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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성제대 비판한 첫 실증연구 “눈길”(건널목)

    ○…19 24년 설립됐던 경성제국대학등은 조선총독부가 세운 일제의 고등교육기관.이들 교육기관은 교육과 연구등 대학 본연의 사명보다는 식민지배를 위한 친일인재양성에 더 큰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해방이후 한국고등교육의 전사로 수용될수 없다는 주장이 독립기념관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장세육연구원(35)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최근 발간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집에 발표한 「일제의 경성제국대학 설립과 운영」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오히려 일제식민통치및 문화침략의 한 기구로써 철저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경성제대를 「일제식민주의 교육의 이식과 외연」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 들어간 이 논문은 경성제대일람,경성제대예과일람,법문학부 교무예규집,경성제대예과 교수요강등 당시의 학사관련 문헌과 경성제대학보,학우회보,관보등 광범위한 문헌자료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각 교육과정이나 목표,역대 총장의 경력이나 교육방침,그리고 졸업생의 진로등을 분석,『경성제대는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일본인을 위해 세워진 대학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특히 경성제대의 설립과 관련,『일제가 식민지교육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우민화와 동화주의적 입장에서 19 10년대 보성전문 연희전문등을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민족적 요구를 억누른채 이를 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립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경성제대나 경성의전 경성법전등이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간주되며 경성제대 졸업생이 서울대학교 동창회의 회원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도 모순』이라고 지적.이 논문은 경성제대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 연구로 간주되어 주목을 끌었다.
  • 미주신대륙 발견/“덴마크가 20년 앞섰다”

    ◎사학자,15세기 벽화·지도 근거로 주장 「아메리카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은 스페인탐험대의 콜럼버스가 아니라 덴마크 사람이다」. 지난해의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백주년 기념 축제와 이에 대한 논란으로 아메리카대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고있는 요즘 덴마크에서는 그동안의 정설을 완전히 뒤엎는 주장이 나와 화제가 되고있다. 덴마크의 역사학자인 에릭 키에르가르는 최근 한 문헌학자의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콜럼버스보다 20년가량 앞서 덴마크인·포르투갈인·독일인등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발표했다. 근착 덴마크 리뷰지가 소개한 그 내용을 보면 15세기의 포르투갈은 신세계개척의 라이벌인 스페인과는 경쟁관계였지만 덴마크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덴마크의 세력권이었던 북극개척을 통해 동방항로를 열어보려는 야심을 품고있었다.포르투갈의 아폰소왕은 이같은 야심을 실현하고자 크리스티엔 덴마크왕에게 해양탐험을 권유하고 이를 돕기위해 신하인 요아 바스 코르테 레알을파견했다. 이에따라 크리스티엔왕은 한스 포토르스트와 독일출신의 디트리크 피닝이라는 두 제독에게 탐험임무를 맡겼다.이들은 코르테 레알과 함께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그린란드 동안을 향해 탐험선을 몰아갔다.그러나 그린란드해적인 에스키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난리를 치르는 사이 배는 거센 해풍에 밀려 엉뚱한 곳에 닿았으며 이들은 이곳에서 일정기간 머무른뒤 덴마크로 귀항했다.이때 탐험선이 도달한 곳은 캐나다 동북부의 래브라도이며 그 시기는 1472년이나 1473년이다. 키에르가르의 신대륙발견사는 이렇게 요약되며 그 뼈대는 문헌학자이자 코펜하겐대학 사서과장이었던 소푸스 라르센이 지난 24년 제21차 국제미국학회에 제출한 연구서에서 따왔다.이 연구서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코르테 레알은 1474년 탐험항해에 대한 보상으로 아폰소왕으로부터 한 섬의 총독지위를 수여받았으며 덴마크의 두 제독은 1480년대 초반 영국해적 소탕전에 나가 전사했다. 키에르가르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16세기의 포르투갈 지도와 당시 건립된 코펜하겐 북부 헬싱고르의 교회벽화를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제시했다. 1534년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한 지도에는 래브라도라는 지명 근처에 탐험에 나섰던 요아 바스의 이름을 딴 마을이 두곳이나 표기돼있다.그리고 탐험을 주도한 크리스티엔왕 재위시에 건립된 덴마크의 한 교회벽화에는 탐험가 포토르스트의 모습이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다. 덴마크 역사학자들은 키에르가르의 주장이 제기된뒤 이의 뒷받침자료가 부실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탐험이 비밀리에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사실쪽으로 굳혀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아메리카 발견사에 관한 새로운 발견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한국의 관보」/조선∼정부수립전 관보 역사·변천 추적(화제의 책)

    「한국정부간행물에 대한 연구」「한국정부공문서의 분류조직」등 정부간행물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최정태교수(부산대·문헌정보학)가 조선조에서 정부수립이전까지 관보의 역사와 변천을 추적했다. 연구범위는 조선조의 「조보」와 「한성순보」(1883∼1884),「구한국관보」(1894∼1910),「조선총독부관보」(1910∼1945),「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1919∼1944),「미군정청관보」(1945∼1948)로 제한했다. 지은이는 이 저서를 통해 정부간행물의 대명사격인 관보의 자료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이에대한 관련학계의 연구소홀을 꼬집고 있다.특히 발행사항,내용 그리고 서지기술면에서 종래의 왜곡된 부분을 검증했다. 최정태지음 아세아문화사 7천원.
  • 영 홍콩신공항 계획 등/중국,전면 반대

    【홍콩=최두삼특파원】 크리스 패턴 홍콩 총독의 홍콩 헌정개혁안을 둘러싸고 벌어지기 시작한 영국과 중국관계는 중국측이 패턴총독의 헌정개혁안뿐아니라 다른 97년까지의 발전계획과 영국의 홍콩 신공항건설계획까지 일괄적으로 공격하고 나섬으로써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으며 이같은 중국의 영국에 대한 공격으로 홍콩에는 새로운 「중국공포」가 일어나 주가가 크게 하락하고 있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를 비롯한 홍콩신문들은 중국이 다음주 행정국의 토의를 기다리고 있는 패턴 총독의 1백90개항의 홍콩 발전계획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중국은 이미 착수된 신공항 건설계획과 입법국과 행정국에 회부된 헌정개혁계획 및 복지계획 등 여하한 영국측의 단독적인 행동에도 반대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새로운 대영국비난은 홍콩에 또다시 「중국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홍콩의 항생지수를 연 이틀간 1백포인트 이상씩 하락시켰다.
  • 조선왕조실록 국역 곧 마무리

    ◎68년 국책사업으로 시작… 26년만에 결실/52억 투입 연 2,500여명 참여/1,707의 내용 413책에 담아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발간사업이 올해말 완료된다.지난 1968년 국책사업으로 시작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발간은 이로써 26년만에 모두 마무리짓게돼 조선시대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왕조실록은 금년에 광해군일기11책 영조실록6책 정조실록22책 순조실록9책등 잔여분 48책을 펴냄으로써 총1천7백7책의 내용이 모두 4백13책의 국역본에 담겨지게 된다.또한 이들 국역본에 대한 색인 34권도 편찬될 예정이다.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일기형식의 종합기록인 이 실록은 조선왕조사 연구의 필수적인 사료일 뿐아니라 중국 일본 만주등 주변국가와의 교섭기록도 상당량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동양사연구에도 불가결한 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이번 작업중 광해군일기의 경우 최종원고인 정초본을 번역한 다른 실록과는 달리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정본인 중초본을 번역했다는 점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실록은 철종대에서 끝나고 있어 고·순종시대 객관적 사료의 확보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민족문화추진회의 이원순회장은 『고·순종실록은 일제때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인학자들에 의해 기술됐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이 중요한 시기의 사료가 공백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당시의 승정원일기등의 국역이 뒤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북한은 지난 70년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에서 이 실록의 국역작업을 시작,지난 81년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4백책으로 완간한바 있다.따라서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분담하여 추진해온 이 사업은 52억원의 예산과 연인원 2천5백명의 전문학자들이 동원된 사상최대의 국역사업으로 부각됐다.
  • 희곡작가 박조열씨(이세기의 인물탐구:12)

    ◎연극계에 신풍일으킨 “지적작가”/발표하는 작품마다 주옥편·문제작·수작 일색/특유의 표현력으로 주제부각… 관객들 매료/「오장군의 발톱」으로 백상예술상대상·희곡상 수상 박조열이란 이름은 몰라도 희곡 「오장군의 발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이 희곡은 74년당시 예륜의 「공연불가」판정으로 연극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88년 해금되어 문예극장대극장 무대에 올려졌을때 「역시 박조열 희곡」 찬탄을 금치못하게 했다. 탄탄한 극적 구성과 그 소재의 특이성,해학적이라 할 작가특유의 언어 표현의 탄력성은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그의 작가적 자존심은 연극의 어디에서도 잔재주를 부리거나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는다.진지하게 대상에 정면 대결하면서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연극속에 용해시켜 설득력있게 관객의 심금을 움직이게 하고있다.어떤 소재를 어떤 시각으로 다루던 극의 테마를 작품 전편에 도도하게 깔고있으면서도 지성의 감성을 잃지않는 것도 대단하다.감상과 정조에 탐닉한 나머지 작품의 객관성을 파괴하는 일도 없다.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무대를 바라보면서 한정된 공간속에서 빚어지는 여러종류의 갈등을 저나름대로의 시각으로 판단하게 한다.그는 연극의 격조뿐아니라 이를 감상하는 관객을 그만큼 존중해주는 작가다. 연극계데뷔 28년만인 91년,첫희곡집 「오장군의 발톱」을 펴냈을때 평소 그를 총애해 마지않던 연극계의 원로 여석기씨는 그의 희곡집출간을 「기특하다」고 표현했었다.「기특하다」는 표현을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지독하리만큼 「과작」인 그가 과연 「책한권」이 될만한 분량의 희곡작품을 썼느냐는 것이다.두번째는 「남달리 깐깐하고 결벽성이 강한 그가 자작품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선보이겠는가」하는 평소의 그의 사람됨과 성품을 꿰뚫어 알고있는 입장에서의 소견이다. 어쩌면 수년후로 미루거나 또는 영영 이루지 못했을 이 창작희곡집은 그를 아끼는 후배들의 권유와 강요에 못이긴 소산인 셈이다. ○30년간 쓴 희곡 9편뿐 박조열은 연극계에 몸담은지 30년동안 단 9편의 희곡을 썼을 뿐이다. 단9편의 희곡만으로 그는 연극계의두드러진 존재가 되었고 그의 희곡은 어떤 누구의 작품보다 많이 연극무대에 올려졌다.이는 뛰어난 작품성과 글에 대한 완벽주의,확고한 주관의 작가정신 때문임을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는 없다.세속적인 것에 대한 일체의 거부,불의와 뻔뻔스러움을 용납치않는 단호한 의지는 희곡을 쓰지않는 동안의 여러 글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 좋은 예로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오장군의 발톱」을 들수있다. 「오장군­」은 문예진흥원이 주는 첫번째 창작희곡지원작가로 선정되어 쓴 작품이다. 성은 「오」이고 이름은 「장군」인 이 땅의 무식하고 가난하고 순수한 심성을 지닌 한 농부와 군대에 간 아들 걱정으로 잠못이루는 따뜻하고 다감한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없이 단지 주인공이 「소총병」이며 「반전」과 관련된 대목이 삽입됐다는 이유만으로 이 연극은 연습도중 발이 묶여 긴 어둠속에 사장됐었다. 공연이 좌절됐다는 실망도 실망이지만 이에 충격받은 작가는 이때부터 창작의욕을 잃고 붓을꺾다시피 긴 칩거에 들어갔다. 그 이전까지는 그의 희곡이 무대에 올려질 때마다 관객의 호응과 평자들의 주목을 받아 그때마다 「정신세계가 풍요로운 지적 작가」로 지적되곤 했다. 데뷔희곡인 「관광지대」는 당시의 국시인 「유엔을 통한 남북통일 정책을 위반」했고 「미국 대표를 냉소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논란되면서 대학극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는등 젊은 연극도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또 작가로 하여금 「희곡의 재미」를 체험케하여 극작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된 계기가 되게했다. 다음작품인 「토끼와 포수」는 달리 설명을 하지않아도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의 하나다.이 연극은 「우리 연극계에 일대 신풍을 일으킨 무대」로 평가받았다.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극진행과 대사와 대사의 숨막힐 듯한 불꽃대결,연극만의 특권인 대사해학과 동작변화의 반전시도는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이 연극은 김정옥연출로 극단 민중극장이 초연하여 동아연극상대상·연기상·극본상을 휩쓸었고 지금도 각 극단들이,그리고 지방극단·대학극에서 다투어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렇게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옥편­문제작­수작」일색이었다.그중에서도 「목이 긴 두사람의 대화」는 이른바 우리연극에서의 반연극·불조이극의 시범이라 할수있는 극작법이 특징이다. 통일문제가 극도로 터부시되던 시절,그 벽을 뚫기위한 방법으로 동문서답식의 모호성과 추상성을 의도적으로 구사하여 작품이 말하려는 진의를 맨끝장면에서 관객이 깨닫게하는 은유법으로 극을 만들어나갔다.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은 흥미롭고도 자극적인 새로운 관극경험을 할수 있었다. ○흥미롭고도 자극적 「오장군­」의 「공연불가」방침에 못지않게 그를 분노케한 것은 오장군에 대한 연극계의 비겁한(?)침묵이었다.그것이 부당한 판정임을 알면서도 누구하나 부당함을 말하려하지 않았다. 생계수단으로 방송극에 손대는 동안에도 그는 그에게서 「연극」을 빼앗아간 분노가 앙금처럼 가슴에 남아 이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 불탔다.정신적으로 왕성하던 시기에 혼신의 힘을 쏟아 희곡에 손댔고 얼마든지 샘물처럼 글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누군가 그를 가로 막아버린 것이다.창작의 샘물줄기를 잔혹하게 절단시켜버린 것이다.그는 비수같은 노여움을 죽이고 오로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86년 연극협이 처음 설치한 극작분과위 초대위원장에 추대되자 먼저 「규제 작품」들을 구제하는데 총대를 메기로 결심했다. 「남북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규제의 한계가 불투명하고 기껏 「단어 한자」에 신경을 곤두세우려는 그 법자체가 설득력이 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첫번째 시도로 그해 「한국연극」(4월호)에 「표현에 대한 한계장황과 개선책」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글 자체는 부드러웠으나 「공연법자체가 헌법에 위반되는 법률」임을 전제,「공연윤에서 윤리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가시적인 잣대로 규제하려들기보다 이를 오히려 자정기능에 맡기라」고 은근히 꼬집었다. 이를 기화로 신문·방송과 각분야전문지들은 일제히 「표현의 자유」를 다투어 보도하는등 이를 다각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에 이르렀다.그는 제11회 서울연극제 심포지엄에서도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생각하자』고 역설,이어서 「한국연극」 「공간」 「예술과 비평」지 등에 같은 논조의 글을 발표,일본연극전문지 「신극」에도 이후 4년간 한국연극계 동향에대한 평문을 기고하여 일반과 전문기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당위성과 인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그는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 일본 동경대 교수인 오쿠다이라 야스히로(오평강홍)의 「표현의 자유」(전3권)등의 저서를 구입하여 밤새도록 세밀분석으로 독파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1·4후퇴때 월남 88년 비로소 긴 어둠에 갇혔던 「오장군­」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로 어렵게 막올린 「오장군­」 공연은 그의 가슴속의 울분을 속시원히 씻어줬을 뿐만아니라 전례없는 대호평으로 그해 백상예술상대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그는 연극계에 돌아왔다.그처럼 아끼고 사랑해온 연극계 중심부에서 이제는 리더의 위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박조열은 함남함주에서지주의 외아들로 출생,문학하는 친척이 집안에 있어 쉽사리 문학적 분위기에 빠져 들어갔다.도스토예프스키와 안톤 체호프,버나드 쇼와 몰리에르에 심취하여 그때까지는 막연히 소설가를 꿈꿨을뿐 극작가가 되리라곤 상상치 못했었다. 고향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지주신분」을 숨긴 것이 드러나 산간오지로 좌천되면서 월남을 결심,1·4후퇴때 흥남부두에서 남쪽으로 가는 LST에 승선했고 묵호항 정착후 육군에 지원,12년간의 군복무시절의 삽화를 정리한 것이 연극 「오장군­」이다. 험준한 산악 최전방 소대원으로 근무하던 51년,허약체질인 그가 고된 산중의 강행군을 견디다못해 「자결」을 결심하려던 순간,어디선가 그를 황급히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는 「자결한 아들의 소식」을 듣게될 어머니의 한을 생각하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긴 과거를 간직하고있다. 그때 산중의 목소리는 「생사조차 알길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념이 천리길 첩첩산을 넘고 휴전선 지뢰밭을 넘어」그에게 와닿는 순간이었음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그는 남편을 존경하고 믿는 부인 최선분여사(58)와 공부잘하는 외아들(현섭씨·31·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어머니 그리운 마음」에 밤새도록 술 마시며 눈물지을 때가 잦다고 말한다.그리고 고향을 등진지 40년이 지난 오늘도 어제일처럼 손에 잡히고 눈에 밟히는 두고온 산하,고향의 얼굴들이 잊힐리야 없다.따라서 남북통일문제는 그의 희곡속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커다란 기둥줄기가 될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만하다. 그는 요즘 15년만에 국립극장 가을공연 위촉작품과 태평양국제연극제를 위한 새 희곡 집필에 들어가 있다.그의 손으로 찾은 「표현의 자유」이후 주제를 마음껏 펼칠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 될것이다.작가의 사명감과 투철한 작가정신,깐깐하고 곧고 불의와 세속을 거부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연극의 자존심을 돌이켜 아마도 또하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움」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연보 ▲1930년10월 함남 함주군 하조양면 지주인 박승훈씨와 최한익여사의 1남4녀중 장남 ▲47년함남중학(구 함남고보)졸업 ▲49년 중등교원 자격시험합격(문학),원산공업학교교사­마전리중 전근 ▲50년 흥남철수때 월남,육군지원입대이후 12년간 군복무 ▲63년 육군예편,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연구과정(극작수업),단막희곡 「관광지대」(단막희곡 28인선 수록) ▲64년 장막희곡 「토끼와 포수」극단 민중극장 초연 ▲65년 희곡 「소식」극단 민중극당 초연 ▲66년 단막희곡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극단「탈」초연 ▲67년 단막희곡 「불임증 부부」(저승에서 만난 부부)극단 「탈」초연 ▲70년 희곡 「흰둥이의 방문」 ▲74년 희곡 「오장군의 발톱」예륜 「공연불가」판정 ▲75년 여석기씨와 함께 한국극작워크숍 창설 ▲76년 희곡 「가면과 진실」(문예진흥원 창작희곡지원작가),희곡 「조만식은 아직도 살아있는가」 ▲79년 한국최초의 FM 음악드라마 「음락가의 소상」(11개월 집필) ▲80년 독립투쟁과 사상분열사를 다룬 장편다큐멘터리 「땅의 아들들」(10개월 집필) ▲83년 일본연극계 견문 ▲86년 한국연극협회 극작분과위원회 초대위원장 ▲88년 「오장군의 발톱」해금(극단 미추 초연) ▲89년 ITI(국제연극협회)헬싱키총회 참석 ▲92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산하 세계문학 연구소 심포지엄에서 「한국연극계의 글라스노스치」강연,일본마에바시(전교)예술제 심포지엄서 「한국의 현대연극」강연,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국제연극제 극단 미추의 「오장군의 발톱」공연참관 ▲88∼현재 숭의여전 문창과 출강 동아연극상 대상(희곡상),제8회 대한민국 방송대상,백상예술상 대상(희곡상) 「오장군의 발톱」「총독 돌아오다」「한국현대단막극선」
  • “홍콩 민주화계획 취소안하면/중국,엄중 대응조처”/인민일보 보도

    【북경·홍콩 AP AFP 연합】 중국은 홍콩 입법원이 크리스 패튼 총독의 민주화확대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모종의 대응조처들을 취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중국 관영 인민일보가 16일 보도했다. 인민일보는 이날 1면 기사에서 『영국이 과오를 깨닫고 홍콩 입법원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입장을 수정하지 않는 한 중국측은 분명히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해 필요한 조처들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문은 사실상의 주홍콩 중국대사관인 신화통신 홍콩분사 장준생 부사장이 14일 홍콩의 한 모임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전했다. 다음달 패튼 총독의 정치개혁안을 심의할 예정인 입법원은 앞서 지난13일 패튼에게 개혁안 백지화요구를 압도적으로 부결시켰으며 이에 패튼총독은 이번 주 중·영 양측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으로 입법원에 개혁안 수정을 촉구했다.
  • 중,“내정간섭 말라”/미 차기정부에 경고

    【북경 AFP AFP 연합】 중국은 14일 미국의 차기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의 국내문제를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오건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주례 브리핑석상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에서 「광범위하고도 평화적인 혁명」이 일어나도록 조장할 것이라고 밝힌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내정자의 미상원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중국측의 입장을 이같이 밝혔다. 오 대변인은 중국이 지금까지의 합의들을 존중해 상호 관계를 발전시킬 준비가 돼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들 합의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에 『상호존중과 내정불간섭등 중요한 원칙들이 많이 담겨있다는 점』 또한 무시돼선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 대변인은 또 홍콩의 정치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우리의 입장은 크리스패튼 홍콩 총독이 정치개혁안을 철회해야 하며 홍콩의 현행 기본법을 바꾸려는 이같은 계획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말했다.
  • 홍콩주둔 영 국경수비대/연례 군사훈련 재개 시사

    ◎대중관계 악화따라 중단 1년만에 【홍콩 로이터 연합】 영국은 지난해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연기됐던 홍콩 주둔 영국 국경수비대의 연례 군사훈련을 올해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콘 리프킨 영국 국방장관이 8일 말했다. 이같은 발언은 크리스 패튼 홍콩총독의 홍콩 민주개혁계획으로 중­영 양국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중국측의 대응이 주목된다. 홍콩을 방문중인 리프킨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홍콩 주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군사훈련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해 「날개달린 용」으로 명명된 홍콩주둔 영국 국경수비대의 연례 군사훈련을 재개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영국군 수비대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오는 97년까지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확인한 뒤 『구체적인 철군 시한은 유동적』이라고 말했다.
  • 중,홍콩협정 준수/이붕총리

    【북경 AP 로이터 연합】 중국의 이붕총리는 8일 홍콩의 민주개혁을 둘러싼 패튼 홍콩총독과의 갈등에도 불구,중국은 홍콩문제에 대한 영국과의 합의사항을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 홍콩민주화 계획 대중국 타협 시사/패튼총독

    【런던 로이터 연합】 크리스 패튼 홍콩총독은 홍콩의 민주화계획에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밝히고 최종제안이 중국에게 수용할 만한 것이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패튼총독은 4일자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지에 실린 회견에서 『영국정부는 홍콩주민이 원하는 것 이상 나아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또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 소설가 최인훈씨(이세기의 인물탐구:10)

    ◎「자신의 언어」에 충실한 “지적성직자”/현실묘사보다 관념성 짙은 작품활동 주력/화제작 「광역」발표로 “전후최고작가” 명성도/다방면에 해박한 지식·분석정신… 주관 강한 성품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아마,마카오에서 다른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소설 「광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추악한 밤의 광장인 남쪽이나 밀실은 없고 광장만 허용되는 북의 기계적 체제등 모든 것에 염증과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어딘가 먼곳,아득한 이상의 나라인 제3국으로 가는 선상에서 실종되자 독자는 그의 실종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은둔인가,영원한 죽음인가,그렇다면 희망과 기대없는 암담한 절망이란 말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소설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곧 이 소설은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을 동시에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는 점과 분열된 이데올로기의 비극이 첨예하게 묘사됐다는 이유외에도 불꽃튀기는 눈부신 지적 문체와 지성미 넘치는 철학적 사고,극명한 체제분석등은 60년당시 정치상황의 독자들에겐 싱그러운 통쾌한 충격일수밖에 없었다. 최인훈은 문단데뷔 1년만에 일약 유명작가로 부상되었고 많은 평자들은 다각도로 그를 조명하기에 앞을 다투었다. 문단과 젊은 문학도들은 당연히 이 당돌한 신인작가가 누구인가에 주목했다.그러나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최인훈은 그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거나 물러서지 않은,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적당한 범주속에서 언제나 담담하고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을 뿐이다. ○견고한 자기세계 구축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 자신이 자신을 감추거나 도사린 것이 아니라 제3자가 그의 실체를 공략할 수 없게끔 이미 탄탄하고 견고한 지식의 성속에 군림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다. 그와 친한 친구들­이라기보다 그를 가까이 하려고 접근했던 이들은 그의 문학과 철학 역사와 생태학 진화론에 이르는 해박한 지식과 지적직관,철저하게 파고드는 분석정신에 삼투된 나머지 오히려 그를 난삽한 존재로 규정짓고는 일찌감치 그에대한 현혹을 포기했던 것 같다. 예를들어 그는 아무나를 만나서 선뜻선뜻 대화에 응하거나 문학지등이 내건 잡다한 기획에 뛰어들어 그때마다 지면을 장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필자는 아니다. 그가 나설 자리 나서지않을 자리를 또박또박 구두점을 찍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타당성 여부를 명료하게 따지고 타진한다.그래서 편집자측도 그에게 맞는 마땅한 기획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게되었고 그역시 『부덕한 사람이 실수를 피할수 있는 길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최상』임을 전제,상대방이 빠져나갈수 있는 탈출구를 터주고 있다. 만사에 긍·부정을 분명히 하면서 이렇게 적당한 변명을 달아주는 것만봐도 지금까지의 주변의 평가대로 그의 행동과 말에는 막무가내의 기미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작가라는 작위」가 갖는 위치가 「막대한 부채를 인수한 상속자」라 현지라도 체면상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거나 체면상 글 한줄 써야 하는 허례와 허식,의례적 형식들을 외면하기 위해서,그러니까 그 자신을 보호하려는 걸맞는 이유를 장치하고 있었는지도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가 오라하지도 않고 갈만한 일도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된다.따라서 사교적인 모임이나 장소에서는 객관적으로 건너다보아도 그의 존재는 어울려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설의 네 귀가 딱딱 들어맞아 빈틈이나 허술함을 찾아볼수 없듯이 그의 평상시의 모습,작가로서의 모습도 여전히 그의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의 걸음걸이에서도 성격이 나타난다.그는 손끝까지 똑바로 편채 걷는다.호들갑스럽게 놀라고 감탄하고 감동하지 않는다.침착하게 아주 천천히 반응하기 때문에 그와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곤혹스러운 노릇이다. 자연스러운 자리가 아닌 이상 상대방이 아무리 떠들어도,그래서 의도적으로 작가의 어떤 면을 꿰뚫어보고 그 대답을 얻고자 하는 방법일 때는 그 질문이 명료해질 때까지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버린다.그리고 산만함중에도 상대방의 의중이 진지하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면 비로소 한마디의 압축된 대답으로 노냐 예스냐로 반응한다. 그는 말을 절제하되될수 있는한 명증한 말만을 고르고 있다.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 그의 소설은 흔히 「관념소설」또는 「환상소설」,작가로서의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비현실적이라고도 말한다. 혹자들은 그의 소설에는 「생동하는 인물」보다 「지적괴뢰」들이 넘쳐있으며 「쉽게 쓸것도 어렵게 쓰고」그래서 그는 「관념보다는 현실을 그리는게 목적인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비꼬기도 한다. 이른바 카뮈나 사르트르보다는 로맹롤랑이나 레마르크처럼 삶의 향훈이 물씬 풍기는 눈물과 한숨과 인생역정과 사랑의 애증을 그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은 관념에 우선한다」는 논리에 반대되는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관념」은 예술적으로 소설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도 「현실에 우선할 수 있는 소설적 기법」임을 그의 여러소설에서 단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고귀한 자가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극적 상황」만이 독자의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정답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라는 유클리드의 공식만큼이나 자명하고 단순할뿐 「고귀한 자」는 「한사람의 남자」이거나 「귀족」이거나 「영웅」이전에 그가 처하고 있는 사회적·철학적·도덕적 차원에서 「고뇌하는 현대인」「방황하는 지식인」일수도 있음을 그는 대표작 「광장」과 「가면고」「회색인」「웃음소리」등에서 증명해보이고 있다. 평소의 그는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들처럼 24시간 책읽기에 빠져있고 혼자 앉아있기를 좋아하며 남들과의 케상공론보다 아들 윤F(20)에게 「영산회상곡」이나 베토벤을 신청해 듣는 것이 행복하다. 바둑을 둘줄도 모르고 스포츠도 모른다.다른 취미나 오락이 있을리 없다.요즘은 긴 방학을 맞아 갈현동 2층서재에서 오랜만에 신작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실은 소설에 손댈 경황도 심적 여유도 없었다.34세에 뒤늦게 결혼해서 낳은 아들 윤F가 중2때 간염백신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보균자로 나타나는 바람에 그는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일념과 기원으로 좋은 의사,좋은 병원을 찾아 뛰어다녀야만 했다. 학업을 중단한채 누워서 책과 음악으로 소일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천둥처럼 무너져 내렸으리라. 문학이 예술이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예술일 것이다.아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를 체험으로 끄집어내고 휘두를만큼 그는 잔혹하지 못하다. 그것이 작가로서 위대한 것이라면 그는 「사양하고 싶은 위대함」이라고 외면해 버린다.2년전 윤구는 회복하여 검정고시합격으로 지난해 대학에 갔다.딸아이 윤경이도 올해 이대 영문과에 입학,모처럼 가정에 안락이 찾아들어 그는 작품구상을 할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무슨일에든 까탈을 부리거나 까다롭게 군 적은 없다.남들이 지레짐작하는 것이라면 그로서도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다.그는 다만 글을 쓰는 일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않아 쓰지않을때도 언제나 내면에서 쓰고있었다고 말한다.그러나 「광장」이후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작품을 쓰느니 못쓰느니 끝없는 소요로 들끓었다. 그가 「광장」을 쓴것은 24세때다.이후 이 소설은 대학생과 문학도들의 필독서에다 지난 32년간 해마다 1만부이상,지난해엔 2만부,지난해초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가 노벨문학상 후보작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단일작품으로는 평자들의 가장 많은 논란을 받았고 「전후 최대의 작가」로 찬사되기도 했다. ○24세때 「광장」 발표 그는 함남 회령출신으로 6·25때 가족이 모두 월남,피란지 부산에서 16세때 장편소설 「두만강」을 쓰기 시작해서 이 소설은 70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아무런 목적없이 법과를 택한 자책감에 학문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결국 출석미달로 4학년에서 1학기를 남기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의 웃음은 순백하다.그의 심성은 천진무구한 소년과도 같고 그의 행동은 순리를 좇아 자연스럽기만 하다.그는 집에서는 두남매와 소탈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원영희씨)와의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고 그리고 이 시대의 대표적 작가의 한사람이다. 평론가 김현은 그의 향기높은 지적 탐구로서의 문학에 대해 롤랑 바르트와 줄리앙 방데의 말을 빌려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그는 독자의 평균에 부합하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에 성실하게 맞부딪치려고 글을 쓰고 있다.그의 정신의 질서는 혼란된 세계를 조리있게 파악하려는 의지이며 논리에 따라 부당하게 기울어지지 않는 천칭,그는 바로 지적 성직자」라고. 그리고 평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임무가 무엇이든 성직자에겐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라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연보 ▲1936년4월 함북 회령서 목재상인 부친 최국성씨와 김경숙여사의 4남2녀중 장남 ▲47년 함남 원산으로 이사,회령국민교에 이어 원산중­원산고2까지 ▲50년 6·25로 가족 전원 월남,부산 정착 ▲57년 서울대 법대 4년때 출석미달로 중퇴 ▲58년 군입대,통역장교로 근무 ▲59년 「GREY 구락부 전말기」「라울전」이 안수길씨 추천으로 「자유문학」지 통해 문단 데뷔 ▲60년 문제의 작품 「광장」을 「새벽」(10월호)에 발표 ▲61년 단행본 「광장」(정향사)출간 ▲67년 「총독의 소리 1·2」연작 발표에 이어 단편집 「총독의 소리」(홍익출판사)출간 ▲70년 평론집 「문학을 찾아서」(현암사)출간,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극단 자유극장공연),11월17일 신문회관에서 이헌구씨 주례로 원영희씨와 결혼 ▲71년 창작집 「서유기」(을유문화사)출간 ▲72년 창작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삼성출판사)출간 ▲73년 장편 「태풍」(중앙일보)연재 ▲73년8월∼76년5월 미국체류,미아이오와대 세계작가 프로그램(IWP)초청,「광장」(일어판),수필가 김소운씨 역으로 일본 동수사출간 ▲76년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극단 산하 초연) ▲77년 「봄이오면 산에들에」(극단 동랑레파토리 공연) ▲78년 「둥둥 낙랑둥」(국립극단 97회 정기공연) ▲79년 미뉴욕주 브록포드대 초청,「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공연참가,「최인훈전집」(문학과 지성사)완간(전 12권) ▲80년 소설집 「왕자와 탈」(문장사),「하늘의 다리」(고려원)출간 ▲81년 소설집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민음사)출간 ▲82년 희곡집 「한스와 그레텔」(문학예술사)출간 ▲87년 미 뉴욕 「범아시아 레파토리」극단 10주년기념공연,「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공연 참관 ▲89년 창작선집 「달과 소년병」(세계사),산문집 「길에 관한명상」(청하),창작선집 「웃음소리」(책세상)출간 ▲9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가 소설 「광장」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 ▲77∼현재 서울예전 교수 그외 대표작 「구운몽」「회색인」「가면고」「크리스마스캐럴」「두만강」「우상의 집」과 수필집 「유토피아의 꿈」외 동인 문학상,한국연극영화예술상(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 장려상,서울극평가 그룹상(달아 달아 밝은 달아)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

    ◎여명기의 민족지/“항일구국” 염원안고 대한매일신보 탄생/국운 기울어 암울했던 1904년 창간/주권수호 앞장서며 숱한 고난/해방직후 서울신문으로 속간/초대사장에 오세창 취임… 권동진·홍명희 고문에 영입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그 시대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1904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암담한 나라 운명속에서 한가닥 빛으로 창강된 대한매일신보.그 항일구국지가 1945년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살았다.당시 민족의 생존이 그렇듯 일제의 모질고 간교한 탄압에 쓰러진 대한매일신보의 맥락은 서울신문이 잇고있다.일제 강점기 사이에 변화도 없지 않았으나 서울신문의 뿌리는 분명히 대한매일신보에 두었다.그 위대한 항일구국지 창간 1세기를 불과 1년 앞둔 오늘,그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신문의 연륜을 다시 헤아리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민족주권 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가히 전설적인 신문이었다.근대 언론사에서 「다시 없는민족의 대변기관」으로 평가 받는 이 신문은 나라 안팎이 매우 복잡한 시기에 발행됐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때이기도 했다.그리고 국내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불길처럼 치솟던 시기였다. 특히 나라안에서는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을 막으려는 민중운동과 함께 의병 무장투쟁,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창간되어 항일구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1702∼1909년)이다. 러·일전쟁때 취재차 한국에 왔던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인 그가 한글전용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짜는 89년전인 1904년7월18일로 돼있다.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동시에 창간했다. 창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모를 보아도 쟁쟁하다.당대의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이자 우국지사였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옥관빈등이 그 주역들. 나중에는 안창호·이갑등 구국운동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뛰어들었다. 창간호(타블로이드판)는 한호의 지면이 6면으로 4면은 영문,2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다.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분리,2종을 발행했다.1907년5월에는 한글전용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 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황실(고종)의 은밀한 재정적 뒷받침과 민족진영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처음부터 반일구국일수밖에 없었다.그 첫 지탄공격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이를 시발로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전재,샌프란시스코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보도,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밀서사진 전재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언론의 횃불을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신문의 강력한 반일논조야말로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경성일보」(일어)「Seoul Press」(영어)등 통감부의 기관지를 직접 발행하여 언론대응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또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인 탄압을 가했다.외교적 압력은 영국측에 대해 배설의 추방요구로,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압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언론 자세는 좀체 꺾이지 않아 국한문판 24차례,한글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지속됐다.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이처럼 항일언론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신문에 몸담고 있던 항일언론투사들의 민족사상과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족적중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신문이 주동이 되어 벌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이는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으로부터 얻은 나라의 빚 1천3백만원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아 일본의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일대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우국지사 대거 참여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던 시기에 사세를 크게 신장,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1907년 9월3일 기준 국한문 8천,한글3천부).이같은 발행부수는 그때까지 한국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조를 터뜨리던 이 신문은 일본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물이 꺾이기 시작했다.그후 배설이 숨지면서 이 신문은 더욱 기울어졌으며 영국인 만성(Alfred Marnham)이 사장직을 인수받았다.그러나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 영국총영사 보나르(Bonar)와 통감부의 회유및 압력을 받아 1910년 5월21일 결국 통감부에 팔리고 만다.국권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것이다.그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두글자 「대한」을 빼앗겨 버린다.「대한」이 없어진 「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한글판은 제939호부터) 이 날짜의 사설제목은 「동화의 주의」로 나온다.제국주의 36년간의 일본 전위역할을 이렇게 상징하고 일제 선전기관으로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는 이틀만인 9월1일 대한제국의 기관지 성격이던 한양신문(전대한신문)까지 합병한다.국한문판과 한글판의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한국인이 만드는 한국의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이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내건 일제의 어용언론활동의 전주곡이었다. 경영의 측면에서 경성일보사에 흡수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철저하게 총독부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매신은 그후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표면상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1920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 승격됐다.그리고 1929년에는 한국인 편집국장이 임명된데 이어 1930년 한국인 부사장이 처음 기용되어 다소 편집제작의 재량권이 이루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매신은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위주로 했으나 민족민간지들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민족진영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비호속에 이같은 논조로 일관하던 매신은 기구를 확대,경성일보사에서 분리하게 됐다.1938년 4월16일 독립된 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고쳐 새로 출발한 것이다. 매신이 경일과 맞붙은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4층 콘크리트 사옥을 짓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하지만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았고 여기에 총독부 소유의 주를 포함한다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셈이었다.매신의 일제옹호논조 또한 해방직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매신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됐다.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청이 그해 10월2일 매신을 접수,매신 한인주주총회를 열어 새중역진을 구성토록 종용했다.이에따라 10월25일 주총이 열려 「서울신문」이라는 새로운 제호와 오세창을 사장으로하는 간부진용이 결정됐다.이 무렵은 사장 이성근이 지난날의 과오를 전사원에게 사과하고 자퇴한뒤 사원자치위원회에 의해 신문이 발행되던 때였다.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을 만들어오던 6백명의 자치위는 그러나 주총의 간부진용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주총결정은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게 그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가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당국은 11월10일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렸다.매신이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 한뒤 일단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개편실무진과 자취위 사이에 얽혔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총독부 기관지로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매신개편의 대업을 새로 위임받은 이관구와 하경덕은 재원확보문제와 함께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는 인사들로 경영·편집진을 구성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초대사장에 위창 오세창이 추대됐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지조높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사회적·정치적 덕망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울신문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었다.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격인 홍명희가 고문에 영입됐다. 서울신문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저명교육자 하경덕이 부사장에,그리고 사려 깊은 논조를 감당할 주필에는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이관구가 선임됐다. 이러한 일사천리의 준비작업은 21일 5층 옥상에서 가진 오세창사장의 취임식으로 그 결실을 보게됐다.해방의 감격과 함께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 지면을 이 땅에 선보인 것이다. 이날이 1945년11월22일이었는데 신문은 11월23일자로 발행됐다. 이때의 서울신문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를 그대로 계승,제13738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 고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련의 역사를 향해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연보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 ▲1904년 7월18일 창간 ▲편집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취임 ▲1910년 5월21일 통감부가 매수 ▲1910년 8월28일 국한문판 1461호,한글판 938호로 종간 ◇매일신보(1910·8·30∼1938·4·28)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대한매신을 계승) ▲경성일보사장 길야태좌위문 취임(매일신보사장 겸임) ▲1912년 3월1일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한글전용으로 합간 ▲1938년 4월28일 매신의 제호로 최종발행(지령11 012호) ◇매일신보(1938·4·29∼1945·11·10) ▲경일에서 분리독립,제호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취임 ▲1945년 11월10일미군정에 의해 정간 ◇서울신문(1945·11·23∼현재) ▲1945년 11월23일 매신을 서울신문으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초대사장 오세창,고문 권동진 홍명희,부사장 하경덕,전무 김동준,주필 이관구취임
  • 일제식민통치문서 요약 발간/항일탄압­경제수탈 등 내용

    ◎정부 기록보존소/기독교 동향보고서도 담아 한·일합방직전 국내기독교계의 국권회복운동을 비롯,일제의 항일운동탄압·경제수탈·식민지이데올로기조장등 일본총독부가 작성한 주요문서를 풀이한 「일제문서해제선집」이 31일 발간됐다.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가 펴낸 이 선집은 지난1906년 통감부설치부터 45년 일제패망까지 총독부가 작성한 문서 2만4천여권중 총독관방·경무국·식산국·학무국 등에서 작성된 주요문서 60권을 선별풀이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추진해 완성된 이 선집은 크게 ▲식민통치 ▲경제수탈 ▲식민문화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선집은 특히 첨부자료로 한·일합방직전 국내기독교계의 국권회복운동등에 관한 각종 정보를 담은 문서인 「야소교에 관한 보고서」를 싣고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상재선생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황성기독청년회(YMCA전신)를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1932년 총독부 재무국이 작성한 「이왕가예산관계서류」는 국권상실후 이왕직으로 격하된조선왕실의 재정운영실태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1993년의 지구촌 정세 본사 특파원들의 분석

    ◎미서 불어오는 신상업주의 바람/연해주 등 한­러합작개발 본격화/북경/시장경제 본격 적용,경쟁체제로/최두삼특파원 중국에서는 올해 국가경영의 대권이 혁명원로들의 손에서 혁명이후 세대로 넘어가게 된다.오는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구성된뒤 출범할 새 행정부에는 혁명원로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정치일선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온 양상곤·진운·만리·송평·부일파·요의림·진기위등 혁명원로들이 지난해 10월의 제14차 당대회에서 당직을 그만둔데 이어 올봄의 전인대에서는 국가기관에서 맡아온 직책마저 벗어던지고 은퇴생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이를 계기로 강택민 당총서기와 이붕총리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강·이체제는 원로들의 간섭없는 살림을 꾸려갈수 있게 된다.일부에서는 보수파로 분류되어온 이붕총리가 수족들이 모두 잘려나간 현 상황에서 총리직의 재신임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하고 있다.그러나 당내 제2인자인 그가 총리직을 계속 맡는게 당연하다는의견도 강력하다. 어쨌든 오는 봄철 새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중국 사회에는 새로운 활력이 일어날 것 같다.지난번 당대회때 채택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면서 경쟁체제에 불이 붙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자유경쟁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이와함께 그동안 잠자고 있던 중화인의 상혼도 다시 깨어날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의 압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고되고 있어 외교적으로는 새로운 시련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물론 인권문제를 트집잡고 있는 미국의 새대통령 빌 클린턴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영국의 젊은 정치가로 얼마전 홍콩 총독이 된 크리스 패튼이 홍콩의 민주화를 내세우며 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중국의 새 지도층은 이같은 서방측의 움직임들이 대중국봉쇄정책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되도록 정면대결을 회피하면서 주변국가들과의 유대강화에 주력해 나갈것에 틀림없다. ◎파리/사회당 총선거 패색,「동거」 불가피/박강문특파원 프랑스는 새해 정치분야에서 큰 변동을 맞게될 것이다.3월의 총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리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정치자금 불법조달,국립혈액원 오염혈액 공급사건등 스캔들과 인기 하락으로 고전해온 사회당과 미테랑 대통령에게는 시련의 한해가 될 수밖에 없다. 사회당은 총선에서 과반수 획득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92년 지방선거에서 급부상한 환경주의자 정당과의 연대를 꾀하고 있다. 그렇게 해도 과반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파인 사회당의 대통령이 우파 야당에서 총리를 맞는 「동거」가 불가피하다.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전총리)이 이끄는 공화국연합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대통령의 프랑스민주연합등 우파 두 야당은 총선에서 연합전선을 펼 것이며 사회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두 우파 야당의 당수는 19 95년으로 연임 14년의 임기가 끝나는 미테랑대통령의 조기퇴진을 요구하면서 다음 대통령자리를 노리고 있다.따라서 미테랑대통령이 조기퇴진하든 어떻든 총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우파 단일후보 통합작업이 활발히 전개될 것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공동체 사이에 맺어진 농산물 협상안에 대해서는 총선때까지 미뤄보다가 결국 양보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그렇게되면 프랑스농민들의 격심한 반발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또한 예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프랑스는 유럽 통합 노력의 중심적 역할을 계속 수행하게될 것이다.그밖의 대외정책에도 별로 수정이 없을 것이며 한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고속전철 건설에 프랑스의 테제베(고속전철)가 채택된다면 두 나라 관계는 기술교류와 통상 부문에서 매우 긴밀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모스크바/보혁대결속 아태국과 협력 강화/이기동특파원 러시아국민들도 우리같이 섣달 그믐날 밤은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다.자정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안팎의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덮인 아파트단지 빈터나 시내공원등지로 몰려나가 새해소망을 이야기하며 서로 덕담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러시아국민들에게 있어 93년 새해는 그렇게 희망찬 설계나 설레임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모든 게 너무 급변하고 불안정해 자기들이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또 한해를 맞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런 일반의 분위기와 관계없이 정부차원에서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굵직한 개혁작업들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옐친정부로서는 보수파와의 일대 격전을 치르는 어려움 속에서도 가격자유화,토지 및 국유기업사유화,군수공장의 민수전환을 위한 중장기 계획들을 보다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에 틀림없다.이와함께 92년 그 절정을 이루었던 인플레·생산하락·분배구조의 혼란등도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보혁대결의 어려움과 함께 남부 코카서스 지방을 비롯,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계속되고 있는 공화국간·민족간의 분쟁들도 평화의 전기를 쉽게 찾기 힘들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다. 대외적으로는 당장 경제원조가 걸려있는 미국·유럽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증진과 함께 한국·중국·일본등 아태지역국들과의 보다 실질적인 협조관계 강화도 적극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극동지역의 개발계획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한국·일본등의 이 지역진출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논의될 전망이다. 이런 여러 계획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의 안정이 필수적이다.그러나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정치불신및 무관심과 이에 따른 사회전반의 무기력 증세를 치유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새해의 과제라는 것이 일반론이다. ◎베를린/유럽통합 부진·경제침체로 고민/유세진특파원 유럽인들에게 있어 93년은 희망의 해여야 했다.그러나 새해를 여는 콜 독일총리의 가슴속은 그리 밝지 못하다.기대했던 유럽통합은 부진하고 독일경제가 침체의 늪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통일의 부담은 예상보다 훨씬커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독일경제로서도 93년까지 그 부담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이 때문에 새해를 맞는 독일전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세계가 새로운 경제전쟁 시기에 돌입했음을 증명하듯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미국간에 무역마찰의 파고가 높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뚜렷한 블록화추세를 보이는 세계경제동향에 비춰볼때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유럽통합을 빨리 제 궤도에 올려놓는게 유럽으로선 시급한 과제다. 독일은 빠른 유럽통합의 실현을 위해 2단계 유럽통합을 보다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이를 위해선 프랑스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독일과 프랑스가 손을 잡아 클린턴의 새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주도세력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오는 3월 프랑스총선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를 지켜봐야 분명한 것을 알수 있다. 동구난민들에 대한 반발로 유럽각국이 극우주의 확산등 여러 사회문제에 직면한데서 알수 있듯이 유럽의 안정을 위해선 먼저 동구가 안정돼야 한다.그러나 동구의 어려움역시 93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경제부진이 가져온 자국이익우선주의로 서구로부터의 지원이 기대에 못미칠게 확실시되기 때문이다.시장주의경제를 자력으로 얼마나 접착시키느냐가 동구각국이 서구진영에 접근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각국간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유럽통합 또한 목표보다 상당히 지연될 전망이다.몇몇나라들이 배제된 소규모 통합이 먼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93년은 유럽에 있어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힘든 협상의 한해가 될 전망이다.
  • 일제 총독부 무속타파정책 실패/일 쓰꾸바대 마사아끼연구원 주장

    ◎포교규칙 제정,고유문화 말살시도/무속인·민중연합·조직적으로 저항 일본은 조선식민통치에 있어 고유문화 말살정책의 하나로 한반도의 민중신앙현상을 「비문명」으로 규정,각종 전통 무속행위를 법적 제도적인 제재를 통해 박멸하려 든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그러나 무속인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민중들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무속신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일본 쓰쿠바대학 역사·인류연구소 아오노 마사아키(청야정명)연구원의 논문 「무속의 수난과 저항­조선총독부의 미신타파에 관한 연구」에서 나타났다.이 논문에서 그는 조선총독부의 각종 미신타파정책을 분석하고 이에 맞선 조선 무격(무격:무당과 박수)들의 조직화를 통한 저항및 무격의 신도조직인 당골제도를 통한 저항에 대해 연구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반종교에 대한 최초의 법령은 한일합방 5년후인 19 15년에 제정한 「포교규칙」(총독부령 제83호).이 규칙에는 신도·불교·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학무국 종교과가 관할케하고 그밖의 종교들은 「종교유사단체」로 규정해 경찰국 관할하에 「경찰범처리규칙」에 의해 단속받도록 돼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민속신앙에 대한 단속이 심했던 증거로 한일합방당시 30만명에 달했던 무격의 수가 불과 20년후인 19 30년 조사에서 1만2천3백명으로 나타나있음을 지적했다.특히 19 32년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생활개선이라는 슬로건 아래서는 미신에서 오는 운명관념이 촌락재건의 최대장애물로 제시돼 무속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화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탄압이 심해지자 자구책의 일환으로 무격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고 주장했다.그 대표적인 것으로 경찰이 무격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인가해준 경신교풍회와 숭신인조합을 들었다. 또 하나의 저항세력은 당골조직으로 이는 촌락자치를 배경으로한 무격과 신도사이에 맺어진 뿌리깊은 신앙조직이었다. 아오노연구원은 또 당시 총독부의 무속탄압은 일본인 무속학자들로부터 비난과 항의를 받았음을 지적했다.19 38년 「조선 무속의 연구」상·하를 발간한 경성제국대학의 적송지성·추엽륭 두교수는 저서에서 총독부에 의한 무속탄압을 『가장 경계해야할 인식부족』으로 또 무속박멸론을 『심히 잘못된 편견』이라고 비난하면서 무속보호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아오노연구원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총독부가 미신타파 최후의 방법으로 구상한 법적인 무속박멸 방안인 「무자취체법규」가 신중론에 밀려 채택되지 못한것은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미신타파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홍콩서 맺은 계약 반환후도 존중을”/미 상무장관

    【홍콩 AFP 로이터 연합】 바바라 프랭클린 미 상무장관은 21일 오는 97년 홍콩반환 이후에도 홍콩이 맺은 모든 계약은 존중돼야 한다고 중국측에 촉구했다. 프랭클린장관의 이날 발언은 크리스 패튼 홍콩총독의 민주주의 확대개혁안을 둘러싸고 중국과 영국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이후 미 행정부가 처음으로 공식입장을 밝힌 것이다.
  • 미군포로 문제로 9개월 지체/수교성사 뒷이야기

    ◎워싱턴,해결때까지 유보 요청 한·베트남간의 수교교섭은 베트남측의 제의로 시작됐다. 베트남은 한국의 사이공(현 호치민)주재 대사관 철수 만 15년이 되는 90년4월 태국주재 대사를 통해 대규모 건설및 투자 진출을 포함한 양국 관계 발전방안을 제의해왔다. 89년 이미 무역을 개시했고 그해 2월 투안 경공업장관,지앙 투자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한국을 다녀간 뒤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한국은 79년 1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촉발된 인도차이나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대베트남 관계개선을 보류한다는 입장을 견지,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90년 10월 다시 태국주재 베트남대사를 통해 우리측에 수교를 정식 제의해왔다. 이어 91년 4월 제46차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총회참석차 방한한 부 코안 외무차관편에 수교에 앞서 우선 무역대표부를 교환·설치하자고 요청했다. 한국은 베트남측의 거듭된 제의와 함께 인도차이나사태가 해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감안,91년 9월 외무부 아주국장을 단장으로 한 베트남 정세조사단을 베트남에 보냈다. 조사단은 베트남과의 수교교섭을 본격 추진할 것을 정부 고위층에 건의했고 이에따라 한국은 91년 12월 정주년 당시 태국대사를 단장으로 한 제1차 수교교섭단을 하노이에 파견,양국간 연락대표부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의 문안을 확정했다. 이어 92년 4월2일 제2차 수교교섭단이 하노이에서 양해각서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한·베트남 수교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양국 수교는 월남전 실종미군(MIA)및 생존포로(POW)문제의 해결때까지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유보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때문에 이날까지 9개월여동안 지체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양국은 8월 하노이,11월 서울에 각각 설치된 연락대표부를 통해 비자발급등 영사업무를 취급해 왔다. 한편 50년초 수립된 북한·베트남 외교관계는 북한이 베트남 주재 대사를 소환할 만큼 유대를 상실해가고 있다. 베트남이 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식 페레스트로이카인 「도이모이」(쇄신)정책을 채택한 이래 실질협력이 축소돼 왔다. 북한과 베트남이 3백만달러씩 투자해 만든 새우양식장업이 실패로 돌아갔고 양잠합영회사인 동흥무역과 대성상사등 베트남내 북한기업들의 활동도 뜸한 편이다. 주요인사 교류 역시 2년전인 90년 10월 베트남 공산당대표단의 북한건국기념일 참석이후 끊어졌다. 이날 공동성명 서명식이 거행된 하노이 영빈관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독립전쟁후 첫 전과를 올린 곳이다. 45년 9월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군은 46년 12월 항불전쟁을 시작한 뒤 당시 프랑스총독부로 쓰이던 이 건물을 공격,점령한 바 있다고.
  • 화가 장우성씨(이세기의 인물탐구:8)

    ◎시·서·화 도양화삼절의 노인가/인위·조작없는 「무위사상」바탕,독창적 화풍/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 은은하게 표출/정많은 성품.부정엔 단호… 「친일논란」때 미술계풍토 비판도 대나무처럼 곧고 차가운 죽색청한과 물빛처럼 영롱하고 푸르른 수광징벽의 한벽원.이는 월전 장우성화백의 개인미술관 이름이다. 경복궁뒤 사간동 화랑가에서 삼청공원으로 이르는 초입에 위치한 한벽원은 서울 한복판(종로구 팔판동 35)이건만 인적없는 산간에 묻힌 선비의 서숙인양 적요속에 묵향이 감도는 분위기다. 눈부시게 흰 화강암건물과 「한벽원」이란 이름만으로도 주인의 기상과 풍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대나무·백매와 계수나무 사이사이로 진귀한 옛 석물·석등이 배치되고 뜰한가운데는 일중 김충현의 「한벽원용」,내부벽면은 12지신·광개토대왕 비문·석굴암 관음상에서 탁본해온 석고부조로 장식되어 미술관다운 품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바로 이곳이 월전의 모든 예술생애가 집약되고 또 앞으로 우리 한국전통미술의 올바른 맥을 보존·육성해나갈 본산이기도 하다. 아다시피 화단의 거봉인 월전은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의 삼절로 동양화 전영역에서 유창탁발의 화업을 이뤄낸 노대가다. 그의 작품은 공자가 그림을 두고 말한 「회사후소」,즉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는다는 후소정신과 인위와 조작이 없는 무위사싱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월전의 이런 선비기질은 그의 그림에서 보듯 한점의 허세나 과장이 없이 잔잔한 운율이 유운문처럼 번지고 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가 은은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가 즐겨 그리는 학과 백로,화훼와 산수는 모든 기교가 배제된 간결 산뜻한 선묘와 담백한 설채,특히 그만의 묵의 묘취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막힌 환희를 안겨준다. ○담백한 선조 일품 월광을 배경으로한 백매가지에는 방금 물오른 새싹을 틔울듯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고 흰 눈속을 헤쳐서 꺼낸듯한 꽃의 화관은 보석처럼 눈부신 진주빛을 발한다. 마치 신운이 움직이는듯한 절제의 필치로써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장인기질보다는 원로의 정신미를 정밀하게 누리고 펼치는 시기라 할수있다. 1912년 임자생.80의 나이에도 그에게는 「노인」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바르고 건강한 모습에 단정하고 깎듯한 움직임,사물을 꿰뚫는듯한 예지의 눈길은 『글씨나 그림등 예술은 가장 천진한것이 극치』라는 완당의 말대로 그 청정의 눈빛을 지니고 있다.그에게선 어떤 흐트러짐이나 허술한 곳도,만모의 기색도 찾아볼수 없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선 다감하고 정이 깊고 상대방을 포용한다.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추호의 용서나 양해가 없다.늘 옳은자의 편을 들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한다. 주말에는 골프,커피와 담배,두주불사의 애주가로 몇년전까지만해도 양주 한병을 비운 술실력이나 요즘은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순한 청주나 곡주를 즐긴다. 집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그러나 작업실이 있는 한벽원까지 아침 9시반에 출근해서 하오2시부터 작업대 앞에 선채로 3시간에서 4시간씩 작업에 몰두한다. 내년 가을 호암아트홀이 기획한 그의 화력 60년을 총정리하는 신작준비 때문이다.이는88년 일본 세이브미술관 초대 「한국·국화의 거장 장우성전」이후 5년만의 대작전시회여서 그는 모든 정열을 이곳에 쏟고있다. 그의 화적을 새삼 더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월전은 18세되던 해인 30년 스승인 이당의 낙청헌에 입문,초기에서 10여년은 사실적 시각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형태의 극세극채색의 치밀한 묘사에 밀착해왔다.그러다가 해방후 서울대미대에 재직하면서 스승의 회화권에서 벗어나 전통동양화인 수묵화에 정진하여 추상이 곁들여진 힘차고 분방한 용필로 활달한 화면을 추구해나갔다. ○18세때 이당에 사사 그는 경기도 여주의 전통적 유교가문에서 2남5녀중 다섯째,부친(장수영씨)의 나이 30세에 얻은 만득자여서 부모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월전」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한 아들을 위해 부친이 손수 지어내린 아호다. 할아버지에게 「동몽선습」「소학」「명심보감」과 「사서삼경」을 배우고 붓글씨를 공부하면서 그림을 시작,그림공부를 위해 상경할 무렵에는 평소 위당 정인보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부친의 배려로 위당댁에 드나들면서 조선역사를 익혔다. 이당문하에서 운보 김기창,현초 이유태와 나란히 수학한지 2년만인 32년 제11회 선전에서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를 그린 「해병소견」으로 화단에 등단,41년에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그리고 연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두차례 수상하고 44년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그린 「푸른 전복」은 열정적으로 부채춤을 추고난후 호흡을 가다듬는 무녀의 휴식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우리미술사를 말할때마다 거론되어지는 대표작중의 하나다. 범접하기 힘든 깨끗한 눈매며 전립의 영모,패영의 구슬은 이슬이 방울진듯,푸르른 구군복과 치마단까지 흘러내린 붉은 끈의 선과 색의 대비,공간을 여백으로 설정한 것등은 훗날 월전 문인화와도 일맥 상통한다. 싸늘한 겨울 날씨와 화면을 가득 채운 만월,한천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떼를 문인화의 무기교와 자연스럽게 절제된 묵선으로 관조한 조형어법은 「종교와도 같은 높은 이념이 함축」되어있다는 평이 뒤따르고 있다. 한치의 흔들림없이 지금도 여전히 화단의 정상을 지키는 월전으로서도 80성상을 돌아보면 흑색반점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44년 최고상을 받았을때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하여 「답사」한것을 스승과 의논없이 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이당의 미움을 받아 소원했던 일,서울대 미대교수시절 「교수자리」를 탐내는 후배의 이간으로 미대 창설동지이며 당시 학장이던 장발씨와의 긴 오해등,어지러운 세속에 휘말려야했던 곤혹과 환멸이 잊을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있다.물론 시간이 흘러 밝은 대낮처럼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곤 하지만 꼿꼿하게 앞만보고 살아온 그에겐 자존심에 먹칠당한 슬픈 추억의 장면장면들이다. 문인사대부의 학문과 역량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그의 그림속에 실린 아름다운 시구외에도 그는 「화맥인맥」등 신문에 자주 글을 발표한 미문으로도 유명하다. ○문장력도 뛰어나 그 한예로 83년봄 한 미술계간지가 다룬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란 특집기사로 인한 「친일 화가파동」때 그는 대단한 문장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해 4월21일자 모 두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발표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이 성명서는 잡지에 게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일제36년과 해방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며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의 식민지 잔재인양 매도하고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기사내용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설」임을 전제,「작고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과거 민족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채 「민족예술창조라는 허구에찬 궤변」으로 사회여론을 오도,「이 방약무인한 오만을 나무라기전에 그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으며 소위미술평론가의 자격은 어디에서 취득했고 누가 인정했던가 묻고싶다」는 실랄한 항변과 규탄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글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월전으로 이 사건은 화단의 경종이 되어 서로 자숙하고 침착하게 자기 성찰하는 기회로 마무리 되었다. 월전은 이처럼 깐깐하다.굳이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화단의 누」라는 차원에서 가차없이 솔선하고 나섰다.그의 작업실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하고 청결하여 난초의 홍자색은 싱그럽고 고고하기만 하다.호불호를 선명하게 가려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사불란하게 실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번 미술관도 88년 구상·계획하여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미대와 홍대미대의 제자·화우들을 주축으로 즉시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89년 미술관 착공,91년 3월개관 2주일전 부설 동양미술연구소 제1회 수강생 20명을 배출했다. 까다로운 성품과는 달리 각계각층과의 다양한 교분은 수화 김환기,영운 김용진,의재 허백련,소전 손재형과 친형제같은 우의를 다졌고 대한교육보험의 신용호회장과 황수영 유경채 이대원 김원용 특히 일중과의 우정은 난향과도 같다. 가족은 부인 유리정여사(73)와 1남3녀.장녀인 정란씨가 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그의 만년의 예술은 「붓가는대로 그린다」는 명경지수의 염과 자연에 돌아가 자유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구사하고 있다. 이제 월전화는 그의 생을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한 무르익은 화경에 접어들어 그 마지막 붓끝까지도 불후의 명작을 그리게 될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아산 현충사·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 영정,세종대왕 기념관 벽화 「집현전학사도」 낙성대봉안 강한찬장군·김경신장군·윤봉길의사·정포은선생·문익참선생·김종직선생·조식선생·정기용박사·유관순열사등 영정 제작.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1천호)」,고려대벽화 「군려도」크리스트상화(63빌딩)제작. □연보 ▲1912년6월 경기도 이주출생 ▲30년 이당 김은호 「낙청헌」입문 ▲32’ 제11회 선전 「해병소견」입선이후 계속 출품 ▲33’ 육교 한어학원 졸업 ▲41∼44’ 「푸른 전복」등 연4회 특선·추천작가 ▲46∼61’ 서울대 미대 교수 ▲49’ 로마 국제미전 「성모와 순교복자」3부작 출품(바티칸시 수장) ▲50’ 제1회 개인전(동화백화점 미술관) ▲63’ 도미,미국무성 화랑 개인전 ▲64’ 워싱턴 스퀘어 화랑주최 국제미술제 한국대표초대출품 ▲65’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 설립 ▲71’ 홍대 미대 교수 ▲75’ 유럽7개국 미술계시찰 ▲80’ 현대화랑서 도불 기념전 ▲〃 프랑스 정부초대 파리세루뉘시 미술관 개인전 「홍매」「석」등 프랑스문화성소장 ▲81’ 월전화집(지식산업사간) ▲82’ 독일 쾰른 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85’ 국립 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88’ 도쿄 아트포럼에서 「한국 국화의 거장 장우성전」개최 ▲〃 동산방화랑서 개인전 ▲92’ 오늘의 작가 11인전(진화랑)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역임 현 예술원회원 서울특별시 문화상·예술원상·5·16민주상 수상.
  • 백제/일 지배위해 왕자 파견/최재석교수,한일문화학술대회서 주장

    ◎고위관리 장군 승려 화공까지 보내/461년부터 2백년간 대화위 통치 백제는 일본점령지인 대화위(오늘날 일본중부 나라지역) 경영을 위해 AD 461년(개로왕7년)부터 멸망할때까지 2백여년동안 총독으로 왕자를 파견했으며 동시에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했다는 새학설이 나왔다.이는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가 최근 「고대한국문화의 일본전파」를 주제로 연 한일문화국제학술대회 발제를 통해 제기됐다.백제의 일본지배설을 처음으로 다룬 발제는 최재석교수(고려대 명예)의 「대화위 파견 백제왕자의 거처와 대화위왕의 거처」.최교수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대화왜왕과 백제총독의 거처비교를 통해 양자의 종속 지배관계가 확고했음을 밝혔다.이와 더불어 파견된 관리들의 기록을 검토,구체적 경영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최교수는 대화왜왕의 궁전은 5세기까지는 띠(아)로 지붕을 엮다가 7세기중엽에 이르러 전나무껍질(회피)로 이은 보잘것 없는 것이어서 왕궁이라기 보다는 왕의 거처라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지적했다.당시 왕궁이 불과 20∼30년만에 잦은 이동을 할만큼 나무기둥을 땅에 박아 지은 허술한 건축양식을 보인데 반해 백제총독이 묵었던 난파관은 2백년이상 한곳에 위치하고 있을 만큼 견고했다는 것이다.따라서 난파관은 돌기초 위에 기둥을 세워 지은 기와집이었다는 점에서 백제와 대화왜와의 힘의 관계를 알수 있다고 주장했다. 백제가 대화왜 경영을 위해 파견한 총독은 왕자였으며 그밖에 일정기간 파견되는 관리와 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관리그룹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AD461년 개로왕의 동생이 최초의 총독으로 파견된 다음 505년(무령왕5년)에는 왕자가 파견되는등 모두 8명의 왕자가 대화왜경영을 위해 일본에 간 기록이 있음을 들추어냈다. 한편 대화왜에 본격적으로 경영팀이 파견된것은 무령왕때.513년(무령왕13년)에 행정을 맡은 오경박사와 군사를 맡은 백제장군이 파견됐다는 최교수는 오경박사의 일본행을 정기파견으로 해석했다.그래서 3년후인 516년 새로운 오경박사로 교체됐으며 백제장군은 부정기파견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1년8개월만에 귀환했다는 것이다. 이들 파견 관리들중 우두머리는 백제의 16계급관등중 3·4위 관등의 높은 관리였던 것으로 미루어 백제가 당시 대화왜 경영을 중시했음을 알수 있다는 것이 최교수의 주장이다.또 이들의 파견때는 승려·사공·와박사·화공등도 파견하여 불사를 건립케 했는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588년(위덕왕35년)에 창건한 법흥사를 꼽았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이밖에도 「일본구주의 환웅상과 일본속의 단군문화」(박성수),「단군신화의 뿌리와 계통」(황목박지),「팔번신앙과 한국과의 관계」(중야번능),「한국고대문화의 일본 전파」(최인학),「향춘신사와 신라신」(오야정남),「고조선 문화권과 문화전파」(권태원),「한국과 맺어져 있는 일본 영언산의 산의 문화」(장야각)등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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