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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우규 의사 동상 서울역광장에 우뚝

    강우규 의사 동상 서울역광장에 우뚝

    일제 강점기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왈우(曰遇)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92년 전 의거 현장에 세워졌다.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는 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강 의사 의거 92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지난 2008년 6월부터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시작해 3년 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기념식에는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 박유철 광복회장, 오산고 학생 등 800여명이 참석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형형한 눈빛의 강 의사 동상은 흰 천에 덮여 있다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강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예순의 나이로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일본 경찰 37명이 죽거나 다쳤다. 강 의사는 보름 뒤 종로구 사직동에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탁본 등 128점 유물 기증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한국 고·중세 금석문(金石文) 탁본 유물과 조선시대 묵적(墨跡) 등 74건 128점의 유물을 기증했다고 박물관 측이 30일 밝혔다. 서예박물관에 따르면 이 회장이 기증한 유물은 금석문 탁본유무 30건 74점(217매), 조선시대 묵적 44건 54점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았거나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어 국내외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고·중세 금석문 탁본 유물은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고고학자로 임나일본부설 등 우리 역사 왜곡에 앞장섰던 오가와 게이기치(1882~1950) 주도로 채탁(採拓)돼 일본으로 반출됐던 것들이다. 기증된 유물은 정리와 연구가 마무리되는 대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기증 상설전시장에서 특별전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식민 지배받은 일본식 다리도 문화유산으로

    식민 지배받은 일본식 다리도 문화유산으로

    베트남의 내재적 다문화성이 외세에 대하여 정치적으로는 수구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인 특유의 이중성을 낳은 것이 아닐까. 후에의 남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옛 항구 도시 호이안을 둘러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호이안은 원래 인도와 중국 간의 해상 교역의 중계항으로 출발했다. 중국과 인도 상인들의 중간 계류지로 흥기한 호이안은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도를 거쳐 이곳에 들르고 뒤이어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상인, 탐험가, 선교사들이 자주 찾으면서 이른바 바다 실크로드의 중심 교역항으로 우뚝 서게 된다. 다행히 전란의 피해를 면한 투본 강변의 구시가지에서 우리는 국제적 교역항으로서의 호이안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골목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실크와 면제품, 기념품 가게 그리고 작은 카페와 화랑은 번영을 구가하던 호이안의 코스모폴리탄 서민문화를 재현해 주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랜드마크 건물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일본식 다리이다. 1593년에 일본인들이 건설했다는 이 다리는 2만동짜리 베트남 지폐의 도안을 장식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었으면서도 베트남 사람들은 이 다리를 그들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선양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수용의 이런 유연성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식민지 잔재로 헐어버린 우리와 사뭇 다른 태도이다. 유네스코는 1999년 “문화적 혼성의 뛰어난 사례”로 호이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중부 해안 풍경이 아름답긴 하지만 베트남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 북부 통킹만 연안의 하롱베이 지역이다. 기암괴석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2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잔잔한 바다를 수놓고 있다. 찬탄이 절로 나오는 이런 경이로운 형상은 석회암 지형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된 결과이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자연의 경이는 전설을 만들어 낸다.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불과 옥돌을 뿜어냈는데 그것이 식으면서 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염원이 만들어 낸 전설이리라.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를 떨치고 독립을 쟁취한 항전의 무대도 이곳 강어귀였고,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 곳도 여기 바다였으며, 월남전의 시발이 된 통킹만 사건이 일어난 곳도 이 부근이다. 아름다운 풍경에도 이처럼 전란의 상흔과 고통스러운 기억이 스며 있다. 종전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월남전의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호찌민의 전쟁박물관 전시실을 가득 메운 기록사진들은 전쟁의 야만적 살상과 폭력, 처참한 후유증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오토바이 행렬이 장사진을 이룬 거리를 몇 블록 걷자 이내 고층 호텔과 백화점과 명품 부티크가 즐비한 다운타운의 화려한 쇼핑가이다. 전쟁과 첨단 자본주의 문명은 상극이 아니라 바로 자웅동체가 아니던가. 응우옌 반 린 (Nguyen Van Linh)을 중심으로 한 남부 출신의 정치가들에 의해 주도된 ‘도이머이’ 운동의 거센 바람 속에서 구치 터널이나 호찌민 루트와 같은 전쟁의 유물이 관광 상품으로 탈바꿈된 지 오래이다. 전후의 베트남이 보여 준 변혁과 쇄신의 과감한 행보는 특유의 하이브리드 문화에 젖어 온 멘털리티가 아니고서는 내디딜 수 없는 것이라 말하더라도 지나친 진단은 아닐 것이다. 호찌민의 탄손낫 공항을 떠나 귀로에 오르며 인간 문명은 피라미드처럼 대칭적 균형체가 아니라 와르르 무너졌다 다시 만들어지곤 하는 사막의 불안정한 흰개미 언덕에 가깝다는 어느 역사가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베트남적 하이브리드 문화는 문명의 이런 본질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인간 문명을 그런 비대칭적 복합체로 만드는 중요한 추동력의 하나가 아름다운 풍광과 천혜의 풍요로움의 표상인 열대에 대한 매혹임을 베트남 여정은 다시금 일깨웠다.
  • 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예전에 10장 한 세트의 회수권을 작게 잘라 11장으로 사용했던 추억이 떠올라요. 직접 회수권을 정교하게 그리는 간 큰 녀석들도 있었죠. 회수권은 학생들의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이필식씨·44·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통근·통학 회수권을 처음 사용한 1957년도 버스값도 아까워하던 시절의 우리네 풍속도다. 21일 서울시에 따르면 대중교통 수단으로 버스가 도입된 지 올해로 어느새 100년째를 맞았다. 한 세기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달려온 시내버스의 변천사와 함께 당시의 소비자물가와 시대상을 반추해 볼 수 있다. 과거속 추억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버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8인승 승합자동차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대구에서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한 일본인이 승합자동차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며 돈을 받은 것이 시초였다. 사업자와 노선이 빠르게 늘면서 경기, 서울 등지에도 상업용 버스가 등장했다. 경성(서울)에 버스 도입이 늦어진 이유는 1927년 당시 서울 인구가 31만여명으로 전차, 자전거, 인력거, 마차만으로도 이동이 원만했기 때문이다. 1927년 6월 서울 최초로 시내버스 운행 신청서가 총독부에 제출됐고 이듬해 1928년 경성부에 시내버스 사업권을 내주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시대가 열렸다. 1928년 첫 운행 당시의 버스 요금은 7전. 반면 전차는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을 경계로 구역당 5전씩을 받았다. 새로 등장한 버스가 요금 경쟁에서 기존 전차에 밀리자 지금의 전철·버스 간 환승개념이 도입된다. 전차가 다니지 않는 곳에 버스를 배치, 전차와 운행 구간을 분리한 것이다. 적자를 메우려는 나름대로의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결국 1930년대 요금은 5전으로 내렸다. 5전이면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반면 1920년대 택시 요금은 거리와 관계없이 균일제로 시내요금이 1원이었다. 택시 요금은 1937년 기본 50전, 1949년 200원, 1950년 200원, 1966년 60원, 1970년 90원, 1988년 800원, 1998년 1300원이었다. 1965년 시내버스 요금은 8원. 1970년대는 15~80원, 1980년대 120~200원을 거쳐 현재 900원까지 이어졌다. 반면 1974년 처음 운행된 지하철의 첫 요금은 1구간이 30원에서 시작해 1981년 100원, 86년 200원, 93년 300원을 거쳐 1999년 500원으로 뛰었다. ●1930년대 요금 5전 ‘자장면 한 그릇값’ 버스 요금은 1930년대 같은 가치로 출발한 자장면값이 요동친 것에 비하면 오름폭이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왕복 요금을 감안하면 두 배 정도 격차를 보인다. 1960년대 자장면값은 15원, 1970년대 30원, 1980년 초 1000원 고지를 넘더니 1990년 초 2000원, 90년대 말 3000원, 2000년대 4000원대로 뛰었다. 만원 버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라이”라고 외치던 여성 차장. 버스 안내양은 진한 남색 등의 제복과 모자를 착용했으며 엄격한 필기시험과 구술면접을 거쳐 선발됐다. 당시 표를 끊어 주던 안내양의 인기가 엄청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으며 실제 배우로 발탁되기도 했다. 김경숙(55·북부운수 버스기사)씨는 “면접을 볼 땐 주로 또렷또렷하고 행동이 민첩한 젊은 여성을 뽑은 것 같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승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게 버스 안내양”이라며 웃었다. 앞서 1949년부터 버스 앞쪽에 승차해 기사를 돕는 조수(남성)가 등장했으나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비싸고 승객과 허구한 날 살랑이를 벌여 1960년대에 사라졌다. ●남자 조수는 비싸고 실랑이 많아 퇴출 1970년대는 그야말로 버스의 전성 시대. 승객들과 부대끼느라 학생들의 가방끈이 끊어질 정도였다. 차량이 너무 부족해 당시 지각하는 회사원이 하루에 20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콩나물 버스’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났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7년간 안내양을 했다는 김경순(55)씨는 “1970년대만 해도 장날이면 버스 안에 120명이 탈 때도 있었어요. 문도 못 닫고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갈 때도 많았죠. 당시 요금이 15원이었는데 돈을 받으면 메모지 같은 종이에 적어 주기도 했죠. 승객이 어디서 내린다는 암호 같은 걸 적어 기억했던 게 생각나요.”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버스 안내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1980년대부터 안내양 없이 승객이 앞문 승차, 뒷문 하차하고 요금을 선불로 내는 시민자율버스 운행이 시작되고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을 통해 버스 안내양 고용 의무조항이 삭제됐다. 애환을 함께 나누던 버스 안내양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병한 서울시 교통정책과장은 “버스 이용객이 여전히 지하철을 앞지른다.”면서 “지난해 마을버스를 포함한 시내버스 일일 이용객 수가 지하철의 483만명보다 약 100만명 더 많은 572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대구세계육상 D-9] 볼트도 안 무섭다, 난 조국 위해 달린다

    [대구세계육상 D-9] 볼트도 안 무섭다, 난 조국 위해 달린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는 206개국의 선수들이 참가한다. 우사인 볼트(자메이카)만 오는 게 아니다. 미국, 자메이카, 영국 등 쟁쟁한 육상 강국의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속속 한국에 도착한 17일 지구 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의 선수 한 명도 이들과 함께 대구 땅을 밟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선수는 볼트를 위협할 유력한 도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앤티가바부다의 다니엘 베일리(25)가 그 주인공이다. 카리브해에 있는 3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구 8만 5000여명의 나라인 앤티가바부다는 오랜 식민의 역사를 안고 있다. 1632년 영국의 식민지가 됐고 350년이 지난 1981년 명목상 독립은 했지만 현재도 영국령이다. 국가 원수가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고, 영국 국왕의 임명장을 받은 총독이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다. 국민 대부분이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농업과 관광으로 먹고사는데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약간 넘는다. 그럭저럭 사는구나 싶지만 빈부 차가 심해 원주민 대부분은 빈곤하다. 게다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관광객이 급감했고 금융도 무너졌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신세를 지고 있다. 한국도 수교를 맺고 있지만 인근 주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에서 대사업무를 겸임하고 있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나라다. 이 작은 나라는 이번 대구 대회에 단 2명의 선수를 보냈다. 남자 100m, 200m에 출전할 예정인 베일리와 브렌단 크리스티안(28)이다. 이들은 너무도 작지만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달린다. 크리스티안의 100m 최고기록은 10초 09로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기준 A기록은 넘었다. 하지만 하락세다. 지난해 기록이 10초 44다. 오히려 200m에서 기록이 좋다. 그래도 세계 정상급과는 거리가 있다. 올 시즌 최고 기록이 20초 60이다. 그러나 베일리는 볼트와 아사파 파월을 위협하는 수준의 선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10초 23으로 6위에 그쳤지만,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9초 93으로 4위를 차지했다. 개인 최고 기록은 9초 91. 그리고 지난해 열린 카타르 도하 실내육상대회에서는 60m에서 6초 57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베일리의 장점은 꾸준함이다. 세계대회를 거듭하면서 큰 기복이 없다. 베를린 대회 뒤에도 9초대를 계속 달렸고 올 시즌도 9초 97을 기록 중이다. 물론 볼트가 세계 1인자이지만 자메이카가 단거리 왕국으로 급성장하는 데는 파월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반 세계대회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자메이카의 어린이들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볼트도 파월을 보고 달린 유망주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 명의 스타급 선수가 탄생하면 그 나라의 스포츠 지형이 변화하고 상승한다. 앤티가바부다에서 베일리도 그런 희망의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 무명의 선수가 대구 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볼트와 파월을 제치고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등극하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자.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자민당 의원 ‘입국쇼’ 한·일 관계 망쳤다”

    “자민당 의원 ‘입국쇼’ 한·일 관계 망쳤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일본 사민당의 하토리 류이치(61) 의원이 14일 이달 초 자민당 의원들의 한국 입국시도와 관련해 “표를 의식한 퍼포먼스에 불과했으며 본인들의 기분은 고양됐는지 모르나 한·일 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하토리 의원은 광복절을 맞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사실을 공개하며 “아버님이 생전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심하게 다뤘다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고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거론했다. →부친이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것으로 아는데. -말단 공무원이었다. 철도 부설을 담당하는 젊은 기술자였다. 아버님은 생전에 일본인이 당시 조선인을 심하게 다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은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조선왕실의궤반환에도 적극 나섰는데, 가족사와 관계있나.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일본은 빠른 시기에 과거청산을 했어야 했다. 총독부가 조선왕실의궤를 빼앗아 왔기 때문에 명백히 ‘반환’인데 일본 정부가 ‘인도’라는 표현을 써 의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왔던 얘기를 꺼내다 가족사를 공개하게 됐다.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영토문제를 민족적인 배타주의로 불지피는 해결 방법은 잘못됐다. 자민당 의원 3명이 지난 1일 한국 입국을 시도한 것은 퍼포먼스이고, 다분히 표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 본인들은 기분이 고양된 것 같지만 한·일 관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Republic of South Africa-무지개 빛 이야기가 뜨는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

    Republic of South Africa-무지개 빛 이야기가 뜨는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는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소위 깡통집에서 살아간다. 150만 채 가량의 만델라 하우스가 지어졌지만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은 도시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다. 무지개 빛 이야기가 뜨는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는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소위 깡통집에서 살아간다. 150만 채 가량의 만델라 하우스가 지어졌지만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은 도시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다. 흑인 경제권 강화 제도 BEEBlack Economy Empowerment는 긍정적인 결과와 함께 흑인을 탄압하는 또 다른 흑인을 낳았다. 모든 일이 좋지만은 않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남아공을 풍부한 자원과 자연을 지닌 축복의 땅이라고 한다. 흑인과 백인은 물론 여러 인종이 모여 만든 무지개 나라Rainbow Nation라고 한다. 어둡지만 않고, 밝지만 않지만 남아공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는 그리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이진경 취재협조 남아프리카공화국관광청 www.southafrica.net Cape Town 살랑 바람이 피어나는 케이프타운 남아공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을 꼽으라면 아마 케이프타운Cape Town일 것이다. 일 년 내내 더울 것 같은 아프리카지만 케이프타운은 예외다. 여름인 1월에도 평균기온이 20.3도이며, 겨울인 7월에도 11.6도를 유지하는 지중해성 기후를 자랑한다. 살랑살랑 항구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도시를 호위하듯 우뚝 선 테이블 마운틴이 있는 케이프타운. 종종 비교되는 샌프란시스코보다 정이 가는 도시다. 보여주는 산, 보기 위한 산 케이프타운에 며칠 머무는 이들 모두가 테이블 마운틴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비와 바람이 잦은 케이프타운에서는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말한다. 테이블 마운틴. 일반 산처럼 정상이 뾰족하지 않고 테이블처럼 평평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특한 모양의 산은 케이프타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와 같다.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에 오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몇 군데 나 있는 등산로를 이용해도 되고, 케이블카로도 손쉽게 오를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없는 여행자들은 5분여 만에 정상에 도착하는 케이블카를 주로 이용한다. 테이블 마운틴 케이블카는 1929년에 개통됐으며, 현재 운행되는 둥근 형태의 케이블카는 1997년에 만들어졌다. 360도 회전하며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는 아찔하게도 창문 두 군데가 막혀 있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아, 탄성이 쏟아진다. 산 아래에서 본 것처럼 정상 일대는 테이블처럼 평평해 사방이 탁 트인 시원한 전망을 자랑한다. 주봉은 해발 1,086m의 매클리어봉이다. 주봉의 북서쪽으로는 669m 높이의 사자 머리Lion’s Head가, 북동쪽으로는 1,001m 높이의 악마의 봉우리Devil’s Peak가 있다. 이들 봉우리와 더불어 테이블 베이, 케이프타운 시내 등 일대가 모두 눈에 담긴다. 케이프타운에서는 테이블 마운틴을, 테이블 마운틴에서는 케이블 마운틴을 보는 셈이다. 정상 일대의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해도 한 바퀴를 돌 수 있으니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케이프타운을 감싸 안은 테이블 마운틴의 모습은 시그널 힐Signal Hill에서 보는 게 아름답다. 석양 무렵, 차와 자전거를 타고 시그널 힐을 찾는 이들이 많다. 저녁이면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되는 테이블 마운틴의 여운을 달래기에도 그만이다. 시그널 힐이라는 이름은 매일 오전 12시에 대포를 발포해 얻게 됐다. 이 대포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대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테이블 마운틴 케이블카┃ 운행시간 오전 8시30분~오후 5시(마지막 하강 오후 6시) 요금 어른 왕복 R180, 편도 R90 문의 021-424-8181 tablemountain.net 1 케이프타운 시내에서 바라본 테이블마운틴과 라이온스 헤드 2 케이블카를 타고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면 케이프타운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3 시그널힐의 일몰 4 케이프타운 일대를 돌아보는 2층 버스가 테이블마운틴을 찾았다 5 테이블마운틴의 절벽위에서 잠든 바위너구리 6 테이블마운틴 산책로 폭풍 속에서 희망을 찾다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60km 가량 떨어진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이다. 그럼에도 희망봉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그 옛날 인도양을 항해하던 선원들이 그랬듯 희망봉에서 희망을 보길 원하는 걸까. 희망봉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바스코 다가마가 아니다.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라는 항해자가 1488년에 이곳을 발견해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라 이름했다. 9년 후인 1497년, 바스코 다가마가 이 곶을 통과해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며 폭풍의 곶은 희망의 곶이 됐다. 케이프타운에서 희망봉까지는 약 50km 거리. 잘 닦인 자동차도로를 따라 희망봉으로 향한다. 운이 좋거나 혹은 나쁘다면 도로 위에서 개코원숭이와도 만나게 된다. 한번 먹을 걸 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 놈이라 양아치로 통하기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희망봉은, 바다다. 희망봉이라는 표지판이 놓인, 육지다. 그래도 거룩한 이름의 희망봉인지라 기념사진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희망봉이라는 표지판이 놓인 곳은 바스코 다가마가 실제 발을 디딘 곳이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당시의 날씨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여 케이프 포인트Cape Point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은 아니지만 남아공 남서쪽 끝을 이루는 곶이 있다. 바로 케이프 포인트다. 238m 높이에 등대가 놓여 있으며, 케이블카를 타거나 걸어서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는 해발 127m에서 출발해 214m 높이의 역에 선다. 케이프 포인트에서는 희망봉은 물론 일대의 바다가 한눈에 조망된다. 세계 도시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등 소소한 볼거리들이 등대와 함께 있다. 케이프 포인트는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관람시간 10~3월 오전 6시~ 오후 6시, 4~9월 오전 7시~오후 5시 요금 입장료 어른 R80, 어린이 R20, 케이블카 어른 왕복 R45, 편도 R35 문의 www.tmnp.co.za, www.capepoint.co.za 1 한 번 먹을 것을 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 개코 원숭이는 케이프타운에서 양아치로 통한다 2 케이프 포인트 케이블카는 해발 127m에서 출발해 해발 214m 역에 선다 3 희망봉을 알리는 표지판 감옥이 된 섬, 유산이 된 감옥 로벤 아일랜드Robben Island로 향하는 길, 배를 다루는 바다가 거칠다. 대서양의 원래 성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바다를 맨몸으로 건너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섬은 1836년부터 1931년까지는 나병환자를, 1959년부터는 정치범을 가두는 장소로 활용됐다. 워터프론트Victoria & Alfred Waterfront의 넬슨 만델라 게이트웨이에서 1시간여 바닷길을 달리면 로벤 아일랜드에 닿는다. 쇼핑 센터와 카페,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는 워터프론트는 늘 활기에 넘친다. 가끔 길거리에서 열리는 공연이라도 보고 있자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맨스워프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로벤 아일랜드는 다르다. 텅 빈 섬은 고요하며 엄숙하다. 감옥이 폐쇄된 건 1996년의 일이다. 다음해인 1997년부터 섬은 박물관으로 공개됐고, 199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섬은 버스로 돌아본다. 버스에는 그 옛날 변사를 떠올리게 하는 가이드가 동승해 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버스를 한 장소에 세워두고 투어가 진행돼 조금은 답답하고 지루한 면도 있지만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진지하다. 버스는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참가자들을 감옥에 내려준다. 실제 이 감옥에 수감됐던 이가 안내를 맡아 강제 노역을 했던 장소며, 수십명의 수감자가 지냈던 방과 화장실 등을 보여준다. 당시 뙤약볕에서 노역을 하며 실명을 한 이들도 많았다고 하니 수감 생활의 고단함은 짐작할 만하다. 넬슨 만델라를 포함한 여러 정치범들이 수감됐던 독방 또한 볼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27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로벤 아일랜드 투어는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다. 섬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이동하는 시간이 길지만 그들의 성지를 엿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물개와 가마우지의 터전이 되는 섬 주변의 바다와 섬 안에서 만나는 아프리칸 펭귄도 반갑다. 4 워터프론트의 시계탑 5 로벤 아일랜드에 사는 아프리칸 펭귄 6 워터프론트에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수많은 가게가 자리했다 그 섬에 물개가 산다 네덜란드어로 나무라는 뜻의 호우트Hout.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상당량의 목재를 베기 이전에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다고 한다. 1652년, 요한 반 리빅Johan van Riebeek은 그의 일기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이곳을 기록했고, 이후 이곳은 호우트 베이Hout Bay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아침, 호우트 베이는 숲이 아닌 기념품을 파는 노점으로 가득하다. 목재 인형에 부부젤라까지, 다양한 상품을 늘어 놓은 노점은 물개 섬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 물개 섬Seal Island은 호우트 베이에서 뱃길로 15분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정식 이름은 더커 섬Dulker Island이지만 물개를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물개섬이라 불린다. 커다란 갯바위에 가까운 섬에는 계절에 따라 600마리에서 5,000여 마리의 물개가 살아간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섬을 물개가 온통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여 배는 섬에 다가갈 뿐 정박하지는 않는다. 섬 주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배에서 물개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15분여 뱃길을 달려 10분여를 구경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물개 섬의 여정은 40분 정도로 짧아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희망봉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잠시 들른다. 호우트 베이를 떠나 희망봉으로 가는 길은 챔프만스 피크 드라이브Champman’s Peak Drive를 따른다. 죄수들을 동원해 7년간 닦은 길로 1922년에 개통됐다. 도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호우트 베이는 하늘의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빛을 담아낸다. 운행시간 오전 8시45분줈, 오전 9시30분, 오전 10시15분, 오전 11시10분줈(줈는 비정기 노선) 요금 어른 R42.50, 어린이 R15 문의 Circe Launches 021-790-1040 www.circelaunches.co.za 작지만 강한 심장의 펭귄들 남아공에도 펭귄이 산다. 아프리카에 사는 놈이라 이름도 아프리칸 펭귄이다. 케이프타운에서 희망봉으로 가는 길에는 보울더스라는 해변이 자리했다. 1982년에 이 해변으로 한 쌍의 펭귄이 들어왔고, 지금은 3,000여 마리의 펭귄이 살아가는 보울더스 펭귄 서식지Boulders Penguin Colony로 탈바꿈했다. 1910년에는 150만 마리 가량의 아프리칸 펭귄이 남아프리카에 서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음식 재료로 펭귄 알을 사용하는 등 여러 이유로 20세기 말에는 개체수의 10%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아프리칸 펭귄은 40~50cm 정도의 귀여운 체구를 자랑한다. 체구는 작지만 심장은 강하다. 보울더스의 해변까지 이어지는 나무 데크에서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펭귄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해변을 벗어나 주차장까지 걸음을 하는 펭귄도 있다. 아프리칸 펭귄은 재캐스 펭귄Jackass Penguin이라고도 불렸다. 당나귀와 울음소리가 비슷해서였는데, 남아메리카의 일부 펭귄도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 아프리칸 펭귄이라 불린다고. 이 펭귄은 1시간에 7km 정도를 수영하고, 2분 정도 잠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보울더스와 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자리한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도 가볼 만하다.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사이먼이 이곳에 항구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는데 곳곳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들이 많다. 입장요금 어른 R35, 12세 이하 R10 문의 021-786-2329 www.tmnp.co.za 1 챔프만스 피크의 전망대 2 호우트 베이에서 뱃길로 15분 가량 달리면 물개 섬이라 불리는 더커 섬에 닿는다 3 보울더스 해변의 펭귄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하다 Kruger National Park 선한 영혼이 뛰노는 자리 크루거 국립공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음푸말랑가Mpumalanga 날씨 맑음. 똑똑한 핸드폰의 아름다운 위젯이 크루거의 날씨를 알린다. 케이프타운에서 2시간 가량 하늘 길을 날아 넬스프룻Nelspruit 공항으로, 또다시 차로 2시간을 넘게 달려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의 사설보호구역Private Game Reserve에 들어섰다. 남아공에서 가장 큰 보호구역으로 알려진 크루거는 그 크기만 남북으로 350km, 동서로 60km에 해당한다. 남아공의 음푸말랑가와 림뽀뽀Limpopo주를 포함해 북쪽으로는 짐바브웨, 동쪽으로는 모잠비크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거대한 크루거의 음푸말랑가 땅, 말라말라 사설보호구역Mala Mala Private Game Reserve에 며칠 머물 예정이다. 똑똑한 핸드폰이 알려준 날씨가 새삼 반갑다. 동물원이 아니랍니다! 새벽부터 숨가쁘게 이어온 여정이건만 쉴 시간은 없다. 해거름이 찾아 들기 전에 야생의 땅으로 안전하게 잠입해야 한다. 샌드위치로 곯은 배를 대충 채우고 랜드로버에 올라탄다. 랜드로버는 크루거 사파리에서 여행자의 발이 된다. 도심의 도로를 달리며 뿜어내던 그의 야성미가 비로소 진정한 멋을 발휘하는 때다. 랜드로버가 발이라면 레인저Ranger는 여행자의 눈이자 보호자다. 레인저들은 매와 같은 눈으로 동물들의 뒤를 쫓는 한편, 안전의식이 미비한 사파리 여행자들을 주의시킨다. “랜드로버에서 엉덩이를 떼지 마세요.” “동물원으로 착각하고 소리치지 마세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장전한 엽총을 지닌 레인저들이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사파리를 마칠 수 있다. 워터벅Waterbuck은 사파리가 시작되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엉덩이에 Q마크를 예쁘게 새긴 워터벅 한 마리다. 곧 이어 모습을 드러낸 임팔라Impala의 엉덩이에는 M자가 박혀 있다. 사파리가 시작되자마자 웬 횡재냐며 랜드로버의 일행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사실 크루거에는 워터벅이며 임팔라 같은 초식동물은 널려 있다. 찾아내고 뒤를 쫓을 필요도 없다. 그들의 생존 방법이 많이 낳는 것 외에 별다른 게 없어서다. 서쪽 하늘의 석양볕이 열기를 잃고 어둠이 내렸다. 낯설고 먼 소리에 임팔라가 반응을 보인다. 놈의 천적이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는 뜻이다. 또 다른 랜드로버에서 무전을 보내 임팔라의 행동을 확인해 준다. 사자다. 그것도 네 마리의 새끼 사자를 거느린 사자 가족이다. 무전을 주고받은 네 대 가량의 랜드로버가 모여들었다. 사자 가족의 비위를 맞추며 랜드로버 떼가 조심스레 접근을 시도한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카메라 앞에 몇 차례 포즈를 취하던 사자 가족은 초원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네까짓것들은 관심 없다는 듯 시크의 절정을 보여주고는 떠났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흥분했다. “내가, 여기, 크루거, 사파리에서, 사자를, 아니, 사자 가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1 크루거를 대표하는 초식동물인 임팔라. 뿔 달린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과 함께한다 2 크루거 사파리에서 여행자들의 발이 되는 랜드로버 3 작은 몸집의 새들도 크루거에서는 생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하루 400km 가량 곡예하듯 비행하는 배틀래 독수리Bateleur Eagle 4 임팔라를 사냥한 표범이 천천히 식사를 즐기고 있다 5 아침, 경비행장 활주로에 나타난 코뿔소 떼 맹수가 사냥을 하는 날 아프리카 사파리 경험이 많은 이들은 초보 사파리 여행자들에게 크루거를 권한다. 짧은 여정으로 쉽게 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비교적 손쉽게 동물을 볼 수 있어서다. 초원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동물을 관찰하는 것도 크루거만의 매력이다. 찻길을 준수하는 여타 사파리와는 달라 크루거에서는 쌍안경이 필요 없다. 의기충천해 범이라도 잡을 태세로 달려가는 길, 진짜 범을 만났다. 호피 코트를 멋지게 뽐내는 표범의 엉덩이가 걸음걸음 실룩거린다. “쉿!” 걷고 쉬기를 반복하는 표범의 발걸음이 외따로 풀을 뜯는 임팔라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사.냥.예.감. 예사롭지 않다. 맹수가 사냥을 하는 날, 사파리를 하는 이에게 필요한 건 인내다. 맹수는 배부른 식사를 위해 초식동물과의 거리를 아주 천천히 좁혀 가며 사냥을 한다. 기다림의 시간, 동물 찾기에만 혈안이 됐던 시선이 어느새 하늘을 향한다. 별은 총총하고, 달은 밝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저 멀리 일렬로 선 목 긴 기린 떼의 실루엣이 들어온다.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는 기다림을 함께하는 친구가 된다. 사냥 시간이 가까워 온다는 생각에 긴장감은 배가 되고,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아릿하게 적시는 바로 그 순간, 표범이 사라졌다! 임팔라 수놈의 울부짖는 소리를 따라 랜드로버가 초원 안으로 들어선다. 수놈 임팔라와 멀지 않은 곳에는 이미 목을 내어 준 암놈 임팔라가 쓰러져 있다. 이번에는 표범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임팔라의 목을 문 표범은 몇분간 미동도 않는다. 파다닥. 파다닥. 몇 차례 이어지는 임팔라의 몸부림에도 표범은 굳건하다. 표범의 기다림이 끝났다는 것은 소리로 알게 된다. 사각사각 살과 내장을 뜯어내는 소리가 선명하다. 사냥에 성공한 표범은 위풍당당하게 식사를 즐긴다. 불과 몇 시간 전, 초식동물을 동정했던 우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반하고 말았다. 아름답다. 잔인하지만 아름답다. 1 등에 작은 새를 태운 버펄로의 모습. 새는 버펄로가 이동할 때 뛰어오르는 메뚜기와 같은 곤충을 먹고 산다 2 초식동물 임팔라는 작은 소리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빅 파이브’를 만나게 될까 사파리를 하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사자, 표범, 코뿔소, 코끼리, 버펄로를 이르는 ‘빅 파이브 Big 5’다. 사파리를 하는 동안 이들을 모두 보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다. 말라말라 사설보호구역에서도 빅 파이브를 모두 보는 이들에게는 증명서를 준다. 이른 아침, 사파리를 시작하자마자 코뿔소가 보인다. 방금 전에 떠오른 해를 등지고는 경비행기 활주로에 단체로 자리를 깔았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버펄로도 아침 사파리에서 만난다. 코뿔소나 코끼리, 버펄로는 새와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다. 등이나 머리 위에 새가 앉아도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작은 새들은 큰 동물이 이동할 때 뛰어오르는 메뚜기와 같은 곤충을 먹고 산다. 몸집에 관계 없이 야생에는 생존 법칙이라는 게 존재한다. 크루거의 사설보호구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출과 일몰 즈음, 두 번의 사파리를 한다. 한낮에는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워킹 사파리 Walking Safari 를 진행한다. 초원까지는 랜드로버로 이동을 하고, 짧은 거리를 걸으며 초식동물이나 새, 나무를 관찰하는 프로그램이다. 워킹 사파리까지 참여하면 하루가 빡빡하다. 똑똑한 핸드폰의 날씨가 바뀌었다. 흐림. 그래도 사파리는 어김없이 이어진다. 어둠이 내렸지만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느껴진다. 첫날의 흥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음침한 분위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웬일인지 동물들도 자취를 감췄다. 너무나 빨라 쫓기가 힘든 하이에나만이 어둠 속을 배회한다. 레인저는 “음침한 오늘은 사냥의 날”이라고 했다. 여기저기에서 사냥이 이뤄졌고, 버려진 고기를 먹기 위해 하이에나는 움직였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봤다면 그날은 사냥의 날이자 피의 날이며 음침한 기운을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날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 clip 말라말라 메인 캠프 Mala Mala Main Camp 크루거 국립공원 음푸말랑가 주에 자리한 로지 Lodge 중 하나다. ‘말라말라’와 ‘래트레이스 온 말라말라Rattray’s on Mala Mala’라는 두 개의 로지가 가까이에 있다. 래트레이스 온 말라말라는 전용 풀을 갖춘 풀 빌라. 단 8개의 객실만 운영하며, 16세 이하는 출입을 금하고 있다. 말라말라 캠프에서는 사파리를 하는 시간 외 밥을 먹는 등의 모든 일을 레인저와 함께한다. 심지어 밤에 숙소로 돌아갈 때는 레인저가 문 앞까지 배웅한다. 수영장, 레스토랑, 바 등의 부대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사슴 종류나 코끼리 등은 캠프 안에서 돌아다닐 정도로 보호구역과 경계가 희미하다. 문의 011-442-2267 www.malamala.com Travel to South Africa ▶남아공 찾아가는 길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는 남아프리카의 항공의 허브 도시다. 한국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는 일반적으로 홍콩을 거쳐 간다. 크루거 국립공원이 위치한 넬스프룻 공항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시간, 케이프타운에서는 2시간 가량 걸린다. 사우스아프리카항공 서울사무소 02-775-4697. ▶남아공 기본정보 랜드(Rand, 주로 란드라 발음)를 사용한다. R1는 160.41원. 230V 3핀 코드. 대부분의 호텔에는 한국 전자제품의 2핀 코드를 꽂을 수 있는 콘센트가 하나 정도 마련돼 있다.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남반구에 자리했으므로 한국과 날씨가 반대다. 7월 최고기온은 17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기온이지만 최고 기온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자. 아침저녁으로는 아주 춥다. 비가 적은 여름과는 달리 7월 평균 강수량은 82mm로 많은 편이다. ▶Accommodation 케이프타운 추천 호텔 월드컵 때 태어난 페퍼 클럽Pepper Club 케이프타운의 다운타운에 자리한 5성급 호텔로 2010 월드컵 때 문을 열어 시설이 전반적으로 깨끗하다. 객실 분위기는 모던한 편. 스토브와 오븐이 있는 부엌이 마련돼 있으며, 토스트기와 캡슐 커피 머신도 있다. 호텔 바로 옆에 아바나(Havana)라는 유명 클럽이 자리해 일부 객실은 시끄러울 수도 있다. 주소 Cnr Loop and Pepper Street, Cape Town 문의 021-812-8899 www.pepperclub.co.za 고풍스러운 더 테이블 베이 호텔The Table Bay Hotel 워터프론트에 자리한, 케이프타운에서 손에 꼽히는 고급 호텔이다. 로벤 아일랜드와 워터프론트, 테이블 마운틴 전망의 329개의 객실이 다양한 타입으로 마련돼 있다. 객실 분위기는 고풍스럽다. 호텔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한 아틀랜틱 그릴(Atlantic Grill)과 경쾌한 분위기의 유니온 바(Union Bar) 등이 자리했으며, 스파, 수영장 등의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주소 Breakwater Boulevard, Quay 6 Victoria & Alfred Waterfront, Cape Town 문의 021-406-5000 www.tablebayhotel.com ▶Dining Place 케이프타운 추천 레스토랑 보슈운달Boschendal 와이너리 투어 와이너리 투어는 케이프타운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시내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더반빌을 시작으로 수많은 와이너리가 펼쳐진다. 그중 보슈운달은 1685년부터 명맥을 이어온 와이너리. 케이프타운 시내에서는 차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곳에 자리했다. 2,250헥타르에 이르는 이곳 와이너리에서는 한 해에 300만 병의 와인이 생산된다. 화이트 와인이 60%, 레드 와인이 40%의 비율을 차지하며 반은 해외로 수출하고, 반은 남아공에서 판매된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 등 종류가 다양하다. 와인 테이스팅을 통해 와인을 맛볼 수 있으며, 와이너리 내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해 마시는 것도 가능하다. 뷔페로 운영되는 레스토랑의 음식이 아주 훌륭하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와인은 화이트 와인인 1685 샤도네 2009(1685 Chardonnay 2009)와 레드 와인인 1685 시라즈 2009(1685 Shiraz 2009). 각각 R60로 가격도 저렴하다. 문의 www.boschendalwines.com 아프리카의 맛을 담은 마마 아프리카 Mama Africa 아프리카의 분위기를 담은 레스토랑으로 케이프타운 시내에서는 유명한 편이다. 주말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 악어, 스프링복, 타조 고기 등이 함께 나오는 메뉴는 생소하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저녁에는 아프리카 전통 공연도 열린다. 주소 178 Long Street, Cape Town 문의 021-424-8634, 021-426-1017 해산물이 싱싱한 벌사스Bertha’s 사이먼스 타운의 항구에 자리한 레스토랑으로 바다가재, 오징어, 라임 피시 등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음식은 전반적으로 짠 편이다. 주소 Quayside Centre 1 Wharf Road, Simons Town, Cape Town 문의 021-786-2138, 021-786-2286 www.berthas.co.za 바다가재 게장이 있는 성북정Taste of Asia 케이프타운에 자리한 몇 안 되는 한식당. 생선초밥 등 일부 메뉴를 뷔페로 즐길 수 있으며, 한식 메뉴를 따로 주문할 수도 있다. 바다가재를 게장처럼 양념해 반찬으로 내어 놓는다. 주소 45 Lower Main Road, Observatory, Cape Town 문의 021-447-1515, 150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올해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특별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시작했고 전국 곳곳에서 잇따라 전시, 강연행사를 가진 뒤 오는 10월 20~21일 서울대에서 종합학술대회를 연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학술사업준비위원회’가 마련한 150주년 기념행사의 결정판이다. 성대하면서도 꼼꼼히 김정호를 기념하고, 그의 손길이 깃든 성과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 보는 자리다.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 제대로 된 지도가 한 장도 없어 김정호는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8번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조정은 나라의 기밀을 적들에게 알려줬다며 김정호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지도와 판목은 압수해 불살랐다.’ 이제껏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을 만든 김정호에 대한 보통의 인식이었다. 시대와 불화한 삶 속에 관련 문헌의 부족, 게다가 비극적 최후까지 더해졌다니 ‘전설’ 또는 ‘영웅’이 될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춘 셈이다. 하지만 이는 1934년 일제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까지 이어지며 빚어진 오해와 편견이다. 일제는 김정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조차 없는 것으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며 왜곡하는 식민사관을 주입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학계 일각에서 ‘김정호 바로세우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이뤄져 온 인식의 벽은 여전히 두껍다. 최근 번역 출간된 ‘한국 고지도의 역사’(장상훈 옮김, 소나무 펴냄)가 반가운 이유다. 한국역사학의 권위자인 게리 레드야드(79)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석좌명예교수가 쓴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한국 지도학의 발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 세계 지도학계에 알린 노작(勞作)이다. 레드야드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김정호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하며 ‘김정호 이전의 성과’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지난 22~23일 두 차례에 걸쳐 레드야드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사 전문가인 그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지만 “고령으로 귀가 어두워 전화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한국사와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이글이글했다. →한국사 전문인데 지도학에 관심을 두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저는 사실 평생에 걸쳐 한국사를 연구해왔고 한국의 지도학은 역사의 한 부분으로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1990년 위스콘신대 지리학부로부터 한국의 지도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습니다. 바로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해당되는 원고였죠. 애초 60쪽 정도로 예상했으나 정리하다 보니 300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 편집위 또한 한국 고지도의 중요성을 흔쾌히 인정했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세 권을 펴낸, 전 세계와 고금을 아우르는 세계 지도학의 종합연구서 시리즈입니다.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제2권의 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수록돼 있습니다. 모두 8권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20년 더 걸려야 마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이죠. 애초 위스콘신대에서 편집기획을 시작한 영국 출신 지리학자인 J B 할리 교수와 데이비드 우드워드 교수는 이미 돌아가셨고 새로운 편집기획위원을 선정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디지털 과학기술의 발달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서관이 이 책을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김정호 팬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지도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부터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중요한 연결 고리였군요. 그런데 왜 대동여지도의 팬이 되신 겁니까.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세계의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대동여지도와 같이 구체적인 성취에 대한 것은 잘 모르죠. 제가 ‘세계 지도학 통사’ 원고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그는 이것을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었다-에도 관심이 남다릅니다. 아시아편 표지 사진으로 ‘강리도’를 실은 이유이지요. 아마 콜럼버스가 1492년 이 지도를 갖고 있었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항해를 떠났을 겁니다. 세계사도 많이 바뀌었을 테고요. →한국의 옛 지도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글을 쓰는 데만 2년 반이 걸렸습니다. 한국의 많은 저작은 물론 일본, 중국, 유럽 학자들의 이론도 충분히 검토하고 종합했어요. 그 과정에서 김정호나 대동여지도 외에도 한국 지도학에 많은 성취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 대동여지도에만 관심을 쏟으며 다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앞서서 노력한 이들, 예컨대 양성지(梁誠之·1415~1482), 정척(鄭陟), 정상기(鄭尙驥·1678~1752) 등에 대해 좀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한국 뉴스를 챙겨 본다.”는 레드야드 교수는 “김정호와 같은 천재를 둔 한국인 여러분에게 축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정겹게 말했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행사에 대해서도 축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국내판은 흑백 도판을 쓴 원서와 달리 컬러 도판으로 바꿨다. 번역을 맡은 장상훈 박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 3만 5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부평 미군기지터 수난

    인천 부평 미군기지 터는 ‘흉지(凶地)’인가. 10년 가까이 끌어온 친일파 후손 부지 반환소송이 겨우 마무리되는가 했더니 독성물질이 폐기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수난사가 이어지고 있다.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이 들어선 인천 부평구 산곡동 일대 50만㎡. 1900년대 초반까지 근대농업회사인 ‘목양사’의 땅이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총독부가 친일의 대가로 송병준에게 이 일대를 불하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군수지원기지로 바뀌었다. 2002년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의 증손자 송모(66)씨 등이 미군기지 일대를 되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확인 및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공시지가로 2600억원. 송모씨는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패소했고, 대법원은 지난 13일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엔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주한미군이 1989년 부평 미군기지에서 독성물질인 폴리염화비페닐 448드럼을 처리했다고 재미 언론인 안치용씨가 폭로한 것. 이후 조사를 촉구하는 인천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부평 미군기지는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환경조사에서도 토양·수질의 오염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고, 지하수에선 맹독성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15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간의 흐름. 찬란했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 피렌체와 일제 강점기 아시아의 소국(小國) 조선이라는 공간과 위상의 차이. 이 시대를 살았던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위대한 메디치’로 불리며 이탈리아, 아니 중세 유럽을 통틀어 가장 화려했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렌조 메디치(오른쪽·1449~1492)와 자국의 역사책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간송(澗松) 전형필(왼쪽·1906~1962). 겉으로 보이는 배경으로는 너무나 다르지만 이들에겐 엄청난 ‘돈’과 예술을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각각 피렌체 우피치미술관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 ‘인류의 유산’을 향유할 기회를 남겼다. 만약 그들이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쓰는 데만 골몰했다면, 또는 재산을 늘리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면 중세미술사와 한국미술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가상 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 주의 주인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꼽히는 로렌조 메디치와 전형필이다. 막대한 재산을 문화유산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이들의 노력이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는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서양미술사에만 관심을 갖다가 지난주 간송미술관을 다녀온 후 한국미술의 전통과 매력에 흠뻑 빠진 직장인 윤정은(33·여)씨가 궁금한 점을 모아 인터뷰에 나섰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물려받았다. 도대체 어떤 가문이었고 재산 규모는 얼마나 됐나. -메디치 내 증조할아버지인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지모는 피렌체인들 사이에서 ‘국부’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은행업을 통해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가문의 수장이 됐을 때 내 나이 고작 20세였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특히 우리 가문은 직물산업의 핵심이었던 ‘백반’(양모 세척제)을 움직였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회였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냥 피렌체가 메디치였고, 피렌체의 모든 것은 메디치 가문의 재산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에 와세다대 법대를 다니던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서울 일대는 물론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를 지나면서 우리 집안 땅을 밟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미곡상을 했는데 내가 24세에 물려받은 논은 4만 마지기(800만평)에 달했다. 1년에 소작농으로부터 쌀 2만 가마니(1만석)를 거둬들였는데, 이를 당시 기와집 값으로 환산하면 150채 정도였다. 현재 서울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매년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논을 몽땅 판다고 가정하면 6000억원 정도였는데, 이건 그냥 단순한 수치 환산이고 당시 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훨씬 더 가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1년에 나만큼 버는 조선인은 43명에 불과했다. →<윤정은> 역사적으로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흥청망청 쓰다 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한국의 재벌 집안만 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실패하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도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 -메디치 할아버지 코지모의 영향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피렌체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난 그들과 토론하는 법을 배웠다. 10대 때부터 이미 유럽 각국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한 덕에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로마어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리스어까지 능통하게 구사했을 정도였으니. 내 신분은 공식적으로는 돈이 많은 시민이었지만 피렌체 안팎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됐고, 그렇게 살았다. 물론 금욕적인 삶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난 바람둥이였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에게는 그런 게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전형필 난 원래 경성에서 대학을 다니며 조선어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호사가 될 것을 강권하셨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법을 연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가업인 장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부모의 상을 당한 상황에서 본인이 즐기는 데 그것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을 사랑했는데 특히 수집(蒐集)에 관심이 많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메디치 ‘위대한 로렌조’라는 호칭과 달리 난 콤플렉스가 많았다. 심한 주걱턱이었고,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었다. 코도 낮았고 목소리는 거칠었다. 하지만 난 비올라와 류트(당시의 현악기), 승마술, 매사냥까지 섭렵했고 유려한 글솜씨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예술에 대한 조예는 못난 겉모습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가를 지원해 그들의 작품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했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난 할아버지나 아버지, 다른 귀족들과는 좀 달랐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 이외에 고대 미술품을 수집하고 동양의 예술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 사회상에서 난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무엇보다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고희동(1886~1965·서양화가) 선생과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서예가) 선생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두 분은 내가 어릴 때부터 책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고 선생은 나에게 “글을 읽으면서 학문을 닦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 결과 나는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위창 선생은 나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주셨고, 내 수집활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작품을 모아야 하는지, 어떤 눈을 갖춰야 진품을 구분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윤정은> 돈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사실 취미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재산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는데, 다른 목적은 없었나. -메디치 (웃음) 난 상인이었지만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치인에게 100% 순수한 호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밀라노에 보내고 1488년 안토니오 다 산갈로를 나폴리에 보냈다. 그 공국들에 내가 후원하던 예술가를 보내는 게 좋은 작품을 선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호의를 베풀면서 실은 정치를 한 거였다. 솔직히 내가 예술가를 후원한 돈은 대부분 내가 피렌체의 공직을 겸하면서 공금으로 썼다. 내 재산은 오로지 내 수집품을 모으는 데 집중적으로 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에 대한 환상이 좀 깨지지는 않았나. -전형필 왜 수집에 나섰느냐고 위창 선생이 물었을 때 난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선이 언젠가 독립될 것이란 믿음이 없었는데도 수집을 계속했을지는 나도 자신이 없지만, 난 반드시 독립될 것으로 믿었다. 1933년 성북동에 터를 구해 미술관을 지은 것도 독립이 됐을 때 후손들에게 우리 문화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팔려 갔던 고려석탑을 다시 사 오면서 난 한번 유출된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해방된 후에는 이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제에 더 이상 빼앗길 염려가 없어진 후에는 조선 사람이 모은 것은 모두 조선 것이기에 해방 후에는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에만 전념했다. →<윤정은> 소장품들에 대해 묻겠다. 두 사람의 노력은 우피치와 간송 미술관으로 남았지만 두 사람 모두 박물관의 개관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메디치 우피치는 영어로 하면 ‘오피스’(사무실)를 뜻한다. 그곳은 내 증조부 코지모의 집무실이다. 물론 내가 가장 주목받기는 하지만 우피치 수집품은 우리 가문 전체의 공이다. 14~16세기 르네상스 화가부터 17~18세기 바로크와 로코코에 이르기까지 소장 규모 자체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조토의 ‘성모자’, 다빈치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도록으로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우피치를 박물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 이후로 200여년이 지난 후 메디치가 최후의 후손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토스카나 공국에 기증하면서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남겼다.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보물을 볼 수 있도록 어느 것도 피렌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형필 간송미술관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운학문매병’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이 있다. 1937년에는 영국 변호사 개스비에게서 청자 20점을 40만원에 사기도 했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가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가치는 후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고, 그것이 원래 내가 수집을 시작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잡스러운 그림을 그린다고 폄하됐던 겸재 정선(1676~1759)을 화성(畫聖)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을 내 최대의 성과로 생각한다. 그럼 내가 묻겠다. 지금 간송미술관에서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끼나. →윤정은 당대 최고의 좋은 자재로 지었다는 미술관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1930년대의 근대식 2층 건물과 창틀에는 현대미술관처럼 멋진 조명도 없고 첨단 잠금장치도 없다. 화장실 냄새도 코를 찌른다. 아이들이 유리에 온갖 손자국을 내며 코를 박고 보는 모습은 유럽 미술관의 풍경과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전시하지 않아서 좋았고, 온전히 우리 것이라는 것이 더 좋았다. 내가 보고 있는 전시품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조상의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다. 바티칸이나 루브르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친구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간송미술관에 가면 간송이라는 사람과 그가 남긴 뜻이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참고서적 간송 전형필/이충렬/김영사 조선의 그림수집가들/손영옥/글항아리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최완수·한상남/샘터 조용헌의 명문가/조용헌/랜덤하우스코리아 메디치 머니/팀 팍스·황소연 옮김/청림출판 메디치‘의 음모/피터 왓슨·김미형 옮김/들녘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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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 개편된 한국사 공부 가이드

    새로 개편된 한국사 공부 가이드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의해 개편된 한국사 교과서는 기존 국사 교과서와는 다르다. 근대 이전의 역사는 간략하게, 근대 이후의 역사는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실상 기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근대 이전의 역사를 약간 추가한 것이다. 다만 근대 이전의 역사는 분량은 적지만 다루는 내용이 많다. 또한 국정교과서에서 검정교과서로 바뀌어, 학교마다 6개 검정교과서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우게 된다. 따라서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른 교과서로 공부하게 된다.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에 대한 공부법 등을 살펴봤다. 올해부터 집중이수제가 실시되면서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한국사를 한 학기에 배운다. 주당 수업 시간이 늘어 학습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다. 중간고사 전까지 선사 시대에서 근대까지의 역사를 배워 중간·기말고사 공부 분량이 많다. 예전에는 시험 기간에 집중하는 ‘벼락치기’가 통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평상시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근대 이전의 역사는 설명이 자세하지 않고, 많은 사실이 나열되어 있어 수업만으로는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지금의 중3 학생은 근대 이전의 경제, 사회, 문화를 간략하게 배우는 데 지금 중2 학생이 배우는 2009 개정 중학교 ‘역사(상)’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수능 한국사 평균 국사보다 높아질 듯 한국사 이수가 필수로 지정됐지만 수능에서 한국사를 선택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14 수능부터 탐구영역은 현행 3과목에서 2과목만 선택하게 됐다. 한국사는 다른 사회탐구 과목보다 다루는 내용이 많아 학생들의 선호도가 떨어진다. 여기에 시험과목도 2과목으로 줄어서 수능 한국사의 평균점수는 지금의 국사보다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꼼꼼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수능에서 높은 등급 점수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다. 꼼꼼한 한국사 공부를 위해선 우선 근대 이전은 100년, 근대 이후는 10년 단위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역사과목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어떠한 변화를 통해 사회가 변해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략 근대 이전은 100년 단위로, 근대 이후는 10년 단위로 구분하여 변화를 파악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각 시기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각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연결되어 있어서 그 시기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며, 각각의 제도는 변화 발전하며 다음 시기로 이어진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하면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동학 농민운동으로 조선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갑오개혁이 추진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근대사의 경우 흥선 대원군의 개혁, 병인·신미양요, 갑신정변, 동학 농민운동, 갑오개혁, 독립협회 활동, 의병 활동 등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사건은 발생 시기 및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일어났는지도 파악해 두어야 한다. ●근대이후 조약·개혁정책 차이도 알아야 기본단위로 끊어서 살펴보지만 통시대적인 제도 변화를 파악하고 각 제도를 비교해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앞 시대의 제도나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아 변화 발전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통시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통일 신라의 사정부, 발해의 중정대는 고려의 어사대, 조선의 사헌부와 성격이 비슷하다. 시험에도 유사한 제도를 섞어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가령 대동법의 성격을 묻는 문항에서 균역법, 영정법 등과 관련된 내용이 오답으로 나오는 것 등이다. 때문에 관련된 내용은 비교해 정리해 놓으면 오답을 피할 수 있다. 근대 이후에 체결·발표된 조약, 강령, 개혁방안, 정책 등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좋다. 근·현대사에서는 근대 각국과 체결하였던 조약, 근대화 및 민족운동을 전개한 단체에서 발표한 강령, 정부에서 발표한 개혁 방안,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발표한 식민지 정책 등을 직접 활용하거나 변형한 문항이 많이 출제된다. 이에 각각 발표된 배경,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다른 조약이나 개혁 방안, 정책과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료 의미 응용력도 키우길 사진이나 지도 등 자료를 분석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자료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다시 문제를 푸는 유형은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이런 유형의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과서나 역사 부도에 언급된 사료, 지도, 그림, 사진, 도표 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 기출 문제나 각종 문제집을 통해 문제 풀이 능력도 높여야 한다.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다시 교과서를 확인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오답 노트를 만드는 것도 유용하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9)‘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간디! 흔히 ‘인도 독립의 아버지’, ‘힌두의 성자’라고 불리는 ‘위인’. 그러나 청년 시절의 간디는 조혼이나 카스트 제도를 부끄럽게 여겼고, 육식을 금지하는 힌두교 전통을 낙후된 것이라 생각했던 식민지의 젊은 문명론자였다. 그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인도의 대개혁을 위해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 이 촌뜨기 식민지 유학생은 식민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신사’의 꿈을 꾸면서 새 옷을 맞추고, 실크 모자와 야외복과 고급 넥타이를 사고, 그것도 모자라 댄스와 프랑스어와 웅변술과 바이올린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빠진다. 물론 이런 부박한 충동은 금세 극복되었다. 그렇다고 ‘문명=개혁’에 대한 간디의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간디는 귀국 후 집안에서 자녀에게 체조 교육을 시키고, 음식을 개량하고 의복을 서구화했다. 그에게 영국은 문명과 이성의 대명사였고, 인도는 교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은 스스로를 위대한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샤 계급 출신으로 인도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식료품상’이란 뜻의 ‘간디’란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개업하기가 어려웠다. 집안의 꿈이었던 정치 관료로 출세하기란 더 난감해 보였다. 간디는 스물넷에 ‘잘나가는 변호사’를 꿈꾸며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안타깝게도 날선 바지에 영국식 양복을 입은 변호사도 그곳에선 ‘갈색 피부’에 불과했다. 1등석 차표를 지녔지만 “같이 못 타고 가겠다.”는 백인의 말 한마디에 강제로 끌려나와 낯선 기차역에 버려진다. 최초의 충격! 그랬다. 간디는 당시 남아프리카에 5만명가량 존재했던 이주노동자, ‘쿨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쿨리들의 구심점이 되어 버린 간디. 이제 스물여섯 살 청년 간디는 ‘쿨리’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결국 남아프리카의 나탈에서 인도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가,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간디는 23년간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귀국 후 조국 인도에서 죽을 때까지 정치 지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대영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국적인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해 왔던 것은 정치적 실험이 아니라 “정신적 실험”이며 ‘모크샤’(자기 구원)를 향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징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다.”거나 도둑질을 했을 때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속죄를 했다는 식의 자기 성찰은 진지하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모든 위인이나 성인의 특징이라고 말해버리면 간디는 그냥 ‘본투비(Born to be) 성인’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간디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매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낯선 상황, 낯선 사건에 놓였고, 매번 그 현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국에 협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정치적 문제에서부터 육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까지 간디에게 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에 그는 책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발견했다. 그가 자발적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유학 시절에 읽었던 책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시절 이후 그가 생산해야 하는 진리의 길은 매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던 투쟁의 한복판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놀라울 정도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매번 창조적인 ‘진리 실험’을 한다. 소위 ‘비폭력 불복종’이라고 불리는 ‘사티아그라하’ 역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불복종, 지문찍기를 강요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 간디의 진리 실험이 더해질수록 그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삶은 점점 더 간결해졌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만큼만 입었으며(윈스턴 처칠은 그가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총독 궁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하며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이 하는 일, 청소나 똥 푸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간디의 아내는 때때로 절망하고 울부짖었으며,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맏아들은 마치 아버지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말썽을 피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명하고 단호했다. 비록 때때로 좌절하고 비틀거렸지만 그는 단 한번도 ‘사티아그라하’, 모든 폭력과 지배에 대한 그 위대한 불복종을 멈춘 적이 없다. 간디의 물레! 그건 간디의 상징이고, 인도 독립의 상징이고, 나아가 모든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물레! 그러나 간디의 물레, 그것은 단순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아니다. 흔히 자치로 번역되는 ‘스와라지’ 역시, 단순한 정치 체제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 인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정신적 힘을 의미했다. 도대체 인도가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물론 동인도회사의 지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 때문인가. 그 이면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들어온 영국 상인만큼 단숨에 돈을 벌고자 했던 인도인의 욕망과 협력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도인의 마음에 뿌리박힌 영국 문명에 대한 동경, 물질과 화폐에 대한 욕망. 독립과 해방은 영국 통치가 끝나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영국적 삶의 방식 전체, 근대 문명 전체가 종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물레’는 도구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생산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 마을 스와라지에 모든 사람이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다. 타고르는 ‘실을 잣고 천을 짜는 것’이 과연 한 민족의 구루가 전하는 메시지로 적절한가에 대해 간디에게 물었고, 간디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고칼레조차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어리석은 짓이라 비웃었다. 간디는 대답했다. “나는 원시적 방법 자체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시적 방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 방법 말고는 할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마을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 걸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네.” 절대적 빈곤 속에서 술과 아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고결함을 돌려주는 일. 상호 의존과 형제애를 일상에서 실감하는 일. 노동과 명상과 섬김이 함께하는 마을에서의 삶! 그건 어떤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인도의 비전, 아니 인류의 비전이었다. 1947년 의회를 통과한 인도독립법령에 따라 8월 15일 영국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었다. 어찌 보면 간디의 이상이 실현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립의 날, 그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독립은 온갖 적대와 폭력 속에서 힌두와 이슬람이 결국 결별을 하는 분단 인도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평생 간디를 추종했고 간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네루는 간디의 스와라지 이상을 버렸다. 그는 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발전된 인도’를 열망했다. 간디의 머리에는 타고르의 시가 떠나지 않았다. “혼자 걸어가라!” 간디는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얼마 못가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투비 성인’으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위대한 영혼’으로 잠들었던 간디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간디의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게 아닐까. 혁명의 길과 구원의 길이 다른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연구원
  • 친일파 송병준 후손 ‘땅찾기’ 패소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낸 2500억원대의 토지 환수 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13일 송병준의 증손자 송모(66)씨가 인천 부평구 미군 부대 일대 땅 430만여㎡를 반환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등기 말소 등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상 귀속 조항 등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음을 전제로, 해당 부동산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송병준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친일 재산에 해당돼 국가 소유라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소송 대상이 된 땅은 부평 미군 기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공시지가로 따져도 가치가 2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송병준의 소유였던 이 토지는 1921년 강모씨, 1922년 동모씨에게 넘어갔다가 1923년 국가 소유로 귀속됐다. 송씨는 2002년 미군 기지 반환이 결정되자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이 국가에 있음을 입증하는 구 토지대장과 임야대장이 위조되거나 사후에 허위 작성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땅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1·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송병준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을 하고,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으며,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 고종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등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한일 합병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자작·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에까지 올랐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식민지 조선의 강요된 ‘명랑화 운동’

    대략 2년 전쯤의 일이다.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는 1930년대 작가인 박태원과 김기림의 작품 속에 ‘명랑’(明朗)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 교수는 이후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를 탐색해 ‘명랑’의 문화사적 의미 변화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명랑’의 끝자락에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유쾌하고 활발하다.’는 뜻의 평범한 단어 하나에 놀라운 역사적 역설이 숨겨져 있었던 것.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명랑이란 단어에 주목해 우울한 근대를 읽어낸다. 총독부와 근대 자본주의가 강요한 명랑의 홍수 속에서 1930년대는 웃음이 넘쳐난 시대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다수 지식인과 예술가, 학생, 노동자들은 우울에 젖어갔다. 저자는 일제가 당시 조선에선 잘 쓰이지 않던 ‘명랑’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총독부가 벌인 ‘대경성 명랑화 프로젝트’가 단적인 예다. 경성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보건 위생과 치안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자, 총독부는 이를 바로잡겠다며 도시 명랑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고 체제순응형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경성에 ‘명랑’이란 감정이 이식되기 시작했다. 학교는 ‘언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라는 지침에 따라 ‘모범 인간’ 양성에 나섰고, 주류 언론들은 퇴폐적이고 저속한 유행가 대신 명랑한 유행가를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산책 즐기는 남자를 부축해주는 ‘스틱 걸’과 당구장에서 손님과 함께 게임을 하는 ‘빌리어드 걸’, 주유소의 ‘가솔린 걸’ 등 화려한 용모와 미소로 명랑을 꽃피우는 온갖 ‘걸’들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강요된 명랑’의 잔재는 ‘명랑화 운동’이나 ‘사회 명랑화 캠페인’ 등을 통해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명랑화’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순응만을 강요하는 명랑화는 ‘행복화’나 ‘쿨’ 등의 레토릭으로 대체된 채 여전히 살아있다고 꼬집는다. 88만원 세대의 ‘쿨’ 또한 1930년대 ‘명랑 가면’의 21세기 버전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는 만화 명랑소녀 캔디를 통해 ‘외로워도 슬퍼도’식 명랑화로부터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진정한 명랑이란 자신의 진실한 감정과 대면하고 슬픔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니,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며 쿨한 척 애쓰지 말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말이다. 1만 38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조선왕실의궤, 오늘 日중의원 본회의 가결땐 새달 귀환

    일본이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의 조선 도서를 한국에 반환하는 내용의 한·일도서협정이 27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를 통과했다. 중의원 외무위는 일본 정부가 제출한 한·일도서협정 비준안을 심의한 뒤 표결을 통해 다수 찬성으로 가결해 28일 열릴 중의원 본회의로 넘겼다. 표결에서 제1야당인 자민당은 당론으로 반대했지만 민주당과 공명당, 사민당 등의 소속 의원들은 찬성했다. 마쓰모토 다케아키 외무상은 외무위원회에서 “한국도서의 인도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에 도움이 되고 양국 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본회의 통과하면 사실상 비준종료 28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한·일도서협정이 가결되면 사실상 비준이 종료된다. 다음 달 초에 열릴 참의원 외무·방위 위원회와 13일 열릴 본회의를 통과해야 일본 의회의 비준 절차가 끝나지만 조약의 경우 중의원 가결 우선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참의원에서 반대해도 협정이 발효된다. 한·일도서협정 같은 조약은 중의원이 비준하면 ‘여소야대’인 참의원이 부결하더라도 일본 헌법 61조의 중의원 우선 원칙에 따라 비준된 것으로 간주한다. 참의원이 심의를 하지 않아도 30일 후 자동 발효된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의를 위해 도쿄를 방문하는 다음 달 21~22일이나 늦어도 6월 안에 우리 정부에 도서를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혜문 사무총장은 일본 중의원 제2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약탈 문화재를 다시 찾아오게 된 것이 무척 기쁘다.”며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되면 정부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이는 것은 물론 이들을 국보로 지정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李대통령 방일 맞춰 상반기내 귀환 혜문 스님은 “조선왕실의궤 이외에도 불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몇 가지 문화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것인지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간 나오토 총리는 지난해 8월 10일 한일병합 100년 담화에서 “일본의 통치기간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를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가까운 시일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 정부는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APEC)가 열린 요코하마에서 한·일도서협정을 맺었고,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임시국회에서 국회 비준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자 이번 정기국회로 넘겼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10년 만에 국내 선보이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10년 만에 국내 선보이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1986년 33세의 패기 넘치는 지휘자 정명훈(58)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함께 주세페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로 오페라 데뷔 무대를 갖는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한 계단씩 경력을 쌓아 올리던 정명훈은 단박에 뉴욕 오페라 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실존인물 시몬의 파란만장한 삶 다뤄 25년이 흘렀다. 어느덧 마에스트로 반열에 오른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국립오페라단과 손을 잡고 ‘시몬 보카네그라’를 올린다. 오는 7~1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이 작품이 국내 오페라 팬에게 선보이는 건 2001년 국립오페라단의 초연 이후 10년 만이다. 1901년 89세로 숨을 거둔 베르디는 28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이 가운데 베르디가 40대이던 185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라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25년 동안 ‘퇴고’를 거듭한 끝에 68세 때인 1881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새롭게 선보인 ‘시몬 보카네그라’는 거장의 숨결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무대는 14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노바. 시몬 보카네그라는 평민 출신 해적이지만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평민파의 추대를 받아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에 오른다. 총독에 오르던 날, 정적의 딸이지만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서막이다. 그 후 ‘25년’이 흐르고잃어버린 딸 아멜리아와 만나는 1막이 시작된다. 세대를 뛰어넘은 정치적 암투와 음모, 엇갈린 사랑, 끝내 독살당하는 비극의 주인공까지. 실존 인물 보카네그라의 이야기는 당장 현대물로 각색해 미니시리즈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 특히 재산 때문에 보카네그라의 딸을 탐냈던 심복 파올로가 일이 틀어지자 아멜리아를 납치하고 그의 연인 가브리엘리에게 장인이 될 보카네그라를 죽이도록 부추기는 대목은 ‘막장’ 스토리에 단련된 요즘 관객에게도 어필할 만큼 입체적이다. ●정명훈 “국가대표 예술명가들 뭉쳤다” 탄탄한 드라마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프랑스 르몽드지가 ‘영적인 지휘자’라고 극찬했던 정명훈이다. 지난해 1월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선보인 데 이어 두 번째 호흡을 맞췄다. 정명훈 감독은 “전체 오페라를 통틀어 이처럼 휴머니즘을 완성도 있게 다룬 작품은 없다.”면서 “권력과 신분의 갈등, 피를 부르는 반목과 암투 속에서 비운의 통치자 시몬이 보여주는 휴머니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화해의 봄을 연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페라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는 물론 성악가, 합창단, 연기자, 무용수까지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호흡으로 움직이도록 조율해야 한다. 연습 과정 역시 5000피스 짜리 퍼즐을 맞추듯 복잡할 수밖에 없다. 정 감독은 “(국내 오페라의)기술적인 부분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면서 “드라마와 음악, 성악가, 무대, 프로덕션이 모두 한 방향을 보고 균형을 맞춰 가도록 조율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미 세계 무대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선보이는 ‘내가 사랑하는 악기’ 서울시향과 바리톤 고성현, 국립오페라단까지 국가대표 예술 명가들이 뭉쳐 최고의 무대를 보여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연출(마르코 간디니), 무대(이탈로 가르시), 조명(마르코 필리벡), 의상(시모나 모레시) 등 이탈리아 제작팀이 만들어낸 웅장한 무대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보카네그라 역은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콩쿠르와 나비부인 국제콩쿠르,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 국제콩쿠르 1위를 휩쓴 고성현 한양대 교수가 맡았다. 평일·토요일 오후 7시 30분, 일요일 오후 5시. 1만∼15만원. (02)586-5282.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강지원 좋은세상] 청와대 옮기고 ‘大日本’ 청산하자

    [강지원 좋은세상] 청와대 옮기고 ‘大日本’ 청산하자

    일본 대지진에 한국인도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 가슴에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일본, 그 일본을 돕겠다고 나서는 한국인들이 감동적이다. 그런데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맨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특이한 하나가 있다. 엉뚱하게도 청와대다. 요즘은 곧잘 잊고 지내지만,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일본 총독이 관저를 지어 쓰던 곳이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후 조선 지배를 위한 상징적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그것이 북악산 중턱의 총독 관저와 경복궁 안의 총독부 건물, 그 남쪽의 경성부청 건물이다. 그들은 이 건물들을 일본을 향해 일직선상에 세웠다. 총독 관저는 ‘대’(大) 자, 총독부 건물은 ‘일’(日) 자, 경성부청 건물은 ‘본’(本) 자가 되도록 지었다고 한다. 이 역사적 표상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지혜의 문제다. 아예 쓸어 버리고 없애는 방법도 있고 그것을 그대로 살려 놓되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청와대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광화문 거리를 계속 국가 상징 거리로 삼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우선 청와대부터 보자. 청와대는 이 나라의 국가원수가 집무하고 기거하는 공간이다. 대한민국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좁다고 해도 청와대 갈 자리가 그렇게 없어서 꼭 일본 총독 관저에 들어가 계속 써야만 하는가. 이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청와대를 그곳에서 빼내 새로운 둥지로 옮기고 지금의 청와대는 일제 총독 침략 사료관과 역대 대통령 사료관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일제 총독 침략 사료관에는 일제가 이 나라를 침략해 얼마나 악독한 짓을 저질렀는지, 특히 총독이란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낱낱이 인식할 수 있도록 꾸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현재 일제 당시의 총독 관저는 허물었다고 하나 그 자리가 그 자리임은 변함이 없다. 둘째로 경복궁 안의 총독부 건물이다. 이 건물 철거를 나는 반대했다. 당시 내 생각은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 위 총독 관저와 마찬가지로 침략 사료관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셋째로 경성부청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일제 침략 경성부 사료관이라야 제격이다. 이렇게 되면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공간에는 조선조 상반기의 권좌와 육조대로의 흔적이 ‘대일본’(大日本)의 흔적과 병존하게 된다. 특히 일제 침략의 흔적은 후세인들이 두고두고 그 죄악상을 되새기게 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복궁 앞 광화문 거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조선의 거리인가? 아니라고 본다. 경복궁이 아무리 조선 초기의 정궁이었다고 하더라도 임진왜란을 당해 소실된 후 사실상 폐허 상태에 놓였었다. 그후 270여년간 가장 많은 왕들이 거처하며 정궁으로 삼았던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다. 그러니 조선의 거리로는 창덕궁과 그 앞길이 더 적합하다. 그곳을 더욱 고풍스럽게 보존하고 가꿀 필요가 있다. 태종도 풍수가 나쁘다 하여 경복궁을 정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후 경복궁은 조선 상반기 정궁 역할과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쓸데없이 중건하여 그곳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또다시 일제에 침략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지금의 광화문 거리는 굳이 말하자면 조선 상반기와 ‘대일본’의 거리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 거리로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가. 광복 후 지도자들이 그곳에 다시 들어가 경무대, 중앙청, 서울시청으로 사용했으나 이는 짧은 생각이었다. 그곳은 일제 침략의 기록으로 남기고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그곳을 떴어야 했다. 이제 중앙정부의 대부분이 우여곡절 끝에 세종시로 간다고 한다. 그러면 청와대는 어디로 가야 할까. 온 국민이 새 마음으로 길지(吉地)를 찾아야 할 때다. 그동안 청와대 자리를 거쳐 간 일제 총독과 역대 대통령들의 족적을 살피더라도 이제 그 자리는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 일제시대 문서·판결문 2014년까지 한글 번역

    국가기록원은 2014년까지 일제강점기 주요 문서와 판결문, 건축도면을 모두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편찬한다고 3일 밝혔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약 2만 4000건의 독립운동 관련 일본어 판결문을 모두 번역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본적·주소, 죄명 등에 대한 검색 기능도 보완해 나라기록포털을 통해 서비스할 계획이다. 또 일제문서인 임정편과 광무편, 행형편, 미곡·산금편을 연차적으로 마무리해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 정책 연구에 필요한 조선총독부 문서 1만 4000권 전부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3·1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육필 회고록

    3·1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광복 뒤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김창준(1890~1959) 목사의 육필 회고록이 출간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일 기독교사회주의자인 김 목사의 증언이 담긴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를 출간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기독교계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 김 목사는 3·1운동 당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평안도 지역에 이를 배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 때문에 수감된 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으로 건너간 뒤 북한에 남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 때문에 1919~1921년 수감기간 동안 옥중에서 보낸 29통의 각종 편지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과 식모살이를 하면서 옥중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아내 김창숙에 대한 미안함 등이 묻어나 있다. 또 3·1운동 기념사를 위해 1946년 2월에 작성한 46장 분량의 원고 ‘기미운동 후 금일까지의 경위’에는 광복 이후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글 가운데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특히 이 원고에는 3·1운동 뒤 연행된 총독부 취조실에서 하루 세 차례씩 고문당하고 물도 없이 하루에 주먹밥 1개만 주는 바람에 10일 만에 18㎏이 빠져 버렸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열린세상] 3·1운동과 SNS/이창원 한성대 행정학 교수

    [열린세상] 3·1운동과 SNS/이창원 한성대 행정학 교수

    때는 92년 전 3월 1일, 조선의 민족대표 29인은 늦게 온 4명을 제외하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선언 후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고, 60여명의 일본 경찰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와서 우리 대표들을 남산 경무총감부와 현재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거사 당일 당연히 통신수단의 미비로 민족 대표들끼리의 연락도 쉽지 않았지만, 대표들과 학생 시위대와의 소통도 전혀 원활하지 않았다. 더욱이 시위학생들과의 원래 약속장소는 태화관과 300m 떨어진 탑골공원이어서, 민족대표 33인이 나타나지 않자 당황한 학생대표는 단독으로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 낭독까지 했다.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결의와 의지를 전파하는 큰 성과가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시계를 반대로 돌려 92년 전 3·1운동 당시 요즘과 같은 정보통신(IT) 기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존재했다면 3·1운동의 시위 양상과 그 결과 역시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도미노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역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92년 전 한반도에는 조직화된 반정부 세력이나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요즘의 튀니지·이집트·리비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3개 국가에서 시위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합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시위장면을 생중계하면서 부패 청산, 장기 독재정권 퇴진, 기본권 보장 같은 실질적인 주장을 전파하니 그 효과가 아주 절대적이다. 대학까지 나왔지만 취직이 안 돼 튀니지 인구 4만의 소도시 시드 부지드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단속으로 청과물을 압류당했고, 이를 항의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자 분신을 선택했다. 이러한 불행한 소식이 금방 SNS를 타고 가공할 실업률, 부정부패와 장기독재로 얼룩진 튀니지에서는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발전되고, 곧 23년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에 대한 전국적 정권퇴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인터넷을 차단하고, 비판적 인사들의 이메일과 SNS 계정을 해킹하면서까지 이러한 반정부 시위를 막고자 했지만, 도리어 우회 경로를 통해 페이스북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결국 시위 2개월 만인 지난 1월 15일 외국으로 야반도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튀니지의 인구가 1000만명 정도인데, 이중 페이스북 가입자가 무려 180만명 정도로, 18%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역시 페이스북 등을 통해 제안된 반정부 집회에 엄청난 시민들이 호응을 했고, 휴대전화·스마트폰·노트북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들은 집회 장소와 시위 상황 등을 SNS를 통해 생중계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 역시 인터넷 차단과 주요 시위 주도자에 대한 감금으로 대응했지만, 결국 2월 11일 헬기를 타고 휴양지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 고 말았다. 지식정보사회에서 무서운 것은 일반 대중이 총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디지털 카메라·노트북 등으로 무장한 대중이 이러한 정보를 다시 SNS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SNS가 민주화와 개방화에 기여만 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곡된 정보도 정말 효과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전 세계에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나 권력집단에 의한 정보 왜곡은 정말 두려운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정치인들이 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매달리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미지수다. 물론 정부나 정치인들의 정보 왜곡은 일반 시민들과 미디어의 개방적 네트워크에 의한 지속적 검증으로 막는 방법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SNS의 진정한 위력도 민주화와 개방화를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의식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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