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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전후 경의선 기관사 이순복씨 “철마 다시 달리다니…”

    “끊겼던 철마(鐵馬)가 다시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해방 전후까지 경의선 열차를 몰았던 노기관사 이순복(李順福·76·서울 도봉구 창동)씨는 31일 제1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반세기 만에 경의선을 복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씨는 “내 고향이야 경기도 연천이지만 열차를 타고 남과 북의 고향 땅에가고 싶은 실향민들이 얼마나 많겠느냐”면서 “남북의 동포들에게 신나는일이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서울에서 신의주 사이의 경의선 철도는 1945년 9월 미·소 양군의 남북 주둔과 함께 운행이 공식 중단됐다.그러나 이씨에게는 서울역을 출발,개성을거쳐 좁쌀밭이 펼쳐져 있는 신막,사과향이 코를 찌르던 황주,말끔한 교복을입은 학생들이 인상적이었던 평양 거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2년 이상 기관사 보조원으로 일한 뒤 용산 철도원 양성소에서 3년간의 엄격한 과정을 마쳤다.42년 2월 20대 1의 경쟁률을뚫고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 입사했다. 이씨는 열차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지급된 주머니 시계와 푸른 제복과 모자, 노란색 완장 등을 착용한모습이 멋져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관사가 된 뒤 처음 배정받은 노선이 처녀 운행구간이던 경원선과 경의선이었다. 해방 직후 만주나 북에서 남쪽 고향을 찾아 열차 꼭대기도 마다않고올라탄 귀향민들을 싣고 내려올 때에는 ‘이제 나라를 찾았다’는 감격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이씨는 “해방 후 남북이 갈려 운행이 중단될 때만 해도그저 잠시 그러려니 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그 뒤 서울지방철도청 등에서 운전관리 업무 등을 맡아오다 83년 서울지방철도청장 등을 역임한 뒤 85년 은퇴했다. 당시 함께 경의선과 경원선을 몰았던 기관사들은 이제 고작 손가락에 꼽을정도만이 살아 남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러면서도 “기회만 닿는다면 당시 가깝게 지냈던 평양의 철도원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으면 좋겠다”는 말도빼놓지 않았다. 김경운 송한수기자 kkwoon@
  • 안중근의사 遺墨 2점 日서 발견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남긴 휘호 2점이 추가로 발견됐다. 다큐멘터리 프로덕션 ‘더 채널’(대표 PD 김광만)측은 26일 “3·1절 특집‘안중근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의 후속프로를 준비하던 중 일본 현지에서 안 의사의 유묵 2점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히로시마 인근 한 사찰에서 발견된 ‘독립(獨立)’은 뤼순감옥 간수의 후손이 보관해 오던 것으로 가로 63㎝,세로 33㎝의 종이에 쓴 것.또 도쿄시내 전 대만총독부 고위관계자의 집에서 발견된 ‘장탄일성 선조일본'은 ‘탄식해 말하노니 일본은 기필코 먼저 망한다’는 의미로 가로 40㎝,세로 230㎝의 비단에 씌어졌다. 휘호 ‘독립’의 소장자로 이번에 한국을 처음 방문한 시다라 마사즈미(設樂正純·72·히로시마현 거주)씨는 “일본에서 전문가의 감정을 마쳤다”며“적절한 때 한국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1)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국내외에서 피끓는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때로는 일제의 합방원흉들에게 단신으로폭탄을 던졌고 때론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며 독립의지를 해외만방에떨쳤다.대한매일은 이같은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과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연말까지 매주 1회씩 미·소·중·일 등 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탐방한다. 중국에서는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을 비롯한 24곳을돌아보고 임정요인 및 독립군이 걸은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또 옛소련에서는 하바로프스크 독립군 전적지 등 5곳을 살펴본다.미국에서는 전명운의사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저격현장인 샌프란시스코 등 5곳을,일본에서는 저항시인 윤동주 등이 숨진 후쿠오카형무소 등을 찾아본다.대한매일은 현장의 모습과 관련문서,생존자 증언 등을 통해 민족의 제단에 몸바친 애국선열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새롭게 정리한다. 중국의 동북3성(省)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성도(省都) 하얼빈.하얼빈은 우리 항일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의열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곳이다.일제당시 이곳은 만주와 러시아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으로 숱한 항일 애국지사들의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이곳은 또 아직도 일제의 가혹한 통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곳곳에는 일제때 세워진 러시아풍의 관공서 건물들이 여전히 옛 영화를 자랑하듯 버티고 서 있다.안 의사 의거로부터 90년이 지났지만 안 의사의의거관련 유적 역시 고스란히 남아 그 날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시내 외곽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일본 관동군 예하 731부대의 잔흔이참혹했던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하얼빈은 근대 동북아시아의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팀이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을 찾은 것은 지난 7월 8일 오후 1시.취재팀은 안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가 91년전 이곳을 향해 출발한 열차의 출발점이자 만주국의 옛 수도였던 창춘(長春)을 출발,세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취재팀을 맞은 것은 30도를 오르내리는 하얼빈의 무더위였다.열차는 3번 플랫폼에 정차했다.승객들을 따라 지하통로를 지나 취재팀이 나온 곳은 1번 플랫폼이었다.바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 근처였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안 의사는 출구쪽의 역사(驛舍)와 인접한 1번 플랫폼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의거현장에는 이곳이 안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의거현장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역무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취재팀은 전문가의 고증을 받기로했다.숙소로 돌아와 이 지역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헤이룽장성 당사(黨史)연구소 김우종소장(71)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김 소장은 “1번 플랫폼 지하통로 옆,즉 2등 대합실 출구 앞”이라며 “당시 일제가 이토의 흉상을 세웠으나 8·15후 소련군이 철거했다”고 증언했다.현재 그 자리에는 작은 화단이조성돼 있다.구내에서 안 의사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1번 플랫폼 뿐이었다. 하얼빈 시내에는 안 의사 관련 유적이 이밖에도 몇 군데 더 있다.보존상태는 대부분 양호한 것으로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우선 안 의사 의거와 인연을 맺고 있는 역으로 하얼빈역에서 15㎞ 떨어진 채가구역이 있다.이 역은 안의사의 동지인 우덕순 의사가 이토가 탄 기차가 이곳에 정차할 것에 대비,이토를 기다렸던 곳이다.하얼빈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채가구역은 러시아풍의 단층 건물 옛 모습을 그대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안 의사가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러시아 군헌(軍憲)에게 처음 신문을 받은 곳은 동청(東淸)철로국 공안국 건물이었다.하얼빈 역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대로변에서 위치한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현재는 하얼빈 철로국 공안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한편 안 의사가 이곳에서 간이신문을 마치고 이송된 곳은 하얼빈주재 일본영사관이었다.안 의사가 체포된 후 두 손이 뒤로 묶인채 쇠사슬을 두르고 찍은 사진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 일본영사관 지하감방에서 일제 관헌으로부터 가혹한 신문을 당한 항일투사가운데 남자현(南慈賢) 의사가 있다.1872년 경북 영양 출신인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전투에서 전사하자 1919년 만주로 망명,서로군정서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들과 사이토 총독 암살계획이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다시 돌아가 재만(在滿)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참여하였다.1931년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온갖 탈출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후 만주주재 일본대사를 처단하기 위해 걸인 노파차림으로 무기를 운반하다가 하얼빈시내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 체포돼 이곳 영사관 지하감방으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 의사는 감옥에서 6개월동안 단식투쟁끝에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33년 8월 22일 이곳 이국땅 하얼빈에서 순국했다.남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시내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그후 문화공원으로 불려온 이곳은 현재 하얼빈 유락원(遊樂園)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취재팀이 방문한 현장은 각종 놀이기구와수영장 등이 들어선 놀이공원으로 바뀌어 있어 어디에서도 남 의사의 흔적은찾을수 없었다. 보훈처의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 답사팀과 함께 하얼빈을 찾은 박환 수원대교수(사학과)는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는 선열들의 업적을 현창하는 일 가운데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업”이라며 “그동안 현지 촌로들의 증언에만의존하는 학술차원의 조사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현지 연구자로 답사팀에합류한 유병호교수(옌볜대학 민족연구소)는 “93년 엔벤대학에서 조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을 당시 단군을 아는 조선족 학생이 5∼6명에 불과한 것을보고 놀랐다”며 “한중우호 차원에서라도 항일독립투쟁사를 제대로 교육할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하얼빈은 안 의사의 의거관련 유적은 물론 시내 외곽에는 일본 관동군예하 731부대의 구지(舊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시내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평방구(平房區)에는 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중국 당국이 건립한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진열관 앞 100m 지점,즉 731부대 북쪽 끝에는 당시 731부대에서 필요한 전기·에너지 등을 공급한 ‘동력반(動力班)’의 대형 굴뚝이 철거되다만채 흉한 모습으로 잡초 속에 방치돼 있었다.이 앞쪽에 위치한 부대 터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현재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이곳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중국 당국에서 이곳을 역사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철거중이라고 했다. 한편 그동안 731부대의 흔적은 동력반의 굴뚝 정도만 상징적으로 남아있고나머지는 대개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취재과정에서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주민은 취재팀에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모두 같은 피해자”라며 “731부대의 지하통로가 하얼빈 시내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증언했다. 하얼빈 정운현기자 jwh59@
  • 7월의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에서의열독립투쟁을 전개한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1883∼1921)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3년 충남예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남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으로참여했고 경술국치이후 충청지역 동지들을 모아 부여를 방문하는 조선총독암살계획을 모의했다. 선생은 1917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의열투쟁이 여의치 않자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충청도지부장을 맡아 조직 확대,군자금 모금,악덕지주 및 친일부호배 처단 등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대한광복회 조직이 적발되면서 충청도지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1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1921년 7월28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외언내언] 진돗개와 풍산개

    북한의 풍산개 암수 한쌍이 서울에 왔다고 청와대가 16일 공개했다.두 마리 풍산개 이름은‘단결’과‘자주’이며 암컷은 생후 50일,수컷은 70일된 강아지들이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게 정상회담 방북선물로 건넨 새끼 진돗개 한쌍에 대한 답례로 김위원장이 서울에 보낸것이다.이번 새끼 풍산개는 북한정부가 공식 인정,남한에 수입된 1호로 기록됐다.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6월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할때기념으로 순종 진돗개 한쌍을 기증했다.‘평화’와‘통일’로 명명된 두달짜리 진돗개 암수 한쌍이 평화의 사절로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했다. 민족분단 55년만에 열린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한반도 평화와 민족화해의 지각변동의 열풍을 몰고 온 가운데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천연기념물인 진돗개와 풍산개의 역사적 교환이 성사된 것이다.남북화해의 상징물로진돗개와 풍산개가 평화의 특사로 맞교환됐다.진돗개와 풍산개는 1938년 일제식민시대 총독부로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왔으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진돗개는 남한 천연기념물 53호,풍산개는 북한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진돗개와 풍산개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동물로 여겨져왔다.진돗개는 민첩하고,슬기롭고,사납고,용맹하여 도둑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2년전 600리를 걸어서 주인을 찾아온 실화에서 보는 것처럼 충직한 심성을 갖고 있다.신의와 의리의 상징으로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귀한 동물이다.북한 풍산개는 진돗개에 비해 키는 4∼5㎝가 더 크고 몸무게도 3∼5㎏이 더 나간다.천성은 비교적 온순하지만 영리하며 단결력이 강해 호랑이같은 맹수도떼를 지어 사냥하는 용맹성을 갖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진돗개와 풍산개가 기념물로 맞교환된 것은 남북화해의 상징성을 높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우리 민족의 생명력과 의지를 상징하는 남북한의 명견(名犬)을 기념물로 교환했다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약속으로도 이해된다.국제적으로도 지난 1970년대초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도 닉슨대통령에게 전한 중국의 상징곰‘판다’의 선물이 상징적 역할을 했다.또한 한·중수교 이후 94년 중국의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백두산호랑이 한쌍을선물한 것도 마찬가지다. 분단의 고통 속에서 평화의 전도사로 맞교환된 진돗개와 풍산개가 아무 탈없이 잘 자라줘야 하겠다.새롭게 마련된 보금자리에서 많은 새끼들을 번식하면서 민족화해와 통일을 앞당기는데 크게 이바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張淸洙 논설위원 csj@
  • 러 푸틴호 ‘첫 암초’

    ‘푸틴의 러시아’가 첫 암초를 만났다. 푸틴대통령의 지방정부 장악 및 권력 수직화 조치에 러시아의 막후 실력자이자 ‘푸틴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이었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54)가 반기를 든 것이다. 베레조프스키는 지난달 30일 푸틴의 조치는 “민주제도를 파괴하는 행위이자 러시아 유권자들에 대한 기만,신진 정치 엘리트들의 싹을 자르는 행위”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크렘린과 언론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이같이 밝히고 “푸틴이 크렘린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는 이해한다.그러나 이번 조치는 정반대의 결과만 초래할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8일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우며 취임한 푸틴은 취임 첫 조치로 지방권력 장악 및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택했다.89개 지방정부를 7개 연방지구로 재편한 뒤 부총리급인 수장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이 결정한 정책을 해당 지역에서 실현하고 지역내 연방정부기관을 통제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은 벌써부터 ‘총독’으로 불리며 세를과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푸틴은지방정부 수장이 상원의원으로 갖는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대통령이 지방수장의 해임권과 지방의회 해산권을 갖는 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31일 하원의 심의 바로 전날 터져나온 베레조프스키의 공식적인 반(反) 푸틴 입장 표명은 향후 푸틴의 개혁조치가 암운을 만날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크렘린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베레조프스키는 러시아의 대표적 과두산업재벌로 네자비시미야 가제트 등각종 언론과 아에로 플로트 등을 소유한 재력가.옐친 때부터 크렘린의 돈주머니 역할을 하며 옐친의 재선을 성공시켰고 크렘린 인사도 좌지우지해 왔다. 지난해 12월 총선 때 단합당을 급조,푸틴의 오늘을 있게 한 것도 베레조프스키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개혁파들이 포진한 하원의 경우 푸틴의 입법안은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이지만 지방 주지사 및 의회 대표들로 구성된 상원(연방위원회) 통과는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들은 ‘푸틴호’가 너무 빨리 풍랑을 만났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집중취재/ 인권기구 어떻게

    *정부·시민단체 논쟁 실태. 잠복상태였던 인권법 제정과 국가인권기구 설치가 다시 현안으로 대두되고있다. 정부와 인권·시민단체는 지난해 인권위원회의 위상을 놓고 대립하다 인권법 제정에 실패했다.그러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인권법의 연내 통과를 지시하고 25일 국무회의에서도 인권법 입법 추진의사를 재확인함에 따라 가속페달을 받게 됐다. 인권법 제정과 인권위원회 설치에 대한 법무부와 인권·시민단체의 입장과논쟁을 살펴본다. 법무부와 인권·시민단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은 인권위의 위상문제다.법무부는 인권위가 특수법인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인권단체는 인권위가 국가기관이 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법무부는 유엔 인권위 권고안은 인권위가 정부의 활동을 감시하고 보완하라는 것이지 정부기관을 대체하거나 경합하라는 게 아니라는 점을 내세워 소속없는 국가기구는 헌법상 근거없는 기구를 만드는 것임으로 위헌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또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할 경우 최소한 500여명의 국가공무원을 증원해야 하고 이에 따르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므로 또 하나의 2중적 권력기관이 생겨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인권·시민단체는 그동안 숱한 인권 침해가 법무부 산하 수사기관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수사기관과 교정기관 등 권력기관에 의한 인권침해행위를 1차적으로 조사하고 구제할 책무를 지닌 인권위는 국가기관이어야만 고도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법무부와 인권단체는 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구성에도 이견을 보였다.위원수에 있어서는 대통령이 임명한 5명,국회가 추천하는 6명 등 모두 11명으로구성하자는데 합의했지만 법무부는 위원의 신분이 특수법인 임직원이 되어야한다는 입장인 반면 인권단체는 통합방송법의 방송위원회와 같이 공무원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양측은 인권위 운영을 위한 예산 운용방식에도 견해가 다르다.법무부는 인권위 예산이 법무부를 통해 지급되는 출연금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의견이다.반면 인권단체는 인권위가 매년 출연금 형태의 소요예산을 법무부로부터교부받으면 법무부의 감독을 받게 된다며 예산요구서를 기획예산처에 직접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위 시행령의 제정과 개정에서도 현격한 시각차이를 표출했다.법무부는법률의 구체적인 사항은 법무부가 관장할 시행령에 위임되야 한다는 입장을견지했고 인권단체는 시행령의 제정과 개정에 법무부가 관여해서는 안된다고못박았다.인권단체는 법무부가 인권위의 조사에 관련된 사항 등 법률이 위임한 주요 사항들에 관해 대통령령을 성안해 국무회의에 제출할 권한을 갖게되면 법무부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인권위의 업무방식을 미리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인권위의 조사대상도 양측이 풀어야할 과제다.법무부는 정부의 각 수사기관등의 9개 인권침해 사안과 차별행위를 감시하고 조사하는데만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반면 인권단체는 조사대상에 시민정치적 인권침해와 평등권 침해 사안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위와 위원의 신분보장에 대해서도 인권단체는 위원의 조사결과 발표에대해 민형사적 면책특권을 부여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이종락기자 jrlee@. *인권법 추진 약사.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국가인권기구설치를 선거공약으로 제시. ■1998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권법제정 및 국가인권기구 설치를 새정부 100대 과제로 발표. ■〃 6월23일 법무부,인권법 제정 발표. ■〃 9월25일 법무부,인권법 시안 공개. ■〃 11월28일 법무부,인권법 수정안 발표. ■1999년 3월22일 정부와 국민회의,법인형태의 민간 인권기구 설치 합의. ■〃 4월7일 인권법 정부안 국회 제출. ■〃 12월18일 국민회의,인권단체의 반대로 인권법 제정작업 연기 발표. ■2000년 4월20일 김대중 대통령,법무부 업무보고에서 인권법 연내 통과 지시. ■〃 4월25일 국무회의,올해안에 인권법 제정 등 205개 법안 제·개정 발표. *인권기구 외국사례. 국가인권기구는 국제인권법을 자국에서 실현하기 위해 설치하는 국내법상의기구다.19세기초 공직자의 월권행위 등을 감시,조사하는 스칸디나비아의 옴부즈만제도에뿌리를 두고 있는 국가인권기구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엔을중심으로 한 국제 인권법의 발전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뒤 현재 세계 50여개국에 설치되고 있다. 국가인권기구는 특히 80년대이후 권위주의 체제를 벗어나 민주주의 체제로이행하던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민주화를 촉진하고 인권보장 체제를 수립하는 전략적 선택의 하나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만 해도 호주와 뉴질랜드,인도,인도네시아에 이어 필리핀,스리랑카의 국가인권기구들이 지난 96년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 포럼’이라는 협의체를 구성,활동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현재 10여개 국가들이의회의 심의를 받거나 입법을 준비하고 있다. 인권기구는 동유럽이나 남미의 경우 처럼 의회가 선임하는 단독관청 형식의인권옴부즈만과 아시아·아프리카 및 영국 연방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합의제 방식의 인권위원회 형태로 크게 나뉜다. 스웨덴,우즈베키스탄,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등은 옴부즈만 형식을 취하고있고 미국,캐나다,프랑스,인도,스리랑카,멕시코는 인권위원회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인권기구가 법인격으로 운영되는 국가도 있는데 호주,뉴질랜드,캐나다,남아프리카 공화국,북아일랜드,말레이시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인권기구 구성원의 임명권자는 정부 수반인 경우가 많고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임명할 수 있는 국가도 다수 있다. 캐나다,호주,뉴질랜드는 수상의 지명을 받아 총독이 5∼8명의 위원을 임명한다.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이 5명 모두를 임명하고 프랑스는 수상이직접 선임한다. 미국은 8명의 시민권위원회 위원중 대통령이 4명,상원의장과 하원의장이 각각 2명씩 임명한다.헝가리의 경우는 의회가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며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종락기자. *郭魯炫 방송대교수. 72개 인권·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공동위원회’의 곽노현(郭魯炫·46·방송통신대 법학과교수) 상임집행위원장은 30일 “인권위원회를 국가기구로 하는 이유는 입법·사법·행정부중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명실상부한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일답. ■인권법제정에 대한 공동위의 대처방안은. 지난해 12월 인권법 제정의 유보발표가 있은뒤 휴식을 가졌다.최근 대통령과 정부의 인권법제정 발표가 있은 뒤인 지난 26일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집행위원회 모임을 재개했다.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하면 위헌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법무부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다.특별검사제의 예에서 보듯 입법·사법·행정 3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잘 운영하지 않았나.입법기술로 독립성을 보장받기위한 취지다. ■인권위 위상문제로 법무부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타협의 여지는 없는가. 다른 국가의 경우를 보더라도 인권위는 국가기구 아니면 특수법인으로 설립된다.중간형태는 없는 것 같다.협상이 재개될 예정이니 법무부가 굳이 특수법인을 집착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따져봐야 겠다.우리의 안이 최상이고 모법답안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하면 500여명의 공무원을 채용해야 하는 등 막대한예산이 소요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정해진 예산을 인권위가 직접 요청하느냐 법무부를 통해 지원받느냐의 출처의 문제일 뿐이다. ■외국의 인권위원회가 법인 형태를 선호한다는 주장에 대해.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되어 있는 50여개국중 오히려 국가기구가 다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법인형태로는 호주가 대표적인데 호주는 지난 95년 정권교체이후 보수당이집권하면서 인권위에 대한 대대적인 예산 삭감 및 인원감축을 단행했다.국가기구가 아닌 산하기구가 겪는 비애다.법무부가 특수법인 형태를 옹호한다면호주,뉴질랜드,남아공 인권위의 관계자를 초빙해 공개토론회를 갖자. *鄭基勇 법무부 인권과장. 정기용(鄭基勇·43) 법무부 인권과장은 “인권위원회가 국가기구로 되면 헌법상 통치기구에 속하지 않는 기구를 만드는 것임으로 위헌이다”라고 잘라말했다.다음은 일문일답. ■대통령과 정부가 연내 인권법 제정을 선언하고 나섰는데 인권단체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입법,행정,사법의 조직과 권한분장을헌법에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헌법재판소,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이 헌법상 별도의 근거가없는 이상 3부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국가기구는 존재할 수 없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는 등 운영의 묘를 살릴 수 있지 않은가. 업무수행에 있어 국가권력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기 어렵다.인권위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정부로부터 독립을 권장하는 UN 권고안의 취지에도역행하게 된다.정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감시·조사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없어 인권위 활동에 대한 공신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어용기구라는 비판이 제기될 우려도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설치된 국가의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기구가 많은 것으로알고 있는데. 수치가 능사는 아니다.UN으로부터 모범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는영국,호주,뉴질랜드,남아공의 인권위가 모두 법인형태인 반면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국가기구 형태인 나라는 대부분 어용기구화돼 있다. ■인권위가 법인형태로 되면 독립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정부와 여당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국민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민간기구가 오히려유리하다.소속직원이 공무원이아닌 민간인이므로 정부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인권구제 활동을 할 수 있고유능한 인권지도자의 영입이 용이해 진다. ■인권위 예산을 법무부를 통해 지급되는 출연금으로 운영한다는 점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예산은 법무부 출연금으로 하되,법무부장관은 예산요구서를 조정하지 못하고 경유만 하도록 규정해 실질적인 재정독립을 보장한다.캐나다·호주·뉴질랜드 보다 강력한 독립성이 보장된다. 이종락기자
  • [외언내언] 탤런트와 빵집주인

    ‘오월은 푸르고나 우리들은 자란다…’어린이날 노래는 이제 노인세대라도어려서 몇번쯤 불러 본, 가장 오래된 가락이 됐다.78회 어린이 날을 맞아 5일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져 그 의미를 되새겼다.어린이 헌장은 ‘대한민국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바르고 아름답게 씩씩하게 자라도록 해야한다’고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어린이날 기원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3·1운동후 어린이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1923년 천도교 소년협회가 중심이 돼소파 방정환선생의 지도로 5월1일이 어린이 날로 정해졌다.그후 1927년 5월첫째 일요일로 변경돼 해를 거듭할수록 민족정신고취 행사로 자리잡자 조선총독부가 39년 이를 폐지했다. 광복후 어린이 날에 대한 의미가 되살아나 46년부터 5월5일이 기념일이 되었으며 57년 2월 동화작가협회 이름으로 어린이 헌장이 제정됐다.당시 헌장전문은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다.헌장은 88년 시대변화에 맞게 개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민족의 이같은 수난사를 반영하듯 어린이들의 장래희망이 과거에는 대통령과 장관·장군·판사 등으로 권위적 직업을 선호했으나 요즘은 현실로눈을 돌리고 있어 흥미롭다.어린이날을 앞두고 한 대학교수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탤런트·운동선수 등 유명인이 25%로 1위를 차지했고 부자(20,5%),사회사업(18%)이 뒤를 이었다.대통령과 장관은 10위(7%)로마지막 순위였다.어렵고 배고프던 시절과 대의명분에서 벗어나 인간을 위한,자신을 위한 직업관이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다이이치(第一)상호보험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장래희망조사’에서는 남자 1위는 목수이고 다음으로 인기 운동선수·경찰관·구조대원 순이었다.여자는 빵집주인이 3년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꽃집주인·선생님·미용사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의식이 현실적으로 변하고있지만 일본어린이 보다는공익적인 성향이다.나라 잃은 어린이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못배우고 천대받던 시절 어린이를 올바르게 기르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어린이날 정신은 귀중한 경험이었다.21세기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아나라의 번영과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건실한 어린이들이건강한 사회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어린이날의 정신이 기념일만의 행사가되지 않도록 쉼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는 공동체가 희망있는 사회이다. 李基伯 논설위원 kbl@
  • 도심 낙산 제모습찾기 나선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낙산이 제모습을 찾게 된다. 서울시는 26일 혜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약 3㎞에 걸쳐 있는 낙산의 훼손된지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종로구 동숭동 동숭시민아파트 철거 부지에서 고건(高建) 시장과 지역주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산 복원사업 기공식을가졌다. 서울시는 2002년 말까지 사업비 840여억원을 들여 종로구 동숭동과 성북구돈암동 일대 6만1,000여평의 낙산을 복원,녹지 및 역사탐방로를 조성하고 공원 및 체육시설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지난 97년부터 낙산 내에 있는 일반주택 362개동과 아파트 30개동에 대한 철거 및 보상작업에 나서 최근 이를 거의 마무리지었다. 서울시는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이르는 2.1㎞ 구간에 서울 성곽을 따라 3∼4m 폭으로 역사탐방로를 조성하고 820평 규모의 조각정원을 설치,문화활동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400∼700평 규모의 광장 3곳을 설치,민속놀이 등 각종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또 산책로 곳곳에 체력단련장 5곳,배드민턴장 3곳,농구장 1곳 등을 설치하고 노인정과 휴게실 등도 마련할 방침이다. 특히 조선조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저술했던 초가집인 ‘비우당(庇雨堂)’도 복원한다. 녹지 복원을 위해 소나무 느티나무 등 11만여그루의 나무와 구절초 등 3만포기의 풀도 심을 계획이다. 한편 해발 125m인 낙산은 지난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16만7,000여평이공원으로 지정됐으나 개발 바람으로 97년에는 지정 당시의 4분의 1에 불과한3만9,000평만 공원용지로 남아 있었다.또 정상까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고 공원용지에 불량주택이 들어서는 등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그동안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었다. 김용수기자 dragon@
  • 호주에 6·25 참전기념비 세워진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산화하거나 부상을 입은 호주군 1,500여명의 공훈을 기리기 위한 참전기념비가 호주 캔버라시 전쟁기념관앞 앤젝공원에 세워진다. 호주 6·25전쟁 참전기념비건립위원회는 오는 18일 오전 9시(현지시간) 앤젝공원에서 월리엄 패트릭 호주총독과 존 하워드 수상 및 참전용사와 시민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준공식을 갖는다. 김종성(金鍾成)국가보훈처 차장,백선엽(白善燁) 6·25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윤재철(尹在喆) 대한민국상이군경회장 등 국내인사 80여명도 참석한다. 기념물은 12m 첨탑형태의 기념탑과 한국산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기념로,한국 정부가 기증한 ‘가평돌’ 등으로 조성됐다. 6·25전쟁당시 호주는 보병 2개대대,항공모함 1척,구축함 4척,2개 비행편대등 모두 1,700여명이 참전,306명이 전사하고 1,216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주석기자 joo@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대한시론] 정치를 투기판으로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왜 정치에 매혹되는가? 정치는 ‘권력에의 길’이기 때문이라 한다.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소영웅주의적인 권력관이나 권력이 부귀영화를 약속하던 봉건사회의 권력구도 때문에 이 모양인가? 지금은 명색이나마 민주주의를 말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권력에의 길로 나선사람들이 정치가 돈벌이 잘되는 장사라고 내놓고 말하진 못한다. 권력의 자리를 차지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핏대를 올린다.일찍이 이승만은 나라를 세운다고 했고,그의 그늘에 정체를 감춘 친일파는 반공애국을 한다고 했다. 이승만 이후시대의 군사독재는 ‘근대화’를 한다고 탈취한 권력으로 거만의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군사정권 30여년에 자기 본업을 집어치우고 권력에의 길로 뛰어든 이들이 줄을 이었다.학자가 강단을 등졌고,기자가 붓을 버리고 감투에 매달렸고,관직을 발판으로 정계에 뛰어든 관리가 더 위세좋은 감투를 차지했고,법률가가 법전을 팽개치고 밀실정치로 날을 지새는 재미에 빠졌다. 기업은 정경유착에서 벼락부자의 비밀을 체득했다.군인이 정치연단에 서는판에 그에 못지않게 약삭빠르고 야심 있는 사람들이 정상배의 이득을 놓치지않았다. 그래서 기회주의와 출세주의가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 정치란 직업은 몫이 좋은 큰돈 만지는 직업이 되었다.이른바 ‘대가성 없는 돈’(?)이면‘정치자금’이라는 면죄부로 그 취득의 합법성이 보장되었다. 결국은 이렇게 막가다가 지금은 몽땅 망하게 되었다. 정치가 투기판이 되고 그러한 카지노에 무법자의 마피아가 합세되면 나라는망한다. 표 모으는 기술이 진실이 전무한 빌 공(空)자의 공약이 되니,아무도안 믿는다. 그런데도 상대방을 공략하는 데는 말로 해야 하는 싸움이니,거짓말도 거창한 거짓말이 난무한다.히틀러는 대중은 조그만 거짓말은 의심해도 엄청난 새빨간 거짓말엔 속는다고 했다.히틀러의 이런 선동술을 체득한 그의 제자들이어찌 이리 많은지…. 문제는 유권자가 바르게 투표하면 된다고 한다.옳은 말이지만,이 유권자를미치게 하는 마약으로 정치판에서 애용되어 오는 것이 지역감정의 자극 선동이고 뒷구멍에서 학연과 각종 연줄로 패거리짜기이다.그것으로도 효험이 없으면 ‘안보’ 귀신과 ‘빨강색’ 칠하기 요술방망이를 휘둘러댄다.50여년을써먹어도 아직도 유효한 처방으로 정상배의 단골처방이 되고 있다. 결국 돈벌이 정치,투기판 정치는 우민정치,바보놀이 정치로 이어져왔다.친일파가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크게 배운 것은 ‘조선사람은 때려야 한다’는 우민관이고 민족멸시이다.대중을 경멸·멸시하여 원색적 감정의 자극으로조정·관리해온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서 배운 것이다. 일찍이 강동진이 쓴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사 연구’(도쿄대 출판회)를 보면 일제가 우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시키고 바보로 만들어왔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승만시대 이래 친일 기득권세력은 국민을 바보로 보았다.군사정권에서는모든 국민을 이등병으로 처우하는 사회의 병영화를 꾀했다.이러한 구 시대의부끄러운 잔재에 도사린 사회적 편견을 개인이나 당파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악용하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지금 선거전을 보면 시민을 깔보고 원색적인 자극 과장과 왜곡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자들이 겁도 없이 날뛰고 있다.밝은 대낮에 모두가 보고 듣고있는 데서 유치하고 치사한 거짓말을 태연히 하고 있는 자들이 사회의 지도층을 자처하고 있다.시민의 감정을 자극시키려고 상궤를 벗어난 모함도 서슴지 않고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한 거대 광고도 피해가 많지만,정치광고의 속임수는 나라와사회를 통째로 망치는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그래서 우리는 정치에서 무책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韓 相 範 동국대교수·법학
  • 오늘 이동녕선생 60주기…되돌아본 업적

    지난 96년 5월17일 15대 국회 개원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됐다.국회의사당 내에 특정인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흉상의 주인공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국회가 선생의 동상을 의사당 내에 건립한 것은 상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해방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기둥’ 역할을 했다.임시정부 공식출범 직전인 1919년 4월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 ‘대한민국’과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 후인 4월13일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정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대한문 앞에서 항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또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07년 양기탁·유동열·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 선생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군사교육을 통한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露領)·중국 등 국내외에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를 지켰다.또 임정 내 이념·계파간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동지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은 때문이다.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재덕이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선생의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언론계활동이다.1897년 ‘독립협회사건’으로 투옥,이듬해 출감한 선생은 당시 이종일(李鍾一)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설을쓰기도 하였으며,1907년 신민회 조직 후에는 당시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이동녕선생 6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3일 오후 2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다.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상동교회이동학 목사의 추모기도를 시작으로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의 약사 보고,추모·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추모식에는 최규학 국가보훈처장,고건 서울시장,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유족대표 이석희 (주)대우 상담역을 비롯해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다. 정운현기자. *석오 이동녕선생 60주기에 즈음하여. 선열의 유지가 날로 퇴색되는 개탄스런 시기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60주기를 맞음은 실로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20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은 선생의 혁명적인 기질이 짙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선생의 독립투쟁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얼음땅 시베리아,연해주,그리고 황야의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 수만리를 뛸 만큼 웅장하고 방대한 발자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선생의 높은 위상은 가난과 무지에서 방황하던 암울했던 구한 말 뛰어난 문필로 여성해방운동과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선각자였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이같은 민족사상의 맥락은 이미 3·1의거 직전 만주땅길림성에서 이른바 ‘무오(戊午)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기개에서도 찾을 수있다.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초기 선생은 초대 의정원 의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주헌법 제정에 앞장섰는데 이는 선생의 투철한 민주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임시정부 주석 4차례,의정원 의장 3차례 등 총 7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대임을 맡는 동안 선생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1910년대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시급함을 통감하고 남만주 해외망명기지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 손수 출자하여 동지들과 운영하였다.또 최초의 군사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해 후일 대한광복군의 초석을 다졌다.선생의 이같은 교육적인 열정은 멀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선생은 평소 덕행과 예절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당시 친러파와 친일파 간의 사상적 갈등,각 지방 파벌 간의 혼란 속에서도 선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수한 ‘터줏대감’이었다.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조선총독 사이토가 한국인 관리를 중국에 밀파,선생의 귀화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일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쳐 선생을두고 ‘불멸의 민족혼’으로 칭송하고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는 자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를 중재하고 수습하였는데 이는 겸손과 높은 식견을 갖춘 선생의 영도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동지들이 증언하고 있다.선생을 두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임시정부의 총수’라고 일컬었던 것은 강직한 성품과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사상,그리고 애국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선생은 항상 남을 존중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은 뒷전에서 도와주는 미덕의 소유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기 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해 전덕기 목사를 알게 된 것을 늘 행복해 했다.또 그 시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창건한 사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전해오고 있다.1940년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5년 앞두고 이역만리에서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독립운동의 와중에서 참아왔던 지병인 급성폐렴이 악화된 탓이었다.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남겼다.선생의 장례는임시정부 수립 후 첫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해방 후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됐다.오늘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그 큰뜻을 되새긴다. 김석영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 [오늘의 눈]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는 역사왜곡

    지난 5일 창간 8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는 서울시내 곳곳에 세워진 창간기념 선전물을 통해 자사 신문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근대 이후 수많은신문이 명멸한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조선일보가 80년의 역사를이어온 것은 대견스런 일이며 또 축하할 만하다.그러나 조선일보가 자사 신문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신문’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이는 엄연한 역사왜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고종 20년) 10월 1일(음력) 통리아문박문국에서 순간(旬刊)으로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다.이 신문은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가 돌아와서 고종에게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역설,이듬해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발행됐다.그러나 이 신문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때 사옥·인쇄시설이 모두 불타 발행 1년만에 막을 내렸다.1886년주간신문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복간됐으나 이 역시 2년뒤 박문국 폐지와 함께 폐간된 이후 대를 잇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문제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는 신문 가운데어느 신문이 가장 역사가 오랜신문인가 하는 점이다.조선일보는 자사 신문이 가장 역사가 오랜 신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대한매일’은 올해로 창간 96년째를 맞고 있으니 조선일보보다 16년이나 역사가 더 오래 됐다. 대한매일은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편집인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후신이다.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 창간한 신문이긴 하지만 제작실무자는 양기탁 등 한국인 우국지사들이었다.또 구국항일의 논조에다 우리 땅에서 발행됐으니 ‘우리신문’이라는 점에서도 하자가 없다. 물론 대한매일신보가 한·일병합후 ‘매일신보’로 개제돼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사실,또 해방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다시 개제돼 역대 정권의 홍보지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같은 것은 여기서 논할 사안은 아니다.문제는 대한매일신보가 맥을 이어왔느냐 하는 점이다.2년전 서울신문은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호를 ‘대한매일’로 환원하였으며,작년에는 창간95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른 바 있다.조선일보는 창간기념 선전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신문’이란 문구를 거두기 바란다. 정 운 현 특집기획팀 차장
  • [김삼웅 칼럼] 일제시대 三節士

    역사나 민족문제에 무관심하다가도 3월이면 숙연해지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아직 봄이기에는 바람결 매운 이계절에 우리는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싸우다 가신 선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지도자들을 돌아본다.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자랑스런 한국인이 많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해방을맞았고 망국사를 독립운동사로 고쳐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는 변혁기나 국난기에 의롭게 희생된 지사들을 묶어 시대정신으로 받드는 전통을 갖고있다. 백제말 성충·흥수·계백의 삼충(三忠), 고려말 정몽주·이색·길재의 삼은(三隱), 청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다가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 살해당한 삼학사(三學士), 온몸을 던져 일제와 싸운 삼의사(三義士)가 대표적이다. 이런 전통으로 식민지시대 돈독한 학문적 바탕에서 절개를 지키면서 끝까지일제와 싸운 단재(丹齋)신채호, 만해(萬海)한용운, 심산(心山) 김창숙선생을삼절사(三節士)로 부르면 어떨까. ‘절개가 있는 사람’을 일컫는 ‘절사’가 어찌 이들 뿐이랴만 세분은 출생연도나 옥고·활동·업적에서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고, 생존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단재 탄생 120주년이고 만해와 심산은 119주년이다. 왜 삼절사일까. 본래 ‘삼절(三節)’은 공자가 주역을 너무 여러번 읽어서‘위편(韋編)’이 세차례나 떨어졌다는 ‘위편삼절’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또다른 의미는 “세가지의 뛰어난 일”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사나 사전적의미보다 ‘절개를 지키면서 싸운 선비’의 뜻에서 3절사로 부르고자 한다. 단재는 한말과 일제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언론·역사·독립운동을 한 흔치않은 인물이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권업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날린, 언론의 한 분야만으로도 독보적 역할을 했다. 조선상고사·독사신론·조선사연구초 등 사학자로서도 독보적 업적을 남기고‘조선혁명선언’집필 등 독립운동과 중국의 일제감옥에서 옥사당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대접 받는다. 만해는 동학운동에 뛰어들고 불교계 대표로 33인에 선정되어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쓰고, 신간회를 지도하고 불교관계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시문학과 불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님의 침묵’과 ‘불교유신론’을 쓰고 국내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창시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타협 노선을 견지했다. 독립운동·시문학·불교재건 등 각분야에서 독보적 역할을 했다. 심산은 매국노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고 파리강화회의 ‘파리장서’를 주도하고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을맡고 북경에서 단재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고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앉은뱅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건국동맹남조선 책임을 맡고 ‘자서종요(字書綜要)’‘벽옹70년회상기’등의 저술을 남겼다. 세분은 고결한 인품과 불굴의 독립정신,극심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신념을 지킨 한국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곧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다’는 동양의 전형적 지식인상이다. “아! 과거 수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는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할역사가 될 뿐이다.”(단재‘조선혁명선언’)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못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논개의 이름은 못씻는다.”(만해 ‘출옥 후 연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다.”(심산‘벽옹73년회상기’) 단재는 추운 겨울에도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 일본놈 천지에 동서남북어느쪽으로도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오기였다. 만해는 주위에서 성북동에 심우당이란 거처를 마련해주자 동남향 창문을 손수 뜯어 북향으로 고쳤다. 총독부가 보이는 쪽에 창문을 낼 수 없다는 독기였다. 심산은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까지 되어 평생을 병 속에 살아왔다하여 누군가 그를 벽옹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농을 한즉 그는 그후 자기를‘벽옹’으로 불렀다. 앉은뱅이도 자랑스럽다는 결기였다. 김삼웅 주필
  • 서대문형무소 역사 첫 고찰

    ‘현저동 101번지’.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왼편 언덕바지,현 독립공원 일대를 지칭한 지번이다. 조선왕조의 도읍을 한양(현 서울)으로 정한 무학대사는 일찍이 이 일대를 가리켜 “과연 명당중의 명당이나 한때 3,000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예언한 바 있다. 무학대사의 말은 과연 적중했다.‘한일병합’ 2년전이자 ‘헤이그밀사사건’ 이듬해인 1908년 10월 이곳에는 당시로선 ‘동양최대·최신 규모’의 경성(京城)감옥이 들어섰다.당시 이미 조선병합을 꾀하고 있던통감부는 장차 일제에 항거하는 ‘죄인’들이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미리이곳에 대형 감옥을 만든 것이다.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감옥의 대명사로 불렸다.그러나 놀랍게도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집 한권이 없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친일문제와 한국현대사를 천착해온 대한매일 김삼웅 주필(57) 이최근 출간한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나남출판)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처음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이 책은 김 주필이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97년 11월부터 금년 1월호까지 기고한 25회 분량의 연재물에 이승만 관련 부분을 보탠 것이다.저자는 집필과정에서 “관련자료의 절대부족이 가장 큰 애로였다”고 토로했다. 지난 88년 서울시가 옥사(獄舍)·담장·망루 등을 대거 철거,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지금 이곳은 한낱 놀이터로 변모하였다.그런 이곳을 저자는 당시자료와 증언을 통해 이곳이 대표적인 민족수난사의 현장임을 입증해 보이고있다.백범 김구·이승만 등을 비롯해 3·1의거만세·105인사건·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일제강점기 대형 독립운동사건에 연루된 애국지사들이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음을 당시 재판기록과 관련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64세의 노구로 사이토(齋藤實)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한말 의병장 허위·이강년 선생,유관순 열사,임시정부 노동국총판 김동삼 선생 등이 최후를 마친 곳도 모두 이곳이다.일제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자가 나서지 않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내평생 선생님의 시신만이라도 뫼실 수 있다면 큰 영광”이라며 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가슴 뭉클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의 행적만 살핀 것이 아니다.일제의 감옥정책,당시 일제가 사용한 형구(刑具),서대문감옥에서 애국지사들이 남긴 시·서한등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시정연보를 통해 당시 한국의 감옥실태 등 우리 행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도 곁들이고 있다.부록으로 여기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이 수록돼 있다.해방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후편에서다룰 예정이다. 저자는 “우리 학계가 독립운동사처럼 명분·명예가 따르는 연구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대문형무소 같은 ‘어두운 역사’는 언제나 망각,또는 배척의대상이 돼 왔다”고 말했다.값 1만5,000원. 정운현기자 jwh59@
  • 이완용 작성 ‘경고문’ 원불 첫 공개

    1919년 3·1의거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민중들을 협박,사태를 진정시킬목적으로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 작성,배포한 ‘경고문(警告文)’원본이 3·1의거 81주년을 맞아 공개됐다.3·1의거 당시 조선총독 등 일제당국 명의의 경고문이 배포된 적은 있으나 조선인 명의의 경고문은 이완용의 것이 유일하며 실물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특히 이 경고문에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인의 급선무로 ‘실력양성론’을 언급한 대목이 포함돼 있어 일제통치사·친일파 연구의 사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28일 한국장서가협회 신영길(辛永吉·75) 회장이 공개한 이 ‘경고문’은가로 39㎝,세로 40㎝ 크기의 전단형식으로 문체는 국한문 혼용.저작및 발행자는 ‘백작(伯爵) 이완용’이며,인쇄자는 이완용과 동일주소(경성 옥인동 19번지) 거주 김창근(金昌根)의 명의로 돼 있다.경고문의 발행일자는 대정(大正) 8년(1919년) 5월 30일로 3·1의거 발생 만 3개월이 되는 시점이다.이 경고문은 이완용이 “근래 각 지방의 소식을 들은즉 소요(만세시위)가 점차로안정되고 있다”고 밝혔듯이 만세시위가 진정국 면을 맞고 있던 시점에 나온,‘소요’사태 수습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과 일본은 상고 이래 동종동족(同宗同族)·동조동근(同祖同根)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한일병합은 역사적 운명이자 세계적 대세의 결과”였다고 평가하고 “조선인들이 이번 소요사태를 뉘우칠 경우 일본인들도 반감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있다. 이 경고문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이완용이 만세시위 이후 전개될 일제의 통치노선의 변화를 예고한 대목이다.그는 “지방자치,참정권,교육,집회·언론문제는 조선인들의 생활및 지식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얻을 수 있을듯 하다”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실력양성”이라고 결론내렸다.이완용의 이같은 견해는 3·1의거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이 민심수습책으로 소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그 일환으로 지방자치제 실시·민간지 발행 등을 허가함으로써 상당 부분 실행되었다. ‘이완용평전’의 저자 윤덕한씨(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이완용이언급한 참정권·실력양성론 등은 그후 민족진영에서 일제에 투항,변절한 친일파들에게 교과서적인 변절논리로 작용하였다”며 “이광수 등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부르짖은 실력양성론의 원조는 바로 이완용”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이완용의 ‘경고문’은 제3차로 발표된 것으로 그는 만세시위가 한창이던 4월 5·7일 이미 두 차례나 경고문을 발표했다.당시 백작이던 그는 이같은 공로로 이듬해 후작으로 승급하였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2·8독립선언과 노애국지사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서리고 서린 산맥 가운데 위연히 솟은 한 고봉(高峰),이 봉우리 위에 서서 보면,외세의 침노 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생성 발전해온 우리 민족의 발자취가 멀리 가까이 제자리를 드러내면서 부각된다.3·1운동은 우리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호수,이 이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이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천관우,‘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편집후기) 3·1운동은 근대 민족운동사의 거대한 호수다.그렇다면 3·1운동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한다.재일 유학생들은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오전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도쿄 주재 각국대사관,일본정부,중의원,조선총독부에 보내고 오후 2시 500여 회원의 환호속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유학생 거의 전원이 모인 이날 독립선언회의에서 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토의하려다가 일경에 강제해산당하고 실행위원들은 체포되었다.이에 앞서 송계백과 최근우가 선언서 일부를 국내로 반입하여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게 전달,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재일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YMCA 건물은 그동안 부채로 존폐의 위기에 있던 것을 지난 연말 정부가 21억6,000만원을 지원하여 은행빚과 건물지하공사비를 갚게 되었다. 스가모감옥터의 노애국지사들 2월 8일 도쿄 YMCA 회의실에서는 2·8독립선언 81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재일본 한국 YMCA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에서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과 이강훈(李康勳) 전 회장 등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후손 40여명이 참석하여 기념식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동경한국학교 초등부 어머니합창단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불러 참석자들을 숙연케 만들었다.행사후 가진 간담회에서 유학생 대표들은 활자로만 읽었던 노애국지사들과의 대면을 감격스러워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학생운동의 진로 등을 물었다. 다른 외국에 비해 ‘재일유학생’의 존재는 유별하다.그것은 한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유학생중에 매국노로 변신하거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학생중에 악질 친일파가 된 경우, 일제시대 많은 유학생들이 총독부 관리나 법관이 되어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해방후에는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때문이다.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유학생들은 이 부분에서 갈등을 느낀다고 했다.그래서 말했다.같은 물을 소가 먹으면 젖을 만들지만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든다,어찌 일본유학생들뿐이겠는가.국내외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친일파가 되고 독재의 주구노릇을한 다른 쪽에서는 의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다,역사가 어느 쪽을승자로 기록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라고. 방일 첫날 노애국지사들은 일제식민지 시대 많은 한인애국자를 수감하고 처형한 스가모(巢鴨)형무소를 방문했다.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이봉창·김지섭 의사 등이 옥고를 치르다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이강훈 옹도 13년 옥살이를 했다.노애국지사들은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살피고, 우리 애국선열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에는 생존 지사들의 흐느낌이 배어 2월의 차디찬 스가모 공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이곳에서 숨진 선열들을 기리는돌비석 하나라도 세웠으면. 도쿄헌책방의 노애국지사들 유학생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한 학생이 물었다.생존애국지사들이 대부분7,80 고령인데 사후 광복회의 존립문제와,일제와 맞서 싸운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독립운동사가 먼 망각의 역사로 퇴락하고 있는 터에 이를 잇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찌 일본유학생들만의 의문일까만 나는 예상외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다.행사를 마치고 도쿄 번화가에 즐비한 헌책방에서 삼삼오오로 만난 우리 노애국지사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찾는 일제시대의 자료와 일본을 알아야 한다면서 푼푼이 모은 용돈으로 일본현대사의 신간을 사는 모습에서,“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것을.-일본 도쿄에서[김삼웅 주필]
  • [시론] 유길준과 커즌

    최근 두 권의 책을 읽었다.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커즌(George Curzon)의‘극동의 제문제’라는 책이다.유길준은 100년전 한말의 격동기를 살았던 학자요,정치가요,개화운동가로서 1880년에는 일본 게이오대학에서,1883년에는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했고 1884년 유럽을 거쳐 귀국하게 되는데 그때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기록한 책이 ‘서유견문’이다. 커즌은 유길준과 거의 동시대의 사람으로 영국에서 태어나 인도 총독,옥스퍼드대 총장,외무장관을 지낸 학자요,정치가요,외교관이다.그가 1880년대와90년대에 두 번 극동을 여행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고종,이홍장 등을 만나면서 당시 일본,조선,중국의 정치상황을 비교·분석한 책이 ‘극동의 제문제’이다. 먼저 커즌의 책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가.필자는 이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시 조선에대한 지독한 표현들에 자주 비분강개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명약은 입에 쓰다”는 격언을 의지하여 당시 그의 우리에 대한 표현을 책에 나오는 순서대로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나가사키 사이에서 함부로 차이는 축구공’,‘관공서는 나라의 원기를 북돋우는 기능 대신에 무고한 백성의 피를 착취하는 기능을 한다’,‘저주스러울 정도로 조선을 황폐화시킨 관료주의’,‘구태의연하고 고집불통인 조선이라는 나라’,‘동아시아의 민족들 중 가장 무기력하고 생기없는 조선민족’,‘조선보다 개혁을 더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한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것’ 등.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에게 치명타를 가하고있다.“조선의 개혁이란 마치 시지푸스의 신화와도 같다.온갖 힘을 다하여땀을 뻘뻘 흘리며 꼭대기까지 밀어올린다고 할지라도 시지푸스의 바윗덩어리는 또다시 굉음을 내며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또 하나의 충격이 있었다.그것은 외국에서 오래 사는어느 분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던 내게 들려주던 말이었다. “나는 세계의 수도에 살면서 한국을 잘 안다는 여러 지식인들을 만났는데아직도 그들의 우리에 대한 솔직한 시각이 커즌의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진것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는 계속해서 “중국속담이 있지요. 옷을 바꾸는데100년, 말을 바꾸는 데 200년, 생각을 바꾸는 데 500년, 행동을 바꾸는데 천년이 걸린다고요” 이어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오늘의 우리에게 두 가지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첫째,나라의 개혁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뜨거운 열정이다. 지금부터 100년전에 그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 사람이 없는것이다.천자도 사람이고 필부도 또한 사람이니 천자니 필부니 하는 것은 이세상의 법률이나 윤리로 지위의 구별을 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그리고 국가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 “천하의 어떤 나라든지 그 거칠고 어두운 옛날의사물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풍속이 야만적인 부락과 어찌 다를 것인가”라고 갈파하고 있다. 둘째,나라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그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역설하면서 “정부 안에 더럽고 욕된 일이 있어도국민들 사이에 씻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지 않으면 모든 일에 구차한경영과고식적인 꾀를 제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급기야는 “착한 국민 위에 나쁜 정부 없고,나쁜 국민 위에 좋은 정부가 있을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라틴어로 개혁의 의미에는 목숨을 바치지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한다.몇년 전 어느 역사가가 “우리에게는 성공한 혁명은 있어도 성공한 개혁은 없다”고 했는데 새천년의 역사에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기필코 성공한 개혁의 기록을 남겨야 하리라.유길준과 커즌이 어느 곳에선가 만났다면 그들은 오늘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있을 것인가. 이계식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장
  • 윤수열씨 ‘용 불멸의 신화’ 펴내

    새 천년 첫 해는 경진년(庚辰年)으로 ‘용의 해’이다.12지(支) 중 유일하게 실존하지 않는 동물인 용은 호랑이와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상서(詳瑞)로운 존재로 여겨져왔다. 최근 나온 ‘용(龍) 불멸의 신화’(윤수열 지음·대원사)는 저자가 십수년간 예리한 관찰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모은 용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용의 해를 맞아 펴낸 것이다. 책은 5개 장으로 나뉘어 있다.‘상징과 의미’에서는 한국인의 의식과 역사에서 용이 갖는 전체적인 의미를 조명했다.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 쓰여진 용의 생김새와 수십가지로 분류되는 용의 종류를 분석했다.또 대표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왕권과 불교에서 용이 갖는 상징성을 이야기했다. ‘용의 기원’에서는 용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뱀에서비롯됐다는 설과 토테미즘이 낳은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설,공룡의 이미지를차용한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미술작품으로 해석한 용의 신화’에서는 머릿 속으로만 그려오던 용을 다양한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우리와중국,일본 등 세 나라의 용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 지도 비교했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용’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선조들이 용에 관해 가져 온 생각의 흐름을 조망했다.삼국유사에서 나타난 용은 개국 설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왕권의 상징인 동시에,왕이 죽어 용으로 다시 태어나 나라를 지켜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조선시대 말에이르러서는 왕권에 대한 상징성이 약화된 반면,서민들의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됐다. ‘민속학의 용’은 용과 관련된 자료를 담고 있다.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간신앙 속의 용,민속놀이에 차용된 용,용 글자가 들어 있는 지명에 얽힌유래와 전설,용꿈과 속담 등이 망라돼 있다.작가는 용이 지배계층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 아닌 민중의 애환을 안고 보듬어 주는 존재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부록으로는 1861년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전국의 용 지명과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수집한 조선전도부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面里洞名稱一覽)에 기록된 것을 비교했고 용 글자가 들어가는절 이름도 따로 모았다.이와 함께 민화나 문자도,대문 등에 붙어있던 용 그림과,도자기나 각종 불구(佛具)에 새겨진 용 조각 등 240여 컷의 컬러 사진을 넣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값 2만2,000원. 김명승기자 m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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