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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한국 천주교가 혼란에 빠졌다. 최근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함세웅(왼쪽) 신부가 오스발도 파딜랴(오른쪽) 주한교황청대사를 정색하고 비판한 글 때문이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공식적인 대응은 하고 있지 않지만 파문이 확산될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함 신부가 사목자 소식지 ‘함께하는 사목’에 사제들로부터 전달받았다며 기고 형식으로 공개한 편지는 충격적이다. 현 교황대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는 게 핵심이다. “교황대사가 총독 같은 모습으로 한국 가톨릭교회를 쥐락펴락하고 한국 주교들을 하인대하듯 해 왔다고 한다”/“한국에 부임한 후 (모국인)필리핀에 너무 자주 오가고, 한국의 주교들과 실업인, 신자들을 불러 식사 대접하는 것을 기회로 돈푼깨나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주교 임명제청권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면서 교황님의 뜻을 왜곡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범하고 있다”/“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서울성모병원을 안방 드나들듯 한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단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후폭풍을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문제를 공론화한 주인공인 함 신부와, 도마에 오른 교황대사의 위상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함 신부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사회와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사제로 유명하다. 그런 사제가 교황대사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으니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교황대사라면 주재국 교회의 상황을 교황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가톨릭 사제이자 외교관으로, 주재국에서는 추기경을 제외한 주교들 중 서열이 가장 높다. 함 신부는 기고 글에서 “중견 사제들의 순수한 뜻과 고뇌가 가득 담긴 글을 받고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짓눌린다”며 “그들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지혜로운 지적과 호소가 교회 요로에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뜻에 동참해 사제들 모두에게, 지금의 어두움을 함께 보고, 성령의 빛이 내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개선할 것을 다짐하며 간청한다”고 호소했다. 한편 파딜랴 교황대사는 1966년 필리핀 세부 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외교관 양성센터인 교황청 교회 학술원을 나와 1972년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일했다. 파나마,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코스타리카 주재 대사를 거쳐 2008년 4월 주한 대사에 임명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황상익(61) 교수가 최근 펴낸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펴냄)은 본문만 842쪽이다. ‘목침용 책’이라 할 만한 두께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시작되는 조선의 근대 의료 진행상황을 이 책을 통해 완전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지적 호기심은 다른 데서 나온다. 자료가 부족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의료뿐 아니라 개항기의 모습을 어떻게 채워나갈까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만난 황 교수는 이 책을 집필한 의도에 대해 “한국에 근대의학이 도입되는 과정을 지난 20여년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라며 “이 책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1910~45년), 해방 이후의 의료까지 130여년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생리학 연구를 하다가 1994년 관심사가 의료사(醫療史)로 바뀌면서 소속도 의사학교실로 변경했다. 황 교수는 “한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발전은 사람의 몸에 투영될 수밖에 없고, 건강의 변화를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면서 “일제 식민지시대와 관련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연구소’ 중심의 경제학자와 그렇지 않았다는 허태열 충남대 교수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논란의 진위를 밝히는데, 몸의 역사, 보건의료의 역사가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근대적 변화를 조선사람의 몸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질병의 발생과 치료, 극복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명의 변화 등을 통해서다. 그는 “흔히 일제식민지가 시작되는 1910년 이전에는 조선의료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일제강점기인 36년 동안 생활의 개선, 의료의 발전, 수명의 연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근대의료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자료를 보자. 1909년 펴낸 ‘한국위생 일반’과 1928년 출판한 ‘일본제국 통계전서’ 자료에 나온 인구 10만 명당 환자 및 사망자를 보정해서 계산해보면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인구 10만명 당 전염병 환자는 재한 일본인 1001명, 재일 일본인 181명, 한국인 23명으로 나온다. 전염병 사망자는 재한 일본인 270명, 재일 일본인 49명, 한국인 7명이다. 명확한 사실은 같은 일본인이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경우에 비해 환자와 사망자가 5배 이상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환자와 사망자 수는 왜 그리 적을까. 게다가 이런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된다. 한국인은 ‘19세기 전염병의 챔피언’ 호열자(虎列刺: 호랑이가 살점을 찍어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는 의미로 콜레라의 일본식 음역어)나, 장티푸스, 두창(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에 천하무적이었다는 의미인가? 이보다는 한국인들이 전염병 신고가 매우 낮고 조사에 극히 비협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479~481쪽). 황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의학·보건상의 혜택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나 그 혜택을 조선인들이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큰 차이가 있다”면서 “근대적 의사는 늘어났지만,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의 한의사를 ‘의생’으로 격하시키고 새로운 한의사의 진입을 억제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의료 소외는 심각했고, 보건은 악화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도립의원들을 세우고 시설을 개선했지만, 조선인들은 거의 이용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 수가 극히 낮은 진짜 이유는 근대적 의료혜택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연두를 극복하기 위한 선구자들로 지석영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고 국가에서는 우두의사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학당에서 의사 양성이란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02년에는 지석영의 건의로 1899년에 세운 의학교에서 19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1899년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대한제국 근대적 의사(서양식 의사) 1호인 김익남도 탄생했다. 근대적 의학발전을 정부와 선각자들이 주도하고, 민중이 참여했던 것이다. 황 교수는 “근대를 규정할 만한 충분한 연구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근대화 식민지론이나 근대화 맹아론을 주장하는 양자 모두 문제다. 그 당시에 선각자들을 찬미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대 역할에 맞게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중원의 적통을 누가 이었느냐를 두고 서울대 의과대학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다투는 과정, 최초의 종두술 시술자가 정약용이냐 지석영이냐, 또는 이완용이 1909년 피습당할 당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느냐와 같은 흥미로운 설명은 이 책에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종교 플러스]

    전국 사찰 금석문 일제 조사 불교중앙박물관은 탁본자료 확보를 위해 전국의 사찰 등에 산재한 금석문 일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 작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이후 전국 대상 사업으로는 최초. 문화재청의 용역을 받아 앞으로 15년간 매년 2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진행한다. 큰 스님 27명과 나눈 대화 책으로 경향신문 종교 담당기자 김석종(55)씨가 한국불교의 큰 스님 27명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 ‘마음살림’(위즈덤경향 펴냄)을 냈다. 고행하다시피 일일이 발품을 팔아 건져 올린 삶의 지혜와 교훈을 특유의 감칠맛 나는 글 솜씨로 정리했다. 책 속 스님들은 대부분 법랍 60년을 넘긴 고승. 삶 자체로, 수행으로, 때로는 죽음으로 가르치고 진리를 보여준 스님들의 맑은 이야기가 그득하다. 1만 4800원. 목회자 소득세 신고 지원 활동 개신교 교회재정건강성운동은 목회자 소득세 신고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원 대상은 5월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 중 소속 목회자들의 2012년 소득세 신고를 원하는 교회와 개별 목회자다. 오는 20일까지 서류를 접수 받아 종합소득세 신고기간인 27∼29일 신고를 하게 된다.(02) 741-2793.
  •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사진은 1968년 3월 15일 거행된 광화문 복원 기공식 장면이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옛 중앙청 건물이 보이고 건물 벽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글씨가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광화문은 전쟁과 침략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된 이 문이 광화문이라 명명된 것은 1425년 세종 7년 때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서였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270여년간 방치되었다. 그랬다가 1864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광화문을 다시 세웠다. 광화문은 다시 수난을 겪는다. 한일병합 후 일제는 1927년 궁궐 건물들을 헐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존재 가치를 상실시켰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동안에 광화문은 폭격을 받아 목조 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이를 1968년에 다시 건립하게 된 것이다. 석축은 그대로 썼지만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필체로 쓰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총독부 건물의 축에 맞춰 짓는 등 겉모양만 복원했다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를 바로잡고자 2006년 12월부터 1960년대에 세운 광화문을 다시 뜯어 복원 공사를 해 2010년 8월 비로소 경복궁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광화문 편액(扁額)도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있으면서 서사관(書寫官)으로서 편액을 쓴 임태영 장군의 서체를 되살렸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열린세상] 평성 25년 경성중학/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열린세상] 평성 25년 경성중학/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널리 회자되는 김춘수 시인의 이 시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견 아름다운 상념을 자아내는 이 시구가 정치적으로는 무시무시한 발언이 된다. 알튀세는 ‘호명’이야말로 개인을 이데올로기에 예속시키는 행위로 보았고, 사이드는 ‘명명’을 제국주의가 식민지 타자를 자신의 체계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시인은 살벌한 세상 이치를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인공은 외로운 섬에서 원주민 하인을 얻는다. 분명 제 이름이 있을 이 원주민에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단지 금요일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로빈슨은 또 이 원주민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명명과 언어 침탈, 개종 등. 사이드는 제국주의 전성기에 형성된 서양 고전 명작들이 이처럼 당시 타자에 대한 서양의 식민화 방식을 은연중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거에 일제는 이러한 서양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하여 우리에게 실천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강제 교육,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이 그것이고 그 후유증과 상흔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명명과 관련된 한 예로 한국의 꽃 이름과 나무 이름들을 보자. 아름답고 토착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우리의 식물 이름과는 별도로 학명에는 상당수가 ‘Nakai’(나카이)를 비롯한 일본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식물학자에 의해 한국의 식물들이 마치 처음 출현한 양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린네의 명명법에 따라 첫 발견자인 일본인 학자의 이름이 한국의 대부분 식물 이름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양학에서 이러한 현상은 심각하다. 동양학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 제국학문이 만들어 낸 용어이지만 근대 이후 동양은 일본이 대변해 왔고, 일본의 동양학에 의해 동양이 설명되어 왔으며, 특히 서양의 동양학은 일본 동양학의 기초 위에 성립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동양학의 고전인 라이샤워· 페어뱅크의 공저 ‘동양문화사’에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그대로 실리고 세계의 모든 지도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온 것은 이런 실정을 보여주는 극히 작은 예에 불과하다. 한편 오늘의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도리어 과거 일제의 만행을 호도하고 나아가 정당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동양을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명분 있는 전쟁이었으며, 한국 등에 대한 식민 지배가 오히려 근대화를 위해 기여했다고 강변한다. 그리하여 ‘침략’이 아니라 ‘진출’이며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던 일로 삭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후안무치한 데다가 적반하장 격인 이러한 언동을 효과적으로 징치(懲治)할 수단이 없는 우리의 현실이 딱하고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지만 최근 서울의 한복판에서 더욱 아연한 일을 겪었다. 며칠 전 우연히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경희궁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곳은 조선의 왕궁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해체되어 일본인 학생들만 다니는 경성중학이 되었고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로 새로 태어났다가 학교가 이전하면서 예전의 왕궁 경희궁으로 복원된 곳이다. 궁 앞의 안내문을 읽다가 어이없는 구절을 발견했다. 경희궁의 연혁에서 ‘한일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노라고 쓰여 있지만 ‘한일병합’이란 단어에서 강제 병합의 기미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병합이란 말 자체가 일제의 용어), 혹시나 해서 그 밑에 병기한 중국어 설명을 보았더니 실로 가관이었다. ‘한일 양국이 한일합병 조약에 서명하고 이 궁전들은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韓日兩國簽署韓日合倂條約, 這些宮殿都歸朝鮮總督府所有)는 것이다. 한국이 합법적으로 병합되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의 망언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이 안내문의 작성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그곳은 경희궁이 아니라 여전히 평성(平成) 25년의 경성중학이었다. 한국이 합법적으로 병합되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경희궁 안내문의 작성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그곳은 여전히 평성(平成) 25년의 경성중학이었다.
  • “3·1운동, 정치운동 변질돼 참여 안해”

    “근본적으로 인간 최남선이가 참회를 한다는 것은 내 자신으로 이론의 곤란한 문제이올시다. 참회할 만한 대역도 대죄도 범하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행동의 전체가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948년 3월 5일자 ‘평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후회의 심경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육당은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설에 입각해 단군과 초대 일왕인 신무가 형제라는 학설을 제시하거나, 일본제국주의의 괴뢰국인 만주 건국대 교수로 1938년 취임하기도 했다. 육당은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거나 혹은 숨기려 하지 않는다”면서 “나의 저지른 정도의 죄과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인정 반성하며 참회도 할 때가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육당은 인터뷰 이듬해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돼 수감생활을 했다. 학병 권유에 대해서는 “만약 그날(해방)이 오게 되면 실권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으니 젊은 청년 다수를 학병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학병을 찬성했다”면서 학병 지원자가 적어 ‘총독에 대하여 면목이 없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육당은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체득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문안을 기초한 것인데 그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내 의도와는 달리 진전됐다”면서 “거족적 민족윤리운동에 기독교나 천도교가 독점하며 중심이 되는 감이 농후하여 가기에 서명을 거절했다”고 해명했다. 육당은 “문안은 내가 기초하였으나 이 운동에는 나의 주관대로 참가한 것이지 결코 그 운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라 설명했다. 인터뷰는 김종욱 공연예술자료연구사가 발굴했고, 계간 ‘연인’ 봄호에 실렸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민국 진보의 씨앗 뿌린 조봉암의 삶

    1959년 7월 31일.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시신을 받으러 갔더니 형무소 측은 각서를 쓰라고 했다. “인수 하루 만에 매장하고 조문받지 않고 묘비를 세우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장례를 그리 치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 답은 이랬다. “국법에 따라 처형된 형사자이므로 조선총독부령 제120호를 적용한다.” 이 법령은 혹시 독립 만세 시위라도 벌어질까 봐 “일제가 순국한 독립투사의 공개 장례를 금지하고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던 규정”이었다. 식민지의 법령을 적용하다니, 한국의 나라 꼴이 우습다. ‘조봉암 평전’(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은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건국과 부국의 역사’ 깃발이 휘날리는 시대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승만과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봉암의 언변에 이승만은 탄복하기도 했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시키기도 했다.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이후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받는 토지 개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국회부의장이었던 조봉암은 국회에 남아 나라의 서류들부터 피난시키는 데 열중하느라 가족을 챙기지 못해 부인 김조이 여사가 납북됐다. 반면 북진통일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독려 방송을 틀어 놓고 수원으로 몰래 도주했다. 거기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의 악재가 연이어 터지자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그 유명한 사사오입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조봉암은 이때 발췌개헌안에 찬성했다. 대체 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판국에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계속된다면 원조를 끊고 유엔군이 신탁통치하겠다고 미국이 통보해서다. 어떻게 얻은 독립이던가. 권력에 눈먼 이승만은 양보할 리 없으니 자기가 물러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결심한 것이 독자 정당 결성과 대선 출마였다. 이승만은 엄청난 부정 선거를 동원해 당선됐다. 당선된 이승만은 감히 ‘국부’의 코털을 건드린 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저자는 충실한 문헌 조사와 현지 답사, 유족 및 친인척, 생존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봉암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민족주의자들의 초상,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과의 협력과 갈등 관계,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과정, 정치 행보에 발목 잡히기도 했던 여자 문제, 일제 말 국방성금을 둘러싼 친일 행위 논란의 진실, 토지 개혁을 입안하는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2만 2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지방행정의 달인] 행정달인 18인 릴레이 인터뷰 ②

    [지방행정의 달인] 행정달인 18인 릴레이 인터뷰 ②

    ‘제3회 지방행정의 달인’으로 선정된 18명의 릴레이 인터뷰 2회를 게재한다. 이번에는 소송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은 이기용 경기 파주시 총무과 팀장과 장은길 김포시청 주무관, 사회교육복지 부문의 류성한 경남 통영시립도서관장, 세정 부문의 김종현 서울 강남구청 세무과 주무관 등 4명을 소개한다. 이기용 파주시 총무과 팀장 “고구려 덕진산성 등 문화재 사유화 막아” 경기 파주시 총무과의 이기용(52·지방행정 6급) 팀장은 사무실보다도 법정이 더 익숙한 공무원이다. ‘행정 변호사’란 별명은 그래서 붙었다. 주특기는 국공유 재산 환수보전소송. 지난 12년간 잃어버린 145만 5017㎡(44만 143평)의 국공유 재산을 환수해 파주시에 500억원이 넘는 재정 수익을 올려준 주인공이다. 신학대를 나와 한때는 목회자의 길을 꿈꿨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무원이 됐다. 파주시청에 몸담은 것은 1991년. 뜻하지 않게 국공유 재산 관리 업무를 맡았다가 승소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2000년 당시 송달영 시장은 그에게 아예 국공유재산관리팀장을 맡겼다. 그는 내친김에 방통대에 편입해 법학을 전공했고 그것도 성에 안 차 고시촌의 법학원을 노크하기도 했다. “3년여간 법에 미쳐 살았다. 한창 일이 몰릴 때는 1년에 국공유 재산 소송이 400건이나 됐다”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옛 장단군 지역의 면 소유 재산을 파주시 소유로 승계시킨 소송이다. 이 팀장은 “장단군 지역이 행정구역상 파주시로 편입됐지만 재산권까지 승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면서 “오랫동안 민통선 구역으로 방치됐던 장단군 지역의 국공유재산을 되찾기 위해 일제강점기 문서가 보관된 국가기록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굵직한 문화재도 환수해 냈다. 토지 브로커들의 농간으로 꼼짝없이 개인소유로 넘어갈 뻔했던 고구려 덕진산성과 고려 시대 마애사면석불이 그것들이다. “6·25전쟁으로 소유권 등기가 사라진 덕진산성의 경우 조선총독부가 1942년 발간한 자료집까지 뒤져 원래 국유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말했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브로커들의 협박을 받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그는 국공유재산에 관한 한 공직사회의 명강사로 꼽힌다. 직접 쓴 책 ‘국공유 재산 소송실무’는 전국 재산 담당 공무원들에게 교과서로 통한다. 황수정 기자 sjh@seoul.co.kr 류성한 통영시립도서관장 “나이 들면 경로당 대신 도서관 찾게 할 것”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직원들에게 혹독하기만 하다. 밤 11시까지 도서관 문을 열고 시민들을 맞아야 한다. 덕분에 시민들은 편하다. 보고 싶은 책이 장서 목록에 없어도 말만 하면 재깍 어디선가 구해 와 빌려준다. 책 보는 곳일 뿐 아니라 세미나, 교양강좌, 영화 상영 등을 하는 종합 문화 공간이다. 도서관이 세 곳으로 나뉘어 있고 휴관일도 각각 다르니 1년 내내 언제나 이용할 수 있다. 류성한(51) 통영시립도서관장이 있는 경남 통영시 얘기다. 류 관장이 ‘지방행정의 달인’으로 뽑힌 것은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었다. 이미 시모범공무원상은 물론 국무총리표창,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등을 휩쓸었다. 류 관장은 2007년 1월 통영시립산양도서관장으로 처음 발령받았다. 당시 도서관은 이용객도 별로 없었고 흉물스러웠다. 그는 버리는 보도블록을 주워다 쉼터를 꾸미고, 나무 분재를 얻어 도서관 안팎을 가꾸면서 산뜻한 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또 섬마을 욕지도에 세워놓은 뒤 무협지 정도 겨우 갖춘 ‘동네 책방’ 같던 욕지도서관을 번듯하게 바꿔 냈고 시와 도를 뛰어다니며 예산을 따내고 민자를 유치해 통영시립도서관 본관을 만들었다. 또 통영 시민 30%가 사는 신시가지에도 충무도서관을 만들어 오는 7일 문을 연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백석 등 통영과 인연을 맺은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테마 도서전’은 물론 ‘도서 나눔 운동’ ‘북콘서트’ 등 많은 창발적 사업을 쉼 없이 쏟아냈다. 그는 “지난 6년은 정말 밤낮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도서관만 생각하고 살았던 시절이었다”고 돌아봤다. ‘도서관 전도사’ 류 관장의 관심은 벌써 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경로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을 찾도록 문화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도서관이 중심이 된 문화센터, 노인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실버 도서관’ 등 가야 할 길이 아주 멉니다.” 글 사진 통영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장은길 김포시청 회계과 주무관 “시·국가의 땅도 내 땅 찾는 것처럼 최선” 경기 김포시 회계과에 근무하는 장은길(42·행정 6급) 주무관은 ‘소송의 달인’이다. 어감만으로는 행정·사법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성 민원인을 연상시키지만 이는 장 주무관이 지방자치단체와 국가 재산을 소송을 통해 지키다 보니 듣게 된 말이다. 김포시는 2008년 도로사업과 관련해 부당이득금반환소송 등 15건이나 제소당했다. 1970∼80년대 시가 보상을 했지만 등기가 이전되지 않은 점을 이용해 변호사와 소유주가 합작으로 기획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기획담당관실에서 일하던 장 주무관은 선배 공무원들이 야속했지만 소송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밤낮으로 법 공부에 매달리면서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 결과 소송에서 시가 100% 승소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상을 했는데도 미등기된 토지는 지역에 널려 있었다. 장 주무관은 해당 토지 소유주나 상속인에게 등기 이전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선뜻 응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당시 등기 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줬는데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반발했다. 장 주무관은 거주지가 다양한 소유주나 상속인을 일일이 찾아가 진정성 있게 설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속이 진행돼 땅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괴롭혔다. 해당인이 국외에 거주할 때는 주소지에 메모를 붙여 놓고 연락 오기를 몇달씩 기다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281필지(7만 7330㎡)에 대한 등기 이전을 마쳤다. 도저히 협의가 되지 않을 때는 소송을 걸어 102필지(1만 8890㎡)를 되찾았다. 이들 땅은 공시지가 기준 106억원으로 국가에 98필지, 김포시에 283필지, 경기도에 2필지가 귀속됐다. 장 주무관은 “만약 내가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이 남의 소유로 돼 있다면 가만히 있었겠느냐”면서 “시와 국가의 땅을 찾는 일에도 같은 심정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김종현 강남구청 세무과 주무관 “체납자 정보 공유… 법원배당금 추징을” “세금 체납자들이 세금 징수를 피하는 걸 보면 기상천외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렵게 징수에 성공하면 또 다른 허점을 파고들거든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꽁꽁 숨겨놓은 재산과 돈을 찾아내는 노하우를 갖춰야 징수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제3회 지방행정의 달인에 선정된 김종현(44·서울 강남구청 세무관리과) 주무관은 세금 체납자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마찬가지다.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돈을 찾아내 결국 체납 세금을 징수해 가기 때문이다. 김 주무관은 지난해 전국 최초로 체납자가 은닉한 법원배당금을 압류하는 시스템을 도입, 5억 8000만원을 압류해 주목받았다. 현재 일선 행정기관에서는 법원이 관할하는 경매 배당금 관련 인적 정보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김 주무관은 경매 관련 업체와 제휴해 배당금 지급이 예상되는 사람들 중에서 체납자를 찾아내 법원이 배당금을 지급할 때 체납 세금을 먼저 징수하는 데 성공했다. 업체들이 파악한 배당 예상자들의 주민번호 앞자리 및 성별 정보를 구청 체납자 정보와 매칭시켜 배당자 중 체납자를 가려내는 시스템이다. 그는 “법원이 세무당국에 배당 지급 예상자 정보를 제공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내세워 난색을 보인다”면서 “정보 공유만 된다면 전국적으로 수백억원의 체납 세금 추가 징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체납 세금 징수율을 높이기 위한 핵심 포인트로 담당공무원의 노하우 공유를 꼽았다. 오랜 기간 체납 징수 업무를 하면서 익힌 경험과 노하우를 동료 및 후배 공무원들과 충분히 나눌 때 체납 세금 징수율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 때문에 그는 현재 구청 내에서 체납업무를 하면서 체납 징수 전문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 서울시 데이터센터 ‘자료마을’의 전문강사로 서울시 타 구청 세무공무원들에게 체납 징수 기법도 전수한다. 임창용 전문기자 sdragon@seoul.co.kr
  • 朴, 20분 단위 19개국 외교사절 접견…“한·미 북핵 해결 위해 긴밀 협력할 것”

    朴, 20분 단위 19개국 외교사절 접견…“한·미 북핵 해결 위해 긴밀 협력할 것”

    취임 이틀째인 박근혜 대통령은 26일 청와대에서 30분간 톰 도닐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장관급)을 비롯한 미국 특사단을 접견했다. 도닐런 보좌관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최측근 인사다. 도닐런 보좌관은 북핵과 관련해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한 대응은 물론 북한 비핵화를 포함한 대북정책 전반에 있어 한·미 간 긴밀한 공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장은 결코 용인할 수 없으며 북한의 도발에 대해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국제사회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더욱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 “지난 60년간 쌓아 온 양국 간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21세기형 포괄적 전략 동맹을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했고, 도닐런 보좌관도 공감을 표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은 물론 지역 및 범세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양국이 보다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특히 도닐런 보좌관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은 확고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한·미 동맹의 현대화를 위해 양국이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도닐런 보좌관은 이와 함께 “가능한 빠른 시일 내 박 대통령의 방미가 이뤄지기를 희망한다”고 전했고 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조기에 만나 양국의 협력 발전 방안에 대해 긴밀히 협의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미국 특사단에는 성 김 주한 미국 대사와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 대니얼 러셀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등도 포함됐다. 박 대통령은 전날인 25일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 류옌둥(劉延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빅토르 이샤예프 러시아 부총리 겸 극동개발부 장관 등 3강 사절단을 만난 바 있어 이날 도닐런 보좌관 일행을 접견하는 것으로 ‘취임식 4강 외교’를 마무리한 셈이다. 이날도 박 대통령의 ‘취임식 외교’가 이어졌다. 25일 6개국 외교 사절들과 단독 면담을 한 데 이어 이날 얀 엘리아슨 유엔 사무부총장과 19개국 정상급 인사 및 외교 사절단을 만났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15분, 20분 단위로 면담 일정이 이어졌다. 취임을 축하하는 재외 동포 초청 리셉션까지 겹치면서 박 대통령의 ‘대통령 2일차’ 일정은 말 그대로 강행군이었다. 엘리아슨 유엔 사무부총장과의 면담에서 박 대통령은 “공적개발원조(ODA) 같은 것들을 해 가면서 한국이 경험했던 농촌 개발 계획이나 새마을운동을 공유하면서 개발, 원조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오후에는 후쿠다 야스오·모리 요시로 일본 전 총리, 퀜틴 브라이스 호주 총독 등과 잇따라 만나 이틀간의 ‘취임 외교’를 마무리지었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아소 부총리 만난 朴 “日, 역사 직시하며 과거상처 치유 노력해야”

    아소 부총리 만난 朴 “日, 역사 직시하며 과거상처 치유 노력해야”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취임식과 함께 외교를 시작했다. 4강 특사를 비롯한 각국 외교 사절단이 현장에 있었다. 20여명의 각국 경축 사절과 주한 외교 사절단장을 맡고 있는 비탈리 팬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비롯해 상주 대사 102명과 비상주 대사 26명 등 150여명도 참석했다. 이날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데이비드 존스턴 캐나다 총독 등 정상급 인사들을 접견한 박 대통령은 경축 사절에 대해 26일까지 순차적으로 만나 외교 현안을 논의한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외교사절단과 함께한 외빈 만찬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에는 북한의 핵실험 등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며 “남북한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지속가능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일본의 내각 서열 2위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과도 25분 동안 회동했다. 이날 접견은 일본이 지난 22일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에 시마지리 아이코 정무관(차관급)을 파견, 우리 정부가 강력 반발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비공개 접견에서 “양국이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지향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역사 문제 등 현안이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어 안타깝다”며 “이웃나라인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양국 지도자들이 신중한 말과 행동을 통해 신뢰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미국 특사단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최측근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장관급)을 단장으로 했다. 성 김 한국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 대니얼 러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이르면 3월로 예상되는 존 케리 신임 국무장관의 방한도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류옌둥(劉延東) 공산당 정치국 위원 겸 교육·문화·과학 담당 국무위원이 시진핑 당 총서기의 특별대표로 왔다. 류 정치국 위원은 공산당에서 여성으로서는 가장 지위가 높다. 오는 3월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부총리에 오를 것으로 유력시된다. 류 정치국 위원은 후진타오 국가주석 및 시진핑 총서기의 친서 원본을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또 빅토르 이샤예프 러시아 부총리 겸 극동개발부 장관과도 만나 양국 간 관계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샤예프 장관은 오는 9월 러시아가 의장국으로 개최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박 대통령을 초청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이 같은 외교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4강 정상 외교’는 역대 정부에 비해 시동이 늦게 걸릴 전망이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의 리더십이 비슷한 시기에 교체된 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과거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에는 각각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가 참석하면서 취임식날 첫 4강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취임식에는 ‘독도’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영토, 과거사 갈등으로 그마저도 무산됐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박근혜 대통령 오늘 취임] 각국 고위급 대표 30여명 참석

    [박근혜 대통령 오늘 취임] 각국 고위급 대표 30여명 참석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는 각국 정상급 인사와 외국 정상이 파견하는 고위 정부 대표 30여명이 참석한다. 미국은 영향력을 강화했고 중국은 한 단계 급을 높였다. 최근 관계가 경색된 일본에서는 2인자인 부총리가 참석한다.  미국에서는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대니얼 러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파견했다. 성 김 주한 미국 대사,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도 이들과 함께 취임식에 참석한다. 미국은 급은 낮아졌지만 영향력은 더 커졌다. 미국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에는 각각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보냈다. 장관급인 톰 도닐런 국가안보보좌관은 외교안보 분야를 총괄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미국의 외교전문지인 포린폴리시가 2012년 뽑은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민주당 실세 50인’ 중 1위였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4위에 올랐다.  중국은 5년 전 이 전 대통령 취임식 때는 당시 중앙위원이었던 탕자쉬안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특사로 왔던 것에 비해 한 단계 급이 높아졌다. 박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후진타오 주석과 시진핑 당 총서기의 공동 특별대표 자격으로 류옌둥 국무위원이 참석한다. 류옌둥 국무위원은 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구로서 25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소속으로, 현재 중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정상의 자리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에 오를 것이 유력시된다. 류옌둥 국무위원과 함께 위안구이런 교육부장, 장샤오지안 국무원 부비서장, 추이톈카이 외교부 부부장이 공식 수행 인원으로 함께한다.  일본에서는 5년 전 이 전 대통령 취임식 당시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왔지만 이번에는 격이 떨어진 내각 서열 2위인 아소 다로 부총리가 참석한다. 재무상을 겸임하고 있는 아소 다로 부총리는 일본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참석하는 것도 검토했지만 경색된 한·일 관계로 아소 부총리가 대신 방문한다. 일본 특사단에는 한·일 의원연맹 소속 현역 의원 16명도 포함됐지만 지난 22일 다케시마 날 행사를 계기로 한·일 관계가 악화됐다는 점은 부담이다. 후쿠다 야스오·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도 특별 초청됐다.  첫 여성 대통령인 박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퀜틴 브라이스 호주 총독,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등 여성 외빈들도 참석한다. 또 주한 외교 단장인 비탈리 펜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비롯해 상주 대사 102명, 비(非)상주 대사 26명 등 150여명의 주한 외교사절도 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 [커버스토리] 시대의 거울이자 국민 향한 다짐…10명의 대통령 초심 지켰을까

    [커버스토리] 시대의 거울이자 국민 향한 다짐…10명의 대통령 초심 지켰을까

    비장하고 숭고했다. 그 자리에 선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국가와 민족,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글거렸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정부 출범 이후 모든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국민의 기대와 환호속에 국민을 위한 멸사봉공을 다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작 때의 감격은커녕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부하의 총탄에 맞고 숨졌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아니면 쓸쓸하게 해외로 망명했거나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감옥에 갔다. 이틀 뒤면 열한 번째 대통령이 취임한다. 임기를 마친 뒤 더욱 행복해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역대 대통령의 취임식과 취임사를 되짚어 본다. 5년 전인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식장에서 ‘섬기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취임식 진행 역시 그에 충분히 호응했다. 무대 위는 국민대표와 각 나라 정상급 인사, 재외동포, 해외기업인 등 외빈에게 내주고 무대 아래에 새 정부 장관 후보자, 청와대 수석 내정자들의 자리를 만드는 파격을 선보였다. 지금껏 취임식 중 가장 많은 6만 405명이 참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대통령의 권위적 모습을 없애기 위해 취임식 엠블럼에도 봉황 문양 대신 ‘태평고’(태평소+북)를 집어넣었다. 장소는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이 늘 이렇게 성대하고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60여년 전에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준비 일정은 숨가빴고 모습은 투박했다. 입헌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순정함과 독립국가를 만들려는 치열함이 그 원동력이었다. 1948년 7월 1일 제헌의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그해 7월 24일 오전 10시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광장에서 첫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애국가 제창,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취임사 등이 지금에야 뻔한 의례로 여겨지지만 입헌민주국가 건설의 새 역사를 쓰는 참석자들에게는 엄숙하고 가슴 벅찬 걸음걸음이었다. 해방된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의 취임사는 비장했다. 그는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면서 “과거 40년 동안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국민에게 주문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후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은 8월 13일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대통령 취임사’가 아닌 ‘대통령 인사’로 표기됐다. 그는 “4월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유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 국민이 잘먹고 잘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이를 위해 “독재가 뿌렸던 반민주성과 부패독소를 조속히 제거하고, 과감한 혁신행정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이른바 ‘셀프 훈장’으로 논란이 됐던 무궁화대훈장 수여식은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은 1963년 12월 17일 오후 2시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취임식 참석 인원은 3373명이었다. 무궁화대훈장이 대통령과 함께 영부인에게도 수여된 것은 이때부터다. 무궁화대훈장을 목에 건 박 대통령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국의 근대화라는 막중한 과업을 앞에 두고 있다”며 ‘민족의 대단합’을 호소했다. 이날 취임식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지기까지 5대 17년에 걸친 장기집권의 서막이었다. 격동의 현대사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1980년 9월 1일 열린 11대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은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됐다. 그동안 사라졌던 대통령 찬가가 다시 불렸다. 전 대통령은 목에 무궁화대훈장을 걸고 붉은색 어깨띠(대수)까지 두르고 등장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개헌 의사를 천명했고, 1981년 2월 개헌을 한 뒤 본격적인 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국정지표로서 ‘우리 정치풍토에 맞는 민주주의 토착화’, ‘진정한 복지국가 이룩’, ‘정의로운 사회 구현’, ‘교육혁신과 문화창달로 국민정신 개조’를 내세웠다. 특히 범국민적인 사회정화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이듬해 전 대통령은 개정 헌법에 의해 새로 구성된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에 의해 다시 대통령에 선출됐고 1981년 3월 3일 12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1987년 6월 항쟁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무궁화대훈장을 목에 걸거나 어깨에 두르고 나오는 모습은 없어졌다. 예포 발사와 국립국악원의 국악이 취임식에 처음 등장했다. 장소도 체육관을 벗어나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옮겨졌다. 참석자들도 2만 5000명으로 확 늘어났다. 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자신을 ‘저’로 칭했다. 이승만·윤보선·박정희 대통령은 ‘나’로 표현했고, 최규하·전두환 대통령은 ‘본인’으로 자신을 나타냈다. 6월 항쟁으로 국민이 따낸 직선제 개헌에 의해 당선된 만큼 자신을 국민 개개인의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표시였다. 노 대통령은 국민이 주인된 국민의 정부임을 강조하고, 고도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미치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겠다고 역설했다. 또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내용의 북방외교도 강조했다.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환경’의 가치를 내세웠다. 재생용지로 초청장을 만들었고, 꽃가루 뿌리기와 풍선 날리기를 없앴다. 길가에서 태극기를 흔들어대는 시민동원도 중단했다. 취임식 참가자는 3만 8000명으로 늘었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그 전까지 군 출신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핵심 국정 지표로 ‘신한국 창조’를 내걸고 이를 위해 부정부패 척결, 경제 회복, 국가 기강 정립을 내세웠다. 1998년 2월 25일 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꽃동네 주민, 독도경비대원, 마라도 주민, 대학생, 전방 소대장, 청년 노동자 등 국민 대표들이 처음으로 취임식 무대로 올라갔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속에 취임한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새 정부는 ‘참된 국민의 정부’임을 선포하고, 대한민국이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 뒤 총체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면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하겠다고 약속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불과 일주일 뒤에 열려 경건한 분위기였다. 윤도현밴드의 공연을 취소한 것이 그 상징이다. 취임식에서는 운동권가요와 일반가요, 클래식, 국악 등을 적절히 조화시켰다. 4만 8500명이 참석했는데 이 중 절반 가까이인 2만여명이 일반 국민이었다. 각계각층 국민대표 50명을 국회의원, 외빈 등과 나란히 앉을 수 있게 했다. 참여의 가치를 앞세운 노 대통령은 지방분권, 동북아시대의 중심국가로의 도약, 한반도의 평화 증진을 주요 지표로 내세웠다. 임창용 전문기자 sdragon@seoul.co.kr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고양시, 일제때 반출 ‘벽제관 육각정’ 환수운동 본격 돌입

    고양시, 일제때 반출 ‘벽제관 육각정’ 환수운동 본격 돌입

    경기 고양시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이 일본으로 반출해 간 ‘벽제관 육각정’ 환수 운동에 들어갔다. 5일 시에 따르면 육각정은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사무소 부근에 있던 벽제관(중국 사신이 한성에 들어오기 전 잠시 머물던 곳)에 있었으나, 1918년 하세가와 총독이 자신의 고향인 이와쿠니시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벌어진 벽제관 전투에서 왜장 요시가와 히로시가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묘 근처에 있는 이와쿠니시 모미지타니 공원으로 육각정을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일본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벌인 시 관계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육각정이 건축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현지 조사에서 전문가들은 정자의 기둥 사이를 머름(모양을 내기 위해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으로 연결해 내부 공간으로 사용하고 바깥쪽에 아자교란(‘亞’자 모양으로 살을 짠 난간)을 설치해 회랑을 두른 점, 목 부재 보아지(기둥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와 마루 받침 보 부재의 돋을새김 형태, 목 부재 기둥에 쌍사(雙絲·기둥이나 나무 그릇의 모서리를 조금 접고 오목한 홈을 파낸 줄)를 둔 점을 통해 상당한 격식을 갖춘 조선시대 당시 건축물로 해석했다. 육각정이 벽제관과 관련해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점도 역사적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는 ‘고양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최근 육각정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환수 계획을 세워 나갈 계획이다. 아울러 육각정이 언제, 누가, 왜 건축했는지도 고증해 나갈 예정이다. 시는 우선 이날부터 육각정 환수 시민 서명운동에 들어가는 한편 19일부터 3일간 이와쿠니시를 방문해 2차 현지 조사를 벌일 방침이다. 이와쿠니시 측은 공식 반환 요청이 매우 민감한 문제라며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비가 주룩주룩 쏟아질때 경복궁 근정전 걸어보라

    비가 주룩주룩 쏟아질때 경복궁 근정전 걸어보라

    비교적 사료가 많고 시대가 가깝다 보니 조선에 대한 대중교양서들은 정말 차고도 넘쳐난다. 그리고 그 책들은 역사적 향에 취하다 보니 그윽한 시선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조선의 정체성’(박석희 등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은 저자들이 관광전문가여서 그런지 철저하게 경복궁을 즐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면서도 세종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내세운 ‘뿌리 깊은 나무’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래서 공간, 상징물, 역사를 둘러싼 소소한 얘깃 거리들이 좋다. 세종을 부각시키는 것은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한 혼란의 시기가 끝나고 명실상부한 법궁으로서 경복궁이 기능하는 것이 세종 때여서다. 그러니까 이전 왕까지는 경복궁을 짓고 수리하고 유지는 했지만 정치적 혼란 때문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세종 때 비로소 모든 공간이 안정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롭게 조성된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을 등장시킨 것도 단순히 조선시대의 위대한 임금이라서가 아니라 경복궁을 법궁으로 쓴 왕인데다, 취임 일성이 “의논하자”였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태도를 취한 임금이어서 광장의 정신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광화문 바깥 해태상은 불을 막아주는 상징물 정도로 알려져있다. 실용적 목적도 있다. 말에서 내려야 하는 지점을 표시하는 하마비였다.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 천장에는 용 두마리가 있다. 발톱이 일곱인 칠조룡이다. 알려졌다시피 용, 그것도 황룡, 거기다 그 황룡의 발톱은 천자와 왕과 제후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왜 이렇게 중건해뒀는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재밌는 점은 또 이 칠조룡을 잘 보려면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의 왼팔과 오른팔이 되어야 비로소 용안을 접할 수 있다는 의미다. 관광전문가로서의 제안도 흥미롭다. 왕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체험이기 때문에 출입구를 되도록이면 광화문 한 곳으로 통일시키자고 제안한다. 또 지금의 수정전은 세종 당시 집현전이었던 만큼 도서관이나 학술, 문화행사 공간으로 만들어 그 뜻을 이어가자고도 한다. 독립기념관 한구석에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아치지붕을 원래 위치로 옮겨와 역사적 과오를 되새기는 다크 투어리즘 공간으로 만들고, 세종의 과학기술이 총집결된 흠경각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자고도 주장한다. 2만 5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평일 낮, 말라카 거리는 왁자지껄한 아이들 무리로 활기에 차 있다. 우리가 경주에 가서 역사를 배우듯,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말라카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물론 수학여행 온 아이들에게는 수백년 전의 역사유적도 그저 오래된 놀이터일 뿐이지만 말이다. 말라카 강변에 펼쳐진 책 한 권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말라카에 도착한다. 지도상에서 이 도시는 말레이반도 왼편에서 인도양을 향하고 있다. 거대한 함선과 포탄을 앞세운 14세기 정복자들도 말라카를 거쳐,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 좁은 물길을 지나야만 더 깊숙한 동쪽에 닿을 수 있었다. 말라카는 그들이 처음 발을 디딘 동양의 땅이었고 동양과 서양, 거대하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과거 수백년간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무역량으로 따지면 수에즈 운하에 비견됐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수심이 너무 낮아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여행객들도 간척개발이 한창인 해변보다 오래된 가옥이 늘어선 말라카 강변의 분위기를 더 선호한다. 말라카강 리버크루즈는 40여 분 동안 9km에 이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잘 꾸민 액세서리 상점, 한적한 노천 카페들 사이사이 중국풍 홍등을 매단 집들이 보이고 화려한 원색의 벽화가 펼쳐진다. 먹음직스런 열대 과일과 음식부터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인도, 중국, 아랍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까지, 움직이는 배 안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한 권의 그림책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나무로 지은 붉은 지붕의 전통가옥촌 ‘캄풍모텐Kampung Morten’이다. 우리나라 한옥에 해당하는 것이 캄풍인데 바닥이 지상에서 1~2m 높이에 있고, 천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기지 않고, 통풍이 잘돼 위생적이라고 한다. 1922년 지은 빌라 센토사Villa Sentosa는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인데 말레이시아 국기를 내걸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인 가옥이지만 집주인이 평생 동안 공들여 모은 골동품과 개인 소장품을 전시해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저녁에는 불을 밝힌 노천 카페에서 분위기에 취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한차례 소나기 후, 불어난 강물이 일렁이는 모습도 여기선 한없이 매력적이다. 강변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울창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반딧불이나 월광욕을 하고 있는 도마뱀도 볼 수 있다. 강변의 카페와 연결되는 존커 스트리트Jonker Street와 히런 스트리트Heeren Street는 꼭 들러 보길 권한다. 존커 스트리트에는 골동품점과 작은 미술관, 특색 있는 식당들이 많다. 매주 금토일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는 벼룩시장도 열린다. 존커 워크 스트리트 바로 옆 골목이 히런 스트리트다. 저렴한 호텔과 예쁜 네덜란드풍 건물이 많다. 네덜란드어로 ‘존커’는 하인을, ‘히런’은 주인을 뜻한다. 존커 거리는 히런 거리의 부자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 보는 말라카 해협의 모습. 시가지와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2 존커 워크 스트리트는 골동품점, 기념품점, 카페와 술집이 늘어선 전형적인 여행자들의 거리다 3 말라카 리버크루즈 는 9km에 이르는 말라카 강줄기를 따라간다. 노천카페와 전통가옥, 벽화가 말라카의 분위기를 전한다 4 비오는 늦은 밤, 조명을 밝힌 말라카 강은 한없이 매력적이다 5 재즈가 흘러나오는 존커 워크 스트리트의 라이브 카 ▶travie info 말라카 리버크루즈Melaka River Cruise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11시30분까지 운항한다. 어른 기준 15RM으로 저렴한 편이며, 왕복 40분 정도 소요된다. 크루즈 선상 공연이 포함된 티켓(Bot VIP/ 매주 일요일 오후 8시~오후 1시/어른 기준 30RM), 하루 동안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Ho-Ho Service/ 오전 9시~밤 11시30분/어른 기준 30RM)도 판매한다. 해양박물관 앞에서 승선하면 된다. www.ppspm.gov.my 메나라 타밍 사리Menara Taming Sari 전망대 80m 높이까지 올라가는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는 말라카 시가지와 항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360도 회전식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방의 정경을 볼 수 있다. 푸른 말라카강과 붉은 지붕 가옥, 세인트 폴 언덕의 옛 유적지들로 대표되는 육지 모습과 달리 바닷가는 부산하게 변화 중이다. 연륙도에는 마리나 리조트가 들어섰고, 갯벌에는 간척공사가 한창이다. 낮은 곳에선 볼 수 없던 말라카의 현재진행형 모습이다. 개장시간 오전 10시~밤 10시 입장료 어른 기준 RM20 홈페이지 www.menaratamingsari.com 1 15세기 말라카 왕궁의 모습. 바닥이 지면에서 1~2m 떨어져 있고, 나무로만 지어진 점이 전통적인 말레이시아 건축 구조를 보여 준다 2 도시 이름의 어원이 된 말라카 나무 3 네덜란드 통치 시기 공관으로 쓰였던 스태이더스 빌딩은 현재 말라카 민족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4, 5 포르투갈의 흔적은 볼 수 있는 세인트 폴 성당. 벽채만 남은 모습에서 역사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6 말라카는 한때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동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교역량은 수에즈 운하와 비견됐을 정도다 7 말라카에서 꼭 경험해 봐야 할 인력거 ‘트라이쇼’. 화려한 꽃과 음악으로 장식하는 게 특징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있는 언덕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첫번째 도시이며, 400년간의 식민 지배 속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 생명력의 땅이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왕조가 탄생한 곳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말라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말레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흔적이 한 덩어리를 이룬 도시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여기에 이주 중국인들이 말레이 사람들과 결혼해 낳은 ‘페라나칸’의 문화까지 더해져 이색적이다. 본격적인 말라카 시간 여행은 독립기념관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마트라섬 스리비자야 왕국에서 건너온 파라메시바라Paramesvara왕자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 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궁지에 몰린 아기 사슴이 자신의 사냥개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힘으로도 용맹하게 맞서면 큰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것. 나무의 이름을 딴 말라카왕국이 건국된 것이 1402년인데,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말레이시아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독립기념관 앞 말라카 나무 주변에는 포르투갈의 요새와 15세기 말라카왕궁The Melaka Sultanate Palace이 있어 여러모로 역사 여행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파라메시바라 왕의 바람대로 작은 왕국 말라카는 전세계의 큰 도시들을 상대하며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말라카 사람들은 해상 교역 활동에 관련된 ‘말라카법’을 만들어 교역 기반을 다졌으며, 앞다퉈 이슬람교로 개종해 멀리서 온 아랍 상인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말라카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국 백여 년 만인 1511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고 뒤이어 1641년 네덜란드, 1795년부터는 말라카를 포함한 말레이시아 전역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포르투갈은 당시 황금보다 더 귀했던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왔는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한 지 겨우 9년 만의 일이다. 그들은 말라카를 시작으로 아시아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은 안전한 거주지 겸 요새 ‘에이 파모사A’Famosa’를 짓는 것이었다. 원주민 노예를 동원해 술탄의 왕궁과 왕릉, 모스크를 철거하고, 성벽 두께가 3m나 되는 요새와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형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뒤이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것은 성문Porta de Santiago과 성당St.PaulChruch 한 채뿐이다. 성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언덕 위로 벽채만 남은 세인트폴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은 가톨릭을 처음 포교한 성 자비에르와 관련된 일화로 유명하다. 자비에르는 말레이반도와 일본, 중국을 오가며 가톨릭을 알리는 데 힘쓰다 1552년 중국 광저우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말라카에서 6개월간 안치된 후 그의 첫 해외 포교지였던 인도 고아로 가게 됐는데, 관을 열어 보니 전혀 썩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자비에르가 바다에 십자가를 던지자 사나운 풍랑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일화도 있다. 얼마 후 어부가 같은 자리에서 게를 건져올렸는데 신기하게도 자비에르의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말라카에서는 등에 십자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게는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 에이파모사 요새는 전체적으로 붉고, 거칠게 풍화된 듯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녹이 슨 듯 보이는데, 철성분이 함유된 홍토 벽돌로 만들어서 그렇다. 이 벽돌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쓰인 것과 같은 종류로 수백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요새 아래쪽에는 멀리서도 붉은 벽이 눈에 띄는 스태이더스The Stadthuys 빌딩이 있다. 원래 네덜란드 총독의 공관이었는데, 현재는 말라카 민족박물관이자 랜드마크로 사랑받고 있다. 말라카 이전부터 식민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유물과 옷차림을 전시하고 있다. 네덜란드식 거실과 당시 사용했던 생활용품들도 볼 수 있다. 베이커리에서는 갈색빵을 파는데 네덜란드 점령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탄 빵을 나눠주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주말에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다양한 군복 코스프레도 볼 수 있다. 스태이더스와 맞붙어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8세기에 세워졌다. 거대한 대들보와 시계탑에서 네덜란드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travie info 트라이쇼Trishaw 스태이더스 앞에는 말레이시아와 페낭에서만 볼 수 있는 인력거 ‘트라이쇼’가 줄지어 서 있다. 평범한 인력거가 아니다. 오디오에서는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지붕이며 좌석을 각종 꽃과 인형, 깃발로 치장하고 있다. 잘나가는 트라이쇼는 광고판까지 달고 성업 중이다. 트라이쇼를 타고 말라카의 골목골목을 돌아보다 보면, 아직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트라이쇼┃이용요금 시간당 40RM(30분 25RM), 어른 2인까지 탑승 가능 에이파모사┃입장료 무료 말라카왕궁┃개장시간 오전 9시~오후 5시30분 입장료 어른 기준 2RM 스태이더스┃개장시간 오전 9시~ 오후 3시30분(금~일요일은 오후 9시까지) 입장료 어른 기준 5R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이 나라가 사는 법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레이시아에서 진한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나라에선 한국인의 영어가 유독 잘 통한다. 우리나라 콩글리시 버금가는 게 바로 말레이시아의 ‘맹글리쉬’.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 가지 언어로 이뤄지는 완벽한 의사소통보다 다양한 언어로 이뤄지는 유연한 의사소통이 더 일반적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한 가지를 고집하기보다 여러가지를 포용한다. 가장 전통적인 것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고, 감추고 싶은 역사를 가장 매력적인 역사로 소개한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타워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본떴고, 쇼핑몰을 활보하는 여자들은 검정색 대신 온갖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치장한 차도르를 둘렀다. 이곳에서 이슬람 전통은 속박의 족쇄가 아니라,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된다.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이나 광장 이름에서 독립을 뜻하는 ‘메르데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매년 8월31일 독립기념일에 성대한 축제를 치를 정도로 독립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반면 쿠알라룸푸르와 말라카 곳곳에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통치 유적들이 버젓이 관광상품화 돼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부러 이런 곳들을 찾기도 한다. 식민 역사에 대해 예민한 우리로서는 이런 모습이 양면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 모습이 너무 양면적이지 않은지 묻자 나이 지긋한 관광가이드 노마가 적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용서에 관대한 편이예요. 아마 종교의 영향도 크겠죠. 무엇보다 우리는 이제 식민시대에 아무런 악감정도 없어요. 역사 그대로의 과거에 얽매어 있기보다 새롭게 보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거지요.” 오랫동안 하나의 영토를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과 공유하며 살아온 역사 속에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포용을 배웠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종교와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는 데 가장 뛰어난 국민이다. 그리고 그런 관용적인 태도 속에는 다양한 삶의 어떤 형태든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강인함이 있다. “나는 10년 동안 트라이쇼 운전을 해왔어요. 운전 기술로 치면 말라카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말라카 최고의 직업이 바로 트라이쇼 운전사라는 거. 난 매일 ‘이녀석’과 함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곳에 대해 알아 가죠. 난 정말 이 일이 좋아요.” 적도 부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매일 12시간씩 인력거 운전을 하는 만MAN 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말라카에서 트라이쇼를 타며 만씨와 함께한 시간은 유쾌함으로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말라카의 신선한 풍경 때문이기도 했고, 비온 뒤 씻은 듯 갠 하늘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많은 자전거 운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룩한 그의 배와 넉넉한 웃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화려하게 뽐낸 ‘이녀석’의 아늑한 품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전거와 만씨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베크만BECHMAN’. 그것은 어느새 만씨 자신이 돼 버린 녀석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도선미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말레이시아관광청 www.mtpb.co.kr ★MALAY FOOD & SWEET DESERT MALAY FOOD 말라카의 음식 계보는 복잡 다단하다. 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의 조리법이 말레이시아 특유의 향신료와 만나 새로운 퓨전 요리로 탄생했다. 달콤한 ‘자연주의’ 디저트도 말라카에선 꼭 맛봐야 한다. 단맛을 내는 데 코코넛 우유와 팜나무 수액으로 만든 흑설탕 ‘굴라Gula’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인공적이지 않고 몸에 좋다. 입 안에 감도는 두 가지 맛 ‘뇨냐푸드NONYA FOOD’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결혼해서 낳은 2세를 남자는 바바, 여자는 뇨냐라고 한다. 뇨냐음식은 말레이시아와 중국음식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데, 아마 혼혈 가정 내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주로 중국 조미료에 코코넛 우유, 말레이 향료를 함께 넣어 조리한다. 태생이 가정식 요리기 때문에 겉보기에 매우 단출하다. 레스토랑에서 먹더라도 휴대용 찬합에 담겨 나온다. 튀김요리인 바이띠Baidee, 중국식 야채볶음인 찹차이Chap Chye, 커리잎을 넣어 구운 치킨IncheKabin 등이 대표적이다. 뇨냐 음식은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말라카와 페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말라카식은 코코넛 우유를 많이 사용해 달달한 반면, 페낭식은 태국의 영향으로 매운 고추가 사용되는 점이 다르다. 뇨냐 식당은 존커 스트리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향에서 맛보는 원조 ‘아쌈페다스ASAM PEDAS’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아쌈페다스의 고향이다. 아쌈은 타마린드 열매즙을, 페다스는 ‘매운’을 뜻한다. 파인애플, 스타프루트 등 열대과일, 아쌈, 토마토, 절인 갓으로 만든 소스에 생선과 채소를 넣고 조리하는데, 겉보기엔 생선찌개에 가깝다. 맛은 전혀 비리지 않고 깔끔해 카레처럼 국물을 밥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 아쌈페다스를 맛보고 싶다면 카페 루마말라카KafeRumah Melaka를 추천한다. 다양한 말레이, 말라카 전통 음식으로 유명하며, 20년 된 캄풍의 풍취도 느낄 수 있다. 영업시간 오전 8시~오후 7시, 일요일 제외(영업시간 이후는 사전 예약 필수) 홈페이지 www.keferumahmelaka.com SWEET DESERT 코코넛밀크의 감미로운 맛 ‘사고Sago’ 바바 뇨냐들이 어렸을 때부터 즐겨먹는 간식이다. 사고팜 나무에서 나오는 전분을 하루동안 물에 담그면 젤리처럼 되는데, 이걸 동그랗게 뭉쳐서 은단만한 알갱이로 만들고, 코코넛 우유에 넣어 먹는다. 여기에 과일과 팜나무 설탕인 ‘굴라Gula’를 넣으면 매우 고소하고 달콤하다. 굴라는 메이플 시럽과 같은 방법으로 팜나무에서 추출한 설탕으로, 디저트에 주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식 팥빙수 ‘첸돌Cendol’ 첸돌은 말라카의 대표적인 디저트다. 얼음에 팥을 올리는 것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팥빙수와 흡사하다. 다른 점은 연유 대신 코코넛 밀크를, 시럽 대신 굴라를 사용한 자연식이라는 것. 특히 향료의 하나인 판단잎 즙으로 만든 녹색 젤리를 짧게 채썰어서 넣는 게 특징이다. 이 젤리는 해독 성분이 있어 몸에도 좋다. 독특한 향을 지닌 두리안을 좋아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첸돌에 두리안을 토핑해서 먹기도 한다. 존커 스트리트 입구에 있는 ‘산슈공San Shu Gong’의 첸돌이 유명하다. ▶travie info 말라카 가는 방법 인천에서 말레이시아항공, 에어아시아항공, 싱가포르항공 등을 이용해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까지 이동한 후 현지에서 버스, 기차를 타면 편하다. 1 쿠알라룸푸르 버스터미널 TBSTerminal Bersepadu Selatan에서 말라카행 버스 이용. 1시간45분 소요되며 매일 7:00~23:00 사이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2.3RM. www.tbsbts.com.my 2 쿠알라룸푸르 기차역KL Central에서 싱가포르 우드랜드Woodland행 열차South Line를 이용하면 된다.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루에 1대만 운행하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다. 쿠알라룸푸르발 말라카행은 오전 9시 출발, 2시간 30분 소요, 23RM. 싱가포르발 말라카행은 오후 1시45분 출발, 4시간 소요, 38RM. www.ktmb.com.my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문화 사랑 진정성 있나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문화 사랑 진정성 있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다. 1984년 5월 전두환 정권에서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해 9월에 시상했다. 행정자치부 기록에 훈장 수여 사유는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로 돼 있다. 1916년 관광차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던 26살의 야나기는 일본인들이 고려청자에 꽂혔을 때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민예’(민중적 공예)란 단어의 창시자로, 1922년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책을 펴내 조선 공예의 미학을 널리 알려 나갔다.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했다. 야나기는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기고문을 5차례나 실었고, 1년 뒤인 1920년 5월 동아일보에 같은 내용이 실렸다. 당시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했는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해방 이후 그 순수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그 건물을 가린다고 1923년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을 때 야나기가 반대해 철거되지 않고 이전만한 일을 두고 ‘조선문화를 사랑한 양심적인 일본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야나기는 조선인의 흰옷을 두고 “상복”이라며 “그 민족이 겪은 고통이 많고 의지할 곳이 없는 역사적 경험”을 탓하며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주장했다. 야나기는 동북아 3국의 예술로 ‘중국=힘=형태’, ‘일본=즐거움=색’, ‘조선=슬픔=선’이라는 도식도 내놓았다. 일제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은 수동적이고 소극적 민족이라는 맥락과 통하는 미학론이다. 서양에 몰입해 있던 일본의 시각에서 조선의 미를 평가했다는 점에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에드워드 W 사이드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려는 서양의 스타일”이니, 동양을 조선으로, 서양을 일본으로 대치하면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야나기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인지, ‘양의 탈을 쓴 일본 제국주의의 숨겨진 조력자’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야나기가 1940년을 전후로 일본 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글을 쓰고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야나기에 대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칭송하던 태도가 사라지게 된 계기다. 이병진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가토 리에 아이치학원대학 강사 등 한·일 소장학자 9명이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소명출판사)을 펴냈다. 논란이 무성한 야나기에 대해 한·일 학자들이 함께 처음으로 연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언론인 정일성이 2007년에 내놓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 펴냄)에 비교하면 너무 옹호 일색이다. 흔히 한국미의 특징에 대해 ‘무기교의 기교’라든지, ‘소박미’,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주의’라는 당대의 인식은 야나기로부터 유래했다. 이런 미학은 민예운동을 펼친 야나기가 1941년 발표한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라는 논문에서 시작됐다. 한국미에 대한 야나기 식 분석이 아직도 일부 통용되는 것을 두고 식민지 유산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야나기의 이런 조선미학론을 두고 해방 전에는 박종홍(1903~1976)이나 고유섭(1905~1944)이, 1960년대에는 시인 김지하, 1970년대에는 시인 최하림과 미술평론가 최열 등이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에 애정을 갖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애정을 제대로 활용할 사상이 없었고,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비애미’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김지하는 한국의 미를 “비애보다는 약동이, 저항과 극복을 고취하는 남성미”라고 주장했고, 재일 민속학자 김양기는 “백색은 태양으로 천손(天孫)의 증거”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병진 교수는 “이번 책은 야나기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도와주는 책이라기보다 한·일 학자들이 함께 연구했다는 점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이 교수는 “지명관 전 한림대 교수의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조선의 공예에 주목하고 가치를 부여한 것에 대해 야나기를 평가해야 한다’는 발언에는 동의한다. 그는 이어 “야나기가 1920년대 반제국주의자였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는 순진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만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이 벌어진 1940년 전후로 제국주의에 수렴해 간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신나경 부산대 강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과 ‘내셔널리즘’이란 논문에서 1940년대 신체제가 형성되자 야나기는 민예운동과 유사하다고 파악해 초기에 정부에 협력했지만,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야나기가 받고 있는 제국주의자란 혐의를 벗겨 주고 있다. 독자들이 텍스트를 잘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지점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일제 위엄 더하려고 조선총독부 치밀하게 설계했다

    일제 위엄 더하려고 조선총독부 치밀하게 설계했다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와 착취의 심장부였던 조선총독부의 상세 도면이 공개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8일 조선총독부 청사의 신축 당시 모습을 담은 도면과 전국 경찰서를 표준화한 도면을 비롯해 경찰관 강습소, 순사 교습소, 경찰참고관 등 치안 지원 시설의 도면 등이 담긴 ‘일제시기 건축도면 해제 Ⅵ’을 펴냈다. 1916년 짓기 시작해 1926년 완공한 조선총독부 청사의 세부 구조와 입단면 상세도에서는 그동안 확인이 어려웠던 청사 신축 당시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청사의 외부 입면 상세도와 중앙홀 입면 상세도, 총독실 설계도 등을 보면 일제가 식민 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청사 입지뿐 아니라 내부 설계와 공간 구성까지 매우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본관 외에도 신축 당시의 기관실 등 부속 건물과 추가로 지어진 별관들에 대한 도면이 함께 공개돼 청사의 전모와 함께 신축 이후 운영 상황 등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1910년 99곳에 불과하던 경찰서가 1920년 244곳으로 늘어난 것 역시 전 지역에 등급별, 시기별로 공통된 경찰서 표준 도면이 활발하게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발간된 해제집은 국공립도서관과 관련 학계에 배포되며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포털(http://contents.archives.go.kr)을 통해 온라인상에서도 볼 수 있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해제집을 통해 근대 건축사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고 일제 식민 통치 실상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청와대 입구 ‘일본식 석등’ 철거

    청와대 입구 ‘일본식 석등’ 철거

    청와대가 청와대비서실 출입문에 설치된 석등을 철거한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 혜문 스님은 이날 “청와대 행정동 입구에 설치된 일본식 석등 철거에 들어갔다.”면서 “청와대 정문과 영빈관 앞에 설치된 석등도 조만간 철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혜문 스님이 지난 2월 26일부터 청와대에 설치된 일본 석등 철거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제기한 지 거의 1년 만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청와대는 그동안 “‘전통식 대문이 아니란 점은 인정하지만,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일본식 석등의 철거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답변해 왔다. 혜문 스님은 “조선총독부에서 석등을 사용했지만, 조선에서는 절이나 묘 등 죽은 자를 위해 석등을 밝히기 때문에 청와대 정문 등에 이런 석등이 설치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혜문 스님은 지난 6월에도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구내에 있는 석등 6기가 일본식이라고 문제를 제기해 철거했다. 그는 “당시 석등은 국보 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석등을 본떠 만들어 모양은 우리 전통식이지만 배열에서 일본식 신사처럼 했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면서 “일본에선 신사를 꾸밀 때 일렬로 석등을 배치하지만 한국의 전통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혜문 스님은 해외에 빼앗긴 문화재 환수 운동에 주력해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실의궤 등 국보급 문화재 반환에 성과를 올려 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새해맞이 타종행사 준비에 바쁜 5대 종지기 신철민씨

    [김문이 만난사람] 새해맞이 타종행사 준비에 바쁜 5대 종지기 신철민씨

    매년 이맘 때면 기다려진다. ‘제야의 종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다. 우선 제야의 뜻이나 한번 알아보자. 제(除)는 섣달 그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夜)는 밤이다. 그러니까 섣달 그믐날 밤이다. 매년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다. 보신각 타종은 조선 시대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열고 닫기 위해 종을 쳐 온 데서 유래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1953년부터 시작해 세계적으로 독특한 새해맞이 행사로 정착했다. 평소 갖는 인간의 온갖 번뇌를 씻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일의 새로운 태양에 기대려는 경건한 행사로 여겨지고 있다. 자,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 왔던 또 한 해가 저문다. 뒤돌아볼 일도 많지만 그러하면 무엇하리. 더 새로운 앞날이 있는 것을. 인간은 어제에 대한 후회와 분노, 그리고 오늘의 질투에 사로잡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그냥 시원하게 종을 치자. 그리고 비워버리자. 종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둥~, 둥~. 온 천지에 퍼져 나간다. 굳이 33번일 필요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의 종을 소중하게 쳐서 올 한해 동안 소홀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보신각종(보물2호)은 조선 세조 14년 (1468년)에 주조돼 정릉사에 걸려 있다가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 때 절이 불에 타 종루로 옮겨졌다. 이후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걸면서 보신각이라 불리고 있다. 1985년까지 원래의 종으로 타종 행사를 했으나 종의 보호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오늘날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걸어둔 종은 1986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복제품으로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보신각종은 조선 시대에는 서울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는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타종행사로 새해를 맞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 일반 시민들에게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체험의 시간을 마련해 놓고 있어 미리 신청을 하면 누구나 종을 칠 수 있다. 보신각 종지기를 인생의 업으로 살아 가는 신철민(39)씨. 제야의 타종행사 준비로 바쁜 지난 21일 보신각에서 그를 만났다. 시민들을 상대로 종치기 해설을 하는 것도 바쁜 일이지만 제야의 타종행사가 그에게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행사이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보신각 바로 뒤 컨테이너 막사 안에 있다. 자리에 앉으면서 날씨도 추운데 힘들지 않으냐고 했더니 “종은 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냐.”며 활짝 웃는다. 제야의 타종행사는 4명씩 4개조로 16명이 서서 종망치(당목)의 손잡이를 잡고 치는 것이지만 사실은 종지기인 신씨가 종망치 맨 뒤에서 ‘5, 4, 3, 2, 1’하면서 힘껏 밀어쳐야 ‘둥~’하는 종소리가 비로소 울려퍼진다. 타종행사에 참석하는 인사는 종을 치는 당목에 손을 올려 약간의 힘만 주고 있을 뿐 실제로 당목을 움직이는 사람은 바로 신씨다. 시간과 속도, 그리고 힘을 정확하게 조절하고 맞추어야 제대로 된 종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종이 얼어붙지 않도록 마사지를 적절하게 해줘야 한다. 종을 약하게 진동시켜 추위에 얼어 있는 종을 깨우는 일이다. 종의 안전을 위해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신씨는 5대 종지기로 7년차이지만 165년째 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어떻게 해서 보신각종과 인연을 맺었을까. “원래부터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2006년 중반쯤 보신각 상설 타종행사에 자원봉사 형식으로 참여하게 됐지요. 당시 보신각 관리소장은 돌아가신 조진호 선생님이었는데 4대에 걸쳐 보신각을 지켜온 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한테 타종과 관리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해 12월 제야의 타종행사 며칠을 앞두고 지병으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저한테 ‘보신각종을 꼭 지켜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서울시에 추천서를 써주었지요. 저도 선생님한테 ‘평생 종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신씨는 5개월 가까이 종치는 법 등을 배운 뒤 스승의 유언대로 5대째 종지기로 대를 이어가게 됐다. 신씨는 스승과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일을 배울 때 많이 혼났지만,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쳐주었다.”고 회고한다. 스승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다시 설명이 이어진다. “선생님은 1962년부터 보신각을 관리해온 종로 토박이입니다. 구한말 궁궐 관리였던 조부님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고의로 보신각 앞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하자 곡괭이를 들고 나가 허물었고 또 영친왕 근위대 출신인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6·25당시 매우 급한 상황임에도 ‘종님을 떠날 수 없다.’며 피란을 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역시 부친의 유언을 따라 종지기 가업을 이었지요. 사실은 선생님이 한 번 정도는 주인공으로 종을 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는 스승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아들처럼 항상 곁에 있었으며 장례식 때에도 위패들고 보신각까지 와서 생전의 정신을 되새겼다. 또 보신각 주변에 있는 모과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4그루 나무에 스승의 혼을 뿌리기도 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신씨는 스승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이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해마다 명절 때면 과일 사들고 차례상에 올리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은 혼자 결정해야 했다. 함께 지낼 때 배운 것을 토대로 ‘종치는 힘’ ‘관리요령’ ‘타종방법’을 터득해나갔다. 2007년에는 종소리가 이상하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있자 전국에 산재한 범종을 조사하며 보신각종에 잘 어울리는 종망치 나무를 찾아내기도 했다. 가장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상설 타종행사를 진행하면서 시민들이 종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소원을 말해봐 코너’를 만들었던 것이다. 종에 손을 대고 울림을 느끼며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했더니 호응도가 예상보다 아주 높았다. 실의와 좌절감에 빠진 시민들이 종을 치고 나서 소원을 얻었다는 편지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중등 임용고시에 낙방한 대학 졸업생이 종을 치고 나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연,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하고 결혼 승낙을 받은 남자의 사연 등이다. 외국인들한테는 ‘원더풀’이라는 찬사를 많이 받았다. 신씨도 힘들 때에는 종을 안고 하소연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종소리를 몸으로 느끼는 것, 즉 종과 한 몸이 돼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웃는다. 종을 치는 비법이 별도로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종을 치는 방법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날의 기온, 습도, 기압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을 치는 의미를 마음에 담아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처음 보신각종 타종을 했을 때 궁합이 맞는다는 숙명 같은 느낌을 받았다. 종도 영혼이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인다. 그는 종을 칠 때마다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보신각 주변에 야간 취객들은 없을까. 있으면 어떻게 대응할까. “(취객들이)많이 있습니다. 매뉴얼 대로 행동을 하지요. 먼저 호루라기를 붑니다. 그래도 안 나갈 경우 ‘여기는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그러면서 ‘종에 관심이 있으면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1시 40분까지 오세요. 그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소망을 물었더니 “영원히 ‘종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스승님의 손자에게 종지기를 물려주는 것”이라며 활짝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신철민 종지기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경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문화재와 범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를 했다. 그러던 2006년 중반 무렵 보신각 타종행사 자원봉사로 보신각종과 인연을 맺었다. 그해 보신각에서 4대째 종지기로 가업을 이어온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유언대로 그 뒤를 이어 평생 종과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 또 스승의 유언으로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 역사문화재과 공무원 신분으로 종 관리를 맡아오고 있다. 2006년 12월 31일부터 제야의 타종행사를 맡았다. 이후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 상설 타종행사를 주관하고, 그의 제야의 타종은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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