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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잔영은 여전히 잔인하다/몽상적 독재자 김일성의 저승길을 보며

    ◎광신적 오열행렬에 피란짐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미망이 저런건가”… 통일로 가는길 먹구름 보는듯 불과 열흘전 한반도에서는 82세로 그 인생을 마감한 헛된 몽상가의 죽음이 있었다.필자는 그 죽음의 소식을 남쪽으로가는 여행길의 휴게소에서 들었다.그리고 두가지의 충격을 받았다.그 첫째는 물론 김일성의 물리적인 죽음이었고,다른 한가지는 백여명을 헤아리는 그 휴게소 여행객들이 보여준 의연한 침묵이었다.그러나 그 무표정에 묻어 흐르고 있는 일말의 아쉬움 또한 필자는 읽을 수 있었다.죽기 전에 남북정상이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회담을 갖자 하던 그의 결심이 진정한 조국애에서 비롯되었기를 바란 것이었기에 그 죽음의 아쉬움은 우리 가슴에 진한 구두점을 찍어준다.분단 50년의 포한을 풀려 한 것이 진정이었다면,하필이면 이 찰나에 불귀의 객이 되었는가에 대한 아쉬움이고 미련이다. 그러나 그 몽상가는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문맹이었다.그는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스탈린의 추종자였다.스탈린이 그러했듯인민을 그의 수하에 두었고 인민을 그의 이념구현의 도구로 삼았다.그는 2천5백만 인민을 울타리속에 가둬두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고 배급으로 울게 만들었다.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좁은 땅위에 살던 군인과 민간인 2백58만명이 초개와 같이 죽거나 실종되었고,무려 5백50만여명이 미망인·불구자·고아등으로 비참한 전쟁후유증을 겪었다.그 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 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전쟁의 깊고 깊은 상흔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끝마다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 미군은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고,소련군대와 중공군까지 불러들여 동족을 살상하고 국토를 초토화시키는 일에 이용했다.설혹 물리적인 피해는 당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의 가슴에는 피맺힌 슬픔이 자리잡고 말았다.그 폐단의 상흔 역시 우리의 진솔한 삶의 그롯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필자는 11살,산골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먼 산자락을 뒤흔들던 포성소리가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새우잠을 자고 있던 우리 어린 두 형제를 깨웠다.문 바깥은 한치 앞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은 어둠,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는 포성을 등뒤로 하고 허둥지둥 발걸음을 떼어놓았다.11살의 나이로는 엄두조차 못낼 무거운 피란봇짐을 등에 진 필자 역시 경황없이 어머니의 뒤를 무작정 따라야했다.동이 트기 시작하는 어느 산기슭에선가 우리는 벌써 쇠파리가 들믿는 국군의 시체를 보았고,그 곁에 인민군에 포위된 채 매복하고 있는 국군을 보았다.남하의 피란길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는 산협의 낯선 농가의 추녀 아래서,그리고 빗물이 새어드는 움집에서 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남아 그 모욕적인 전쟁이 먼발치로 떠나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작년 여름,필자는 중국의 집안에 있는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그 맞은편에 있는 만포의 강안을 스쳐간 적이 있었다.우리가 탄 배가 북한의 만포연안을 서행으로 거슬러 올라갈제 40여년전 필자 나이 또래였던 헐벗은 아이들이 몰려와서 담배를 달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필자 곁에 있던 일행중 한사람이 담뱃갑을 던질듯 포즈를 취하다가 그만두자 그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은 배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돌팔매질을 사양 않던 그 철부지들의 단도직입적인 호전성을 목격하면서 자리잡은 충격적인 슬픔은 11살의 나이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던 40여년전의 피란짐보다 훨씬 무거웠다.집권 49년을 그는 북한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였고,그 인민은 동원의 미망속에 살고 있다.그 인민은 미망속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수령의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려왔다.그들은 스스로 창조하려는 몸부림보다 식량배급표를 쥐고 있는 수령의 명령과 교시만을 따르려 하였다.그런 바탕위에서만 우리는 북한의 그 엄청난 오열의 행렬을 이해한다.울먹이는 목소리로 독재자의 죽음을 알리고 있는 북한 아나운서의 슬픈 가슴을 이해한다.냉정한 검증을 거쳐가는 역사에 참여되고 있는 민족이 아닌한 독재자의 신격화에 동원되었던 인민의 미망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면서,우리는 또 다른 무게로 등을 덮치는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과 마주서야 한다.우리는 통일의 열쇠가 이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한 독재자 김일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미망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우리가,그리고 우리겨레가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는 그 통일의 열쇠는 공교롭게도 바로 백성으로 이름되는 우리 모두의 이해와 용서와 화합에 달려 있다.그렇기에 그에 대한 냉정한 검증없이는 국민의 이해와 용서는 구걸조차 어려울 것이다. 고달픈 인생살이에는 필경 눈물이 많은 법이고 가슴을 에는 듯이 통렬한 예배의 대상을 둠으로써 심정적 위안을 획득한다.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고 있는 슬픔이 바로 그런 모습들에 있다면 그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궁핍에서 벗어나고 자기개발과 창조의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터득시켜 그들이 겪고 있는 미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주선하는 아량과 노력이 통일을 위한 정치적 담판과 병행되어야 할 줄 안다. 2년전 겨울 필자는 중국의변경에 있는 어느 해관(세관) 식당에서 중국의 친지방문을 위해 방금 북한땅에서 건너온 어떤 모녀의 점심식탁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그 두사람의 식탁은 너무나 빈약해서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애옥살이를 견디고 있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죽은 자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전쟁도 아니고 핵을 개발하는 데도 있지 않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일이다.그것은 바로 남북한간의 화합과 용서,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통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제 한시대는 물러났다.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한반도의 북쪽에서 가장 야만적인 모습으로 군림하던 독재자는 사라졌다.그러나 그 잔영은 너무나 진하게 우리앞에 남아 있음을 또다시 목격하게 된다.그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아닌 비방과 이간질의 현실이 북한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신문에서도 우리는 읽고 있다.아연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길위에 놓인 고통과 갈등을 예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 대화 이어갈 정치 꼭 마련토록/조순승(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다)

    우리는 역사의 전환기에 서있다.한 시대의 획을 긋는 분기점에 서있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창조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다행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잘못 판단하여 역사흐름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후세에 영원한 지탄을 면치못할 것이며 옳은 판단을 하여 민족통일의 길을 열어놓으면 민족사에 길이길이 잊지못할 지도자로 남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남북한의 실무자 회담에서 양정상이 수행원들의 배석없이 두차례이상의 단독 정상회담만 갖고 확대정상회담은 따로 갖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운명을 두정상의 판단력에 일단 맡기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제삼자의 개입없이 단 둘이서 허심탄회하게 민족의 장래를 논하고 상호간의 진의를 파악할 기회를 줌으로써 분단의 서러움을 한꺼번에 씻어보려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게도 생각되며 또 한편으로는 막다른 골목에서 활로를 찾아보려는 대담한 시도이기도 하다.따라서 이 회담이 성공한다면 두 정상은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는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민족사의 전진을 20∼30년이나 후퇴시켰다는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두 정상이 회담에 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처럼 중대한 회담은 우리 민족사에서도 그렇게 많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민족분단의 비운을 맛본지 49년만의 첫 정상회담이 아니던가? 그만큼 우리의 기대도 크고 회담에 임하는 두 정상의 책임도 무거울 것이다.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과거 10여년동안 꾸준히 통일의 길을 확대해 왔으며 1972년의 남북공동선언이후 구체적인 실현방법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즉 1992년2월17일에 발효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또한 동년 9월17일에 발효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1장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제2장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제3장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등이 있다. 또한 이 합의서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1992년5월7일 발효된 「남북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남북교류협력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남북 연락사무소의 설치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있다.그뿐만 아니라 한반도내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92년2월19일 발효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과 1992년3월19일 발효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있다. 이렇게 많은 남북합의서를 진작부터 실천에 옮겼다면 우리민족의 통일은 현재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불행히도 이 모든 합의서가 선언적 효과만 거두고 실천화되지 못했고 지난해 3월에 있었던 북한의 NPT탈퇴선언으로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어 올해에 들어서는 전쟁재발의 위험선까지 이르기도 했었다.남북간의 전쟁이 재발된다면 우리 강산은 일순간에 초토화될 것이고 선진국으로 향하는 길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민족재생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된것은 민족사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이번의 정상회담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며 온민족의 힘으로 성공시켜야 한다.이 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해 단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오히려 회담을 좌절시키는 위험이 있다.처음 회담에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양정상의 신뢰구축에 역점을 두고 회담이 계속 열릴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힘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동서독의 제1차 정상회담에서도 그러했다.제1차 회담에서 동서 양수뇌들이 합의한 것은 전쟁을 피한다는 것과 제2차,제3차 회담을 계속해 나가자는 약속을 하는데 그쳤다.우리는 그 많은 합의서에 의해서 어떻게 하면 남북이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이룩할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에는 이미 도달해있는 상태다.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하는 지도자들의 의지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두 지도자가 실천의지를 표현해주기만을 온 민족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핵개발의 과거사를 꼬치꼬치 따질 것이 아니라 민족간의 분쟁은 전쟁이 아니라 대화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천명하여야 한다.아울러 이미 합의된 합의서의 이행을 지켜보며 독려하기 위해서는 제2차회담은 남한에서 열릴 것을 합의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핵의 과거사는 북미회담에서 거론될수도 있고 다음 고위급회담에서도 다룰수 있을 것이다.두 정상이 민족분단의 문제를 기필코 해결해야 겠다는 결단을 민족앞에 내놓음으로써 민족을 안심시키고 민족의 앞날에 희망를 주기만 해도 그 의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회담은 정상간의 단독회담이기 때문에 사전준비를 충분히 하여야만 한다.의제가 없이 만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말을 꺼내고 어떤 문제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자체가 의제를 결정하게 된다.따라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예상되는 의제 선택에 만전의 준비를 기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도 사전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말려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결단력이라할수 있을 것이다.결단력없이 우유부단하면 아무런 성과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김대통령이 결단력이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민주화투쟁의 과정속에서 길러온 그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판단밑에 내리는 결단력이 이번 정상회담을 꼭 성공시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온 민족과 더불어 그가 우리민족사에서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 「6·25」 3년1개월간 인명·재산피해

    ◎군인·민간인 258명 사망·실종/장애자·미망인·고아 등 전재민 5백망/항만1백곳·교량 3백12㎞ 완전 파괴/주택·학교·병원·공장 등 63곳 초토화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1개월동안 계속돼 막대한 인명·재산피해를 냈다. 남북한군은 물론 연합군등 수백만명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한 부상을 입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산업·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돼 휴전뒤 남북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전쟁복구에 땀흘려야만 했다. 우선 군인의 피해를 보면 한국군은 전쟁중 14만9천5명이 전사하고 71만7천8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3만2천2백56명이 실종됐다. 또 포로로 붙잡힌 사람은 9천6백34명으로 한국군 전체의 인명피해는 1백만여명에 이른다. 또 한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은 5만7천6백15명이 전사하고 11만5천3백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과 포로는 8천8백97명으로 집계돼 유엔군의 피해는 18만여명에 달했다.이중 대부분은 미군으로 전사 5만4천2백46명을 비롯,부상 10만3천2백84명과 실종·포로 5천5백29명등 16만여명이다. 공산측의 피해는 더욱 커 북한군은 29만4천명이 전사하고 부상 22만6천명,포로 11만2천명등 모두 63만2천여명이나 되고 중공군은 전사 18만4천명,부상 71만6천명,포로 3만1천명등 93만1천여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산가족 1천만 이같은 군인피해에서 사상자수만 따로 떼어내 보면 유엔·한국·북한·중국군을 통틀어 사망 41만4천여명,부상 1백77만4천여명등 모두 2백18만8천여명이다. 6년동안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사상자가 일본 6백46만명,미국 1백7만명이었고 14년간 계속된 월남전에서 1백90만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과 비교했을 때 3년여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치러진 한국전쟁이 다른 전쟁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얼마나 치열했었나를 입증하고 있다.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는 더욱 엄청나다. 남한의 경우 민간인 사망 24만4천여명,학살 12만8천여명등 37만2천여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고 부상 22만9천명,납치 8만4천명,행방불명 30만명등 모두 99만1천여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전재민 3백62만명과 미망인 50만명,불구자 33만명,결핵환자 1백만명,전쟁고아 10만명등 무려 5백55만여명이 전쟁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2천50만명 정도였던 남한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직접적인 전쟁피해를 입은 것이다. 특히 6·25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도 전쟁의 깊은 상처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있다. 서울의 경우 49년 6월 1백43만명이던 인구가 52년 3월 67만명으로 추계돼 전쟁으로 76만명이 피란살이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거나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남한의 총인구는 55년 1천8백92만여명으로 전쟁전보다 1백만명 이상 감소됐다. ○재산피해 40조원 6·25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0년도 불변가격으로 약 4천억원이었으며 이를 9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4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계산됐다. 당시 재산피해 내용을보면 민간가옥 61만호,각급학교 4천23개교 15만4천여동,경찰관서 1천9백여곳,행정관서 2천7백여곳,의료기관 1천5백여곳,금융기관 1천1백여곳,종교단체 8백여곳,생산업체 1만3천여곳이 파괴됐다. 또 기간시설을 보면 항만은 1백개소가 파괴됐고 철도 3백29㎞,교량 3백12㎞,전선 61㎞등이 끊겨 전국토의 도로망과 통신이 완전 초토화 되었다. 이같은 사회간접시설등의 파괴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발발 당시 56달러에서 전쟁이 끝난 53년에는 67달러로 겨우 11달러가 증가하는데 세계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통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쳐 예를들면 전쟁직전 5백30원하던 어떤 물건의 경우 51년 그 값이 2천1백28원으로 4배나 껑충 뛰어올랐고 52년에는 다시 2.5배 오른 5천2백43원으로,53년에는 7천6백18원으로 급상승했다. 전쟁전과 종전직후를 비교하면 물가는 3년만에 무려 14배가 오른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물가상승은 휴전협정이 체결된뒤에도 계속돼 54년에는 73%,55년에는 57%등의 놀랄만한 인플레율을 보인 바람에 민생고가극에 달했다. 당시 주요 공업생산규모를 보면 면직물은 50년 1백34만필생산에서 전쟁이 끝난 53년 생산량이 27만필로 4.9배가 줄었고 시멘트는 1만t에서 2천여t으로 4.3배,전깃줄은 1백78t에서 50t으로 3.6배나 줄어들었다. ○담배소비만 급증 그러나 담배만은 유일하게 생산량이 늘어 연간 4백11만개비보다 무려 1백76배 급증한 7억9백53만개비를 생산,생활고와 전화에 시달린 나머지 국민들이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만일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신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미루어 인명과 재산피해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대명제이다.
  • 6·25 그때와 오늘의 남북한 경제·군사력 비교

    ◎남 GNP 북의 16배… 수출은 80배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44년.전차와 야포등 고성능 화력을 앞세우고 38선을 돌파,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앞에 우리국군은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었다.가까스로 낙동강교두보를 형성한뒤 유엔군과 함께 북진을 계속,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휴전을 맞았지만 44년이 흐른 지금도 통한의 6월25일을 잊을 수 없다.50년6월과 94년6월.44년 전후 남북한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국방부와 한국은행,민족통일연구원등의 자문을 중심으로 비교해본다. ◎군사력/현 한국군 독자 군사력 북의 71% 수준/해군함정수 남 251척·북 460척/1994년/군인수 남 65만·북 1백3만명/1950년/북한,병력 2배·장비 3배 앞서 6·25당시를 보면 북한이 남한에 비해 병력은 약 2배,장비는 약 3배가량 많아 전력이 훨씬 강했다. 개전초기 북한의 총병력수는 19만8천여명으로 이중 18만명이 육군 10개 사단으로 편성돼 있었다. 장비도 박격포 1천7백여문을 비롯,남한에는 없던 전차 54대,자주포 1백76문,고사포 36문을 갖고 있어 각종 화력이 모두 3천3백37대에 이르렀다. 북한 보유 포들은 대부분 1백20㎜이상의 대구경이었다. 반면 남한은 총병력 10만5천여명으로 육군이 8개 사단 9만4천여명이었으며 장비는 장갑차 27대를 비롯,박격포·곡사포·대전차포등 3종의 포 1천1백91문이 전부였다.이 포들은 그나마 최대구경이 1백5㎜로 북한의 화력에 비해 크게 뒤졌다. 당시 북한군은 양적 측면뿐아니라 군사훈련등 질에서도 남한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북한군은 3명중 1명꼴로 중국내전등에서 실전경험을 쌓았으며 육군은 8개 사단중 7개 사단이 사단급 연습을 끝마쳐 놓고 있어 전투력이 최고수준이었다. 장비와 보급품도 당시로서는 최신인 47∼50년식 소련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고급장교중 문관이 상당수를 차지하는등 대부분 장교들이 전투경험이 없었다. 육군의 경우 공비토벌작전을 펼치느라 소규모로 흩어져 있어 겨우 4개 사단만이 대대급 훈련을 끝냈으며 나머지 4개 사단은 중대훈련이 고작이었다. 장비등도 미군이 2차대전중 사용하던 중고품이나 일본제 소총등이 주종이었으며 보급품 비축량은2일분에 불과했다. 주한미군도 치안유지에 적절한 수준으로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남한과 미국측은 이처럼 현저하게 열세인 전력으로 전쟁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20여년쯤 70년대초반.남한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고속경제성장가도를 달리면서 비로소 군사력건설을 위한 율곡사업을 시작,지난 20여년 약 21조원을 투자했으나 주한미군을 제외한 한국군 독자군사능력은 북한의 71%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94년도 북한의 병력은 1백3만명으로 정규사단이 53개,후방침투등 특수전을 위한 여단이 99개등이며 전차는 3천8백대,1백70㎜자주포등 야포는 무려 1만3백문에 이르고 있다. 해군도 전투함이 4백34척이고 잠수함도 26척이나 된다.공군은 전술항공기가 8백50대로 지원기·헬기를 포함하면 1천3백30대에 이른다. 이같은 북한의 군사능력은 6·25당시에 비해 병력은 5.2배가 늘어났으며 전차는 15.7배,각종 포는 3.4배,함정은 25.7배,항공기는 7.7배 늘어난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병력이 65만5천명으로 육군사단은 50개,여단이 21개이며 전차는 1천8백대,장갑차 1천9백대,야포 4천5백문이다. 함정은 전투함 1백90척을 비롯해 잠수함 1척등 2백51척이며 항공기는 전술기 5백90대와 헬기 6백대등 1천3백10대다. 한국의 군사력은 6·25당시에 비해 병력은 6·2배,야포는 3.8배,항공기는 29.8배가 늘어난 것으로 특히 공군전력이 강화됐다. 이처럼 남북한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확대됨에 따라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반도는 거의 초토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경제력/무역량 남 1천6백억불로 북의 63배/철도길이 남 1.3배… 44년간 같아/1955년/북한 발전시설용량 남의 8배/1993년/자동차생산량 남이 2백5배 ▷국민총생산(GNP)◁ 93년 한국의 GNP는 3천2백87억달러로 북한(2백5억달러)보다 16배에 이른다.53년에는 남한 13억5천달러,북한 4억4천만달러로 3배의 차이가 났다가 60년대 말까지 그 격차가 좁혀졌다.그러나 남한에서 본격적인 경제발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70년 2배,80년 4.5배,90년 10배 등 격차는 더 벌어졌다.이제는 북한이 도저히 따라올수 없게 된 것이다. 1인당 GNP는 더 큰 변화를 보였다.74년을 분기점으로 남저북고가 남고북저로 역전됐다.53년에는 남한이 다소 앞섰지만 그뒤부터는 역전돼 60년에는 남한이 94달러로 북한의 1백37달러의 70% 수준이었다.그러나 74년 남한이 5백35달러로 북한(4백61달러)을 앞지르기 시작해 93년에는 남한 7천4백66달러,북한 9백4달러로 8배가 넘었다. ▷대외무역◁ 60년대 중반까지 수출·입을 합한 무역 규모는 남북한이 비슷했다.그러나 남한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지난 73년 5배의 차이에서 20년이 지난 93년에는 1천6백60억달러 대 26억4천만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63배나 됐다.수출은 80.6배,수입은 51.7배이다. ▷광공업◁ 70년대 초까지는 북한이 중공업 분야에서 우위를 지켰다.전쟁 직후 남한이 경공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편 반면 북한은 군수산업과 연관된 중공업을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지난 55년 북한의 발전시설 용량은 80만8천㎾로 남한(10만㎾)의 8배였다.총 발전량도 남한의 4배 가까이 됐다.60년의 제강능력도 66만t 대 5만t으로 북한이 앞섰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남한이 중화학 부문에 투자를 늘리면서 상황은 역전됐다.우선 지난 해 남한의 발전시설용량은 2천7백65만㎾로 북한(7백14만㎾)의 4배이다.총 발전량도 남한이 북한의 6배나 된다.제강능력은 남한이 3천3백25만t으로 북한의 1백86만t을 18배나 앞질렀다. 93년 남한의 자동차 생산량은 2백5만대인 반면 북한은 1만대 수준에 그쳤다.선박 건조량도 남한이 북한의 66배나 됐다.화학비료 생산량은 60년대 중반까지는 비슷했지만 지금은 남한이 4백11만t으로 북한보다 3배가 많다.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철광석 생산량은 북한이 4백76만t으로 남한의 21만t 보다 여전히 많다. ▷식량생산◁ 쌀 생산량은 다른 부문보다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지난 65년 남한이 3백50만t,북한 1백25만t으로 2.8배의 격차를 보였다.지난 해에는 4백75만t 대 1백31만t으로 남한이 3.6배 많았다. 전체 경지면적은 65년에는 남한이 2백55만6천㏊로 북한(1백99만㏊)보다 넓었지만 90년에는 북한이 2백14만1천㏊로남한(2백1만9천㏊)을 앞질렀다. ▷수송수단◁ 도로 총 연장은 남한이 55년 2만6천6백㎞에서 93년 6만1천2백95㎞로 2배 이상 늘었다.북한은 1만7천6백82㎞에서 2만3천㎞로 늘었다.철도 총 연장은 50년대부터 줄곧 남한이 북한보다 1.3배 정도가 많다.
  • 미스텔사기 하루면 영변 초토화/AP가 분석한 북핵문제

    ◎심각한 인명·방사능피해가 문제로/북 핵보유 노릴경우 제재 별무효과 북한 김일성정권의 핵무기 제조를 중단시키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이 취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북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최후의 수단인 미국의 선제공습조차도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다.국제위기로 부각되고 있는 북한핵문제의 해결을 위해 빌 클린턴 미대통령과 우방정상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을 문답식으로 알아본다. ­유엔의 제재는 실행될 것인가. ▲유엔차원의 제재이행 여부는 김일성이 추구하는 실질목표가 무엇인가에 달렸다.김이 단순히 핵개발계획을 통해 협상에서 가능한 많은 성과를 얻어 내려는 것이라면 대북제재는 문제해결을 가속화시킬 것이다.그러나 김이 진심으로 핵무기를 소유할 생각이라면 제재만으로 북한의 핵개발계획을 중단시킬 수 없을 것이다.미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북한은 또 금년말 4∼5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충분한 플루토늄을 추가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적은 수의 핵폭탄을 개발할 경우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북한은 핵폭탄을 서울에 대한 테러공격에 이용할 수 있다.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탄도미사일의 정밀도와 사정거리를 개선시켜 일본을 사정권으로 하고 나아가 잠재적으로 미국영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북한은 또 핵무기나 노하우를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에 판매할지 모른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지 못한 이유는. ▲유엔의 핵에너지 이용통제는 회원국 핵시설을 감시할 수 있는 IAEA에 의존하고 있다.IAEA로서는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집행력을 갖고 있지 않아 북한의 어떠한 행동도 이끌어낼 수 없다. ­클린턴대통령이 미군병력과 무기들을 한국에 추가파견할 경우 사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 ▲일부에서 그같은 조치가 사태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이에따라 미국방부는 지난 수개월간 주한 미군진지를 강화하는 작업을 추진해 왔고 지난 4월 패트리어트 방공미사일이 한국에 인도됐다.그러나 이같은 준비태세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핵무기와 미사일을 보유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을 경우 이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북한원자로를 폭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은 F117A 스텔스기를 동원,단 하룻만에 북한의 원자로를 사용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으며 기타 항공기들을 이용해 북한이 내년 완공예정인 대규모 원자로와 플루토늄 추출시설에 대해서도 폭격을 가할 수 있다.그러나 이들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가할 경우 큰 문제점들이 수반된다.즉 미국이 공습을 감행하면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수천명의 한국인과 미국인이 희생될 것이 분명하다.또 원자로시설을 폭격할 경우 한반도와 일본,그밖의 지역에 엄청난 방사능오염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이밖에 공습을 단행하더라도 일부 핵물질이 지하에 은폐돼 폭격으로부터 보호될 가능성도 있다. ­아직도 대화를 통한 사태해결 가능성은 남아있는가. ▲그렇다.그러나 북한의 IAEA탈퇴 결정으로 그 가능성은 종전보다 훨씬 줄었고 현재 진행중에 있는협상도 없는 상태다. ◎삼성경제연 분석/「북핵」 무력 충돌까진 안갈것/유엔통한 「단계적 제재」 실현성 높아 %%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의 현 상황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과연 전면전으로 확대되는가.국내 최고의 분석력을 자랑하는 삼성경제연구소는 15일 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결론부터 말하면 북핵문제와 관련,전면적인 무력충돌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날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제출된 「북한 핵문제의 현황과 전망」이란 보고서의 내용을 간추린다.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은 두가지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미국의 선제공격과 북한의 선제공격이다.미국의 선제공격은 심각한 희생이 요구되는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선제공격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얻지 못할 것이므로,북한이 체제가 무너질 정도의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북·러 군사협정은 사실상 폐기됐으며,지난 번 북한 군사대표단이 중국에 갔을 때 『북한이 침공을 당할 경우에만 중국이 지원한다』는 명백한 중국의 입장표명이 있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중국이 안보리 제재 결의에서 기권하고,유엔에 의한 부분적 경제제재를 시발로 단계적으로 대북제재를 강화,북한을 대화로 유도하는 「유엔차원의 제재」가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다.북한은 기본적으로 대화의 여지는 항시 남겨두는 경향이 있어 제재 이후라도 외교적인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유엔 차원의 제재 방식은 우선 1단계로 문화·과학·기술교류 중단 등 각 국의 부분적 제재,2단계로 인적교류 및 물자교역을 중단하고 이어 자본거래를 중단하는 전면적 경제제재로 옮겨진다. 그러나 중국의 적극적 중재,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 등 북한과 미간의 협상채널을 통해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정 이전에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있다.이 경우 북한은 핵확산 방지조약(NPT) 체제로 복귀하면서 핵투명성 보장과 북한의 안전보장 및 대북한 원조를 의제로 북·미 3단계 고위급 회담이 진행될 것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중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한·미·일이 공동으로 제재를 추진하는 것이다.이 경우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이어지고,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중국과 러시아가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북한의 선도발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이 상황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유엔을 통한 1단계의 부분적 경제제재는 북한 경제에 별 영향이 없다.미국의 경우 이미 무역금지 조치 등 대북제재를 취하고 있으며,북한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지난 해 12.7%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식량과 원유는 중국으로부터 조달이 가능하다.하지만 2단계의 전면적 경제제재로 들어갈 경우,중국의 동참을 가정하면 식량과 원유 공급이 중단되고 연간 20억달러로 추정되는 일본의 송금과 북한의 대외 교역이 끊기면서 북한은 극심한 외화부족에 시달린다.동시에 외자공급이 중단되면 북한 경제의 소생 가능성은 거의 없다. 향후 유엔 안보리 결의로 대북제재가 점진적으로 강화돼 위기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도 타격을 받는다.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겠지만 민간 및 정부의 해외자본 조달이 큰 차질을 입게 된다.주가급락,해외자금 조달의 어려움 등 금융시장의 불안을 시발로,생필품을 중심으로 한 수요폭증과 기업의 투자지연 등이 뒤따른다. ◎「러」 이즈베스티야지 분석/“북은 핵개발 포기 안할것”/김 체제 존속하는한 이성적 해결 난망 러시아 일간신문 이즈베스티야는 15일 「위대한 수령은 왜 핵무기를 가지려는가」하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일성의 핵무기개발 야욕은 한국전쟁 직후 싹텄으며 한­소수교에 자극을 받아 본격화한 것이라고 전했다.이 신문은 북한의 현체제가 존속하는 한 핵문제는 이성적 해결이 어렵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요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관한 믿을만한 증거는 없다.북한의 핵개발 작업은 50년대 중반 시작됐다.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모험이 실패한 뒤 핵무기 보유를 진지하게 생각했다.김일성대학에 핵물리학과가 개설되고 소련과 핵연구협력협정도 체결됐다.50명이 넘는 북한의 전문가가 소련의 핵연구기관인 두브나연구소에서 연구했다.김일성은 65년 소련의 「형제적 지원」으로 최초의 연구용원자로를 획득했다. 92년말 쉐레메티예보 2공항에서 북한으로 가려던 30명이상의 러시아 과학자가 체포됐다. 북한이 소련에 자체 핵개발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데는 한­소수교와 관련이 있다.90년 여름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외무장관이 북한을 방문,김영남외교부장에게 서울과의 수교 불가피성을 설득하려 했다.이를 극력 막으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김영남은 셰바르드나제에게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즉 『고르바초프가 「남조선 괴뢰정부」와의 협력을 추진할 경우 평양은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는다는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셰바르드나제는 이 위협을 단지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했다.또 당시 모스크바는 미국첩보위성이 북한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발견했다는 보도를 믿으려하지도 않았다. 러시아정보기관은 오늘날도 평양의 핵무기제조 기술과 시설 보유에 대해 부정적이다.그러나 북한이 고성능 중·장거리 로켓을 제조하고 있으며 이는 화학·생물무기 뿐만 아니라 핵무기 장착도 가능하다는게 러시아측 전문가들의 견해다.남한의 9개 원자력발전소는 미사일 공격만으로도 핵폭격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러시아 군사전문가들은 특히 위성을 통한 정보를 믿는 미국인의 천진성에 놀라고 있다.북한은 절대로 비밀시설을 노출되게 건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중국의 반대로 대북한 제재는 없으리라 보고 안심하고 있다.북한에 70%의 석유와 60%의 식량을 공급하는 중국이 불참하면 경제봉쇄는 의미가 없다.북경이 제재를 반대하고 있고 설사 유엔안보리에서 표결하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은 논리적으로 시사되고 있다.안심한 김일성은 무역전쟁에는 진짜전쟁으로 대응하겠다면서 위협적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과는 어떤 일이 가능한가.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유엔안보리를 우회하는 제재조치다.이 경우 북한이 한반도에서 대결을 도발할 위험이 있으며 결과는 예측이 어렵다. 두번째는 김일성에게 군사목적용 플루토늄을 IAEA에 들키지 않도록 감추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시나리오다.이는 또하나의 핵강국 출현을 허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핵확산금지체제를 뿌리째 뽑아버리기 때문이다. 관측자들은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자체 생존과 부자권력이양에 초조해하고 있는 북한의 현체제가 존속하는 한 북한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이성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이 평양을 인정,외교적 관계를 맺더라도 김일성은 그 대가로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새로운 흥정 또는 위협을 위해 또다른 「흉포한 비밀」을 지키기 위한 수단을 강구할것이다.
  • 신팔균선생/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이끌어(이달의 독립운동가)

    ◎충북 진천에 사립학교 세워 인재 양성/만주망명후 독립군 총지휘… 일 괴롭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이후 수많은 선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왔다. 동천 신팔균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친 대표적인 애국선열로 손꼽히고 있다. 선생은 김좌진,홍범도,김동삼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한 무장이다. 선생은 부친이 한성부판윤과 좌변포도대장등을,조부가 금위대장·삼도수군통제사·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출신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선생은 육군참위로 임관,강계 진위대에서 첫 근무를 했다. 선생은 1909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체되자 인재양성에 힘을 쏟기로 하고 충북 진천에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국교 자리)를 세웠다. 이와함께 전국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80여명으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항일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성공했다. 대동청년단은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단체로 광복때까지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보안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단체를 출범하면서 단원이나 단명등에 관한 사항은 일절 문자로 표시하지 않으며 경찰등에 체포될 경우 다른 단원을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피의 서약」을 맺었다. 선생은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종지부를 찍고 일제통치가 시작되자 무장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선생은 일단 만주로 망명,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에 가입했으며 3·1운동에 앞서 만주 동삼성의 민족지도자 38인 가운데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생은 이어 만주 서간도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경학사의 후신인 한주회 소속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에 가입,군단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후진교육을 맡았다. 당시 교관으로는 일본육사출신인 지청천과 김경천,한말 무관출신인 김창환등이 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생을 비롯한 애국투사들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3·1운동을 전후해 만주지역에는 50여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됐으며 이들은 각각 일제에 전쟁을 선포하고 일제 주재소와 헌병대등을 습격하는등 맹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선생도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일제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가졌으며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는등 용맹을 떨쳤다. 독립군부대는 그러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1천여명의 병사를 잃은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 살육하는등 초토화작전으로 맞서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이동하게 된다. 당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만으로 옮겼으며 선생이 활약하고 있는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등은 남만의 홍경현으로 이주했다. 1922년 봄,남만에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의 조직을 위해 기존 부대를 해체,대한통군부를 결성했으며 이 통군부는 그해 가을,북만의 독립군부대까지 결합시켜 대한통의부로 새로 출발했다. 선생은 1923년 대한통의부 의용군사령관에 임명돼 독립군병력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 의용군은 5개중대와 유격대,헌병대로 조직됐으며 각 중대는 5백∼9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의용군은 당시 압록강 접경에서 일제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국내에도 잠입,게릴라전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의용군은 1923년 1월 유격대원 7명이 평북 창성군 후평주재소를 습격,일경을 사살하는등 무수한 전과를 남겼다. 선생은 그러나 1924년 7월 홍경현 밀림에서 야외군사훈련중 중국 마적 3백여명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쓰러져 42세로 운명했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 죽으려했더니 중국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생을 숨지게 한 마적들은 사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로 밝혀졌다. 한편 선생이 순국할 당시 서울 셋방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며 살고 있던 부인 임수명여사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쓰러져 운명,일가족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친 셈이 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추서했다.
  • 전쟁과 반전쟁/이재근(서울광장)

    「제 3의 물결」「권력이동」등의 매혹적인 저서로 잘 알려진 앨빈 토플러는 최근 저서 「전쟁과 반전쟁」에서 전후로부터 탈냉전시대로 이어진 이 시대의 일반적인 「전쟁 불감증」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족들은 서로 증오의 살육전을 벌이고 있고 지구는 황폐화되고 있으며 전쟁이 전쟁을 낳는 또다른 암흑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고 토플러는 지적했다.그는 1945년 「평화」가 마련된 이후 전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과 내전은 1백50여회나 되고 민간인을 제외한 군인만도 7백20여만명이 희생됐다고 적었다.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전체 전사자수가 약 8백40만명임에 비추어,놀랍게도 세계는 45년이후에도 세계대전을 다시 한번 치른 셈이 된다는 게 토플러의 분석이다.실제로 45년부터 90년까지의 모두 2천3백40주중에서 지구상에 전쟁이 전혀 없었던 주간은 단 3주에 불과하다.그러므로 45년이후의 그 오랜 기간을 전후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토플러는 말한다.한반도의 현실은 더욱 그러하다. 동서독통일과 남북한통일문제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이 전쟁과 반전쟁의 차이라 할수 있다.남북한통일은 누구에게나 지상명제이겠지만 그 성취과정에는 반전쟁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동서독에는 그것이 없었다.세계전쟁의 끝에서 분단이 됐고 동족전쟁의 미완으로 분단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고 보면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반전쟁은 통일의 기본전제가 되지 않을수 없다.우리에게 있어 언제나 통일과 안보가 표리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수만은 없는 속성을 갖고있다.그것은 어느날 아침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일어날수 있다.그래서 전쟁의 우발성과 파괴적 비인간성을 놓고 트로츠키는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무서운 말이다. 지금 한반도에는 이상하게도 전쟁의 망령이 끊임없이 어른거리고 있다.북한핵,팀스피리트,스커드미사일,패트리어트 배비,판문점,휴전선,전진배치,북의 남침 시나리오,반격 격멸시나리오,서울 불바다론,평양 초토화작전등이 모두 한반도에깊게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들이다. 지난 4월 82회 생일을 맞은 북한주석 김일성은 그무렵 주석궁에 앉아 전쟁과 평화를 얘기했다.『북한에는 핵무기가 없다.물론 제조할 생각도 없다』고 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큰 피해를 입는다.이만큼 해놓고 왜 전쟁을 하는가.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면서 「서울 불바다」운운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명」도 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맞다.그러나 『전쟁은 좋은 것이다.그래서 나는 전쟁을 해야하겠다』고 예고하며 전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전쟁은 그것이 터지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평화」인 것으로 머물며 그 가혹한 살상과 파괴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는 「평화주의자」였다.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야심과 환상은 정권을 잡기전 일찍이 옥중에서 기술한 「나의 투쟁」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데도 그는 항상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위장했다.33년 1월 총리에 지명된뒤 의회 시정연설에서 그는 『나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현재의 유럽과 독일은 평화스럽다.제국과 독일사이의 현안들은 모두 평화적인 교섭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들 뿐이다.물론 독일은 유럽 어느 국가에도 전쟁을 유발시킬 사유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고 다짐했다.저돌적인 히틀러의 출현을 지켜보던 유럽인들은 이 한마디에 안심했다.히틀러의 숨겨진 호전성을 간파하여 전쟁위험을 역설하던 영국의 처칠이 오히려 전쟁 모험주의자로 몰려 진짜 평화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전쟁은 터졌고 이제 히틀러는 표변하여 『평화를 떠드는 자가 꼭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지꺼렸다.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잘못됐다는 말을 믿고자 하는게 우리 입장이다.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여전히 서울 불바다론의 속내와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그가 평화를 말하니까 더 그렇다.이 단계에서 제정신을 갖고 거듭 지적컨대 모든 전쟁은,한 사람의 광적인 지배야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그리고 지금 한반도의 휴전선 북쪽에는 거금 44년전에 전쟁을 일으켰던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사실을 알아야 한다.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말대로 「제정신」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 고라주데서 중화기 철수완료/세르비아계/“유엔,초토화작전” 강력항의

    【베오그라드 로이터 AFP 연합】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나토가 설정한 최후통첩시한인 27일 상오9시(한국시각) 몇시간전에 고라주데 인근 20㎞ 제한구역에서 중화기 철수를 완료했다고 26일 밝혔다. 세르비아계의 SRNA통신은 이날 군사령부의 성명을 인용,『세르비아계 군부대는 고라주데 중심부에서 3㎞ 밖으로,중화기는 고라주데에서 20㎞ 밖으로 각각 철수했다』고 보도했다. 군성명은 특히 『세르비아계군은 나토의 최종시한이 만료되기 전에 라도반 카라지치 대통령과 아카시 야스시(명석강) 유엔특사간에 체결된 베오그라드협정 조항을 완벽하게 준수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유엔평화유지군의 한 대변인은 세르비아계에 대해 최종시한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나토의 폭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매우 확고하다』고 경고했다. 한편 유엔은 세르비아계가 고라주데에서 철수하면서 약탈과 주택방화,식수공급체계 파괴등 이른바 「초토화작전」을 구사하고 있는데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특히 아카시 야스시 유엔특사는 『그같은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고 유감스런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같은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고 마이클 윌리엄스 유엔보호군 대변인이 밝혔다.
  • 검은 대륙에 “경제 새바람”(현장 세계경제)

    ◎사회주의 30여개국 시장경제 전환/남아공 인종차별정책 철폐… 교역 “물꼬”/공기업 민영화 등 구조조정 작업 활발/소말리아·수단은 아직도 1인 GDP 1백불선 아프리카 국가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맞고 있다. ○금광 합작 채굴도 인종차별정책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아왔던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대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이 차별정책의 철폐로 광범위한 교역의 물꼬를 트면서 아프리카 경제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남아공은 나미비아·탄자니아·잠비아·짐바브웨·가나등 주변국가로의 무역대표들 내왕이 잦으며 다이아몬드를 비롯,전기·금광 및 보석광 채굴등에 관한 합작채굴에 관한 협상이 진행중이다.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소속 10개국은 이 지역을 아프리카교역의 중심지로 추진중이며 멀지않아 남아공도 이에 가세할 전망이다.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은 오늘날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빈곤국은 아니다.보츠와나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천8백달러(92년기준)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남아공·나미비아·스와질랜드등도 1천달러를 훨씬 넘는 국가로 개혁을 적극 추진중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의 대부분 국가들은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비록 남아공과 인접국과의 교역이 급성장해도 그것은 아프리카 전체 교역의 5%에 지나지 않는다.대부분은 유럽과의 교역이다.아프리카는 빈부로 양분된 상태에서 내부간 거래조차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외자유치 3% 불과 사하라사막 이남의 43개 국가중 1인당 GDP가 1천달러를 넘는 나라는 6개국에 불과하다.반면에 3백달러 이하인 국가는 15개국에 달한다.대륙전체가 평균 4백달러선이다.수단·소말리아·에리트리아·탄자니아·모잠비크는 1백달러에 불과하다. 이같이 아직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저발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되고 있다.수단·소말리아·라이베리아등에서는 해묵은 종족분쟁으로 공업시설은 물론 농업·상업 기반마저 초토화됐다.현재 아프리카는 70년대 중반의 소득수준을 회복하는데만도 앞으로 40여년을 기다려야 하며 나이지리아 경우는 1세기를 더 허비해야만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유럽과 교역 관경유착과 지연·혈연에 따른 관리등용,만연한 부정부패와 행정의 비능률도 한 요인이 된다.정부가 앞장서 막대한 이윤이 남는 독점사업과 인허가제도를 운용한 결과 관료층만 득을 보고 국민다수인 농민과 상인들은 생존기반 마저 상실했다.92년 한햇동안 나이지리아에서는 GDP의 10%에 해당하는 30억달러가 지하경제로 사라졌다. 외국인투자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법제 및 세제가 마련되지 않아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93년 한햇동안 외국인 투자액은 전세계 자본흐름의 3%에 불과한 16억달러에 그쳤다. 그러나 최근들어 아프리카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정부의 수입과 지출의 균형,환율조정,가격자유화,정부의 민간기업 개입중지와 공기업 매각등 자체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중이다.우간다처럼 독재정권에 의해 추방당했던 많은 기업인들이 재산을 가지고 귀국하고 있는 국가들도 있다.이미 30여국가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전환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최근 사하라사막 이남국가 가운데 가나·탄자니아·잠비아·부르키나파소·나이지리아·짐바브웨등을 개혁이 성공하고 있는 모범국가로 지목했다. ○가나 등 모범국 지정 이중 가나는 세계은행과 IMF의 지원에 힘입어 88∼92년사이 연간 4%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하지만 아직도 국민전체의 저축률이 GDP의 7.5%(87∼91년)에 불과하다.게다가 IMF등이 철수한다면 이 수치들은 더욱 떨어질것이라는 예측이 나올만큼 경제저항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아직 카메룬과 탄자니아처럼 정부가 수입쿼터를 정하고 특정작물의 자작농재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나라도 많으며 정부가 항공·채광·이동통신등 돈벌이를 독점하는곳도 다수다. 그러나 80년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시간을 들여야 결실을 맺는다는 교훈을 가르쳤다.이제부터라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값비싼 경제적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폭력을 제어할수만 있다면 90년대는 아프리카국가들에 희망의 연대로 기록될수 있을 것이다.
  • 건국의 아버지 모택동/부국의 선각자 등소평/누가 더 위대한가

    ◎모 탄신 100주년 계기 중국서 논란/“민중해방 시킨 혁명가” 모 찬양/학생층/“중국사상 첫 기아 추방” 등 칭송/장년층 『모택동과 등소평중 누가 더 위대한가?』­요즘 중국신문들을 보면 오는 26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는 모와 내년이면 90장수를 누리게되는 등간에 누가 더 위대한가를 놓고 경연이라도 벌이는 것 같다.최근 들어 모에 관한 연구토론회 미술전 기념서적발행등 각종 추모행사들이 쏟아져나오면서 그동안 등의 독무대였던 중국신문들의 지면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11월중순까지만해도 중국신문들 지면은 등소평에 관한 기사로 홍수를 이루었다.82년 이후 등의 각종 연설 담화문을 모은 「등소평문선(제3권)」이 나오면서 매일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며 등이론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소 동구와는 달리 망당망국의 위기로부터 중국사회주의를 구출한 등의 선견지명에 모두가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것 같았다.그래서 일부 서방신문들은 등에 대한 신격화를 추진하고 있지않은지 의심하기도 했다.이보다 앞서 2∼3개월동안은 또 등의 막내딸이 쓴 「나의 아버지 등소평을 각 신문들이 경쟁적으로 발췌,연재하며 등의 과거를 미화하는데 정신 없었다. 그러던중 11월 중순부턴 모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주로 『모택동과 티베트』『내 마음속의 모택동』등과 같은 제목의 토론회로부터 시작된 모추모사업은 『일대의 위인 모택동』이란 제목의유화 전시회,모 관련 영화 감상평가회,각종 기념도서출판,『중국에 모택동이 나타나다』란 제목의 기록영화 제작 방영,『모사상 연구토론회』등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각 신문마다 경쟁적으로 모에 대한 회상록등을 게재해 오고 있다. 모에 대한 찬양은 그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는데도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그래서 19세기 중엽부터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천하를 통일하고 봉건주의 노예상태나 다름없던 민중들을 해방시킨 그 공적은 아무리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식이다.다만 그가 집권후반 10년동안 문화혁명을 통해 중국사회,중국전통을 초토화시켜버린 과오에 대해서는 그다지큰 목소리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의 20대 젊은학생들은 모의 혁명사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문화혁명을 경험하고 굶주림을 경험한 장년층에서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기아를 추방하고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될만큼 중국의 경제력을 키워놓은 등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는것 같아 보인다. 어쨌든 모에 대한 추모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모택동과 당외친구들』을 비롯한 모관련 서적 수십권이 쏟아져나와 북경에서 가장큰 왕부정 신화서점에서는 「모서적 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전시판매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회주의 우방인 북한이 모탄신 100주년기념우표를 발행한데 이어 반공의 선봉에 서 왔던 한국에서도 「모택동탄신1백주년기념」이란 글이 새겨진 2천원짜리 공중전화카드를 5백장 발매했다고 이곳 광명일보가 보도했다. 모의 얼굴이 새겨진 접시나 시계 기념메달 사진포스터등도 발매되고 있는데,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통한 잘살기운동을 벌인 덕분에 중국 주민들이 이것들을 사들일 여유가 생겼다고 한 홍콩 신문은 지적했다. 그러나 1백주년기념행사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중공고위 간부 전원이 참석하는 24일밤의 문화예술제에 이어 26일 인민대회당 기념대회때 강택민총서기의 연설이 될것 같다.그런가하면 모의 고향인 호남성의 소산에서는 지난 20일 모동상 제막식을 비롯,지금까지 무려 27차례나 각종 기념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모에 대한 이같은 대대적인 추모행사에 비하면 모를 흠모하는 열기가 그렇게 높은것 같지만은 않다.모두가 등이 제창해온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매달려 돈벌이에 정신을 쏟다보니 그런지도 모른다.그런데도 이같이 많은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대해 한 중국기자는 『모는 정신적 측면의 사상가인 반면에 등은 물질적인 경제의 반영을 중시하는 지도자다.요즘 중국사회가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나가니까 당중앙에서는 정신분야의 영양보충을 통해 균형을 잡겠다는 생각이 든것 같다』고 풀이했다. 어쨌든 모는 『혁명의 천재요.건국의 아버지』인 반면에 등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부국의 선각자』라는 두지도자의 서로 다른 역할이 모탄신 1백주년을 맞아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
  • “북한 도발땐 체제붕괴 직결”(김일평의 한반도진단)

    ◎사찰 수용… 평화공존의 길 찾아야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레스 애스핀 미국 국방장관이 며칠전 사임을 발표했다.워싱턴발로 한국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애스핀장관이 그만두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클린턴대통령과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애스핀은 희생양 그러나 애스핀장관의 사임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했을때 어떻게 전략을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그 요인이 된 것도 아니고 또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견해차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는 사임발표 1주일전인 12일 미국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해결을 강조한 바 있다.따라서 애스핀장관의 관리스타일에 문제가 있었고 또 국방비를 삭감한데 대하여 군부가 원하는 5백억달러를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백악관의 비위를 거스르는 입장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하여간 클린턴이 대통령선거 공약이었던 국방비 삭감,동성연애자 대우문제 등 국방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중에는 대부분이 냉전이 종결된 이후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반도의 전쟁가능성을 홍보하고 군비축소를 지연시키는 전략이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도 있는 것이다.최근 서울발로 월 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북한의 핵개발 및 군사력증강에 대하여 미국측이 전쟁위기설을 홍보하고 있는 반면에 한국정부와 국민은 오히려 미국이 과잉반응을 하고 있다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국방부와 군사전략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의 전쟁가능성을 설파함으로써 미국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국방예산의 삭감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미국이 북한과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섭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양보는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웠을때 미국은 불가피하게 쌍무협상을 버리고 유엔으로 하여금 경제제재뿐만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모든 외교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의 핵보유와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그러면 북한은 경제타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휴전선에 배치한 병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시작하고 3일이내에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미국은 수원이나 대전까지 후퇴할지도 모르나 반드시 반격을 가하여 북한을 완전히 항복하도록 만들고 북한정권이 붕괴되어서 남북이 통일되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물론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것은 한국사람들이고 지난 40년동안 건설하여 놓은 한반도의 산업시설은 초토화되는 것이다.그러면 미국의 국방비는 증가되고 군비는 더욱더 보강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한반도의 전쟁으로 북한은 얻는 것이 무엇이고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북한은 한국전쟁이후 너무도 장기간 고립되어 있었고 미국에 대하여 적개심만 키우며 반미구호만 외쳐왔지 미국에 대한 인식도 없고 이해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남쪽에선 국제화·개방화·세계화 등 여러가지 구호를 외치면서 선진대열에 동참하려는의지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통문화의 영향때문에 배타주의·독선주의·극단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오늘 북한의 지도층이 미국을 이해하고 세계무대를 향하여 진출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은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그러나 북한이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얻는 것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그것은 북한이 반세기동안 주장하여온 남북통일일 것이다.그러나 북한의 체제는 붕괴되고 독일의 통일과 같이 남쪽으로 흡수통일이 된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그러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첫째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고 둘째 북한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며 셋째 평화공존으로써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대일수교에 역점 북한이 영변의 2개 핵개발시설을 포함하여 7개의 핵개발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인다면 미국은 교역제재를 없애고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고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교류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북한은최근에 있었던 인사이동에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일본의 조총련 부의장출신 김병식을 부주석으로 등용함으로써 대화이미지를 개선하고 또 대남전략도 전환시킬 계기를 마련했다.지난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나올때 주역이었던 김영주와 현대조선의 기본문제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김병식을 다시 등용해 대미협상에서 이룩하지 못한 외교목표를 대일외교전략으로 전환함으로써 호소카와 일본정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대미외교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양측은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 거물급 대부분 개표초 당선 확정/일 중의원선거 이모저모

    ◎다케시타 무소속 출마해도 1위/미야자와 “정말 어려운 선거” 실토 ○…지난 12일 발생한 강진으로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홋카이도 서남부 오쿠시리(오고)섬은 선거일인 이날 새로 9명의 사망자가 발견되고 69명이 실종인 채로 있는등 최악의 상태에서도 전체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투표에 참여. 이 섬에서는 이날 투표종사원의 제안에 따라 지진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투표가 시작됐으며 투표순서도 지진피해 구호요원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등 투표소의 분위기가 이 섬의 침울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 선거종사원들은 지진으로 파괴된 5개의 투표소를 대신해 임시투표소를 긴급설치하는등 투표율제고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투표율은 49%를 조금 웃돌아 이 섬의 지난 90년선거에 비해 17%,이번 총선의 전국투표율보다 11%나 낮게 기록. ○…집권 자민당의 수성과 야당의 약진노력이 맞부딪치고 있는 총선의 열기를 잊은듯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이 제작한 영화 「주라기 공원」의 상영관들은 이날 관객이 대거몰려들어 최고의 흥행기록을 수립. 상영관들에는 상오7시 조조시간부터 관객이 장사진을 이룸으로써 투표참여율이 저조한 이유에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환멸이 뿌리깊이 박혀있는데다 날씨가 나빴던 탓도 있지만 주라기공원의 인기도 한몫을 차지한듯. ○…이날 개표에서 미야자와 총리등 대부분의 거물급 정치지도자들은 일찌감치 선두로 나서면서 당선이 확정. 미야자와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인 히로시마(광도)에서,하타 쓰토무(우전자)신생당당수는 나가노(장야)에서 각각 초반부터 선두를 유지,당락을 결정지었다. 또한 재선여부로 주목을 끌었던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전총리도 정치자금스캔들 의혹으로 자민당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지역구의 폭넓은 지지로 1위로 당선,저력을 발휘했다.그의 1위당선은 8번째. ◎자민 부패불구 현상유지 성공/「신당트리오」 정국변수로 부상(해설) 일본정치가 이번 총선을 통해 구조적 대전환을 맞고 있다.전후 일본정치를 지배해온 자민당이 과반수의석 획득에 실패하고 사회당이 참패한 반면 신당그룹이 대약진했다. 신생당,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선구)등 「신당트리오」가 1백석 이상을 차지하며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자민당과 사회당을 주축으로한 이른바 「55년 체제」와 함께 자민당 다수단독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일본정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고 있는 이번 선거의 최대 특징은 사회당의 참패와 신당의 대약진이다.사회당의 참패는 자민당의 비판표가 과거와 같이 사회당으로 가지않고 신당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세운 신당들의 약진은 일본인들의 강한 정치불신과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자민당은 제1당이지만 과반수확보에 실패,다수단독정권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그러나 연립정권을 구상하고 있는 신생당과 야당등 5개당의 의석수도 자민당보다 적어 이들의 연립정권 가능성은 높지않다.이때문에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일본신당의 움직임에 따라 다음 정권이 결정되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자민당 재집권의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 국민지지 바탕,「혁명적 개혁」 박차/신한국 건설의 삽질 이렇게

    ◎칼날사정·파격인사… 정관계 대폭 물갈이/「12·12」 등 역사재평가… 기득권층 무장해제/정권의 정통성·도덕정 무흠결이 추진력 배가 김영삼대통령의 취임초기 일부에서는 『누구나 초기에는 개혁을 한다』고 말했다.기득권층의 희망적 예단은 빗나가고 있다.「종교적 열정」으로나 이해가 가능한 개혁드라이브 1백일을 맞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임기중 개혁을 중단없이 계속할 것』이라고 한 김대통령의 말을 의심치 않고 있다. 지난 1백일을 통해 김대통령과 정부는 질풍노도같은 사정과 인사를 통해 문민정부의 개혁토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그것은 반개혁적이게 마련인 기득권세력의 초토화,개혁에 대한 국민적신뢰와 합의의 구축으로 나타났다. 이 바탕위에서 이제부터는 취임의 슬로건으로 제시했던 「신한국」이란 집의 건축이 시작되려하고 있다.개혁의 법제화·의식화가 기둥이 되고 그 위에 신한국의 구체적 모습인 「깨끗하고 부강하며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의 지붕이 얹히게 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취임 1백일이 되는 4일은 개혁이 기초정지를 끝내고 구체화로 넘어가는 대전환점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김대통령의 초기작업은 개혁으로 상징되는 사정과 변화로 의미되는 인사,역사의 재평가를 축으로 해 진행돼 왔다.여기에 YS식정치 특유의 전격·과감성이 가미됨으로써 「개혁의 이름을 빌린 혁명」은 거침없이 「한국병」의 환부를 섭렵해내고 있다. ○걸작드라마 방불 개혁이 대단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하는 것임에도 솔선수범과 화려한 정치술의 뒷받침으로 인해 걸작 드라마처럼 미화되고 있음은 특이하다. 김대통령은 자신과 가족의 재산공개(2월27일),정치자금단절 선언(3월4일)이란 솔선수범으로 개혁의 대장정을 선언했다. 또 다른 솔선수범인 청와대 칼국수는 경제회생을 위한 고통나누기의 의지표시였다.대통령과 핵심세력의 솔선수범을 맛깔나게 만들어 국민의 동참을 이끌어낸 개혁의 양념이다.당연하게도 청와대 칼국수는 외국 언론이 한국의 개혁정치를 소개할 때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한국개혁정치의 마스콧으로 부상하고 있다.일부의 저항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국내외의 갈채속에서 진행되고 있고,개혁의 장기화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서 찾아지고 있다. 일반인이 생각할때 개혁은 사정과 동의어로 여겨질 만큼 사정만이 부각돼온 측면이 없지 않다.그러나 역사의 재평가를 통한 분위기 장악과 과감한 인사를 통한 지원이 없었다면 사정도,개혁도 궤도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란게 1백일 개혁을 지켜본 사람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김대통령은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기득권세력의 치부를 국민 앞에 공개하는 것으로 개혁의 첫삽을 떴다.국민의 공분을 일으켜 개혁에 국민적합의와 추진력을 붙여주기 위한 면밀한 계산의 결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개혁은 이 단계에서 이미 미화되고 국민적 합의를 얻기 시작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세력의 상징적 인물인 전국회의장의 의원직사퇴가 이루어지고 현국회의장의 탈당이 있었다.12·12세력의 원로격인 유학성의원의 사퇴가 뒤따랐다.과감한 물갈이의 서막은 이렇게 장식됐다. ○도덕성시비 불식 개혁작업은 역사의 재평가와 인사의 파격성을 통해 재충전을 하면서사정으로 한국병의 실체에 바로 접근해 들어갔다. 4·19는 혁명으로 재득명했다.5·18은 문민정부가 그 연장선상에 있음이 선포됐다.5·6공의 출발점이었던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다시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평가는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강화해주면서 동시에 기득권 세력의 완전한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2·12의 재평가가 야당의 요구에의해 이루어졌든,5·18광주재평가가 광주문제해결을 위해 이루어졌든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 원인이나 계산여부에 상관없이 개혁작업은 이를 통해 비상의 날개를 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문민정부는 비로소 과거정권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질 수 있었다.과거를 대상으로 한 사정작업이 「일제시대에 살았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친일파」란 논리의 도덕성 시비에서 자유스러워진 것도 역사의 재평가를 통해 얻은 수확의 하나로 여겨진다. 대통령과 그 세력이 과감한 개혁에 나서고 국민적합의를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정권획득과정의 정통성과 취임 이후의 도덕적 무흠결이다. 최초의 문민정부란 점,선거의 공명성이 개혁의 안전한 발아를 가능케 했다.『단 한푼의 돈도 안받겠다』고 한 취임이후의 선언은 그의 개혁이 「정권의 안정성도모」같은 앞선 정부의 개혁작업과 차별되면서 개혁작업의 도덕성을 완전에 가깝게 끌어올린 것으로 파악된다.기존 권력층의 공개된 치부,그위에 가해진 개혁주체의 높은 도덕성은 당연히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국민의 지지가 다시 개혁의 가장 날카로운 날로 등장하는 새로운 「개혁모델」을 등장시킨 것이다. 김덕용 정무1장관은 세미나에서 정부의 개혁을 「생존을 위한 개혁」으로 정의한바 있다.김대통령은 『경제회복을 위해 부정부패 척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개혁의 목표가 청교도적인 도덕사회의 수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복지국가의 수립에 있음을 분명히 읽게하는 대목이다. ○능동적협력 긴요 국제경쟁력의 회복을 위해서는 기업외적인 비용의 척결이 필요하다.또한 근로의욕을 북돋우기 위해서도불로소득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부동산투기를 없애야만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고 보면 새정부의 개혁은 확실히 더 나은 복지국가를 위한 전단계로서의 의미를 갖는게 틀림없다. 그러나 경제는 투자의욕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이 간과돼 왔다.투자의욕과 개혁을 동시에 얻으려는 것이 현정부의 생각이지만 기업투자는 늘지 않고 있고 이를 반영해 청와대는 재계에 잇단 유화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개혁의 법제화나 제도화는 공무원과 기존 정치권의 능동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그러나 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징후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개혁작업이 민생사정이란 이름으로 개혁대상을 넓혀 갈때 그만큼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개혁지지에서 떨어져 나갈 개연성이 높다. 성공적인 출발과는 상관없이 개혁의 열매를 딸때까지 그 과정은 길고 더 많은 사람의 인내를 요구한다.개혁작업의 난이도도 사실은 더 높아지는 단계일 것이다.
  • “TJ뇌관 터지나” 술렁이는 정치권/박태준씨 탈세혐의 수사의 파장

    ◎경선때 자금살포 핵심… 민정계 큰 불안/민자/“정치자금 빠진점 아킬레스건” 노릴듯/민주 박태준 전민자최고위원의 횡령·수뢰혐의에 대한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정치권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박씨가 지난해 대권을 노리면서 정치권에 막대한 자금을 살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정치자금사용처까지는 조사가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나 만일 사용내역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사법적·정치적 제재가 이어지면 「TJ파문」은 동화은행·슬롯머신사건보다 훨씬 크게 번질 가능성이 있다. ▷민자당◁ ○…박씨 파문은 그렇지않아도 위축되고 있는 당내 민정계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지난해 총선과 민자당 대권후보경선을 전후해 민정계의원들 다수는 박씨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박씨는 민주·공화계 심지어 야당가에도 규모는 작지만 정치자금을 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마음먹고 수사를 한다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걸릴 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은 부지기수일 것이다.특히 민정계는 「초토화」될 가능성도 있다. 청와대측도이러한 점을 알고 있다.검찰수사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면서도 박씨 이외의 정치인들을 이번 사건으로 사법제재할 생각은 없는듯 보인다. 사실 박씨는 지난해 3·24총선을 전후해 민자당 후보들에게 5천만∼5억원씩의 자금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한지구당위원장은 『개인당 평균 1억원수준은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때문에 총선당시 자금지원을 문제삼는다면 파장도 크거니와 「정치보복」「민정계 말살」의 의혹을 살 우려가 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뒤 대권후보경선과 관련해 자금이 오간 부분은 조사할 수 있다고 여권의 고위관계자는 말했다.『선거때 자금지원은 흔한 일이지만 경선을 앞두고 돈을 주고받은 것은 매수로 보고 사법적으로 안되면 정치적 제재라도 가해야 한다』는 논지이다.경선을 전후한 자금수수부분만을 밝혀도 지금까지 연명해온 민정계내 반YS세력은 그대로 주저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씨에 대한 사법제재는 심리적 측면에서도 영향이 크다.박철언의원에 이어 박씨에게도 이같이 단호한 조치가 취해지는 것을 본 민정계인사들은 『YS에게 대항하는 것은 정치적 파산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이점에서 민자당뿐 아니라 전정치권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장악력이 보다 확고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민주계를 중심축으로 한 정치권물갈이의 본격화를 예고하는 것으로도 파악된다. 청와대나 민자당지도부는 박씨 처리가 「정치보복」으로 비치는 것을 극구 꺼려한다.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은 『김대통령이 어떤 자리,누구에게도 박씨를 응징하라는 얘기를 한적이 없다.적법한 세무조사 결과 비리가 드러난 것일뿐』이라고 강조했다. 김덕용정무1장관도 『포철은 그동안 기업이면 누구나 받게되어 있는 법인세 조사를 한번도 받지 않았다.만약 이번에 포철이 조사를 받지 않았다면 왜 특정기업만 빼느냐는 비난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강재섭대변인은 『박전포철회장은 현재 민자당원이 아니다.따라서 당이 뭐라 언급할 성질이 아니다.국세청 조사·검찰수사·사법부 재판은 각자 그 기관의 고유책임과 권한하에 진행되고 있다』고 박씨 사건에 정치복선이깔려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포철의 탈세와 박전회장의 수뢰에 대해 양비론적인 입장을 견지.포철과 박전회장에 대해서는 정경유착의 샘플로,검찰과 국세청에 대해서는 정치보복성 수사와 조사로 각각 비난. 먼저 권력의 비호속에서 성장한 정경유착의 본보기로 포철과 박전회장을 공격.박지원대변인은 『은행대출을 독점하고 탈세등 갖은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권력층에 상납해온 기업』이라고 포철을 비난하고 『옳지못한 방법으로 축재한 박전회장은 즉시 귀국해 정부의 조사에 응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 정부측에 대해서는 세무조사가 박전회장 주변문제에 국한된 점을 들어 정치보복성 표적수사로 주장.특히 3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이고도 공식 혐의가 탈세와 공금유용으로 드러나자 미묘한 정치자금 부분은 파장을 우려,고의로 뺀게 아니냐는 시각. 박대변인은 『이번 박전회장에 대한 수사를 놓고 김영삼대통령을 반대했기에 당하는 것 아니냐는 국민적 의혹을 저버릴수 없다』고 지적. 박대변인은 이어 『정치자금을 제공하는등 부패기업이 포철 하나만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다른 대기업에 대한 전면적 조사를 촉구하는등 쟁점화를 시도.
  • 중국 모래폭풍 43명 죽어(지구촌단신)

    【홍콩 로이터 연합】 지난 5일 중국북서부의 농경지역을 휩쓴 살인적인 모래폭풍으로 최소한 43명이 숨지고 경작지가 초토화됐다고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9일 보도했다.
  • “임란문학,전란문화사 연구에 큰 몫”

    ◎소재영·조동일교수 등 공저 「임진왜란…」서 주장/소설·시가·성화·실기문학 등 통해 조명/“상·하층 체험 사실주의 전통 마련” 평가/피란·피해상황·복구·포로귀환 등 소재 다양 지난해 92년은 임진왜란 발발 4백주년이 되던 해.임란 5년뒤에 일어난 정유재란은 오는 97년으로 4백주년을 맞는다.이들 대전란은 조선 봉건체제에 큰 변화를 안겨 주었다.그럼에도 이 전란의 문화사적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이러한 시점에서 당시 신분적으로 대립했던 상·하층의 공동체험문학기반을 추적한 「임진왜란과 한국문학」이 민음사에서 간행됐다. 이 연구에는 소재영(숭실대),정재호(고려대),설성경(연세대),김태준(동국대),조동일(서울대),신동욱(연세대),황패강(단국대)교수등이 참여했다.임란과 더불어 형성된 소설과 시가문학,실화,한시,실기문학을 주로 다루고 있다.이들 문학은 우선 처참하게 희생된 하층인의 처지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또 전쟁체험에서 우러난 소망이 상하공감의 사실주의적 문학전통을 마련한 것으로 해석했다. 소재영교수는 「임진왜란과 소설문학」을 통해 「임진록」을 비롯,「최척전」과 「남윤전」「이한림전」을 검토대상으로 삼았다.이밖에 봉유계열로 「달천몽유록」을 포함시켰다.「임진록」은 임란의 전승설화집의 성격을 지녔으나 소설적 격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역사소설(역사군담)로 보았다.「임진록」을 문헌과 기록문학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옴니버스형 작품으로 조명하면서 「최척전」에 주목했다.특히 조위한의 「최척전」은 소설주인공의 공간적 체험을 중시하고 있다. 「최척전」은 임란포로들의 체험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실존인물 노인이 남원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 갔다가 중국의 복건성등지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나 조완벽이 포로로 팔려 장기·안남등지를 전전하다 귀환한 사실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이한림전」의 경우 조선에서 일본으로 갔다가 안남에서 부자가 상봉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소설구조역시 공간관념의 확대현상으로 지적했다. 정재호교수는 「임진왜란과 국문시가」에서 임란소재 현전 시가로가사 16편,시조 10수를 밝혀냈다.이들 시가의 내용을 임란의 피해현황,난에 대한 자아비판,피란,전쟁뒤의 평화,복구,포로의 시가및 귀환의 노래로 분류했다.그리고 이러한 임란의 묘사에는 관념적인 것이 있는가하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포함되어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이들 시가는 1592∼1640년까지의 시기에 몰려 있는 것으로 가려냈다.이같은 현상은 당대에 전란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정교수는 주장했다. 그 가사의 하나가 무수히 죽어간 인명살상에 대한 「용사음」이다.「조종 구섭에 도적이 님재도여/뫼마다 죽기거니 골마다 더듬거니/원혈이 흘너나 평육이 성강하니/건곤도 뵈자올샤 피□□ 전혀 업다」라고 되어 있다.임란은 군인간의 전투가 아니라 전국이 초토화되고 문화가 야만에 의해 짓밟힌 것을 상징한 이같은 시가는 우리 가슴에 한이 되어 이루어진 임란문학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설성경교수는 임진왜란의 설화를 현실적 체험의 비극을 곰삭여 자아낸 인간적 여유의 문학으로 정의하고 있다.그는 「임진왜란 체험의 설화와 양상」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우회적으로 따뜻하게 덥혀낸 문학을 임란의 설화로 보고 그 유형을 다각적으로 검토했다.그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신격예시등의 임란이전의 사건설화로부터 임란때의 여성대응설화,임란종결과 보상설화까지 여러 갈래로 나타난다. 보상설화의 대표적 케이스로 「사명당 설화」를 꼽았다.임란에 대한 보복보상심리가 짙게 깔린 이 설화는 사명당이 왜에서 벌인 신통력있는 활동을 통해 7년간의 민족적 시련에 대한 정신적 보상의 명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했다.
  • 제2걸프전 위기 일단 넘겼다/미­이라크,「유엔사찰안」수용 안팎

    ◎후세인 제거 확신못해 후퇴/부시/“사찰팀서 미배제” 승리 자위/후세인 유엔 무기사찰팀의 이라크 농무부청사 조사문제로 촉발된 미국과 이라크간의 대결이 28일 마침내 충돌직전 사전절충에 합의,이라크측이 사찰을 허용함으로써 일단 전쟁재발의 위기국면은 벗어나게 됐다.이는 지난 3주간 재공격 위협을 가해온 부시 미대통령이나 후세인 이라크대통령 모두가 행동의 한계를 안고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즉 미국은 정전협정위반을 이유로 이라크를 또다시 공격할 경우 후세인을 제거시킬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고 이라크 또한 걸프전때 겪은 미국측의 미사일 섬광이 난무하는 초토화전략에 무력할수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따라서 부시로서는 이라크 농무부시설에 대한 사찰을 보장받는 대신 미국인을 비롯한 걸프전 당시 동맹국측 전문가들을 조사팀에서 배제하라는 후세인의 요구를 수용하는 선에서 양측의 체면을 살려 타협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하튼 후세인은 미국과의 신경전에서 사찰팀 구성에 거부권을 확보하는등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쿠데타설이 나돌던 국내정치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됐고 아랍세계에 자신의 위상을 높여 걸프전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다소나마 회복했다고 자위할만도 하다. 그러나 이번 미·이라크간의 어정쩡한 타협이 걸프해역에 그간 조성돼온 긴장의 파고가 잠들었다고 하긴 아직 이르다.우선 부시의 입장으로선 1백여일 남짓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악화일로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라크문제」를 최대한 활용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CNN방송의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민의 70%가 대이라크 군사작전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민주당 진영에서도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걸프전 직후 국민들의 열화같은 지지를 잊을수 없는 부시는 오는 11월의 선거전까지 여건만 조성되면 언제라도 군사행동을 벌일 가능성은 유보하고 있다고 볼수있다. 미국의 국내정세 말고도 양측간에 전쟁이 재발할 잠재적인 요인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앞으로의 사찰과정 뿐아니라 쿠웨이트와의 국경획정문제,이라크내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문제등 광범위한 현안에 대해 미국측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과 이라크가 또다시 전쟁을 벌일지 여부는 속단키 어렵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양국간의「감정싸움」이 비화되면 될수록 걸프지역에 드리워져 있는 전운은 점점 짙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제 2걸프전 먹구름”… 긴장의 중동

    ◎부시는 과연 결행할건가/영·불과 합세 “본때 보이겠다” 완강/안보보좌관 소집… 군사행동 계획 완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유엔의 대량살상무기사찰팀의 활동을 봉쇄하고 있는데 대해 미국의 입장은 단호하다. 무엇보다 후세인의 이같은 행동은 미국을 필두로 한 유엔의 권능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특히 미국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5일 이라크가 유엔특별사찰팀의 농무부 진입을 막을때부터 사찰팀은 걸프전의 휴전협정에 따라 이라크내의 핵및 생화학무기,이를 운반할 미사일의 제거임무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외교경로를 통해 강조해왔다.그러나 2주일이 지나도록 이를 수용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찰팀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등 노골적인 휴전협정파기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미국은 후세인의 이러한 휴전협정농락행위가 계산된 행동이며 특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내문제해결에 몰두하도록 여론의압력을 받고있는 부시대통령이 쉽사리 군사행동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에 근거하여 미국의 반응정도를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미국이 후세인의 유엔사찰팀 활동봉쇄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경우 이를 계기로 이라크가 유엔과 체결한 휴전협정을 사문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그러나 이라크의 휴전협정파기행위를 용납할수 없으며 이점에 관한한 영국·프랑스등 동맹국과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제2차 걸프전을 치르더라도 본때를 보이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시대통령이 24일 주말휴가일정을 취소하고 25일 아침 고위안보보좌관들과 이라크사태를 총점검한 것이나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한 미국을 강력한 1등국으로 유지시킬것』이라고 다짐한 것은 바로 미국의 이같은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시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조치는 이번 주말에 후세인에게 「휴전협정준수」냐,「무력제재감수」냐를 택일토록 최후통첩한뒤 태도변화가 없을 경우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의 바그다드공습을 감행한다는 복안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이미 페르시아만과 지중해상의 항공모함,터키밋 사우디공군기지 등 4개 방향에서 F­117 스텔스폭격기,F­15E 장거리전폭기·F­14·F­16전투기,A­6 폭격기 그리고 정찰기·공중급유기·전파방해기 등을 출격시킨다는 작전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단호한 입장은 후세인이 사찰팀의 활동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빠르면 내주중에 가시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후세인의 대응책과 선택/사찰타협안 제시 등 시간벌기 작전 구사/“휴전협정 조건 대부분 수용” 강변 미국을 비롯한 영국·프랑스등 유엔안보리 국가들이 이라크에 대한 무력제재를 위한 발빠른 수순을 밟고있는 가운데 결전을 앞둔 사담 후세인대통령의 대응여부가 주목되고 있다.후세인은 무얼 믿고 유엔 무기사찰팀의 농무부청사 사찰을 거부하는가.단순히 부시 미대통령에 대한 후세인의 「자존심」때문인가,아니면 군사행동에 곤혹스러워하는 미국의 입장을 읽은 탓인지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이번 사태를 보는 이라크의 시각은 지난 91년2월 걸프전이 끝난이래 종전에 따른 의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엔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지켰다는 점에서 서방측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다.이라크는 이번 농무부청사 사찰단을 제외하고 40개의 유엔 무기사찰단이 그동안 이라크 현지에서 아무문제없이 활동하면서 5백개소를 수색했다고 주장하고 대체로 사찰단에 협조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특히 이라크는 다량의 화학및 탄도무기와 소량의 핵및 세균무기용 물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이런 무기의 생산계획과 공장도 밝힌바 있다.또한 보유가 금지된 무기·시설의 파괴및 주요 핵연구시설 파괴를 허용했고 헬리콥터와 U-2기에 의한 사찰단의 감시비행을 격렬한 항의끝에 동의했다. 인권문제와 관련,이라크는 1년여동안 유엔경비병 5백명과 유엔직원 5백명이 쿠르드족이 장악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지방과 남부의 시아파 회교도지역에서 인도적 활동과 식량분배에 종사하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이라크는 미국등의 내정간섭에 가까운 요구조건을 수용했는데도 불구,패자를 끝까지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이라크측의 이 전략은 사정이 그렇게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수도 바그다드 상공에 대공포의 섬광이 난무하는 다국적군의 초토화전략이 또다시 재현되는게 두렵기 때문이다.아랍세계의 맹주를 꿈꾸며 지난번에 시도한 무조건「버티기 전략」은 국내정세 변화로 무모한 인명희생만 따랐을 뿐이다.따라서 미국도 군사행동을 주저할수 밖에 없으리라는 판단하에 후세인의 체면도 살리고 우선 시간을 벌자는게 이라크측의 계산인 것같다. 이와관련,안바리 유엔 주재 이라크대사는 24일 본국정부가 농업부청사 사찰과 관련한 타협안에 대해 사찰단의 규모축소를 포함한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할것으로 보인다고 밝혀 주목되고 있다.앞서 빈 소재 유엔사무소에 주재하는 라힘 알 키탈 이라크대사가 오스트리아나 스위스같은 중립국전문가로 사찰단이 구성될 경우 이들의 농업부청사 출입을 허용하겠다고 한 발언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이같은 일련의 발언들은 이라크의 사찰거부로 야기된 미국을 위시한 서방측의 군사공격 가능성을 피하려는 고육지책으로 보여 향후 이라크측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42년이 지난 「그날」아침에/이형근

    6·25전쟁 3년1개월은 평생을 군인으로 일관한 나에게는 한마디로 치욕적인 전쟁이었다. 군인이 싸우면 이기든지 지든지 둘중에 승부를 내야 하는데 4백만명의 동족이 숨지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나고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것은 수치스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39년이 지난 지금에도 휴전선일대에는 남·북한 1백여만명의 장병들이 대치하고 있다. 1백55마일 휴전선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긴 휴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장병과 무기가 집결되어 있다. 소련이 와해되고 동유럽권이 붕괴되는 등 세계사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으나 한반도 안보상황만은 변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아직도 계속중이며 진행중이다. 통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상대방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이 진정으로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은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핵개발과 무력증강을 계속하고 있다.북한은 외교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됐는데도 지난 5월22일에는 북한의 무장침투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해 왔으며 북한은 유엔군측의 군사정전위원회 개최제의도 묵살하고 있다. 휴전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군사정전위원회 기능이 1년이상이나 정지되어 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북한 위정자들의 대남적화통일전략은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들의 성급한 통일논의와 함께 과격한 시위에서 인공기가 등장하는 사실을 보고 전쟁을 지휘한 군인의 입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6·25 전쟁기간동안에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군번도 없이 종군,7만여명이 죽어갔다. 42년전 낙동강 전선에서 이름없이 숨져간 수많은 학도병들의 애국심이나 현재의 대학생들의 애국심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를 위해 숨져간 학생들과 적화통일도 좋다는식의 감상주의적인 통일론을 펴는 학생들과의 의식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통일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적화통일도 좋다는 식의 성급한 생각은 필경 우리 모두를 공산주의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소련과 동유럽국가들도 버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는 북한에서도 멀지않아 붕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 6·25당시 우리 국군의 병력은 9만5천명밖에 안되는데다 소총과 수류탄도 별로 없었다. 북한은 만주와 소련에서 전투경험을 한 직업군인들을 중심으로한 병력 20만명과 전차 2백42대,포 7백28문,전투기 2백11대로 국군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우세였다. 당시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탱크는 공산권이 가진 가장 우수한 탱크였다. 장갑능력도 뛰어나고 기동력도 우수하며 소형이어서 좁은 길이나 험준한 산악지역에서도 훌륭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가진 중기라고는 고작 M8장갑차 27대뿐이었다. 6·25 발발당시 대전의 2사단장이었던 나는 이날 상오 육군본부의 김백일참모차장으로부터 북한이 38선을 돌파,남침했으니 부대를 의정부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2사단은 사단본부만 대전에 있고 청주·천안·온양에 1개연대씩 주둔하고 있는 향토사단이었다. 사단본부 병력을 인솔하고 노량진을 거쳐 용산에 도착해보니 국군은 이미 패주중이고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상황이었다. 부대를 잃은 패잔병과 지휘소를 잃은 부대장,고향을 잃은 실향민,부모와 자식을 잃은 고아와 가장들의 비참한 행렬이 이어졌다.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후방의 병력을 전선에 투입한다면 계속해서 먹힐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육본에서는 무기도 장비도 없이 후방의 병력동원에만 열중했다. 전선에 병력이 투입되면 궤멸되어 없어지고 다시 병력을 모으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사이 대전·대구까지 밀리게 됐다. 50년 9월은 내 생애에서 가장 비참한 달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전쟁중 영양실조로 숨지고 막내동생인 이상근준장이 청송전투에서 전사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됐다. 50년 10월에 초대 3군단장에 취임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에 이어 38선을 돌파,북진대열에 참가하게 됐다. 3년전쟁의 결과는 국토의 초토화와 폐허뿐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방력과 경제력 두 가지 힘을 길러야한다.
  • 러시아연 정정 급속 악화/곳곳 유혈분규

    ◎아르메군,아제르공 마을 초토화/옐친 비판 확산속 프라우다지도 가세 【모스크바 AFP 로이터 타스 연합】러시아 곳곳에서 수구세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역내 체체노­잉구슈 자치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내 나고르노­카라바흐자치주 등 민족 분규 「화약고」에서도 10일 유혈 사태가 발생,구소련 정정 불안이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고 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공화국간의 민족분규는 11일 아르메니아 군부대들이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한 마을을 점령,초토화시킴으로써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국연합(CIS)의 채널 1TV는 이날 나고르노 카라바흐내 호드잘린 지역의 말리베일리 마을이 아르메니아군 소속 게릴라들에게 함락돼 초토화됐으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부상자들은 치료조차 받지못한 채 버려져 있으며 말리베일리 마을은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됐다고 전했다. 한편 이타르 타스통신은 10일 키르찬 마을 주변에서 양측간의 전투가 하루종일계속돼 최소한 24명의 아르메니아인 주민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주말 역내 주둔 구소련군이 습격당해 수천정의 총기와 상당량의 탄약을 빼앗긴 사건이 발생한 체체노­잉구슈 자치공의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10일 긴급포고령을 통해 11일(현지시간)을 기해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자치공 주둔 구소련군 기지에 대한 기습이 끊이지 않자 지난 9일 자치공 수도 그로즈니에 배치된 부대 일부를 긴급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지난 주말 모스크바 및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러시아내 12개 이상지역에서 보리스 옐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데 이어 10일 구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도 옐친 비판에 가세하는 등 수구세의 급속한 확산이 완연하다. 현사태와 관련,러시아연방 최고회의(상설의회)지도부는 10일 보리스옐친 대통령을 축출할 권한도 갖고 있는 최고 입법기구인 인민대표대회를 오는 4월20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고 ITAR­타스통신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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