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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서울시교육청, 초등 한자교육 중단하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

    [기고] 서울시교육청, 초등 한자교육 중단하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서울시교육청의 방침에 대해 한글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은 한자교육추진단을 만들어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교재 개발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올해 2학기부터 한자교육을 서울시교육청의 특색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해왔다. 국어 이해능력을 높이고 세대 간 언어장벽을 없애기 위해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며 국어·수학·과학·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를 중심으로 한자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글전용이 교과서에 정착된 지 40년. 한글은 배우기 쉽고 편리해 지식·정보통신시대에 세계에서 주목받는 으뜸글자다. 이제 와서 초등학교에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구시대적 발상은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자의 짐을 지워 가방을 무겁게 만드는 일이다. 서울시교육청의 한자교육 발상은 한자단체들의 주장과 그 목표가 거의 일치한다. 이들의 추진계획은 우선 현행 교육과정에서 허용하는 재량활동과 방과후 활동 등의 범위 안에서 한자교육을 강화하고 학부모들의 찬성 반응을 유도한 다음, 이를 정규교과에 반영하여 궁극적으로는 초·중·고등학교의 모든 교과서에 한자를 혼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이 한자교육을 주장하는 이유로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어사전(한자어 비중 69%)이다. 그러나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과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의 한자어 비율은 각각 52%와 57.3%이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생활언어는 이미 한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교’를 ‘學校’로 써야만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개념어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개념어도 한글로 가르쳐서 모양이나 모형을 보여주면 금방 이해한다. 간혹 어려운 개념어가 교과서에 있다 하더라도 설명이나 국어사전을 통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 모든 한자어를 한자로 가르쳐 배우는 것이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우리는 시간과 경제성을 따져 봐야 한다. ‘세대 간 언어 장벽을 없애기 위해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말도 어이없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자 실력 차이로 세대 간에 언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국어 교육=한자교육’이라는 등식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다른 아이가 한자를 배우니까 우리 아이도 가르쳐야 한다는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자극, 한자 사교육을 조장하여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쓰는 상용한자는 중·고등학교에서 한문시간에 1800자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으로 한자교육은 충분하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한자를 더 공부할 사람은 알아서 배운다. 서울시교육청은 우리 한글문화의 역사를 조선시대로 되돌리려는 서당식 한자교육 추진을 중단하고 창의적인 국어교육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에는 광장의 개념까지 포함됐다. 국가의례나 문화행사가 열리는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광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폭 58m, 길이 200m의 큰길이었다. 노면이 고르고 배수가 잘 됐으며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멋진 길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이나 개항 이후 방문한 백인 외교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수선전도, 조선경성도 등을 보면 육조거리의 관아는 위계에 따라 배치됐다. 의정부가 광화문 왼쪽 맨 앞자리인 현재의 광화문 열린 광장 자리에 있었고 이조, 한성부, 호조가 뒤를 이었다. 반대쪽 정부서울청사 쪽에는 삼군부,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차례로 터를 잡았다. 서울역사문화연구소 이상협 소장의 논문 ‘조선시대 육조거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의정부와 예조 등 모든 관아가 육조거리에 직각 방향으로 있으며 육조거리의 공간 구성과 관아 배치는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있는 공간 구성의 틀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조성 당시의 배치 구조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만 1900년대 전후에 촬영한 사진과 관아 그림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양쪽의 긴 담장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긴 행랑 때문에 육조를 흔히 육조장랑(六曹長廊)이라고도 지칭할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의 행정관청인 육조라는 명칭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거리 이름을 광화문통으로 바꿨다. 육조장랑은 뜯겨 나갔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 신청사를 짓자마자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 버리고 나서는 총독부 광장이라고 호칭했다. 어용 군중집회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하면서 군정청 광장이라고 불렸다. 정부 수립 기념식이 개최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육조거리로 복권되지 못하고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리를 광화문이나 광화문광장이라고 즐겨 부른다. 세종로라는 작위적 지명보다 현존 구조물인 광화문이 더 친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세 번이나 옮겨지고, 두 번이나 불탄 광화문 수난사가 마음속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1946년 해방 직후 구성된 지명위원회는 국가 중심가로의 역사성을 간과했다.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육조대로라는 지명을 원상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세종로가 100m의 도로폭을 갖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맥아더의 호언장담처럼 종전 후 서울도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기회를 잡았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은 한국인 1호 도시계획가 장훈씨가 1952년 고시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에서 광화문사거리~중앙청까지 500m 길이 도로의 폭을 기존 53m에서 100m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폭 12m에 길이 2750m이던 청계천을 폭 50m의 도로 부지로 확장해 오늘의 청계천을 있게 했다.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 숭례문광장 등 주요 광장 부지도 확보했다. 대담한 도시계획에 맞춰 건물과 토지를 매수하고 수용해야 했지만 서울시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원이 빗발치자 가건축 허가를 내줘 가건물을 짓도록 했다. 도로 확장은 1966~1979년 계획대로 실행했지만, 광장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종로사거리를 기점으로 반지름 150m의 광장이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과 광화문 우체국, 교보빌딩과 KT빌딩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건설부고시에 따라 광화문광장계획선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세종로와 태평로를 연결하는 광장계획선 안에 일부 건물이 건재하다. >>광화문의 오늘:주요 건물의 부침사 정부서울청사 옛 삼군부·예조 자리에… 개인건물은 4채뿐 광화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광화문시민열린마당·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국대사관·KT빌딩·교보빌딩·비각이 차례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와 별관·세종로공원·세종문화회관·삼보빌딩·현대해상화재·세광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폭 100m, 길이 500m의 광장구조 거리에 공공건물 5채와 대기업 건물 3채, 개인건물 4채, 문화재 1개, 공원 2곳뿐인 쾌적한 구조다. 해방 이후 육조거리를 복원하지 않은 탓에 건물들의 격렬한 부침(浮沈)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세종로를 폭 10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건물이 헐렸다. 먼저 1967년 의정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경기도청과 국제전신전화국 일부가 철거됐다. ‘서울 한복판에 웬 경기도청’이냐고 하겠지만, 옛 경기도청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성부(서울)를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화한 일제가 의정부를 헐어 내고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식민통치의 음모였다. 한 때 치안본부 등으로 쓰였다. 정부는 이 자리에 정부 제2종합청사를 지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고무된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 중심가로 구상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백지화됐다. 서울시는 이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해 광화문 시민열린 마당을 조성했다. 부지를 지킨 것은 잘한 일이지만 명칭을 의정부 광장이나 육조마당, 육조광장으로 붙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질책받을 일이다. 서울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벌어졌다. 이른바 ‘서울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외국 원조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민간 자본이 속속 건물을 지었다. 1961년 10월 완공된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쌍둥이 건물이다. 역사박물관은 이조, 미국대사관은 한성부 터다. 이 건물은 미국대외경제원조처(USOM)가 5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대고 필리핀에 건축을 의뢰해 지어졌다. 정부청사용 건물을 짓고도 280만 달러가 남자 건물을 한 채 더 지었는데 여기에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역사박물관 건물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건물로 사용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쓰이다가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쳐 지난해 448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전시 내용과 건물의 구조 등이 박물관으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KT 광화문 빌딩은 1981년 국제전신전화국 자리에 세워졌고 체신부와 함께 입주했다. 이후 잦은 정부 조직 개편으로 소관 부처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뀔 때마다 간판을 변경했다. 1998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체신청으로부터 분리, 공사가 된 이후 2002년 민영화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체신부가 갖고 있던 이 건물의 12~14층까지 3개 층의 소유권도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넘어갔다. 교보빌딩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가 등 전문가 그룹은 ‘짝퉁’ 건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일반인들은 건물 외관의 대형 걸개 글판과 시내 한복판 책방인 교보문고의 존재를 달가워한다. 왜 그렇까? 이 건물의 정체성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의 디자인을 빼닮았다는 이유다.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같은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디자인을 교보의 전국 지사 건물로 복제했다. 최근 한 건축 잡지는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리스트에 올렸다. 층수와 용도를 둘러싸고 뒤탈도 많았다. 설계 당시 40층을 계획했지만 23층에 그쳤다. 완공 단계에서 정부청사보다 낮은 17층 이하로 지으라고 행정 당국이 종용하자 당시 신용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완공 단계의 건물을 자르라면…. 내가 광화문 복판에서 배를 자르겠다”는 격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용도를 호텔로 변경하라고 권하자 “정부청사 앞에 술과 밥을 파는 숙박업소를 짓는다는 것은 나라 체면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거절한 사연도 자서전에 남아 있다. 교보빌딩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건물의 뼈대만 남겨 두고 건물 옆면 일본식 다다미 모양을 유리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짝퉁 논란에서 벗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서울청사는 1970년 옛 삼군부와 예조 자리에 들어섰고, 별관인 외교부청사는 2002년 옛 교통방송국 터에 자리 잡았다. 1966년에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전신저금보험관리국, 경찰기동대 순찰반이 헐렸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종로보건소와 광화문전화국이 철거됐다. 시민회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회관으로 지어졌지만 4·19혁명 이후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1961년 개관했다. 1972년 불타 버리는 바람에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했다. 세종문화회관 옆 17층짜리 현대해상화재빌딩은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976년 현대건설 본사로 지어져 1983년 현대건설이 계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특수를 누린 이 건물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국민당 당사로 썼다. 현대해상은 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기 직전인 1999년 이 건물을 현대건설로부터 인수했고, 2004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KT와 교보, 현대해상화재뿐이다. 그보다 엄청난 격랑을 헤치고 최고의 요지에 끝까지 살아남은 개인 빌딩 4채의 존재감이 더 빛난다. joo@seoul.co.kr
  • 근대적 ‘화장장 의식’ 일제가 강제로 만든 것 아시나요

    사라진 전통 일생의례 가운데 ‘꽁밥’ 풍속이란 게 있다. 꽁밥은 공밥(公食)을 뜻하는 것으로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행하던 일종의 성인식이다. 음력 칠월 백중 무렵에 마을 수령이 “아무개가 오늘부터 꽁밥을 먹게 되었소”라고 공표하는 의식을 통해 어린 농부는 어른 농부로 인정받았다. 꽁밥 의례는 백중날이 약화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이처럼 전통 일생의례는 생업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자연스레 사라진 경우도 있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근대화 사고의 영향과 식민지배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 강제적으로 소멸된 것들도 적지 않다. 가령 상여를 매던 일반 역군들에게 나눠 주던 떡 문화를 폐풍악습으로 규정하고, 조혼 풍습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 등이 그런 예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펴낸 ‘일생의례로 보는 근대 한국인의 삶’(채륜)은 격변과 굴욕의 시기이자 근대화의 시기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전통 일생의례, 즉 출산과 관·혼·상·제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정리한 책이다. 11명의 저자들은 분야별로 나눠 각 일생의례의 지속과 변용 과정을 알아보고, 이것이 근대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본격적으로 전통의례를 말살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1912년 총독부령으로 공포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이다. 일제는 국민건강과 위생, 근대화 등을 이유로 매장 풍습을 탄압하면서 근대적 화장장 의식을 강제적으로 주입했다. 1934년에는 상복 간소화와 상여소리금지, 혼인 연령(남자 20세, 여자 17세) 등을 규정한 의례준칙을 제정했다. 겉으로는 근대화를 ‘위한 의례형식의 합리적 변화를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피식민국에 대한 동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종원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근대적 사고의 하나인 합리적 사고가 대두되면서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생의례의 허례의식을 줄이고, 의례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일생의례가 변화했다”면서 “이는 합리적 사고에서 볼 때 전통의 일생의례를 악습 혹은 악풍으로 보는 사고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정책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이사지왕/안미현 논설위원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 주막집 주인 박문환은 주막을 늘리기 위해 뒤뜰을 팠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물이 나왔다. 경주경찰서의 일본인 순경 미야케 고조는 소문을 듣고 즉시 박문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땅 파기는 중단됐고 27일부터 30일까지 유물 수습 작업이 이뤄졌다. 4일 만의 ‘뚝딱 발굴’로도 유명한 금관총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1927년 11월 10일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도둑이 들었다. 금관만 남기고 허리띠, 귀걸이 등 순금 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구열이 쓴 ‘한국문화재비화’의 한 토막.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가져가기 거추장스러웠는지 금관만 무사했다. 천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느니, 무덤 속 물건을 갖고 있으면 변고가 생긴다느니 온갖 헛소문까지 퍼뜨렸지만 허사였다.” 심리전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서였다. 1928년 5월 20일, 도둑은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에 유물 보따리를 슬그머니 놓고 갔다. 그때 다시 찾은 허리띠가 지금의 국보 88호다. 지난 3일 그 금관총 출토유물(고리자루큰칼)에서 ‘이사지왕’(?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다. 정체는 아직 미스터리다. 내물왕 등 신라시대 여섯 마립간(왕)의 다른 이름이거나, 왕이 아닌 고위 귀족일지 모른다는 등 가설만 무성하다. 일본 규슈지방 출신 왕의 이름이 이사지라는 얘기도 있다. 만약 왕이라면 서기 503년 지증왕이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썼다는 종전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금관총의 주인이 여자라는 학설도 위협받고 있다. 이사지왕이 금관총 여주인의 남편일 수도 있다. 고고학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이사지왕이라는 네 글자를 앞에 두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양상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사지왕의 칼을 발굴하고도 거기 새겨진 글자를 찾아내는 데 무려 92년이 걸렸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돼 있다가 올해 초에야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사업’이 시작된 탓이다. 박물관 측은 해방 이후 우리가 발굴한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만도 손이 달려 일제강점기 발굴 유물에는 미처 눈을 돌리지 못했다고 해명한다. 그렇더라도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이왕지사,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기치로 내건 만큼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력과 예산 배정에 앞서 문화재 전문가들의 학자적 양심과 열정이 우선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또다른 이사지왕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안미현 논설위원 hyun@seoul.co.kr
  •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 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자가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신라무덤에서 왕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을 밝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미공개 자료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글씨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박물관 관계자는 “6세기 이전 마립간시대 신라 최고지배층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신라 무덤에서 신라의 왕 이름이 처음 확인됐다”고 말했다. 칼집 끝 금동 부분에 앞뒤로 ‘이사지왕’과 ‘십’(十), 칼집 상단에는 ‘이’(爾)가 각각 새겨졌다. 박물관 측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또 다른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이’, ‘팔’(八), ‘십’ 등의 글자가 확인됐다며 ‘이사지왕’ 명문의 일부라고 추정했다. 나머지 한 자루는 많이 부식돼 글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 박물관 연구진은 같은 이름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두 자루 이상 출토된 것으로 미뤄 소유주와 피장자가 일치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지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상고시대 왕 가운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앙박물관은 마립간인 내물왕이나 지증왕 중 한 사람의 다른 왕명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 측은 아울러 ‘이사지왕’이 당시 왕으로 불린 고위 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놨다. 경북 포항의 냉수리 신라비(503년)에 등장한 ‘차칠왕등’(此七王等)과 같은 기록에선 마립간이 아닌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금관총, 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해 온 연구는 모두 재검토돼야 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이요, 지리에서 뻗어오른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주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무학 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야 궁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선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악과 관악산이 불의 산이고, 목멱산(木覓山)에는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불이 나면 도시가 재앙에 빠진다고 예언했다.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5대를 잇기 전에 왕위찬탈의 비극이 생기고 200년 안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사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태조 당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개국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초토화됐다. 조선의 정궁(正宮)은 불탄 경복궁 대신 도읍 중앙에 입지한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 두 마리가 광화문 앞을 지켰다. 도시가 서쪽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운종가(종로)이다.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현재 지도로 보면 세종로 끝자락 비각에서 코스를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결론적으로 1막의 승자는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주축(主軸)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제2막】 일제… 총독부~시청~조선신궁 일직선 ‘大日本天’ 대못질 일제는 조선의 축선을 파괴하고 개조했다.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정기 말살정책이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5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을 파헤쳤다. 서울의 지명을 경성으로 바꾸더니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서울은 더는 도읍이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지방도시가 됐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세종로에서 육조거리를 지워버리고 황토마루(누루재)도 뭉개버린 그들은 새로운 축선을 고안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태평통)를 만들었다. 큰 길을 내면서 경운궁 담장을 텄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멋대로 바꿨다. 종묘와 창덕궁을 분리하고,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오락시설화했다. 남산에 조선 신궁을 만들면서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버렸다. 국사당은 태조와 무학 대사, 최영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총독부 신축은 축선 말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7만여평의 부지에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서울의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고자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때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중문 22개, 당 45개 등이 헐려 음식점, 별장 건물로 팔려나갔다. 겨우 철거 신세를 면한 광화문은 1927년 불길한 피난길에 올랐다. 경회루 등 전각 몇 채만 덩그러니 남은 당시 경복궁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축선에서 5.6도 각도를 튼 자리에 390칸짜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로 지었다. 일제가 축선을 튼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뿐더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상과제로 삼은 그들의 치밀한 민족정기 말살 시나리오를 간과한 어설픈 학설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신영지’(新營誌)에 “경복궁의 중심선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총독부를 광화문 중심선과 맞추면 중심선과 어긋나 위용을 살리지 못한다. 태평통의 도로 중심선으로 새 청사의 중심을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총독부~경성부청(서울시청)~남산 조선 신궁으로 쭉 뻗은 ‘일본의 새 축선’을 서울의 중심에 새기는 것이었다. 축선상에 있던 신축건물인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에 경성부청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40년 경성시가지 지도를 보면 총독관저(청와대)의 대(大)→총독부의 일(日)→경성부청의 본(本)→조선 신궁의 천(天)이 일직선상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4개의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문자모양으로 건축됐다. 이름하여 ‘대일본천’(大日本天)이라는 일본 축선의 완성이다. 【제3막】 광복 이후… 총독부 헐고 경복궁 복원해 역사 바로잡아 ‘서울의 축선=일본의 하늘’이라는 일제의 오싹한 음모는 청산되지 않았다. 개념 없는 위정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기와 맥을 끊고자 지은 총독부 청사에서 제헌 의회와 정부수립 기념식 그리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1939년 지어진 경복궁 후원 총독관저는 미 군정장관 관저, 경무대, 청와대로 대이어 사용됐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둥지를 튼 탓인지 54년 만인 1993년에야 헐렸다. 총독부는 1995년 헐리기 전까지 미 군정청, 정부 중앙청사로 이름을 바꿔 가며 권부로 군림했다. 1952년 서울도시재건계획이 수립됐지만, 우리의 축선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일제가 왜곡시킨 축을 확장·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뼈아팠다. 한국전쟁통에 훼손돼 석대만 남아 있던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다면서 1969년 아무 생각 없이 옛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일제가 5.6도 틀어놓은 방향,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10.9m, 북쪽으로 14.5m 북쪽으로 물러난 이른바 ‘일본의 축’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총독부를 철거하거나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을 원상회복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일제의 기를 누를 수 있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충무공 동상을 남산 신궁 터를 노려보는 자세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축선 복원은 1990년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5년 뒤 총독부가 철거되면서 닻을 올렸다. 총독부가 일본 축선상에 식재한 은행나무를 양옆으로 도려내고서 중앙분리대 자리에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에 두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2010년 8월이었다. 두 번이나 불타고 두 번이나 엉뚱한 자리에 놓였던 비운의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비틀린 축선의 출발점을 바로잡는 데 8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축선의 종착지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홀랑 불탔다. 축선 복원을 차일피일 미룬 우리의 업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숭례문은 지난 5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912년 일제의 황토마루 제거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축선전쟁 제3막도 끝이 났다. 세종로 축선복원이라는 고단한 여정도 10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식민잔재의 핵을 걷어내는 데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joo@seoul.co.kr ■축선이란 한 국가, 도시의 주축을 이루는 도로 혹은 건물. 우리나라의 축선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산이다.
  • 5주 여행 상품이 무려 11억원…‘궁극의 사파리’

    5주 여행 상품이 무려 11억원…‘궁극의 사파리’

    단 5주 짜리 여행 상품이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원)나 된다면 믿을 수 있을까? 특히 이 상품은 돈 쓸 일 없어 보이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사파리 여행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최근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여행사 ‘익스트로드너리 저니’(Extraordinary Journeys)가 돈을 주체 못하는 갑부들을 위한 이색적인 여행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총 36일 간의 일정으로 구성된 이 상품의 이름은 ‘밀리언 달러 사파리’(The Million Dollar Safari). 이 상품의 이용객들은 편안한 자가용 제트 비행기를 타고 5주 동안 케냐의 ‘마사이 마라’ ,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등 아프리카의 유명 국립공원 및 관광지를 고루 둘러볼 수 있다. 또한 과거 식민지 총독들이 관저로 쓰던 숙소 등 전망이 좋은 최고급 저택에서 묵으며 호화로운 5주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르완다에서 고릴라와 함께 트래킹하고 숙소 창문에서 기린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는 것은 이 패키지의 백미. 여행사 측은 “아프리카의 유명 관광지 모두를 최고의 시설에서 여행할 수 있는 궁극의 사파리”라면서 “이보다 더 좋은 사파리 상품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했다.  이 여행 상품의 가격은 4인 가족 기준 100만 달러로 아프리카 현지 공항에서 출발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힐링 창신동/정기홍 논설위원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하얀 나비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80~1990년대 대학가에서 불렀던 운동 가요 ‘사계’의 가사다. 이 노래는 재봉틀(미싱)을 돌리던 동대문시장 의류공장 어린 여공들의 고달픔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엔 인근 창신동 여공들의 ‘애환과 꿈’이 자리하고 있다. 1970~1980년대 서울 종로의 창신동은 골목의 쪽방에서 미싱을 돌리며 옷가지를 만들던 곳, CD 가게가 여공들의 발길을 잡던 곳, 겨울 골목길에 하얀 연탄이 뒹굴던 곳, 골목길 보름달에 ‘시다’의 그리움이 머물던 곳이었다. 지금도 창신동 채석장 바로 밑 봉제 골목에는 동대문 의류시장의 모태 같은 역할을 하면서 미싱은 돌아가고 있지만···. 창신동은 조선시대만 해도 도성에 인접해 유서깊은 동네였다. 낙산을 낀 마을에는 붉은 열매인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아 ‘홍숫골’ 또는 ‘홍수동’(紅樹洞)으로 불리며 도성 안 사대부의 ‘별저’(別邸)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실학 선구자인 이수광도 경치 좋은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대에 들어서는 이곳의 돌을 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역(현 서울역), 경성부청(서울시청)을 지었다. 근자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과 화백 박수근이 살면서 인연을 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 법인가. 동대문시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던 이곳은 1970년대 들어 봉제공장이 들어서면서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이때부터 창신동은 여공의 ‘꿈’이 영그는 대표적인 쪽방촌으로 각인된다. 지금은 이곳 3000여개 봉제공장에서 생산된 의류가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대표되는 동대문 시장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40년 전 그날의 창신동 여공들이 어엿한 봉제공장의 안주인으로 들어앉은 사례도 많다. 창신동을 아는 이들은 말한다. 쪽방의 재봉틀 소리를 뒤로하고 낙산에 올라 본 사람만이 창신동의 골목 이야기를 안다고. 낙산은 창신동·숭인동 달동네를 품고서, 저 너머 동대문 시장의 화려한 불빛을 주시하고 있다. 이처럼 낙산은 쪽방촌의 애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요즘 창신동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열고 있는 창신동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한 ‘Made in 창신동’전이 연일 입소문을 타고 있다. 최근에는 창신·숭인지역 뉴타운 개발지구가 해제되면서 창신동을 ‘힐링 골목’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봉제 골목과 백남준·박수근이 만날 날이 언제쯤일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대한제국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서울 중구는 지난해 10월부터 추진한 사적 제157호 환구단 복원 공사를 마치고 10일부터 개방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헐린 환구단엔 총독부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지금은 하늘과 땅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돌북 3개, 석조 정문만 남아 있다. 특히 환구단에 설치됐던 석등은 한국미술사에 등장하지 않은 이질적 형태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원 장식용으로 널리 보급된 일본식 석등과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일본식 정원으로 논란을 빚은 잔디 1340㎡를 들어내고 전통 방식에 따라 마당 1462㎡ 전체를 마사토로 포장했다. 배수가 잘 되도록 집수정 7곳과 배수관로 110m도 설치했다. 석등 21개와 가로등, 조형수 7그루를 철거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주변에 흩어졌던 난간석과 지대석도 한데 모았다. 황궁우의 파손된 부분은 전통 돌로 다시 깔았다. 환구단은 오전 9시~오후 9시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된다. 황궁우 내부는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 운영하는 중구 문화유산탐방,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볼 수 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1848년 4월 런던. 한 여인이 20분째 진창 같은 부두에 무릎을 꿇고 있다. 비까지 내려 드레스가 젖어들자 여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추위가 아니라 치욕에 떤 그녀는 빅토리아 영국 여왕. 여왕이 기다린 것은 중국의 장갑기선 기영호였다. 기영호를 타고 영국의 심장부에 들이닥친 중국 총독은 영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의 포고문을 감정 없이 읽어 내려갔다. 여왕은 끝내 혼절했다. 이후 일생을 버킹엄궁전에 갇힌 그녀는 1901년 중국 제국 이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로 사라졌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는 이런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반대로 흘렀다. 아편전쟁(1840~1842) 당시 중국은 양쯔강 입구로 포를 쏘며 쳐들어온 영국 함대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가 이토록 황당하게 역사를 뒤집은 이유는 뭘까. 1008쪽에 걸쳐 왜 서양이 세상을 지배했는지 설파하는 저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미래다. “사람들이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궁극적으로는 이 물음은 ‘22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된다’는 그의 예견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된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굴욕을 안긴 픽션은 과거 동서양의 주도권 경쟁과 앞으로의 운명을 파고드는 대장정에 나서기 전 독자의 시선을 잡아채기 위한 극적 장치인 셈이다. 그간 서구 학자들은 서양의 우세 배경에 대해 방대한 이론을 쏟아냈다. 하나는 예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변경 불가능한 결정적인 요인이 존재해 산업혁명이 서양에서 일어났다는 장기고착 이론. 또 하나는 우연한 사건으로 서양이 패권을 잡게 됐다는 단기우연 이론이다. 하지만 둘 다 서양 지배론의 원인을 캐기엔 역부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550년부터 1775년까지 1000년 이상 서양을 앞질렀다는 점, 산업혁명은 무역·금융으로 축적된 서유럽의 경제력과 과학혁명이 낳은 기술력, 이민족 침입 우려가 없는 지리적 이점 등이 맞물리며 잉태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원전 1만 4000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 지난 1만 6000년의 동서양 역사 속에서 드러난 흥망성쇠를, 직접 고안해낸 분석틀 ‘사회발전지수’로 해부한다. 전쟁 수행 능력, 정보 기술, 조직화·도시성, 에너지 획득이 주요 가늠자로 쓰였다. ‘서양의 지배/1773~2103/여기에 편히 잠들다.’ 이 충격적인 문구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구두쇠 스크루지가 미래에서 목격한 그의 묘비명을 본뜬 것. 동양과 서양의 사회 발전이 20세기와 같은 속도로 계속되면 동양이 늦어도 2103년엔 서양을 앞설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을 압축한 한 줄이다. 그러나 자신의 묘비명을 보여준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에게 “제발, 이 묘비명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해주시오!”라던 스크루지의 절박한 애원처럼, 주인공 자리를 뺏기는 서구의 불안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급증하는 중국의 군비 지출 등을 들며 피와 살이 튀었던 과거 서양의 지배기보다 동양의 부상이 유혈 사태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나 책 전체에 스민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물러나야 하는 자의 미련’이 엿보인다. 4만 2000원.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반항하는 그들보다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1919년 3월 2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는 낯선 글이 실렸다. 전날 조선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모두 5차례나 이어졌다.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도 실렸다. “조선과 조선민족에게 느끼는, 누를 수 없는 애정은 예술에서 받은 충동에 의한 것”이란 고백이었다. 글쓴이는 30대의 젊은 미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조선의 공예를 조선인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운 뒤 시야를 가린다며 광화문을 없애려 하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해 철거를 막았고,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세상을 떠난 그에게 한국정부는 1984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야나기에 대한 평가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갈렸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냐, ‘양의 탈을 쓴 일제의 조력자’이냐의 논란이다. 1940년을 전후해 일제에 협력하는 그의 글과 행동이 잇따랐던 탓이다. 그의 아버지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중장 출신. 작고한 최하림 시인은 야나기를 가리켜 “(조선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그 애정을 올바르게 활용할 사상은 없었다”고 꼬집었다. 조선인을 수동적인 민족으로 도식화하고,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부른 것을 놓고도 비판했다. 지난 25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막 올린 ‘야나기 무네요시’전은 이런 점에서 다분히 ‘논쟁적’인 전시다. 아베 총리 등 일본 지도층의 식민침략을 정당화하는 언행이 잇따르는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큰 기획전이다. 류지연 덕수궁관 학예연구사는 “야나기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수년째 기획만 하다가 숙제처럼 미뤄놓은 일을 펼쳐 놨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작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가 수집한 공예품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7월 21일까지 계속된다. ‘논쟁적’ 예술가의 수집품을 얼마나 깊이, 어떤 시각으로 감상하느냐는 관람객의 몫이 됐다. ‘민예(民藝)’를 미술 장르로 끌어올린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조선 공예와 미술, 문학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미학자. 그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건 분명하다. 1부 ‘서유럽 근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선 도예가 버나드 리치와 교류하며 시야를 넓힌 그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에 심취하고 종합예술지 ‘시라카바’를 창간해 조선예술계에 영향을 주던 당시 야나기의 수집품이 공개된다. 2부 ‘조선과의 만남’은 소박한 조선 공예품들로 채워졌다. 개다리소반과 담배상자, 화각화문빗, 철사운죽문항아리 등이 나왔다. 조선의 막사발을 두고 ‘무기교의 기교’라 부르던 야나기가 소장했던 조선백자들이 볼 만하다. 야나기는 27세 때 처음 떠난 조선여행에서 백자를 접한 뒤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너왔다. 3부 ‘주변에 대한 관심과 민예’에선 일본 오키나와, 중국, 만주로 확장된 작가의 관심 영역을 엿볼 수 있다. 민예론 정립의 단초가 된 일본의 목조불상 허공장보살상과 오키나와 지방의 직물 문양 등이 전시된다. 야나기는 ‘일상 공예품에서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예품을 수집해 왔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가 일본 도쿄에 설립한 일본민예관에서 옮겨온 139점이 선보인다. 한국 관련 전시물은 30점 안팎. 야나기는 평생 2만여점의 작품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 2000여점이 한국 관련 작품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한국 천주교가 혼란에 빠졌다. 최근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함세웅(왼쪽) 신부가 오스발도 파딜랴(오른쪽) 주한교황청대사를 정색하고 비판한 글 때문이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공식적인 대응은 하고 있지 않지만 파문이 확산될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함 신부가 사목자 소식지 ‘함께하는 사목’에 사제들로부터 전달받았다며 기고 형식으로 공개한 편지는 충격적이다. 현 교황대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는 게 핵심이다. “교황대사가 총독 같은 모습으로 한국 가톨릭교회를 쥐락펴락하고 한국 주교들을 하인대하듯 해 왔다고 한다”/“한국에 부임한 후 (모국인)필리핀에 너무 자주 오가고, 한국의 주교들과 실업인, 신자들을 불러 식사 대접하는 것을 기회로 돈푼깨나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주교 임명제청권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면서 교황님의 뜻을 왜곡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범하고 있다”/“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서울성모병원을 안방 드나들듯 한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단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후폭풍을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문제를 공론화한 주인공인 함 신부와, 도마에 오른 교황대사의 위상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함 신부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사회와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사제로 유명하다. 그런 사제가 교황대사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으니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교황대사라면 주재국 교회의 상황을 교황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가톨릭 사제이자 외교관으로, 주재국에서는 추기경을 제외한 주교들 중 서열이 가장 높다. 함 신부는 기고 글에서 “중견 사제들의 순수한 뜻과 고뇌가 가득 담긴 글을 받고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짓눌린다”며 “그들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지혜로운 지적과 호소가 교회 요로에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뜻에 동참해 사제들 모두에게, 지금의 어두움을 함께 보고, 성령의 빛이 내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개선할 것을 다짐하며 간청한다”고 호소했다. 한편 파딜랴 교황대사는 1966년 필리핀 세부 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외교관 양성센터인 교황청 교회 학술원을 나와 1972년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일했다. 파나마,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코스타리카 주재 대사를 거쳐 2008년 4월 주한 대사에 임명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될성부른 창작 뮤지컬 골라주세요

    될성부른 창작 뮤지컬 골라주세요

    서울시뮤지컬단은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힘내라, 우리 뮤지컬’을 선보인다. ‘2013 창작뮤지컬 기획개발 공모’에서 선정된 창작 뮤지컬 3편을 제작단계별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19일까지 오르는 쥬크박스 뮤지컬 ‘문나이트’는 정식 공연을 올리기 전에 관객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마련하는 ‘트라이 아웃’ 공연이다. 1990년대 대중문화 전성기에 춤꾼들의 아지트이자 춤의 메카였던 서울 이태원의 나이트클럽 문나이트를 배경으로 당시 유행하던 음악과 춤을 재연했다. KBS ‘유머1번지’, ‘쇼비디오자키’ 등을 만든 이상훈 PD가 연출을 맡고, 비보이 40여명이 출연해 1990년대 문화와 추억을 전한다. 개그맨 심현섭이 나이트클럽 디스크 자키로 변신해 코믹 연기를 펼친다. 이어지는 ‘경성 딴싱퀸’(23~25일)은 1936년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다. 일본이 경성에서 사교댄스를 금지하고 댄스홀을 폐쇄하자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조선총독부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극단 아리랑이 내놓은 연극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2009)의 뮤지컬 버전이다. 주인공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존심을 건 댄스 대회를 준비하며 춤을 통해 사랑과 우정, 조국을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음악극 ‘십이야’, 연극 ‘뿔’로 주목받은 연출가 김관과 이민형이 함께 연출한 이 작품은 쇼케이스 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헤이, 미스터 디제이’(28~29일)는 낭독극 형식이다. 납치사건이 있던 1973년과 2009년을 오가면서 ‘작전명 KT’의 비밀을 풀어낸다. 당시 정치적 이유로 금지곡이던 한대수의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이장희의 ‘그건 너’, 양희은의 ‘그날’,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으로 시대상을 전한다. 개그맨 김늘메가 출연한다. 서울뮤지컬단은 이번 공연을 통해 전문가와 관객의 의견을 수렴하고 작품을 보완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의 대표 레퍼토리의 가능성도 점쳐볼 계획이다. 각 공연 1만원, 모든 작품 패키지 2만 4000원. (02)399-1114.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종교 플러스]

    전국 사찰 금석문 일제 조사 불교중앙박물관은 탁본자료 확보를 위해 전국의 사찰 등에 산재한 금석문 일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 작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이후 전국 대상 사업으로는 최초. 문화재청의 용역을 받아 앞으로 15년간 매년 2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진행한다. 큰 스님 27명과 나눈 대화 책으로 경향신문 종교 담당기자 김석종(55)씨가 한국불교의 큰 스님 27명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 ‘마음살림’(위즈덤경향 펴냄)을 냈다. 고행하다시피 일일이 발품을 팔아 건져 올린 삶의 지혜와 교훈을 특유의 감칠맛 나는 글 솜씨로 정리했다. 책 속 스님들은 대부분 법랍 60년을 넘긴 고승. 삶 자체로, 수행으로, 때로는 죽음으로 가르치고 진리를 보여준 스님들의 맑은 이야기가 그득하다. 1만 4800원. 목회자 소득세 신고 지원 활동 개신교 교회재정건강성운동은 목회자 소득세 신고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원 대상은 5월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 중 소속 목회자들의 2012년 소득세 신고를 원하는 교회와 개별 목회자다. 오는 20일까지 서류를 접수 받아 종합소득세 신고기간인 27∼29일 신고를 하게 된다.(02) 741-2793.
  •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황상익(61) 교수가 최근 펴낸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펴냄)은 본문만 842쪽이다. ‘목침용 책’이라 할 만한 두께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시작되는 조선의 근대 의료 진행상황을 이 책을 통해 완전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지적 호기심은 다른 데서 나온다. 자료가 부족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의료뿐 아니라 개항기의 모습을 어떻게 채워나갈까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만난 황 교수는 이 책을 집필한 의도에 대해 “한국에 근대의학이 도입되는 과정을 지난 20여년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라며 “이 책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1910~45년), 해방 이후의 의료까지 130여년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생리학 연구를 하다가 1994년 관심사가 의료사(醫療史)로 바뀌면서 소속도 의사학교실로 변경했다. 황 교수는 “한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발전은 사람의 몸에 투영될 수밖에 없고, 건강의 변화를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면서 “일제 식민지시대와 관련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연구소’ 중심의 경제학자와 그렇지 않았다는 허태열 충남대 교수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논란의 진위를 밝히는데, 몸의 역사, 보건의료의 역사가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근대적 변화를 조선사람의 몸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질병의 발생과 치료, 극복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명의 변화 등을 통해서다. 그는 “흔히 일제식민지가 시작되는 1910년 이전에는 조선의료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일제강점기인 36년 동안 생활의 개선, 의료의 발전, 수명의 연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근대의료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자료를 보자. 1909년 펴낸 ‘한국위생 일반’과 1928년 출판한 ‘일본제국 통계전서’ 자료에 나온 인구 10만 명당 환자 및 사망자를 보정해서 계산해보면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인구 10만명 당 전염병 환자는 재한 일본인 1001명, 재일 일본인 181명, 한국인 23명으로 나온다. 전염병 사망자는 재한 일본인 270명, 재일 일본인 49명, 한국인 7명이다. 명확한 사실은 같은 일본인이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경우에 비해 환자와 사망자가 5배 이상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환자와 사망자 수는 왜 그리 적을까. 게다가 이런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된다. 한국인은 ‘19세기 전염병의 챔피언’ 호열자(虎列刺: 호랑이가 살점을 찍어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는 의미로 콜레라의 일본식 음역어)나, 장티푸스, 두창(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에 천하무적이었다는 의미인가? 이보다는 한국인들이 전염병 신고가 매우 낮고 조사에 극히 비협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479~481쪽). 황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의학·보건상의 혜택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나 그 혜택을 조선인들이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큰 차이가 있다”면서 “근대적 의사는 늘어났지만,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의 한의사를 ‘의생’으로 격하시키고 새로운 한의사의 진입을 억제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의료 소외는 심각했고, 보건은 악화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도립의원들을 세우고 시설을 개선했지만, 조선인들은 거의 이용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 수가 극히 낮은 진짜 이유는 근대적 의료혜택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연두를 극복하기 위한 선구자들로 지석영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고 국가에서는 우두의사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학당에서 의사 양성이란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02년에는 지석영의 건의로 1899년에 세운 의학교에서 19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1899년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대한제국 근대적 의사(서양식 의사) 1호인 김익남도 탄생했다. 근대적 의학발전을 정부와 선각자들이 주도하고, 민중이 참여했던 것이다. 황 교수는 “근대를 규정할 만한 충분한 연구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근대화 식민지론이나 근대화 맹아론을 주장하는 양자 모두 문제다. 그 당시에 선각자들을 찬미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대 역할에 맞게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중원의 적통을 누가 이었느냐를 두고 서울대 의과대학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다투는 과정, 최초의 종두술 시술자가 정약용이냐 지석영이냐, 또는 이완용이 1909년 피습당할 당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느냐와 같은 흥미로운 설명은 이 책에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사진은 1968년 3월 15일 거행된 광화문 복원 기공식 장면이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옛 중앙청 건물이 보이고 건물 벽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글씨가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광화문은 전쟁과 침략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된 이 문이 광화문이라 명명된 것은 1425년 세종 7년 때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서였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270여년간 방치되었다. 그랬다가 1864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광화문을 다시 세웠다. 광화문은 다시 수난을 겪는다. 한일병합 후 일제는 1927년 궁궐 건물들을 헐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존재 가치를 상실시켰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동안에 광화문은 폭격을 받아 목조 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이를 1968년에 다시 건립하게 된 것이다. 석축은 그대로 썼지만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필체로 쓰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총독부 건물의 축에 맞춰 짓는 등 겉모양만 복원했다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를 바로잡고자 2006년 12월부터 1960년대에 세운 광화문을 다시 뜯어 복원 공사를 해 2010년 8월 비로소 경복궁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광화문 편액(扁額)도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있으면서 서사관(書寫官)으로서 편액을 쓴 임태영 장군의 서체를 되살렸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열린세상] 평성 25년 경성중학/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열린세상] 평성 25년 경성중학/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널리 회자되는 김춘수 시인의 이 시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견 아름다운 상념을 자아내는 이 시구가 정치적으로는 무시무시한 발언이 된다. 알튀세는 ‘호명’이야말로 개인을 이데올로기에 예속시키는 행위로 보았고, 사이드는 ‘명명’을 제국주의가 식민지 타자를 자신의 체계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시인은 살벌한 세상 이치를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인공은 외로운 섬에서 원주민 하인을 얻는다. 분명 제 이름이 있을 이 원주민에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단지 금요일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로빈슨은 또 이 원주민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명명과 언어 침탈, 개종 등. 사이드는 제국주의 전성기에 형성된 서양 고전 명작들이 이처럼 당시 타자에 대한 서양의 식민화 방식을 은연중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거에 일제는 이러한 서양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하여 우리에게 실천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강제 교육,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이 그것이고 그 후유증과 상흔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명명과 관련된 한 예로 한국의 꽃 이름과 나무 이름들을 보자. 아름답고 토착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우리의 식물 이름과는 별도로 학명에는 상당수가 ‘Nakai’(나카이)를 비롯한 일본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식물학자에 의해 한국의 식물들이 마치 처음 출현한 양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린네의 명명법에 따라 첫 발견자인 일본인 학자의 이름이 한국의 대부분 식물 이름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양학에서 이러한 현상은 심각하다. 동양학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 제국학문이 만들어 낸 용어이지만 근대 이후 동양은 일본이 대변해 왔고, 일본의 동양학에 의해 동양이 설명되어 왔으며, 특히 서양의 동양학은 일본 동양학의 기초 위에 성립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동양학의 고전인 라이샤워· 페어뱅크의 공저 ‘동양문화사’에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그대로 실리고 세계의 모든 지도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온 것은 이런 실정을 보여주는 극히 작은 예에 불과하다. 한편 오늘의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도리어 과거 일제의 만행을 호도하고 나아가 정당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동양을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명분 있는 전쟁이었으며, 한국 등에 대한 식민 지배가 오히려 근대화를 위해 기여했다고 강변한다. 그리하여 ‘침략’이 아니라 ‘진출’이며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던 일로 삭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후안무치한 데다가 적반하장 격인 이러한 언동을 효과적으로 징치(懲治)할 수단이 없는 우리의 현실이 딱하고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지만 최근 서울의 한복판에서 더욱 아연한 일을 겪었다. 며칠 전 우연히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경희궁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곳은 조선의 왕궁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해체되어 일본인 학생들만 다니는 경성중학이 되었고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로 새로 태어났다가 학교가 이전하면서 예전의 왕궁 경희궁으로 복원된 곳이다. 궁 앞의 안내문을 읽다가 어이없는 구절을 발견했다. 경희궁의 연혁에서 ‘한일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노라고 쓰여 있지만 ‘한일병합’이란 단어에서 강제 병합의 기미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병합이란 말 자체가 일제의 용어), 혹시나 해서 그 밑에 병기한 중국어 설명을 보았더니 실로 가관이었다. ‘한일 양국이 한일합병 조약에 서명하고 이 궁전들은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韓日兩國簽署韓日合倂條約, 這些宮殿都歸朝鮮總督府所有)는 것이다. 한국이 합법적으로 병합되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의 망언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이 안내문의 작성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그곳은 경희궁이 아니라 여전히 평성(平成) 25년의 경성중학이었다. 한국이 합법적으로 병합되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경희궁 안내문의 작성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그곳은 여전히 평성(平成) 25년의 경성중학이었다.
  • “3·1운동, 정치운동 변질돼 참여 안해”

    “근본적으로 인간 최남선이가 참회를 한다는 것은 내 자신으로 이론의 곤란한 문제이올시다. 참회할 만한 대역도 대죄도 범하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행동의 전체가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948년 3월 5일자 ‘평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후회의 심경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육당은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설에 입각해 단군과 초대 일왕인 신무가 형제라는 학설을 제시하거나, 일본제국주의의 괴뢰국인 만주 건국대 교수로 1938년 취임하기도 했다. 육당은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거나 혹은 숨기려 하지 않는다”면서 “나의 저지른 정도의 죄과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인정 반성하며 참회도 할 때가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육당은 인터뷰 이듬해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돼 수감생활을 했다. 학병 권유에 대해서는 “만약 그날(해방)이 오게 되면 실권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으니 젊은 청년 다수를 학병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학병을 찬성했다”면서 학병 지원자가 적어 ‘총독에 대하여 면목이 없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육당은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체득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문안을 기초한 것인데 그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내 의도와는 달리 진전됐다”면서 “거족적 민족윤리운동에 기독교나 천도교가 독점하며 중심이 되는 감이 농후하여 가기에 서명을 거절했다”고 해명했다. 육당은 “문안은 내가 기초하였으나 이 운동에는 나의 주관대로 참가한 것이지 결코 그 운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라 설명했다. 인터뷰는 김종욱 공연예술자료연구사가 발굴했고, 계간 ‘연인’ 봄호에 실렸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민국 진보의 씨앗 뿌린 조봉암의 삶

    1959년 7월 31일.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시신을 받으러 갔더니 형무소 측은 각서를 쓰라고 했다. “인수 하루 만에 매장하고 조문받지 않고 묘비를 세우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장례를 그리 치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 답은 이랬다. “국법에 따라 처형된 형사자이므로 조선총독부령 제120호를 적용한다.” 이 법령은 혹시 독립 만세 시위라도 벌어질까 봐 “일제가 순국한 독립투사의 공개 장례를 금지하고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던 규정”이었다. 식민지의 법령을 적용하다니, 한국의 나라 꼴이 우습다. ‘조봉암 평전’(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은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건국과 부국의 역사’ 깃발이 휘날리는 시대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승만과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봉암의 언변에 이승만은 탄복하기도 했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시키기도 했다.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이후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받는 토지 개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국회부의장이었던 조봉암은 국회에 남아 나라의 서류들부터 피난시키는 데 열중하느라 가족을 챙기지 못해 부인 김조이 여사가 납북됐다. 반면 북진통일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독려 방송을 틀어 놓고 수원으로 몰래 도주했다. 거기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의 악재가 연이어 터지자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그 유명한 사사오입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조봉암은 이때 발췌개헌안에 찬성했다. 대체 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판국에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계속된다면 원조를 끊고 유엔군이 신탁통치하겠다고 미국이 통보해서다. 어떻게 얻은 독립이던가. 권력에 눈먼 이승만은 양보할 리 없으니 자기가 물러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결심한 것이 독자 정당 결성과 대선 출마였다. 이승만은 엄청난 부정 선거를 동원해 당선됐다. 당선된 이승만은 감히 ‘국부’의 코털을 건드린 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저자는 충실한 문헌 조사와 현지 답사, 유족 및 친인척, 생존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봉암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민족주의자들의 초상,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과의 협력과 갈등 관계,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과정, 정치 행보에 발목 잡히기도 했던 여자 문제, 일제 말 국방성금을 둘러싼 친일 행위 논란의 진실, 토지 개혁을 입안하는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2만 2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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