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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 100주년- 학술대회·지면분석]

    서울신문이 국내 현존 언론 중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독립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에도 바른 보도로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신보에서 시작되는 민족언론의 뿌리가 서울신문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이 시대에 대한매일신보가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학술회의가 지난 7일 열렸다.서울신문사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다. ●정리 논설위원실 1. 창간의 역사적 의의 /정진석 외대 명예교수 대한매일신보 창간 이래 오늘날까지 100년을 이어온 발자취는 한국 현대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암과 굴절이 많았다.이 신문이 한국의 언론사와 더불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고 중요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강의 침탈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창간돼 1904년부터 6년 동안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력한 항일언론을 펼쳤다.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는 매일신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됐다.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재출발했다가 한때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고,이제 또다시 서울신문이 됐다.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굴절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신문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자 소유주였던 배설이 영국인이었고,그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발행인 배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영국인이었기에 대한제국의 법률로는 처벌할 수 없었으며,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도 그를 추방하거나 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수 없었다.대한매일신보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됐다. 한국의 민족진영은 이 신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성원했다.반면에 일본은 이 항일신문을 침략정책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여겼다.영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치외법권을 손상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영국과 일본이 처음에는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 또는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결국은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하는 재판에 회부하게 됐다.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던 한말에 있었던 재판은 다섯 차례나 됐고,한국·영국·일본의 법관이 이를 다루었으며,재판 장소도 서울과 상하이까지 걸치게 됐다.재판은 한일병합 후까지 계속됐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기도 했고,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은 논설로써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으로는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따라서 이 신문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말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신문의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국한문·한글·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자주개화운동의 근본으로서 한글 사용을 주장했다.또한 지면에 실린 항일 시가(詩歌) 등은 국문학상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을 고종 또는 민족진영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나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경영한 주체는 배설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고종이나 민족진영의 자금지원이 있었지만,그것이 신문발간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울신문을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과거의 역사로부터 단절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관(史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그것은 언론의 역사를 민족사관(民族史觀)에서 파악하는가,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증사관(實證史觀)의 입장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1945년 11월23일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뀔 때에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이어받아 13738호부터 시작했다.제호는 바뀌었지만 신문의 역사는 계승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 3월23일부터는 매일신보의 역사를 단절하고 지령을 다시 조정했다. 1998년 11월11일부터는 단절시켰던 과거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지령도 새롭게 계산했다.대한매일신보를 지령에 넣되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부분은 지령에서 뺌으로써 매일신보를 건너뛰고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혔다.2004년 1월1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환원했다.이 날짜 지령은 20095호로 역시 한말 대한매일신보 지령을 합친 것이다.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역사를 이은 것이다. 2. 참여인물·언론사상/박정규 한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한 인물 중 배설과 양기탁에 대해서는 완벽할 정도로 연구가 이뤄져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객이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재직 기간 중 활동,지사(支社)설치 상황과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또,기명이 안된 사설의 집필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배설은 영문 논설이나 기사 외에 국한문판 신보에 직접 집필한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배설이 한국어로 쓴 기사라기보다 한국인 기자들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배설의 이름을 빌려 사회문제 등에 대해 맘껏 필봉을 휘둘렀다고 보아야 한다. 박은식은 성리학자였던 만큼 전통 한문체의 글을 썼다.1907년 박은식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신채호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논객이다.신채호는 애국사상이 담긴 특유의 선동적 문장을 통해 국민들의 국권회복 정신을 북돋우는 등 독자를 감동시켰다.양기탁의 글로 알려진 ‘학계(學界)의 화(花)’ 등 2편의 논설은 집필시점과 문체로 보아 신채호가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 경영 외에 국채보상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해 논설집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보는 국한문판 발행을 본격화하면서 1905년 평양,선천,장련 등 관서재방 세 곳에 최초의 지사를 설치하게 된다.장련의 지사는 백범 김구가 운영했다.1908년 평양 태극서관 지사장을 맡은 안태국은 교사이자 이 지역 신민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신보의 전국 지사 중 절반이 평안도에 집중 돼 있었던 것은 총무 양기탁이 이 지역 출신이었고 안태국과 같은 지사원의 활약에 힘입었기 때문이다.1910년 6월 전국 지사 수는 59개소,지사원은 250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신민회의 지방거점,국권회복운동가들로 추정할 수 있다.회계 임치정은 양기탁이 가장 신임한 동지였다.이완용 암살미수사건,신민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신채호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3. 국채보상운동 주도/이연 선문대 교수 차관을 이유로 조선민중을 식민지의 올가미에 옭아 매려는 일제의 획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현 수창초등학교 뒤 대성사 자리)에서 시작됐다.“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우리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강점하의 물산장려운동이나 해방 후 국산품 애용운동,1998년 IMF 이후의 금모으기 운동처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운동으로,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운동이었다.최초 발의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나,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농민들이나 봇짐장수,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적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을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게 동력이 됐다.이 신문들은 기사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와 당위성을 호소하면서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 및 납부금액을 게재해 온 국민들의 동참을 역설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조선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개탄했다고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조선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면서 갖은 탄압과 모략을 획책했다.일제는 을사 5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용구 등 친일파를 동원해 반대하는 책동을 일으키게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 배설 사장과 양기탁 총무는 이러한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일제는 결국 이들의 언론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배설의 국외추방과 양기탁을 탄압해 제거하기에 이른다. 4.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논설/김덕모 호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평가된다. 제1기는 창간 때부터 1905년 3월10일 일시 휴간 때까지의 시기이다.6면중 4면은 ‘The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영문면을 만들고,나머지 2면은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로 국문면을 만들었다. 제2기는 대한매일신보를 속간하기 시작한 1905년 8월11일부터 1907년 3월말까지의 단계다.이 시기에는 ‘을사5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제3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기 시작한 1907년 4월 초부터 대한매일신보사가 이장훈에게 팔려 양기탁 등 신민회 간부들이 대한매일신보사를 떠난 1910년 6월13일까지의 시기다. 제4기는 배설에 이어 사장직을 승계한 만함이 일제의 공작에 말려들어 회사 일체를 사원 이장훈에게 매도하고 귀국해버린 1910년 6월14일부터 일제가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병합하여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켜버린 1910년 8월29일까지의 2개월 반 간의 기간이다. 제1기에는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국가의 안녕질서에 대한 모든 주제에 대해 공평한 변론을 전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2기는 한국인의 문명지식을 계몽하고 세계 각국에 대한 견문을 공유하기 위한 개화의 목적에 역점이 두어졌다. 제3기 이후는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에 초점을 맞춰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가 개화기 구국계몽운동의 선봉이 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에 광무신문지법에 의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어왔다. 그러나 신용하 교수 등의 연구는 이러한 외적요인에 더하여 대한매일신보가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기관지가 된 이후 더욱 과감하게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논설 분석 결과로도 입증된다. 이 시기 논설은 민족의 자립정신,교육과 나라정신,산업진흥,친일언론과 단체에 대한 비판,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식민 지배를 감추기 위한 기만책임을 통렬히 비판하고,국채보상운동,헤이그 특사 파견,고종황제 퇴위,한일병합조약,동양척식회사 설립 등 역사적 사건을 맞을 때마다 과감하고 열렬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제 오늘의 신문들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5.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광고/안종묵 외대 연구원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게재했다.사기업인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의 안정적인 발행을 위해 광고가 중요했다. 창간 초기의 광고료는 1인치에 50전이었고 한달에 5원이었다.발행부수가 다른 신문의 3배 이상이어서 광고의 효과면에서 대단히 컸다.한글과 영문이 혼용된 6면이 발행된 시기에는 운수광고(16%),은행(14%),잡화점(9%) 등이 주요 광고주였다.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 13%,외국이 43%,미상이 44%다. 1907년 5월23일부터 발행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는 그해 하루 평균 5.26개이던 것이 1910년에는 10.25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대 광고업종은 약국,서적,사고광고 등이었다.약국 가운데 이응선의 종로 화평당약방과 이경봉의 남대문 제생당약방이 최대 광고주였다. 서적광고는 전체의 16.5%를 차지했다.애국계몽운동가인 이승훈이 운영하던 태극서관이라는 서점 광고가 집중적으로 등장했다.‘국한문신옥편’이라는 실용적인 서적부터 ‘서사건국지’‘애국부인전’ 등 국권회복을 자극하는 계몽적 성격의 서적들이 광고됐다. 1908년과 1909년에는 사고(社告)광고가 많이 등장하는데 명함 인쇄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사고였다.국채보상운동 취지를 제일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흥미로운 것은 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촉구하고 있을 때 일제 담배광고가 많이 광고되었던 점이다.이는 광고가 국채보상운동과는 큰 관계없이 운영되었음을 말해준다. 6.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독자 인식/김영희 서울대 강사 대한매일신보 독자들이 투고한 기서(寄書)에서 신문에 대해 가장 자주 요구한 것은 춘추필법으로 공정하게 계도하는 엄한 스승으로서의 언론의 모습이었다.다음으로 많이 주문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는 문명진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이 두 요인 또는 인식은 지금까지 개화기 신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설명된 것으로,이 시기 신문발행에 참여한 발행 주체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 일반 신문 독자들의 인식으로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로 자주 언급된 것으로 신문이 독립자유의 감발심(感發沈)을 격동케 하고,새로운 자각을 유발시킨다는 인식이었다.이러한 인식은 신문의 춘추필법과 지식 제공으로 자극을 받아 생성되는 기쁨,감격,분노,안타까움,흐뭇함 등의 정서적 반응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은 독자들이 남긴 다양한 글에서도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황현은 대한매일신보를 설명하면서 “각 신문사에서도 의병들을 폭도나 비류(匪類)로 칭하였지만 오직 매일신보는 의병으로 칭하며,그 논설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모두 폭로하였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 상태에까지 이르렀고,1년도 못되어 매일 간행되는 신문이 7000∼8000장이나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읽었던 김윤식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통쾌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이러한 논의들은 신문의 공공성을 지키면서 보도와 논평 기능을 통해 환경을 감시하고,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을 개명 진보로 이끌고자 한 대한매일신보의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한 대한매일신보의 모습을 신문의 전형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준다. 7.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잡보(사회면)/채백 부산대 교수 오늘날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하는 것이 ‘잡보’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 중에서는 사실보도가 전체의 76.1%를 차지했다.반면 의견이 개입된 기사,즉 사실+해설과 해설기사를 합치면 전체의 14.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독립신문의 분석결과와 비교해 보면 의견기사가 줄어들고 사실보도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부 관련 정보였다.전체의 24.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문제,유명인사 동정,관의 비리와 폐해 순서로 나타났다.사회문제 기사에서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활발했던 의병 관련 기사나 교육 관련 기사가 포함됐다. 독립신문에서는 해외토픽류의 흥미 위주의 기사가 있었지만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런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반면 일식이나 태풍,자살 기사 등이 ‘사고와 흥미거리’ 기사에 포함됐다. 잡보란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관련지역을 보면 한성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아 전체의 59.6%에 이른다.그밖의 지역은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외국에 대해서도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특히 일본이 가장 많았다. 잡보기사의 주인공도 다양했다.잡보 기사의 주인공으로는 지식인과 단체가 26.3%로 가장 많았고,그 다음으로 왕실과 정부가 22.3%를 차지했고,일반인이 15.6%로 그 뒤를 이었다. 잡보기사의 보도태도를 긍정,중립,비판 세가지로 분류해보면 긍적적이 6.8%,중립적이 85.8%,비판적이 7.4%의 분포를 보였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에 나타난 주요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기사의 건수가 독립신문에 비해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지면의 판형이 커지고 단수가 늘어나는 등의 외형적 요인 외에도 신문이 정착기에 들어가면서 취재여건이 다소나마 좋아졌던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다음으로는 사실보도와 중립적 보도태도가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이는 신문이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객관저널리즘에 좀 더 접근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사실보도 위주로 가면서 단위 기사의 분량도 점차 짧아지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세번째로는 기사의 관련 지역이나 주인공,정보원 등에서 특정의 편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이다.지역면에서는 한성,주인공이나 정보원 측면에서는 정부나 관리에 대한 의존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겠습니다

    서울신문이 2004년 7월18일로 창간 100주년을 맞습니다.창간 100주년을 맞는 신문은 한국언론 사상 서울신문이 처음입니다.우리는 이 기쁨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 지난 100년을 거울삼아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 가고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정론의 선봉에 선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과 지령을 승계하고 있습니다.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김구 등 선각자들이 신문 창간과 제작,보급에 참여한 대한매일신보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대한제국 말기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한 구국언론이었습니다.최초의 시민운동이라 할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실질적인 본부 역할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확산시키고 민족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로 대한매일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했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신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매일신보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출범한 서울신문은 창간호가 아닌 혁신속간호를 냅니다.지령도 1호가 아닌 제13738호였습니다.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은 것이지만 일제의 유산인 매일신보를 청산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서울신문에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두분(오세창 사장,권동진 고문)과 한국역사 소설의 기념비적 걸작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고문),어문학계의 권위자였던 그 아들 홍기문(편집국장) 등이 참여했습니다.좌우 이념대결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서울신문은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공정한 보도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 수립에 기여했습니다. 서울신문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국내 최초로 조석간제를 실시했는가 하면 1960년대 순 한글신문을 만드는 등 한글전용과 신문말 다듬기에 앞장섰고 1980년대 최초로 컴퓨터 조판 시스템을 도입해 뉴미디어 시대의 첨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의 지난 100년은 영광과 함께 오욕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대한매일신보가 일제 치하 매일신보로 전락했듯이 서울신문의 혁신속간 정신은 독재정권 아래서 퇴색했습니다.그래서 ‘권력의 나팔수’라는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고 4·19혁명 때 성난 시위대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참담한 비극도 겪었습니다. 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바탕으로 1998년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이름을 바꾸고 2002년 사원들이 제1대 주주인 민영화를 이루어 냈습니다.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공정보도를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올해 초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하고 창간 100주년을 맞이합니다.우리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영욕의 역사를 겸허히 되돌아 보면서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 나가겠습니다.100년은 한 세기를 접고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관행적 사고로는 따라잡기 힘든 질적 대전환의 시기에 놓여있습니다.서울신문은 시대정신을 이끄는 신문으로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 하겠습니다.국민과 국익을 비추는 세상의 등불이 되겠습니다. 서울신문의 사시는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공공 이익과 민족 화합에 앞장선다”입니다.따라서 서울신문은 무엇보다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민족 화합과 민족 공동체 회복에 더욱 앞장서면서 통일지향의 중도적 진보 노선을 유지해 가겠습니다.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한 보도로 정치개혁을 이끌고 지역·계층·세대간 갈등 해소는 물론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신장에도 힘을 쏟겠습니다.자유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하는 경제구조가 정착되도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민생을 먼저 생각하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항상 독자의 편에서,진실의 편에서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가겠습니다. ˝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6)항일 논객 장도빈 주필

    장도빈 선생은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천년 가까이 잠자고 있던 발해(699∼926)를 처음으로 찾아낸 역사학자이다.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한 1908년 약관의 나이에 박은식 선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발탁됐고 와병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였다.그의 글로 알려진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후 신보가 일제에 의해 문을 닫기 전까지 3년 동안 단재와 ‘친동기 이상’의 친분을 쌓았고 그의 영향으로 역사에 눈을 떴다.양기탁 선생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밀리에 신민회에 가입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신한촌 여관방에서 단재와 동고동락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라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로 스며들었다.회고록에서 “신한촌에서 단재 선생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동고동락했다.”고 적고 있다.단재 선생이 주필로 있던 권업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물 설고 낯선 땅이었지만 1910년대 연해주 신한촌에는 선생을 비롯,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주역 5명중 배설(1909년 서거) 선생을 제외한 전원이 엇비슷한 시기에 드나들며 몸을 의탁했었다.마치 대한매일신보사를 연해주로 옮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천년 동안 잠자던 발해를 깨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 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양대 성지로 꼽힌다. 선생은 이곳의 옛 지명이 쌍성자(雙城子)였던 사실에 주목,틈 날 때마다 답사했다.당시 한인들은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쌍성자(우수리스크),수청(水淸·빨치산스크),추풍(秋風·수이푼),연추(延秋·크라스키노),동개터(나홋카),지신허(地新墟·치진헤)처럼 러시아 지명을 쓰지 않고 고구려,발해 때부터 전해내려 오던 한국지명을 썼다. 선생이 성벽,해자,절터 등 유적을 찾아내 발해의 동경성터로 추정했던 곳은 현재의 크라스노야르 성이다.성안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잡고 있어 크기와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성밖에는 토성이 남아 있었다.성을 감싸고 흐르는 수이푼강은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해자였다.성은 지명 그대로 남성(南城)과 서성(西城) 등 2개의 성(雙城)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쪽 성은 시가지에 편입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지만 남쪽 성의 절터에 방치돼 있는 4개의 현무암 주춧돌과 발해식 축성법을 보여주는 토성 일부는 아직 남아 발해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지난 1995년 우수리스크 일대를 발굴한 러시아 극동고고학연구소는 성내부의 경사면에 위치한 집터에서 온돌구조를 찾아냈다.9세기 당백자(唐白磁) 도편도 출토돼 발해시대 문화층 존재가능성이 확인됐다. ●극동대학엔 장도빈기념관이 우뚝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아데우스카야 56번지에 위치한 극동대학 동양학부는 1899년에 세워진 동양학의 산실이다.무려 10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학 건물 옆에 한국학대학이 서있다.건물 이름은 ‘장도빈 기념관’이다.선생의 아들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이 사재를 들여 지었다. 선생의 ‘고토(古土)’ 발해에 대한 집착이 연해주를 대표하는 극동대학의 건물 이름으로 현재화한 것이다. ■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틀)=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이춘규 특파원 ●중국 및 러시아(상하이,다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노주석 이언탁 박지윤 특파원˝
  • 세운상가, 선망의 대상서 애물단지로

    종로 세운상가 일대가 재개발되고 있다.세운상가는 일제시대,60∼70년대 개발시대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세운상가는 60년대 후반 개발당시만해도 “마치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배처럼 꾸며진다.”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지금은 흉물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했지만 세운상가는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김수근씨가 최신 건축사조를 끌어들여 만든 최첨단 건물이다.여기에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집합주택과 다층도시의 공중가로 개념이 도입됐다. 남북으로 1㎞에 이르는 세운상가는 ‘꿈의 도시’를 표방했다.5층에는 인공대지가 조성되고 콘크리트의 투박한 외양을 감쌀 유리덮개와 3층 보행자 전용도로,지구별 동사무소,파출소,우체국 등이 계획됐다.옥상에는 초등학교와 정원을 만들어 독립타운의 토대를 구상했다.하지만 국민소득이 고작 114달러에 불과했던 당시 상황에 8개 기업군으로 분할된 소유권을 고려하면 무리한 발상이었다. 세운상가의 형성은 일제 강점기의 방공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945년 3월10일 도쿄대공습 이후 조선 총독부는 폭격으로 인한 대형 화재를 막기 위해 시가지에 빈 공터를 마련했다.이때 만들어진 19개 소개공지·도로 가운데 서울역∼회현동,필동∼신당동,서울역∼충정로는 한국전쟁 복구때 포장됐지만 종묘∼필동,경운동∼낙원동∼종로에 이르는 구간은 방치됐다.한국전쟁이 끝난 뒤 종묘∼필동 구간은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서 사창가로 변모했다. 너비 50m,길이 1180m에 면적 1만 5151평의 거대한 도심 공간에는 2200여채의 무허가 판잣집이 무질서하게 거대한 슬럼을 형성했다.‘불도저’로 불렸던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7년 개발계획에 착수한다.‘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세운상가라고 상가명을 짓고 35세의 김수근과 의기투합했다. 대지 4933평에 연면적 6만 2284평,2000개가 넘는 점포와 사무실,177개 호텔 객실,주택 851개가 혼재된 거대 타운은 청계천 상인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세운상가는 1966년 9월8일 착공해 1968년까지 건물들이 하나씩 준공된다.물건 값이 쌀 뿐만 아니라 최첨단 시설의 세운상가는 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다.게다가 승용차가 1만∼2만대 밖에 없었던 때라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세운상가 5∼13층 아파트는 인기 최고였다.18.3평과 25.5평이라 국민주택 규모에 불과하나 당시 사회저명인사들은 앞다퉈 입주했다. 그러나 70년대 신세계,미도파가 세를 확장하고 79년 롯데쇼핑이 등장하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세운상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70년대 후반부터 터져 나왔다.도심의 볼썽 사나운 건물군은 북한산∼비원∼종묘∼남산∼용산∼한강을 잇는 녹지축을 잘라 놓았다.게다가 도심의 맥이 청량리에서 동대문을 거쳐 광화문과 신촌·마포를 잇는 것과도 배치된다. 최근 서울시는 종로구 예지동 85번지 일대 ‘세운상가 4구역(세운상가 동편)’을 업무·주거·상업·숙박·문화·집회 시설 등의 복합단지로 개발하겠다고 밝혔다.이 계획이 끝나는 2008년부터 시는 지주들과 협의를 거쳐 세운상가를 광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세운상가, 선망의 대상서 애물단지로

    세운상가, 선망의 대상서 애물단지로

    종로 세운상가 일대가 재개발되고 있다.세운상가는 일제시대,60∼70년대 개발시대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세운상가는 60년대 후반 개발당시만해도 “마치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배처럼 꾸며진다.”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지금은 흉물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했지만 세운상가는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김수근씨가 최신 건축사조를 끌어들여 만든 최첨단 건물이다.여기에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집합주택과 다층도시의 공중가로 개념이 도입됐다. 남북으로 1㎞에 이르는 세운상가는 ‘꿈의 도시’를 표방했다.5층에는 인공대지가 조성되고 콘크리트의 투박한 외양을 감쌀 유리덮개와 3층 보행자 전용도로,지구별 동사무소,파출소,우체국 등이 계획됐다.옥상에는 초등학교와 정원을 만들어 독립타운의 토대를 구상했다.하지만 국민소득이 고작 114달러에 불과했던 당시 상황에 8개 기업군으로 분할된 소유권을 고려하면 무리한 발상이었다. 세운상가의 형성은 일제 강점기의 방공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945년 3월10일 도쿄대공습 이후 조선 총독부는 폭격으로 인한 대형 화재를 막기 위해 시가지에 빈 공터를 마련했다.이때 만들어진 19개 소개공지·도로 가운데 서울역∼회현동,필동∼신당동,서울역∼충정로는 한국전쟁 복구때 포장됐지만 종묘∼필동,경운동∼낙원동∼종로에 이르는 구간은 방치됐다.한국전쟁이 끝난 뒤 종묘∼필동 구간은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서 사창가로 변모했다. 너비 50m,길이 1180m에 면적 1만 5151평의 거대한 도심 공간에는 2200여채의 무허가 판잣집이 무질서하게 거대한 슬럼을 형성했다.‘불도저’로 불렸던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7년 개발계획에 착수한다.‘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세운상가라고 상가명을 짓고 35세의 김수근과 의기투합했다. 대지 4933평에 연면적 6만 2284평,2000개가 넘는 점포와 사무실,177개 호텔 객실,주택 851개가 혼재된 거대 타운은 청계천 상인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세운상가는 1966년 9월8일 착공해 1968년까지 건물들이 하나씩 준공된다.물건 값이 쌀 뿐만 아니라 최첨단 시설의 세운상가는 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다.게다가 승용차가 1만∼2만대 밖에 없었던 때라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세운상가 5∼13층 아파트는 인기 최고였다.18.3평과 25.5평이라 국민주택 규모에 불과하나 당시 사회저명인사들은 앞다퉈 입주했다. 그러나 70년대 신세계,미도파가 세를 확장하고 79년 롯데쇼핑이 등장하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세운상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70년대 후반부터 터져 나왔다.도심의 볼썽 사나운 건물군은 북한산∼비원∼종묘∼남산∼용산∼한강을 잇는 녹지축을 잘라 놓았다.게다가 도심의 맥이 청량리에서 동대문을 거쳐 광화문과 신촌·마포를 잇는 것과도 배치된다. 최근 서울시는 종로구 예지동 85번지 일대 ‘세운상가 4구역(세운상가 동편)’을 업무·주거·상업·숙박·문화·집회 시설 등의 복합단지로 개발하겠다고 밝혔다.이 계획이 끝나는 2008년부터 시는 지주들과 협의를 거쳐 세운상가를 광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이경형칼럼] 창간호 없는 서울신문

    오는 18일은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그런데 어떤 이들은 “웬 100년?” “100년 전에 서울신문이 있기라도 했느냐.”고 퉁명스럽게 되묻곤 한다. 얼른 듣기엔 말이 된다.그러나 서울신문 창간 제1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귀를 쫑긋 세운다.‘서울신문’이라는 제호의 신문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광복을 되찾은 1945년,그 해 11월23일 처음으로 발행되었으나,지령은 제1호가 아닌 제13738호였다.1904년 구한말,항일 구국 언론의 표상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창간호로부터 기산하여 일제에 강제 매수된 매일신보 지령까지 더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 사장 등 당시 서울신문 주역들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신보를 ‘혁신 속간’한다고 천명했다.“일제의 괴뢰였던 매일신보의 성격을 완전히 불식하고,해방 조선의 대변기관으로 새 출발한다.”고 밝혔다.초대 주필이었던 이관구는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의 법통을 이은 적자(嫡子)”라고 규정하면서 구국 독립언론의 정신을 계승할 것임을 공표했다. 서울신문의 지령은 그 후 자유당 말기인 1959년 3월,야당 의원의 필화(筆禍)사건을 둘러싼 민족정기 논란을 계기로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버리고,1945년 ‘혁신 속간’호부터 계산하여 새로 지령을 매겼다.그러다가 1998년 11월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하면서 매일신보 지령을 제외하고 대한매일신보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했다.총독부기관지 노릇을 한 시기의 지령을 계승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올해 1월1일자로 제호가 대한매일에서 다시 서울신문으로 되돌아왔지만,6년전 표방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과 지령 계승은 그대로 유지했다.제호 환원은 광복 직후 좌우 이념 대결의 해방공간에서 중립적·통합적 자세로 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주창했던 서울신문의 ‘혁신 속간’정신도 오늘에 되살리고,동시에 친근감 있고 지명도 높은 서울신문 브랜드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신문은 창간 100년을 맞으면서 비록 매일신보의 지령은 합산하지 않았지만,매일신보 시기도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있다.지난주 발간된 ‘서울신문 100년사’도 제1편 ‘아! 대한매일신보’에 이어 제2편에 독립 항목으로 ‘식민시대의 기록-매일신보’를 실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신문은 지난 1971년과 1993년에도 ‘뿌리찾기 운동’으로 대한매일신보에서 발원한 역사를 복원하려 했으나,매일신보 시기의 편입여부 문제로 미완에 그쳤다.돌이켜보면 서울신문 100년사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명암이 엇갈렸고,굴절도 많았다.민족 전체의 수난기였던 일제 통치하의 매일신보 시절뿐이 아니다.4·19혁명 때는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사옥이 불타버렸고,독재·군사 정권 아래서는 ‘권력의 나팔수’라는 오명도 남겼다. 역사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이제 서울신문은 영욕의 역사를 반추하며 처절한 반성 위에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서울신문은 사원이 최대 주주이고,사원들이 사장을 뽑는 민영화된 신문이다.한 세기 전,한국 언론사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위상을 오늘에 되찾는 것은 결국 서울신문 구성원 전체의 몫이다. 편집제작 이사 khlee@seoul.co.kr˝
  • [창간 100년-DMZ 51년] 대한매일신보 100주년 학술회의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서울신문사가 후원하고 한국언론학회가 주관한 이날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은 구한 말 항일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의미와 참여인물들의 역할,당시 보도 내용 등을 광범위하게 조명했다.특히 국내 현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는 서울신문의 대한매일신보 승계와 관련,계승의 불가피성과 함께 단절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했다. 채수삼 서울신문사 사장은 축사에서 “서울신문사 임직원들은 서울신문이 1904년 7월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 독립정신과 지령을 계승해온 데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고 “올해 1월1일자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환원하면서 일제 아래서 매일신보를 발행한 부끄러운 역사도 100년 역사의 일부분임을 인정했다.”고 소개했다. 채 사장은 “오욕의 역사일지라도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민족 수난기 역사”라고 전제한 뒤 “서울신문은 철저한 자기반성 위에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시대가 부여한 언론의 사명도 투철히 이행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강력한 항일논조… 신민회 본거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역사적 의의와 그 계승 문제’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강력한 항일 논조로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이었다.”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자신의 수백 마디 말보다 이 신문의 기사 한줄이 한국인들에게 더 위력이 크다고 토로했을 정도”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알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되었다.”면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서울신문의 100주년 계승문제와 관련,민족사관의 견지에서는 단절의 필요성을,실증사관의 견지에서는 계승의 불가피성을 제시했다.그는 일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역사를 새롭게 태어난 서울신문의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지만,매일신보가 언론의 역사에서 단절시킬 수 없는 엄연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를 서울신문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라고 말했다. 종합토론에서 이경형 서울신문 편집제작이사는 “1945년 11월22일 ‘서울신문’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 사장 등 당시 서울신문 주역들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신보를 ‘혁신 속간’한다고 천명했다.”고 상기시키고 “지령도 1호가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까지 더한 13,738호였다.”고 강조했다.이 이사는 서울신문은 오는 18일 창간 100주년을 맞으면서 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지는 않았지만 매일신보의 시기도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고 지난주 발간한 ‘서울신문 100년사’에도 매일신보가 독립편으로 다뤄졌다고 소개했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는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은 민족주의,서울신문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라면서 “서울신문 종사자들은 이러한 창간정신을 내재화해야만 과거의 계승·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참여인물과 언론사상’등 8개 주제 발표 학술회의에서는 또 박정규 한남대 사회학부(정치언론국제학 전공)교수가 ‘대한매일신보의 참여인물과 언론사상’,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가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배설과 양기탁 등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가 ‘대한매일신보 사지에 대하여’를 주제로 발표했다. 또 김덕모 호남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내용분석’,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잡보 내용분석’,안종묵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연구소 연구원이 ‘광고 분석’,김영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사가 ‘대한매일신보 독자의 신문인식과 신문접촉 양상’을 각각 발표했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임정출범 두 주역

    ■ 재건돕는 美대사 네그로폰테 미군이 28일 이라크 임시정부에 주권을 이양하고 몇시간 뒤 존 네그로폰테(64) 미국 대사가 바그다드에 도착했다.이라크 임시정부 탄생 뒤 첫 부임한 외국 대사다. 그는 미국인 1000명 등 직원 1700여명으로 이뤄진 세계 최대 재외공관을 이끌게 된다.2005회계연도(2004.10∼2005.9) 대사관 운영비만 10억달러(1조 2000억원)다.그의 손을 거칠 미국의 이라크 원조자금은 180억달러다.군사문제를 빼고 이라크 임정의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이라크내 미국의 모든 활동을 조정하는 역을 맡게 돼 이라크 일각에선 ‘사실상의 총독’이 아니냐며 경계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네그로폰테 대사는 분쟁 지역에 근무하면서 워싱턴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앞장서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외교관으로서 첫 명성을 얻은 곳은 60년대 베트남이다.당시 현지어를 완벽하게 구사,파리에서 열리던 비밀협상을 주도했었다.처음으로 대사로 근무했던 80년대 온두라스에서는 레이건 행정부가 니카라과의 좌익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온두라스를 통해 반군을 지원하는 것을 방조·묵인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9·11테러 이후부터 얼마전까지 유엔 주재 대사로 근무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관한 여러 결의안을 안보리에서 통과시켰다.그리스 선박왕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와 하버드 법대에서 공부했고 5개 국어를 구사한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軍 재창건 맡은 페트라우스 데이비드 페트라우스(51) 미 육군 중장은 주권이양 이후 이라크 군대를 재건하는 중책을 맡은 인물이다. 미군이 이라크군에 치안을 맡기고 ‘이라크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느냐여부는 그가 얼마나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미군의 ‘철군 전략’이라고까지 부른다. 이달 초 모술지역 사령관에서 이라크군 재건 책임자로 임명된 그의 임무는 지난 4월 팔루자 무장봉기 때 미군이 훈련시켜온 이라크 보안·치안군이 무기력하게 붕괴됐던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이라크 군대를 만드는 것.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라크 무장단체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와 규율을 갖춘 이라크 육군을 재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훈련방식을 전면 바꿀 계획이다.현재 20만명 수준인 이라크 보안·치안군을 10만명 수준으로 추려 정예화할 방침이다.지난 1년간 미 육군 최정예부대인 제101공정사단장으로 모술을 책임지면서 체득한 경험을 군대 재건에도 적용할 생각이다.즉 이라크인 스스로 일을 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이미 옛 이라크 장성 출신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혔다.1974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그는 프린스턴대에서 베트남전 관련 논문으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아이티와 보스니아 내전 때 작전을 담당한 작전통이지만 실제로 군사작전을 지휘한 것은 이번 이라크전이 처음이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청와대 떠나면 종로구 得? 失?

    청와대를 포함한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전체가 찬반논란에 휩싸였다.여기에는 반세기 넘게 청와대를 이웃으로 동거해온 종로구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청와대가 빠진 종로에 대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종로구 공무원들은 ‘공무원 신분상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기는 어렵지만 청와대가 빠져 나가면 여러가지 과외일이 줄어드는 등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반응이다.반면 주민들은 대체로 청와대 이전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종로공무원 ‘감정적 반대 계산적 찬성’ 각 부서의 성격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구청 공무원들의 밑바닥 정서는 청와대 이전에 반대다.반면 청와대 뒷수발을 들어야 하는 부서는 청와대 이전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신현봉 기획예산과장은 “행정부 수장이 추진하는 일을 어떻게 일개 공무원이 토를 달 수 있습니까.”라면서도 “그러나 종로가 정치1번지와 서울 제1번구라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청와대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익명의 구 공무원은 “수도이전을 잘 따져 보면 종로구에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털어놨다. 종로구는 청와대 ‘뒤치다꺼리’로 해마다 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지난 2002년에는 무려 76억원이 청와대 주변 가꾸기에 쓰였다.2000년에는 38억원,2001년 43억,지난해에도 35억원이 사용됐으며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48억원씩 들어갔다.구 1년 예산이 1800여억원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반면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중앙정부로부터 지원받은 특별교부세는 모두 합해야 32억 1000만원에 불과,남는 장사가 아니다.청와대를 옮기면 이 차액이 모두 주민들을 위한 예산으로 쓰일 수 있다. 청와대 이전은 세수 기반이 취약한 종로구에게 일종의 호기인 셈이다.청와대를 비롯, 각종 국가기관과 문화재 등이 밀집한 종로구에는 비과세 토지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에 달한다.청와대 이전과 더불어 몇 개의 국가기관이 빠져 나가고 다른 시설이 들어서면 그만큼 세금은 늘어난다. 예산절감과 세수확장 외에도 청와대가 짓누르는 업무상의 압박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청와대 주변 관리를 책임진 공원녹지과와 토목과,청소행정과 등 관련 부서는 청와대 업무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김동훈 청소행정과장은 “권위주의 정권에 비하면 대폭 감소됐지만 여전히 청와대는 특별히 신경써야 하는 특별 대상”이라면서 “청와대를 ‘특정지역’으로 정해 청소에 만전을 기한다.”고 밝혔다.종로구의 환경미화원은 다른 자치구의 두배에 가까운 243명이나 된다. 게다가 공원녹지과와 토목과는 청와대의 접근로는 물론 인근 효자로와 삼청동길,창의문길,인왕산∼북악산길 등의 관리도 모두 떠맡고 있다. 유낙준 공원녹지과장은 “청와대 주변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라면서 “청와대를 옮기면 ‘보이지 않는 압력’이 사라져 종로구가 업무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수지역 거주 ‘대가’ 심하지 않아 청와대 이전에 대해 ‘대한민국 1번지’ 주민들은 반대세가 우위를 점한다.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이나 불투명한 효과 등 일반적인 이전 반대 이유 외에도 ‘1번지 프리미엄’을 뺏기지 않으려는 속내가 있다. 청운동에서 10여년째 학생복 대리점을 하는 장병네(50·여)씨는 “청와대의 빼어난 풍수지리설상의 입지를 이전한 뒤에도 계속 이어갈지 의문”이라면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데 엄청난 세금을 들여 새로 지은 청와대를 구태여 옮기려는 이유를 대체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처럼 검문이나 각종 규제 등 권력에 붙어 사는 대가도 심하지 않다.오히려 지역의 특수성 덕에 치안상태가 월등해져 이 일대에는 도둑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청와대 때문에 유지되는 한적한 분위기도 이곳 주민들에게는 호재다. ●“청와대와 건축 규제는 무관” 30여년째 청와대와 총리공간 사이인 삼청동에서 거주하는 문영주(60·여)씨는 “예전에는 집을 조금만 고치려 해도 행정절차가 무척 복잡했다.”면서 “이제는 많이 바뀌었으며 건물 높이에 제한이 있지만 사실 일반 주택을 짓는데는 별 문제 없고 이마저도 점차 풀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청와대 주변인 삼청동과 청운동,효자동,사직동,가회동 등은 최고고도지구로 위치에 따라 건물 높이가 최고 15∼20m이내로 제한된다.또 일부 지역은 자연경관지구까지 겹쳐 최고 3층이하의 건물만 지어야 한다.하지만 이런 높이 규제는 청와대가 주변에 위치해서만은 아니다.청와대가 빠져 나가도 고도제한이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명의 종로구청 도시계획과장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와 북한산 등 조망권 확보를 고려해 도시계획이 이뤄졌으며 이때 이미 고도 제한도 계획됐다.”면서 “해방 후에도 시의 도시계획은 이 당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게다가 ‘청와대 프리미엄’이 걷히면 집 값도 동반 하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청와대와 이 일대 부동산값의 직접적인 함수 관계는 없다.하지만 청운동에 위치한 경복고에는 청와대 직원의 자녀가 꽤 많다.대개 이들의 성적은 좋은 편이며 다수가 빠져 나갈 경우 경복고의 명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다. 청운동 주민 김재근(40)씨는 “강북권이지만 경복고가 옛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재학생 가운데 청와대 직원 자녀들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경복고의 위상이 흔들리면 부동산 값도 덩달아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러나 반대의 가정도 있다.효자동에 사는 김영례(39·여)씨는 “한강변처럼 조망권을 해치는 지역에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경우는 있다.”면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청와대 자리에 유동인구가 몰릴 시설이 유치되면 지역경제는 살아나고 부동산값도 오르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유종 김기용기자 bell@seoul.co.kr ■和寧臺·黃瓦臺도 개명 후보로 거론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는 ‘권력의 1번지’ 청와대가 근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푸른 기와 저택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건평 586평 규모의 조선 총독관저로 처음 지어졌다.‘무명’(無名)이었던 1호 관저는 정부 수립과 더불어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경복궁 중건 이후 이 자리에 있던 과거 시험장인 경무대에서 유래했다. 청와대 일대는 풍수지리상 길지(吉地) 가운데 최적지로 손꼽힌다.북악산을 비롯 낙산,인왕산,남산이 둘러싸며 청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다.하지만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다.총독관저 위치를 물색하던 조선의 풍수사들이 고의로 자리를 비껴 정했단다.때문에 조선 총독과 청와대 주인들은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는 설(說)도 있다. 윤보선 대통령은 부패정권의 온상이라는 경무대의 이미지를 떨치려고 개명 작업에 착수했다.기와와 평화의 색과 같다는데 착안해 청와대로 결정했다.당시 개명 후보에는 화령대(和寧臺)도 있었다.이성계가 명나라에 제출한 국호에는 조선 이외에 화령도 있었다.영문으로 ‘블루 하우스’는 ‘화이트 하우스’와 대조를 이뤄 윤 대통령의 마음에 들었다.박정희 대통령 때는 황(黃)이 청(靑)보다 귀하기 때문에 ‘황와대(黃瓦臺)’로 고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1991년 완공된 청와대 본관은 연면적 2564평으로 청기와 15만장이 얹어졌다.부속 건물까지 합치면 1만 8000여평에 부지는 7만 6685평이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청와대 경내 눈은 특별대접 서울에 눈이 오면 가장 신속하고 깨끗하게 제설작업이 이뤄지는 곳은 청와대와 그 주변지역이다. 청와대를 끼고 있는 종로구 청운동·효자동·삼청동 일대는 종로구 청소행정과에서 ‘제설작업 특정지역’으로 구분해 특별히 신경쓰는 곳이다. 눈이 오면 종로구는 전체 환경미화원 243명중 208명을 청와대 일대에 긴급투입해 제설작업을 펼친다.▲효자로 ▲청와대 앞길 ▲삼청동길 ▲광화문 앞길 등 청와대를 둘러싼 ‘특정지역’ 약 3.7㎞ 도로는 순식간에 깨끗해 진다. 이에 비하면 청와대 내부 제설작업은 조금 더딘 편이다. 일반 제설작업에 필요없는 청소차량이 49대나 한꺼번에 동원되는 등 특별한 방법이 사용된다. “청와대 경내 눈은 일단 밖으로 다 빼내야 해요.”종로구 청소행정과 김동훈 과장은 제설작업에 청소차량이 필요한 이유를 살짝 귀띔했다. 일반적인 제설작업의 경우 보행인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고 특별한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길가에 눈을 쌓아두는 방법을 이용한다.그러나 청와대의 경우 미관상 경내에 눈을 쌓아둘 수 없다는 것.따라서 청와대 내부의 눈은 모두 청소차량에 실어 담아 외부에 버려야 한다.청와대 눈은 청소차에 실려 버려지는 ‘특별대접’을 받게 되는 셈.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청와대 떠나면 종로구 得? 失?

    청와대 떠나면 종로구 得? 失?

    청와대를 포함한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전체가 찬반논란에 휩싸였다.여기에는 반세기 넘게 청와대를 이웃으로 동거해온 종로구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청와대가 빠진 종로에 대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종로구 공무원들은 ‘공무원 신분상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기는 어렵지만 청와대가 빠져 나가면 여러가지 과외일이 줄어드는 등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반응이다.반면 주민들은 대체로 청와대 이전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종로공무원 ‘감정적 반대 계산적 찬성’ 각 부서의 성격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구청 공무원들의 밑바닥 정서는 청와대 이전에 반대다.반면 청와대 뒷수발을 들어야 하는 부서는 청와대 이전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신현봉 기획예산과장은 “행정부 수장이 추진하는 일을 어떻게 일개 공무원이 토를 달 수 있습니까.”라면서도 “그러나 종로가 정치1번지와 서울 제1번구라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청와대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익명의 구 공무원은 “수도이전을 잘 따져 보면 종로구에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털어놨다. 종로구는 청와대 ‘뒤치다꺼리’로 해마다 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지난 2002년에는 무려 76억원이 청와대 주변 가꾸기에 쓰였다.2000년에는 38억원,2001년 43억,지난해에도 35억원이 사용됐으며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48억원씩 들어갔다.구 1년 예산이 1800여억원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반면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중앙정부로부터 지원받은 특별교부세는 모두 합해야 32억 1000만원에 불과,남는 장사가 아니다.청와대를 옮기면 이 차액이 모두 주민들을 위한 예산으로 쓰일 수 있다. 청와대 이전은 세수 기반이 취약한 종로구에게 일종의 호기인 셈이다.청와대를 비롯, 각종 국가기관과 문화재 등이 밀집한 종로구에는 비과세 토지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에 달한다.청와대 이전과 더불어 몇 개의 국가기관이 빠져 나가고 다른 시설이 들어서면 그만큼 세금은 늘어난다. 예산절감과 세수확장 외에도 청와대가 짓누르는 업무상의 압박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청와대 주변 관리를 책임진 공원녹지과와 토목과,청소행정과 등 관련 부서는 청와대 업무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김동훈 청소행정과장은 “권위주의 정권에 비하면 대폭 감소됐지만 여전히 청와대는 특별히 신경써야 하는 특별 대상”이라면서 “청와대를 ‘특정지역’으로 정해 청소에 만전을 기한다.”고 밝혔다.종로구의 환경미화원은 다른 자치구의 두배에 가까운 243명이나 된다. 게다가 공원녹지과와 토목과는 청와대의 접근로는 물론 인근 효자로와 삼청동길,창의문길,인왕산∼북악산길 등의 관리도 모두 떠맡고 있다. 유낙준 공원녹지과장은 “청와대 주변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라면서 “청와대를 옮기면 ‘보이지 않는 압력’이 사라져 종로구가 업무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수지역 거주 ‘대가’ 심하지 않아 청와대 이전에 대해 ‘대한민국 1번지’ 주민들은 반대세가 우위를 점한다.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이나 불투명한 효과 등 일반적인 이전 반대 이유 외에도 ‘1번지 프리미엄’을 뺏기지 않으려는 속내가 있다. 청운동에서 10여년째 학생복 대리점을 하는 장병네(50·여)씨는 “청와대의 빼어난 풍수지리설상의 입지를 이전한 뒤에도 계속 이어갈지 의문”이라면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데 엄청난 세금을 들여 새로 지은 청와대를 구태여 옮기려는 이유를 대체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처럼 검문이나 각종 규제 등 권력에 붙어 사는 대가도 심하지 않다.오히려 지역의 특수성 덕에 치안상태가 월등해져 이 일대에는 도둑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청와대 때문에 유지되는 한적한 분위기도 이곳 주민들에게는 호재다. ●“청와대와 건축 규제는 무관” 30여년째 청와대와 총리공간 사이인 삼청동에서 거주하는 문영주(60·여)씨는 “예전에는 집을 조금만 고치려 해도 행정절차가 무척 복잡했다.”면서 “이제는 많이 바뀌었으며 건물 높이에 제한이 있지만 사실 일반 주택을 짓는데는 별 문제 없고 이마저도 점차 풀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청와대 주변인 삼청동과 청운동,효자동,사직동,가회동 등은 최고고도지구로 위치에 따라 건물 높이가 최고 15∼20m이내로 제한된다.또 일부 지역은 자연경관지구까지 겹쳐 최고 3층이하의 건물만 지어야 한다.하지만 이런 높이 규제는 청와대가 주변에 위치해서만은 아니다.청와대가 빠져 나가도 고도제한이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명의 종로구청 도시계획과장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와 북한산 등 조망권 확보를 고려해 도시계획이 이뤄졌으며 이때 이미 고도 제한도 계획됐다.”면서 “해방 후에도 시의 도시계획은 이 당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게다가 ‘청와대 프리미엄’이 걷히면 집 값도 동반 하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청와대와 이 일대 부동산값의 직접적인 함수 관계는 없다.하지만 청운동에 위치한 경복고에는 청와대 직원의 자녀가 꽤 많다.대개 이들의 성적은 좋은 편이며 다수가 빠져 나갈 경우 경복고의 명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다. 청운동 주민 김재근(40)씨는 “강북권이지만 경복고가 옛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재학생 가운데 청와대 직원 자녀들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경복고의 위상이 흔들리면 부동산 값도 덩달아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러나 반대의 가정도 있다.효자동에 사는 김영례(39·여)씨는 “한강변처럼 조망권을 해치는 지역에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경우는 있다.”면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청와대 자리에 유동인구가 몰릴 시설이 유치되면 지역경제는 살아나고 부동산값도 오르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유종 김기용기자 bell@seoul.co.kr ■和寧臺·黃瓦臺도 개명 후보로 거론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는 ‘권력의 1번지’ 청와대가 근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푸른 기와 저택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건평 586평 규모의 조선 총독관저로 처음 지어졌다.‘무명’(無名)이었던 1호 관저는 정부 수립과 더불어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경복궁 중건 이후 이 자리에 있던 과거 시험장인 경무대에서 유래했다. 청와대 일대는 풍수지리상 길지(吉地) 가운데 최적지로 손꼽힌다.북악산을 비롯 낙산,인왕산,남산이 둘러싸며 청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다.하지만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다.총독관저 위치를 물색하던 조선의 풍수사들이 고의로 자리를 비껴 정했단다.때문에 조선 총독과 청와대 주인들은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는 설(說)도 있다. 윤보선 대통령은 부패정권의 온상이라는 경무대의 이미지를 떨치려고 개명 작업에 착수했다.기와와 평화의 색과 같다는데 착안해 청와대로 결정했다.당시 개명 후보에는 화령대(和寧臺)도 있었다.이성계가 명나라에 제출한 국호에는 조선 이외에 화령도 있었다.영문으로 ‘블루 하우스’는 ‘화이트 하우스’와 대조를 이뤄 윤 대통령의 마음에 들었다.박정희 대통령 때는 황(黃)이 청(靑)보다 귀하기 때문에 ‘황와대(黃瓦臺)’로 고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1991년 완공된 청와대 본관은 연면적 2564평으로 청기와 15만장이 얹어졌다.부속 건물까지 합치면 1만 8000여평에 부지는 7만 6685평이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청와대 경내 눈은 특별대접 서울에 눈이 오면 가장 신속하고 깨끗하게 제설작업이 이뤄지는 곳은 청와대와 그 주변지역이다. 청와대를 끼고 있는 종로구 청운동·효자동·삼청동 일대는 종로구 청소행정과에서 ‘제설작업 특정지역’으로 구분해 특별히 신경쓰는 곳이다. 눈이 오면 종로구는 전체 환경미화원 243명중 208명을 청와대 일대에 긴급투입해 제설작업을 펼친다.▲효자로 ▲청와대 앞길 ▲삼청동길 ▲광화문 앞길 등 청와대를 둘러싼 ‘특정지역’ 약 3.7㎞ 도로는 순식간에 깨끗해 진다. 이에 비하면 청와대 내부 제설작업은 조금 더딘 편이다. 일반 제설작업에 필요없는 청소차량이 49대나 한꺼번에 동원되는 등 특별한 방법이 사용된다. “청와대 경내 눈은 일단 밖으로 다 빼내야 해요.”종로구 청소행정과 김동훈 과장은 제설작업에 청소차량이 필요한 이유를 살짝 귀띔했다. 일반적인 제설작업의 경우 보행인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고 특별한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길가에 눈을 쌓아두는 방법을 이용한다.그러나 청와대의 경우 미관상 경내에 눈을 쌓아둘 수 없다는 것.따라서 청와대 내부의 눈은 모두 청소차량에 실어 담아 외부에 버려야 한다.청와대 눈은 청소차에 실려 버려지는 ‘특별대접’을 받게 되는 셈.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27일 TV 하이라이트]

    ●생방송 이슈&이슈(MBC 오전 8시10분) 김선일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추가파병에 대한 논란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여야 의원 50명은 ‘파병재검토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이라크 추가파병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김선일씨 피랍 사건’으로 불거진 이라크 추가파병 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1시25분) 기존의 화폐 중심 경제체제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고유의 제도를 신뢰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본다.코넬대학이 있는 미국의 ‘이타카’시에는 달러 대신 주민들이 만든 ‘이타카 시간’이라는 화폐가 사용된다.또 멕시코 시티는 ‘탈록’이라는 대체화폐를 10년 동안 사용해 왔다. ●삼색토크 여자(EBS 오후 8시40분) ‘레드’코너에서는 전통을 아름답게 계승한 해금연주가 강은일씨를 초대한다.‘블루’에서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징용과 독립군 색출을 위해 만든 호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그린’코너에서는 이혼의 아픔을 딛고 새 둥지를 튼 재혼가족 권명희·남기주씨 부부를 초대한다. ●게릴라 리포트(iTV 오후 8시20분) 서울 시내버스 노선과 요금이 다음달 1일부터 바뀌면서 시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서울 버스체계 변경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그리고 제도가 바뀌면서 요금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경기도 주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파리의 연인(SBS 오후 9시45분) 수혁은 야근하는 태영을 위해 도시락을 들고 사무실로 찾아가지만,태영 옆에는 늘 기주가 있다.윤아는 기주가 상대를 해주지 않자 한 회장을 찾아가 귀여움을 받고,태영의 말을 꺼내 그를 곤경에 빠트린다.기주는 태영에게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하고,태영은 당황스러워 한다. ●비타민(KBS2 오후 10시) 한국여성의 약 50%가 잠재적 갑상선 종양을 갖고 있으며,중년 여성뿐 아니라 20∼30대 여성도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질병 갑상선질환에 대해 알아본다.‘위대한 밥상’코너에서는 칼슘을 보충해 골수를 보호하고 근골을 튼튼히 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무인시대(KBS1 오후 10시10분) 황제가 최충헌에게 무릎 꿇는 장면을 목격한 태자는 그 치욕을 갚으리라 다짐한다.박진재는 두두을의 은신처를 찾아내고,두두을은 박진재가 두두을 목각을 웃는 낯으로 바꾸어 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두두을의 죽음은 일시에 양 군의 사기를 뒤바꿔 결국 반란은 진압된다. ˝
  • [서울 포토]한강다리의 원죄?

    [서울 포토]한강다리의 원죄?

    반포대교 등 한강다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다.올 들어서는 사회저명인사들의 투신자살이 많아 ‘명예형 자살’이라는 새로운 말까지 나돈다.한강다리는 예나 지금이나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아 ‘애물단지’였다. 1900년 준공된 한강철교에 1917년 인도교가 만들어지면서 ‘자살 터’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다리 양쪽 가로등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생활고에 빠진 서민들에게 자살충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조선총독부는 인도교 동쪽에 파출소를 설치하고,다리 입구에 ‘一寸待己(일촌대기·잠깐 기다리시오)’라는 팻말까지 세웠지만 허사였다고 한다.이에 대해 1923년 8월18일자 한 일간신문은 “사회의 무정(無情)을 이기지 못해 저주하며 무참히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금년에도 수십명에 이르렀다.당국은 투신자살을 예방하려고 갖은 방법을 썼으나,‘백약이 무효’라는 사실만 확인했다.”며 통탄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학부모들은 여름방학 동안의 자녀 교육이 신경쓰이는 대목이다.서울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가 운영하고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은 이같은 걱정거리를 더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시간적 노력과 경제적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체험의 장’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숨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연희동 안산 자락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서대문구가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건립한 자연사박물관이다.지난해 개장한 박물관은 인간과 자연관·생명진화관·지구환경관 등 3개의 주제관과 기획전시실·시청각실·가상체험실 등의 부속시설로 이뤄져 있다.전시표본과 수장품은 대형 공룡 모형을 비롯,4000여점에 이른다. 현 구청장은 “이곳에서는 각종 동·식물들을 직접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다.”면서 “또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말했다. 특히 박물관은 유치원·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7월 20일부터 8월21일까지 7개 분야에 75개 특별강좌(정원 1500명)를 마련했다. 유치반의 경우 ▲금붕어는 내 친구 ▲집짓는 선수 거미,초등 저학년반은 ▲우리 동네 꽃나무 ▲모래야,넌 어디서 왔니? ▲바다는 기름을 싫어해요,초등 고학년반은 ▲갑옷 입은 곤충 ▲화산섬 제주도 등이다.강좌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오전반과 오후A·B반 등 3개반으로 나뉘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접수는 다음달 3일(추가접수기간은 다음달 6∼10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한다.수강료 1만원. ●역사가 숨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사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돌아 독립문공원을 가로질러가면 나타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3·1독립만세운동과 105인 사건,신간회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독립운동에 연루됐던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던 곳.1923년 서대문형무소,1945년 서울형무소,1961년 서울교도소,1967년 서울구치소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다.이어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쳤다.15동의 옥사 가운데 7동과 보안과청사,사형장 등이 보존돼 있다. 이 중 보안과청사를 꾸며 만든 ‘역사전시관’은 1층에 애국선열의 활동상을 대형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이 들어서 있다.2층으로 올라가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재현한 매직비선과 실물크기의 벽관·독방 모형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또 지하1층 ‘체험의 장’은 애국지사들의 밀랍인형과 고문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했으며,‘유관순굴’로 불렸던 여성용 감방도 볼 수 있다.사형장에 들어서면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있다.사형수들이 이 나무에 기대어 통곡한 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현 구청장은 “하루 평균 2000여명,연간 150만명이 찾고 있다.”면서 “2001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하는 등 매년 8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학부모들은 여름방학 동안의 자녀 교육이 신경쓰이는 대목이다.서울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가 운영하고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은 이같은 걱정거리를 더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시간적 노력과 경제적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체험의 장’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숨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연희동 안산 자락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서대문구가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건립한 자연사박물관이다.지난해 개장한 박물관은 인간과 자연관·생명진화관·지구환경관 등 3개의 주제관과 기획전시실·시청각실·가상체험실 등의 부속시설로 이뤄져 있다.전시표본과 수장품은 대형 공룡 모형을 비롯,4000여점에 이른다. 현 구청장은 “이곳에서는 각종 동·식물들을 직접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다.”면서 “또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말했다. 특히 박물관은 유치원·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7월 20일부터 8월21일까지 7개 분야에 75개 특별강좌(정원 1500명)를 마련했다. 유치반의 경우 ▲금붕어는 내 친구 ▲집짓는 선수 거미,초등 저학년반은 ▲우리 동네 꽃나무 ▲모래야,넌 어디서 왔니? ▲바다는 기름을 싫어해요,초등 고학년반은 ▲갑옷 입은 곤충 ▲화산섬 제주도 등이다.강좌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오전반과 오후A·B반 등 3개반으로 나뉘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접수는 다음달 3일(추가접수기간은 다음달 6∼10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한다.수강료 1만원. ●역사가 숨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사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돌아 독립문공원을 가로질러가면 나타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3·1독립만세운동과 105인 사건,신간회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독립운동에 연루됐던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던 곳.1923년 서대문형무소,1945년 서울형무소,1961년 서울교도소,1967년 서울구치소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다.이어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쳤다.15동의 옥사 가운데 7동과 보안과청사,사형장 등이 보존돼 있다. 이 중 보안과청사를 꾸며 만든 ‘역사전시관’은 1층에 애국선열의 활동상을 대형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이 들어서 있다.2층으로 올라가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재현한 매직비선과 실물크기의 벽관·독방 모형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또 지하1층 ‘체험의 장’은 애국지사들의 밀랍인형과 고문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했으며,‘유관순굴’로 불렸던 여성용 감방도 볼 수 있다.사형장에 들어서면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있다.사형수들이 이 나무에 기대어 통곡한 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현 구청장은 “하루 평균 2000여명,연간 150만명이 찾고 있다.”면서 “2001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하는 등 매년 8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서울 포토]한강다리의 원죄?

    반포대교 등 한강다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다.올 들어서는 사회저명인사들의 투신자살이 많아 ‘명예형 자살’이라는 새로운 말까지 나돈다.한강다리는 예나 지금이나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아 ‘애물단지’였다. 1900년 준공된 한강철교에 1917년 인도교가 만들어지면서 ‘자살 터’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다리 양쪽 가로등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생활고에 빠진 서민들에게 자살충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조선총독부는 인도교 동쪽에 파출소를 설치하고,다리 입구에 ‘一寸待己(일촌대기·잠깐 기다리시오)’라는 팻말까지 세웠지만 허사였다고 한다.이에 대해 1923년 8월18일자 한 일간신문은 “사회의 무정(無情)을 이기지 못해 저주하며 무참히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금년에도 수십명에 이르렀다.당국은 투신자살을 예방하려고 갖은 방법을 썼으나,‘백약이 무효’라는 사실만 확인했다.”며 통탄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씨줄날줄] 투명성의 덫/우득정 논설위원

    6공화국 말 한 경제 관료의 진단이다.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서정쇄신’,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사정’이라는 칼날을 동원해 수시로 곪은 곳을 도려냈다.통치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윤활유가 흐르게 하되 지나치다고 판단되면 한바탕 칼춤판을 벌여 국민의 답답한 감정을 정화시켰다는 것이다.그래서 ‘시범 케이스’라는 말도 나왔다.하지만 6공 들어서는 최소한의 정화장치마저 작동을 멈추면서 부패라는 암세포가 나라 전체로 번져나갔다고 그는 탄식했다. 이 관료가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는 사이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한 정치인은 중국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오랑캐 50여개 나라를 복속시킨 반초(班超)의 고사를 들먹이곤 했다.반초는 후임 서역도호부 총독에게 오랑캐를 다스리는 요령으로 ‘水至淸卽無魚: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人至察卽無徒:사람이 너무 살피면 무리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일러주었다.너무 엄격하게만 하지 말고 도량을 베풀 줄도 알라는 뜻이다.하지만 이 정치인은 적당히 흐려야(부패해야) 더불어 살 수 있다고 해석한 것 같다. 그후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숱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과 먹이사슬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은 이유는 밑바닥에 이러한 정서가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기업이라고 다를 바 없다.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대주주 차입금이라는 명목으로 계열사 돈을 끌어다 대통령 선거에 나섰듯이 내 기업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그릇된 인식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기업의 돈을 쌈짓돈처럼 여긴 배경에는 분식 등 불투명한 회계 관행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잣대가 바뀌기 시작했다.내 돈인줄 알았던 돈이 주주들의 돈이고 고객의 몫이란다.‘횡령’‘유용’으로 형사처벌하더니 회계장부도 국제 기준에 맞추라고 한다.과거처럼 돈 보따리 싸들고 하소연할 곳도 없다.기업인들은 갑자기 죽을 맛을 느끼게 됐다.돈이 생기는 대로 빚부터 갚고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맞서기 위해 지분율도 높여야 한다.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지난 4일 기자브리핑에서 기업의 이러한 상황을 ‘투명성의 덫’에 걸렸다고 했다.하지만 어쩌랴.투명성은 시대의 요구인 것을. 우득정 논설위원˝
  • 문희상 “나는 총독도 권노갑도 아니다”

    요즘 정치권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이다.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경력에다 지금은 ‘대통령 정치특보’라는 ‘마패’까지 차고 있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기자들은 물론 여당 의원과 야당까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문 의원의 말에는 틀림없이 대통령의 의중이 실려 있을 것이란 ‘강박적 확신’이 그의 입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2일 오전 문 의원이 국회에서 열린 긴급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몇몇 기자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그를 수배하고 나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기자들이 따라붙었다.‘체구는 장비,머리는 조조’란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기자들의 ‘허기’를 동물적으로 감지했는지,처음엔 피하는 듯하다가 이내 작심하고 얘기 보따리를 풀어제쳤다. 그는 국회 본청 앞에서 서서 얘기하다가 “차라리 의원회관 내 방에 가서 2라운드를 하자.”고 제안해 오히려 기자들을 당황하게 했다.옮긴 자리에서 문 의원은 무려 1시간 이상 기자들과 치열한 문답을 주고받았다.민감한 현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자들에게 그는 “옛날식으로 판단해선 절대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사고방식의 대전환을 수차례 요구했다. 지금 당지도부에서 김혁규 총리 지명과 관련해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는데,김혁규 총리 지명에 문제가 없겠는가. -물론 없다.김혁규 총리 지명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소장파 의원들을 모두 만났나. -지도부가 재선 이상은 다 만났다.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초선들은. -초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턱걸이 과반인데,반대하는 의원이 몇명이라도 있으면 표결에서 인준이 안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대통령 임기 2기가 첫 출범하는데 만일 부결되면 대통령은 물론이고 당지도부가 뭐가 되겠나.지금까지 정당사를 보면 중대사,즉 당의 명운이 걸린 일은 한사람도 반대한 적이 없다.기묘하더라.위기의식이 생기면 저절로 당을 아끼는 마음,즉 부모를 생각하는 효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김혁규 의원에 대한 검증은 됐나. 검증에는 단계가 있다.1차는 지명권자가 검증하는 것이고 2차는 여당과 국가기관이 재산과 부동산투기 등 도덕성을 검증하는 것이다.지명을 한다면 이 정도는 걸러졌다고 보는 것이다.남은 것은 청문회에서 혹독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청문회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확인되면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도덕성에 대한 검증은 끝났나.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것은 끝났다.국가기관이 그런 거 안하고 뭐하겠나.지사 3번 했다면 국민적 검증은 끝난 것이다.한나라당이 공천을 3번이나 준 것은 검증이 다는 얘기 아닌가. 상생하자면서 굳이 야당이 반대하는 김혁규 총리 카드를 관철하려는 대통령의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굳이 과반 여당의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자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뭔가.기분 나쁘다고 안된다고 하면 되나.힘있는 쪽이 양보하라고 하는데,한나라당은 힘있을 때 봐줬나.윤성식 감사원장 부결시키고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 반대하고 김두관 장관을 해임시키지 않았나. 김혁규 의원은 언제 총리로 지명하나. -빠를 수록 좋다.총리대행체제를 오래 끌 순 없으니까.5일 재보선 끝나고 6일은 현충일,7일은 국회 개원일이니까 이르면 8일이 되지 않겠나. 3개 부처 입각 구상에는 변함이 없는 것인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소장파들이 당·청관계의 문제점을 거듭 지적하고 있는데. -오해다.당·청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당·청 고위정무회의까지 생겼다. 당에서는 정무회의에 대통령이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바로 옛날식 사고다.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옛날식 수법이다.노 대통령은 실용적이다.수평적 의사소통을 강조한다.당 대표에게 힘을 주려는 세리머니 차원에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대통령과 자주 만난다고 지도부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다.대통령이 참석하면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 형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게 대통령 생각이다.대신 필요할 때는 대통령이 참석한다. 일부 소장파들이 ‘청와대 파견 총독’이라고 공격하는데. -공격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총독이니 해서 권아무개(권노갑을 지칭)처럼 하는 것같이 보도됐는데,그말은 마치 ‘고자가 간통한다.’는 소리와 같다.세상이 바뀌었다.대통령이 당정분리 선언했다.참여정부는 원초적 불능이다.대통령이 당 인사권 하나도 행사하지 않는다.급사 한명 임명하지 않았고 공천장 하나 준 적 없다.옛날엔 원내총무가 전략을 매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정균환 전 민주당 총무한테 물어봐라.제왕적 총재가 있으니 권 실세,박지원도 생긴 것이다.나는 정치특보로서 대통령의 의중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제대로 잡아줄 뿐이다.나는 당직이 없는 ‘깍두기’다. 문 의원이 당에 군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왜 그런 얘기가 나오나.의원들한테 전화 한 통화 건 적이 없다.내가 지도부 문책론 얘기했다고 하는데 나는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란 취지로 말했다.만일 총리 인준이 부결되면 어떻게 되겠나.언론이 제일 먼저 문책할 것이다.‘여당 왜 이러나.’라면서.나도 사표낼 수밖에 없다.지금도 유아무개(유시민) 등이 전당대회하자고 하는데 부결되면 가만 있겠나. 최근 소장파들을 만났나. -딱히 만날 필요가 없다.정장선·송영길 의원 등이 전화를 걸어와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다.안영근 의원은 직접 만났다.우상호 의원은 일부러 찾아와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이기우 의원 등은 내 주변사람들이다.다들 그런 얘기 안했다고 하더라. 초선 의원들이 너무 중구난방이라는 생각은 안드나. -그렇게 옛날식으로 사고해선 안 된다.시대가 바뀌었다.기자들도 인정해야 한다.나도 가슴이 철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나도 과거다.틀을 깨야 한다.제일 먼저 국민이 깼다.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고,총선에서 승리한 것이다.다음으로 젊은그룹이 깼다.그다음이 나 정도다.겁만 낼 게 아니다.발길질을 해야 건강한 태아다.카리스마는 없어졌다.이젠 제왕적 정치인은 있을 수 없다.신기남도 천정배도 박근혜도 아니다.나는 총독이 될 수 없다.1인자가 없는데 어떻게 2인자가 있겠나.기자도 막연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문희상은 옛날 권노갑이 아니다. 대통령이 소장파들의 불만에 대해 불쾌해하지 않나. -눈하나 깜짝 안할 분이다. 국회 인준 대상 인사 문제는 대통령이 당과 사전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권한인데 협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얼마전 개각과 관련해 당의 의견 구했다가 큰 논란이 있지 않았나.인사는 보안이 생명인데 그런 게 흔들릴 우려가 있다.인사는 행정권의 가장 중요한 요체다.입법부가 견제권이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본질적인 것을 건드리면 안된다. 총선 전 대통령이 1당에 총리를 준다고 했으면 열린우리당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당 사람으로 임명한 것이다.김혁규 의원이 열린우리당 소속 아닌가.대통령이 당의장,원내대표와 상의했다.그런데 지도부가 바뀌었다.따라서 지난달 20일 새 지도부에 대통령이 다시 김혁규 총리론의 당위성을 설명했다.“대통령의 말은 소속 의원들을 설득해달라.”는 의미였는데 당 지도부가 못알아듣는 것같다.지도부가 나서서 의견수렴을 하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아 나만 ‘독박’을 썼다.그런데 천정배 원내대표가 나중에 “그말의 의미를 몰랐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가. -그때는 원내대표로 선출된 지 얼마안됐을 때니까.천정배 원내대표와 신기남 의장 생각에는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이 안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대통령은 의원들을 잘 설득하라는 취지였는데,그냥 자기들 선에서 이해하고 넘어간 것이다. 대통령 정치특보 대신 정무장관을 맡는 게 낫지 않나. -지금은 정무과잉,정치과잉이라는 게 대통령 컨셉트다.우리는 지금 너무 정치에 매달려 있다는 게 대통령 메시지다.국회 정책에 치중해야 한다는 게 대통령 생각이다. 민주당과의 합당론을 얘기했는데. -정반대로 보도됐다.인위적 정계개편이나 영입은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통합하고 싶다고 그대로 되는 게 아니다.양당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돼야 되는 것이다.그런데 지금 양당에서 반 이상이 반대하고 있다.이쪽(우리당)은 반대가 더 많다.나도 아쉬움은 있다.하지만 참여정부 임기 안에 합당은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 입당은 허용하나. -스스로 걸어들어오겠다면 가려서 받을 수는 있다.우리와 맞는지를 따져봐서….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약력 ▲경기도 의정부 출생(59) ▲중앙초등,경복중·고,서울대 법대 ▲14·16·17대 국회의원 ▲민족연합청년동지회(민청) 중앙회장 ▲민주당 대표비서실장 ▲청와대 정무수석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대통령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상임고문,대통령 정치특보 ˝
  • 문희상 “나는 총독도 권노갑도 아니다”

    문희상 “나는 총독도 권노갑도 아니다”

    요즘 정치권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이다.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경력에다 지금은 ‘대통령 정치특보’라는 ‘마패’까지 차고 있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기자들은 물론 여당 의원과 야당까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문 의원의 말에는 틀림없이 대통령의 의중이 실려 있을 것이란 ‘강박적 확신’이 그의 입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2일 오전 문 의원이 국회에서 열린 긴급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몇몇 기자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그를 수배하고 나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기자들이 따라붙었다.‘체구는 장비,머리는 조조’란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기자들의 ‘허기’를 동물적으로 감지했는지,처음엔 피하는 듯하다가 이내 작심하고 얘기 보따리를 풀어제쳤다. 그는 국회 본청 앞에서 서서 얘기하다가 “차라리 의원회관 내 방에 가서 2라운드를 하자.”고 제안해 오히려 기자들을 당황하게 했다.옮긴 자리에서 문 의원은 무려 1시간 이상 기자들과 치열한 문답을 주고받았다.민감한 현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자들에게 그는 “옛날식으로 판단해선 절대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사고방식의 대전환을 수차례 요구했다. 지금 당지도부에서 김혁규 총리 지명과 관련해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는데,김혁규 총리 지명에 문제가 없겠는가. -물론 없다.김혁규 총리 지명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소장파 의원들을 모두 만났나. -지도부가 재선 이상은 다 만났다.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초선들은. -초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턱걸이 과반인데,반대하는 의원이 몇명이라도 있으면 표결에서 인준이 안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대통령 임기 2기가 첫 출범하는데 만일 부결되면 대통령은 물론이고 당지도부가 뭐가 되겠나.지금까지 정당사를 보면 중대사,즉 당의 명운이 걸린 일은 한사람도 반대한 적이 없다.기묘하더라.위기의식이 생기면 저절로 당을 아끼는 마음,즉 부모를 생각하는 효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김혁규 의원에 대한 검증은 됐나. 검증에는 단계가 있다.1차는 지명권자가 검증하는 것이고 2차는 여당과 국가기관이 재산과 부동산투기 등 도덕성을 검증하는 것이다.지명을 한다면 이 정도는 걸러졌다고 보는 것이다.남은 것은 청문회에서 혹독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청문회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확인되면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도덕성에 대한 검증은 끝났나.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것은 끝났다.국가기관이 그런 거 안하고 뭐하겠나.지사 3번 했다면 국민적 검증은 끝난 것이다.한나라당이 공천을 3번이나 준 것은 검증이 다는 얘기 아닌가. 상생하자면서 굳이 야당이 반대하는 김혁규 총리 카드를 관철하려는 대통령의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굳이 과반 여당의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자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뭔가.기분 나쁘다고 안된다고 하면 되나.힘있는 쪽이 양보하라고 하는데,한나라당은 힘있을 때 봐줬나.윤성식 감사원장 부결시키고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 반대하고 김두관 장관을 해임시키지 않았나. 김혁규 의원은 언제 총리로 지명하나. -빠를 수록 좋다.총리대행체제를 오래 끌 순 없으니까.5일 재보선 끝나고 6일은 현충일,7일은 국회 개원일이니까 이르면 8일이 되지 않겠나. 3개 부처 입각 구상에는 변함이 없는 것인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소장파들이 당·청관계의 문제점을 거듭 지적하고 있는데. -오해다.당·청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당·청 고위정무회의까지 생겼다. 당에서는 정무회의에 대통령이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바로 옛날식 사고다.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옛날식 수법이다.노 대통령은 실용적이다.수평적 의사소통을 강조한다.당 대표에게 힘을 주려는 세리머니 차원에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대통령과 자주 만난다고 지도부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다.대통령이 참석하면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 형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게 대통령 생각이다.대신 필요할 때는 대통령이 참석한다. 일부 소장파들이 ‘청와대 파견 총독’이라고 공격하는데. -공격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총독이니 해서 권아무개(권노갑을 지칭)처럼 하는 것같이 보도됐는데,그말은 마치 ‘고자가 간통한다.’는 소리와 같다.세상이 바뀌었다.대통령이 당정분리 선언했다.참여정부는 원초적 불능이다.대통령이 당 인사권 하나도 행사하지 않는다.급사 한명 임명하지 않았고 공천장 하나 준 적 없다.옛날엔 원내총무가 전략을 매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정균환 전 민주당 총무한테 물어봐라.제왕적 총재가 있으니 권 실세,박지원도 생긴 것이다.나는 정치특보로서 대통령의 의중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제대로 잡아줄 뿐이다.나는 당직이 없는 ‘깍두기’다. 문 의원이 당에 군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왜 그런 얘기가 나오나.의원들한테 전화 한 통화 건 적이 없다.내가 지도부 문책론 얘기했다고 하는데 나는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란 취지로 말했다.만일 총리 인준이 부결되면 어떻게 되겠나.언론이 제일 먼저 문책할 것이다.‘여당 왜 이러나.’라면서.나도 사표낼 수밖에 없다.지금도 유아무개(유시민) 등이 전당대회하자고 하는데 부결되면 가만 있겠나. 최근 소장파들을 만났나. -딱히 만날 필요가 없다.정장선·송영길 의원 등이 전화를 걸어와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다.안영근 의원은 직접 만났다.우상호 의원은 일부러 찾아와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이기우 의원 등은 내 주변사람들이다.다들 그런 얘기 안했다고 하더라. 초선 의원들이 너무 중구난방이라는 생각은 안드나. -그렇게 옛날식으로 사고해선 안 된다.시대가 바뀌었다.기자들도 인정해야 한다.나도 가슴이 철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나도 과거다.틀을 깨야 한다.제일 먼저 국민이 깼다.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고,총선에서 승리한 것이다.다음으로 젊은그룹이 깼다.그다음이 나 정도다.겁만 낼 게 아니다.발길질을 해야 건강한 태아다.카리스마는 없어졌다.이젠 제왕적 정치인은 있을 수 없다.신기남도 천정배도 박근혜도 아니다.나는 총독이 될 수 없다.1인자가 없는데 어떻게 2인자가 있겠나.기자도 막연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문희상은 옛날 권노갑이 아니다. 대통령이 소장파들의 불만에 대해 불쾌해하지 않나. -눈하나 깜짝 안할 분이다. 국회 인준 대상 인사 문제는 대통령이 당과 사전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권한인데 협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얼마전 개각과 관련해 당의 의견 구했다가 큰 논란이 있지 않았나.인사는 보안이 생명인데 그런 게 흔들릴 우려가 있다.인사는 행정권의 가장 중요한 요체다.입법부가 견제권이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본질적인 것을 건드리면 안된다. 총선 전 대통령이 1당에 총리를 준다고 했으면 열린우리당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당 사람으로 임명한 것이다.김혁규 의원이 열린우리당 소속 아닌가.대통령이 당의장,원내대표와 상의했다.그런데 지도부가 바뀌었다.따라서 지난달 20일 새 지도부에 대통령이 다시 김혁규 총리론의 당위성을 설명했다.“대통령의 말은 소속 의원들을 설득해달라.”는 의미였는데 당 지도부가 못알아듣는 것같다.지도부가 나서서 의견수렴을 하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아 나만 ‘독박’을 썼다.그런데 천정배 원내대표가 나중에 “그말의 의미를 몰랐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가. -그때는 원내대표로 선출된 지 얼마안됐을 때니까.천정배 원내대표와 신기남 의장 생각에는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이 안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대통령은 의원들을 잘 설득하라는 취지였는데,그냥 자기들 선에서 이해하고 넘어간 것이다. 대통령 정치특보 대신 정무장관을 맡는 게 낫지 않나. -지금은 정무과잉,정치과잉이라는 게 대통령 컨셉트다.우리는 지금 너무 정치에 매달려 있다는 게 대통령 메시지다.국회 정책에 치중해야 한다는 게 대통령 생각이다. 민주당과의 합당론을 얘기했는데. -정반대로 보도됐다.인위적 정계개편이나 영입은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통합하고 싶다고 그대로 되는 게 아니다.양당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돼야 되는 것이다.그런데 지금 양당에서 반 이상이 반대하고 있다.이쪽(우리당)은 반대가 더 많다.나도 아쉬움은 있다.하지만 참여정부 임기 안에 합당은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 입당은 허용하나. -스스로 걸어들어오겠다면 가려서 받을 수는 있다.우리와 맞는지를 따져봐서….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약력 ▲경기도 의정부 출생(59) ▲중앙초등,경복중·고,서울대 법대 ▲14·16·17대 국회의원 ▲민족연합청년동지회(민청) 중앙회장 ▲민주당 대표비서실장 ▲청와대 정무수석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대통령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상임고문,대통령 정치특보
  • [기고] 키프로스의 장래/유임수 이화여대 경제학 교수

    지중해에 있는 몰타와 키프로스는 동유럽 8개 국가와 함께 지난 1일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키프로스는 1974년 북부 터키계와 남부 그리스계로 나뉘어 대립하며 남북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나라다.2003년 EU에 가입하기 위한 자격을 얻었으나 분단된 국가가 하나로 뭉쳐지지 않아 추스르기 어려운 국론 분열상을 노출해왔다.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느슨한 형태의 스위스식 연방국가 통일방안을 제시해 지난 3월24일 선거를 실시했다.그러나 그리스계에 의한 투표의 부결은 터키계의 키프로스인도 오랫동안의 경제적 제재 조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좌절시켰다. 지중해의 섬 키프로스에 대한 역사와 문화는 다양하다.16세기 무어족 출신 총독 오델로와 부인 데스데모나,그리고 이아고 세 사람의 질투와 권력 투쟁으로 결국 데스데모나의 죽음에 이르고 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이를 오페라 작품으로 만든 베르디 등으로 이 지역은 잘 알려져 있다.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에서 이주한 무어족들이 모로코와 남프랑스 지역을 점령해 문화적·경제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흔적을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프로스는 자원과 군사 요새의 이점으로 비잔틴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그후 그 전략적 위치로 영국이 1차 대전 이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1960년에 키프로스는 독립됐다.그 이후로 그리스 정교회의 마카리오스 대주교가 키프로스를 통치했다.그리스는 1967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복귀시키려고 했다.그리하여 결국 1974년 그리스는 키프로스를 점령해 그리스계 마카리오스 대통령을 추방했으며 터키는 키프로스 터키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해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다.남부 다수 그리스계 키프로스와 북부 소수 터키계 키프로스가 분리돼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배치된 남북 경계선을 끼고 주둔하고 있다. 북부 터키계 키프로스는 1983년에 터키공화국이란 국명으로 독립했지만,터키를 제외하고는 유엔의 반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현재 남키프로스는 유엔을 비롯해 각국으로부터 대표국으로 인정되고 있다.1975년 이래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 하에 남북 키프로스 간의 분쟁해결을 위한 협상노력이 진행됐으나 두 지역의 이해관계 상충 및 그리스와 터키의 개입 등으로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코피아난 사무총장의 주관으로 통일방안이 마련됐으나 그리스의 반대로 키프로스 전체는 EU 가입이 됐음에도 이 지역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키프로스의 EU 가입은 경제적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지중해 연안국인 이 지역은 EU 경제권으로 편입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점을 활용하게 되면 발전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키프로스는 소수의 북부 지역은 척박한 산악지대가 많고 경작면적이 협소한 탓에 개발이 낙후되고 소득 수준과 발전 수준이 낮아 어려움이 많다.이에 비해 남부 지역은 해양수산업·관광산업 등이 주력 산업을 이루고,해군기지 등의 서비스 산업이 발달해 높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제조업 등의 산업구조가 빈약해 새로운 산업의 육성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이 지역에는 EU 가입으로 상당한 경제교류,투자협력 그리고 경제적 지원 등이 예상되고 있다.EU로부터 지역안정기금,산업구조기금,사회간접자본 등에 대한 지원으로 경기 활성화에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분단국으로서 키프로스의 분단 상황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우리 외교관과 군부 지도자들이 과거 유엔의 요청에 의해 키프로스 사태의 중재역을 맡기도 했다.앞으로 EU에 가입한 지중해 국가는 물론 기타 국가 간에도 관심과 이해를 한층 높여 EU 전 지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세계화 전략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임수 이화여대 경제학 교수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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