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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군 장례식장에 「한민전」 유인물

    ◎“민중 힘모아 「제2 6월항쟁」 폭발시키자”/경찰,불순세력 소행여부 수사 14일 상오 10시30분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본관 10층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명의의 유인물 1백여 장이 강경대군의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는 대운동장 쪽으로 뿌려져 경찰이 이를 수거,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8절지 크기의 복사지 양면에 타자로 인쇄된 「전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은 『오만가지의 죄악을 저질러 국민의 배격을 받고 벼랑 끝까지 밀려난 노 정권은 절망에 빠진 야수처럼 광기를 부리고 있다』면서 『각계각층 민중은 청년·학생 등의 죽음으로 솟구치는 비분을 모아 제2의 6월항쟁을 폭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인물은 또 『강군 살해사건으로 민주화 투쟁이 범국민 항쟁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주한 미국 대사 그레그는 노태우를 배후조종하는 한편 야당정치인들을 회유하고 민주애국세력을 각개 격파하기 위해 공작정치의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파쇼독재의 원흉인 미국을 축출하고 한국총독그레그를 워싱턴으로 추방하자』고 적혀 있었다. 경찰은 이 유인물이 강군 치사사건 이후 조성된 혼돈상황을 더욱 부추겨 내부혼란을 극대화하려는 불순분자에 의해 뿌려진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 부시­메이저 회담/중동 평화유지 방안 논의

    【런던·해밀턴(영령버뮤다) 외신종합】 걸프전에 참가했던 주요 서방국 지도자들과의 연쇄회담을 위해 순방외교에 나선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16일 버뮤다섬에서 존 메이저 영국총리와 회담을 갖고 전후 중동평화정착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메이저총리의 한 대변인은 버뮤다제도의 수도 해밀턴에 있는 버뮤다 총독관저에서 열린 이번 회담에서 양국정상이 다국적군의 걸프전 승리에 뒤이은 걸프지역에서의 효율적인 평화유지 방안에 대해 중점 논의했다고 밝혔다.
  • 등,“홍콩 민주세력 좌시않겠다”

    ◎「천안문」 지도자 석방요구·헌법화 형식에 “발끈”/홍콩주간지 보도/“97년 귀속뒤 반정 소요땐 해방군 보내 본때 보일터”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실권자 등소평(87)이 최근 중국대륙의 자본주의식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는 홍콩의 정치계 및 민주운동단체 지도자들에게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는 97년 이후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투의 경고장을 띄웠다. 홍콩의 민주세력에 대해 종전까지 중국관영 신화사통신 홍콩분사장이나 일부 중국지도자들이 비난발언을 해온 적은 몇번 있었으나 등이 직접 협박적인 내용의 경고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얼마전 강택민 당총서기·이붕총리 등이 참석한 중국공산당 지도자회의에서 『만약 97년이후 홍콩에서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소란이 생길 경우 중국 중앙정부는 인민해방군을 보내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친중국계 시사주간지 광각경(와이드 앵글)이 9일 밝혔다. 등은 또 지난 89년 6월의 천안문 민주시위 지도자들이 지난달 북경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이들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이던 홍콩의 민주세력들이 중국헌법 화형식을 가진데 큰 분노를 표시한 뒤 『천안문시위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97년 이후 홍콩에서 요직을 맡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등은 이어 『홍콩주민들은 앞으로 중국이 사회주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환상을 갖고 있는 것같다』며 『중국은 우리와 같은 혁명1세대들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사회주의를 지킬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중국이 사회주의를 외면할 경우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강조하고 사회주의의 틀안에서 모든 제도를 개혁·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등은 영국측에도 비난의 화살을 겨냥,『홍콩의 재정을 바닥나게 하는 갖가지 투자사업을 벌여 이윤을 빼내가려 한다』고 질책했다. 한편 홍콩정청의 데이비드 윌슨총독은 지난달 북경을 방문,홍콩의 신공항건설계획 등에 관해 중국지도자들과 협의했으나 중국측은 이러한 건설사업들이 97년 이후에도 홍콩에 개입하려는 영국측의 외교적 술책에 의한 것으로 보고 심한 반발을 나타내고 있는실정이다.
  • 외언내언

    1991년의 새아침이 밝았다. 행운을 가득 안고 솟아 오르는 동해의 붉은 해. 광휘로워야 할 3백65일의 첫 햇빛으로 온 누리를 감싼다. 희망찬 새해의 새 아침이다. ◆옛 사람들은 한 해의 계획은 새해의 새 아침에 있다고 했다. 고요히 앉아 새해의 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하지만 너무 거창하게 계획할 일은 또 아니다. 거창한 것이었을수록 섣달 그믐날 밤의 실의는 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절주나 금연을 한번 실천해 볼 수도 있겠고 일기 쓰기의 생활화를 시작해 볼 수도 있겠다. 지난해의 허물을 되돌이키면서 그것을 바루는 생활을 결심하는 새해의 새 아침으로 삼았으면 한다. ◆간지로 쳤을 때 새해는 신미년이다. 지금부터 1백80년 전의 신미년에는 홍경래가 군사를 일으켜 한때 서북지역을 휩쓸었다. 이듬해에 평정되지만 당시의 관권사회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1백20년 전의 신미년은 우리에게 신미양요로 기억되는 해. 미 군함 5척이 강화도로 침입해 온 사건이다. 그리고 60년 전의 신미년에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야욕을 본격화한 해. 그해 조선의 총독으로는 우가키(우원일성)가 임명되어 왔다. ◆양띠의 해이기도 하다. 양은 영어로 「시프」,독일어·덴마크어로 「샤프」,라틴어로 「오비스」,그리스어로 「오이스」라 하지만 그 어원이 「보호」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의 「아비」(avi)에서 출발된다고 한다. 성서에도 5백번 이상이나 인용되는 양은 고대사회에서 희생동물이었다. 그래서 「보호」해야 할 만큼 소중한 동물이었을까. 그리스도도 『나는 목양자』라고 자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유럽에서는 아침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동물로써 운세를 판단하는 습속이 있었다. 이 때 양떼가 으뜸가는 행운을 뜻했던 것. 유순하기만 한 평화의 상징인 그 양의 해가 열렸다. 나라 안에서도 남과 북이 평화에의 길을 찾고 국제간에도 평화가 이룩되는 해로 될 것을 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요.
  • 마카오/「중국의 새관문」으로 탈바꿈

    ◎「마약·도박의 도시」 오명씻고 금융 중심지로/국제공항 새로 건설·항구확장 공사로 분주/“여건만 개선되면 외국인투자 크게 늘것” 해적들과 밀수업자·스파이들과 도박꾼들의 천국이자 무법지대의 대명사로 악명이 높던 마카오를 광활한 중국대륙의 관문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이 지금 마카오에서 한창이다. 중국으로의 주권반환예정일(99년 12월20일)을 9년정도 남긴 지금 마카오는 외자유치를 통해 국제공항과 항구를 새로 건설하고 중간기술사용산업들의 단지를 조성,과거의 도박중심지에서 새로운 산업기지로 또 중국의 새로운 경제관문으로 변모시킨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코 나보 마카오총독은 『마카오는 좁은 곳이긴 하지만 그 위치가 대단히 좋은 곳』이라면서 『마카오는 중국과 외부세계를 잇는 연결통로가 될 수 있으며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금융중심지로 또는 중간기술산업들의 생산기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16㎢의 좁은 면적에 인구 45만여명의 마카오는 오랫동안 관광업과 약간의 섬유산업을 제외하면 이렇다하게 내세울 산업이 전혀 없는 「잠자는 도시」였다. 부두의 수심은 너무 얕아 대양을 오가는 대형 컨테이너선들은 마카오까지 들어올 수 없었으며 마카오와 외부를 잇는 연결수단은 홍콩과 마카오 사이를 오가는 수중이선(선체 하부에 날개를 달아 쉽게 부상토록 만든 배) 뿐으로 마카오는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마카오는 이같은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5억8천5백만달러를 들여 새 국제공항을 건설(93년도 완공목표)하는 한편,대형 컨테이너선들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부두의 수심을 깊게 하는 건설공사를 한창 진행시키고 있다. 이미 홍콩의 카이탁국제공항이 포화상태에 도달한데다 새로 건설중인 홍콩의 새 국제공항도 오는 97년까지는 문을 열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동북아의 새로운 수송기지를 꿈꾸는 마카오 사람들이 새 국제공항건설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크다. 마카오는 이와함께 대규모 증권시장개설을 통해 동북아의 새 금융중심지로 부상한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마카오에 대한 외국투자도 미미한 형편이며 또 증권매매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도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나보총독은 지난 2년간 3차례에 걸쳐 일본과 대만을 방문,외자유치협상을 벌인 결과 외자유치에서 좋은 결실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나보총독은 『여러 차례의 외자유치협상을 벌인 결과 「마카오에 투자하고 싶다. 그러나 도대체 마카오의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면서 『현재 부동산과 관광업외에는 투자할 곳이 없는 마카오의 투자여건이 조금만이라도 개선된다면 마카오에의 외국인투자가 아주 빨리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마카오의 앞날을 밝게 전망하고 있다. 마카오가 이처럼 새 탄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우선 과거의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씻기 위한 것도 있지만 오는 97년으로 예정된 홍콩의 대중국 주권반환으로 최근 홍콩의 경제적 앞날에 대한 불안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과 관련,현재 홍콩이 갖고 있는 기능중 일부만이라도 마카오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과거에는 꿈도 꿀수 없었던 홍콩과의 경쟁이 앞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데 따른 것이다. 마카오은행협회의 에드먼드호 회장은 『마카오의 하부구조가 현재와 같은 수준이라면 누구라도 홍콩을 찾지 마카오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로는 홍콩과 경쟁할 여건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마카오의 하부구조만 개선되다면 그 위치로 볼때 마카오는 홍콩에 견줘 뒤떨어질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이같은 마카오의 움직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데 있다. 10년이 넘은 중국의 경제개혁 결과 중국이 상당히 개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마카오인들은 중국이 여전히 마카오의 변신노력을 탐탁한 눈길로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는 마카오의 발전이 장기적으로 볼때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회주의체제내에서의 경제개혁을 고집하고 있는 중국으로선 손쉬운 체제통제를 위해 결국은 중국내에 흡수될 마카오가 너무 급속한 변화를 보이는 것보다는 중국자체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만큼의 변화를 선호할 것이라는 전망때문이다. 나보총독도 『마카오의 변신에 대해 현재 중국과 마카오가 갖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변화의 속도에 대한 차이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선 그 속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 노대통령 방소 계기로 본 두나라 관계사

    ◎극동패권 겨냥,러시아함대 1854년 첫 입항/거문도 상륙뒤 한달동안 동해지역 실측/열강침탈 막으려 1884년 조·로조약/노·일전에 지자 공식관계 끝나… 일제땐 독립운동의 무대로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맺게 되는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관계의 수립에 앞서서 러시아인과 한인들 사이의 교섭관계가 선행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1850년대 초반에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의 개항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에 러시아의 해군중장 푸티야틴은 대일교섭을 위하여 마닐라에서 북상하여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분산된 함대의 집결장소로 거문도를 지적하였다. 1854년 4월2일 푸티야틴의 기함 팔라다호를 위시로 러시아함대는 5일간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러시아함대는 계속 북상하여 4월20일부터 5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한반도의 동해지역을 실측하기도 하였다. 푸티야틴은 또한 강원도 봉천군 금난진과 함경도 안변부 화등해진,영흥부 고령사 대암진 등에 상륙하거나 정박하였다. 이러한 사건은당시에 빈번하게 출몰하였던 많은 이양선사건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러시아는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 이후의 다른 특별한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에 극동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하게 되어서 1858년에는 아이훈조약을 통하여 아무르지방을 러시아영토로 편입하였고 1860년에는 이어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연해주를 통하여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러시아와 조선과의 관계가 일어나는 조건을 만들게 되었다. 1863년에는 조선에서의 흉년을 계기로 함경도의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함으로써 재소 한인의 첫 이민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어서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속속 이주하였고 이들 한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양측간의 교섭도 이루어졌다. ○흉년 못견뎌 국경 넘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극동의 정세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한반도를 침탈하여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에 기대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던 계획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선정부는 방향을 바꾸어 적성국이었던 러시아를 끌어 들였다. 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그리고 영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때에 또한 러시아측으로서도 코르프가 프리아무트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아시아정책을 적극화 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과의 외교는 급진전되어 1884년 7월7일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의 첫 외교관계는 이같이 열강의 침입을 외교적 균형을 통해 회복하려는 조선의 노력과 그 열강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정책을 강화하려던 러시아의 정책이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국교수립 이후의 조선은 아직 자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의 외교적 힘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침략하고 있는 외세에 의존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존심만 키워주었고 그것조차도 결국은 만족되지 못하였다. ○1896년 친로내각 러시아는 결국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을 위하여 한국에 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 이후에 친러세력이 조정에서 형성되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삼국간섭을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견제한 러시아의 외교적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친러세력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바로 이렇게 강화된 친러세력의 형성으로 인하여 1896년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런내각까지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친러내각의 성립은 러시아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해 주는 역할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러시아세력과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던 일본과의 대립은 드디어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기선을 제압하면서 1904년 5월18일에 한로 조약은 폐기되어 공식적으로 한로관계는 차단되고 만다. 한로조약의 폐기 이후 한국은 얼마 안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상태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외교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은 노령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꿈과 실질적 힘을 키워나갔다. ○북방정책의 결실 맺어 또 1917년의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정부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기대하고 민족운동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한인들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므로 이 기대는 종종 기대 수준에 못미쳤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역행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고 1925년에는 일로협약에 의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이 또다시 제약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소련은 자주적 민족운동세력이 새로운 한국건설의 주역이 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로써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패권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더불어 남북한을 분단시키고 북한에서도 자주적 성격의 정권이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분단된 한반도에 냉전논리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간주하고 일방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소련과 적대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1985년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중 냉전논리의 현실적 적용의 결과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있었으며 이는 스탈린의 승인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한국과 소련은 서로 적의 상태에서 남남이었다. 이 기간중 1978년 KAL기 무르만스크호수 기착과 같이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일반원리를 따라서 행동한 적도 있었지만 1983년에는 KAL기를 격추하여 2백69명의 승객을 전원 사망케 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며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소련은 남한의 경제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으며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남한 역시 통일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냉전논리에서 탈피하여 1988년부터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1990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의 정상이 회담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에 한소 수교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12월13∼16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렇게 하여 한로관계의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는 한국과 소련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지고 있다. 소련은 더이상 한국에 대해 패권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며 한국은 더이상 저개발국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면에서 소련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한국민이 원하면 한국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평화적 통일정책은 소련의 기본적인 정책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은 한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나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일 징용해설서 발견/조선총독부서 제작

    【도쿄 연합】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만든 「징용해설서」가 6일 발견돼 한인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소송 등에서 일본정부에 배상문제를 따지는 데 좋은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백20쪽에 걸쳐 문답식으로 된 이 해설서는 지난 44년 10월 조선총독부 노무과가 제작,배포해 한인들의 대규모 징용을 강요하고 있는데 구일본군 관계자의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오사카(대판)의 한국관계 정보지 코리아 투데이가 입수했다.
  • 청와대 새 관저 준공

    ◎“대통령 일가 살림집”… 팔작지붕 전통미 살린 단층/내년 집무실 완공되면 일제의 잔재 씻는 셈/노 대통령,“옛 중앙청 이전,경복궁 복원해야” 전통 한옥형태에 청기와를 올린 새 대통령 관저가 청와대내에 마련됐다. 청와대는 25일 상오 노태우 대통령 내외,비서실 직원,공사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관저 준공식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금명간 새로 마련된 관저에 입주,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지금까지 1,2층 계단을 오르내리던 출퇴근에서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맛을 느끼게 됐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건물은 1층이 집무실이고 2층이 살림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 동쪽 약간 뒤편 계곡에 자리잡은 새 관저는 본채(2백44평),접대시설이 마련된 별채(1백50평)와 사랑채 부속건물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지면적은 1천2백60평이다. 전통 한옥형태로 4면에 추녀를 달아낸 팔작지붕(까치박공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전통미를 살린 단층인 이 관저는 얕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살림공간 분위기를 내고 있고 솟을 대문에는 「인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해 8월28일 착공,4백25일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이날 준공된 신축 관저는 총 공사비 60억원에 연인원 8만1천명과 연 2천3백대의 장비가 동원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준공테이프를 끊은 뒤 별채에서 참석자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과거 같았으면 대통령이 새 집을 짓는다면 장기집권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을지 모르나 나는 그럴 염려가 없는 사람 아니냐』고 반문한 뒤 『처음 신축 건의를 받았을 때는 임기만료 6개월 전쯤 완공하면 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라졌다』고 피력.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항간에 대통령 관저가 훌륭하게 건축되고 있는 점을 들어 앞으로 내각제를 하기는 어렵다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자 『말레이시아에 가보니 국왕과 수상이 있는데 수상은 국정의 온갖 일을 다하느라 위세를 부릴 시간도 없다고 하더라』고만 말해 청와대 관저 및 집무실(내년 7월 완공) 신축과 내각제문제는 연관이 없음을 시사. 노 대통령은 또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한국식으로 새로 짓고 경복궁도 옛 모습대로 복원하면 일제 침략의 역사로부터 나라의 위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일제 총독 부청사였던 옛 중앙청(현 국립박물관) 건물도 다른 곳으로 옳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은 1937년 3월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남차랑)가 일본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이곳에 총독 관저용으로 착공,2년 만에 완공했던 것. 독립한 지 40여년이 된 국가의 대통령이 식민통치하의 총독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를 신축하게 된 배경이라고 한 관계자는 설명.
  • 조선 정도이후의“영산” 일제,“정기말살”수난도/“남산6백년” 약사

    ◎일,아카시아 심어 소나무 밀어내/호텔등 들어서며 녹지 크게 잠식 남산은 옛날 조선초기 도성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목멱산 또는 인경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남산은 해발 2백56m로 높은 산은 아니다 북서쪽으로는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여기저기 계곡이 깊고 그윽해 서울도심의 명산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같은 남산은 이미 조선초기 태조때 그 영험함을 인정받아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산신을 모셔 제사를 지냈으며 남산의 동쪽 기슭에 무학대사 사당을 안치하면서 국사당으로 불렸다. 또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도 커 능선을 따라 성곽이 세워졌으며 5개의 봉수대가 있어 전국각처의 봉화신호가 이곳에 모아지기도 했다. 후기에는 청계천쪽 남산기슭에 가난한 양반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남산골 딸깍발이」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의 유래를 낳기도 했다. 일제시대이전의 남산의 모습은 소나무가 전체 수목의 70%를 차지,애국가의 가사처럼 「철갑을 두른듯」 소나무가 무성했다. 그러나일제때 민족정기말살을 위해 유럽산 변종 아카시아가 심어지고 신사건립등으로 제모습을 잃기 시작했으며 6ㆍ25동란과 해방을 거치면서 훼손이 가속화됐다. 57년 이태원 산 1의 7 일대 3만3천㎡(1만평)가 외국인주택단지 건설을 위해 공원에서 해제된 것을 시작으로 58년 동국대 건립,63년 월남난민주택과 중앙공무원교육원,67년 군장교주택,69년 외인아파트 건립을 위해 공원이 잠식되어 왔다. 70년대에 들어서는 하이아트호텔(71년),신라호텔(75년) 등 재벌들의 호텔건립으로 공원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로써 남산은 1940년 3월 총독부고시로 남산도로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현재까지 총 36회에 걸쳐 공원일부가 잠식된 기록을 남겼다. 남산은 지난 84년 건설부고시에 의해 도시계획공원으로 지정된 뒤 동서 2.7㎞,남죽 1.2㎞ 89만6천평의 면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에는 현재 1백93종의 식물과 꿩ㆍ다람쥐 등 63종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소나무는 대부분 3년생으로 60년생이상은 1백84그루에 불과하다. 약수터 8개소를 비롯,전망대ㆍ도서관ㆍ식물원 등을 찾는 시민은 하루평균 3만7천6백70여명에 달하고 있다.
  • 생생한 역사ㆍ조상의 슬기 배운다/「고궁여름학교」 큰 인기

    ◎문화재관리국서 무료 방학특강 개설/경복궁등 5곳 순회,매기마다 “만원”/“바캉스 보다 값지다”… 진지하게 경청 『왕궁이란 단순히 왕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시대 최고의 기술과 학술이 총동원되고 백성들의 피와 땀이 모여 이룩된 문화의 정수이자 나라의 얼굴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었던 시절 일제는 경복궁 전면에 총독부건물을 짓고 창경궁 안에 동ㆍ식물원을 지어 놀이터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여기 창경궁만 하더라도 보루각이며 춘당대 등 60여채의 전각과 담장 등이 헐리고 저 보기 흉한 일본식 건물 장서각이 들어서고 수천그루의 벗나무가 심어졌지요,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던 일인들의 횡포를 여기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궁의 역사와 그뒤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문화재전문위원회의 자상한 설명을 듣는 60여명의 청소년들은 우리조상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듯 그 눈빛이 하나같이 초롱초롱 했다. 문화재관리국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개설한 「고궁문화재 청소년여름학교」가 여름방학을 맞은 초ㆍ중ㆍ고교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23일부터 오는 24일까지 5주동안 매주마다 열고 있는 고궁여름학교는 매일 상오9시30분부터 낮12시30분까지 매일 1개궁씩 월요일부터 금요일사이 5개 궁을 돌고 있다. 월요일은 창경궁,화요일 창덕궁,수요일 덕수궁,목요일 경복궁,금요일 종묘 순으로 문화재전문위원들이 직접 안내에 나서 산 역사교육을 하고 있다. 문화재전문위원들은 각 고궁에 얽힌 뒷이야기며 건축물들의 독특한 건축양식,고궁안에 산재해 있는 보물ㆍ사적ㆍ문화재에 대해 참가자들에게 알기쉽게 설명해 준다. 이번주 참가자들은 대부분 초ㆍ중ㆍ고교생들이었으나 대학생들도 적잖게 섞여 있었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국민학교 4ㆍ6학년,중2년생 자녀 3명을 데리고 이 여름학교에 참가한 윤경순씨(39)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직접 가르쳐줄 지식이 없는 학부모로써 자녀와 함께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 보람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바캉스계획을 취소하고 이 여름학교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성균관대사학과에 재학중인 박광일씨(21)은 『사학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5대고궁에 대해 전문위원들에게 직접 배우는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면서 『전문위원들의 설명수준이 초ㆍ중학생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고 좀더 쉽게 설명해 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문화재전문위원 윤홍로씨(51)는 『지난달23일부터 27일까지의 첫주에는 모두 2백83명이 참가,대성황을 이뤘으나 이번주에는 날씨가 너무 무더운 탓인지 다소 인원이 줄기는 했으나 배우려는 열기는 오히려 더 진지하다』고 소개하고 『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에게는 각 단체 등에서 실시하는 여름캠프나 휴양지로 떠나는 바캉스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고궁여름학교는 참가자들에게 각 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기록된 교재를 무료로 제공하며 고궁 입장료 등 모두가 무료다. 또 평소 일반관람객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창덕궁안 비원의 비공개코스도 특별히 관람시켜 교육효과와 함께 관광효과도 높이고 있다.
  • 외언내언

    내일(7월26일)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의 독립 1백43주년 기념일. 도상사이자 도최고사령관이며 도박사이기도 한 도대통령 정권은 이 기념일을 제대로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외신은 도정권붕괴 초읽기를 예고하고 있다. ◆1822년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몇척의 낡은 기선을 타고 서부 아프리카 몬로비아 해안에 도착한다. 그곳은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끌려갔던 조상의 땅. 이 때부터 이 나라의 건국은 시작된다. 라이베리아라는 나라 이름은 영어 리버티(Liberty)에서 온 것. 자유를 얻은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다. 수도 몬로비아 또한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의 미국대통령 제임스 몬로에 연유하는 터. 공용어까지 영어인 미국풍의 나라다. ◆1847년 7월26일 그들은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초대대통령은 조지프 J 로버츠.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 총독이었다. 이 로버츠대통령으로부터 따진다면 도대통령은 20대. 19대 윌리엄 R 톨버트 2세는 80년 4월 「도 특무상사」가 일으킨 쿠데타 때 살해되었다. 화무십일홍이라던가. 집권 10년만에 그 또한 친위병력에 의해 감금된 채 반정부군 진격속에 풍전등화의 운명이다. ◆독립이래 이 나라를 가혹하게 지배해 온 계층은 미국에서 돌아온 흑인들. 토착민과의 인구 비례로 보아 5%밖에 안되는 소위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이었다. 그 독재는 크란족인 도상사의 쿠데타로 끝나지만 다시 이어지는 독재. 그의 집권 10년에 30차례나 있었다는 크고 작은 불발쿠데타가 국민감정을 말해 준다. 그는 82년 우리나라에 온 일이 있다. 그 때 모대학이 명예박사 학위를 주어 「상사 열등감」을 덜어주기도. ◆반정부군의 총지휘자는 찰스 M 테일러.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도 도정권때 공금횡령 혐의를 받고 탈출했던 사람. 그가 대권을 잡는다 해서 라이베리아의 전도가 밝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괴로운 건 국민이다.
  • 포르투갈 마카오통치권 누수에 곤욕

    ◎중국,99년 귀속 앞두고 사사건건 참견/“초대총독 동상 철거”요구엔 굴욕감도 현재 중국땅 마카오(오문)를 다스리고 있는 포르투갈이 약해진 국력때문에 식민지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훼손당하고 있다. 오는 99년 12월20일자로 중국본토에 귀속토록 돼있는 포르투갈령 마카오의 내정문제에 대해 요즘들어 중국당국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식으로 사사건건 깊이 참견하고 있기 때문. 두드러진 예를 몇까지 들어보면­. 중국에서 파견된 마카오 연락사무소부주임 노평은 최근 마카오정청의 카를로스 멜라치아총독에게 99년 이후 적용될 현지 기본법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포르투갈인들의 게으름 때문에 늦어진다고 호통을 쳐댔다. 또 노평은 마카오정청이 현재 설립을 허용한 대만 무역관광공사의 이름이 대만정권의 대표부같은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회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고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카오의 통치권을 쥐고 있는 포르투갈측이 느끼고 있는 가장 큰 굴욕감은 중국측이 마카오식민지화에큰 공을 세웠던 도아마랄 전총독의 동상 및 기념비 철거를 주장하고 나선 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아마랄은 지난 1846∼1849년에 마카오 초대총독을 지냈으며말을 탄채 칼을 높이 빼어든 그의 동상과 기념비는 마카오시내 한복판 리스보아호텔 앞에 우뚝 서 있다. 도아마랄은 당시 서구열강의 중국침략이 한창일때 뒤질세라 마카오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며 총독재임기간중 식민지정책에 반발한 중국농민들 손에 살해당했다. 그는 마카오정청이 만든 관광팸플릿에 뛰어난 통치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은 노평을 통해 그의 동상과 기념비가 중국땅을 짓밟은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의 상징이므로 마땅히 철거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갖가지 일에 대해 중국측에 시달리다 못한 현 멜라치아총독은 얼마전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날아가 마리오대통령과 카바코실바총리에게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포르투갈측으로선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 멜라치아총독은 『97년 중국에 귀속되는 홍콩이 현재 중국당국으로부터 받은 압력보다 10배나 더 큰 곤욕을 당하고 있다』며 마카오가 이미 포르투갈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났음을 한탄하고 있다는 것. 국제관계라는게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며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이 이같은 최근의 마카오ㆍ중국 관계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민주여신호」떠돌이배로 전락

    ◎중국의 잇단 경고에 각국 지원 꺼려/홍콩 입항거부 이어 대만마저 “주춤” 「6ㆍ4천안문사건」1주년을 맞이하면서 중국대륙에 민주개혁을 촉구하는 전파를 보내기 위해 남중국해를 항진중인 방송선 민주여신호(본보 4월25일자 보도)가 자국과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하는 주변국가들의 소극적인 호응으로 표류할 운명에 놓일 것 같다. 지난 3월17일 프랑스남부 라로셰항구를 떠난 이배는 당초 중국의 애국ㆍ민주항쟁이 폭발했던 「5ㆍ4운동」71주년 기념일에 맞춰 방송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배는 예정일이 훨씬 지난 현재 당초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했던 대만당국으로부터 방송활동에 대한 보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13일 정오쯤 대만북부 기륭항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배는 프랑스를 떠날때만 해도 많은 성원을 받았다. 모금활동으로 민주여신호를 구입,프랑스ㆍ대만언론기관의 지원으로 대중국방송계획을 세운 것이 지난해 천안문 광장시위를 주도했던 중국반체제 지식인 엄가기와 오이개희 등 학생대표들이었기 때문. 이들은 중국을 탈출,파리에서 민주중국진선(FDC)이란 민주단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민주여신호가 중국대륙에 가까워 올수록 주변 관련국가들은 매우 달갑지 않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배가 식수 등 음식물과 유류를 공급받기 위해 지난 3일 싱가포르에 들렀을때도 현지당국은 마지못해 요구에 응했다. 이 배의 다음기항지가 홍콩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홍콩정청 데비드 월슨총독은 『홍콩이 정치의 전쟁터가 될 수 없다』며 단호하게 입항을 거절했다. 홍콩은 물론 이 지역의 주권국인 영국정부가 천안문사태를 가리켜 중국민주화의 싹을 밟아버린 폭거라고 비난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민주여신호의 입항거부는 중국눈치를 보느라 취해진 저자세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 이배 때문에 골치를 앓는 곳은 대만이다. 당초 민주여신호는 이달초 기륭항에 들른뒤 4일부터 6월말까지 대만과 중국사이의 공해인 남중국해에서 방송을 개시할 계획이었고 대만당국도 처음엔 별달리 머뭇거리는 기색없이 이 배의 활동에 개입치 않는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만국방관계자는 이 배가 방송도중 중국측 공격을 받고 자국영해에 피해 들어 올 경우 적극적인 대응으로 보호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렇지만 중국이 민주여신호에 대한 대만의 협조적 태도에 계속 강한 불만을 표시하자 분위기가 크게 바뀌어 버렸다. 이같은 중국의 강압적인 자세를 의식한 듯 대만측은 『민주여신호의 공해상 방송활동은 국제법에 어긋난다. 따라서 대만정부는 이 배의 입항은 일단 받아들이고 물자공급도 하겠지만 중국을 비난하는 방송을 할 경우 재입항은 거절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민주여신호가 대만해역 가까이로 다가옴에 따라 중국은 잠수함을 파견,무력행사를 할 의사를 보였으며 대만해군은 11일 경계령을 내리고 순양함과 전투기를 발진시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 사건이 군사적 긴장상태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배의 처지에 대해 세계 민주주의의 대표격인 미국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지난 10일 중국이 2백11명의 천안문시위 관련자들을 석방한 사실등을 감안하면 민주여신호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성원은 약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밖에 대만북부 한 어촌에서 민주여신호를 돕기 위해 수십척의 어선을 동원,배의 장성을 만들어 여신호가 중국측의 공격을 피해 방송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결의한 것으로 보도돼 눈길을 끌고 있으나 실효성 여부엔 강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 시베리아 철도개통이후 한인 푸대접/러시아동방정책 추진과 위상변모

    ◎러시아농민들의 극동행렬에 밀려나/1990년이민장려칙령마저 폐기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을 연결하는 5천8백마일의 시베리아철도는 명실공히 세계최장의 철도라 할 수 있다. 이 철도의 건설은 러시아의 동방진출과 동방경영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계획이 완성된 것은 1890년 12월이었다. 당시 집권자인 알렉세이3세는 우랄산맥 동쪽의 첼리아빈스크로부터 옴스크 이르크추크를 거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결정, 1891년에 그의 아들 니콜라이를 시베리아철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한 후 본격적인 건설에 나섰다. 공사는 모두 6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당초 건설계획은 1억7천5백만달러에 상당한 자금을 투입,1891년부터 1903년까지 13년동안에 완성키로 돼 있었다. 그러나 험악한 지형과 기후조건 등으로 건설공사가 지연된데다 노일전쟁ㆍ1차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계속 지연돼 볼셰비키혁명 1년전인 1916년에야 최종적으로 완공을 보게 됐다. 당초 계획보다 2배나 긴 26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착공 7∼8년만에 개통돼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개통된 극동의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간 우수리선은 1891년에 착공,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바이칼호이동의 공사는 1904년까지 대부분 마무리됐었다. 어쨌든 시베리아철도는 이 공사 책임자였던 세르게이 위테교통통신상의 말대로 『금세기 전세계 최대 사업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시베리아철도의 개통은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이민에 많은 편리를 제공하게 되었고 따라서 극동으로의 이주에 필요한 비용도 대폭 경감하게 됐다. 그러자 이민의 수도 늘어나게 되어 시베리아철도위원회는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1861년의 이민장려칙령을 1900년 6월에 폐기해 버렸다.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은 주로 1900년 이후부터 시베리아철도를 따라 동방으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1900년에는 1만7천명의 농민들이,그리고 1901년에는 1만1천3백64명의 농민들이 연해주로 옮겨왔다. 이러한 이주농민의 급증에 따라 농민에게 분여할 경작지가 부족하게 되자 1902년에는 사전답사를 통해 1인당 15데샤치나(15정보)의 토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이주를 허용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이로 인해 이민의 수는 다소 감소해 1902년에는 5천8백62명,1903년 8천9백11명,1904년 1천3백77명,1905년에는 2백14명이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05년의 혁명이후에 러시아정부의 정책이 다시 바뀌어 극동에의 이민을 장려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럽러시아 지역의 지주들이 농민의 소요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에게 이민을 허용하려 했던데 있었다. 이에 따라 이민 숫자가 크게 늘어나 20세기초 극동지방의 인구급증을 초래했다. 1897년에서 1914년까지 시베리아의 인구는 4백60만에서 7백60만이 되어 65.2%가 늘어났으며 그중 극동지방의 인구는 90만에서 1백60만으로 77.8%가 증가했다. 한편 행정편제는 1884년에 자바이칼,아무르,연해주(프리모르)지방이 극동변강을 구성하고 있었으며,1894년에는 자바이칼지방이 동시베리아 총독의 관할에 귀속됨으로써 분리됐고 1909년부터 1917년까지 극동변강은 아무르,프리모르,캄차카,사할린 등 4개의 지방(오블라스트)으로 구성되었다. 극동변강의 행정 책임자는 총독이었으며 각 지방의 책임자는 군무지사로 불리웠고 그 밑에 군ㆍ면에 해당하는 행정으로 우에즈드,볼로스트가 있었다.
  • “「빼앗긴 문화재되찾기」캠페인을”/한ㆍ일 새 쟁점화…전문가들 견해

    ◎“석기유물등 일의 푸대접볼때 가슴아파”“사서ㆍ고문헌등 수만종 반환운동 벌여야” 한국인 골동품 중개상이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뺏어온 사건은 한일문화재반환이라는 두나라간의 오랜숙제를 다시표면화시켰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일본인 소장가의 우리 문화재 기증의사 표현으로 일단락된데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차제에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문화재의 반환을 위해 한일 두나라 정부와 민간인 차원에서 적극적인 노력이 펼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효재교수(서울대 박물관장)=결국 우리 문화재를 되찾게 됐다니 다행한 일이다. 문제의 문화재을 일본인 소장가가 한국에 기증하겠다고 한것은 일제시대부터 귀중한 우리문화재를 대량으로 강탈해간 일본의 한가닥 양심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같은 양심의 차원에서 앞으로 더 많은 문화재가 한국에 반환되기를 바란다. 반환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지 일본의 박물관에서는 한국 문화재를 진열하지 않거나 진열하더라도 귀중한 유물은 빼 놓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의 귀중한 석기시대 유물이 대학박물관 창고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한일협정 당시 문화재반환문제를 소홀히 처리한 결과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남아있게 된 것인데 이번일을 계기로 문화재 반환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국토개발을 앞세워 문화유적지를 불도저로 밀어붙이는등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비하시키는 태도를 고쳐야 하겠고 부동산 투기를 하듯 문화재를 투기 대상으로 삼는 태도 역시 삼가야 할 것이다.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이번 사건의 방법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결과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문화재의 일본인 소장가들은 그 문화재가 어떻게 그들의 소유가 됐는지를 알 것이다. 일제의 무단통치시기 일본인들은 총독까지 관련될 만큼 조직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낙동강 가야유적의 경우는 송두리째 발굴하여 당시 화차 2대분량을 실어갔을 정도다. 귀중한 고문헌과 사서 수만종을 강제 몰수해 남산의 총독부관저 뒤뜰에서 불태우기도 했다. 차제에 양국정부와 민간인들이 합리적인 교섭을 하면서 우리 문화재의 반환과 소재확인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윤내현교수(단국대박물관장)=도난행위로 인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게 되어 일단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환을 위해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우리 문화재가 가장 많이 유출된 곳은 물론 일본이지만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에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을 하루 빨리 돌려받아야 한다. 물론 정부차원의 교섭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민간차원의 교류와 설득으로 반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단체나 학술기관등 민간채널을 통해 많은 협조가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이기동교수(동국대)=일본인에 의해 우리 문화재가 되돌려진다는 사실이 여간 반갑지 않다. 지난 65년 한일기본조약체결이후 「국교정상화」란 정치적 이슈에 밀려 문화재반환청구 문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일본으로 유출됐던 우리 문화재가 일본정부나 국립박물관ㆍ미술관등에 속속 귀속되면서 되돌려받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간혹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 문화재가 반환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극히 드물었던 사실이고 보면 이번 경우 역시 희귀한 예가 아닐 수 없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번 일이 우리 정부의 문화재반환 노력에 불을 댕기고 특히 일본의 소규모 소장가들이 한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기폭제가 됐으면 한다.
  • 외언내언

    『강탈해간 것을 강탈해 왔는데 뭐가 어떤가. 도둑치고는 착상이 좋았다. 속이 후련하다. 그래도 좀 너무했다. 아니야 문화재를 찾아오는데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팔지않고 박물관 같은데 기증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7일 아침 조간신문 사회면 기사를 보며 직장등에서 친구ㆍ동료들간에 오간 말들이다. ◆일본의 한국문화재 수집가로부터 고려청자등 국보급 한국문화재 9점을 강탈ㆍ국내에서 처분하려다 붙들린 범인들의 기사를 읽는 한국인들의 이런 심경을 일본인들도 납득할 것이다. 그것은 권장해서도 안되고 마땅히 처벌해야 할 범죄행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만 보고 넘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심경이다. ◆이번에 문화재를 빼앗긴 히가사 겐이치씨는 한국의 국보급 도자기류만 2백50여점을 갖고 있었으며 범인도 그것을 보고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의 중요문화재가 우리보다 일본에 더 많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일본에는 국보급의 우리문화재가 많다. 궁정,공원,박물관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지도층 인사의 집 거실이나 서가엔 한국문화재 한두점 없는 곳이 없고 또 있어야 행세를 한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구체적으로 오쿠라 컬렉션의 1천30점을 포함,한국문화재를 가장 많이 소장한 도쿄 일본국립우에노박물관은 한국문화재만 3천8백56건이나 소장하고 있다. 우리도자기가 주종으로 유명한 아다카 컬렉션도 총7백93점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밖에 개인이 숨기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수십만점에 달할 것이라고 일본 역사연구가 니시야마씨는 최근 아사히신문에 투고 한 논단에서 밝히고 약탈문화재의 반환을 촉구했다. ◆그는 초대총독 데라우치가 재임중 약탈해 간 것만도 수만점으로 그의 고향 모여대에 소장되어 있다고 폭로했다. 일본의 한국문화재는 대부분이 약탈해 간 것이란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돌려주는 것도 이상하고 돌려주지 않는 것도 이상한 빼앗아 온 우리문화재의 향방을 지켜보겠다.
  • 남아공 대통령ㆍ소외무/나미비아서 전격 회동

    【빈트 후크(나미비아)로이터 AFP 연합특약】 데 클레르크남아공대통령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은 21일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서 양국간 사상 처음으로 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이들 지도자는 보좌관을 대동하고 남아공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가 독립함에 따라 오는 23일까지만 사용될 예정인 나미비아주재 남아공 총독관저에서 회담을 가졌다.
  • “독도는 한국땅”일제 제작 자료 발견(조약돌)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귀중한 입증자료가 국립수산진흥원에 의해 발견됐다. 24일 국립수산진흥원자료연구실 한상복박사(52)에 따르면 최근 수산진흥원자료실에서 일본이 독도를 조선총독부 관할아래둔 일제시대의 해양관측보고서가 발견돼 독도가 우리의 영통임이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고 것이다. 이 해양조사 보고서는 조선총독부 수산과에서 1917년부터 5년동안 경북 구룡포를 떠나 울릉도를 거쳐 독도까지 항해하면서 조사한 것으다. 이 보고서에는 특히 독도와 울릉도 근해를 10마일에서 12마일 단위로 나누어 모두 20곳을 관측점으로 하여 직진항로에 따라 조사했으며 사용된 배는 62t급 중기선 「미사고」호로 명시되어 있다.
  • 청와대 경내 대통령 관저 신축지/“천하명당” 4백년전 표석 발견

    ◎공사중 우연히 드러나 「풍수설」 화제로/화강암 암벽에 「천하제일 복지」 음각/글씨크기 가로ㆍ세로 50cm… 해서체로/정도전도 “명당” 지목… 낙관자리 「연릉 오거」 규명이 열쇠 청와대 구내 대통령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뒷산 암벽에 천하 명당자리라는 표석이 최근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표석은 수직으로 된 화강암 암벽을 깍아 가로 2m50cmㆍ세로 1m20cm의 암벽면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50cm,획의 굵기는 9cm인데 해서체로 씌어있다. 낙관자리에는 가로 세로 12cm 크기로 「연능 오거」라고 새겨져 있어 이 표석의 글을 쓴 사람이 아닌가 여겨진다. ○획 굵기는 9cm 정도 청와대측은 지난 20일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인 청명 임창순옹을 초빙,1차 감정한 결과,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3백∼4백년전인 조선조 중기쯤으로 추정되며 글씨체로 미뤄 중국 청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같다는 의견을 들었다. 「연능오거」의 인적사항이 규명되면 더 정확한 내용이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조선조때 서예대가로 오거라는 인물이 없는것 같고 연능이 아호인지 아니면 연능에 사는 오거인지도 불확실하다. 오거가 명필이 아니라면 조선초기나 중기의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는 터에 「천하제일복지」라는 선인들이 새긴 표석이 기초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무언가 길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표석이 발견된 암벽은 현 청와대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백50m 떨어진 가파른 지역인데 암벽 전면이 나무로 가려져 있는데다 이 쪽에는 길이 없어 그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작년 5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서 총독관저로 사용해온 현 청와대 건물 대신에 대통령 집무실(현 본관의 서북쪽 1백50m)과 함께 관저를 이곳에 새로 착공하면서 최근 공사를 위한 배수로를 치다가 이를 발견한 것이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북악의 언저리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때부터 궁터로 점지되었던 곳이다. 한양천도 당시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 자락에 동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한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남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이태조가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지금처럼 북악산의 정남쪽에 경복궁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한양천도 당시 풍수지리에 따른 주산(터를 등지고 있는 산) 결정과 도읍의 좌향 논의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학이 한양의 세를 보며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북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ㆍ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궁궐은 임(서북서)좌병(남쪽)향하여 백악현무,인왕백호,낙산청용으로 해야 한다』 청와대 주변 터는 한양천도 이전인 이미 고려 숙종때 지기가 쇠해가는 송도의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이궁터로 선택됐다. 지금부터 9백28년전인 숙종9년(1062)에 이궁을 지었으나 1백50년이 채 못된 고종19년(1210)에는 강화천도와 더불어 폐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 이 자리가 경복궁 후원으로 단장된 것은 세종8년(1426)이었으며 서현정ㆍ취로정ㆍ관전ㆍ충순당ㆍ융문당ㆍ융무당ㆍ경농제ㆍ연무장ㆍ과거장 등을 설치했다. 그후 국운의 흥망에 따라 성쇠를 함께해 임진왜란 이듬해(1593) 경복궁의 소실로 황폐화되었으며 고종8년(1868)에 경복궁이 재건되자 이곳 또한 과거ㆍ열무ㆍ근농의 행사 등이 치러지는 후원으로 옛 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조선왕실 유린으로 이곳도 훼손돼 융문당ㆍ융무당 할것 없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조선조때 건물도 남아있는 것은 약간 자리를 옮겨 일부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별채와 같은 20평 남짓한 침유각과 2평 가량의 오운정이 옛날의 향취를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일제 식민통치의 제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남차랑)가 착공,중일전쟁으로 한차례 공사를 중단하는 곡절을 겪으며 착공 2년반만인 1939년 9월 준공을 했다. 당시 미나미는 남산의 왜성대,용산의 사택,현 적십자병원 자리의 임시사택 등을 옮겨가며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사택 신축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의 후원으로 경복궁이 눈아래 보이는 이곳을 택했다. ○청대 서체 영향 받아 일제는 조선 주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그 전면에 총독부 청사(현 국립박물관ㆍ구 중앙청)를 지은데 이어 그 후면에 총독관저를 지어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에 있어 용맥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항설에 의하면 일제는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총독부 청사­총독관저로 이어지는 남향축이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북악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왕궁을 건설한 풍수의 맥을 압살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중에서 보면 경성부 청사건물이 「대」자형,총독부 청사가 「일」자형이고 총독관저 건물 구조가 「본」자형으로 돼있어 동대문쪽에서 서대문쪽을 바라보면서 이를 읽어보면 「대일본」으로 읽혀진다는 항담도 있다. 그러나 풍수에 밝은 술가들 사이에는 당시 일제의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징발되었던 조선인 풍수지관이 본래 「임좌병향」의 북악의 용맥과는 약간 비켜나 있는 현 위치를 잡아주어 그 건물에 기거하게 되는 총독들이 망하도록 했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수 없지만 이번에 발견된 표석이 북악의 혈(풍수에 있어 음양이 합해지고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에 해당되는 곳이라면 그럴법도 하다. 청와대 당국이 현재의 이 본관건물을 역사의 전면에서 퇴진시키고 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짓기로한 결정적인 동기도 이 건물이 지난 반민족적 역사성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독립한지 45년이 되고 전인류의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식민통치의 채찍을 휘두르던 일제 총독의 사택을 집무실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민족자존을 국정의 제1 지표로 내건 6공화국 정부의 이념에는 물론 민족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집무실의 건물은 영빈관쪽 출입문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본관 건물 서쪽 뒤편 구릉에 신축되고 있으며 한옥지붕 양식의 2층으로 총건평은 현재 본관 건물(1층 집무실ㆍ2층 대통령 살림집)의 9백평 보다 약간 적은 8백평 규모이다. 완공시기는 내년 상반기쯤으로 잡고 있어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 1년반을 이곳에서 집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저는 명당표석이 발견된 곳으로 부터 남쪽 아래로 50여m 떨어진 곳에 동향인 본채와 남향인 별채로 나뉘어 지어지고 있는데 역시 한옥 양식의 단층으로 건축되며 총건평은 8백평 가량 된다. 관저는 빠르면 금년 9월께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집무실과 관저가 모두 한국전통의 청기와 지붕형태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영빈관 건물,그리고 오는 7월쯤 완공되는 보도관(프레스 센터)건물 등이 한데 어우러져 현 청와대 경내는 우리 고유의 전통건축미로 조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측은 앞으로 집무실과 관저가 완공되면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윤보선ㆍ박정희ㆍ최규하ㆍ전두환 전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보관,전시하는 기념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길조로 받아들여” 대통령 관저의 신축장소가 명당표석이 발견된 지점과 일치된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청와대 주변지반은 대부분이 암반이어서 공사하기에 쉽게 좀 넒은 터를 찾아보니 이곳이 눈에 띄었을 뿐』이라며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설명했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긴 표석의 역사적인 고증은 앞으로 전문가들의 조사와 검토가 더 있어야 밝혀지겠지만 현 본관건물 2층에서 기거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뒤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새 관저 신축을 계기로 대통령의 임기가 평화롭게 끝나고 물러나서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전직대통령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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