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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한일병합 무효’ 근거 제공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한일병합 무효’ 근거 제공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소회를 물으니 울컥하네요. 그러고 보니 횟수로 18년 만입니다. 기분이 마냥 흐뭇한 게, 무척 좋네요.” 11일 소회를 묻는 질문에 이태진(68)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공동성명을 힘주어 낭독할 때와 달랐다. 전날 한·일 양국 지식인은 한일병합 무효를 선언했다. 일본 지식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렇지, 사실상 한일병합은 불법협약으로 원천무효라는 선언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00년 만의 일이다. 선언의 내적 논리를 제공한 이가 바로 이 교수다. 그는 1992년 한일병합이 무효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발굴했다. “연구가 묻히면 어쩌나 했는데, 역사의 진실은 아무도 외면할 수 없구나 싶어 기쁩니다. 모쪼록 이번 공동선언이 한·일 양국의 공동번영에 기초가 되었으면 합니다.” ●규장각 정리 중 한일조약 허점 발견 이 교수는 알려진 대로 고종황제의 ‘수호천사’를 자임한다. 우유부단해서 나라를 뺏긴 나약한 인물이라거나, 기껏해야 봉건왕조를 연장시키려 했던 구닥다리 황제에 불과했다는 비판에 맞서 왔다. 이런 이 교수의 신념은 한일병합 무효론과 맥이 닿아 있다.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았습니다. 그때 규장각에는 대한제국 공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이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차피 망한 왕조인데 볼 게 있겠느냐는, 말하자면 식민사관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왕조시대에도 전 왕조가 망하면 뒷 왕조가 그에 대한 역사서를 만드는데 왜 대한제국은 없는가, 이건 나랏돈을 받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에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의외의 성과는 여기서 나왔다. 국가 서류다 보니 법령 자료부터 손대기 시작했는데 정미조약(1907년·대한제국 정부를 일본 통감부 산하에 두는 내용)과 관련된 법령 사인 가운데 순종황제의 필체와 다른 게 6개나 나왔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본과 맺은 각종 조약의 원본을 다 찾아봤다. 을사보호조약(1905년)에는 제목도, 명칭도, 비준서도 없었다. 정상적인 문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란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협상 대표가 받아가는 위임장, 협상 뒤 만들어지는 조약문, 여기에 서명날인, 다시 국가원수에게 재가를 받는 비준서가 있어야 합니다. 한·일 간 조약을 보면 조약문 하나 달랑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한일병합 문건도 마찬가지다. “병합 문건도 비준서가 없어요. 다른 서류도 한일 양국이 쓰는 종이나 필체가 똑같아요. 일본이 서류를 다 만들어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는 뜻이에요. 게다가 순종황제 서명도 없어요. 행정절차 처리하는 엉뚱한 도장 하나 찍힌 게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문건상 효력이 인정되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1992년 관련 연구를 종합해 학계에 보고했다. 나라를 빼앗긴 건 사실이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저항한 황제들이었다는 주장이다. “순종황제의 유언이 뭔지 압니까. 시종 조정구에게 ‘역신(逆臣)들이 강린(强隣)과 함께 한 것이지 내가 승인한 적 없다. 내가 죽어서도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돕겠다. 광복에 힘쓰라.’라고 합니다. 참 슬픈 얘기지요.” 서류 문제는 일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항이 워낙 심하다 보니 을사보호조약에는 제목이 없어요. 외교자문을 받으라는 1904년 한일협약은 메모랜덤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 영국에 관련 서류를 보여줄 때는 을사조약에는 convention(협약), 한일협약에는 agreement(조약) 같은 단어를 제목에 집어넣어요. 한마디로 조작인 거죠.” ●국호도 고종 독살설과 3·1운동 연관 3·1운동도 이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가 일본 내각 총리로 있을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웁니다. 고종황제가 또 헤이그밀사사건 같은 걸 일으킬까봐 데라우치가 후임 총독인 하세가와에게 지시해요. 고종에게서 을사보호조약을 추인받으라, 거부하면 죽이라고. 그 이틀 뒤에 고종황제가 죽어요. 당연히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풍문이 나돌고, 그 때문에 3·1운동이 터져나온 겁니다.” 우리의 국호가 대한민국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원래 논의됐던 국호는 ‘조선공화국’이었습니다. 지금의 국회 격인 당시 의정원 기록을 보면 긴급발의가 나와요. 임정이 3·1운동 덕에 세워진 것이고, 3·1운동은 고종황제의 독살을 슬퍼한 사람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대한제국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감흥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은 멀다.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은 시작에 불과하다. “‘유효부당론’(도덕적으로는 부당하지만 국제법으로는 유효)에 머물던 일본 진보 지식인들이 ‘불법무효론’에 동의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요. 파도가 자꾸 쳐서 바위를 부수듯, 앞으로 자꾸 번져나가길 바랍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돈의문 현판/김성호 논설위원

    1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선 충격적인 발견이 있었다. 지하 수장고에서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대동여지도 원판. 대동여지도라면 김정호가 일일이 발품을 팔아 한반도의 처음과 끝을 70여장의 목판, 22첩에 담은 조선 최고의 실측 조선전도이다. 전 지형을 촘촘히 새긴 정확성으로 해서 지금의 지리학자들조차 감탄해마지 않는 경외의 지도. 하지만 나라의 기밀이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한 대원군이 압수해 불태웠다는 설과 함께 기록으로만 남았던 게 대동여지도 목판이다. 그러다가 한국 최고의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모습을 나타냈으니…. 대동여지도 못지않게 의외의 충격적인 발견은 그 이후로도 숱하게 있었다. 가까운 2007,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잇따라 발견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체 금속활자 ‘교서관인서체자(校書館印書體字)’와 1916년 이후 종적을 감춘 고려 초기 석조비로자나불상. 모두 기록으로만 전할 뿐 멸실된 아쉬움의 대상이던 소중한 문화재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만 발견된 게 이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귀중 유산들이 사람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미 발굴된 국가귀속 대상 문화재 30만점만 해도 그냥 수장고에 묵히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돈의문, 그러니까 서대문의 현판 실물이 발견됐다. 돈의문이라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지 5년째 되는 해 도성의 동서남북에 낸 네 개의 대문 중 서쪽의 것을 말한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철거해 4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못한 문. 서울시가 2013년까지 복원을 계획해 관련 사료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우연찮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그 현판을 찾은 것이다. 역시 도심 한복판 가까운 곳에서의 발견이 반갑고도 씁쓰름하다. 예정대로라면 3년 뒤 돈의문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터. 대문에 당연히 걸려야 할 제 문패를 찾았으니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결국 집에 돌아와서야 행복의 파랑새를 찾았다는 벨기에 문인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해외에 빼앗기고 내돌려진 우리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는 지금 새길 대목이 있지 않을까. 빼앗기고 사라진 것들의 되돌림에 앞서 손에 쥔 것들의 소중함부터 먼저 챙김이 어떨지. 서울시가 4대문 안 전 지역 지표조사를 통해 유적지도를 만들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겠다는 문화유산 보존방안이 반갑다. 우리만의 파랑새를 함께 찾아보자. 더 늦기 전에.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앞선 이슬람, 유럽을 키웠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의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슬람 또는 무슬림 하면 분쟁, 폭력, 테러가 떠오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산다. 오늘날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데 있어서 이슬람이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를 보존·계승한 이슬람 세계가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나 르네상스를 일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732년 10월 프랑스 중부지방 평원인 푸아티에에서 코르도바(스페인 남부 지역)의 총독 아브드 알 라흐만이 지휘하는 이슬람 군대와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기독교 군대가 천하패권을 놓고 격돌했다. 알-안달루스(스페인)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이슬람 세력은 여기에서 멈춰섰다. 수많은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놓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기독교 세계를 위기에서 구출한 전투로 칭송한다. 그러나 미국의 비교역사학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유럽인들은 13세기에 가서야 겨우 달성했던 경제적, 과학적, 문화적 수준을 400년이나 앞당길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당시 이슬람이 승리했다면 관용적이었던 이슬람의 특성상 모든 종교 신앙이 존중받았을 것이고, 천문학, 삼각법, 아리비아숫자, 그리스 철학 등이 일찌감치 유럽으로 흘러들어 선진문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유럽의 승리가 문명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승리였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 것이다. 8세기 경제적인 측면만 이슬람이 지배하던 알-안달루스 지역은 화폐 경제가 발전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왕국은 물물교환 경제에 머물러 있던 터였다. 루이스는 ‘신의 용광로’(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에서 지나치게 기독교 관점에 치우쳐 있던 유럽 중세사를 당시 유럽에서 공존하고 있던 이슬람 문명과 비교하며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슬람 문명이 근세 유럽 형성에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기존 유럽사 해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세 유럽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슬람 문명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저자는 무슬림 유럽과 기독교 유럽, 이교도 게르만 부족을 주연 삼아 6세기에서 13세기 초까지 유럽을 살핀다. 특히 이슬람 세력이 정착했던 알-안달루스에 주목한다. 이슬람 세력은 711년 지브롤터를 침공한 뒤 1085년 톨레도에서 패퇴할 때까지 알-안달루스에 정착했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관대하게 받아들인 알-안달루스는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선진 문화를 꽃피웠고, 이 선진 문화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 중세 암흑시대에 놓여 있던 유럽을 자극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3만 3000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심훈 유품 美서 돌아온다

    심훈 유품 美서 돌아온다

    심훈(1901~1936) 선생 유품이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충남 당진 송악읍 부곡리 생가 ‘필경사’로 돌아온다. 8일 당진군에 따르면 심훈선생유품인수추진위원회 위원들은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심훈 선생의 3남 재호(75)씨를 방문, 그가 보관 중인 육필 원고 등 심훈 선생의 유품 200여점을 이전받기로 협약했다. 군은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유품을 이전 받을 예정이다. 이전 대상 유품은 ‘상록수’ ‘직녀성’ ‘영원한 미소’ 등 소설 육필원고와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 시집 ‘그날이 오면’ 일제총독부 검열판이다. 영화 ‘상록수’와 영화소설 ‘탈춤’ 각본, 영화 ‘먼동이 틀 때’ 촬영 원본과 절필원고 ‘오오 조선의 남아여’도 돌아온다. 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사설] 日왕실에 묻힌 나라의 魂 되찾아야 한다

    일본 왕실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조선왕실 의궤 등 조선왕조 희귀본 고문서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시기·주제별로 정리해 글과 그림으로 남긴 자료다.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2007년 조선왕조실록 등과 함께 유네스크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기록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일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는 의궤 외에도 임금의 교양도서였던 ‘경연’,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들여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서 왕실이 소장했던 대표적 경연 도서 ‘통전’, 조선시대 의학과 관습 등을 소개한 ‘제실도서’들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끝난 지 65년이 지났건만 우리의 얼과 혼은 여전히 일본의 왕실에 갇혀 있다니 참담하다는 개탄 외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프랑스에 외규장각도서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던 데 비해 일본에 남아 있는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간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문화재 1432점을 반환함으로써 문화재 반환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한 까닭이다. 그러나 궁내청이 버젓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자료는 639종 4678책에 이른다. 약탈의 근거가 명확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120종 661책이며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도장이 찍힌 게 79종 269책으로 그 대다수가 조선왕실 의궤다. 궁내청은 일본 왕실이 관리하는 기관으로 치외법권과 같은 존재라고 하지만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약탈문화재는 조건 없이 반환해야 한다. 그것이 식민시대에 저지른 만행을 청산하는 길이며 문명국가의 도리임을 상기해야 한다. 지난달 국회도 ‘일본 소장 조선왕조 의궤 반환촉구 결의안’을 의결해 본회의에 상정한 마당이다. 정부는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우리의 혼을 되찾아 오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 바란다. 약탈 문화재 반환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올해에 한·일 두 나라가 반드시 풀어야 할 역사적인 과제다.
  •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성북동 길상사 가는길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성북동 길상사 가는길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삶의 끝자락에서 머물렀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가는 길은 유려한 곡선이다. 이 길은 스님이 지난 2005년 10월 길상사 가을법회에서 설파한 곡선의 미학을 떠오르게 할 만큼 자연스럽다. 스님은 법회에서 “사람의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자연은 곡선이다. 강물과 산맥, 해와 달을 보라. 다 곡선이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러나 곡선은 여유와 인정과 운치가 있다. 곡선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삼선교)역에서 시작되는 성북동 나들이는 첫 발걸음부터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골목길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꼬불꼬불하다. ●최순우와 한용운의 흔적 길상사로 가는 길에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2채의 고택이다. 최순우 옛집과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尋牛莊)이다. 이들 고택이 자리한 언덕길은 ‘성북동=부자동네’라는 편견을 허문다. 마치 30~4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이다. 1920년대 지어진 최순우 옛집은 ㄱ자와 ㄴ자가 어우러진 전통한옥집으로 단아한 정원이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산실이기도 하다.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정해졌다. 겨우내 문을 닫았다가 오는 4월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문을 연다.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 가는 언덕길은 아예 차가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좁은 데다 층층이 돌계단을 끼고 있다. 길가의 집들은 아직도 연탄을 쓸 만큼 허름하다. 이 길은 마치 선종에서 말하는 열가지 수행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뜻을 가진 심우(尋牛)처럼 마치 내면속의 자아를 찾아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심우장은 만해 선생이 1933년 조선총독부와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1933년 마련한 팔작 기와집이다. ●외국인 사찰순례 필수코스로 길상사는 심우장을 지나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삼청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밀실정치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대원각이었다. 요정의 몰락과 함께 이 집을 사찰로 사용해 달라는 집주인 김영한씨의 간곡한 요청을 법정 스님이 받아들이면서 1997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스님은 창건법문에서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서울에 볼 일 있어 우연히 들렀다는 한 스님은 “절마다 모두 객을 받아주지는 않는다.”면서 “길상사는 잘 곳 없고 쉴 곳 없는 떠돌이 스님들이 묵었다 갈 수 있게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서울의 몇 안 되는 사찰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창건 법문이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단청이 없는 법당과 스님들 처소로 바뀐 별실, 조그마한 찻집, 2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만 보고서는 요정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을 만큼 소담스럽다. 특히 일반인을 대상으로 불교경전과 수행법을 좀 더 알기 쉽게 체험하는 시민선방 ‘길상선원’을 개원, 외국인 관광객들의 사찰 순례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텅빈 충만’의 향기만 남기고 떠나간 안타까움은 내려오는 길에서 만나는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전통차 6000~1만원·764-1736)에서 차 한잔으로 달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씨줄날줄] 아이고 다리/이순녀 논설위원

    남태평양 팔라우공화국은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 사이 미크로네시아 권역에 속한 인구 2만명의 작은 섬나라다. 천혜의 자연 환경과 다양한 해양 스포츠 덕에 신혼부부를 비롯한 외국 관광객에게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수도인 멜레케오크와 코로르, 펠렐리우 등 340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최근 기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토리비옹 팔라우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해양포럼에 참석해 팔라우의 위기 상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팔라우의 옛수도 코로르섬(2006년 수도 이전)에는 ‘아이고 다리’가 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할 때의 우리말 감탄사 ‘아이고’다. 코로르와 인근 섬을 연결하는 1㎞ 길이의 다리에 한글 이름이 붙게 된 배경에는 비참하고 끔찍했던 일제 치하 한인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가 있다.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미크로네시아 일대 남양군도의 위임통치를 받은 일본은 1922년 코로르에 통치기관인 남양청을 설치하고 식민 지배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한때 일본 이민자가 5만명에 이를 정도였으나 조선총독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한국인 노무자들을 억지로 이주시켰다. 강제징용된 한인 노무자들이 코로르 다리 건설 작업을 할 당시 너무나 고된 노동 때문에 저절로 ‘아이고’란 탄식을 내뱉었는데 현지인들이 이 말을 따서 다리 이름에 붙였다고 한다. 일제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팔라우를 비롯한 남양군도 일대에 강제징용된 한인들에 관한 자료 수집과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몇년 전 남양군도에서 한국으로 귀환한 1만 1000명의 승선자 명부를 기록한 미국 태평양함대의 자료를 발굴·공개한 정도를 성과로 꼽을 만하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남양군도 한인 강제징용 피해 실태조사는 그런 점에서 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1939~1941년 사이 최소 5000여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혹사당하다 폭력과 굶주림으로 60%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위원회는 파악했다. 일본의 남양군도 한인 강제징용에 대한 실태 규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국내 생존자는 50명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남산 통감관저터 표지석 설치추진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던 서울 남산의 ‘통감관저(統監官邸)터’에 표지석이 세워질 전망이다. 통감관저는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고, 발견 후에도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돼 왔다. 서울시는 일본 강점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남산 서울소방방재본부 부근 공터에 ‘한일병합조약’ 체결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25일 밝혔다. 통감관저는 이토 히로부미 등 한국 침략의 총책임자였던 통감들의 거처이자 집무실로, 강제병합 이후에는 1949년까지 총독관저로 쓰였다. 특히 1910년 8월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강제병합 조약서에 도장을 찍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감관저는 광복 이후 ‘민족박물관’과 ‘연합참모본부’ 청사로 쓰이다가 옛 중앙정보부 관할로 출입이 통제된 이후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 소장은 1927년 발행된 ‘경성시가도’와 사진자료 등을 토대로 현재 남산 서울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진입로 주변의 다목적광장이 옛 통감관저 자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소장은 “방치된 장소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고 어떤 형태로든 표석이라도 만든다면 경술국치 100주년을 짚고 가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건물 복원은 어렵지만 표지석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논의중이며 상반기 중 문화재과와 협의를 거쳐 구체적인 설치 계획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YS기록전시관 4월8일 개관

    YS기록전시관 4월8일 개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록전시관이 오는 4월 문을 연다. 경남 거제시는 8일 장목면 대계마을 김 전 대통령의 생가 옆 1347㎡에 2층 규모로 짓고 있는 기록전시관을 오는 4월8일 개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록전시관은 외부 공사가 끝나 현재 내부 마무리 공사와 전시물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전시물 내용도 대부분 확정했다. 전시관 1층 입구에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식 당시 선서하던 모습을 본뜬 밀랍인형이 설치된다. 1층 전시실 안에는 거제에서 생활하던 어린 시절 모습과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모습,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펼치던 모습 등이 담긴 사진과 영상 자료를 전시한다. 2층 입구에는 14대 대선 당시 투표를 하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본뜬 밀랍인형이 설치된다. 밀랍인형 바로 옆에는 대통령 선거 당시 경쟁했던 후보들의 포스터를 나란히 전시해 관람객들에게 당시 선거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2층 전시실 안에는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주요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 시행 발표 기자회견 모습이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 등을 담은 사진을 전시한다. 전시실 한쪽에는 김 전 대통령의 활동이 담긴 문헌자료도 진열하고 재임 당시 청와대 기자회견장과 대통령 집무실도 재현한다.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신던 조깅화와 양복, 부인 손명숙 여사의 물품 등도 진열된다. 거제시는 되도록 많은 자료와 기록을 전시하기 위해 국가기록원 및 김 전 대통령 측과 수시로 협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1층 전시실은 대통령 취임 전 활동전시, 2층 전시실은 취임 후 활동 전시로 구분해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볼 수 있도록 전시실을 꾸민다.”고 말했다. 거제시는 2007년 전직 대통령 기록물을 영구보존하고 대통령이 태어난 고장에 대한 시민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사업비 55억원을 들여 지난해 4월 기록전시관 공사를 시작했다. 거제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日왕실 조선왕조 교양서 등 대량 보유”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왕실이 조선왕실의궤 이외에도 조선 왕조가 소장했던 도서와 왕의 강의에 사용됐던 서적들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3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왕실을 관장하는 궁내청이 보관중인 조선 왕조의 도서는 크게 두가지다.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불리는 조선 당시 의학과 관습, 군(軍)의 역사 등을 소개한 서적 38종 375권과 왕이 교양을 쌓기 위해 받던 강연인 ‘경연(經筵)’에 쓰던 책들이다. 특히 밝혀진 도서 중에는 1392년 조선 건국 초기 자료와 함께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의학서와 같은 종류, 해외에 흩어져 있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서적집도 포함돼 있다. 도서들은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으로 유출한 서적들로 보인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한국문화재청 측은 최근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는 6만 1409점”이라고 발표했지만 “개인의 소유까지 포함하면 30만점이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 문화재와 문화협력협정을 체결, 한국에서 온 문화재 1300여점을 일본이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또 1990년 이후 일본인들의 기증 등의 방식으로 한국에 반환된 문화재는 17건에 2500점가량의 미술품·고고학자료· 서적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양국 정부는 국제법상 문화재 인도는 완료된 것이라는 입장”이라면서 “그러나 조선왕실의궤의 경우 한국 국회가 2006년 12월 반환요구 결의를 채택하고 외교통상부 장관도 2008년 4월 한·일 외무장관회담에서 국내 사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반환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제실도서와 경연 서적도 조선왕실의궤와 유출 경로가 유사한 만큼 한국 정부에서는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3점의 문화재를 함께 돌려줌으로써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삼고 싶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hkpark@seoul.co.kr
  • [행정플러스] 국가기록물 추가 공개

    국가기록원은 비공개 소장 기록물 가운데 380만여건을 27일 나라기록포털(http://con tents.archives.go.kr)을 통해 공개한다고 26일 밝혔다. 공개되는 기록물은 1960~1970년대 대일청구권 자금 도입과 각국과의 경제협력 기록, 낙동강 등 지방하천 정비 및 지방도로 공사 설계도서, 조선총독부의 관리 인사 기록과 범죄검거 보고서, 경비관계철, 사상범죄철, 기밀서류철, 경시청 정보 등이다. 특히 조선총독부와 관련한 기록물은 190만여건 전부를 공개 또는 부분 공개할 계획이다.
  •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일제 이전과 광복 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경제사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대립해 왔지만, 이는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먼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을 낙후된 ‘봉건국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광복 후의 ‘대한민국 근대화’를 일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이론인 동시에 일제 이전의 자생적 근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18세기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실적이 충분히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수탈론·근대화론은 경제적 측면만 부각 더욱이 ‘근대화론’은 한국인의 치열한 항일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시대를 ‘노예상태’로 이해하고 목숨을 던져 투쟁한 것은 ‘근대화’의 고마움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었던가? 또 광복후 대한민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망국의 수치를 씻으려는 자존심의 폭발이 응집력을 높였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탈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수탈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의병운동은 경제수탈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국권 박탈에 대한 저항이었고, 일제시대의 항일운동도 마찬가지다. ‘근대화론’이나 ‘수탈론’이나 한국인의 드높은 ‘주권정신’과 ‘문화적 자존심’을 무시한 이론이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찾아온 서양과 직접 교류하면서 경제, 기술, 군사면에서 조선을 앞서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인문문화의 수준은 조선보다 낙후되어 있어서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에서 간 통신사(通信使)에 열광하면서 조선문화를 배우려고 애썼다. 조선은 쇄국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양이 찾아오지 않아 경제와 군사에서 뒤지게 된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붓문화’가 ‘칼문화’에 꺾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 일본을 건설한 주역이 한국인이고, 그 후로 수 천년간 선진문화를 건네준 것이 한국인이므로, 정신적으로 일본이 한국인을 압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긴 일본인의 열등의식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압살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역으로 일본을 마음 속으로 멸시하는 정서를 낳았던 것이다. ●양복·기차 등은 근대화 아닌 서양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서양이론을 끌어다가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시대의 국민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일제시대 한국인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에 표출된 국민여망은 ‘대한국’의 회복이었고, 그들의 손에 쥔 것도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였다. 국외에 세워진 많은 독립단체들도 모두 ‘대한국’ 회복을 저항의 목표로 삼았다. 총독부가 정한 ‘조선’이라는 칭호는 국내에서만 강제로 사용될 뿐이었다. 그 ‘대한국’을 민주공화국 정부로 재건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다. 임정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았고,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어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광복 후의 ‘대한민국’이 ‘대한제국’과 ‘임정’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확실하게 계승했음을 말해준다.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1987년의 개정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도 그런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바탕을 둔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산업화와 근대화의 삽질을 힘차게 시작했다. 정체(政體)는 제국이었으나, 정체의 목표는 민국(民國)이었다. 삼한(三韓), 즉 삼국(三國)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을 국호에 담았고, 조선시대부터 국기처럼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와 어기(御旗)로 확정했다. 일제 36년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국권’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집요한 사투를 벌인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일제시대를 경제에만 한정하여 바라보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영화를 보고, 서양문화를 접했다는 것은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화’나 ‘서양화’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런 따위의 ‘서양화’는 이미 1876년의 개항 이후로 우리 스스로 모두 시작한 일들이므로 하등 새로울 것도 없다. ●한국은 붓문화 재인식해야 한국의 정치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와 치열한 교육열, 그리고 고도로 세련된 민본정치와 관료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봉건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막부시대 말기까지 이런 정치문화를 갖지 못했다. 높은 인문문화와 교육열의 전통이 지금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발전은 ‘기적’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의 전통이 되살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과 칼이 부딪치면 당장은 붓이 꺾인다. 그러나 길게 보면, 붓의 위력이 칼을 이긴다는 것이 고금의 진리다. 일본은 이제 칼 문화의 한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우리는 붓 문화의 전통을 한탄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역사학 전공)
  • 신연식 감독의 영화 ‘페어 러브’

    신연식 감독의 영화 ‘페어 러브’

    명품 카메라 수리에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50대 초반 노총각 형만(안성기). 작업실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철옹성이자 소우주나 다름없다. 어느 날 전 재산 8000만원을 떼먹고 도망갔던 친구가 8년 만에 나타난다.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하고, 이따금 형수에게 눈칫밥을 얻어먹게 한 장본인이다. 간암을 앓던 친구는 “시간날 때 잠깐씩 딸에게 들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세상을 뜬다. “이 자식은 항상 이런 식이야.”라고 부르짖는 형만. 마지못해 25살 여대생인 남은(이하나)을 찾아가는데, 친구의 딸은 당차게 작업을 걸어온다. “난 니 아빠 친구야!”라고 외치며 한껏 저항해 보지만,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감정은 뭐지? ●30년을 뛰어넘은 경쾌한 사랑 14일 개봉한 영화 ‘페어 러브’는 친구의 딸, 아빠의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서툰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30살에 가까운 나이 차다. 대번에 원조교제나 불륜 같은 칙칙한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10대 시절 로맨스처럼 풋풋하고 상큼하게 전개되며 박수를 끌어낸다. 멜로 연기에 가장 자신이 없다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오빠야~” 등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 영화는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모호한 상황으로 매듭지어지며 로맨스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지난 12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신연식(35) 감독은 형이상학적이고 판타지 같은 엔딩과 관련해 “두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게 한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재가 멜로이긴 하나, 사랑이 필요없는 상태에서만 머물려고 했던 한 남자의 성장기라는 것. 그래서 당초 형만에게 초점이 맞춰져 남은의 비중은 작았다고 한다. 처음과 달리 남은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상업 영화로 성공하려면 남자 주인공 혼자 많은 것을 감당해서는 안 된다는 안성기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남은이가 형만을 좋아하게 된 배경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의도된 생략이라고. ●“세상과 소통하는 한 남자의 성장기” “50년 넘게 쌓아온 자기 논리에 대한 부조리를 인식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죠. 그래서 사건적인 흐름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작사에서 엔딩을 좀 쉽게 가자고 했지만, 엔딩 자체가 이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를 즐기는 데 편차가 있을 것 같네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랑에 빠져 자신이 갇혀 살던 단단한 껍질 밖으로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 되는 한 남자를 만들어 가기 위해 세심하게 앵글을 잡고 상징적인 이미지 컷을 넣고 사운드를 싣는 등 공을 들인 기색이 역력하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소설가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해서 글을 쓰는 것처럼 장면 하나 하나, 사운드 하나 하나가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러티브에 포함되는 동시에 전체적인 리듬이 되죠.” 형만과 남은만큼은 아니지만, 신 감독도 7살 아래의 권한빛(28)씨와 첫 사랑 끝에 결혼했다. 몇 가지 에피소드는 실제 경험에서 따왔다. “연애를 많이 해 보지는 않았지만 형만보다는 잘했던 것 같아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기는 하는데 선물을 그냥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주는 등 완성도는 낮은 편이었죠. 하하하.” 신 감독은 정식 영화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한때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가 운영하는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 다닌 게 전부다. 중퇴했지만 대학에서는 스페인어를 전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무작정 연출부 생활에 뛰어들었다. ●첫 상업영화… 다양한 방식 시도 계기로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중간에 모두 중단되는 바람에 프리프로덕션 작업만 열심히 한 셈”이라고 웃는 신 감독은 2003년 30만원을 들여 독립 단편 ‘피아노 레슨’을 만들었고, 2005년에는 달랑 300만원을 들여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에 이르는 장편 데뷔작 ‘좋은 배우’를 찍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독하게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때문에 처음으로 스타 캐스팅에다 제작비도 억대를 넘긴 작품인 ‘페어 러브’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듯싶다. “준비가 돼서 한다기보다 일단 일부터 벌이고 보는 편입니다. 이번 작품이 본의 아니게 상업적으로 배급하는 첫 영화가 됐네요. 상업 영화 틀 안에서도 (독립 영화 등) 다양한 제작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를 다뤄 보려고 한다는 그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또 다른 중년 멜로를 다룬 시나리오를 써 놓은 상태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더니 좋은 배우는 영감을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안성기, 이하나와 작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누아르를 찍고 싶다고 했다. 안성기는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애매한 악당 두목이고, 이하나는 총독부 고위관료의 딸이란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꼬박 100년이 흘러갔다. 아시아의 평화와 대한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안중근은 옥중에서 미완성 수고(手稿) ‘동양 평화론’을 쓰다가 형이 집행됐다. 머리말과 목차만을 남겼을 뿐이다. 일련의 상황들은 얼핏 역설 또는 가치의 전복에 가깝다. ‘동양 평화’ ‘대동아공영’을 주창했던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평화를 원하던’ 안중근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총살했으니 말이다. 안중근의 의거 10개월 뒤인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탄(倂呑)한다. 100년이 지났건만 평가는 엄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새로 오는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더욱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지난 역사의 평가작업으로서 제기되는 몇몇 의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다. #장면 1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 일본의 전 총리이자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탄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러시아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대합실에서 일어나 천천히 플랫폼으로 걸어나갔다. 만 서른 살의 청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이토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68세의 노정객 이토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20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은 러시아 사열병 바로 뒤쪽까지 다가섰다. 신문기자로 위장했기에 접근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토가 사열병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안중근은 앞으로 뛰쳐나가 품 속에서 권총을 빼내 세 발은 이토에게 명중시키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원들을 쐈다. 그리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우레 코레아!(한국,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30분 뒤인 오전 10시 사망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였다. 뤼순 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지난해 9월 동상으로나마 돌아온 안중근은 여러 논란 속에서 제자리를 못 잡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경기 부천 안중근 공원(구 중동공원)에 어렵사리 정착할 수 있었다. #장면 2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일방적 을사늑약 체결, 1906년 조선 1대 통감으로서 펼친 각종 조선 말살 및 식민지화 정책,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등 일제가 벌인 동아시아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맡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긴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저항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안중근에 4년 앞서 또 다른 대한제국 청년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다.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1906년 3월)하기 직전 수원으로 사냥 나들이를 나서는 등 여유 있는 한때를 보냈다. 해 저물녘 안양을 들러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을사늑약 체결에 비분강개하던 스물 세 살 원태우가 돌멩이를 여러 개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고, 이토의 얼굴에는 파편 여덟 개가 박혔다. 원태우는 징역 2개월에 장형(곤장 100대)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 안에서의 평가는 또 다른 극점에 놓여 있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격(格)으로 평가받는다. 빈농의 아들에서 출발한 그는 일찍이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화학을 전공하는 등 서구 문물과 근대 교육을 받아들였고, 일본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으며, 내각제 등 일본 정치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초대 총리와 5·7·10대 총리를 지냈고,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을 맡는 등 36년 동안 일본의 최고 핵심권력에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총리에서 몸을 한껏 낮춰 조선의 초대 통감을 자처했으니, 일본에서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겸손하게 대의에 충실한 인물,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토의 장례는 1909년 11월4일 히비야공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63년 발행된 일본의 천엔(円)권 화폐 속 인물이 됐을 정도로 지금도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
  • [씨줄날줄] 열석발언권/육철수 논설위원

    2004년 4월 어느 날, 재경부(현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고위 간부들이 회식자리를 가졌다. 덕담이 오가고 폭탄주를 돌리며 주흥이 무르익을 즈음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박승 한은 총재에게 “잘하고 계신데, 한은에 가끔 과격한 탈레반이 있어 문제”라고 말했다.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회식이 끝날 때쯤 마침내 일이 터졌다. 자중하던 어느 한은 간부가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한은이 탈레반이면 재경부는 알카에다 아닌가….” 양측은 졸지에 이슬람 무장세력이 됐다. 재무부처와 한은은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견원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남대문출장소’도 양측의 관계를 보여 주는 단골 단어다. 한은이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인다 해서 붙여진 한은 직원들의 자조 섞인 말이다. 이 말은 1970년대 말 한은 총재를 지낸 신병현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리는 공문서에 사용해 더 유명해졌다. 당시 한은 독립을 추진하던 신 총재는 부하 직원이 올린 초안에 빨간줄을 좍좍 긋고 재무부의 전횡을 하나하나 들추어 내면서 한은의 처지를 이런 말로 표현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1948년 정부 수립 무렵엔 거꾸로 재무부처가 한은의 ‘세종로출장소’란 소리를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광복 후 친일파로 몰린 조선총독부 재무국 출신 인사들이 대거 잠적했는데, 이때 조선은행(한은의 전신) 직원들이 건국 정부의 재무국으로 대거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생긴 말이다. 양측의 뿌리 깊은 불편한 관계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이 참석한 것을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이 그 증거다. 거의 11년 만에 정부가 ‘열석(列席) 발언권’을 행사하자 일각에서는 정부가 금리 결정에 영향을 주려는 행위로, 한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관치 부활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열석이란 의결권은 없지만 재정부 차관이 금통위원들과 나란히 앉아 발언하는 것이어서 영향력이 있다. 법(한은법 91조)에 따른 정당한 권한 행사인데 의혹의 눈길을 받는 것은 안타깝다. 여기에는 정부가 그동안 이 권한을 스스로 사장화(死藏化)한 탓이 크다. 일본·영국은 정부 관계자가 중앙은행의 금융·통화 정례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한다. 이번 일은 정부의 태만과 불찰로 오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관치금융’과 ‘정책공조’는 두부 자르듯 딱 갈라놓기가 쉽지 않다. 결국 관점의 차이 아닌가. 경제가 겨우 회복기에 접어든 만큼 주요 경제부처들은 불신을 접고 적극 협조했으면 한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새해 벽두 문화계 “虎·虎·虎”

    새해 벽두 문화계 “虎·虎·虎”

    2010년은 60년 만에 돌아온 백호랑이 해다. 의미가 남다른 만큼 새해를 여는 문화계의 화두도 역시 ‘호랑이’다. 호랑이를 소재로 한 전시회와 책 출간이 잇따르고 있다. 백호(白虎) 해에 태어난 아들은 사주가 좋다는 속설에 힘입어 출산·육아 관련 제품도 인기다. 거리에는 호피 패션과 호랑이 캐릭터 상품이 넘쳐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호랑이를 전면에 내세운 ‘변신, 신화에서 생활로’ 특별전을 3월1일까지 연다. 생활문화 속에 깃든 호랑이 모습과 그와 관련된 상징체계의 변신을 조망한다. ‘신성(神聖)’, ‘벽사(?邪)’, ‘군상(群像)’, ‘변신(變身)’을 주제로 신격화된 호랑이부터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된 현대생활 속 호랑이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았다. 조각·부적·장신구 등 유물 120여점도 전시한다. ●호랑이 화가들, “바쁘다 바빠” 미술계에서는 ‘호랑이 작가’로 이름난 화가들의 붓놀림이 바쁘다.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1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이목일 화백의 호랑이 그림 전시회가 열린다. 역시 40년째 호랑이만 그려오고 있는 오동섭 화백도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6월까지 반년에 걸쳐 ‘한국 호랑이 표정’, ‘한국 호랑이 그 위용’ 전을 차례로 연다. 민화작가 남정예도 오는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아이에서 ‘호랑이 민화전-삶을 확신하는 또 다른 상징’ 전을 연다. 호랑이를 현대 민화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호랑이 서적’은 지난 세밑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장이 엮어낸 ‘십이간지 호랑이’(생각의나무 펴냄)는 호랑이를 통해 한·중·일 3국의 전통 문화를 비교하는 학자 24명의 글을 모았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엔도 기미오 지음, 이은옥 옮김, 이담북스 펴냄)는 일본 야생동물 생태 연구자가 한국 호랑이의 최후를 추적한 논픽션이다. 1915~24년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따라 호랑이 100여마리가 남획된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기록했다. 패션계는 호피무늬를 비롯해 동물무늬의 레오퍼드(표범) 패션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장정현 롯데홈쇼핑 홍보담당자는 “레오퍼드 패션은 최근 방송에서 하루 5억원 매출을 올리는 등 다른 제품에 비해 평균 30~40% 매출이 많다.”면서 “이달에도 레오퍼드 속옷 등 관련 제품을 계속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스와로브스키 등 귀금속 브랜드들도 호랑이 장식 조각 및 액세서리 등을 선보였다. 최고의 호랑이 특수를 맛보고 있는 분야는 육아·출산 제품 관련 시장이다. 역술가들은 “올해 아들을 낳으면 백호의 기상을 가지게 돼 크게 성공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따라 업계는 2007년 황금돼지띠해의 출산 붐 재현을 기대하며 관련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백호 기상” 속설… 출산 급증할 듯 맘스홀릭(cafe.naver.com/imsanbu) 등 출산·육아 카페에는 속설의 진의를 묻는 질문이 쇄도한다. 올 8월 출산을 앞둔 예비엄마 손혜숙(33·서울 망원동)씨는 “60년 만에 오는 귀한 해에 아이를 낳게 돼 기쁘다.”면서도 “일시적 출산율 증가로 아이가 자란 뒤 치열한 입시·취업 경쟁을 치르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털어 놓았다. 백호띠 딸을 기피하는 풍조로 성비 불균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윤창수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살아있는 역사의땅 이스라엘을 가다

    살아있는 역사의땅 이스라엘을 가다

    이스라엘. 누군가에게는 거룩한 곳이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낯설거나 불편한 곳이다. 하지만 신성(神性)에 대한 선입견을 조금만 빼고 바라보면 믿음 여부를 떠나 종교 관련 유적지야말로 역사, 문화 공부에 더 없이 좋은 여행지다. 켜켜이 쌓이는 수직의 역사와, 그 기억과 공간을 공유하는 수평의 사람이 서로 씨줄날줄로 얽혀 살아가고 있는 곳. 이스라엘 땅에 스며있는 수천년의 역사와 자연 경관의 독특한 매력을 짚어 본다. │예루살렘 박록삼특파원│헤롯왕이 건설한 지중해변의 옛 항구도시 케사리아(Caesarya)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아코(Akko)는 이 땅 위에서 인간이 얼마나 융성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융성함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경제 수도 역할을 하는 텔 아비브에서 차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케사리아, 4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아코가 나온다. ●수직으로 쌓인 제국의 융성과 몰락의 시간들 아기 예수의 후환을 두려워하며 베들레햄의 갓난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이가 헤롯왕이다. 욕망은 늘 공포의 단짝이다. 케사리아는 그 헤롯왕이 기원전 22년 방파제로 지중해의 파도를 잠재워 해상 무역을 위한 항구로 만든 인공의 도시다. 그는 원형극장, 마차경기장 등 당대 로마 못지않은 화려함도 함께 추구했다. 케사리아는 이후 로마제국이 총독부를 마련하며 더욱 번성했다. 로마는 1만 5000여명의 병사들이 먹을 식수를 끌어오기 위해 수㎞에 이르는 멋드러진 수로교(水路橋)를 지었고, 로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목욕탕을 갖춰 놓는 등 화려함과 영원을 추구했다. 로마의 몰락 뒤 7~10세기는 이슬람의 시대였고, 11세기에는 십자군이 침략하며 종교의 지엄함을 원했다. 이후 터키제국이 지배의 발길을 거친 곳이다. 모두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이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백, 수천년이 흐른 지금 그저 부서진 기둥 조각과 앙상한 돌무더기, 절반 남짓의 담벼락 등으로 남은 폐허는 제국의 영광, 승리의 기쁨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옛 제국은 아이들의 소풍 놀이터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앞으로 몸을 내주며 흔적을 새겨 놓을 뿐이다. 모든 제국은 몰락했다. 모든 침략자는 패퇴했다. 유구하리라 바랐던 제국의 융성과 번창함은 또 다른 제국에 몸을 내줬고, 창과 칼로 만들어낸 승리는 영원한 지배를 약속하지 못했다. 시간이 강제하고, 인간이 그러하게 만들었다. 아코 역시 마찬가지다. 무슬림들의 정복, 십자군의 지배, 오스만튀르크의 지배가 밀물과 썰물이 나들듯이 이뤄졌다. 지배와 복속, 승리와 패퇴는 수천년이 흐르는 동안 이곳의 고대 건축물에 덧입혀져 왔다. 십자군시대의 건축물이 지하에 있고, 터키제국의 건축물이 그 위에 올려졌다. 또한 아코의 건축물들 위에는 또 다른 지배자 영국의 흔적까지 쌓였다. 이제껏 4% 남짓만 발굴됐다고 하니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로 손색이 없다. ●예루살렘, 평화와 수평의 가치를 역설하다 이스라엘을 찾은 이의 발걸음은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곳은 오늘의 이스라엘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키워드를 모두 품고 있다. 특히 올드시티에는 유대교를 믿는 이들,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공존한다. 유대인의 마을과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아랍인의, 이슬람인의 풍경이 번갈아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상징인 통곡의 벽(Western wall)을 손으로 짚고서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유대인, 몇 골목 떨어진 곳에서는 시장통에서 팔라펠(피이타 빵 안에 야채와 고기 등을 넣은 아랍식 샌드위치)을 팔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코란 독경 소리에 맞춰 남루한 담요를 펴고 바닥에 엎드려 기도 올리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경계의 이쪽저쪽에서 경계를 존중하며, 또한 경계를 비웃으며 살고 있는, 공존의 지혜를 터득한 이들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현장 학습 시간이면 총든 경호원이 꼬박 따라붙는다. 15명당 1명의 경호원은 의무 사항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곳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불균형한 전쟁이 수십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곳임을 일깨워준다. 안타깝게도 분쟁과 갈등은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 위주의 희생을 재촉한다. 이스라엘은 내부의 팔레스타인 외에도 시리아, 레바논과도 여전히 국경 분쟁과 지지부진한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수천년 수직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예루살렘에서 평화와 공존, 수평의 가치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실제로 이스라엘 북쪽 나자렛은 종교의 박물관이자 평화적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곳이다. 예수가 나고 30년을 자랐던 나자렛에는 그리스·이집트 정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동방교회 등 여러 종파들이 저마다 각자의 성당, 교회, 회당을 갖고서 최고 신성(神性)의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다. 글 사진 youngtan@seoul.co.kr ●여행 팁! 갈릴리 호수 북쪽 골란고원에서 요르단강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사해가 나온다. 90번 도로다. 4시간 남짓 걸리는 비교적 긴 거리다. 길 왼쪽으로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가 가꾸는 바나나밭, 대추야자밭 등이 이어지고, 더 멀리로는 요르단의 산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 요르단강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이다. 오른쪽으로는 흙바람 날리는 광야, 양떼를 모는 목동이 점점이 보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중간중간 차를 멈춰 그 광경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올라가는 길이 있다. 2번 도로다. 역사 속에서 유럽 등과 무역이 이뤄졌던 항구를 많이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번성했다. 자파, 텔 아비브, 하이파, 아코 등 아름다운 도시들을 선으로 잇고 있다. 특히 해가 지는 시간에 이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지중해 석양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 ‘虎’ 왜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虎’ 왜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1922년 가을 경주의 한 작은 마을. 당시 26살이던 김유근씨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대덕산에 친구들과 나무를 하러 갔다. 사람들과 떨어진 채 산비탈에서 아슬아슬하게 삭정이를 꺾던 김씨는 아래에서 들리는 짐승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호랑이였다. 김씨는 깜짝 놀라 쓰러졌고 호랑이는 그의 등을 덥석 물었다. 하지만 지게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겨우 마을로 돌아와 주재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경찰은 수백명의 몰이꾼을 동원해 호랑이를 쫓았고, 결국 한 순사가 쏜 총에 호랑이는 쓰러졌다. ●조선시대 포호정책? 일제 남획? 이것이 한국에서 발견된 마지막 호랑이의 최후다. 1922년 이후 호랑이는 한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수많은 속담과 전래동화, 각종 민속예술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인 호랑이.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인 호랑이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됐을까. 김동진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는 조선시대에 왕조가 펼친 ‘포호(捕虎)정책’이 호랑이 개체 감소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고려시대까지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을 추구했지만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얘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은 기본적으로 ‘위민제해(爲民除害·백성을 위해 해로운 것을 없앰)’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백성들은 호환(虎患)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은 범을 잡는 착호군(捉虎軍)을 편성했다. 각종 포획 도구를 개발·보급하며 지역차원에서도 호랑이 사냥은 계속 됐다. 일제의 남획이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엔도 기미오 일본야조회 명예회장은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총독부가 (개발에) 방해되는 호랑이 등 맹수를 대량 살상했다.”고 전한다. 당시 총독부 자료를 보면 1915~16년 2년 동안에만 호랑이 24마리,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가 포획됐다. 그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호랑이는 60년 전 10만마리가 있었으나 현재는 5000여마리에 불과하다. 그나마 국내에 남은 것이라고는 동물원 호랑이와 1907년에 잡혀 전남 목포의 한 초등학교에 기증된 박제 호랑이 한마리 뿐이다. ●호랑이 소재 전시 잇따라 이와 같은 내용은 2010년 경인년 새해를 맞아 15일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 ‘호랑이의 삶, 인간의 삶-호랑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에서 발표된다. 민속박물관이 서울대 수의과학대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 행사는 인문학자와 생물학자가 함께 모여 인간-호랑이의 상호 영향을 분석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전망한다. 내년 호랑이띠 해를 맞아 호랑이를 소재로 한 전시회도 잇따라 열린다.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명품관은 29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100마리 호랑이’전을 연다. 민화작가 서공임이 현대적으로 해석한 호랑이를 소개한다. 돌조각가 오채현은 경기 파주 헤이리에 있는 갤러리 ‘더 차이’에서 18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화강암으로 만든 호랑이 조각들을 선보인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서울광장] 인사동다워야 할 이유/김성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인사동다워야 할 이유/김성호 논설위원

    뉴욕 센트럴파크와 42번가 브로드웨이, 파리 샹젤리제와 몽마르트르, 베이징 톈안먼광장과 왕푸징(王府井), 도쿄 신주쿠(新宿)와 하라주쿠(原宿)….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을 찾는 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어 하고 발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 명소들이다. 이렇게 보란듯이 이름을 알려 사람들이 찾아들게 할 만한 한국의 거리가 있다면 어떤 곳일까. 한국의 ‘문화지구 1호’ 서울 인사동이라면 그 반열에 올릴 수 있을까. 인총이 몰리는 명소라면 이름에 걸맞은 가치들이 있을 터.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인사동의 가치는 한국문화의 전통과 숨결일 것이다. 인사동이 어떤 땅인가. 조선 정궐에 가깝다 하여 내로라하는 세도가며 명인들이 자리잡아 살았고 그에 따른 문화와 풍습들이 옹골차게 배어든 곳이다.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의 인(仁)자와 지명인 대사동의 사(寺)자를 엮어 이름 지어진 인사동이다. 오래도록 탑동, 사동, 탑사동이란 이름이 통용된 건 원각사에 딸린 석탑이 유명했기 때문이고 지금도 비슷한 이름의 상호며 건물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이름과 명성은 사람과 사건을 불러오게 마련. 조선조 최대의 철학가 이이, ‘사동대감’이라 불렸던 문신 김병학은 지금도 회자되곤 한다. 장안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들이 즐겨 찾았고 3·1독립선언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개교한 승동교회는 일제치하 전국으로 번진 학생운동의 발상지였으니 인사동은 분명 보통 땅은 아니다. 일제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골동품 상가는 아무래도 인사동 정체성의 으뜸이다. 살아 있는 노상박물관의 별명답게 200여개의 골동품, 전통공예상이 즐비했고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한국미술협회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수도 한복판에 이만큼 한국의 가치를 담았던 역사적 공간이 또 있을까마는 인사동의 모습은 영 딴판이 되어가고 있다. 하루 5000명, 한 해 170만명이 방문한다니 연간 외국인 관광객의 25%가 찾는 셈이다. 이같은 숫자의 성황 속에 가치 변질이 급속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다. 문화지구로 지정된 2002년 기준으로 골동품점은 33%, 필방·지업사는 21%가 준 데 비해 술집은 80%, 음식점은 35%가 늘어났다고 한다. 먹거리, 잡상품을 팔려는 호객이며 목소리의 홍수는 여느 유흥가와 다르지 않다. 인사동 변질의 아픔은 10년 전 이미 겪은 바여서 안타까움이 더 크다. 인사동길 복판, 이른바 ‘전통 12가게’가 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인사전통문화보존회 등이 보존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종로구가 호응했고 서울시가 문예진흥법에 따라 2002년 지정한 게 문화지구이다. 빼어난 전통과 가치의 자랑이 아닌, 홍수처럼 밀려드는 싸구려 상점과 먹거리 장사들을 제어하기 위한 태생의 아픔을 갖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인사동의 값싼 상업화는 악의 개선이 아닌, 전철의 답습으로밖에 볼 수 없다. 가치의 상실은 현실의 쇠퇴와 몰락을 불러옴을 역사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대로라면 외국인이 더 이상 찾을 가치가 없는, 이름뿐인 인사동의 함몰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한국 ‘문화지구 1호’ 명예(?)의 손상이고 그것은 곧 한국전통의 큰 훼손이다. 우리가 스스로 지켜내지 못할 소중한 가치를 그 어느 외국인이 찾아낼까. 다행히 서울시는 최근 인사동 새 정비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문화지구 1호의 박탈을 보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씨줄날줄] 환구단/김성호 논설위원

    일제 36년의 침탈로 수도 서울의 4대문 안에서 가장 큰 아픔의 흔적을 간직한 곳은 경복궁과 환구단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기세를 펴기 위해 낙점한 조선시대 정궐이 경복궁이고, 고종황제가 국격의 자존을 살려 천제를 올리던 제천단(祭天壇)이 환구단 아닌가. 통치와 집정의 핵심인 경복궁에 식민통치와 수탈의 중심인 조선총독부를 세운 것이나, 황제의 제천단을 허물어 호텔을 올린 일제는 식민 심장부의 눈엣가시를 모두 제거해 회심의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훼손된 경복궁 안 390여칸의 전각이며 정문인 광화문을 복원하려는 국가적 역사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혼 부활을 겨냥한다. 망가지고 스러진 조선 정궐을 다시 살려내려는 역사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국가적 대사의 뜻대로라면 어두운 과거를 털고 민족정기의 회복을 코앞에 둔 셈이다. 이렇게 웅장한 경복궁 복원의 거사와는 달리, 1㎞도 채 안 떨어진 환구단이 똑같이 아픈 잔재임에도, 관심에서 먼 채 그늘의 잔재로 남아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환구단이 천제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나라의 자존과 위신을 세우려는 고종의 통한이 담긴 곳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곤 이 천구단에서 제사를 드린 뒤 황제에 즉위했다. 삼국시대부터 거행한 제천의례는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원구제 형태로 이어지다 세조 때 폐지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구제라 함은 천자(天子), 즉 황제가 하늘에 드리는 제사였으니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원구단을 빌려 나라의 독립을 천명한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환구단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고왔을리 없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3년 뒤인 1913년 일제는 결국 총독부 부속건물인 철도호텔을 세우면서 많은 부분을 헐어냈다. 1967년 조선호텔 건립 때 신주를 봉안하던 황궁우만 빼놓고 그나마 모두 철거됐다니 환구단은 시련의 점철이다. 서울시가 2007년 우이동에서 발견된 환구단 정문을 원래의 자리에 이전 복원해 놓았단다. 뒤늦은 가치의 발견과 역사의 복원이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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