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총독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드롬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비법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역대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반등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162
  • 한­일 역사논쟁 해법찾기 고민

    ◎양국,「합방」 무효인정과 배상 불원 연계 검토/한국선 일제 피침국들과 공동대응도 모색 한국과 일본간의 과거사 논쟁은 이제 화전양갈래로 나뉘어 진행되는 국면이다.한편으로는 양국 국민의 감정싸움이 계속되는가 하면,또 한편으로는 파문을 수습하기 위한 양국의 외교적 노력이 모색되고 있다. 감정적 측면에서의 싸움은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지난 17일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일본 외상이 『한반도 분단은 일본이 책임』이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뉴욕타임스 회견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한 이후 양국의 감정대립은 본격화 됐다.이 싸움을 주도하는 것은 양국의 정치권과 여론이다. 국내 여야 정당에서는 연일 일본을 비난하는 성명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김태지 일본대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일 『한국 정부가 일본에 강경발언을 하는 것은 내년 4월의 총선을 앞두고 하락한 인기를 만회하려는 의도』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이에 대해 야당에서조차 『파렴치한 왜국인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번불붙은 양국의 감정싸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번 논쟁을 가라앉히기 위한 양국정부의 해법찾기도 본격화되고 있다.아직까지도 한·일합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한국정부의 입장과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일본의 기본입장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정답은 없는 것 같다.따라서 양국 정부는 서로가 양해할 수 있는 정도에서 접점을 찾으려 한다.예컨대 「일본이 한·일합방조약이 무효임을 인정하되,한국은 물질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검토되는 방안 가운데 하나다.그러나 양국정부로서는 그런 타협안이 확정될 경우 뒤따르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려할 부분이 많다.또 격앙된 양국의 국민감정이 양국 정부의 타협안에 쉽게 수긍할 것 같지도 않다.여기에 양국 정부의 고민이 있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는 일본과 관계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주장을 관철하고 싶겠지만 국가간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논쟁에서 명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우리 측의 주장에 가까운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입장이다.그러나 현재로서는 일본도 쉽게 물러설 태세가 아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해결방안도 모색하고 있다.예컨대 과거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와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 공동대응하는 방안 등이다.사태가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면 한·일관계는 한층더 돌이키기 어려운 긴장국면으로 돌입할지도 모른다. ◎“한일 합방 조약은 원천 무효 일 메이지대 교수 저서 화제”/“「을사보호조약」은 강폭­협박 등 통해 체결” 증거제시/“한일기본조약의 「무효」 규정 시점 명시 안해 논란” 분석 최근 한일관계는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최악의 상태를 맞고 있다.여러가지 현안이 뒤엉키면서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인지조차 찾기 쉽지 않은 상태다.이 가운데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은 한일합방조약의 유효성 여부.무라야마총리의 발언으로 야기된 이슈지만 이 문제는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올해 전후 50주년을 맞아 한 일본인 학자가 한일합방조약의 법적 유효성 주장에 의문부호를 찍는 내용의 「일한협약과 한국병합­조선식민지지배의 합법성을 묻는다」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6월 도쿄 아카시(명석)서점 출판으로 책을 펴낸 이는 운노 후쿠주(해야복수)메이지대 교수.일본근대사와 한일근대사를 전공분야로 하고 있는 그는 93년 도쿄에서 열린 「을사보호조약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이후 한일합방조약의 법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돼 2년만에 한국과 북한 학자의 글과 자신의 연구논문 등을 한데 모아 책을 펴낸 것이다. 그는 첫번째 장 「연구의 현상과 문제점」에서 먼저 한일기본조약의 「이미 무효」라는 규정이 국제조약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조인당시에 무효임을 확인한 데 불과하며 언제부터 무효인지를 명시하지 않아 문구상만으로는 한일 양측의 주장이 모두 허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그러나 합방조약이 원천무효인 근거로 「식민지화의 기점인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체결됐으며 이를전제로 한 합방조약은 따라서 무효」라고 말한다.1963년 조약법의 법전화를 검토한 유엔국제법위원회에 제출된 월도크 제2보고서가 「조약체결행위에 있어 국가의 대표자 개인에 대한 강제 또는 위협이 행해진 경우 국가가 조약을 폐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면서 을사보호조약을 역사적 실례로 들었다는 사실도 제시한다. 운노교수는 이러한 원칙을 1910년이전 당시 일본 외무성과 국제법학자가 잘 알고 있었다면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을사보호조약은 한국대표개인에 대한 「강폭,협박」을 통해 체결됐다고 「무력적 협박」 「협박적 언사」 「불법행위」의 증거를 차례로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그러나 지난 92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발견된 을사보호조약 원본에 황제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이 무효의 근거로 주장된데 대해서는 「조약서 정본에는 국가원수의 서명날인이 있어야 한다」는 초보적 오해 때문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고 지적한다.또 조약의 효력발생에 비준서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한다. 그는 책에 논문이 실린 이태정서울대교수와 김길신 김일성종합대학교수 등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의 강제조인은 부당하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고 전제하면서 을사보호조약과 그에 근거한 합방조약이 무효라고 한다면 ▲당시 한일관계를 국제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조선총독부의 권한행사가 한국 주권의 일시적 대행인가 아닌가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적 승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데 대해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 오늘 한­가 정상회담/경제 등 실질협력 증진방안 논의

    ◎김 대통령 오타와 착 【오타와=이목희 특파원】 캐나다를 국빈방문중인 김영삼 대통령은 19일 밤(현지시간 19일 상오·이하 한국시간)두번째 기착지인 토론토를 떠나 오타와에 도착,르블랑 총독이 주최한 오찬에 참석하는 등 2박3일동안의 오타와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김대통령은 20일 밤 캐나다의 크레티앵 총리와 단독및 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정세와 남북한 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세와 경제·통상및 산업기술협력 강화 등 두나라 사이의 실질협력 증진방안등에 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한다. 김대통령과 크레티앵 총리는 또 우리의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등 유엔과 아·태경제협력체(APEC)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방안 등에 대해서도 협의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0일 상오 르블랑총독이 주최한 국빈오찬에 참석,답사를 통해 『상호 보완적 산업구조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캐나다와 한국간의 협력강화는 양국의 공동번영은 물론 아·태시대를 앞당기는 견인차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5개 각서 오늘 서명 정부는김영삼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청소년 교류,산업·기술,농업,사회보장세 면제 및 국립공원관리 등 분야에서의 양국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5개 합의서를 채택하기로 했다.
  • 한·가 경협 아∼미주 번영 가교잇자/김 대통령(김 대통령 여로)

    ◎교민 1천명 환호·박수… 수차례 연설 중단/“한국인 부끄럽던 시대 갔다” 자신감 당부 캐나다를 국빈방문하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은 1박2일동안의 토론토 방문에 이어 19일 상오(한국시간 19일 하오·이하 현지시간) 세번째 방문지인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도착,로메오 르블랑 총독내외의 환영을 받으며 공식환영행사와 국빈오찬에 참석하는 등 오타와 일정을 시작했다. ▷국빈오찬◁ ○…김대통령은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19일 낮 총독관저로 르블랑총독을 예방,오찬을 함께 하며 환담을 나눴다. 르블랑총독이 『오타와를 방문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김대통령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민주와 번영의 꽃이 만발한 캐나다를 방문하게 돼 매우 기쁘다』고 화답했다. 김대통령내외는 이어 르블랑총독내외의 안내로 총독관저내 볼룸으로 자리를 옮겨 약 1시간20분동안 오찬을 함께 하며 우의를 다졌다. 르블랑총독은 환영사를 통해 『캐나다·한국 양국이 21세기 희망찬 아시아·태평양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도록 양국간 실질적인 협력이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답사에서 『한국과 캐나다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양국 국민간의 우정의 역사는 한세기이상 거슬러올라간다』면서 『두 나라는 6·25전쟁에서 혈맹이 되었으며 최근 아시아·태평양지역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특별한 동반자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국빈오찬에는 우리측에서 공로명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공식수행원과 최종현 전경련회장,조량호 한·캐나다경제협의회위원장등이 참석했다. ▷공식환영식◁ ○…이에 앞서 김대통령내외는 이날 상오 총독관저에서 열린 국빈방문 공식환영식에 참석했다. 김대통령내외는 총독관저 입구에서 캐나다측이 제공한 의전마차에 옮겨 타 기마경찰대의 안내를 받으며 본관앞 광장에 마련된 행사장에 입장했다. 김대통령내외가 의전마차에서 내리자 르블랑총독내외가 반갑게 영접했으며 김대통령과 르블랑총독내외는 나란히 사열대에 올라섰다.21발의 예포발사와 국가연주가 끝나자 김대통령은 캐나다 의장대장의 안내로 의장대를 사열한 뒤 르블랑총독과함께 연설대로 이동했다. 김대통령은 르블랑총독의 환영사에 이은 답사에서 『캐나다와 한국 두 나라는 한세기에 걸쳐 쌓아온 두터운 우정의 역사를 갖고 있다』면서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두 나라간 긴밀한 협력은 양국의 공동번영은 물론 미주대륙과 아시아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타와 도착◁ ○…토론토 방문을 마친 김대통령은 19일 상오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국제공항에 도착,3일간의 오타와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신기● 주캐나다대사의 기상영접을 받고 특별기에서 내린 김대통령내외는 리더만 캐나다 의전장의 소개로 대기하고 있던 캐나다측 영접인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를 교환했다. 김대통령내외는 이어 화동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뒤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교민들에게 『반갑습니다』라면서 일일이 악수을 나눴다.이날 공항에는 이현식 오타와한인회장내외등 교민대표와 해링턴 한·캐나다친선협회장등이 나와 김대통령의 오타와 도착을 영접했다. ▷토론토 출발◁ ○…김대통령은 17시간의 짧은 토론토 체류도중 교민리셉션,온타리오주 총리접견,만찬 등 바쁜 일정을 마치고 19일 상오 오타와로 떠났다. 숙소인 로열 요크호텔을 출발한 김대통령은 피어슨국제공항에 도착,미리 나와 있던 심경보토론토총영사의 영접을 받으며 서순경한인회장·양용진평통지역회장을 비롯,영사관 직원등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어네스토 페 온타리오주 의전장 등 캐나다측 인사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전용기 트랩에 올라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 ▷주총리 주최 만찬◁ ○…김대통령은 18일 하오 숙소인 로열 요크호텔 토론토 룸에서 열린 마이클 해리스 온타리오주 총리 주최 만찬에 참석해 한국과의 우의를 강조했다. 해리스총리는 만찬사에서 『캐나다에 진출한 한국기업 대부분이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 온타리오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캐나다에 대한 한국투자의 80%가 이 지역에 집중돼 있다』며 지속적인 우호협력증진을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해리스총리가 지난번 주총리선거에서 「상식혁명」을 주장한 사실을 들어 『상식혁명철학에 기초한 해리스총리의 개혁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돼 온타리오가 더욱 역동적으로 발전해나갈 것으로 확신한다』며 온타리오주의 번영을 기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캐나다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이 바로 이곳 토론토 출신으로 그는 최초의 한·영사전과 한글판 성경,영문판 한국사를 편찬함으로써 서구세계에 「은둔의 왕국」 한국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면서 1백여년에 걸친 한국과 토론토의 깊은 인연을 강조했다. ▷토론토 교민 리셉션◁ ○…김대통령은 18일 하오 숙소인 로열 요크호텔 콘서트홀에서 열린 교민리셉션에 참석,『훌륭한 캐나다 국민이 되어달라』고 격려했다. 과거에는 반정부활동이 거센 탓에 역대대통령이 토론토를 찾지 않은 때문인지 이날 리셉션장에는 당초 예상인원보다 많은 1천명가량의 교민이 참석,계속 박수와 환호를 보내 연설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김대통령도 시종 상기된 모습. 김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과거 한국사람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제 세계의 누구에게도 떳떳이 한국사람임을 밝힐 수 있는 때가 됐다』고 교민들이 자신감을 가져줄 것을 강조했다. ○국교은사 부인 만나 이날 교민들 가운데는 김대통령의 거제 장목국민학교 재학시절 송차조 교장의 부인 김순애씨(80)가 딸 4명과 함께 참석,김대통령에게 인사했는데 김대통령은 설명을 듣다가 갑자기 『아이구,사모님』이라며 끌어안자 김씨는 아무말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기도. 김씨는 딸들과 함께 지난 80년 캐나다로 이주했는데 이날 김대통령에게 전할 편지를 들고 참석,『김대통령이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 그 양반(송교장)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회고.
  • “한국에 투자 늘려라” 다각 「세일즈 외교」/김 대통령 여로

    ◎“가 자원­한국 생산력 결합 경협전망 밝다”/무역센터서 국산과일·주스 특별 홍보전 캐나다를 방문하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은 18일 상오(한국시간 19일 새벽·이하 현지시간)2박3일동안의 밴쿠버 방문을 마치고 두번째 기착지인 토론토의 피어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김대통령은 이에 앞서 17일 저녁 밴쿠버의 팬 퍼시픽호텔에서 밴쿠버 무역협회와 캐나다의 아시아·태평양재단이 공동주최한 만찬에 참석,「아·태 번영의 동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한국과 캐나다의 우호협력 증진 방안 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무역협회 만찬 연설◁ ○…김대통령은 17일 저녁 밴쿠버 무역협회와 캐나다의 아시아·태평양재단 공동주최 만찬 연설에서 캐나다 기업의 한국에 대한 투자증대를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세일즈외교를 전개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호텔 가제브 룸에서 가드 가돔 브리티시콜럼비아주 총독과 레이먼드 챈 주 국무장관 등 주요 참석인사 30명과 인사를 나눈 뒤 만찬장인 크리스탈 파빌리온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찬에서 펠프스 캐나다아시아·태평양재단 총재는 『김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한국민의 인권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며 집권 후에는 도덕성과 과감한 결단을 바탕으로 정치개혁과 민주발전,경제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대통령은 연설에서 『밴쿠버는 캐나다의 어느 도시보다 아시아의 힘찬 박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서 『캐나다의 풍부한 자원과 첨단기술,그리고 한국의 우수한 생산능력을 감안하면 양국간 경제협력 전망은 매우 밝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한국은 캐나다의 일곱번째 교역국이며 캐나다는 한국의 13번째 교역국이자 네번째 투자 대상국』이라고 상기시킨 뒤 『특히 환경,우주항공,생명공학,컴퓨터산업 등 첨단산업분야에서 두 나라 기업간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할 것』을 요청했다. 김대통령의 밴쿠버 방문은 이곳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특별한 요청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날 만찬은 이런 배경을 반영하듯 우호적이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며 만찬이 끝난 뒤 펠프스총재와 루이부회장은 김대통령에게 선물을 증정했다. 한편 김대통령은 이날 새벽 비가 내리자 숙소인 팬 퍼시픽호텔 헬스클럽 실내 조깅트랙에서 20분간 조깅을 했다. ▷손여사 UBC 방문◁ ○…대통령부인 손명순여사는 18일 하오 밴쿠버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UBC)의 인류학박물관과 밴두센식물원을 각각 방문,인디언 유물과 세계 각국 식물들을 둘러보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손여사는 인류학 박물관내 한국유물전시실에 들러 1910년대에 제작된 색동저고리와 나막신,꽃신,부채,복주머니,각종 탈 등을 살펴본 뒤 『이들 유물들을 어떻게 수집했느냐』고 물었고 이에 한국전시관 책임자는 『선교사를 비롯,한국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기증받았다』고 대답했다. ▷한국 과실류 홍보행사◁ ○…한국 농수산물 유통공사가 주최한 한국 과실 및 과일주스류 특별홍보행사가 17일 상오 밴쿠버 무역센터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공로명 외무·최인기 농림수산부장관 등이 참석,우리 과실의 특성과 우수성을 참석자들에게 설명하는 등 세일즈활동을 전개했다.
  • 김 대통령 밴쿠버 무협 연설 의미

    ◎“한국 시장개방 선진국 수준” 자신감 피력/“가 서부지역은 아주­북미 연결통로” 강조 김영삼 대통령은 18일 밴쿠버무역협회 초청연설을 통해 21세기 아·태지역의 개막을 앞두고 한국과 캐나다가 국제경제측면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적시했다. 먼저 한국의 역할과 관련,김대통령은 두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한국의 개방이 선진국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천명했다.또 우리의 발전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기술을 아·태지역의 개도국들과 공유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도 약속했다. 김대통령은 연설에서 한국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행정규제 완화,외국인 전용공단 건설 등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앞으로 캐나다가 속해 있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는 물론 중국·아세안·베트남 등 아시아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다짐했다. 캐나다에 대해서도 김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투자확대를 요청했다.풍부한 자원과 첨단기술을 가진 캐나다와 우수한 생산능력을 가진 한국이 서로 도울 때 바로 21세기를 지향하는 「아·태협력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대통령은 특히 밴쿠버가 속한 캐나다 서부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이곳이 한국과 캐나다,궁극적으로는 아시아와 북미대륙을 잇는 가교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최근 캐나다 서부지역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환경·우주항공·생명공학·컴퓨터산업 등 첨단산업분야에서 한·캐나다간 협력이 급진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의 캐나다 방문은 주로 경제외교에 치중돼 있다.캐나다와 경제교류가 많은 기업인 28명이 수행하고 있다.밴쿠버무역협회 연설은 「정상 세일즈외교」의 본격시동인 셈이다. 김대통령이 이번 순방에서 경제외교의 첫 무대로 밴쿠버무역협회와 캐나다 아·태재단이 공동주최한 행사를 잡은 것은 두 단체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밴쿠버무역협회는 1887년에 창립,1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단체다.현재 밴쿠버를 중심으로 4천여기업과 경제단체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지사도 포함돼 있을 만큼 회원의 면면이 폭넓은 게 특징이다. 캐나다 아·태재단은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에 의해 지난 84년 설립됐다.본부는 밴쿠버에 있고 몬트리올·토론토·빅토리아 등에 지부가 있다.APEC연구센터를 설치,아·태지역이 세계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에 대비한 각종 연구및 조사활동을 하고 있다.한국·말레이시아·대만 등 아시아지역에 캐나다문화원도 운영하고 있다. ◎김 대통령 밴쿠버무협 연설 요지 한국은 역동적인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적 위치에 있는 나라입니다.오늘의 한국은 경제규모와 교역규모에 있어서 세계 10위권수준의 나라로 발돋움했습니다.올해 한국의 교역규모는 대략 2천6백억달러에 달하고 1인당 소득도 처음으로 1만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행정규제 완화,외국인전용공단 건설,외국인투자에 대한 지원확대 등 투자환경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의 대외투자도 최근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우방인 캐나다는 모범적인 협력관계를발전시켜왔으며 이제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습니다.통상면에서 한국은 캐나다의 일곱번째 교역국이며,캐나다는 한국의 13번째 교역국입니다.캐나다는 또한 한국의 네번째 투자대상국이 되었습니다. 나와 장 크레티앙총리는 2년전 시애틀 APEC 정상회의에서 두 나라간에 「특별한 동반자관계」를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으며,양국정부는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풍부한 자원과 첨단기술,그리고 한국의 우수한 생산능력을 감안할 때 양국간의 경제협력전망은 매우 밝다고 생각합니다.한국에 대한 캐나다기업의 보다 적극적인 교역과 투자진출을 기대합니다. 나는 특히 최근 캐나다 서부지역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환경·우주항공·생명공학·컴퓨터산업 등 첨단산업분야에서 양국 기업간에 긴밀한 협력관계가 구축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이번 캐나다 방문이 캐나다와 한국간의 유대와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타와에서 르블랑총독각하와 크레티앙총리를 만나 양국관계발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것입니다.나의 오타와 방문중 양국정부는 「산업기술협력협정」에 서명할 예정입니다.이 협정의 체결로 양국간 산업 및 기술의 협력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믿습니다.
  • 대법원 「서소문 시대」 마감/어제 전원합의체 마지막 판결

    ◎28일까지 이사… 서초동 새 청사서 업무재개 숱한 명판결과 다소 부끄러운 판결도 내렸던 서소문 대법원 법정이 17일 전원합의체 재판을 끝으로 67년의 기나긴 역사를 마감했다. 이날 하오 1시30분 101호 대법정에서 열린 마지막 재판은 재판장인 윤관 대법원장이 『상고를 각하합니다』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5분여동안 판결문을 낭독함으로써 끝났다. 대법원은 이날 지난 80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내란사건 선고공판 이후 15년만에 법정의 사진촬영을 허용,아쉬움을 달랬다. 서소문 대법원청사는 1895년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된 뒤 1908년 서울 공평동 1636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법원종합청사가 1928년 10월 새로 건립돼 이전되면서 시작됐다. 아케이드식 창문과 아치형 출입구로 건축 당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청사는 일제 침략주의를 상징하는 「일」자형으로 설계돼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대표적인 「오욕」의 건물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임기를 다 채운 대법원장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비롯,3·4대 조진만,5·6대 민복기,8대 유태흥 대법원장 등 4명에 불과하며 정년(70세)으로 물러난 이일규 대법원장을 제외하고는 김용철 대법원장 등 4명이 정권교체기의 사법파동과 재산공개 파문 등으로 임기중 물러나는 아픔을 겪었다. 한편 대법원은 오는 21일부터 28일까지 서초동 신청사로 이사를 완료한다.
  • 중기지원 대폭 강화… 경영난 타개 부축/김 대통령 시정연설 요약

    ◎다자간 정상외교 확대… 국제 위상 제고/농림수산부문 8조5천억 투자… 구조조정 촉진/저소득층 지원금 최저 생계비 수준 인상/군 전문­정예화·군장비 현대화 지속 추진/부동산 실명제 정착시켜 주기 철저 차단 김영삼 대통령은 16일 이홍구 국무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을 통해 내년도 국정운영방향을 밝혔다.다음은 분야별 요지. ○지방화시대 뒷받침 ▷정치◁ 내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우리 정치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불법과 타락이 발을 붙일 수 없는 명실상부한 공명선거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할 것이다. 민선 자치단체장체제의 출범으로 이제 명실상부한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지역 주민의 기대속에서 모든 자치단체가 의욕적으로 지방살림을 꾸려가고 있다.정부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율과 책임,경쟁과 협력을 통해 세계화시대에 부응하는 지방화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나갈 것이다.지방의 발전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하도록 국정의 통합성 유지에 역점을 두어나갈 것이다. ○북한 변화유도 노력 ▷통일·외교·안보◁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기조를 일관되게 견지해 나가고 있다.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것도 평화 유지와 남북협력의 이정표를 세우고자 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우리 기업들의 대북 투자 허용등 남북간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북한의 자세와 태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려고 한다.우리가 북한 동포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해 쌀 15만t을 아무런 조건없이 제공한 것도 화해와 협력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에서 취한 조치였다.앞으로도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기울일 것이다.무엇보다 남북 당국간의 회담이 조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북한의 성의있는 자세 변화를 촉구해 나갈 것이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세계속에서 한국의 지위와 역할을 제고하기 위해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외교노력을 강화하고 있다.나는 오늘 유엔 창설 5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또 이 기회에 캐나다도 국빈자격으로 방문하기 위해 출국한다.이번 유엔특별정상회의에는 1백50개국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참석할 예정으로 있어 나의 유엔 방문은 다자간 정상외교를 통해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한번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 기회를 통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 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상응하는 국제적 역할과 기여를 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계획이다.또 정부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괄하는 지역경제협력체인 APEC를 주축으로 우리 위상과 국익을 높여 나가면서 역내의 경제발전과 협력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내년 3월 방콕에서 열릴 예정인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 적극 참여해 EU와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도 노력할 것이다. 국군의 전력 극대화를 위해 군의 전문화 및 정예화와 군장비의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국군이 국가안보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방패로서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군의 사기와 복지 개선을 위해서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 ○첨단기술 집중 개발 ▷경제◁ 정부는 물가안정이 서민생활 안정의 절대적 요건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경주해 올해 소비자물가를 5% 이내에서 안정시키겠다.통화를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재정수지를 개선하는 등 총량면에서 경제안정기조를 확고히 뒷받침하겠다.유통 혁신을 촉진하고 농산물 및 공산품 가격과 개인서비스요금등 부문별 물가안정을 위한 노력도 병행해 나가겠다.금융실명제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계기로 경제활동의 투명성과 형평성을 뒷받침하는 제도로 뿌리내릴 것이다.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부동산실명제를 정착시켜 부동산 투기를 제도적으로 막고 부동산가격의 구조적 안정기반을 마련하겠다. 내년에도 치열한 국제경쟁 여건속에서 우리 경제가 활력있게 성장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첫째,사회간접자본을 대폭 확충함으로써 화물 유통의 원활화를 도모하고 교통난으로 인한 국민생활의 불편이 점차 해소되도록 노력해 나가겠다.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예산 배분상의 우선순위를 높게 유지해 내년에 8조원 이상을 집중 투자하고 민자유치사업도 적극 추진하겠다.전국 수송량의 60% 이상을 분담하고 있는 서울∼부산 축의 수송애로를 완화하기 위해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철도경영 개선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국고 지원을 늘리겠다.수도권 신공항이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중추공항이 되도록 건설을 추진할 것이며 지방공항도 중장기 개발계획에 따라 확충해 나가겠다.세계적인 수출입 화물 항구로서 부산·광양 양항제체를 구축하고 권역별로 주요 항만의 시설능력도 확충해 나가겠다.도심을 통과하는 국도의 대체우회도로와 교통량이 많은 지방간선도로의 공사비를 정부재정에서 지원함으로써 기간교통망의 병목현상을 완화하겠다. 둘째,정보화시대에 앞서가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과학기술 개발에도 적극 노력하겠다.2015년까지 모든 공공기관과 기업 및 가정을 연결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이 구축될 수 있도록 하겠다.정보화촉진기본법의 시행을 계기로 공공부문의 정보화는 물론 산업정보화와 지역정보화등 국가사회 정보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한편 국가지리정보체계(GIS)구축사업등 국민생활의 안전확보를 위한 정보화사업도 추진하겠다.G­7사업등 첨단기술 및 산업현장 기술개발을 위해 연구사업비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민간의 기술개발도 적극 지원하겠다. 셋째,중소기업의 경영애로를 타개하기 위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겠다.영세사업자의 자금난을 덜고,인력난 완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동화사업과 공동집배송단지등 물류개선사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우리 경제의 뿌리인 중소기업이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겠다.그동안 정부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영세중소사업자에 대해 시설 현대화와 사업전환 자금을 신규로 지원하겠다. 넷째,세계무역기구(WTO)출범등 대내외적 여건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농어촌발전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내년에 농림수산부문에 약 8조5천억원의 예산을 투자할 계획이다.특히 경지정리와 용수개발등 농업생산 기반정비를 위한 투자와 농수산물 유통개선사업을 집중 지원해 농어업의 구조전환을 촉진시키겠다.기술집약형 고부가가치 농업의 실현을 위해 인력육성과 기술개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수산자원조성과 산지자원화를 위한 투자도 확대해 나가겠다.농어촌의 생활환경 개선과 농어민의 복지증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재해를 입은 농어민에 대한 재정지원도 강화하겠다. ○정수시설 현대화 ▷민생◁ 정부는 교량·가스·지하철·선박·항공기·통신구 시설등 위험시설물에 대한 안전점검과 보수에 주력하고 있다.지난 7월 재해관리법 제정에 이어 정부의 재난관리기능을 보강하면서 부실건설 추방을 위한 개혁작업을 적극 추진하겠다.맑은 물 공급대책의 일환으로 하수처리장등 환경기초시설을 앞당겨 건설하고 광역상수도의 확충과 정수시설의 현대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대도시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청정연료의 사용을 더욱 확대하고 자동차 배출가스로 인한 대기오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재활용 처리시설을 연차적으로 확충해 자원재활용에 힘쓰겠다.또 환경산업 육성을 위한 기술개발과 환경친화적 기업경영체제 확산에 역점을 두고 인접국가들과의 환경협력도 강화해 나가겠다.적조등 해양오염을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해양오염방지대책 5개년계획」을 수립해 시행할 것이다.오염이 심한 연안바다를 특별관리해역으로 지정하고 연안지역에 하수처리장과 축산폐수처리장등 환경기초시설을 앞당겨 건설하겠다.어장도 단계적으로 정화해 나가겠다.해양오염이 발생했을 때 어민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공신력있는 기관과 합동으로 피해를 조사하겠다.특히 영세어민에 대한 보상기준을 대폭 현실화하겠다. ○유공자 처우 개선 ▷사회복지◁ 근로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수준을 98년까지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인상하겠다.장애인 취업훈련시설과 고용촉진을 위한 지원을 확대해 나가겠다.노인 치매 전문병원을 건립하고 치매노인 부양가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등 종합적인 노인대책을 연말까지 마련하겠다.저소득층의 자녀학비 지원대상을 실업계 고교생에서 성적이 우수한 인문계 고교생까지로 확대하고 생업자금 융자도 늘리겠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방과후 아동지도제도를 실시하며 국민학생에 대한 전면 급식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를 추진하겠다.공무원 채용에 있어 여성고용목표제를 도입하고 공기업에서도 여성직원의 고용이 증가되도록 하겠다. ○여성 사회참여 부축 ▷교육·문화◁ 우리가 추구하려는 새로운 교육은 입시 위주의 획일화된 교육을 창의력과 인성개발 위주의 다양한 교육으로,공급자 중심의 교육을 학생과 학부모가 선택하는 수요자 존중의 교육으로,그리고 규제보다는 자율에 바탕을 둔 교육으로 탈바꿈하자는 것이다.이를 위해 앞으로 3년간 총 62조3천억원을 교육분야에 투자하도록 했다.또 문화예술 공간을 확충하기 위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참여를 유도하겠다.국민들의 여가 수요에 대응하고 외국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광발전 10개년 계획」을 마련하는 등 관광산업을 세계화시대의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유치에 최선을 다하고 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준비도 차질없이 진행하겠다. 경복궁과 창덕궁 복원을 위한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국외에 안장되어 있는 선열의 유해 봉환등을 계속 추진해 단절된 민족사를 복원하는 전기가 되도록 하겠다.독립유공자를 비롯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연금을 비롯한 보상금등 각종 지원시책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겠다.국가유공자의 노령화에 따라 보훈의료시설을 확충하고 고령자 공동주거시설등 노후복지시설을 확충하겠다. ○학교폭력 추방 최선 ▷공직및 사회기강 확립◁ 공직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노후에 대한 걱정이 없도록 공무원연금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한편 보수도 국영기업체 수준으로 현실화해 나가겠다.민생치안을 위해 현장치안에 중점을 둔 방범활동과 범죄를 유발하는 각종 유해환경정화에 힘쓰고 학교주변 폭력행위와 조직폭력배,마약사범 소탕에 주력하겠다.집단이기주의적 불법행위나 폭력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
  • 국립 중앙도서관 오늘 개관 50돌

    ◎특별 전시회·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 15일로 개관 50주년을 맞는 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용문)이 특별전시회와 학술세미나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광복직후인 19 45년 10월 15일 서울 중구 소공동 소재 옛 조선총독부 도서관을 인수해 국립도서관으로 문을 연 이래 74년 12월 남산 어린이회관(회현동) 건물로 이전했다가 지난 88년 5월 지금의 자리인 서초구 반포동의 지하1층 지상 7층의 현대식 건물로 옮겨왔다. 현재 2부7과 1담당관 1분관의 기구로 직원 2백51명이 재직중이며 보유장서는 총 2백49만권.이용객은 하루평균 6천49명,연인원 1백9만1천6백86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용도서수는 하루 평균 1만2천2백67권,연평균 3백99만8천7백63권에 이른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개관 50돌 기념행사로 16일 하오 4시 문화예술계 인사 6백명을 초청해 대강당에서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며 이에 앞서 이날 하오2시 「21세기 국가대표도서관의 기능과 책임」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이 세미나에는 송자 연세대총장의 기조강연(국가대표도서관에 바란다)에 이어 현규섭(공주대)·한상완(연세대)·최석두(이화여대)교수가 주제발표에 나선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와 함께 16일부터 30일까지 도서관 전시실에서 사진·도표등 역사자료 30여점과 서지·요람등 그동안 발간했던 책자 90여점,국보·보물등 소장자료 80여점을 한데모은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 일 구마모토아트폴리스「신치주거단지」(세계의명소/걸작건축감상:23)

    ◎도시민 주거 특성·자긍심 높인 “집합 주택”/40대 건축가 5명,5개 구역 나눠 “개성 설계”/단지마다 독창적 공간 창출… 문화도시로/호소가와 전 총리 지사시절 「지자체 특색」 살린 작품 지난 8월15일 조선총독부에서 중앙청으로 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그 역할이 속절 없이 바뀌기를 거듭하던 한 건물의 첨두를 잘라 버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의 잔재를 상징적으로나마 끊어버리자는 취지에서였다.그 전에도 옛 청와대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지은 적이 있고,현 서울시청사도 곧 새로 짓는다고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무언가 잊혀지지 않을 만한 업적을 남겨놓으려 한다.그런데 이런 업적이 무형의 것이기보다는 실제로 가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그래서 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들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놓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인도의 타지마할,중국의 자금성,영국의 트라팔가 광장 등이 옛날의 예라면,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미국 애틀랜타의 카터 도서관 등이 오늘의 예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좋은 예보다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전통건축양식을 본떠 지어졌으나 박대통령이 좋아하던 계란색으로 온통 뒤덮여 그 성격이 모호해져 버린 현충사 등의 기념건물이 있었다.전두환 대통령시대는 아직도 빗물이 몇십군데에서나 새고 있다는 천안 독립기념관이나 공사중단의 상태로 볼성 사납게 남아있는 평화의 댐을 남겨 놓았다.그리고 노태우 대통령 시대는 부실공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주택 200만호 등의 대역사를 남겨놓았다.마지막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와의 차별화에 주력하는 때문인지 짓기보다는 헐기에 더욱 관심을 쏟는 듯하다. ○“양보다 질” 높이 평가 이웃나라 일본은 조금 다르다.몇년전 일본 총리를 지냈던 호소카와(세천호희)는 구마모토현(웅본현)지사로 재직 중이던 1988년,구마모토 아트 폴리스(ArtPolis)라는 도시설계 및 환경설계운동을 추진했다.이것의 근본 취지는 지방자치제의 특색을 살린 도시·건축문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지역 내의 모든 개발행위가 궁극적으로는 그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되기 때문에 환경설계나 건축행위의 결과는 양보다는 질의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하고,이를 통해 미래의 세대에게 자랑스런 문화적 도시환경을 물려주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자체 위주의 도시건축운동은 매우 독창적인 도시공간의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실제는 구마모토시가 국제적인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해가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대한주택공사의 연구원들이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구마모토 아트 폴리스의 작품으로 선정된 집합주택은 도시민 주거특질의 향상이라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목표의 달성뿐만 아니라 지역내 주민들의 자긍심 향상이라는 비가시적 정주성을 고양하는 사회정책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구마모토 아트 폴리스 작품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치(신지)주거단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신치 단지는 전체 면적이 약4만여평으로 1960년대에 지어진 7백여 가구의 저소득층 주거단지를재개발하여 시영 영구임대 아파트를 건립한 것이다.1991년에 입주가 시작되어 1995년 현재 1천여가구 4천명의 입주가 거의 완료된 상태다. ○지형맞게 높낮이 살려 이 단지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것을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인 아라타이소자키(기기 신)가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면서 5개의 존으로 나누었으며 각각의 존을 일본의 40대 건축가 5명이 하나씩 나누어 나름대로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아파트 건물군을 설계하였다. 단지 서쪽 끝의 A단지는 2,3층 아파트 건물이 중정을 둘러싸고 서 있고 그 양쪽 외곽으로 5층 건물 2동이 길게 배치되어 있다.건물의 외벽은 어두운 색을 주조로 하여 차분한 느낌이 들게 했으며 외부공간은 단지 원래 지형에 맞추어 높낮이를 그대로 살려 넓은 계단을 놓고 그 사이에 잔디밭과 얕은 인공연못을 설치하였다.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우리네 시끌벅적한 아파트 단지와는 아주 대조적이다.게다가 과감하게 1층 부분을 빈 공간으로 처리하여 보행자의통로로서 또한 뜨거운 여름날 그늘진 휴식처로 쓸 수 있도록 한 점은 본받을만 하다. 두번째로 개발된 B단지는 1백50m가 넘는 긴 아파트 건물 2동이 넓은 보행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다.이 건물 역시 어두운 색을 썼고 높이도 5층에 지나지 않는다.이 단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의 보행자 도로인데 아무런 조경시설물 없이 콘크리트 바닥에 가로등만이 있는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입각한 설계다.나름대로 저소득층의 아파트 단지 관리비를 아끼자거나 혹은 건축가의 철학에 따라 자연과 대비되는 철저한 인공의 삶터를 창출하자는 의도에서 이렇게 해 놓았을 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네 정서로는 영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장소가 되고 말았다.건축이 형태만을 위한 추상예술이냐 아니면 삶을 위한 도구인가를 따지는 건축계의 끊임 없는 논쟁은 바로 이런 곳에서 출발하는 것일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낙천적인 삶을 표현 건물 입구부분의 계단실은 건물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돌출되어 있는데 1층부의 콘크리트 상자와그 위의 철골구조는 마치 교도소의 입구 같은 느낌이 들어 이 B단지만큼은 실패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여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구마모토 아트 폴리스 작품에서 산다는 자긍심이 앞설지 혹은 이렇게 비인간적인 장소에서 사는 것을 불만족스러워 할지 한번쯤 제대로 연구해 볼 일이다. C단지의 아파트 역시 길게 들어서 있는 건물인데 밝은 색과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창문과 베란다를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은 입면을 가지고 있다.획일적인 입면에 비해 거기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르며 또한 복잡다난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흥미롭다. D단지의 아파트는 다분히 유희적이다.검정색과 밝은 원색을 자유분방하게 쓰고 옥외 계단은 제멋대로 갖다 붙여놓은 듯하다.여기서는 다양하고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 느껴진다.저소득층을 위한 시영 영구임대 주택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려는 건축가의 노력이 돋보이기는 하나,너무나 유희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어 그의 의도가 반감되어 버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단지의 아파트는 저소득층 중에서 최상위층을 대상으로 한 건물로서,1층 주호에는 독립된 정원을 가질 수 있는 배려를 해 놓았다.역시 밝은 색과 다양한 형태를 적절히 조합하여 낙천적이고도 고급스러운 삶의 모습을 담으려 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임대 아파트 개발에 일본 최고의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밝고 낙천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낸 구마모토현의 호소카와 지사는 결국 일본 총리까지 지내게 된다.무슨 기념관이다 무슨 박물관이다 하는 곳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기 보다는 이렇듯 주민의 실제적 삶에 이바지하는 일을 남기는 것에 가치를 둔 한 정치가의 탁월한 견해가 부럽다.
  • 중국의 이중적인 대홍콩 정책(해외사설)

    홍콩은 영국이 지난 세기에 식민지로 삼은 중국의 도시이다.영국이 오는 97년을 맞아 홍콩에 대한 중국의 통제를 회복키로한 조약을 깨야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많은 홍콩시민들은 그들이 영국국기 아래서 즐기고 있는 상당한 자유와 중국지배의 불확실성을 맞바꾼다는데 대해 반발하고 있다.이것은 홍콩시민들이 반환을 방해하고 싶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그들은 단지 일정한 정도의 민주적 특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홍콩시민들은 최근 입법부의 한 투표에서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 지를 보여줬다.즉 홍콩의 입법부 의원들은 북경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친북경 정당과의 표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일단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입법부를 헤산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그들은 민주당의 마틴 리 당수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만약 「위험」이라는 의미가 전체주의 질서에 대해 민주적인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라면 그는 참으로 「위험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지지자들을 묘사하기에 더 좋은말이 있다.「용기있는 사람」. 자유의 신봉자 마가렛 대처 전영국총리는 홍콩반환조건에 대해 중국과 협상하면서 『나는 실망했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다. 현재의 홍콩총독인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민주적인 특징들을 구축하기위한 조심스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이 최근의 투표결과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홍콩에 대해 정치적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방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과실을 얻고 싶어한다.다시말해 홍콩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면서도 홍콩의 이익이 중국의 나머지 지역에 까지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경제 발전소」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마틴 리 당수는 중국이 그런 식으로 한다면 두가지 모두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 프랑스 핵실험 6회 추가 실시/폴리네시아 총독

    【파페에테(타이티) AFP 연합】 서태평양상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및 소시에테제도의 프랑스 지도자(총독) 가스통 플로세는 23일 프랑스가 남태평양에서 알려진 것처럼 8번이 아니라 모두 7번의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이날 귀국한 플로세는 『2번째 핵실험이 실시될 것이며 이후에 5차례의 핵실험이 더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고 『최종결정이 변경된 것은 아니지만 8번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 광복 이전 경제·사회상/통계청 1910∼44년 분석

    ◎평균수명 45세… 취학률 32%­40∼42년/화전민 1백52만… 15∼19세 여성 63% 결혼/병원 1백81개… 전염병 감염자 연2만명/전당포 대금업 호황… 월금리 11% 솟기도 일제 때엔 조혼이 유행했고 생활고로 자살하는 이도 한해 2천명이나 됐다.나라잃은 설움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떠나거나 산으로 들어간 사람(화전민)도 일제강점 기간 중 2백만여명에 달했다.30년대엔 골드러시가 일어 한해 무려 4천∼5천건씩의 금광출원이 있었고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이 성행,사채금리가 월 11%까지 치솟았다.공장근로자 월급은 쌀 한섬 값,소·돼지도 2가구당 한마리꼴로 그렇게 많질 않았다.통계청이 21일 조선총독부통계연감 등을 활용해 펴낸 「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을 살펴본다. ▷인구◁ 1910년 한반도 인구는 1천3백30만명.여자 1백명당 남자 1백12명 꼴이었다.일본인은 17만2천명.43년 말에는 인구가 2천6백66만명으로 늘고 일본인 유입도 늘면서 일본인 거주자도 전체 2.8%인 75만9천명으로 최고수준에 이른다.일본인의 3분의 1이 경기도(서울 포함)에 살았다. 15∼19세 여자인구(35년 기준) 중 63.3%가 결혼했고,10∼14세 여자 중 결혼한 인구도 4%나 됐다.23년에는 20∼24세의 신부가 연하의 신랑(20세 미만)과 결혼한 비율이 26.9%나 됐다. 1919년부터 20여년간 35만7천명이 굶주림과 압제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생활고로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도 36년 28만2천가구,1백52만명이나 됐다.평균 수명은 42년 44.9세(남자 42.8세,여자 47.1세).44년엔 인구가 전년보다 69만4천명 감소한다.조선인징병제·학병제·정신대 등의 탓이다. ▷토지·농촌◁ 43년 서울의 논 3백평 값은 4천5백원,밭은 7천5백원.당시 논은 소 16마리,밭은 27마리 값에 해당한다.택지가격(1백평 기준)은 평양이 13만5천원으로 가장 비쌌고 함흥(2만9백원),부산(1만5천원)순이었다.35년 소 사육두수는 1백68만마리,돼지는 1백62만마리로 각각 농가 2가구당 1마리꼴이다.닭은 7백12만마리로 2마리꼴. ▷광공업◁ 30년대 중반을 전후 일본인 주도아래 「노다지바람」이 불었다.34년부터 6년간 출원된 2만4천5백22건의 금은광업 중 5천3백69건이 허가가 났다.43년 남자 공장노동자의 월급은 53원10전,여자는 25원.남자는 쌀 1.2섬,여자는 쌀 0.5섬 값이었다. ▷상업·금융◁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품목은 가축·가금·고기류 등 축산물.연간 총 매상고의 34.3%를 차지했다.43년에 전국에 27개의 공익 전당포가 있었고 급료생활자(41.6%),소상인(14.5%),노동자(14.1%)가 전당포를 많이 찾았다.잡히는 물건은 83.9%가 의류였다.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까지 대금업자의 최고금리가 월 1할9리나 됐다. ▷철도·운수◁ 1910년 철도이용객은 하루 5천7백명.43년엔 35만1천명으로 는다.35년 총독부예산(2억9천만원)중 철도수입이 31%였다.38년 자동차는 8천8백대.당시 일본은 11만7천대,미국은 2천9백70만대였다.44년 전차는 2백52대,운행가능한 전차는 2백34대로 하루 53만4천명이 이용했다.전차요금은 한번에 6전. ▷전매◁ 43년 전매수입은 2억6천만원으로 총독부 세입예산의 14%.연초전매수입이 전체 87.5%였으나 아편모르핀매각액도 4백만원이나 됐다.담배는 43년에 1백27억2천9백만개비가 제조됐고 이 중 필터담배가 1.2%였다.담배판매액은 인구 1명당 8원20전꼴로 당시 쌀 2말값. ▷무역◁ 1910년 상품수출은 1천9백만원,44년엔 9억1천9백만원으로 46배가 증가했다.이 기간동안 일본수출이 대종(전체 84%)을 이뤘다.반면 수입은 같은 기간 3천9백만원에서 9억5천5백만원으로 24배 늘었다.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75%로 그때도 지금처럼 수입의존도가 높았다.일제 36년간 생산된 금은 40만㎏,이중 25만㎏이 일본으로 반출됐다.1911∼38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은 약 3.7%.이 기간 중 총독부의 세입예산도 1백11배나 늘어 세부담도 가구당 쌀 3말에서 3섬으로 높아졌다.43년 당시 한국인 공직자의 평균 월급은 쌀 1섬 가격인 46원으로 일본인의 45∼52%에 불과했다. ▷임금·교육◁ 36년 당시 짐꾼의 하루 일당은 쌀 2되값이었다.30년 당시 한국 학생수는 57만8천명으로 한국인 인구의 3%,일본 학생수는 9만명으로 일본인 인구의 18%였다. 40년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32%,국민학교 학급당 학생은 71명이었다.한국아동의 유치원 취학률은 0.7%,일본아동은 6.5%였고 서당은 35년 6천2백9개에서 43년 2천6백79개로 줄었다. ▷의료·보건◁ 43년 병원수는 1백81개,병원당 인구수는 14만7천명.의사는 3천8백13명.33년 당시 소화기계통 질환에 따른 사망자는 전체 20%,신경계통이 19%였다.34∼43년엔 장티푸스 등 급성 전염병의 감염자는 한해 평균 2만명에 달했다.10세 미만 영유아 전염병 치사율이 1백명당 23명꼴이었고 24년 당시 17세 남학생의 신장은 1백55㎝,체중은 44㎏였다.25년 기준으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중등학교 학생들 64%가 기생충에 감염됐고 회충보유자는 52%나 됐다. ▷사회·문화◁ 경찰관서는 41년 3천2백12개소로 1910년보다 6.7배 늘었고 한국인 전화가입자는 6천4백48명으로 1천3백57명당 1명꼴,한국인 라디오 청취인구는 1천명당 5명꼴이었다.43년 당시 활동사진 관람인원은 2천6백50만명으로 인구 1인당 연간 1회꼴이었고 연극 관람인원은 4백21만8천명으로 6.3명당 1명이었다.병고와 생활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늘어 1910년 4백74명에서 37년엔 2천8백16명,43년엔 2천27명으로 늘어났다.곰·호랑이 등에 의한 사상자도 34년 41명,41년 61명,43년 37명이나 됐다.
  • 홍콩 의회선거/민주세력 압승/직선 20석중 16석 차지

    ◎친중계는 2석/중,주권 환수땐 해산 【홍콩 외신 종합】 영국 통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실시된 17일 홍콩 입법국(의회) 입법위원 직접선거에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를 지지하는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고 중국의 지지를 받는 「홍콩발전을 위한 민주동맹」이 참패한 것으로 개표 결과 밝혀졌다.그러나 민주화계열 후보들은 직능대표를 포함한 60명 전체 입법위원의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 18일 개표완료된 이번 입법위원 선거에서 지역구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입법위원 20개 의석가운데 민주당 12석 등 민주화계열 후보가 16석을 확보한 반면 「홍콩발전을 위한 민주동맹」의 지도자인 창 욕 싱등의 후보가 패배하는 등 2석확보에 그쳤고 나머지 2석은 무소속후보들에게 돌아갔다.이같은 선거결과는 홍콩반환을 1년9개월 앞둔 중국에는 큰 좌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 패튼 총독의 민주개혁안에 따라 입법위원 60명중 30명을 뽑는 직능대표 선거와 선거위원회 관리들이 간접투표로 10명을 뽑는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11석을 친중국계인 「홍콩발전을 위한 민주동맹」이 4석을 각각 추가로 확보했다. 이로써 총의석은 민주당 23석,민주당 지지성향후보 6석,「홍콩발전을 위한 민주동맹」 6석,친자본가 성향의 자유당 10석,군소정당및 무소속 15석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선거당일인 17일에도 패튼 총독이 중국의 승인을 받지않고 민주개혁안을 도입해 이번 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에 97년 7월1일 주권을 돌려받게되면 곧바로 입법국을 해산할 것이라고 거듭 선언했다.
  • 홍콩 마지막 총선/입법의원 60명 선출

    【홍콩 AFP 로이터 연합】 오는 97년 홍콩 주권 반환을 앞두고 영국 통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치뤄지는 입법국(의회) 입법위원 선거가 17일 아침 일제히 시작됐다. 이날 하루동안 크리스 패튼 홍콩총독의 선거개혁안에 따라 등록 유권자 2백57만명이 최초로 입법위원 60명 전원을 선출하게 된다. 중국은 97년 7월 1일 주권을 돌려받게되면 곧바로 입법국을 해산하고 대신 임시입법기구를 설치할 것이라고 선언한 바있다. 선거에 앞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당수 마틴 리를 포함한 민주당 후보들이 우세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친중국계 후보들과의 경쟁도 치열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 불 핵실험 왜 밀어 붙였나/늦출수록 반대여론 고조 판단

    ◎미수준 「모의 실험기술」 갖추기 프랑스가 국제적인 거센 반발과 비난,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밀어붙이기식」으로 핵실험을 강행했다. 프랑스의 이같은 핵실험강행배경은 미국등에 비해 미흡한 모의핵실험 기술을 완성시켜 21세기에 걸맞는 핵억지력을 보유하겠다는 의도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신드골주의의 기수」로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는 확실한 방편이라고 믿고 있는 등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도 빼놓을 수 없다. 남태평양 무루로아섬의 핵실험에서 발생된 에너지는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와 비슷한 20kt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당초 30kt수준의 에너지가 발생될 것으로 예상한데 비하면 상당한 에너지가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핵실험은 이런 국내외의 반발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우선 핵실험의 실시횟수 등에서 신축성을 보이고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핵실험의 충분한 정보만 얻으면 내년 5월 21일 이전이라도 정해진 핵실험을 다하지 않을수 있다』고 말했다. 계획된 8차례의 핵실험 가운데 몇차례는 축소할 수 있다는 양보의 카드인 셈이다. 그의 발언은 핵실험을 불과 10여시간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다분히 계획된 카드라는 인상을 준다. 국제적인 반발분위기를 희석해보려는 정해놓은 수준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핵실험개시의 시점도 약간 조절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자신이 하와이에 가 있을 주말동안에 실험을 하지 말 것을 됴청했다. 30여년동안 핵실험 연료를 미국영공을 통과해 수송해온 프랑스로서는 결국 주말은 피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게다가 국제적인 반발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국내적인 반대여론바저 고조돼가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넘어야 할 산」인 핵실험 시점을 늦출수록 반발과 반대여론만 더욱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쇄폭탄테러 가운데 최근 발견된 불발탄들이 핵실험과 연관돼 있다는 설이 확인도 되지 않고 그럴듯하게 나오고 있다. 다시말해 핵실험의 비난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핵실험의 첫단추는 뀌었지만 앞으로 반대여론은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20kt의 폭파에너지가 발생한데 대해 그린피스는 이미 시라크 대통령을 「자연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내년 5월까지 실시될 프랑스 핵실험에서 나올 에너지의 최대치는 첫번째의 10배인 2백kt이라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국제사회 및 환경론자들의 반대도 발생되는 에너지의 양만큼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 핵실험 관련 일지 ▲45년 10월18일:드골 장군,원자력위원회 설치 명령. ▲60년 2월13일:알제리 레가네에서 최초의 원폭 실험. ▲66년 7월2일: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서 핵실험 첫 실시. ▲68년 8월24일:팡가타우파서 첫 수소폭탄 핵실험 실시. ▲75년 6월5일:팡가타우파 환초의 산호속 갱도에서 첫 핵실험. ▲85년 7월10일:프랑스요원들,오클랜드항에서 레인보우 워리어호 격침. ▲91년 6월3일:미테랑 대통령,NPT(핵확산금지조약)가입 천명. ▲92년 4월8일:미테랑 대통령,핵실험 1년간 중지 선언.▲95년 6월13일:자크 시라크 대통령,핵실험 재개 선언. ▲95년 9월5일:무루로아 환초서 핵실험 실시. ◎「불 핵실험 강행」 이모저모/항의 시위대 “시라크는 범죄자” 맹렬 규탄/불 반핵단체들도 “정부 청사앞 시위” 선언/중 군축대사 “일은 핵실험 비난 자격없다”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의 주요 반핵시위 주도자들은 무루로아섬에서 프랑스의 핵실험이 실시됐다는 보도를 접한뒤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 파페에데에서 오랫동안 핵실험 반대활동을 전개해온 마리­테레제 다니엘슨씨는 시위가 폭력화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고 말했다. ○…프랑스 원자력위원회 관계자들은 『이번에 실시된 핵실험에서 바다 수면위로의 방사능 누출이 전혀 관측되지 않았다』고 설명. 무루로아 환초지역 프랑스군 사령관인 폴 베리셀 장군도 『이번 실험은 실시전 모든 안전조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최상의 조건속에서 조용하게 이루어 졌다』고 발표. ○…타히티 수도 파페에데의 프랑스 시위진압 경찰은 5일 프랑스가 무루로아 환초에서 핵실험을 실시한 직후 폭력사태를 우려해 방패·곤봉 등 폭동대비 장비를 완전히 갖춘 70명의 경찰관을 프랑스 총독관저 및 청사에 배치. 한편 파페에데의 핵실험 항의 시위자들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범죄자」라고 규탄하며 현지 프랑스군 부대 홍보실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헌병에 의해 강제로 운반돼 나갔다. ○…칠레와 뉴질랜드가 프랑스의 핵실험에 항의,자국주재 프랑스대사를 소환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그린피스는 6일 호주정부에 대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비무장 해군함정을 파견하라고 촉구. ○…제네바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사조강 중국 군축대사는 5일(현지시간)연설을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 책임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은 프랑스·중국등의 핵실험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강력히 비난. 사군축대사는 포괄 핵실험금지조약(CTBT)문제를 논의중인 이날 군축회의 본회의 연설에서 일본은 히로시마(광도)에 원폭이 투하된 배경은 언급하지 않은채 원폭 참상만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 ○…볼리비아·콜롬비아·페루·베네수엘라등 중남미의 안데스협정 국가들은 5일 정상회담중 공동성명을 발표해 프랑스의 핵실험에 대해 강력히 비난하고 『프랑스의 핵실험이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환경위험에 직면케 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 ○…프랑스 야당 정치가들과 환경보호 운동가들은 6일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를 규탄함으로써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국외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부정적 반응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야당인 사회당·공산당·녹색당 정치가들과 저명한 해양탐험가 자크 이브 쿠스토씨(85)는 프랑스 시간으로 5일 밤 무루로아환초에서 핵실험이 실시된 것으로 밝혀지자 6일 이른 새벽 격노에 찬 항의 성명을 발표. 저명한 환경운동가 쿠스토씨는 『생물무기·화학무기들을 모두 금지시켰음에도 더욱 위험한 핵무기가 불법화되지 않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핵무기를 실험하지 말고 폐기하자고 촉구했으며 그린피스 프랑스지부를 포함한 수개의 반핵단체들은 이날 하오 파리의 바스티유광장과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선언.
  • 유형의 수도 이르쿠츠크(시베리아 대탐방:34)

    ◎왕정반란 「12월 당원」들의 마지막 안식처/유형 온 주모자가 살았던 주택을 박물관으로/앙카라 강변엔 17세기 「시베리아 정복탑」 우뚝 이르쿠츠크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은 앙가라강변에 세워진 시베리아 정복탑이다.총독청사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오벨리스크다.동진하던 러시아 정복자들은 17세기말 이곳에 이르러 가쁜 숨을 내쉬고는 잠시 정복의 발길을 멈추었다.그리고는 이곳에 높이 10여m의 대형 정복탑을 세워 그동안의 공적을 자축했다.정복의 상징인 대형 쌍독수리 문양 아래 모라비요프·아무르스키·스페란스키 등 정복자들의 이름이 쓰여져있고 「시베리아 정복자들에게 영광있기를」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철도 개통… 도시 부흥 이르쿠츠크는 1686년 정식 도시가 된 뒤 성장을 거듭,1764년에는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다.그러나 도시발전의 진짜 전기는 1898년 시베리아철도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찾아왔다.따라서 3년 뒤면 동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된지 1백주년이 된다.당시 이곳은 주도 였기 때문에 동시베리아의 철도업무를 이곳에서 관장했다.관공서 거리였던 칼 마르크스거리에는 당시 이르쿠츠크·부리야티·치타주의 철도를 총괄하는 동시베리아 철도청이 있었다.4층짜리 대형 대리석건물인데 혁명 전 세워진 건물원형에다 혁명 뒤 소비에트식 건물장식을 곳곳에 덧붙이고 역시 혁명성이 강한 대리석 조각까지 건물상단 곳곳에 만들어 붙여서 연대불명의 이상한 건물이 돼버렸다.시베리아 곳곳에 이런 식으로 옛건물에 사회주의 장식을 덧붙여 건물의 원형을 훼손시킨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는 혁명 전 러시아 유형의 수도였다.특히 1825년 왕정에 반대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 주모자들 대다수가 이곳으로 유형 와 생을 마쳤다.사회주의 시절 볼셰비키들은 이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추앙했다.그래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 같은 곳이 됐다.당시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 와 거처했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고 성역화해 놓은 이들의 무덤이 곳곳에 있다. ○교회에 구경꾼들 몰려 제르진스키거리에있는 「돔 무제 데카브리스트」는 1826년부터 30여년간 12월당 혁명주모자들 수명이 유형생활을 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대표적인 명소다.12월당 혁명은 1825년 알렉산더 1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할 즈음에 일어났다.당시 군대내에 왕정폐지를 주장하던 비밀결사조직인 12월당원 5백여명이 「새 차르즉위 반대,공화정 수립 지지」를 내걸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나드광장에서 무력저항을 시작한 것이다.25년 12월14일 하오3시 직후였다.물론 이 저항은 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분쇄됐고 이후 주모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주모자급 1백28명이 모두 시베리아로 유형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이들은 중죄인으로 유형지에서도 모두 죽을 때까지 카타르가(쇠족쇄)를 차고 살아야했다.박물관 자료에는 당시 12월당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 소사이어티」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 소사이어티」등으로 나뉘어 이미 광범위한 비밀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박물관,그들의 무덤이 있는 교회입구에는 반드시 늘어서서 여행객들을 맞는 불청객들이 있다.바로 구걸꾼들.입구의 좌우로 10여명씩 늘어서서 연신 성호를 그으면서 자비를 구하는 데 도저히 그냥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이들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신경써야 할 일이다. 이르쿠츠크는 폴란드인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제정 러시아시절부터 러시아에 이주해온 폴란드인의 정신적 수도 같은 곳이고 폴란드인들의 대성당이 이곳에 있다.시베리아 폴란드인들도 유형 와 정착한 사람들이다.나폴레옹시대가 지난 1861년 당시 바르샤바가 있는 동폴란드는 러시아영토였다.1861년부터 63년까지 폴란드인들은 거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러나 이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1만여명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왔다.이들의 주유형지가 바로 이르쿠츠크였고 그들의 친척·후손들이 지금도 이 일대에 모여살게 된 것이다. 주청사 바로옆 「폴란드혁명거리」에 위치한 폴란드성당인 「성모 무염시태(무염시태)성당」도 1884년 이들이 세운 것이다.소련시절 교회가 폐쇄된 채 국유화돼 시립 파이프오르간 연주장 등으로 쓰이다 지난해말 건물 일부가 폴란드신도들에게 되돌려졌다.폴란드에서 파견돼온 베르다벳다라는 젊은 수녀는 현재 이르쿠츠크 오블라스치(주)에 약 3천여명의 폴란드인이 사는 데 매주 3백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이곳 뿐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크라스노야르스크·옴스크 등 시베리아 여러 곳에 폴란드성당이 있는 데 하나 같이 교회건물 반환문제를 놓고 러시아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폴란드 혁명거리로 모스크바에도 많은 폴란드인이 살고 폴란드 성당이 2곳 있는 데 이들은 시베리아 폴란드인들과는 또 다른 이주배경을 갖고 있다.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서부러시아는 과거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당시 그곳에 살던 폴란드인 다수가 모스크바로 옮겨가 살았다.특히 폴란드인들은 교육열이 높아 모스크바의 각종 대학·인스티튜트(단과대학)등에서 공부했다.소련시절에는 모스크바 거주 폴란드인수가 10만명을 넘었다.모스크바의 가톨릭교회도 소련시절 국유화됐는 데 최근 반환을 요구하는 폴란드인들과 시정부가 맞붙어 유혈충돌까지 벌어졌다.모스크바 폴란드성당건물은 외양만 교회이지 시정부에서 건설회사 사무실로 사용해 내부는 완전히 일반 사무실처럼 바뀌어 있다.러시아전역이 마찬가지지만 국유화된 교회는 이렇게 사무실로,창고로,때로는 감옥으로도 바뀌어 철저히 파괴됐다.모스크바의 폴란드성당은 몇개월 전 건물일부가 반환돼 폴란드인들과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외국인 가톨릭신자들이 그곳에서 미사를 본다. 이르쿠츠크의 폴란드성당 멀지 않은 곳에는 주청사건물을 비롯한 정부청사들이 들어서있다.시베리아의 각 도시들이 마찬가지지만 주도에는 주청사·지방의회·지방선거위원회 등과 함께 연방대통령 대리인의 집무실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게 흥미롭다.93년말 새헌법 채택으로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들로 임명하는 지방관을 보내 주정부의 일을 감독·감시토록 하는 것이다.그래서 주민이 선거로 뽑은 주지사·시장과 이 대통령 대리인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 차이석 선생/독립단체 임정중심 결집 주역(이달의 독립운동가)

    ◎총독 암살기도 사건에 연루돼 변고/상해 건너가 독립신문 기자로 활약 국가보훈처가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동암 차이석(1881년7월 26일∼1945년 9월9일)선생은 임정요인으로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다. 20대중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 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비밀결사 신민회의 평양지회 평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애국정신을 키워나갔다. 신민회는 당시 교육기관의 설립과 만주 독립군기지개척등 국권회복을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그 결과 1911년쯤에는 이시영 등 일부 인사들이 만주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비밀결사 신민회 가입 선생은 안창호선생의 뜻에 따라 교육운동에 헌신하던중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데라우치(사내)총독 암살기도사건에 연루돼 3년여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이후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임정기관지로주3회 발행되던 「독립신문」기자로 일했다. 1921년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임명된 선생은 박은식등과 함께 임정을 구심점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애국세력의 결집에 힘을 쏟았다. 임정은 수립초기 국·내외 동포의 지원과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과의 긴밀한 연계등으로 대일항전의 구심체역할을 수행했지만 1920년 외교노선의 실패등에 따른 책임추궁문제에 휘말려 지도체제가 심하게 동요를 겪던 중이었다. 1921년 임정존립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요구가 거세지자 선생은 이동령·김구·이시영·조소앙·이동휘 등 임정 주요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역설,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그는 지면을 통해 『임정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출발을 기약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일사불란하게 전진하고 대동단결하자』고 호소했다. 선생은 특히 「임정무용론」이 대두되던 1922년 임정에 가입,임정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선생은 임정 의정원의원을 지내면서 안창호선생이 이끄는 흥사단 이사로 근무하는등 청년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임정은 1930년초 오랜 혼란을 극복,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을 기초정당으로 창당,독립운동수행을 위한 체제정비에 성공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한독당기관지 「상해한문」의 편집인겸 인쇄인으로 임명됐으며 1930년 임정 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의정원 국무위원 선임 임정은 이후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항일투쟁에 이어 1934년 강병학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등을 일으켜 한국인의 독립염원을 세계에 떨쳤다. 그러나 임정은 이 사건의 여파로 14년동안 머물렀던 상해 프랑스조계를 떠나 항주등으로 이동하게 됐다. 1932년 항주 의정원회의에서 선생은 김구·신익희·이동령·조성환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돼 임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임정의 시련은 이어졌으며 이때마다 선생은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돼 임정요인중 일부가 임정을 떠나 임정와해의 위기가 닥치자 선생은 광동,항주등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를 찾아다니며 임정의 임무와 의의를 강조,임정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선생을 포함한 임정요인의 노력에 힘입어 임정은 전열을 정비하고 주석 이동령을 비롯,김구와 선생등 국무위원을 선출했다. 이들은 또 민족혁명당의 창립으로 한국독립당이 없어짐에 따라 다시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설립했다. 한국국민당은 창립선언문에서 「국가주권의 완전한 광복으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이 당은 일제 군사정보수집활동과 청년대원의 국내잠입 및 일제시설파괴,일제 요인제거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직후 중경서 별세 임정은 중국내 여러 지역을 거쳐 1935년 중경에 자리를 잡고 직할부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국독립운동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위치를 확보했으며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임정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선생은 중경 임정에서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등을 맡아 대일항전을 지원하다 해방을 맞은 1945년9월9일 임정청사에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유해는 이동령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돼 서울 효창원에 안장됐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불 베르사유 궁전(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22)

    유럽에 첫 나들이를 가는 여행자들은 우선 파리에 대한 기대감에 젖게된다.그러나 파리에 첫 발을 딛게 되는 순간 「프랑스 혁명」의 대상이었던 화려한 왕궁문화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낮게 펼쳐진 소박하고 아담한 가로의 표정을 접하고는 왠지 실망감 마저 느끼게 된다. 파리는 「로망스」라는 그들의 노랫말처럼,『파리라는 말이 「로맨스」를 뜻하고,파리는 그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지만,갖기를 원하면 언제나 당신의 것이 될수 있는』 서정적 모습이다.물론 파리가 「도시화」나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이렇듯 본연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파리의 건축법은 매우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지 오래다.모든 공간은 문화재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집 안팎을 뜯어 고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파리의 역사와 문화에 도전하는 무모함으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그러나 파리 여행코스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베르사유 궁전 관광」에 나서보면 파리에서 느낀 정서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의 무대,즉 사치의 극을달리는 귀족문화의 현장에 들어서게 된다. ○왕권의 상징적 건물로 베르사유 궁전은 1623년 루이13세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2백년간에 걸쳐 증·개축 되었다.처음에는 파리 서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사냥」을 위한 별궁의 형식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그후 귀족계급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된 왕권의 상징적인 과업이었다. 관광버스가 루브르 박물관 옆의 발착장을 출발하면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에 대한 안내방송이 시작된다.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인 그들이 타도한 귀족문화의 상징을 세계인을 상대로 판매(?)하는 어색함에 대한 그들다운 변명의 방식이다.만약 자신들의 『우리의 선조는 이렇게 혹세무민을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면 누워서 침뱉는 일이 될 것이고,『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짓고 잘 살았습니다』하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터이니 그들도 나름대로 요리조리 궁리를 했음에 틀림없다.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프랑스인들은 이들 귀족의 사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제와서 보면 이들 귀족은 베르사유궁전이라는 명작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줌으로써 막대한 관광수입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그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은 결국 당시의 국민 세금으로 후대를 위해 저축을 한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라는 절묘한 넋두리가 일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베르사유 궁전은 사냥용 별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신축 당시에는 아주 평범한 작은 별장이었다.그러나 이후 확장을 거듭해서 지금은 전체 면적이 1백50만평에 이르고 있다.수렵광으로 알려진 루이13세는 6개 정도의 방이 있는 이 작은 궁전에 소동물원을 만들었다.이곳에서는 초기에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타조나 펠리컨등 진기한 조류가 사육되었는데,점차로 동물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낙타나 코끼리도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한다.절대권력과 파탄적 귀족문화 공간의 초기 모습이 「진기한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화려한 분위기에 매료 루이 14세에 이르러 베르사유는 당대 최대의 궁전이자 귀족들의 공동주택으로 변모한다.당시의 상황에서 귀족들은 매일 아침 자신의 집을 출발하여수십리 떨어진 베르사유의 제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요즈음 말로 「눈도장」찍는 고달픈 일과를 겪고 있던 것이다.그들은 궁전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객실수를 대폭 늘려잡아 자신들의 거처를 확보하는 묘책을 택했다.이때부터 베르사유는 「귀족 아파트」가 되었고 밤낮으로 연회가 열렸으며,이른바 「귀족의 반항」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시초까지 가장 사치스러운 축제공간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베르사유는 지탄받아야 할 타락의 상징임에 틀림없다.그러나 궁전 건축에 동원된 당시의 건축술에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예술성과 정교함이 가득하다.목욕탕에는 18세기 당시에 이미 보일러를 이용해서 가동되는 독립된 급탕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벽화 이외의 건축재료는 천연석을 정교하게 조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은 선명한 색상을 간직하고 있다.특히 대리석과 유리가 조화된 실내는 낮에는 자연채광을 구석까지 고루 반사시켜 주며,밤이되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보석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혁명후 베르사유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그러나 결코 「폐허」로 변하지는 않았다.혁명가들은 부패한 절대권력의 상징인 이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하는데에 동의했다.그들은 단지 일부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를테면 백합꽃이나 왕관등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만족했다.가구나 장식품은 경매에 부쳐졌다. 빈집이 된 궁전은 19세기에 들어서 루이 필립왕에 의해 프랑스역사박물관으로 변모되었다.그리고 이곳에 프랑스 건국에서 근대까지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수천점의 벽화와 조각으로 전시하였다.전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칸막이 벽을 변경하고,전시품을 제작하는데만 4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로코코시대」전기 이뤄 베르사유를 떠난 귀족들은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갔다.이들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그동안 방치했던 자신들의 집을 단장하기 시작했다.곳곳에서 주택의 설계와 증·개축,인테리어공사가 활발해졌다.베르사유 궁전의 장식적 분위기에 집착한 이러한 경향은 건축사적으로 「로코코」시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후련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물론 총독부 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은 타락한 선조의 유산이 아니라 침략자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하지만 역시 우리 땅에서 우리의 피땀으로 시공된 우수한 건축물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우리 것을 찾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순 해체로만 만족하지 말고 해체과정을 기술 발전의 계기로 삼기위한 지혜와 노력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아울러 우리의 궁전 건축 유산을 보전하기 위해서 입장을 제한하는 방식의 「보호」그 자체 보다는 당시의 기술적·예술적 지혜를 현대에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발전적인 개방의 장으로 관리해나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 BAM 철도(시베리아 대탐방:33)

    ◎지도에 없던 「극비 철도」… 스탈린이 계획/타이셰트∼콤소몰스크나아무르 총 3,200㎞/일제위협 대비 41년 착공… 84년 전구간 개통 이르쿠츠크에서 북으로 우스치림스크댐까지 거대한 인공호수가 돼있다가 이후부터 실제로 강의 모습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앙가라는 북으로 주경계를 넘어 크라스노야르스크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가서 에니에시강과 합쳐진 다음 북극해로 들어간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보쿠차느이시가 있는 지점의 앙가라강에는 지금 제4의 댐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시베리아여행중 제일 친절한 승무원을 만나서 비교적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모스크바교외에 산다는 이 젊은 여승무원은 한번 기차를 타면 2명이 1조가 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왕복 15일 밤낮을 쉬지 않고 교대로 일한다고 했다.그 다음 2주일을 쉬고 다시 2주일 동안 기차를 타는 것이다.보통 체력과 인내심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직업임에 틀림없다.왜 많은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했다. ○바이칼호 북단을 지나 이르쿠츠크주 초입에 있는 타이쉐트는 20세기 최대의 대공사로 러시아인들이 자랑하는 BAM(바이칼∼아무르철도)철도의 시발점이다.이곳에서 시작된 BAM철도는 동쪽으로 거의 직선거리로 진행해서 바이칼호수 북단 위쪽을 지나 종착역인 하바로프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르시까지 이어진다.총길이 3천2백㎞에 달하는 구간이다.이곳에서 지선으로 남쪽의 하바로프스크를 통해 다시 대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 철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30년대 중반 스탈린이었다.가장 큰 이유는 바이칼호수 남단을 우회하는 대시베리아철도가 당시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만주국경과 너무 가까워 안보면에서 문제가 크다는 것이었다.이후 계획을 완성해 착공한 것은 41년이었다.바이칼호 북쪽은 바위·험로가 첩첩한 난공사구간이다.당초 대시베리아철도가 호수남단을 우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번째 구간으로 아무르주의 스코보르디노∼튄다 사이의 공사가 시작됐다.일차적인 목적은 남쪽의 기존 시베리아횡단철도역인 스코보로딘을 통해 치타주로부터 공사장비·인력 등을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 이 구간은 2차대전 발발 직전인 41년 완성됐으나 이후 전쟁으로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모든 물자·인원을 모두 서쪽 전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종전 직전인 45년 공사가 재개돼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태평양연안의 군항인 소베츠카야 가반항까지 구간이 착공됐다.블라디보스토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경우에 대비해 태평양함대를 이곳으로 옮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태평양함대 이동 목적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구간공사가 시작됐다.46년이전에 타이쉐트∼브라츠크구간은 완공돼있었다.브라츠크의 목재·메탈·철 등을 서쪽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따라서 BAM공사의 실제 시발점은 브라츠크인 셈이다.46년부터 이후 51년까지 브라츠크에서 동쪽으로 계속 공사가 진행됐다.브라츠크에서 강항인 우스트구트까지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BAM철도는 레나강과 연결되게 됐다.레나강을 통해 실어온 주변의 목재들은 우스트구트에서 철도로 실어 러시아 각지로 운반해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시절인 77년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튄다까지 구간이 완공돼 BAM의 동쪽구간이 완성됐다.당시 중소관계가 악화돼자 중국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안전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판단,공사에 박차를 가한 때문이다.BAM은 일명 「젊은 영웅들의 철도」라고 불린다.기차에서 만난 튜멘주의 건설노동자같이 젊은 콤소몰 청년들이 대거 건설현장으로 동원됐기 때문이다. 지난 84년 처음으로 동서 전구간이 연결돼 기차가 운행했다.그러나 토넬느이에 있는 터널 1곳은 아직 미완성인 채 우회로를 통해 기차가 다니고 있다.현재 미완성 구간은 토넬느이∼탁시모간 15㎞이다. 스탈린시절 BAM철도 건설은 1급비밀로 속해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이 동원됐다.이 철도가 지도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55년이었다고 한다.브라츠크발전소 건설을 발표하면서 이곳에 철로가 있으며 이 철로를 이용해 발전소를 건설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복선·전철화작업 진행 현재 BAM은 전구간 복선·전철화 작업이 진행중이다.그러나 아직은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철도란 건설 뒤 10∼15년 지난 뒤부터 철도주변에 개발효과가 가시화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조만간 이 지역에도 경제개발붐이 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덕분에 일찍이 외국인에 개방된 곳이다.바이칼의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이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따라서 우리가 묵은 인투리스트호텔은 입구에서부터 서구화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새벽에 체크인하는데도 교대근무자들이 친절히 맞아주었고 엘리베이터는 금성사제품,객실 세면대에는 한국산 비누·치약·샴푸 등이 깨끗이 준비돼 있는 등 여행중 최고로 쾌적한 인상을 주었다.객실의 냉장고도 다른 지방의 호텔에서 같이 「탱크 굴러가는 듯한」요란한 소음을 내는 러시아제 대신 말끔한 한국산 냉장고가 갖추어져 있다.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많이 들르는듯 한식당·일식당도 있고 호텔 로비 곳곳에 한국어 안내판이 나붙어 있다. 현재 인구 60만명의 이르쿠츠크시는 1661년남쪽의 몽골·중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출발했다. 이후 1686년 군사요새로서의 제한된 역할을 마감하고 정식도시로 재출발했으며 1698년 중국과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이르쿠츠크는 매우 중요한 교역중심지로 부상했다.도시가 커지면서 17 64년에는 당시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고 총독의 집무처가 들어섰다.그래서 이곳에는 「벨르이 돔(백악관)」으로 불리는 순백의 당시 아름다운 총독관저가 지어져 지금 빼놓을 수없는 관광명소가 돼있다.가가린프로스펙트에 있는 이 건물은 현재 이르쿠츠크 시립도서관이 입주해 있는데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크바렝키가 설계한 작품이다.
  • 이봉창의사 폭탄투척 등 기술/총독부 비밀문서 발견

    【부산=이기철 기자】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소장 박낙조)는 28일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탄투척의거에 대한 조선총독부 비밀문서 「경비관계철」을 발견,판독한 결과 이의사가 1924년쯤 부터 이미 항일청년단체를 결성했었다는 등 그의 청년시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이의사는 거사후 일경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폭탄을 건네받을 때부터 성능을 의심하고 헛되이 희생되지 않을까 고민했다는 진술이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폭탄투척사건 직후 일본에서는 친일파 거두 박춘금이 친일단체인 「상애회」회원 1백여명과,국내에선 한상용,박영철 등이 친일단체인 「동민회」회원과 함께 일왕에 사죄하는 등 부끄러운 내용도 담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