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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턴의 불확실성 극동에 암운(해외사설)

    아카소주 리프록에서 샴페인을 터뜨릴 홍콩의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축하해야할 것인지 어리둥절했다.대통령 당선자인 클린턴은 그의 당선이 극동지역에 복이 될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줘야할 처지에 있다. 부시에대한 이곳 평가는 엇갈려있다.그는 일본방문으로 크게 점수를 잃었으나 베트남정책은 홍콩내 베트남보트피플을 송환할수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그러나 그는 국내인기의 하락을 자초했으며 중국에 최혜국대우를 계속 부여함에 따라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에 도전했다. 이와는 반대로 클린턴은 미지의 인물이다.아시아에대한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가 보호주의에 의존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외교관계는 국내정책에 비해 우선순위가 크게 뒤처질 것이며 이에따라 미국제일주의라는 고립주의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지미 카터대통령때처럼 인권문제를 미대외정책의 핵심항목으로 구사해보려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클린턴이 대중인기주의자라면 낸시 펠로시하원의원과 같은 반중국운동가들에게 보다 더귀를 기울여 인권문제를 앞세울 것이지만 그가 실용주의자라면 대중국교역이 미국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십분 이해하게 될것이다.많은 이곳 관측통들은 클린턴이 민주당의 인권촉구정책으로부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것으로 믿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중국측에 최혜국대우 부여와 인권개선을 연계시키는 문제를 비정치화하는데 행정부와 의견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클린턴의 재정정책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적자를 줄이는 단순한 방법이 아닌것 같다.대신 자금을 경제쪽에 쏟아부음으로써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그의 정책은 이미 아시아금융시장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있다.미국내에서의 달러가치상승과 소비증대는 아시아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판매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든 미·중국무역문제는 홍콩주민들에게는 핵심과제가 아닐수 없다.정부나 기업은 이제 워싱턴에서의 로비가 어느때보다 절실해졌다.크리스 패튼 홍콩총독도 하루빨리 워싱턴에 모습을 나타낼 방안을 찾아야한다.그래서 클린턴과 사진을 찍어두는게 유리할 것이다.
  • “관변단체 행사 대선기간엔 중단”(국정중계 29일 본회의)

    ◎「농약밀」 특별감사 실시중/정신대 피해 390건 접수 ▷사회·문화분야 질문◁ ▲최락도의원(민주)=북한 고위간첩 이선실일당이 17년간 암약하고도 하나도 붙잡히지 않고 북한으로 가버린데 대해 국가보위를 책임진 대통령은 국민앞에 사과해야 한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정신대 피해실상과 피해자에 대한 대책을 밝히라. 종말론자들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한데 엉터리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가. ▲남재두의원(민자)=우리사회 우리민족의 가장 비극적 암적 저해요인은 지역간 갈등으로서 지금같아서는 남북통일도 어려울 지경이다. 지역간 감정문제와 집단이기주의,부처별 이기주의를 해소하고 무너진 사회기강을 바로잡을 복안은 무엇인가. 청소년범죄와 성범죄 예방을 위한 결연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편 「꿈을 지닐 수 있는 사회」「살아있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청사진을 밝히라. ▲이호정의원(국민)=정치권의 공직사회에 대한 간섭배제를 위해 보다 더 발전적인 직업공무원제 확립이 필요하다고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정부의 복안을 밝혀달라. 감사기능을 통폐합하여 능률적으로 감사를 시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감사원이 국회로 귀속되어 국회의 국정수행 능력이 제고돼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성무용의원(무소속)=대선과 관련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반상회까지 취소했는데 기왕이면 사회단체의 재정지원도 줄일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특별교부세는 그동안 선거용 선심자금으로 사용돼 국민들의 오해를 받았는데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내무부의 특별교부세 배정기준과 이와 관련한 내부규정을 국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 ▲함석재의원(민자)=남조선노동당 간첩단사건등 북한이 95년 대남적화를 포기하지 않은 시점에서 사회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의 폐지,축소 주장에 대한 대처방안은. 또 아직 검거되지 않은 간첩들이 선거막바지에 후보자를 저격하거나 폭탄테러를 감행,극도의 사회불안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대비책은. 징코민 파동으로 약무행정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데대한 국민불신의 해소대책은 무엇인가.또 의료체계의 제도적 법률적 개선과 함께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응급전문의 제도도입등을 검토할 용의는. 국감자료에 따르면 국민의 식수원인 4대강 지류에서 중금속이 검출됐다고 하는데 믿고 마실수 있는 맑은물 공급방안은 무엇인가. ▲김원웅의원(민주)=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이자 국민의 희망이다.우리교육은 불평등구조가 고착돼 저소득층 자녀는 교육의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비교육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시정할 교육복지차원의 종합대책은 무엇인가.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문제는 이시대 모두의 아픔이다.총리는 이번 회기중 해직교사 복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용의는 없는가. ▲구천서의원(민자)=김구선생 암살사건과 관련,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거나 특별검사를 임명할 용의는 없는가. ▷정부측 답변◁ ◇현승종총리=새 내각은 불편부당,엄정중립의 자세로 법과 공정선거를 집행하겠다. 공명선거추진 연락기구는 검토해볼수 있으나 정당간 협의로 합의를 도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정신대 피해접수는 모두 3백90건으로 학적부 대조등 진상조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일본정부에도 조사확대와 적절한 조치를 촉구하겠다. 통일비용은 상당히 들 것이나 통일의 전단계인 남북연합과정에서 화해 협력과 평화교류 기틀을 마련해 비용이 최소화 되도록 노력하겠다.공명선거를 위해서는 대통령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나 현실적으로 지킬수 있는 법을 만들어 줘야 정부도 공명선거를 실시할수 있다. 수서사건은 당시 수사기관에서 성의있게 수사했으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한 현상황에서 재수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시대상황이 바뀌었다고 재검토를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선거철을 맞아 치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민생치안 사범을 철저히 색출,엄단할 것이며 유흥업소 심야영업 개발제한구역훼손등 각종 무질서와 유세장폭력등도 강력히 제재해 선거치안에 만전을 기하겠다. 종교계의 물의는 사안성격상 정부의 대처보다 민간,즉 종교계자체의 조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종교를 빙자한 불법행위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부총리급 사회복지부와 여성부의 신설은 현시점에서 검토하고 있지 않다.전교조를 결성해 해직된 교사들은 복직시킬수 없다. 정부의 정책결정과 정치자금이 연계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련의 교량붕괴사태에 대해선 정부책임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정부가 남북대화에 있어 일관성을 잃은 듯한 것은 기본적으로 남조선 노동당사건에서 드러났듯 북한의 2중성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는 통일이전 단계인 남북연합단계에서 교류협력을 확대,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함으로써 통일비용을 줄여나갈 방침이다. ◇백광현내무부장관=종말론과 관련해 29일 현재까지 폭력관련 2명,사기1명,업무방해 2명등 모두 6명을 구속했다. 앞으로도 종말론과 관련한 폭력행위에 대해선 지속적인 수사를 계속해 나가겠다. 새마을운동단체·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등 국민운동단체의 연례적인 행사도 선거개입의 오해를 줄 소지가 있을 경우 이를 대선기간중에는 일시중단토록 지도해 나가겠다. ◇이정우법무부장관=남북합의서가 발효되고 국제정세가 변화해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으나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에 변화가 없어 방어적인 국가보안법의 개정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간첩단사건은 적극적인 수사로 남은 세력을 반드시 소탕하겠다. 검찰총장의 임기제는 소신있는 검찰수사의 여건을 조성,검찰권행사에 도움이 됐다고 평가한다. ◇이수정문화부장관=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구조선총독부자리의 중앙박물관은 철거하거나 이전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21세기를 대비하는 새로운 중앙박물관의 신축이 선행돼야 하며 새 박물관의 신축과 함께 현 박물관은 철거하겠다. 현재 인구 16만명당 1개 수준인 공공도서관의 수는 오는 96년까지 인구 10만명당 1개 수준으로 늘리겠다. ◇이진삼체육청소년부장관=서울평화상에 대해 다소간 논란이 있지만 이의 존폐를 거론하기보다는 권위있는 상으로 발전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상의 권위를 인정받기까지는 연륜이 필요함을 이해해 달라. ◇안필준보사부장관=농약이 검출된 호주산 밀로 제조된 밀가루를 회수하도록 지시했으나 전량 회수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어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있다.결과에 따라 엄중 조치하겠다.밀가루에 함유된 농약성분은 밀 제분과정에서 껍질과 함께 제거되므로 인체에는 해롭지 않다는 판정이 나왔다. ◇이연택노동부장관=급속히 늘어나는 외국인 불법취업 근로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부 여성 장애인등의 고용을 촉진하고 2백40만에 달하는 유휴인력을 적극 활용하도록 하겠다. ◇이재창환경처장관=환경보존사업을 위한 재원확보를 위해 환경개선부담금,폐기물예치금등 원인자부담제도를 발전시켜 다음 세법개정때 환경세를 신설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겠다. ◇유혁인공보처장관=TV의 저질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듣고 있으나 정부가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신중히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 영·중,홍콩 장래 싸고 대립/신공항건설도 걸려 관계 급속 악화

    ◎“중국 동의없이 민주화개혁 계속 추진”/영국/“강행땐 반환즉시 기존정부 해체” 위협/중국 오는 97년의 홍콩반환을 앞두고 있는 중국과 영국의 사이가 반환후 홍콩의 장래및 신공항건설문제들을 둘러싸고 또다시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영국의 크리스 패튼 홍콩총독은 지난 21일부터 3일동안 홍콩의 통치구도 변경에 관한 자신의 「홍콩 민주화개혁안」과 신공항건설 세부문제에 대한 중국의 반대와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지만 서로 이견과 감정의 골만 키운채 아무 성과없이 돌아왔다. 중국은 패튼총독이 독자적으로 민주화개혁을 계속 추진할 경우 홍콩을 반환받는 즉시 기존정부를 해체하고 입법·사법·행정기능을 중국에서 바로 맡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신공항건설도 사전승인없이 강행하면 반환후 채무와 계약에 책임을 지지않을 것이며 신공항을 떠난 항공기의 중국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이는 지난해 7월에 합의한 두나라간 신공항건설계획과 반환이후 50년동안 홍콩의 자치를 보장하기로 한 약속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패튼총독은 그러나 중국의 이같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초 예정했던 민주화개혁과 신공항건설 추진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존 메이저 영국총리도 이날 의회연설에서 『패튼총독에게 영국정부와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말해 영국의 분명한 입장을 재확인했다.중영 두나라의 이같은 대치국면은 오는 95년의 차기의회구성방식을 변경하려는 패튼총독의 이른바 민주화개혁안이 최근 표면화되면서 촉발됐다. 이 개혁안은 정원 60명인 입법국(의회)의 의석수를 늘리고 주민의 직접선출비율을 확대하며 유권자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것이 핵심골자.현재는 60명의 의원을 18명은 주민의 직접투표로 선출하고 나머지 42석은 총독과 금융가나 회계사등 친중보수성향의 특수이익집단이 각기 절반씩 지명하고 있다.따라서 중국은 이 민주개혁안이 의회의 구성을 자본주의및 영국에의 향수가 강한 주민들에게 맡겨 반환이후에도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중국의 영향력은 극소화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를 담고있는 것으로 보고 반대하는 것이다.그러나 영국이 이의 추진을 강행할 태세를 보이자 신공항건설문제를 다시 들고나오게 됐다. 신공항은 새로운 활주로와 대규모 인공섬,세계 두번째로 긴 다리등 모두 1백62억달러가 투입되는 매머드공사.두나라는 이미 1년이상 대치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다.중국은 영국이 이같은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홍콩의 재정을 탕진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특히 뒷마무리까지 포함하면 반환이후까지 공사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홍콩의 국제적 관련을 확대,영국쪽 기득권을 반환이후까지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이번에 중영 두나라의 관계가 다시 급속냉각기미를 보임으로써 가뜩이나 반환문제에 민감한 홍콩에 미칠 파장은 매우클 것으로 우려된다.전문가들은 이같은 대립이 장기화되면 홍콩의 투자분위기가 경색되고 심할경우 지난해까지 이어졌던 자본과 인력의 「홍콩대탈주」가 재현될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 홍콩 민주개혁 조치/중국,강력대응 경고

    【북경 AP 연합】 크리스 패튼 홍콩 총독의 첫 중국방문이 실패로 끝난 가운데 중국정부는 23일 패튼 총독이 홍콩민주화개혁을 북경의 동의없이 추진할 경우 오는 97년 홍콩이 반환된후 중국이 홍콩의 정부,의회,사법부 기능을 대신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측의 이같은 공개적인 위협은 처음 있는 일로 북경측과 홍콩간의 갈등을 증폭,홍콩 반환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불안을 야기시킬 것으로 전망돼 홍콩당국의 대응책이 주목된다. 중국 국무원의 홍콩·마카오 판공실주임 노평은 이날 이같이 밝히고 중국은 북경의 동의없이 97년이후 들어설 어떠한 홍콩 민주정부(정청)도 폐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패튼이 중국의 동의없이 신공항 건설을 추진한다면 반환이후 중국은 그와 관련된 계약이나 부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김형직 우상화(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7)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105인 사건의 일원” 선각자로 미화/신민회와 조선국민회 고의적 “혼합”/“안창호 등 독립지사 지도했다” 강변 북한에서 진행되는 역사날조는 다른 인물이 아니라 김일성 자신이 「솔선수범」한다.우리는 이 점에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가져야 한다. 김일성은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민족주의운동을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키는 투쟁」을 한 인물로 둔갑시켰는데 이것 뿐 아니라 「3·1운동 이전의 모든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한 최고의 지도자」로 만드는데도 온갖 힘을 다하였다. 그는 1983년 6월30일부터 3일간 페루·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대표단과 만나서 담화를 한 일이 있었다.그런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이었습니다. 1917년 가을에 유명한 「105인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1백5명이나 한꺼번에 일제경찰에 체포된 사건이었습니다.일제경찰에 체포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조선국민회의 성원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파벌싸움을 하여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오직 인민대중을 묶어 세워가지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여 싸워야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지금 김형직이 「인민대중을 묶어 세우라」 「무산민중을 조직해라」라고 주장했다고 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전에 언급한 1919년 10월의 대한국민회 규칙초안을 보면 그 회원의 항목에는 「단지 여자는 중등교육 또는 5연이상 종교의 교습이 있음을 요함」이라는 조목이 있다. 식민지시대 여성에게 중등교육 수료자격을 요구할 정도의 고급한 인텔리집단이 국민회였다.그러한 국민회에 있는 김형직을 김일성은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우는 「선각자」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김형직이 「105인사건」의 한사람이었다는 주장이다. 105인사건이란 1917년이 아니라 1911∼12년에 일어났고 조선국민회가 아니라 신민회의 회원들이 일제에 체포된 사건이다. 1910년 평북 선천에서 안명근이 사내(데라우치)총독을 암살하는 의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일제경찰은 이것을 계기로 애국자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일제는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당시의 혁혁한 지사들인 유동설·윤치호·양기탁·이승훈·이동휘등 6백여명을 검거하였다. 총독부의 명석(아카시)경무총감이 그들을 고문하여 그중 1백5인을 기소,투옥하였다.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큰 타격을 입고 해체되었다. 신민회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6년 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결성한 비밀결사였다.김일성은 이 신민회를 고의적으로 조선국민회와 혼합시키고는 「조선국민회의 조직자」 김형직을 이 105인사건으로 「체포투옥」하게 하고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 조작으로 안창호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전부 김형직이 지도하였다는 신화를 만들었다.이것은 식민지시대의 신민회·국민회를 통틀어 민족주의자로서는 김형직이 제일이라는 우상화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김형직은 민족주의자이기는 하였지만 별로 두드러진 업적은 없는 인물이다.그 예로 북한이 김형직의 최대업적으로 선전하는 관전현홍통구(홍통구)회의를 들어보자. 이 회의에 대한 북한의 주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회의가 주로 조선국민회(대한국민회)의 회원이 참가하여 이룩됐다는 점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조선에서 도만한 애국지사와 열혈청년들 5백60여명은 1919년 음력 3월15일 만주 유하현 삼원포 서구 대화사에서 회집하여 대한독립단을 형성하였다. 이 독립단에 입단한 지방조직의 하나로 평양숭실학교에 근거를 둔 국민회 인사들이 있었다.그 중심인물은 오능조,고진한,황보덕삼,허영진 등이었는데 이 중 황보덕삼과 허영진은 1919년 12월에 평양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장로파의 조사(목사,장로 다음가는 성직)였던 오능조(당시 31세)는 체포를 면하게 되어 만주로 달려가 관전현 홍통구의 대한독립청년단 안병찬 아래에서 서기를 하고 있다가 1920년 5월에 안병찬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 대한독립청년단에는 회고록에 나오는 오동진도 생계부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만약 홍통구회의가 있었고 그것이 국민회 성원이 주로 참가한 것이었더라면 적어도 평양의 오능조가 홍통구에 가 거기에서 대한독립단이나 대한독립청년단의 인사를 알게 된 이후라야 가능하다. 오능조는 1919년 12월이후에 홍통구로 갔다.북한에서는 「홍통구회의」가 1919년 8월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920년 전반기라야 그러한 「회의」의 개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관전현 홍통구회의」라는 회의는 문헌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객관적으로는 누가 참가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만주의 관전현지방은 주로 평안도의 독립지사들이 모이고 있었으므로 독립단이나 청년단에 망라된 인물의 연줄을 타서 평양의 국민회원들이 거기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919년 음력 3월에 조직된 대한독립단의 성원은 의병령수,유림수뇌,보약사대표,향약계대표,농무계대표,포수단대표들이었다.또 대한독립청년단의 총재 안병찬도,서기 오능조도 좌익계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지방에 가령 김형직이 갔다 하더라도 오능조 등이 주최하는 비좌익계모임에 1920년 전반기에 참가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민족주의운동을 공산주의운동으로 방향전환」시키는 말을 김형직이 할 여건도 없었다. 관전현 홍통구회의 개최라는 김형직의 「업적」은 물론 회의개최 당일 그가 냈다는 방향전환방침도 역사적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허황한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①「주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에 대하여」김일성저작선집9 1987년 당간 149면 ②현대사총평25 544면 ③대한계년사 732면 ④대한독립사 김승학편 1965년 한국독립사편찬위원회편 325면 ⑤현대사총평28 15면 ⑥한국독립사 334면 ⑦같은책 325면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전연구:5)

    ◎서열4위 김형직을 회장으로 날조/조선국민회 실제 주도자 이름 삭제/“일제에 투옥” 주장 사실 아닐 가능성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우상화에는 조선국민회가 불가결이었다.그는 조선국민회의 결성자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경찰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의 조직경위는 다음과 같다. …1914년 9월에 장일환이 하와이의 박용만을 찾아 가 같이 싸울 약속을 했다.그는 귀국하여 총독정치의 상황과 민심을 살피고 이를 박용만에게 통보하여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장일환은 191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1909년에 먼저 돌아와 있었던 전하와이 국민회회원 강석봉과 만났다.이해 겨울 그는 또 만주 안동현의 백세빈을 만나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도록 합의하였다.이들은 간도에 이주할 계획까지 하였으나 그 계획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1917년 2월.배민수,김형직이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장일환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거기서는 평양 장로파신학교에 조선각도 청년들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였고 3월23일 13명이 모이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성 당일에는 6명이 결석하였다.이 때문에 9명이 이보식의 집에서 회합하고 장일환을 회장,배민수를 통신겸서기,백세빈을 외국통신원으로 선출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장일환이 우두머리 1917년6월,회원 배민수,김형직,노선경 등은 각기 자기의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다른회원들 중에는 「결사」라고 혈서하는 이도 있었다.이 때 배민수는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할 뜻을 밝혔다.또 국민보를 발간하여 회원에서 보내는 계획도 있었다. 17년 7월,노선경은 간도의 동지들과 연락하는 통신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서간도로 갔다.그리고 김은현,조옥소는 양경수에게 돈 일만원을 내게 하며 그 일부로 권총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후 조선국민회 회원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평양의 회원은 1918년 2월 장일환 이하 12명이 신병송검되고 기타 13명은 석방되었다…. 이상이 일제 경찰기록의 요지이다.이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는 2년반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장일환이 17년 3월 23일에 세운 결사이다. 그는 조선에서 강석봉,백세빈,배민수,김형직,이보식 등을 차례로 동지로 삼아 그중 백세빈,배민수를 간부로 뽑았다.나머지는 회원이 되어 각각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일제자료를 입수한 후 착수한 것은 김형직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나오는 인명을 모조리 은폐하는 작업이었다.은폐하기 위해서는 일본측 자료를 개찬하여야 하는데 개찬한 결과는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16에 사진 판으로 실려 있다. 이를 참작하면서 변조과정을 밝혀 본다. 일제자료에는 조선국민회 회원의 본적·주소·직책·이름을 회장 장일환(32세)외국통신계 백세빈(25세),서기 배민수(22세),서당 교사 김형직(34세),회원 서광조의 순으로 밝히고 있다.그러나 조선전사16은 이 일제기록 중에서 순번 제4위인 김형직의 본적과 주소,이름만을 사진판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책에 실었다. 일,회원씨명 본적‥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주소‥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삼리 서당교사 김형직 당삼십사년… 이와같은 기록은폐작업으로 당시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이란 시골에 있었던 김형직은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다른 간부를 제쳐놓고 일약 「회장」으로 「출세」하는 것이다. 동지들을 없애 치운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신자이고 대부분이 후에 상해임정과 연계를 가지게 되는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체제의 의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는 여태까지 그렇게도 철저하게 삭제하고 은폐한 이름을 일부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1917년 3월 23일,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조선국민회에 망라된 청년투사들은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결사」라는 혈서를 썼다』 일본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대한독립」을 혈서한 인물인데 이 혈서는 아마도 회장 장일환 앞에서 썼을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맹원 김형직의 입장을 은폐하고 이상과 같이 그를 장일환을 지도하는 인물로 올려 놓았다.그러나 김일성이 한 말의 내용은 일본경찰기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경찰기록 이상으로는 조선국민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기록 이상 몰라 조선국민회 회원은 1918년 2월 이전의 어느 날,25명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어 그중 12명이 감옥생활을 하였다.북한에서는 이것도 체포자가 백여명이었다고 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감옥에 간 12명중에 김형직이 들어 있었는가 어떤가이다.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5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3·1운동이후에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하였다. ②19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로부터 3∼4년은 그가 1916년에 투옥되었다고 변경하고 있었다. ③그랬던 것이 조선국민회 자료를 입수한 후부터는 투옥이 1917년 가을부터 18년 가을까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김형직은 만경대에서는 그 부친 보현의 장남이었다.따라서 그 「혁명적가정」에서는 많은 일가친척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주목하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들은 김형직이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그의 투옥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된다.투옥의 해가 세번이나 변경되는 추태를 보면 김일성 자신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사자료25,37면 같은책 38면 같은책 동면 조선전사16,22면 같은책 동면 세기와 더불어1,26면 1952년 4월 20일자 로동신문의 「김일성장군의 전기」참조 「조선근대혁명운동사」,북한 과학원역사연구소간 일본번역판,2백92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15면
  • 일제 형사작성 「요시찰활동 예규철」 첫 발견(광복절화제)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항일운동 탄압실상·시행세칙등 생생히/거의 「영구보존」 문서… 영구통치야욕 입증 일제시대때 일제가 항일운동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증거로 당시 고등계형사들이 작성한 「요시찰활동등에 관한 예규철」이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발견됐다. 총무처 안조일 정부기록보존소장은 14일 지난3월부터 조선총독부 문서를 한글 해제작업을 벌이던 중 일제 고등계형사들의 업무에 관한 시행세칙과 문서취급규정등이 처음 발견됐다고 밝혔다. 정부기록보존소의 이 자료 발견으로 일제시대때 항일운동탄압을 전담했던 고등계 형사들의 탄압실상과 함께 이들이 작성한 문서의 종류·취급방법·보존연한등을 파악할수 있게 됐다. 더욱이 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문서의 대부분이 「영구보존」문서로 분류돼 일제가 식민통치를 영구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지속적인 항일운동감시활동을 하려했음이 드러났다. 일제가 지난 1931년4월부터 경기도를 비롯한 각 도경찰부에서 총독부 경찰국의 지시를 받아 자행한 사찰을 규정해놓은 「요시찰인 취급내규 시행세칙」에 따르면 요시찰대상자는 ▲1차로 상습적으로 도당을 만들어 집단적 위력을 악용할 우려가 있는 자로 규정하는 한편 ▲타인의 소송사건이나 분쟁에 개입해 간여하려는 자 ▲불온행위 혹은 불온문서·도서를 밀매·반포하려는 자등으로 분류해 대부분 항일운동 관련자들을 지목했다. 또한 시행세칙 9조에는 요시찰사항을 9가지로 들고 있는데 ▲범죄 기타 부정행위의 유무 ▲생업의 유무 및 자산수입의 상황 ▲행동의 양부 및 직업의 근면여부 ▲가족의 상황및 세평 ▲교제인물 및 출입자의 모양 ▲보호훈계 또는 구제를 요하거나 혹은 장려해야 할 상황 ▲시행처 및 그 목적·출가관계 ▲명부기재사항의 이동여부 ▲기타 참고사항 등이라고 규정,요시찰대상에 한번 오르면 고등계형사들로부터 철저하게 사생활을 감시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행세칙 11조에는 고등경찰과의 형사특무·순사들은 매월 1∼2회씩 요시찰활동내용을 경찰서장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함께 발견된 「경찰서처무규정」은 지난 1930년부터 경찰업무전반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총독부경찰은 모두 2백78종의 문서를 작성하도록 해왔었으며 일제는 요시찰대상자뿐만 아니라 빙과류행상자·고물상·인력차꾼·약장사·정신병자에 이르기까지 이 출입이 잦은 사람을 모두 감시해와 어느 독재국가에도 견줄수 없는 철저한 감시를 해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고등경찰과에서는 요시찰명부·요시찰인 수사부등을 작성,감시해온 것뿐만 아니라 귀순자(일제에 투항한 자)명부·유력자산가명부등도 작성한 것으로 밝혀져 친일성향의 인사들도 결국 피지배계급으로서 감시돼온 것도 밝혀졌다. 이들 문서들은 영구·20년·15년·10년·5년·3년·2년·1년 등 8단계로 분류됐으며 모두 2백78종 문서 가운데 1백49종은 「영구문서」로 분류돼 일제는 식민지배가 영구적일 것으로 판단해왔음도 밝혀졌다.
  • “조선근대화 앞당겼다” 일 주장은 허구

    ◎독립운동사연,광복 47돌 기념 일 한반도침략과정 다각분석 세미나/총독부는 경제약탈위한 군정조직/문화콤플렉스 풀려 민족문화 말살 광복 47주년을 맞아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을 정치 경제 문화 사회등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학술심포지엄이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조동걸 국민대교수)주최로 오는 12일 상오10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열린다. 최근 종군위안부문제가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고 PKO법안 통과로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안팎으로 높아가는 것과 때맞춰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은 특히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진행된 한반도 침략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오늘의 상황과 비교,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 또 일제36년이 조선의 근대화 및 자본주의화·공업화를 앞당겼다는 일본 및 외국학계의 일부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일제의 침략논리에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 실체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가한 김운태씨(단국대 초빙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수탈조직과 기능」이라는 제목의 미리 제출한 발표문에서 『일제의 대한침략은 군사적 지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지배체제의 구축과 경제적 침투,전래의 「정한론」에 근거한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문화적 침식등이 유기적으로 관련돼 자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일본천황제 국가권력체제의 군사적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그것을 배경으로 급속히 성장한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질,일본인의 전통적 대한식민주의 침략논리와 문화적 콤플렉스등을 일제침략과정의 특이성으로 들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본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왜곡시키고 외래자본주의의 예속화를 심화시켜 한국경제의 파행성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며 그 「근대화」기능도 일제의 식민정치에 필요한 범위내에서만 허용되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재정정책」에서 국민대 최태호교수는 『총독부 재정정책은 시종 식민지 대중의 부담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들의 목적달성만을 위해 가혹한 대중수탈정책으로 일관되고 있다』며 이를 제1기(1910년대 재정독립계획과 수탈기반조성기),제2기(1920∼30년대 전반까지 15년간 관업재정의 강화와 수탈기반확충기)그리고 제3기(중일전쟁∼제2차대전까지 전시재정과 군사비 수탈기)로 나누고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일제하 식민문화정책」에서 일제 강점기의 문화정책은 한 마디로 「민족문화말살정책」이었으며 이는 한반도정책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던 침략­동화­아시아에로의 기지구축을 위한 동원이라는 일관된 일본민족 숙원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제의 문화정책을 무단통치기(1919년까지),한국문화가 본격적인 일본의존적 개화파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사이비 문화통치기(1919∼1936)그리고 동원정책기(1937∼1945)로 나눠 분석하고 특히 일본인 학자에 의한 한국문화 연구목록의 방대함과 그 수준등을 예로 들면서 일제식민문화정책의 치밀성을 지적하고 있다. 신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한국민족이 근대적 부국강병체제를 수립하는데 있어 일본보다 뒤늦기는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력적으로 전개해 오던 자주근대화운동과 정책들이 일제의 침략으로 중단됐다가 해방과 함께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극복하면서 비로소 근대화를 추진,민족적 대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반박했다.
  • 반문명적 인간사냥(사설)

    『그것은 반문명적 인간 사냥이었다』이른바 정신대문제에 관한 최초의 우리정부보고서가 그렇게 쓰고 있다.한 나라의 정부가 국민 앞에 이런 보고서를 내기 위해서는 그나름의 의지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그것을 들추는 일조차 악몽이었던 시기를 우리는 그동안 지내왔다. 이 보고서가 이제까지 알려진 자료보다 획기적이거나 비장의 것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일본의 일부 언론이 비아냥거리듯 그것은 일본인들이 발굴한 자료를 『베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어차피 이에 관한 자료는 거의 모두 일본이 지니고 있고 끊임없이 감추려 해온 것도 일본이다.그런 가운데 신빙할만한 자료가 그들손에 있으면 그 자료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보고서를 내야하는 일이 왜 불가피했는가에 대해서 한일 두 당사국은 생각해야 한다.가해자측이 계속 책임회피를 하면 피해자측은 그것을 계속 입증해야 한다.한국정부의 「공식보고서」도 그런 결과의 하나다.처음에 그들은,「종군 위안부」문제가 민간업자의 한 짓이지,일군이 개입한 사실은없었다고 했었다.발부리에 차일만큼 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무너뜨리자 그들은 다시 『모집 및 운영과정에서 일군이 개재된 것은 인정되나,동원의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들이 못발견한 입증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데,그걸 부정하는 「관방장관」이 있는 나라와 이야기를 하려면 이쪽도 정부가 나서서 진상을 밝힐 수밖에 없다.그결과 「일본군의 각본에 의해 총독부가 집행한 부녀자 사냥」이었다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우리에게 아직도 살아 있는 악몽이고 낫지 않는 상처다.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고 더 거론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의 깊은 상처이다.우리로 하여금 그걸 계속 되뇌게 하는 것은 이웃의 도리가 아니다.가해당사국이 꼭 한발짝씩 흥정하듯 하는 태도 때문에 그들의 『반문명적인 인간사냥적』인 행적은 또다시 세계를 향한 확성기에 실리게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확고한 주도국이 되었고,유엔에서 안보이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세계의 지도국이 되고 세계평화유지활동으로 화려한 역할도 하고싶은 일본과 일본군에게는 『반문명적인 인신매매의 혐의』는 불명예스러운 상처다.한국이 아직도 전후의 시련속에 있는 가난하고 절박한 나라이고,일본이 미처 「대국」의 가능성을 못보이고 있을 때,또한 피차의 상처가,아직은 너무 생생하여 서로가 「처리」해버리고 끝내기에는 너무도 큰 상처일때 처리한 일은 다시 도진다.도질때마다 아무는 속도는 지연된다.한 뿌리에서 돋은 「죄의식」과「피해의식」이 서로를 황폐하게 상처입히며 도지고 또 도지는 악순환에서 두나라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가 앞서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아량은 큰나라다운 금도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대로 짓밟힌 민족 특유의 피해증후군을 스스로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치유할 기회를 미뤄가는 일도 어리석지만 그것이 자학의 빌미로 오래 남게 하는 일은 더욱 나쁘다.그러기 위해서는 당당하되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할것이다.
  • 일경앞세워 소녀들 마구잡이 납치/정부보고서가 밝힌 종군위안부 실태

    ◎“취업 시켜주마” 인신매매 수법 사용/41년 북만주에 8천명 동원하기도/패주때 철수 안알려… 미 공습에 대부분 희생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결과는 한마디로 충격 그자체였다.이 땅의 젊은 처녀들은 강제로,혹은 속아서 끌려가 이역만리 타국을 전전하며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목숨을 부지해야했다.그리고 엄청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다가 죽어갔다. 보고서에 나타난 위안부 모집·수용·관리 과정을 살펴본다. ▷위안소의 설치◁ 18년 시베리아 출병,32년 상해사변,37년 남경대학살 당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은 현지주민의 격렬한 반항을 초래해 일본군의 점령정책에 큰 지장을 가져왔고,성병의 만연으로 전투능력의 저하를 야기시켰다. 이에따라 병참의 일부로 위안소 설치 필요성이 제기됐다. 위안소는 남경대학살 이후 군대위안소 정책이 본격적으로 채택되면서 다수 생겨났다.구주대 의학부를 졸업한 산부인과의사로 남경대학살 당시 군의 소위로 제11군 병참병원에 근무했던 마생철남은 「화유병의 적극적 예방법」이란 보고서에서 위안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육군오락소는 군공로 가까이의 양가택에 세워졌다.목조바라크 10동 정도로 각 동은 4첩반 정도의 토간이라고 하는 소실 10개로 되어있고,관리동과 함께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각 실은 나무판자문에 방안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있고 가로 30㎝ 세로 50㎝의 창이 하나 있다.창의 아래쪽 3분의2 정도는 젖빛 유리,나머지는 투명유리로 돼있다.그리고 벽에는 이용규칙인 「육군오락소규칙」이 게시돼 있었다. ▷위안부의 모집◁ 38년까지는 주로 도시지역에서 여공모집,식당종업원 모집등의 전형적인 인신매매수법으로 모집했다.이후 40년까지는 업자가 군의 허가아래 헌병·경찰·면장등의 도움을 얻어 주로 가난한 농부의 딸들을 특지간호부,군간호보조원 모집등의 명목으로 꾀어 모집했다. 41년 7월 「관동군 특별대연습」이 개시돼 8월초 약 70만의 병력이 북만주,소련 접경지대에 집중돼 대규모의 위안부가 필요해지자 조선총독부에 위안부동원을 의뢰,결국 8천명 정도를 동원했다.그러나 군부대에서의 잡역,간호보조,군수공장 여공,여자특수군속이라고 속아 동원된 미혼여성들이 위안부생활을 한다는 것이 알려져 위안부동원이 힘들어지자 43년부터는 19세기 아프리카 흑인노예사냥과 비슷한 사람사냥으로 위안부를 충원하기도 했다. ▷수송방법◁ 인신매매와 같은 사기적 수법에 의한 경우에는 업자가 여관같은 곳에 감금시켰다가 숫자를 채워서 데리고 떠났다. 37년 중일전쟁 이후 대량동원시에는 경찰·군대·관의 유기적 협조아래 창고,휴업중인 요정,작업중인 백화점건물,군부대 창고등에 집합시켰다가 수송했고 집결지는 주로 서울·부산이었다. 이들은 군 병참부의 책임아래 군용화물열차및 군용수송선으로 목적지에 수송됐으며 수송되는 업자와 위안부는 「화물」로 취급됐다. ▷배치◁ 1차 목적지에 도착하면 업자가 전선부대로 위안부를 데리고 직접 가거나,적당한 숫자로 나누어 각지의 연대·대대 등 단위부대의 위안소에 배치했다.아무리 오지일지라도 위안부가 배치되지 않은 부대는 거의 없었다.버마같은 곳에서는 한국인 위안부들은 주로 일선쪽에 많았다.당시 한국내에도 대구·영도등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안소의 관리◁ 군은 설비,이용단가및 시간·검사·감독책임등을 포괄한 관리규칙을 만들어 관리,감독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장교와 하사관과 병,일본인·중국인·한국인으로 구분,이용시간과 요금을 차등 구분하고 있다. 경영은 업자에게 맡기는 형태를 취했고 이들 업자는 군속과 비슷하게 취급됐을 것으로 보인다. 위안소의 질서유지는 헌병대및 경비담당부대가 맡았다.이외에도 매일 당직 장교가 순찰했다. 위안부들은 수입의 60% 정도를 업자에게 바쳐야 했다.위안부들은 수입에서 세금이 공제됐으며 수입을 군사우편저금의 형식으로 저축할 수 있었다.그러나 실제로 한국인 위안부가 수입을 현금의 형태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표는 일본의 패전으로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이동◁ 군부대가 이동하면 그 부대 소속의 위안부도 함께 이동했다.특히 중국에 주둔하던 부대가 버마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소속위안소의 위안부 대부분이 부대를 따라 버마로 간 것으로 보인다. ▷전쟁말기의 상황◁ 전쟁말기 미군의 공습으로 상당수가 사망했다.일부는 군부대의 참호나 영내의 진지에 수용되기도 했으나 이 경우에는 위안부의 역할뿐아니라 잡역·간호업무까지 떠맡아야 했다.일본군은 패주전 한국인 위안부들에게는 철수사실을 알리지 않아 사상자가 더욱 컸다.
  • 신유고 총리에 지명된 미국인 피니시/“주보스니아군 철수·해체”

    ◎베이커국무와 회견 【헬싱키 AP 연합 특약】 신유고 연방의 총리로 지명받은 미국실업가 밀란 파니시씨는 10일 초청받지 않았음에도 CSCE 정상회담 폐막회의에 나타나 제임스 베이커 미국무장관과 회견,『보스니아로부터 세르비아군을 철수시키고 해체시키기』로 약속했다고 베이커 국무장관이 전했다. 파니시 총리지명자는 이어 기자회견을 통해 『밀로 세비치 세르비아대통령은 평화회복을 위한 나의 뜻을 거스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그는 신유고연방의 헌법상 자신의 권한이 미국대통령과 비슷한 반면 밀로 세비치 세르비아대통령은 총독지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일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한국문화재 6백23점 밀반출

    ◎서예가 이종영씨 밝혀 【도쿄=이창순특파원】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사내정의)가 재임당시(1910∼1916)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대량으로 일본에 가져간 사실이 최근 대구의 서예가 이종영씨(62)에 의해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씨에 따르면 데라우치총독이 가져간 문화재는 신라 명필 김생의 작품을 비롯,조선시대까지 수많은 명현들의 작품들로 현재 일본 야마구치(산구)현 야마구치여대 부속도서관의 「오호데라우치(앵포사내)문고」에 소장돼 있으며 그 숫자는 최소한 6백23점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들 자료중에는 조선사가 서거정이 신라에서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동국통감」,정린지가 편찬한 「고려사」등과 조선5백년의 각종 법령을 편수한 「대전회통」,이를 보완한 「육전조례」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임경업의 일생을 기록한 「이충민공실기」와 퇴계 이황에 관한 「퇴계언행록」「퇴계선생문집」같은 전기류와 경주의 역사와 문물을 기록한 「동경잡기」및 개성에 관한 「중경지」등 지리종류도 소장돼 있다. 특히 신라시대 최치원의 시부를 엮은 「계원필경」과 고려시대 정몽주의 「포은집」,이색의 「목은집」,조선시대 이이의 「율곡선생전서」,이항복의 「백사집」,조광조의 「정암집」등 저명인사의 시문집들도 다수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최근 잇단 「모습공개」에 숨은 뜻(오늘의 북한)

    ◎김정일,「지도자이미지」 심기 안간힘/「4·15행사」전후해 서방인사들 이례적 접견/권력승계 「자연스런 분위기」조성 초점/대인접촉 기피증 불구,정권차원 연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있으라』 지난 4월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거행된 조선인민군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김정일이 전인민군에 내린 격려사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원솔)의 「열병준비완료」보고에 이은 이 짧은 격려사는 김정일의 육성이 대외에 처음으로 공개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공식석상에서의 이같은 김정일의 스피치는 지난 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위상이 잡힌 후 신비스런 이미지 조작에만 전념,대중앞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가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의 「자기모습 드러내기」에 나섰음을 알리는 신호라는게 북한 전문가들의 풀이다. 김정일의 발언은 이제까지 언론매체에 의해 보도만 돼와 서방언론은 그를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을 정도다. 김정일의 이같은 신비스런 「이미지 만들기」는 아버지 김일성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외모,카리스마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권차원의 「연출」인 동시에 대인접촉을 기피하는 개인적 성격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 고위외교관으로 있다 지난해 8월 망명한 고영환씨는 『김정일비서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기피, 「실무지도」를 나설 때는 해당공장을 다 비우게할 정도』라고 밝힌 바 있다. 서방언론들이 일찍이 이같은 김정일의 정치스타일을 두고 「아방궁 정치」라고 꼬집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김정일의 「모습드러내기」는 지난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경축행사를 전후해 두드러지고 있다. 로이터·AFP등 김일성80회 생일행사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던 외신들은 김정일이 경축연회에서 비공산권 사절단을 접견함으로써 서방측에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은 생일행사 기간중 일본 자민당 대표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었으며 에드워드 슈라이어 전 캐나다총독,로드리고 카리소 전 코스타리카대통령등 세계평화정상회의(총재 문선명 통일교교주)대표들과 주석궁인 금수산의사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지도자로서의 「모습드러내기」는 지난 89년말 김정일이 쿠바 공산당기관지「그란마」와 가진 서면인터뷰와 이 회견사실을 중앙방송이 두달 뒤 이례적으로 공개한데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북한에서 해외언론과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김일성주석 뿐이었다. 설사 해외언론과 기자회견을 했다하더라도 북한에서 그 내용을 관변 매체를 통해 선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어느 누구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서면 인터뷰였다 할지라도 김정일이 해외언론과 접촉한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일이었으며 언론매체를 통한 회견사실의 보도·선전은 김정일이 김일성과 동일선상에 올라섰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한편 지난 90년 말부터 전개되고 있는 김정일의「친필서한」공개도 같은 맥락으로 분석된다. 즉 「자상한 지도자 김정일」이 인민의 곁에 존재하고 있는「실체」임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권력승계의 자연스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란 풀이다. 김정일의 업무 지시나 독려는 「지시」나 「친필지시」,「친필서한」으로 구분돼 이루어진다는게 고영환씨의 말이다. 「지시」는 「근무기강을 확립할데 대하여」와 같은 제목으로 내려오는 포괄적 지시사항을,「친필지시」는 해당사업담당자가 기안한 내용에 김정일이 직접 수표(서명)한 지시서를 말한다. 「친필서한」은 모든 내용을 김정일이 직접 써 공개적으로 내리는 것으로 지시사항인 경우 반드시 집행해야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그러나 이제까지 김정일의 친필서한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다. 김정일의 친필서한과 관련한 북한 언론매체들의 보도특징은 각 단체 기관들이 김정일 앞으로 보낸 충성의 편지와 김정일의 친필회답서한내용을 공개하고 이를 주제로 한 인민들의 「반향」을 내보내는 것이다. 지난 90년말 북한 언론들은 관영 중앙통신사의 5국 2세포 당원들과 조선문학창작사 문인들이 김정일에 보낸 충성의 편지와 회답서한 사실을 공개,『혁명의 한길에서 동지적 의리와 사랑으로 굳게 맺어진 당중앙(김정일을 지칭)과 인민대중 사이의 혈연적 관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특히 지난해 김정일의 49회 생일에 즈음,북한군 제525군부대원들이 「군사의 영재」「탁월한 군사전략가」「최고사령관」등 찬양수사를 붙여 보낸 「맹세문」과 『우리당에 충실한 혁명무장력에 영광이 있으라』고 한 김정일의 친필회답서한 주제의 보도 역시 김정일의 군부장악과 관련한 최초의 「모습드러내기」로 파악된다.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막바지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북한은 올해 들어서도 평양방송등을 통해 김정일이 지난 1월1일 정무원 외교부 일꾼들에게 「새로운 사업성과에로 고무하는」친필서한을 보냈다고 전한 바 있다. 김정일은 또 같은 달 8일에도 평양시 창천국민학교 당1·2세포 14명의 노당원들에게 『40여년간 당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여온 노당원 동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는 내용의 회답친필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의 80회생일과 북한 인민군 창군60주년 기념행사등에서 대외에 내비친 김정일의 행보,그리고 최근 3년동안 그가 내린 친필서한의 공개·교양집회 등은 김정일이 이제 바야흐로 지도자로서의 「모습드러내기」를 본격화한 것이란 점에서 김일성으로부터의 권력승계 시기와 관련,주목을 받고 있다.
  • 1백만 관동군에 「정신대」 8만 동원/일 여성단체서 증언집 발간

    ◎조선인위안부 「기모노」입혀 위장/“군수공장 취직” 구실… 한번에 2천명씩 만주로 일본의 여성단체들이 지난 1월 개설했던 직통전화 「종군위안부 110번」에 걸려온 제보를 토대로 증언집을 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전후 책임을 확실하게 하는 모임」「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종군위안부 우리 여성 네트워크」「재일 한국 민주여성회」등 일본 여성단체들은 직통전화에 걸려온 제보 2백35건을 토대로 4개월에 걸쳐 제보자와 직접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거나 추적조사를 벌인후 그 내용을 책자(1백88쪽)로 엮어 냈다. 이 책자에 담긴 일부 증언내용은 다음과 같다(증언자들은 당시의 직책). ▲군의(78세)=1940년 관동군 사령부 조선후방부대에서 사령부의 가족과 보급감부의 진료를 담당했다. 「관동군 여자특수군속 복무규정」이라는 두꺼운 규정서는 위안부의 취급에 대해 상세히 규정해 놓고있다.여자 특수 군속이란 조선인 위안부를 말하고 있다. 규정서에는 이들에게 월 8백엔의 급료 지급과 함께 피복·침구·화장품등을 대여하도록 하고 있다.관동군 보급감부는 위안부의 「보급」업무도 맡고 있다. 철도로 여자들을 운송했다.보통 열차 한칸에 2백명씩,10칸의 화차를 통해 2천명을 한꺼번에 운송했다. 만주철도의 열차는 넓어 열차 자체가 「팡팡열차」(위안소)가 되기도 했다.국경군은 「팡팡열차」를 일정한 기간까지 두도록 명령서를 시달했다.국경의 숙박업소들은 모두 관동군의 위안소가 되어버리고 민간집까지 접수해 「팡팡 숙」(위안소)를 만들었다. 당시 전 중국 해남도까지 위안부의 수는 8만명,관동군 수는 1백만명이었다.성병에 걸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일요일 외출시에는 「돌격 1번」(콘돔)을 지급했다. ▲경비대원(75세)=1938년 중국 양자강 상류의 악주(현재 악양)에서 철도 경비부대에 근무했다. 위안소에는 일요일만 갈 수 있으며 병사 한사람이 대부분 5,6분정도 위안소에 머무를 수 있었다.위안부 한사람당 하루 20명 정도의 병사를 상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안부의 식사는 부대의 취사병이 만들어 보냈다.중국인 위안부는 중국옷을,조선인은 일본인 옷을입고 있었다. ▲통신 교육대원(73세)=나는 1944년 만주 흑용강성 부금에서 근무했다.거기에는 18∼20세의 조선인 위안부 20명이 수백명의 병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한사람의 조선인 위안부를 도망시킨 일이 있다.그녀는 경성고전 여학교를 졸업한 18세 처녀였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고관으로서 학교에서는 관동부 사령부 근무를 약속했다는 것이다.「관동군 전시 특별 여자 정신대」라고 했으나 실제로 와보니 위안부였다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마침 고열로 앓고 있어 호위헌병을 불러 「결핵」이라고 말해 해방시켰다. 조선인 여성은 경성역에서 2천명이 모여 열차에 태워져 만주의 신경에 하차 시켰다.거기서 20∼30명씩 나누어 다시 열차에 태워 각 지역으로 운송했었다. ▲국민학교 교사(71세)=1929년 8세때 부모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 전라북도에서 소학교(국민학교) 교사를 했다. 조선에서 3번째 근무지인 이리의 일출소학교에 있을 때 교장의 명령에 따라 8명의 제자(13세)를 여자정신대로서도미야마(부산)현의 군수공장에 보냈다. 당시 지시는 집안이 가난하고 몸이 튼튼한 어린이를 선발하도록 했기 때문에 수업료를 못내는 어린이 집을 방문,부모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정신대로 보내진 8명은 「심신이 모두 상처를 입어 사람들앞에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확실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종군위안부를 의미한 것으로 알았을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 한일합방등 “불법” 판명/규장각서 밝혀낸 「국권찬탈」 실상

    ◎“대한제국과 협의” 일 주장 허위 입증/고종 끝내 항거… 근대사 재조명 돼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토록한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이 국제조약상 반드시 필요한 당시 통치권자인 고종황제의 강력한 저항속에 위임장과 인준서없이 작성된 「무효문서」로 밝혀짐에따라 을사보호조약체결에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근대사부분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가 불가피하게 됐다. 한일합방이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다시한번 극명하게 확인된 동시에 당시 대한제국이 무기력하게 국권을 넘겨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따라 우리의 역사교과서의 수정은 물론 일본의 교과서 역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하게 된 것이다. 11일 서울대 규장각(관장 이태진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일제는 이외에도 1907년 12월13일 조선총독부체제에 거의 접근한 「각부관제통칙」등 48건의 각종 칙령을 당시 순종황제의 서명을 위조해 공포함으로써 1910년이전에 반포된 일체의 법령에 대한 정밀조사가 필요하게됐다.이태진관장은 『그동안 일제의 침략이 형식적으로는 법적절차를 갖춘 합법적인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사실은 을사조약자체가 체결조차 되지 않은셈』이라면서 『일제가 조약체결을 추진하다 고종황제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황제의 동의없이 부랴부랴 세상에 공표해 마치 기정사실인양 역사적 사실을 위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고종황제는 자신이 을사조약에 서명·날인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런던트리뷴지 특파원 투글내스 스토리에게 위탁한 친서(1907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를 통해 밝혔고 같은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세계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2차례에 걸쳐 천명한 것으로 확인돼 고종이 마지막 순간까지 한일합방을 막기 위해 항거했다는 사실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신용하교수(서울대)는 또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킨 것도 일제의 을사조약에 수결할 것을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교수는 『1907년 반포된 48건의 칙령에 있는 순종의 수결은 순종이 1898년 독다사건이후 신체의 일부가 마비돼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사실에 비춰볼때 놀라울 정도로 달필이어서 순종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일제에 의해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이 법적효력이 없는 「무효문서」임이 증명됨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일이 국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약체결의 다른 당사자인 일본에서도 마땅히 병행되어져야 하며 일제의 한반도 침략으로 인한 배상의 시기 역시 1910년이 아니라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으로 앞당겨져야 한다고 학계에서는 지적한다.
  • 외언내언

    「포르시운클라의 우리 안헬레스 여왕의 마을」.1781년 캘리포니아 총독 돈 펠리페 데 네베가 오늘의 로스앤젤레스에 대해 붙인 이름이었다.LosAngeles를 스페인어로 읽으면 로스 안헬레스.칠레 남부에 이 이름의 도시가 있다.「천사」라는 뜻이다.◆「천사」라는 그 이름이 부끄러운 사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다.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폭동 장면을 보느라니 기가 차다.천사는 커녕 악마의 난동.강도의 약탈질 그것이다.죄의식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가게물건을 웃으며 들고 나가는 광경이 더 오싹해지는 대목.세계를 이끌어 가는 나라의 치부가 참으로 볼썽사납다.세계에 안겨주는 충격이다.◆로스앤젤레스는 우리와 인연이 깊다.우리 마라톤이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 1932년의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그때 출전했던 김은배가 6위,권태하가 9위를 차지했다.이 기초 위에서 4년후의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우승은 이루어진다.로스앤젤레스와 인연이 더 깊어지는 것은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이 있은 후부터.해마다 이민하는 수가 늘어 여기저기에한인촌이 형성되고 있다.◆이곳에서는 미국말을 못해도 큰 불편 없이 살수가 있을 정도.그만큼 한국 사람이 많다.특히 72년 항공노선이 개설되면서는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같이 가까워졌다.상주하는 동포가 대충 50만∼70만명.그래서 폭동 소식이 전해진 날은 평소의 5배나 안부전화가 폭주했다.74년부터 가져오는 「한국의 날」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로스앤젤레스시의 명물로 부상한다.한국어 방송국도 세군데나 되고.◆이렇게 우리와 밀접한 곳이기에 남의 나라의 불행 같지가 않다.실제로 동포들의 인적·물적 피해가 적지 않다지 않은가.어서 빨리 수습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 홍콩 청마대교 공사/현대건설,수주 실패/영사로 낙찰내정

    【홍콩=최두삼특파원】 현대건설이 홍콩의 신공항건설중 노른자위라 할수 있는 청마대교건설에 최저가로 응찰했음에도 정주영씨의 정치참여와 재정보증 미비등의 이유로 낙찰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업계소식통들에 따르면 홍콩정청은 현대보다 20억홍콩달러(약 2천억원)나 많은 70억홍콩달러로 응찰한 영국의 트라팔가사를 이미 낙찰사로 내정,현재 영국을 방문중인 윌슨총독이 돌아오는대로 5월초 공식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신임 홍콩총독에/패턴 보수당의장/영 메이저총리,임명

    【런던 AP AFP UPI 연합】 영국은 24일 새 홍콩 총독에 크리스 패턴 보수당의장(47)을 임명했다고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발표했다. 오는 7월 윌슨 현 총독 후임으로 부임할 패턴은 오는 97년 홍콩의 중국 이양을 처리할 마지막 총독일 것으로 보인다.
  • 근대문화유산보존위(문화로 본 일본 일본인:6)

    ◎명치이후 유산 발굴·보존에 “심혈”/증기기관차·근대화풍 건축등 연구/나고야 명치촌엔 당시건물 65채 보존 1992년도 일본 문화청의 중점사항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사업항목으로는 근대화 유산보존대책조사연구라는 신규사업이 있다.일본의 근대화의 궤적을 보여주는 유형·무형의 각종 유산은 이제까지 별다른 보존조치가 강구되지 못한 채 근년의 기술혁신과 산업구조의 변화,생활양식의 개혁 등에 의해 급속히 소멸되는 중에 있어 조속한 보존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해졌다는 이유를 근거로 해서 정치·경제·사회등 명치 이래의 역사에서 각 부문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유산에 관해 이제부터 문화재로서 보호할 만한 범위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 조사·보존·활용에 관한 기본방침을 책정한다는 것이다. 문화청에 근대화유산보존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사연구를 실시하는데 국산 증기기관차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고 있다. 비슷한 개념으로 근대화풍 건축종합조사사업이 있다.에도(강호)후기부터 소화초기에 걸쳐목조건축의 전통적 기술이 최성기를 맞이했던 바 그러한 전통적 양식에 의한 근대화풍건축은 약 10만동이 존재한다고 일러지고 있다.그러나 저명한 주택과 여관·공공건축 등의 존재가 일부 알려져 있을 뿐이고 전국에 어떤 모양의 것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가 전혀 조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종합적으로 조사하여 문화재로서의 보존대책을 책정하는 자료로 삼는다는 것이다.대표적인 예로서 나나노(장야)지방재판소 마쓰모토(송본)지부의 구청사가 손꼽히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본다면 주택건축은 명치이래 대정·소화 초기에 기술이 최고점에 이르렀고 신사나 절 건축은 에도말기가 기술적으로 최고점이었다고는 하지만 명치에 들어서서도 질이 높은 작품이 계속 만들어졌다는 것이다.특히 신사는 내무성 신사국의 지도설계로 각지에 양질의 본전·배전·사무소 등이 만들어졌고 공공건축에 관해서도 화풍 디자인을 취한 건축이 다수 만들어졌는데 이처럼 전통적 기법·양식에 의한 근대화풍 건축의 소재확인과 가치평가,주요유적의 선정과 그 개요조사를 행하여 보고서를 작성,문화재로서의 보존대책 책정의 자료로 한다는 것이다.주택(주택·민가·여관·요정·상점·별장포함),종교건축,공공건축(학교·병원·은행·극장·재판소·역사·공중욕탕·사무소·창고·작업장(역장)포함),그리고 그밖에 그것들과 일체가 되어 보존될만한 문 등을 포함하는데 사업주체는 각 도도부현의 교육위원회이고 국고보조사업에 의해 행한다. 2년 또는 필요하다면 3년이상을 소요해서라도 시행해 보겠다는 이 신규사업을 보면서 필자는 나고야에 있는 메이지무라(명치촌)를 머리에 떠올렸다. 이는 명치시대의 건물을 옮겨 놓고 귀중하게 보존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명치의 문화와 생활을 맛보게 하려는 야외박물관이다.명치시대는 구미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두드러지게 근대화 한 시대였다고 하겠는데,여기에서 그 나름대로 장점을 지녔던 문화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일본을 세우고자 한 명치시대 사람들의 의욕과 노력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누야마시 교외,호수를 낀 경치좋은 언덕에 약1백만㎡를 터전삼아 세워진 건조물의 수는 현재 65개에 이르는데 나고야철도주식회사 회장을 지낸 츠치가와씨(사천원부)가 투자하여 만들어진 이 야외박물관에 들어선 건물중에는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시애틀·하와이·브라질에서까지 옮겨온 것들도 있다.단순히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내에 가구 집기등을 진열하여 공개하는 외에 그 건물에 관련된 자료를 상설전시하거나 필요에 따라 명치시대의 역사자료의 특별전시도 행하고 있다.또한 명치시대의 최초의 전차와 증기기관차가 손님들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고풍의 우편국에서는 실제로 우편업무를 행하기도 한다. 1975년에 개장된 이 야외박물관을 둘러보면서,그리고 19 92년도의 일본 문화청 중점사업중 신규사업의 하나를 설명들으면서 우리의 한옥지역 보존사업이나 경복궁 복원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궁금하게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특히 필자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서울시내 적당한 지역으로 이전,복원시켜 식민통치에 관한 전시공간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이전비용은 일본의 정부나 민간이 부담토록 하자는 발상은 무리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일본의 최근 세사에서 이 건물이 어느 것 못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황당무계한 주장만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억지일까?
  • “성숙한 문화의 길” 이수정장관에 듣는다/대담=임영숙문화부장

    ◎“청소년 정서함양 「산문화교육」힘쓸터”/문화의 중앙집중 탈피,지역시설 확충/국립극장등 예술공간의 특성화추진/국민의 문화욕구­정부재정의 갭 해소가 과제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맞물린 올해 국민들의 관심은 어쩔수 없이 그쪽으로만 쏠려 한가롭게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취임 2개월을 넘긴 이수정문화부장관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때』의 문화행정을 조용히 이끌어 나가고 있어 「바람개비 효과」를 노린 떠들썩한 문화행정을 폈던 이어령전임장관 시절에 비해 문화가 더욱 잊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라면 정신활동의 소산인 문화가 현실정치에 짓눌리지 않으며 떠들썩하게 강조될 필요도 없다.또한 초대 문화부장관이 문화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그 역할을 다 했다면 2대장관은 그 바람에 실체를 부여하는 차분한 문화행정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우리 사회가 냄비처럼 쉽게 들끓지 않고 열린 다양성을 지닌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때보다 문화의 조용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권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수정장관의 문화부는 문화를 앞세우기 어려운 오늘의 상황에서 큰 강점을 지닐수 있다. ­지난 두달동안의 문화행정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국민의 문화욕구와 정부재정 사이의 갭을 메우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지금은 정치·경제·문화 모든면에서 전환기입니다.조급하지 않게 벽돌 쌓듯 최선을 다해 가면 조만간 욕구가 현실화되는 시기가 오리라 믿습니다. ­그 갭을 메울 구체적인 방안은 있으신지요.이른바 「실세장관」으로 알려진 이장관의 힘으로 현재 국가예산의 0.5%에 불과한 문화부예산이 93년에는 좀더 늘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청와대에서 최선을 다해 맡은바 일을 성실히 했을뿐 「실세」라는 정치적 파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물론 올해 문화부 예산 1천6백억원은 다른나라의 문화예산에 비해서도 월등히 적습니다.그래도 우리의 발이 현실이라는 땅을 딛고 서있는 만큼 예산타령만 할수는 없으며 제한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지요.분명히 말씀드릴수 있는 것은 제가 이자리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부와 산하기관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셨습니다.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수정시대」가 열리는 셈인가요. ▲문화부에 상당히 오랜 기간 인사가 없었습니다.조직의 활력을 찾기 위해선 일정기간이 지나면 진용을 개편해야 합니다. ­예술의 전당 직제를 개편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술의 전당은 영국의 바비칸센터나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 뒤지지 않는 하드웨어를 갗추었습니다.이에 걸맞는 소프트웨어를 채워 넣기 위해서는 체제개편이 필요했지요.예술공간이 특성화돼야 한다는 것이 제 기본생각입니다.이를테면 국립극장은 전통적인 공연만 하고 예술의 전당에 궁극적으론 교향악단등 산하 예술단체가 만들어져야 겠지요.또 예술의 전당 자료관과 문화발전연구소의 자료실을 통합한다든지 해서 그곳에만 가면 예술관계자료는 무엇이든 찾을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장관이 구상하고 있는 장기적 문화정책과 단기적 문화정책을 말씀해주십시오. ▲무엇보다 삶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문화정책을 중·장기적으로 펴 나갈 생각입니다.또한 민족이 민족이게끔 하는 독창성을 바탕으로 문화를 창달해 나가야지요. 가장 독창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그렇다고 배타적이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열린 문화·생명력 있는 문화가 문화발전의 요체입니다.이를 위해 정부는 자유로운 문화예술활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현재 전국 곳곳에 마련되고 있는 종합문예회관 등 문화의 마당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활동체제를 확립해야지요.입시위주 교육에서 정서가 고갈된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심어주느냐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취임 당시부터 청소년문화 육성문제는 특별히 강조해 오셨지요. ▲일단 대학입시에 매달려야 하는 고등학생은 접어두더라도 국민학생·중학생은 적어도 1년에 한번 좋은 연극·음악회장을 찾아서 이해하고 느껴야 합니다.학교에서 집에 돌아 오면 공부방에 박혀 책만 달달 외며이어폰을 꽂고 외국가수의 노래만 듣다 직접 그들을 만나 보니 졸도까지 하게 된 것이 바로 「뉴 키즈 소동」입니다.교육부 소관이긴 하지만 교육 자체에도 산교육이 필요합니다.그래서 문화부가 청소년을 초대하고 찾아가는 문화예술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교육부에도 현장학습을 교과제도에 반영시켜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자주 피력하고 있습니다.이렇게 가능한것 부터 하나씩 개선해 나가야지요. ­문화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것,겨레를 겨레답게 하는 것,언어 풍속을 포함,국민들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가치체계』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하신바 있는데 모든 국민이 문화향수권자가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한 특별한 구상이 있는지요. ▲경제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여건이 조성되어 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중전체의 문화향유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1년에 대학을 졸업하는 음악·무용전공자가 1만여명에 달하고 미술전공자도 5천여명이나 됩니다.예술전공학생이 이만큼 배출되기 위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엄청난 숫자의 예비 학생들이또 있습니다.우리 사회의 과제는 이를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지방자치시대가 시작됐음에도 문화의 중앙집중현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문화부는 올해 지역문화시설 확충에 어느때보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그러나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있는만큼 이제는 지역주민이 그 지역문화를 일으키는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시·도의원들부터 문화투자를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지방자치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지방자치제는 지역민의 경제적 부담을 필요로 합니다. ­지난해 떠들썩했던 구조선총독부 청사 이전문제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언젠가는 철거돼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의 기능은 잠시라도 중단시킬수 없고 새 박물관을 세우려면 6천억원 이상이 필요하지요.지금과 같은 경제상황에서 너무 조급한 명분론은 찬성할수 없습니다.그러나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가면 그자리에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국립미술관을 세울수있는 부지를 마련해달라고 건설부와 서울시에 적극적으로 요청해 놓고는 있습니다. ­남북문화교류는 어떻게 추진하실 계획입니까. ▲남북이 하나라고 말할수 있는 것은 문화때문입니다.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기 때문에 교류를 하려면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지요.우선 언어·고대사·문화재 등 민족의 기본적인 것을 바탕으로 북한에서 수용할수 있는 것부터 교류해 나가야겠지요. ­대학시절 4·19선언문을 기초하셨고 그 원고가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데 문화부 장관으로서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 감회가 어떠하셨습니까. ▲독립기념관 개관 당시 육필원고를 써 달라고 해서 새로 써 준 것입니다.그때는 제가 문화부장관이 아닐때지요.저희 세대가 살아온 기간은 파란이 많았습니다.일제하에 태어나 해방의 감격을 맛보았고 한글 첫 세대로서 6·25와 4·19,5·16,유신을 겪었습니다.지금은 과거 희망이 없었던 시대에 우리 선렬들이 꿈꾸었던 소망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통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그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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