 쌀 한섬은 4만6천5백원,쇠고기 한근은 6백99원정도로 추정된다.당시 목수의 평균일당은 0.82원으로 쌀 1말정도를 살 수 있었다.요즘의 일당으로 구입할 수 있는 2.5말과 비교하면 당시 임금이 박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공무원봉급은 격차가 더 심해 일본인이 2∼3배 많았다. ▷공공행정·치안◁ 1910년의 경찰은 5천8백81명으로 40%가 일본인이었다.특히 경찰의 고위직 대부분과 판·검사의 74%가 일본인으로 치안·사법계통을 일본인들이 거의 장악했다.다만 변호사의 경우는 한국인이 51명으로 일본인보다 20명정도 많았다. 1910년의 인구 10만명당 강도발생건수는 92년의 4배인 23.9건으로 개화기의 뒤숭숭한 세태를 반영했다. ○수입이 수출의 2배 ▷무역·금융◁ 1876년 개항이후 대외교역이 본격화되면서 교역량은 1910년까지 연평균 17%씩 늘었다.1910년의 수출은 1만9천9백원,수입은 3만9천7백원으로 수입이 2배나 됐다.엄청난 무역적자인 셈이다.일본과의 교역이 수출의 74%,수입의 60%를 차지했다.수출품은 농축산물·인삼·철광,수입품은 석탄·옥양목 등이 주종이었다. 화폐발행고는 1910년 2천16만4천원으로 8년 전보다 54.3% 증가했다. 은행예금보다 대출규모가 컸으며 금리도 1909년의 경우 예금 5∼6%,대출 11∼13%로 대출금리가 월등히 높았다. 1894년 당시 엔화환율은 1엔이 우리 돈 은화 5냥(50전) 수준이었다. ◎군예산이 전체의 25%로 최고/명성왕후 장례비 쌀4만섬값/재무예산 31% 대일채무상환/19세기말 국가예산 쓰임새 1899년의 우리나라 국고는 당시 화폐로 대략 6백40만원정도.예산편성은 지금의 재무부격인 도지부(탁지부)에서 했다.예산규모는 군부(국방부)·내부(내무부)·도지부·궁내부(청와대) 순으로 요즈음과 비슷하다.지세·가호세·관세 등으로 조달된 세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궁내부의 예산은 6만5천원.대부분 황제를 모시고 궁정을 유지하는 데 쓰였지만 제사비용도 1만5천원으로 23%나 됐다.1896년과 그 이듬해에는 일본인이 시해한 명성황후의 장례비로 농상공부 예산의 2배 가까운 35만5천원을 썼다.지금으로 치면 1백여억원규모며 당시 쌀 4만4천3백섬을 살 수 있는 돈이다. 1백30만원의 내부 예산 대부분은 지방의 행정기관과 경찰·감옥 유지에 쓰였다.서울시격인 한성부 예산이 내부 전체의 0.5%에 불과한 것이 이채롭다.창궐하던 천연두예방을 위해 종두접종을 의무화해 3천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탁지부 예산은 일본 차관금 상환여부에 따라 해마다 큰 차이가 났다.1899년의 예산은 2백여만원으로이중 대일채무상환용이 31%를 차지,가장 많았다.주로 정부의 채무를 갚는 데 예산이 집행됐다.각 도에서 징수한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든 돈도 10%정도인 22만원이나 됐다.세금으로 거둔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1.8∼2㎏이나 돼 수송비용이 많이 들었다. 군부의 예산은 전체의 25%정도로 지금처럼 가장 비중이 높았다.1899년의 예산 1백43만8천여원의 90%이상이 군대유지비에 쓰여졌다.이중 대부분이 수도군의 유지비로 쓰였다.법부(법무부)의 예산이 3만8천9백여원으로 가장 적었다.지금과 달리 교도소 등 감옥이 법부가 아닌 내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 “공무원 하복 일제·군정잔재 여전”

    ◎패션 평론가 김청씨,남방셔츠·새마을복 비판/남방셔츠/2차대전때 일본군의 여름 군복/새마을복/일 국민복 변형… 5공때 즐겨 착용 『옷차림은 그 사람의 삶의 거울이며 크게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한 국가 공무원들의 복장이 정치체제의 성격,국민에 대한 서비스 정도를 알게하는 가늠자란 사실은 당연한 것이지요』 계간 「패션문화」 발행인이며 패션평론가인 김청씨(54)는 공무원들이 남방셔츠를 많이 입는 여름철만 되면 할말이 많다고 한다.TV를 통해 입은 모습이 많이 보이는 남방셔츠가 「새마을복」과 함께 일제와 군부정권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남방셔츠란 2차대전때 일본군들이 남방의 여러섬에서 여름철 군복으로 입었던 셔츠입니다.문민시대에 들어선 지금도 정부관리들이 모내기나 가뭄피해를 입은 농촌에 격려차 나갈때 권위적이고 군부 냄새가 나는 남방셔츠나 새마을복을 입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일하기 좋은 밝은 색의 스포츠의류나 캐주얼의류가 시중에 많이 나와있는데 말입니다』김씨는 광복이후 오늘까지 정치인과 관리들의 옷차림변화를 보면 정치세태의 변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있다고 말한다.즉 46년 중앙청 총독부 관리들에게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식 아이비스타일의 색코트를 입은 반면,일제 티를 못벗었던 당시 관리들은 일제시대 군복이었다는 설명.또 5·16군사쿠데타후 2공화국때는 군복이,3공화국때는 일제 국민복을 살짝 변형한 재건복이 주로 입혀졌다는 사실을 들고있다. 『국민복의 특징인 목을 높이 감싸는 스탠(Soutien)칼라에서 미군의 전투복(배틀재킷)의 스포츠칼라로 바뀌고 5개이던 앞단추가 4개로,덧주머니가 조금 덜 불룩해 진것이 재건복이죠.이 재건복 착용은 전두환대통령때에도 이어졌는데 새마을복으로 이름이 바뀌어 남방셔츠위에 걸쳐 입었습니다』 6공화국 노태우대통령시기 「일하는 분위기를 진작하기위해」여름이면 남방셔츠 위에 양복을 입거나 새마을복을 껴입는 형태가 흔했는데 최근에도 상급관료들의 노타이 차림시 흔히 볼 수있는 스타일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김씨는 대민 봉사체제가 자리 잡힌 나라의 공무원들은 예의를 갖춘 옷을 입는다며 노타이 차림의 남방셔츠를 입거나 「굳이 공무원임을 나타내는 새마을복」을 입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유니폼이 꼭 필요하다면 친절한 이미지의 심미적인 옷으로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국민은 손님이니까요』
  • 궁궐:6(서울 6백년 만상:43)

    ◎창경궁/1909년 행락장소로 전락/일제,전각 60여채 헐고 동·식물원지어/창경원으로 개명… 6·25거치며 황폐화 융희 원년(1907년).순종황제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창경궁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일제는 이듬해부터 「창덕궁 전하」로 전락한 순종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명목으로 창덕궁에 인접해 있는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곰과 호랑이·공작등 각종 동물과 조류를 모아 동물사를 만들었다. 이때 일제가 헐어버린 전각은 무려 60여채로 옛 근농장터에는 못을 파서 춘당지라는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 북쪽에 일본식 수정을 지었으며 근처에 식물원과 박물관을 세워 궁궐의 위엄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조가 자신의 생모이자 사도세자 빈인 혜경궁홍씨를 위해 지어준 자경전을 헐고 이곳에 일본식 빨간 벽돌건물을 지어 「이왕가박물관」이라고 이름지었다.이 건물은 1937년 덕수궁에 총독부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전시된 유물을 옮기고 장서각이란 이름을 얻었다.이후 창경궁 복원이 이뤄진 최근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다 지난 92년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일제가 얼마나 조선의 민족정기를 끊는데 혈안이 돼있었느냐하는 것은 풍수사상으로 볼때 장서각은 좌청용,식물원은 우백호의 자리인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창경원은 1909년 11월1일 순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개원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됐다.처음엔 창덕궁의 동쪽에 있다고해 「동원」이라고 불렀으나 얼마뒤에 창경궁의 위치를 나타내는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7만평규모로 동양최대였던 창경원이 일반에 공개되자 장안은 온통 술렁거렸다.서민들에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갖 진귀한 동물과 식물을 구경한다는 것 말고도 임금이 사는 궁궐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매력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창경원을 『청량리밖과 노들강변,우이동이 놀기는 좋아도 피곤한 몸을 쉬기엔 창경원이 제일이다』고 적은뒤 몰려드는 인파가 『구름같다』고 표현하고 있다.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었지만 현실이 그랬다. 봄이면 서울시민들의 시속(시속)으로까지자리매김했던 「야사쿠라」(밤벚꽃 놀이)의 시작은 1924년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서울인구가 28만명에 불과했던 시절 하루저녁 밤벚꽃 놀이를 즐긴 시민이 전체의 1할이 넘는 3만명으로 기록됐다.예나 지금이나 행락객의 수를 높여잡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긴 하지만 많은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서울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은 창경원에 어느날 동물들의 신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패망직전의 일제는 1944년 미군이 창경원을 공습하면 맹수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시민들을 해칠것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붙인뒤 독극물을 먹여 호랑이·사자·곰·표범등 수많은 동물들을 죽인 것이다. 조선조의 몰락과 거의 동시에 태어난 창경원은 일제의 패망과 6·25를 거치며 완전히 황폐화됐다. 1954년 김태선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창경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됐다.그리고 이듬해 4월6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창경원은 다시 개원됐다.이때 동물가족수는 1백여종 5백여마리로 시민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 “구한말∼일제 농촌 변화과정 생생”

    ◎구례 지주 유씨가의 일기 농촌경제연서 분석/할아버지와 손자가 85년간 쓴 농업일기/당시 작목구조·농사방식 연구에 큰 도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기간 우리 농촌경제의 변동과정이 할아버지와 손자에 걸쳐 쓰여진 85년 동안의 일기를 통해 연구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두순 부연구위원과 박석두 책임연구원은 「한말·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의 지주인 유씨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일기와 각종 문서를 이용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연구에 이용된 일기는 유제양(1846∼1922년)이 1851년부터 1922년까지 모두 72년 동안 쓴 「시언」과 그의 손자인 유형업(1886∼1944년)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13살 때부터 1936년까지 쓴 「기어」.또 금전출납부인 「당용록」과 연도별 소작료 수취부인 「추수책」,노동력 사역부인 「전가일기」 및 「농가일기」,식량소비를 기재한 「양미책」 등 농가경영요소가 망라된 가전문서들이 분석됐다. 연구에 따르면 유씨가는 17 93년쯤 논·밭을 합쳐 8백83두락(22만3천4백여평)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1백년뒤에는 분할상속과 매각 등으로 1백62두락(2만5천평) 정도로 줄어들었다.이후 19 00년에는 1백두 미만으로 축소됐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친족의 방탕이나 횡령 질병등으로 인한 매각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선이 일제의 강제농정에 휩쓸린 시기였다.일제는 조선을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원료농산물의 생산기지로 만들려 농업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이에따라 유씨가의 작목구조와 농사방식도 크게 바뀌었다.「군청에서 양뽕나무 150그루를 보내 1백10그루를 뒷 채소밭에 심었다」(1911년 3월25일)는 일기에서 보듯 일본산 뽕나무로 종자를 개량했고 이어 재래면의 재배를 금지함에 따라 면화재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조선총독부는 일본 쌀시장에서 인기높은 품종을 강압적으로 보급했다.미곡증산사업의 목표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신품종이라는 미모의 종자가 여러 군데에서 얼어 죽었다」(1931년)는 기록처럼 일본품종은병해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재래종보다 휠씬 심했다. 농사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씨가가 화학비료를 처음 구입한 것은 1930년이다.일본 괭이와 왜낫을 산 것은 1912년이었으며 1916년에는 탈곡기구를 샀다.또 1937년부터 벼를 도정할 때는 물레방아 대신 동력 정미기를 썼다. 유씨가는 한해 2백∼4백50명의 노동력을 외부에서 조달했다.노동력 조달 방법은 호역와 매고·머슴의 세가지로 크게 구분됐다.호역은 농토를 빌려주고 지대로 춘추 각 4일의 노동을 제공받는 것이며 매고는 호역으로 충당되지 못한 노동력을 현금 또는 현물을 주고 쓰는 것이다.유씨가는 1900년대 초에는 호역으로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고 부족노동력을 매고로 보충했으나 1920년쯤에는 소작으로 전환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이 연구에 쓰여진 유씨가의 문서를 이용해 앞으로 「류씨가의 수입지출구조 및 생활실태」「토지소유 및 지세의 변화에 관한 연구」「오미동의 사회구조와 사회조직」 등을 연차적으로 연구해 갈 계획이다.
  • 구총독부건물 내년 8월 해체/당·정,새국립박물관 97년 착공

    정부와 민자당은 4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문공관련 당정회의를 갖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옛 총독부 건물에 대한 철거공사를 내년 8월에 착수,96년 8월까지 마무리짓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또 용산 가족공원에 신축될 연건평 3만5천평규모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해 오는 12월부터 내년 7월까지 국제설계공모를 실시한 뒤 97년 공사에 착수,2000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당정은 경복궁안의 문화재관리국 건물을 조선왕조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하고,오는 96년 1월부터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질 때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이밖에 문예진흥기금 모금을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내무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부금품 모집금지법과 상충됨에 따라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고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쳐 정기국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한편 이민섭문화체육부장관은 95년을 「미술의 해」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 중,“홍콩 개정선거법 불용”/입법국 승인에 반발

    ◎“97년 의원임기 무효화” 경고 【북경 연합】 중국정부는 지난달 30일 오는 97년 6월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는 홍콩의 개정선거법에 의해 선출된 의회(입법국)의원들의 임기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 항­오(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대변인은 홍콩입법국(의회)이 이날 상오 크리스 패튼총독의 정치개혁에 토대를 둔 개정선거법을 통과시킨 것과 관련,이같이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어 중국정부가 중·영양국간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94∼95년 홍콩 개정선거법에 따라 선출된 의회의원들의 임기는 97년6월30일 이후 존속될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 밝혀왔음을 상기시켰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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