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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대첩비 등 문화재 일제가 파괴”

    ◎행주전승비·이순신 명량대첩비 등 20건/오세탁 전 충북대교수 「지시 공문」 발견 일제가 남원 황산대첩비 등 우리 문화재 20건을 반시국적인 고적이라며 무참히 파괴할 것을 지시한 공문이 발견됐다. 오세탁 전 충북대교수가 3일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릴 「일제의 문화재정책 평가 세미나」 발표를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 일제문서보관창고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 무렵인 1943년 8월,11월 전북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학무국장이 각각 발송한 「유림의 숙정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문서에 따르면 유림등 주민의 반일적 불온한 동향이 황산대첩비와 같은 이른바 반시국적 고적이 정신적 지주가 돼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일제는 사적비 20건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다. 명기된 문화재는 고양 행주전승비,청주 조헌전장기적비,공주 명람방위종덕비,공주 명위관임제비,공주 망일사은비,아산 이순신신도비,운봉 황산대첩비,여수 타루비,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진주 촉석선충단비,통영·남해 이순신충렬묘비,부산 정발전망유지비,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연안 연성대첩비,경흥 녹보파호비,회령 고충사타 등.
  • “총독부 벽돌 등 기념보관 하세요”/국립중앙박물관

    ◎중순께 무료 배포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달 중순 조선총독부 철거 현장에서 철거된 폐기물을 국민들이 가져가 기념품으로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행사를 마련한다. 박물관측은 총독부건물에서 나온 돌을 벽돌크기로 잘라 철거현장에 쌓아놓고 이날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로 했다.또 지난해 총독부 첨탑 제거행사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공연 등을 열어 방문객들이 총독부 철거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박물관측은 당초 일반인들이 철거 폐석재를 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원칙아래 7만3천여t의 철거 폐석재중 첨탑,전면기둥,장식돌,내부난간 등 주요 부재 2천4백여t은 독립기념관에 이전 보존하고 나머지는 김포매립지에 버리기로 했었다.
  • 되찾은 이름(외언내언)

    국보1호 남대문이 숭례문으로,보물1호 동대문이 흥인지문으로 본래의 명칭을 되찾게 되었다.일제 때인 1934년에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꼭 62년만에 「호적상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이밖에도 5점의 문화재명칭이 바뀌었고 6점의 보물이 국보로 승격되는 등 일제 지정문화재의 재평가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숭례문」「흥인지문」이란 어엿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도 지정명칭이 속칭인 「남대문」「동대문」으로 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현판의 글씨는 가로쓰기가 원칙인데 숭례문만은 세로로 씌어졌다.서울 외곽인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숭례문의 현판은 세종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문화재명칭의 격하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와 관련되는 것은 가능한 한 말살하려고 했다.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광화문을 옮기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청사를 세웠다.왕조에 대한 백성의 향수조차 막으려 한 것이다.1918년에는 창덕궁 내전을 중건한다는 명목으로 200여동에 달하는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냈다.일제는1909년 창경궁에는 느닷없이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벚꽃을 심었다.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꿔 유원지로 만들었다.그들의 구실은 『고종의 적적함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왕궁을 밤벚꽃놀이장소로 만든 것도 계산된 휼계였다.창경궁은 84년부터 중창공사가 추진돼 「창경궁」이란 본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창덕궁의 「비원」도 일본인이 개명해놓은 것.원래이름은 금원이다.금원이란 호적명을 찾아줬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비원이라 부르고 있다.일제가 물러간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명칭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많다.「국민학교」란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뀐 것도 해방 51년만의 일이 아닌가.
  • 구총독부 지하 나무말뚝 9천388개 뽑아낸다

    일제가 옛 조선총독부 건립 작업에 앞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 부지 땅속에 박아 놓았던 9천388개의 대형 나무말뚝들이 모두 제거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철거한 옛 조선총독부 지하에 일제가 박아놓은 지름 20∼25㎝,길이 4∼8m의 대형 나무말뚝들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제거돼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말뚝뽑기 작업은 청사 잔해물 제거작업이 완료되는 내년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경복궁 불교문화재 반환”/조계종,정부에 요구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경복궁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중인 가운데 불교계는 일제가 경복궁 안에 모아둔 국보 및 보물급 불교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 28개 기업 진출… 작년 교역량 55억불/한·말련 관계 현황

    말레이시아는 독특한 입헌군주국이다.국왕이 있지만 영국·일본과 달리 선출직이다.연방국가인 말레이시아에는 13개의 주가 있다.페낭·말라카 등 비말레이계 4개 주는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이 통치하며 나머지 9개 주는 주왕이 통치자다.주왕회의에서 9명의 주왕중 1명을 국왕으로 호선한다.국왕 임기는 5년.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의전적 성격이 강하며 실제국정은 총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말레이시아는 1인당 GNP가 4천달러를 넘고 있다.동남아에서는 싱가포르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다.연간 교역규모도 1천5백억달러이상으로 탄탄한 경제기반을 갖추고 있다.마하티르 총리는 「비전 2020」의 기치를 내걸고 선진국도약을 꿈꾸고 있으며 88년이래 연 8%이상의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말레이시아간 교역량은 95년 55억달러에 달했다.우리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흑자로 반전됐다.28개 우리 업체가 진출해 있고 현지투자설립업체가 30여개다.총투자액은 2억9천만달러. 말레이시아는 우리의 주요자원공급국이다.95년 우리의 수입액25억달러중 절반이 목재·원유·천연가스 등 자원수입이었다.95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2백만t씩의 LNG장기도입이 진행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또 우리에게 제2위의 해외건설시장이다.지난해에만 12억달러의 수주가 이뤄지는 등 95년까지 건설수주누계는 60억달러에 이른다. 말레이시아정부는 최근 한국건설업체에 대해 불리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나 김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대부분 해제했다.한·말레이시아 정상회담 이후에 우리 건설업체의 진출이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
  • 국립중앙박문관 개관/새달 13일 경복궁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정양모)은 다음달 13일 경복궁내 국립중앙박물관을 개관한다고 22일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사용해오다 이 건물 철거작업에 앞서 지난 6월1일 휴관에 들어갔다.
  • “신문 변혁” 주도… 언론사 새 장 열다(서울신문 51년)

    한장의 사진 속에는 지나간 역사의 한 순간이 시간이 정지된듯 그대로 살아 있다.올해로 51돌을 맞은 서울신문도 그 무르익은 연륜만큼이나 뜻깊은 사진을 많이 남기고 있다.낡은 한장의 사진에는 서울신문 변화의 발자취뿐만 아니라 격동과 부침을 겪으며 발전해온 우리 역사가 숨쉰다.서울신문이 우리 사회와 창조적으로 교감,그 발전을 이끌어온 사실이 무엇보다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서울신문과 우리사회를 씨줄·날줄 삼아 짜인 사진들을 통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서울신문의 기념비적 순간들을 돌이켜본다. ▷서울신문 1호◁ 1945년 11월23일자 서울신문 첫호 1면.서울신문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이어받아 창간했음을 전하는 기사가 한가운데 보인다.지령을 제13738호로 한 것은 1904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로부터의 계승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 ▷언론메카 기공식◁ 1982년 4월6일 서울신문사는 태평로 옛사옥을 헐고 현재의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 건물인 새사옥 신축에 들어갔다.지난 39년 건축돼 해방,정부수립,6·25,5·16 등 파란많은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서울신문과 영욕을 같이한 구사옥은 이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신사옥 기공식에서 힘차게 삽질하는 인사는 맨 왼쪽에 정주영 당시 전경련 회장,한사람 건너 문태갑 당시 서울신문사장,그 곁에 이광표 당시 문공부장관 등이다.새사옥은 84년말 완공됐다. ▷을지로 사옥 시절◁ 1982년 12월16일 서울 을지로5가 서울신문 임시사옥 게시판에서 「김대중 석방」을 알리는 속보를 보는 시민들.새사옥을 짓는 3년간 서울신문은 농협 건물에서 셋방살이를 해야했지만 서울신문 가족은 최신식 건물에서 더 크게 도약할 미래를 꿈꾸며 어느때보다 부지런히 뛰어 「중공기납치범」사진 특종,「아웅산 폭발사건」일보 등 잇따른 특종을 엮어냈다. ▷국내 첫 CTS 도입◁ 서울신문이 1985년 1월1일자부터 언론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컴퓨터편집조판시스템(CTS).태평로 새 사옥으로 돌아온 때에 맞춰 서울신문은 기존의 납활자 제작방식에서 탈피,최신기술의 결정체인 CTS로 신문을 찍어내며 전자신문시대의 새 장을 열었다.이후 모든언론사가 앞다퉈 CTS 대열에 참여했고 제작시간 단축,지면개선 등 신문제작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대구 분공장 준공◁ 1992년 7월1일 서울신문은 대구인쇄본부 건물을 준공,신문의 지방화시대를 열었다.준공식에 참석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대표 등 축하방문객들은 시설들을 둘러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구로공장에 이어 건립된 대구인쇄본부는 신문의 전국 동시인쇄를 가능케 해 「정보의 지방공유시대」를 앞당겼다.대구인쇄본부는 현재 하루 30만부 정도를 찍어내면서 서울판과 똑같은 따끈따끈한 뉴스를 지방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인터넷 신문시대 개막◁ 1995년 11월22일 창간 50주년을 기해 서울신문은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서비스하는 「뉴스넷」을 도입했다.이로써 네티즌들은 서울신문을 비롯해 자매지인 스포츠서울·뉴스피플·TV가이드 등에 실린 모든 기사를 인터넷상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됐다.신속하고 세밀한 정보제공으로 「뉴스넷」은 개통 열달 만에 「하루 접속 1백만건 돌파」라는 기적을 일궈냈다.그러나 정보화의 혁명적 물결에 대비하고 더 나아가 이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서울신문의 정보화노력은 이제부터가 시작단계라 할 수 있다.
  • 공익정론 외길 초일류 고급지로(서울신문 51년)

    □45년∼84년 ·항일지 「대한매일신보」 뿌리로 ·54년 소설 「자유부인」장안 선풍 ·56년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85년∼현재 ·CTS 첫 도입 등 언론사에 큰 획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96년 10월 전면가로쓰기 단행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의 어지러운 상황이 한창 전개되던 1945년 11월22일 태어났다. 서울신문 탄생은 당시 언론계는 물론 정치·사회·문화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하나의 사건이었다.일제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의 인쇄시설과 건물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문발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데다 이제야 비로소 민족의 기대와 염원을 담아낼만한 권위있고 책임있는 언론기관이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창간호를 1호가 아닌 제13738호로 시작했다.이는 새 시대를 맞은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을 자임하는 동시에 1904년에서 한일합방까지 지령 1461호를 기록한 대한매일신보와 이후 1945년 11월10일자(13737호)를 끝으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은 매일신보의 전통을잇는다는 정통성의 표현이었다. 창간 이래 3년 가까운 기간 중립지 노선을 고수해온 서울신문은 그러나 국토가 분단되고 공산화 위협이 거세지자 반공지로 변신한다.직접적인 계기는 1949년 5월3일 공보처가 내린 발행정지 처분이었다.이유는 반정부기사를 많이 싣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후에도 각종 현안이나 이승만정부에 대한 건설적 비판논조는 계속 이어갔으며 미군철수안·여순반란사건·국가보안법 문제 등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균형있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전 발발은 서울신문에도 큰 시련이었다.기자 1명을 포함한 사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설 일부가 두차례나 파괴·해체당했으며,고단한 부산 피난시절을 감당해야 했다.그러나 서울신문은 멈추지 않았다.51년 4월6일에는 서울수복후 첫 진중신문을 발행,「우리는 돌아왔다」는 사설을 게재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을 감격에 젖게 했다. 6·25전란은 한편으로 서울신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이는 자유당 발족을 전후해 통치기반의 공고화를 꾀했던 이승만정부의 구상에 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서울신문은 정치부문에선 친정부적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기타 문제에 있어서는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리는 절묘한 균형을 취했다. 한편 50년대초 반공포로 석방·휴전협정 조인·한일회담 결렬 등 역사적 사건들이 쉼없이 전개되는 속에서도 서울신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사상초유의 인기와 시비를 몰고 왔던 소설 「자유부인」의 연재가 그것이다.54년 1월1일부터 그해 8월6일까지 모두 215회에 걸쳐 연재된 「자유부인」은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때 전후의 퇴폐적 분위기에 휩쓸려 허영과 향락으로 치닫는 여성을 묘사한 이 소설은 장안에 숱한 화제를 낳으며 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은 서울신문에게 시련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4·19 그날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수난을 당한 반면,곧이어 출범한 제2공화국 하에서 서울신문은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다시 표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그러나 새출발의 기쁨도 잠깐,극심한 경영난으로 서울신문은 61년 5월9일부터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5·16 쿠데타는 서울신문에게 재기의 길을 열어주었다.7개월째 발행되지 못하던 서울신문이 집권층의 후원과 재벌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그해 12월21일 속간된 것이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비약적인 사세신장을 이루었으나 한편으로는 5·16 군사정부와 뒤이은 제3·제4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길을 걷게 된다.특히 72년 10월 유신으로 빚어진 전환기에서 서울신문은 친정부적 성격을 굳히게 된다.서울신문의 성격상 당시로선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창간 30주년인 75년을 기점으로 사세중흥기를 맞게 된다.고속 오프셋 윤전기의 가동으로 신문발행의 전환기를 마련했고 ▲지령 1만호 기념 만호장학금 신설 ▲의료보험제 도입 ▲급여인상 등 사원복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5공 출범한 81년은 서울신문으로선 새롭게 내실을 다지는 원년이 됐다.대중문화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길이 없던 청소년층을 위해 「TV가이드」를 창간,대중문화를 선도했는가 하면 「예술과 비평」을 선보여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독자들을 만족시켰다.바야흐로 종합언론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국내 최고 종합일간지다운 면모를 다지고자 새 사옥 마련에 나섰다.82년 1월1일 태평로를 떠나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사한 뒤 3년여에 걸친 대역사끝에 새 사옥을 마련한 것. 85년 1월1일 준공된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사옥은 한국언론 제2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전조였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쾌적한 환경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한국언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특히 이 시기에 도입된 CTS 제작시설은 신문발행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국내 신문사로는 최초로 CTS를 도입한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사들의 부러움을 한껏 즐기며 신문제작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서울신문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사건은 또 있었다.그해 6월23일 「스포츠서울」의 탄생이 그것이다.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보다많은 스포츠 정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창간한 「스포츠서울」은 30분만에 창간호 가판이 완전매진되는 등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금까지 정상의 스포츠·연예·오락 전문지로 군림하고 있다. 스포츠·연예·오락전문지 「스포츠서울」,시사주간지 「뉴스피플」,대중문화 전문주간지 「TV가이드」,여성월간지 「퀸」등을 자매지로 둔 서울신문은 이제 또한번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증자를 통한 5세대 CTS와 최첨단 윤전기의 도입을 마무리한데 이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이 1일 접속횟수 1백만을 돌파함으로써 전자신문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21세기에 진정한 정론지로서 독자들을 찾아갈 서울신문의 밝은 미래는 이미 시작됐다. □약사 1945년 △11.22 서울신문 창간 1946년 △3.1 제1회 「3·1기념 서울·인천간 왕복마라톤 경기대회」개최(77년 32회까지 존속) 1948년 △10.18 시사지 「주간 서울」 창간 1951년 △3.8 전란으로 휴간 △6.9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 복귀 1953년 △8.16 첫 견습기자 공채 실시 △9.1 어린이신문 「주간소년서울」 창간 1954년 △1.1∼8.6 소설 「자유부인」연재 1956년 △10.18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1958년 △10.1 신문사상 처음으로 조석간 발행 1960년 △4.19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 전소 △4.26 휴간 △6.27 속간 1961년 △5.9 경영난으로 휴간 △12.21 속간 1962년 △8.13 석간으로 전환 1966년 △2.9 한국 최초로 1백만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 시상 1968년 △9.22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 창간 △11.22 전 지면에 걸쳐 한글전용 단행 1975년 △3.30 「주간 스포츠」 창간 △11·2 「주간 소년서울」 폐간 1978년 △10.5 보관자료 마이크로필름화 1981년 △7.18 청소년 주간지 「TV가이드」창간 1982년 △1.1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전 1985년 △1.1 언론사상 처음으로 CTS 도입,태평로 신사옥 입주 △6.23 스포츠 전문지 일간 「스포츠 서울」 창간호 발행 1989년 △9.23∼10.18 파업 1990년 △6.23 여성월간지 「퀸」창간 1991년 △7.31 구로공장 준공 △12.31 「선데이 서울」폐간 1992년 △1.5 자매지 주간 「피플」창간 △7.3 대구인쇄본부 준공 △12.25 「피플」,「뉴스피플」로 제호 변경 1994년 △2.18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본부」발족 1995년 △11.22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1996년 △1.29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국내 첫 동화상 속보체제 시작 △10.1 전면 가로쓰기 단행
  • 서울신문 창간51돌 기념 김 대통령 특별회견:Ⅰ

    ◎미·중 정상과 한반도문제 긴밀 논의/OECD가입 무역적자 해소에 도움/일 하시모토 총리와 월드컵 협력 협의/북,군인조차 굶주리며 적화통일 망상/북한 도발재발 방지 약속해야 경협 재개/금융기관 경쟁 촉진… 금리 하향안정 유도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신문 창간 51주년 기념 특별회견을 옛 조선총독부건물 철거에 따른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했다.『해방후 50여년동안 그 건물이 그대로 있어 무언지 국민의 정신을 짓눌러왔다』면서 『금년에 다 철거된 것은 문민정부 개혁중 특별히 기억될 일』이라고 강조했다.김대통령은 조선총독부건물 철거와 관련해 서울신문에 대한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서울신문도 해방직후 창간됐다』며 『새 역사와 서울신문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김대통령은 이어 20일 시작되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과 베트남·말레이시아 순방,미국·일본·중국 등 주요국가 정상과 만나 대북문제를 조율하는 일정,경쟁력 10%이상 올리기운동 등에 대한 물음에 진지하게 답변했다.특히 공직부정을 언급할 때의 단호한 톤은 부정부패척결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그대로 보여줬다.회견장소는 청와대 본관 접견실이었으며 서울신문 우홍제 편집국장과 이경형 정치부장이 질문에 나섰다. ­필리핀 APEC 정상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 정상들과 어떤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하실 계획인지요.한국은 어느 정도 수준의 자유화계획을 제출하게 됩니까. ▲작년 오사카 정상회의에서 APEC 무역투자자유화를 위한 기본골격인 행동지침(Action Agenda)을 마련했습니다.이번 정상회의에서는 오사카회의의 행동지침에 따라 역내 무역투자자유화 실천을 위한 실행계획(Action Plan)과 APEC 회원국간 경제협력방안에 대해 주로 논의할 예정입니다.나는 이번 회의에서 APEC을 통한 무역투자자유화의 혜택이 역내 회원국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생각입니다.특히 APEC 국가가 공동체의식을 갖고,공동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공존공영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그 역할에 상응하는 수준에서자유화실행계획을 마련했습니다.이번 실행계획은 WTO협정을 비롯한 기존의 무역투자자유화계획을 중심으로 작성한 것입니다.이는 앞으로 우리가 선진경제로 진입하는데 초석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북의 점진적 개방 유도 ­APEC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미,한·중 정상회담도 열릴 예정입니다.재선된 클린턴 대통령과 어떤 형태의 대북공조방안을 이끌어내실 생각인지요.중국정상과 만나 북한이 잠수함사건을 사과하고 4자회담에 나오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한·미 양국은 그동안 대북정책추진에 있어서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잠수함을 통한 무장공비침투사건과 관련,북한의 잇따른 보복위협에 대해 확고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거듭 확인하고 저들의 무력도발가능성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양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궁극적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통해 남·북간 화해·협력을 증진시켜 나가야 한다는 데도 인식을 같이하고 있습니다.이번 클린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이와 같은 양국간의 공동인식과 공조체제를 재확인할 것입니다.또한 북한에 대해 먼저 무장공비침투에 대한 사과 및 재발방지약속 등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할 것과 4자회담에 조속히 응할 것을 다시 한번 강력히 촉구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북한엔 미래가 없다” 우리는 그동안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과도 긴밀히 협의해왔습니다.강택민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의 무장공비침투사건과 4자회담을 비롯하여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중국의 건설적인 기여방안 등 상호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 정상도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개인적으로 만나면 으레 그것을 물어봅니다.외국정상들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북한 미래에 대해 그 사람들 나름대로 전망을 합니다.대부분 북한의 미래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국민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통일에 대한 생각에 있어 우리와 북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우리는 민주방식인데 비해 북한은 적화통일에서 한치의 변화도 없습니다.북한은 군인조차 배가 고픈 실정입니다.굶는 군인이 있으며 자주 후송되고 있습니다.그런 상황에서 1백6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일입니다.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 승리이후 일본국민과 정계가 보수화·민족주의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와 일본은 대북정책공조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등 함께 노력해야 할 과제도 많습니다.필리핀에서 하시모토 총리를 만나면 과거사 정리문제와 함께 양국간 협조방안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내실 생각이신지요. ○베트남 한국공단 협의 ▲나는 이번에 새로 출범한 일본의 자민당정권이 하시모토 총리의 지도력 아래 종래의 대외정책기조,특히 한국을 중시하는 대한반도정책을 변함없이 견지해나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나와 하시모토 총리는 21세기 미래지향적인 한·일 협력관계는 올바른 역사인식의 토대 위에서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이번 마닐라 정상회담에서도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한반도에서의 안정과 평화유지,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공동개최 등에 대한 양국간 협력방안을 심도 있게 협의하고자 합니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전후해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시게 되는데 동남아 2개국 순방에서 역점을 두고 논의하실 내용은 무엇입니까. ▲나의 이번 베트남 방문은 수교후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최초의 방문입니다.베트남의 풍부한 자원과 성장잠재력에 비추어 양국간 실질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은 매우 커지고 있습니다.베트남은 인도차이나의 주요국가로서 우리와 수교한지 4년에 불과하지만,교역·투자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의 실질협력관계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이번 방문기간중에 한국전용공단설립,원자력협력협정체결,메콩강유역개발 등을 비롯하여 경제협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 중점논의될 것입니다.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해오고 있는 우리의 주요실질협력상대국입니다.나의 이번 방문에서 투자확대,자원협력을 비롯하여 범아시아 철도망건설,방위산업협력 등 새로운 분야에서의 협력확대방안도논의하고자 합니다.또한 이번 순방중에는 이 두 나라가 회원국으로 있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의 협력증진방안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논의할 계획입니다.이것은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한국과 ASEAN이 21세기 아·태시대를 함께 준비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무장공비침투사건과 관련해 북한이 아직 공식사과는 않고 있습니다.내부적으로는 북한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왔는지요. ▲북한은 지금까지 우리의 요구에 대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우리에 대한 비방·중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북한의 이와 같은 적반하장의 행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면서 북한주민의 어려움을 지원해온 우리의 대북정책기조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입니다.무엇보다 먼저 북한당국은 무장공비침투와 무고한 우리 주민을 살상한데 대해 명시적으로 시인·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합니다.북한이 우리의 이러한 요구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때,남북간에는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가 다시 조성될 것이며 남북경협도 재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력 국제적 인정 의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으로 우리 경제는 또 한번의 도약기회를 맞고 있으나 그에 따른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OECD 가입이후 한국경제의 진로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으신지요. ▲정치적 민주주의,시장경제창달,인권존중을 3대이념으로 하고 있는 OECD에 우리나라가 초청받았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그것은 우리가 OECD의 이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특히 아시아지역에서 일본 다음으로 두번째 가입초청을 받은 것은 더욱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OECD에 가입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핵심국가와 함께 세계경제질서형성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대내적으로는 열린 세계와의 경쟁을 통해 능률과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또한 OECD 회원국의 경험을 활용하여 경제·사회 각 분야의 제도개선을 촉진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한차원 높이는 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회원국의 경제정보와 기술을전수받는 것은 우리의 무역적자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밖으로 나가보면 OECD 회원국끼리 모여 소곤소곤 얘기합니다.무서운 세계입니다.당분간 OECD는 문을 닫아걸 것으로 예상됩니다.앞으로는 가입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회원국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가입이 안되는 것입니다. 정부는 OECD 가입을 계기로 각종 제도와 관행 및 의식의 선진화를 통해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총체적인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개방과 자유화의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제체제를 구축하는데 힘쓸 것입니다. ­과소비를 치유하고 고비용저효율구조를 깨기 위해 경쟁력 10% 높이기운동을 제안하셨는데 앞으로 추진방향과 특히 금리와 땅값을 낮출 방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계획입지」규제 완화 ▲최근 우리 경제의 어려움은 반도체가격 하락,일본 엔화절하 등 외부적 요인도 있겠지만,근본적으로는 고비용저효율구조와 분별 없는 소비급증 등 내부적 요인에 의한 우리의 대외경쟁력 약화에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에너지수입이 세계 5위이고 그 소비증가율은 세계최고로 에너지수입 증가에 의한 금년도 국제수지 추가적자요인이 50억달러에 달할 정도입니다.정부는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9·3종합대책」에 이어 「경쟁력 10%이상 높이기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기업활동여건을 개혁적 차원에서 개선하고 있으며 각종 제도와 규제를 OECD국가수준에 맞게 고쳐나갈 것입니다.이와 함께 금리·땅값·임금을 안정시키고,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향상노력을 뒷받침하겠습니다.금융기관의 경쟁을 촉진하여 스스로 경영혁신을 하도록 함으로써 금리가 하향안정되도록 할 것입니다.기업이 꼭 필요로 하는 자금은 해외에서 직접 들여올 수 있도록 기회를 넓히는 것도 금리안정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부동산실명제 등으로 부동산투기가 없어짐으로써 땅값이 많이 안정되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공장용지값을 하락시키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판단되어 공장용지와 관련한 각종 부담금을 줄이는 한편 계획입지에 대한 규제도 대폭 완화하고자 합니다.계획입지가 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보다 더 싸게 공급되도록 할 것입니다.공단용지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공급을 계속 늘려나갈 계획입니다.정부는 내년도 경제운영에 있어서도 「경쟁력 10%이상 높이기」시행을 최우선과제로 삼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특히 내년도에는 경상수지적자를 금년의 절반수준으로 낮출 수 있는 대책을 우선 추진코자 합니다.이러한 일은 정부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우리 국민 모두가 「경쟁력 10%이상 높이기」에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합니다. 외국정상이나 외국연구기관에서는 한국의 미래를 무서울 정도의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전체적으로 세계경제가 안 좋고 이웃 일본경제도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영향을 줍니다.그러나 경제는 굴곡,사이클이 있으니 영원히 나빠질 이유는 없습니다.국민이 새 결심을 하고 정부·기업인·근로자 모두가 경쟁력 10% 올리기에 나선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습니다. 쓰레기문제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버려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한해 8조원의 음식쓰레기가 버려진다는데 실제로 10조원이상일 겁니다.10조원이상을 버린다는 것은 낭비중 낭비이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노동관계법 개정을 포함,노사관계개혁에 있어 국정통치권자로서 복안이 있으시면 밝혀 주십시오. ○노사 의식개혁 중요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노사관계개혁은 대립과 갈등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질서를 만드는 일입니다.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근로자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것입니다.지난 6개월여동안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가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노개위의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논의과정을 통하여 개혁의 당위성과 기본방향에 대해 노사당사자가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노동법 개정방향에 대해서도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었다고 봅니다.이에 따라 정부는 이러한 노개위 논의결과를 참고하여 국가발전과 국민전체의 이익이 도모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추진할 것입니다.노사개혁은 제도만 고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노사의 의식을 바꾸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앞으로도 노개위가 계속해서 노사제도,의식·관행에 관한 2차개혁과제도 대타협의 정신을 바탕으로 적극 추진하여줄 것을 기대합니다. ­정부 전체적인 측면에서 각 부처에서 발생되고 있는 연구개발수요에 대한 종합조정능력이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국가연구개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의 과학기술행정체제,정부출연연구소 기능개혁조치를 할 용의는 없으신지요. ○전문연구기관 일류화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의 조정능력과 정부출연연구소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추진하고 있습니다.먼저 국가연구개발의 경쟁력과 우리의 과학기술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혁신특별법」을 이번 국회에서 제정하고자 추진하고 있습니다.이 법이 통과되면 관련 법규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과학기술혁신5개년계획(97∼2001)」을 수립·시행할 예정입니다.과학기술정책과 연구개발투자계획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추진을 위해 경제부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과학기술장관회의를 금년 3월부터 운영해오고 있습니다.앞으로 수립될 「과학기술혁신5개년계획」도 이 회의를 통해 실효성을 확보해나갈 것입니다.아울러 정부출연연구소와 관련,무엇보다도 연구개발의 효율성과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여 세계일류의 전문연구기관으로 육성해나갈 계획입니다. ­지난달 14일 대통령께서 발표하신 정보화선언은 시의적절하다고 봅니다.재임기간에 이 정보화선언을 좀더 구체화하고 또 차기정부까지 연속성을 갖게 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정보화는 국가경쟁력 강화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핵심적 국가전략이며,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기업·정부 등 모든 주체가 합심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이를 위해 나는 이미 내각에 세부적인 실천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토록 지시했으며,정보화추진 확대보고회의를 계속 주재하면서 직접 챙겨나갈 것입니다.특히 물류·교육·행정·국방 등 국민생활은 물론 기업활동과 밀접한 분야에서 정보화를 집중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정보화의 효과가 국민의 피부에 닿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아울러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법과 제도정비,정보화마인드확산 등 정보화기반조성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제 정보화는 어느 한 정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21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나가는 전환점에 서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시대적 과제입니다.
  • 서울신문 창간51돌 기념 김 대통령 특별회견:Ⅱ

    ◎옛 총독부건물 철거 민족정기 되살린 얼/차기 논의 시기상조… 적잘한 때 경선으로/부패척결 제도로는 한계… 의식개혁 중요/신문 지면 너무 많아… 서울신문 가로쓰기 돋보여 ­대통령의 공약사항인 문화예술분야 예산확보(총예산의 1%)를 포함해 국민문화예술발전기반의 확충에 관한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입니까. ○문화인프라 적극 확충 ▲문화예산을 선진국수준인 정부예산의 1%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삶의 질」향상을 위한 정책의지를 나타낸 것이며,정부는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97년도에도 문화예산의 증가율은 24%로서 교육개혁 등 다른 분야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러나 시급한 사회적 간접자본(SOC)확충,민생사업 등에 투자비중을 높이다 보니 1%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96년도 문화예산 3천5백8억원(정부예산대비 0.56%),97년도 문화예산안 4천2백50억원(정부예산 대비 0.59%),그러나 문화산업의 경쟁력이 국가경쟁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투자우선순위를 높여 빠른 시일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힘써나가겠습니다.또한 금년을 「문화복지시대」의 막을 여는 첫 해로 선포한 만큼 중앙과 지방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문화가 국민생활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각종 문화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해나가겠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개혁을 하셨는데 그에 대한 평가와 함께 추진할 개혁과제는 무엇이며 개혁의 마무리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우리가 목표로 하는 21세기 세계중심국가는 「변화와 개혁」 없이는 결코 건설할 수 없습니다.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경제발전도 불가능합니다.취임이후 줄기차게 추진해온 과감한 개혁조치의 결과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그동안 이 개혁작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동참해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변화와 개혁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정신이라는 공감대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깁니다.부정부패척결,군의 개혁,공직자 재산공개,금융실명제 실시,부동산실명제 도입,교육개혁 등 많은 개혁조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효과가 더욱 나타날 것입니다.앞으로 민생분야의 개혁에 역점을 둠으로써 온 국민이 개혁의 성과를 더욱 체감할 수 있도록 할 생각합니다. ○민생분야 개혁에 역점 ­최근 장관들이 비리문제와 관련,경질되는 일이 있었습니다.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우선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개혁을 주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을 보고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특히 청렴하고 헌신적인 대다수 공직자의 명예를 더럽힌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나는 취임이래 부정부패척결을 가장 중요한 개혁과제로 삼아 관련자에 대한 단호한 처벌과 함께 비리의 소지가 되는 제도를 고치는 등 줄기찬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무엇보다도 부패의 원천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어느 누구로부터 어떤 명분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 약속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으며 금융실명제,공직자재산공개,부동산실명제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한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부정부패의 구조가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부정부패의 역사는 인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나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하나의 관행처럼 이어져온 부정부패에 너무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도무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이처럼 고질화된 부정부패의 척결은 형벌이나 제도개선만으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온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국민의 의식개혁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과거에 비해 국민의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어 큰 다행입니다만 아직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부정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 국민의식,비리와 결탁하지 않는 공직자의 투철한 윤리의식이 확립되어야만 깨끗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공직자는 물질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기업인은 부정한 수익보다 떳떳한 이익을 추구하는 건전한 풍토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부를 택할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나야 하며 공직자는 사회봉사·국민봉사의 길로 혼신의 힘을 다해 나가야 합니다.부정부패하면 살아 남지 못한다,걸리면 감옥간다고 생각하면 부정을 저지르기 힘들 것입니다.어찌보면 제도보다 중요한 게 국민의식변화입니다. 부정부패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이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과거정권에서는 부정부패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우리 문민정부는 절대 감춰놓는 일이 없습니다.부정이 있으면 탁 터놓고 철저히 처벌합니다.부정부패가 우리 역사의 오래된 관행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고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봅니다.대통령이 결심하고 실천해나가면 결국 그렇게 간다고 봅니다. ○명예 중시하는 풍토를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라의 선진화를 이룰 수 없으며,경제발전의 진정한 혜택을 누릴수 없습니다.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부정과 비리를 우리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나는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비장한 각오로 부정부패의 뿌리를 뽑는 일에 끝까지 모든 힘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앞으로도 부정부패관련자는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호하게 법에 따라 처벌할 것입니다.아울러 불필요한 각종 규제를 지속적으로 개혁해나감으로써 부정부패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제도개선작업을 병행해나가겠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부정부패를 몰아내겠다는 역사적인 일이 시작된 만큼 기필코 성공을 거두어 깨끗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합시다.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한국의 장기적 국가전략을 체계적으로 연구,국가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길잡이를 제시할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과거 인류의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이렇듯 급변하는 세계속에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과 국가전략을 세우는 것은 정권의 향배와 관계없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할 과제입니다.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과업은 어느 특정기관이 전담해서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과 비전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과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정부는 그동안 사회 각계인사가 참여하는 각종 위원회,정부산하 연구기관을 통해 이러한 국가비전제시작업을 계속해왔습니다.앞으로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다 구체적인 국가전략을 꾸준히 마련해 나갈 것입니다. ­지방자치제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재정지원,자율권보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정비,정부와 광역자치단체간 명확한 업무영역구분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그와 관련한 정책구상이 있다면 밝혀주십시오. ○지방자치제 정착 성공 ▲지방자치 실시이후 지방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살아나고 대민봉사행정과 경영행정이 크게 신장되는 등 우리의 지방자치는 전체적으로 볼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되어가고 있습니다.정부는 우리의 지방자치가 조기에 정착될 수 있도록 중앙권한의 지방이양과 지방재정력확충 등에 힘써 지방자치단체 스스로의 역량을 제고해나가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나갈 것입니다.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규제·지침등을 완화하고,정부와 광역지방자치단체간 사무배분을 명확하게 하는 것 등 기능조정과 그에 걸맞는 재원배분체계를 빠른 시일내에 마련하고자 합니다.다만 현시점에서 진정한 지방자치의 발전은 국가발전의 큰 테두리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언제쯤 대권논의가 시작되는게 바람직한지요.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는 당헌·당규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당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안보와 경제문제 등 국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시점에서 차기대통령선거논의가 조기에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지금은 이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개인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 일인가를 통찰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내각제개헌이나 4년중임제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내 임기중에 개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고한 방침입니다.실제로 대통령직을 수행해보니 5년이라는 기간은 하기에 따라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긴 시간이라고 느껴집니다.더구나 국가의 근본규범인 헌법을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편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국가발전과 법적 안정성의 측면에서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건국이래 잦은 개헌으로 얼마나 많은 혼란과 국력낭비를 초래했던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 조선총독부건물이 거의 철거되었습니다.반대도 있었습니다만 많은 사람이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대통령께서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다고 생각됩니다만…. ○개헌주장은 국력낭비 ▲옛 조선총독부건물은 민족의 자존심을 짓누르는 상징이었습니다.이 건물이야말로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데도 큰 걸림돌이 되어왔습니다.이 건물을 철거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며,문민정부의 개혁조치 가운데 특히 기록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철거를 반대하던 사람도 철거후의 모습을 보고는 헐기를 잘했다고 생각을 바꾼 사람이 많아졌다고 듣고 있습니다.이 건물을 철거한 것이 민족정기를 되찾고 우리의 자긍심을 살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신문에 대한 충고를 해주신다면. ▲신문지면이 너무 많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독자가 그렇게 많은 양을 다 보지 못합니다.배달도 문제고 버리는 양도 엄청나다고 듣고 있습니다.최근 몇몇 신문이 가로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잘한 것 같으며 국민의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부정부패 끝까지 뿌리 뽑겠다”/김 대통령,서울신문 특별회견

    ◎제도개선 지속 추진… 국민의식 변해야 김영삼 대통령은 『앞으로 부정부패 관련자를 법에 따라 단호히 처벌하는 것과 함께 불필요한 각종 규제를 지속적으로 개혁해 나감으로써 부정부패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제도개선작업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오는 22일의 서울신문 창간 51주년에 즈음해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서울신문과 가진 특별회견에서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비장한 각오로 부정부패의 뿌리를 뽑는 일에 끝까지 모든 힘을 다 기울일 것』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국민의식개혁을 당부한뒤 『명예 대신 부를 택할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은 우리 민족 정기를 되찾고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필리핀 마닐라의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앞서 오는24일 열릴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클린턴 미국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북한이 먼저 무장공비침투에 대한 사과와재발방지 등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할 것과 4자회담에 응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게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북한 당국이 무장공비 침투와 무고한 우리 주민을 살상한데 대해 명시적으로 시인·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조치를 취할때 남북간에는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가 다시 조성될 것이며 남북경협도 재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앞으로 민생분야의 개혁에 역점을 둠으로써 온 국민이 개혁성과를 더욱 체감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라고 향후의 개혁방향을 제시했다. 김대통령은 「경쟁력 10%이상 높이기운동」과 관련,『금융기관의 경쟁을 촉진해 스스로 경영혁신을 하도록 함으로써 금리가 하향안정되도록 할 것』이라며 『공장용지와 관련한 각종 부담금을 줄이는 한편 계획입지에 대한 규제도 대폭 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내년 대통령선거에 따른 당내 정치일정과 관련,『신한국당 대통령후보는 당헌·당규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당원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말하고 『안보와경제문제 등 국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시점에서 차기대통령선거 논의가 조기에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 경복궁이 보인다(사설)

    가슴이 확 트인다.맑은 가을 하늘에 우뚝 선 북악의 이마가 더욱 빛난다.조선조의 정궁 경복궁 한복판에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짓밟으며 들어섰던 옛 조선총독부건물이 없어지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13일 하오 근정전을 가리고 있던 회의실 뒷벽이 해체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사라졌다.지난 95년 광복 50주년 기념식때 상부 첨탑이 제거되면서 시작된 총독부건물 철거작업이 마무리단계에 들어선 것이다.해체된 건물의 잔해인 시멘트더미 등이 올 연말까지 치워지면 우리 민족을 억눌렀던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 총독부건물은 70년만에 이 지상에서 없어진다. 일제침략의 상징이자 식민통치 36년의 산실이었던 총독부건물의 철거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운다는 의미를 지닌다.또한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93년 국민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몇십년간 논란의 대상이 돼오던 총독부건물을 완전철거한다는 결단을 내린 것은 바로 그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철거작업과 함께 『치욕의 역사도 역사로서 보존해야 한다』는 철거반대여론이 일부에서 거세게 제기되기도 했지만 총독부건물이 없어진 지금 『역시 철거하길 잘했다』는 감회를 우리는 느낀다.철거하기 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던 오랜 체증이 뚫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의식과 문화속에 배어든 일제잔재를 깨끗이 청산해 진정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다.오는 2009년 광화문의 제위치 찾기로 마무리될 경복궁 복원작업도 차질없이 진행해 북한산에서 근정전과 광화문을 지나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축을 완전히 되살릴 때가 기다려진다.
  • 새달 11일 홍콩행정장관 선출/친중 동건화에 친영 양철량 도전

    ◎중 추선위 일정 확정/선거인단 4백명 확정… 친중국계 일색/홍콩 첫 대의방식 행정수반 선출에 의미 내년 7월1일 출범할 홍콩 특별행정구(SAR)의 최고지도자인 행정장관 선거인단 및 선출일정이 확정됐다. 2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폐막된 SAR 주비위원회(위원장 전기침 부총리겸 외교부장) 6차회의는 선거인단(제1기 홍콩정부 추선위원회·SC)400명을 확정하고 오는 12월11일 첫 행정장관 선출을 결정했다.또 기존의 홍콩 의회를 해산하는 대신 SC에서 12월21일 이를 대치할 임시 입법회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중국정부의 홍콩주권 접수를 위한 홍콩지역의 최고책임자 선출이 몇달 지연됐지만 사실상 중국의 의도대로 마무리됐다.선거단의 대다수가 친중국 색채의 인사들로 구성됐다는 것이다.또 행정장관 및 국회의원선거가 올해내 모두 끝남에 따라 97년부터는 중국의 홍콩내 영국총독 정부의 권력 인수작업이 본격화되고 기존 크리스 패턴 총독 정부의 권력누수현상도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확정된 선거인단 400명 가운데 340명은 홍콩의 공·상업계및 금융계의 실업인 100명,노동·종교 등에서 100명,전문직 종사자 100명,전직 정치인 40명 등으로 구성됐고 나머지 60명은 홍콩지역 중국 정치협상회의 위원 및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으로 구성됐다. 이같은 선거인단 선출은 「제한된 범위내에서의 선거」 「부자 클럽모임」 「친중국 인사들로 구성된 잔치」라는 홍콩내 일부 비판에도 불구,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 행정수반을 임명이 아닌 대의방법으로 뽑는다는 의미를 지닌다.12월 행정장관이 선출되면 행정장관 선출자는 곧 내년7월 출범될 특구 정부의 각 행정부문 고위관리들을 임명,그림자내각(섀도 캐비닛)의 구성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정권 인수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현재 행정장관 경선은 홍콩의 해운왕으로 불리는 실업가 동건화와 지난주 행정장관 출마를 위해 홍콩의 대법원장격인 수석 대법관직을 사임한 양철양의 2파전으로 압축되고 있다.동은 현재 동방해외국제 그룹의 회장이며 중국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특구주비위 부의장,정협의원,중국정부의 홍콩사무고문 등의 감투를 마다하지 않으며 중국정부를 도와왔다.이에비해 양철양은 런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친영국성향의 인사로 알려져 있다.한편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오는 12월12일 홍콩 특별행정구 주비위원회 전체회의를 심천에서 개최한다면서 「일국양제」 및 「홍콩에 대한 고도자치」를 다시한번 강조했다.행정장관을 선출한뒤 영국정부와의 정권인수와 관련된 현안문제를 협의해 나가겠다는 것이다.중국의 홍콩인수를 앞두고 정치자유화 폭을 넓히고 각종 예산사업을 벌여 마찰을 일으켜오던 영국정부가 이같은 결정에 어떤식으로 협조할지 정권인수 초읽기에 접근하면서 관심이 모이고 있다.
  • 옛 총독부 건축기록 발견/공사개요 등 담은 아연상자 공개

    ◎심하계 훼손된 종이도 나와… 당시 신문인듯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한뒤 이 건물 밑에 조선총독부의 공사개요와 참여자명단을 담아 묻어두었던 아연상자가 76년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이 건물 앞면 오른쪽 모서리 하단부 화강암 정초석 밑에서 가로 19.8㎝,세로 14.6㎝,높이 2㎝크기의 아연상자를 발견,1일 공개했다. 이에 따라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완공한뒤 준공보고서격으로 남긴 「조선총독부 청사 신영지」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됐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세부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 아연상자는 표면이 약간 부식돼 붉은 색을 띠었으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고 그 안에서 상자크기의 은판 1개와 심하게 훼손된 종이부스러기가 수습됐다. 신영지는 『대정 9년(1920)7월10일 상오9시 총독부 건물의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정초식을 열고 조선총독,정무총감,토목부장,영선과장,토목부 경복궁 출장소장의 관직과 성명이 새겨진 은판 1개,청사 신축설계 및 공사개요서 1책과 당일 발행신문 1부를 아연으로 만든 용기에 수장해 정초석 밑에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상자 발견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한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그러나 상자의 크기가 작아 신영지의 기록대로 공사개요서 1책과 신문 1장이 모두 담겨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보존처리와 정밀조사를 통해 은판에 새겨진 글자와 종이부스러기의 내용을 정확히 판독할 것이라고 밝혔다.
  • “한글을 국보1호로”/“종교·이념 배제한 살아 숨쉬는 문화재”

    ◎재지정 검토관련 PC통신에 지지 쇄도 문화체육부가 국보 1호를 재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과 관련,최근 PC통신에는 「세계 유일의 글자창제 원본」인 훈민정음 원본을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이텔의 조중훈씨(META)는 「국보 1호를 바꿉시다」라는 제목의 게시문을 통해 『일제에 의해 지정되고,이름 또한 숭례문에서 남대문으로 비하된 현 국보 1호는 납득할 수 없다』며 『총독부 건물까지 철거하는 마당에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재의 국보 1호를 바꾸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남대문에 대해 토론자들은 『일제 침략 시기에 남쪽(일본)을 향한 문을 국보로 지정한 것은 식민지배를 강화하려는 숨은 의도』(PSALM96),『현재 남대문은 단지 교통지명으로만 가치가 있을 뿐』(junjeik)이라고 깎아내렸다. 김용호씨(Zata999A)는 『한글은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종교 및 지역,이념 색채가 없는 거의 유일한 문화유산』이라며 『더욱이 한글은 단순한 보존대상이 아니라 가꾸고 지켜나가야 할 살아 숨쉬는 문화재』라고 강조했다.〈김태균 기자〉
  • 일본 영사관 한때 점거/홍콩인들 조어도 항의

    【홍콩 AFP 연합】 홍콩인 20여명이 9일 일본이 조어도를 통제하고 있는데 항의하며 홍콩주재 일본영사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고 AFP통신 특파원이 말했다. 이 특파원은 시위대가 영사관 건물에 들어가 현수막으로 영사관 팻말을 덮은 뒤복도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날 점거농성은 크리스 패튼 총독이 홍콩 주민들에게 일본인 거주자들에 대한 자제를 호소한 지 하룻만에 발생한 것이다.
  • 발굴이야기/조유전 지음(화제의 책)

    ◎1945년 이후 한국 고고학의 역사 1945년 이후 한국 고고학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쉽게 풀어쓴 책.우리나라에 고고학이란 학문이 도입된 것은 1세기에 가깝다.하지만 그 주체는 우리가 아닌 일제였다.한국을 고고학이란 학문의 실험장으로 삼은 일제는 대규모 발굴작업의 명목아래 우리 문화유산을 마구 파헤쳤다.이 책은 바로 이같은 일제의 반문화적 행위를 지적하는데서 출발,우리의 손으로 유적과 유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광복 이후에 서술의 초점을 맞춘다. 광복과 함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국립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시작된 한국 고고학 발굴사의 첫 과실은 지난 46년 경주 신라 호우총이다.또 70년대 무령왕릉과 천마총,성산패총,황룡사터 발굴을 거쳐 80년대 초에 이뤄진 전곡 구석기유적 발굴도 주목할만한 성과다.〈김종면 기자〉
  • 홍콩행정장관 12월 선출/추선위원은 11월초 확정

    【홍콩 연합】 내년 7월 홍콩의 주권반환 이후 정식발족하는 홍콩특별행정구의 총독격인 초대 행정장관과 임시 입법회의 의원을 선출·지명하는 4백인 추선위원회 위원이 오는 11월 1∼2일쯤 확정되고 행정장관은 12월 중순쯤 지명될 예정인 것으로 6일 밝혀졌다.
  • 조선족 이주 역사(송화강 5천리:2)

    ◎30년대 일제이민정책에 1만가구 정착/“주택·식량 제공” 감언이설에 속아 집단이주/「만척」서 안전촌 건립… 항일 세력과 연결 차단/부여국­고구려­발해 고대사 무대… 아직도 조선지명 남아 송화강의 큰 원류는 두 갈래가 있다.이도송화강인 이도백하 말고 두도송화강이 그 원류다.두도송화강은 이도송화강을 이도백하라 하는 것처럼 그냥 두도강이라고도 한다.그런데 두도강은 본래 두갈래 물줄기가 합수하여 강을 이루었다.두도강의 한 갈래는 만주어로 어허러인(액혁낙인)이고,다른 한 갈래는 역시 만주어로 사인러인(새인낙인)이라는 이름를 가지고 있다. 어허러인은 백두산 옥설봉에 쌓인 만년설의 눈이 녹아 험준한 바위산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그래서 낙차 57m나 되는 큰 폭포에서 작은 폭포에 이르기까지 폭포군을 이루었다.물이 급하게 흐를 수밖에 없다.일명 긴강이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이에 비해 사인러인은 완만하다는 뜻을 가졌거니와 강의 흐름도 온화했다.일명 만강이라 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부여족 유적 대량 발굴 이들 두 물줄기는 화라자에서 합수했다.바로 두도강인 것이다.두도강은 2백30㎞를 달려서 길림성 화전시 백산진 양강구에서 이도백하를 만나 드디어 합류,장강다운 송화강 물길을 잡아나갔다.송화강유역은 비옥할 뿐 아니라 광활했다.이 풍요로운 땅에 세운 맨 처음의 읍락국가는 해모수를 우두머리로 한 부여국이었다.「자치통감」기록에 나오는 첫 도읍지 녹산지도는 그 어디인가. 오늘날 길림시에는 동단산성과 동단산 평지성,용담산성이 있다.근래 동단산 부근에서는 대량의 부여족의 문물(문화재)이 발굴되었다.금 은 동 철제유물과 도자기 옥석 칠기 등의 유물만 해도 8천여점에 이른다. 또 1978년 동단산 서쪽 서단산 무덤군 돌널무덤에서는 무덤주인공의 머리를 감싼 모직물이 나왔다.양털과 개털을 꼬아 실을 자아내고 이를 천으로 짠 것이다.간단한 직조기를 사용하여 짠 이 모직물은 부여족의 문화가 상당 수준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동단산 일대는 광개토대왕 시기에도 고구려 판도였다.오늘날 길림시내에 남아있는 고구려산성은 용담산성이다.용담산은 산 자체가함지박처럼 중간이 낮고,사방은 높은 산등성이에 둘러싸인 산세를 했다.성은 산세를 이용하여 황토와 자갈로 쌓았다.높낮이는 일정치 않았다.성 서북쪽에 있는 길이 53m,너비 26m에는 용담이라는 못이 있다.이 연못은 1만㎥의 물을 가둘 수 있는 인공 못이라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견해다. 용담산성 망루자리에 올라서면 성 아래로 도도히 흘러가는 송화강과 강 양안에 우뚝우뚝 솟은 길림시의 고층건물들이 한 눈에 조망되었다.망루에 올라 문득 역사를 거슬러 뒷걸음질하고 있을때 피맺힌 비명이 들리는 착각에 사로잡혔다.서기 668년 2월 당나라 장군 설인귀의 공격을 받고 울부짖는 고구려군사들의 비명이….고구려는 용담산성에서 패하고 다시 군사 5만을 모아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이후 한 때는 발해가 용담산성의 주인이 되었다.그러나 역사는 변화하는 것이어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그 역사의 체취가 배인 송화강유역으로 조선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압록강유역이나 두만강유역에 비해 훨씬 뒤의 일이다.1922년 「동북3성실황」은 이를 뒷받침했다.당시 두만강유역 화룡,연길,왕청 3개현의 조선족은 44만4천4백20명,송화강유역인 안도,돈화,길림,장춘은 4만5천6백명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리고 흑룡강성에는 고작 6백61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송화강유역의 조선족 이주민 유형은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두만강과 압류강 이주민들의 재이주,러시아 이주민들의 유입,일제 이민정책에 의한 집단이주 등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절대적인 비중은 일제 이민정책과 맞물린 한반도로 부터의 조선인 집단이주가 차지했다.일제는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세력을 소멸하고 동북에다 중국내지와 동남아를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를 만들 목적으로 이민정책을 서둘러 폈다. ○동남아 침략 병참기지화 그들이 1936년 8월 입안한 이민정책에는 2년내에 일본인 1백만가구 5백만명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이와함께 일본은 1만가구의 조선인 농민들을 동북지방 23개현으로 집단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1937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일본 이주민들도 적지 않게 들어왔으나 큰 성과는거두지 못했다.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은 일망무제한 북지대륙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가기만 하면 집과 먹을 것을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이다.그래서 조선농민들은 이주증을 받기가 무섭게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등졌던 것이다. 그 당시 집단이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길림성에 살고있다.장춘시의 정병남(71)노인도 그런 이주민의 한 분이다.전남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 태생인데,당시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우리는 1937년 2월에 길림성 유하현에 도착했습니다.함평군 함평면,대동면,광주 송영리에서 각각 열다섯 가구씩 마흔다섯 가구가 집단이주를 한 것이지요.눈보라가 치는 한겨울에 다시차란 데에 떨어지니 집은 커녕 먹을 식량도 없었어요.언땅에 막을 칠 수밖에….만주척식회사(만척)에서 뜬 수수와 좁쌀을 주어 그나마 배불리 먹었습니다.그냥 준 것이 아니라 변리곡이었지요.일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가을에 갚고나면 식량이 없어요.또 만척에서 변리곡을 다시 먹어야 했습니다.빚은해마다 늘고….광복이 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노예로 살았을 겁니다』 유하현 삼원포는 조선독립운동 진원지의 하나였다.1911년에 경학사가 서고 나서 신흥무관학교,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다.그런데 일제의 수탈기관 만척은 이 일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안전촌을 만들었다.경찰을 주둔시키고 무장자위단을 조직했다.마을마다 소총 열자루와 권총 한자루씩을 내주었다.그리고 양민증이 없으면 마을을 드나들지 못했다.항일세력들과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양민증 없이 출입못해 집단이주민 무장화 과정에 나타난 유명한 무장자위단은 1944년에 조직한 풍향의용개척단이다.조선에서 보통학교 고등과를 나온 청년 90명을 모집,유하현 대통구촌 신가가에 이주시켰다.이들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한 군사·농업조직이었다.단장을 비롯,군사교관·청치교원 등의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 맡았다.조선인 단원 20명은 뒷날 관동군에 편입되었다.일인 간부와 조선인 단원들은 휴가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식솔들까지 데려와 살았다. 오늘날 송화강유역에는집단이주민마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조선족이 있든 없든 간에 한반도 군명에서 따다 만든 마을 이름들이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유하현에서는 아직도 창성,벽동,가평이라는 이름이 보였다.또 안도현에는 금화,원주,고성,장수,정읍,김제,익산마을이 있다.이밖에 두군의 이름을 딴 청흥(북청·신흥),안산(진안·익산)이 있는가 하면 조선의 양양이라 한 조양마을이 존재했다.이들 마을 이름에서 집단 이주민들의 진한 노스탤지어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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