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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회공초문학상/이형기씨 선정/서울신문사주최 공초선생 숭모회 주관

    ◎5일 30주기 맞아 성대한 추모행사/“초윤리의 사상가·시를 체험한 시인”평/후배문인들 91년 기금1억 마련 근대 신시운동의 선구자이자 자신이 즐겨 피우던 담배연기처럼 살다간 기인 공초 오상순시인(1894∼1963)이 우리곁을 떠난지 5일로 30주기를 맡는다.올해는 또 선생의 탄생 99돌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서울신문사와 공초오상순선생숭모회(회장 구상)는 선생의 설흔번째 기일을 맞아 3일 상오11시 문인·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수유리 빨래골 묘소에서 기제를 올린다.이와함께 하오4시부터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올해 처음 제정한 「공초문학상」시상식을 개최한다.제1회 수상자로는 이형기시인이 선정됐다. 이어 열릴 추모행사에서는 수상자인 이형기시인이 「공초의 시와 공사상」이란 공초론을 발표하며 시인 이원섭씨(숭모회 부회장)가 「공초의 생애와 사상」강연등 성대한 행사를 치를계획이다. □공초문학상제정배경및 취지 「공초문학상」은 지난91년 10월 공초선생의 제자인 구상숭모회회장 주도로 서울갤러리에서열린 「공초문학상기금마련 희사작품전」의 수익금으로 제정됐다.숭모회측은 구상·박두진·서정주·조병화·설창수·홍윤숙씨등 문인들과 화가 김기창·김영주·박고석·이대원씨등 모두 1백5명이 내놓은 자작친필과 소장품 1백32점을 팔아 모은 기금 1억1천5백만원을 지난4월 서울신문사에 기탁해 온 것이다. 이에따라 「공초문학상」은 서울신문사 주관으로 매년 시부문 1명을 시상하며 시상대상자는 20년이상의 문단경력을 가진 작가로 작품의 우수성뿐만아니라 수상자의 인품을 고려하는등의 운영규정을 정했으며 매년 6월중 시상식을 갖게 된다. □공초의 생애와 사상 오상순은 1894년 8월9일 서울 시구문안(지금의 장충동2가)에서 태어났다.비교적 개방적인 중산층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경신학교를 거쳐 19세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경도의 동지사대학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한 인텔리였다. 1920년 변영노·남궁진·김억·염상섭과 함께 한국신시운동의 선구가 된 동인지 「폐허」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허무혼의 선언」「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등 명시를이때 발표했다. 청춘기의 공초는 만년의 트레이드마크인 빡빡깎은 머리와는 달리 길게 드리운 올백머리의 멋쟁이 청년이었다.그는 40대에 대구에서 연하의 과부와 잠시 동거생활을 한 이외에는 평소 지론이던 독신주의를 지켰다. 그는 살아생전 혈육한점,머물 지상의 집한칸,시집 한권 내지 않았다.공간을 초월,시간속에 영원히 산다고 해서 「공초」라 했던가.그득한 담배연기속에 묻혀 살았다고 「꽁초」라고 불리었던가.그의 삶은 세속을 떠난 성자의 그것이었다. 6·25를 전후해 서울 푸라워,대구 아리스,부산 금강,서울 명동 청동,서라벌등 다방을 무대로 문학을 교리처럼 설파한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며 신화다.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담배불을 꺼뜨리지 않았다.제자의 결혼식 주례에서도,세수할때도 담배는 항상 손에 있었다.하루평균 1백80개비(20개들이 9갑)를 연기로 만들었다.다방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여 「청동산맥」이라는 서명첩을 내놓고 「연기는 사라져 어디로 가나」같은 선문답문제를 내 제자나 방문객들이 나름대로의 단상을 적은 「청동문집」1백98권이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이다. 무일푼,무소유로 일관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예술원종신회원,예술원상,서울시문화상등 상복이 따랐다.1963년 6월3일 노환으로 입원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제자들의 간호를 받으며 운명했다.그는 무교리의 종교가,초윤리의 사상가,시를 몸소 체험한 유일한 시인이었다.
  • “고미술 1천여점” 민족문화 사료전 개막/「공평아트」서 7일까지

    ◎유출됐다 돌아온 명품도 5천년 문화유산인 고미술품 1천여점이 망라된 사상최대의 고미술전시회 「민족문화사료전」이 서울 공평아트센터(733­9512)에서 개막됐다.7일까지. 한국고미술협회(회장 한기상)가 주최한 이 자리에는 고미술협회 회원 8백여명이 출품한 도자기를 비롯,토기 민속공예 목공예 서화류 청동기류 의상 선사유물 전적류등 고미술 전분야가 나와있다.여기에 출품된 1천1백30여점중에는 해외에 유출됐다가 최근 국내에 다시 돌아온 고미술품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번에 선보인 것들중에는 또 문화재급에 속하는 명품이 다수 끼어있어 모처럼 민족문화의 정수를 접할수 있는 자리가 되고있다.조선시대의 「금동아미타불」(높이77㎝)과 황수영박사(전 동국대총장)가 격찬한 백제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삼존불」(높이15·5㎝)등이 대표적인 것들. 회화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호생관 최북,겸제 정선,미수 허목,소치 허련등 대가들의 명품들이 나와있다. 고미술협회 한기상회장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30명의 감정위원들이 출품작을 선정해 사료적 가치와 미술품으로서 수준이 갖춰진 작품들로 전시회를 꾸몄다』고 했다.그는 특히 고가의 투자대상으로 여겨지는 고미술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일부 귀한 작품을 제외하고 2천5백만원 이하의 진품들로 출품작을 제한했다고 밝혔다.
  • 핵 우선협의 조건부/북측 제안 긍정수용/내일 우리입장 전달

    정부는 27일 황인성총리 주재로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통일관계 고위전략회의를 열고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특사교환 제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오는 29일 황총리 명의의 대북서한을 통해 우리측의 공식입장을 전달키로 했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핵우선협의라는 전제조건아래 북한측 제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키로 하고 관계부처간 추가 협의를 거쳐 의제· 회담형식·날짜등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제의안을 마련,북한측에 통보키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 군복벗은 4인 「12·12」때 뭘했나

    ◎서울로 병력이동한 29연대장/이필섭/신군부 도운 수경사 상황실장/김진선/9사단 작전참모로 병력 인솔/안병호/특전사령관 체포 공수대대장/박종규 「12·12사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가 「5·24」인사조치로 전격 해임된 이필섭합참의장(육사16기) 김진선2군사령관(〃19기) 안병호2군부사령관(〃20기) 박종규56사단장(〃23기)등 4명의 당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이들은 한마디로 「12·12사태」를 신군부의 승리로 만드는데 「혁혁한」공로를 세운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합참의장은 9사단 29연대장으로 있으면서 12일 밤 노태우9사단장의 서울진입명령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중앙청에 출동한 「9·9인맥」의 핵심인물이었다.당시 대령이던 이합참의장은 5·6공을 거치면서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 사단장·군단장·육사교장·군사령관 등을 거쳐 합참의장까지 승승장구해왔다. 79년12월12일 자정쯤 서울 경복궁 30단장실에서 노사단장은 구창회참모장(전3군사령관·예편)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동원을 지시했고 구참모장은 29연대장인 이대령에게 출동을 지시했다.이대령은 1개연대 병력을 이끌고 구파발을 거쳐 중앙청에 진루했다.중앙청과 삼청동 총리공관을 점령함으로써 경복궁에 있던 「12·12주역」들의 방패막 역할을 했다. 29연대를 이대령과 함께 인솔해 들어온 사람이 바로 안2군부사령관이었다.9사단 작전참모였던 안중령은 전방배치 9사단 병력을 빼내 한동안 휴전선을 비우게 했다. 김진선2군사령관은 당시 중령으로 수경사 상황실장이었다.「12·12사태」를 끝까지 반대하며 진압군의 출동을 독려했던 장태완전수경사령관의 지시를 상황실에서 입수,신군부에 알려줬다.신군부는 김중령이 상황실에서 전해준 진압군 출동상황을 역이용,쿠데타군을 효과적으로 배치시켰다. 당시 중령으로 제3공수여단 15대대장였던 박종규56사단장은 신군부의 지시로 장전수경사령관과 함께 진압작전을 펴던 정병주특전사령관(사망)이 있던 강동구 거여동 특전사령부로 들어가 비상사태를 맞아 부대를 지휘하던 정전사령관을 체포했다.조금전까지도 상관으로 모시던 정전사령관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하극상」의 대표적인 상황을 연출했다.박중령은 이 과정에서 정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낭소령을 사살했다. 이합참의장등 이들 4인의 당시 행적을 이제와서 문제삼는 것은 다시는 군이 정치적인 집단이 돼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군내에 주입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 위만조선의 성격(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4)

    ◎단군조선 계승한 강력한 무역국가/「위만 중국인설」로 88년이전엔 학계 홀대/철기문화 개화,무기생산·농업 활발 수천년간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만주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고조선을 멸망시킨 위만은 중국인 인가.또 그가 세운 「위만조선」은 우리땅을 점령한 외국인 정복국가인가. 위만조선을 둘러싼 이같은 의문들은 오랫동안 국내 사학계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였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우리 역사상 그만큼 홀대를 받아왔다. 부정적 평가의 주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연지방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해와 그 국적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또 그가 왕위를「찬탈」했으며 그의 손자인 우거왕때 중국 한무제에게 망해 그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케 했다는것 등에서였다. 이에따라 지난 88년이전까지만해도 고교용 국정 국사교과서에서 위만의 신분을「중국에서 고조선에 들어온 이주민 세력의 대표」로만 막연하게 밝혀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위만이 조선인이며,위만조선은 이민족의 정복국가가 아니라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이와함께 위만조선은 강력한 무역국가로도 새로이 평가받고 있다. 이같은 해석의 근거는 다양하다. 우선 위만과 그의 무리 1천여명이 망명당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있었다는 기록과 위만이 준왕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뒤에도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유지했으며 고조선의 토착민 중에서 고위관리를 계속 중용한 사실이 밝혀졌다.또 고조선 토착민들이 위만의 세력들에게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같은 민족의 뿌리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와함께 위만조선기를 전후한 당시대 상황을 볼때 이같은 해석은 훨씬 신빙성을 갖게 된다. 위만은 왕으로 등극할때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튼튼한 왕권을 바탕으로 청동기문화에 머물러 있던 고조선 사회에 철기를 적극 도입했다.농업생산도 늘리고 무기생산을 중심으로한 수공업을 발전시켰다.이후 위만조선은 주변국들과 활발히 무역을 벌였으며 한의 변방을 쳐 빼앗는등 자주 괴롭혔다. 반면에 중국대륙을 통일,당시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던 한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1년넘게 고조선 백성들에게 시달려야 했다.고조선 점령후 설치했던 한사군도 엄청난 저항 때문에 수년내 통치를 포기해야 했다. 위만은 단군의 후손이 이끌던 고조선의 왕좌를 빼앗었지만 이는 단순한「정권교체」였다.오히려 그는 고조선 사회에 철기문화를 꽃피웠으며 고조선을 강력한 무역국가로 성장시켰다.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이 통일된 중국세력과 처음 맞닥뜨렸던 한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백8년의 일이었다.그러나 위만조선의 백성은 한사군을 축출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에 꿋꿋이 맞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전통을 수립했다.
  • 되돌아본 79년 12월12일

    ◎거사일 암호명 「생일집잔치」로 잡아/총리공관 등 3곳에서 동시에 행동/정승화 전 총장 연행과정서 총격전 1979년 12월12일. 이날은 「생일집 잔치」가 벌어진 날이었다. 「생일집잔치」는 쿠데타음모를 꾸민 12·12주동자들이 잡은 거사일의 암호명이었다. 이 「잔치」는 경복궁 30경비단장실·한남동육군참모총장공관·삼청동총리공관등 3곳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하오6시 경복궁 장세동경비단장방에는 유학성중장,1군단장 황영시중장,수도군단장 차규헌중장,9사단장 노태우소장,20사단장 박준병소장,71사단장 백운택소장,정동호경호실장대리,고명승상황실장,박희도,최세창,장기오공수여단장,김진영33단장등이 모였다. 같은시간 정승화총장의 직계인 정병주특전사령관 장태완수경사령관 김진기헌병감은 헌병대장 조홍대령의 장군진급축하연인 연희동 축하 술자리에 초대되어 발이 묶여 있었다. 또 같은시간 한남동 정총장공관에는 전두환합수부장으로부터 『정중히 모셔오라』는 지시를 받고 허삼수대령과 우경윤대령이 정총장을 연행하러 갔다. 정총장은처남의 장군진급축하연에 가기위해 부인과 함께 사복차림으로 외출하려던 길에 허대령과 우대령의 연행팀과 부딪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총장 경비병력과 연행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우대령이 총상을 입자 허대령이 권총을 빼들고 정총장을 연행했다.정총장의 연행이 끝난시간이 7시30분쯤. 7시55분 장사령관의 명령으로 경장갑차 1대와 헌병특공대 1개소대 규모의 특공대가 정총장을 구출하러 총장공관에 파견되고 8시7분 헌병1개소대,전차1대,경장갑차 1대,사이드카 2대,앰뷸런스 1대,트럭 1대의 특공대가 2차로 파견됐다. 정총장의 강제연행소식을 들은 정특전사령관과 장태완수경사령관 이건영3군사령관은 부대로 들어와 병력출동을 지시했으나 사령부내의 핵심부대와 참모들은 이미 경복궁에 가 있거나 쿠데타군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소곤작전참모부장과 정특전사령관은 휘하여단의 장병에게 총상을 입고 부상을 당한채 체포됐다. 국방부장관실에는 노재현장관,김용휴차관,김종환합참의장,유병현대장등 10여명의 장성과 30여명의 경호헌병이있었으나 공수특전단의 총격으로 13일 상오1시30분 점령됐다. 12·12사태는 군의 지휘체계가 교란되었을때 군의 비상통수기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무력화 될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 한반도·중국 동북부·만주까지 통치(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3)

    ◎대표적 유물 비파형동검 고르게 출토/전통·재야학자사이 문헌해석 논쟁 해결 고조선이 중국 북부와 만주·내몽고·연해주를 통치한 동방의 대제국이었는지,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부와 중국 동북부의 요령지방 일대에 형성된 작은 나라였는지는 70∼80년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소국이었음을 주장하는 전통사학자나 대제국이라고 강변한 재야사가측 모두 문헌해석에만 의존한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서술한 사료는 우리측 문헌과 중국측 기록을 합하더라도 현재 10여종이 남아있는데 불과하다.더욱이 학자마다 각 사료에 대한 가치평가가 엇갈리는데다 믿을만하다고 공인된 사료에 대해서도 자구별 해석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사료가운데 고조선을 기록한 최고의 문헌인 삼국유사의 경우 고려 후기에 쓰여졌고,그 내용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전통사학자들에게 외면당할 정도였다. 「고조선 평양중심설」은 조선 후기 한백겸·정약용등 실학자들이 우리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돼 70년대 중반까지 통설로 인정됐다.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전통사학자들이 국내사료를 무시하고 중국측 문헌에만 의존,고조선의 영역을 축소시켰다」고 보고 있다. 반면 전통사학자들은 재야사가들이 「대제국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단기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등을 후대에서 조작한 위서로 판단,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료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평행선을 긋는 동안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토대로 한 「이동설」이 제시됐다. 즉 고조선이 초기에 중국 요령지방에서 형성돼 점차 인접한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만주와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 근거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비파형동검)이 중국 서북부 일대와 한반도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는 점을 들고,청동기문화를 가졌던 고조선이 중국 서북부와 한반도에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한 것으로 해석했다. 비파형동검은 요령지방에서 많이 출토돼 요령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데,검의 날과 손잡이 부분을 따로 만들어 결합시킨 형태여서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중국식동검과는 확연히 구분된다.한반도에서는 충남 부여 송국리의 석관묘에서 출토되는등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국형동검(일명 세형동검)으로 발전했으며 이들 동검은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청동기문화 위에 성립한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중국 동북부와 만주일대,한반도를 세력범위로 하였다. 이같은 학설을 뒷받침하는 연구성과가 차근차근 쌓여가고 있다.
  • 김창희씨 조각 「고향마을」 미에 기증

    ◎스토니브룩대에 한국 시골풍경 선보여 한국의 중진 조각가 김창희교수(서울시립대)가 기증하는 작품 「고향마을」이 지난달 28일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 엔지니어링 광장에서 제막 됐다. 가로 5.1m,세로 2.41m,높이1.8m 크기에 무게가 3t이나 되는이 대형조각품은 미루나무가 둘러처진 냇가에 시골사람들이 유유자적 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시골마을 풍경을 담고 있다.시가 25만 달러는 될것으로 추산 되는 이 대형청동조각품을 기증한 김교수는 4일부터 12일까지 뉴욕의 갤러리 코리아에서 이 대학 한국학과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도 갖고 있다. 김교수는 『미국에서 한국학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이 대학광장에 한국의 정서를 담은 조각품을 세우는 일이 보람된 일로 여겨져 작업에 흔쾌히응했다』면서 『앞으로도 한국학 발전을위해 도움이 된다면 힘껏 돕겠다』고 말했다. 스토니브룩대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한국학과가 독립적으로 설치돼 있는 대학으로 한국의 서울대학교와 함께 미국에서 사용될 한국학 관계 대학교재인 「한국학 연구총서」를 공동으로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삼청동 청와대 안가/헌재소장 공관으로

    청와대는 10일 그동안 청와대 부속가옥으로 사용돼 왔던 종로구 삼청동소재 안가를 헌법재판소장 공관으로 사용토록 조치했다고 이경재 청와대대변인이 밝혔다. 새로 헌법재판소장 공관으로 사용될 삼청동 133의5 소재 건물은 대지 6백2평에 건평 2백90평이다. 이로써 헌법재판소가 경제기획원에 요청한 헌법재판소장 공관부지 매입및 건설비 소요예산 1백20억원을 절감케 됐으며 헌법재판소는 지난 88년 창설이후 숙원이었던 헌법재판소청사와 헌법재판소장공관을 확보케 됐다.
  • 금복주회장 김홍식씨(“어둠속 햇살” 미담 2제)

    ◎5만6천평 땅 시에 헌납/대구 화원유원지… 수영장도 갖춰 김홍식 대구시의회의장(65·금복주 회장)은 24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4백억원 상당의 경북 달성군 화원읍 구라·성산리일대 5만6천여평의 화원유원지를 대구시에 헌납한다고 밝혔다. 화원유원지는 지난 72년 김의장이 시로부터 3만8천9백77평의 시유지를 불하받아 개발에 착수,지난해까지 인근지역 1만7천98평을 추가로 매입해 모두 5만6천75평의 규모에 수영장·동물원·주차장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김의장은 『당초 시와 화원유원지를 국내 굴지의 유원지로 개발키로 약속했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이제 땅매입 및 시설개발에 한계를 느껴 행정당국에서 직접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대구시는 김의장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내달 대구시의회 승인 등 시재산으로의 소유권확인절차를 밟아 화원유원지를 시차원에서 본격 개발할 예정이다. ◎삯바느질할머니 이순옥씨/평생모은 30억 “장학금으로”/“무학설움­숨진 교사딸 한 풀었다”부정척결을 위한 사정태풍이 사회전반에 몰아치는 가운데 80세의 삯바느질 할머니가 평생 모은 30억원의 재산을 장학금으로 희사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국민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이순옥할머니(서울 종로구 삼청동 11)가 바로 그 주인공이 이다. 이씨는 서울 중구 황학동 중앙시장안에 있는 자신소유의 시가 30억원짜리 상가건물(대지 1백평,건평 1백20평)을 외손녀의 출신고교학교법인인 대원학원에 기증했다. 『학교설립이 죽기전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이루기에는 너무 늙었고 그동안 모은 재산이나마 교육발전과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 쓰고 싶었습니다』 이씨는 스스로 배우지 못한 설움과 여고교사로 있다 숨진 외동딸의 한을 달래기 위해 그 딸의 「분신」처럼 여겨온 외손녀 출신고교에 기증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6·25전쟁중 남편이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뒤 38세때 홀몸이 되어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삯바느질. 남대문시장에 1평짜리 쪽방가게를 얻어 삯바느질로 딸을 이화여대에 진학시켰고 어렵게 모아현재의 상가건물도 구입했다.
  • 북 핵문제 해결때까지 경협·기업인방북 유보/통일장관회의 확인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의혹과 관련한 국제적 압력을 약화시키기위해 남북대화를 제의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유엔안보리관련국들의 대북설득노력,미­북한 양자차원의 접촉등 국제적 공조체제를 희석시키지 않도록 신중히 대처키로 했다. 정부는 20일 상오 시내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에서 한완상부총리겸 통일원장관주재로 열린 통일관계장관회의에서 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회담이 재개되더라도 의미있는 진전을 기대키 어렵다고 보고 이같이 결정했다. 정부는 또 이날 17개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회의를 통해 핵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북물자교역과 제3국에서의 상담을 위한 접촉은 허용하되 남북한의 경제협력사업과 기업인의 방북은 계속 유보키로 했다. 정부는 이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지되어야 하고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NPT복귀·특별사찰 수락과 함께 남북상호사찰이 실현되어야 하며 ▲북한의 핵문제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3대 기본입장을 정리했다.
  • “한반도역사 70만년전 시작”입증(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1)

    ◎85년 발굴팀 매일 12시간씩 작업 강행/청동기­신석기­후·중기구석기 고루 분포 1985년 7월25일 저녁무렵 충북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마을 뒷산 「금굴」동굴 안. 연세대 사학과 손보기교수(현 단국대 한국민족학연구소장)는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오늘도 저물고 있었다.지난 5월26일 3차 발굴에 들어간지 벌써 두달이 지났고 이제 발굴터도 바닥을 드러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침 7시반부터 12시간씩 강행군하는 처지에 오늘이라고 작업량을 늘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성과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3·4m를 판 지점부터 층별로 청동기­신석기­중석기­후기구석기­중기구석기 유물이 차례로 나와 발굴단을 흥분시켰었다. 그러나 손교수는 내심 「진짜 큰물건」을 기대하고 있었다.작업을 끝마치라고 하려는데 누군가 『선생님,주먹도끼가 나왔습니다』라고 외쳤다. 주먹도끼를 받아든 손교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내뱉었다. 『휜날주먹도끼로군』 『와』하는 함성이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한국역사의 기원을 70만년전까지로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이날 발굴된 「휜날주먹도끼」는 세계 고고학계로부터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 인정받았으며 함께 출토된 화석등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60만∼70만년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선사유적 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이같은 통설은 차차 무너져온 터였다. 그동안 선사유적은 단양 금굴,공주 석장리유적말고도 남한에서는 충북의 제천 점말동굴과 청원 두루봉동굴,경기 연천 전곡리,제주 빌레못동굴 등지에서,북한에서는 함북 웅기 굴포리와 평남의 상원 검은모루동굴,덕천 승리산동굴등 한반도 전역에서 고루 발굴됐다. 특히 금굴에서 25㎞쯤 떨어진 단양 상시동굴과,승리산동굴·석장리유적지등지에서는 사람의 뼈·이빨·머리털등이 발견돼 한반도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중의 하나임을 보여줬다. 또 이들 유적지는 한국인의 조상을「외지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처음부터 살았던 원주민」이라고 인정하는 쪽으로 학설이 바뀌어가는 근거가 됐다.
  • 차량검사 대행료 2만∼3만원 하락

    ◎업체 과당경쟁… 11만9천∼12만7천원선/손수 검사땐 1만7천∼2만5천원 절감 차량검사 대행업이 크게 늘어나 이들 업체간의 「제살 깎아먹기」식 과당경쟁으로 자동차 정기검사를 눈앞에 둔 운전자들이 검사방법 선택에 혼란을 겪고있다. 업계에 따르면 90년초까지 10여개에 불과하던 차량검사 대행업체는 이후 우후죽순 처럼 늘어나 최근 업체수가 60∼70개에 달하고 있다.대부분 보험사와 연계된 대행업체들은 각처에서 정기검사 대상차량의 명단을 입수,광고전단을 보내는 방법으로 고객확보에 나서고 있다. 2년전쯤 소형승용차를 구입한 회사원 노모씨(32·서울 종로구 삼청동)는 지난달 20일이 처음 맞는 자동차검사일이었다.검사일을 15일가량 앞둔 무렵부터 노씨집의 우편함은 「댁의 차를 맡겨달라」는 우편물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노씨에게 온 대행업체들의 우편물수는 무려 50여통.전부 비슷한 조건이면서 가격은 조금씩 틀린 점에 망설림을 느낀 노씨는 결국 본인이 직접 자동차검사장을 찾았다. 차량검사 대행업체들의 유형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며종류별로 가격과 서비스면에서 차이가 난다.첫번째는 자가운전자들의 책임보험을 따내기위해 보험사 영업소들이 검사대행을 맡는 경우며 요금은 11만9천원선으로 가장 싼 편이나 지정장소까지 차주인이 직접 차를 운송해야 한다.대행업이 전문인 업체는 대행료 1만원을 포함한 12만5천원 정도의 가격에 차의 인수·인도까지 대신해준다.마지막 출장검사장으로 지정받은 정비업체들의 경우 정규비용외에 간단한 정비료를 추가해 12만7천원선을 받고있다. 이같은 요금은 1년전에 비해 오히려 2만∼3만원이 내린 가격이다.업체들이 고객유치 경쟁을 위해 대행료보다는 책임보험 확보에 따른 수수료를 주수입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현행 자동차검사제도는 교통안전진흥공단 주관으로 차령 10년까지 승용차는 2년,승합차 및 화물차는 1년에 한번씩 해당지역의 검사장에서 의무적으로 받게 되어있다.자동차검사장은 서울의 서부검사소(마포구 성산동 369의 1)를 비롯,전국에 41개소가 있으며 예년과 달리 검사시설이 대폭 늘어 1∼2시간이면 검사를 마칠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차량정기검사는 차 주인이 검사장까지 차를 가지고 가 검사를 받을 수 있으나 번거러움 때문에 대행업소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시간이 있는 사람은 직접 검사를 받는 것이 안전하고 경제적이다.손수 검사를 받을경우 검사료 1만원,도로교통안전협회비 7천2백원,책임보험료 8만4천7백원(1,500㏄이하) 등 총 10만1천9백원이 소요된다.
  • 사증위조,일본에 부녀자 취업알선/국악협 문예위장 영장

    ◎32명 송출… 억대 챙겨 서울강서경찰서는 31일 사단법인 국악협회 문예분과 위원회 위원장 허기현씨(49·종로구 삼청동 35의 13)등 2명을 사문서위조와 직업안정법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원명숙씨(33·여·성동구 금호동 4가 423)를 같은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은 또 여권위조 전문범 김종철씨(59·경기도 과천시 부림동 주공아파트 901동 109호)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허씨는 지난해 11월16일부터 종로구 낙원동 낙원오피스텔 701호에 문예분과 위원장 사무실을 차려놓고 원씨등을 통해 일본의 유흥업소에 취업하려는 김모씨(20)등 69명을 모집한뒤 여권위조법 김씨가 위조한 취업사증을 이용,이가운데 32명을 일본 요코하마의 「은하」「센스」등 한국인 클럽에 소개해주고 업주로부터 소개비명목으로 한사람에 일화 50만∼75만엔씩 모두 2천2백여만엔(한화 1억5천만원)을 받아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김씨는 허씨로부터 5천1백70만원을 받고 지난해 12월 20일까지 4차례에 걸쳐 69명의 90일 짜리 취업사증을 위조해주었다는것이다.
  • 초중교원 교직수당 인상않기로/교육부·교총 첫 교섭

    교육부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26일 우수교원확보법 제정등 6개안을 93학년도 전반기 정기교섭 안건으로 채택했다. 양측은 이날 하오 서울 삼청동 중앙교원연수원 대회의실에서 오병문교육부장관과 이영덕한국교총회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전반기 정기교섭 첫 회의를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 양측이 합의한 안건은 우수교원확보법 이외에 ▲학교안전관리공제회법 제정 ▲사립학교 교원의 신분보장방안마련 ▲교육부및 소속기관 직제개정 ▲한국교총의 교원자격연수 실시근거 마련 ▲교육 공무원 승진규정 개선 등이다. 한국교총은 그러나 최근 공무원봉급 동결조치등 근검·절약운동에 발맞춰 정기교섭에 앞서 교섭안건으로 합의했던 ▲초·중등교원 교직수당 인상 ▲대학교원 연구보조비 인상안 등은 교섭안건에서 제외키로 했다.
  • 「삼국유사」의 백제시대 고찰/사자사암터 찾았다

    ◎전북 익산 사자암서 명문새긴 기와 발견 전북 익산군 금마면 미륵산(일명 용화산)기슭에 위치한 사자암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고찰 사자사터로 밝혀졌다.이같은 사실은 문화재관리국 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가 지난2월24일부터 실시한 사자암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고려 충숙왕(1322)때 만들어진 암막새(한끝에 반달모양의 혀가 붙은 암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함으로써 확인됐다.이 명문에는 「지치이년사자사조와」라고 적혀 있어 현재의 사자암이 고려시대및 그 이전에는 사자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사자암의 불당이 낡아 새로운 불전을 세우기 위해 그동안 사전조사발굴을 해온 부여문화연구소는 이 명문기와 이외에 네번째 건물터에서 백제계 기와등을 발굴함으로써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자사의 존재를 뚜렷이 입증했다.이번 발굴에서는 통일신라 기와,고려시대 암·수막새,청동불상등도 출토됐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무왕편에는 백제 최대사찰인 미륵사창건설화를 소개하면서 무왕이 부인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사자사를 찾아간 일이 기술되어 있다.
  • 병역기피 87명 명단

    수배중인 병역기피자 명단과 본적지는 다음과 같다. △고재성(전남 화순 능주 만인 233) △권기동(경북 안동 녹전 녹래 774) △김광수(경북 영천 대창 오길 580) △김근래(서울 동대문 휘경1동161의46) △김기철(경북 경산 용성 곡란 203) △김상현(충남 서산 대산 운산 568) △김성철(경남 양산 웅상 주진 81의1) △김성호(경남 하동 금남 대치 557) △김인덕(경기 파주 법원 420) △김정관(전남 나주 남평 상곡 126) △김종민(서울 송파 오금403) △김종호(서울 성동 화양150) △김정석(경남 양산 상북외석807) △김정준(서울 송파 담실 진주(아)1의314) △김주호(강원 강릉 노암동 279의42)△김철우(전북 정읍 감곡 통석 854) △김충식(전북 남원 산내 덕동337)△김택성(서울 종로 누상 123) △김희중(전남 구례 문척 금정 423) △내천규(경기 파주 교하 오도 68) △마철운(전북 김제 황산 용마 590)△문성철(충남 공주 이인 주봉 201) △문종옥(전남 나주 계람 723) △박상오(경북 달성 하빈 대평 145) △박성수(전남 진도 군내 둔전 822) △박승구(경북 영양 영양 서부 361) △박승용(충남 청양 남양 용마 550) △박종민(전남 고흥 도양 장게 186) △박종운(강원 명주 강동 하시동 187) △박종진(서울 송파 오금 403의155) △박정수(강원 춘성 사북 오탄 124) △배성인(서울 노원 월계380의1) △송무철(서울 성북 동선 268) △송훈(서울 노원 상계64) △신이철(충북 괴산 괴산 신기 470) △신석진(서울 동작 대방 391의75) △신언조(서울 동작 상도 184의26) △양병헌(전북 장수 산서 동화 646) △양승도(경남 하동 고전 성평 573) △염성호(경남 밀양 하남 백산 695) △오종근(전북 장수 번암 사암 1081) △오형철(전북 이리 인화1가 78) △오형율(전남 완도 완도 가용 69) △유학식(전북 고창 아산 풍월 450) △이석환(서울 종로 행촌210의574) △이성대(전남 승주 상사 도월 504) △이영섭(광주 서구 유촌123) △이웅(충남 예산 고덕 상몽 212) △이정환(전북 장수 계내 장계400) △이재승(전남 장흥 대덕 연정 116) △이재우(서울 도봉 미아 산 111) △이준호(서울 마포 중동 375) △이지수(서울 종로 봉익 11의6) △이창섭(경남 밀양 하남 수산 815) △이화주(서울 성동 하왕십리 1039의24) △이현승(충북 보은 외속리 구인 6의1) △임근백(서울 은평 응암 243의534) △임재권(서울 성동 하왕십리 678) △임형석(강원 횡성 공근 부창 605) △장동길(강원 명주 사천 노동 78) △장창훈(경기 평택 청북 어소 197) △장호(전북 무주 무주 읍내 785) △전보환(강원 춘성 신북 천전 697) △전종진(경북 상주 모동 이동 125) △정성욱(서울 중 신당 432의212) △정재훈(서울 중 회현1가 55의2) △정한울(제주시 오등동 1438) △조광일(전남 완도 군외 영풍 268) △정구현(서울 영등포 영등포7가 64) △정선웅(전북 김제 공덕 동계348) △조성민(경북 영천 청동 우천 343) △조수원(충남 보령 오천 오포 108) △조승래(충남 논산 가야곡 산노1) △조재학(서울 은평 신사 7의11) △조홍규(경남 사천 용현 금문 476) △주형준(서울 성북 길음 548) △차재원(전북 남원 대강 사석679) △차준원(전북 익산 함라 다망 228) △채수원(전북 군산 서흥 남동 799) △최영민(경남 고성 영오 영대 714) △최준석(강원 명주 사천 석교 757의5) △탁현욱(서울 성동 상왕십리 149) △홍순두(강원 강릉 홍제 58의2) △허태구(경북 문경 가은왕릉 산 50) △황기룡(서울 강동 천호 243의171) △황용범(경남 김해 대동 조눌98) △황철이(경남 함안 칠원 유원 790)
  • 구베트남 관저 반환

    정부는 서울 삼청동지역의 안가들을 없애기로 한 방침에 따라 법무부의 안가로 사용해온 구베트남대사관저를 반환키로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1일 법무부측이 안가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때까지 베트남측에 한남동에 건물을 임대해주기로 했으며 구베트남대사관저와 호치민시의 구한국대사관을 교환키로 했다고 밝혔다.
  • 이인모씨 무조건 북송 방침/통일장관회의

    ◎오늘 전략회의서 시기·방법 등 확정 정부는 비전향장기수출신의 이인모노인(76)을 북한으로 무조건 송환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1일 상오 한완상부총리겸 통일원장관 한승주외무부장관 박관용청와대비서실장 김덕안기부장등이 참석하는 전략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송환방법및 시기등을 확정,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이날 하오 발표한다. 정부는 10일 상오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에서 한부총리주재로 외무·내무·재무등 17개 부처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 정부 출범 후 첫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이에따라 91년 1월 남북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위에서 북측이 처음 송환을 요구한 이래 주요 남북현안의 하나가 돼왔던 이인모노인문제는 정부가 빠르면 이달중 그를 무조건 북한으로 송환함으로써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부가 이인모노인송환에 아무런조건을 달지 않기로 함으로써 송환에 따른 당장의 반대급부를 북측으로부터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나 북한핵및 이산가족,남북경협문제등 남북현안을 푸는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남북간 당면문제및 주요정책에 관한 정부의 입장을 신속히 결정하기 위해 통일관계장관회의 안에 통일원·외무장관및 청와대비서실장 안기부장등 4명을 정위원으로,사안에 따라 관계부처장관이 참석하는 통일관계장관 전략회의를 신설·운영키로 했다. 신설되는 전략회의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소집돼 현안문제를 협의한 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부의 공식입장을 확정하며 통일관계장관회의에는 이를 사후 보고하게 된다. 송영대통일원차관은 이날 전략회의와 관련,『전략회의의 신설은 과거 밀실에서 이뤄지던 통일정책결정과정을 문민시대에 맞게 제도화시킨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북한의 핵무기개발의혹이 조속히 해소돼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기로 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3)

    ◎길림시절:2/체류시기의 왜곡/육문중 재학기간 실제보다 1년 늘려/마적활동설 등 평단중시절 비행 은폐/27년 8월 입학을 1월로 주장 김일성이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1927년 1월 17일이 아니라 사실은 그 해 8월이다.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그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26년8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맹했다」고 쓰고 있는데 26년이나 입학,공청동맹 가맹 같은 것은 다 사실이 아니지만 8월이란 날짜만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의 27년8월 길림행은 3가지근거로 증명할 수가 있다. ○사실확인의 세 근거 그 첫째는 앞에서 말한 이선일 증언이다.그는 27년8월 심양 평단중학교 입학 때 그 직전 김일성이 이 학교를 중퇴한 소문을 들었다.그리고 그는 30년에 최덕현 오가자에서 김일성과 같이 있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직접 본인으로부터 확인하고 있다.27년 당시 심양의 한인 인구는 적었으므로 중학생 김일성의 동향은 곧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김일성이 29년 5월에 길림 육문중학교를 중퇴한 사실을 들 수 있다.이 때 허소가 만든 「조선공산청년회」란 조직에 길림의 정의부계통 청년들이 망라되고 있었다가 일본 길림총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었다.그 속에 김일성도 있었는데 그는 도망쳐서 길림을 탈출하고 체포를 면하였다. 그는 이에 따라 육문중학교도 중퇴했다.최형우는 김일성이 다닌 중학교를 잘못 알고 있었지만 중퇴사실 자체는 다음과 같이 정확히 말하고 있다. 「…김일성은 졸업기를 목전에 둔 제오중학의 교문도,소년탐험대의 자리도 떠나서 단신 방랑에 가까운 여인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본 기록과 최형우의 서적으로 우리는 김일성이 29년 5월,3년제인 길림초급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필자가 평단중학교 문제 때 소개한 중학교 학년학기 일정표이다. ○방학기간 이용 이동 이 일정표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2학기 마감은 6월 28일로 되어 있다.따라서 졸업식은 그후 며칠 안가서 진행되는데 김일성은 바로 「졸업을 목전에 둔」5월 중순에길림성성을 탈출하여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다. 또 이 일정표는 1학기 수업개시가 8월 24일로 되어 있다.그래서 이 날짜를 가지고 그의 재학 가능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926년 8월 24일 1학년 입학 1927년 8월 24일 2학년 진학 1928년 8월 24일 3학년 진학 1929년 5월 중순 3학년 중퇴 그런데 이상의 표에서 26년 입학 가능성은 그것이 길림 육문중학교 같으면 현재 김일성이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그는 1학년 시절은 대체로 심양 평단중학교에 있었다.또 일정표를 보면 당시 여름 방학은 6월 29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약 2개월이었다.이선일의 증언과 같이 그는 이 방학기간에 심양으로부터 길림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길림시절을 사실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중학교에 있었던 1927년 8월부터 29년 5월까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그는 육문중학교에 가기 직전에 심양에서 길림으로 왔고 20개월 후 일종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에 있었다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길림을 떠났다.이 1년 10개월동안이 김일성이 길림에 있었떤 전 기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는 이같이 주장하지 않고 있다.그들은 김일성이 27년 1월에 무송에서 와서 29년 가을 길림감옥에 투옥될 때까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길림체제기간을 27년 1월부터 8월까지의 6개월간과 29년 5월부터 가을까지의 약 6개월간씩 넓히게 되었다.모두 1년 정도 김일성이 길림에 더 있었던 것으로 꾸민 것이다. 여기서는 김일성이 넓힌 이 「활약기간」중 그의 길림 입성을 둘러싼 문제만 다루어 놓았다.그가 8월에서 1월로 반년이나 길림 입성을 앞당긴 것은 그의 전기 작성상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⑴그는 평단중학교 시절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할 수 있게 되었다.그의 이 시기 생활이란 학생 기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슨 상궤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그가 일종의 마적떼에 있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므로 학교생활도 짐작이 갈 것이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은폐한 것이다. ○「주체형 조직」강변 ⑵이 시절을 은폐하는 것으로 그는 26년 가을부터 27년 여름까지 10개월 정도 우상화를 위한 어떤 날조물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는 세월을 획득하게 되었다.그는 이 기간을 26년과 27년으로 양분하고 26년에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새날소년동맹,반일부녀회 등 대체로 2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의 하부조직이나 변두리조직을 「주체형」의 조직으로 제멋대로 왜곡,변형해왔다. ⑶따라서 육문중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인 27년 상반기란 텅 비운 시일도 김일성이 앞으로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①동서 232면 ②평전 212면 이하 ③29면 ④평전 107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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