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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무부 ◇검사 신규임용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이재순△서울중앙지검 김제성 이응철 김도엽 신동원 이준범 김남훈△서울동부지검 하재무△서울남부지검 고권홍 송창현△서울북부지검 이종민 최명규△서울서부지검 김종우 이동균△인천지검 정태원△수원지검 김태진△춘천지검 홍석기△대전지검 용성진△대구지검 김정환△대구 서부지청 장준호 신종곤 차범준△부산지검 임일수△울산지검 박규형△전주지검 최행관△군산지청 김락현◇검사 전보 및 파견△법무부 국제법무과 이윤제△서울서부지검 정수봉△서울고검 이건종■ 기획예산처 ◇고위공무원단 전보△균형발전재정기획관 이경옥■ 국가보훈처 ◇임명 △보훈심사위원회 상임위원 宋桂丑◇전보△대전지방보훈청장 鄭桂雄△대구〃 禹武錫△광주〃 文秉敏△국립대전현충원장 李龍源■ 기상청 △예보국장 홍 윤△기상기술기반국장 박광준■ 대교 ◇승진 (부사장)△신규사업부문 대표이사 朴台永△눈높이사업부문 〃 宋熙龍(상무)△눈높이사업지원실장 金光倍△AP본부장 文常湖(상무보(신임))△서울북서교육본부장 朴憲柱△서울강남〃 趙連京△경기동〃 宋康旭△경기서〃 李惠辰△대구〃 林永周△충청동〃 朴元雨△전남〃 李仁哲△MOL벤처사업본부장 安榮魯△강원교육본부장 李鴻揆■ 메리츠증권 ◇임원 선임 (이사)△IB사업본부 기업금융 2사업부 林鍾英 (팀장)△국제금융팀 李相勳■ 하이트맥주 ◇임원 승진 △상무 이인우 (전보) △상무보 송교도■ 진로 (임원 전보) △생산담당 부사장 이영진 △마산공장 부사장 윤기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감사 김형규
  • [거리 미술관 속으로] 마포구 도화동 ‘날고싶은 사람’

    [거리 미술관 속으로] 마포구 도화동 ‘날고싶은 사람’

    낯선 골목길에서 연모하던 남자를 우연히 만난 느낌을 아는가.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조각가 정현의 ‘날고 싶은 사람(Believe,I can fly)’을 마주했을 때 바로 그 설렘을 경험할 것이다. 새로 지은 오피스텔(태영 데시앙루브) 앞마당에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2006 올해의 작가’의 작품을 만나다니…. 미술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에게 주는 올해의 작가상에 조각가가 선정되기는 처음이었다. 정현은 폐기처분한 철로용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나무전봇대 등 ‘낡고 둔탁한 소재’를 고집해 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연륜이 묻어난다. 그러나 때때로 그 낡음이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작가가 거리에 처음 선보인 이 조각상은 기존의 스타일과 사뭇 달랐다. 가볍고 날렵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느 순간 무거운 것이 싫어졌다. 얽매였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날고 싶은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자. 청동상은 거대하다. 가로 3.2m×세로 4m×높이 5.8m.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정도다. 그러나 왠지 포근하다. 구릿빛에 가까운 색깔 덕분이다. 작가는 “도약하는 느낌이 나도록 밝은 청동색을 선택했다.”고 했다. 작품은 왼발로 힘차게 땅을 박찬다. 입을 꼭 다문 채 얼굴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팔은 힘껏 뻗어 곧게 세웠다. 앞쪽에서 바라보면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몸매다. 그러나 등쪽에는 근육이 뭉쳐 있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난 듯 팔이 어깨가 아니라 등에 붙어 있다. 작가는 “인체를 형상화했지만, 근육은 재해석했다. 두 팔이 날갯짓하듯 속도감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작품에서 비상하는 새가 연상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 청동인은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날아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이 힘든 세상이다. 직장인이든, 주부든 마찬가지다. 일상이 힘들수록, 자유를 갈구하는 욕망은 커진다. 그 욕망을 작품에 담았다.” 작가는 세상살이에 짓눌려 날개를 접은 도시인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단다.‘내일을 향해 다시 날아보자.’고 우리를 다독이는 것이다. 작가의 위로가 가슴으로 전해져 흐뭇한 미소로 번졌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13)홍세태의 활약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13)홍세태의 활약상

    북악산 아래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아들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1682년에 낙송루(洛誦樓)라는 만남의 공간을 꾸리자 노론 계열의 시인들이 자주 모여 시를 지었다. 한 동네에 살았던 홍세태도 이곳에 드나들며 동갑내기 김창흡·이규명과 신분을 따지지 않는 친구가 되었다. 세 사람은 낙송루에서 자주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워 함께 잠을 자며 시를 주고받았다. 뒷날 이규명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홍세태가 그의 시집 발문에서 처음 만나던 시절을 회상하며 “한마디에 마음이 맞은 것이 마치 돌을 물에 던진 듯하여, 망형지교(忘形之交)를 허락하였다.”고 적었다. 여러 살 차이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잊고 친구처럼 사귀는 것이 망년지교(忘年之交)이고, 양반과 중인·상민이 신분 차이를 잊고 친구처럼 사귀는 것이 망형지교이다. 김창흡과 친구가 된 인연으로 홍세태는 통신사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에 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 구해온 그림을 낙송루에 걸고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글만 읽고 지은 것이 아니라 글씨도 잘 써야 했고,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은 그림으로 그렸다. 연암이나 다산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위(申緯)같이 세 가지를 다 잘하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 칭찬했다. 홍세태는 일본에 가서 그림을 많이 그려주었으며, 일본 화가의 그림을 구해오기도 했다. 눈 내리는 강가에서 노인이 혼자 낚시질하는 그림을 김창흡에게 선물하자, 김창흡은 이 그림을 낙송루에 걸고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홍세태가 그림을 구해 준 뜻을 “자연으로 돌아가 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기사환국(1689)에 김수항이 죽자, 김창흡은 결국 영평에 은거하였고 낙송시사는 흩어졌다. 몇년 뒤에는 형이 영의정에 올랐건만, 평생 벼슬하지 않고 시와 학문을 즐겼다. 한양에 홀로 남은 홍세태는 임준원의 도움을 받으며, 위항시인들의 모임인 낙사(洛社)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북악에 유하정 짓고 제자들에게 시 가르쳐 홍세태는 쉰살쯤 되었을 때 북악산 아래 집을 짓고 유하정(柳下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좌우에 등잔과 책을 놓고 그 사이에서 시를 읊었지만, 살림살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썰렁하였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주렸지만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8남2녀나 되는 자식들은 하나둘 병이 들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위항시인 정내교는 스승 홍세태를 처음 만나던 무렵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처음 유하정에서 공을 뵈었을 때, 공의 나이가 벌써 쉰이나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이 희끗희끗한 데다 얼굴빛은 발그레해서 마치 신선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이 해에 온 중국 사신은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의주까지 와서 우리나라 시인의 시를 보여달라고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누구의 시를 가려뽑을 건지 어려움에 처했는데, 당시의 재상이 공을 추천하였다. 임금께서도 “내 이미 그의 이름을 들었다.”고 하셔서 곧 시를 지으라고 명하여 보냈다. 얼마 안 되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뽑혔다가 승문원(承文院) 제술관(製述官)으로 승진하였다. 이문학관이나 승문원 제술관은 외국에 보내는 글을 담당하는 전문직이다. 역관이자 시를 잘 짓는 홍세태가 맡기에 알맞은 직책이었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떠났다가 삼년상을 마친 뒤에 승문원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찬수랑(纂修郞)으로 옮겨 우리나라의 시 고르는 일을 맡았다. ●위항시인들의 시선집 ‘해동유주´를 편찬 문인이 세상을 떠나면 후손이나 제자들이 망인의 작품을 수집해 문집을 간행했다. 그러나 문집 간행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글을 잘 지어야 했고, 적어도 책 한권 분량은 되어야 했으며, 편집비와 간행비가 마련되어야 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도 사회에서 문집을 낼 만한 인물이라고 인정받아야만 가능했다. 아무리 글을 잘 지어도 작품이 몇편 되지 않으면 책으로 편집할 수 없었고, 출판비를 부담할 사람이 없으면 역시 간행할 수 없었다. 홍세태 이전에 위항시인으로 문집을 낸 사람은 노비 출신의 유희경이나 최기남 정도였다. 한시를 배운 중인이나 상민의 숫자가 임진왜란 뒤부터 늘어났지만, 아직 문집을 낼 만한 시인이 별로 없었다. 문집이 간행되지 않은 채 몇십년이 지나면 원고가 다 흩어져, 후세에 이름도 남지 않게 된다. 그래서 최기남과 어울려 삼청동에서 시를 지었던 위항시인 여섯명이 1658년에 161편의 작품을 모아 ‘육가잡영(六家雜詠)´이라는 시선집을 냈다. 일종의 동인지였는데, 이들이 역관이나 의원같이 경제력을 지닌 중인들이었으므로 가능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나자 위항시인들의 작품이 많아졌다. 직업도 다양해졌으며, 시사(詩社)도 많아져,‘육가잡영´같이 동인지 성격으로 그 많은 시인과 작품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창흡의 형인 대제학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홍세태에게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을 편찬해 보라고 권하였다. “우리나라 시 가운데 채집되어 세상에 간행된 것이 많지만, 위항의 시만은 빠져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그대가 이것을 채집해 보게.” 김창협은 “천기(天機)가 깊은 자만이 참다운 시를 지을 수 있다.”는 천기론을 내세운 문인이기에 그런 제안을 했으며, 편집자로는 홍세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천기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부여받았던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데, 조탁하거나 수식하지 않고도 시를 지을 수 있는 바탕이다. 홍세태는 1705년에 낙사(洛社) 동인인 최승태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면서 위항시인과 천기론의 관계를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시는 하나의 소기(小技)이다. 그러나 명예와 이욕에서 벗어나 마음에 얽매인 바가 없지 않고는 잘 지을 수가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길 ‘욕심이 많은 자는 천기가 얕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살펴보면 시를 잘하는 사람은 산림(山林) 초택(草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부귀하고 세력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됨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신분불만? 천기론 설파 시를 통해서 사람됨까지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은 개성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개성은 빈부나 귀천에 달린 것은 아닌데, 벼슬을 얻기 위해 과거시험에 몰두한 양반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거나 시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권력에 욕심을 가질 수 없었던 위항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때까지 위항시인들은 이름난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후손을 찾아 유고를 얻어보는 일부터 힘들었다. 그는 ‘모래를 헤쳐 금을 가려내듯´ ‘사람들이 입으로 외우기에 알맞은 시´를 찾아 10여년 동안 48명의 시 235편을 골랐다. 책에 실린 시인의 후손들이 출판비를 모아 1712년에 간행했는데, 김창협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였다. 홍세태는 “(잘못 골랐어도) 바로잡아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머리말을 썼다.‘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제목은 ‘해동에 버림받은 구슬´이란 뜻도 되며,‘해동에서 시선집을 낼 때에 빠졌던 구슬´이란 뜻도 된다. 빛도 이름도 없이 땅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위항시인들의 작품이 그 덕분에 후세에 전해졌다. 그는 69세 되던 해에 자서전적인 시 ‘염곡칠가(鹽谷七歌)´를 지었는데, 그 첫번째 노래는 이렇다.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대의 자가 도장이라지./자기 말로는 평생 강개한 뜻을 지녔다지만/일만 권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늙고 나자 그 웅대한 포부도 풀더미 속에 떨어졌네./누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를 끌게 했던가?/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아아! 첫번째 노래를 부르려 하니/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자기 같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나 끌게 하는 사회가 바로 그가 인식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천기를 잘 보전하여 시를 지으라고 권하였다. 제자 정민교가 일자리를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홍세태가 글을 지어 주었다.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내게 달렸으며, 그 재주를 쓰고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내게 달린 것을 할 뿐이다.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그만둘 수 있으랴?´ 중인 이하에게 벼슬길을 제한하는 사회제도 때문에 슬퍼할 게 아니라, 타고난 천기와 글재주를 맘껏 발휘하라는 충고이자, 사대부 문단에 대한 불만 선언이다. 그의 천기론은 후대에 더욱 발전하여 위항시인들이 방대한 분량의 시선집을 출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이색거리 탐방] (9) 화곡동 유통 단지

    [이색거리 탐방] (9) 화곡동 유통 단지

    목동에서 인천방향으로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신월나들목 못미처 ‘○○유통’‘○○통상’이란 간판이 쭉 늘어서 있는 거리가 있다. 총 1.2㎞ 구간에 230여 생활용품 점포가 들어선 화곡유통단지다. 생활용품 단지로는 국내최대 규모인 이곳은 “먹을거리와 입을거리 빼곤 다 있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물건이 다양하고 많다. 특히 가격면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싸다고 장담한다. 취급품목을 보면 문구, 완구, 화장품, 주방용품, 판촉물, 도자기, 가방·벨트 등 가죽용품, 소형가전, 공구, 차량용품, 인형, 게임기, 매트, 인테리어 팬시용품, 우산, 타월, 경품, 생활 잡화 등 종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가격. 저렴한 가격 덕분에 중간상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쉬쉬하며 감추는 ‘비밀의 쇼핑장소’다. 같은 장사라도 남보다 싸게 물건을 공급받아야 경쟁력이 생기는 탓에 ‘침묵의 카르텔’은 지켜진다고 이곳 상인들은 말한다. 화곡유통협동조합 홍종국 이사장은 “품목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형마트의 반값으로 쇼핑이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면서 “덕분에 지방 상인은 물론 러시아,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를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까지 찾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싸도 소매를 안 한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지만 지난해 8월 조합 이사회는 회의를 통해 도매와 소매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초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래 도매만을 고집했던 이곳이 소매를 시작한 것은 사정이 있다. 최근 할인마트와 대형슈퍼마켓들의 공세에 주고객층인 소상인들의 구매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편리함으로 무장한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도 불황을 가중시켰다. 주방용품을 파는 한 상인은 “도매전문상가에서 소매를 취급하는 건 제 살 깎아먹는 격이란 논쟁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 상점의 30% 정도는 소매를 하지 않는다. 매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도매가격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일부 단골 소매상들이 심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가격경쟁력에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협동조합 박상근 상무는 “주 고객이 도매상인 탓에 일반소비자에 비해 (도매 소비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조금 불편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싼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상가 대부분이 오전 9시∼오후 7시 문을 열며 일요일엔 쉰다. 글· 사진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어디서 무얼 살까 그러면 화곡동 생활용품단지의 대표적인 품목을 중심으로 쇼핑에 나서 보자. 아동용 완구전문점인 벤처유통은 3층짜리 건물 전체가 각종 무선조정완구와 게임기, 로봇, 인형, 소형게임기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전품목이 일반매장에 비해 30% 이상 싸다. 소형가전 전문점인 성원상사에선 전기밥솥부터 전화기, 스팀다리미, 토스터, 면도기, 다리미 등 각종 전자제품을 살 수 있다. 무선주전자도 만원이면 살 수 있다. 한 가게 주인은 “백화점에서 20만원까지 호가하는 T사의 신형 전기그릴이 이곳에선 10만원 정도로 평균 40%는 싸다.”고 말했다. 고속도로변 미화물산은 액자와 스탠드, 장식장, 청동장식 등 앤티크풍의 인테리어 소품을 판매한다. 인테리어 용품은 사치품목인 데다 소량생산으로 물건이 귀해 가게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만큼 바가지 쓰기 좋다는 말인데 이곳에선 일반매장의 50% 정도 가격에 구입이 가능하다. 지갑, 벨트, 가방 등 각종 가죽제품을 파는 CM유통에선 벨트는 2000원, 지갑은 7000∼8000원부터 살 수 있다. 한동유통에서는 그릇, 수저, 프라이팬부터 식당에서 쓰는 대형 솥단지까지 주방용품 일체를 판매한다. 매장을 돌며 발품 파는 것이 힘들다면 만물유통과 같은 ‘마트식 도매점’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4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이곳은 스포츠용품부터 공구, 시계, 주방잡화, 자동차용품, 주방용품까지 마치 유통상가를 축소한 듯하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의사 한송이의 요리짱건강짱] 섬유질 보고 봄나물 샐러드

    [의사 한송이의 요리짱건강짱] 섬유질 보고 봄나물 샐러드

    요즘 시장에 나가보면 쌓여 있는 여러 가지의 봄나물이 시선을 유혹한다. 쑥, 냉이, 달래, 두릅, 원추리, 취, 돌나물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에도 파릇파릇 새싹이 돌고 햇볕이 한층 따사로워진 이 즈음, 향긋한 봄나물들은 봄소식을 가장 먼저 우리 식탁에 전하는 봄의 전령사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부식으로 나물과 생채, 쌈 등을 즐겨 먹었는데 이는 주로 에너지원의 역할을 하는 곡물과 어울려 비타민과 무기질의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제철에 나는 생채소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려두었다가 겨울이나 새싹이 돋지 않는 이른 봄에 불려 씀으로써 나물은 연중 어느 때나 밥상에 오를 수 있는 음식이다. 최근 자연식이 붐을 이루면서 우리나라 전통음식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특히 육식과 고도의 탄수화물, 영양적으로도 훌륭할 뿐 아니라 풍부한 섬유질 섭취의 근원이 되는 나물이야말로 빠뜨리지 말고 먹어야 할 중요한 건강 식품인 것이다. 채식은 본래 한식의 바탕이고, 채식의 바탕은 바로 나물이며 이러한 나물은 사계절의 맛과 향기, 그리고 여러 색깔로 한국인의 식탁을 풍성하고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꽃이다. 우리 조상들은 250여 가지나 되는 나물을 먹었다고 한다. 온 산, 들녘에 나는 풀, 뿌리들이 그 재료가 되었으며 이러한 야생의 채소들은 당연히 고유의 맛과 향과 질감을 가지며 비타민, 미네랄, 섬유질, 기타의 생리활성물질 등 영양소의 함량이 월등히 높다. 뿐만 아니라 제철의 채소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한 계절을 이겨내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생명력을 품고 있다. 흔히 ‘채소’나 ‘섬유질’ 하면 생으로 먹는 샐러드를 떠올리지만 이러한 채소들은 90% 이상이 수분이다. 이들은 부피가 커서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하기에는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 채소는 살짝 데치거나 찌게 되면 부피가 줄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소 작용에 의한 영양소 파괴가 중단된다. 또한 식물 세포벽의 변화로 식물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생으로 먹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만, 이러한 효능이 극대화되고, 본래의 맛과 향을 내려면 자연에서 농약이나 인공비료를 주지 않고 제대로 자란 제철 채소여야만 하는데 현재 우리가 접하는 채소들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요즘 시장에서 사다 끓여먹는 쑥국은 어렸을 적 엄마가 해 주셨던 그 향과 맛이 나질 않는 것이다.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산에 나물’은 제철 나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계절과 시기에 따라 제공되는 나물이 바뀌는데 강원도 점봉산에서 깨끗하게 자란 제철 나물을 쓰기도 하고, 말려두었다가 불려 쓰기도 한다. 식당이 쉬는 월요일에는 직접 사장님이 산지를 찾아 다니며 나물을 구해오는 경우도 있다. 싱싱한 제철 채소는 생채(샐러드)로 내고, 약간 시들면 나물로 요리한다. 이 곳은 나물 자체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파, 마늘 등의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고 들기름과 약간의 소금만으로 조리하는데 자연스러운 나물의 맛과 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고,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감칠맛이 난다.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여러가지 나물들을 향긋한 산마늘 잎에 싸서 먹으면 그 맛이 더욱 일품이다. 각종 나물은 물론이고 함께 나오는 제철 반찬과 밥, 담백한 찌개류와 직접 만들어주는 후식까지 모두 하나같이 정성스럽고 맛있다. 이런 모든 것을 맛보려면 단품 보다는 정식을 먹기 권한다. 양도 적당하고, 간이 강하지 않아 소화가 잘 되고 속이 편안하다. 특히 어르신이나 외국인 손님을 모시고 간다면 더욱 만족스러울 수 있는 곳. 전화 (02)732-2542. 정식 2만 5000원부터. 나물비빔밥 정식 1만 3000원, 맑은 송이전골 2만원.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여성전문병원 ‘한송이 W클리닉´ 원장
  • [여성&남성] ‘호모 컬렉터스’

    [여성&남성] ‘호모 컬렉터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젊은 여인들이 연이어 목졸려 숨진 채 발견된다. 천재적인 후각을 지닌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가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여인의 향기를 ‘수집(?)’한다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주인공 그루누이의 광기는 도를 넘어섰지만 한번쯤 수집에 빠져 본 이들이라면 그루누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표 수집에 올인하던 구세대 컬렉터들과 달리 향수와 마우스, 구두,DVD, 밀리터리 피겨 등 훨씬 다양해진 ‘20&30’들의 컬렉션을 들여다봤다. ●향수 수집은 기억을 모으는 것과 같다 회사원 김지은(27·여)씨는 10여년째 향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처음에는 언니가 가진 미니어처(소형 모형) 향수병이 예뻐서 모으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향수 예찬론자’가 됐다.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향수를 사고 그 향기에 대한 느낌을 일기장에 기록한다.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향기가 주는 분위기와 느낌을 모으는 거죠. 향수를 고를 때의 고민과 기다리는 설렘, 박스를 열어 처음 펌핑했을 때 풍기는 분자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천국을 엿보는 것 같아요.” 그의 향수 예찬론은 멈출 줄 모른다. 그는 “지난 기억들은 잊어 버리지만 코끝에서 맴돌았던 향기는 잊혀지지 않아요. 향수를 모으는 일은 기억을 모으는 것과 같죠.”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요즘도 특정 브랜드를 정해 놓고 꾸준히 사모으며 한달에 10만원 정도 투자한다. ●다운로드는 DVD진열의 기쁨 몰라 정석한(29·회사원)씨가 DVD광이 된 것은 좋아하는 영화를 곁에 두고 싶다는 욕망 때문.DVD 구입에 매월 20만∼25만원 가량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다운로드를 받으면 공짜로 볼 수 있는데 왜 비싼 돈을 들여가며 DVD를 사냐.’는 비아냥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소장해 진열해 놓으면 얼마나 뿌듯한지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개봉작은 수집은 기본이고 40∼50년대 고전영화 DVD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발품, 손품(?)도 마다하지 않는다. 알음알음으로 중고시장을 뒤져 구하거나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건지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장품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 모음이다. 하나씩 사 모으다 보니 3년이 걸렸다. 정씨는 “힘들게 모아서 그런지 혼자서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기분은 정말 끝내 줍니다.”라고 말했다. ●우울할땐 와인코르크에 남은 추억을 회사원 강수정(31·여)씨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와인 코르크 마개를 모으는 재미에 와인바를 찾는다. “누구와 어디서 마셨는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코르크마개를 하나 둘 가져오기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와인 마니아들 사이에선 의식처럼 통하더라고요. 일부 마니아들은 와인병 라벨까지 떼어 모은다던데 ‘귀차니스트’라 그 수준까진 도달하지 못했죠.” 그는 기분이 우울할 때면 커다란 유리컵에 담아둔 코르크마개를 꺼내 코르크 껍질향과 다 날아간 듯하면서도 아련하게 남아 있는 와인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보통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이나 강남의 와인바에서 친구들과 만나는데 요즘은 서로 코르크마개를 가져가려고 쟁탈전이 벌어진다고 털어 놓았다. ●전쟁모형 사는 과정이 진짜 전쟁 김병구(30·회사원)씨는 ‘밀리터리 피겨(병사나 병기를 실제 비율로 축소해 놓은 인형)’ 마니아다.2001년 우연히 12인치 군인 피겨를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다. 국내에서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구하기 쉽지 않아 미국, 유럽, 일본에서 구해야 한다. 수입 사이트에 예약하고 바로 입금하지 않으면 ‘닭 쫓던 개’가 되기 쉽상이다. 그는 “피겨를 사 모으는 일이 제겐 피말리는 전쟁이죠. 전세계 쇼핑 사이트를 다 뒤져야 합니다.”라면서 “운송료, 관세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는 한정 없이 가격이 올라가기도 합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한동안 ‘미국 레인저(수색대) 우드랜드 버전’을 가지고 싶어서 전세계 쇼핑몰을 다 뒤졌다.“지방 출장을 갔다가 모형숍에 이 제품이 있는 걸 발견해 뛸 듯 기뻤는 데 꿈이더라고요.”라고 멋쩍어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결국 외국 쇼핑몰에서 12만원에 ‘보물’을 얻었다. 그는 요즘도 한달에 20만원 정도를 투자한다. “주위에선 어른이 장난감 모은다고 타박하죠. 하지만 어렵게 피겨를 구입해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 같답니다.” ●구두는 수선만 잘해도 저절로 모인다 패션 감각이 빼어난 미시족 박진혜(34·여·회사원)씨는 구두 수집광이다.“옷도 중요하지만 정작 신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해요. 패션의 마무리는 신발인데 그걸 몰라요.”라며 답답해 했다. 그렇다고 그가 충동구매나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 수집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꼭 맘에 드는 디자인 두 켤레, 유행을 타는 디자인 한두 켤레, 부담없이 신을 수 있는 싼 구두 한 켤레 등 4∼5켤레를 사는 게 ‘전부(?)’라고 설명했다. “구두도 다른 물건처럼 신는 사람의 정성이 중요해요. 아낌없이 막 신지만 수선도 정성스럽게 하죠. 굽은 한 달 반마다 갈아주고 긁히면 바로 구입한 상점에 수선을 맡긴 답니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구두를 모으기 시작한 그는 현재 60여 켤레를 소장하고 있다. 그나마 많이 구조조정을 한 덕분이다.‘말끔한 구두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준다.’는 징크스를 가진 박씨는 첫 월급을 타고 명동의 한 제화점에서 맞춘 검정색 수제 하이힐을 특별한 날 신는다고 말했다. ●마우스 마구 모으다 보니 얇아진 지갑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임모(33)씨의 짝사랑 상대는 컴퓨터 마우스다. 온라인게임 스타크래프트를 즐겨하던 그는 보다 좋은 감도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마우스를 찾다가 하나씩 모으게 됐다. 처음에는 용산전자상가에서 발품을 팔았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동호회나 온라인 매장에서 구입한다. 지금까지 그가 수집한 마우스는 400개를 훌쩍 넘는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1만원짜리부터 10만원짜리 MX300까지 있다. 마니아들 사이에 ‘마구’로 불리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구형 볼마우스는 골동품으로 간주돼 6만∼6만 5000원에 거래된다.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다른 수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가여서 ‘가랑비에 옷 젖듯’ 지갑이 얇아진다. 임씨는 “대충 따져봐도 800만∼900만원 정도는 쓴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그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갈수록 중독되는 느낌이다.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얼마전 가지고 있는 마우스를 모두 창고에 넣고 꺼내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카페 ‘수집본색’ 운영자 한주영씨 “지를땐 쾌감 모이면 행복 시세차익 덤” 도대체 ‘디나르’가 뭘까? ‘코루나’‘스토팅키’‘메티칼’‘탱게’는? 이 생경한 단어들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체코, 모잠비크, 카자흐스탄의 화폐란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는 걸로는 성에 안 차 수십개씩 모아 정성스레 닦고, 앨범에 꽂으며, 만면에 미소짓는 사람이 있다. 화폐 수집광 한주영(38)씨다. 그는 1만 3000여 수집 마니아들의 아지트인 온라인 카페 ‘수집본색’의 운영자다. “수집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마음을 이해 못한다.”는 한 마디에 수집광의 ‘본색’이 집약돼 있다. 그는 “수집에 열을 올리기 전엔 홈쇼핑에서 물건 사는 주부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면서 “그러나 요즘은 나도 마음에 드는 수집품을 만날 때면 ‘지름신’이 강림해 충동구매한 적이 많다.”고 고백했다. 그는 “요즘 수집의 대세는 화폐”라고 말한다. 수집가들마다 취향은 각기 다양하지만, 화폐가 구미를 당기는 까닭은 투자가치 때문이다. 아예 처음부터 시세차익을 노리고 화폐 수집을 시작하는 큰손도 적지 않다. 그는 이런 경향을 매우 경계한다.“수집은 취미로 할 때라야 즐거운 것인데, 돈벌이 개념이 끼어드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사업이 된다.”는 것이다. 한씨도 9000여개의 화폐로 컬렉션 리스트를 꾸민 화폐 마니아지만, 화폐를 모으는 이유는 “그저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일로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동전을 정리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기분이 좋아진다.”면서 “진정한 수집 마니아라면 돈벌이가 아닌 수집 자체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 닮아 친근해요”

    ‘그는 달린다. 가녀린 몸과 기다란 팔, 다리를 쉼없이 움직이며 어딘가로 달음박질친다. 힘겹지만 멈출 수 없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중앙분리대에는 조각품이 가득하다. 송파구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올림픽로 주변지역을 국제적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기획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덕분이다.88서울올림픽 운동경기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멀리뛰기, 볼링, 높이뛰기, 조정, 태권도 등 48개 종목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이 가운데 2호선 종합운동장역 4번 출구 옆에 놓인 김병철 작가의 ‘달리기-도약21세기(4×0.64×2.48m)’가 눈에 띈다. 운동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타 작품들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청동상은 우스꽝스러운 몸매를 지녔다. 몸은 보잘것없이 말랐고, 팔과 다리는 지나치게 길쭉하다. 게다가 손과 발이 기형적으로 크다. 그러면서도 온몸을 앞으로 구부려 힘껏 내달린다. 분명 열심히 달리지만, 육상선수의 날렵함을 엿볼 순 없다. 오히려 일상에서 달음질치는 현대인이 연상된다. 작가는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리는 40대 가장을 묘사했다.”고 설명했다.“운동선수만 달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모두가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송파구는 운동종목인 달리기를 주제로 제시했지만, 작가는 삶의 달리기를 그려낸 것이다.오가는 시민들도 작품에서 자신을, 이웃을 발견한다. 회사원 김성식(34)씨는 “‘저 사람, 열심히 사는구나’하고 생각한다. 어딘가로 쉼없이 달려야하는 내 모습 같아 동지적 친근감마저 든다.”고 작품을 평했다. 대학생 이지은(21)씨는 “어느날 문뜩 아빠의 지친 어깨를 마주하듯 가슴 뻐근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청동상은 희망을 품고 있다. 작가는 “험난한 현실에서도 두 다리를 크게 벌려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몸을 유난히 가느다랗게 조각한 것도 “나약해 보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우리 민족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그래,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듯 오늘을 힘차게 내달리자. 그러면 내일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라고 해도 그게 인생 아닌가.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강원도 춘천 시내의 언덕 지대인 약사리 고개에 우뚝 선 죽림동 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54호·죽 림동 38)은 춘천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다. 신도들이 자생적인 신앙의 싹을 틔워 공소·본당에서 주교좌성당까지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희생이 따랐다. 지난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4000여명이 미사에 참석할 만큼 교세가 컸던 본당. 개발 바람이 불어 인근 지역에 아파트 단지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신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지금은 ‘주교좌성당’의 명맥만 근근이 이어가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태동기부터 고난의 신앙 역정을 모두 견뎌내고 묵직하게 선 ‘맏형’격 신앙터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죽림동 성당의 역사는 1920년 본당으로 설립된 곰실 공소로부터 시작된다. 당시만 해도 강원 중심 본당인 횡성 풍수원 성당의 신부가 이 지역의 작은 공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에서 동쪽으로 5㎞ 떨어진 외딴 곳의 곰실 공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도가 늘어나면서 본당 설립을 요청했고 마침내 1920년 본당이 설립돼 당시 풍수원 성당의 보좌였던 김유용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모셔왔다. 이후 신도들은 춘천 시내에 성당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없이 함께 가마니를 짜고 짚신을 삼아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지금의 성당 아래 골롬반의원 터와 아랫마당, 수녀원 터를 사들여 성당을 세운 게 1928년 5월이다. 지금의 성당은 이 부지에 보태 1939년 서울(경성)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분할되면서 부임한 구인란(Quinlan) 주임신부와 신도들이 약사리 고개 언덕의 도토리 밭을 추가로 매입해 마련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성당 모양새만 갖췄지 구조며 성물은 변변치 못했던 것 같다. 결국 1941년부터 새 성당을 지을 계획을 세웠는데, 성당 벽의 라틴어 초석이 말해주듯 일제의 살벌한 감시와 박해로 8년 뒤인 1949년 4월5일에야 착공할 수 있었다. 전남 광주의 ‘자’씨 성을 가진 화교 기술자가 설계와 건축을 맡았다.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석재를 날라다 외벽을 모두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어 내부공사를 하던중 6·25전쟁이 터졌다. 한쪽 벽이 모두 무너지고 사제관이며 부속건물이 대파되었는데 전쟁 중에도 복구작업을 벌여 1956년 6월 마침내 주교좌 성당 축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교구 설정 60년을 맞은 1998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가회 작가들이 힘을 모아 제대며 내부 성물들을 새롭게 꾸몄는데, 물론 외벽이며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성당은 명동성당의 옛 십자가와 똑같은 모습의 십자가와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이 작은 십자가는 서울대교구에서 갈라져 출발한 교구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려면 둔중한 청동 문을 지나야 하는데 성당 건립을 관할했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를 기리는 한 쌍의 아일랜드풍 십자문양이 새겨져 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주로 강원과 호남 지역을 관할했는데 죽림동성당에서도 1939년부터 30년간 모두 11대에 걸쳐 이 선교회 소속 신부가 주임을 맡았다. 지금도 성당 입구엔 이 선교회 소속 수녀원이 있으며 성당 아래쪽 병원의 이름도 여전히 ‘성골롬반 의원’. 지역 주민들에게 ‘성당 병원’이라 불리는 이색 공간이다. 고풍스러운 외벽과는 달리 내부는 현대식으로 가꿔져 대조를 이룬다. 양쪽 벽을 두른 정감어린 예수 고행 14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성당의 핵심은 역시 감심과 화강암 제대, 독경대, 주례석, 촛대로 구성된 중앙 제대 공간. 한국 천주교계에서 성미술과 전례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으로 정평난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인들이 뜻과 품을 모은 작품들이다. 요즘 새로 짓는 성당들이 모두 이곳에 와 그야말로 ‘한 수 배워간다’는 바로 그 이름난 전례공간이다. ‘파격의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성당 뒤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이내 낯선 광경을 만나게 된다. 이 성당에 몸을 담았거나 강원 지역에서 희생된 내외국인 성직자 유해 16구를 모신 성직자 묘역이다. 성당 본당에 바로 붙여 묘지를 쓴 흔치 않은 곳이다. 묘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전쟁기 북한으로 끌려가다 순교한 신부들. 전쟁 발발 당시 보좌신부였던 프란치스코 신부와 라바드리시오 신부, 고안당 신부, 진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눈에 띈다. 외국인 신부들 틈에 나란히 누운 한국인 이광재 신부는 원산까지 끌려가 어느 방공호에서 선종했다고 한다. 춘천교구는 해마다 11월 첫 주간을 ‘위령의 달’로 정해 이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된 사제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 ‘위령의 달’ 행사에는 춘천 지역 사제와 신도들이 모두 모인다고 한다. 6·25 전쟁 중 주요 인사들이 쇠사슬에 손이 묶인 채 북한으로 끌려간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서 기독교계도 숱한 희생자들을 냈다. 당시 교황 사절을 비롯해 외국인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 수백명이 평안북도 산골에 강제수용돼 34개월간 포로생활을 했는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성당이 건립될 때 주임으로 있었던 구인란 신부도 미사 도중 끌려갔으나 기적적으로 돌아와 주한 교황청 대사를 지낸 뒤 1955년 초대 춘천 대목구장에 부임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과는 아주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인 셈이다. 이 묘역 바로 뒤편에는 기이한 십자가가 나무에 기대어 서있다. 지난 2000년 대희년 6월25일 춘천교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를 열면서 제단에 설치했던 십자가다. 동해안 지역을 휩쓴 화마로 불 탄 소나무에 북한의 주목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분단 교구의 아픔과 신도들의 통일 염원이 서려 있다. 지금 죽림동 성당에 적을 둔 신도는 1600명. 대부분 오래도록 이 성당을 다닌 나이 든 세대들이다. 지난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3800명이 성당을 다녔다고 한다.2000년대 들어 춘천 지역엔 17개의 성당이 새로 생겨나 애막골, 퇴계동, 수무숲 성당같은 곳엔 신도 수가 3000명을 넘는다. 지난 2003년부터 주임을 맡고 있는 김현준 신부는 “지금 죽림동 성당은 옛날의 교세와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만 신도들의 자생적인 믿음에서 출발해 신앙 공간을 일군 흔치 않은 성당으로 한국 교회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kimus@seoul.co.kr ■ 죽림동 성당·춘천교구 ‘밀알’ 엄주언 죽림동 성당과 천주교 춘천교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지역에 신앙의 싹을 틔워 성당을 세워놓은 밀알인 엄주언(말딩·1872∼1955)이다. 한국의 천주교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없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특징을 갖는다고 할 때 춘천 지역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 한 가운데 바로 엄주언이 있는 것이다. 춘성군 장학리 노루목에서 태어난 엄주언은 19살때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천주교와 연을 맺었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발상지인 광주 천진암을 찾아 움막생활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영세하도록 인도했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천주학쟁이’로 몰려 따돌림과 온갖 수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화된 주민들이 차츰 모여들었으며 죽림동 성당의 모태인 곰실 공소를 마련해 예절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된 것도 순전히 엄주언의 공이다. 풍수원 성당과 서울의 명동 성당을 오르내리며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실이다. 본당 설립후 신도들의 애련회를 조직해 춘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서 결국 성당 터를 구입했으며 여기에 6대 춘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구인란 신부가 인근 밭을 매입해 지금의 죽림동 성당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성당 입구의 사제관과 연결된 말딩회관은 바로 춘천교구가 그의 공을 기려 지난 1997년 건립한 곳으로 춘천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공간으로 통한다.
  • [책꽂이]

    ●도쿄타워를 향해 달려라(알렉산드라 후놀트 지음, 김준미 옮김, 주니어 김영사 펴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해결하는 꼬마 탐정들의 범인추적 과정을 통해 일본의 문화와 지리, 역사 등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꾸민 학습서. 일본의 전통여관 료칸, 벚꽃축제 하나미,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종교 신도 등 고유의 문화를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추리와 탐험이 만나는 세계여행’ 시리즈 첫째권. 시리즈 2,3권으로 브라질편 ‘아마존에서 사라진 아빠’와 인도편 ‘뉴델리의 얼굴 없는 도둑’도 함께 나왔다.9500원.●흙으로 만든 귀(이규희 지음, 바우솔 펴냄) “나리 마님, 절대로 밖에 나가셔서는 안 됩니다. 왜놈들이 조선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귀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간답니다. 그래야 조선 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알고 본국에 가서 상을 받는다고요. 지금 남원뿐 아니라 경상도나 충청도까지 귀나 코가 잘린 시신들이 셀 수 없이 많답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미미쓰카’라 불리는 이총(耳塚, 귀무덤)의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한 책. 이 무덤엔 우리 군인과 민간인 12만 6000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 무덤 뒤엔 가증스럽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사 지내는 도요쿠니(豊國) 신사가 자리잡고 있다.7000원. ●트로이와 크레타(한스 바우만 지음, 강혜경 옮김, 비룡소 펴냄) 20세기초 트로이와 미케네, 크노소스 유적을 발굴해 전 세계에 고고학 열풍을 몰고온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서 에번스의 일대기. 기원전 3000∼1만년에 걸쳐 에게해 일대에서 번영을 누린 트로이와 미케네, 크노소스 문명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청동기 문명을 입증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은 일곱살 때 선물로 받은 책에서 불타는 트로이성의 그림을 보고 당시로선 신화로만 존재했던 트로이 전쟁의 무대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꿈을 키웠다.1만 2000원.●한국의 멋-인물편(최순자 등 지음, 삐아제어린이 펴냄)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이야기. 안견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와 사군자에도 능했다. 그의 화풍은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1447년에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을 비롯, 정인지·신숙주·성삼문 같은 당시 문신들의 찬시가 곁들여져 회화사적으로 더욱 가치가 높다.‘금강전도’ ‘청풍계도’ ‘계상정거도’ 등을 그린 겸재 정선, 김홍도·신윤복·김득신 등 조선 3대 풍속화가의 이야기도 실렸다.9000원.
  • [길섶에서] 홍탁/최태환 수석논설위원

    화단에서 월전(月田) 장우성 화백만큼 카리스마가 돋보였던 이가 있을까. 그는 동양화 1세대다. 조선조말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의 문하였다. 채색, 수묵 자유자재였다.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진행형이었다. 고답적인 문인화를 현실비판의 영역까지 확장했다. 작고하기 전 급정거한 버스가 휘청하는 그림을 남겼다. 자신의 은유였다. 어지러운 세상을 안온하게 붙들고 싶은 심상의 표현이었다.2년전 타계했다.94세였다. 그는 식성이 좀 독특했다.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했다. 양식을 즐겼다. 삼청동 자택 앞에 단골집이 있을 정도였다. 이채롭다. 어느날 지인이 물었다.“선생님은 그 연세에 양식을 그렇게 좋아하십니까.”그러자 그가 답했다.“밥은 너무 오랫동안 먹었잖아.” 그다운 해학이었다. 설 명절때 시골서 친구와 홍어를 먹었다. 경상도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음식이다. 홍탁. 홍어와 탁주. 그는 어느 날 맛이 들었다고 했다. 목포에 종종 주문한다고 했다. 극성이다. 나이가 들면 미각이 넓어지는 걸까, 변덕스러워지는 것일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 [거리 미술관 속으로] 무교동 대우조선해양빌딩 ‘호기심’

    서울 무교동 옛 대우조선해양 빌딩(현 하나은행 전산본부) 지하 아케이드로 향하는 계단 중간에 ‘엉덩이가 예쁜 여자’가 한 명 서있다. 나신으로 뒤돌아 선 모습이다. 살포시 무릎을 굽혀 엉덩이를 쭉 빼낸 모습이 요염하기까지 하다.1994년 12월10일에 태어난 그녀는 수많은 남정네의 흠모를 받아 왔다. “오랜만에 한번 만져 볼거나.” 얼큰하게 취한 직장인들이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을 탐닉한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도 그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때문에 청록빛이 감도는 청동상이지만, 엉덩이와 가슴은 손때로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엉덩이는 수년간 쳐다봤지만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벽에다 귀를 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요?’‘저 너머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고 있어요. 벽으로 둘러싸인 이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 저 아름다운 세계로 날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저 너머 세상을 동경하고 있다. 몸은 화강암 벽에 갇혀 있지만, 정신은 어느 새 그 세상에 닿아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라. 아름다운 머리채가 하늘로 올라가더니 저 세상과 통하는 창문까지 뚫는다. 그리고 저 너머 세계의 구름을 에워싼다. 작가 박헌열 서울시립대 교수는 “몸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마음은, 정신은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 작품이름이 ‘호기심’이다. 그녀는 세상에 귀 기울였지만, 우리는 그녀의 몸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녀가 외롭지는 않았을까.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직장인들이 엉덩이를 손쉽게 만지도록 작품의 높이를 조절했습니다. 삭막한 도심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며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낀다면 저도, 그녀도 행복하지요.” 그래서 청동이 벗겨진 엉덩이를 손질할 계획이 없단다. 반질반질한 빛깔 그 자체가 이미 작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의 손길로 그녀의 엉덩이를 색칠해 보자.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이젠 웃고 넘는 박달재

    이젠 웃고 넘는 박달재

    충북 제천에 있는 박달재가 올해 말 ‘특급 관광지’로 탈바꿈한다. 26일 제천시에 따르면 봉양읍 원박리∼백운면 평동리간 4.5㎞의 박달재에 올해 말까지 모두 29억 4000만원을 들여 벤치와 대장간 등 갖가지 편의 및 관광시설을 조성한다. 청동리 경찰묘역 앞에는 벤치와 화단을 만들고 인근에 대장간과 무구전시관 등이 있는 체험공간을 설치한다. 무구전시관에는 투구와 칼 등이 있어 무인을 흉내낼 수 있고 차를 맛보고 목각도 하는 체험관도 있다. 좀더 올라가면 박달재 자연휴양림 산 중턱에 있는 아름다운 경은사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다. 이어 박달재 정상에 매점인 ‘금봉이네 집’, 높이 7m 규모의 인공폭포와 물레방아 등이 만들어진다. 금봉이는 조선 중엽에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박달과 하룻밤 사랑을 나눴다 돌아오지 않는 박달의 이름을 부르다가 숨진 이곳의 처녀.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고 시름에 잠겨 있다 금봉이가 죽은 것을 알고 박달재 절벽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고개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봉양읍 원박리에는 벤치 등 각종 편의시설과 높이 20m 이상되는 상징물이 세워진다. 제천시는 4∼5월 공모를 통해 상징물 모형을 결정키로 했다. 인근에 장승 등 60점의 조각품으로 꾸며지는 목각공원도 만들어진다. 천등산에 있는 박달재는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옛길로 계곡이 험해 고려시대 때는 김취려 장군이 10만명의 거란군을 물리친 전적지이기도 하다. 현재 박달재에는 박달과 금봉이의 동상과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유명한 ‘박달재 노래비’ 등이 세워져 있다. 제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정5품까지의 관직에 한정한다.”고 규정했다. 양첩 자손은 그나마 한정된 벼슬에라도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천첩 자손은 벼슬할 기회가 없었다. 뛰어난 서얼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정조는 서얼금고법에 해당되지 않도록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잡직(雜織) 관원을 뽑았다. 규장각을 설치한 뒤에,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정무직이 아니어서 기득권층의 반대도 없었고,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서얼 학자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네사람이었다. 당대에 가장 명망있는 서얼 출신의 이 네학자를 4검서라고 불렀다. 유득공은 조선의 문물과 민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1책을 지었으며, 대를 이어 검서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유본예가 부자편이라고 할 수 있는 2권2책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지었다. 바로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들 부자는 필운대 꽃구경을 서울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유득공은 ‘경도잡지’ 유상(遊賞)조에서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들,(무악산)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水石)을 찾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대부분이 인왕산 일대이다.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시인은 그렇게 새해를 시작하고, 또 한해를 보내며 늙어간다. ●정조도 필운풍류에 취하다 한세대 앞선 시인 신광수는 도화동에서 복사꽃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필운대 꽃구경이 장안의 으뜸이라.(雲臺花事壓城中)” 하고는,“삼십년 전 봄 구경하던 곳을/다시 찾은 오늘은 백발 노인일세.(三十年前春望處,再來今是白頭翁)”라고 끝을 맺었다. 반악은 진(晉)나라 때의 미남 시인인데, 그도 나이가 들자 흰머리가 생겼다. 자신은 서얼 출신이라 벼슬 한번 못하고 늙었지만, 반악 같이 잘 생기고 재주가 뛰어난 시인도 나이 들자 흰머리가 생기지 않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고전들은 모두 검색이 가능하다. 한글로 번역한 책에서 ‘필운대’ 제목을 찾으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시 2편과 이덕무가 지은 시 1편만 나온다. 제목은 아니지만 필운대를 노래한 시는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의 작품이 더 있다. 모두 유득공 부자가 필운대 꽃구경을 장안의 명승으로 소개한 정조-순조 시대 인물들이다. 이 당시에 필운대 꽃구경이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유흥지였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필운대 꽃구경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백단령 차려 입은 사람은 모두 시 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에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필운화류(弼雲花柳)’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은 다른 시들과 같이 필운대의 번화한 꽃구경 인파를 노래했다. 뒷부분에선 그 가운데 시인과 독서인을 찾아내고, 장안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하는 속에서 글 읽는 젊은이에게 벼슬을 주어야겠다는 왕자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이 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왕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지 않아 원문 검색만 가능한 문집 가운데는 위항시인들이 지은 시도 많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지 못한 위항인들의 시까지 합쳐 60년마다 편집한 ‘소대풍요(昭代風謠)’나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엄청난 양의 필운대 시가 실려 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해마다 수천명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하며 시를 짓기에 분량은 많아졌지만, 해마다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운대풍월’이란 말 속에는 천박한 풍월, 판박이 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의정 채제공의 화원 구경기 이 시대에 필운대풍월뿐만 아니라, 꽃구경을 하고 산문으로 기록하는 유행도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도성 안팎의 화원에 노닐며 지은 글이 여러편 있다. 필운대 부근의 조씨 화원을 감상하고 ‘조원기(曹園記)’를 지었다. 주인 조씨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심경호 교수는 “조하망(曹夏望)의 후손이었던 듯하다.”고 추측하였다. 계묘년(1783) 3월10일, 목유선과 필운대에서 꽃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가마를 타고 갔더니 목유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필운대 앞 바위에 자리를 깔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목유선이 이정운과 심규를 이끌고, 종자에게 술병을 들게 하여 사직단 뒤쪽으로 솔숲을 뚫고 왔다. 처음에는 필운대 꽃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였다. 그러나 인파가 몰려 산속이 마치 큰 길거리 같이 번잡해지자, 채제공은 곧 싫증이 났다. 동쪽을 내려다보자 서너곳 활터에 소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동산 안의 꽃나무 가지끝이 은은히 담장 밖으로 나와 있어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목유선에게 “저기는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야. 가보지 않겠나?”고 물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널빤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점잖은 손님들이 꽃구경을 하겠다고 들어서자 주인이 집 뒷동산으로 인도하였다. 화원에는 돌층계가 여덟개쯤 깔려 있었는데, 붉은 꽃·자주 꽃·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항주·윤상동 같은 관원들도 꽃구경하러 왔다가 채제공이 조씨네 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라와서 술잔을 돌리고 꽃을 평품하며 시를 지어 즐기느라고 달이 동쪽에 뜬 것도 몰랐다. 이듬해 윤3월13일에도 채제공은 친지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육각현 아래 조씨네 화원에 찾아가 꽃구경을 했다. 석은당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눕히고 채발을 뽑아 서너 줄을 튕겨 보았다. 곡조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윽한 소리가 나서 정신이 상쾌해졌다. 얼마 뒤에 조카 채홍리가 퉁소 부는 악사를 데리고 와서 한두곡을 부르게 하자, 술맛이 절로 났다. 채제공은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하였다. “아양 떠는 자는 사랑받고, 정직한 자는 미움을 사는구나. 수레와 말이 달리는 것은 꽃 때문이지. 소나무야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아보랴?” 모두들 맘껏 흥겹게 놀다가 흩어졌다. 채제공은 북저동 명승에 노닐고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를 지었다. “도성의 인사들이 달관(達官·높은 벼슬아치)에서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노닐며 꽃구경을 했다.(줄임)국가의 백년 승평(昇平)의 기상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위항인들의 경제력이 사대부 같이 되자, 유흥문화도 함께 즐겼다는 뜻이다.(화원 이야기는 심경호 교수가 쓴 논문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를 많이 참조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中언론 “단군신화 역사 편입” 비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교육부가 새학기 역사교과서에서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고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 도래시기를 500∼1000년 앞당긴 것과 관련, 중국 언론이 비난하고 나섰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동방조보(東方早報)는 26일 “한국 당국이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학계의 고질병과 같은 요구를 받아들여 사람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했다.”며 역사교과서 개정 내용을 소개했다. 신문은 이전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한다.’고 기술돼 있으나 새 교과서는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로 바꿔 신화를 역사에 편입시켰다고 밝혔다.또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20∼15세기로 수정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신문망은 한국의 역사교과서 개정 내용을 소개하며, 한국 내에서도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jj@seoul.co.kr
  • [생각나눔] 고조선 신화서 역사로… 청동기 1000년 앞당겨

    올해 신학기 역사교과서에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최대 1000년까지 앞당겨진다. 또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된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계 의견이 엇갈려 논란이 예상된다. 교육부는 학계의 지적을 수용해 2007학년도 고교 역사교과서의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을 일부 수정해 신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개정교과서를 보급하기로 했다고 23일 밝혔다. 교육부에 따르면 이 단원 27쪽의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는 부분이 새 교과서에는 ‘신석기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 요령(랴오닝), 러시아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라고 기록된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 홍천, 경기도 가평, 경남 진주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가 전래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또 32쪽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부분도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했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중국이 고조선 건국 장소인 중국 요동지역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데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또 “단군조선 초기 역사 형성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다. 신화를 역사적인 시각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송호정 교수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면서 “중국 동북공정에 대항해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 좀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고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고고사학과의 한 교수도 “고조선 편입 문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면서 “위만 조선이 과연 정치적 실체로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실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나를 생각하면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재천 강아연기자 patrick@seoul.co.kr
  • “인혁당 무죄 선고로 사법부 새벽 돌려줘”

    한명숙 총리는 22일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무죄 선고는 32년 전 사법살인의 오명을 쓰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의 피고였던 우리 사법부에 ‘새벽´을 되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이날 오후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진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총리는 이어 “한 순간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가 국민들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참석자들을 위로했다. 오찬에는 고 이수병씨 미망인 이정숙씨 등 인혁당 재건위사건 희생자 유족 및 진상규명대책위 관계자 등 24명이 참석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상돈·김광제 선생 흉상 제막

    서상돈·김광제 선생 흉상 제막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식이 21일 오전 10시 대구 엑스코에서 한명숙 국무총리 등 정부 관계 인사, 대구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한 총리는 축사에서 “국채보상운동은 국권침탈 시대에 민초들의 가슴에 뜨거운 애국의 불꽃을 지펴 겨레를 하나로 묶은 국민정신이었다.”면서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더욱 다잡아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것으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오전 11시 30분에는 대구시 중구 공평동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지사 서상돈(1850∼1913)·김광제(1866∼1920) 선생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두 지사는 국채보상운동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서상돈 선생이 발의하고 김광제 선생이 찬동해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이 올랐다. 이어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캠페인을 적극 벌이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 국민이 금연을 통해 의연금 등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하려는 운동이 크게 일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 국채보상운동을 중단시켰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은 IMF 환란 때 금모으기 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제막식에서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은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광제·서상돈 선생의 후손들에게 ‘이달의 독립운동가’지정패와 기념품을 수여했다. 흉상은 조각가 이상일(대구가톨릭대)교수가 제작했으며, 서예가 백영일(대구예술대) 교수가 제자를 맡았다. 흉상의 높이는 68㎝, 폭은 51㎝로 실제 인물 크기의 1.2배이며 청동으로 제작됐다. 높이 10㎝의 받침대와 높이 110㎝, 가로 48㎝, 세로 42㎝의 오석 좌대 위에 올려져 있다. 또 이날 두 지사가 설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출판사 광문사(현 수창초교 후문)와 서상돈 선생 고택, 부인들이 패물을 처음 내놓은 장소인 대구 중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사무소 등 3곳에는 시민들이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한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추진위는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와 함께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장을 발행해 만국우편연합 190여개 회원국에 배포했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소재로 한 오페라 ‘불의 혼’을 지난해 초연한데 이어 2월 구미,3월 서울에서 앙코르 공연을 갖는다. 기념학술토론회와 음악회와 전시회, 시 문학공연, 청소년 무대 공연, 금연 100주년 선포식 및 전국여성금연대회 등을 열어 국채보상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7개월만에 대좌… 4시간만에 합의

    7개월만에 대좌… 4시간만에 합의

    관계 복원의 필요성에 대한 사전 교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15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 실무대표접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전 10시30분부터 얼굴을 맞댄 양측은 불과 4시간여만에 공동보도문을 번갈아 읽은 뒤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일정에 대한 사전합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北대표 “설에 겨레에 큰 선물주자” 당초 우려됐던 회담 중단의 책임을 둘러싼 당국자간 신경전은 벌어지지 않았다.“대화중단의 귀책사유가 남측에 있다고 북측이 유감을 표시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우리측 대표인 이관세 본부장은 “7개월 만에 열렸기때문에 할 일이 쌓여 있다.”면서 “부지런히 가도 시간이 없는데 과거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이 본부장은 “회담의 전체분위기는 매우 진지하고 좋았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날 회의는 북측 대표인 맹경일 조평통 부국장이 기조연설에서 “올해 북남 관계가 풍성한 수확되게 씨를 잘 뿌려 설을 맞는 겨레에게 큰 선물을 주도록 노력해보자.”며 덕담을 건넬 때부터 순항을 예고했다. 특히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양측 대표들은 날씨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녹였다. 이 본부장은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회담도 잘 될 것 같다.”고 했으며, 맹 부국장은 “봄계절 오면 겨울 물러나는 게 자연의 법칙”이라며 “북남 관계에도 따듯한 봄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 통일, 환송식서 상기된 표정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이날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사무소에서 가진 대표단 환송식에서 “지난 13일 6자회담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계기”라면서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7개월간 중단된 남북간 대화를 복원함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은 물론 한반도 긴장완화와 동북아 평화정착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밝혔다. 취임후 첫 남북 장관급회담 데뷔가 눈앞에 다가온 탓인지 이 장관은 환송식 내내 한껏 상기된 모습이었다. 한편 이날 대표접촉에서 북측은 쌀·비료 지원 및 철도·도로 연결, 경공업 원자재 제공 등 현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남북간 합의했지만 이행하지 않은 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의제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개성공동취재단·김미경 이세영기자 chaplin7@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는 위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왕기 서린 인왕산 서울의 물길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이 물을 개천(開川)이라고 하였다. 백악의 남쪽, 인왕산의 동쪽 명당에 궁궐을 지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종로를 경계로 하여 살았다. 왕족과 양반 관료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의 지역, 지금의 율곡로 양쪽 일대에 모여 살았다. 즉 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의 북촌이 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白岳·北岳)이다. 백악의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도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으며, 북악처럼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다. 그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할 무렵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의논도 있었다. 이는 전설이 돼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온 듯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겪고 나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다시 퍼져, 광해군 시대에 인왕산 기슭에다 경희궁(慶熙宮)을 세웠으며, 자수궁(慈壽宮)이나 인경궁(仁慶宮)도 세웠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왕위에 올라 인조(仁祖)가 되었으니, 인왕산 왕기설이 입증된 셈이다. ●장안의 명승지 인왕산 인왕산에는 왕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도 좋았다. 서울의 명승지로는 반드시 인왕산이 꼽혔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弼雲臺)·청풍계(淸風溪)·반송지(盤松池)·세검정(洗劍亭)을 포함했다.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가 서울 명승지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서울의 5대 명승지 가운데 인왕동과 백운동이 모두 인왕산에 있었다.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심 가까이 있으니, 성안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명승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인왕산을 보면 앞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습을 인왕산의 전부로 알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 부분에만 집과 관청이 들어섰고 사람이 살았으며, 역사가 이뤄졌다. 골짜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강희언(姜熙彦·1710∼1764)의 그림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뒤 몇개씩 합해져서 지금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몇개의 법정동이 합해져서 다시 행정동이 되었다. 사직동부터 체부동을 거쳐 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까지가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인왕산의 동네들이다. 인왕산에는 약수터도 많아서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서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다가 입산통제 25년 만인 1993년 2월25일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져, 서울시민들에게 등산로가 다시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33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등산로가 14곳이나 되며,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의 네 구역 인왕산은 경치가 좋은 명승지면서 경복궁에서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 건물이 모두 불타버려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양반과 중인들이 대대로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라는 이름에 비해, 이름난 정자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 사는 경복궁이 너무 가까운 데다, 높은 곳에서 궁궐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이 일대에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제한이 있다. 그래서 인왕산에 지어진 집들은 시대마다 그 구역이 달랐다. 경복궁이 정궁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옆동네에 관청만 있었고,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인왕산에 있었지만,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지 않는 옆자락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수성동(水聲洞)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따로 있었다. 수성동은 옥인아파트 자리라고 추정되는데,1960년대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김영상 선생이 증언하였다.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던 청풍계(지금의 청운동)나 위항시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옥류동(지금의 옥인동)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활기를 띠었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불타버려 오랫동안 폐허가 되자, 높은 곳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아전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인왕산은 구역과 높이에 따라 고관들의 호화주택이나 별장, 위항인들의 초가집들이 섞이게 되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누상동이나 누하동, 필운동 일대에는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다음 회에는 인왕산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안평대군과 무계정사, 안동 김씨와 청풍계, 김수항의 청휘각과 송석원, 필운대와 육각현 순으로 살펴본다. ■ 역사기록이 전하는 인왕산 인왕산은 역사 기록에서만 보더라도 명산으로 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인왕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무학(無學)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답했다. 이는 후에 인조반정으로 현재화된다. 또한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인왕산의 경치를 자랑했다. 한성 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적은데, 그중 놀 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줄임)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인데, 깊은 골짜기가 비스듬히 길게 뻗어 있다고 말했다. 유본해가 서울의 명승지와 동네를 소개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도 그 사실을 적시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물 맑고 바위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 이 동네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고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종로 8경·8품·8미 찾습니다

    종로 8경·8품·8미 찾습니다

    종로구는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살거리·먹거리 등을 모아 ‘종로 8경’‘종로 8품’ ‘종로 8미’를 선정한다고 31일 밝혔다. 구 관계자는 “종로구는 600년 조선왕조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8경·8품·8미를 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잠정적으로 종로구는 경복궁·창덕궁 등 고궁, 국립공원 북한산, 청계천, 흥인지문, 종묘, 서울문묘, 탑골공원을 8경 후보로 정했다. 8품은 인사동 문화지구, 북촌 한옥마을 화랑·공방거리, 동대문종합시장, 대학로 문화지구, 종로3가 귀금속 상가, 광장시장, 창신동 문구·완구·신발·수족관 상가, 낙원동 악기 상가와 떡전거리로 선정해 놓았다. 또 청진동 해장국, 종로1가 낙지, 인사동 전통차·전통음식, 낙원동 아귀찜, 창신동 성곽냉면, 종로6가 곱창, 삼청동 전통음식, 대학로 퓨전요리 등은 8미 후보이다. 이 곳들을 중심으로 3월31일까지 구청 홈페이지(www.jongno.go.kr)에서 주민의견을 들어 최종 선정할 방침이다. 구 홈페이지(www.jongno.go.kr)나 문화진흥과(731-1156), 팩스(731-0329)로 의견을 내면 된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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