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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

    어린이들이 눈물을 줄줄 흘린다.옛날 신부출같은 현하지변으로 「할아버지」라는 얘기꾼은 「미제 승냥이」의 「만행사」를 그럴싸하게 엮어 나가고.5일 밤 「남북의 창」프로에 방영된 북한의 텔레비전 필름이다.◆얘기꾼의 얘기1.1866년 「미제 승냥이」들이 셔먼호로 대동강을 거슬러 침략해 온다.이를 몰살시킨 사람은 「위대한 수령의 할아버지」.그후 「침략의 앞잡이」선교사들이 몰려온다.한 선교사가 제집 정원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먹은 소년의 이마에 초산으로 「도둑」이란 글씨를 새긴다.비명을 지르는 소년.분노한 동네 사람들이 쳐들어가자 그는 도망가고.그 「승냥이」들이 6·25전쟁을 일으켜 부녀자·아이 가리지않고 죽였다는 내용이다.◆셔먼호 사건은 사실이다.그러나 몰살을 지휘한 사람은 당시 평안감사였던 박령수라는 것이 정사의 기록.그 거짓 대목은 김일가 우상화를 위한 왜곡이라 치자.그러나 어린이들이 눈물짜는 것까지 「연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남녘 어른의 눈에선 눈물이 난다.「할아버지」질문에 「정답」을 합창하는 것에서도「눈물」이 「연기」임은 드러나는 터.고위급 회담으로 우리 대표들이 북에 갔을 때도 보았던 그 「눈물」이다.어린이들을 「살아있는 기계」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그들은 백지장 같은 어린이의 의식위에 그들의 「의도」를 입력시켜 나간다.「원쑤들」에의 살기 띤 적개심을 곁들여서.그를 위하여 「할아버지」는 손자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놈」자도 쓰고 있지 않던가.선택된 유년시절의 김현희씨도 그랬던 것이리라.하지만 속은 걸 알았을 때 적개심은 부메랑이 됨을 아는지 모르는지.◆북의 필름은 남녘 사람들에겐 코미디로 비친다.하지만 슬픈 코미디.눈물 나오는 코미디가 명작이라고는 하지만….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모든 자활보호·의료부조자/의보부담률 20%로

    ◎보사부,7월부터 낮추기로 오는 7월부터 생활보호대상자 가운데 자활보호자와 직할시 이상 대도시의 의료부조자의 본인부담진료비가 20%로 낮아진다. 보사부는 6일 그동안 진료비 총액의 40%를 내던 대도시 의료부조자와 30%를 내던 다른 지역 부조자,역시 30%를 내던 대도시 자활보호자들의 진료비부담률을 모두 20%로 하향조정하는 내용의 의료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동안에는 대도시를 제외한 자활보호자들만 20% 부담혜택을 받았었다. 개정안은 이와 함께 직장,공무원,교원 등 의료보험가입자에게 지급하고 있는 자가분만비를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도 똑같이 주기로 했다. 현재 의료보험자의 자가분만비는 2박3일을 기준으로 초산시 5만4백원,중산부터는 4만6천4백원씩이다. 또 생활보호자의 경우 지금까지 14일로 제한했던 입원진료기간은 30일로 늘었으며 정신질환은 90일까지 입원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 “왼손잡이 평균수명 9∼10년 짧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코너)

    ◎미·가 두 심리학자 충격보고/기계등 오른손 위주… 상대적 불리/돌발사태 만나면 사고사율 높아/예술·지적 분야엔 오히려 우월 왼손잡이의 수명은 오른손잡이에 비해 평균 9년이 짧다고 일단의 미국 심리학자들이 학계에 보고,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왼손잡이가 행태 및 심리적 면에서 여러 가지 부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많이 입증된 사실이다. 미 캘리포니아주 2개 군내 사망증명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이번 연구는 왼손잡이의 이런 성향이 평균수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시사했다. 몇가지 질병의 경우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보다 감염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왼손잡이는 조산아와 정신박약자 가운데 유별나게 많고,또한 큰 사고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아주 많다. 이러한 차이들로 인해 최근 일부 학자들은 전체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왼손잡이들이 오른손잡이보다 약간 단명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됐다. 그러나 최근 미 의학전문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 발표된 캘리포니아 연구결과는 엄청난 수명차를 밝혀냄으로써 연구담당자는 물론 다른 많은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 연구를 수행한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심리학자 스탠리 커린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다이앤 핼펀은 『수명차가 2년 정도라면 몰라도 이렇게 클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결과가 너무 의외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 전에 또다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학자는 3년 전에도 야구선수를 상대로 실시한 연구에서 왼손잡이 선수의 수명이 오른손잡이보다 평균 9개월 짧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었다. 커린과 핼펀의 이번 연구는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 지역에서 무작위르 추출한 1천명의 사망증명서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두 학자는 사망자의 친척들을 일일이 접촉,고인이 생전에 어느 손을 잘 썼는지를 조사했다.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고 공은 왼손으로 던지는 사람의 경우 왼손잡이로 분류했다. 조사결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른손잡이 남녀의 수명은75세였으나 왼손잡이는 66세로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만 보면 오른손잡이의 평균 수명은 72.3세,왼손잡이 62.3세로 10년이나 차이가 났다. 커린과 핼펀은 몇가지 다른 근거의 제시를 통해 그들의 왼손잡이 단명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는 표본조사한 왼손잡이의 사인 가운데 7.9%가 사고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른손잡이의 사고사율 1.5%에 비해 다섯 배가 많은 것으로써 오른손잡이 위주로 설계된 기술세계에서 왼손잡이의 높은 생활위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왼손잡이 운전은 위험한 것이 명백하다. 갑작스런 위험에 부딪쳤을 때 오른손잡이들은 반사적으로 왼팔을 높이 쳐들고 오른팔은 낮게 든 채 두 팔을 교차시켜 얼굴을 가린다. 운전중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자동차는 시계방향으로 돌거나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피해 인도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왼손잡이의 경우 이와 반대되는 반사현상으로 인해 운전중인 차량을 마주 오는 차량 쪽으로 선회시키기가 일쑤다. 왼손잡이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이론은 좀 복잡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왼손잡이 가운데 일부만이 천성적이고,나머지는 유전적으로 오른손잡이였는데 태아나 출생시 또는 어린 시절에 뇌 손상으로 인해 왼손잡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 주장에 따르면 자궁내에 남성호르몬이 이례적으로 많을 경우 왼손잡이로 바뀐다고 본다. 다른 학설들은 왼손잡이를 출생 스트레스에 연계시키고 있다. 한 표본조사에 의하면 출생시 평균체중에 미달한 어린이의 54%가 왼손잡이였다. 반면에 체중이 정상 또는 정상 이상의 어린이 가운데 왼손잡이는 8%에 불과했다. 또다른 연구에 따르면 조산 가운데 63%가 왼손잡이였고,혈압이 높은 여인이 왼손잡이를 낳는 경우가 많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초산아와 나이가 많은 여인이 낳은 어린이 가운데 왼손잡이가 훨씬 많았다. 이 두 경우 모두 출생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왼손잡이는 유아의 신경발달이 교란된 표시라는 것이 이 두 학설의 주장이다. 그러나 왼손잡이를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병리학적인 왼손잡이는 예술과 지적분야에서 아주 훌륭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조숙아도 많은 편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SAT(대학진학적성검사)에서 왼손잡이가 7백점 이상을 받는 비율은 일반인에 비해 2배가 많다.
  • 고르비,강경파 격렬 비난/“정치적 고립 자초” 결별 시사

    ◎경제회생책 곧 발표할듯 【모스크바 AP AFP 연합】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26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를 당서기장직에서 축출하려다 실패한 강경파들을 격렬히 비난한 것으로 당기관지 프라우다와 관영 타스통신의 27일자 보도들이 전했다. 이날 연설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공산당이 정치적으로 점점 고립될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경고하고 전날 그를 당서기장직에서 축출하려 한 강경파들의 시도를 『무책임한 것』이라고 공격한 것으로 이들 언론들은 보도했다. 프라우다에 따르면 그는 이 연설에서 『당기구가 당의 내부문제 해결에는 독점적으로 관여하면서도 정치의 주요 전개에서는 소외될』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는 한편 공산당 엘리트들에게 『당이 위기타개 대책의 실행과정에 능동적인 세력으로서 그 역량을 과시하는 것을 돕는 데 전념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 계속 분노를 표시한 것은 그가 최근 연방산하 15개 공화국 가운데 9개 공화국지도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마련한 「위기타개」 대책이 보여주듯 강경파들과의 결별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파업을 중단시키고 기초산업과 소비재 부문에서의 생산량을 회복시키기 위해 빠르면 내주중에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 빙초산 마신 40대 여인/병원 3곳 돌다 숨져

    29일 상오2시쯤 서울 성동구 중곡1동 248에 세든 이명심씨(42ㆍ여ㆍ식당종업원)가 식용빙초산을 마신뒤 쓰러져 가족들에 의해 인근 건국대부속 민중병원ㆍ한양대 병원과 혜민병원 등 3곳을 옮겨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숨졌다. 이씨의 맏아들 김모군(18ㆍ무직)은 『이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던중 어머니가 가슴이 답답하다며 물에 빙초산을 타 마신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 중국 강경파 입지강화/이붕,긴축경제 강조

    【홍콩=우홍제특파원】 중국의 당기관지 인민일보는 9일 중앙계획 및 긴축경제 운용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붕총리의 연설문을 전재하고 지나친 고도성장정책을 경고하는 논평을 했다. 이총리는 『현재 국민들은 종전보다 물가가 안정돼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중국 당국은 안정을 저해하는 맹목적인 발전은 추구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경제특구등의 이름으로 된 개발지역을 늘리거나 시장경제원리를 시험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으며 농업발전과 국가기초산업 건설에 정책집행의 역점을 둘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이총리의 연설은 이미 지난 8월2일 전국공업생산공작회의에서 했던 것이나 인민일보가 뒤늦게 전문을 게재한 것은 평소 개방ㆍ개혁을 반대해 오던 이총리등 강경 보수파의 당내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 한­말련,관세율 점진 인하키로/양국 통상장관 합의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양국간의 교역확대를 위해 관세율인하등 무역장벽규제를 점진적으로 없애나가기로 했다. 박필수 상공부장관과 라피다 말레이시아 상공부장관은 26일 하오 콸라룸푸르에서 제3차 한ㆍ말레이시아 통상장관회담을 갖고 양국간 교역의 확대균형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높은 관세율을 점진적으로 낮추고 수입허가제도등을 완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에 앞서 박장관은 림 켕야크 기초산업부장관과 가파르 바바 부수상을 차례로 예방,양국간 통상현안과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진전내용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초산누출 사고원인 조사키로/울산 환경지소

    【울산=이용호기자】 부산지방환경청 울산출장소는 23일 선경인더스트리에서 22일 발생한 초산증기 누출사고가 텔레프탈린산공장 반응기에서 원료를 공급하는 펌프가 파손돼 일어난 것으로 보고 전담반을 편성,정확한 사고원인 조사에 나섰다. 환경청 울산출장소는 지난 4월초에도 선경인더스트리 울산공장에서 유해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했던 점을 감안,이번 사건에 회사측의 과실이 드러나면 고발조치키로 했다. 한편 울산시 남구 황성동 성외ㆍ세죽 등 초산증기 피해지역 주민들은 이 회사에서의 잇따른 유해가스 누출로 『인체와 농작물이 피해를 입어 불안해 살수없다』면서 관계기관에 보다 철저한 지도감독과 회사측의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 공장서 초산 누출… 주민 질식 소동/울산 선경인더스트리사

    ◎연결 파이프 고장,10분간 새 나와/3개 마을 2천여명 구토ㆍ두통/40여명 치료… 2명은 실명위기/바람타고 독소확산… 인근 1만여평 농작물 피해 【울산=이용호기자】 22일 하오2시10분쯤 경남 울산시 황성동 울산공단내 폴리에스터 생산공장인 ㈜선경인더스트리(대표 이승동) TPA공장에서 초산파이프 밸브가 고장나 초산이 10여분동안 새어 나오는 바람에 이 마을 감용자씨(28ㆍ여) 등 2명이 질식,중독돼 시내 동강병원 등에 입원하고 박상년씨(77ㆍ여) 등 34명이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또 이날 사고로 황성동 성외부락을 비롯한 성암ㆍ세죽 등 3개부락 4백94가구 주민 2천80여명이 심한 구토와 두통,눈을 뜰 수 없는 중독증세를 보였으며 주민들 일부는 회사로 몰려가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피해주민 박씨에 따르면 마을에서 2백여m 떨어진 이 공장에서 새어나온 초산으로 숨이 막히고 심한 재채기와 함께 눈이 따가와지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며 마을주민 36명이 같은 증세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증세가 가장 심해 의식을잃고 입원중인 감씨 등 2명은 눈동자에 충혈이 생기는 등 심한 상처를 입어 실명될 위기에 놓여있다. 이날 사고는 폴리에스터원료인 TPA 공장으로 연결된 초산파이프의 밸브 포인트가 고장이 나 일어난 것으로 회사측은 밝혔다. 회사측은 『밸브 포인트고장으로 새어나온 초산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마을 일대를 덮은것 같다』고 말하고 확실한 원인을 조사,피해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입원중인 동강병원의사 김모씨는 『환자들이 속이 메스꺼우며 구토증세와 함께 가슴이 답답하다고 고통을 호소해 오고 있다』며 『초산의 일종인 TPA가 새어 나오면서 눈에 들어가 각막궤양증세를 일으킨것 같다』고 말했다. 초산은 파이프속에서 액체이나 밖으로 새어나오면 기체로 변해 액체상태에서 보다 더 큰 피해를 일으킨다. 한편 이날 피해가 심했던 성외부락 주민들은 마을앞 1만여평의 밭에 심은 고추ㆍ참깨 등 농작물도 잎이 누렇게 말라 죽어 1억원상당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 수입돼지고기 통조림/관세율 60%로 인상

    수입돼지고기 통조림의 관세율이 현행 30%에서 60%로 인상되는데 반해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통조림캔의 관세율은 10%로 인하된다. 19일 상공부에 따르면 수입급증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국내산 돼지고기통조림 등 4개품목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통조림의 경우 관세율을 60%로 인상하고 나머지 초산에틸,스테아린산 등에 대해서는 연차적으로 국산품의 구매확대를 권장키로 했다. 만일 이들 품목에 대한 수입동향 분석결과,시행되지 않을 경우 한시적으로 수입물량을 제한 할 방침이다. 상공부의 이같은 조치는 한국육가공협회 등 관련 단체 및 업체들로부터 제기된 산업피해구제신청에 대해 상공부무역위원회가 수입급증으로 인해 실질적 피해가 있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 티타늄공장 설립 인가/재무부/자체매립장 확보 조건

    2년을 넘게 끌어온 미국 듀퐁사의 이산화티타늄 제조를 위한 공장설립이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재무부는 18일 외자사업심사위원회를 열어 듀퐁사가 7천7백60만 달러를 들여 한양화학과 합작으로 국내에 건설키로 한 이산화티타늄공장 설립 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골재로 사용하겠다는 듀퐁사의 신청은 불허하고 반드시 자체 매립장을 확보해서 묻어버려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는 해당 폐기물이 환경에 전혀 무해하다고 입증할 수 없다는 국내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외심위는 이밖에 영국의 BP케미컬이 빙초산과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 삼성종합화학과 합작으로 세운 삼성 BP화학에 1천3백70만 달러를 증액투자 하는것 등 3건의 외국인 투자도 함께 인가했다.
  • 초산에틸등 수입 급증/국내산업 실질적 피해/무역위 판정

    상공부무역위원회는 4일 집성운모절연제품과 스테아린산 및 초산에틸의 수입이 최근 급격하게 늘어남으로써 국산제품의 생산이 줄어들고 가격이 떨어지는등 국내 산업이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판정했다. 이에 따라 무역위원회는 앞으로 60일 이내에 이들 품목에 대한 수입수량 규제나 관세인상 등의 국내산업 보호방안을 마련,상공부에 건의하게 된다. 무역위원회의 조사결과 가전제품과 중전기기의 내열ㆍ절연에 사용되는 핵심부품인 집성운모절연제품의 경우 86년부터 3년간 해마다 수입이 평균 58%씩 증가했으며 89년에는 수입품의 시장점유율이 73%까지 치솟아 지난해 1월부터 이 제품의 생산을 개시한 대한마이카㈜의 평균가동률이 41%에 머물고 자본금의 절반이 넘는 손실을 기록하는등 도산위기에 빠진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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