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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배우 최종원씨(이세기의 인물탐구:20)

    ◎혼신다해 역동적 연기하는 “진짜 배우”/주어진 역할에 정열바쳐 특유의 개성표출/「리어왕」서 고뇌하는 내면연기로 주목받아/갖가지 삶의 모습 소화해내며 끝없는 연기변신 시도 거칠고 투박하다.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불같고 칼같은 그의 성격상 중용과 중도를 지키는 모호한 태도는 맞지않는다.기백과 의리,정의감과 정열로 뭉쳐진 연극배우가 최종원이다. 아직은 들판에 풀어논듯한 포효와 폭만이 도사려보인다.그러나 탁탁 부러지기보다 불에 달군 쇠처럼 강인함이 돋보인다.부러지는듯 휘어지고 휘어졌다가도 제자리에 돌아와 설줄아는 투지,꿋꿋한 자존심이 그의 대명사다.만사에 주저함이 없다.한다면 한다.연기를 할때도 몸을 사리지않고 전신을 던진다. TV출연 때문에 연극연습에 소홀한 선배나 후배를 보면 연극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연극을 그만두어 줄것을 당당히 요구한다.TV인기,연기보충처럼 연극에 참여하는건 연극모독이자 관객모독,처럼부터 연극할 자격도 없다고 못박는다. 또 연출자나 제작자에겐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끌어낼수 있을만큼 완벽하고도 만족한 여건을 갖춰달라고 말한다.그는 언제 어디서나 연극배우의 입장에서 배우의 권한을 옹호하고 주장한다. 한때는 연기자그룹을 발족하고 초대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배우들의 출연료 계약문제를 연극계에 제기한적도 있었다. 91년 연극의 해를 위한 모임에서는 그동안 창작극 활성화와 극단 지원 결과 과연 그 성과가 어땠는가를 따져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그때도 그자리에서 막연하게 단체를 지원하여 지원금의 효력을 희석시키기보다 한사람의 연기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해보는 방법을 고려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이런식으로 열성적으로 연극무대를 지켜왔다.20년간 1백여편,아마도 그처럼 많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최종원이 끼지 않으면 연극이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주어진 무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밀착하여 그는 이미 「최종원 특유의 색깔과 체취가 물씬 풍기는 살아있는 연기」를 구사한지 오래다. 최종원의 출생과 성장기는 마치 일부러 설정해놓은 무대와 인물구성처럼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어있다.그것은 어쩌면 소설이나 연극보다 더 가파른 삶의 진실이라 할수 있다. ○탄광촌서 유년기 보내 강원도 태백,광부의 8남매중 막내.태백공고 졸업후 그는 그의 부친이나 형들처럼 함태 탄광에서 탄분석기사로 일한적이 있다. 이 일을 하기위해 3개월동안 갱(갱)속에서 생활하는 연수기간을 거쳐야했다.그리고 3개월 연수를 끝내고 갱속에서 나오던날,동료중의 하나가 지하로 떨어져 죽는 슬픔을 눈앞에서 겪었다.그는 동료의 시체를 찾아내겠다고 울부짖었다.그러나 수직 6백m 지하로 떨어지면서 비좁은 갱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을 시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낼수 없었다. 동네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갔다.곡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부인네들의 통곡소리,이런 생활에 지쳐 걸핏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치는 가족들,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상에 둘러앉아 탄가루에 찌든 목을 술로씻어 내렸다.슬픔은 차라리 사치임을 그는 어린시절에 진작 터득하고 있었나보다.어머니에게 손목을 잡혀초상집에가면 어른들은 술마시고 어린애들은 떡이나 국수를 얻어먹는다.청소년기에는 남의 상가에 가서 상여메는 일을 도맡다시피했다.상여를 멨던 광목한필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도 나무도 심지어는 빨래줄에 널린 빨래까지도 온통 검은색 뿐인 묵화같은 탄광촌,그는 둘째형이 메탄가스로 질식사하는 사고를 겪은후 더이상 참지못하고 고향을 탈출했다.술집외상,싸움질,비통,울분,가난과 무기력이 집합된듯한 극지의 땅을 떠나지않는한 타고 태어난 운명적 비극을 모면할수 없을것 같았다. 그는 집을 떠나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던 손위 누이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농무가 눈앞에 쌓인것처럼 막막할뿐,대책도 목적도 없었다.평소 연극을 좋아하던 누이가 갑자기 「연극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연극이라면 고등학교때 박종화원작의 「금삼의 피」를 해본적이 있었다.그때 맡았던 「연산군」이 미련처럼 내면에서 꿈틀거렸다.그러나 배고픈 그에겐 연극은 너무나 한가한 소리였다.몇달을 빈둥거리다가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전)에 입학원서를 냈다. 면접하는 날 동랑 유치진선생이 『자네는 왜 연극을 하려는가』고 물었다.그는 대뜸 「연극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연극을 위해서 왠지 자기자신이 필요한 존재일 것 같았다.남다른 경험을 요구하는 연극무대에서 그는 끝내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70년,전국대학생극협의회가 주최하는 연극 「콜렉터」로 정식 데뷔,그때 협의회 자문으로 있던 유현목 하길종감독이 그의 연기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었다.그는 차츰 연극무대에 침몰되어갔다.의사 형사 주정뱅이 농부 공사판 감독에서 백만장자 워벅스,무기력한 세일즈맨,에쿠우스와 햄릿,방화범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연기변신을 시도해나갔다.연극평자들로부터 「좋은 재목」「탄탄한 연기자」「능란하고 현란한 연기구사」로 평가되기도 했다. ○70년 「콜렉터」로 데뷔 그러나 모든 역할이 그때마다 절실하게 밀착되는건 아니었다.전혀 엉뚱하고 생소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역할은 얼마든지 있었다.83년 안민수연출의 「리어왕」이 그랬다.오랜만에 동랑의 연극에서 타이틀 롤을 맡게됐으나한달반의 연습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연기 이미지가 포착되지 않았다.하나의 역할을 끝내고 또다른 새로운 성격을 몸속에 채워야한다.그러나 리어의 모습은 아득한데서 맴돌뿐 이에 탐닉되지 않았다.그는 이 역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최종원의 잠재된 수많은 가능성을 간파하고있던 연출자는 오히려 그에게 1주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리어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한 가정에 가장이 있고 회사에는 사장이 있듯이 그는 한나라의 왕이다.너무 부담갖지 말라』고 위로했다.리어왕의 고뇌와 갈등이 전광처럼 뇌리를 스쳤다.결국 「리어왕」은 최종원의 내면연기를 끌어낸 화제작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무슨일에든 망설이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시시때때로 연극이냐 생활이냐,연극에 대한 회의에 시달렸다.연극의 열성만큼이나 다른 일을 했다면 그도 남들처럼 풍요롭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아무리 온몸을 던져 무대를 지켜도 느는건 눈덩이처럼 커지는 빚뿐이었다.연극을 할수록 가난의 공동은 깊이 패어갔다. 연극초기때부터 줄곧 살고있는 명륜동3가 언덕바지에서 부부(부인 정영애씨)와 딸 둘(고1,중3)네식구가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그는 10원을 아끼기 위해 연탄을 직접 날라다 쓴적도 있다.생활때문에 어쩌다 1년에 한두편 TV베스트셀러극장이며 「마유미」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그의 연극보다 TV나 영화출연을 더 좋아하는 것에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당신은 연극배우의 아내다.나는 처음부터 연극배우였다.이를 전제하고 결혼했었다』고 단호하게 못박았다. 가족들이 불편해 하더라도 그는 연극을 포기할 순 없었다.다른 동료들처럼 TV나 영화로 돌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연극은 천직이고 다른일은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았다.85년이후 TV출연을 일체 끊어버렸다. 연극무대를 지키는 배우는 드물다.자신의 직업에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갖게된 그로서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관객들이 두시간전부터 극장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일본 연극계가 부러웠다.그는 뜻맞는 동료를 만나면 배우들의 의식개혁을 부르짖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삶을 다양하게 비쳐보는 연극의 매력,어떤 예술과도 견줄수 없다.인간이 전신으로 할수 있는 총체예술은 연극의 수단을 능가할 수 없다고. ○작년 「극발전연」 발족 지난해 그는 연극계의 선배이자 존경해온 연기자인 전무송과 의기투합,순수연극을 지향하는 극발전연구회를 발족하여 첫무대로 이강백작 김광림연출의 「북어대가리」를 동숭동 성좌소극장에 올렸다. 자신의 주어진 삶을 한치의 오차없이 지키려는 창고지기 전무송과 갇혀진 창고속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꾀하려는 최종원의 거칠고 절박한 모습에는 그 옛날 탄광촌을 벗어날 때의 몸부림이 실려있어 보는이의 가슴에 전율같은 감동을 흐르게 한다. 더구나 23년간 기다려온 대선배 전무송과의 연기대결은 「연염의 조화」에 비유될만큼 그의 성숙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 어떤 역할에든 책임져야 하는 위치. 심장의 고동소리까지도 생생하게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그의 정열은 모든 고통과 시련을 딛고 이긴 투지의 결정에 틀림없다.머리카락 한올 까지도 혼신을 다해 역동적으로 연기해내는 배우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연극계는 물론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 모두는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연보 ▲1949년10월 강원도 태백 출생 최석담씨(84)와 김옥녀여사(85)의 4남4녀중 막내 ▲67년 태백공업고 광산과 졸업 ▲68년 함태탄광 탄분석기사 ▲69년 상경,서울 연극학교 (현 서울 예전)연극영화과 입학 ▲70년 서울연극학교 학생회초대회장 ▲〃 전국 대학생 극 협의회 주최 연극 「콜렉터」로 데뷔 ▲〃 수재민 돕기 지방공연 「점을칩니다」 1팬,「교행」 「춘향전」 ▲71년 재경 강원도 학우회주최 연극 「형제」로 강원도 일원 공연 ▲77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공연(이진순연출 「북벌」) ▲83년 연기자그룹창립(초대·2대·8대 회장역임) 85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연극영화과 졸업 87년 극단 부활과 이재한작·연출 「배비장전」 미국지역 45일간 순회공연 89년 영화 「마유미」 촬영차 도미 ▲90년 서울연극제 「아버지바다」 개인연기상 수상기념 뉴욕 연수 ▲91년 「연극의해」 기획위원▲〃 배우협회 창립(창립기념공연 윤대성작·정일성연출 「출세기」) ▲92년 일본동경 다이니아이리스 페스티벌 참가(김상열작 「길」) ▲현재 한국연극협회이사·극예술발전연구회 창립멤버(전무송과 발족) 「거룩한 직업」「어린왕자」「달집」「우회」「베니스의상인」「방화광」「노부인의 방문」「날개」「동물원이야기」「그리고 리어든양은 마시기 시작했다」「탱고」「검찰측증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리어왕」「내·물·빛」「에쿠우스」「햄릿」「밤의묵시록」「신화1900」「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꽃을 사절합니다」「지금은 부재중」「티타임의 정사」「세일즈맨의 죽음」「환타스틱」「심판」「출구없는방」「애니」「만리장성」「아가씨와 건달들」「매춘Ⅱ」「헬로 미스터후라이데이」「하나를 위한 이중주」「기막힌 사내들」「아버지바다」「토선생전」「살로메」「누가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랴」「락스트리트」「그리운 앙트완느」「마네킹의축제」「변신」「격정만리」「길((욕)」「아침부터 자정까지」등 앙코르공연외 초총공연만 100여편이상,현재 「북어대가리」공연중.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마유미」「꿈」「나의아내를 슬프게 하는것들」등…. 영화연극상·서울연극제개인연기상·동아연극상대상·서울극평가그룹상
  • 기름진 토양/김장호 수필가(굄돌)

    윤리도덕의 타락이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고 궤도를 벗어난 부정과 비리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사회 바탕인 가정은 인간성의 본향이요 인격형성의 요람이기에 인류문명이 만든 지상최대의 제도라 했다. 그리고 가정은 신뢰와 사랑과 희망의 원천이며 따라서 그것은 참다운 인간성의 고향이라지 않는가. 순진한 동심이 최초의 교사인 부모로부터 생활의 지혜와 윤리도덕 책임의식등 삶의 기초를 익히는 인격도야의 도장이 바로 가정이다. 따라서 가정의 모체인 부부는 인생의 긴 대화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사랑하려는 의지,서로 도우려는 정성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울때 힘이 되고 용기를 잃었을때 두손을 잡아주어야하는 것이다. 도시화·산업화에 밀려 하숙생 같이 되어버린 아버지도 부권을 찾고 엄부의 자리에서 자녀의 바른 성장을 책임질 때다.자녀육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어머니의 의식개혁도 시급하다.먼저 모유를 먹여 엄마의 영양분과 체취로 정서를 함양시키고 무언의 대화로 아기 심성에 이슬비되어 기름진 토양이 되도록 해야한다.또 늘 밝은 표정·고운 말씨·보살핌으로 가정이 즐거운 곳이 되게 하고,시간엄수·책임있는 행동·선의의 경쟁을 통한 리더십을 길러야한다. 이는 부모가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기 가정에 긍지를 갖게하여 조화를 통한 안정을 이룩케함이다. 핵가족시대이기 때문에 부모의 언행이 표리일체 깊은 신뢰속에 이뤄져야 하고 또 부모의 자녀에 대한 기대치를 조절하고 보상심리를 억제하여 바른 가치관을 심어줌이 절실하다. 그러면서 계속적인 보상과 격려로 신체건강하고 지적인 탁월성을 갖고 인간관계에서의 높은 성취에서 오는 만족을 통해 사회적으로 책임있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게 해야한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귀여운 자녀에게 합리성에 기초한 바른 판단력,융통성을 기초로한 자율성,이기주의를 떠난 고매한 인격,개인 욕심을 억제할 수 있는 책임감 함양으로 도덕적 자아의 바탕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치맛바람과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정숙한 현모양처의 부덕을 살려 가정이 아버지의 왕국,어머니의 영토,자녀의 낙원이 되어 살기좋은 금수강산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 고용구조/3차산업집중 심화/통계청,92년동향 발표

    ◎전체취업자의 58.5% 차지/서비스·건설업 7% 늘어/실업률 2.4%… 46만명 경제성장의 둔화로 취업자 증가율이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제조업부문의 취업자는 계속 감소추세인 반면 건설,도산매업 등 서비스부문의 취업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등 3차산업으로의 고용집중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8일 통계청이 분석한 「92년중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취업자수는 연평균 1천8백92만1천명으로 전년대비 1.9%가 늘어나는데 그쳐 91년의 2.9%증가보다 고용증가율이 크게 낮아졌다. 이에 반해 실업자수는 연평균 46만4천명으로 91년의 43만6천명에 비해 6.4%가 증가한 가운데 실업률은 91년의 평균 2.3%에서 2.4%로 0.1% 포인트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부문별로 보면 ▲건설업은 연평균 취업자가 1백65만2천명으로 7.1% ▲도산매업은 4백24만4천명으로 4% ▲서비스업은 2백97만2천명으로 7.1%▲기타는 2백20만명으로 5.3%가 각각 증가했다. 이에 따라 전체 취업자중 3차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91년의 56.4%에서 작년에는58.5%로 높아졌다.
  • 기업진출 여건(투자 손짓/베트남의 오늘:상)

    ◎개방 6년째… 규제법령 80개 고쳐/값싼 노동력·자원풍부 최대 장점/월급 30∼40불선… 손재주 좋고 근면/도로·전력 등 엉망… 신중한 투자 필요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여기에 도이모이로 표현되는 개방화정책을 「무기」로 베트남이 외국기업들을 손짓하고 있다. 월 30∼40달러의 임금만으로도 고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기업들이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베트남을 찾는 사람들은 호치민(옛 사이공)시 「탄 손 나트」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베트남이 매우 빠르게 시장경제로 질주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거리엔 외제승용차 외제승용차와 화사한 옷차림의 여성들에게서 자본주의의 향내를 맡을 수 있고 밤의 여인들과 호치민시 벤탄시장의 왁자지껄함에서 시장경제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자전거와 오토바이,시클러(자전거에다 의자를 붙인 3륜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는 베트남인들의 밝은 표정에서도 개방의 체취는 물씬 풍겨난다. 베트남 정부는 인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의 빗장을 풀었다.88년 말이후 지금까지 소득세법과 외환관리법,관세법,토지법등 각종법규와 제도를 80여건이나 고쳤다.개방을위해 한달에 평균 1·5건꼴로 제도를 바꿔온 셈이다. 지난해 5월에는 외국인업체의 여론을 수렴,최저임금법을 개정해 종전 월 50달러에서 30달러 수준으로 낮추기까지 했다. 흔히 베트남의 투자장점으로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베트남인의 근면성이 꼽힌다.지리적 입지와 정치·사회적인 안정도 투자매력에 첨가되고 있다.때문에 국내업체들도 수교를 계기로 너도나도 보따리를 싸들고 베트남에 진출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 진출한 업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베트남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한 시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무공 조영복 호치민 무역관장은 『베트남이 너무 좋게만 인식되고 있다.아마도 그것은 인도네시아등 동남아에서 임금이 오르고 국내업체간 과당경쟁이 심화되면서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기 어려웠던 차에 베트남이라는 시장이 나타나서 그런 것같다』고 말한다. 그는 『베트남인들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근면하다.또 영리하고 정이 있다고 평판이 나있다.이러한 장점을 기업에 활용하면 생산성은 당연히 높아진다.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은 마이너스 요소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손재주가 있고 근면해서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영리하기 때문에 진출업체가 골탕을 먹기 십상이며 정이 깊어 한번 틀어지면 가까워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관련법규를 끊임없이 뜯어고치고 있다.그러나 아직도 조세·회계규정이 미흡해 기업운영에 어려움이 많고 경직된 법률 규정해석으로 진출기업이 적지 않게 애로를 겪고 있다. ○토지임대 3년계약 도로 전력 통신 항만등 사회간접자본도 문제다.전력이 모자라 개별적으로 발전기를 설치해야 하며 도로포장률이 10%에 불과해 운송비가 많이 든다. 인구 6천7백만명의 내수시장 역시 규모는 크나 소득이 낮아 구매력이 낮다. 토지사용도 50년까지 임대가 가능하나 보통 3년단위로 임대료(㎡당 0.5∼25달러)계약을 경신하게 돼 있어 3년이 지날 경우 임대료가 급등할 소지가 높다.따라서 계약때 임대료인상을 일정률이내에서 하도록 미리 정하는 것이 좋다고 이곳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특히 근로자의 최저임금이 낮아졌지만 진출업체간 인력확보경쟁등으로 조만간 오를 전망이어서 저임을 노린 임가공진출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 뉴욕필 150돌/오페라·콘서트 등 자축공연/7일부터 필하모닉주간

    ◎내년 3월엔 유럽 등 해외순회공연 떠나 수많은 음악애호가들의 사랑과 갈채를 받아온 미국 최고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뉴욕필)가 오는 7일로 대망의 창립 1백50주년을 맞는다.뉴욕필은 이 뜻깊은 날에 즈음하여 다채로운 음악행사를 펼칠 계획아래 요즘 행사준비에 더없이 바쁘다.뉴욕에서는 이날부터「필하모닉 주간」을 설정,오페라·콘서트·심포지엄·세미나·전시회등 각종 기념공연 및 행사를 갖는다.내년 3월22일부터는 베를린·부다페스트·런던·파리·마드리드·빈 등지로 해외순회공연에도 나선다. 음악을 통해 세계평화의 가교역할을 해온 뉴욕필은 지난 80년대만해도 전미순회공연 4회를 포함해 세계 50개국 3백48개 도시를 방문,수많은 음악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독일통일의 해인 89년 역사적인 동베를린공연을 통해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최근에는 AIDS퇴치를 위한 자선공연도 가줬다. 현재 뉴욕필을 이끌고있는 상임지휘자는 클래식음악을 통한 삶의 질의 향상과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보급에 힘을 쏟고있는쿠르트 마수르.마수르는 이번 1백50주년기념 첫공연에서도 관례에 따라 1893년 뉴욕필의 첫 해외공연때 선을 보인 드보르자크의「신세계교향곡」을 지휘한다.전임지휘자인 피에르 불레(71∼77년),주빈 메타(78∼91년)도 이날 무대에 서게된다. 지금은 조직과 기구가 방대해지고 연주기법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수준이란 호평을 받고있는 뉴욕필이지만 그 출범은 음악애호가들의 단출한 모임에서 비롯됐다. 1842년 봄 브로드웨이에서는 뉴욕음악협회 회원 몇몇이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이 모임은 뉴욕일원에서 「음악 미치광이」소리를 듣던 코렐리 힐이 주관했다.안건은 기악의 발전을 위해 직업음악인협회를 설립하자는 것. 이들은 모임을 몇차례 가진뒤 그해 4월23일 그때까지의 성악위주에서 벗어나 기악에 비중을 두는 「뉴욕 필하모닉협회」를 창립했다.창립회원은 모두 70명이었으며 실제 연주자는 53명밖에 되지않았다.공연리허설은 1주씩 걸러 토요일 하오에 가졌고 경비는 불참회원들의 벌금으로 충당했다. 뉴욕필의 창단은 시기적으로 적절했다.창립당시뉴욕은 인구 35만명으로 세계 7대도시의 하나로 성장해있었고 불경기였지만 부호들이 몰려있어 문화수용기반이 탄탄했다.또한 풍성한 레퍼토리로 하루종일 공연하는 극장이 4개나 있을 정도로 이미 문화적 체취가 깊숙이 배어있었다.셰익스피어와 셰리던의 희곡이 상연되었으며 에머슨·월터 스콧·바이런등 시인들의 문학활동도 잦았다.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뉴욕필은 협회를 창립한지 7개월 남짓만인 그해 12월 7일 마침내 역사적인 첫 연주회를 열었다.관객은 6백명. 이날밤 83센트를 치르고 아폴로룸에 입장한 관객들은 하얀 장갑을 낀 젊은 연주자 52명으로부터 직접 정중한 안내를 받았다.그리고 베토벤·베버·로시니·모차르트 등의 작품이 연주됐다. 공연이 끝났다.그러나 관객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느라 귀가도 잊은채 객석을 떠날줄 몰랐다.젊은 연주자들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첫공연의 성공과 뉴욕필의 무한한 가능성이 확인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서설이었다.
  • 연극배우 전무송씨(이세기의 인물탐구)

    ◎긴 갱도 헤치듯 살아온 무대인생 30년/파란·곡절·절망속에서 뼈깎는 변신 시도/몸에 밴 「햄릿형」서 탈출… 본능적 연기 발산/“인생은 걷고 있는 그림자… 주어진 시간·무대서 서성일 뿐” 하나의 공연에서 성공적인 연기자를 발견하면 뉴욕타임스의 공연평론가 잭 앤더슨은 『어둡고 탁한 브로드웨이 하늘에 오늘밤 별이 떴다』고 말하고 브룩스 애트킨즈는 『폭죽을 터뜨린듯 눈부시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60년초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학생들의 「햄릿」공연을 본 극작가 차범석씨는 『드라마센터 무대는 괜찮은 배우를 품고 있다.이제 곧 연극계에 새로운 별이 탄생될 것 같다』고 예고했다. 그후 20년이 지난 82년 극단 산울림이 연극 「쥬라기의 사람들」을 대한민국연극제 무대에 올렸을때 연극평론가 정진수씨는 『신연극 70년을 통틀어 걸출한 수작』임을 못박고 『주인공 「만석」은 인간의 표리부동과 배반,진실의 모순 속에서 정의가 얼마나 외로운가를 피가 뚝뚝 흐르는 절규로 보여주었다.그의 연기는 범용한 우리 연극계에 폭죽처럼 찬란하게 피어올랐다』고 호평했다. 드라마센터 무대가 품고 있는 「별」과 「쥬라기의 사람들」의 「만석」은 바로 연극배우 전무송이다. ○데뷔때부터 능력 인정 그리고 전무송은 드라마센터가 배출한 수많은 연기자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부상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밤하늘의 폭죽처럼 찬연하기까지는 순풍에 돛단듯 그렇게 순조로운 항해를 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파란과 곡절,절망의 나락을 수없이 넘나들었으나 지난 세월을 망각한채 성공한 오늘에 안주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전무송은 그렇지 않다. 이미 60년대부터 연극무대의 주역으로 각광받아 그는 우울한 햄릿과 세일즈맨인 윌리 로먼의 연기로 각박한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파멸되고 함몰되는 패배주의자,음습한 도시 뒷골목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이방인의 모습속에 노스탤지어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단지 새뮤얼 베케트의 블라디미르나 헤롤드 핀터의 스탠리,테네시 윌리엄즈의 브리크를 분장하지만 그는 언제나 햄릿형 배우를 면치못하는듯 했다. 그는 배우의 생명인 혁신적인 연기변신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벽에 부딪쳐 자질부족이라는 자책을 스스로에게 제기했고 햄릿과 윌리로부터 도망치려고 때때로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의 연기를 「끌과 망치로 다듬어진 대리석」이라 평했다.그만큼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리듬이 배어있지 않다는 의미도 될것이다. 결코 오지않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처럼,그리고 블라디미르가 기다림을 멈추지않듯 그의 연기세계의 앞날은 농무속의 안개꽃처럼 불투명하기만 했다. 그는 대사 한마디짜리 역할로 첫 무대에 올랐다. 재학생 발표무대에 올린 유치진작·오사양 연출의 「소」가 그것이다. 『우리집 타작은 낼 모레니까 그때 들러 술이나 한잔 하세』 무대를 가로질러 이 한마디를 하고 들어오는데 연출자가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건 술취한 걸음걸이가 아니라 깡패의 건들거림이라 했다.그날 진눈개비가 내렸다.인천행 기차를 타기위해 서울역까지 걸어내려오면서 그는 허공에 대고 『오사량,두고보자』고 소리쳤다.두빰위로 눈물과 진눈개비가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고 그는 곧잘 그날을 회상하곤한다. ○대사 한마디에 뺨맞고 전무송은 인천에서 가난한 어부 집안의 7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천공고 3학년때 대학진학을 포기하면서 신포동 동방극장에 들락거렸고 서울에 왔다가 우연히 관람한 김동원의 「햄릿」을 보고 막연히 햄릿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모의 도움으로 서울예전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입학,유치진 오사양 이해랑 이진순 이원경씨등 기라성같은 연극대가들의 연기지도를 받았으나 기본단계인 대사외우기와 작품몰입 템포부터가 너무 어눌하고 뒤늦다는 것이 교수들의 지적이었다. 어둠속에 잠긴 원형무대를 응시하면서 그는 인생의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는 참담한 후회에 허우적거렸다. 이후 그는 동랑레파토리극단창단과 함께 드라마센터내의 골방에 기숙하면서 자신의 약점들을 하나하나 극복해나갔다. 「마의태자」「춘향전」「나운규」와 「햄릿」으로서 전무송이 등장한 무대는 살아있다,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는연기자 등의 평을 받아냈고 그의 앞길에 청신호가 반짝거리는듯 했으나 인생역전은 예측 불허였다. 극단창단 6년만인 70년 유치진 2세이며 미트린티대·예일대에서 교육을 받은 유덕형이 새로운 연출자로 부임하게 된다는 뉴스였다. 모름지기 동낭의 간판배우로서 당대 대연출가들의 인정을 받고있는 전무송으로서는 자만심과 야심,오만이 넘쳐있었는지도 모른다. 연극 본고장인 뉴욕에서 본격적인 연극체험을 했다는 이 촉망받는 신성에게 그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기도 했다. 유덕형의 귀국기념 무대는 헤롤드 핀터의 「생일파티」였다. 대본을 읽는 과정에서 연출자는 「느낌이 없다」「사극조(사극조)다」하는 식으로 그에게 주역을 주지 않았다.「언더스터디」를 하라고 했다. 「언더스터디」가 무슨 소린지 몰랐던 전무송은 주인공인 스탠리의 상대역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한낱 「대역」에 불과했다. 동낭의 간판배우에게 대역이라니­.「연기에 대한 접근방법이 너무 경직되어 작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연극을 전체적으로 보지않고 자기역에만 깊이 빠지는데다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든다」「다른 등장인물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무대의 조화를 깬다」는 것이 연출자가 배역을 정한 이유였다. 전무송은 고요하고 다감하고 부드러운 반면 술만 마시면 그의 주사는 소위 「울분」을 터뜨리는 식이었다. 더구나 갓 결혼한 부인 이기순씨는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아기의 우유 살 돈,쌀 살 돈이 없어 그는 갓난아기를 연습장에 데리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혹독한 가난에 시달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날뛰었다. 유치진씨가 그를 불렀다. 『연기자는 취한 모습으로 연기할 수 없다.정결한 생활없이는 연기를 위한 시선과 접촉·언어·동작을 무대에서 구사할 수 없다』고 엄히 나무랐다. 다음해 앙코르 공연에서 신구의 TV출연으로 주인공 스탠리가 돌아왔으나 처음엔 「사극조」라고 못박아 사기를 죽이더니 유덕형이 이번엔 「리처드 버튼을 흉내내지 말라」고 힐난했다. 『넌 백날 해도 리처드 버튼은 쫓아가지 못한다.네속에 있는 네것을 끄집어내라.연기생활 10년이면 제대로 무대에 설수 있는데 왜 남의 것을 쫓는데 급급하고 있는가』 유덕형의 이 말한마디가 그에게 잠재돼 있던 영감과 본능의 연기를 끌어낸듯 그는 비로소 눈앞을 가리웠던 두꺼운 커튼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곤두박질치며 그는 이렇게 성장했다. 「생일파티」는 템포빠른 극진행과 눈부시게 현란한 조명,록뮤직 불꽃튀는 화합의 무대로 번역극일망정 『우리 연극사에 전례없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평과 함께 연극계의 화제가 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혹독한 가난 속에서 그의 부인은 회사의 경리일,그때도 6개월에 한번씩 삭월세 방을 찾아 창동에서 쌍문동 문래동 다시 인천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와 개봉동에서만 여섯차례나 이사를 다녔다. 그때까지 그는 극단 성좌,국립극단,동랑레파토리 극단에서 여전히 세일즈맨 윌리역을 해냈고 그는 인생의 비바람에 시달릴대로 시달린,피로하고 허약한 윌리 로먼이 영락없이 자신의 모습처럼 착각되었다. 그런 그에게 윌리를 벗어날 수 있는 운명적인 기회가 다가왔다.영화 「만다라」출연이었다. 어지러운 속세를 등진 채 인간적 욕망과 갈등과 싸우는 젊은 지산의 영혼은 방황하는 윌리라는 다른 또하나의 자신의 분신이었다. 짐짓 불경스러운 몸짓과 땡추임을 자초하는 그 찐득하고도 냉소적인 체취는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연기의 환희이기도 했다. ○만다라서 연기폭 넓혀 그는 「생일파티」에서 튼 본능의 연기를 이 작품에서 마음껏 펼쳐 나갔다.그가 설 무대는 광활하고 그의 역할은 얼마든지 다양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수 있었다. 그는 결국 「쥬라기의 사람들」의 「만석」처럼 좁고 길고 어두운 갱도를 나와 그때부터 눈부신 햇살속에 서있게 되었다. 아기를 맡길데가 없어 연습장에 안고 다니던 딸아이 현아는 동대 연극과에 재학중이고 아들 진우(고2)도 연극을 하고싶어 한다. 그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윌리 로먼도,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도 더이상은 아니다. 아침햇살에 사라지는 별빛,밤하늘의 폭죽같은 순간적인 아름다움도 아닐 것이다. ­인생은 다만 걷고있는 그림자,주어진 시간과 무대에 서성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초라한 배우에 불과할뿐­. 다만 예술세계에서는 어떤 우둔도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책임질 줄 아는 위치인 것이다. □연보 ▲1941년 인천 출생.전경식씨와 원복희씨의 3남4녀중 장남 축현국민교­인천중­인천공고졸업 ▲64년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현서울예전)졸업 ▲64∼74년 동랑 레파토리극단 단원 ▲75∼79년 국립극단 단원 ▲83년 극단 집현 창단 ▲현재 극단 ‘산울림’ 단원 ·64년 데뷔무대 유치진작,연출 「춘향전」을 비롯,「나운규」「마의태자」「햄릿」「수치」「태」「하멸태자」「대이인」「생일파티」「잉여부부」「돈주앙」「베케트」「쇠뜨기놀이」「초분」「고도를 기다리며」「세일즈맨의 죽음」「루브(Luv)」「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쥬라기의 사람들」「징비록」「손탁호텔」「뜨거운바다」(일본스가고헤이작 연출)「시즈위벤지는 죽었다」 「맨발로 공원을」「파우스트」등 1백여편. ·영화 「만다라」 대종상,백상연극상,대한민국연극제 남자연기상,연극평론가협회상등 수상
  • 3당 유세와 선거법 문제점(사설)

    12월 대통령선거가 공고되기도 전에 3당후보의 유세 나들이가 한창이고 그것이 자칫 과열로 이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아직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5년전 이맘때의 대통령선거 양상을 되돌아 보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과열된 것이었다.야권주자인 김영삼씨가 부산에서 1백여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기세를 올리고 김대중씨가 광주에서부터 북상하며 세몰이를 시작한 것이 10월중순이었으니,시기적으로도 10여일 빠른 것이었다.또한 여당쪽 노태우후보의 호남지역 방문행사가 일부 과격학생들의 방해를 받음으로써 유세장 폭력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상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이번 대선전은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민자·민주·국민 3당의 대통령후보들은 이번 주초부터 일제히 전국유세활동에 들어갔으나 아직은 당원대회 참석,시장돌기,농촌방문 등을 통해 집권공약을 제시하는 정도고 일부 김력공세를 제외한다면 크게 우려할만한 사태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여론은 대권주자들의 움직임에 날카로운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다.사소한 탈법·불법 사전선거운동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다.각 당의 대통령후보가 지방순회나 시장방문 등을 통해 지지를 유도하는 활동은 과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이번엔 선거법 위반사례로 공공연히 적시되고 있다.탈법·불법선거운동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엄격해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첫째,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들부터 솔선수범해서 법을 지키도록 하고 둘째,이번 대선의 과열조짐에 미리 쐐기를 박자는 것이다.그렇지 않을 경우 선거풍토 개혁과 공명선거 정착은 한낱 공념불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민자당의 김영삼총재가 어제 시장순방 등 사전선거운동으로 지적받을 수 있는 활동을 일체 중지키로 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다른 당의 호응을 기대한다.또한 이러한 옥외 순회활동의 축소가 각 당간 옥내 정책토론의 시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할때 후보자와 유권자간의 직접접촉은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과 관련하여 나쁠게 없다는 점에서 이를 불필요하게 규제하고 있는 현행 대통령선거법은 개선·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평소엔 시장근처에 얼씬도 않던 사람들이 선거때가 되자 갑자기 시장을 누비며 미소를 보내는 일은 분명 낯간지러운 일면이 없지 않다.그러나 이러한 접촉이 후보자들에게는 장바구니 물가를 체감하고 민초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정책개발의 기회가 되고 유권자들에겐 후보들의 체취나 정서까지도 판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규제보다는 오히려 권장사항이라고 본다. 문제는 법이다.현행 대통령선거법은 법정기간내 법정선거운동 이외에는 일체 불허하는 이른바 포괄적 제한규정을 통해 후보와 유권자간의 이러한 선의의 접촉도 차단하고 있다.또한 통상적인 정당활동과 선거운동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해 항상 논란의 과제가 되어 왔다. 법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지킬 수 없거나 지키려들지 않는 법은 현실에 맞게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현행 선거법을 서둘러 고쳐서 무의미한 탈법·불법 사전선거운동 시비를 종식시켜야 할 것이다.이는 선거법 개정작업을 맡고 있는 국회 정치특위가 할 일이다.물론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각당 각 후보는 현행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인내를 보여야 할 것이다.
  • 오늘 의거 83주년… 한·중·일 3국 입체취재

    ◎안중근의사/“동양평화 지켰다” 중국인이 더 추앙/이등 저격 하얼빈시선 해마다 확술대회/기념비 곧 건립… 여순감옥엔 유품 보존 우리는 해마다 10월이 저물어가면 의사 안중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19 09년 10월26일 하얼빈역두에 터뜨린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더 이상 침략책동자로 세워두지 않은 의거의 그날이 돌아오기 때문이다.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매도,끝내는 교수대에 세웠다.그러나 안의사는 지금 영원한 휴머니스트이자 또 평화론자로 추앙받고 있다. 1909년 10월26일 상오 10시가 막 지나는 시각.모두 6발의 총성이 중국 흑용강성 하얼빈시 하얼빈역두에 울려 퍼졌다.의장대 사열을 끝내고 귀빈열차를 향해 몸을 돌리던 일본의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향한 안중근의사의 육혈포가 불을 뿜는 소리였다.그날의 총성이 사라진지 83돌을 맞은 하얼빈역은 신역사를 짓는 건설현장의 굉음과 종종걸음치며 플랫폼을 오가는 중국인들의 말소리만이 어울려 요란할 뿐이다. 이등박문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 1번 플랫폼앞 현장에는 뜰이 조성돼 대형플라스틱에 담긴 화분이 몇개 놓여 있었다.피격지점에서 10m쯤 떨어진 러시아군 사열대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었던 안의사의 저격장소는 이곳에 새로 지어진 1등 대합실건물에 편입돼버렸다.이등이 쓰러진 곳은 몇년전만해도 피살지점을 표시하는 둥근 녹쇠판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등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의사가 5개월에 걸친 수감생활끝에 1910년 3월26일 상오10시15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여순형무소.당시 악명 높았던 이「인간지옥」은 요령성 대연시 서쪽 40㎞지점에 「여순일아감옥구지」라는 현판아래 지난88년부터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안의사가 복역한 지하감방은 간수사무실부속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감동 복도벽에는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이라고 쓴 액자속에 안의사의 수감당시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이밖에 유화초상화·족자·유시「장부가」가 담긴 액자등이 걸렸다. 안의사에게 교수형이 행해졌던 교형실은 감옥 동북쪽 구석에 감춰진채 15평남짓의 좁은 공간으로 남아있다.교수대는 2층으로 꾸며져 있고 시체처리통까지도 보존됐다. 현재 6만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하얼빈시에는 2개의 안중근연구회가 있다.안의사추모사업은 지난89년 의거80주년을 맞아 한·중·일의 학자들이 하얼빈역에서 추모회를 가진 이래 학술대회를 잇따라 열어 왔다.또 안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대형오페라가 공연되는등 추모붐이 대단했다.최근에는 새로 발굴된 자료를 모은 안중근사료집발간을 준비중이며 안의사기념비를 피격현장에 세우기위해 중국정부와 교섭도 벌이고 있다.당초 하얼빈역 광장에 안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었지만 일본과의 불편한 입장을 고려한 중국측의 소극적 태도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얼빈시내 동북열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근대사소개부문에도 안의사의 영정과 기념자료등을 손문다음으로 다루는등 안의사에 대한 중국현지의 평가와 연구열기는 그 어느때보다 높다. ◎국내/국내연구 활기­일선 “평화주의자” 새 시각/학계 동향/대중수교 계기 새 자료발굴 기대 우리나라에서의 안중근연구는 올해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계기를 맞고있다.그 이유는 중국이 「역사의 현장」인데다 그동안 우리측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도 가능해졌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에따라 그동안 한정된 자료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학계의 상황도 크게 개선되어가고 있다.또 안의사의 의병활동기지였던 러시아측의 연구성과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여서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림성 조선연구소가 국내에서의 안중근연구를 희망해오는가 하면 러시아사회과학원 동방연구소에서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우리나라에 와서 발표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최석우신부)에서는 안의사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점을 고려,프랑스측이 소장해오던 자료를 입수,연구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은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로 안중근연구에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때일수록 연구자들은 일과성이 아닌 체계적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새로 입수된 자료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해석이 나올 경우 안의사연구에 자칫 흠집을 남길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다.안중근의사에 대한 저술은 물론 연구결과를 집약한 논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기존의 학술자료로는 「한국독립운동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안에 수록된 공판기록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 기록등이 정리돼 있다.또 논문은 신용하교수(서울대)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등이 꼽힌다.저술은 주로 전기류인데 안의사 의거 이후에 쓴 박은식의 「안중근전」이 있고 해방후에는 「의사 안중근」(만수사보존회·1964년)과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 숭모회·1970년)등이 나왔다. 그리고 안의사를 기리는 단체는 사단법인 안중근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안중근의사장학회등이 있을 뿐이다. ◎일본/올 전기 등 2권 출간… 사당건립도 안중근에 대한 가해자쪽인 일본에서 안의사 평가는 「암살자」와 「휴머니스트」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시각으로 나타났다.테러리스트 시각을 가진쪽은 안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정권담당자들이다.그리고 휴머니스트로 보는쪽은 안의사의 재판에 참여한 판사와 검찰관,여순감옥의 형리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 일본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다.안의사를 휴머니스트로 보는 시각도 두 갈래로 나뉜다.그 하나가 중천팔양교수(축파대)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이끌려지는데,여순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이 『한일관계의 원전으로 오늘날 더욱 빛나는 혜안이었다』고 극찬한다.동아시아의 제국이 우방과의 신의를 축으로 한 동맹관계를 수립,러시아에 대응방위를 해야한다는 안의사의 주장은 오늘날 일본에 좋은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형무소장과 변호사는 물론이려니와 검찰관·재판관들이 서 있다. 재판과 수형생활등의 과정에서 안의사의 높은 지적수준과 고결한 인품이 자신들을 매료시켰다고 회고한다.오늘날 남아있는 안의사의 유묵은 그들에 의해 고이 간직되어 온 것이 많을 정도다.또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어 일본안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현재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와카야나키의 대림사에 세워지고 있는 안의사의 기념사당도 그러한 경우다. 「테러리스트아닌 독립운동가」라는 시각에 따라 「안중근 무죄론」까지 제기되어 주목을 끌었다.특히 올들어 최근 일본에서는 안중근관계 저술이 2권이나 새로 출간됐다. 그 하나가 중야태낭교수(아세아대교수·국제관계학)의 「안중근」(아기화방간행).한국관계의 원상이라는 부제로 간행된 이 저술은 이토를 저격한 안의사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생애와 사상/의병투쟁땐 일군포로 석방/「동양평화론」 저술한 선각자 안중근의사는 1879년9월9일 황해도 해주 한 향반의 집에서 태어났다.그리고 나서 31살을 일기로 1910년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까지의 삶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 생애에서 안의사가 평화론자였다는 사실은 여러군데서 찾아진다.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고종 양위와 함께 군대가 해산됐을 때 독립전쟁을 주장하면서 의병활동에 뛰어든다.그는 의병전투기간에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그러나 이 사실은 오히려 의병활동을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이라는 국제공법에 근거,포로를 인도적으로 처리한 사례로 평가 되고있다.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힌 뒤 쓴 미완성원고 「동양평화론」은 그의 이같은 사상적 배경을 구체화한 것이다.「독립한 청국 한국 일본이 일심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게 된다」는 논리를 편다.그래서 개화의 역으로 진보,구주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할 때 동양평화가 실현되고 또 유지된다고 주창했다. 이토는 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에도 역행했다는 것이 안의사의 주장이다.그의 자서전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등의 15개조의 죄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안의사는 자신의 행동을 『한국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토를 공격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 남북화해·협력의 기틀 마련/정원식내각 16개월 결산

    ◎시위·노동쟁의 해소… 사회안정 공헌/새질서운동 등 벌여 경제회복 기여 8일 하오 총리이임식을 마치고 정부종합청사9층 총리집무실에 마지막으로 들른 정원식전국무총리는 1년4개월동안 자신의 체취가 흠뻑 밴 집무실 창옆에 서서 깊은 감회에 잠겼다. 이제 궤도를 잡기 시작한 남북대화·학원및 노사문제를 포함한 사회안정·교육문제·환경문제 등 재임기간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갖가지 시책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치는 듯 했다. 국무총리라는 막중한 직무를 맡아 「6공 최고의 총리」로 평가받기도 한 「교육자 정원식」은 조용히 물러났다. 총리실을 비롯한 관가에서는 그의 재임기간중 큰 업적으로 단연 사회안정과 남북대화를 꼽는다. 정전총리가 취임한 지난해 5월은 강경대군 치사사건이후 계속된 시위정국과 노동쟁의가 겹쳐 사회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학원과 산업안정을 포함,사회전체의 안정을 되찾는데 국정운영의 역점을 두겠다고 천명하며 의욕을 보였다.그러나 취임 열흘만인 6월3일 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 학생 2백여명에게 둘러싸여 계란과 밀가루세례를 받고 폭행당하는 봉변을 겪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은 준엄하고 현명했다.총리이전에 한 교수로서 맡았던 강의를 책임지기 위해 종강을 하고 나오는 스승을 끌고 다니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문명국가에도 없는 개탄스런 일이라고 국민들은 한결같이 꾸짖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각종 불법시위와 폭력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학생시위의 참가자수가 격감하는 등 학생과 재야의 시위가 한풀 꺾이고 사회도 점차 안정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전총리는 우선 남북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4차회담에서 8차회담까지 5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발효시키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부속합의서까지 발효시켰다. 정전총리는 분야별 부속합의서채택에 최대의 장애로 제기된 북한의 한미방위조약폐기·국가보안법철폐주장등을 철회시키는 협상의 노련함도 발휘했다. 이로써 남북간 화해및 교류협력이 실천단계에 접어들게 되어 정치·군사교류협력분과위등 협의기구와 군사공동위등 5개 실천기구를 남북이 구성,현안을 논의하게 됐고 남북공식연락창구로 남북연락사무소가 설치됐다. 정전총리는 재임기간중 「남북화해와 협력의 기틀마련」이란 위업을 해낸 것이다. 이와관련,학도병의 한사람으로 6·25에 참전했던 정전총리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에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느끼며 부속합의서 발효까지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회담이 계속 진행돼야 전쟁재발을 막을 수있다』며 지속적인 회담을 강조했다. 그러나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실향민인 그는 남북한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을 가슴아파하며 후임총리가 꼭 이 일을 성사시켜주길 바라고 있다. 그는 총리취임전 문교부장관으로 2년간 재임한 경력을 바탕으로 취임당시부터 국정관리자로 각부처간 업무조정에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취임당시 정전총리는 주부들이 느끼는 피부물가의 상승,국제수지적자,생산성저하및 경쟁력낙후,근로의욕좌절등으로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 위기국면을 맞았었다. 그는 이를 극복키위해 경제부처간 업무협조가 잘되도록 필요할 경우 관계부처사이의 다리를 놓아주고 조정역할을 원활히 수행,국제수지적자를 50억달러로 줄이고 농가소득을 18%나 상승시키는등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이는 정전총리가 중점을 두고 추진한 「새질서 새생활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그가 앞장선 「30분 더 일하기 운동」,「근검절약 운동」,「식생활개선 운동」,「교통사고줄이기 운동」등은 이제 사회전반에 확산되고 있어 정착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신으로 미뤄볼 때 앞으로도 나라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학문분야에서 못다한 집필을 완성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스승 고 오천석박사가 고희에 이르기까지 공직생활을 한뒤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꼭20장의 원고를 써 방대한 전문서적을 남긴 예를 귀감삼아 이제 총리에서 학자로 되돌아 갔다.
  • 대전 엑스포 홍보사절 임수지양(맹렬여성)

    ◎4개국어 능통… “박람회 PR 자신감” 『국가적 큰 행사인 대전 EXPO의 홍보사절로 뽑혀 영광입니다.앞으로 작은 힘이나마 우리나라를 알리고 외국관람객을 유치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지난달 27일 열린 EXPO홍보사절 선발 최종심사에서 뽑힌 3명 가운데 특히 외국어에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임수지양(22·미국스미드대학4년)은 홍보사절로서의 포부를 다부지게 밝힌다. 오랜 외국생활로 서구적 체취가 물씬 풍기면서도 우아한 한국인의 미까지 겸비한 임양은 우선 태도부터 매우 당당하다. 본선 사회자와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후보들이 겸손(?)하게 대답한 반면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제가 뽑혀야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해 심사위원을 놀라게 했을 정도다. 홍보사절로 뽑힌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EXPO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연구한 것처럼 자세히 설명한다. 『EXPO가 중요한 행사임에 틀림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너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그래서 특히 청소년을 비롯한 국민들에데 EXPO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앞으로 이 행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집중 홍보할 작정입니다. 지난달 22일부터 28일까지의 합숙기간중 대전은 EXPO현장을 둘러봤다는 임양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지만 규모의 방대함에 감탄했으며 홍보사절요원으로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아나더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이제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만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여지고 책임감이 무거워진다며 예의 겸손함을 잊지는 않았다.
  • 충북 유병국경무관/신인 지방경찰청장 5명 프로필

    ◎학자체취 강하게 풍기는 선비형 경찰관이라기 보다는 학자적 체취가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선비형. 「악법도 법」이라는 법언을 존중한다고 밝힐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매사에 차분하고 침착한 반면 때로는 보스기질이 보완돼야 한다는 얘기도 듣는다. 부인 손승자씨(52)와 2남1녀. ◇유청장약력(52·충북 중원출신)=▲충주사범학교졸 ▲간부후보16기 ▲서울 남대문경찰서장 ▲치안본부 감사과장 ▲서울경찰청 교통지도부장
  • 안익태선생 옛집엔 연미복 그대도…

    ◎46∼65년거주 스페인 마요르카섬을 찾자/작년 교포가 구입… 말끔하게 보수/67년 「안익태거리」지정,업적 기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선생의 미망인 롤리타여사(76)를 만나기 위해서는 팔마시내 중심가에 있는 둘째딸 세실리아(41)의 집을 찾아가야 했다.팔마시는 스페인령 발레아레스제도의 주도이자 마요르카섬의 중심도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세실리아의 아파트에서는 그러나 세실리아보다는 롤리타여사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국식 고가구에서부터 거실의 장식장안을 가득 채운 조선백자에 이르기까지…. 롤리타여사를 따라간 그들의 옛집은 팔마시를 막 벗어난 손 마테트지역의 서세프 코스타 4번지.세실리아의 아파트앞에서 택시를 타고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6㎞쯤 되는 거리다. 선생의 집은 4차선의 해안도로에서 한블록 들어가 조용하지만 퇴락한 주택가에 있었다. 수리를 끝낸지 얼마되지 않는듯 주위의 다른 집들과는 달리 말끔히 단장된 2층 집은 건평이 2백19㎡,즉 70평이 조금 못되는 정도라고 했으나실제로는 더 작아보였다. 이집은 안씨부부가 마요르카섬에 정착한 지난 46년 이후 선생이 바르셀로나의 한병원에서 숨을 거둔 65년까지 함께 살았던 곳.롤리타여사는 이집을 선생과 함께 살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고 말했다. 소박한 2장의 여닫이 판장문을 밀고 현관을 들어서면 곧바로 벽난로가 있는 거실이다.벽난로위에는 안익태선생이 작곡하는 모습을 그린 3장의 그림이 걸려있다. 거실 오른쪽 구석에는 원래 선생이 쓰던 업라이트피아노가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한국문화사절단의 공연이 열리기로 한 팔마의 오디토리엄극장에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 현관 왼쪽에 있는 식당은 바로 선생의 작업실. 6평정도의 널찍한 방 복판에는 8명이 족히 앉을 수 있는 큼지막한 탁자가 놓여있었다.선생은 그러나 이 식탁보다는 그 옆에 초라하게 놓여있는 1인용 원탁에서 주로 작곡을 했다고 롤리타여사가 일러줬다. 선생은 평소에는 이곳에서 작업을 했지만 날씨가 좋을 때는 이 원탁을 들고 2층 베란다로 올라가 편지를 쓰거나 작곡을 했다고 한다. 이 식당의 북쪽 벽에는 사람키보다 약간 큰 흔해보이는 장식장이 놓여있다. 롤리타여사는 선생과의 행복했던 모든 기억을 이 장식장 하나에 담아놓은 듯 가벼운 흥분속에 내용물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 지휘봉들은 특별히 튼튼하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어요.선생은 연습을 하다 틀린 대목이 나오면 지휘봉으로 보면대를 세게 두드리곤 했는데 보통 지휘봉 가지고는 하루에 열개라도 부족했지요.또 선생이 40년대에 갖고 다니던 이 여권을 보면 선생이 당시 얼마나 왕성하게 연주여행을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롤리타여사는 이 장식장안에 1946년 선생과 결혼한뒤 선생의 음악활동을 실은 거의 모든 신문기사를 모아 두기도 했다. 2층은 2개의 침실과 부엌 그리고 욕실로 되어있다.롤리타여사는 선생과 함께 쓰던 남쪽 침실의 옷장에 아직도 선생의 옷가지를 보관해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선생이 숨을 거두기 불과 3달전인 1965년7월4일 런던의 로열앨버트홀에서 런던심포니를 지휘할 때 입은 「마지막 연미복」은 바로 오늘 저녁 연주회에서 입어도 될 만큼 손질이 잘 되어있었다. 선생이 즐겨 작업을 했다는 베란다는 지중해를 면해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집은 음악을 사랑하는 집주인의 호의로 그동안 선생부부가 적은 임대료만으로 살고 있었다.그러나 지난해 이 집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교포실업인 권영호씨(52)가 12만6천달러를 주고 사들였고 다시 13만달러를 들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한뒤 우리정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정부는 팔마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공관이 3백㎞쯤 떨어진 바르셀로나총영사관인 만큼 인원이 상주하지 않고는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해 아직 접수를 유보하고 있다.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이집을 「안익태 기념관」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이 집에서 나와 「안익태거리」로 가기 위해서 다시 택시를 탔다.옛집이 팔마시내를 벗어난 서쪽인 반면 그의 거리는 팔마시의 동쪽 끝이었다.큰길에서 해변에 이르는 4백m쯤의 길이인 「안익태거리」는 지난 67년 지정,당시만 해도 한적한 시골길이었으나 지금은 고급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중심로가 되어 있다. 롤리타여사가 마요르카에 사는 재미는 이날 일행이 타고 다녔던 택시의 운전사처럼 대부분의 팔마사람들이 「마에스트로 안」을 아직도 기억하고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때문인 것같았다.
  • 현대전자 주력업체 취소등 제제조치 백지화/외환은,곧 통고방침

    현대전자에 대한 주력업체 선정취소등의 제재조치가 전면 백지화됐다. 금융당국은 은행대출금 1백33억원을 운전자금 이외의 용도로 유용한 혐의를 받은 현대전자에 대해 첨단수출업체란 점을 감안,지난달 21일 유보했던 주력업체취소및 당좌대출한도 축소등의 제재조치를 내리지 않기로 27일 최종 결정했다.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이같은 방침을 금명 현대측에 통보하는 한편 앞으로 같은 사례가 재발될 경우 엄격한 제재조치를 내리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현대전자에 대한 제재조치를 백지화한 것은 외환은행이 지난달 중순이후 한달여동안 종업원의 주식매입자금을 회사측이 대납했는지를 중점조사한 결과,회사측의 대납금액이 2억7천만원으로 밝혀졌으나 그 액수가 미미하고 나머지 금액도 회계처리상의 실수였다는 점을 참작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지난달 3일 현대전자가 은행당좌대출금 43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은행감독원의 수표추적결과 드러남으로써 시작된 이번 사태는 이후 주력업체선정취소,대출금유용액수 1백33억원,제재조치유보등의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됐다.
  • 외환은,「대출금유용」 못밝혀/현대전자 제재 없을듯

    대출금을 유용한 것으로 밝혀진 현대전자에 대한 주력업체취소등의 제재조치가 백지화될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금융계에 따르면 현대전자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이천현지공장등에 대한 한달여에 걸친 대출금 유용조사를 이날로 끝마치고 철수,내주중에 실사결과와 함께 제재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외환은행은 이번조사에서 정주영씨소유의 현대중공업·현대엘리베이터등의 주식을 매입한 5천여명의 헌대전자종업원들이 주식매입대금을 개인돈이 아닌 회사의 가불금으로 충당됐는지에 대해 집중조사해왔으나 이를 확인하지 못한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현대전자는 지난달 23일 은행감독원이 유보했던 주력업체취소및 당좌대출한도등의 제재조치를 받지않을 전망이다.
  • 현대전자 제재유보 안팎/“기업은 살려야” 현실론 선택

    ◎주거래 환은의 실무처리만 남아/주력사 여신규정 개정등 과제로 대출금을 유용한 현대전자에 대해 당국이 제재결정을 당분간 유보한 것은 대출금 유용사실은 명백하나 주력업체 취소가 현대그룹이나 전체 경제에 미칠 엄청난 영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은행감독원으로서의 제재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번 결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후퇴라느니,「당국의 자충수」라는 등의 의견도 있으나 명백한 대출금유용이라는 명분논과 기업주는 벌하되 기업은 살려야 한다는 현실논 사이에서 은행감독원이 내린 최선의 고육지책이란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난 3일 하오7시 감독원이 현대전자가 48억3천만원의 당좌대출금을 정주영씨와 통일국민당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된 이번 사태는 유용액수만 1백33억원으로 늘었을 뿐 제재조치없이 20일만에 일단락됐다. 감독원은 당초 3·24총선 전후 정씨에게 회사측의 정치자금이 건네졌다는 제보를 받고 수표를 역추적,대출금유용사실을 밝혀냈으나 이 돈이 주식매각대금이라는 현대측의 해명을 듣기 하루전날에 주력업체취소 등의 강경제재조치를 발표하는 성급함을 보였다.이어 제재조치를 놓고 당국자간의 엇갈린 이견,현대전자측의 반박광고와 함께 정몽헌회장의 사과방문,그룹과 정부와의 화해설속에서 지난 10일과 17일 두차례 발표가 연기된 이번 사태는 결국 사실상의 제재조치 철회로 낙착됐다. 이 과정에서 은행감독원은 여신관리규정을 적용하는데 있어 형식에만 얽매이는 경직성과 함께 공신력의 실추라는 상처를 입었다.현대전자는 정경분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여론의 질타와 주먹구구식 회계처리를 바로잡지 못한 비난과 함께 자금및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21억달러어치의 반도체를 수출한 현대전자측은 주력업체지정이 취소될 경우 올해 설비투자자금 3천억원의 조달은 물론 금융권의 대출길이 막혀 자칫 회사존폐의 위기로까지 몰렸었다. 이번 사태의 원만한 해결에는 기업회계처리및 대출금유용에 따른 조사가 타그룹과의 형평에 어긋난다는 여론도 한몫 거들었다. 현대전자에 대한가혹한 제재가 자칫 기업의 투자의욕을 꺾는 등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것이라는 우려가 유보결정에 크게 작용했다. 외환은행의 실무적인 추가조사를 남겨놓은 이번 사태는 앞으로 주력업체제도에 대한 선정과 사후관리에 따른 여신관리 규정 개정의 짐을 남겼다. 당국은 이에대해 그룹별 3개사 선정의 주력업체제도를 현행대로 유지하되 재계의 요구처럼 업종별로 선정하는 방안등을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현대그룹을 비롯한 모든 재벌그룹들에는 회계처리의 엄격한 분리와 함께 회사자금의 사외유출,즉 가지급금 등을 하루빨리 회수해 기술개발 등 경쟁력강화에 힘써야 하는 책무를 확실히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번 조사에서 정씨등이 주식매각대금을 신고납기일보다 빨리 받아 증권거래법에 위반된 점은 향후 사법당국의 처벌 여하에 따라 정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추이가 주목된다.
  • 현대전자 제재 유보/은감원/첨단수출업체등 감안

    대출금을 용도외로 유용한 현대전자(회장 정몽헌)에 대한 주력업체취소 등의 제재조치가 당분간 유보됐다. 황창기은행감독원장은 23일 상오 기자회견을 갖고 『외환은행의 실사결과 현대측이 당좌대출금을 빼내 정주영씨 등의 정치자금 등으로 유용한 금액은 당초의 48억3천만원보다 많은 총1백33억원으로 확인됐다』고 밝히고 『그러나 현대전자가 첨단수출업체라는 점과 주식매각대금이 납부됐다는 점을 감안,주력업체 자격취소 등의 제재조치를 당분간 유예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외환은행의 추가조사결과 현대전자 종업원들의 주식매입자금이 개인 돈이 아니라 회사가 빌려준 가불금 등으로 드러나면 주력업체취소는 물론 당좌대출한도의 축소 등의 제재조치를 내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 황창기 은행감독원장 문답/“회계처리 실수 정상 참작… 방침 바꿔”

    황창기은행감독원장이 이날 현대전자의 대출금유용에 대한 처리방향을 발표한뒤 기자들과 가진 일문일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초 방침과 달리 여신관리규정을 무시하고 제재조치를 완화한 이유는. ▲현대전자가 연간20억달러의 첨단반도체를 수출하는 기간산업체인데다 주식매각대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사소한 회계처리 실수를 정상참작했다. 또 주력업체 취소가 너무 심하다는 여론과 함께 국가경제에 미칠 악영향도 고려했다. 규정을 꼭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보며 현실에 맞게 탄력적으로 감독원장이 운용할 수 있다고 본다. ­외환은행의 실사가 계속중인데 유보결정을 발표한 배경은. ▲그동안 조사에서 윤곽이 드러났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난무하는 여러 추측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하루빨리 결말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같은 발표에 앞서 정부와 협의하는 것은 당연하며 정책당국으로서 주거래은행에 대해 처리방향을 제시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주력업체취소는 안하는 것인가. ▲주식매각 대금이 확실하다면 안하겠다.만약 추후조사에서 회사가 종업원들에게 가불을 해주어 이 돈으로 주식매입 대금을 내도록한 사실이 드러나면 주력업체취소와 함께 당좌대출한도도 축소할 것이다. ­증권거래법 위반내용은. ▲정주영씨 등이 주식을 팔면서 지난 2월11일 대금을 납부받기로 신고를 했으나 지난해 12월31일과 1월11일에 이미 66억원을 받은 것이 관계법상 불성실 선고에 해당된다. 이 경우 증권감독원의 고발에 따라 사실일 경우 주식소유자가 1천만원이하의 벌금이나 징역2년이하의 처벌을 받도록 돼있다. ­외환은행이 추가로 조사하고 있는 것은. ▲현지공장의 주식매입·종업원을 상대로 매입자금의 출처를 캐는 것이나 인권침해 등의 소지가 있어 지난20일 현지조사를 일단 중단하고 서류조사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 자금이 회사돈으로 밝혀진 사례는 없다. ­이번 사건으로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관계규정을 개정할 의사는. ▲대출금의 사후관리에는 어려움이 있어 이를 보완해 나가겠다. 주력업체 제도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개선을 검토하겠다.
  • 정몽헌씨,5개사 말은 그룹의 주축/구속 계기로 본 위상

    ◎다른 계열사에도 타격 확산/정세영회장 직접 공백메우기 나서 현대상선탈세와 관련,정몽헌부회장이 구속됨에 따라 그가 이끌어온 현대전자·현대엘리베이터등 현대그룹 5개 계열사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특히 현대상선의 경우 최경희 전관리본부장이 구속된데 이어 관리본부장인 김충식상무·관리담당 황선욱이사등 핵심 경영진 2명이 검찰의 소환에 불응,수배중에 있어 회사업무가 거의 마비된 상태이다. 정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현대전자도 대출금유용과 관련,은행감독원의 주력업체 제외 여부를 기다리고 있어 임직원들은 일손을 놓은 채 당국의 결정을 걱정스럽게 관망하고 있다. 정몽헌씨는 정주영국민당대표의 5남으로 지난 1월 정기인사에서 현대전자회장으로 승진,그룹사장단운영회의에도 참석하는등 차남 몽구씨(현대정공회장)와 함께 현대를 이끌어 가는 주축의 한명이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측은 정씨가 구속될 경우 그가 맡고 있는 5개 계열사는 물론 다른 계열사까지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정세영회장이 직접나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모색하는등 사후 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회장을 비롯,전·현직임원이 대거 구속된 현대상선은 실질적인 경영을 맡아온 정씨의 구속에 대비,김주용사장과 회사본부·관리본부·전용선영업본부·컨테이너영업본부·살물선영업본부등 전무와 상무로 구성된 5개 본부장을 중심으로 비상 경영체제에 돌입한다. 현대상선은 올해 예정된 내륙화물운송기지와 미국 LA의 화물터미널 건설,홍콩·독일등 현지법인설립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이번 탈세사건으로 신용도가 떨어져 해외거래선이 거래를 변경·취소하는 사태도 나오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고 있다. 정씨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전자는 대출금 유용혐의로 주력업체취소 여부까지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현대전자도 상선사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주용씨가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으나 올해 예정된 3천억원규모의 신규기술투자가 자금사정으로 어려워지는등 정씨 구속에 따른 여파는 엄청날 것으로 걱정. 특히 그룹의 주력업종이 중공업·건설에서 첨단산업쪽으로 이행되는 과정이고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고용 사장인 김씨가 자금조달등을 독자적으로 떠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대그룹측은 정씨의 구속에 대해 『현재로서는 공식적으로 입을 열 입장이 못된다』면서 『정씨의 부재에 따른 경영공백을 최대한 메우기위해 임원진을 중심으로 최대한 노력할뿐』이라며 침통해했다.
  • 현대전자 제재 또 연기/외환은/실사 계속… 내주 최종결정

    현대전자에 대한 주력업체 취소여부결정이 다시 연기됐다. 외환은행은 17일 현대전자에 대한 대출금유용여부에 대한 확인작업이 덜 끝나 취소여부결정을 내주초로 연기했다고 밝혔다. 은행측은 『정주영씨등에게 전달된 대출금이 현대가 주장하는 주식매각대금인지를 확인하는 실사가 이천현지공장등에서 계속되고 있다』면서 『내주초에나 확인작업이 끝나 유용사실여부를 가린뒤 주력업체 취소여부를 최종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초 은행감독원은 외환은행측에 지난 10일까지 주력업체취소등의 제재여부를 보고하라고 통보했다가 은행측의 요청에 따라 17일까지 1주일 연기했으며 또다시 최종결정을 뒤로 미뤘다.
  • 증권관리위,주식거래규정 확정

    ◎외국인 투자한도 수시 공시/외국법인의 자회사·현지법인 별도 외국인 간주/신용거래 불허… 9월말 현재 16억 재투자 가능 1일부터 해외증권 전환주식을 보유한 외국인들은 이를 팔아 현재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투자분과는 별도로 종목당 외국인전체총액한도 5%와 1인당 투자한도 2%의 범위내에서 국내주식에 투자할 수 있다. 증권관리위원회는 내년 1월의 주식시장개방에 앞서 10월부터 해외증권전환주식 매각대금의 국내재투자가 허용되는데 맞춰 「외국인의 주식매매거래 등에 관한 규정」을 30일 제정했다. 이 규정의 적용을 받는 외국인은 해외증권 전환주식을 팔아 다른 주식을 사는 재투자외국인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내년 1월 일반외국인에 대한 주식시장 개방후에 이 규정이 대부분 적용될 것으로 알려졌다. 재투자외국인의 주식보유지분은 외국인들의 현재 지분과는 별도로 취급되므로 개방초기 외국인의 지분은 종목에 따라 외국인의 전체총액한도(10%)및 1인당 투자한도(3%)를 넘을 수도 있다. 외국인의 주식투자에대해서는 내·외국인 동등대우를 원칙으로 하되 신용거래는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외국인의 범위는 외국국적 개인,외국법인,외국인이 과반수 출자 또는 사실상 지배하는 국내법인 이외에 국민인 해외영주권자,IMF(국제통화기금)등 국제금융기구및 유사단체등으로 정했다. 또한 동일외국인의 범위는 원칙적으로 법인격을 갖춘 실체를 기준으로 외국법인의 자회사 또는 현지법인은 별도의 외국인으로,외국법인의 본점과 지점은 하나의 외국인으로 간주하되 국내지점은 별도의 외국인으로 분류키로 했다. 한편 증권감독원은 무국적자 2중국적자 투자등록이 취소된후 2년이 경과되지 않은 외국인등은 투자등록을 거부할 수 있으며,외국인이 투자등록 없이 증권투자를 하는 경우와 차·가명거래시 의결권 행사를 금지시키기로 했다. 증권감독원은 외국인의 종목당 투자가능주식수를 알 수 있도록 종목별 외국인 전체취득 한도와 1인당 취득한도에 해당하는 주식수를 공시하게 된다. 한편 지난 9월말현재 전환가능총주식수(10개종목·9백44만5천70주)가운데 0.9%인 5개종목 8만2천2백73주(16억원)가 주식으로 전환됐으며 나머지는 아직껏 사채등의 형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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