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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총독부청사 철거에 유감 표명/정부 “내정용훼 용납못해”

    ◎양국,비공식 채널통해 물밑공방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가 오는 8월15일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로 사용됐던 현 중앙박물관의 철거를 시작하려는 방침에 대해 『양국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비공식 우려의 뜻을 전달해온 것으로 7일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전해온 우려는 『종전50년,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맞아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를 건설해야하는 올해 한국정부가 국내의 일부 반대여론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8월15일에 건물을 해체를 시작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서 『한국정부의 이같은 방침이 한국내에서 반일감정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할까 우려된다』는 내용이라고 한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일본측은 「한국에 새정부가 들어서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려는 방침을 정할 때부터 양국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을 가져왔지만,한국 내부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전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에대해 정부는 비공식 입장표명을 공식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운 점을 감안,역시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일본측의 유감표명이 전혀 적절치 못하며 그 같은 견해표명은 한국민의 반일감정만 자극할뿐 양국관계에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강력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근본적으로 과거 식민시지시대의 잔재를 제거하는 문제는 우리의 국내문제일뿐 타국이 간여할 사항이 못된다』고 지적하고 『더구나 식민통치의 가해자인 일본측이 이 문제와 관련,용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 「총독부 철거」와 일의 뻔뻔함/이도운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최근 일본의 언론이 큰 관심을 보이는 사안 가운데 하나가 이웃나라인 한국의 광복절 기념행사다.그중에서도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시절 총독부로 사용했던 현 중앙박물관을 철거하는 「행사」에 대해 유독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일본 언론들은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관련기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특히 철거에 반대하는 한국야당이나 사회단체·일부언론의 주장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대해 우리 내부에도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다』『철거에 돈이 많이 든다』『여론수렴이 충분치 못했다』『삼풍백화점 무너진지 얼마안되는데,또 철거라니…』라는 등의 반대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그처럼 근시안적이고,미시적인 차원에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철거가 『단군이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표현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치더라고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함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좌표로 삼자는 뜻은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다. 일본측은 최근 우리내부에 약간의 의견이 엇갈리는 틈을 비집고 들어와 철거가 양국민의 감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비공식으로 우리측에 전해온 것으로 전해진다.물론 우리의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입장 표명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지만,일본 정부가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려할만한 일이다.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을 만들어보자고 양국정부가 아무리 외쳐도,우리국민이 일본을 멀게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죄도 회피하기 때문이다.그런 상황에서 우리민족에 대한 탄압의 본산이었던 일본의 총독부 건물 철거에 그토록 아쉬움을 보이는 것 자체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올해 광복 50주년,수교 30주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서,왜 양국이 공동으로 아무런 기념행사조차 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지를 먼저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오는 15일 분명히 조선총독부의 철거는 시작될 것이다.일본은 그날 과거의 망상이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며,진정으로 과거사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 10일 개막

    ◎징용자 명부 등 희귀자료 5백여점 전시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긍심 함양,기록보존문화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기 위해 오는 10일부터 12월10일까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을 개최한다. 총무처가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 후원으로 개최하는 이 전시회에는 문서와 사진등 5백여점의 자료가 멀티슬라이드와 멀티미디어등 첨단 영상기법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전시된다. 특히 ▲고 백범 김구선생 장의에 관한 건등 정부수립 직후의 국무회의록 ▲4·19혁명 때 비상계엄 선포및 공민권 제한 심사기록 ▲62년 1월6일 공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철」 ▲포항종합제철 건설 관련문서등 처음 공개되는 문서가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일제시대의 자료 가운데는 ▲1922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1920년대의 서울(경성)전도 ▲1932년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1930년대말 조선총독부의 군 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미곡·면화 공출문서 ▲일본 후생성에서 수집한 것을 지난해 외무부가 이관받은 「징용자명부」 ▲194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작성한 수양동우회 판결문등 희귀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총무처는 이와 함께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갑오개혁 직후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내려진 판결문을 「국권회복운동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본으로 발간했다. 이번 전시회는 「건국의 여명」 「조선조의 사고(사고)」등 6군데의 특별코너와 「시련에 선 왕조」 「광복의 환희」등 11군데의 일반코너및 시청각실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조선조의 사고」에는 국보 제151­2호인 태백산본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본등 자료를 조선시대의 사고 사진과 함께 전시해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기록보존문화를 과시하고 있으며,북한에서 발행한 번역본인 「이조실록」까지 전시해 흥미를 더하고 있다.
  • 40대장관 임명… “세대교체” 실천/김 총무처장관 기용에 담긴뜻

    ◎당·정 주요포스트 신지인사 대거발탁 전망/“광복 50주년행사 해방후세대에 위임” 의미 김영삼 대통령은 7일 새벽 함께 조깅을 하던 보좌진에게 의미심장한 언급을 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40대의 김기재 전부산시장을 총무처장관에 임명하기로 했다.이제부터는 가급적 세대교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는게 요지다.세대교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국민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김신임장관은 46년생으로 올해 49세.40대 장관은 새정부들어 이인제 노동·서상목 보건복지부장관이 있었고 과거 정권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대통령의 「특별한 의지」를 담고있어 앞으로 정부·여당의 각종 인사에서 중요 기준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세대교체를 말로 강조하면 특정인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언급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수도 있다』면서 『지금부터는 말보다는 실제 인사를 통해 「세대가 바뀌고 있구나」는 느낌을 국민에게 주게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관계자는 『당대표 등 주요 당직자가 한꺼번에 갑자기 젊어지기는 힘들겠지만 일부 장·차관과 민자당의 중·하위 당직,그리고 지구당위원장을 비롯,여러 분야에서 50세 이하가 상당수 발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는 『특히 이번에 신설되는 지구당 조직책 인선과정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신진 인사가 대거 영입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김총무처장관의 기용은 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청와대측은 설명했다. 윤여전 청와대대변인은 이날 『김대통령이 김전부산시장을 총무처장관에 임명한 것은 오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구총독부건물 철거 등 식민시대 잔재를 없애는 작업을 해방이후 세대에게 맡긴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윤대변인은 김시장의 풍부한 행정경험,청렴도도 기용의 배경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젊음」과 「해방이후 세대」가 이번 인선의 주된 배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터뷰/“공직사회 사기진작… 분위기 쇄신”/“행정 생산성”·효율성 제고에 초점/국가경영 선도역할 충실히 수행”/김기재 신임총무처장관 김기재 신임 총무처장관은 『행정이 국가 경영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총무처를 이끌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다음은 김장관과의 일문일답. ­소감은. ▲갑자기 중책을 맡아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국가적 과제가 중첩한 시기라 어깨가 무겁다.청와대에서도 이야기가 있었지만 올해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서 해방둥이 또는 해방 이후 세대에게 맡겨 국정에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을 불어넣자는 취지에서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총무처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생각인가. ▲국가 경영의 생산성과 효율성 제고에 초점을 맞추겠다.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다양화·전문화되는 추세에 비추어 행정이 선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적극적인 행정으로 국가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역점을 둘 생각이다.이와 함께 대형 사고 등으로 인해 행정에 대한 불신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 행정의 신뢰 회복에도 진력하겠다.행정의 변화와 개혁,그리고 세계화 추진의 본산이 바로 총무처라고 본다.공직사회의 분위기를 쇄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직자의 사기 진작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한다. ­정부조직 개편에 대한 견해는. ▲지방에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잘 모르겠다.그러나 작은 정부와 공직자들의 능력 극대화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정부조직을 개편할 필요성은 느끼는가. ▲조직 개편은 많이 됐다고 본다.개편할 곳이 더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기 총선에 출마할 생각은. ▲야인에서 행정부로 돌아왔으니 거리가 멀어진 것 아닌가.현 위치에 충실하겠다.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사학위를 딸 때 제2외국어를 일본어로 했고 지방자치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교류할 때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신임장관은 지난 72년 제11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줄곧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내무관료 출신.최형우 전내무부장관 밑에서 차관보를 맡아 시·군 통합과 제2차 행정구역 개편을 주도해 능력을 인정받았다.지난해 9월부터 지난 6월말까지 부산시장을 지내면서 아시안게임 부산 유치를 따내는 등 상당한 업적을 남겨 한때 민선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소탈한 성품으로 각계에 발이 넓다.두주불사형으로 취미는 바둑과 등산.부인 전명숙씨와 1남1녀.
  • 총독부청사에 「일제 지하감방」/4개실 20평

    ◎애국지사 고문장소로 이용한듯 일제가 항일 애국지사들을 고문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조선총독부의 지하공간이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7일 처음으로 공개한 이 지하공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물품창고밑 지하1층 지하실로 20여평 규모에 4개의 방으로 돼있다. 중앙 통로로 통하게 돼있는 이 지하실에는 두께가 14㎝나 되는 문이 8개 달려 있으며 각 문은 20㎝ 두께의 나무 문틀에 모래가 채워진 나무와 철판으로 돼 있다.또 모든 문에는 세로 10㎝,가로 5㎝크기의 유리창문이 달려있다.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오래전부터 박물관 지하에 지하감방이 있었다는 소문에 따라 지난 93년부터 이 지하실에 대한 실측및 점검작업을 벌여왔다』면서 『그동안 서울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이 건물의 유일한 지하공간인 이 지하실이 일제하 임시감방이나 고문장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김 대통령의 민자 당직자 조찬 발언

    김영삼 대통령은 1일 민자당 당직자와 당무위원을 초청한 청와대 조찬모임에서 미국방문 성과와 국정운영의 방향에 대해 40여분 동안 이야기했다.다음은 박범진 민자당대변인이 전한 김대통령의 국내정치 관련 발언 요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새로운 결심을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개개인이 국가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고 당을 생각하는 등 큰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내년 총선에서 여러분의 승리를 위해서 당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고 당을 위하는 것인지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이달에는 많은 행사가 열린다.정부는 여러가지 준비를 해왔다.이달을 헛되이 넘겨서는 안된다.그동안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왔지만 옛총독부를 철거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이것은 민족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것이다.식민통치의 상징을 없애는 것은 국민의 소망이기도 하다.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박물관을 임시로 옮길 곳을 짓고 세계적인 박물관을 영구적으로 짓기로했다.광복 50주년을 맞아 이러한 행사들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당도 정부와 협력해서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놓여있는 입장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국민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변화없이는 우리는 절대로 안된다.변화와 개혁은 취임 초와 똑같이 추진하겠다.실제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없다.금융실명제는 대담한 결정이었고 옳은 결정이었다.어제 내각에 대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주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중소기업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대기업이 협력해줘야 한다.특별히 관심을 갖고 당정간에 긴밀한 협조를 통해 중소기업을 살리는데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 통일로/미래로/역사적 광복 50돌 행사

    ◎국내외서 8월 한달 84개 경축행사/「총독부 철거」엔 시민·교포 5만명 초청 역사적인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중앙경축식이 광복절인 오는 15일 옛 조선총독부건물 앞 광장과 세종로 일대에서 독립유공자와 가족,광복회원,해외동포,청소년,시민등 5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리게 된다. 이와 동시에 지방에서도 대대적인 경축식이 개최되며 특히 중앙경축식에 앞서 식전행사로 일제 잔재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중앙돔 첨탑이 철거된다. 중앙경축식에서 김영삼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향하는 대북한 중대 제의를 할 예정이다. 또 중앙경축식과 별도로 8월중에 광복50주년 기념행사로 개최될 정부부처행사 22개,산하단체행사 19개,민간단체행사 16개,지방자치단체 주요행사 27개등 84개 주요 국내외 행사계획들이 확정됐다. 정부는 1일 광복 50주년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21세기 국가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화합과 참여의 장으로 치러질 이같은 광복절 중앙경축식 행사계획을 확정,발표했다. 「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주제 아래 펼쳐지는 중앙경축식은 광화문에서 충무공동상에 이르는 세종로 일대에서 ▲식전행사(9∼10시) ▲본행사(10∼10시55분) ▲식후행사(10시55분∼11시10분)로 나뉘어 2시간 10분동안 진행된다. 식전행사는 5백명의 멜북꾼,바라꾼,횃불수의 합주와 행진등이 어우러지는 「새아침의 소리」로 시작해 고유시낭독,옛 조선총독부건물 중앙돔 첨탑 철거행사인 「어둠 걷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속에 우리 고전무용과 현대무용이 조화를 이루는 「다시찾은 빛」공연,광복50주년 기수단과 시·군·구및 전국 대학기수단,경찰및 3군 군악대등 1천5백명과 광복길놀이 꽃차등의 「한울림」 행진이 펼쳐진다. 본행사는 김승곤 광복회장의 기념사에 이어 지휘자 정명훈,소프라노 조수미등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7명이 참여하는 합창곡 「동방의 빛」연주,독립유공자 포상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어 광복절노래 제창과 만세3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색 연기를 내뿜는 경축비행이 하늘을 수놓고 통일성화봉송단 통과와 4백여명의 현대무용단 및 서울시립무용단과 국민학생들의 무용 「통일로 미래로」라는 식후행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정부는 이날 저녁 경복궁 경회루에서 각계 대표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각 시·도와 재외공관에서도 중앙경축식에 준하는 경축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 역사·화합·미래 주제 국민축제로/8월을 수놓을 광복 50돌 행사

    ◎역사의 장­총독부 건물철거… 민족정기 고양/화합의 장­한민족축전 열어 남북통일 기원/미래의 장­무궁화호 발사기념 등 11개 행사 8월은 50주년을 맞는 광복절이 들어있는 달.연중 계속되는 각종 기념행사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규모가 큰 행사들이 대부분 8월에 펼쳐진다.정부부처 행사 22개,산하단체 행사 19개,민간단체 행사 16개,지방자치단체 행사 27개 등 모두 84개의 행사가 「역사의 장」「화합의 장」「미래의 장」이라는 3개의 주제로 나뉘어 열린다.정부는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민족번영과 통일을 향해 새롭게 출발하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의도에서 올해 초부터 추진해 오던 기념행사를 8월에 집중 개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역사의 장」은 민족정기를 고양하는 사업으로 ▲일제 잔재인 옛 조선총독부건물 철거 및 대지미술전 ▲이준열사기념관과 중경임시정부청사등 독립운동 사적지 복원 ▲독립유공자 1천4백여명에 대한 대대적 발굴 포상 ▲국내외 독립운동 사적지 순례등 25개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는 「화합의 장」에는 ▲여의도 고수부지 레이저영상쇼 ▲광복 길놀이 ▲95 세계 한민족축전 ▲통일 한마음 행사등 20개 사업이 들어 있다.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의 장」 사업으로는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 ▲종합학술행사 ▲무궁화통신위성 발사 기념행사 ▲지구촌 우주소년 큰잔치등 11개가 있다.이밖에 지방에서 개최되는 주요 행사로는 서울시의 조국을 빛낸 해외동포 초청행사와 경기도의 창작무용극 「제암리의 아침」 공연등 23개가 있다. 정부는 기념행사가 광복이전 세대에게는 광복의 벅찬 감격을 되새기게 하고 광복이후 세대에게는 광복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현장체험의 기회가 되도록 기획했다.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또 민간과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를 전국에서 어우러지는 국민축제로 승화시키고 해외동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 민족단결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 아래 행사를 추진해 왔다.옥내 행사에서 벗어나 광화문 앞과 국내외 독립운동 사적지,독립기념관 등 개방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를 활용함으로써 광복의 의미를 한층 되살아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8월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광복절 당일 각계 대표와 일반 시민 각각 2만5천여명씩 모두 5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옛 조선총독부건물 앞 광장에서 열리는 중앙경축식.「광복 50년,통일로 미래로」라는 주제 아래 상오9시부터 10시까지 식전행사,10시55분까지 본행사,10시55분부터 11시10분까지 식후행사로 나뉘어 2시간10분 동안 진행된다. 민족사를 재조명하고 광복의 환희를 재현하는 식전행사는 5백여명의 북을 멘 바라꾼과 횃불수 및 60여명의 전통군악대가 펼치는 「새아침의 소리」,옛 조선총독부건물 중앙돔 철거행사인 「어둠 거두기」,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립·서울시립·경기도립 무용단의 고전 및 현대무용 「다시 찾은 빛」,광복 50주년 기수단을 비롯해 각 시·군·구 기수단과 경찰 및 3군 군악대등 약 1천5백여명이 광복 길놀이 꽃차 및 장식차와 함께 벌이는 「한울림」행렬로 구성된다. 통일과 세계를 향한 민족의 결의를 다짐하는 본행사는 국민의례,광복회장의 기념사,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 속에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7명과 서울시립교향악단·연합합창단이 부르는 축가 「동방의 빛」,독립유공자 포상,경축사,광복절 노래제창,경축비행의 순으로 진행된다. 통일과 미래의 희망을 염원하는 식후행사는 해방둥이들이 광복절 노래를 합창하는 가운데 통일성화 봉송단이 통과하며 4백여명의 현대무용단·서울시립가무단·국민학생들의 무용 「통일로 미래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중앙경축식 행사장은 모든 국민의 출입이 허용되며 참가자들에게는 광복 50주년 공식 휘장 또는 태극무늬로 도안된 모자·부채·음료 등이 제공된다. 정부는 행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3가지 종류의 포스터 6만부를 만들고 눈에 잘 띄는 곳에 홍보조형물을 설치했다.안중근 의사의 얼굴이 새겨진 1만원짜리 은화와 김구 선생의 초상을 담은 5천원짜리 니켈화 각각 7만개를 제작했다.기념우표 3백만장,소형 시트 60만장,우표책 1만부를 만들고 5천원권 공중전화카드 30만장과 기념담배 5천만갑을 발매했다.
  • 광복 50돌 맞아 「한·일관계 소설」 출간 붐

    ◎가즈오의 나라­광개토왕 비문 변조싼 한·중·일 시각차 조명/세종로 1번지­“치욕의 상징” 옛 조선총독부 건물 보존 주장/제국의 별­일 육사출신 이청천·홍사익·박시찬 삶 대비 광복 50주년을 맞아 최근 출판가에 한일관계를 다룬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이 소설들은 한일간 역사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각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인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작품은 「가즈오의 나라」(전2권·프리미엄북스 펴냄),「세종로 1번지」(전2권·여백),「제국의 별」(전4권·우석)들이다. 「가즈오의 나라」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지난해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김진명씨의 두번째 작품.「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을 변조해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으며,지금도 그 맥을 이은 극우파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내용이다.「무궁화꽃…」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리적 기법이 동원돼 연쇄살인과 범인 추적,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을 흥미있게 풀어나갔다. 이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경로,비문 해석을 둘러싼 한국·일본·중국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소개해 작품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다만 줄거리에 「김정일의 일본 방문­평양에서 쿠데타 발생­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김정일 재집권」으로 전개되는 남북관계 진전을 담은 것이 작품의 전체 틀을 어그러지게 하는 인상을 준다. 「세종로 1번지」의 작가는 지난해 「원균 그리고 원균」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던 고정욱씨다.앞의 작품에서 「이순신은 선이요,원균은 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한 지은이는 이번 작품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내세웠다.오는 15일 광복50주년에 맞춰 철거하기로 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 곧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은 우리 의식에서 형성돼야지,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파괴한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논리다.또 한마당 잔치를 벌인 것으로 우리 자신이 청산을 끝냈다고 만족해 하지나 않을지 경계하는 마음도 내보인다. 작가는 건물철거에 관련된 토목업자가 점차 역사의식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형상화했다. 「가즈오의 나라」와 「세종로 1번지」가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해석했다면 유현종씨의 「제국의 별」은 일제강범기 때 실재했던 인물들의 다기한 삶을 보여준다. 한일합병 직후 일본은 조선무관학교 생도인 이청천·홍사익·박시찬 등을 국비유학생으로 뽑아 일본육사에 입학시킨다.이들 가운데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이청천·박시찬은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친다.그러나 홍사익은 육사를 우등으로 졸업,중장까지 진급했다가 일본 패망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 소설은 홍사익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이청천 등의 독립운동과 대비시킨다.역사소설가로 손꼽히는 작가의 선굵은 문체가 일본·필리핀·만주 등지를 넘나드는 웅대한 스케일 속에 녹아들어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 3부요인·정당대표 청와대 오찬 대화록

    ◎“북의 대미 평화협정 공세에 쐐기”­김 대통령/시국 사범 구제… 참사후속조치 만전­이기택 총재/클린턴인기 재선가능할 정도 상승­김종필 총재 김영삼 대통령이 31일 낮 3부요인과 여야 정당대표를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나누면서 나눈 대화 내용을 배석했던 이원종 청와대정무수석과 일부 참석자가 전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김대통령=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문제는 한국이 주도하며 미국은 지원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북한정세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분석하고 대처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한반도 평화체제문제는 남북한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하여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은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 공세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평화체제가 등장할 때까지 휴전협정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고위 외교레벨에서 협의체 구성에 합의한 것과 한국민이 원하는 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도 성과다.과거의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관계만 주로 논의해 왔으나 이번에는 동북아문제를 비롯한 범세계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했다.이것은 우리가 유엔 안보리에 진출하면 세계문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한미간의 협조가 더욱 중요해 진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선다는 것이 단순한 구호가 아닌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며 우리 위상이 이렇게 달라진데 대해 국민에게 감사한다. 6·25의 역사적인 의미를 미국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큰 성과다.6·25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전쟁으로서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기억될 전쟁이라는 새로운 평가와 인식을 분명히 심어주었다.이 참전기념비는 워싱턴의 명소가 될 것인 만큼 앞으로 6·25를 모르는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6·25의 역사적인 의미와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기택 민주당총재=정치적인 이유와 이념적인 문제때문에 생긴 시국사범과 정치적 이유로 제약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구제됐으면 좋겠다.삼풍사고 등 대형사고로 민심이 흉흉하다.사고 자체도 문제지만 사고를 처리하는 후속조치가 미흡한 것도 문제다.국민들은 사고도 사고지만 정부의 사고처리를 더욱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대통령의 미국방문이후 한미간 통상마찰이 많이 줄어들 것인지. ▲김대통령=통상마찰은 실무적으로 미리미리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차관보급 실무 채널을 마련했다.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원칙에 입각해 정도로 나가겠다.원래 걸어온 길이 그랬지만 사심없이 국민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겠다.8월25일이면 내 임기도 반이 지나가는데 두분 총재께서 뒷받침해 주었으면 좋겠다.큰 범죄 행위가 아닌데 전과자가 돼있는 사람들이 많다.그런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구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들은 대부분 찬성하나 그 속의 문화재를 손상없이 보존하는데 관심이 많다.이 문제도 추호의 잘못이 없이 잘 해나가도록 지시했다.왜 총독부 건물안에 박물관을 짓게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사고는 고도성장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다.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제부터는 공기를 연장,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히 안전문제를 챙기겠다.이렇게 하다보면 많은 불편이 생기고 이러한 불편은 국민들이 참아 주어야 한다.다리건 도로건 건물이건 불편이 있어도 국민들이 이해하고 동참해 주어야 하며 이와 관련해서도 두분 총재께서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 이에 앞서 참석자들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대통령=(김종필 자민련총재에게)요즘 골프 많이 치는지. ▲김자민련총재=(골프를 화제로 한참 환담) ▲이민주총재=골프 금지령은 해제된 것인지. ▲김대통령=내가 안 친다고 했지 골프를 금지한 적은 없다.(김자민련총재에게)체중이는 것 같다. ▲김자민련총재=체중이 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클린턴미국대통령의 인기가 재선이 가능한 정도로 올라가는 것 같다. ▲김대통령=타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도가 클린턴은 44%,공화당의 보브 돌은 46%로 나타나고 있다.보브 돌은 오른팔을 못쓰는데 전쟁에서 부상당했다.내가 의회 연설할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던데 감회가 새로운 것 같더라. ▲김자민련총재=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검증을 거쳤고 보브 돌은 그렇지 못해 클린턴이 유리한 것 같다. ▲황낙주 국회의장=우리나라 사람은 칭찬에 인색하다.국회의장이 된 뒤 수십명의 외국 사람을 만났는데 한국을 부러워하고 칭찬하더라.14대 마지막인 이번 정기국회를 국민들이 칭찬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 “8·15특사 생활사범 많이 구제”/야대표등과 방미성과 설명 오찬

    ◎김 대통령/개혁 추진 사심없이 국민과 더불어 김영삼 대통령은 31일 낮 청와대에서 이기택 민주당총재,김종필 자민련총재 등 야당대표들과 황낙주 국회의장 등 3부요인과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원칙에 입각해 정도로 나가겠다』고 변함없이 개혁을 추진해 나갈 방침임을 확인하고 『원래 걸어온 길이 그랬지만 사심없이 국민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방미 성과를 설명한 이날 오찬에서 또 『8월25일이면 내 임기도 반이 지나가는데 두분 총재가 뒷받침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국정운영 협조를 당부했다. 김대통령은 『지난날 고도성장의 부산물로 불행한 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전제,『그 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제부터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문제를 철저히 챙기도록 하겠다』며 사고수습등에 대한 야당의 협조도 아울러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이총재는 『정치적 이유와 이념적 문제때문에 생긴 시국사범과 정치적 이유로 제약받는 사람들을 많이 구제해달라』고 대폭적인 사면복권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큰 범죄 행위가 아닌데 전과자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런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내각과 비서실에)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8·15 특사의 초점이 「생활사범」을 구제하는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새정부들어 사정으로 사법처리된 인사들을 사면복권하는 「정치특사」는 정부의 개혁의지가 훼손되고 광복 50주년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실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생활사범 구제에 있어 주로 도로교통법,향토예비군법등 자신도 모르게 법을 위반해 고통받는 다수 국민들의 불편을 더는 방안이 추진될 것』이라고 말하고 『8·15특사에 일반 시국문제로 형을 받은 일부 공안사범이 포함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대통령이 야당대표와 만난 것은 지난해 5월 이민주당총재와 청와대회담을 가진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김대통령은 이에앞서 이날 아침 청와대에서 이홍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국무위원 및 조순서울시장과 조찬간담회를 갖고 방미 결과를 설명한뒤 『이번 8·15는 국민들이 광복 5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조선총독부건물 철거는 문민정부 출범이후 여론수렴과정을 거쳐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은 것인 만큼 차질없이 추진토록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개혁 추진과 관련,『어떤 경우에도 원칙에 입각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면 되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사심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 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 경복궁 점거 70년만에 사라지는 일본총독부

    ◎중앙돔 첨탑부터 헌다/광복 50주년 맞는 오는 「8·15」기념행사/석조건물 내년까지 모두 해체/첨탑 다이아톱으로 둘로 절단/9월 독립기념관에 옮겨 보관 일본 식민지 통치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오는 8월 15일 중앙돔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문화체육부는 29일 제50주년 광복절인 오는 8월 15일 상오 9시,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조선총독부의 중앙 돔 첨탑을 철거,건물의 해체작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날 철거식에서 주돈식 문체부장관이 건물의 해체를 조상에 알리는 고유문을 낭독한뒤 첨탑을 제거하게 되며 제거된 첨탑은 박물관 광장에 보관했다가 오는 9월중 독립기념관으로 이관 보존된다고 문체부는 설명했다.첨탑 철거행사는 5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의 하나로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다. 첨탑 철거는 현대건설 계열사인 철거전문회사인 산천개발이 시공을 맡는다. 산천개발은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현 박물관이 조선왕궁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한 후인 내년 상반기부터 건물에 대한 본격적인 철거작업을 벌여 내년말까지는 완전 철거할 예정이다. 산천개발의 해체방법에 따르면 전체 돔을 두 부분으로 절단해 대형크레인으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것. 직경 3·5m,높이 8·5m의 첨탑은 전체 구조가 철근 콘크리트와 동합금으로 돼 있어 총무게가 35t에 이른다.이 가운데 해체되는 부분은 최상층부 10·5t과 중하단부 15t등 모두 25·5t.산천개발은 첨탑이 설치된 지점의 높이가 지상 35m나 되어 첨탑무게를 고려해 2개 부분으로 절단한후 안전하게 따로따로 철거할 방침이다. 절단에 쓰이는 다이아몬드 줄톱은 직경 1㎝의 강선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입힌 기계로 산천개발은 이를 모터에 연결,고속회전시켜 첨탑을 두동강낸다. 그 후 본관 석조 건물은 압쇄식으로 6개월에 걸쳐 철거된다. 철거에 앞서 8월 1일부터 5일까지 건물위에 절단 기계인 다이아몬드 줄톱을 설치하며 5일부터 10일까지 시운전을 거쳐 10∼14일중 실제 절단작업을 벌인다.광복절인 8월 15일 상오 기념식장에서는 이 절단된 돔을 들어내 역사적인 종말을 알리는 셈이다.구 조선총독부건물은 일제가 1926년 건립한 석조건물로 계획대로 작업이 진행되면 오는 96년말 70년만에 지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문체부는 이 건물을 철거하기 전 완벽한 실측을 실시하고 기존 모습과 해체과정을 영상물등 다양한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또 건물의 이오니아식 원주,중앙홀 대리석,2층계단등 보존가치가 있는 10여개 부분의 자재는 용산부지에 오는 2010년까지 건립될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전시·교육자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 일 「데라우치 문고」 연내 돌아온다/한­일 대학교류형식 반환키로

    일본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사내정의)가 수집해간 주요 한국 문화재들이 올해안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일의원연맹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지난 20일부터 3일동안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영광 민자당 국책자문 위원장은 28일 『데라우치 문고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 야마구치여대의 학장과 협의를 통해 한국의 적절한 대학과 학술교류 형식으로 해당 문서들을 반환한다는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위원장은 『야마구치현은 현재 우리 경상남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고 밝히고 『다카야마 나오(고산치) 야마구치여대학장과 박재규경남대총장이 조만간 대학간 자매결연을 하고 경남대측의 전문교수단 파견에 이어 학술목적을 위한 영구보존등 반환조건을 협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데라우치문고는 데라우치총독이 조선과 중국·일본등에서 수집해 가져간 문화재급 고문서·서화집등으로 후손들이 야마구치여대에 기증,보관돼오고 있다.
  • 경복궁내 구조선총독부 박물관/철거작업 본격돌입/9월24일까지 완료

    문화재관리국은 27일 전통공예상설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복궁내 구조선총독부 박물관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문화재관리국은 이날부터 건물의 내부 시설물과 보관물 철거작업을 시작한데 이어 28일부터 비계설치작업을 벌이며 오는 8월 중순부터 건물철거에 들어가 9월24일까지 완전철거할 계획이다. 경복궁 복원정비계획에 따라 동궁(왕세자의 처소)을 복원하기 위해 철거되는 이 건물은 1915년 일본이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지은 것으로 연면적 3백66.34평의 2층규모다.
  • 코트디부아르 「평화의 성당」(세계의 명소/걸작건축 감상:19)

    ◎3년만에 건립한 세계최대 성전/콘크리트 기둥·대리석을 조립식으로 축조/“영혼없는 건축”… 집권자의 과대망상적 산물/높이 170m 총33만 8천여명 동시 미사참여 가능 명지대학교 최재필 지금은 작고한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에 대해 새삼 경탄을 하게 된다.김환기화백의 그림은 그저 조그만 네모와 그 속의 점들이 커다란 화폭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다.이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이거 뭐 이래? 애들 장난같잖아』하는 반응을 보일는지 모른다.아무런 뜻도 없는(다시 말해서 의미있는 형태가 아닌)그저 조그만 무늬의 반복은 시정 아낙네의 치마폭에 인쇄된 무늬와 무엇이 다를까 하고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김화백이 네모 하나하나,점 하나하나를 캔버스에 그리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자.김화백은 노년이 되어 마지막으로 그 큰 캔버스에 네모 하나,점 하나를 찍으며 그간 그의 일생에서 스쳐지나갔던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만나서 좋았던 사람.이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젊었을 시절 신세를 졌던 사람.김화백은 네모 하나 점 하나를 그려가며 이들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리라.밤이 새도록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새벽 그 넓은 캔버스에 이제는 더 채워넣을 공간이 남지 않았음을 발견했을 때,그는 그가 그동안 보냈던 삶의 전부가 이 한장의 캔버스에 녹아들어 있음을 확인하며 탈진한 그의 육체를 뛰어넘는 초월의 경지를 느꼈으리라. ○규모 웅장… 감동은 없어 바로 이런 것이 예술품의 가치가 된다.이러한 가치는 비단 미술품에 그치지 않는다.건축도 마찬가지다.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물도 이것이 땅 위에 굳건히 서게 되기까지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것에 용해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럽에는 대성당이 많다.로마 바티칸시의 성베드로 성당,파리의 노트르담사원,런던의 성바오로 성당 등.이들 성당 앞에 서면 그 웅대한 규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에까지 정열을 쏟아 만들어 놓은 세심한 장식 디자인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신을 향한 인간의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이들 건물을 짓는데 수백년이 걸렸다.중세의 장인들은 대를 이어가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는 말이다.이들중 대부분은 살아있는 동안 완성된 건물을 보지도 못했다.그렇지만 이들은 벽돌 한장한장을 쌓아가며 스테인드글라스 한조각 한조각을 맞추어 나가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또 그것이 아름다웠든 그렇지 못했든지를 막론하고 그것을 신에게 바친다는 태도를 견지했을 것이며 자신이 마치지 못한 작업은 그의 아들에게,그의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그래서 수백년이 흐르면 비로소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성당이 완성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이보다는 인내심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바로 5년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 단 3년만의 공사 끝에 건립되었다.더구나 이 성당은 본고장 유럽에 있지도 않다.「평화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이름지어진 이 건물은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라는 나라의 야무스크로시에 세워진 것이다. 성당 중앙부의 돔은 지름이 90m에 이르며,꼭대기의 높이는 지상에서부터 1백70m니 우리나라 63빌딩보다 약간 낮은 정도다.그러나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몇개가 이 돔 안에 들어갈 수 있다.성당 내부 제단의 캐노피(차양)높이만도 9층 높이가 되며,10층 건물의 높이를 가진 창문을 장식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총면적은 2만3천평에 이른다.그뿐이랴.이 성당에는 좌석이 7천석이 있고,추가로 1만1천명이 서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게다가 대리석이 깔린 옥외광장은 3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모두 총합 33만8천명이 동시에 미사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코트디부아르의 행정수도로 근래 새로이 개발된 야무스크로시의 총인구가 3만명을 넘지 못하고,그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는 4천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렇듯 비현실적이다 못해 과대망상적으로 큰 성당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인 펠릭스 우페이 바냐다.참고로그는 코트디부아르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부터 이제껏 35년간 대통령을 해오고 있다. ○63빌딩보다 약간 낮아 우페이 바냐 대통령이 어린시절,그의 고향 야무스크로에는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영세를 받기 위해서 수십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오늘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을 그의 고향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자신의 고향에 아름다운 성당을 갖고자 하는 개인적인 염원 자체야 높이 사 줄만 하지만,이러한 염원이 과대망상적인 사고로 귀결지어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 평화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3년만에 뚝딱 지어졌다.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피에르 카브렐리라는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하고 있다.처음 우페이 바냐 대통령에게 불려간 자리에서 대통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대한 꿈을 이야기했다.나는 요즈음 누가 이런 고전양식의 성당을 지으려고 할까하고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그리고는 이 성당을 언제까지 완공해야 할는지 물어보았다.대통령은 바티칸의 교황이 4년만에 한번씩 아프리카를 방문하는데 그가 작년에 왔다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이제 다음번 방문까지 몇년이 남았는지를 나보고 계산해 보라고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대의 성당은 3년만에 지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기술이 없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돌 하나하나를 깎고 기둥을 하나씩 만들어 지은 중세의 성당과는 달리 이 성당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부재(공상에서 미리 만든 콘크리트 기둥이나 벽체 등)를 현장에서 대형 크레인을 써서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김환기화백의 네모와 점에 녹아든 영혼,또는 중세 장인들의 수공예작품에 밴 종교적 열정을 여기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 대통령의 업적” 과시 어느 후진국 장기 집권자의 개인적 욕구에서 시작되어 과대망상적으로 지어진,그러나 영혼이 없는 건축,이것이 이 세계최대 성당의 현주소다.우페이 바냐 대통령의 나이는 현재 90세가 넘었다.그가 대통령직에서 어떤 연유로든지 물러난 후에도 이 성당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지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다.후진국의 장기 집권자나 식민통치자들은 거개가 다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개인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대형 구조물을 한 두개쯤은 지어놓게 마련이고,이들이 권력을 잃은 후에도 대부분의 이러한 건축물은 오래지 않아 장대한 기념식과 함께 허물어지거나,요행히 그렇지 않더라도 그 모습이 쇄락해지게 마련인 것을 우리는 멀고 가까운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올 8월이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게 된다.5공 시절 세워진 천안의 독립기념관의 그토록 장엄한 모습이 요즈음 그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한 퇴기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국민의 성금(?)으로 시작된 평화의 댐 공사는 그래도 중간에 무산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34년만에 처음으로 인구 1천만의 국제도시 서울에 민선시장이 선출되었다.포부도 크고 개인적인 신념도 가지고 있겠지만 세계최대의 무엇을 서울에 들여놓고자 무작정 밀어붙이는 일만은 삼갔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남·북·일 새 3각관계(한·일수교 30년)

    ◎일의 「남·북 줄타기 외교」 대비해야/대북 수교협상 자세따라 한·일갈등 소지/끊이지않는 「망언」… 선린의 앞날 불투명 국교가 정상화된지 30년,한일양국관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지난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에 서명한 이후 양국 관계는 발전과 퇴보를 되풀이하고 있다.지난 30년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측면에서 양국 관계는 양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65년 2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무역액은 그동안 2백배 가까이 늘어 지난해에는 3백89억 달러를 기록했다.양국간 인적 교류도 65년 1만명에서 지난해 2백7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이 이웃국가로서 결속력있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한국쪽에선 「동반자」보다는 「반일감정」이나 「망언」이,일본쪽에선 「혐한」「추한 한국인」이란 단어가 언론에 더 많이 등장한다. 지난 연말 한국 외무부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들이 여느해 보다 강하게 새해를 맞는 흥분을 느낀다고 털어 놓는 것을 본 일이 있다.광복 50년(일본에는 종전 50년이다),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1995년의 역사성이 양국관계를 다루는 당국자들에게는 팔을 걷어붙일만한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몇차례 천명했듯 95년을 과거를 극복,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원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당국자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의욕은 국민감정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일본과의 수교 30년을 기념하는 것 같은 공식행사를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엄연한 우리 국민의 평균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기념행사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이를 반민간 단체로 볼 수 있는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윤환/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으로 넘겼다.그러나 연맹측이 계획했던 행사조차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경북 예천 출신으로 「일본의 이미자」로 불리는 재일동포 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서울,부산 공연은 문화체육부의 불허로 무산됐으며,한일청소년회관의 건립계획도 변경됐다.이달 일본에서,오는 12월 우리나라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것 정도가 확실히결정됐을 뿐이다. 의원연맹측이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사내정의)가 한반도에서 수집해간 문화재를 반환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 정도가 계속 기대를 걸만한 사업이다. 양국 관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차원에서 시각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분석한다. 우선 한일 관계를 양자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자간 관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사회 내에서라면 한일 양국의 이익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양국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국가발전 전략을 꾀하고 있으며,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 이념도 같다. 일본 관계를 다루는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선출과정에서 김철수후보를 적극 지원하거나,우리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양국의 이해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국익이 일치하는 구조 속에서도 양국 국민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 지적이다.일본인들 스스로의 지적처럼 『괴롭지만 과거를 바로 보지 않으면,미래는 없다』는 것이 한일관계의 현실이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군대 위안부문제,사할린동포 문제등은 양국이 해결해야 할 오랜 현안이지만,일본측은 어느것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며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일의원연맹의 지철민 사무총장은 올해 사회당,자민당,신당 사키가케등 여당연합과 신진당이 추진하던 일본 국회의 과거사죄와 부전결의가 결국 신진당이 불참한 채 반성과 평화추구라는 용두사미로 끝나고,때를 맞춰 터져나온 와타나베(도변미지웅) 전외무장관의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이 아직 한일관계의 미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일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의 대북 쌀 제공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미묘한 자세는 우리 국민과 정부 당국자들이 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원초적 우려감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인가.일본은 과연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가.한국민은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를 이끌어낸뒤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저울질하는 줄타기 외교를 전개하며 이문을 챙기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올해가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서가 아니라,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에,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일본 태도에 따라 한일 관계는 또 한차례 갈등하며 후퇴의 시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측 외교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지난 1월 고베 대지진 때 한국 국민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구호물자를 보낸 바 있다.전문가들은 광복후 50년이 지나고 양국을 움직이는 세력이 전전세대에서 전후세대로 교체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양국관계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세대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인식을 전세대보다는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또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낮에는 반일,밤에는 친일」이라는 식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은 있다」의 저자 서현섭씨(외무부 외교정보관리관)는 『한일관계의 지난 50년은 두나라 국민이 무시(DISREGARD)→불신(DISTRUST)→혐오(DISLIKE)라는 3D를 만들어온 세월』이라고 말했다.그는 『앞으로의 50년은 세 단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DIS」 세글자를 떼어버리고 상호인정(REGARD)→신뢰(TRUST)→선린(LIKE)의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일관계 30년 일지 ▲1965년 6·22=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서명 ▲8·28=한일협정 반대 학생 데모 및 위수령 발동 ▲12·18=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발효 및 주한·주일대사관 상호개설 ▲1966년 1·17=한일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발효 ▲5·27=일본 문화재 2천3백28점 반환 ▲19 67년 6·30=사토 에이사쿠 일본총리 방한,박정희대통령 취임식 참석 ▲1970년 6·16=한일 정기여객선(부관페리호) 취항 ▲1971년 2·5=일·북 재일교포 북송합의서 조인 ▲1973년 8·8=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년 8·15=조총련계 문세광,육영수 여사 저격 ▲1975년 9·15=조총련계 동포 성묘단 모국 방문 ▲1982년 7·26=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외교 문제 비화 ▲1983년 1·11=나카소네 일총리 첫 공식 방한 ▲1984년 9·6=전두환 대통령 첫 공식 방일 ▲1986년 5·18=일,대한 2백해리 어업수역 선포 ▲7·24=후지오 문부상 교과서 왜곡관련 망언 ▲1990년 5·24=노태우대통령 방일 ▲9·24=가네마루 자민당부총재 등 3당 대표 방북,일북수교 원칙 합의 ▲1991년 1·9=가이후 총리 방한,한일 우호협력 3원칙 발표 ▲1992년 7·6=일본정부 종군위안부 조사결과 발표,정부관여 인정 ▲11·8=노태우 대통령 실무 방일 ▲1993년 10·4=사할린 동포 관련,한일 실무협의회 ▲11·6=호소카와총리 실무 방한 ▲1994년 3·24=김영삼대통령 방일 ▲7·23=무라야마 총리 방한 ▲1995년 1·19=한국정부,고베지진에 구호품 전달 ▲6·5=와타나베 전외상 한일합방 관련 망언 ▲6·14=일본의회 과거 반성,평화 추구 결의 ◎지표로 본 양국관계/교역규모 급속 증가… 1백85배 늘어/경기둔화·국민감정 악화… 90년초 주춤/대일 누적적자 1천억불 시정 과제로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80년대 말까지 교역과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다가 90년대 초 국내 경기둔화와 노사분규 여파로 잠시 주춤했다.그러다 엔고에 힘입어 지난 해부터 기계류와 부품을 중심으로 산업협력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그러나 30년간 누적돼 온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65년 국교정상화 당시 대일 수출은 4천4백만달러였다.이것이 지난 해에는 1백35억2천만달러로 늘었고,대일 수입도 1억6천만달러에서 2백53억9천만달러로 커졌다.교역규모만 1백85배 신장한 셈이다. 반면 교역확대속에 65년 1억2천만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가 86년 50억달러를 넘은 데 이어 지난 해에는 1백억달러 돌파(1백18억6천만달러)라는 반갑지 않은 기록까지 남겼다.그간의 누적적자만 이미 1천억달러를 넘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국교정상화 이후 계속 늘던 대일 수출은 89년 1백35억달러를 고비로 줄기 시작,92년 1백16억달러로 떨어졌다.수입도 91년 2백11억달러에서 92년 1백95억달러로 감소했다. 일본의 대한투자가 전체 외국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92년 건수기준 30.5%,금액기준 17.3%로 82∼86년 평균(건수 47.7%,금액 49.6%)에 못미쳤다.고임금으로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과거사 문제로 국민감정이 악화돼 소원한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93년 초 양국 모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 경제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됐다.국민감정과 정치논리보다 경제논리로 문제를 풀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한 뒤 우리 정부가 먼저 수입선다변화 품목을 해제하는 등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역액이 92년 3백11억달러에서 지난 해 3백89억달러로,일본의 한국투자는 92년 72건,1억5천달러에서 지난 해 1백32건,4억2천만달러로 각각 늘었다. 교역형태도 기계류와 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다 경공업제품을 생산,제3국에 파는 「산업간 교역형태」에서 반도체와 철강 등 중화학제품을 서로 주고받는 「산업내 교역」으로 바뀌었다.일본으로서도 가격과 품질경쟁력이 있는 한국산 부품과 소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일본기업들의 투자도 저임금을 겨냥한 해외 생산기지화 전략에서 전략적 제휴형태로,기술협력도 한국의 일방적 기술이전 요구가 아닌 경제논리에 기초한 교류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엔고 지속과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미국과의 협상실패에 따른 무역마찰로 일본은 우리와 산업협력의 끈을 단단히 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일본기업을 적극 유치,대일역조를 개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그렇게 되면 기술이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양국관계가 호혜와 동반의 관계로 성숙돼 갈 것이다.
  • 장진홍 의사(이달의 독립운동가)

    ◎대구 조선은행 폭파 “미완의 거사”/일제만행 철저히 조사… 국제사회 고발시도/동경경시청 테러 모색중 붙잡혀 순국자살 『육체는 죽는다해도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겠다』 창려 장진홍 의사(1896년 6월6일∼1930년 6월5일)가 일제에 의해 사형이 확정된뒤 대구 옥중에서 일제총독에게 보낸 서한문의 한 대목이다. 의사는 35년의 짧은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운 독립투사였다. 경북 칠곡 출신인 의사는 19세때인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교,2년동안 군사지식을 배우고는 제대해 곧바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했다. 국내에서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의사는 1918년 만주 봉천(심양)을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광복단 동료들과 함께 한인 청년 80여명을 규합,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훈련이 어렵게 되자 다시 귀국,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맞았다. 의사는 일제가 독립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제암리 학살사건등을 저지르자 일제의 만행을 철저히 조사,국제사회에 고발코자 전재산을 정리해 한국인 피해조사작업을 펼쳤다. 서적행상으로 가장해 전국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학살·방화·고문사실등을 기록한 「조사문」을 작성,인천함대에 근무중인 친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의사는 국내 독립운동이 미약해지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에게 타격을 가할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1927년 4월 의사는 동료의 소개로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일본인 폭약전문가 굴절무삼낭을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굴절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웠으며 만주와 국내에서 다이너마이트·뇌관등을 구입했다. 의사는 이어 1927년 8월 시험적으로 제조한 2개의 폭탄을 칠곡 산중에서 터뜨리는 폭파시험을 가졌다. 폭파위력을 확인한 의사는 혼자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폭탄투척장소를 경북도청·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대구 부호가등 5곳으로 선정하는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의사는 거사를 위해 다시 6개의 폭탄을 제조,1927년 10월18일 거사에 나섰다. 이날 상오 9시쯤 자전거에 폭탄을 싣고 대구시내 덕흥여관으로찾아온 선생은 『길전상점 점원인데 이 여관에서 며칠간 묵게 됐다』고 신분을 위장하고 투숙했다. 선생은 이어 상오 11시30분쯤 폭탄을 4개의 벌꿀상자속에 넣어 싼뒤 여관점원에게 『이웃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이 선물상자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점원은 대구지점의 한 일본인 은행원에게 이 상자를 전달했으나 이 은행직원이 폭탄폭발 직전 상자를 열어보는 바람에 폭탄임이 들통났다. 은행원들은 서둘러 폭탄 도화선을 자르고 다른 3개는 길옆으로 내다놓았다. 그러나 11시50분쯤 길옆의 폭탄 3개가 폭발,신고를 받고 쫓아온 일경등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창문 70여장이 부서졌다. 이 거사로 대구시내는 심한 혼란상태에 빠졌고 일경은 총비상이 걸렸다. 의사는 미리 여관을 나와 선산군의 한 동지집으로 피신해있었다. 일경은 범인을 찾을 수 없자 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정기등 8명을 검거,고문으로 거짓조서를 받아 공판에 회부했다.민족저항시인 육사 이원록 선생(건국훈장 애국장)도 이 때 사건에 연루돼 무고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의사는 이어 1928년 다시 영천경찰서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아예 일본땅에서 거사를 할 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에서 11개월동안 이곳저곳 폭탄투척장소를 물색하던 의사는 동경 일제 중의원과 경시청을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하고 거사후 일본을 탈출할 계획까지 치밀하게 짰다. 그러나 일제는 의사에게 이미 혐의를 두고 검거작전을 비밀리에 진행중이었다. 일제는 거사를 며칠 남겨둔 1928년 2월13일 의사가 묵고있던 대판시내 안경점을 급습,의사를 체포했다. 체포된뒤 대구로 압송된 의사는 일경의 심문과정에서 『조선은행 폭탄사건은 혼자 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동포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의사는 사형이 확정되자 자결순국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일 우익 「한·중 수탈사」 왜곡입증/일 귀족원 비밀회의록 공개의미

    ◎태평양전쟁에 조선인 징용 준비 확인/“공격대상 미·영” 논리 허구성 드러내 일본참의원의 전신인 명치헌법하의 귀족원(추밀원) 비밀회의록이 5일 모두 공개됐다.비밀회의록은 24건으로 A4판 4백70쪽 분량.그 가운데 전후 미점령군 사령부가 가져간 「미국의 일본 공습 및 상륙에 관한 질의」는 공개대상이지만 자료는 입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중의원이 갖고 있는 비밀회의록의 공개가 과제로 남게 됐다. 비밀회의록의 공개는 대부분 한국에서는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등에 의해 널리 확인돼 왔으나 일본에서는 극우주의자나 일부 보수정치인등에 의해 제멋대로 왜곡돼 왔던 과거의 침략수탈사가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됐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41년 1월 회의록에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키기 1년전 이미 영미와의 전쟁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이는 뒤에 징용으로 나타난다. 또 고노에 당시총리는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관련,「대동아 각 민족을 구미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한다」면서 「(예상되는 지구전에 대비해)남방경영에 의해 소요물자의 보급을 확보해 지구전체제를 정비하는 외에 길은 없다」고 본심을 드러내고 있다.즉 구미로부터 동남아시아를 분리시켜 자원을 강탈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정치권에서 부전결의등의 채택을 둘러싸고 비뚤어진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시아와 싸운 것이 아니고 영·미와 싸우다가 본의아니게 아시아인에게 폐를 끼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영·미가 일본의 생명선인 유류등의 금수조치를 실시해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일본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논리가 엉터리라는 점이다.고노에총리는 『영·미는 중일사변과 관련,9개국조약에 기초해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이 대륙침략정책을 포기하지않자 영·미가 일본을 준적국화하고 가솔린등 대일수출금지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 모든 원인이 한반도와 만주에 이어 중국까지 마구잡이로 침략을 자행한 일본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밖에 비밀회의록에는 1894년(한국의 동학농민전쟁에 일본이 개입,청일전쟁이 벌어진 해) 청일전쟁 임시군사비를 심의하는 귀족원 회의가 히로시마에 건설된 대본영의 가의사당으로 의원들이 집합해 열리는가 하면 심의도중 군사비에 관한 사항이라며 속기까지 정지돼 기록이 남겨지지 못하게 되는 등 군의 문민정치원리에 대한 훼손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45년 3월 도쿄대공습 직후 열린 비밀회의에서는 이미 공습사망자가 5만5천명을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이와관련,한 전쟁작가는 당시 일본이 전쟁을 포기했다면 일본은 원자탄 투하도 피할 수 있었고 일본인 사망자 3백10만명 가운데 2백만명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침략에 눈이 먼 지도자들이 일본국민과 아시아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회의록 내용을 살펴본 도쿄도립대 사사키 류지교수등은 「고노에내각은 절망을 선택했다」,「무책임한 체계의 공허함을 본다」면서 침략의 역사에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일제 비밀회의록 요지 일본 참의원은 18 91년부터 19 45년까지 명치헌법하의 귀족원에서 행해진 비밀회의록을 5일 공개했다.다음은 비밀회의록 가운데 한반도 및 침략전쟁과 관련된 부분들의 주요내용. ▷태평양전쟁과 조선인 노동력 착취 계획◁ 1941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총리의 「국내외정세에 관한 보고」.…제국장래의 생명인 대동아 공영권건설 문제에 관해 독일·이탈리아 양국은 일본의 지도권을 인정한다고 함이 명료하다. 독·이와 더불어 나아가는 길 말고는 길이 없다.전쟁은 독일측의 승리로 귀결될 것으로 믿는다.영국과 미국은 중일사변에 대해 우리의 지금까지의 대륙정책을 포기하도록 하고 있다.제국으로서는 그렇게 해서는 장래의 발전이 되지 않는다.그 결과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준적국화하고 장개석정권을 원조하고 있으며 가솔린등의 대일수출금지에 이르고 있다. (영·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면서)특히 노동력 보급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곤란을 느낄 것으로 생각된다.지금의 탄광종사자 30수만명에 더해 시급히 약 4만명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다른 산업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쉽지 않다.국내 노동자 모집,조선 노동자 도입등에 관해 현재 응급 특별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아시아각지의 침략과 관련)예상되는 지구전에 대비해 남방경영에 의해 소요물자의 보급을 확보해 지구전체제를 정비하는 외에 길은 없다. ▷중일전쟁◁ 40년 2월 요나이 미쓰마사총리(해군장관출신) 상황보고.중경정권(장개석정권)이 항전을 계속하는 한 사변은 계속된다.(왕조명정권의 목적은)중경정권을 약화굴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국제연맹탈퇴◁ 1933년 2월 사이토 마코토총리(조선총독역임)의 보고.(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는 립튼보고서를 국제연맹이 채택하면)동양평화의 확립에 대해 연맹과 소신을 달리하게 되므로 연맹과 협력할 여지가 없게 된다.…최후의 결정을 할 필요가 있다(이 회의는 연맹이 보고서를 채택한 2월 24일보다 사흘 앞선 21일 열렸다).
  • 서울시청사(외언내언)

    1926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서울시청 청사는 건축물로는 보잘것없는 졸작이다.10년의 대역사인 총독부 청사를 준공한 뒤 마지못해 아무렇게나 세운 것 같은 인상을 준다.그러나 터를 잡는 데는 적지아니 신경을 썼다.길건너 대한문앞은 을사조약이후 1919년 3·1만세운동까지 수많은 유생과 학생의 격렬한 연좌시위가 계속되던 곳.이런 조선의 정기를 위압적 건물로 꺾어보자는 속셈이 작용했다.그래서 경성일보사옥을 몰아내고 그자리에 경성부청사를 세운 것이다. 일인들은 청사가 준공된 뒤 『관청건물로는 최초로 공중식당·전화자동교환기를 설치하고 조선인의 백의에 맞게 흰색의 석재도료를 건물외부에 사용했다』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한일합방 당시 서울인구는 23만3천5백90명,부청이 건립된 26년에도 90만명에 불과했다.최초로 서울의 인구조사가 실시된 세종10년(1428) 한성부 인구는 10만3천3백28명.오늘날 인구 1천1백만의 거대도시 서울의 팽창을 읽을 수 있다. 서울시청 이전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부터.신축이전이 본격화된 것은81년1월 정상천시장때 일이다.서초동에 2만8천여평의 부지까지 매입했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지난해 정도6백년을 맞으면서 시청이전문제가 다시 제기됐고 최근에는 8곳의 후보지를 놓고 신청사건립시민추진위가 4차례 공청회끝에 현시청자리를 최종후보지로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동대문운동장등 후보지를 대상으로 수도서울의 상징성·역사성·중심성·교통편의등을 채점한 결과 4대문 안에 있는 현청사부지가 월등한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당연한 평가결과가 아니겠는가.새 청사는 97년 착공해 2001년쯤 입주할 예정이라고 한다.21세기를 여는,통일에 대비하는 기념비적인 새 청사가 세워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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