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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가 길의 선물… 집콕 피로를 날리다

    십자가 길의 선물… 집콕 피로를 날리다

    보통의 풍경이 사라진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종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는 것에 고마워하라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한 시기다. 물리적 방역 못지않게 심리적 방역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에 차분히 돌아볼 여행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명소로 떠오른 곳이 많단다.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 않아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좀더 솔직해지자면, 당진을 찾은 게 사실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여태 코로나19 청정지역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게 더 큰 이유였다.25일 현재 당진에는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실내와 달리 야외에서만큼은 시원하게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 아직 바이러스의 기세가 등등한 만큼 당장 다녀오시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상황이 차분히 정리된 뒤 ‘집콕’에서 쌓인 먼지들을 털어낼 겸 발걸음하는 것도 좋겠다.●김대건 신부 태어난 ‘솔뫼성지’엔 교황의 흔적 당진엔 천주교 성지가 두 곳이다. 솔뫼성지와 신리성지다. 둘 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주요 지역으로 꼽히는 합덕면에 있다. 이름값으로는 솔뫼성지가 단연 앞선다. 솔뫼성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내년이면 벌써 그의 탄생 200주년. 그를 포함해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배출됐다고 한다. 2014년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국내 천주교 관련 유적 중 최초로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529호)가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일 터다. 솔뫼는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란 뜻이다. 이름처럼 이리저리 휜 소나무가 그윽한 풍경을 선사한다. 성지 안에 ‘십자가의 길’, 기념관과 성당, 수녀원, 김대건 신부 생가 등이 있다. 다만 건물 내부는 코로나19 탓에 공개되지 않는다.●조선의 순교자가 묻힌 ‘신리성지’는 SNS 핫플 신리성지는 최근 SNS를 타고 급속히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신리성지는 조선 후기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 때문에 로마시대 지하교회인 카타콤바에 비유해 ‘한국의 카타콤바’라 곧잘 불린다. 제5대 조선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가 은거하며 조선천주교사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논산 강경에 첫발을 내디딘 후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동안 그가 수집한 자료와 순교자들의 행적은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됐고,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리성지가 명소 반열에 오르게 된 건 종교적인 이유보다 여행지로서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신리성지는 사방이 탁 트였다. 성당에 이르는 길 주변으로는 연못과 잔디밭이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작은 경당이 조성돼 있다. 평평한 잔디밭 끝자락의 가장 높은 곳엔 순교미술관이 우뚝 솟았다. 십자가를 제외하면 장식이라고는 없는, 소박하고 무뚝뚝한 건물이다. 잘 정돈된 잔디밭과 소박한 순교미술관이 어우러져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생사진 건지려는 청춘들의 애정행각은 좀… 순교미술관 안엔 한국 천주교 순교의 역사를 기록한 그림들이 전시됐다. 순교미술관 꼭대기에 오르면 국내에선 드물게 지평선을 볼 수 있다. 드넓은 내포평야가 선사하는 시원한 풍경 덕에 온몸에 달라붙은 바이러스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한데 빼어난 풍경과 달리 교회 측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죽은 이들이 묻힌 곳이라는 교회의 설명에도 ‘인생사진’을 얻으려는 연인들이 성지 곳곳에서 과감한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한 합덕성당도 둘러볼 만하다. 1929년 세워진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정한 외양이 인상적이다. KBS 드라마 ‘단 하나의 사랑’ 촬영지로 쓰였다고 한다.●일출·일몰이 장관인 왜목마을의 명물 ‘새빛왜목’ 바닷가 쪽에서는 왜목마을을 찾을 만하다. 한자리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갯마을이다. 저물녘 풍경도 곱지만 해뜰녘 풍경은 더 빼어나다. 동해의 힘차고 장엄한 일출과 달리 서해 특유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해돋이 장면과 마주할 수 있다. 왜목마을의 명물은 ‘새빛왜목’이다.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이다. 저 유명한 경북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8.5m)보다 세 배 이상 높다. 날아오르는 왜가리의 모습을 표현한 이 조형물은 스테인리스 스틸판으로 이뤄졌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판에는 외부의 색이 그대로 담긴다. 이 덕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야간에는 조형물 내부의 조명이 켜져 은은한 빛을 낸다. 대호방조제 너머의 도비도는 섬이었다가 뭍이 된 곳이다. 대·소난지도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철엔 잔잔한 물 위를 떠다니는 다양한 철새들과 만날 수 있다.오래된 시간의 선물 … 상실의 위로를 받다 면천읍성 일대는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다. 한때 버려졌던 옛집들이 이야기가 있는 집들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 이제 막 주민 중심의 문화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책방에서 책을 읽거나 작은 미술관, 잡화점 등을 기웃대며 나른한 한때를 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오래된 자전거포 건물서 재탄생… 발길 붙잡는 아늑한 책방·카페 면천읍성 일대를 어슬렁대다 보면 귀가 따갑게 듣는 이야기가 있다. 면천(옛 면주)이 충청도의 5주 가운데 하나였다는 거다. 충북 청주와 충주, 이웃한 홍주(현 홍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큰 도읍이었다는, 이른바 ‘라떼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다 어느 시기엔가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게 됐고, 이후 면주(면천) 일대는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걷게 됐을 것이다. 요즘 면천읍성 일대는 다르다. 하루 종일 머물러도 전혀 심심하지 않은 곳이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주민들이 이끌고 있다. 옛 건물을 새로 꾸민 문화공간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한적하기 짝이 없던 마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면천 여정의 들머리는 면천읍성 남문이다. 성을 쌓은 이가 자신의 이름을 벽에 남긴 각자돌이 확인돼 지난해 ‘500년 전 공사 실명제’로 잠시 화제가 됐던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면천읍성이 처음 세워진 건 1439년(세종 21년)이다.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은 긴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시나브로 사라졌고, 지금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2025년쯤 발굴 작업과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 일대의 모습이 제법 번듯하게 바뀌지 싶다.읍성 남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면 오래전부터 면천 사람들이 살아왔던 동네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숱한 열사들을 길러냈던 100여년 역사의 면천초등학교, 옛 면사무소 등은 이미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에 객사 등 옛 관아 건물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옛 면천초등학교 바로 앞은 책방 ‘오래된 미래’다. 오래전 자전거포였던 건물이 아늑한 책방으로 새로 태어났다. 새 책도 있고, 헌책도 판다. 2층은 일종의 북카페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다. 책방 이름은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동명의 책에서 따왔다고 한다.●서까래·봉놋방 등 탁배기 한 잔의 추억 고스란히 간직한 잡화점 책방 바로 옆은 잡화점 ‘진달래 상회’다. 화가인 주인장이 이런저런 액세서리들을 팔고 있다. 이 집 역시 책방과 같은 가치를 지키고 공유하려는 곳이다. 잡화점의 전신은 ‘희망집’이란 대폿집이다. 오래전엔 탁배기 한 잔 걸치려는 술꾼들의 발걸음이 무시로 이어졌을 터. 당시 ‘주막’이나 다름없었을 봉놋방, 서까래 등 건물 내부는 대부분 예전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옛 면천초등학교 한구석엔 거대한 노거수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1000년을 넘어선다는 면천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51호)다. 나무 바로 옆은 ‘영랑효공원’. 둘 다 복지겸 장군의 딸, 영랑에 대한 전설이 담겼다. 줄거리야 흔히 듣던 여느 전설들과 다르지 않다. 면천에 살던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렸고, 효녀 영랑이 백방으로 약을 찾아다녔고, 산신령이 나타나 신묘한 처방을 내려줬다는 얼개다. 다만 현 영랑효공원 안쪽의 안샘의 물로 두견주(진달래술)를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그곳에 은행나무를 심으면 아버지의 병이 낫는다는 산신령의 가르침에선 어딘가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스토리텔링한 듯한 ‘합리적인 의심’도 든다. 미술관에서 작은 언덕을 넘으면 골정지다. 1797~1800년 면천군수로 있던 연암 박지원이 축조했다는 저수지다. 물 위엔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가지붕 정자’라는 뜻의 건곤일초정이 떠 있다. 이 정자 역시 골정지 축조 당시 연암이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아미미술관·아그로랜드 목장·놀이공원 등 인생사진 성지도 이제 새로 떠오르는 여행지 몇 곳 덧붙이자. 아미미술관은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이다. SNS의 성지라는 당진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다. 보통 오전에 찾아야 창문으로 넘어오는 햇살 등을 배경 삼아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아그로랜드(옛 태신목장)는 당진과 예산에 걸쳐 있는 대규모 목장이다. 너른 보리밭과 벚나무길, 메타세쿼이아, 트랙터 열차 등의 목장풍경과 몇몇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좋다. 합덕에 있는 카페 피어라, 서해대교 건너 송악에 있는 해어름 카페 등도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꼽힌다. 1970년대 건설된 삽교천방조제와 대호방조제, 석문방조제 등 3개의 방조제를 잇는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는 맛도 시원하다. 삽교천방조제 인근의 놀이공원도 요즘 ‘핫한’ 곳이다. 저녁때 조명이 켜진 놀이기구와 함께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이 제법 많다. 글 사진 당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여행수첩 -당진은 해안과 내륙의 관광지 간 거리가 멀다. 미리 돌아볼 구역을 정해야 알뜰하게 시간을 쓸 수 있다. 왜목마을, 도비도 등은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 면천읍성 일대는 당진영덕고속도로 면천나들목, 신리성지 등은 합덕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낫다. -면천읍성 일대엔 콩국수집이 유난히 많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른라 ‘원조’라 할 만한 집도 사라진 상태다. 그런데도 점심 무렵이면 줄을 서야 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보통 5월쯤 날씨가 더워지고 주민들이 ‘은근한 콩국수 개시 압력’을 넣기 시작할 무렵 문을 연 뒤 가을에 문을 닫는다. 일년 내내 여는 집도 있는데, 추운 계절엔 콩국수 대신 칼국수를 판다. ‘에이스식당’은 쑥을 곁들여 만든 면이 특징이다. 열무김치 때문에 간다는 사람이 있을 만큼 김치 맛도 좋다. 당일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면 일찍 문을 닫는다. 초원콩국수는 검은콩, 면천곱창콩국수(상호와 달리 곱창은 없다)는 메주콩으로 각각 맛을 낸다고 한다. 코로나19 탓에 음식점을 찾을 때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염두에 둬야 한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는 피하길 권한다. -이맘때 서해바다에선 실치가 난다. 밑반찬으로 흔히 쓰이는 뱅어포의 주인공이 바로 실치다. 실치는 주로 무침회로 먹는다. 장고항이 실치로 유명한 곳. 요즘 이 일대가 대대적인 공사 중이어서 예전만큼 맛집들이 늘어서 있지는 않다. 몇몇 횟집에서 실치 맛은 볼 수 있다.
  • 달성 하목정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달성 하목정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달성 하목정’이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된 ‘달성 하목정’은 낙포 이종문(1566~1638)이 1604년경에 건립한 정자형 별당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정면 1칸, 측면 4칸의 방들이 서로 붙어서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독특한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커다란 사랑대청을 가지면서도 사랑윗방 앞에 개인적인 공간인 누마루를 설치, 조선 중·후기 별당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가구구성은 5량과 3량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가구의 구성은 두꺼운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건물고를 높여 건물이 둔중해 보이지 않으면서 당당한 기품과 함께 시원한 공간감을 준다. 중대공과 대공을 포대공으로 꾸미는 등 고급 장식과 치장을 곁들이면서도 화려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다. 사랑윗방의 정면 창호, 대청 측면 부분, 대청 배면의 어칸 부분의 창 윗틀에서 영쌍창의 홈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영쌍창의 모습은 17세기 이전의 사랑방이나 안방의 전면 창호 또는 대청의 창에서 많이 쓰이던 것으로 18세기에서도 일부 이어져왔던 수법이며 건축의 연대를 파악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와가는 지붕의 모습을 날렵하게 보이기 위하여 처마 모서리를 뾰족하게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목정은 초가지붕의 모습과 같이 둥글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수법은 청도 선암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79호)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처마구성 방식이다. 김문오 달성군수는 “새로 지정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우선 소유자와 협의하여 보존관리 대책을 수립하고, 장기적으로는 군 홍보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포토] ‘겨울나기 준비’ 초가지붕 이엉 얹기

    [포토] ‘겨울나기 준비’ 초가지붕 이엉 얹기

    4일 경북 경주시 양동민속마을에서 초가지붕에 이엉 잇기 작업이 한창이다. 양동민속 마을에는 약 200여 채의 초가집 있으며 내년 1월까지 이엉 잇기 작업이 계속된다. 2019.12.4 뉴스1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물로야 뱅뱅 돌아진 섬에 - 제주 성읍 민속마을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물로야 뱅뱅 돌아진 섬에 - 제주 성읍 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 #제주도_삶의_원형 “여자로 사느니 쉐로 나주” 제주 속담이다. 뜻을 알면 슬프다.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보다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다. 숨구멍 뚫린 현무암 돌덩이만 가득한 척박한 땅, 바람만 불면 풀풀 하늘로 날리는 화산회토에서 논농사는 애당초 꿈도 꾸지 못한다. 보리, 메밀, 조 농사를 지어야 했고, 물숨 먹어가며 전복, 해삼 캐는 일은 전부 여자의 몫이었다.그러다보니 제주의 집들은 살림살이 맡은 여자들의 힘든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덜(아들)이 아니라 지집아이(여자아이)로 태어나면 비바리(처녀)가 되어 시집가고 아주망(아주머니)이 되어서 할망(할머니)으로 늙어도 물 긷는 항아리인 물허벅을 놓지 못한다. 물질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육지의 아궁이같은 화로모양의 ‘부섭’에 불을 붙이고, ‘돌방에’에 곡식을 찧어 ‘고래’로 보리를 갈아 껍질을 떼내어 가족들을 먹였다. 물이 귀한 화산섬이다 보니 부엌 입구에는 한라산 중산간부터 지고 내려온 물허벅을 놓는 자리인 ‘물팡’이 있고 항상 물이 채워진 허벅이 있어야 했다. 제주의 옛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성읍 민속마을이다.1984년에 국가민속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된 제주 성읍민속마을 시작은 이러하였다. 1423년(세종 5년) 제주도를 세 군데의 행정 구역으로 나눈다. 현재 제주시가 있는 중심은 제주목으로, 지금의 중문관광단지로 가는 서쪽은 대정현으로, 성산일출봉이 있는 동쪽은 정의현으로 구분하였는데 성읍 민속마을이 바로 정의현의 중심, 즉 도읍지였다.마을은 한창 제주 개발 바람이 지나가던 2000년대 이후에도 고스란히 옛 마을 형태를 보존하였는데 지금도 770m에 이르는 성곽을 포함하여 동헌을 비롯한 향교, 돌하르방 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제주 가옥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싼 ‘새(볏집)’가 올려진 초가지붕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해서 제주 민속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답사지이기도 하다. #여자들의땅 #올레길유래는 사실 우리나라에는 성읍처럼 이름난 민속 마을은 지역마다 있다. 경주의 양동마을, 고성의 양곡마을, 천안 아산의 외암마을, 안동의 화회마을, 영주의 무섬마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지에 있는 이들 마을들은 이리 오너라를 서너 번 외치면서 헛기침 한 두 번씩 뒷짐 지며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이다 보니 양반이나 유림이 아니고서야 대문간에 이름 석 자 감히 붙이지를 못하는 곳이 많다.하지만 성읍마을은 애당초 양반님들 에헴하며 돌아다니는 담길 뻗은 마을이 아니라 팍팍한 삶을 고스란히 살아내야 했던 제주민들의 힘든 시간이 보존된 곳이어서 더더욱 의미가 있다. 이 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 주변에서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한라산 오름에 올라 검은 돌덩이 치워가며 만든 돌랭이(밭)에 심은 곡식을 돌봐야 했다. 돌랭이에서 캐낸 구멍 숭숭 뚫린 돌들은 돌담이 되어 집집마다 밭의 경계를 이루었는데 한라산 꼭대기에서 보면 이런 밭담이 만든 올레길이 제주 전역에 9천 7백리에 이른다고 하여 흑룡만리(黑龍萬里)라고도 불렸다. 지금 외지 사람들이 그리 열광하는 우아한 올레길의 실상은 제주 아주망들이 산짐승으로부터 밭을 지키고 바람 막을 방풍용도로 쌓은 고된 노동의 흔적인 셈이니 돌덩이 하나하나 허투루 볼 일은 아니다.삶이 이러하다보니 마을에 한가로이 남아 있는 사람은 없어 성읍 민속마을에는 집집마다 ‘정주석’과 ‘정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정주석은 세 개의 구멍이 뚫린 돌로 ‘정낭’이라 불리는 통나무 세 개를 끼울 수가 있다. ‘정낭’이 하나만 걸쳐져 있으면 잠시 외출, 두 개가 걸쳐 있으면 반나절이상, 세 개 다 걸쳐져 있으면 하루 종일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지금도 그 역할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성읍 민속마을에는 사라져가는 제주의 시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방문객들에게 제주의 삶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제주 성읍민속마을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제주도 방문의 횟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 제주 역사에 인문지리학적인 관심이 있다면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마을이다 보니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29길33 - 제주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720번, 720-1번 버스를 타고 '성읍 민속 마을(성읍 1리)'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 표선에서 '표선면 사무소'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720번, 720-1번 버스를 타고 '성읍 민속 마을(성읍 1리)'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4. 특징은? - 제주의 역사를 품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성곽, 동헌, 제주 화장실인 통시, 올레길의 구조 7. 관람시 주의사항은? -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물품을 판매하려는 호객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 살펴 보자.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www.jeju.go.kr/culture/folklore/samda/showPlace/placeStone.htm?act=view&seq=60025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표선 해수욕장, 섭지코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제주는 삼다(三多)라 하여 돌과 바람, 여자가 많았고 삼무(三無)로 도둑, 대문, 거지가 없었으며 가뭄과 홍수, 태풍 등 삼재(三災)의 땅이다. 관광지로서의 제주와 고단한 삶의 흔적을 지닌 역경의 땅으로서의 제주도 함께 바라보자.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연암의 뜻이 피운 꽃

    연암의 뜻이 피운 꽃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애민정신이 깃든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1만㎡의 골정지(骨井池)에 백련, 분홍련, 노랑련 등 연꽃이 만발했다. 연암은 1797~1800년 3년간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이 연못을 만들고 안에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가지붕 정자란 뜻을 가진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을 세웠다. 연암은 면천군수 시절 정조의 명으로 애민정신이 녹아 있는 과학농서 ‘과농소초’와 토지개혁서 ‘한민명전의’를 저술하기도 했다. 당진시 제공
  • 연암의 뜻이 피운 꽃

    연암의 뜻이 피운 꽃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애민정신이 깃든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1만㎡의 골정지(骨井池)에 백련, 분홍련, 노랑련 등 연꽃이 만발했다. 연암은 1797~1800년 3년간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이 연못을 만들고 안에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가지붕 정자란 뜻을 가진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을 세웠다. 연암은 면천군수 시절 정조의 명으로 애민정신이 녹아 있는 과학농서 ‘과농소초’와 토지개혁서 ‘한민명전의’를 저술하기도 했다. 당진시 제공
  • [이호준의 시간여행] 사립문이 사라진 자리

    [이호준의 시간여행] 사립문이 사라진 자리

    옛집들이 잘 보존된 민속마을에 갔을 때였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다가 어느 초가의 기울어진 사립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오래된 시간을 밀고 나올 것 같아 쉽사리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해가 설핏 기울어도 사람의 기척은 없고, 짝을 찾지 못한 멧비둘기의 젖은 울음만 드나들 뿐이었다. 사립문…. 가만 눈을 감으면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처럼 가슴에 펄럭이는 존재다. 사립문은 문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애매했다. ‘이 안에 사람이 살고 있소’ 표시하려는 것 이상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인을 경계하겠다거나 도둑을 막아 보겠다는 의도 따위는 없었다. 생긴 것 자체가 얼마나 엉성한지, 그 틈으로 식구들이 마루에 앉아 밥 먹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여다보였다. 어디 그뿐일까. 시간이 갈수록 엉성해져서 몇 해만 지나면 벌어진 틈새로 강아지 하나쯤은 거뜬히 드나들었다. 그런 형편이니 무슨 경계고 배척이고 할 게 있었을까. 사립문은 집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베어다 엮어 놓은 문을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립짝을 달아서 만든 문’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립짝은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이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확인해도 사립이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은근히 궁금해진다. 혹시 ‘사립’(斜立ㆍ비스듬하게 섬)이란 한자어에서 온 것은 아닐까? 늘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사립문과 딱 어울리는 말이다. 혹자는 ‘싸리문’으로 적기도 하는데, 싸리문은 말 그대로 싸리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이다. 싸리가 지천이었으니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을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그랬다. 물려받은 밭 한 뙈기 없이 드난살이를 전전하다 어렵사리 오두막이라도 한 채 지어 놓고 보니, ‘내 집’이라고 어깨에 힘 한 번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이라도 제대로 있었을까. 내에서 호박돌이라도 져다 쌓으면 좋으련만 늘 일손이 달리다 보니 그마저 없는 집도 많았다. 그런 마당에 솟을대문이 어울릴까, 나무대문이 맞을까. 그래도 그냥 지나가기는 섭섭한지라 잔 나무 베어다가 잎사귀를 훑어 얽어 놓은 게 사립문이었다. 사립문을 보면 기우뚱하거나 비뚜름한 게 대개 문틀하고 어긋나 있었다. 문틀 자체가 정밀하게 짜 맞춘 게 아니라, 좀 튼실해 보이는 통나무를 세워 놓고 문짝을 엮어서 매달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집에서는 워낭(말이나 소의 목에 다는 방울)을 장식 삼아 달아 놓기도 했는데, 사람이 드나들 때만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개들이 수시로 오가고 가끔 바람도 딸랑딸랑 흔들어 놓고 도망치고는 했다. 그래 봐야 문 열고 뛰어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잠금장치도 없었다. 끼익끼익 소리 지르는 나무문이나 철문과 달라 밀면 못 이기는 척 물러날 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어디든 있을 땐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사립문이 하나 둘 사라지고 나니까 절절하게 그리운 건 무엇 때문일까. 고향이 내 고향 같지 않던 때부터였을 것이다. 초가지붕과 돌담과 사립문이 사라진 자리에 쇠대문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 고향. 열일곱 살에 집을 나가 스무 살에 파마머리로 돌아왔던, 돌아온 지 넉 달 만에 아비 모를 아기를 낳았던 이웃집 순례 누나처럼 본질은 그대로인데 왠지 서먹서먹해진 내 고향…. 지금이라도 굽은 등과 흰머리 설운 내 할머니가 사립문 지그시 밀고 나올 것만 같은데, 눈을 크게 떠 보면 시간이란 지우개는 할머니도 사립문도 깨끗이 지워 버린 뒤다.
  • 톡… 톡… 봄망울 터지나 봄

    톡… 톡… 봄망울 터지나 봄

    동백 지고 매화 핀 휴애리자연생활공원 연분홍 꽃잎 은은한 향기 맡으며 봄맞이 흑돼지·거위쇼 등 각종 체험프로그램도 옛 가옥 재현 제주민속촌으로 과거 여행 미술관 된 비밀기지 ‘빛의벙커’가 ‘핫플’대한민국 남쪽 끝 제주 서귀포에는 언제나 봄이 한 발 먼저 찾아온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가 벌써 만개해 보는 이를 설레게 하고, 겨우내 홀로 피어 있던 동백은 더욱 붉은 빛깔로 손님을 맞는다. 한 달쯤 지나면 유채꽃이 섬 곳곳에서 노란 바다를 이루며 일렁일 제주를 조금이라도 일찍 만끽하고 싶어 서둘러 다녀왔다.3월이 되기 전 서둘러 서귀포를 찾은 이유는 8할이 매화를 보기 위함이었다. 매화 명소만도 여러 곳인 서귀포에서 이번에 찾은 곳은 남원읍에 위치한 ‘휴애리자연생활공원’. 한 달 전까지 동백축제가 열렸던 이곳에는 매화축제가 한창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문 앞까지 마중 나온 매화가 연분홍 꽃잎을 살랑이며 맞이했다. 언덕 위로 굽이굽이 난 길가에도 매화나무가 줄을 잇는다. 저마다 누가 더 예쁜지 겨루는 것처럼 활짝 핀 매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발걸음은 자연히 느려진다. 천천히 걷다 매화정원에 다다랐다. 소문을 듣고 온 방문객이 많지만 매화는 더 많다. 매화나무 숲 사이로 들어가자 매화의 품에 안긴 느낌마저 든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살짝 스친다. 가족, 연인, 친구끼리 온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이른 봄꽃이 부리는 마법이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조랑말·산토끼·염소에게 먹이를 줄 수 있고, 승마체험과 전통놀이도 할 수 있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흑돼지·거위쇼다. 수십마리 작은 흑돼지가 줄지어 계단을 오른 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거위 떼가 그 뒤를 따른다.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동물들을 보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냥 즐겁다.휴애리를 나와 차를 타고 동쪽으로 45분쯤 달린다. 표선해수욕장 뒤편 제주민속촌이 다음 목적지다. 수학여행 때나 가는 관광지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갈수록 현대화돼가는 제주에서 진짜 옛 제주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장소다. 인공적으로 꾸몄지만 제주 문화유산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100여채에 이르는 전통가옥은 19세기 제주의 실제 가옥을 본떠 한 곳도 똑같은 모양이 없다. 둥근 초가지붕 위로 드리운 매화, 오래된 대문 앞 동백나무 빨간 꽃이 그림 같다. 돌담으로 쌓은 축사 안에서 소 한 쌍이 건초를 뜯고, 당나귀가 어슬렁거린다. 수십년 시간을 건너 뛰어 옛 제주 시골 마을에 온 것 같다. 하귤이라 불리는 큼직한 전통귤이 제주의 느낌을 더한다. 본래 좀녀라고 불린 해녀의 삶을 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서귀포 동쪽 해안 근처로 난 1132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다. 30분쯤 가다 만난 산양교차로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 성산읍 ‘빛의벙커’를 찾아간다. 지난해 11월 처음 문을 연 미술관 ‘빛의벙커’는 서귀포에서 가장 핫한 명소로 떠올랐다. 옛 국가기간 통신시설로 오랜 시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 벙커가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변신했다.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5.5m의 어둑한 내부공간에 들어가면 낯설면서도 신비한 느낌이 든다. 클래식 음악이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퍼져 나오고 사방 벽뿐 아니라 바닥까지 화려하게 수놓는 미디어아트가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개장 후 첫 전시인 ‘클림트전’은 ‘빛의벙커’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찬란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 클림트의 작품들이 물감 대신 빛으로 변해 한층 더 영롱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림을 따라 분주히 움직이거나 작품을 공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바닥에 가만히 앉아 1~2시간 보내면 미술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빛의 벙커’를 나와 차로 10분 정도만 이동하면 서귀포의 바다다. 섭지코지로 들어가는 길목 해변에 서면 바다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섭지코지에는 바다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국내 최대 규모 아쿠아리움인 한화 아쿠아플라넷 제주다. 메인 수조인 ‘제주의 바다’에서 상어·가오리 등 100여종을, 전체 전시관에서는 450여종 4만 5000여마리의 해양생물을 만날 수 있다.남원읍의 고살리탐방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여행지다. 서귀포제1청사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서성로입구삼거리 부근에 있다. 효돈천을 따라 우거진 원시림에 사람만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생태탐방로가 나 있다. 짙게 이끼 낀 숲길과 현무암 돌담, 족히 수백년은 됐을 법한 신령스러운 나무 사이를 걷는다. 사시사철 물이 고여 있는 ‘속괴’는 놓치지 말아야 할 장소다. 기암괴석이 웅덩이를 둘러싼 신비로운 분위기에 토속신앙의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미 봄이 한창이지만 유채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은 한층 더 짙어진다. 오는 23~24일 이틀간 서귀포시 일원에서 열리는 ‘제21회 서귀포 유채꽃 국제걷기대회’ 기간 즈음에 방문하면 유채꽃 물결이 한창인 제주를 만날 수 있다. 소정의 참가비를 내고 5·10·20㎞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걸어봐도 좋겠다. 글 사진 서귀포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여행수첩 →잘곳 : 대명 샤인빌 리조트는 서귀포 시내와 성산일출봉 중간쯤 자리하고 있어 서귀포 동부를 두루 둘러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아열대 식물로 둘러싸인 지중해풍 건물로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리조트 단지 안에서도 제주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정원과 레스토랑, 카페, 문화공간, 인피니티 풀 등 시설을 갖췄다. 휘닉스 제주 섭지코지는 서귀포 동쪽 해안에 삐죽 나온 섭지코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조트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유민미술관과 글라스하우스는 JTBC ‘효리네 민박2’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 배경으로 화제가 됐다. 사방이 통유리인 글라스하우스 2층 민트레스토랑에서 제주 봄 바다 절경을 바라보며 제주 특산물 요리를 먹는 경험이 특별하다.
  • 겨울옷 입는 초가집

    겨울옷 입는 초가집

    입동(立冬)을 하루 앞둔 6일 오전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낙안민속마을에서 주민들이 초가지붕의 이엉을 얹고 있다. 주민들은 해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꼬아 12월까지 초가지붕의 이엉을 얹는다. 순천 연합뉴스
  • 구석구석 찾는 재미…떠나볼까 시간여행

    구석구석 찾는 재미…떠나볼까 시간여행

    1905년 경부선 개통, 1914년 호남선 개통으로 ‘한밭’은 철도를 중심으로 한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인 대전(大田)으로 급성장한다. 교통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행정 수요가 이곳으로 몰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전 원도심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14개에 이른다. 그만큼 대전이 근현대사의 교통·행정의 중심 도시로 성장해 왔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대전 원도심 여행은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지하철 중구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전시관을 찾을 수 있다. 대전역과 두 정거장 거리여서 외지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전시관을 둘러본 뒤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으로 가는 길 곳곳에서 근현대사 건물과 빵집 ‘성심당’ 등 원도심 맛집을 만날 수 있다. 도시 곳곳에 숨은 근현대사 건물들을 하나하나 찾는 1920~1930년대로의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①웅장한 유럽식 건축양식 ‘근현대사전시관’ 대전을 오랜만에 찾는 사람이라면 대전근현대사전시관보다는 충남도청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옛 충남도청은 내포신도시로 도청이 이전된 후 현재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탈바꿈해 시민들의 소중한 역사 공부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웅장한 유럽식 건축양식이 돋보이며 일본 시즈오카현 청사 본관과 비슷해 1930년대 관공서 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자료로도 평가된다.건물 벽돌에 새겨진 일본의 상징인 벚꽃 모양을 본 이들은 다소 불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가 남긴 유산이다.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벽돌을 제거하려 했지만, 너무 단단해서 결국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을 만큼 웬만한 현대 건축물보다도 튼튼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본관 1층은 구한말 이후 대전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고,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는 안창호 선생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영화 ‘변호인’ 등의 촬영 장소이기도 했던 고풍스러운 계단을 걸어 올라간 2층에는 역대 도지사들의 옛 물품과 1920년대 제작된 무게 1t짜리 금고 등이 전시돼 있다.②일제시대 건축 보고 싶다면 ‘관사촌거리’로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10분 남짓 거리에는 관사촌이 있다. 옛 충남도지사 공관과 부지사 관사, 국장급 관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관사들이 이처럼 함께 모여 마을을 이룬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조성 당시에는 일제 고위 관료들이 머물렀고, 6·25 전쟁 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임시 거처로도 활용됐다.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1930년대 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건물로, 옛 충남도청과 함께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대전시가 충남도에서 공관을 매입해 도시재생 사업에 따라 ‘테미오래’라는 이름의 문화 공간으로 새로운 탄생을 준비 중이다. 올해 말쯤 시민과 관광객에게 공개된다.③도심 속 퍼지는 청아한 종소리 ‘대흥동성당’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형상을 한 대흥동성당은 고딕 양식의 적벽돌 구조가 대부분인 여느 성당 건축물과 달리 시멘트 벽돌로 마감해 기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서울 명동성당보다 큰 성당을 지으려고 했지만 완공하고 난 뒤 명동성당의 실제 크기를 잘못 측정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명동성당보다 작게 지어졌지만, 개발이 더뎠던 주변 원도심과는 오히려 잘 어울려 보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당시는 대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다. 대전 원도심 투어를 하는 이들은 낮 12시나 오후 7시 대흥동성당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기도 한다. 1969년부터 매일 같은 시간에 종을 치며 50년째 성당의 종지기로 살아온 조정형(71)씨는 이 동네에서 이미 유명인사다. 한번은 성당 종소리가 달라졌다며 주민들의 항의가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그가 성지순례로 자리를 비운 사이 ‘대타’가 종을 쳤던 것이다. 소리가 달라졌음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종소리는 주민들에게 친숙하고도 독특하다. 대흥동성당은 등록문화재 643호로 지정돼 있다.④예술 공간으로 재탄생 ‘옛 대전여중 강당’ 대흥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은 이들은 인근 대전갤러리로 가보자. 무엇보다 한국 고유의 초가지붕을 연상케 하는 대전갤러리의 지붕은 부드러운 곡선미로 보는 이의 마음을 잔잔하게 한다. 이곳은 원래 1937년 대전여중 강당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2003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지역 예술가를 위한 문화전시관인 대전갤러리로 재탄생했다. 대전갤러리는 근대건축물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시대의 변화 속에서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창조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⑤슬픈 역사 홀로 지켜본 ‘옛 대전형무소 망루’ 대전 중촌동 옛 대전형무소 자리의 망루는 ‘왜 빨리 철거하지 않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흉측한 외관을 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우리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6·25 전쟁 때는 좌익과 우익이 번갈아가며 교도소를 장악해 서로를 죽인 학살의 장소였다. 슬픈 역사를 지켜봐 왔던 망루는 원래 동서남북에 1개씩 모두 4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대전 자유회관 옆에 1개만 남아 있다. 시신을 생매장했던 망루 인근의 우물 자리도 참혹했던 역사의 증인이다. 옛 대전형무소 자리의 역사적 의미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모임인 ‘중촌마을 역사탐험대 그루터기’에 의해 재조명됐다. 대전시가 옛 대전형무소 관광자원화 조성공사를 올해 말까지 진행하고 있다. 대전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사진 한국관광공사 대전충남지사 제공 ■여행수첩(지역번호 042) →맛집:대흥동성당 인근 원조진로집(226-0914)은 두부 두루치기의 원조로 알려진 식당으로 매콤한 두부 두루치기와 오징어 두루치기가 주메뉴다. 원래 가락국수를 팔던 조그만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두부 요리를 만들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귀빈돌솥밥(255-9198)은 전주식 돌솥비빔밥 전문점으로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모든 나물은 리필이 되니 많이 많이 드세요’라고 적힌 수저통 메모에서 식당의 인심이 전해진다.
  • [서울포토] 한복입고 창덕궁 모내기 체험

    [서울포토] 한복입고 창덕궁 모내기 체험

    서울 창덕궁 청의정 주변 논에서 농업진흥청과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청의정은 창덕궁 유일의 초가지붕 정자로 과거 임금이 그해 농사의 풍년을 가늠하기 위해 창덕궁 내 논에서 직접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수확한 볏짚을 이용해 지붕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018.6.7.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서울포토] 창덕궁 논에서 ‘모내기 체험’

    [서울포토] 창덕궁 논에서 ‘모내기 체험’

    서울 창덕궁 청의정 주변 논에서 농업진흥청과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청의정은 창덕궁 유일의 초가지붕 정자로 과거 임금이 그해 농사의 풍년을 가늠하기 위해 창덕궁 내 논에서 직접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수확한 볏짚을 이용해 지붕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018.6.7.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헌신과 희생의 삶… 행복한 ‘은하 철도’가 달린다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헌신과 희생의 삶… 행복한 ‘은하 철도’가 달린다

    씨앗 하나가 가장 연약한 잎새를 올리며 딱딱하게 굳은 언 땅을 허물곤 한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들어버린 영혼의 잎새에 글이라는 생명의 물을 부어 주는 존재들이다. 세상이 점점 팍팍해져서일까. 유튜브를 보면 세계 각국 언어로 꾸준히 낭송되는 시 한 편이 있다. 이웃 섬나라 까마득한 시골에서 태어나 땅과 평화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인이자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작품이다. 37년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미야자와는 동화작가 권정생, 소설가 김연수 등 문인들도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유고시 ‘비에도 지지 않고’는 투병 중이던 1931년 11월 3일 수첩에 쓴 것이다.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이 결코 화내지 아니하며 늘 조용히 웃으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먹고 모든 일에 제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숲속 그늘 아래 초가지붕을 새로 이은 작은 초가집에서 살며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볏단을 날라주고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 가뭄 들면 눈물을 흘리고 냉해 닥친 여름엔 허둥대고 모두에게 멍청이란 소리 들으며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드라마와 영화에 많이 나오고, 노래로도 많이 불렸다. “비에도 지지 않고/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겠다”는 당찬 다짐으로 시작한다. 비에도, 바람에도, 눈에도,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모두 날씨와 관계 있다. 농민들과 함께 살았던 그는 매일 날씨를 걱정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단가(短歌)를 지을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미야자와는 농민들을 착취하는 아버지가 미워 가출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고향 이와테현 하마나키는 휴전선처럼 북위 38도선 근방이지만, 여름날 땡볕 날씨에 오호츠크해의 냉습한 동북풍이 불어오면 갑자기 냉해가 닥쳐 “추위 닥친 여름엔 허둥대”야 했다.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늘 조용히 웃으며 이겨 나가야 한다며 농촌 청년들과 악단과 극단을 만들기도 했다.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돈 많은 부모를 떠나 초가집에서 살며 농사를 짓고 농업학교 교사로 일했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된장과 나물을 먹으며”에는 채식주의자였던 미야자와의 식습관이 보인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육식보다 채식을 해야 한다며 농민들에게 채식주의를 권했다. 일일현미사홉(一日玄米四合)에 만족하며 전쟁에 반대했던 미야자와와 달리, 태평양전쟁 때 일본 군부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하루에 이홉(二合)만 먹을 것을 국민에게 강요했다.1926년 그는 농촌 지역 향상을 위해 라스지인협회(羅須地人協會)를 설립하고 농작과 비료 연구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동쪽에 병든 아이”,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으로 상황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동서남북으로 어려운 농민들 곁으로 분주하게 다가갔던 미야자와의 일상 그 자체다. 일본어 원문을 보면 몇 개의 명사를 한자로 쓰고 나머지는 가타카나로만 썼다. 가타카나 표기는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마치 기억하며 읽으라는 시인의 기호 같다. “그런 사람이/나는 되고 싶다”라는 표현에 구도자로서 아직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안타까움이 스며 있다. 시에 이어 “남무”(귀의합니다), “묘법연화경(법화경)”이 쓰여 있는데, 이는 “법화경으로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법화경’을 탐독하고 1921년부터 대승불교를 포교했던 미야자와의 손길이 보인다.안타깝게도 농민들은 미야자와의 정성을 간섭으로 여기고 불편해했다. 장마와 냉해 때문에 모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들은 부잣집 도련님의 철없는 행동이라며 배척하기까지 했다. 농민들에게도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는 어떡하면 농민들에게 즐거움을 줄까 생각했다. “농민들의 삶을 위로해 줄 글을 쓰자.” 그는 동화집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자비로 출판했다. 야만의 군국주의 시대에 그의 책을 산 구매자는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남아 있는 수많은 메모 중에서 친구들은 한 편의 동화를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었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구구구”라는 후렴을 듣기만 해도 영상이 떠오르는 세대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방송된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말이다. 원작 만화를 그린 만화가 마쓰모토 레이지가 미야자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은하철도의 밤’에서는 몇 가지 신화적 요소를 볼 수 있다.이야기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은하수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수줍은 성격 탓에 아이들에게 왕따당하는 주인공 조반니에게는 곁을 지켜주는 친구 캄파넬라가 있었다. ‘은하 축제의 날’에 놀 일을 생각하는 친구들과 달리 가난한 조반니는 인쇄소에서 일해야 했다. 몇 푼 번 돈으로 빵과 설탕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병든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릴 뿐이다. 조반니가 엄마를 위해 우유를 사던 그날은 ‘은하 축제의 날’이었다. 이날엔 하눌타리 열매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등불을 넣어 강에 띄우는 놀이를 한다. 왕따당한 조반니가 외로이 언덕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덕 풀밭에 쓰러져 잠시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은하정거장, 은하정거장”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수억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오듯 밝아졌다가, 정신을 차리니 조반니는 어느새 기차 안에 있다. 기차 안에서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새까만 윗도리를 입은 친구 캄파넬라를 발견한다. 캄파넬라의 모습은 이미 죽은 자의 모습이다. 캄파넬라의 얼굴은 어딘가 좋지 않은 듯 창백했습니다. 그러자 조반니도 어디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습니다. (미야자와 겐지 전집 1/너머·2012·246쪽) “젖은 듯한 검은 옷”은 물에 빠져 죽은 캄파넬라의 모습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고사기’(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한 책)에 나오는 창세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미 죽어 저세상에 있는 이자나미를 만나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자나기가 저세상에 가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캄파넬라는 은하철도 안에서 계속 엄마를 걱정한다. “엄마가 날 용서해 주실까?” 캄파넬라는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힘겹게 참고 있는 듯했습니다. “난 모르겠어. 하지만 누구라도 정말로 좋은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한 거지. 그러니까 엄마는 나를 용서해 줄 것으로 생각해.”(위의 책, 249쪽) 이 대화 부분이 무슨 뜻인지, 왜 캄파넬라는 엄마에게 미안해하는지, 왜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나면 캄파넬라가 강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은 뒤, 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동화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몇 번이고 묻는다. 미야자와의 작품에서 보이는 신화는 허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조반니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반니의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웠고 볼에는 차가운 눈물이 흘렀다. 마을에 내려왔을 때 친구 캄파넬라가 축제 때 강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듣는다. 꿈속에서 만난 캄파넬라는 이미 죽은 존재였던 것이다. 캄파넬라는 죽어 지금 저 은하 끝 하늘나라로 사라졌고, 자신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차표 덕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캄파넬라가 친구 자네리를 구하고 죽은 희생정신은 바로 미야자와가 평생 지켜오던 헌신적인 삶이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자체가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답으로 미야자와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을 제시했다. 결핵으로 37세에 요절한 그는 평가받지 못하다가 이후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열도는 식지 않는 ‘겐지 붐’에 휩싸여 있다고 할 만큼 일본엔 열광적인 독자군이 형성돼 있다. 2000년에 아사히신문에서 발표한 1000년간 일본인이 좋아하는 문인 순위를 보면 1위는 나쓰메 소세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는 시바 료타로, 4위는 멍청이라고 조롱받던 미야자와 겐지가 올라 있다. 필자가 일본에 유학 갔던 1996년은 미야자와 겐지 탄생 100주년의 해였기에 영화도 나오고,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특집과 드라마가 방영됐다. 대형 서점뿐만 아니라 동네 책방에도 입구까지 1년 내내 그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마구 출판되던 한국어판 전집은 도서출판 너머에서 잘 정리돼 5권짜리 전집으로 출판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됐고, 환멸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자연과 우주의 교감을 이루고 있는 그의 작품은 진정한 행복을 제시하는 바로 그 지점, 절망의 동토(凍土)를 뚫고 고개 드는 연둣빛 잎새처럼 부드럽다. 시인·숙명여대 교수
  • 훈장 박탈 김성수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자격 유지

    지난 2월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된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안 김상만 고택’의 국가민속문화재 자격이 유지됐다. 1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 민속분과는 지난 10일 열린 회의에서 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 ‘부안 김상만 고택’의 문화재 지정 해제 안건을 검토해 부결했다. 앞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인촌은 대법원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에 대한 확정판결을 받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지금의 대통령장)이 박탈되고 생가와 동상의 현충시설 해제가 결정됐다”며 인촌 김성수와 관련된 고택의 문화재 지정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위원회는 “부안 김상만 고택은 거주 인물이 아니라 주거지 관점에서 가치를 평가받아 문화재로 지정됐다”며 “문화재 지정 해제 요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가민속문화재는 의식주, 생산, 교통, 교역 등에서 한국 민족의 기본적 생활문화를 나타내는 유물 중 전형적인 것이 지정된다.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 있는 김상만 고택은 안채, 안사랑채, 헛간채 등 건물 8동으로 이뤄졌다.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이다. 이 집은 1895년 안채와 사랑채 등이 지어졌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가 세워졌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됐으며,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ㅁ자형이다. 기와집 못지않게 좋은 부재를 썼지만, 기와지붕이 아닌 초가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1982년에 보수를 거치고 지붕의 이엉이 억새로 변경됐으나, 전북 고창 지방의 주거양식을 잘 나타내는 근대적 초가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촌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모금운동을 벌여 고려대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일제의 징병과 학병을 찬양한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항일운동가단체들은 인촌 관련 기념물 철거와 후손들의 재산 환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봄 맞아 새 지붕 얹은 함양한옥

    봄 맞아 새 지붕 얹은 함양한옥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마을에 위치한 아름지기 함양한옥의 초가지붕 이엉 이기 작업이 27~28일 이틀간 실시된다. 아름지기 함양한옥은 정선 전씨의 150여년 된 종택을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 기증받아 개·보수한 전통 한옥문화 체험관이다. 27일 마을 주민들이 지난해 11월 채취해 말린 억새를 엮어 만든 이엉으로 초가지붕을 교체하고 있다. 함양군 김용만씨 제공
  • 치욕의 역사… 카타르시스 보다 ‘묵직한 울림’

    치욕의 역사… 카타르시스 보다 ‘묵직한 울림’

    새달 3일 개봉하는 ‘남한산성’은 원작에 충실한 정통 사극이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에 포위된 채 남한산성에 고립돼 47일간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던 조선의 임금 인조와 조정 대신, 그리고 민초들을 그린 영화다.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처럼 장(章)을 나누어 11장으로 구성한 영화는 원작의 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묵직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오랑캐 발밑을 기어서라도 백성을 살려야 한다며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치욕스럽게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논쟁이 중심축이다. 영화는 청나라 군대가 날린 화살비에도 움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최명길과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준 초로의 뱃사공이 청군의 길라잡이가 되지 않게 하려고 단칼에 베는 김상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작, 두 사람이 결코 물러섬 없는 공방을 펼칠 것을 예고한다. 먹을 것도, 덮을 것도 부족하다. 성을 지키는 백성들이 외투 대신 쓰는 가마니와 초가지붕까지 걷어 말먹이를 주다가 말이 죽자 그제야 말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기도 한다. 조정 대신들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어전회의에서 머리를 맞대지만 뾰족한 수는 없고 입으로 드잡이할 뿐이다. 처연하다 못해 암울하며 암울하다 못해 비장하다.분위기를 이따금 풀어 주는 것은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인조(박해일)다. 군왕다운 모습을 거의 보여 주지 못하는 인조는 그러나 상황 논리에 따라 최명길과 김상헌을 번갈아 비난하는 영의정 김류(송영창)를 면박주는데 이 장면들이 마치 콩트처럼 관객들의 뇌세포를 이완시킨다. ‘남한산성’은 분명 좋은 영화다. 연기 칭찬을 하려면 입이 아플 정도인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고수를 비롯해 조연들까지 빛난다. 원작의 문장에 피와 살을 붙인 황동혁 감독의 연출력도 빼어나다. 산성의 미장센, 전투 장면까지 흠 잡을 곳이 거의 없다.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도 울림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웰메이드’라고 흥행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관객들이 이미 이 영화가 굴종과 오욕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 일반 시사회에서 관객들과 만난 원작자 김훈은 “패배와 치욕을 가지고 독자에게 호소하기는 어렵다”며 “그럼에도 그 속에서 희미하게 돋아나는 희망과 미래의 싹을 봐 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에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낸 민초들에게 찾아온 평온한 봄날이 아주 잠깐 에필로그에 스친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카타르시스가 될지는 추석 연휴 극장을 찾을 관객들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15세 관람가.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이호준 시간여행] 초가지붕에 묻힌 추억

    [이호준 시간여행] 초가지붕에 묻힌 추억

    해마다 늦가을이면 순천 낙안읍성이나 경주 양동마을,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같은 전통마을을 찾아간다. 꼭 가을이어야 하는 이유는 새로 올린 초가지붕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곳에 가면 미술 작품이라도 감상하듯 오랫동안 지붕을 바라본다. 그 부드러운 곡선을 가슴에 들이면 각진 마음이 둥글둥글 무뎌지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올해도 추수가 끝나고 이엉을 얹을 때가 되면 그중 한 곳을 찾아갈 것이다.새 지붕을 이는 풍경 앞에 서면 기억은 자연스럽게 어릴 적 어느 날로 달려간다. 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 마당 한쪽의 짚가리 옆에서 이엉을 엮기 시작했다. 그렇게 엮은 이엉 둥치들이 마당에 그득해지면 어느 날 아침 동네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농투성이라면 이엉쯤 엮는 건 일도 아니지만, 지붕을 이는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엉을 올리는 날은 작은 잔칫날이었다. 부엌에서는 새참으로 낼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아이들은 주전자를 들고 부지런히 막걸리를 받아 왔다. 어른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두어 명은 사다리로 이엉을 올리고 몇몇은 그것을 받아 지붕에 깔았다. 그 작업이 끝나면 용마름을 덮을 차례. 용마름은 이엉이 맞닿는 마루를 덮는 것으로 초가지붕을 이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용마름이 완성되면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삿(초가지붕을 일 때 쓰는 새끼)을 맨다. 지붕을 다 올리고 난 뒤 올려다보면 집 전체가 보름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초가는 우쭐거리지 않았다. 이만치 떨어져서 보면 둥그런 앞산·뒷산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산이 지붕이고 지붕이 산이 되어 서로 얼싸안고 내닫던 풍경. 초가나 산이나 고난 속에서도 둥글둥글한 심성을 잃지 않았던 민초들을 닮았다. 초가집은 배타적이지 않았다. 생명을 품어 안을 줄 알았다. 추녀에는 참새가 둥지를 틀었으며, 업이라 불리는 구렁이가 상주하기도 했다. 오래 묵은 지붕은 굼벵이들의 삶터가 되었다. 실용적으로도 뛰어난 점이 많았다. 속이 비어 있는 볏짚은 공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뜨거움을 덜어 주고 겨울에는 집 안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준다. 그리고 볏짚은 겉이 매끄러워서 빗물이 잘 흘러내리므로 두껍게 덮지 않아도 비가 새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초가집은 멀리 있어도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던 어머니의 흰머리 같은 존재였다. 때론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과도 같아서 부평초처럼 떠돌아도 항상 가슴속에서 펄럭이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초가집을 보기 어렵다. 옛집들이 잘 보존된 민속마을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수천 년 동안 민초들을 안아 주던 초가는 1970년대 ‘새마을노래’와 함께 우르르 사라졌다. 둥그런 초가지붕이 떠나간 자리에는 울긋불긋한 함석지붕이 얹혀졌다. 편리성으로야 자주 바꿔 줘야 하는 초가지붕이 반영구적인 함석지붕을 어찌 따를 수 있으랴. 하지만 삶의 만족이 반드시 편리함만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강제적 지붕 개량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까지 초가집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해마다 갈아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그러잖아도 일손이 없는 농촌에서 초가집을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움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찾아올 때가 많다. 세월이 흐른다고 초가지붕의 그 따뜻한 발색. 부드러운 곡선을 어찌 잊을까. 늦가을이면 연례행사처럼 전통마을을 찾는 이유다.
  • 박수현 대변인 “文대통령 주선한 집, 계단 오를때마다 가슴이 뭉클”

    박수현 대변인 “文대통령 주선한 집, 계단 오를때마다 가슴이 뭉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임명 이후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드러냈다.박 대변인은 지난 5월 24일 대통령 경호실 빌라(대경빌라)에 입주했다. 문 대통령은 충남 공주에 거주하는 박 대변인을 위해 이 빌라를 숙소로 사용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변인은 12일 자신의 SNS를 통해 ‘대경빌라’ 계단 사진을 공개하며 거주 소회를 밝혔다. 그는 “청와대 출근 첫날, 문 대통령님의 첫인사는 저의 숙소 걱정이셨고, 대통령님께서 직접 숙소를 주선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 영광되고 엄청난 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70년대식 작은 시멘트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미어지기도 하며, 행복하기도 하다”고 덧붙였다.박 대변인은 이어 문 대통령이 주선해준 집에 대한 감정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대변인의 집 걱정까지 해 주신 대통령님의 마음이 계단계단마다 절절히 밟히는 감사함. 초가지붕과 사립문 시골집에 살던 내가 시멘트 벽돌집에 처음 들어가 봤을 때의 신기함과 부러움이 생각난다”고 밝혔다. 또 “초등학교 6학년 밖에 안 되던 누이가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는 2학년 나를 엄마나 된 듯이 어른스럽게 달래며 손 꼭 잡고 걷던 모습이 생각난다”면서 “누이 친구들의 머리에 논두렁 같은 가르마와 댕기처럼 땋은 머리가 생기고 여학생 교복을 입을 즈음, 내 누이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갔던 서러움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이어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이면 시끌벅적했던 추석이 그리워지고,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고생하는 줄 알고 주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허리 굽은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대통령님께서 구해주신 집으로 가는 길의 이 오래되고 못생긴 시멘트 계단은 제 마음의 심연을 끄집어 내는 보물”이라며 “이 계단을 걸어 저 모퉁이를 돌면 플라타너스 숲길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고 전했다. 이어 “대통령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은 대변인이라는 과분한 역할뿐 만 아니라, 이 작은 계단에 감사할 줄 아는 ‘착한마음’ 이다”라며 “국가와 국민과 정치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로 국가와 국민과 대통령님께 보답 드리겠다”고 글을 맺었다. ▼박수현 대변인 글 전문▼ 청와대 대변인 출근 첫 날, 문재인 대통령님의 첫 인사는 저의 숙소 걱정이셨고, 이미 많은 언론에 알려졌듯, 대통령님께서 직접 대변인의 숙소를 주선해 주셨습니다.  그 영광되고 엄청난 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70년대식 작은 시멘트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오를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하기도하고, 미어지기도하며, 행복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대변인의 집 걱정까지 해 주신 대통령님의 마음이 계단계단마다 절절이 밟히는 감사함 때문이고, 둘째는, 초가지붕과 사립문 시골집에 살던 내가 시멘트 벽돌집을 처음 들어가 봤을 때의 신기함과 부러움이 생각나기 때문이며,  셋째는, 초등학교 6학년 밖에 안되던 누이가 다리아프다고 칭얼대는 2학년 나를 엄마나 된 듯이 어른스럽게 달래며 손 꼭 잡고 걷던 모습이 생각나기 때문이고, 넷째는, 누이 친구들의 머리에 논두렁같은 가르마와 댕기처럼 땋은 머리가 생기고 여학생 교복을 입을 즈음, 내 누이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갔던 서러움이 생각나기 때문이며, 다섯째, 그래도 일년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이면 시끌벅적했던 추석이 그리워지기 때문이고, 여섯째,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고생하는 줄 알고 주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허리굽은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에, 대통령님께서 구해주신 집으로 가는 길의 이 오래되고 못생긴 시멘트 계단은 제 마음의 심연을 끄집어 내는 보물입니다. 이 계단을 걸어 저 모퉁이를 돌면 플라타나스 숲길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압니다. 대통령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은 대변인이라는 과분한 역할 뿐 만 아니라, 이 작은 계단에 감사할 줄 아는 ‘착한마음’ 입니다. 국가와 국민과 정치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로 국가와 국민과 대통령님께 보답드리겠습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하회마을 무단 변경 지붕 원상복구 명령 앞두고… 초가냐, 시멘트 기와냐…안동시 ‘딜레마’

    하회마을 무단 변경 지붕 원상복구 명령 앞두고… 초가냐, 시멘트 기와냐…안동시 ‘딜레마’

    ‘초가지붕이냐, 시멘트 기와지붕이냐.’경북 안동시가 불법으로 지붕을 교체한 하회마을 주민에 대한 행정처분을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다.<서울신문 5월 5일자 12면> 안동시는 조만간 하회마을 주민 A(78)씨에게 지붕 원상복구 명령을 내릴 방침이라고 8일 밝혔다. A씨가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제122호)로 지정된 하회마을 자신의 집 지붕의 낡은 시멘트 기와를 문화재청의 현상 변경 허가를 받지 않고 함석 기와로 무단 변경한 데 따른 조치다. 하지만 시는 지붕 형태를 어떻게 원상복구하도록 조치할지 고심하고 있다. 시의 ‘하회마을종합정비계획’에는 이 집 지붕의 원형인 초가로 정비하는 방안이 담겨 있어서다. 그렇다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초가를 시멘트 기와로 개량한 것을 놓고 뒤늦게 원상복구 명령을 내릴 경우 A씨가 거세게 반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서 시는 2012년에 A씨 집 지붕을 초가로 정비하려 했으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당시 A씨는 관리상의 어려움 등을 주장하며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10년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시멘트 기와지붕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며 반발했다는 것이다. 하회마을에는 조선시대 기와집 100여채와 초가집 120여채가 보존돼 있지만 지금도 6~7채의 시멘트 기와지붕이 있다고 류한철(53) 안동 하회마을보존회 사무국장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전통마을 본래의 고풍스러운 멋과 품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회마을 일부 주민과 관광객들은 세계적인 전통마을로 보존, 육성하려면 초가 또는 전통 기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동시 관계자는 “A씨 집 형태를 놓고 전문가와 협의 중이나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면서 “경북도, 문화재청과도 협의해 바람직한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뚜벅뚜벅, 제주를 기억하다

    뚜벅뚜벅, 제주를 기억하다

    봄 여행주간이 오는 29일부터 시작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 지방자치단체 등과 함께 국내여행 수요 창출을 위해 벌이는 대형 이벤트다. 새달 14일까지 이어진다. 올해 봄 여행주간에도 여러 프로그램들이 마련됐다. 제주에서는 ‘제주시 원도심의 재발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도시 재생 전문가와 함께 제주 재생 현장을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의아하다. 제주에 원도심이 있다고? 보통 원도심이라고 하면 대도시가 외연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낙후되어 가는 도심 지역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를 지방 소도시 정도로 인식되는 제주에 적용하니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라 안에서 가장 극심하게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제주다. 개발로 인한 상전벽해가 하루아침에 생겨난다. 그러니 원도심을 기억이 축적되는 장소라고 전제한다면 제주야말로 숱한 원도심을 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글로컬제주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제주 원도심을 돌아봤다. 오롯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제주인 듯 아닌 듯한 풍경들이 제법 많았다.원도심은 제주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이 축적된 장소다. 제주의 지리, 역사적 근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는 제주목관아와 제주성(城)이 있었던 구도심을 일컫는다. 제주공항을 기준으로 보면 제주시 동쪽에 해당된다. 제주성을 중심으로 일도 1동, 이도 1동, 삼도 2동과 건입동, 중앙로, 칠성동 등이 포함된다. 삼도동은 제주 삼성신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제주를 일군 삼형제가 활을 쏴 정한 각각의 거주지가 그대로 이름이 됐다. 맏이가 일도, 둘째가 이도, 막내가 삼도를 중심으로 거주지를 형성했다고 한다. 원도심이다 보니 제주에서 가장 먼저 생긴 간선도로, 극장 등 기록으로서 최초가 된 것들이 꽤 많다. 제주 최초의 제빙공장 터, 거울공장 터, 발전소 터, 1920년대 목욕탕 터 등도 이 일대에 있다. 1950년대 가장 먼저 양복점과 양장점이 들어선 패션의 거리이기도 했다. 미용실, 다방 등의 간판도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가장 번화한 곳은 칠성로다. 지금껏 ‘제주의 명동’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고·양·부 삼성 시조가 세 지역의 땅을 나눠 차지할 때 북두칠성 모양으로 대를 쌓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각각의 대는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보존됐으나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칠성로란 이름으로만 남았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칠성로 일대는 제주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연동 등 이른바 ‘신제주’에 자리를 내줬고, 새 천년이 되면서 화려함도 잃었다.원도심 투어의 출발지는 동문로터리다. 이어 산지천 일대-건입동 동자복-금산수원지(김만덕 기념관)-탑동광장-북초등학교-관덕정-삼도동 문화의 거리-오현단 등을 돌아본 뒤 동문시장에서 마무리한다. 동문로터리와 동문시장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 사실상 출발과 종착지가 같은 원형의 코스로 이뤄졌다. 동문로터리 건너편의 ‘동문시장’ 간판을 내건 옛 건물이 눈길을 끈다. 1965년 세워진 옛 동양극장 건물이다. 건물엔 제주 바다의 이미지가 배어 있다. 외벽의 원형 창문은 여객선을 떠올리게 하고 지붕은 물결치는 파도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원도심의 랜드 마크로 삼을 만한 자태다. 원도심 한복판엔 산지천이 흐른다. 한라산에서 발원해 원도심 중심부를 관통한 뒤 산지포구에서 바다와 몸을 섞는 하천이다. 한때 최고의 상권을 자랑했던 동문로, 칠성로, 중앙로, 탑동, 동문시장 등이 이 하천 양쪽에 매달려 있다. 서울의 청계천처럼 오염이 심해지면서 1960년대 복개됐다가 2002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사람이 사는 마을은 물길 주변에 형성되기 마련이다. 산지천도 마찬가지. 기원전 1세기쯤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뱃길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산지천 끝자락의 산지포는 제주의 관문이자 최고의 상업지역이었다.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으로 회자되는 의녀 김만덕(1739~1812)의 객주터가 있던 곳도 산지포였다. 객주를 통해 재산을 모은 만덕은 조선 정조 때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으로 전복되자 평생 모은 재산을 내놓아 관덕정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쑤어 굶주리는 백성을 먹였다. 이를 기리는 기념관이 산지천 아래쪽에 있다. 김만덕 객주터는 최근 옛 모습대로 재현돼 주막집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객주터 바로 위에는 복신미륵이 떡하니 서 있다. 복신미륵은 행운과 복을 가져다 주는 미륵보살을 뜻하는 말이다. 제주성 동쪽에 있는 자복이라 해서 동자복이라 불린다. 용담동의 서자복과 함께 제주성을 향해 마주 보고 서 있다. 동자복은 입상이다. 신장이 286㎝, 얼굴이 161㎝이다. 눈 위에는 눈썹을, 앞가슴에는 맞잡은 팔의 소맷자락을 표현했다. 예전 제주에도 성이 있었다. 제주성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갈랐다. 서울의 이른바 ‘4대문 안’을 떠올리면 알기 쉽겠다. 성 밖에는 초네따이(시골아이)가, 성 안에는 시에따이(도시아이)가 살았다. 지금도 제주목관아 뒤편의 ‘묵은성’(지나간 옛 성을 뜻하는 사투리) 지역에는 평수 너른 옛집들이 남아 있다. 제주성벽은 일제강점기에 산지포구와 오현단 등의 조성 공사에 쓰이느라 산산이 해체됐다. 몽돌해변을 매립해 조성한 탑동광장, 설립 연도가 올해로 꼬박 110년이나 된 북초등학교를 휘휘 돌아가면 관덕정(보물 제322호)에 이른다. 제주목관아 앞에 있는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꼽힌다.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처음 지어진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관덕정 앞 뜨락엔 돌하르방 2기가 서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도 내 40여기의 돌하르방 중 하나다. 근래에 조각된 돌하르방에 견줘 단연 비범한 자태다.도로를 건너면 삼도동 문화의 거리다. 미술, 공예 등 작가들의 공방이 밀집돼 있다. 제주도 한량들의 회합 장소였던 향사당 등 볼거리가 은근히 많다. 이 골목에 제주 고유의 초가집이 남아 있다. 초가는 안거리와 밖거리 2채로 이뤄져 있다. 단단한 돌담과 새(띠), 집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맨 초가지붕은 태풍도 견딜 만큼 견고하다. 오현단은 제주 발전에 공헌한 송시열 등 다섯 명의 현인을 배향하는 옛 터다. 유적지 둘레를 제주성지가 둘러치고 있다. 오현단에서 남수각을 거쳐 내려오면 동문시장이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주)동문시장, 동문재래시장, 동문공설시장 등으로 나뉠 만큼 규모가 크다. 오메기떡 하나 사들고 천천히 돌아보기 딱 좋다.이제 화북포구를 말할 차례다. 원도심의 ‘연관검색어’쯤 되는 곳이다. 다소 떨어져 있긴 해도, 원도심의 형성과 관련이 깊고 정서 역시 맞닿아 있어 함께 둘러보는 게 좋다. 화북포구는 고전소설 ‘배비장전’의 고사가 얽힌 곳이다. 풍경만큼이나 담긴 이야기들도 곱다. 예전 화북포구는 제주에서 뭍과 연결되는 두 곳의 관문 중 하나였다. 수많은 비바리(갯마을 처녀의 사투리)들이 뭍에서 군역 등을 마치고 돌아오는 연인을 마중하던 곳이자, 눈물로 배웅하던 곳이다. 그렇게 쌓인 비바리들의 애환의 두께가 ‘배비장전’을 낳은 것일 터다. 포구는 억척스러운 삶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다. 섬인 탓에 포구가 필요했지만 화산섬의 거친 자연은 이를 쉬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이 얕고, 바위는 뾰족해 배를 부수기 일쑤였다. 제주 사람들은 노고에 지혜를 얹어 이를 해결했다. 수중 암초인 ‘여’나 그보다 높은 ‘코지’를 중심으로 돌을 쌓아 파도의 위력을 줄이고, 내부를 ‘안캐’, ‘중캐’, ‘밧캐’의 세 칸으로 나눴다. 아직 원형을 잃지 않은 제주의 몇몇 포구들이 일직선으로 뻗은 뭍의 나룻터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동문로터리 인근 대동호텔(064-722-3070)은 1971년 세워진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도 재일교포나 일본인 등 수십년 인연을 가진 이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동문시장 안에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오메기떡이 특히 알려졌다. 횟집도 있다. 1층에서 생선을 고르고 2층에서 먹는 형태다. 기념품으로 인기인 말린 옥돔 등도 싸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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