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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재·백범 그리고 안기부(金三雄 칼럼)

    “이성(理性) 말고는 어떠한 주인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인의 세계에만 태양이 빛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폭군과 노예,성직자들과 그들의 우둔하고 위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교의 신자들은 역사 속이나 무대 위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수학자이며 계몽사상가,그리고 혁명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인간정신진보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콩도르세가 처형되고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체적으로 인류사는 이성과 진보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프랑스혁명이 반혁명과 나폴레옹 독재의 반동기를 겪었듯이 인류는 몽매와 압제에 시달려왔다. 우리 역시 이성과 진보의 과정보다 몽매와 압제의 기나긴 터널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중세의 어둠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횃불이 근세의 여명을 열었듯이 우리도 광주항쟁,6월항쟁,그리고 새정권의 출범과 함께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변화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변화의 가닥에는 안기부도 포함된다.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태어난 안기부(중앙정보부)가 새로운 역할,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비록 ‘국가정보원’으로 개명을 해놓고도 국회파행으로 개명신고조차 하지 못한 과정에서 추구하는 변화이지만 과거 어두웠던 시절 원부(怨府)의 이미지를 씻고 새롭게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은 값지다. 안기부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던 조형물을 철거하고 내곡동 청사 진입로에 시야를 널리 해외로 돌리자는 뜻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원형의 크기대로 세워 8·15광복절에 제막식을 갖는다고 한다. 안기부의 변화는 조형물의 교체만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백범 김구 선생의 존영을 이종찬 부장 집무실에 걸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상징성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 흔히 안기부의 연원을 일제시대 고등계경찰이나 건국 직후 악명을 떨친 육군특무대를 연상하는 잘못을 씻고,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단재의 의혈단이나 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재의‘조선혁명선언’으로 잘 알려진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다. 창단 직후‘공약 10조’와 뒤에‘5파괴’‘7가살(可殺)’이란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했다. ①천하의 정의의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등 10개조와,파괴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식민지 통치기관을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1926년 12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지도부는 중국인의 악감(惡感)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기 위해 일제에 대한 파괴와 암살을 계획했다. 한인애국단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되고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의거,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등이 감행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망국기 국권회복원동의 첨병이었다면 제2국난기로 불리는 오늘 안기부는 그 정신을 이어서‘정보는 국력이다’란 부훈에 걸맞는,21세기 정보화시대를 뒷받침하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재·백범 정신으로 건국 반세기동안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해 단재와 백범정신이 굴절되었다. 이 분들의 애국사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안기부가 구태를 벗고 이들의 애국정신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아무리 외양이 바뀌고 구호가 요란해도 본질이 바뀌지 않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으라운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 바란다”(백범일지) 기왕에 백범과 단재의 정신을 안기부의 정신으로 받들기로 했다니 과거의 ‘좁으라운’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분발할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를 열어가자.
  • LG상남재단 ‘일제시대 압수기시모음’ 펴내

    ◎민족언론 항일기사 ‘햇빛’/일어로 된 비밀자료 토대 원문 발굴/1년 작업 통해 1,061건 기사 수록/보도기사·논설·만화·시가 등 망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된 민족언론의 항일기사가 햇빛을 보게 됐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전 2권,정진석 엮음)을 발간했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은 당시 발간된 3개 민족지(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압수기사 원문을 발굴해 정리·해설한 것이다. 1920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6년까지 압수된 보도기사를 비롯,논설 및 해설,만화,시가(時歌),기명기사 등이 실렸다. 이들 압수기사에는 6·10만세운동,광주학생 운동,폭탄과 권총으로 일제를 응징했던 김상옥과 라석주 의거 보도 등 민족언론의 진수가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언론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의 언론과 세상’‘조선 출판경찰개요’등 일본어로 된 비밀자료를 토대로 원문을 찾아냈으며,원문이 소실된 기사의 경우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총 1억원을 들여 1년의 작업 끝에 발간된 이 모음집에는 1,061건의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일제가 우리 신문에 삭제처분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1920년 민간지가 허가된 뒤에도 인쇄된 신문을 먼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납본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중에도 도서과의 지시가 있으면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잡지는 원고의 사전검열,조판된 잡지의 대장검열,납본검열 등 3중 통제를 받았지만 신문은 사전검열을 생략하는 대신 ‘납본검열’을 시행했던 것이다. 편저자인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언론사)는 “일제치하의 항일언론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것이었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을 지키려는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한말 이래의 전통인 저항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3773­2161
  • 역사기록도 ‘한밭’ 대이동/정부기록보존소 28일 大田청사로 이전

    ◎국보 조선왕조실록 등 호송 군작전 방불 대한민국 역사(歷史)기록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각종 정부기록과 행정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정부기록보존소가 오는 28∼30일 대전 제3정부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창고 안에 보관돼 있던 ‘역사’들도 함께 대전으로 옮겨간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제 총독부 자료에서 최근의 행정문서·판결문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것들이어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송이 전개된다.정부 행정문서,고(古)문서,해외문서,행정박물(博物) 등 물량만도 231t.광(光)파일 등 전산자료가 수록돼 있는 주전산기는 파손에 대비해 1억원짜리 보험에도 가입돼 있다. 이전되는 기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지소로부터 옮겨지는 조선왕조실록 태백산(太白山)본 848책.국보 151­2호인 실록은 방충,방습을 위해 290개 오동나무 상자에 나뉘어 담긴 뒤 다시 두께 1㎝ 짜리 특수 종이상자에 넣어진다.삼엄한 경찰 경비 아래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가 된 특수 차량에 실린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다시 제작,전국 5개 사고(史庫)에 분산보관했던 것 가운데 하나다.남한에는 서울대 규장각의 강화도 정족산사고본과 함께 두질만 남아있다. 일제 조선총독부 문서도 귀중한 자료.모두 2만6,000권으로 식민통치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다.柳寬順 등 3.1운동 관련자 재판 판결문,산미증식계획 관련 서류,토지조사 사업 지적원도 등은 모두 근·현대사를 되짚는데 필수적인 사료(史料)들.동학의병장 全琫準의 처형 기록,갑오개혁과 대한제국 때의 관청 문서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문서가 각각 2,000장씩 담긴 해외문서 마이크로필름도 2,000롤이나 된다. 행정기관이 쓰던 각종 도구들도 모두 옮겨진다.정부수립 이후 계속 쓰이다 지난해 7월 낡아서 퇴역한 국새(國璽)보관함,88올림픽 성화봉,경제기획원·재무부·국토통일원·전매청·공업진흥청 등 없어진 부처의 관인,각종 메달,기념품 등 350점이다. 광복 이후 최근까지의 법원 판결문도 이전한다. 金才淳 학예연구관(37)은 “한번 훼손되거나 잃어버리면 영원히 되살릴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자료들이어서 전 직원이 비상근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 세종로에 가면 ‘대한민국 50년’을 만난다/거리사진전 개막

    “대한민국 50년사를 사진으로 보세요”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50년 거리 사진전’이 17일부터 8월 15일까지 30일동안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옆 세종로 공원 입구에서 열린다. 입장료는 무료다. 이 곳에는 지난 50년간의 정부 공식행사,생활상,발전상,사건 사고 사진 등 500여점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사진은 칼라와 흑백이 골고루 섞여 있으며 비가 올 경우에 대비해 방수처리가 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의 항복문서 조인 장면,최초의 국산승용차 택시,제2공화국의 시읍 면장 선거,청계천 피복노동자 全泰壹 분신자살,한일회담 반대시위,金大中 대통령 피납사건,광주민주화 항쟁,백담사의 全斗煥 전 대통령,林秀卿의 방북,黃永祚 마라톤 우승,金日成 사망,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사진 등이 있다. 또 세계 골프여왕 朴세리에 관한 컬러사진도 전시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 추진기획단의 崔彰容씨는 “역사공부를 겸한 알뜰 데이트 코스로 만들었다”면서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 국가기록물 정리·전산화/공공근로사업 새달 실시

    정부기록보존소는 오는 28일 정부 대전청사로 이전하며 벌이는 국가기록물정리와 전산화작업을 2만여명의 고학력 실업자를 투입하는 공공근로사업으로 추진키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8월부터 연말까지 대전본소와 부산지소 등 2곳에서 실시하는 이 작업의 내용은 △목록 입력 △평가·분류 △자료 스캐닝 △지적원도 정리 △총독부 문서 정리 △행형기록 정리 △소장기록물 정리 등 7개 분야이다. 참가자격은 한자 해독과 전산입력 능력이 있는 대졸자나 사무직 경력자이며 대전·부산을 비롯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 거주자면 된다. 대전·부산시청 및 각 구청에서 신청서를 배포한다. 서울 (02)720­4415,2079 부산 (051)503­6962∼4
  • “1국가 2체제 준수”/江澤民 홍콩 회귀 1돌 연설

    【홍콩 연합】 홍콩특별행정구(SAR)는 1일 주권회귀 1주년을 맞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했다. 장 주석은 이날 홍콩의 홍함 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일국 양제’(1국가 2체제)와 ‘항인항치’(港人治港,홍콩인에 의한 홍콩 자치) 원칙의 지속적인 준수를 다짐했다. 기념식에는 작년의 주권회귀식 때와는 달리 홍콩 주재 각국 외교사절들만 초청됐을 뿐 크리스 패턴 전 총독 등 영국의 고위인사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 도시계획 다시 정비하라(사설)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되고 60년 가까이 집행되지 않은 사유지도 있다는 서울신문 18일자(19면)보도는 충격을 넘어 분노마저 일게 한다.조선총독부 시절인 1940년 공원부지로 지정된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9,000여평 땅 주인 K씨는 체육시설이라도 만들어 활용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매년 300만원에 이르는 종합토지세를 꼬박꼬박 물어야 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행정 당국이 시민에게 이토록 엄청난 재산상 피해를 주고도 이에 관한 구체적인 관련 공문서들이 없다는 점이다.최근에야 10년 주기로 공문서를 없애도록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주기가 5년이어서 어떤 계획으로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됐는지 등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지금의 행정기관은 예산부족 타령만 할 뿐 보상이나 도시계획구역 해제 등 구체적인 문제해결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실정이다. 전국적으로 도시계획구역으로 묶인 땅은 모두 2,841㎢나 되며 이 가운데 미집행 면적은 46%인 1,302㎢에 이른다.이 가운데 10년 이상된 땅이 27%,20년 이상 24%이며 30년 이상된 곳도 7.2%나 된다고 한다.이 땅을 모두 보상해주고 계획대로 공원이나 도로,유원지 등을 만들 경우 드는 예산은 무려 258조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다.서울시만 하더라도 장기 미집행 사유지가 61㎢나 되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소요되는 예산은 모두 17조원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예산반영은 제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지난 40년대 그린벨트를 세계 최초로 설정한 런던시가 장기간에 걸쳐 해당지역 토지 소유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준 뒤 집행한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공익을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처럼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방치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개인의 재산권을 명백하게 침해하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도시계획구역으로 일단 지정되면 계획대로 집행되지 않더라도 몇십년동안 그대로 묶여있는 동안 겪어야하는 서민들의 고통은 아랑곳 없다는 태도다.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된 뒤 20년이 지나면목적 타당성이 없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그렇다면 이런 땅은 주인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제해야 마땅하다.5년마다 시설의 필요성을 재검토하도록 한 개정 도식계획법이 국회에 넘어간 뒤 낮잠만 자고 있는 사실도 한심하다.국민을 위하는 행정과 정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
  • 도시계획구역 24% 20년째 ‘낮잠’

    ◎재산권 행사 못하고 綜土稅만 꼬박꼬박/60년전 총독부 도시계획도 아직 그대로/지자체들 “재원없다” 사업집행 차일피일 “60여년 전 일제 때의 도시계획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 ○○번지 땅 9,000여평은 1940년 조선총독부가 공원지부로 고시한 곳이다.하지만 5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원은 조성되지 않은 채 공원 예정지로만 남아 있다. K씨(43) 등 땅 주인들은 이 곳에 체육시설이라도 만들어 땅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도시계획 구역으로 지정돼 그 것마저도 할 수 없는 처지다.그럼에도 해마다 종합토지세 300만원을 꼬박꼬박 물고 있다. 재산권 행사는 고사하고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이 대단하다.현행도시계획법에는 재산권 제한에 대한 적절한 보상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서울시에 진정서도 내봤다.하지만 ‘아직 사업을 집행할 계획도,공원 부지를 해제할 계획도 없다’는 한장짜리 통지서만 받았다. 행정소송은 일찌감치 포기했다.도시계획시설의 집행 여부는 권한소송의 대상이 아닌 행정기관의 재량사항으로 법원에 가봤자 각하되기 때문이다. K씨는 “세금만이라도 안냈으면 좋겠는데 방도가 없다”고 한숨지었다. 수십년 동안이나 도시계획구역에 묶여 재산권을 침해 당하는 땅은 너무나 많다. 12일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현재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됐는데도 사업이 집행되지 않은 땅은 전체 도시계획 결정면적의 46%에 이른다.이 가운데 20년 이상된 것이 24%나 된다.30년 이상 된 것도 7.2%나 된다.K씨의 땅처럼 조선총독부의 도시계획에 묶인 땅도 많이 남아 있다. 모 학교법인 소유의 서울 동작구 사당동 땅 5,000여평도 지난 62년 건설부고시 187호로 공원부지로 결정됐지만 사업은 집행되지 않았다.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되면 집행을 맡는 지방자치단체가 ‘실시 계획 인가(認可)’를 낸 뒤 땅 값을 보상해주는 것이 순서다.하지만 지자체들은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집행을 계속 미루고 있다.도시계획시설 부지를 모두 집행하려면 257조원이 필요하고 앞으로도 100년 이상 걸린다는 막연한 대답만 하고 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崔昌行 위원(38·행정학 박사)은 “공익을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할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20년을 넘었다면 ‘공익을 위한 사회적 제약’을 넘어서 ‘헌법상 사유재산권 침해’에 해당한다”면서 “일정기간마다 시설의 필요성을 검토하는 방안이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시계획법이 서민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고 일부 계층에게는 관대해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서울 종로구의 안국·적선·삼청·가회·원서동 등은 지난 84년 한옥보존지구로 결정되면서 주민들은 간단한 집 수리를 빼고 어떠한 건축행위도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91년 이후 관련 규정이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지금도 심의위원회를 거쳐야 증·개축을 할 수 있다. 반면 서울 도심의 K,P호텔 등은 70년대에 건축될 당시 현관이 시유지 도로를 점거했는데도 준공 허가가 났으며 지금까지도 도로점령료만 내고 계속 사용하고 있다.
  • 나운규 아리랑/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한국영화의 신화로 남아있는 ‘아리랑’은 1926년 4월말 지금의 고려대 근방인 안암골에서 처음 크랭크인했다. 당시 안암골은 기와집 한채와 초가집 10여채만이 있는 첩첩산중이었다고 기록된다. 촬영기간은 4개월, 제작비는 1천200원, 필름 길이는 9천 피트로 조선총독부 완공과 함께 같은해 10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 광고용으로 사진엽서가 제작되었고 김치담그기다듬이질 널뛰기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사진을 배경으로 ‘아리랑 타령’ 한글가사에 일본어로 토를 단것이 눈에 띤다. 일제하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첨단적인 몽타주기법을 사용한 것등은 영화미학상으로 높이 평가된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羅雲奎가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3·1만세사건과 연루된 한 대학생이 고향에 내려와있다가 여동생을 겁탈하려던 일본순사의 앞잡이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두손이 묶인채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러나 영화에 담긴 뜻은 동생과 동생을 구하려던 대학생은 ‘조국’의 상징이며 일제 앞잡이는‘일제 강점(强占)’으로 표현되어 억압됐던 민족감정을 일시에 유발시킨 저항영화로 유명하다. 그 ‘아리랑’필름이 일본에 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돌아올지도 모른다. 항일(抗日)로 일관된 영화내용때문에 필름이 강제수거, 폐기되는 바람에 우리에겐 없는 것을 일본인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93년에도 소장자인 아베 요시시게(安部善重)씨는 나운규의 아들인 나봉한감독을 통해 필름을 반환하겠다고 해서 영화계를 들뜨게 한적이 있다. 이번에도 金大中 대통령 방일(訪日)때 ‘필름의 정식반환을 요청하면 돌려줄 의사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반환의 논의가 어떻게해서 중단됐는지는 알수 없으나 일제하의 민족증언을 스크린에 담아냈다는 점에서도‘아리랑’은 우리에게 소중한 영상자료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놓일자리에 놓여야 빛나고 쓰일자리에 쓰여야만 가치가 살아나는 법이다. 어두운 창고안에서는 한낱 낡은 필름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 예술자료가 예술적 사료(史料)로서 빛날수 있도록 순수한 협조를 기대하는 바이다.
  • 건국이후 인구변화(대한민국 50년:19)

    ◎49년 첫조사 20,188,641명… 96년엔 갑절로/55년 간이조사 전에는 추계… 정확성 의문/6·25전쟁기간 150만명 희생… 사망률 4%/60년대부터 공업·도시화 영향 대규모 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49년 5월1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인구조사’였다.이 때 인구는 2천18만8천641명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인 50년과 51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발표가 남아있다.50년 2천35만6천명,51년 2천44만1천명이었다.그런데 이 인구조사 발표는 실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49년의 조사를 토대로 각도 도지사의 보고에 의한 추계였다. 52년과 53년에는 내무부의 추계가 남아있다.52년 2천52만6천명과 53년 2천1백54만6천248명이었다.53년의 인구가 전년도보다 1백만명 이상 급증한 것은 배급을 늘리기 위한 유령인구 때문으로 추측된다.54년 보건사회부의 인구통계는 2천1백91만3천명이었지만 이도 실제조사가 아니라 전년도에 기준한 추계이다.결국 정부가 발표한 50년부터 54년 사이의 인구 수는 정확하지 못하다. 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상주인구가 2천20만2천256명이었다.이는 현역 군인과 형무소 수형자 등을 뺀 숫자이다.한국전쟁 시기의 인구 증가율은 1.1%였다.그러나 한국전쟁후 베이비 붐이 일어 55년 이후 66년까지 인구 증가율은 2.8%를 기록했다.그러다가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된 66년부터 85년까지는 1.7%로 떨어졌다. ○증가율 2.8% ‘베이비 붐’ 정부 수립후 인구의 변동은 경제문제와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1인당 국민소득은 44.5달러에 불과했다.따라서 국민총생산의 5분의 1에 달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액 1억7천9백59만3천달러는 기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부족했다.한국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인구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생산시설은 ‘저고용­저소득­저고용’의 악순환 고리를 이어갔다.폭발적인 인구문제의 해결은 60년대 경제개발을 통한 지속적 성장 밖에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인적 피해로 인한 가장 직접적이고 충격적 결과는 무엇보다도 특이한 인구구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우선 한국전쟁은 일시적 사망률의 상승과 출생률의 저하를 초래했다.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 중 사망자는 약 1백만∼1백5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한 인구의 사망률은 1천명당 36∼47명,즉 4% 안팎으로서 평소 한국인의 사망률인 평균 2%의 2배나 됐다.이같은 현상은 60년과 66년의 인구 센서스에서 각각 30∼49세 및 35∼49세의 연령층에서 과부가 많은 것으로 조사된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반면 전쟁기간 동안의 0∼9세의 영아 및 아동의 사망자 가운데는 남아보다 여아가 더 많았다.이것은 새로 태어난 신생아들과 아이들의 경우 전통적 남아 선호사상으로 인해 남아를 되도록 보살핀 때문으로 사회학자들은 보고 있다. ○45만∼72만명 월남 추정 전쟁기간 중의 출생률은 극도로 저하돼 같은 기간의 높은 사망률과 더불어 인구의 절대 감소현상을 초래했다.이때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 1%나 낮아졌으나 인구 증가율이 당시에는 1년에 1천명당 23명으로 늘어났었던 데 비해 전쟁기간 중이었던 49∼55년 사이에는 연평균 1천명당 11명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동의 또다른 충격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현상이다.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월남인구의 추정치는 45만∼72만명에 이르고 있다.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납치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넘어간 이들의 수도 대략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인데 60년대 이후의 인구이동은 물론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화의 결과였다. 61년 이후 인구 분포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서울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에는 전인구의 7.1%를 차지했고 11개 시·도 중 인구 수로 따져 9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75년에는 이미 전인구의 20%에 해당하는 6백90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또 오늘날에는 전인구의 22%가 넘는 1천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 ○86년 도시인구가 65% 그러나 서울과 부산,그리고 경기도를 제외한 모든 도는 전국 인구에 대한 구성비에 있어 감소 추세를 보였다.인구이동을 도시와 농촌으로 구분하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55년 25%에 불과했던 것이 80년에는 57%,86년에는 65%에 달해 도시인구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70년 이후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어느 정도 둔화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촌인구가 서울 이외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특히 마산 울산 포항 등의 새로운 공업도시와 수도권의 성남 안양 수원 등에는 우리나라 전도시의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정부수립후 49년 첫 인구조사에서 남한의 인구는 2천18만8천여명이었으나 96년 조사된 인구는 4천6백43만4천여명으로 50년동안 두배로 불어났다. ◎日 전쟁 동원 인구 해방후 엄천난 逆유입/日帝와 美 군정 시기의 인구/도시주변 戰災民으로 반공체제 정착 큰 역할/46년 1,936만명 조사/이듬해 국민등록 실시 한국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특히 37년 이후의 전시 총동원체제 아래서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경험했다.가혹한 수탈로 인해 농촌을 떠나 일본과 만주 등으로 이주했다.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기간동안 이른바 노무 동원 또는 강제 징용 등에 의해 북한의 광공업지역과 일본으로 동원됐다.39년에서 해방 전까지의 기간에 국내외에 걸쳐 전시체제와 관련한 유동인구는 약 7백만명으로 45년 현재 국내 총인구 수의 약 30%에 달한다는 사실은 인구이동 규모의 방대함을 말해 준다. 일제 말기의 인구이동 현상은 해방직후에는 역으로 대규모의 인구유입 즉 귀환을 초래했다.여기에다 남북 분단의 체제대립적 성격을 반영하는 이른바 월남민들이 발생했다.해방 직후 남한사회는 단기간 안에 엄청난 인구유입을 경험했다. 이는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첫째는 유입인구가 자신의 성장지역인 농촌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도시지역의 경제활동 인구로 흡수되지도 못하면서 상당수가 도시 주변에 전재민(戰災民)으로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이는 해방정국의 사회적 불안정성과 긴장을 높이는 주요한 변수가 됐다. 둘째는 유입인구가 계급적 성격과 사회적 경험 등에 따라 비교적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정치적 격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해방 직후 월남민들이 우익세력의 선봉대였으며 남한사회가 반공체제로 귀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역사가들이 입증하고 있다. 해방 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미군정청에 의해 46년 8월25일 실시되었다.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은 제외됐다.이 통계는 44년 조선총독부의 국세(國勢)조사 인구에 미군측이 파악한 식량배급 인원과 외부로부터의 유입인구를 고려해 작성됐다.이 때 조사된 남한 인구는 총 1천9백36만9천270명이었다.따라서 이 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미군정청은 이어 47년 국민등록을 실시했다.등록 인구는 총 1천9백88만6천234명.다음해 다시 실시한 국민등록에서는 2천2만7천393명의 인구가 등록됐다.미군정청이 실시한 국민등록은 의식주 및 생활 필수품의 확보와 배급계획의 수행,앞으로의 선거 등을 대비한 것이었다.
  • 일제,탑골공원 유린 기도/일본식 다방·음악당 설치

    ◎총독부 ‘예정설계도’ 발견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유린당할 뻔했던 사실이 밝혀졌다.일제는 일본식 다방과 야외음악당 설치를 기도했으며 위락시설 설치는 민족정기를 말살의도로 해석된다. 이는 정부기록보존소가 192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총독부의 국내사찰과 문화재 조사 및 수리계획 도면을 최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탑동공원다방 예정설계도’라는 제목의 8장짜리 도면에서 일제는 현재공터인 탑골공원에 1백50여평 규모의 다방을 설치하려 했다. 특히 ‘아오키(청목) 다방’으로 이름지어진 다방은 다다미방과 주방을 갖춘 전형적인 일본풍으로 일본식 담장형태인 나무울타리로 둘러 쌓이게 돼 있었다.
  • 미군정 폐지와 행정권 인수(대한민국 50년:7)

    ◎정부수립후 3개월 지나서야 ‘정권’ 확보/한·미대표단,군­경찰 지휘권 놓고 첨예 대립/하지­이승만 직접담판 통해 ‘점진 이양’ 합의 1948년 9월4일 열린 제헌국회 제57차 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 사이에서 진행되는 행정권이양 회담에 관해 중간보고를 했다.이총리의 보고는,국회가 9일전 긴급결의해 국회의장 명의로 서한을 보낸데 따라 갖게 됐다.이총리는 회담에서 한국측 수석대표였다. 이총리는 먼저 “한미 양국간에 이견이 있어 회담에 매달리다 보니 경과보고가 늦어졌다”고 사과한 뒤 “행정권을 완전히 이양받은 다음에야 인적·물적 토대에 근거하여 시정방침(국정지표)을 마련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이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째인데도 정부가 아직 행정권을 인수하지 못해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사실을 국무총리가 공개시인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재산권처리 협상도 난제 2년 11개월에 걸친 미군정은 형식상 48년 8월16일 0시를 기해 폐지됐다.16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호를 발표,미군정청 과도정부로부터 이관되는 행정업무를 11부4처별로 정리했다.이에 따라 17일부터 신생정부 각부처의 장은 과도정부의 미국인 고문들과 구체적인 인수절차 협의에 들어갔다.19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과도정부에 소속된 한국인 관리의 직책을 새정부에서도 보장했다. 이처럼 한국정부가 발빠르게 인수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행정권이 쉽게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양쪽은 인계인수할 행정권의 범주를 결정하는 큰 테두리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였다. 한국정부와 미군정 간의 행정권이양 회담은 16일 하오2시 중앙청내 미군정 민사처 사무실 200호실에서 처음 열렸다.양쪽 대표는 한국에서 이총리와 윤치영 내무부장관·장택상 외무부장관,미군정측의 무초 주한미국대사·헬믹미군정 민사처장(소장)·드럼라이트 미군정 정치고문 참사관 등 6명이었다.무초대사는 그달 23일에야 부임하는 바람에 첫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은 ▲군(당시의 조선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과경찰에 대한 지휘권 문제 ▲한미간 재정 및 재산권처리에 관한 협정 등이었다.군정측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군과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미군사령부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정부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측이 미군정이 보유한 물적 재산을 최대한 넘겨받기를 원했고,더불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도 요구했다.회의에 진전이 없자 양쪽은 하루에 상하오 두차례로 회동을 늘리기로 합의,이를 한국정부 김동성 공보처장이 정식 공표하기도 했다. 당시 회담에 임한 미군정측은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손아귀에 쥐어 있기 때문에 논의과정에서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시각을 가져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출국을 사흘 앞둔 8월24일 이대통령을 방문,직접 담판을 짓고서야 ‘군경에 관한 통수권’문제가 해결됐다.26일 조인한 ‘군사통수권 이양에 관한 협정’내용은 ▲군경에의 통수권은 가급적 점진적으로 이양하되 ▲미국이 국방경비대·해안경비대 장비를 원조하며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 문제를 계속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9월30일에 시정연설 이 합의에 따라 경찰지휘권이 대한민국의 내무부장관에게 정식으로 넘어간 것은 9월3일 정오를 기해서였다.내무부는 곧바로 경찰조직 9국실 가운데 감찰실·총감부·수사국·교육국·공보실 등 5개국을 없애고 공안국·통신국·총무국·여자경찰국 등 4국실만 남기는 개혁을 단행했다.지방경찰 직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막상 지방 경찰력을 인수할 때는 미군정청과 가까운 일부인사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물자 현금 인사 및 정부직권의 이양’협정은 9월11일 타결됐다.이승만 대통령은 9월30일 국정지표를 제시하는 시정방침 연설을 할 수 있었다.미군정 과도정부의 중앙 각부처가 인원·재산 등을 한국정부에 이관하는 작업이끝난 날은 11월 18일이었고 지방 행정기구까지 완전히 신생정부가 인수한 때는 11월 20일이었다.정부수립 석달여가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은 1945년 9월9일 서울 중앙청(옛 총독부)에 설치됐다.행정실무를 책임질 첫 군정장관으로는 아놀드 소장이 임명됐다.미군정은 초기부터 ‘영어를 알고 행정겸험이 있는’한국인을 활용한 고문제도를 시행했다.45년 12월에는 한 직위에 미군과 한국인을 한사람씩 두는 ‘한인·미인 양국장’제도로 바꾸었다.이때 참여한 인사가 광공국장 대리 오정수,학무국장 유억겸,농상국장 이훈구,경무국장 조병옥 등이다. ○행정훈련서 친미 양성 해방된지 1년쯤 지났을 때는 모든 부처의 장에 한국인이 진출,한인관료 체계가 자리잡았다.47년 2월12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고,그해 6월3일에는 미군정청 한국인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라 개칭했다.이어 47년 9월12일에는 행정권을 남조선과도정부에 넘겨 새정부에의 이양에 대비했다. 이같은 미군정청의 정책에 대해서는 두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하나는 미군정이 나름대로 일정표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행정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신생국가에 친미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했다는 시각이다.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한 공이 적지 않은 반면에,일제의 한인 관료군대부분에게 재생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일제청산에 큰 걸림돌을 남기기도 했다. 미군정이 이땅에 시행한 법령은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 4건,남조선과도정부법령 14건,미군정법령 219건,행정명령 24건,부령 및 지령 115건,조선과도정부입법결의안 4건,미군정청포고 7건,기타 11건 등 모두 398건에 이른다. ◎미,한국협상대표단 불신/본사 특별취재반,‘제이콥스 보고서’ 입수 확인/“이범석 권한 없고 이승만이 모두 결정” 미국이 한미 행정권 이양회담에 임하면서 이범석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단에 불신을 가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입수한 ‘제이콥스 보고서’는 당시 회담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J K 제이콥스는 주한 미24군 정치고문으로 회담경과를 정기적으로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이번 자료는 1948년 8월22일 작성했으며 그가 보낸 5번째 보고서이다. 제이콥스는 8월20일 상오10시와 하오2시 7∼8차 회의가 잇따라 열렸으며,7차 회의에서 이총리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고 결정권은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 수중에 있다”고 실토했음을 보고했다.이어 미군정측의 헬믹소장이 구체적인 항목들을 나열하며 의견을 물었지만 이총리는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한국측 태도에 자극받았음인지 하지사령관은 8월24일 이승만을 만나 ‘군사통수권 이양 협정’을 직접 협상했다.미 본국 정부도 우회전술로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트루만 미국대통령은 8월27일 ‘한국경제원조 계획’을 미군정에서 다루지 말고 국무부 경제협력국에서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마샬 국무장관은 9월1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국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UNTCOK)의 보고가 있을때까지 행정권 이양에 관한 최종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이후 한미행정권 이양에는 가속도가 붙었다.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기 보다는,회담에서 상대가 내민 카드를 서로 탐색하다가 결국 수뇌부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 ▲이경위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웅 정치부기자 ▲최병렬 문화부 기자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청와대/황병선 논설위원(외언내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북악산 자락의 청와대 자리는 풍수지리상 최상의 길지에 속한다.북한산과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우백호인 인왕산,그리고 명당수인 청계천이 흘러 배산임수의 더없는 명당자리다.6공 당시인 90년 현재의 새 관저를 짓기위한 토목공사중 ‘천하제일복지’라 새겨진 조선조 중기 작품으로 보이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해 길지임을 증명했다. 너무나 뛰어난 명당인 때문인지 청와대 자리는 얽히고 설킨 사연이 우리 역사의 기복만큼이나 복잡하다.고려때 조그만 이궁이 세워졌던 이 명당 자리에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창건했고 청와대는 이 경복궁의 후원터에 해당한다.이 후원에는 오운각 융문당 등과 함께 경무대가 세워져 과거장으로 쓰였는데 이 경무대주변이 청와대 터인 것이다. 자유당시절 무소불위 권세의 상징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기전 경무대는 일제 조선총독의 관저로,해방후에는 미 군정장관 하지장군의 숙소로 쓰이는 서글픈 과거를 가졌다.4·19직후 윤보선 대통령은 시위대의 공격목표,원부의 상징처럼 된 경무대 명칭을 건물의 청기와에서 따온 청와대로 바꿨다.당시 서울 시사 편찬위원을 맡았던 김영상씨가 청와대와 함께 ‘화령대’를 제시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성계가 건국후 중국 명나라에 보내 국호로 선택을 구했던 조선과 화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뒤 박정희 대통령때는 ‘청’보다는 ‘황’색이 더 존귀함을 나타낸다며 ‘황와대’로 바꿔야 나라에 길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화가 남아 있다.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구총독부 건물과 함께 총독관저였던 옛 청와대 건물은 완전 철거됐다. 새 정부 인수위가 ‘국민의 정부’에 걸맞게 청와대 명칭을 바꾸는 문제를 검토한다는 보도다.권위주의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는게 이유다.김영삼 정부도 청와대를 개방하며 ‘관광명소’로 만든다고까지 했었다.이름바꾸기도 따지고 보면 옛것을 부수는 일이다.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과거의 것을 부수기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멋진 정치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이름이 정겨운 이미지로 국민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은 아닐까.이제 우리 정치도 워싱턴의 백악관이나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처럼 전통있는 권부의 애칭을 가질때가 되지 않았을까.
  • 이란 「페르세폴리스」(세계 문화유산 순례:61)

    ◎대평원 열주로 남은 페르시아수도/2,500년 전 다리우스대제가 세운 관성대도시/‘182년 영화’ 알렉산더대왕 말발굽에 폐허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천500여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제국의 수도이다.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을 날면 고대 도시 시라즈에 도착하고,다시 자동차로 동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타크트 에 잠시드’에 도착한다.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페르세폴리스의 현지명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셀 수 없는 열주와 초석, 궁전터와 성벽계단,건물의 잔해들,궁전의 규모라기 보다는 궁성 대도시였다.고도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끝없이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서 묻혀지고 잊혀버린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역사의 상처마저 풍화되어 보는 이의 가슴을 친다.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만 믿고 서양을 통째로 동양에 실어 날랐던 알렉산더의 도도한 물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적 정신의 심장부였다. ○각 국어로 새긴 ‘세계의 문’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그리고 그 도시의 완성은 그후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외국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다. 기원전 330년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182년간의 짧은 생애였다.그리고 2천260년 동안 망각속에 있었다. 1931년 부터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 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페르세폴리스의 역사적 의미는 되살아 났다. 페르세폴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아파다나궁이다.왕들의 대접견장이었던 이 건물은 다리우스 대제때 시작하여 세르케스 왕때 완성되었다.지금은 72개의 기둥 중에 13개만 남아 있다.기둥과 벽면에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적 편린을 엿볼 수 있다.상대적으로 조그맣게 새겨진 외국사신들이 손에 진상품을 가득 들고 커다랗게 묘사된 페르시아 왕들앞에 서있는 조각은 정말 사실감을 준다.사신들의 공손한 표정이며 왕의 근엄한 태도,날리는 옷자락에서 공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의 몸부림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가 전개된다. 어떻게 돌을 쪼아 저토록 선연하고 감동어린 조각을 만들 수 있을까?항상 그러하듯이 수천년전의 한 역사 유물에서 인간은 숙연함과 겸손을 배우게 된다. 페르세폴리스 건물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화려한 건물은 세르케스궁이다. 19m 42㎝ 높이의 1백개의 열주로 꾸며졌으나,이제 몇몇 기둥만이 그 흔적을 전해줄 뿐이다. 입구의 대문을 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에는인간의 모습을 한 황소가 조각되어 있다.11m 높이의 대문 위에는 엘람어와 아시리아어,페르시아어로 각각 ‘전세계의 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페르시아 국의 위용을 엿 볼수 있다.이곳의 기둥마다에도 쐐기문자로 새겨진 역사가 숨쉬고 있다.왕은 주로 세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불을 모신 신전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또는 걷고 있는 모습들이다.부조의 양식들은 아시리아의 니네베 조각의 양식을 많이 닮아 있다.그러나 자세히 보니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권력과 신분에 따라 인물조각의 크기가 다르다.커다란 왕의 위엄앞에 보일락 말락하는 이름없는 백성의 표정이 인상적이다.특히 옷자락의 묘사에서 니네베 양식은 옷이사람 몸에 찰싹 들러붙어 있으나,이곳 페르세폴리스 양식은 옷이 살아 펄럭펄럭 날리고 있다.최고의 예술적인 조각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아파다나관 대표적 건물 신전은 불의 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모셨다. 빛과 어둠,선과 악이 엮어내는 페르시아 사람들의 이원론적인 민간신앙이 조로아스터교로 성장했다.그리고 유대교에 직접 영향을 주어,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종교사 이야기이다.기원전 6세기말,페르시아의 창건자인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그곳에 포로로 잡혀있던 유대인을 무사히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나아가 재정지원을 통해 예루살렘사원을 재건축하게 해주었다.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유대인 지도자에게도 좀처럼 부여하지 않았던 각별한 존경을 키루스에게 표하고 있다.신과 악마의 대결,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응징개념 등이 바빌론 유수 이후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광풍을 견딘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더는 전군을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었으며,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온 몸이 열 군데 이상 칼로 찔린 아시아의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한 병사의 눈에 발견된다.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로부터 한모금의 물을 받아 마신 후,조용히 눈을 감는다.기원전 330년 7월,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대페르시아 제국도,그 수도였던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이렇게 하여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여행 가이드/테헤란∼인근 시라즈까지 비행기로 2시간 엄격한 이슬람 국가라 여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의외로 친절한 이란 사람들의 인간미와 철저한 치안으로,오히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의 안전지대이다. 테헤란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시라즈로 가서 그곳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페르세폴리스가 있다.현지명이 타크트에 잠시드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시라즈에는 호마호텔이 유명하다.관광안내는 이란 관광국 안내(892212)나 이란 관광정보센터(227072)로부터 얻을 수 있다.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작고 향기로운 ‘동귤’/유만근 성균관대 교수(굄돌)

    한 해가 또 저물어 가니 제 철 열매 귤이 한창 곱고 향기롭다.귤중에 제일 작은 것,살구나 탁구공 보다도 훨씬 작으며,껍질째 먹는 종류를 우리말로 ‘동귤’이라 한다.이 말은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는 말이라 1920년에 나온 ‘조선어사전’(총독부 한·일사전)에 이미 표제어로 올라있고, 일본말로 ‘깅깡’(김감)이라 풀이돼 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즈음 사람들이 우리말 ‘동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대신 당치않은 일본말을 쓴다. ‘동귤’의 중국식 한자말 ‘금귤’이 서양에 알려질 때,북경발음대신 남중국 광동발음 ‘감괏’(gamgwat)비슷한 것이 전해졌기 때문에 영어로는 결국 ‘캄쿠옷’(kumquat)처럼 되었다.일본식 ‘금감’이나 중국식 ‘금귤’은 모두‘금빛’을 나타낸 것 같은데 과일 빛깔로야 어디 ‘동귤’만 금빛인가? 딴 종류 큰 귤도 모두 빛깔이 비슷하니 의미상으로 ‘금감’이나 ‘금귤’이 도무지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우리말 어감상,발음편의상으로도 그것들은 ‘동귤’만 못하다.작고 둥글둥글한 그 과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동귤’이 얼마나 적절한가? 우리들이‘동귤’이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몰라 못썼지,알고난 다음에는‘동귤’이라는 말을 모두 즐겨 쓰며 옆사람 그 옆사람한테로 널리 보급할줄 믿는다.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귤이 있었다는데 중간에 한때 없어졌던 까닭은 무엇인가? 일설에 의하면,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귤을 서울 궁궐이나 세도가들 집에 진상했는데,생산량 짐작도 못하고 무리하게 자꾸 더 가져오라는 경우가 많은 바람에 제주도 사람들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오기로 귤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궁궐이나 세도갓집이 아닌 보통집,우리집에서도 그것들을 즐겨 먹을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고 고마울 따름이다.그러나 물건보다 말과 정신이 중요하다.이제 우리가 잠깐 놓쳐버렸던 이름 ‘동귤’까지 되찾으면 얼마나 좋을까!
  • 흑하시의 비극(흑룡강 7천리:12)

    ◎러 1643년 침략 주민 50명 살해/흑룡강변 60만㎢ 점령 ‘애훈조약’ 강제 체결/강건너 러시아 땅 ‘자유시’엔 독립군 참상이… 비극 흑룡강 한 구간을 흑하로 부른다.발원지에서 900㎞에 이르는 대하의 한 구간이다.‘상고교통개항’ 등 문헌기록에 나오는 ‘흑하’와 무관치 않는 이름이다.그러나 역사에 등장한 지명 ‘흑하’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바로 오늘날의 흑룡강성 흑하시가 근·현대사에 나오는 지명인 것이다. 옛날에는 막하에서 흑하로 가자면 배편을 이용했다.요즘에는 짐배만 다닐뿐 여객선은 없다.강을 따라 뺀 육로가 있기는 하다.그러나 비포장길인데다 막하와 탑하,탑하와 호마를 거쳐 또 버스를 갈아 타야하기 때문에 꺼리는 길이다.그래서 막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도중 눈강역에서 내려 다음날 새벽 흑하행 버스를 타는 여정을 택했다.막하∼하얼빈∼흑하를 잇는 철도여행 보다 230㎞를 줄인 것이나 흑하에 도착했을때는 한낮이 기울었다. 흑하시 일대는 참으로 넓다.눈강,손극,손오,덕도 등의 4개 현과 북안,오대련지 등 2개 시가 몰려있다.6만8천726㎢의 면적에 인구는 겨우 1백50만.이 일대의 땅 넓이는 남한 면적 4분의3이나 되지만 인구는 30분의1 정도니까 헐렁하게 사는 셈이다.망망한 수림에는 짐승이 뛰어놀고 일망무제한 들판에는 갈가마귀가 무리지어 울어댈 뿐 인적은 드물었다. 흑하시에 여장을 풀고 30㎞ 떨어진 애휘진를 먼저 찾았다.본래 이름은 애훈이었는데,1956년 국무원이 지명을 애휘로 바꾸었다.중학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애훈은 청나라 흑룡강성장군아문과 흑룡강 부도통아문의 소재지로 오늘의 흑하시는 여기서 출발했다.풍수설에 따르면 애훈은 열 명의 장군이 나올 땅이라는 것이다.그런데 탑을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나비 한마리가 날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그 나비 한마리 때문에 장군이 아홉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청조때 아홉 장군의 거주지였던 애훈성 유적은 오늘날 애휘진 외이도구툰에 있다. ○6만8천㎢에 인구 150만 애훈성은 붉은 벽돌을 쌓아 축조하고 푸른색 기와를 이어 망루를 지었다.성안으로 들어서면 나비가 날아오는 자리에 지었다는 탑이 첫 눈에 들어왔다. 1900년 제정 러시아군에 의해 불타버린 애훈성내 유일의 탑으로 ‘괴성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흑룡강성 전 성장 진뢰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쓴 현액이 걸려있다.한문으로 열가지 이상 표기되는 애훈은 다우르족말로 사납다는 뜻이다.당시 어마어마했던 흑룡강장군의 위세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훈성은 흑룡강성이라고도 했다.1683년 10월 흑룡강장군인 영고탑 부도통 사푸수가 1천500명 병졸을 거느리고 이성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사푸수까지 모두 아홉 장군이 살았다. ○러 체호프 석조상 눈길 ‘애훈현지’는 인구 4만이었던 이 성은 흑룡강연안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러시아와의 국경에 있는 청나라 성이라는 하지만 성안쪽 진열관 기념품상점 앞에서 만난 체호프의 석조조상은 이채로웠다.러시아의 대문호는 애훈에 들렀다가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애훈성 진열관 왼쪽에는 ‘애훈조약체결기념탑’이 있다.애훈조약이란 러시아가 총칼을 앞세워 흑룡강유역의 중국땅 60만㎢를 빼앗은 불평등조약이다.이굴욕적인 조약을 중국쪽에서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울리 만무다.그렇다고 러시아쪽에서도 침략역사를 부러 드러내보일리 없고 보면 기념비는 누가 세운 것일까.이 기념비가 선 곳은 흑룡강 부통아문 자리다.동시베리아 총독 부르디요프는 부통아문에서 청나라 흑룡강장군 혁산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이끌어냈다.물론 강압적인 조약이었다.그래서 1939년 일본은 중국을 힘없는 나라로 얕잡아 보려는 뜻에서 이 비석을 세웠다. 어떻든 러시아는 흑룡강 건너 자기들 땅 지명에다 중국침략의 기수들 이름을 모조리 붙여 놓았다.손극현 기극진 대안의 러시아 지명은 1643년 중국을 처음 침략한 포야코프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다우르족의 거점을 점령하고 50명 주민을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이다. 원동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도 마찬가지다.대지주 하바로프스크는 1649∼1651년 여러차례 흑룡강을 건너와 다우르족을 죽였다.그리고 포로로 잡은 여인들을 자신이 강간했다.1651년에는 애훈성 자리의 토얼쟈성을 함락하고 성주와 주민을 가리지 않고 죽였던 그의 동상이 지금도 하바로프스크역 광장에 버젓이 서있다. ○러군 성주 등 무참히 살해 그리고 흑하시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마주한 러시아의 블라고베시첸스크가 보인다.러시아말로 기쁨을 주는 성,다시 말하면 보희성이 블라고베셴스크다.그러나 기쁨은 커녕 다른 민족에게는 비극만을 안겨주었던 러시아의 침략기지가 분명했다.우리 민족 역시 잊어버리지 못할 이른바 ‘자유시사변’의 자유시가 바로 블라고베시첸스크다.1921년 일본군 토벌대에 쫓겨 흑룡강 건너로 집결한 우리 독립군이 러시아 홍군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자유시사변’이 아니던가.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홍군 제29연대 4개중대의 공격으로 독립군 272명이 죽고 31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행방불명 250명에 포로는 917명이나 되었다. 우리 일행이 흑하시에 갔을때 시내에서 4㎞ 떨어진 오도활용도에서는 촬영이 한창이었다.중국인 자신들의 흑룡강유역 역사 비극을 담은 3부작 54집의 TV대하드라마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우리 독립군이 재기불능으로 치명적 상처를 당한 ‘자유시 사변’을 제대로 아는 조선족들은 흔치 않다.강룡권·김택 공저의 ‘홍범도장군’(1991년·연변출판사)이 고작이어서 그럴수 밖에 없다.
  • 일 여인의 국경넘은 고아사랑/윤학자 여사 사후 30년만에 기념비

    ◎총둑부관리 부친따라 7살때 한국에/본명 다우치… 고향 고지시선 ‘성녀’로 ‘한국 고아의 어머니’ ‘목포의 어머니’로 추앙받아온 일본여인 다우치 치즈코(전내천학자·한국이름 윤학자)여사.7살때 총독부관리였던 부친을 따라 한국에 와 한국인 남편을 만나고 이후 목포에서 3천여 고아들을 키우기는데 평생을 바치다 68년 작고한 그가 최근 고향사람들에 의해 성자로 자리매김됐다. 지난달 31일 그의 출생본가에서 6백m 떨어진 고치(고지)시 와카마스초의 한 귀퉁이에는 기념비 하나가 세워졌다.이날은 그가 태어난 날이자 동시에 작고한 날.그가 평생을 바친 목포 공생원 원아들의 ‘목포의 눈물’ 합창속에 진행된 기념비 제막식에 모인 450여명은 고인의 헌신적 사랑과 베풂의 삶을 기리고 계승을 다짐했다.한국에서는 공생원 원아 80여명과 생전에 같이 생활했던 노인들,전남도와 목포시 관계자 등 250여명이 참석했고 일본에서는 다우치여사의 장남 윤기씨(55) 등 가족과 하시모토 다이지로 지사 등 정계인사,모금운동을 주도한 상공인 등 20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 일제잔재/유만근 성균관대 교수(굄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기간은 불과 35년 미만이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남긴 흔적은 여기저기서 좀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그중 언어에 관련된 것만 보아도 한두가지가 아니다.일본이 학교교육을 통해 독일을 예찬하고 프랑스를 악평하는 편협성을 보인 바람에,우리나라 노인들은 아직도 그 두나라에 대해,어려서 배운대로,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그리고 외국어로서 불어보다 독어를 더 많이 배우는 나라를 이 세상에서 한국 말고 다시 찾기 어려운 것도 다 일본시대 유산과 광복후 우리의 무심 탓이다.지금은 일본조차 독어보다 불어를 더 배운다. ‘인왕산’이 일정시대에 ‘인왕산’으로 둔갑했다가 최근에 ‘인왕산’으로 회복되었는데,‘중량교’는 아직도 ‘중랑교’로 둔갑한 채 쓰이고 있다.서울 ‘다릿골’(교곡)은 한자로 획수가 많다고 획수 적은 ‘월곡’으로 바꾸고,“‘다릿골’이나 ‘달골’이나 그게 그것 아니냐”고 모욕적으로 나왔다 한다.1939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당시 경성방송국에 날벼락 명령을 내려,‘동경,이등박문…’을 전에 없이 일본한자음으로 읽으라 했다.그때 제2 방송과장 심우섭은 이것이 당치않고 불편하다고 거세게 항의하다가 여의치 않자,집에 와 사표를 써서 우송하고 방송국에 출근하지 않았다.그 해 9월10일에 결국 사표가 수리되었다.그때부터 방송에서 생긴 일본음 혼용관행이 ‘중낭교’처럼 내내 뻗쳐오는 중에,지난 9월 18일에는 KBS보도국이 ‘북경,강택민…’대신 중국한자음을 채택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참으로 어이없는 잘못이다. 이웃나라 간에 현지원음 사용은 식민지가 아닌 한,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다.현지원음주의라는 역사상 일찍이 문화교류가 없던 지구 반대편 나라끼리,편리한 딴 어형을 도저히 달리 찾을수 없을때,할 수 없이 채택하는 가장 불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보이게,안 보이게 우리를 휩싸고 있는 일본 식민지 잔재를 우리는 언제나 다 벗을꼬? □굄돌 필진이 바뀝니다 10∼11월에는 곽배희·김종환·유만근·임정규씨가 맡습니다. ▲곽배희(51)=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이화여대 법학과,동 대학원 사회학과 졸.기독교방송 PD 역임.저서 ‘남편은 적인가 동지인가’. ▲김종환(40)=한국과학기술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서울대 전자공학과,동 대학원 박사.로보틱스 전공. ▲유만근(58)=성균관대 영문과 교수.국제음성학회(IPA)평생회원.서울대 영문과,동 대학원 석사.저서 ‘한글·로마자 대조표기 서울말 발음독본’ 등 다수. ▲임정규(55)=한국수자원공사 사장.중앙대 행정학과 졸,미국 뉴욕대 국제정치학 수료.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특별보좌역.동부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역임. 지난 8∼9월 수고하신 박경미·이승복·조남진·한만진씨께 감사드립니다.
  • 조선총독부 청사터 사적 117호로 지정

    일제가 유린한 경복궁내 구 조선총독부청사터가 광복 52년만에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는 26일 구 조선총독부청사터인 흥례문권역 8천2백80평과 총독부 관사지역 9백20여평을 사적117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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