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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사르가 건넌 ‘루비콘강’ 진짜 위치는?

    카이사르가 건넌 ‘루비콘강’ 진짜 위치는?

    BC 49년. 로마의 갈리아주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기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당시 원로원이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어긴 것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쿠데타였다. 역사적인 이 사건에서 유래한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말은 지금도 국내 정치인들이 단골로 사용하는 언어다. 최근 역사적 명소인 루비콘강을 놓고 이탈리아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고있다. 바로 역사 속 루비콘강의 실제 위치가 어디냐는 것. 이탈리아 현지언론에 따르면 조만간 3명의 역사가들이 이 루비콘강을 놓고 ‘모의 재판’을 벌일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있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북동부를 동류(東流)하여 아드리아해(海)에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황제를 거치며 루비콘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고 홍수 등으로 지형이 바뀌면서 정확한 위치도 ‘강 건넌 신세’가 됐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 당시 역사가들이 모여 피우미치노(Fiumicino), 피시아텔로(Pisciatello), 우소(Uso)를 루비콘강의 유력 후보지로 꼽았으며 이중 현재까지 실제 루비콘강이라고 인정받는 곳은 바로 피우미치노다. 그러나 역사가 파울로 투로니닌은 “피시아텔로가 진짜 루비콘”이라면서 “과거 지도와 조반니 보카치오(14세기 소설 ‘데카메론’을 쓴 이탈리아 소설가)작품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전직 의원 지안카를로 마주카는 “이미 역사가들 사이에 정답은 내려졌다. 피우미치노가 진짜 루비콘”이라며 일축했다. 한편 이번 모의 재판은 지역 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리며 각 루비콘 후보지를 대표하는 역사가들이 모여 토론할 예정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씨줄날줄] ‘백제인의 얼굴’ 발굴한 일본인/서동철 논설위원

    군수리(軍守里) 절터는 부여 시가지에서는 조금 떨어진 궁남지 서남쪽에 있다. 지금도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곳에서는 1935년부터 이듬해까지 발굴조사가 벌어졌다.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같은 축에 나란히 서 있는 1탑 1금당 구조가 확인됐는데, 이후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로 알려지게 된다. 군수리 절터가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특히 높이가 13.5㎝에 불과한 석조여래좌상은 ‘백제인의 얼굴’로 알려지며 백제인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로 떠오르게 된다. 곱돌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에 방금 완성한 듯 조각칼 자국이 선명한 석조여래좌상은 6세기 백제 문화 전성기의 모습을 가감 없이 과시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을 수습한 사람은 일본인 고고학자 사이토 다다시였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1934년 조선에 건너온 그는 총독부박물관 산하 조선고적연구회 연구원이었다. 석조여래좌상은 1936년 제2차 조사에서 나왔다. 사이토는 2005년 부여박물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절터 한가운데서 주변과는 종류가 다른 뻘흙을 발견했는데, 꽃삽으로 표면의 흙을 제거하고 손으로 파 내려가는 과정에서 손끝에 불상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부여고적보존회라는 동호인 단체가 지역 고적 보존에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백제 와당이 흩어져 있고 건물 초석이 노출된 군수리를 조사해 달라는 회원들의 요청에 따라 발굴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부여박물관 강연에서 사이토는 97세 나이에도 기억이 또렷했고, 부소산 답사에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랬던 그의 부음이 뒤늦게 전해졌다. 지난달 21일 105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다. 사이토는 1940년 한국을 떠나기까지 총독부박물관 소속 경주박물관장을 맡으며 신라고분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에 주력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인물로 기록된다. 북한 관련 고고학 정보가 거의 없던 1996년에는 평양을 찾아 ‘북조선 고고학의 신발견’을 펴냈고, 2003년에는 두 차례 답사 여행 끝에 한국의 독특한 불교 유적 당간을 다룬 ‘당간지주의 연구’를 내놓았다. 모두 연구 일선에서 한참은 멀어졌을 나이의 성과로 학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사이토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국의 옛문화 연구에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였다. 하지만 총독부 관변학자로 그가 거둔 성과의 한계 또한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의 죽음이 우리 학계에 식민사관을 떨쳐내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으면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도시의 새 심장이 된 서울광장 서울광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광장이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품은 공간이다. 도시의 광장은 마치 도시의 가슴과 같다. ‘시청 앞’이라는 한마디에 백 가지 의미가 함축됐다.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화 항쟁, 월드컵 거리 응원 등 숱한 근·현대사의 무대이자 현장이었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서울광장은 울분과 정체의 공간이었다. 시위대와 최루탄이 부딪치고, 구호와 바리케이드가 맞선 불행한 탄식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동차를 몰고 시청 앞 광장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면 비로소 서울 시내에서 운전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 8가닥의 진입로와 8가닥의 퇴출로가 뒤엉키던 교통 광장이었다. 2004년 메마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자유로운 보행 공간 ‘서울광장’으로 부활했다. 또 울분과 탄식이 작열하는 분노의 광장에서 여유와 즐김이 있는 문화의 광장, 젊음의 광장으로 진화했다. 서울시청과 서울광장의 존재는 서울의 도시 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경성부청사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경운궁의 기운을 누르면서 일본인 상업지구인 황금정(을지로)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노렸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옛 경성부 청사를 그대로 둔 채 어정쩡하게 짓는 바람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불평불만의 건물’이 됐다. 얼마 전 건축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최악의 한국 현대 건축물’ 1위에 선정됐다. 건물도 문제지만 건축 과정이 최악이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시 짓자는 얘기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 1935년 세워진 경성부민관은 오늘의 서울시의회다. 황국신민화를 부추기는 정치 집회와 위무 공연이 열리던 시민회관 용도로 지어졌다. 부민관 폭파 사건의 현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후 미군 사령부로 사용됐다. 1975년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이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묻혀 있다. 3·15 부정 선거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이 건물 앞에서 불붙었다. 1980년 태평로 확장 공사 때 옛 부민관은 대부분 잘려 나갔다. 국내 최대 규모 오피스 빌딩 중 하나인 서울파이낸스센터는 최악의 건축물이라는 불명예를 서울시 신청사에 물려준 사연 많은 건물이다. 1984년 호텔을 지으려고 공사에 착수했지만 수뢰 사건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건물주가 부도를 맞는 바람에 철골 구조로만 도심에 15년 동안 서 있었던 유령 건물이었다. 완공 전까지 수십 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고 옷을 벗었다. 싱가포르투자청은 2000년 이 빌딩을 3550억원에 인수했지만 지금은 1조원대를 호가한다고 한다. 한국프레스센터 빌딩은 1985년 서울신문사와 신문회관 자리에 지어졌다. 흩어져 있던 25개 언론 관계기관 및 단체와 5개의 주한 외국 언론기관이 입주한 명실상부한 한국 언론의 총본산이다. 경기도 가평산 화강암을 외벽에 장식하는 등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했다. 신문회관은 옛 경성일보(매일신보) 부지를 넘겨받은 서울신문사 부지 중 568평에다 정부 예산 1억원을 들여 3층짜리 건물로 지었는데 1962년 개관 당시 서울시청을 옆에 두고 국회의사당을 마주하는 태평로 길가의 당당한 건물이었다. 무교·다동 재개발사업의 하나로 지어진 프레스센터는 지하부터 11층까지는 서울신문사가 소유하고 12층부터 20층까지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갖는 소유권 수평 분할 방식이 적용됐다. 이는 훗날 맞은편 광화문빌딩(동화면세점) 소유권 정리의 선례가 됐다. >>내 이름 이렇게 태어났어요 태평로(太平路)는 일제가 기획하고 만든 대표적인 신작로다. 세종로사거리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600m의 주요 간선대로다. 세종로가 정치의 심장부라면 태평로는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부다. 도로명 통합에 따라 2010년 세종로와 합쳐 세종대로로 승격했다. 태평로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묵었던 태평관(太平館)이 있었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다. 옛 태평관이 있던 곳은 오늘의 중구 남대문로 4가 대한상공회의소 자리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남별궁(조선호텔)에 묵기 전까지 사신 숙소로 쓰였다. 이후 남별궁은 주요 사신, 태평관에는 보조 사신(差官)이 주로 묵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백관과 함께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옆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사신을 맞이하고 나서 경복궁에서 황제의 칙서를 받고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연 뒤 모화관까지 배웅했다.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東平館)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2가 인현어린이공원 일대에 있었다. 일제가 새 길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면서 일본 사신 숙소인 동평관을 딴 ‘동평로’가 아니라 중국 사신을 모신 태평관에서 이름을 따온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국 사신을 모시듯 일본인을 극진하게 모셔라’라는 풀이도 가능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태평로는 경복궁과 남대문을 직접 잇는 길을 내지 않았던 조선의 남북 간 상징 축선을 무시하고 육조거리를 보호하는 언덕인 황토 마루(세종로사거리)를 깎아내는 등 무리한 공사를 통해 만들었다. 이 길을 내느라 고종이 정사를 보던 경운궁(덕수궁) 담을 헐어내 궁 동쪽 전각들이 잘려 나갔고, 남대문 성곽도 이때 헐어냈다. 성곽을 잃은 남대문은 서울의 외딴 섬 신세가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잇는 태평로 라인에 경성부 청사(서울시청), 경성역(서울역)을 각각 지었다. 일제가 남긴 3대 건물이다. 경복궁 안에 지은 조선총독부는 민족 정기 회복 차원에서 걷어냈지만 서울시청과 서울역은 건재하다. 지금의 태평로 일부를 ‘황토현 신작로’라고 지칭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1896년 7월 여러 날의 독립신문에는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새 길을 낼 계획이 세워져 측량했다’, ‘정동에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힌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에도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길을 황토현 신작로라고 부른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1901년에는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신교(新橋)라고 불렀다. 1910년에 출판된 경성시가전도를 보면 황토현~서울시청까지를 신교통(新橋通)이라고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관보에도 고종이나 순종이 신교통을 통해 종묘에 행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일신보 1913년 8월 22일 자에는 남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태평로 확장 공사 사진이 실렸다. 1914년 태평로는 길 이름이자 동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내려온다. >>덕수궁 너만 보면 나도 아파 태평로와 덕수궁은 악연이 깊다.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세 번이나 궁이 잘려 나가는 피해를 봤다. 일제가 한 번, 우리 손으로 두 번을 훼철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도로 신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당시 경운궁 담벼락이 처음 잘려나갔다. 일제가 폭 27m, 길이 1009m의 태평로를 건설하면서 육조거리(광화문광장)의 중심과 태평로의 중심을 맞추지 않고 광화문 우측 끝 선으로 맞춘 것은 고종이 경운궁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속을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경운궁을 심하게 축소해서 민심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는 우리 스스로 덕수궁 훼손에 앞장섰다. 1961년 확장 때 덕수궁 돌담을 헐고 속이 훤히 보이는 철책으로 바꾸면서 공원화하는 우를 범했다. 1968년에는 철책마저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문(대안문)은 담장과 분리돼 확장된 태평로 안에 홀로 있다가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는데 이때 16m 뒤로 밀려났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은 일제의 상징 길인 태평로 및 일본과 각축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외국 공사관, 교회에 터 대부분을 빼앗기고 한낱 도심공원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역사책 속에 해프닝처럼 기술될 뿐이다. 일제가 태평로를 확장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경운궁과 정동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되살리려는 심상찮은 기운이 일자 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멀쩡한 경성일보를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경성부 청사를 지었다. 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단(天壇)의 역할을 하는 원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으면서 하늘과 땅의 신령들을 모시는 황궁우를 호텔 장식품으로 배치했다. 조선은행(한국은행)과 미스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을 지어 일본인 중심 상업지역으로 육성했다. 결과적으로 고종이 정궁을 경운궁으로 옮겨 몰락해 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서울의 도시 구조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작용했다. 이후 현대화 과정에서 서울의 실질적인 중심이 세종로에서 태평로를 따라 개편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joo@seoul.co.kr
  • [씨줄날줄] 반가사유상의 외출/서동철 논설위원

    경복궁 안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것은 1995년이다. 논란이 뜨거웠는데, 존경하는 어르신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찬성하는 쪽도 옳고, 반대하는 쪽도 옳아. 그런데 없어지면 다른 건 몰라도 눈은 시원할 거야. 광화문 거리에서 북악산도 보이고….” 생각해 보면, 온갖 당위를 끌어 들였던 찬반 논리는 간데없고 지금은 어르신의 말씀만 진리가 되어 남았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미국 전시가 결국 불발됐다. 문화재청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반출 허가를 신청한 목록에서 반가사유상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중앙박물관을 비롯해 반출에 찬성한 쪽은 한국 문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 문화 중심지인 뉴욕의 대표적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그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무산됐다고 한숨짓는다. 반출을 반대한 쪽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국가대표급 문화재의 해외 전시에 신중해야 하는 만큼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반긴다. 총독부 청사 철거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 얘기는 맞고, 누구 얘기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저 사유상이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결론이 내려졌을 뿐이다. 전시를 추진하는 사람들조차 가정이지만, 사유상이 없는 중앙박물관이란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전시회 대표 유물의 반출이 좌절된 중앙박물관 심정도 이해가 간다. 전시가 확정된 문화재는 국보 9건과 보물 14건을 포함해 130점 남짓이다. 선산 금동보살입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불교 문화의 정수라면,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들은 왕실 문화의 꽃이다. 특히 현대적 감각이 물씬 느껴지는 황남대총 남분의 금목걸이는 뉴욕의 멋쟁이들도 탐낼 만한 명품이다. 감은사터 서삼층서탑 사리장엄구와 경주 계림로 보검, 황남대총 남분 유리잔이 더해진 것은 신라의 황금 문화가 로마 및 페르시아 문화와 활발하게 교섭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의 부재(不在)는 전시회가 현지 관람객들에게 던질 문화 충격을 감소시키고, 전시장의 구성마저 다시 손보아야 할 만큼 치명적이다.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과 중앙박물관·문화재위원회 모두 직분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이제 남은 것은, 달라진 여건에서도 중앙박물관이 메트로폴리탄 전시회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반가사유상 못지않게 뉴욕에 가는 문화재 하나하나가 중요한 문화 자산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황토마루서 바라본 사대문 풍광에 정도전이 칭송詩 읊었다는데… 세종로 사거리는 본디 사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 지도를 펼쳐 보면 오늘의 광화문광장인 육조거리와 남대문을 잇는 남북 간 도로는 없었다. 지금의 태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솟아올랐다가 정동과 청계천광장을 거쳐 무교동 쪽으로 흘러내린 나지막한 고개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이 고개가 황토마루(황토현)였다. 아쉽게도 지명으로만 남아 있을 뿐 사진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생김새와 위치를 짐작할 뿐이다. 고개 덕분에 사대문 안의 등뼈에 해당하는 남북 간 상징 축선은 육조거리에서 정(丁)자 모양을 그리면서 운종가로 꺾여 종루(보신각)까지 이어지고 나서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 남대문까지 뻗었다. 황토마루에서 바라보는 사대문 안의 풍광이 가장 아름다웠다. 삼각산을 병풍처럼 두른 북악과 경복궁, 그리고 육조 관청 담벼락(長廊)이 장관을 이뤘다. 한양천도 직후 정도전은 ‘여러 관아 높은 건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이/하늘의 별들이 북두칠성을 둘러쌌네/달 밝은 새벽 관청거리 물같이 고요한데/말 구슬 소리 들려오고 티끌 한 점 일지 않누나’라고 육조거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아마 야밤에 황토마루에 올라 북악 쪽을 바라보면서 읊었을 것이다. 인왕산 지맥인 황토마루는 풍수지리학상 관악산 불길이 경복궁에 미치는 것을 막는 장치였다. 그래서 길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청계천을 파낸 흙을 보태 언덕을 덧쌓았다. 조선지도에 동령동(東嶺洞)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친 황토마루 동쪽 마을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軍器寺)가 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신문(한국프레스센터)과 서울시청쯤이다. 일제는 1912년 ‘황토현 언덕을 없애서 폭 100m, 길이 220m의 광장을 만든다’는 총독부 훈령을 내려 고개를 뭉개 버렸다. 황토현을 없애고 나서 광장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태평로를 내서 경복궁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일본의 상징 축선을 만들었다. 황토현을 없애 버림으로써 육조거리를 파괴하고, 조선의 남북 상징 축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광복후 신생 대한민국, 지명 즉흥 결정 육조거리·운종가 전통 이름 사라져 광복 후 1년여 지난 1946년 10월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은 일본식 동명이나 가로명을 바꾸는 작업을 했다. 당시 군정청 문교부장(교육부장관) 유억겸의 제안에 따라 일제강점기 가로명의 뒷말인 통(通)을 로(路), 정목(丁目)을 가(街),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특히 큰 가로명에는 역사상 위인의 시호를 붙이기로 했다. 개정 작업에 참여한 국어학자 황의돈은 회고록에서 “세종로는 우리나라 문치의 위인으로서 민족의 태양과 같은 세종대왕의 이름을, 충무로는 무인으로서 위훈을 추모하는 충무공을, 을지로는 육군의 대표 인물인 을지문덕을, 원효로는 불교의 대표 인물인 원효 대사를, 퇴계로는 유학계의 대표 인물인 이퇴계를, 그리고 충정로는 순국열사 중에서도 맨 처음인 민충정공으로 택정하였다”라고 썼다. 이에 따라 광화문통은 세종로, 황금정통은 을지로, 본정통은 충무로, 소화통은 퇴계로 등으로 변경됐다. 개정 작업은 논란 없이 간단하게 끝났다. 36년이란 식민 통치 기간이 너무 길어선지, 광복의 기쁨에 들떠선지, 일제잔재 지우기에 열중해선지 세종로 사거리가 황토마루였다는 점을 일깨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광화문통을 육조가로 되돌리자는 의견이 개진됐으나 무시됐다. 일제가 새로 만든 대표적인 길인 태평통도 태평로로 버젓이 살아남았다. 종로도 옛 지명인 운종가를 되찾지 못했다. 지명과 가로명 개정 작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열렸지만,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지명이란 자연과 지리, 풍속, 제도의 산물임에도 식민통치를 갓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은 숙고 없이 지명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오늘날 사대문 안을 오가는 숱한 청소년들이 육조거리와 황토현, 운종가 같은 우리 지명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좋은 역사나 전통이라도 계승하지 않으면 잊히게 마련이다. 교보빌딩옆 ‘고종즉위40년 비전(碑殿)’ 도난당하고 헐리고 부실 복원까지 세종로와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이 서 있다. 육중한 덩치의 교보빌딩 때문에 일견 왜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날아갈 듯한 추녀가 북악에 겹쳐 보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기단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장중한 기품이 주변 고층건물 숲을 압도한다. 1902년 세워진 이 건물은 건축사적으로 대한제국기 전통 양식의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된다. 현대식 건물밖에 없는 삭막한 세종로 사거리에 역사의 향기를 풍기는 존재다. 한때 세종로 사거리를 ‘비각 앞’이라고 불렀다. 이 건물의 가치를 깎아내린 일제의 몹쓸 잔재다. 아직도 관광 안내 책자나 교통 관련 안내문에 비각이라고 잘못 기록한 사례가 많다. 비각(碑閣)이 아니라 ‘비전’(碑殿)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궁궐 전(殿)자는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이 사용하는 건물에만 붙는 글자다. 전통 건물은 격에 따라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누(樓)-정(亭) 순으로 이름이 붙는데 비각은 비전의 부속 건물에 불과하므로 이를 바꿔 부르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이 쓴 비문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썼으며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세운 일’ 등이 기술돼 있다. 단순히 고종 즉위 40년을 기리는 건물이 아니다. 대한제국 건국 사실과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헐릴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66년 광화문 지하보도 공사 당시 비전이 공사에 거추장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60년밖에 안 된 것이니 헐어 버리라”라고 막말을 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10년 후 종로길 확장 공사와 교보빌딩 신축공사 때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1979년 해체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자리 잡았지만 부실 복원을 면치 못했다. 지붕 꼭대기 절병통(節甁?) 모양이 달라졌다. 어찌 된 셈인지 회칠을 한 추녀 마루가 기와로 바뀌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어처구니(雜像)도 간데없다. 또 비를 보호하는 꽃담과 철제 틀도 사라져 옹색해졌다. 출입구였던 만세문(萬歲門)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뜯어다가 자신의 집 대문으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쟁 통에 일부 파손됐다. 비전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리케이드 밖에선 비문이 보이지도 않는다. 광화문광장을 오가는 숱한 내외국인들이 대한제국의 당당한 위엄을 엿볼 수 있도록 원형대로 복원돼야 한다. 국제극장·감리회관 부지에 광화문 빌딩 주인 둘, 담당 구청도 둘이 된 사연 세종로 사거리는 광장이 들어설 자리였다. 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52년 3월 25일자 내무부 고시에 의해 확정된 7만 700㎡의 대광장 계획범위 안이기 때문이다. 전후 복구계획에 따라 세종로 사거리 중심에서 반지름 150m 원 넓이의 광장 부지가 잡혀 있었다. 이 반지름 안에는 지금의 교보, 현대해상화재, 동아일보, 광화문우체국, 광화문빌딩 등이 포함된다. 이 계획은 엄청난 로비에 의해 꼬리를 내렸다. 1962년 12월 8일자 건설부 고시에 의해 3만 3228㎡(반지름 102m)로 확 줄었다. 광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개발지상주의 때문이었다. 도로와 광장계획에 걸려서 정식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땅이지만 가(假)건물을 허용했다. 청계천 쪽 동아일보사와 정동 쪽 국제극장, 감리회관이 대표적 가건물이었다. 동화면세점이 입주한 광화문빌딩의 탄생 비화도 흥미롭다. 1986년 신문로 도심재개발사업에 따라 1950년대 말~60년대 초 장안 최고의 개봉관이었던 국제극장과 감리회관을 헐고 새 건물을 짓게 됐다. 시행 주체는 동아흥행과 감리회유지재단이었다. 건축허가 과정에서 2개의 건물을 따로 짓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낫다는 아이디어가 서울시와 건축위원회 등에서 제시됐다. 시행 주체를 설득하고 나니 담당 구청이 걸림돌이었다. 두 건물이 속하는 종로구청과 중구청이 막대한 세원 확보를 놓고 한 치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국제극장은 종로구 세종로동 211번지였고, 감리회관은 중구 태평로 1가 68번지였다. 설득과 타협, 숙고를 거듭한 끝에 수평분할 방식에 합의했다. 지하 5층에서 지상 12층까지는 동아흥행 소유로 종로구에, 지상 13층부터 20층까지는 감리회유지재단 소유로 중구에 속하게 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 건물은 1993년 완공됐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화문빌딩은 몸체는 하나, 주인은 둘, 담당 관청도 둘인 특기할 만한 건물”이라고 말했다. joo@seoul.co.kr
  • 여명의 눈동자부터 신의까지 ‘드라마 제왕’ 김종학 PD는 누구

    여명의 눈동자부터 신의까지 ‘드라마 제왕’ 김종학 PD는 누구

    김종학 PD가 23일 성남의 한 고시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그의 과거에 네티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종학 PD는 1951년 생으로 경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MBC에 입사했다. 1981년 ‘수사반장’으로 연출자로 데뷔한 김종학 PD는 ‘동토의 왕국’, ‘제5열’, ‘인간시장’,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조선총독부’ 등 묵직한 역사소재의 드라마를 잇따라 연출했다. 이후 송지나 작가와 함께 했던 ‘여명의 눈동자’가 큰 성공을 거둬 스타 PD 반열에 올랐다. ‘여명의 눈동자’ 이후 MBC에서 퇴사한 김종학 PD는 프리랜서를 선언, 첫 작품이었던 SBS ‘모래시계’를 대히트시키며 배우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 이정재를 국민 배우로 키워냈다. 사실상 개국 초기 SBS의 이름을 대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98년 자신의 이름을 딴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한 김종학 PD는 2009년까지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드라마 연출과 제작에 모두 힘썼다. 연출자로 ‘고스트’, ‘대망’, ‘태왕사신기’ 등을 만들었고, 제작자로 ‘고스트’, ‘아름다운 날들’, ‘풀하우스’, ‘해신’, ‘하얀거탑’, ‘베토벤 바이러스’ 등을 탄생시켰다. 1984년 한국방송대상 연출상과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1992년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1995년 ‘모래시계’로 백상예술대상 연출상과 작품상, 2003년 ‘대망’으로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등 각종 상도 휩쓸었다. 김종학 PD는 최근 1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SBS ‘신의’ 배우 출연료와 스태프 임금 미지급과 관련해 배임 및 횡령 혐의로 피소돼 어려움을 겪었다. 경찰 조사를 받았고 출국금지 조치를 당해 심리적 부담감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어린이·청소년 책꽂이]

    마주 보면 무섭지 않아(질 티보 지음, 자니스 나도 그림, 정문주 그림, 어린이 작가정신 펴냄) 2년간 병마와 싸운 소년은 모두가 무서워하는 죽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물 한 모금을 건네고, 오렌지를 나눠 먹으며 소년과 죽음은 서로를 아끼게 된다. 죽은 척 장난치는 소년을 보고 놀라 부들부들 떠는 죽음. 죽음은 소년에게 낮은 밤이, 더위는 추위가, 생명은 죽음이 필요하다는 세상의 이치를 일러준다. 어려운 주제를 섬세한 감성의 필치로 부드럽게 풀어냈다. 2008년 캐나다 총독상 수상작. 9000원. 윤선비와 함께 한 발 한 발 돌아보는 한양 도성(나각순 지음, 강윤정 그림, 황은주 정리, 그린분 펴냄) 정조 임금이 조선을 다스리던 200년 전, 과거를 보러 수도 한양에 올라온 윤 선비를 따라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창의문 천장의 그림에 닭이 그려진 까닭과 지금은 사라진 숭례문 남쪽의 연못 얘기까지. 우리를 품고 있는 도시의 옛 모습을 어린이들이 쉽고도 깊숙이 알 기회다. 1만 4000원. 열다섯이 묻고 여든이 답하다(졸리 쿠엔틴 칸실 지음, 지여울 옮김, 서해문집 펴냄)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과 과학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 왜 이렇게 다른 거죠?” “진실과 행복은 무슨 관계인 거예요?” 호기심 많은 10대 소녀 퀸타나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주에서 시작해 지구 생명의 기원, 종교의 본질, 과학과의 갈등, 죽음의 의미 등으로 이어지는 물음에 답하는 80대 할아버지 ‘오파’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심이 깃든 답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혀 준다. 9800원.
  • [기고] 서울시교육청, 초등 한자교육 중단하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

    [기고] 서울시교육청, 초등 한자교육 중단하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서울시교육청의 방침에 대해 한글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은 한자교육추진단을 만들어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교재 개발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올해 2학기부터 한자교육을 서울시교육청의 특색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해왔다. 국어 이해능력을 높이고 세대 간 언어장벽을 없애기 위해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며 국어·수학·과학·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를 중심으로 한자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글전용이 교과서에 정착된 지 40년. 한글은 배우기 쉽고 편리해 지식·정보통신시대에 세계에서 주목받는 으뜸글자다. 이제 와서 초등학교에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구시대적 발상은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자의 짐을 지워 가방을 무겁게 만드는 일이다. 서울시교육청의 한자교육 발상은 한자단체들의 주장과 그 목표가 거의 일치한다. 이들의 추진계획은 우선 현행 교육과정에서 허용하는 재량활동과 방과후 활동 등의 범위 안에서 한자교육을 강화하고 학부모들의 찬성 반응을 유도한 다음, 이를 정규교과에 반영하여 궁극적으로는 초·중·고등학교의 모든 교과서에 한자를 혼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이 한자교육을 주장하는 이유로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어사전(한자어 비중 69%)이다. 그러나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과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의 한자어 비율은 각각 52%와 57.3%이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생활언어는 이미 한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교’를 ‘學校’로 써야만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개념어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개념어도 한글로 가르쳐서 모양이나 모형을 보여주면 금방 이해한다. 간혹 어려운 개념어가 교과서에 있다 하더라도 설명이나 국어사전을 통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 모든 한자어를 한자로 가르쳐 배우는 것이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우리는 시간과 경제성을 따져 봐야 한다. ‘세대 간 언어 장벽을 없애기 위해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말도 어이없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자 실력 차이로 세대 간에 언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국어 교육=한자교육’이라는 등식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다른 아이가 한자를 배우니까 우리 아이도 가르쳐야 한다는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자극, 한자 사교육을 조장하여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쓰는 상용한자는 중·고등학교에서 한문시간에 1800자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으로 한자교육은 충분하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한자를 더 공부할 사람은 알아서 배운다. 서울시교육청은 우리 한글문화의 역사를 조선시대로 되돌리려는 서당식 한자교육 추진을 중단하고 창의적인 국어교육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에는 광장의 개념까지 포함됐다. 국가의례나 문화행사가 열리는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광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폭 58m, 길이 200m의 큰길이었다. 노면이 고르고 배수가 잘 됐으며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멋진 길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이나 개항 이후 방문한 백인 외교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수선전도, 조선경성도 등을 보면 육조거리의 관아는 위계에 따라 배치됐다. 의정부가 광화문 왼쪽 맨 앞자리인 현재의 광화문 열린 광장 자리에 있었고 이조, 한성부, 호조가 뒤를 이었다. 반대쪽 정부서울청사 쪽에는 삼군부,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차례로 터를 잡았다. 서울역사문화연구소 이상협 소장의 논문 ‘조선시대 육조거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의정부와 예조 등 모든 관아가 육조거리에 직각 방향으로 있으며 육조거리의 공간 구성과 관아 배치는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있는 공간 구성의 틀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조성 당시의 배치 구조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만 1900년대 전후에 촬영한 사진과 관아 그림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양쪽의 긴 담장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긴 행랑 때문에 육조를 흔히 육조장랑(六曹長廊)이라고도 지칭할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의 행정관청인 육조라는 명칭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거리 이름을 광화문통으로 바꿨다. 육조장랑은 뜯겨 나갔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 신청사를 짓자마자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 버리고 나서는 총독부 광장이라고 호칭했다. 어용 군중집회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하면서 군정청 광장이라고 불렸다. 정부 수립 기념식이 개최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육조거리로 복권되지 못하고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리를 광화문이나 광화문광장이라고 즐겨 부른다. 세종로라는 작위적 지명보다 현존 구조물인 광화문이 더 친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세 번이나 옮겨지고, 두 번이나 불탄 광화문 수난사가 마음속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1946년 해방 직후 구성된 지명위원회는 국가 중심가로의 역사성을 간과했다.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육조대로라는 지명을 원상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세종로가 100m의 도로폭을 갖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맥아더의 호언장담처럼 종전 후 서울도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기회를 잡았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은 한국인 1호 도시계획가 장훈씨가 1952년 고시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에서 광화문사거리~중앙청까지 500m 길이 도로의 폭을 기존 53m에서 100m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폭 12m에 길이 2750m이던 청계천을 폭 50m의 도로 부지로 확장해 오늘의 청계천을 있게 했다.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 숭례문광장 등 주요 광장 부지도 확보했다. 대담한 도시계획에 맞춰 건물과 토지를 매수하고 수용해야 했지만 서울시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원이 빗발치자 가건축 허가를 내줘 가건물을 짓도록 했다. 도로 확장은 1966~1979년 계획대로 실행했지만, 광장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종로사거리를 기점으로 반지름 150m의 광장이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과 광화문 우체국, 교보빌딩과 KT빌딩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건설부고시에 따라 광화문광장계획선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세종로와 태평로를 연결하는 광장계획선 안에 일부 건물이 건재하다. >>광화문의 오늘:주요 건물의 부침사 정부서울청사 옛 삼군부·예조 자리에… 개인건물은 4채뿐 광화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광화문시민열린마당·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국대사관·KT빌딩·교보빌딩·비각이 차례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와 별관·세종로공원·세종문화회관·삼보빌딩·현대해상화재·세광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폭 100m, 길이 500m의 광장구조 거리에 공공건물 5채와 대기업 건물 3채, 개인건물 4채, 문화재 1개, 공원 2곳뿐인 쾌적한 구조다. 해방 이후 육조거리를 복원하지 않은 탓에 건물들의 격렬한 부침(浮沈)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세종로를 폭 10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건물이 헐렸다. 먼저 1967년 의정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경기도청과 국제전신전화국 일부가 철거됐다. ‘서울 한복판에 웬 경기도청’이냐고 하겠지만, 옛 경기도청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성부(서울)를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화한 일제가 의정부를 헐어 내고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식민통치의 음모였다. 한 때 치안본부 등으로 쓰였다. 정부는 이 자리에 정부 제2종합청사를 지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고무된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 중심가로 구상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백지화됐다. 서울시는 이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해 광화문 시민열린 마당을 조성했다. 부지를 지킨 것은 잘한 일이지만 명칭을 의정부 광장이나 육조마당, 육조광장으로 붙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질책받을 일이다. 서울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벌어졌다. 이른바 ‘서울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외국 원조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민간 자본이 속속 건물을 지었다. 1961년 10월 완공된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쌍둥이 건물이다. 역사박물관은 이조, 미국대사관은 한성부 터다. 이 건물은 미국대외경제원조처(USOM)가 5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대고 필리핀에 건축을 의뢰해 지어졌다. 정부청사용 건물을 짓고도 280만 달러가 남자 건물을 한 채 더 지었는데 여기에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역사박물관 건물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건물로 사용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쓰이다가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쳐 지난해 448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전시 내용과 건물의 구조 등이 박물관으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KT 광화문 빌딩은 1981년 국제전신전화국 자리에 세워졌고 체신부와 함께 입주했다. 이후 잦은 정부 조직 개편으로 소관 부처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뀔 때마다 간판을 변경했다. 1998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체신청으로부터 분리, 공사가 된 이후 2002년 민영화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체신부가 갖고 있던 이 건물의 12~14층까지 3개 층의 소유권도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넘어갔다. 교보빌딩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가 등 전문가 그룹은 ‘짝퉁’ 건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일반인들은 건물 외관의 대형 걸개 글판과 시내 한복판 책방인 교보문고의 존재를 달가워한다. 왜 그렇까? 이 건물의 정체성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의 디자인을 빼닮았다는 이유다.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같은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디자인을 교보의 전국 지사 건물로 복제했다. 최근 한 건축 잡지는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리스트에 올렸다. 층수와 용도를 둘러싸고 뒤탈도 많았다. 설계 당시 40층을 계획했지만 23층에 그쳤다. 완공 단계에서 정부청사보다 낮은 17층 이하로 지으라고 행정 당국이 종용하자 당시 신용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완공 단계의 건물을 자르라면…. 내가 광화문 복판에서 배를 자르겠다”는 격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용도를 호텔로 변경하라고 권하자 “정부청사 앞에 술과 밥을 파는 숙박업소를 짓는다는 것은 나라 체면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거절한 사연도 자서전에 남아 있다. 교보빌딩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건물의 뼈대만 남겨 두고 건물 옆면 일본식 다다미 모양을 유리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짝퉁 논란에서 벗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서울청사는 1970년 옛 삼군부와 예조 자리에 들어섰고, 별관인 외교부청사는 2002년 옛 교통방송국 터에 자리 잡았다. 1966년에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전신저금보험관리국, 경찰기동대 순찰반이 헐렸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종로보건소와 광화문전화국이 철거됐다. 시민회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회관으로 지어졌지만 4·19혁명 이후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1961년 개관했다. 1972년 불타 버리는 바람에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했다. 세종문화회관 옆 17층짜리 현대해상화재빌딩은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976년 현대건설 본사로 지어져 1983년 현대건설이 계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특수를 누린 이 건물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국민당 당사로 썼다. 현대해상은 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기 직전인 1999년 이 건물을 현대건설로부터 인수했고, 2004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KT와 교보, 현대해상화재뿐이다. 그보다 엄청난 격랑을 헤치고 최고의 요지에 끝까지 살아남은 개인 빌딩 4채의 존재감이 더 빛난다. joo@seoul.co.kr
  • 근대적 ‘화장장 의식’ 일제가 강제로 만든 것 아시나요

    사라진 전통 일생의례 가운데 ‘꽁밥’ 풍속이란 게 있다. 꽁밥은 공밥(公食)을 뜻하는 것으로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행하던 일종의 성인식이다. 음력 칠월 백중 무렵에 마을 수령이 “아무개가 오늘부터 꽁밥을 먹게 되었소”라고 공표하는 의식을 통해 어린 농부는 어른 농부로 인정받았다. 꽁밥 의례는 백중날이 약화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이처럼 전통 일생의례는 생업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자연스레 사라진 경우도 있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근대화 사고의 영향과 식민지배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 강제적으로 소멸된 것들도 적지 않다. 가령 상여를 매던 일반 역군들에게 나눠 주던 떡 문화를 폐풍악습으로 규정하고, 조혼 풍습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 등이 그런 예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펴낸 ‘일생의례로 보는 근대 한국인의 삶’(채륜)은 격변과 굴욕의 시기이자 근대화의 시기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전통 일생의례, 즉 출산과 관·혼·상·제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정리한 책이다. 11명의 저자들은 분야별로 나눠 각 일생의례의 지속과 변용 과정을 알아보고, 이것이 근대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본격적으로 전통의례를 말살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1912년 총독부령으로 공포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이다. 일제는 국민건강과 위생, 근대화 등을 이유로 매장 풍습을 탄압하면서 근대적 화장장 의식을 강제적으로 주입했다. 1934년에는 상복 간소화와 상여소리금지, 혼인 연령(남자 20세, 여자 17세) 등을 규정한 의례준칙을 제정했다. 겉으로는 근대화를 ‘위한 의례형식의 합리적 변화를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피식민국에 대한 동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종원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근대적 사고의 하나인 합리적 사고가 대두되면서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생의례의 허례의식을 줄이고, 의례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일생의례가 변화했다”면서 “이는 합리적 사고에서 볼 때 전통의 일생의례를 악습 혹은 악풍으로 보는 사고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정책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이사지왕/안미현 논설위원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 주막집 주인 박문환은 주막을 늘리기 위해 뒤뜰을 팠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물이 나왔다. 경주경찰서의 일본인 순경 미야케 고조는 소문을 듣고 즉시 박문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땅 파기는 중단됐고 27일부터 30일까지 유물 수습 작업이 이뤄졌다. 4일 만의 ‘뚝딱 발굴’로도 유명한 금관총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1927년 11월 10일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도둑이 들었다. 금관만 남기고 허리띠, 귀걸이 등 순금 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구열이 쓴 ‘한국문화재비화’의 한 토막.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가져가기 거추장스러웠는지 금관만 무사했다. 천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느니, 무덤 속 물건을 갖고 있으면 변고가 생긴다느니 온갖 헛소문까지 퍼뜨렸지만 허사였다.” 심리전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서였다. 1928년 5월 20일, 도둑은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에 유물 보따리를 슬그머니 놓고 갔다. 그때 다시 찾은 허리띠가 지금의 국보 88호다. 지난 3일 그 금관총 출토유물(고리자루큰칼)에서 ‘이사지왕’(?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다. 정체는 아직 미스터리다. 내물왕 등 신라시대 여섯 마립간(왕)의 다른 이름이거나, 왕이 아닌 고위 귀족일지 모른다는 등 가설만 무성하다. 일본 규슈지방 출신 왕의 이름이 이사지라는 얘기도 있다. 만약 왕이라면 서기 503년 지증왕이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썼다는 종전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금관총의 주인이 여자라는 학설도 위협받고 있다. 이사지왕이 금관총 여주인의 남편일 수도 있다. 고고학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이사지왕이라는 네 글자를 앞에 두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양상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사지왕의 칼을 발굴하고도 거기 새겨진 글자를 찾아내는 데 무려 92년이 걸렸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돼 있다가 올해 초에야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사업’이 시작된 탓이다. 박물관 측은 해방 이후 우리가 발굴한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만도 손이 달려 일제강점기 발굴 유물에는 미처 눈을 돌리지 못했다고 해명한다. 그렇더라도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이왕지사,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기치로 내건 만큼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력과 예산 배정에 앞서 문화재 전문가들의 학자적 양심과 열정이 우선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또다른 이사지왕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안미현 논설위원 hyun@seoul.co.kr
  •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금관총 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글자 확인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 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자가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신라무덤에서 왕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을 밝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미공개 자료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글씨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박물관 관계자는 “6세기 이전 마립간시대 신라 최고지배층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신라 무덤에서 신라의 왕 이름이 처음 확인됐다”고 말했다. 칼집 끝 금동 부분에 앞뒤로 ‘이사지왕’과 ‘십’(十), 칼집 상단에는 ‘이’(爾)가 각각 새겨졌다. 박물관 측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또 다른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이’, ‘팔’(八), ‘십’ 등의 글자가 확인됐다며 ‘이사지왕’ 명문의 일부라고 추정했다. 나머지 한 자루는 많이 부식돼 글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 박물관 연구진은 같은 이름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두 자루 이상 출토된 것으로 미뤄 소유주와 피장자가 일치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지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상고시대 왕 가운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앙박물관은 마립간인 내물왕이나 지증왕 중 한 사람의 다른 왕명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 측은 아울러 ‘이사지왕’이 당시 왕으로 불린 고위 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놨다. 경북 포항의 냉수리 신라비(503년)에 등장한 ‘차칠왕등’(此七王等)과 같은 기록에선 마립간이 아닌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금관총, 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해 온 연구는 모두 재검토돼야 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이요, 지리에서 뻗어오른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주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무학 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야 궁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선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악과 관악산이 불의 산이고, 목멱산(木覓山)에는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불이 나면 도시가 재앙에 빠진다고 예언했다.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5대를 잇기 전에 왕위찬탈의 비극이 생기고 200년 안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사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태조 당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개국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초토화됐다. 조선의 정궁(正宮)은 불탄 경복궁 대신 도읍 중앙에 입지한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 두 마리가 광화문 앞을 지켰다. 도시가 서쪽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운종가(종로)이다.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현재 지도로 보면 세종로 끝자락 비각에서 코스를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결론적으로 1막의 승자는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주축(主軸)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제2막】 일제… 총독부~시청~조선신궁 일직선 ‘大日本天’ 대못질 일제는 조선의 축선을 파괴하고 개조했다.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정기 말살정책이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5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을 파헤쳤다. 서울의 지명을 경성으로 바꾸더니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서울은 더는 도읍이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지방도시가 됐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세종로에서 육조거리를 지워버리고 황토마루(누루재)도 뭉개버린 그들은 새로운 축선을 고안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태평통)를 만들었다. 큰 길을 내면서 경운궁 담장을 텄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멋대로 바꿨다. 종묘와 창덕궁을 분리하고,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오락시설화했다. 남산에 조선 신궁을 만들면서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버렸다. 국사당은 태조와 무학 대사, 최영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총독부 신축은 축선 말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7만여평의 부지에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서울의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고자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때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중문 22개, 당 45개 등이 헐려 음식점, 별장 건물로 팔려나갔다. 겨우 철거 신세를 면한 광화문은 1927년 불길한 피난길에 올랐다. 경회루 등 전각 몇 채만 덩그러니 남은 당시 경복궁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축선에서 5.6도 각도를 튼 자리에 390칸짜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로 지었다. 일제가 축선을 튼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뿐더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상과제로 삼은 그들의 치밀한 민족정기 말살 시나리오를 간과한 어설픈 학설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신영지’(新營誌)에 “경복궁의 중심선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총독부를 광화문 중심선과 맞추면 중심선과 어긋나 위용을 살리지 못한다. 태평통의 도로 중심선으로 새 청사의 중심을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총독부~경성부청(서울시청)~남산 조선 신궁으로 쭉 뻗은 ‘일본의 새 축선’을 서울의 중심에 새기는 것이었다. 축선상에 있던 신축건물인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에 경성부청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40년 경성시가지 지도를 보면 총독관저(청와대)의 대(大)→총독부의 일(日)→경성부청의 본(本)→조선 신궁의 천(天)이 일직선상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4개의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문자모양으로 건축됐다. 이름하여 ‘대일본천’(大日本天)이라는 일본 축선의 완성이다. 【제3막】 광복 이후… 총독부 헐고 경복궁 복원해 역사 바로잡아 ‘서울의 축선=일본의 하늘’이라는 일제의 오싹한 음모는 청산되지 않았다. 개념 없는 위정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기와 맥을 끊고자 지은 총독부 청사에서 제헌 의회와 정부수립 기념식 그리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1939년 지어진 경복궁 후원 총독관저는 미 군정장관 관저, 경무대, 청와대로 대이어 사용됐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둥지를 튼 탓인지 54년 만인 1993년에야 헐렸다. 총독부는 1995년 헐리기 전까지 미 군정청, 정부 중앙청사로 이름을 바꿔 가며 권부로 군림했다. 1952년 서울도시재건계획이 수립됐지만, 우리의 축선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일제가 왜곡시킨 축을 확장·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뼈아팠다. 한국전쟁통에 훼손돼 석대만 남아 있던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다면서 1969년 아무 생각 없이 옛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일제가 5.6도 틀어놓은 방향,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10.9m, 북쪽으로 14.5m 북쪽으로 물러난 이른바 ‘일본의 축’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총독부를 철거하거나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을 원상회복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일제의 기를 누를 수 있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충무공 동상을 남산 신궁 터를 노려보는 자세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축선 복원은 1990년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5년 뒤 총독부가 철거되면서 닻을 올렸다. 총독부가 일본 축선상에 식재한 은행나무를 양옆으로 도려내고서 중앙분리대 자리에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에 두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2010년 8월이었다. 두 번이나 불타고 두 번이나 엉뚱한 자리에 놓였던 비운의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비틀린 축선의 출발점을 바로잡는 데 8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축선의 종착지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홀랑 불탔다. 축선 복원을 차일피일 미룬 우리의 업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숭례문은 지난 5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912년 일제의 황토마루 제거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축선전쟁 제3막도 끝이 났다. 세종로 축선복원이라는 고단한 여정도 10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식민잔재의 핵을 걷어내는 데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joo@seoul.co.kr ■축선이란 한 국가, 도시의 주축을 이루는 도로 혹은 건물. 우리나라의 축선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산이다.
  • 5주 여행 상품이 무려 11억원…‘궁극의 사파리’

    5주 여행 상품이 무려 11억원…‘궁극의 사파리’

    단 5주 짜리 여행 상품이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원)나 된다면 믿을 수 있을까? 특히 이 상품은 돈 쓸 일 없어 보이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사파리 여행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최근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여행사 ‘익스트로드너리 저니’(Extraordinary Journeys)가 돈을 주체 못하는 갑부들을 위한 이색적인 여행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총 36일 간의 일정으로 구성된 이 상품의 이름은 ‘밀리언 달러 사파리’(The Million Dollar Safari). 이 상품의 이용객들은 편안한 자가용 제트 비행기를 타고 5주 동안 케냐의 ‘마사이 마라’ ,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등 아프리카의 유명 국립공원 및 관광지를 고루 둘러볼 수 있다. 또한 과거 식민지 총독들이 관저로 쓰던 숙소 등 전망이 좋은 최고급 저택에서 묵으며 호화로운 5주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르완다에서 고릴라와 함께 트래킹하고 숙소 창문에서 기린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는 것은 이 패키지의 백미. 여행사 측은 “아프리카의 유명 관광지 모두를 최고의 시설에서 여행할 수 있는 궁극의 사파리”라면서 “이보다 더 좋은 사파리 상품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했다.  이 여행 상품의 가격은 4인 가족 기준 100만 달러로 아프리카 현지 공항에서 출발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힐링 창신동/정기홍 논설위원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하얀 나비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80~1990년대 대학가에서 불렀던 운동 가요 ‘사계’의 가사다. 이 노래는 재봉틀(미싱)을 돌리던 동대문시장 의류공장 어린 여공들의 고달픔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엔 인근 창신동 여공들의 ‘애환과 꿈’이 자리하고 있다. 1970~1980년대 서울 종로의 창신동은 골목의 쪽방에서 미싱을 돌리며 옷가지를 만들던 곳, CD 가게가 여공들의 발길을 잡던 곳, 겨울 골목길에 하얀 연탄이 뒹굴던 곳, 골목길 보름달에 ‘시다’의 그리움이 머물던 곳이었다. 지금도 창신동 채석장 바로 밑 봉제 골목에는 동대문 의류시장의 모태 같은 역할을 하면서 미싱은 돌아가고 있지만···. 창신동은 조선시대만 해도 도성에 인접해 유서깊은 동네였다. 낙산을 낀 마을에는 붉은 열매인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아 ‘홍숫골’ 또는 ‘홍수동’(紅樹洞)으로 불리며 도성 안 사대부의 ‘별저’(別邸)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실학 선구자인 이수광도 경치 좋은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대에 들어서는 이곳의 돌을 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역(현 서울역), 경성부청(서울시청)을 지었다. 근자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과 화백 박수근이 살면서 인연을 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 법인가. 동대문시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던 이곳은 1970년대 들어 봉제공장이 들어서면서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이때부터 창신동은 여공의 ‘꿈’이 영그는 대표적인 쪽방촌으로 각인된다. 지금은 이곳 3000여개 봉제공장에서 생산된 의류가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대표되는 동대문 시장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40년 전 그날의 창신동 여공들이 어엿한 봉제공장의 안주인으로 들어앉은 사례도 많다. 창신동을 아는 이들은 말한다. 쪽방의 재봉틀 소리를 뒤로하고 낙산에 올라 본 사람만이 창신동의 골목 이야기를 안다고. 낙산은 창신동·숭인동 달동네를 품고서, 저 너머 동대문 시장의 화려한 불빛을 주시하고 있다. 이처럼 낙산은 쪽방촌의 애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요즘 창신동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열고 있는 창신동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한 ‘Made in 창신동’전이 연일 입소문을 타고 있다. 최근에는 창신·숭인지역 뉴타운 개발지구가 해제되면서 창신동을 ‘힐링 골목’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봉제 골목과 백남준·박수근이 만날 날이 언제쯤일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대한제국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서울 중구는 지난해 10월부터 추진한 사적 제157호 환구단 복원 공사를 마치고 10일부터 개방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헐린 환구단엔 총독부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지금은 하늘과 땅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돌북 3개, 석조 정문만 남아 있다. 특히 환구단에 설치됐던 석등은 한국미술사에 등장하지 않은 이질적 형태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원 장식용으로 널리 보급된 일본식 석등과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일본식 정원으로 논란을 빚은 잔디 1340㎡를 들어내고 전통 방식에 따라 마당 1462㎡ 전체를 마사토로 포장했다. 배수가 잘 되도록 집수정 7곳과 배수관로 110m도 설치했다. 석등 21개와 가로등, 조형수 7그루를 철거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주변에 흩어졌던 난간석과 지대석도 한데 모았다. 황궁우의 파손된 부분은 전통 돌로 다시 깔았다. 환구단은 오전 9시~오후 9시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된다. 황궁우 내부는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 운영하는 중구 문화유산탐방,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볼 수 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1848년 4월 런던. 한 여인이 20분째 진창 같은 부두에 무릎을 꿇고 있다. 비까지 내려 드레스가 젖어들자 여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추위가 아니라 치욕에 떤 그녀는 빅토리아 영국 여왕. 여왕이 기다린 것은 중국의 장갑기선 기영호였다. 기영호를 타고 영국의 심장부에 들이닥친 중국 총독은 영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의 포고문을 감정 없이 읽어 내려갔다. 여왕은 끝내 혼절했다. 이후 일생을 버킹엄궁전에 갇힌 그녀는 1901년 중국 제국 이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로 사라졌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는 이런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반대로 흘렀다. 아편전쟁(1840~1842) 당시 중국은 양쯔강 입구로 포를 쏘며 쳐들어온 영국 함대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가 이토록 황당하게 역사를 뒤집은 이유는 뭘까. 1008쪽에 걸쳐 왜 서양이 세상을 지배했는지 설파하는 저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미래다. “사람들이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궁극적으로는 이 물음은 ‘22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된다’는 그의 예견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된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굴욕을 안긴 픽션은 과거 동서양의 주도권 경쟁과 앞으로의 운명을 파고드는 대장정에 나서기 전 독자의 시선을 잡아채기 위한 극적 장치인 셈이다. 그간 서구 학자들은 서양의 우세 배경에 대해 방대한 이론을 쏟아냈다. 하나는 예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변경 불가능한 결정적인 요인이 존재해 산업혁명이 서양에서 일어났다는 장기고착 이론. 또 하나는 우연한 사건으로 서양이 패권을 잡게 됐다는 단기우연 이론이다. 하지만 둘 다 서양 지배론의 원인을 캐기엔 역부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550년부터 1775년까지 1000년 이상 서양을 앞질렀다는 점, 산업혁명은 무역·금융으로 축적된 서유럽의 경제력과 과학혁명이 낳은 기술력, 이민족 침입 우려가 없는 지리적 이점 등이 맞물리며 잉태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원전 1만 4000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 지난 1만 6000년의 동서양 역사 속에서 드러난 흥망성쇠를, 직접 고안해낸 분석틀 ‘사회발전지수’로 해부한다. 전쟁 수행 능력, 정보 기술, 조직화·도시성, 에너지 획득이 주요 가늠자로 쓰였다. ‘서양의 지배/1773~2103/여기에 편히 잠들다.’ 이 충격적인 문구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구두쇠 스크루지가 미래에서 목격한 그의 묘비명을 본뜬 것. 동양과 서양의 사회 발전이 20세기와 같은 속도로 계속되면 동양이 늦어도 2103년엔 서양을 앞설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을 압축한 한 줄이다. 그러나 자신의 묘비명을 보여준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에게 “제발, 이 묘비명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해주시오!”라던 스크루지의 절박한 애원처럼, 주인공 자리를 뺏기는 서구의 불안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급증하는 중국의 군비 지출 등을 들며 피와 살이 튀었던 과거 서양의 지배기보다 동양의 부상이 유혈 사태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나 책 전체에 스민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물러나야 하는 자의 미련’이 엿보인다. 4만 2000원.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반항하는 그들보다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1919년 3월 2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는 낯선 글이 실렸다. 전날 조선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모두 5차례나 이어졌다.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도 실렸다. “조선과 조선민족에게 느끼는, 누를 수 없는 애정은 예술에서 받은 충동에 의한 것”이란 고백이었다. 글쓴이는 30대의 젊은 미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조선의 공예를 조선인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운 뒤 시야를 가린다며 광화문을 없애려 하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해 철거를 막았고,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세상을 떠난 그에게 한국정부는 1984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야나기에 대한 평가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갈렸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냐, ‘양의 탈을 쓴 일제의 조력자’이냐의 논란이다. 1940년을 전후해 일제에 협력하는 그의 글과 행동이 잇따랐던 탓이다. 그의 아버지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중장 출신. 작고한 최하림 시인은 야나기를 가리켜 “(조선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그 애정을 올바르게 활용할 사상은 없었다”고 꼬집었다. 조선인을 수동적인 민족으로 도식화하고,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부른 것을 놓고도 비판했다. 지난 25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막 올린 ‘야나기 무네요시’전은 이런 점에서 다분히 ‘논쟁적’인 전시다. 아베 총리 등 일본 지도층의 식민침략을 정당화하는 언행이 잇따르는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큰 기획전이다. 류지연 덕수궁관 학예연구사는 “야나기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수년째 기획만 하다가 숙제처럼 미뤄놓은 일을 펼쳐 놨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작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가 수집한 공예품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7월 21일까지 계속된다. ‘논쟁적’ 예술가의 수집품을 얼마나 깊이, 어떤 시각으로 감상하느냐는 관람객의 몫이 됐다. ‘민예(民藝)’를 미술 장르로 끌어올린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조선 공예와 미술, 문학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미학자. 그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건 분명하다. 1부 ‘서유럽 근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선 도예가 버나드 리치와 교류하며 시야를 넓힌 그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에 심취하고 종합예술지 ‘시라카바’를 창간해 조선예술계에 영향을 주던 당시 야나기의 수집품이 공개된다. 2부 ‘조선과의 만남’은 소박한 조선 공예품들로 채워졌다. 개다리소반과 담배상자, 화각화문빗, 철사운죽문항아리 등이 나왔다. 조선의 막사발을 두고 ‘무기교의 기교’라 부르던 야나기가 소장했던 조선백자들이 볼 만하다. 야나기는 27세 때 처음 떠난 조선여행에서 백자를 접한 뒤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너왔다. 3부 ‘주변에 대한 관심과 민예’에선 일본 오키나와, 중국, 만주로 확장된 작가의 관심 영역을 엿볼 수 있다. 민예론 정립의 단초가 된 일본의 목조불상 허공장보살상과 오키나와 지방의 직물 문양 등이 전시된다. 야나기는 ‘일상 공예품에서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예품을 수집해 왔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가 일본 도쿄에 설립한 일본민예관에서 옮겨온 139점이 선보인다. 한국 관련 전시물은 30점 안팎. 야나기는 평생 2만여점의 작품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 2000여점이 한국 관련 작품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 부적절 처신”

    한국 천주교가 혼란에 빠졌다. 최근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함세웅(왼쪽) 신부가 오스발도 파딜랴(오른쪽) 주한교황청대사를 정색하고 비판한 글 때문이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공식적인 대응은 하고 있지 않지만 파문이 확산될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함 신부가 사목자 소식지 ‘함께하는 사목’에 사제들로부터 전달받았다며 기고 형식으로 공개한 편지는 충격적이다. 현 교황대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는 게 핵심이다. “교황대사가 총독 같은 모습으로 한국 가톨릭교회를 쥐락펴락하고 한국 주교들을 하인대하듯 해 왔다고 한다”/“한국에 부임한 후 (모국인)필리핀에 너무 자주 오가고, 한국의 주교들과 실업인, 신자들을 불러 식사 대접하는 것을 기회로 돈푼깨나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주교 임명제청권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면서 교황님의 뜻을 왜곡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범하고 있다”/“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서울성모병원을 안방 드나들듯 한다”….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단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후폭풍을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문제를 공론화한 주인공인 함 신부와, 도마에 오른 교황대사의 위상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함 신부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사회와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사제로 유명하다. 그런 사제가 교황대사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으니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교황대사라면 주재국 교회의 상황을 교황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가톨릭 사제이자 외교관으로, 주재국에서는 추기경을 제외한 주교들 중 서열이 가장 높다. 함 신부는 기고 글에서 “중견 사제들의 순수한 뜻과 고뇌가 가득 담긴 글을 받고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짓눌린다”며 “그들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지혜로운 지적과 호소가 교회 요로에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뜻에 동참해 사제들 모두에게, 지금의 어두움을 함께 보고, 성령의 빛이 내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개선할 것을 다짐하며 간청한다”고 호소했다. 한편 파딜랴 교황대사는 1966년 필리핀 세부 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외교관 양성센터인 교황청 교회 학술원을 나와 1972년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일했다. 파나마,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코스타리카 주재 대사를 거쳐 2008년 4월 주한 대사에 임명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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