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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현대 생활에서 날씨는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언제 어디에 설치됐을까? 공식적인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고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초대 인천관측소장에는 일본 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씨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경성, 대구,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다. 또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다. 인천관측소 및 지방 측후소에서는 매일 오전 2시,6시,10시, 정오, 오후 2시,6시,10시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상을 관측했다. 날씨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매 시간 또는 30분마다 임시 관측을 했다. 관측사항은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 강수량, 증발량, 구름의 투명도 등 중요한 기상요소를 비롯해 그외의 기상현상을 실측했다.1910년 4월에는 인천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관측소의 주요업무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시보와 오후 3시 천기 예보였다. 일기예보는 “서해로 구름이 창궐하고 태풍이 불 조짐이 보이나니….”라는 식의 고풍스러운 멘트였다. 특히 정오 시보는 포를 쏘아 알렸는데 포수가 손을 다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제로 손가락 8개를 잃은 포수는 얼마 전까지 동구 화평동에서 ‘전당포 조막손 아저씨’로 불리며 생존했다.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오포가 울리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인천 사람들은 관측소가 있는 응봉산을 오포 쏘는 곳이라 해서 ‘오포산’으로 불렀다. 인천관측소는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 산하기구가 되었는데,1912년 3월 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관측소는 기상에 관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실시했다. 인천관측소는 1939년 7월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에는 중앙기상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되고,6·25전쟁으로 중요한 기상관측 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된다. 그 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128) 梅花不賣香(매화불매향)

    儒林 (623)에는 ‘梅花不賣香’(매화 매/꽃 화/아니 불/팔 매/향기 향)이 나온다.朝鮮(조선) 中期(중기)의 학자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野言(야언)’에는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이라는 글이 있다.‘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가면서 항상 거문고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安樂(안락)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梅’는 意符에 해당하는 ‘木’(나무 목)과 音符 구실을 하는 ‘每’(매양 매)를 결합하여 ‘매화나무’의 뜻을 나타냈다.‘每’는 원래 ‘잘 차려입은 여자’를 나타낸 글자이다. 아랫부분은 성숙한 여인을 나타내는 ‘母’(어미 모)이며, 위쪽은 ‘머리 장식’을 표현한 것이다. ‘花’는 본래 ‘華(화)’의 俗字(속자)였다.‘花’자는 풀의 상형인 ‘艸’와 ‘ (인:바로선 사람을 뜻함)’과 ‘匕(비:거꾸로 서있는 사람)’가 어우러진 글자이다.‘不’은 나무나 풀의 ‘뿌리’를 본뜬 象形字(상형자)이다. 공교롭게도 뜻만 있고 글자가 없던 ‘아니다’라는 뜻의 부정사와 發音(발음)이 같았기 때문에 결국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賣’는 ‘물건을 팔러 나간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出’(날 출)과 ‘買’(살 매)를 결합한 會意字(회의자).‘香’은 ‘벼’의 상형인 ‘禾’(화)와 ‘발 없는 솥’이 변한 형상인 ‘曰’이 결합한 會意字이다. 추위에 굴하지 않는 매화는 淸貧(청빈) 속에서 살아가는 깐깐한 선비의 氣槪(기개)이고 눈 속에서도 몰래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君子(군자)의 덕이다. 청빈한 선비는 결코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올곧은 선비는 志操(지조)를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다.“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不正(부정)과 不義(불의)한 권력 앞에는 最低(최저)의 생활,最惡(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조지훈이 ‘志操論’(지조론)에서 한 말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선 채로 세수를 하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逸話(일화)가 전한다.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晩年(만년)을 서울 성북동 소재의 尋牛莊(심우장)에서 보냈다. 나라 잃은 울분을 토하며 셋방을 전전하는 처지를 딱하게 여긴 知人(지인)들이 뜻을 모아 집 한 칸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남향의 좋은 터를 권했지만 일제 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 하여 故意(고의)로 北向(북향)을 택할 만큼 옹골찬 선비였다.‘이 땅의 마지막 선비’로 일컬어지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다가 혹독한 拷問(고문)의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를 얻었다. 일본의 植民統治(식민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법을 무시했고,抗訴(항소)도 辯護士(변호사)도 거부했다.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信念(신념)이었다. 김석제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인디아 리포트] (8) 국가경쟁력 원천 ‘영어’

    [인디아 리포트] (8) 국가경쟁력 원천 ‘영어’

    |뭄바이 이상일특파원|‘사티야 브라제스 쿠마르’는 델리의 명문대인 네루대학 한국어과출신으로 올초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마쳤다. 쿠마르는 네루대학 1,2학년때 영어를 사용하는 교수로부터 한국말을 배우고 3학년이 되서야 비로소 한국말 강의를 들었다. 대학입학시험은 영어로 치렀다. 꾸마르는 “인도의 경우 대개 고등학교때부터 영어로 전 과목을 수업하며 명문대의 경우 입학시험은 전 과목을 영어로 치른다.”고 말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라시마 미즈라(여)는 인도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서비스업체인 ‘사탐 컴퓨터 서비스사’남아공 지사의 인사담당 이사. 그녀는 인도 동북부의 오릿사주 수도인 부바네스와르에서 학교를 다녔다.“사립중학교 입학때부터 모든 수업을 영어로 들었다.”는 그녀는 서구인같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 미즈라 이사는 “영어는 인도에서 도시 엘리트들이 모두 배우기 때문에 ‘도시의 언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인도 현지인이며 오랫동안 영어를 배운 사람들이어서 영어로 역사나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이제야 비로소 일부 고교와 대학에서 영어 강의가 시도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도시의 언어,IT산업의 언어 인도의 경쟁력 원천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영어다.IT산업뿐 아니라 무역에서도 능통한 영어로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수입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출세하고 성공하려면 영어는 기본조건이다. ‘고아’나 ‘폰디체리’등 과거 식민지 통치를 받던 지역에서는 프랑스어와 포르투갈어도 일부 쓰이지만 대도시에서는 영어가 일상생활에서 주로 쓰인다. 즉 인도의 언어권은 ‘지방은 현지어, 대도시는 영어’로 2분화되어 있는 셈이다. 또 초등학교때는 영어와 힌디어나 다른 지방언어 등 2∼3개 언어를 익히다 5학년(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운다. 사립중고등학교나 대학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 교육단계별·기관별로 언어사용이 이중화되어 있다. 그래서 “영어는 농민의 언어는 아니지만 농과대학의 언어이며 시장의 언어는 아니지만 경영대학·IT산업의 언어”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즈니스맨들은 거의 모두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또다른 영연방에 들어선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가하면 택시 기사와 허드렛일하는 노동자도 영어로 간단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다. 델리에서 빈민구제 NGO단체를 이끌고 있는 60대의 카롤은 “영국 식민지 하에서 영어를 배울 때는 저항감도 있었지만 요즘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강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구 IT기술을 언어 통·번역없이 바로 수입할 수 있어서다. 인도인들이 미국 IT업계에 대거 취직하고 미국 회사들의 전화교환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영어덕분이다. 한국의 IT가 강하면서도 한국인력의 외국 진출이 쉽지 않은 것은 영어의 벽 탓이다. ●빠르게 변하는 IT기술 통·번역 필요없이 수입 인도의 영어 사용인구를 총 인구의 10%라고 쳐도 1억 65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영국(5900만명)보다 더 많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영어를 사용, 능통하다. 인도 영어교육에서 특이한 점은 영어교사가 거의 전부 인도인 교사란 점이다. 미국인이나 영국인 교사가 거의 없는 것은 보수격차를 보전해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도인 교사들의 층이 두껍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인도인의 영어에는 특별한 악센트 등으로 미국이나 영국 영어와 다른 점이 있으나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늘 파란눈과 노란머리의 영어강사만 선호하다 자격 미달 서구인을 마구잡이로 수입하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bruce@seoul.co.kr ■ “소프트웨어 업계 취업땐 영어가 필수” 인도의 대표적인 컴퓨터 교육훈련 회사 중 하나인 ‘앱텍’은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한다. 더욱이 영어가 달리는 한국인 유학생 등에게 3∼6개월간 영어연수를 시킨 다음 컴퓨터교육에 들어간다. 인도 뭄바이에서 만난 앱텍사의 크리쉬난 부사장은 영어 강의의 배경을 “영어는 정보통신기술(IT)소프트웨어의 국제 언어인데다 수강생들은 교육후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일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에서 초등 교육은 지방언어로 가르치지만 고등 교육은 영어로 강의한다.”면서 “컴퓨터 교육은 고등교육에 속하기 때문에 영어로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쉬난 부사장은 “우리가 가르치는 영어는 수강생들이 고객과 대화를 하며 고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앱텍의 수강생은 대부분 18∼25세로 학교 졸업후 일자리를 구하거나 경력을 쌓길 원하는 사람들이다. 크리쉬난 부사장은 “인도에는 영어 전문 학원이 많지 않아 앱텍안에서 영어 교육도 시킨다.”며 “토플 등 자격증 취득은 별도 기관에 위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IT콜센터 등 서비스업종에서는 미국식이나 영국식 영어 악센트가 필요할 경우가 있지만 일반 컴퓨터 서비스업에서는 기술용어만 알면 족하다.”고 말했다. 앱텍은 1986년 인도에서 설립돼 현재 세계 52개국에 3200여개 지소를 둔 세계적인 IT교육기관으로 한국에도 출장 강의를 하거나 한국인 유학생을 받아 교육도 한다. ■ ‘Hinglish’ 세계 통용 가능성 힝글리시(Hinglish:힌디어+영어). 영어에 가끔 힌디어 등을 사용하는 인도식 영어를 말한다. 영문 서적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인도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도에는 모두 힌디어를 비롯해 1652개의 지방 언어가 있다. 영어는 힌디어와 함께 준공용어다. 화폐도 18개 언어로 표기된다. 일반적으로 260개 언어가 사용된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국회에서 의원들이 상대방 의원 발언의 통역을 듣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있다. 영어는 영국이 가르친 식민지언어였다. 그러나 영국 지배계급은 1800년대 인도인 교육을 놓고 갈팡질팡했다. 그들 내부에서 ‘영어파’와 ‘동양어파’가 대립했다. 전자는 인도인의 지적 향상을 위해 영어로 교육하고 영어를 고등교육기관의 필수과목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후자는 영어를 필수 교육과목으로 하는 데는 반대하면서 원주민에게 보다 친숙한 산스크리트어나 아랍어 등 동양어를 보급시킬 것을 주장했다. 10여년에 걸친 이런 논쟁은 1835년 영어파의 승리로 굳어졌다. 벤팅크 총독이 콜카타 의과대학을 설립하면서 영어 강의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영어파는 영국인 관리를 본국에서 불러오는 대신 인도인에게 영어를 가르쳐 값싸게 고용하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된 후 인도 헌법에 영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하는 기간을 잠정적으로 1965년 1월25일까지로 명기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전국적인 의사소통과 남·북간의 언어갈등 때문에 영어를 버릴 수는 없었다. 요즘은 세계화를 타고 오히려 영어 사용이 인도 경쟁력의 강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델리 등 수도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영어 신문이 수십개씩 발행된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해 한 영자신문인 ‘비즈니스 스탠더드’에 출자했다. 지분율은 26%. 외국자본으로는 첫 인도 신문 투자다. 인도의 영어는 이미 영문학계에서 ‘인디안 잉글리시’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영국과 미국식 영어보다 인도 영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연세대 이옥순 교수는 지적했다. 실제 영문학에서 인도 출신들이 주옥같은 작품을 생산한다. 머지않아 힝글리시를 우리도 배워야 할지 모른다.
  • 일제 금융수탈자료 전시회

    보험소비자연맹은 일제가 식민통치자금과 태평양전쟁 전비 마련을 위해 발행했던 전시보국채권과 조선총독부 간이보험증서 등 희귀한 일제 금융수탈자료 전시회를 15∼16일 국회의원회관 2층 전시실에서 연다. 전시 자료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전시저축채권과 대동아전쟁할인국고채권 등 총 350여점이다.
  • 조선왕조실록 환수? 기증?

    조선왕조실록 환수? 기증?

    서울대가 일본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환수’와 ‘기증’ 형식을 동시에 취하기로 해 역사의식 부재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약탈당한 문화유산의 소유권을 충돌이나 반대급부 없이 완전히 넘겨받는 실익을 얻음으로써 앞으로 약탈 문화재 환수에 의미있는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도쿄대는 기증, 서울대는 환수”로 양해 서울대는 31일 대학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왕조실록 환수 배경과 역사적 의미 등을 밝혔다. 이태수 대학원장은 “서울대가 도쿄대 소장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돌려받기로 한 것은 서울대 개교 60주년을 기념한 양교 학술교류 활성화의 차원”이라면서 “도쿄대측은 ‘기증’, 서울대측은 ‘환수’의 형식을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도쿄대측은 지난 15일 사토 부총장이 직접 서한을 갖고 와 조선왕조실록을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서울대측은 별도 추진팀을 구성해 환수를 추진했다. 이 원장은 “도쿄대측은 자국내 여론 등을 고려해 기증의 형식을 원했으며 이에 서울대는 환수의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서로 양해했다. 이는 소유권 이전에 있어 굉장히 진일보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소유권 넘겨받은 진일보한 방식 vs 역사의식 없는 수용 식민지 시대에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국제법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어 그동안 연구 목적의 영구임대 등 형식으로 돌려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일제 치하 36년을 ‘강점’으로 보면 당연히 불법적인 합방에 의한 약탈이겠지만 아직 이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의 기증을 제안하고 서울대가 이를 역사의식 없이 수용, 국민 모두의 지지와 연대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승리의 영광을 퇴색시키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서울대도 이를 의식한 듯 “이번 환수는 사실상 환수위의 노력 덕분”이라며 공로를 돌렸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서울대내 규장각에 소장돼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했다. 국사학과 이상찬 교수는 환수위의 오대산 월정사 소장 의견에 대해 “실록이 오대산 사고에 있긴 했지만 이는 예산 등 문제 때문이었고 관리권은 1911년 3월 이후 조선총독부 취조국이 줄곧 행사하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양측은 조선왕조실록 환수가 국가적인 경사인 만큼 향후 관리권과 소장권에 대한 소모적 논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약탈 국보’ 민간교류로 환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史庫本)의 반환은 지난해 10월 돌아온 북관대첩비와 더불어 한·일 민간차원의 협상을 통해 이끌어낸 문화재 반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휘준(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위원장은 “이번 실록 반환을 계기로 민간 교류를 통한 문화재 환수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도쿄대 서고에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올해 초. 그때부터 오대산 월정사를 비롯한 불교계와 시민단체, 정치권 등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지난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실록 환수를 위해 도쿄대와 수차례 협상을 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참여했다. 환수위측은 불법으로 유출된 문화재 반환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환수가 이뤄지지 않으면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환수위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쿄대는 최근까지도 “문부과학성, 문화재청, 외무성 등 관계당국과의 협의에 상당한 시일이 요구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도쿄대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한국측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일본 내 우익세력이 반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도쿄대의 이같은 고민은 서울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양국의 대표적 국립대간 학술교류협력 차원에서 고문서를 기증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다.‘약탈문화재 반환’의 의미보다 학술교류를 강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대와 도쿄대 총장이 최근 적극적인 학술 교류를 약속하면서 반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2004년 도쿄대가 법인화되면서 학교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김기배 문화팀장은 “그동안 서울대보다 환수위가 협상에 적극적이었지만 향후 실록 보관 및 활용 등을 고려할 때 일본측이 서울대 규장각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실록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온 환수위측은 조선왕조 시절 오대산 월정사가 실록 사고 관리를 맡아 왔다는 점을 근거로 ”반환되는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이 아니라 월정사가 소장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환수위 실무자들이 30일 3차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상태에서 일본측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다. 환수위 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도쿄대의 결정은 협상주체인 우리 환수위를 무시하는 처사”라면서 “일본측이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경 김기용기자 chaplin7@seoul.co.kr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에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한 것들을 실록이라 하며 이런 실록을 총칭해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한다. 조선 왕은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해야 하지만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은 제외한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는데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목활자로 인쇄된 실록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주 사고(史庫)만이 살아남은 교훈을 거름삼아 깊숙한 산중으로 옮겨져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에 보관된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번에 반환되는 것은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다.
  • 日반출 조선왕조실록 돌아온다

    日반출 조선왕조실록 돌아온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나라에 반환된다. 서울대 관계자는 30일 “일본 도쿄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五臺山) 사고(史庫·역사서를 보관하던 곳)본 47책을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하는 데 두 학교간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31일 오전 서울대 개교 60주년 및 규장각 창립 230주년 기념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축사에서 이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반환되는 조선왕조실록은 행정절차 등을 거쳐 약 6주 뒤 도쿄대 귀중서고에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등록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총 1893권 888책)은 임진왜란 이후 태백산·적상산·오대산·강화도 사고 등 4곳에 20세기 초까지 분산보관돼 왔으며, 이 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데라우치 마사다케 초대 조선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오대산 사고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도쿄대 도서관 귀중서고에 중종대왕실록과 성종실록 등 47책이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올해초 확인된 이후 양국간 반환 협상이 진행돼 왔다. 서울대는 31일 오후 1시 이태수 서울대 대학원장, 김영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장, 이태진 국사학과 교수 등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반환의 의미와 배경에 대해 설명할 계획이며 도쿄대도 같은 시각에 부총장 주재로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 강제 동원된 거문도 생존자 증언 “비가 오고 파도가 높게 치는 날에도 배를 타고 다른 섬에 건너가야 했어.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십장’이라는 일본인들이 사정없이 우리들을 방망이로 내려쳤지. 나야 워낙 어렸지만 연세 많은 아저씨들까지 스무살도 안돼 보이는 십장들한테 얻어맞는데, 정말 비참하더라고.” 1944년 거문도 군사시설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이성화(76) 할아버지는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일본군이 매일 필요한 인원을 요청하면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서 ‘어느 집 누구 내일 나오시오.’ 하는 거야. 나가지 않으면 식량배급표를 안 주는데 안 나가고 배길 재간이 있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리 집에 남자는 나뿐이라 고기잡이도 못하고 매일 끌려다녔지.” ●할아버지, 청소년 100여명 노력동원…몽둥이질 일삼아 16세 나이에 강제 부역을 해야 했던 이성화 할아버지는 “6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본군이 섬에 머무르며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저지른 만행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1938년 5월 일제는 전국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시체제에 맞춰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7년 300만명이던 조선 내 노동가능인구를 1941년 400만명으로 늘려잡는다. 노동가능 연령대를 20∼40세에서 14∼50세로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김윤미(26) 조사관은 “생업에 피해를 받으며 무임금으로 부역에 동원됐으면서도 강제동원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군사시설들은 1944년 12월부터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걸쳐 지어졌다. 일본인의 관리감독 아래 황해도 옹진 등의 내국인 발파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동원된 100여명의 주민들은 돌을 옮기고 굴을 파는 등 단순작업을 시켰다. 거문도를 구성하는 3개 섬 중 동도에서만 9개의 터널이 발견됐다. 이중 7개는 해안가에 지어졌으며 배를 댈 수 있도록 콘크리트 접안시설까지 갖췄다. 터널은 폭 2.5∼3.0m, 높이 3m, 길이 15∼25m로 h·I·王·T자형의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 위원회 한흥수(45) 조사1팀장은 “전쟁이 났을 때 군수물자, 식량, 어뢰정 등의 보관·대피시설로 활용하거나 주변 정찰을 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王자형 터널의 경우 최고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해안가 터널은 군용정 4∼5척까지도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규모”라면서 “특히 콘크리트 벽의 두께가 30㎝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고 말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 했을 가능성”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큰 일제시대 군사시설은 제주도의 터널 300여개였다. 그러나 거문도의 시설물은 제주도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지영임 연구원은 “이번에 처음 학계에 알려진 거문도 군사시설은 일제가 한반도 자체를 전장(戰場)으로 삼으려 했음을 뜻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면에서 제주도 군사시설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서도리 불탄봉(해발 195m) 정상 근처에 있는 참호 2개는 군수물자 보관용이라기보다는 주변 정찰의 용도가 더 큰 것으로 파악됐다. 참호에서는 남동쪽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지나는 선박의 움직임 등 주변 정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콘크리트로 입구 두 곳에는 철문을 달 때 쓴 경첩이 남아 있어 유사시 공격에 대비해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찰용 참호를 지을 때에는 주민들이 위치와 형태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규동(81) 할아버지는 “우리는 중턱까지 시멘트나 목재 같은 물자를 올려주는 일만 했고 그 위로는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다.”면서 “불탄봉에 주둔해 있던 육군들이 직접 짓고 포탄을 숨기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돌로 만든 80m 이상 전쟁용 방어벽도 건설 한 주민은 “일주일에 2∼3차례 수송용 비행기가 진해에서 물자를 날라 왔고 1944∼45년 사이에 함정 6∼7대가 항상 정박해 있었다.”고 증언했다.“해안가에 막사를 짓고 일본군과 기술자 100여명이 생활을 했지. 권총을 찬 해군이 군수물자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게 권총을 보여주며 나를 귀여워하기도 했어. 나중엔 일본군이 집단 이질에 걸려 일본인 대위가 친구집에서 매실즙을 마시고 나았다고 들었어.”(70세 원용삼 할아버지) 가운데 섬인 고도 거문리의 회양봉 중턱에서는 돌을 쌓아 만든 높이 60∼80㎝의 방벽이 발견됐다. 산책로를 따라 섬의 북쪽을 두르고 있는데 눈으로 확인된 것만 80m 이상이었다. 거문리 신사터 뒤편에는 1938년 일본이 거문리에 130m에 이르는 방파제를 개축했다는 기념비가 있다. 1904년 일본군이 매설한 해저 케이블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직경 약 1㎝의 구리선을 수십가닥 엮어 만든 케이블은 광복 전까지 일본군이 통신용으로 사용했다. ●일본식 건물, 신사(神社)터…황민화 등 일제 잔재 그대로 현재 거문도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어업·양식업에 종사하거나 낚시꾼을 상대로 하는 민박·식당업을 하고 있다. 하루 두번 관광객과 주민을 실은 배가 오갈 뿐 조용한 모습이다. 그 속에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도에는 일본식 건물의 흔적이 많다. 고도는 원래 주민들이 살지 않던 곳이었으나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일본인 거주지역이 됐고 현재는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있는 중심지다. 일본인들이 거문도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로 1897년 원양어업장려보조법을 만들어 국가차원에서 어업이민을 장려했다. 김윤미 조사관은 “연중 어장이 풍부하고 지리적 요충지인 거문도는 일본인을 이주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활용하기에 최적의 섬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1942년에는 87가구가 이주해 346명의 일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250가구 이상 살았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일본인이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소학교 3곳과 신사 터도 그대로 남아 있다. 비석만 흉칙하게 남은 200여평 넓이의 신사터는 현재 헬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도 소학교를 다닌 원용삼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10장의 카드를 주고 한국말을 사용하면 친구에게 카드를 뺏도록 해 카드의 개수가 적으면 마구 때렸어. 정월 초하루와 해군이 출격하기 전날엔 동네사람들을 모아 억지로 신사참배도 시켰지.”라면서 60여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글 사진 거문도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하필 거문도에 왜 지었나 거문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중간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와 부산의 사이에 있지만 거리로 따지면 일본에 더 가깝다. 거문도∼부산이 198㎞인 반면 거문도∼규슈는 161㎞밖에 되지 않는다. 예부터 일본∼중국, 여수·부산∼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이 풍랑을 피하거나 식수를 얻는 중간 기항지로 이용한 이유다. 이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열강들은 호시탐탐 거문도를 점령할 기회를 노렸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885년 ‘거문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국해군은 거문도에 무단으로 침입해 2년 동안 점령했다. 그래서 거문도에는 영국군이 만든 국내 최초의 테니스장과 영국군 묘지가 남아 있다. 일본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거문도에 해군과 육군을 1개 중대씩 배치했다. 그러다 1944년 말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이미 미군이 일본 오키나와까지 치고 들어가 있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일제는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거문도를 본국과 한반도를 잇는 초계기지 겸 병참기지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도와 서도 사이 내해(內海)의 물결이 잠잠하고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활용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비슷한 시기 제주도에 건설된 군사시설은 지하갱도 300여개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제주대 지영임 연구원은 “제주 해안가 갱도는 길이가 40∼60m에 이르며 함정을 출격시킬 수 있는 추진장치도 발견됐다.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제주도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한·호 경제협력委 합동회의 참석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25∼27일 호주 퍼스에서 열리는 제27차 한·호 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 참석을 위해 24일 출국한다.2002년부터 한·호 경제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 회장은 29일 마이클 제프리 호주 총독으로부터 호주 최고 훈장을 받는다.
  • [한승원 토굴살이] 사람들의 거래

    [한승원 토굴살이] 사람들의 거래

    소설 ‘원효’를 쓰면서 역사의 행간 굽이굽이에서 여러 가지 슬프고 무섭고 흉측한 거래들을 읽었다. 가야를 신라에게 통째로 바친 왕손의 후예인 김유신은 신라 정치의 한복판에 서기 위해, 신라 왕손의 후예인 김춘추에게 누이 문희와 보희 둘을 모두 시집보낸다. 김춘추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김유신의 환갑 선물로 문희와 자기 사이에 낳은 딸 지소를 시집보낸다. 삼중의 정략결혼이다.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태종과 밀거래를 했다. 당나라 연호에 복식을 쓰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에는 청천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 영토를 당나라에 주고, 그 아래쪽 땅을 신라가 차지하겠다고 했다. 밀거래에 응하는 당나라의 내면에는 장차 신라까지를 삼킬 음모가 들어있었다. 때문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살아남기 위하여 당나라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전쟁을 그만두라고한 신라 최고의 지성인 원효와 김춘추의 사이에는 어떤 거래가 있었을까. 김춘추는,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원효를 제거하지 않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알천의 주장을 무릅쓰고 원효와 강제적인 거래를 했다. 전쟁으로 인해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 공주 궁에 연금을 시킴으로써, 그를 ‘성전’(삼국통일전쟁)으로 인해 과부 되어 있는 여자나 따먹는 파렴치한 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강제적인 거래에서 원효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요석공주를 품에 넣음으로써 파계를 하고 날아갈 뻔한 목숨을 보존하고, 통일신라시대를 관통해 가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대중교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미녀 요석공주와 원효 사이의 거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요석공주는 나당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기 궁 안에 들어온 원효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대신 설총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김춘추 서거 이후, 그의 아들인 문무왕과 원효와의 사이에는 미묘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문무왕은, 무등산 기슭에 뿌리를 두고,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승려 중심의 세력을 회유하는데 그를 이용했다. 원효는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 삼국 전쟁을 목숨 걸고 반대한 큰 인물이라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의 창건 연대는 문무왕 때이다. 원효는 기꺼이 달려가서 그 저항세력을 회유, 백제 유민과 신라 정부군과의 전쟁을 막았다.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던 일제의 오만이 절정에 달하여 ‘대동아 공영이라는 성전(聖戰-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 식민통치의 본산인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 사이에 밀거래가 있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원효대사’를 한글로 연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 청년들을 성전에 참여하도록 선동하려는 수작이었다. 이광수는 그 추악한 거래를 위하여, 자비를 실천해야 할 석가모니 제자인 원효를, 잔인한 전쟁을 찬양하는 자로 그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소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어야 했다.“원효는 도술로써 바람이라는 큰 도적을 제압하고 제자로 만들었는데, 바람은 신라군의 장군이 되었고, 휘하 부하들 또한 모두 군직을 받았다. 훗날 삼국통일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이들이었다. 황산벌 싸움에서 용감히 싸운 장수들이 이들이요, 또 죽기를 무릅쓰고 백제와 고구려의 국정을 염탐한 것이 거지 떼들이다.” 오래전부터 남한의 주거래 국가인 미국이 핵을 이유로 경제를 계속 묶어놓고 있으므로, 북한은 남한과 더 거래를 할 수 없어 중국에 목줄을 댄다. 중국은 미국 덕택에, 고구려 역사 빼앗기와 북한을 상대로 경제적인 동북공정을 아주 쉽게 풀어나가고 있다. 저러다가 북한은 중국의 식민지가 되고 우리 통일은 물 건너 가버리는 것 아닐까. 아, 슬픈 사람들의 거래.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 대웅전. 일제치하 불교 총본산으로 세워져 지금은 조계종 직할교구본사 본당의 위상을 갖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책에 따라 막혀 있던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면서 불교계의 중지를 모아 건립된 불당으로, 단일 목조건물론 국내 최대 규모. 조선후기 전통사찰 불전과 궁궐 양식이 혼합된 대웅전에는 일제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의 한과 암울했던 시절 불교중흥을 위한 불교계의 염원이 함께 서려 있다. ‘4방에 계단을 둔 단층 석조 기단위 정면 7칸, 측면 4칸의 평면에 외부 22개의 평주, 내부 12개의 고주를 세워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155.7평 규모의 남향 불전.’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서면 법당은 물론, 기단과 공포(拱包, 처마 끝을 받치는 기둥머리에 맞추어댄 나무쪽)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조선후기 불교 건축양식에 충실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조선왕조의 궁전보다 더 장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 우선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단. 높이가 160㎝에 이르는 단층 석조인데 경복궁 근정전을 포함해 어느 궁전의 기단보다도 높다. 다음은 공포.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짠 다포계로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궁전보다 안팎으로 2출목씩이나 더 많을 만큼 장중하다. 대웅전 천장 높이는 자그마치 8.5m. 대웅전 디자인을 비롯해 곳곳에 스며있는 궁궐 양식도 눈길을 끈다. 외벽 큰 기둥을 받친 장초석은 경복궁 집옥재(1873년)의 것과 비슷하며 기단 전면에 일렬로 배치한 석조 동물상 중 해태상도 궁정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이다. 불전에 궁궐양식을 쓴 것은 당시 불교계가 얼마만큼 이 건물을 중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건립을 맡았던 도편수와 부편수는 모두 궁궐 재건공사를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도편수 최원식은 1920년대 창덕궁 대조전 재건 공사를 총지휘한 도편수로 대웅전 건립을 위해 경복궁과 덕수궁을 여러 차례 시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설계 담당이며 관리직들은 모두 이왕직(李王職) 영선과 소속 일본인으로 돼 있었으나 사실상 대웅전 건립은 모두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불상을 모신 불단도 폭 14.57m, 높이 2.3m의 초대형.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강원도 홍송으로 교체했다. 불단 크기에 비해 불상은 왜소한 편. 불전 건립때 도갑사의 것을 개금해 모신 것인데 오는 10월쯤 대웅전 동편에 들어서는 영산전으로 옮겨지며 대신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17자 크기의 대형 삼존불이 봉안된다. 석가불좌상 뒤편, 즉 후불벽에는 1978년 새로 봉안된 천불도와 목각탱이 걸려 있다. 대웅전 정면은 전혀 벽이 없이 모두 장엄한 꽃판문과 꽃판창으로 처리했는데 벽 안쪽에는 천부중·신중, 바깥쪽에는 최근에 그려진 불전도가 장엄되어 있다. 바닥은 원래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나 최근 불단과 함께 강원도 홍송으로 바꿨다. 그런데 조계사의 원래 이름이 ‘태고사’였고 대웅전도 증산도 원류인 민족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을 옮겨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먼저 태고사는 일제하에서 한국불교를 지켜내려는 당시 불교계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이름. 일제의 민족말살책에서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사찰령을 시행한 데 이어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댄 게 바로 총본산 건립이다. 식민지 시절인 만큼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총본산 설치에 총독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나름대로 한국불교의 맥을 지키기 위해 불교계가 뭉쳤다.1935년 8월 전국 31본산주지회의 이후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란 대표기관을 설치한 데 이어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을 갖는 사찰을 세운다는 원칙아래 인근 각황사 교당 개축에 뜻을 모은 것이다. 각황사는 지금의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있던 한국 최초의 불교 포교당. 이 각황사를 헐어 지금 조계사 자리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는데 새로 대웅전을 건립하고도 그 명칭을 확정짓지 못하다가 고심끝에 한국불교의 법통을 태고 보우에서 찾는다는 뜻에서 삼각산(현 북한산)의 태고사로 정해 총독부에 신청한 것이다. 태고사는 전국승려대회 이후 소유권 다툼이 법정으로 비화한 끝에 1975년 6월에야 명칭이 조계사로 변경되었다. 그러면 왜 하필 보천교 십일전을 옮겨왔을까. 아무래도 당시 신도가 12만명에 불과했던 불교계 형편상 기존 건물을 옮겨짓는 것이 비용절감에 긴요했고 무엇보다 보천교가 일제에 강하게 맞서 일제에게도 위협적인 종교란 점에 착안했던 것 같다. 조계사 대웅전은 단순히 불교의 한 가람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2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다.1928년 당시 전북 정읍의 보천교 본소는 2만평 부지에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같은 건축물이 45채나 들어섰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특히 십일전은 일제가 남산에 설치한 조선신궁(神社)에 대응해 지은 건물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뒤 일제는 대대적인 보천교 말살에 나서 결국 십일전을 강제로 헐값(1만 2000원,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30전)에 사들였는데 불교계가 이것을 매입해 옮긴 것이다. 대웅전 기둥과 대들보는 십일전의 것을 그대로 옮겨 세웠으며 형태도 사실상 십일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계사 대웅전이 낙성된 것은 1938년 10월25일. 건립엔 총 17만원이 소요됐으며 기술자는 목공 7000명, 와공(瓦工) 200명을 포함해 6500명, 인부는 6만 5000명이 동원됐다. 당시 만해 한용운은 ‘총본산건설의 재인식’(1938년 ‘불교’ 신제17집)이란 글에서 대웅전의 규모를 말하면서 “만일 이 건물을 신축하자면 최소한도 100만원은 초과치 아니하면 안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한 집인가.”라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19∼20세기를 통틀어 한국 최대의 건축불사(佛事)였던 셈이다. 조계사는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전통사찰 양식에 충실한다.”는 원칙을 세워 기둥과 지붕 등 기본 골격과 구조물은 변형하지 않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바뀌어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천장을 민반자로 완전히 바꾸면서 천장에 있던 그림들이 모두 철거됐고 자개 장식의 불단도 완전히 바뀌었는가 하면 새로 봉안될 3존불 위에 전통양식의 닫집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장식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이강근(48) 경주대 교수(미술사학)는 “전통사찰 양식도 중요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문화재의 구조물들을 교체하는 것은 역사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큰 오류”라고 말한다. 이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으로 4년 안에 조계사에는 종각과 보제루·영산전이 새로 들어서 환골탈태하게 된다. 경내에 있는 여관 현대장도 헐려 그 자리에 24시간 개방형 시민선방이 세워진다. 조계사 주지 원담(48) 스님은 “조계사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대표적인 신중도량으로 한국불교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 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에 맞지 않게 사찰 형태가 초라하고 급하게 지은 대웅전도 전통 사찰양식에서 비켜난 부분이 많아 해체보수를 통해 한국불교 고유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kimus@seoul.co.kr
  • 뉴질랜드 총독에 명예박사학위

    이화여대(총장 신인령)는 19일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한국을 방문한 실비아 카트라이트 뉴질랜드 총독에게 인권수호와 양성평등 실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 ‘선비의 혼’ 또 한번의 ‘광복’

    김정희·정선·이경윤·성삼문 등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개되지 않은 시와 글, 그림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남대학교(총장 박재규)와 예술의전당(사장 김용배)이 오는 25일부터 6월11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최하는 명가명품 컬렉션 전시회 ‘경남대박물관 소장 ‘데라우치문고’ 보물-시·서·화에 깃든 조선의 마음’. 이번에 공개되는 작품은 일제하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수집한 한국유물 중 1996년 일본 야마구치현립대학이 경남대에 기증한 98건 153책에 포함된 작품 131점으로, 반환 이후 10년간 문예·미술사적 가치에 대한 연구를 거쳐 처음으로 대규모 전시가 이뤄지게 됐다. 1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고고미술사학자인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은 “데라우치문고 중 일부이나 매우 중요한 작품들만 엄선했다.”면서 “특히 새로운 자료가 대거 발굴돼 조선시대 시와 그림, 글씨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눈에 띄는 회화작품으로는 왕족출신 이경윤(1545∼1611)의 화첩 ‘낙파필희’를 들 수 있다. 그동안 그의 진작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 작품에 동시대인인 이호민·유몽인의 찬문이 적혀 있어 최립의 찬문이 적힌 호림박물관 소장 ‘산수인물첩’과 함께 진품으로 밝혀졌다. 또 안동 계회 풍경을 담은 ‘계묘사마동방계회도첩’은 남종문인화가 도입된 시기를 조선 초기로 앞당길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이정·정선·송민고 등 조선 중·후기 명가들이 그린 28점이 수록된 ‘홍운당첩’도 눈길을 끈다. 특히 정선의 ‘한강독조도’는 정선의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예작품으로는 조선 초·중기 유학자와 시문 대가, 명장들의 작품들이 대거 공개돼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서예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될 전망이다. 성삼문·서경덕·정철·고경명·곽재우·양사언·임제 등의 육필 시고가 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또 조선 서예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는 석봉 한호의 자필 자료인 ‘석봉필론’도 처음으로 공개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청와대 안팎은 ‘문화유산 보고’

    청와대 안팎은 ‘문화유산 보고’

    지난 1일 청와대의 뒷산인 북악산의 숙정문 일대가 열렸다. 홍련사에서 숙정문, 촛대바위까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37년 만의 일이다.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인 북원 자리의 청와대와 북악산 곳곳에는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유적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통령 경호상 개방될 수 없었던 까닭에서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 경주에서 옮겨놓은 석조여래좌상, 임금의 쉼터인 오운정,‘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법흥사터, 만세동방계곡 등 크고 작은 역사의 흔적들이다. 청와대 경호실은 최근 청와대를 중심으로 주변의 문화유산을 손수 정리한 책,‘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을 펴냈다.29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청와대의 유래에서부터 유적의 사진과 역사·전설까지 자세하게 기록,‘역사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문화관광부의 감수까지 받았다. 경호실측은 “출입이 통제돼 청와대 주변의 문화유산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점이 안타까워 직접 유적들을 사진찍고 자료를 모았다.”면서 “사라진 유적들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석조여래좌상 대통령 관저 뒤쪽에는 높이 1m의 석조 불상이 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이지만 청와대 경내에 있어 접근이 어려운 탓인지 서울시문화재의 홈페이지에는 소재지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8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크기만 다를 뿐 똑같다. 일명 ‘미남불’로도 불린다. 불상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총독부 관저가 신축되면서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터로 옮겨졌다. 일본 총독인 데라우치가 조선 문화재에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안 경주금융조합 이사 오히라가 자신의 집 정원에 뒀던 불상을 총독 관저로 가져갔다. 일본 총독의 점유물이 된 것이다. 서울시는 1974년 1월 유형문화재로 지정했으며, 현재 불상의 보호각은 1980년대인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 ●법흥사터 청와대 동쪽 북악산 기슭에 있는 신라 진평왕 때 내옹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현재 주춧돌 등 일부만 남아 있다.1965년 청오 스님이 현재 절터에 증축해 사용했으나 68년 1·21사태 이후 신자들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폐허가 됐다. ●만세동방계곡 법흥사 아래에 있는 계곡이다. 중턱에는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고 쓰여진 약수터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직때 약수물을 손수 떠다 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78년 폐쇄됐다. 수남극은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의 별인 노인성(星)으로 무병장수를 뜻한다. ●오운정 대원군이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2.3평 정도 되는 임금의 휴식 공간이다. 청와대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오운정(五雲亭)이라는 편액의 초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정자는 19세기 중엽 성행했던 전통기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1989년 대통령 관저 대지를 조성하던 중 발견된 가로 2m, 세로 1.3m 규모의 바위에 새겨진 글귀다. 관저 부지가 오래전부터 명당자리였음을 의미한다. 글자는 조선중기 때인 300∼400년 전쯤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태바위·말바위 북악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해태바위다. 멀리에서도 보이지만 접근할 수 없다. 무게만 55t이나 된다. 전설의 동물 ‘해태’와 비슷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왕조 창건 때 정도전이 물을 상징하는 해태바위가 불의 형상인 관악산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말바위는 북악산의 끝이라 해서 말(末)바위 또는 말과 비슷하다고 해 말(馬)바위라고도 불린다. ●사라진 유적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짓고 연회를 즐기던 융문당, 무관들이 활쏘기와 훈련을 하던 융무당은 1922년 5월 철거돼 일본 사찰의 자재로 사용됐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데라우치 문고’ 서울 나들이

    경남대가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 문고’가 서울 나들이를 한다. 데라우치문고는 일제하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유물 가운데 국내로 반환된 일부이다. 경남대박물관은 개교 60주년 및 데라우치 문고반환 10주년을 기념해 오는 25일부터 6월11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데라우치문고 특별전시회’를 갖는다고 3일 밝혔다. 데라우치문고 유물 98종,135점 모두 공개된다. 유물에는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서법을 친필로 기록한 ‘완당법첩조눌인병서(阮堂法帖曺訥人幷書)’와 조선 23대 순조의 왕세자가 세자시강원에 입학하는 광경을 서화로 표현하고 축하시문을 붙인 ‘정축입학도첩(丁丑入學圖帖)’등 국보급 문화재도 포함돼 있다. 이밖에 김생을 비롯한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이황, 이순신 등의 서첩과 윤두서, 심사정 등의 그림이 실린 서화첩과 대원군을 비롯한 김정희, 한석봉 등의 글씨에 대한 자료첩도 볼 수 있다.데라우치문고는 지난 1996년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해외유출 문화재 환수사업으로 80년 만에 돌아왔다.소장하고 있던 야마구치(山口)현립대학이 국제학술교류차원에서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경남대에 기증한 것. 야마구치현립대학에는 데라우치가 가져갔던 유물 1000여종,1500여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원규 연구사는 “반환된 유물 전부가 한꺼번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라며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높여 환수사업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마산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공직 초대석] 퇴직앞둔 ‘청사지기’ 강여형 방호실장

    [공직 초대석] 퇴직앞둔 ‘청사지기’ 강여형 방호실장

    “그동안 모두 스물아홉분의 총리를 모셨습니다. 여성부 장관을 하실 때 푸근하게 대해주시던 한명숙 지명자께서 오시면 꼭 서른분째가 되네요.” 3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새벽이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의 문을 열어온 사람이 있다. 강여형(57) 방호실장이 그 주인공이다. 강 실장은 1973년 3월 지금은 헐려버린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던 옛 중앙청에서 방호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업무는 청사 현관에서 총리와 장·차관, 그리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국내외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이다. 강 실장은 가장 최근에 떠나서인지 이해찬 전 총리가 아직도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강영훈 전 총리도 마음에 깊이 각인된 총리였다.“이 전 총리는 퇴임하기 직전 방호실장과 경비대장을 집무실로 부르더니 차를 권하면서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말씀하셨죠. 강 전 총리는 방호실까지 찾아와 직접 격려금을 건넬 정도로 마음 씀씀이가 깊었습니다. 얼마전 청사에서 뵈었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고요.”방호직으로 처음 모신 김종필 전 총리와 이한동 전 총리도 아랫사람을 부릴 줄아는 분들로 마음에 새기고 있다. 장관으로는 1980년 당시 유일한 여성 국무위원이었던 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이 가장 다정다감했다. 김 전 장관은 청사 방호원과 환경미화원들을 대신동 집으로 초대해 손수 냉면과 빈대떡을 내오면서 ‘음지에서 고생한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방호직은 청사 출입자 관리와 보안·방화관리, 의전을 맡는다. 정부중앙청사에만 99명이 있다. 중앙청사의 상주직원은 4000여명, 여기에 하루 평균 내방객도 1000명에 이른다. 강 실장은 30여년 동안 정부청사의 가장 큰 변화는 ‘권위주의’에서 ‘고객 중심’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1980년대 까지만 해도 중앙청사는 일반인들은 민원이 있어도 감히 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문턱’이 높았다. 하지만 요즘은 중앙청사를 찾는 민원인은 당당하게 안내를 요구한다. 청사 후문 앞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가 벌어진다. 총리와 장·차관만 이용할 수 있던 정문현관과 전용 엘리베이터도 개방됐고, 군복같던 방호직의 제복도 양복으로 바뀌었다. 강 실장은 매일 새벽 4시30분에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 집을 나선다. 출근하는 총리와 장·차관을 영접하고, 퇴근길에도 배웅하려면 근무시간은 다른 직원들보다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방호직의 수장이지만 현관에서 직접 모시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강 실장은 별정직 6급으로 만 57세가 정년. 그의 ‘청사 지킴이 인생’도 오는 12월31일이면 막을 내린다. 퇴직하면 집 근처 텃밭에 야채를 가꾸며 소일할 생각이다. 강 실장은 “청사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면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면서 “이젠 후배들에게 마음 놓고 자리를 물려줄 수 있을 것 같다.”며 환히 웃었다. 글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장서 570만여권 인터넷으로 본다

    장서 570만여권 인터넷으로 본다

    ‘100년 전 오늘 서울(경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제시대 쓰여진 춘향전은 어떤 내용일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보물 523호)은 어떻게 쓰였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오는 5월부터는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안방에서 인터넷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태근)은 27일 인터넷 포털 네이버(NHN㈜·대표 최휘영)에 도서관이 소장한 570여만개의 장서에 대한 자료를 제공키로 하는 업무협력 협정을 29일 체결한다고 밝혔다. ●“인터넷에 도서관을 짓는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해당 검색어를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http:/www.nl.go.kr)에 장서의 유무가 검색된다. 장서가 있을 경우 ‘원문 DB 서비스’를 선택하면 장서의 목차, 표지, 주요 내용, 대출가능 여부 등 기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1950년 이전에 발행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는 장서 20여만개는 원본을 그대로 열람할 수 있다. 자료를 그대로 스캔한 것이어서 표지·삽화·주석 등이 나오기 때문에 화면을 인쇄하면 원본과 엇비슷한 책이 완성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한매일신보(옛 서울신문) 등 신문 기사(106만 4482건) ▲도서관에 소장된 문화재, 고서 귀중본(9만 6019건) ▲일제시대 대중소설(915권) ▲옛날 지도(2262면) ▲구한국·조선총독부 관보기사(14만 7133건) 등이다. 이에 앞서 국회도서관(관장 배용수)도 5월 말부터 네이버에 장서 6000여권의 원문과 120만여권의 기초 정보를 제공키고 하고, 지난 23일 관련 협약을 맺었다. ●한국도 ‘사이버 책 전쟁’시대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구글’이 뉴욕공공도서관, 미국국회도서관, 하버드·스탠퍼드·미시간 대학도서관 등 5개 도서관 장서 정보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2015년까지 미국 전역의 도서관 장서 정보를 연결해 ‘구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영국국립도서관과, 야후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도서관과 손잡고 장서의 디지털화를 서두르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도서관화’ 작업은 이미 세계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정보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도서관 1곳에 인구 11만명꼴로 미국(2만 6000명), 일본(4만 8000명)에 비해 낮은 편이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이버 도서관’이 미국에서 벌써 저작권 문제와 출판사의 위기 등이 불거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주목된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이구택 포스코 회장, 濠 ‘최고 훈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이 호주 정부로부터 민간인 대상 ‘최고 훈장’을 받는다. 포스코와 주한호주대사관은 호주 정부가 무역과 투자를 통해 한국-호주 우호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이 회장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훈장은 ‘Companion’과 ‘Officer’,‘Member’ 등 3가지 호주 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으로 조만간 호주 캔버라에서 마이클 제프리 총독이 직접 수여할 계획이라고 대사관측은 설명했다. 마크 베일 호주 부총리 겸 무역성 장관은 “이 회장이 4년간 한·호 경제협력위원장으로서 양국간 경제협력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포스코를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며 최고훈장 수여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이 회장은 ‘6시그마’ MBB(마스터 블랙벨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직원 개개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확산하고, 이를 토대로 타사에 모범이 되는 비즈니스 프로세스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고유의 기업문화를 강조했다.이어 “큰 위기를 겪어보지 않은 것이 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면서 “앞으로의 30년은 과거 30년과는 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며, 향후 3∼4년이 포스코의 명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서울의 문화재] (1) 한용운의 심우장

    [서울의 문화재] (1) 한용운의 심우장

    서울에 살면서 서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 곁에 수백여곳의 조상 혼이 담긴 훌륭한 유적과 유물이 존재하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바쁜 일상탓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일부는 외국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잘못된 편견이다.612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해온 서울에는 국보의 38.9%, 보물의 25.5%가 산재해 있다.<16면 서울통계 서울의 문화재 참고> 이번 호부터 서울의 진면목을 바로 알고 느낄 수 있는 숨겨진 유적과 유물을 소개한다. 과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과거는 현재를 보는 거울이다. 한번쯤 가족들과 우리 선조들의 혼과 삶을 느낄 수 있는 그곳에 들러보면 어떨까. # 심우장을 찾아서 지난 3일 만해 한용운(1879∼1944)선생이 1933년부터 만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심우장’(서울시 기념물 제 7호)을 찾았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그의 삶과 혼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일제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집’인 심우장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는 것은 처음이다.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관련 정보도 많지 않다. 가는 길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성북초등학교 방향으로 1.5㎞ 걸어 가거나,6번 출구로 나와 초록색 버스 1111번,21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명수학교에서 내리면 된다. 종점에서 10m쯤 거슬러 내려와 오른쪽 언덕길로 50m쯤 올라가면 심우장이 나온다. 역에서 걸어서는 15∼20분, 버스는 5분이면 도착한다. 입장료는 없다. # ‘님의 침묵’을 만나다 성북구에서 지정한 ‘우리동네 명소’라는 간판을 따라 올라가자 ‘尋牛莊(심우장길 16호)’이라는 글이 쓰인 검은색 간판을 만났다. 인근의 개인집과 섞여 있어 쉽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심우장에서는 알수 없는 기(氣)가 느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령 90년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와 함께 정면 4칸에 측면 2칸짜리 역 ‘ㄴ’자형 한옥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곳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로 불리던 한적한 동네였던 탓에 관람객들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집안 곳곳에서는 한용운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한용운이 서재로 썼던 온돌방 문을 열자 정면으로 ‘님의 침묵’을 이 반겼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그의 서재에 걸린 님의 침묵은 새로운 느낌을 전해준다. 그 옆으로 한용운과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이 참석한 가운데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기록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선생이 기초한 ‘공약삼장’이 들어 있는 ‘3·1 독립선언서’가 눈에 들어온다. 또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와 석정 안종원의 글씨 등 족자가 걸려 있다. # 깨달음을 얻는 곳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어졌다. 한용운이 이 집을 지을 때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기 싫다.’하여 고의로 등지고 지었기 때문이다. 서재 앞에 걸린 심우장이라는 현판은 위창 오세창 선생이 쓴 글씨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한용운의 아호 중 ‘목부’(牧夫·소를 키우는 사람)에 따온 것이라 전해진다. 또 불교용어로는 성불이 되기 위한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 아는 만큼 보인다 한용운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심우장에 가기에 앞서 그의 삶을 되집어보면 관람이 더 유익하다.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한용운의 자는 정옥(貞玉), 아호는 만해(萬海)이며, 용운(龍雲)은 법명이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로 28세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의병학교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했다.3·1운동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한 뒤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했다. 이 집에서는 역사소설 ‘흑풍’과 ‘심우장 만필’ 등을 집필했다.1944년 선생이 중풍으로 입적한 뒤 이 집은 그의 친딸인 한영숙 여사가 소유하고 있다가 1972년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했다. 현재는 심우장 앞 마당에 있는 별채에 성북구청 소속 직원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해송의 노래…고흥반도 해안

    해송의 노래…고흥반도 해안

    # 쪽빛 봄바다에 빠져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흥반도의 봄은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도 느껴진다. 쉼 없이 파도를 가르며 만선의 깃발을 날리는 어선이나 퍼득거리는 생선이 가득한 수산물 공판장, 경관이 수려한 바닷가의 풍경에도 어김없이 봄의 빛깔이 묻어난다. 외나로도에서 유람선을 타고 해상관광에 나섰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외나로도 해안은 육지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갖가지 모양의 조그만 무인도,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나로도항에서 출발해 섬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다시 나로도항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2시간 걸린다. 제일 먼저 기다리는 곳이 꼭두여라는 무인도.2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불쑥 솟은 바위와 벌렁 드러누운 바위의 조화가 절묘하다. 옛날 곡식을 갈던 맷돌 손잡이 꼭두처럼 생겼다. 개인 섬으로 유명한 낚시터였으나 워낙 훼손이 심해 이젠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카멜레온의 모습을 꼭 닮은 카멜레온바위, 달리는 사자의 모양을 한 사자바위. 눈, 코, 입 등이 너무 사자와 흡사해 자연의 신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용굴과 거대한 짐승의 콧구멍 같은 쌍굴, 남근바위, 부처님이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모습의 부처바위 등 해안절경이 줄지어 나타난다. 편안하게 배에 앉아서 유람을 할 수도 있고 3층에 마련된 옥외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금어호(061-833-6905), 우주스타호(061-833-6524)등 2척의 유람선이 운항한다. 어른기준 1만 4000원. # 이곳도 들러보세요 ‘작지만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고흥의 대표적인 관광지. 고흥 녹동항에서 600m 떨어져 있다.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지역으로 지정돼 있어 과거엔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았다.198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록도는 작은 사슴이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대표적인 명소는 한센병 환자들이 피땀 흘려 세운 중앙공원과 울창한 송림으로 이뤄진 해수욕장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소록도에 병원을 세우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환자들이 자녀를 갖지 못하게 강제로 수술도 시켰다.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감금실과 검시실, 단종수술대 등이 중앙공원 앞에 남아 있어 소록도의 슬픈 역사를 말해준다. 중앙공원은 환자들이 세운 정원으로 정말 예쁘다. 마치 유럽의 어느 성에 잘 꾸며진 정원을 걷는 기분이 든다.7000여평의 대지에 치자나무, 편백나무, 팔손이나무 등 각종 관상수가 유럽의 화원처럼 단아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공원에는 ‘나병을 구하는 탑’이라는 뜻의 ‘구라탑’과 ‘문둥병 시인’ 한하운의 시비가 있다. 소록도의 크기는 여의도의 1.5배 정도. 섬을 돌아보는 데 걸어서 2시간이면 족하다. 녹동항에서 오전 7시부터 15분 간격으로 배가 출항한다. 소록도에서 녹동항으로 나오는 마지막 배가 오후 6시에 있다. 도선료는 왕복 1000원. 승용차는 1만원. 또 예내리를 지나 외나로도 서쪽으로 향하면 해넘이의 명소 염포해수욕장이 나온다. 파도에 울어대는 검은 자갈과 해송 숲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신비감을 자아낸다. 이밖에 영남면 양사리에 있는 용바위와 능가사도 빼놓으면 아쉽다. # 여행메모 맛집은 나로도해수욕장 입구 봉래초등학교에서 왼쪽으로 직진하면 봉래면 신금리의 나로도항 수협위판장(061-834-8102)이 있는데 나로도여행에서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 산낙지, 꽃게, 활어, 조개류 등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나로도 연안에서 잡아 올린 생선만 취급한다. 목포나 외지에서 사오면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나로도에서 나는 해산물은 모두 자연산. 봄에는 낙지, 서대, 양태, 돔, 꽃게가 많이 나고 여름은 역시 일본에 수출하는 참장어(하모), 가을은 삼치와 새우, 겨울은 잡어가 주로 많다. 봉래면 신금리 나로도선착장옆 서울식당(061-835-5111)은 자연산회가 저렴하다. 전화로 미리 주문하면 당일 많이 잡힌 생선으로 알아서 준비해준다. 내나로도에서 제2나로대교 건너기 직전 동일면 봉영리의 서구식 펜션풍 ‘하얀노을’(061-833-83112)이 전망이 좋다. 고흥 가는 길은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나 대전·통영고속도로를 이용해 남해안 고속도로로 갈아 탄 후 순천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17번 국도와 2번 국도를 이용해 벌교를 거쳐 고흥으로 들어오면 된다. 항공편은 여수공항 또는 사천공항. 고흥군 문화관광과(061)830-5224.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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