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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대부분 역사학계 원로… 보수 행적 논란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대부분 역사학계 원로… 보수 행적 논란도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안이 최종 확정되면 세간의 관심은 국사편찬위원회(국편)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역대 국사편찬위원장들의 면면에 관심이 쏠린다. 역대 위원장은 대부분 역사학계의 원로가 맡아 왔다. 문화부 장관이 위원장을 겸했던 이승만 정부의 초대 수장은 신석호 전 위원장으로, 1949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16년간 국편을 이끌었다. 일제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해방 직후 근현대 일본 측 자료에 가장 정통한 학자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던 신 전 위원장이었다. 그는 해방 뒤 일본이 없애려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유리 원판을 소각 직전에 빼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경력 때문에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됐다. 문화부 장관 겸직이 아닌 전임 위원장제가 시행된 1965년부터 1972년까지는 경희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균 제1, 2대 위원장이 국편을 이끌었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한 김 전 위원장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도서 검열 업무를 맡았고 이 시기 일제의 영화통제정책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던 이력 때문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초판에 포함됐다. 이후의 위원장들은 친일 논란에서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8대 이만열 전 위원장(숙명여대 명예교수)을 제외하고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임명된 이들조차도 보수적 역사학자로 분류된다. 김대중 정부 당시 7대 위원장을 맡았던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역사 교과서가 일부 좌편향돼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1대 위원장을 맡았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5·16에 대해 “3선 개헌과 유신을 거치며 비판받고 부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나름대로 헌법적 질서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나름 독재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12대 위원장을 역임한 유영익 연세대 명예교수는 교학사 국사 교과서 집필진 다수가 속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고문 출신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처럼 평가하는 한편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으며 국정감사장에서 ‘햇볕정책은 친북정책’이라고 발언하는 등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③이스라엘의 프로방스, 갈릴리 호수Galilee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③이스라엘의 프로방스, 갈릴리 호수Galilee

    ●Galilee 갈릴리 호수 이스라엘의 프로방스, 갈릴리 호수Galilee 사해의 서북쪽 연안, 마사다에서 멀지 않은 쿰란Qumran은 2000년 전 필사한 성경이 발견된 곳이다. 1947년 베두인 양치기 소년은 쿰란 제1동굴에서 사해사본을 발견했다.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 사람들이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욕주의자들이었다는 에세네파 사람들은 정결한 몸을 유지하고 의식을 치르기 위해 공중목욕탕도 만들었다. 쿰란을 떠나 이스라엘 북부의 산악지역에 있는 갈릴리Galilee 호수로 향한다. 도로 왼편은 사마리아 지방이다. 성경이나 영화 속에서 듣거나 본 장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갈릴리로 가는 길에 요르단강도 건넌다. 예수는 여리고 근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강이라지만 물줄기는 작다. 레바논 북쪽, 헤브론산에서 발원한 요르단강은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로 흘러간다. 굽이굽이 흐르는 요르단강 강줄기는 320km에 달한다. 늦은 오후 갈릴리 호수 남쪽 마간의 한 키부츠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도착했다. 갈릴리 호숫가 키부츠다. 키부츠 안에 수영장도 있다. 키부츠 숙소는 가족 단위 여행자들이 머무르기 좋게 방갈로 형식이다. 해가 지면서 호수 맞은편 산간 지역은 실루엣처럼 보인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수면 위로 돛을 세우고 윈드서핑을 즐기는 이들도 보인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붉은 병풍 같은 골란고원이 보인다. 골란고원 저편이 시리아라는 사실이 좀체 실감나지 않는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갈릴리 호수의 둘레는 60km에 달한다. 예로부터 이곳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던 게 수긍된다. 영어 이름대로 ‘바다 같은 호수Sea of Galilee’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설파한 산상설교지인 팔복산Mount of Beatitudes이 바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 예수는 산상설교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때 예수는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 있었다. 사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갈릴리 호수도 해저 222m로 매우 낮은 지역에 위치한다. 평균 수심은 30m이지만 가장 깊은 곳은 50m에 달한다. 우기와 건기에 따라 수심이 다르다.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식수의 70%를 생산할 만큼 깨끗한 상수원이다. 갈릴리 지방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프로방스’라 불린다. 이스라엘을 찾은 크리스천들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굴곡진 요르단강을 찾아 래프팅을 즐긴다. 갈릴리 지방의 중심지인 티베리아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미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찾은 이유는 만 열두 살이 된 아들의 성년식 때문이다. 외국에 살지만 이스라엘로 돌아와 성년식을 치르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축복할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비행기 값, 호텔, 식사, 촬영비 등 제법 큰돈을 들여 성대한 파티를 벌이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도 매주 두 번씩 요란하게 성인식을 치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개 다른 나라에 살다가 성인식을 위해 이스라엘로 온 사람들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3 Western Coast Cities of Israel ▶십자군 성채 도시, 아코Akko 지중해의 동편을 마주한 아코는 요새처럼 구축된 항구도시다. 이스라엘에 속한 ‘아랍인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아코의 올드 시티는 지중해를 마주보고 성벽에 둘러싸였다. 북으론 레바논과 시리아, 터키, 남으론 아프리카, 서쪽으론 유럽과 면한다. 1104년에는 십자군에 점령되었고, 1291년에는 술탄 말렉 엘-아쉬라프에게 함락된 바 있다. 술탄 말렉은 아코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나마 남은 것은 땅에 묻어 버렸다. 기구한 역사는 아코를 강건하게 만들었을까. 훗날 나폴레옹은 두 달간 아코를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결국 아코 성벽을 넘지 못하고 퇴각했다. 요새 같은 항구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탓에 아코는 때로 번영하고, 때로는 깨뜨려졌다. 아코의 구시가지는 2001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몰 때 아코의 성벽을 따라 저녁 산책을 즐기면 좋다. ▶헤롯왕의 도시, 카이사레아Caesarea 헤롯왕이 만든 도시로 로마의 행정수도이자 총독의 거주지였다. 로마 시대의 항구도시로 번성하면서 남긴 유적 외에도 십자군 성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이사레아 남쪽의 극장은 헤롯왕 때 건설된 이후 수백 년 동안 사용된 극장으로 4,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헤롯 시대의 전차 경기장 흔적도 남아 있다. 거대한 U자 모양의 전차 경주장은 1만명의 관객을 수용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로마군 장군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카이사레아에는 헤롯 시대뿐만 아니라 로마, 비잔틴, 십자군 시대 등 다양한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다. 유적만 봐도 영고성쇠를 거듭한 도시의 역사가 보인다. ▶자유의 도시, 하이파Haifa 이스라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무역항구로 유명하다.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있어 도시의 분위기는 자유롭다. 이스라엘 최대의 도시라지만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버스가 운행을 멈추는 텔아비브보다 유대교적으로 덜 경건한 것도 하이파의 매력이다. 하이파는 이스라엘 북부의 해안 평야에서 느닷없이 솟아오른 갈멜산Mount Carmel 북서 기슭에 자리잡았다. 아코와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이 많이 살지만 생활수준은 아코에 비해 높다. 하이파의 유명한 상징 중 하나는 황금색 돔을 가진 바하이교 사원이다. 세계적인 종교 가운데 가장 최신 종교다. 아름답고 웅장한 정원이 유명하다. 바하이교 사원 밑으론 1869년 처음 조성된 독일 템플 기사단의 공동체 마을Templar Society이 복원되어 독일의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다. 단, 중세 시대 십자군인 템플 기사단과 헷갈리지 말 것.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박준 취재협조 이스라엘정부관광청 www.goisrael.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박문각 남부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헌법

    [박문각 남부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헌법

    서울신문은 많은 수험생이 응시하는 7급 공무원 시험에 대비해 헌법·경제학원론에 대한 실전강좌를 마련했다. 박문각 남부고시학원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과목별 주요 문제와 해설을 싣는다. (문제)다음 중 헌법재판소가 비례의 원칙에 위배되는 경우로 본 것은. ①전체 임신 기간 동안 태아의 성별 고지를 금지하는 것 ②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활동을 친일반민족행위의 하나로 규정한 것 ③종합소득 과세표준의 과소신고에 대하여 20%의 가산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한 소득세법 ④수용 중인 마약류 사범에 대해 월 1회씩 정기적으로 마약류 반응검사를 행하기 위해 소변을 채취하는 것 (해설)①비례의 원칙에 위배된다. 낙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러서도 태아에 대한 성별 정보를 태아의 부모에게 알려 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료인과 태아의 부모에 대한 지나친 기본권 제한으로서 피해의 최소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2008. 7. 31, 2005헌바90) ②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해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고자 하는 공익의 중대성은 막대한 반면 이 사건 법률조항으로 인해 제한되는 조사대상자 등의 인격권은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조사보고서와 사료가 공개됨으로 인한 것에 불과하므로 법익 균형성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2010. 10. 28, 2007헌가23) ③종합소득과세표준의 과소신고에 대하여 20%의 가산세를 부과하는 것은 의무위반의 정도와 부과되는 제재 사이에 적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비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2005. 2. 24, 2004헌바26) ④마약류 반응검사는 교정시설 내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하여 필요하고, 마약의 복용 여부는 외부관찰 등에 의해서는 발견될 수 없으며, 자발적으로 소변을 받아 제출하도록 한 후 3분 내의 짧은 시간에 시약을 떨어뜨리는 간단한 방법으로 실시된다. 대상자가 소변을 받아 제출하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자신의 신체의 배출물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다소 제한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소변채위의 목적 및 검사방법 등에 비춰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2006. 7. 27, 2005헌마277) (정답)① (문제)다음 중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경우는. ①공정거래법상 불공정 거래행위에 해당하는 부당 내부거래에 대한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 ②미결수용자에 대하여 국민건강보험료 납입을 정지하는 처분 ③형사사건으로 기소된 국가공무원을 직위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 ④형사사건으로 기소가 되기만 하면 사건의 경중과 관계없이 해당 공무원을 필요적으로 직위 해제하도록 하는 것 (해설)①공정거래법에서 형사처벌과 아울러 과징금의 병과를 예정하고 있더라도 이중처벌금지원칙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 과징금 부과 처분에 대해 공정력과 집행력을 인정한다고 해 이를 확정판결 전의 형벌집행과 같은 것으로 봐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반된다고도 할 수 없다.(2003. 7. 24, 2001헌가25) ②수용자의 의료보장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한 입법 정책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며 유죄의 확정 판결이 있기 전인 미결수용자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2005. 2. 24, 2003헌마31) ③직위해제처분을 받은 공무원에 대한 범죄사실 인정이나 유죄판결을 전제로 하여 불이익을 과하는 것이 아니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2006. 5. 25, 2004헌바12) ④이 사건 규정은 헌법 제37조 제2항의 비례의 원칙에 위반되어 직업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고 헌법 제27조 제4항의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위반된다.(1998. 5. 28, 96헌가12) (정답)④ 조기현 박문각 남부고시학원 강사
  • [옴부즈맨 칼럼] 일보와 신문/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옴부즈맨 칼럼] 일보와 신문/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서울의 종합일간지 중 9개가 10만부 이상 유료 판매한다. 한국ABC협회가 올 초 발표한 재작년 판매 기록이다. 경제·스포츠지 등을 제외하면 10만부 이상 유료 판매를 하는 일간지는 전국을 통틀어 10여개 안팎이다. 제호를 기준으로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일보’들. ‘조선·중앙·동아·한국·문화·국민’일보다. 또 하나는 ‘신문’들. ‘한겨레·경향·서울’신문이다. 대개의 경우 ‘일보’들은 보수적인 색조가 강하고 ‘신문’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편집을 한다. 모든 일간지들이 판매와 경영상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덩치가 큰 ‘일보’들에 비해 ‘신문’들의 매출액과 판매부수는 눈에 띄게 적다. 큰 ‘일보’들에 비해 층이 지는 ‘신문’ 종사자들의 임금 수준은 ‘저널리즘의 최저 수준’ 방비가 오롯이 이들의 헌신과 사명감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신문’들의 임직원 숫자는 오백여 명 전후로 엇비슷하지만 편집과 경영·소유 측면에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일보와 신문 사이, 서울신문은 어디에 있는가. 서울신문의 뿌리는 1904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다. 영국인 베델과 신채호, 박은식 등 선열들이 혼을 담아 만들었다. 여명기의 민족정론지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일제의 침탈 후 1910년 강제 종간됐다. 일제는 제호를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꿔 총독부 기관지로 편입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제는 신보(申報)를 신보(新報)로 바꾸었다. 해방되던 해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어받은 서울신문이 탄생했다. 서울신문은 1998년 ‘대한매일’로 제호를 변경했다. ‘한경대’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한겨레·경향·대한매일의 줄임말로 그만큼 사회적 쟁점에 대해 개방적·전향적인 보도를 유지했다는 뜻이리라. 2004년 다시 ‘서울신문’으로 돌아왔다. 그해 ‘서울신문 100년사’를 펴냈다. 서울신문의 역사는 111년, 지령은 2만 3000호를 훌쩍 넘는다. 사람들은 서울신문에서 ‘한경대’ 혹은 ‘서한경’을 보는가, 아니면 신문 서울을 ‘일보’ 중의 하나로 매기고 있는가. 옴부즈맨 칼럼을 쓰는 데도 상당한 절차와 노력이 필요하다. 새벽에 종이신문을 읽고, 사무실에서 PC형 서울신문을 수차례 본다. 이동을 하다가도 모바일 서울신문에 접속해 새로운 정보를 살펴본다. 칼럼을 집필하기 직전에는 사십여일 분량의 종이신문을 다시 차근차근 넘겨 보며 구상해 두었던 주제의 글 자료를 따로 모은다. 주장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한국ABC협회에 접속해 서울신문의 발행부수와 유료판매부수를 추가로 확인한다. 금융감독원 전자정보공시센터에 들러서 열흘 전 탑재된 서울신문의 ‘투자설명서’ 자료도 본다. 기존의 사업보고서와 반기보고서의 데이터 변화도 비교한다. 최근 소유구조 지분율 변화도 확인할 수 있다. 규모가 비슷한 다른 일간지들의 사정도 살펴본다.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히겠다’는 포부와 어떤 권력이나 자본, 족벌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을 서울신문은 내세우고 있다. 시비를 가리는 균형성과 공정성을 다짐하면서 쉽지 않은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한다. 몇몇 보고서와 전언을 종합할 때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고 신문 경영의 난제를 풀기 위한 서울신문 종사자들의 고군분투는 각별하다. 일보의 시장에서 견주든, 신문 시장에서 다투든 서울신문의 가장 경쟁력 있는 무기는 ‘관점’ 있는 뉴스, 심층적인 기획기사일 것이다.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율을 치유하고 강화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힘내라, 신문 서울.
  • 한국 반도체신화 주역 황창규 ‘5G 통신신화’에 새로운 도전

    한국 반도체신화 주역 황창규 ‘5G 통신신화’에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통신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이제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KT는 전 세계 통신 시장의 리더로서 5세대(5G) 통신을 선도해 나갈 것입니다.” 황창규 KT 회장은 21일 서울 광화문 KT올레스퀘어에서 ‘대한민국 통신 130년 기념식’을 갖고 KT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통신 역사를 집중 조명하고 5G 통신 리더로서의 비전을 제시했다. 지난해 1월 KT 회장에 취임한 이후 융합서비스, 데이터 중심 요금제 등 각종 혁신 화두를 던져 온 황 회장이 이번에는 통신 역사 카드를 내민 것이다. 황 회장의 제안으로 KT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지난 130년 동안 이어온 우리 통신 역사 속에서 KT가 가진 1등 DNA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통신 업계 1위로 부상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취지”라고 KT 측은 설명했다. KT의 뿌리는 조선 고종 22년인 1885년 설립된 한성전보총국(현 우정사업본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보 업무를 담당한 만큼 우리 통신의 효시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KT는 지난 130년 동안 한성전보총국, 조선총독부 산하 통신국(1910년) 등 을 거쳐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체신부(1948년)로 변경, 한국전기통신공사(1981년), KT(2002년)로 변신하며 대한민국 통신 역사의 명맥을 이어왔다. 황 회장은 이날 기념식에서 한국 통신의 중요한 성취마다 KT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한국전기통신공사 시절이던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대를 연 데 이어 1986년 순수 자체 기술로 개발한 자동식교환기(TDX)를 개통해 1가구 1전화 시대를 구현했다. 1994년 코넷(KORNET)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처음 상용화했으며, 2009년엔 업계 최초로 스마트폰을 도입하기도 했다. 황 회장은 이같이 ‘1등 역사’를 가진 KT가 ‘기가토피아’를 바탕으로 5세대(5G) 무선 시대를 개척하고 세계 통신 시장을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다. 그가 주창한 기가토피아란 인간과 사물이 기가 인프라로 연결되고, 융합서비스를 통해 ICT 생태계가 활성화되는 세상을 말한다. 기가토피아의 근간이 되는 유무선 기가 인프라를 선도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임기인 2017년까지 3년간 총 4조 5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기가토피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기존 인터넷보다 10배 빠른 ‘기가 인터넷’을 출시한 데 이어 6월에는 기존 롱텀에볼루션(LTE)보다 15배 빠른 ‘기가 LTE’ 서비스도 상용화했다.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이 된 뒤 ‘황의 법칙’을 제시하며 반도체 신화를 써 내려간 그가 이번엔 통신 신화로 ‘제2의 황의 법칙’을 재현할지 주목된다. 한편 KT는 이날 사옥 1층에 상설 전시관을 마련해 모스 전신기부터 사물인터넷(IoT) 기기까지 다양한 통신 역사 자료를 공개했다. 기념식에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삼성전자 등에 감사패를 전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피플 인 포커스] 맬컴 턴불 호주 신임 총리

    백만장자 출신의 맬컴 턴불(60) 신임 호주 총리는 ‘보수파의 이단아’로 불린다. 기후변화, 동성애 등에 유연하고 진일보한 태도를 보이면서 높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기자, 변호사, 투자은행가로 활동하면서 금융과 법, 통신 부문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애초부터 자유당 연립정부의 총리직은 턴불의 몫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2008년 당시 야당이던 자유당의 대표에 올랐으나 이듬해 노동당 정부가 마련한 탄소배출권거래제를 지지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때 1표 차이로 당 대표직을 토니 애벗 전 총리에게 내줬다. 애벗은 2013년 9월 총선에서 노동당에 승리하며 총리에 올랐다. 턴불은 자유당의 중도주의자로 불린다. 2004년 의회에 처음 진출했고 2007년에는 환경장관을 지냈다. 2008년에는 단박에 당 대표에 오를 만큼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솔직 담백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정파에 상관없이 기후변화 정책을 꾸준히 지지해 왔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총리가 되겠다”며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또 호주를 영국 여왕이 국가원수로 있는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적이면서도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대중과의 소통에 능통해 전임 애벗 전 총리와는 다른 방향에서 호주를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기후변화 문제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고 강경 일변도의 난민정책이 바뀔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턴불 총리는 15일(현지시간) 캔버라 총독관저에서 피터 코스그로브 총독에게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내용의 취임 선서를 하면서 29대 총리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예전 정부와는 다른 새로운 지도력을 보이겠다”면서 “성공적인 리더가 되려면 국민의 지혜를 존중해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항일 의거’ 강우규 의사 정신 기리며…

    ‘항일 의거’ 강우규 의사 정신 기리며…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96주년을 맞아 서울역광장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강인섭(앞줄 오른쪽 여섯 번째) 기념사업회장 등 참석자들이 강 의사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평남 덕천 출신인 강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일제 조선총독부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가 붙잡혀 이듬해 6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기고] 관보를 보면 대한민국 역사가 보인다/정재근 행정자치부 차관

    [기고] 관보를 보면 대한민국 역사가 보인다/정재근 행정자치부 차관

    지난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67주년이었다. 지난 세월은 우리나라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일군 위대한 역사였다. 이런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알 수 있으나, 그중 하나가 정부가 발간하는 관보(官報)라고 생각한다. 즉 관보를 보면 대한민국 역사가 보인다. 관보는 헌법,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 및 부령의 공포와 각종 고시·공고 등으로 정부의 주요 사업과 정책을 알리고 의견을 수렴하는 정부의 주요한 정보 전달 매체다. 관보의 역사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조보’, ‘한성순보’ 및 ‘구한국관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관보’(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정부공보’), 미군정 시기 ‘미군청관보’를 거쳐 현대적인 관보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자도 1980년대에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매일 종이 관보를 선람하고 사인하면서 각종 법령의 공포 사항과 중앙정부의 중요 정책 사항 등을 꼼꼼하게 읽고 정보를 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현재는 ‘유엔 전자정부평가’ 3회 연속 세계 1위가 말해 주듯 홈페이지와 모바일웹으로 전자관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 관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에서 보름이 지난 9월 1일 제1호를 발행한 이후 2015년 9월 1일 제18587호를 발행했으니, 대한민국 67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헌법, 법률, 대통령령, 조약 등 각종 법령이 최종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관보에 공포해 국민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공포의 매체가 관보이기 때문이다. 통상 대부분의 국민들은 법률이 제정되거나 개정되는 것을 국회에서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치는 순간이나 대통령이 법률안에 사인하는 순간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절차일 뿐 최종적인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효력이 발생하려면 반드시 관보에 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역사적 사건의 마무리는 대부분 관보가 하는 셈이다. 제1호 관보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수립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1호 법률인 정부조직법, 국무총리 및 각부 장관 임명, 대통령·부통령 및 국무총리 취임사, 대통령 선서문 등이 실려 있다. 제1호 관보가 발행된 이래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모든 헌법, 법령, 조약과 중앙 및 지방정부의 중요한 정책 등은 모두 관보를 통해 공포됐다. 과거에도 그러한 것처럼 미래에도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관보는 계속될 것이고, 모든 역사적인 기록들은 관보를 통해 영구히 남게 될 것이다. 이렇게 관보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궤를 같이하며 유구한 역사가 돼 가고 있다.
  • 일제 잔재 벗은 국세청 별관터 시민 품으로

    일제 잔재 벗은 국세청 별관터 시민 품으로

    서울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섰다. 20일 시는 일제강점기의 상징물 중 하나였던 국세청 별관 자리에 조성한 시민광장을 일반에 공개했다. 일본은 1937년 덕수궁을 축소해 국세청 별관 자리에 조선 총독부 체신국 청사를 지었다. 시는 지난 4월부터 국세청 별관을 철거해 광장 조성에 착수했다. 국세청 별관이 철거되면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민광장에 서면 덕수궁과 서울도서관 등 세종대로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수직적 권위의 공간을 시민 중심의 수평적 공간으로 바꿨다는 설명이다. 서해성 예술총감독은 이날 “서울 시민광장 왼편의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오른편 시의회 건물에서 4·19혁명의 격동을, 가운데 자리한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민주항쟁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하고서 “이 일대가 또 하나의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는 철거된 국세청 별관 터의 지하부에 덕수궁 지하보도와 연결되는 시민문화 공간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설계공모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22일에는 남산 북쪽 기슭(예장동 2-1)에 있는 조선통감부 관저 터에 새로운 표석을 세운다.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판석 3점을 활용해 만든 ‘거꾸로 세운 동상’이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곤스케의 동상은 파괴됐고 통감관저도 철거됐다. 2006년 남산 기슭에서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이라고 쓰인 동상 판석이 발견돼 관저 터의 위치가 확인됐다. 서 감독은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만들 것”이라면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한 ‘불망(不忘)의 거울’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표절 논란 영화 ‘암살’ 상영중지 가처분 기각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부장 김용대)는 18일 소설가 최종림(64)씨가 “영화 ‘암살’이 내가 쓴 소설을 표절했다”며 영화제작사 케이퍼필름을 상대로 제기한 상영 중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일제에 맞서 싸우는 독립군의 활약을 그린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은 광복절인 지난 15일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재판부는 “여성 저격수의 유형이나 임시정부에서 암살단을 조선으로 파견한다는 등의 줄거리는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되지 않는 아이디어의 영역”이라며 “영화의 여주인공은 저격수로 암살 작전을 주도하지만 소설의 여주인공은 일회성 저격 임무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또 영화에서 암살 행위는 등장인물들의 최종 목표지만 소설에서는 암살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인물도 없다고 봤다. 최씨는 영화와 소설 모두 조선 파견대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일본 총독과 친일파의 밀담 장소를 독립군이 습격하는 장면과 더불어 종로경찰서가 등장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표절을 주장했다. 최씨는 가처분 신청과 별도로 최 감독과 케이퍼필름 등을 상대로 10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한 상태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나라말 빼앗긴 한민족, 광복 직후 한글날 기렸다

    나라말 빼앗긴 한민족, 광복 직후 한글날 기렸다

    달력은 인류 지혜의 산물이다. 인류는 해가 뜨고 지는 현상과 계절 변화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고 수천 년에 걸쳐 달력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 역법(曆法)을 들여와 달력으로 사용했고, 조선 세종대왕 때는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활용해 우리 실정에 맞는 최초의 자주적 달력 ‘칠정산’을 개발했다. 갑오개혁 이후인 1896년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태양력이 사용됐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뒤 역서의 발행을 중단시키고 조선총독부가 ‘조선민력’(朝鮮民曆)이라는 달력을 발간했다. 1937년부터는 ‘약력’(略曆)으로 이름을 바꿔 출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으면서 이듬해 1946년 달력은 다시 우리 손으로 발간됐다. 서울신문은 14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부 조성면(50·문학박사) 창작지원팀장이 소장하고 있는 1946년 달력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어렴풋이 엿봤다. 이 달력은 동성사(東星社)가 발간한 ‘애국월력’(愛國月曆)이다. 가로 27㎝, 세로 39㎝의 종이 한 장에 1946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요일이 표기돼 있으며, 단기(檀紀) 4278년을 서기(西紀) 앞에 명기했다. 달력 가장 밑부분에는 동성사의 위치로 보이는 주소가 적혀 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과 많이 다르다. ‘경성부(京城府) 중구 동사헌정(東四軒町·현재 장충동 1가) 26번지.’ 경성부는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의 수도인 한성부를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만든 행정구역으로 일제의 잔재가 1945년 말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이 달력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등에 따르면 경성부는 광복 1주년인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선포하면서 서울시로 이름을 바꿨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경기도에서 분리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했다. 1949년이 돼서야 지금과 같은 서울특별시가 공식 이름이 됐다. 동사헌정의 ‘정’도 일제의 잔재. 일본 발음으로 ‘마치’인 ‘정’은 전통 행정구역 동(洞), 리(里)와 유사한 개념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 혼마치(本町·현 충무로)와 같은 행정 단위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서야 이 같은 일제식 행정 명칭을 없애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달력 맨 위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데, 태극무늬와 4괘의 위치가 지금과 약간 다르다. 시계 방향으로 90도 누워 있다.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역관 이응준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직후에도 만드는 법이 약간씩 달랐다가 1949년 국기제작법이 공표되면서 통일된 양식을 갖추게 됐다. 태극기 양 옆에는 1945년 7월 26일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고,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방침을 표명한 ‘포츠담 선언’에 참가했던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 국기가 배치됐다. 달력의 중국 국기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가 아닌 중화민국(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다. 당시는 중국 총통이던 장제스가 마오쩌둥과 치른 국공 내전에서 패하기 전으로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를 통치하고 있었다. 5개국 국기 맨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개는 1946년이 병술년(丙戌年) ‘개의 해’임을 알리고 있다. 국기 밑에는 당시의 4대 기념일로 보이는 개천절과 한글날, 크리스마스, 조선개방일(朝鮮開放日)의 날짜가 차례로 적혀 있다. 개천절이 11월 7일로 명기된 게 특이한데, 당시는 개천절을 음력으로 쇤 것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음력으로 기념하던 개천절은 1949년부터 양력을 쇠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서울신문이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변환을 통해 확인한 1946년 음력 10월 3일은 양력으로 10월 27일이어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조 팀장은 “당시에는 음양력 환산이 쉬운 작업이 아니어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광복 직후에는 역법이 완벽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1년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23년 만인 2013년 부활한 한글날이 광복 직후부터 기념일로 등재된 것은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6년은 훈민정음 반포 500돌을 맞은 해라 어느 때보다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해 한글날에는 덕수궁에서 2만여명이 참석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크리스마스가 기념일에 포함된 건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뜻이다. 한국은 1949년 국무회의를 통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공식 지정했으나, 중국과 일본은 아직도 평일이다. 8월 15일로 표기된 조선개방일은 광복절로 유추된다. 달력 한가운데에는 애국가 가사가 있는데, 1절 마지막 소절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리 보존하네’라고 돼 있는 등 지금과 약간 다르다. 조 팀장은 “애국가는 수십 종이 존재했으며, 달력의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곡조가 아닌)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맞춰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사실 애국가 작사자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계몽운동가였으나 친일파로 돌아선 윤치호(1865~1945) 작사설과 독립운동가 안창호(1878~1938) 작사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정부는 아직껏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서울 정동 제일교회 한국인 최초 담임 목사를 지낸 최병헌(1858~1927), 교회음악가 김인식(1885∼1963),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1861~1905)도 애국가 작사 후보로 꼽힌다. 애국가와 함께 게재돼 있는 한반도 지도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신의주, 원산, 부산, 목포 등으로 뻗어 있는 철도가 그려져 있다. 조 팀장은 “남북 간으로 발달해 있으나 동서 간으로는 미흡한 모습을 보면 일제가 만주에 물자 공급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철도를 개설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도 밑에 있는 ‘조선의 힘’이라는 노래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학평론가이자 삼국지 연구가인 조 팀장은 지난해 10월 고서적 가게에서 우연히 이 달력을 입수했다. 조 팀장은 “이 달력 뒷면에는 소유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서평이 쓰여 있다. 소유자는 아마 서평을 보관하기 위해 달력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광복 직후에는 종이가 귀해 일명 ‘똥지’로 불리는 재생지가 주로 사용됐다. 이 달력의 재질도 당시 흔히 쓰인 재생지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비록 한 장의 달력이지만 해방 당시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아… 한용운, 님이 다시 왔습니다

    아… 한용운, 님이 다시 왔습니다

    조국을 일제에 빼앗기고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며 절절하게 울부짖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 만해 한용운. 그가 생을 마친 집인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이 부활했다. 성북구는 13일 한용운이 직접 지은 고택인 심우장 마당의 야외무대에서 그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 ‘심우’를 제작해서 발표했다. 뮤지컬 ‘심우’는 성북구에 기반을 둔 극단인 ‘늚’에서 음악도 직접 제작한 순수 창작 뮤지컬로 성북구에서 활동하는 무명 배우들이 출연한다. 뮤지컬은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지내던 생애 말년을 담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총부리 앞에서 스러져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에 직접 그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만해는 백년 후 손님인 후손들에게 조국의 미래를 당부한다. 심우(尋牛)는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으며,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일제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볕이 잘 드는 남향 대신 동북향으로 집을 틀어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뮤지컬 발표에 앞서 이순선 인제군수, 김석환 홍성군수와 함께 한용운의 발자취가 깃든 순례길을 마련하고 직접 그 길을 다녀왔다. 세 지방자치단체가 손잡고 만든 만해 순례길은 만해의 출생부터 출가·수행·독립운동·입적과 관련된 전국의 장소들을 1박 2일 동안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충남 홍성군의 생가, 한용운이 출가한 강원 인제군 백담사와 만해마을, 성북동 심우장 등을 만해 순례길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성북구는 구청 1층과 2층에서 오는 29일까지 만해의 독립선언문과 옥중 작품, 신문자료 등을 통해 그의 시와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도 마련했다.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의 삶의 궤적이 남아 있는 성북구, 홍성군, 인제군이 함께 2000리의 긴 순례길을 시작했다”면서 “앞으로도 만해와 관련된 내용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해방둥이 초청·총독부 철거… 그때 그 광복절 추억

    해방둥이 초청·총독부 철거… 그때 그 광복절 추억

    광복 70주년을 맞아 되돌아본 광복절은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날인 만큼 갖가지 일로 빛났다. 8월 15일을 국경일로 결정해 광복절로 명명한 건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부터다. 1955년 광복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되찾던 날에 태어난 일명 ‘해방둥이’ 22명을 경무대(현 청와대)로 초청했다. 광복 10돌을 맞아 서울신문사가 12~16일 마련한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11개 도에서 2명씩 뽑았다. 아이들은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선물 상자를 받고 기뻐하기도 했다. 앞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1958년 광복절 경축식 땐 건국동(建國童·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 태어난 사람) 1만 2000명이 애국가를 열창해 뜻을 더했다. 육·해·공 3군 분열식도 곁들여져 온 국민을 환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1975년 광복절 30주년 땐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을 세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후손도, 묘소도 없이 서러움을 받던 애국지사들의 넋을 달랬다. 1995년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정부중앙청사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하고 광복절 행사에 맞춰 첨탑부터 걷어 냈다. 국가기록원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광복절 관련 자료 32건을 14일부터 홈페이지(www.archives.go.kr)를 통해 공개한다. 동영상 7건, 사진 19건, 문서 2건, 우표 4건이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열을 추모하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일제 잔재’ 슬픈 역사의 기둥

    ‘일제 잔재’ 슬픈 역사의 기둥

    서울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로 지은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의 남은 구조물을 오는 19일 공개한다. 현재 23개 기둥과 부출입구로 이용했던 벽체 일부만 남아 있다. 사진은 10일 서울신문 사옥에서 내려다본 모습.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철거...성공회 풍경 78년만에 드러나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철거...성공회 풍경 78년만에 드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로 지어진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의 마지막 남은 구조물이 오는 19일 공개된다. 서울시는 앞서 이곳을 철거함에 따라 78년간 가려져 있던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풍경도 드러난다고 10일 밝혔다. 현재 철거를 거의 마쳐 23개 기둥과 부출입구로 이용되던 벽체 일부(내부 기둥 3개 포함)만 남은 상태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길섶에서] 태극기의 의미/이동구 논설위원

    청계천 배오개다리에 내걸릴 초대형 시민태극기에 관심이 쏠린다. 서울시민 100여명이 광복 70년을 기념해 이틀 동안 손바느질로 완성한 가로 21m, 세로 14m의 태극기다. 찜통이 돼 버린 8월의 서울광장에서 수백 조각의 흰 천을 한 땀 한 땀 이어 붙인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그날, 전국의 거리에서 202만개의 태극기를 흔들었던 민초들의 절박함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김구 선생은 1941년 벨기에 출신의 오그 신부에게 건넨 태극기에다 미국의 동포들에게 전하는 친필 묵서를 아로새겼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태극기를 본 동포들의 각오는 어떠했을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날 조선총독부 청사의 일장기는 내려졌으나 태극기 대신 올라간 미국의 성조기를 보고 있어야 했던 국민들의 심경은 또 어떠했을까. 정부서울청사와 세종문화회관 등 서울의 주요 건물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들이 새삼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씨줄날줄] 제2 수에즈운하/서동철 수석 논설위원

    ‘우리는 홍해를 항행하였다. … 봉운이 나를 깨워 갑판으로 인도하였다. “시나이 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검푸른 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정을 가리켰다. 그날 밤, 우리의 배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였다. 큰 여객선은 모래 언덕 사이의 좁은 물길을 고생스럽게 간신히 지나갔다. 좌우로 쓸쓸한 풍경이 창백한 달빛 아래에 전개되었다. 천천히, 우리가 걷는 것보다도 별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휘황찬란한 창을 수없이 가진 배가 처참한 빈 사막을 미끄러져 갔다.’ 독일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작가 이의경(1899~1950)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대목이다.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경성의전 재학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유럽으로 건너가 1920년 독일에 정착하게 된다. 독일 문단에서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당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중해의 포트사이드와 홍해의 수에즈를 잇는 길이 193.3㎞의 수에즈운하는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수에즈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홍해와 나일강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유서 깊은 도시다. 반면 포트사이드는 수에즈운하 개발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도시로 포트(port)라는 유럽어식 표현에 이슬람 세계에서 흔한 사이드(Said)라는 인명이 더해진 지명이다.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운하 개발권을 따내 1859년 4월 25일 착공했다. 드 레셉스에게 운하 개발권을 넘긴 사람이 당시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 사이드 파샤였다. 1863년 세상을 떠난 그의 후계자 이스마일 파샤가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에게 의뢰해 오페라 ‘아이다’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수에즈운하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갈 때보다 절반이나 짧아졌다. 부(富)의 보고인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급급했던 유럽 국가들은 수에즈운하를 사이에 두고 수없이 충돌했다. 영국이 1875년 이집트 정부의 운하 지분을 사들인 이후 지배권을 오래 행사했지만, 1959년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 옛 소련의 지원으로 전격 국유화에 성공했다. 이집트가 제2 수에즈운하를 건설해 6일(현지시간) 개통식을 가졌다. 일부는 기존 운하와 나란히 새로운 운하를 뚫었고, 일부 구간은 폭과 깊이를 늘려 쌍방향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집트 정부는 통행료 수입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어떤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제는 중국까지 나서 운하의 지분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동철 수석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단체장 발언대] 봄에 품은 정동, 가을에도 즐기자

    [단체장 발언대] 봄에 품은 정동, 가을에도 즐기자

    서울 중구 정동에 숨겨진 명소가 있다.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과 맞닿아 있는 ‘성공회성당’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적 건축미를 살린 점이 특징인 성공회성당은 십자형의 평면구조를 갖고 있으며 기초부와 뒷면의 일부에는 화강석을, 나머지 벽체에는 붉은 벽돌을 사용해 멋진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서울 중심부 대로변에 있는 이 성당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다. 일제가 성당 앞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 사당이 있던 자리에 1937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숨결과 세종대로 일대의 역사성을 훼손하기 위해서다. 해방 후 지금까지 사용된 이 청사로 인해 시민들은 아름다운 성공회성당 건물을 볼 기회를 빼앗겼다. 심지어 그곳에 성공회성당이 있는 것조차 모를 정도다. 서울시민이 성공회성당의 멋진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건 지난 5월 열린 정동야행축제 때다. 성공회성당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냈고, 우리나라 유일의 영국식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중명전도 마찬가지다. 중명전은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됐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됐다. 그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그동안 중명전은 정동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었다. 그러나 지난 정동야행축제 때 많은 시민이 이곳을 찾아 역사의 현장을 느꼈다. 특히 밤에는 달빛을 벗 삼아 발코니에서 열린 간이음악회를 즐기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이런 정동을 즐길 수 있었던 정동야행축제에는 무려 9만명이 넘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았다. 낮의 정동 모습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은 색다른 정동의 밤 모습에 열광했다. 예술장터 체험 부스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족등을 만들고 점괘를 보며 즐거움을 나눴다. 외국인 관광객 부부는 조선시대 전통 의상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며 추억을 만들었다. 정동야행축제는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누구나 부담 없이 그 시간을 즐기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가을에 한번 더 정동야행축제를 열 계획이다. 특히 단풍이 가득 든 가을 정동의 밤 풍경은 또 다른 정동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축제를 통해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함께 가을밤 정동을 마음껏 품을 수 있도록 하겠다. 아울러 볼 게 너무 많아 봄 축제 때 제대로 보지 못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나 정동제일교회,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 구세군역사박물관 등 한국 근대사 현장을 꼼꼼히 살펴볼 좋은 기회를 만들 것이다. 이번에는 시민들이 정동의 어떤 모습에 흠뻑 빠질지 새삼 궁금해진다.
  • ‘이사지왕도’ 명문 경주 금관총 또 발견

    ‘이사지왕도’ 명문 경주 금관총 또 발견

    경북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칼집에서 ‘이사지왕도’(?斯智王刀)라는 명문이 또다시 발견됐다.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금관총의 주인공과 이사지왕의 관계에 한층 관심이 모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지난 2월부터 진행한 금관총 정식 발굴의 최종 단계(무덤 해체 조사 단계)에서 출토된 칼집 끝 장식에서 ‘이사지왕도’와 ‘십’(十)이라는 명문과 지금껏 발굴된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금 귀걸이 2점 등을 발견했다고 30일 밝혔다. 명문은 칼집 끝 장식(금제) 양쪽 면에 각각 ‘?斯智王刀’와 ‘十’이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이사지왕도’는 ‘이사지왕의 칼’을 뜻하고, ‘십’은 지금까지 주술적인 의미라는 견해가 많다. 박물관 측은 “‘이사지왕도’는 2013년 금관총에서 나온 큰 칼에서 ‘?斯智王’ 등의 명문이 발견된 이후 두 번째지만 정식 발굴 과정을 통해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앞서 나온 명문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미공개 자료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박물관 측은 “2013년 명문과 비교했을 때 ‘도’(刀)자가 추가로 더 있는 점이 다르다”며 “이번 명문은 칼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 주는 자료”라고 덧붙였다. 이번 발굴에선 가는고리 금 귀걸이 2점(1쌍), 굵은고리 금 귀걸이 1점, 가는고리 금 귀걸이 1점, 유리구슬 수백여 점 등 많은 양의 부장품도 새롭게 나왔다. 이 중 가는고리 금 귀걸이 2점은 아직까지 신라 고분에선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앞서 두 박물관은 지난달 23일 금관총이 거대 봉분의 지상식 돌무지 나무 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는 1차 발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단독] 창공에 조국 광복 염원 띄운 ‘공중 여왕’

    [단독] 창공에 조국 광복 염원 띄운 ‘공중 여왕’

    “도산 선생 앞에. 20여년 구속받든 아픈 마음과 쓰린 가슴을 상제주(하느님)께 호소하고 공중여왕(자신 지칭) 면류관(왕관)을 빼앗스려가나이다. (선생께서 저를) 길이 사랑하여 주신 바라 삼가 이꼴을 눈앞에 올리나이다 사랑하시는 기옥 올림. (단기)4257년 7월 5일 재운남(운남항공학교 재학 중).” 한국과 중국 양국의 첫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 지사의 1924년 첫 단독 비행 기념사진과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24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권 지사는 동향(평양) 출신인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다는 각오를 다진 것으로 풀이된다. 권 지사는 비행 시간만 1300시간에 달하는 베테랑으로, 1932년 상하이사변에서 비행기를 몰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달 말 출간되는 권 지사 평전 ‘날개옷을 찾아서’를 집필한 소설가 정혜주(52)씨가 최근 도산기념사업회를 통해 편지 등을 발굴했다. 평양 출신인 권 지사는 우리 공군이 인정하는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다. 2005년 영화 ‘청연’을 통해 박경원이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 알려졌지만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실제로 권 지사는 1925년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며 비행 자격을 취득했지만 박경원은 1927년 일본 제국비행협회에서 3등 비행사 면허증을 받았다. 그동안 박경원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역사 속 첫 여성 비행사로 권 지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 작가는 2005년 박경원의 묻혀 있던 친일 행적을 끄집어낸 주인공이다. 그는 “권 지사에 관한 평전 집필을 위해 지난 13년 동안 중국을 3차례 방문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며 “당시 중국에서 항공 학교는 4개였지만 여성 입학생은 권 지사가 처음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천하고 권 지사가 대일 독립투쟁 의지를 밝혀 입학이 허가됐다”고 설명했다. 권 지사는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인 1917년 평양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품었다. 17세 소녀가 하늘을 날고 싶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황궁을 폭파하리라.” 권 지사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도산 선생과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에게 한 말이다. 권 지사는 숭의여학교 시절 항일 비밀 결사대인 ‘송죽회’ 활동을 하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흥식 목사의 지휘를 받아 평양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 체포 직전 상하이로 밀항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육군 항공대 창설을 구상해 온 터라 권 지사를 조종사로 만들기로 했다. 특히 도산 선생은 1923년 12월 권 지사를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추천하고 격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작가는 “1921년부터 임시정부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고, 항공대 창설 계획이 무산됐다”면서 “비록 청사진에 그쳤지만 여성 최초 비행사로 주권을 침탈한 일본과 싸우겠다는 권 지사의 삶은 한국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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