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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국내외서 항일운동 옥고치러

    국내외서 항일운동 옥고치러

    국가보훈처가 이번 3·1절에 서훈을 추서하기로 한 독립유공자 165명 가운데 좌파 계열로 구분되는 54명의 면면과 활동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빼어난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좌파 계열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서훈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지 않았을 경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서훈을 줄 수 있도록 정부가 최근 관련규정을 변경함에 따라 이들이 6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다음은 이번에 복권된 주요 좌파 계열 독립운동가 면면과 활동상이다. ●여운형(1885∼1947) 항일 독립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 해방 후엔 정치 및 남북 합작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조선총독부, 미 군정과 소련 군정, 김일성 등과 정치적 담판도 가졌다. 몽양의 항일투쟁 사실에 대해 학계는 물론 남북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좌파 계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뛰어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심사에서 ‘보류’ 판정을 받아 왔다. ●권오설(1897∼1930)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경북 안동에서 풍산소작인(小作人)회를 결성,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1924), 언론집회압박 탄핵위원(1924),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돼 활동했다. 학생들과 연계해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숨졌다. ●조동호(1892∼1954) 1919년 신한청년당 이사로 선출돼 조선독립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데 관여하는 등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독립신문 창간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선양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결성시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일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조선건국동맹 조직을 결성했다. ●구연흠(1883∼1937) 구한 말 관원 출신으로 무산자 동맹회, 신사상 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며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상해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참여,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한인지부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며 3·1운동,6·10만세운동 국치일 등을 기념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재봉(1891∼1944)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전국에 세포단(細胞團)을 조직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아리랑’ 원본필름 공개될까

    ‘아리랑’ 원본필름 공개될까

    |도쿄 이춘규특파원|한국 최초의 영화인 ‘아리랑’의 필름 원판이 드디어 발견되나. 일본의 전설적인 영상수집가 아베 요시시게가 지난 9일 타계, 춘사(春史)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의 원본필름이 발견될지 주목된다고 마이니치신문이 11일 보도했다. 조선총독부 경찰의사를 지낸 부친 때부터 영화를 수집,5만점 이상의 희귀 필름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아베가 오사카병원에서 상속인 없이 타계함으로써 일본 문화청이 소장품을 승계, 관리할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이 전했다.‘아리랑’ 원본은 6·25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아베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언론은 그의 자택 소장목록에서 ‘아리랑/9권/현대극’이라는 목록을 확인했다. 고인도 생전에 자신이 ‘아리랑’을 소장하고 있음을 시사했지만 공개는 거부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남북 영화관계자들이 고인으로부터 아리랑을 얻어내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북한측은 조총련 산하 총련영화제작소장인 여운각(78)씨가, 한국측은 다큐멘터리 작가 정수웅(62)씨가 건네줄 것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아리랑은 식민지시대 반일(反日)영화인 만큼 일본인으로서 생각할 점이 있다.”며 “내놓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남북한이 통일되면 평화를 위해 내놓겠다.”고 말했었다. taein@seoul.co.kr
  • [韓日협정 문서 공개] “징용보상금 당시정부가 대리 수령한 셈”

    [韓日협정 문서 공개] “징용보상금 당시정부가 대리 수령한 셈”

    정부가 17일 공개한 한일회담 문서는 새로운 내용을 밝혀줬지만 한계 또한 적지 않다. 서울신문은 한일민족문제학회 강제연행문제연구분과장인 정혜경 박사에게 의뢰해 공개 문서 내용과 파장 등을 긴급 분석했다. ●주요 내용의 의미 공개된 5건의 문서는 7차 회의록의 일부만 포함돼 있을 뿐이고 5차·6차 회의록은 포함돼 있지 않다. 논의 내용을 정리한 문서만 편철돼 있다. 특히 대일청구권과 관련된 내용은 매우 적고, 대부분은 자금의 액수와 사용방법 등에 대한 논의 중심이다.7차 회의록을 보면 주로 무상원조와 유상차관 제공에 대한 처리방법이 다뤄졌고, 개인청구권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다만 ‘청구권’이라는 용어 사용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은 ‘청구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한국은 청구권 용어 사용을 요구했다.5·6차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한국의 민주당 정부는 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를 회담의 의제로 거론하고 그 범위를 구체화했을 뿐 아니라, 국가(정부)가 대신해 개별적 보상을 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군사정부가 청구권 자금의 금액과 협정 문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청구권’ 문구를 고수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무상 3억 달러의 자금을 받게 된 점도 밝혀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피징용자 피해보상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군사정부 들어 일본 정부에 대해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청구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보이기는 했지만, 청구권 해결 주체를 한국정부로 상정하고 있었던 당시 견해에는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최종 청구권 협정 문안에 한·일 양국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선언하는데 동의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한국 정부의 보상책임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피징용자의 인원 수를 제시하고 금액을 조정했음에도 자금의 사용계획에는 피징용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이러한 점은 바로 피징용자를 금액 조정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한국 외교부는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한일협정문서 공개가 대일배상소송에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 왔다. 이런 암시가 문서 공개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징용자의 대상에서 제외한 위안부와 국내 징용자에 대한 문제 및 후생연금과 같이 한일협정에서 논의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문서공개가 가져올 파장 우선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 요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위해 박정희 정부가 취한 조치는 ▲청구권 자금의 운영 및 관리에 관한 법률(1966.2.19)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1971.1.19) ▲대일 민간청구권보상에 관한 법률(1974.12.21) 등 세 가지 국내 보상법 체계였다. 그러나 이들 법률은 1982년 12월 31일 모두 폐지됐고, 그 후로는 더 이상 법에 따른 개인보상의 길이 사라졌다. 당시 일본 정부가 발행한 유가증권이라든지 피징용 증명 사망자 신고건수는 모두 10만 9540건이었고, 정부는 관련증거와 자료를 심사해 10만 3281건에 대해 지급을 결정했다. 보상금액(1977년 기준)은 95억 3000만원이었다.8522명의 징용 사망자가 신고됐고 사망자 1인당 유족에게 30만원씩 지급됐다. 그밖에 일본 정부가 발행한 유가증권 9700여건은 1엔당 30원씩 환산해 지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보상기간은 1974∼77년까지 3년에 그쳤을 뿐 아니라, 당시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보상대상을 사망자에게만 한정했다는 문제가 있었다.1인당 30만원이라는 금액도, 청구권자금을 협상할 때 한국 정부가 제시한 2600달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다. 이러한 한계로 그동안 피해자들은 적정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해 왔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정부가 소장한 문서를 통해 밝혀진 만큼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적정한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서에 담긴 항목별 한계 피해자 인원수 산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일협정 당시 한국은 노무자수 66만 7684명, 군인군속 36만 5000명을 포함해 모두 103만 2684명으로 산정했다. 그러나 지난 2003년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각종 통계를 근거로 집계된 인원수는 총 794만 1101명이다. 통계치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피해 대상자도 한일회담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가 제외되어 있다. 개인 청구권 항목에서도 한계점이 드러나 있다.‘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다고 인정한 개인 청구권에는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총독부에서 취급한 간이생명보험, 우편저금 등이 해당된다. 정리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10월 개관 준비 한창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 관장

    10월 개관 준비 한창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 관장

    2005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서 더 없이 경사스러운 해이다. 광복 60돌이란 역사적 의미에다가 국립박물관 개관 60돌까지 겹치는 경사를 맞았고, 무엇보다 명실상부한 국립박물관의 면모를 갖춘 용산박물관 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용산 새 박물관은 오는 10월28일 개관될 예정. 광복 및 개관 60돌을 맞는 역사적 의미와 21세기 국립중앙박물관이 나가야 할 방향 등을 들어보기 위해 개관 준비로 한창 분주한 이건무(58) 관장을 만나보았다. 지난 연말 10만여점에 달하는 유물 이전작업을 무사히 마무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숨 돌리신 것 같은데 아직도 표정이 긴장돼 보입니다. -잠깐 한 눈을 파는 순간 사고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제가 긴장을 풀면 유물을 옮기고 전시하는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려 실수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2003년 정무직 차관급으로 격상된 관장직에 제가 임명된 것도 다름아닌 실무형 전문가로서 엄청난 양의 유물 이전과 용산 새 박물관의 개관을 무사히 치르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유물 이전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10만여점에 달하는 유물을 해당 직원들이 직접 일일이 포장했습니다. 전문 용역업체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유물의 특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작업을 해야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살짝 금이 간 유물의 경우 어떻게 다루고 포장을 해야하는지는 그 유물을 계속 다루어온 직원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도 이전작업 중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거액의 보험도 들었고,6억원이 넘는 보험료까지 냈습니다. 결국 단 하나의 유물도 티끌만큼의 손상도 없이 이전한 데 대해 저와 직원들 모두 자부심을 느낍니다. 광복 60돌과 개관 60돌을 동시에 맞는 역사적 의미, 그리고 용산 시대 개막의 역사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1945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넘겨받아 국립박물관으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순수하게 박물관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없어 6번이나 국립박물관을 옮겨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석조전, 남산 분관, 옛 중앙청 건물 등을 개수해 국립박물관으로 썼습니다.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박물관을 용산에 지어 개관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절로 뿌듯합니다. 광복 60돌을 계기로 새 박물관이 국민들에게 우리역사의 중요성, 그리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인식케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적 위상이나 박물관에 대한 국민적 인식 수준이 대체로 낮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새 박물관 규모는 세계 6대 박물관 수준으로, 규모와 시설면에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같은 하드웨어에 걸맞는 소프트웨어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박물관이 역사교육의 현장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면서도 막상 박물관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저희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단순 전시 기능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써 거듭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이를 위해 다양한 교육·문화사업을 발굴, 시행할 예정입니다. 용산 박물관은 전시면적만 해도 경복궁 시절보다 3배 이상 늘어납니다. 그에 걸맞게 유물도 더욱 많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 박물관 전시공간은 크게 늘어납니다. 관람 동선을 계산해 보았더니 3㎞가 넘더군요. 한 진열장 앞에서 30초씩만 머문다고 해도 상설 전시장을 모두 돌아보려면 9시간 정도 걸릴겁니다. 이처럼 넓어진 전시공간을 채울 유물 수집을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유물 구입 예산은 연 70억원 정도로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국보나 보물급 유물을 구입할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소더비나 옥션 경매에서 수억, 수십억원짜리 문화재가 나온다면 기존의 구입예산 이외에 예비비 등 별도 예산을 책정해 적극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올해부터는 문화재 기증제 보상제도가 도입돼 유물 기증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금액은 1억원으로 적은 편이지만 차차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 도난 사건이 가끔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새 박물관의 보안시스템은 어떻습니까 -기계적 시스템은 완벽합니다. 건물 외곽 감시에서 부터 실내 침입, 진열장 및 수장고에 대한 센서 등이 3단계로 설치돼 있어 침입은 거의 불가능할 걸로 봅니다. 어느 곳이든지 유물이나 진열장에 손이 닿는 순간 모든 카메라가 그곳을 향하도록 자동조정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안시설이 완벽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모니터를 안보고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면 첨단기계도 무용지물이지요. 그래서 직원들에 대한 보안교육과 기강확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흔히 다양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용산시대를 연 국립박물관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시겠습니까. -크게 두가지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국민과 친숙한 박물관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전시유물에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름과 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 앞서 잠깐 말씀 드렸듯이 각종 공연과 영화 상영, 강의, 체험교실 등 교육·문화사업을 통해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다양한 국제교류전을 통한 박물관의 세계성 확보입니다. 국제교류전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면서, 국경을 넘어 아시아를 아우르는 중심국가 박물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새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교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선 지난 1992년 한국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전’에 대한 답례로 러시아에서의 ‘한국미술 5000년전’을 열 계획입니다. 또 한국과 중국, 일본의 국보중 진수만을 한 자리에 모으는 ‘한·중·일 국보전’도 추진 중입니다. 모두 올해 안에 윤곽이 잡히고, 개최는 내년이나 후년 쯤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김좌진 군자금 모금은 강도죄” 판결록 공개

    “김좌진 군자금 모금은 강도죄” 판결록 공개

    일제시대 때 군자금을 마련하려던 김좌진 장군은 무슨 죄로 처벌받았을까. 답은 강도죄다. 법원도서관은 일제 강점기인 1909∼1943년 대한제국 대심원과 통감부·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의 민·형사 사건 판결록 일부를 한글로 번역,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2만쪽 분량의 판결록 30권 가운데 1909∼1912년의 형사사건 51건, 민사사건 125건을 다룬 제 1권을 출간한 것이다. 당시엔 고등법원이 최종심을 맡아 이 판결록은 대법원 판례집에 해당한다. 시대상과 법률관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의병활동에 강도죄나 강도살인죄 적용 형사편엔 백야 김좌진 장군의 판결문이 있다. 김 장군은 1911년 21세 때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할아버지뻘인 친척 김종근씨를 찾아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서대문 감옥에 갇힌 김 장군은 고등법원에서 안승구씨와 공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은 “김좌진은 김종근 집에서 재물을 훔칠 계획을 세웠지만, 집 안에 사람이 많아 실행하지 않은 ‘강도미수범’”이라고 했다. 김 장관은 친척에게 협박, 폭력을 행사해 금품을 빼앗을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고등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2년 6월형을 확정했다. 기오(木尾虎之助), 이와모토(岩本英夫)란 이름의 일본 변호사 2명이 김 장군을 변론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흥분해 원수를 죽인 것은 죄가 아니다 1910년 9월 9일 오후 8시쯤 이모씨는 친구 김모씨 집을 방문했다가 싸움 끝에 맞아 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이씨의 아내 홍모씨와 첩 엄모씨는 김씨 집으로 달려갔다. 김씨를 묶어 놓은 뒤 3시간 동안 남편을 살리려 온갖 수단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흥분한 두 여성은 마침내 김씨를 때려 숨지게 했고, 경찰에 자수했다. ‘부모나 남편, 자손을 죽인 살인자를 흥분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살해한 경우 죄를 논하지 않는다.’는 형법대전 493조를 들어 이들은 무죄를 주장했다.1,2심은 “남편이 살해당한 시간과 아내가 살인범을 죽인 시간이 다르다.”며 이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아내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조선에선 조선의 관습을 따른다 1911년 꼬마신랑 송모(11)군과 결혼한 여성 김모(18)양과 성관계를 맺은 일본인 가와하라(川原貞季)가 법정에 섰다. 가와하라측은 “민법이 남자 17세, 여자 15세 이상이 되지 않으면 혼인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송군의 결혼은 무효이며 간통죄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조선인은 연령에 상관없이 혼인하는 풍습을 갖는다.”면서 “김씨는 유부녀로 간음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고등법원은 또 자식을 부양하는 의무는 아버지가 진다는 관습을 지적하며 따로 살며 사생아를 키운 첩에게 아버지는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갑오경장 때 과부의 재혼을 허가한 뒤 사대부들이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며느리에게 돈을 준 사례도 나타났다.1911년 며느리 신모씨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시댁에서 논밭과 가옥, 소 등을 받았다. 그러나 재혼했고, 시댁은 재물 반환 청구소송을 냈다. 신씨는 “재혼을 금지한 계약이 재혼을 허가한 법률을 위반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계약을 어겼으니 재물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법원도서관은 앞으로 매년 2∼3권씩 판결록 번역작업을 진행, 앞으로 10∼15년내에 전권을 완역할 계획이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역사갈등 한·중·일 ‘연합’ 가능할까

    ‘동아시아’가 화두다. 세계적인 블록화의 바람에 유럽연합을 부러워하면서도 막상 ‘동아시아연합’을 들추면 대부분 “가능할까?”라고 반문한다. 과거를 두고 한·중·일 3국이 치열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에는 미·중간 갈등과 북핵문제가 미묘하게 겹쳐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단합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과거 기억을 더듬고 있다. 먼저 20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주최로 지난 20일 열린 ‘근대전환기의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 학술회의는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고 있다. 개화기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이 쓴 조선여행기나 조선총독부 치안관계자의 육성녹음, 개화기에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잡지 등을 분석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추적했다. 이에 앞서 지난 16∼17일 15명의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세대 국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지역구도:역사의 연속과 단절’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좀 더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관계를 조명했다. 우선 ‘명·청(중)-조선(한)-막부(일)’시대 조공·책봉체제의 재해석이다. 이전의 ‘정치적인 상하관계’에서 ‘경제적인 유인’으로 해석의 초점이 이동했다.18세기까지 세계최고의 부를 자랑했던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제가 형성됐었다는 다소 파격적인 근거와 함께다. 또 조공·책봉체제는 정권안정을 위한 왕조끼리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아시아지역의 이익을 요구하고 나선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뒤였던 20세기 후반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사실상 부활한다. 이는 전세계적인 냉전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세계경찰 미국은 일본에 역할분담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재정부담 증가와 급성장한 일본이 1차적 원인이었고 길게는 일본이 시장논리에 따라 중국에 근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영·일동맹과 미·일간 태프트-가츠라조약의 부활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학의 권위자 하버드대 앨버트 크레이그 교수가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일본을 ▲선진국 가운데 GNP대비 가장 최저의 군사예산을 가진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 다시 호전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0이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강대국에 빌붙는 사대,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균세, 스스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강. 세가지 갈림길은 결국 개별 국가를 중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19세기적인 사고라는 비판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상호작용, 협력의 제도화 노력, 민간연대나 운동 등을 통한 발전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화두로 본 2004 정치] 수도이전 위헌에 “관습헌법이 뭐야”

    [화두로 본 2004 정치] 수도이전 위헌에 “관습헌법이 뭐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4·15총선 물갈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국가보안법 폐지안 개혁입법 처리 논란….2004년 정국은 충격적이고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점철됐다. 올해만큼 정치가 ‘청룡열차’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 적도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말 그대로 넘치는 말잔치 속에 올해 정국의 다사다난했던 변화를 조망해보기 위해 화두를 주제로 한 정치 캘린더를 꾸며본다. ●1월, 오세훈 의원의 불출마 선언과 물갈이 열풍 여야 중진 의원들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줄줄이 구속됐다.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한나라당의 초선 오세훈 의원은 6일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하듯 늘 갈등만 했던 게 부끄럽다.”며 4·15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는 정치권 ‘물갈이 열풍’으로 번져 자진 사퇴 의원들이 잇따랐다. 그는 ‘돈 안드는 정치’를 위한 정치자금법, 선거법 등을 만드는 데 일조해 이들 법안은 ‘오세훈법’으로 통했다. ●2월,與 ‘총선 올인’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은 13일 “총선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사퇴시한 15일을 이틀 앞둔 때였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총선 출마 압력을 견디다 못해 12일 사퇴해버렸다. 참여정부는 총선용으로 징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진표 경제부총리, 이영탁 국무조정실장, 한명숙 환경부 장관, 변재일 정통부 차관 등을 총선 출마에 합류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어떤 일이 생길지….”라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월,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노 대통령은 2월24일 방송클럽 토론회에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월4일 “선거법 9조의 공무원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라고 밝혔고, 의견서를 청와대로 보냈다. 이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9일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노 대통령은 11일 사과를 거부하고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 뜻에 따라 정치적 결단을 하겠다.”며 재신임과 연계시켰다. 야당은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고, 이날 오후 5시15분 대통령의 권한은 공식 정지됐다. 한나라당은 23일 여의도 천막당사 시대를 열었다. ●4월, 정동영 의장 ‘노인폄하 발언’ 파문 열린우리당 정 의장의 3월26일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다. 집에서 쉬셔도 된다.”는 발언이 인터넷에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탄핵 ‘후폭풍’으로 총선에서 299석 중 3분의2석을 싹쓸이 할 것이라는 전망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정 의장은 12일 선대위원장·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했다. 열린우리당은 초선 108명(108번뇌)을 포함해 151석,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의 선전 속에 121석을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으로 첫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5월, 탄핵소추안 기각 헌법재판소는 14일 “중대한 헌법과 법률 위반이 아니다.”고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윤영철 헌재 소장은 최종 기각 주문을 내리기 전에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부여받은 것이며,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며 ‘충고’의 메시지도 전달했다. 고건 국무총리는 대통령 직무대행직을 그만두게 됐고,24일 사표를 제출했다. ●6월, 책임총리제 도입 노 대통령은 8일 5선 중진인 열린우리당 이해찬 의원을 새 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앞서 경남지사 출신의 김혁규 의원을 총리후보로 내정했으나, 당 안팎의 반발로 관철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의 정치특보였던 문희상 의원은 노심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다가 내부 반발이 일자 “나는 총독이 아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는 14일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관련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발언했다가 파문을 일으켰고,30일 정 전 의장과 함께 보건복지부 및 통일부 장관에 각각 임명됐다. ●7월, 박근혜 대표 ‘국가 정체성 전면전’ 한나라당 박 대표는 19일 전당대회에서 재선출됐고,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돌아가신 분과 싸우자는 것이냐.”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발했다. 박 대표는 2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화 인사로 판정했는데 대통령이 경고 한번 하지 않았다.”면서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시기가 올 것으로 본다.”고 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강금실 법무장관은 28일 사퇴하면서 “너무 즐거워 죄송하다.”는 어록을 남겼다. ●8월,與 지도부 친일행적 논란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논란이 돼 온 부친의 친일 행적이 사실로 확인되자 19일 의장직을 사퇴했다. 열리우리당에선 과도체제 주장 등이 제기됐으나 당헌 당규에 따라 이부영 의장이 승계했다. 친일과 관련한 시련은 광복절이 끼어 있는 8월 계속 열린우리당 지도부을 괴롭혔다. 친일진상규명법을 추진하던 김희선 의원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 혈통 논란에 시달렸다. 이미경 상임중앙위원도 아버지가 일제시기에 일본에서 헌병을 지낸 전력이 드러나 곤혹을 치렀다. ●9월 노 대통령,‘국보법 박물관으로 보내야’ 노 대통령은 5일 MBC ‘시사매거진2580’과의 대담프로에서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며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발언은 국보법과 관련해 열린우리당에서 사분오열되고 있던 의견을 ‘폐지’로 확고하게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고, 한나라당 박 대표는 “법치국가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10월, 관습헌법으로 수도이전 위헌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등 4대 입법을 당론을 확정짓고 연내 관철을 선언했다. 헌재는 21일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해 재판관 8대 1로 ‘관습헌법론’을 토대로 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7월12일 서울시 의원 50여명과 공무원 대학생 등 169명의 청구인단이 헌법소원을 했을 당시 언론들도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 위헌판결이 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처음 들어보는 이론”이라고 불만을 표시했고, 한나라당은 환호했다. ●11월, 이 총리 ‘차떼기 당’발언 논란 이 총리는 10월28일 정치분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한나라당은 지하실서 차떼기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 받은 당”이라고 발언한 것을 놓고 한나라당이 반발하면서 국회 파행으로 이어졌다. 이 총리가 한나라당 폄하 발언과 함께 “조선·동아일보는 역사의 반역자”라고 했다가 설화를 입었다. 한나라당은 이 총리가 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대정부 질의를 거부해 국회는 2주일이 넘도록 공전됐다. 이 총리는 9일 ‘사의’라는 이름으로 사과했다. ●12월, 이철우 의원 北 노동당원 논란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8일 국회 본회의 5분 발언에서 “열린우리당 포천·연천의 이철우 의원이 지난 92년 노동당원으로 현지 입당하고 당원번호까지 받았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열린우리당은 ‘수구 냉전세력의 백색테러’로 규정하며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기로 하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주 의원은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가 오히려 ‘색깔론’,‘정형근 의원 고문 논란’ 등 역풍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문소영 박지연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친일서훈/신연숙 수석논설위원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를 이뤄 국회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네티즌 모금운동에 힘입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이 국고지원도 받게 됐다. 아마도 이런 친일청산 분위기에 지하에서나마 가장 감격해 할 이는 고 임종국선생이 아닐까 한다. 임선생은 아무도 ‘친일파’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던 1960년대에 ‘친일문학론’을 펴내면서 친일연구의 서막을 연 재야사학자다. 원래 문학평론가였던 선생은 한·일국교회담에서 너무도 당당한 일본의 모습과 당시 장관이 “제2 이완용이 되더라도…”운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 친일파 연구로 인생의 행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선생의 업적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친일논설선집’ 등 5권에 집대성됐다. 오늘의 ‘친일인명사전’은 선생의 유업 ‘친일파총서’를 계승한 것이다. 선생의 서거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는 등 친일 연구 명맥은 이어지고 있지만 항상 문제는 자료부족이다. 선생이 기술한 ‘일제 하 작위취득 상속자 135인 매국 전모’는 한일병합 공로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들의 전모를 세세히 밝힌다. 선생이 신문, 잡지, 조선총독부 관보는 물론 관계자 증언까지 취합해 쓴 글들은 그대로 친일연구 자료가 돼왔지만 아직도 진상규명에 필요한 원사료는 태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기록원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들여온 일제하 일본정부 서훈명단은 기대를 모은다. 최고훈장인 ‘대훈위 국화 대수장’을 받은 이완용 등 친일 관료와 판·검사, 교사, 경찰 등 무려 1500명의 수훈사실이 자세한 공적과 함께 적혀있다고 한다. 작위취득자의 경우처럼 거절하거나 반납한 경우 등만 확실히 가린다면 친일 진상규명에 획기적 근거자료가 될 것이다. 지난 3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도 개인에 의해 공개됐다. 진상규명 의지만큼 민·관의 자료 발굴도 활발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친일규명의 필요성은 이제 정치권도 이의가 없다. 친일진상규명법이 하루빨리 통과돼 우리의 과거청산 콤플렉스가 깨끗이 해소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4)거문도의 역사와 삶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4)거문도의 역사와 삶

    ●英 침략행각 고스란히… ‘포트 해밀턴’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해군 함정과 상선이 거문도에 드나들었고,1885년부터 1887년까지는 해군이 기지를 두었다. 그 동안과 그 후 몇 해 동안 해군 사병과 해병대원 10명이 이 섬과 근처 해역에서 사망하여 섬에 묻혔다.1886년에 사망한 2명과 1903년에 사망한 1명의 해군 병사의 기록은 비문에 새겨져 있으나 나머지의 묘지는 이제 알 길이 없다.”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병기한 거문도 영국군 묘지에 가면 ‘주한 영국대사관, 한·영협회, 영국부인회는 한·영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3년 이 패를 세웠다.’는 동판이 세워져 있다. 묘지의 주인공에만 관심을 갖는 위 기록으로 보면 워낙 표현이 온건하여 영국군이 잠시 나들이라도 나왔다 간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거문도 무단점령은 두 말할 것 없이 제국주의적 침략 행각이었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에 있는 섬으로 대한해협과 대마해협의 문호에 해당한다. 영국은 일찍이 거문도를 주목,1845년에 사마랑을 보내 탐사를 한 뒤 해밀턴항으로 명명했다. 서구열강은 이곳이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다.1866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슈펠트 제독도 5일간의 정밀탐사 끝에 ‘해군기지로 손색이 없다.’고 결론내렸다.1878년에 이곳을 다시 찾은 영국 실비아호 선장 존은 아예 ‘영국이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응이란 관점에서 무단점령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해석상의 명분일 뿐이다.35세에 외무차관,39세에 인도 총독, 후일 옥스퍼드대학 총장이 된 커즌은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에 관해,“블라디보스토크나 나가사키 사이에서 함부로 차는 축구공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거문도 점령은 동아시아에서의 거점확보가 핵심 의도였다.1885년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군기지화하면서 22개월간 장기 점령한다. 김윤식 등 조선정부의 요인들은 보고를 받고도 섬의 위치조차 몰라 강화도 앞의 주문도와 착각하기도 했다. 조선정부의 무능이 이 정도였다. ●섬 3개 사이 만 숨어있어 군항에 딱 이 엄청난 국제적 사건을 이해하려면 한번쯤은 이곳에 들러봐야 한다. 거문도엘 가다 보면 뱃길을 따라 초도, 손죽도 등이 펼쳐져 이곳이 다도해임을 누구나 알게 된다. 동·서도가 삼산교라는 교각으로 연결되며, 그 가운데에 고도(현재의 거문리)가 자리해 삼산도(三山島)라 불렸다. 등대로 가다 보면 3개의 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늑한 만이 요새처럼 숨어 있어 군항으로는 그만인 곳이다. 초대형 선박의 입·출항은 어렵지만 중간 연락항으로는 그만이다. 영국이 욕심 낸 이유를 알 만하다. 제국주의의 살아 있는 전시장과도 같은 섬 거문도. 영국군 묘역 바로 아래 바닷가에는 중국과 통신하던 해저 케이블이 남아 있다. 당시만 해도 전선(電線)은 ‘제국주의 침탈의 동맥’이었으니, 이는 본국과 교통하며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 야욕의 증거이기도 하다. 집단취락의 흔적인 일본식 여관, 소화13년(1938)에 건립한 거문항 확충비, 삼도(三島)신사터 등 식민의 흔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야마구치(山口縣)현의 기무라 추다로(木村忠太郞)가 무인도를 개척하여 거문리를 조성한 까닭에 왜인들 사이에서는 더러 ‘목촌(木村)의 거문도’라거나 ‘왜도(倭島)’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왜인 후손들이 일본에서 ‘거문도회’를 조직, 이따금 이곳을 찾아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한다니 그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삼치와 고등어, 갈치잡이가 주업이다. 일본인도 예전에 이곳에서 주로 어업에 종사했다. 그 고등어가 이곳에 ‘거문도 파시’를 열었다.5월말에 시작,10월까지 파시가 이어졌는데, 이 전통은 일제시대부터 76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60∼70년대에는 겨울 동안에 삼치파시도 이어 열렸다. 고등어와 삼치가 한창 들던 60∼70년대는 거문도의 전성시대였다. ●60~70년대엔 고등어·삼치 많이 잡혀 이곳에서 어획된 삼치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한창 삼치가 들 때는 배 한 척이 출어해 보통 2∼3t, 많게는 6t까지 잡아 올리기도 했다. 경남 통영이나 삼천포 등지에서 200여척의 배들이 몰려 장관을 이뤘다.17세부터 어업에 종사해온 정복래(81)씨는 ‘파시평(波市坪)’이란 역사적 용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뜻을 ‘온갖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동·서도를 잇는 삼선교까지 이런 배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술집은 말할 것도 없고 옷과 비단, 신발가게에 강진 칠량에서는 옹기배까지 찾아들어 고기와 물물교환을 했다. 거나한 술판에 싸움 잘 날이 없었던 때도 이 무렵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유곽이 들어차 포구에 창녀들이 진을 쳤다. 당시 거문리에는 우물이 12곳이나 있어 수백 척의 배들이 몰려들어도 식수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영국군이나 일본인이 동·서도를 마다하고 굳이 거문리로 몰려든 것도 풍부한 식수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문도 사람들은 고등어보다 삼치를 더 가깝게 기억한다. 고등어 잡이가 경상도 선망배에 의해 독점되었고, 그 선망배들은 밤에 작업한 뒤 낮에 잠깐 항구에 들러 물만 얻어 싣고 떠나 주민생활과 깊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고등어는 모두 부산에 모였다. 그렇지만 폭풍이라도 불라치면 이곳에는 인근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며칠씩 묵어가는 바람에 골목길이 흡사 장터 같았다. 한 척에 수십명이 타던 시절, 어선 수십 척만 들이밀어도 그들이 푸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거문도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더 이상 어로선단이 몰려들지도 않았고, 많은 거문도 사람들이 원해나 원양어선을 타고 외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로지 갈치잡이만 성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말린 갈치나 생갈치 위판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여기서 솟구친 의문 하나. 왜 60∼7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던 거문도가 한순간에 몰락하게 되었을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되면서 대일 청구권자금에 의한 노후 선박과 그물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기다리며 잡던 어업’에서 ‘쫓아가 잡는 어업’으로 변신, 단기간에 엄청난 어획량을 올렸으나 그만큼 어자원은 급감했다. 여수에 위치한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수산연구소 김진영 박사의 말을 듣자.“삼치나 고등어는 떼를 지어 움직이는 외해종(外海種)이다. 서식 공간은 정해져 있고 먹이도 제한돼 있어 이들 어류는 자기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고등어를 우리는 연간 20만∼40만t씩 잡아 올린다. 엄청난 양이다. 치어기의 생존 조건이 좋으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하지만 어류 번성의 주기는 2∼3년이다. 확실히 우리의 ‘어획 강도’가 너무 높다. 샅샅이 뒤져 씨를 말리는 ‘완전어획’으로 연안을 찾아든 외해종 치어까지 모조리 잡아버려 결국 어자원 고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은 ‘느림의 철학’이 여기서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한 마리라도 더 잡아들이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을 터이니 작은 놈들까지 싹쓸이할 것이 뻔한 이치 아닌가. 자원이 고갈되면서 우리는 고작해야 1년생 고등어를 사먹고 있으니,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말한 바 ‘소년어’를 잡아먹고 사는 격이다. ●또 하나의 명물, 100년된 등대 거문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거문도 등대이다. 백도의 아름다운 절경도 소중하지만 이 섬의 역사를 알려면 이 등대를 찾는 게 훨씬 정확하다.1905년에 세워진 등대이니 내년이면 100년. 열강이 각축하던 100년 전에 등대가 세워졌다는 것은 거문도가 전략적 요충지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등대로 가는 바닷가 벼랑길은 지나치기 아까운 절경이다. 동백나무 터널을 수백m나 통과해야 한다. 등대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만한 숲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한준봉(56) 소장은 “등탑 자체가 문화유산 감인 데다가 숲조차 뛰어나서 연간 10만명에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해양수산부에서 거액을 들여 새 단장을 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등대지기의 삶은 고달프다. 한 소장도 평생 오동도와 백야도, 소리도, 거문도 등 등대만을 돌아다녔다. 그는 아내의 출산 경험담도 털어놨다. 병원없는 절해고도에서 애를 낳는 바람에 자신이 직접 탯줄을 자르고 뒤처리까지 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다 앓기라도 할라치면 장장 6∼7시간이나 배를 타고 여수까지 나가야 했다. 이렇듯 등대지기의 애환은 끝이 없다. 이곳에는 한 소장 말고도 김계인(54)·한현성(29)씨 등 2명의 등대원 ‘홀아비’들이 더 있다. 이곳에 초임 발령을 받은 한씨는 총각이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자 “등대에서 살겠다는 아가씨만 있다면….”이라며 말꼬리를 감춘다. 농촌 총각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남들 모르는 ‘등대총각’은 어쩌랴. 혹시라도 동백꽃 피고 지는 등대섬에서 살 뜻이 있다면 누구든 나서 보시라. 마침 관사도 비어 있어 새 삶에 운이 트이기도 할 것이니. 단, 등대의 삶이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점은 알아둘 것. 영국군 묘지, 등대 100년, 일본인 어촌은 언뜻 무관한 항목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거문도 위쪽 손죽도에는 왜구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니 이 역시 외세와 관련된 역사의 일부이다. 구한말 거문도의 지식인이었던 귤은(橘隱)은 거문항의 만(灣)을 삼호(三湖)라 명명했다.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뜻인데, 실제로 거문도는 역사 속에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 [김춘수시인 타계] 생애·작품세계

    [김춘수시인 타계] 생애·작품세계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 놓고 복사꽃을 울려 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西風賦’ 전문) 한국시단의 큰어른 대여(大餘) 김춘수. 힘겨운 시절, 한국이라는 궁벽한 땅에서 태어나 그만큼 치열하게 또 자유자재로 시의 지평을 넓히며 ‘자신의 문학’‘자기 시대의 문학’을 윤기나게 일군 이가 다시 있을까. ●모더니즘 경도된 시절에 상징주의 수용 그는 1948년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면서 시인의 삶을 시작한 이래 2002년 ‘쉰 한편의 비가’에 이르기까지 물경 40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냈으며,‘시의 위상’ 등 시론집도 7권이나 펴낼 만큼 열정적으로 시를 보듬어 왔다. 초창기인 1950년대 무렵, 내로라하는 당대의 시인들이 하나같이 영미의 모더니즘에 경도된 그 시절에 그는 주저없이 릴케 류의 상징주의 시정신을 받아들여 우리 문단의 협소함을 극복하고자 한 한국 시문학의 선구자였다. 이 무렵 그가 지향한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절대 순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시를 두고 이승훈 한양대 교수는 “그는 투쟁보다 화해, 고통보다 안정, 탐구보다 신앙을 희원했다.”고 분석한다. 김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청년기를 보냈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日本)대학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했다. 언젠가 “기질적으로 항일운동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많이 좌절했다.”며 젊은 시절을 고백한 적이 있는 시인은 자기 반성의 한 자락인 양 평생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무의미의 시’를 썼다. 일본의 총독정치를 비판하다 7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퇴학당했던 경험이 이후 관념을 배제한 시들을 쓰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50년대 말부터 ‘무의미의 시’ 골격 구축 1946년 ‘애가’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세계는 크게 4단계로 나뉜다. 1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 ‘나목과 시’ 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시기. 이 즈음 그는 존재의 의미에 천착해 치열한 탐색의 태도를 보였다. 이런 그의 모색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한 ‘꽃’에서 잘 나타난다. 2기는 50년대 말부터 드러난 서술적 이미지의 시세계. 이 시기에 그는 ‘타령조’‘부두에서’‘봄바다’ 등의 시편을 발표하며 김춘수 시세계의 큰 축인 ‘무의미의 시’의 골격을 구축해 냈다.‘날이 저물자/내 근골과 근골 사이/홈을 파고/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베꼬니아의/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처용단장 제1부)는 시편에서 보듯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어쩌면 무상(無常)과도 맥이 닿는 무의미가 주조를 이룬다. 이어지는 3기는 탈(脫)이미지의 세계로,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기에 나타난다.‘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살똥이 앗아간 것, 여자가 앗아가고 남자가 앗아간 것,/앗아간 것을 돌려다오‘(처용단장 제2부)에서 보듯 이미지 파괴와 실존성이 구체적인 리듬감으로 표출되고 있다.4기는 7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이어지는 시기로 실존성의 극복과 담담한 성찰의 특성이 드러나는 시기다. ●우리 문단의 영원한 숙제 ‘김춘수 읽기’ 그러나 이런 축약으로 그의 시세계를 말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김춘수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평자는 먼저 그의 엄청난 필력에 압도 당하고, 또 아무리 짧은 촌평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에 당혹하게 된다.”는 이창민 고려대 교수의 지적처럼 그의 시세계는 섣부른 해석을 한사코 경계하는 까닭에 ‘김춘수 읽기’는 우리 문단의 미제로 남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인으로서의 김춘수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다양한 문학적 편력을 훑지 않을 수 없다. 숱한 시집과 시론으로 우리나라 시세계의 여백을 채워온 그는 수필과 소설에도 열정을 쏟아 부었다. 지난 76년 첫 수필집 ‘빛 속의 그늘’ 이후 95년 ‘사마천을 기다리며’까지 여섯 권의 수필집을 문단에 봉헌했는가 하면,54년에 ‘유다의 유서’를 내는 등 지금까지 3권의 장·단편 소설을 내기도 했다. 5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경기도 분당 큰딸의 아파트 근처에 살았던 시인은 지난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신작 시집 ‘달개비꽃’이 새달 중 출간될 예정이다. 거인이 훌쩍 자리를 비운 문단이 허허롭기 이를 데 없다. 그가 필생의 업으로 여겼던 ‘절대 순수’와 ‘인간의 참모습’에 대한 끝없는 향수는 ‘맑은 시인의 피’로 두고두고 세상의 가슴을 흐르지 않겠는가. 떠나간 시인의 느리고도 지치지 않았던 보행처럼….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김춘수시인 타계] 김종길 교수의 추도사

    기도폐색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넉달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혼수상태를 계속하던 김 사백이 마침내 어제 아침 9시에 만 8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적은 연세는 아니지만 강건한 체질이라 장수하리라 믿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안타깝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 사백은 해방 후에 등단한 국내시인 중에서는 가장 철저한 순수시인이며 가장 예술가다운 시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변모해온 시인으로 가장 전문적인 시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우리 시단(詩壇) 내지 시사(詩史)에 있어서의 그의 위상은 그의 지속적인 예술적 정진의 결과이지만 시예술의 특질은 그의 사람됨과 생애와도 무관할 리가 없다. 그는 통영의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보통의 환경과는 다분히 격리된 공간에서 생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그는 보통 사람들이 자라고 철드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다소 폐쇄적이고 몽환적이기도 한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가졌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통상적인 현실세계가 늘 낯선 곳처럼 느껴졌을 것이며 그의 현실감각은 확실히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다소 달랐을 것이다. 그가 중학 졸업을 몇달 앞두고 담임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퇴했다든가, 경험삼아 나가 본 도쿄의 노동판에서 순진하게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하다가 반년 남짓 옥고를 치른 것이라든가, 제5공화국 초기에 불쑥 내맡겨진 국회의원직을 얼떨결에 수락해 버린 것이 모두 그의 특수한 현실감각 탓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을 역사의 피해자로 간주하고 역사를 불신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라고 실토한 것은 미당(未堂)이었지만, 대여(大餘)에게는 이 세상은 가도가도 어색하기만 하였으리라.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는 불행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시업(詩業)에 있어서는 행복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펼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천생(天生)의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했고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떠나간 것이다. 그가 사숙한 시인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고사했듯 그 또한 기도로 들어간 미음 알갱이 때문에 사고사하였다. 동양에는 옛날 적선(謫仙), 즉 이 세상에 귀양온 신선이라고 불린 시인이 있었다. 김 사백도 지상에 귀양온 신선처럼 이 세상이 서먹서먹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 훌륭한 시를 남기고 표표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 이 지상에는 슬픔과 찬탄에 잠긴 우리들을 남겨두고. 예술원 회원·고려대 명예교수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1) 완도 송징당산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1) 완도 송징당산제

    ‘장사의 뼈는 진작 초목과 더불어 썩었어도/의연한 그 혼백 노여움 머금어 바람 우뢰 사나우니/귀신이 영웅되어 이 땅에서 받들어지며/신목에 꿩털 꽂고, 나무로 형상을 만들었도다/저 어떤 사람인가?/신당을 괴이하게 비웃으며/부수고 망가뜨려 강가에 던지다니!/백년 풍상에 한 간 당집이 쓸쓸하고/철 따라 복날이고, 섣달이면 마을의 북소리/뉘엿뉘엿 해 질 무렵이면 무당이 굿을 하는데/하늬바람에 갈가마귀 춤을 춘다.’ 당대의 문인 임억령(1496∼1568)이 해마다 송대장군을 받들고 굿을 하게 된 내력을 읊은 장시 ‘송대장군(宋大將軍)’의 한 대목, 시에서 ‘신당’이 있는 곳은 우리에게 청해진 유적지로 잘 알려진 완도 장좌리의 장도(將島). 이곳에는 전설의 인물 송징(宋徵)이 마을신으로 좌정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 열나흘 밤이면 풍물굿이 열린다. 모두들 일렁이는 횃불을 들고 물이 빠진 바닷길을 걸어서 섬으로 들어가 장군을 모신 신당 앞에 자리를 잡는다. 굿은 밤새도록 이어진다. 새벽녘 동이 훤하게 터올 무렵에야 신당에서의 굿은 파한다. 여명이 들 무렵이면 들물이 차올라 장도는 다시 물길에 갇히고 만다. 아낙들은 아무런 속이 없이 그냥 흰 밥을 둘둘 만 굵직한 김밥을 하나씩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 김치를 곁들인 흰 김밥을 새벽 바다에서 먹는 맛이라니! 그 김밥으로 허기를 때운 사람들, 이제 마을로 돌아갈 행장을 꾸린다. 굿패는 신당을 몇바퀴 돌면서 굿거리 장단을 펼친다. 올 때는 걸어왔지만 돌아갈 때는 배를 타야 한다. 배에서도 요란하게 풍장을 치면서 굿판의 여흥을 사른다. 아침 바다에 울려퍼지는 풍물소리의 매혹스러움을 어찌 글로 다 옮길 수 있으랴. ●매년 정월 열나흗날 섬에서 밤새 풍물굿 지금부터 꼭 20년 전인 1984년. 그 때 머나먼 이곳 장도로 답사를 왔었다. 그 때만 해도 차편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어쩌다 시골버스가 다닐 뿐 너무도 조용하여 굿장단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동네 구멍가게에 자리를 잡고 물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 마침 마을 장정 몇이서 됫병 소주를 맥주컵에 그득하게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에게도 컵 가득 소주를 부어 권하였다. 그러면서 그 사내들은 송징 장군을 모시게 된 내력을 신명나게 풀어냈다. 그렇게 의기투합해 오래 대화를 나눴지만 그들의 말 어디에도 유명한 장보고 이야기는 없었다. 물이 빠지자 그대로 200여m를 걸어서 장도로 들어갔다. 바다에 에워싸인 언덕배기에는 푸른 밭이 펼쳐져 있었고, 섬 정상부는 유난히 푸르른 동백나무숲이 무성했다. 반짝이며 생기가 도는 동백나무 잎에서 생명의 기(氣)가 무한히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그곳에 조그마한 당집이 있었다. 금줄이 쳐진 당집 문을 열자 송징 장군이 기다리기라도 한듯 좌정하고 우리를 맞았다. 그로부터 10여년쯤 뒤. 다시 한번 그곳 장좌리를 찾았다. 불과 10년 사이에 그 때의 초가 당집은 기와집으로 바뀌어 한 눈에도 근엄해져 있었고 당집 문을 열자 예전에는 없었던 장보고의 영정이 마중하였다. 어느 노인이 들려주었다.“원래는 송징인데, 문화재에서 장보고래요.” 노인이 말한 ‘문화재’란 문화재를 다루는 관계 공무원이나 학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20년 전 조사할 당시만 해도 분명히 송징으로만 전달되었고, 임억령의 시에도 송징이 주인공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빚어졌을까. 변모 과정을 꼼꼼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임억령은 앞의 시를 통해 송징을 모신 굿당을 무시하며 이를 음사(淫祠)로 치부하는 유생들의 고루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송 장군의 영웅성을 노래했다. 그의 고향이 해남 땅이니 완도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지냈으렷다. 시에서 송 장군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위력을 보여주는 영웅,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천험의 요새에 진을 치고 민중을 도와주었던 출중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송 장군을 둘러싼 다양한 ‘설’만 있을 뿐 아무런 입증자료가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 송징이란 뛰어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가 완도민들을 위하여 무언가 선한 일을 했을 법한데 영웅으로서 피를 흘리며 비장하게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바다의 영웅,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 모셔지게 되었고, 임억령의 시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듯 오랜 세월을 모셔지던 바다영웅 송징이 주인 자격을 잃고 느닷없이 장보고로 바뀌었다니…. 송징은 원래 장보고인데, 신라에서 장보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기에 내놓고 장보고를 모실 수가 없어 송징으로 이름을 바꿔 모시게 된 것이라는 희대의 궤변도 등장했다. 송징은 분명 실존인물이었을 것으로 비정된다. 민중의 입장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영웅답게 당신(堂神)으로 신격화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래 송징의 의미는 격하되고 장보고라는 ‘새로운 신화’가 느닷없이 그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장보고의 시대적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오랫동안 숭배되어 온 민중영웅은 끝내 쫓겨나고 거짓 신화가 창조된 것이다. ●송징장군 10여년 전부터 장보고로 뒤바뀌어 그동안 제 대접을 받지 못하였던 장보고의 인물사적 조망이나 유적지 발굴 등 현양사업의 필요성은 너무도 당연하다. 문헌이 남아 있지 않으니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어도 문화재청의 발굴 결과 장도는 청해진의 진지로 비정되며, 학계에서도 대략 이를 공인하는 분위기다.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법화원 터도 발굴되었다. 일찍이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E.O.Reischauer) 교수가 ‘해양 상업제국의 무역왕’으로 표현하고 그의 직책을 총독(Commissioner)으로 지칭했듯 장보고는 백가제해(百家濟海)하던 해상국가 백제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해양의 원대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현양사업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장도의 주신은 엄연히 송징이다. 역사적으로 장보고가 남해안의 신으로 좌정한 적은 없었다. 왜구를 물리친 최영도 남해안의 신이 되어 있다. 억울하게 죽은 민중의 영웅이라면 대개 민중의 신으로 좌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상하게도 장보고만은 민중의 신이 되지 못했다. 참으로 이상한 점이기는 하나,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마을 주민들에게서 다양한 증언이 나오고 있다. 송징 장군, 정년 장군, 혜일대사는 예전부터 당제로 모셔졌지만 장보고 장군을 모신 것은 10여년 전부터라고 했다. 정확하게는 1982년 남도문화제 출전 이후부터라고 아예 못을 박는 이들도 있었다. 장보고 장군을 모시자는 마을 유력자들의 건의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도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바움(E.Hobsbawm)이 이론화시킨 ‘만들어진 전통’의 개념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효할 것이다.‘전통 만들기’로 인하여 반허구적 조작이 이루어지고, 역사적 연속성을 초월하여 과거가 새로이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역사적인 연속성조차 새로이 만들어진다고 그는 설파하였다. 장보고를 되묻는다.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혹시나 박정희 시대의 이순신 장군, 전두환 시대의 세종대왕, 김대중 시대의 장보고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정치적’으로 귀착한 것이나 아닌지. 장도가 청해진이라는 발굴 성과가 제시되자 사람들은 한층 ‘전통 만들기’의 욕망에 허덕이는 듯 보인다. 장보고와 송징은 섞여서 해석되고, 장보고의 ‘만들어진 전통’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송징은 마땅히 죽어야만 한다는 듯. 송징의 옷을 빼앗아서라도 새롭게 갈아입은 장보고가 주인공이 되어야만 우리들 시대가 펼치려는 온갖 장중하고도, 때로는 불필요한 일까지 포함하는 장보고 현양사업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모든 길은 장보고로 통한다.’는 식에 가까운 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온갖 추정과 가설이 정설로 둔갑되고 마침내 확고부동의 진실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유력 일간지는 아예 ‘천년 넘게 이어져온 장보고 당제’라는 특집도 내보냈으며,TV도 ‘장도와 청해진, 장보고, 마을신앙’의 연결을 공식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역사적 근거가 없으니 안타깝거니와 사실은 ‘아둔한 짓’ 아닐 것인가. ●천년 넘게 이어져온 장보고 당제라니… 송징은 조만간 완벽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훗날에는 장보고의 ‘만들어진 전통’,20세기 초기나 말기의 행위들이 당당히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새로운 구전(口傳)으로 이어져서 새 전통으로 거듭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인 즉, 민중신앙사의 장기 지속에서 연이어 온 송징만큼은 훗날을 위해서라도 온전히 보존해 두어야할 것 아닌가. 매우 하찮은 일 같지만, 이렇듯 역사적 뿌리마저 뒤범벅해 놓으면서 어찌 후대의 역사적 평가 운운하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으랴. 한학자 임형택(성공회대) 교수도 이를 경계하여 ‘민중영웅의 형상이 또 한번 훼철당한 사례’로 비판한 바 있다. 장보고를 핑계삼아 희생양처럼 훼철된 송징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늠름하게 좌정해야 하지 않을까.
  • ‘대한매일신보연구’ 논문집 발간

    ‘대한매일신보연구’ 논문집 발간

    대한제국 당시 대표적인 항일구국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의 성격과 내용, 언론사적 의의 등을 분석한 단행본 ‘대한매일신보연구’(커뮤니케이션북스)가 발간됐다. 한국언론학회 언론사연구회가 엮은 이 책은 지난 7월 열린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보완해 엮은 것이다. 한국언론사연구총서 발간사업의 첫번째로 발간된 이번 책은 제1부 대한매일 신보의 성격과 운영,2부 기사 내용과 독자로 구성돼 있으며, 부록으로 대한매일신보에 관한 그간의 주요저서와 논문들의 목록을 실었다. 필진으로는 김덕모 호남대 교수, 김영희 이화여대 강사, 박정규 한남대 교수, 안종묵 한국외대 교수,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채백 부산대 교수, 이연 선문대 교수,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 등 8명이 참여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침탈이 극심했던 대한제국 당시 ‘뎨국신문’, 황성신문에 이어 1904년 7월18일 창간됐다. 당시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항일구국지들보다 더 과감하고 날카롭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주도했다. 또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섰으나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을 합방하면서 그해 8월 28일자를 끝으로 폐간의 운명을 맞았다. 한일합방후 일제는 대한매일신보를 강제로 매수해 ‘매일신보’란 한글판 총독부 기관지로 발행했으며,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가 환수한 뒤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단행본은 대한매일신보 창간후부터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된 총 2660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우리동네 이야기]서울 청량리동

    [우리동네 이야기]서울 청량리동

    나무가 우거진 데다 남서쪽이 확 트여 늘 시원한 바람이 그칠 날 없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청량리(淸凉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588’이 곁들여지며 거듭나기 위해 안타까운 몸부림을 치는 곳이 돼 버렸다. 1970년대 경기도 구리, 남양주 등 수도권에서 유동인구가 쏠리면서 동북권 최대 부도심을 뽐냈던 청량리는 서울정신병원과 맞닿은 제기로를 축으로 북쪽은 2동, 남쪽은 1동이다. 이곳 사람들은 윤락촌인 ‘588’ 하면 곧 청량리를 떠올리는 데 불만이 적지 않다. 강북구 미아동과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윤락촌 ‘미아리 텍사스’가 미아동이 아니라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에 위치했다.‘588’도 청량리가 아니라 전농동에 있다.1900년대 초 철도 청량리역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윤락촌이 철도와 시외버스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이같은 오명(?)을 뒤집어 썼다. 어언 1세기에 이르는 ‘588’처럼 청량리도 유서가 깊다. 신라 말기인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청량사(淸凉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점은 유래를 잘 말해 준다. 청량리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해 중요한 지역으로 꼽혔다. 영조 때인 1751년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청량리계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가 국권을 강점한 뒤 이듬해 4월 ‘5부 8면제’ 실시로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로 일컬어지다가 14년 4월 경성부 축소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가 됐다. 그러나 36년 경성부를 확장하는 총독부령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광복 후인 46년 10월엔 일제식 동명인 청량리정(町)도 청량리동으로 바꿨다. 회기로, 홍릉로가 접하는 삼거리 청량리동 206에는 세종대왕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73년 서초구 내곡동 영릉터에 있던 세종대왕신도비(神道碑=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죽은 이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석. 서울 유형문화제 42호)를 옮겨놓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떡을 즐겨 해먹었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떡전거리’도 청량리1동과 전농동을 잇는 도로변에 있었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면적은 청량리 1동 0.4㎢,2동 0.76㎢를 합쳐 1.16㎢다. 모두 1만 63가구에 인구는 2만 7275명이다.2동은 휘경2동(1.05㎢), 전농3동(0.85㎢)에 이어 관내 26개동 가운데 세번째로 넓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儒林(20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타인과의 약속을 신과의 맹세처럼 생각했던 공자가 공숙씨와의 약속을 이처럼 헌신짝처럼 버린 일은 놀라운 일이다.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던 공자의 파격적인 행동은 이것이 단 한 번의 예외인 것이다. 공자가 포땅을 벗어나 단숨에 위나라로 발길을 돌리자 원칙주의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방금 공숙씨들과 절대 위나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을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강요에 의한 맹세는 신도 듣지 않는다.” 생명을 위협하는 감금상태 중 일반적인 강요에 의해서 맺어진 협약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공자의 대답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예수의 태도와 상극을 이룬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굳은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로마인 총독 빌라도가 ‘나에게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가.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 모르느냐.’라고 마지막 회유를 하였을 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공자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마다하지 않는데, 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현실의, 현실을 위한, 현실에 의한 현실주의적 사상가였던 것이다. 공자는 마침내 위나라로 다시 들어가는데 이것이 세 번째의 입국이었다. 사기에는 이때도 영공이 ‘공자가 왔다는 기별을 받고 교외까지 반갑게 마중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차츰차츰 공자에 대한 대우는 소홀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공자가 입국했을 때에는 6만 두의 곡식을 녹봉으로 주었으나 두 번째는 영공 자신이 교외에까지 마중하고 부인인 남자도 공자를 회견했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위나라로 들어왔을 때에는 교외까지 마중은 했으나 영공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고 은근히 공자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행동은 공자가 포땅에서 반기를 들었던 공숙술 일당에게 곤혹을 치렀단 말을 전해 듣고 공자에게 한 행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대가 포땅에서 공숙 일당으로부터 큰 수난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소. 어차피 공숙 일당은 반역자라 이들을 토벌하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영공의 말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공자는 개인의 원한 때문이 아니라 국가에 반기를 든 모반자들은 반드시 처벌하여 국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영공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우리 대부들은 이를 불가하다고 말하고 있소. 포는 위나라의 서쪽에 있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진나라와 초나라를 막는 요충지로 생각하고 있소. 나는 포를 치고 싶은데 말이오.” 망설이는 영공을 향해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제가 본 바에 의하면 포나라 사람들은 공숙술의 편이 아닙니다. 그곳 남자들은 그곳을 다스리는 공숙씨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고, 그곳 여자들은 그곳을 평화로이 유지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군사를 내어 정벌하신다면 금방 반역자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숙씨를 따르는 무리들은 불과 4,5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자 자신이 직접 공숙씨의 군세를 본의 아니게 염탐까지 하였으므로 신빙성이 있었다. 이에 영공은 크게 반기며 말하였다. “좋소. 당장 군사를 동원하여 포를 치겠소.”
  • 일본인 첫 건국훈장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정부는 12일 국무회의에서 일본인 고(故)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79∼1953) 변호사가 독립운동가 김지섭·박열 선생 등을 변론하고,독립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한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키로 했다. 이번 결정은 2001년 ‘후세 선생을 연구하는 모임’(대표 정준영)이 서훈을 신청함에 따라,다방면의 공적 검토를 거쳐 이뤄졌다.후세 변호사는 1919년 재 일본 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송계백 선생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론을 맡았으며,1924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참석한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 왕궁의 이중교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김지섭 의사를 변론했다. 또 1926년엔 일왕과 왕족을 폭살하려는 거사를 감행하다 사전에 발각돼 체포된 박열 선생 등의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항거를 적극 옹호했다.훈장은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에게 전달될 예정이며,외국인이기 때문에 유족 연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중국 31명,영국 6명,미국 3명,아일랜드 3명,캐나다 1명 등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길섶에서] 새마을에 대한 기억/심재억 문화부 차장

    언론계와 정계에 몸담았던 모 인사가 최근에 펴낸 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 눈길이 머물렀다.“(박 대통령은)특히 명치유신 때의 지사들을 존경…(중략)총독부의 아다라시이 무라 쓰쿠리(새로운 마을 만들기)정책과 새마을운동의 유사성도 있다.” ‘박통’이 ‘일본통’인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그가 “밤잠을 설쳐가며 창안했다.”던 새마을운동의 시원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닿아있다는 데서 맥이 풀렸다. 문득 아린 기억이 되살아났다.어느 해 추수를 끝낸 늦가을,시멘트를 가득 실은 ‘오가다 도라꾸’가 마을로 들어오고,누대의 애환이 층층 켜를 이룬 초가지붕이 훌러덩 벗겨져 나갔다.볏짚을 이겨 쌓은 토담도 볼 것 없다는 듯 자빠뜨렸다.그 자리에는 슬레이트 지붕과 블록담장이 생겼고,담벼락에는 ‘반공 방첩’이나 ‘무찌르자 공산당 쳐죽이자 김일성’ 등속의 선전구호가 살벌하게 그려졌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이엉 대신 홑겹의 슬레이트를 얹은 집은 겨우내 외풍이 들어 아무리 구들을 덥혀도 코가 시렸다.그런 집 꼬락서니에 울화가 치민 할아버지는 한 날,마을을 찾은 점잖은 면장에게 삿대질을 하고 말았다.“한겨울에 지붕을 걷어내다니,이런 똥물에 튀겨 쥑일 인사 같으니….”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열린세상] 새 역사교육체계 수립 시급하다/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한·중·일 3국 사이에 동아시아 역사분쟁에 대한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 해 지난 1년여 동안 우리의 혈압을 오르게 했지만 시원스레 해결되지 못하고 잠복했다.중국 외교당국이 내년도 검정예정인 역사교과서에 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교적 언사가 구두로 나왔을 뿐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고 있다.게다가 역사교과서에 수록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정작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을 감행하고,중국 외교당국이 지방 민간학자들의 활동임을 내세워 방어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북한 핵문제,날로 높아가는 중국과의 무역 비중,패권주의적 중국의 대외정책 등에 떼밀려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느냐,수년 뒤의 개정을 위해 노력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려 버리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내년 봄에는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일본의 우익 역사교과서 재검정이 있고,현장에서 그 교과서를 채택하는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국제사회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있고,일본 총리를 비롯한 각료,국회의원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우리의 항의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중국과의 역사분쟁에 한국이 대응하는 방식을 보았으니 일본도 이참에 좀더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한·중·일 3국간의 역사분쟁 실상을 너무 어둡게 그렸는지 모르겠으나 강대국 사이에 끼인 우리의 처지는 이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안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떠한가.어떤 학자는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주민에게 돌려주자고 주장하는데,고구려의 주민은 찾을 길이 없다.우리가 고구려의 땅을 전부 우리 땅이라고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 역사계승관계를 살펴 우리의 정체성을 탐구하자는 것인데,그것조차 부정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니니 해방시키라고 한다.오히려 해방시켜야 할 대상은 중국 주변의 수많은 소수민족과 그들의 국가 및 역사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의 변화가 미·중 관계와 남북통일에 미칠 영향이다.북한의 변화방향에 따라서는 이제까지 겪어온 세월 이상으로 분단상황이 지속되지 말란 법이 없다.중국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포석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경제적 지표에만 의존해 식민지시대에 성공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그렇다면 왜 500여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를 떠돌았는가.경제적 지표 못지않게 역사의 전체상을 바라보아야 한다.조선총독부,또는 일본정부가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자료가 없다고 하여 그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본이 식민지시대의 정책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것을 추궁해야 한다. 지난달 11일 남북 역사학자교류협의회에서 남북 공동으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자는 결의를 하고 실천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중·일의 패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이 연대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 역사교육의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일이다.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한편,우리의 극단적 국수주의도 극복할 수 있는 균형잡힌 역사의식을 갖추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중·고교 교육과정에서처럼 역사과목이 사회과목의 품안에 파묻혀 있어서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역사과목을 사회과목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일이 시급하다.역사교육을 소홀히 하고서는 민족과 국가,역사와 문화 그 어느 것도 지킬 수 없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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