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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100년 대기획]억압·멸시 이겨낸 재일동포의 삶 - 민단세대 고난과 과제

    [한·일 100년 대기획]억압·멸시 이겨낸 재일동포의 삶 - 민단세대 고난과 과제

    광복 이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억압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한 많은 타향살이를 견뎌야 했다. 재일동포들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나뉜 채 지문날인제를 폐지시키는 등 권익보호에 매진해 왔다. 여기에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뉴 커머(New comer)’들도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며 재일동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본인들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얼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해 본다. │도쿄 이종락특파원│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에 거주하던 많은 한국인들은 귀국을 원했다. 하지만 상당한 액수의 배삯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고향에서 이렇다 할 생계수단이 없는 한국인들은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200만명의 재일동포 중 140만명이 귀국하고 60만명이 일본에 체류했다. 이들은 광복 직후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두 패로 나눠졌다. 친공산주의계의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과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반공청년 조직인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이 결성됐다.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건청과 건동은 1946년 10월3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재일동포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재일본대한민국 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탄생시킨다. 당시 민단은 규모나 인력, 자금력에서 조련으로부터 발전한 조총련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악했다. 재일 한국인은 1947년 발표된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야 했다. 박병헌 민단 중앙상임고문은 “재일 한국인은 해방 전에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대우에서의 차별을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외국인 등록법이 제정돼 그 법에 의해 규제를 당하고 법률적으로 제한을 받았다.”고 말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차별의 벽을 견뎌야 하고, 일본 주류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된 셈이다. 그러다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라 재일 동포들은 특별 영주권을 받았다. 또한 일본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와 생활보호를 받을 권리,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권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취업에 제한을 받는 것을 비롯해 공영주택에 입주할 수도 없고, 국민연금 혜택을 누릴 수 없으며, 금융차별을 견뎌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을 견디다 못해 인질극을 벌인 이른바 ‘김희로 사건’이 터졌다. 부친의 성에 따라 이후 개명한 권희로씨는1968년 2월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한 뒤, 인근 하이바라군의 한 여관으로 도주해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다. 그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해 일본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1999년 우리나라 종교인들의 석방운동으로 가석방된 권씨는 지난달 26일 지병으로 숨졌다. 민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조총련계를 포함한 성묘단(省墓團) 모국방문사업을 벌여 조총련계 동포 4만 8000명의 조국 방문을 이끌어 내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일본 법무성의 2006년 통계에 따르면 재일교포는 59만 8219명에 달했다. 이들 중 민단 소속은 33만∼34만명, 조총련 소속은 9만∼10만명가량으로 추산됐다. 민단은 도쿄의 중앙본부 산하에 48개의 지방본부와 30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재일교포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매진했다. 일본의 한국인 차별에 반대하는 지문날인(指紋捺印)제도 철폐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1987년 외국인 등록법 개정을 이끌어 냈다. 이후 민단은 1994년부터 지방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재일동포들에게 지방참정권이 주어지는 듯했지만 자민당과 보수세력들의 반대로 올해 상반기 국회에서 법안제출이 무산됐다. 일본의 ‘귀화 권장정책’에 따라 2세, 3세 교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는 것도 민단이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민단 사이트에 따르면 매년 1만여명의 재일동포 2, 3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연히 민단의 구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뉴커머(New Comer)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2, 3세들을 가르칠 한국인 학교도 도쿄, 교토, 오사카 등 4곳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민단은 지난해부터 한국어 사용 운동에 나섰다. 날로 희미해지는 재일교포의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정진 민단회장도 올해 신년행사에서 신년사를 처음으로 한국어로 했다. 강우성 민단 사무총장은 “ 일본어 사용이 익숙한 2, 3세들을 대상으로 한국말 배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일본 내 한국계 은행 계좌 갖기 운동도 펼쳐 지난해 12월 말 현재 약 352억엔(약 4224억원)의 예금실적 올렸다.”고 말했다. jrlee@seoul.co.kr
  • [오디세이 서울] (2) 소공로(상)

    [오디세이 서울] (2) 소공로(상)

    소공로는 일찍이 장안의 댄디(멋쟁이)들이 출몰하던 첨단의 거리였다. 총독부와 경성부청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료들의 통근로였고, 중산모와 회중시계로 멋을 낸 모던보이들이 소파에 몸을 묻고 제임스 조이스와 예세닌을 논하던 식민지 살롱문화의 본산이었다. 소설가 박태원이 하루에 세번씩이나 드나들며 가배(커피)를 홀짝이던 다방도, 시인 박인환이 일본 패션잡지를 찢어들고 찾아가 홈스펀 양복을 맞춰입던 테일러 숍도 이곳에 있었다. 소공로가 댄디의 주무대로 자리잡은 것은 이곳이 조선은행으로 상징되는 경제권력과 총독부·경성부라는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연결하는 직통 루트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1922년 일본 양복점 재벌이 정자옥(현 미도파백화점)을 설립한 뒤 이 일대는 남성 패션의 중심거리로 부상한다. 뒤이어 상공회의소와 기독청년회, 빅터 레코드사 등이 들어서고 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지척에 반도호텔이 건립되면서 ‘모데로노로지오’(考現學·현대를 탐구하는 학문)의 현장학습장으로, 첨단과 유행에 목마른 모던보이들을 불러모으게 된 것이다. 댄디의 시대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물론 문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앉아 문단사와 시국담을 나누던 맹아적 살롱문화의 거점은 명동으로 옮겨간 뒤였다. 궁핍한 예술가와 ‘먹물’들의 빈 자리는 재력있는 멋쟁이들이 채웠다. 이 시기 소공로는 맞춤양복의 메카였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양복점 한구석을 빌려 의상실을 개업한 것이 1962년이었다. 소공로와 명동 일대에만 내국인과 일본 관광객을 상대하는 크고 작은 양복점이 300여개나 됐다. 소공동 양복가로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920년대 필동에 살며 소공로로 출퇴근하던 총독부 관리들을 상대로 일본인들이 점포를 내면서 시작됐다는 설이 우세하지만, 볼셰비키 정부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터키인들의 테일러 숍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원이야 어찌됐든 소공동 상권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이 거리의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전문직으로 꼽히던 은행원과 고급 공무원, 그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과 고급스러운 몸치장으로 곤핍에 찌든 대중들과 스스로를 구별했고, 취향의 심미화를 통해 범속한 졸부들이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궁정’을 구축하려 했다. 천박한 세태에 대한 반감을 자의식적 저항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까닭에 이들의 ‘구별짓기’는 세기말 유럽을 풍미했던 댄디즘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다만 ‘일상의 미학화’를 무기로 교양·예술과는 담을 쌓은 졸부집단을 향해 지독한 멸시와 혐오를 공공연히 표출함으로써, 문화와 취향의 영역마저 식민화하려던 경제권력의 공세에 저항한 공로만은 인정받을 만하다. 오로지 돈과 사익을 위해 들쥐처럼 내달리는, 이 만개한 속물의 전성시대에 소공로의 몰락과 댄디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사진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21일 TV 하이라이트]

    ●영상앨범 산(KBS1 밤 12시25분) 2007년 가을, 한국의 스카우트 청소년들이 네팔을 향했다. 공부와 입시에 치여 앞만 보고 달리는 요즘 아이들, 그들에게는 ‘대학’이라는 당장의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 네팔을 향하는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힘든 삶이 앞에 놓여 있지만 그들은 조금의 구김살도 없이 해맑다.   ●시네마 천국(EBS 오후 10시50분) 배우 엄지원이 최근 임창정과 함께 주연한 영화 ‘스카우트’에서 발랄한 성격의 ‘세영’역을 맡았다. 영화 작업을 통해서 좀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해가고, 또한 그 속에서 성숙해가는 것 같다는 엄지원. 그녀에게 있어 배우란 직업의 의미와 배우로서의 욕심이 무엇인지 들어본다.   ●중소기업UP 한국경제UP(YTN 오전 10시40분) 젊은이들의 중소기업 취업 기피현상과 함께 찾아온 청년실업과 중소기업의 인력난, 그 해결책을 찾았다. 중소기업과 대학교가 협력하여 만든 ‘혁신형 중소기업 현장 연수 프로그램’. 보다 나은 기술력과 보다 나은 복지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혁신형 중소기업을 소개한다.   ●김치 치즈 스마일(MBC 오후 8시20분) 김준현 아나운서의 대규모 팬 미팅을 취재하고 온 기준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한편, 수현은 애들 앞에서 새로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를 자랑한다. 때마침 연지는 기준과의 관계 때문에 우울해하는데 수현은 연지가 자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고 새 여자 친구와 연지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여자가 무서워(SBS 오후 7시20분) 승미네 집을 찾아간 은애는 승미에게 경표와의 일에 대해 묻는다. 승미는 영림의 차 사고와 유산, 이어 2년 만에 나타난 사연, 그리고 자신이 천천히 경표를 파멸시키겠다고 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승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은애는 이제 영림이 그만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던지고는 발길을 돌리는데….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부잣집 딸 유미와의 약혼도 파기한 채,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소영을 선택한 진우. 그런 남편에 대한 고마움에 소영은 독한 시집살이를 떠맡아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산다. 하지만 진우는 소영에게 권태를 느끼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미가 접근하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드는데….
  • 난곡 겉은 바뀌었지만 속은 그대로

    난곡 겉은 바뀌었지만 속은 그대로

    ‘난곡’(蘭谷)이라고도 했고,‘낙골’(落骨)이라고도 했다.‘난초 향기 그득한 골짜기’라 부르기도 했고,‘굴러 떨어진 해골’이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배지에 갇힌 강홍립이 난초를 많이 길렀다고 해서 ‘난곡’이었고, 청소차에 실린 도시 철거민들이 뼈 굴러다니는 공동묘지에 쓰레기처럼 내던져졌다 해서 ‘낙골’이었다. 서울 관악구 신림7동은 그렇게 향기롭고도 자조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최근 난곡의 마지막 판자촌이 철거됐다. 문학작품 곳곳에 발자국을 남겼던 난곡이 희미한 흔적마저 지우고 있다. 작가 조경란은 단편 ‘나는 봉천동에 산다’(소설집 ‘국자이야기’에 수록, 문학동네 펴냄)에서 난곡을 “폐허”라고 썼다. 대규모 철거가 이뤄진 2003년의 난곡을 “태풍 루사가 지나간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조경란에게 난곡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있는 곳”이었고,‘달동네지만 추석 보름달을 볼 여유를 빼앗긴 곳’이었다.“봉천동 주택개발 사업 때 봉천동 산동네에서 떠밀려나간 사람들 중 일부가 옮겨간 곳”이 난곡이었지만, 난곡이 철거돼도 봉천동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난곡에 있었다. 봉천동 옥상에서 허물어지는 난곡을 바라보며 소설의 ‘아버지’는 ‘나’에게 말한다.“집은 사라져도 거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낙골에서도 굴러 떨어지면 어디로…” 신림7동 산94번지. 철거되지 않고 남았던 마지막 판자촌이 사라졌다.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뚫린 공가(空家)가 완전히 헐렸고, 이달 1일 건설사는 재개발 아파트 기공식을 마쳤다. 포클레인이 땅을 다졌고, 골조를 세울 준비도 끝냈다.2003년 철거 당시 산94번지는 1종 일반주거지역이었다.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재개발에서 제외됐다. 올초 관악구는 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바꿨다.2009년 9월이면 지하 2층, 지상 7층의 주상복합건물 2개동이 들어선다. “낙골에서도 굴러 떨어지면, 이젠 어디로 더 떨어질 거여?” 철거가 시작된 지난 5월, 이삿짐을 싸던 세입자 신동석(가명·63)씨는 말했다.“난곡 꼭대기에 살다가 아파트 들어서면서 밑으로 내려왔는데, 이젠 여기서도 나가래.” 세입자 신씨에게 아파트 재개발은 또 다른 이주를 뜻할 뿐이었다.1960년대 말 대방동, 청계천, 동부이촌동, 남대문, 용산 등지에서 떠밀려온 도시 철거민들은 구청에서 횟가루로 선을 그어주면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았다.2003년 17만 1770㎡에 대한 재개발이 시작됐고, 지난해부터는 신축 아파트가 새 주인을 맞았다. 주인은 주로 외지인들이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난곡 세입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산101번지의 경우 전체 세입자의 34.6%), 입주한 이들도 비싼 임대료를 못내 아파트를 내줘야 했다. 난곡 세입자들은 인근의 지하방과 옥탑방을 떠돌고 있고,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던 서씨도 지금 난곡 아래쪽 어딘가로 떠나갔다. 과거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할수록 높은 곳에 살았으나, 이젠 부유할수록 높은 곳을 찾는다. 달동네 주민들은 달과도 멀어졌다. 판자촌은 사라졌으나, 판자촌 주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곡을 찾은 6일, 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바라보고, 분노하고, 기억하던 곳 구충씨(김영종 다큐 소설 ‘난곡 이야기’ 주인공, 청년사 펴냄)는 누가 잘해준다고 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니다. 눈빛은 꼿꼿해서 누군가 담배 한 보루 소주 한 병을 사주면 ‘카악∼’ 하고 가래 한번 끌어올리면 그만이다. 관의 우두머리가 “만일 처방을 잘못하거나 치료를 늦추면 이 구충으로 인해 생명을 잃게 된다.”고 선언하자, 서울 시민들은 국가 최고 의료기관이 조제한 관중환을 일제히 먹고 구충을 전멸시켰다. 난곡 주민 구충씨는 마치 박멸해야 할 박테리아와도 같았다. 김영종은 난곡을 온정적 눈길로 보는 시선을 경계했다. 향수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가난담론’, 타인의 가난에 대한 책임을 연민이나 동정과 바꾸려는 시도에 분노했다. 난곡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가난도 없어질까, 난곡을 보며 맘 불편했던 사람들도 안도할 수 있을까. 김영종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세상에 구충이 살아진 뒤로 구충의 망령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떠돌고” 있고,“거리거리, 빌딩 숲, 아파트, 급기야 나의 마음 속”까지 구충이 틈입한다. 사실 난곡에도 판자촌이 다 없어진 건 아니다. 박멸해도 박멸되지 않는 구충처럼, ‘산93번지 2´의 7가구는 마지막 재개발에도 끼지 못했다. 개울을 옆에 끼고 일렬로 늘어선 집 구조상 개발이 힘들다는 이유였다. 부동산 업자들이 “웬만해선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 말하는 곳에서, 그들은 또다시 섬으로 남고 말았다. 이웃 주민 중 누구는 “이대로 놔두면 난곡에서 그 사람들만 매장되고 만다.”고 하고, 누구는 “저 집 판 돈으로 어디 가서 살겠냐.”며 “그냥 눌러 앉아 있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홀로 루푸스병을 앓으며 개 두 마리를 가족 삼아 사는,‘산93번지 2´의 끝머리 최수희(가명·39)씨 집 앞엔 채 영글지 못한 어린 감들이 때리는 빗방울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뒹굴었다. “23살에 걸린 병, 부모에게 짐 되느니 혼자 죽는 게 낫다.”며 최씨는 막소주를 들이켰다. 소설가 황석영은 한국전쟁 때 부모님을 따라 거처를 자주 옮겨 다녔다. 황석영은 “나중에 관악산 나가는 길목에 임시 거처를 옮겼는데 그곳은 ‘나꿀’이었다.”고 추억했고,“이곳도 나중에야 신림동 외곽의 난곡이라는 걸 알았다(‘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고 기억했다. 조경란처럼 바라봐주고, 김영종처럼 분노해주고, 황석영처럼 기억해주는 것. 난곡을 기록하는 문학의 한 방식이었다. 이제 작가들이 바라보고, 분노하고, 기억해야 할 난곡의 판자촌은 사라졌다. 난곡을 오르는 길 양쪽으로 아파트만 우뚝우뚝 가파르다. 폐허의 겉은 바뀌었으나, 폐허의 속은 바뀌지 않았다.‘난곡’은 바뀌었을지 모르나,‘낙골’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 보이는 폐허가 아닌 보이지 않는 폐허를 고발할 숙제를 문학은 안게 됐다. 글 사진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섬뜩한 동작…적개감으로 가득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섬뜩한 동작…적개감으로 가득

    “너희들은 내 피를 보겠다고 결정한 거야.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어. 내겐 한 가지 선택밖에 없어. 너희가 이렇게 만든 거야. 당신들은 절대 씻겨지지 않을 피를 손에 묻히게 된 거야.” 미국 NBC방송이 18일 공개한 조승희(23)씨의 동영상 비디오와 43장의 사진,1800자 분량의 ‘성명서(manifesto)’는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사전에 계획된 범행임을 드러낸다. 조씨가 우편물을 발송한 시간은 사건 당일인 16일 오전 9시1분. 최초 총격(오전 7시15분)으로 2명을 살해하고, 재차 범행(오전 9시45분)에 나서기 직전이다. 조씨는 동영상과 사진에서 ‘스킨헤드(극우주의자)’처럼 짧은 머리에다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권총과 흉기, 망치 등 살인 도구를 든 채 의식을 치르듯 다양한 동작을 취했다. 입으로는 적대감과 분노에 찬 증오심을 뿜어냈다. 조씨는 직접 찍은 10분 분량의 동영상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씨는 “내가 그들을 위해 저질렀다. 이제 시간이 됐다. 내가 했어야 했다.”고 기숙사에서의 총격을 시인했다. 그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떤 기분인지, 목구멍에 쓰레기를 밀어 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너희가 아느냐.”며 뿌리깊은 원망도 드러냈다. 중간 중간에 사회적 약자, 십자가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또 “벤츠도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냐.”고 부유층의 쾌락적인 삶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그의 기숙사 방에서 발견된 ‘부잣집 아이들’,‘방탕’이라는 메모에서 드러낸 적개심이다.NBC뉴스는 조씨가 특히 ‘쾌락주의(Hedonism)’ 혐오와 ‘기독교 신앙(Christianity)’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김정일, 오사마, 부시’ 언급 조씨는 자신이 ‘PDF파일’로 보낸 43장의 사진 곳곳에 메시지를 넣었다. 그는 김정일,9·11테러의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언급하며 “너희들이 나를 이런 사람들로 만들었다.”며 “행복하냐.”고 비아냥거렸다. 그가 보낸 사진 중 여느 평범한 청년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은 2장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진들은 마치 살육을 앞둔 전사처럼 권총을 겨누고 칼과 망치로 위협하는 섬뜩한 동작들이 연속됐다. 자신의 머리에도 총을 겨눈 채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들은 조씨가 오래 전부터 범행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차량 안과 실내외가 모두 사진 배경이 됐고 옷차림도 조금씩 달랐다. 그가 시차를 두고 미리 사진들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조씨 ‘유나보머’ 모방했나? 미국내에서는 조씨가 우편물을 통해 범행 동기를 밝히고 합리화하는 것이 마치 ‘유나보머’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씨의 성명서와 우편물 발송 수법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나보머(Unabomber) 사건은 1970∼80년대 현대 문명과 기술을 경고한 버클리대 교수 출신의 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가리킨다. 카진스키는 직접 만든 소포폭탄을 발송하는 수법으로 사망자 3명 등 26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그 역시 ‘유나보머 선언문’이라고 불리는 ‘산업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를 언론에 보내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조승회 성명서 요약 너희(You)는 오늘을 피할 수 있는 많은 방법과 기회가 있었다. 너희는 내 피를 쏟기로 결정했다. 너희는 나를 구석으로 몰고 내게는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았다. 그 결정은 당신들의 것이다. 너희는 절대로 씻겨지지 않을 피를 손에 묻혔다. 너희는 내 마음을 파괴했고, 나의 영혼을 강탈했으며, 나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너희는 소멸시킨 것이 한 애처로운 소년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당신들 덕분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단 한 방울의 고통도 느껴본 적이 없다. 너희는 원했던 모든 것을 가졌다. 메르세데스 벤츠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는 금목걸이로도, 신탁예금,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속물들아. 유흥과 환락으로도 부족했느냐. 그 모든 것들도 너의 쾌락주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순 없다. 이제 시간이 됐다. 나는 행동했다. 그래야만 했다.
  • 판사를 사살한 법원의 검은 반란

    판사를 사살한 법원의 검은 반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부근 「상라파엘」지방재판소에서 일어난 재판중의 범인에 의한 재판관 납치 탈출 사건은 비교적 조용했던 미국의 여름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인종분규의 불씨를 지핀 이 사건은 그처럼 큰 피해를 내지 않고도 수습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과, 법정마저 흑인들에게 차별대우를 한다는 불만의 폭발이라는 여론이 들끓어 지금 미국에서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흑인청년이 총나눠 판사인질로 총격전 이처럼 시끄러운 말썽을 일으키게 된 문제의 재판은 수년전의 강도사건으로 5년이상 무기의 부정기 징역선고를 받고 흉악범수용소로 유명한 「산쿠엔틴」형무소에 복역중 작년 간수를 칼로 찔러 부상시킨 흑인「매클레인」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건 경위는 재판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한 사람의 흑인청년이 「트렁크」를 들고 뛰어들어 피고쪽 증인에게 권총을 한 자루씩 던져줌과 동시에 자기는 「카빈」총으로 수위들을 위협, 손을 들게 했다. 「매클레인」피고는 권총을 「헤일리」판사(65)의 머리에 들이대고 「토마스」부검사를 시켜 피고와 2명의 피고쪽 증인의 수갑을 풀게 했다. 이어 흑인청년 피고, 2명의 피고 증인등 4명은 판사와 2명의 부인 배심원등 모두 3명을 「피아노」줄로 묶어 인질로 데리고 법정앞에 세워놓았던 「스테이션·왜건」을 타고 도망했다. 그러나 급히 달려온 경찰, 「산쿠엔티엔」형무소 형무관들은 차의 진로를 막고 차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으며 범인 일당도 이에 응전 총격전이 벌어졌다. 목격자의 말로는 4인조의 한사람은 총격전이 벌어지기 직전 판사의 목덜미에 권총을 들이대고 사살했다고 전했으며, 사건이 있은뒤 경찰은 이 자동차 속에서 목덜미에 총을 맞고 턱이 달아나 버린 「헤일리」판사의 시체를 발견했고 「다이너마이트」도 8개나 찾아냈다, 이 사건으로 담당판사외에도 3명이 죽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피고인 「맥클레인」(38), 피고증인 「크리스머」(27·흑인)와 침입한 흑인 청년(성명 미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중경상자는 「토마스」지방부검사 또 한명의 피고쪽 증인, 부인 배심원 2명, 법정서기 1명이다. 법정서 실력행사로 피고 빼내가긴 처음 「상라파엘」시는 인구 4만,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끼고 11km북쪽에 있으며 조용한 교외주택지다. 미국의 교도소안에서는 가끔 폭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번처럼 법정에서 실력으로 피고인을 뺏어 가려고 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자 미국인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인종문제와 관련, 벌써부터 큰 말썽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 범인들의 배후는 이미 무시무시한 폭력행패로 미국사회에 충격을 준바있는 「블랙·팬더즈」(흑표범)단이라는 징조가 보이고 있어 큰 말썽을 빚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흑인들이 과격단체 「블랙·팬더즈」의 「멤버」 인지 아닌지 그 배경이나 조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인질을 연행할 때 『돼지새끼들아,(경관을 멸시해서 부르는 말) 꺼져라』고 소리쳤고 달려온 신문사 사진기자에게 『우리는 혁명주의자다.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라』 고 외친 것을 보면 백인권력에 반감을 가진 「그룹」 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권총을 들이대고 부검사에게 수갑들 풀게 했을 때 피고 「매클레인」 은 배심원을 향해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외쳤다. 같은 죄를 범해도 백인에 비해 차별적으로 무거운 형벌을 받아온 불만, 재판에의 불신이 이 사나이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 같다. 흑인에게 가혹했던 재한에 불만 들끓어 「예일」대학의 「블루스타」총장은 앞서 일방적인 「블랙·팬더즈」재판을 비판, 『미국의 흑인들이 공평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애그뉴」부통령등 보수파의 총공격을 받았다. 흑백 결혼금지를 강행하기 위해 「캔서스」주 의회가 백인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한 흑인청년에게는 「성기절단」(性器切斷)의 형을 과한데 반해 흑인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한 백인 청년에게는 「5년이하의 징역」을 결정한 것은 불과 반년전의 일이다. 이 차별적인 전통은 지금도 뿌리깊게 남아있다. 작년 「시카고」경찰은 「블랙·팬더즈」본부를 밤중에 습격했을때 살상당한 9명의 흑인지도자는 명백히 수면중이었거나 무저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쪽의 책임을 추궁했다는 얘기는 그뒤 들리지 않았다. 1960년부터 64년까지 사이에 「플로리다」주에선 백인 여성에게 폭행한 흑인청년의 54%가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흑인여성에 폭행한 백인청년중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1930년부터 66년까지 미국 전역에서 3천8백53명이 사형을 받았다. 그중 흑인은 54%, 백인은 45%, 기타 유색인종이 1%였다. 미국인구중 흑인은 11%정도인데 사형수는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문제 깔려진 채 흉악범죄 더욱 늘 듯 전미(全美)흑인변호사협회의 「번즈」회장은, 『법률을 만들고 재판하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흑인이나 빈자에 대한 백인의 적의가 없어지지 않는한 흑인에 대한 부당한 재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미국사회 밑바닥에 있는 모순의 근절을 외치고 있다. 흑인들은 「닉슨」정권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중간층」의 지지를 굳히기 위해 흑인등 소수족을 버리는 「남부전략」을 채택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반항하는 흑인을 경찰권력의 강화와 보수적인 대법원에 의한 「법과 질서」체제에 의해 탄압하려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 탓은 아니겠지만 「닉슨」정권이 발족한 이래 조직적인 흑인폭동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있다. 그러나 그만큼 흑인의 불만이나 반감이 쌓여 산발적인 흉악범죄는 반대로 늘어나고 있다. 진보파인사들은 범죄의 밑바닥엔 빈곤 실업 인종문제등 복잡한 사회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폭발직전의 차별에 대한 불만과 총기가 쉽게 결합된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미국의 현실인 이상 이번 사건과 같은 흉악범죄는 되풀이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선데이서울 70년 8월 23일호 제3권 34호 통권 제 99호]
  • 웃키는 외국인 웅편대회

    웃키는 외국인 웅편대회

    주한 외국인 남녀 한국어 웅변대회가 3월31일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강당에서 열렸다. 8개국 22명의 연사들은「에트랑제」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서툰 한국말로 청중을 웃기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청중을 웃긴 걸작「하일라이트」-. 한복에 와이샤쓰 입고 넥타이 맨 차림도 첫번째 여자 연사로 등장한 사람은 태국서 온「짜루완·부냐시티」양. 현재 예원(藝苑)여중에 재학중인「부냐시티」양은 한국에 온지 1년1개월밖에 안된 아가씨답지 않게 우리 말에 익숙했다. 『킴치, 맵다 맵다 하지만 우리 태국 킴치 더 맵습니다. 딴 외국학생들 킴치 못 먹는데 전 아주 아주 잘 먹습니다. 그래서 전 한국 더 좋습니다』하며 김치예찬론으로 자신이 친한파(親韓派)임을 과시.「부냐시티」양은 현재「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방 호수가 10호. 그래 자기는 멋도 모르고「넘버·텐」,「넘버·텐」했더니 하루는 자기 집에 온 태국군인 하나가「넘버·텐」이란 나쁘단 뜻도 갖고 있다고 알려 주더라는 것. 그러면서 『한국「넘버·원」』이라고 치켜 올려 박수를 받기도 했다. 다음 등장연사는 자유중국의 조운화(曺雲和)씨. 장사 관계로 10년 가까이 한국을 드나들었다는데 한국어 실력은 예상 외로 저조.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이따금 「커닝」하며 연설하곤 했는데 끝내 종반에 가선 외워 두었던 원고를 잊어버린듯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당황하여 갑자기 두 주먹으로 연단을 꽝! 두드리며 외쳤다. 『여러분! 우리 모두 천진합시다!』 알고보니 연제는『우리 모두 전진합시다』 그래도 그 뒷말이 생각 안나 연단 위에 있던 물을 따라 한「컵」들이키고도 말을 잇지 못해 계속 연단을 두드리며『천진! 천진!』만. 관중석에선 폭소가 터지고. 7번째 연사로 등장한 미국인 「마크·하카」씨는 독특한 의상으로 한몫 보았다. 옥색 한복바지에 흰 웃저고리와 푸른 조끼로 영락없는 시골 총각차림인데 저고리속엔 흰「와이샤쓰」에「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바지 아래는 윤이 나는 구두를 신었다. 한양(韓洋)절충식. 이어 등장한 연사는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도시로·이시구라」씨. 서울에 온지 8개월 밖에 안된다는데 한국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유창한 한국말을 해 청중을 놀라게 했다. 『이야기 좀 할까요?』로 말문을 연 「이시구라」씨는 우리말 큰 사전에 나온 선입관의 뜻부터 설명,「쪽바리」,「조센징」으로 서로를 멸시하는 한·일양국의 국민감정이 근거없는 선입관에서 온 것임을 지적, 보다 돈독한 우의를 쌓아야겠다고 외교관다운 연설을 했다. 끝까지『이야기 좀 할까요?』식의 차분한 강연으로 이날의 우수상을 차지. 두번째 아가씨 연사는 평화봉사단으로 1년전 우리나라에 온 「브리나·카이츠」양.『저는 현재 여관에서 살고 있읍니다』로 시작, 파란 눈의 아가씨 눈에 비친 여관생태를 털어 놓아 청중을 웃겼다. 『한국 여관 참 웃기는 곳입니다. 밥먹고 잠자고 돈안내고 도망가는 사람, 밤 12시 지나 담 넘어 도둑처럼 오는 사람, 또 좋지 않은 짓 하러 오는 상상(쌍쌍), 이거 별로 안 좋습니다』 ”체주도·켱주불쿡사·해인사 다 갓고 싶습니다”에 폭소 한창 여관비판으로 열을 올리던「카이츠」양, 화제를 바꾸어『체주도 보고 싶고 광한루, 오작교 가고 싶습니다. 켱주 불쿡사, 합천 해인사 모두 갓고(가고?) 싶습니다』로 한국관광 한바탕. 끝내는 한국사람으로 자기보다 더 영어 잘하는 사람 많아 자기도 빨리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말을 잘해야겠다고. 이 날 영예의 대통령상은 역시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 인도 출신의「라마·크리슈난」씨.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얼굴의 이 인도 청년은『한국사람들 1961년 전엔 무엇 했읍니까?』로 시작, 시종 60연대의 경제성장과 건설상을 격찬. 『미스·코리어와 민족문화』를 연제로 들고 나온 미국의「제임즈·미프서드」신부는 거리에 범람하는 외래어 상표와 한국인들의「외국 것이면 덮어놓고 좋다」식의 사고 방식에 일침을 가했다. 『명동 지나가면 어느나란지 잘 모르겠읍니다.「샹젤릴제」「에펠」의 간판 있고「뉴요크」「워싱턴」「에스콰이어」있고 「이스탄불」「삿뽀로」있고, 없는것 없읍니다. 이거 되겠읍니까?』하며 한국고유의 것을 내세우고 찾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 『「미스·코리어」뽑는다 해서 구경캈더니 나온 사람, 천부 미국여자 뿐입니다. 36~22~36 그거 미국여잡니다. 트기입니다. 그런것 한국의 아름다움 아닙니다.「미스·코리어」-한국 아름다움 그대로 가진 여자라야 합니다. 수영복, 「이브닝·드레스」대신 더 아름답고 우아한 한복 입고 「콘테스트」해야 합네다. 그래야 외국사람에게 매력 있읍니다. 또「미니」많이 입는데 무릎 더 내놓았다고 근대화 절대 절대 아닙니다』 ”한국말 5가지 밖에 몰라 상을 타도 기자회견 못해” 『세균전』을 연제로 들고 나온 미국의「그란트·파커」씨 역시 도중에 말문이 막혀 청중을 웃겼다.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지자「파커」씨도 함께 파안대소. 『이거 미안합니다』하곤 다시 히죽. 결국 청중과 연사가 함께 웃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자『우리 모두 힘 뭉쳐「콜레라」쳐부십시다!』하곤 하단. 연세대 교환교수로 와있는 서독의「게르하르크·브라이덴슈타인」박사의 연제는『한국말이 쉽지 않습니까?』 한국말 다섯가지만 알면 충분하다는게「브라이덴슈타인」박사의 지론인데 우선 김포(金浦)에 내려「택시」타고 『반도호텔 갑시다』그다음엔『어느나라서 왔다』『식구는 몇이다』『한국하늘 참 좋다』『고맙습니다』면 OK 라는 것. 이런「브로큰·코리언」으로 자신은 눈치껏 살아왔는데 어느날 봉변을 당해 역시 한국 말은 어렵다고. 3·1절날「택시」를 탔는데 운전사 말이『오늘 무슨날인 줄 아느냐?』교수 대답인즉『서독서 왔다』이 동문서답은 「날」을「나라」로 알아들은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맨 마지막으로 가로되『심사위원께 꼭 부탁합니다. 나 상주지 마십시오. 한국말 5가지 밖에 몰라 상타도 기자회견 못합니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佛 노동법 합헌결정 파장 1일 시라크 입에 달렸다

    |파리 함혜리특파원|학생들과 노동계의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촉발시킨 프랑스의 새 고용 관계법(기회균등에 관한 법)이 30일(현지시간) 헌법위원회에서 합헌판결을 받았다. 학생들과 노동계, 야권은 ‘시위를 부추기는 결정’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31일 저녁(현지시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입장을 발표, 새 법의 핵심인 최초고용계약(CPE)을 둘러싼 정부와 학생·노동계의 대립이 중대 고비를 맞게 됐다. 헌법위는 야당인 사회당이 낸 위헌 소송과 관련,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헌법위는 “청년고용 증진을 위한 특별 조치는 헌법에 허용되는 것”이라며 “CPE는 헌법에 명문화된 노동권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합헌 판결로 시라크 대통령은 9일 이내에 새 법에 서명하고 공포할 수 있지만 그대로 공포할지, 다른 유화책을 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여권 소식통들은 대통령이 새 법에 서명하고 공포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면서 1968년 5월 대학생 시위 사태 때의 해결책과 비슷한 고위급 협상 제의로 유화책을 시도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시라크 대통령이 직권으로 법안을 의회로 돌려 보내 재심의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모색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럴 경우 CPE를 주도한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퇴진 가능성이 커진다. 드 빌팽 총리는 ‘재심의하면 사임하겠다.’는 뜻을 시라크 대통령에게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학생 조직인 UNEF의 브뤼노 쥘리아르 회장은 “시라크 대통령이 CPE가 포함된 기회균등법을 공포하면 시위대를 멸시하는 조치이자 무책임한 태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lotus@seoul.co.kr
  • 儒林(568)-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儒林(568)-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유생의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원래 이러한 모욕은 과하지욕(跨下之辱)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일찍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명장 한신(韓信)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천하제일의 한신이었으나 청년시절에는 비참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워낙 집이 가난하여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었으며, 용모도 신통치 않아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천하의 게으름뱅이로 손가락질까지 받고 있었다. ‘왜 가난하여도 농사를 짓지 않는가.’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한신은 ‘농사를 짓는 일은 농부가 할 일이다.’라고 대답하고 천민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빨래하던 노파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을 주자 한신은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 뒤부터 한신에게는 ‘노파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이란 별명이 붙어 더 한층 멸시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말이 밥을 얻어먹은 것이지, 실은 밥을 구걸한 거렁뱅이의 행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신이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동네의 불량배들이 한신을 크게 조롱한다. 불량배 중의 우두머리가 한신이 거리를 지나가려하자 길을 막고 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히 가고 싶다면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고 명령하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한신은 태연한 얼굴로 몸을 굽히고 개처럼 기어서 무뢰배의 두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던 것이다. 수과하욕.‘다리 사이를 기어가며 욕을 참는다.’는 뜻의 고사성어는 바로 천하의 명장 한신의 이러한 모습에서 탄생된 것. 과하지욕((跨下之辱)으로도 불리는 이 장면은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 순간의 치욕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한신의 깊은 야망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율곡이 한신의 고사를 모방하여 유생의 명령대로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수는 없음이었다. 더구나 그 유생은 당대 제일의 세도가였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아들. 이준경은 그 무렵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두루 제수하고 있었던 최고의 권신이었다. 언젠가는 영의정에 오를 만큼 명종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원로대신으로 큰 명망이 있었으나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파락호(破落戶)였던 것이다. 율곡은 기세등등한 유생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비켜 다른 길로 가려하였다. 그러자 선접꾼들이 재빠르게 율곡을 포위하였다. 선접꾼들은 자른 도포를 젖혀 매어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우산과 빈자리, 그리고 말뚝과 막대기 같은 도구들을 들고 과장이 열리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 현제판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는 왈패들이었다. 이들이 그러한 이상한 도구들을 들고 다닌 것은 쟁접(爭接)을 통해 자기가 차지한 자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현제판 근처에 자리 잡으면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 우산을 씌움으로써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좋은 자리를 선점하였음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숙연하여야 할 과거시험장은 이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다.
  • [문화마당] 우리 안의 미국화/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타이완에는 ‘클럽51’이라는 상류층 엘리트 사교모임이 있다.1994년에 결성된 이 클럽은 타이완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타이완을 미국의 한 주로 만들면 구차하게 이민을 가지 않아도 되고 소수민족으로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여기가 바로 아메리카”라는 ‘클럽51’ 슬로건은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나 타이완의 분리 독립을 꿈꾸는 기득권 세력들의 극단적인 상상력을 대변한다. 타이완에서 미국화는 냉전의 산물이 아니라 동시대 국가적 생존을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본토 중국에 대한 공포가 클수록 미국에 대한 내면화는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화는 비단 타이완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국화는 어디까지 왔을까? 미국시민권을 얻기 위한 원정출산 바람, 영어발음을 원어민처럼 하기 위해 아이의 혀를 늘리는 수술붐, 청년들의 모자와 티셔츠에 새겨진 미국 명문대학 로고, 정·관·학계를 주름잡는 미국유학파들…. 한국의 미국화는 제도에서 일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신체 안에 각인되어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커피체인점 스타벅스의 초대형매장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캘리포니아 ‘피트니스클럽’은 캘리포니아에만 있지 않고 바로 압구정동과 명동에도 원형 그대로 있다. 미국의 외식 업체인 ‘아웃백스테이크’의 한국 지점들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장사가 가장 잘된다. 이쯤 되면 한국의 미국화는 타이완이나 일본보다 더 강렬해 보인다. 한국의 미국화는 욕구라기보다는 욕망에 가깝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영어를 배우는 욕구보다는 영어를 통해 미국다움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 하버드대학에 가고 싶은 욕구보다는 하버드라는 상징기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이것이 신체 안에 각인된 내면화된 미국화이다. 한국전쟁 당시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며 미군 군용차를 따라다녔던 아이들의 추억,‘미8군부대’에서 미국의 컨트리송을 부르고, 미국 번안곡들이 최고 인기를 얻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미국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령 1960∼70년대 미국 번안곡은 미국의 노래를 있는 그대로 차용하지만, 그 문화정서에는 한국적인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가수들이 부르고 있는 힙합이나 알앤비 음악은 거의 자작곡이지만, 문화적 정서는 미국지향적이다. 번악곡의 시대는 미국적인 형식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만 자작곡의 시대에는 의도적으로 미국적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시대 힙합과 알앤비 음악의 정서에서 미국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구분은 사실상 모호하게 된다. 미국적인 리듬과 멜로디는 이미 우리의 신체 안에 내면화된 것이다. 일본의 문화연구자 요시미 순야는 일본이 미국화된 절정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1984년 도쿄디즈니랜드 개장으로 분석한다. 도쿄디즈니랜드는 일상 속에서 미국적인 것과 미국적이지 않은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1월26일 한·미무역투자협정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한국 내 미국화가 가속화되고 그 경계가 마침내 사라지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스크린쿼터의 폐지는 바로 우리 안의 미국화가 임계점에 다다르는 순간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프랑스의 한 영화관계자가 미국의 할리우드 관계자에게 지금 세계영화시장의 70%가 미국영화인데 어느 정도면 성이 차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물론 100%죠.”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만일 스크린쿼터가 미국의 주장대로 축소되거나 이후 완전 폐지되어 한국영화의 배급망이 붕괴된다면, 미국화는 영화소비를 통해서 가시화될 것이다. ‘쌀과 영화’, 즉 ‘신체와 감성’을 미국의 요구대로 내주었을 때, 이보다 더 강력한 미국화가 있을 수 있을까? 한국에도 타이완의 ‘클럽51’과 같은 완전한 미국화를 주장하는 그룹들의 출현이 멀지 않아 보인다. 아니 정부 스스로가 ‘클럽51’인지도 모르겠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이 “이란 유엔서 축출” 美·EU “핵 안보리 회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의 발언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 핵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를 촉구했고, 유럽 국가들도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인의 자살폭탄테러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27일 “다른 나라의 국민을 전멸시키겠다는 국가는 유엔의 회원이 될 수 없다.”며 유엔에서 이란을 축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과 중동뿐아니라 유럽에도 위협이 된다.”면서 이란 핵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경한 대응을 촉구했다. 미국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발언에 즉각 거부감을 표시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그의 발언은 이란 핵에 대한 우려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27일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은 “폭력을 선동하는 이란의 발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가장 강한 수준으로 비난한다.”고 밝혔다. 스페인은 자국 주재 이란대사를 소환했으며, 영국·독일·프랑스도 이란대사를 소환, 항의하겠다고 밝혔다. 캐나다도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7일 “이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며 이란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데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영국 BBC는 “서방 국가들은 이 발언을 이란의 강경파 대통령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면서 대 이란 압박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알 자지라 방송은 아마디네자드가 이 연설을 통해 서방과의 대화를 강조했던 모하메드 하타미 전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이날 팔레스타인 청년이 이스라엘의 북부 도시 하데라에서 자살폭탄테러를 일으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샤론 총리는 27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테러를 막는 데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평화협상을 재개할 수 없다.”면서 “테러가 중단될 때까지 끊임없이 광범위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날 가자지구 내 이슬람지하드의 근거지를 4차례 공격했으며, 요르단강 서안에 군대를 투입해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 및 테러 연루자 체포에 나섰다. AP통신은 이스라엘 군 관계자를 인용해 최종적으로는 가자지구에 이스라엘군이 다시 진입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무장세력의 이스라엘 공격은 팔레스타인의 이익을 침해하고 폭력과 혼란, 극단주의, 유혈사태 악순환을 부를 뿐이라면서 자제를 촉구했다.장택동기자 외신종합 taeck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신격호 롯데 회장은 빚을 몸속의 열에 비유하곤 한다. “몸에 열이 오르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다. 특히 잘하지도 못하는 업종에 빚을 내 사업을 벌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신 회장의 말은 울림이 크다. 일각에서는 “껌 팔아 부자됐다.”며 롯데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기여도가 높다는 삼성·현대·LG 등이 저마다 골칫덩이 자식 한두 개 때문에 국가경제에 고통을 줄 때도 롯데는 어느 계열사 하나 그런 곳이 없었다.“실패하더라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에서만 투자한다.”는 신 회장의 무차입 경영 덕분이다. 롯데그룹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현재 70.3%. 삼성(50.0%) 다음으로 재무구조가 튼실하다.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땅에 건너가 ‘조센징 장사꾼’이라는 멸시를 받아가며 부(富)를 일군 신 회장. 그렇게해서 번 돈으로 고국에서 다시 기업을 일으킨 그는 한·일 양국에 사업체를 갖고 있지만 지금껏 과실송금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한국에 재투자하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중후장대 기간산업을,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경박단소 첨단산업을 일으켰다면, 신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서비스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다. 몇 안되는 생존 창업주인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셔틀경영’을 하고 있다. ●또다른 이름 시게미쓰상 그는 홀수달에는 신격호, 짝수달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가 된다.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 일한다. 그의 셔틀경영이 언제쯤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주위에서는 모국 투자가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라고 짐작한다. 벌써 30년째다. 월말이 되면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공항에 나가 훌쩍 비행기를 탄다. 생활철학인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이 엿보이는 단면이다. 한국에 머무를 때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을 쓴다. 집무실 겸 숙소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로 옆의 롯데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는 정도다. 올빼미족에게 반가운 얘기 한가지. 신 회장은 창업주 총수로는 드물게 ‘새벽형 인간’이 아니다. 오전 8시쯤 일어나 9시에 호텔방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임원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말수가 적다. 칭찬에도 인색하다.“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완벽주의자다. 타고난 내성적 성격에 오랜 일본생활까지 겹쳐 웬만해서는 ‘혼네’(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냉정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둘째아들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결단코 자상한 분은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언론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단돈 83엔 들고 일본으로 신 회장은 1922년-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랐다-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경남도립 종축장에 기수보로 취직했지만 “박봉의 삶이 싫어” 1941년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다. 이 때가 열아홉살.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돈이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워야 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어가던 1944년 어느날,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이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며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자.”고 종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는 게 그였다. 빚을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럴 듯한 간판(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도 달았다.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내친 김에 비누를 만들던 가마솥과 국수를 뽑아내던 기계로 껌을 만들었다. 또다시 대박.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했다. 껌회사에 소설 여주인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샬로테) 이름을 붙인 발상이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한 문학청년의 꿈은 그렇게 해서 다소 풀렸다.1948년 6월28일의 일이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그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을 때, 일각에서는 “고국에 대한 첫 투자가 겨우 소비재 사업이냐.”며 비판했다. 신 회장은 이렇게 항변한다.“한·일 수교로 모국 투자길이 열리자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고국에 진출한 그는 한국롯데를 국내 재계서열 5위의 ‘유통 명가’로 키워냈다. 지난해 말 현재 자산 29조 7000억원, 계열사수 41개, 종업원수 3만 5000명이다. 일본롯데에 비교도 안됐던 매출액(26조원)은 7대3 규모로 역전됐다. ●일본인 아내와 재혼 신 회장은 조혼 풍습에 따라 1940년 둔기리의 고향처녀(노순화)와 결혼했다. 신혼생활은 신 회장의 일본행 가출로 1년여만에 끝났다. 노 여사는 남편의 금의환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51년 29살에 요절했다.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일본 1위의 껌업체 하리스와 10년 상전(商戰)을 벌이는 동안, 신 회장에게 큰 힘이 돼준 이는 1952년 재혼한 일본인 아내 다케모리 하쓰코(竹森初子·78)씨였다. 결혼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이었다.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시게미쓰 여사는 성품이 온화하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기는 한다. 신 회장은 노 여사와의 사이에 맏딸 영자씨를, 시게미쓰 여사와의 사이에 동주·동빈 두 아들을 두었다. 롯데가의 한 인사는 “동주와 동빈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집안에서는 히로유키, 아키오라는 일본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불렸다.”고 전했다. ●백화점 주역 신영자 부사장 모녀 신 회장의 맏딸 영자(63)씨는 롯데쇼핑 총괄 부사장 겸 호텔롯데 면세점 총괄 부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왔다. 유통업계의 라이벌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는 대학 동창이다. 지난해 말 롯데면세점 모델인 ‘욘사마’ 배용준씨의 사진전에 직접 참석했을 만큼 회사일에 적극적이다. 유통 사업가답게 의상과 화장이 화려하다. 다소 깐깐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19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가장 눈에 띄는 자녀 혼사는 막내딸 정안(31)씨. 지난해 5월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37)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 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회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잡화 바이어(차장)로 일하던 정안씨는 결혼후 휴직, 남편과 함께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친구 소개로 이 변호사를 만나 2년간 연애했다. 주례는 시아버지의 절친한 ‘지기’ 한완상 한성대 총장이 맡았다. 한 총장과 이 전 회장은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신 부사장이 사업적으로 가장 의지하는 이는 둘째딸 선윤(34)씨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나와 97년 롯데쇼핑에 입사, 올해 초 이사로 승진했다. 명품관 ‘에비뉴엘’ 개관의 일등공신이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 성격도 소탈해 직원들 사이에 평이 좋다. 인테리어 회사 사장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외아들 재영(38)씨는 롯데에 포장지를 납품하는 인쇄업체 ‘재영상공’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맏딸 혜선(36)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선윤씨처럼 독신이다. ●일본롯데 이끄는 큰아들 동주 동주(51)씨는 일본롯데 부사장이다. 결혼이 다소 늦었다. 서른여덟살이던 92년 3월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둘째딸 은주(41)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동주씨가 일본롯데의 미국법인 지사장으로 발령나면서.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인 그는 의외로 열살 연하의 거래처 여직원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주례를 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아들(정훈·12)만 하나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동주씨는 아오야마(靑山)학원과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전공했다. 롯데와 무관한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다.“순수하고 학자 같다.”는 게 주위의 공통된 평가다. ●한국롯데 이끄는 둘째아들 동빈 동빈(50)씨는 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역시 형이 다닌 아오야마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88년 일본 롯데상사의 이사로 롯데에 합류하기까지,8년을 다른 회사(노무라증권)에서 일한 것도 형과 같다. 한국무대에 데뷔한 것은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를 맡으면서. 증권사에 오래 있어서인지 수치에 매우 밝다.97년 2월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중국적자이던 그는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본 국적을 정리했다. 처음엔 우리말이 서툴렀으나 지금은 발음이 조금 어색할 뿐, 대화를 주고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와인을 즐기지만 폭탄주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문학 기질을 이어받아 사석에서 가끔 괴테의 시를 영어로 읊기도 한다. 이승엽 프로야구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도 맡고 있다. 세간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나 집안 인사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형인 동주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다. 원래 신씨 집안 남자들이 활달한 편은 못된다.” ●한·일 넘나든 현해탄 혼맥 롯데가는 물론 재벌가를 통틀어 화려한 혼맥의 정수로 꼽히는 게 동빈씨의 결혼이다.85년 형보다 먼저 일본에서 다섯시간에 걸친 일본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신부는 일본의 대형 건설사 다이세이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딸 마나미(眞奈美·46)씨.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학습원)을 졸업한 재원이다. 일본황실의 며느리감 후보로도 거론됐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가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결혼식에 나카소네 당시 총리를 비롯해 전·현직 일본 총리가 세 명이나 참석해 한·일 양국에서 떠들썩한 화제가 됐다. 마나미씨를 만나본 한 인사는 “평범하고 참한 인상”이라고 전했다. 아들 유열(19)군과 규미(17)·승은(13) 두 딸을 두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은 일본에 살고 있다. 한달에 두세번 신 부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 회장이 ‘셔틀 기업경영’을 하고 있다면, 신 부회장은 ‘셔틀 가족경영’인 셈. 수행원 없이 다니는 것은 부자(父子)가 똑같다. ●남다른 고향사랑과 초고층 건물에의 꿈 해마다 5월이면 신 회장은 울산시 울주군 둔기리 호숫가의 너른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인다.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1971년 5월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인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모임 이름도 고향에서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처음엔 수십명이던 회원수가 아들·며느리·손자의 가세로 지금은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고향 못지 않게 신 회장에게는 애틋한 대상이 있다. 파리 에펠탑 같은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여든살이 되던 해인 2002년,112층 건물 청사진을 내보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교통영향 평가 등에 걸려 지금껏 삽도 떠보지 못했다. 신 회장은 ‘건설통’ 서울시장에게 기대를 걸며 초고층 건물을 재추진하고 있다. ●유통명가 떠받치는 롯데맨들 롯데에는 사장단 회의가 따로 없다. 지난해 신설된 정책본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계열사간 조정자 역할을 한다. 호텔롯데 소속의 김병일(62) 사장이 신동빈 부회장(본부장)을 도와 부본부장을 맡고 있다.73년 호텔롯데 경리부장으로 입사해 81년 그룹 기획조정실 이사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신 회장 부자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다는 핵심참모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 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전무가로 말수가 적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는 경리분야에서 20년 잔뼈가 굵은 한수길(64) 사장이 맡고 있다. 자일리톨껌 등 ‘연타석 홈런’으로 경영성과를 끌어올렸다.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은 삼성 출신의 장경작(62) 사장과 ‘젊은’ 이인원(58) 사장이 각각 이끌고 있다.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장 사장은 올 2월 롯데맨으로 변신했다. 수익사업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닌다. 평균 연령이 60대인 롯데 경영진 사이에 드물게 50대인 이 사장은 97년 CEO(최고경영자)로 파격 발탁돼 8년간 장수하고 있다. 관리·영업·매입 등 백화점 3대 요직을 모두 거쳤다. 의심나면 끝까지 파헤친다. 할인점 업계 최초로 중소기업 박람회를 연 롯데마트 이철우(62) 사장과 정통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대석유화학 인수 주역인 호남석유화학 이영일(64) 사장도 눈에 띈다. 신 회장의 가족 가운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는 친동생인 신준호(64) 롯데햄·우유 부회장과 5촌조카 신동인(5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대행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롯데를 일구는데 일조했으나 지금은 한발 물러나 있다. 음료업계 최초로 순 매출액 1조원 돌파의 대기록을 세운 롯데칠성음료 이종원(61) 대표이사 부사장, 스피드 경영으로 유명한 롯데건설 이창배(58) 대표이사 부사장, 워커홀릭(일중독자)으로 불리는 롯데삼강 이광훈(57) 대표이사 전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롯데맨이다. 황각규(51) 롯데쇼핑 상무와 강현구(45) 롯데닷컴 상무 등은 신 부회장의 관심사업을 보좌하고 있다. ●“평창면옥에 해답이 있다” 이철우 사장의 회고다. “잠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백화점을 짓기는 했는데 신세계의 세 배인 드넓은 매장을 채울 일이 걱정이었다. 회장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타박하시더니 평창면옥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했다.” 당시 서울 평창동에 있던 평창면옥은 5000원짜리 밥맛이 워낙 좋아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사람들이 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곳까지 가겠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상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꼭 필요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면 문제는 절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신 회장의 이 얘기는 지금도 롯데 임직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된다. hyun@seoul.co.kr ■ 절친했던 신격호·정주영 회장 신격호 회장은 생전의 정주영(왕회장) 현대 창업주와 절친했다. 왕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직접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신 회장이 일곱살 아래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매우 닮았다. 우선 대가족의 장남이다. 신 회장은 동생이 9명, 왕회장은 7명이다. 중농·빈농의 아들로 농사규모는 달랐지만 식솔이 워낙 많아 삶이 퍽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 신화의 시작이 가출이라는 것도 같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살 때 “앞이 안보인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사업 시작후 최대의 시련도 ‘불’이었다. 신 회장은 처음 차린 커팅오일 공장이 불에 몽땅 타버려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왕회장도 첫 사업인 자동차수리공장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신 회장은 이 때문에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자나깨나 불조심을 외친다. 롯데호텔 준공 때 멀쩡한 새 건물의 복도 천장을 뜯게 한 뒤 손전등으로 직접 방화 장치를 확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죽을 고비도 한차례씩 넘겼다. 여든이 다 될 때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던 신 회장은 언젠가 밤길에 귀가하다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왕회장도 새벽에 울산공장을 시찰하러 직접 운전하고 가다가 차가 바닷물에 빠져 죽을뻔 했다. 발상도 기발하다. 신 회장은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장난감처럼 불 수 있게 했다. 왕회장은 겨울 골프에 빨간 골프공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유명한 빨간공 일화를 남긴 1970년 초봄 라운딩의 동반자가 바로 신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폭설이 내려 (하얀 골프공을 찾을 수 없는 만큼)의당 약속이 취소된 것으로 여겨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고 회고했다. M&A(인수합병)보다는 직접 공장말뚝 박기를 즐겼던 것이나 귀향잔치(둔기회·소떼방북)를 벌인 점도 똑같다. 다만, 신 회장은 언제나 소리가 나지 않았고 왕회장은 늘 요란했다. 대선 출마 등 말년에 한눈을 판 왕회장과 달리 신 회장이 사업에만 전념하는 것도 결정적 차이다. hyun@seoul.co.kr ■ 신동빈 부회장 ‘큰어머니’ 제사 해마다 직접 지내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성북동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자택. 검정 옷차림의 신씨가문 후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날은 종손인 신격호 회장의 첫 부인 노순화 여사의 기일이었다. 신동빈 부회장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머니’의 제사를 주관했다. 누나인 신 부사장은 말없이 ‘생모’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느 재벌가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 회장이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동빈씨는 한국에 정착한 이후 노 여사의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고 있다. 집안에서나, 그룹에서나,‘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빠르게 굳혀가고 있는 모습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후계구도와 관련해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언급을 회피하던 그룹측은 이제 공공연하게 “후계구도 작업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신 부회장이 일본인 아내를 맞은 점 등을 들어 일본롯데를,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이 장남인 점 등을 들어 한국롯데를 맡을 것이라는 분석이 한때 유력했지만 현재로서는 뒤집힌 셈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신설된 정책본부의 장(長)을 맡으면서 후계자 논란을 확실하게 잠재웠다. 재계는 “그룹 대권을 둘째아들에게 넘기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로 해석했다. 신 부회장은 온라인쇼핑몰·편의점 사업 등에서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KP케피칼·현대석유화학 등을 성공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임을 굳혔다. 현장을 중시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지난 4월에는 롯데마트 금천점에 불쑥 나타나 한 시간 동안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현장에서 지시한 내용은 나중에 꼭 확인한다. 상장(6개사)에 인색한 기업 문화와 보수적인 토양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주목된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1)고군산군도의 경관적 가치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1)고군산군도의 경관적 가치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신지도 곶리도 말도 횡경도 방축도 야미도 등이 별처럼 모여 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앉은 이 섬들 때문에 고군산군도는 ‘호수에 뜬 섬들’로 불렸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중국 사신들이 서해를 건너오면 고려군사들이 고군산까지 영접을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과 한반도가 뱃길로 연결되는 길목이었음은 물론이고 서남해안 쪽에서는 개경이나 한양으로 가는 중간 허리였다. 조운선과 상선, 군선이 상존했으며, 이순신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도 난중일기에 보인다. 사람과 배만 그러한가. 물고기에게도 필수 코스였으니, 유명한 칠산어장의 북단이 바로 고군산이다.1906년 군도 끝자락 말도에 등대를 세워 올해로 99년째 불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이곳은 일찍부터 서해 항로의 요충지였다. 때맞춰 북상하는 조기같은 회유어종의 통로라 함은 역으로 남하하는 홍어나 대구 같은 한류어종의 통로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군산 수협조차도 애초에는 육지가 아니라 장자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군산진을 설치하고 서해를 경영하다가 옥구로 옮기게 된다. 왜구의 노략질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황당선의 ‘황당한’ 일도 자주 벌어졌다. 군산진만 육지로 떠난 것이 아니다.20세기 후반에는 물고기들이 떠나가는 일도 벌어졌다. 황금어장 칠산이 고갈되면서 섬사람들은 서울이나 군산 등지의 저잣거리로 떠나갔다. 모진 세월은 이 천혜의 섬들을 가만 두질 않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공사용 차량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분진을 일으키더니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야미도와 신지도가 방조제로 이어졌고, 그 바람에 승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군산 수천년 역사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변화’가 밀어닥친 것. 약삭빠른 업자들은 관광유람선을 띄웠고 부동산업자들은 ‘새만금 새땅‘식으로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하는 거품경쟁에 나선다. 물고기가 사라진 바다에 땅장사들이 대신 몰려든 셈이다. 수산과학원 산하 갯벌연구소의 전용 조사선에 몸을 실었다. 분기별로 행하는 정기 탐사 일정이었다. 연구원들은 항해 내내 포자망으로 해파리 유체를 채취하고, 멸치 난어를 조사했다. 예전에 없던 아열대성 해파리떼가 한반도를 휩쓸어 그물 가득 해파리만 든다.20세기 초반 시인 김억이 ‘해파리의 노래’를 상재했으나 이런 ‘괴물’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남방 해파리의 알이 고군산 근역에서 보임은 수온 상승의 반증 아니겠는가. 바다 물고기들의 동향도 수상쩍다. 조기 갈치는 물론이고 여타 고급 어종들이 대거 사라진 자리를 멸치떼가 채우고 있다. 고급 어종 비율이 1967∼69년도 39%에서 36년 만인 1999년 23%로 줄었으니 엄청난 감소다. 멸치는 1992년 군산수협 위탁량이 88t이던 것이 2002년에는 2359t으로 급증했다. 먹이사슬 상층부를 차지하는 큰물고기들이 사라지자 아래쪽 개체인 멸치떼가 극성을 부리는 것. 생태계의 적신호가 울리고 있다. 이러다가 고기가 아예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진반농반의 걱정을 전하자 동행한 김수관 군산대 교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동의한다.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동해안의 엄청난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서해에 쏟아부어지는 오염총량을 계산할 때 서해가 죽음의 바다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란다. 일제시대에 고군산 근역에서 미역 김 해삼 상어 가오리 넙치 고등어 멸치 조기 삼치 대구 도미 청어 전광어 새우 숭어 참장어 가사리 병어 민어 홍어 오징어 뱅어 갈치 등이 잡혔다니, 종다원성이 해체된 비극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바다의 젖줄인 동진강, 만경강을 끊어 놓으니 바깥 생태계에 엄청난 부담이 가해지고 있다.”는 갯벌연구소 조영조 소장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새만금간척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반대해 온 환경운동가를 비롯, 뜻있는 많은 이들이 잠시 반성할 지점이 있다면, 바로 고군산 같은 방조제 바깥 섬들의 안위를 도외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막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바깥 바다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환경운동조차 언제나 육지 중심이었던 것이다. 현재 군산쪽이 완전히 막힌 상태에서 남쪽 일부만 트여 좁은 수로로 조류가 엄청난 속도로 드나든다. 그래서 신시도 아래쪽 무녀도와 비안도 사이는 거대한 물골이 패였으며, 이곳에서는 어떤 어업도 불가능하다. 무녀도 어민 김용문(55)씨는 “조류가 빨라 그물 설치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양식이나 조개 채취도 다 지난 얘기”라며 “방조제 안쪽은 그래도 보상이나 넉넉히 받았지만 바깥쪽은 단돈 1000만원이 고작이었다.”고 말꼬리를 흐린다. 어류가 산란을 위해 새만금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거대한 장애물이 가로막으니 애당초 어업은 결단난 것이다. 무녀도를 둘러보니 물고기 못지 않게 자연 경관의 훼손도 심하다. 왕왕 경제적 가치만으로 간척의 폐해를 계산하느라 대개 경관가치는 무시되기 일쑤다. 무녀산 중봉의 ‘삼각형’이란 곳까지 올랐다. 왼쪽으로 선유팔경이 펼쳐지고 무녀도 서두리 마을과 염전, 닭섬을 비롯한 자잘한 섬들, 그리고 비안도, 신시도 같은 섬까지 한 눈에 들어와 가히 관해의 요처답다. 선유도와 무녀도를 이어주는 현수교가 멋스럽다. 섬들은 아득한데 저 멀리 한 눈에 들어오는 방조제가 철책처럼 흉물스럽게 방벽을 두르고 있다. 무녀도가 한창 ‘잘 나갈 때’, 삼월 삼짇날이면 선남선녀들이 밥솥을 짊어지고 산정에 올라 진달래꽃 향기에 취해 놀다 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고군산은 예로부터 ‘신들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춤추는 무녀의 형상에서 따왔다는 무녀도란 섬 이름이 말해 주듯 섬마다 신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선유도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망주봉이 기암괴석으로 솟아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절경만 보고 돌아올 뿐 거기에 오룡묘 신당이 있는 것은 모른다. 다섯 용을 모신 곳인 만큼 기와집이 화려한 폼새로 지어졌고, 산신각도 따로 세워져 신당의 위용을 자랑한다. 해마다 당제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음은 물론 수년에 한번씩 별신제를 올릴 때면 내로라는 굿쟁이들이 몰려들어 삼현육각을 잡고 남사당패까지 몰려와 신명의 굿판으로 바다를 달구었던 서해안 최대 신당의 하나였다. 신당 형체는 여전하나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할 정도로 쇠락했다. 군의관으로 고군산에 근무하면서 이 일대의 신당을 조사, 세상에 알린 서홍관씨가 80년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섬마다 있던 신당이 주민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멸시와 박해를 당해 심지어는 불태워지기도 했단다. 여기서도 종교적 극단주의의 한 정형을 본다. 고군산 신당의 파괴는 문화적 반달리즘의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장자도에도 어사대란 당집과 할머니바위가 있다. 비승비속의 당할머니가 모셨던 신당이다. 건너 횡경도에는 할아버지바위가 있어 양자간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고군산의 12섬에서 모두 신당 및 당숲이 확인되지만 당제가 남아 있는 곳은 없다. 당집이나마 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하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즉, 오룡묘같이 역사문화적 전통이 분명한 문화유산을 방치하는 군산시의 안목이 불안하기만 하다. 고군산에는 그동안 말로만 들어온 초분도 전해진다. 분묘 대신 짚으로 엮은 초분에 시신을 안치하는 초분 전통은 진도를 비롯한 남해안의 전통으로 알려졌다. 그 초분이 고군산에도 남아 있어 남해안뿐 아니라 서해안까지도 초분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녀도 초입에는 아예 궁금해 하는 외지인을 위해 ‘관광용 초분’까지 만들어 두었다. 무녀도에는 고군산 유일의 초분이 남아 해마다 짚을 갈아주면서 정성스레 보존해 오고 있다. 이처럼 신들이 잠을 청한 안식처이자, 초분 같은 고풍스런 유산까지 전해지는 것, 난초와 모감주나무군락을 비롯한 자연유산의 보고인 고군산의 경관가치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계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은 선유도에 잠시 들러 회를 먹고는 휘∼ 해수욕장을 한번 둘러보고 떠난다. 연육된 무녀도나 장자도는 그 관광객들이 떨구고 간 몇 푼의 푼돈 수혜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고군산이지만 이곳에도 ‘남북의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선유도는 관광형 어촌으로 변신하면서 인심이 살벌해졌다. 멀리 떠있는 말도처럼 불과 15호 밖에 안되는 섬에서도 어제까지 ‘형님, 아우’하던 공동체가 깡그리 해체되는 중이다. 이웃 섬 주민들이 조개를 캐가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대책없는 개발이 떠안긴 ‘인간성 파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고군산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고군산의 예스러움이 완벽하게 소멸되는 중이니 새만금 간척지가 가져다준 반갑지 않은 ‘보너스’ 아니겠는가. 다행스러운 일은 이곳 청년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3년전부터 고군산청년연합회를 조직한 이들은 해마다 체육대회를 열어 공동체의 연대감을 지속시키고 있다. 번갈아 12섬을 돌아가면서 여는데 박영구(43) 부회장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다. 모처럼 12섬 젊은이들이 모여 단합도 꾀하고, 훗날을 생각하는 지혜도 모은다.”고 말한다. 대횟날이면 아침부터 각 섬에서 배를 끌고 집결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부녀회에서는 음식을 장만하여 술추렴도 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 ‘섬들의 바다축제’를 연출한다. 청년들은 김양식을 하며 어렵사리 버티고 있으나 김값이 폭락하면서 하나, 둘 이곳을 떠나고 있다. 무녀도에만 청년들이 20명을 넘었으나 지금은 고작 8명만이 남아 있다. 살기 힘들어 떠나는 청년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다음 세대가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섬, 그런 섬을 만들지 않고서야 우리 바다의 미래가 어디에 있겠는가. 새만금의 거대 장벽은 안쪽의 갇힌 생물은 물론 이렇듯 바깥쪽 사람들의 삶까지 옥죄고 있다. 미래 세대와 해양의 종다원성을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이명박 시장 홈페이지 글 전문

    ●행정수도에 관해 저 이명박이 말씀드립니다. -수도분할을 중지하고 통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 인터넷에 띄우신 “행정수도 건설을 결심하게 된 사연”은 잘 읽어보았습니다.그 글에서 “행정수도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도 꿈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렇습니다.저 이명박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저의 꿈은 통일수도입니다.대통령께서는 ‘분할된 수도’를 꿈꾸고 계시지만,저는 ‘통합 된 수도’를 꿈꾸고 있습니다. 충청권과 수도권뿐만 아니라 온나라가 함께 잘사는 나라,남한과 북한이 하나 되고 함께 잘사는 나라,남북한 7천만 겨레가 합의하는 통일수도를 꿈꾸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개혁과 국가발전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에는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하지만 수도분할은 아닙니다.개혁도 아니고,균형발전도 아닙니다. 사실 수도이전 논의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나온 것이어서,저는 선거가 끝나면 당연히 국민의 의사를 물어 재고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께서는 ‘수도이전 공약으로 재미 좀 봤다.’,‘한나라당에서도 재미좀 보라.’,‘정권의 명운을 건다.’,‘지배세력 교체를 위해 천도해야 한다.’,‘수도이전에 반대하는 것은 정권 흔들기다.’라고 말씀하시는 등 국가대사를 극단적으로 정치쟁점화하는 것을 보고,국가의 중대사인 수도이전을 오직 정치적 계산에서 추진한 것이지,국가균형발전이나 수도발전을 위해 오래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하여 추진한 것이 아님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 예정지를 발표하고 후속 조치를 일사천리로 진행시켰습니다.국민이 원하지 않는 정책은 성공한 예가 없다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습니다.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했던 수도이전은 지난해 대다수 국민의 반대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결국 무산되었습니다.저는 그때 국민과 함께 ‘국력낭비를 막았다.’면서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도이전이 수도분할의 망령으로 되살아나 또다시 정치에 남용되고 있고,국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수도이전보다 더 나쁜 수도분할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정부·여당은 성난 민심을 의식하여 “수도권 후속대책”을 쏟아내고 있고,국무총리는 ‘수도권발전대책협의회’를 만들어 수도분할을 기정사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수도분할로 충청권 주민을 현혹하더니,이제는 선거를 앞두고 수도권 주민을 현혹하려 하고 있습니다.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수도분할은 수도이전보다 더 나쁩니다. 제17대 국회는 2005년 3월 2일 수도를 분할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대통령과 6부는 서울에 남고,국무총리와 12부4처는 충청남도 연기·공주로 이전한다고 합니다.대통령은 3월 18일 이 법률을 공포했습니다.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도를,그것도 행정부를 갈라 나누어 놓은 예는 없습니다.수도분할은 국정운영의 비효율과 국력 낭비,그리고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 명백합니다. 요즘은 치열한 국제경쟁 시대입니다.국정운영의 효율은 국가경쟁력의 기초입니다.대통령과 국무총리,장관들이 서로 120km나 떨어진 장소에서 근무해서는 국정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원만한 부처간 협의도,신속한 위기관리도 어려워집니다.수도분할은 국가정체성과 통치의 근본을 쪼개는 것으로서,수도이전보다 더 나쁩니다. 수도이전과 수도분할에 정략적으로 담합한 정치권은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16대 국회는 2003년 12월 ‘신행정수도건설을위한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그때 저는 이 법률의 통과를 막기 위해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국민과 함께 사방으로 뛰어 다녔으나,여·야 정치권은 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의 입헌민주주의는 살아있었습니다.헌법재판소가 2004년 10월 21일 수도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대의민주주의의 타락에 경종을 울리는 역사적 순간이었고,대한민국 헌정사에 한 획을 긋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한나라당은 위헌 결정을 환영하면서,수도이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그러나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들이 또다시 수도분할에 동조했습니다.수도를 두 동강내는 결정에 동조했던 정치권은 역사에 공동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중앙정부는 서울시와 단 한번의 사전·사후협의 없이 수도이전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수도이전은 건국 이후 최대의 국책사업입니다.그런데도 중앙정부는 사전에도,사후에도 서울특별시장의 의견을 구하거나,협의를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프로젝트의 경우에도,이해당사자나 전문가와 오랜 기간 기술적·경제적으로 치밀한 사전 검토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추진합니다.이것은 최소한의 예의이며,필수적인 절차입니다.수도이전은 작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가 대사입니다.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이러한 최소한의 예의와 절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정치적 담합으로 수도분할을 기정사실화 해놓고,“후속대책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사후적으로 지방정부를 불러 무조건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가 아닙니다.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의 부활이며,참여를 가장하여 지방자치를 억누르는 ‘참여권위주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지방자치의 헌법정신을 존중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시대에 역행하는 ‘권위주의’ 방식의 모양 갖추기에는 결코 승복할 수 없습니다. 수도분할 반대는 수도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라 통일한국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수도분할에 반대하는 것은 수도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반대가 아닙니다.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국가균형발전은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이나 수도분할로 이룰 수 없습니다.만일 제가 충청권 시·도지사였을지라도,수도이전의 문제점을 똑같이 지적했을 것입니다. 수도이전 문제는 통일을 대비해서 국민의 뜻에 따라 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해양수산부 이전 반대 이유는 지금도 타당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해양수산부장관 재직 시에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지금 보아도 아주 잘하신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께서는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가면 서울에 따로 사무소를 두어야 하고,장관은 거의 서울에 있어야 한다.”,“장·차관이 매주 국무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국회에도 출석해야 하는데,서울에서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지방으로 이전하면 결재 등 업무효율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처이전보다는 실질적인 업무와 권한을 지방에 대폭 이양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참으로 올바른 지적이며,지금도 타당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나,지금이나 사정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그런데도 대통령께서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정부의 “수도권 후속대책”은 국민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정부·여당이 내놓은 “수도권 후속대책”은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서울시가 이미 계획했거나 추진하는 사업을 자신들이 새롭게 수립한 것인 양 발표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아무런 사전상의도 없이 서울시의 정책을 복사하여 발표한 것은 명백한 표절입니다. 중앙정부의 뚜렷한 역할이나 예산지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여당에서는 “서울시 청사를 광화문네거리에 대형 건물로 짓겠다.”고 하고,정부에서는 “대학로 발전방안”까지 발표했습니다. 대학로를 꾸미는 일은 기초자치단체인 종로구가 추진하고 있는 고유 업무이며,“청계천 역사문화벨트 조성”은 서울시가 추진하는 역점사업입니다.그런데도 이러한 사업들을 마치 중앙정부가 마련하고 주도하는 것처럼 발표한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며,그간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정부·여당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촉구합니다. 정부·여당은 수도분할로 텅 비게 될 정부청사에 “벤처단지 조성”과 “초고층 업무빌딩 유치”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수도권과밀 해소를 위해 수도분할을 한다면서,그 후속대책으로는 오히려 수도권과밀을 부추긴다면,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입니다.정부부처가 떠난 자리에 기업을 유치하겠다면,처음부터 연기·공주에 유치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수도이전과 수도분할은 ‘국가균형발전’과 ‘수도권과밀 해소’를 이유로 추진되어 왔습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저의와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선거 때마다 이용하려는 정치책략임을 모든 국민이 알게 되었습니다.그래서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심 쓰듯이 “후속대책”을 급조하고 남발하는 것은 잘못된 수도분할을 더욱 잘못되게 하는 일이며,충청권과 수도권,나아가 국민을 두 번 속이는 일입니다.국민을 두려워한다면,국가균형발전을 원한다면,이제는 진정으로 지방을 도와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수도분할과 “수도권 후속대책”은 바른 길(正道)이 아닙니다.국민의 행복보다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그릇된 길(邪道)입니다.정부·여당은 지금이라도 통일한국과 7천만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바른 길로 돌아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길로 가기를 호소합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진정한 지방분권과 재정지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참여정부가 진정으로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려고 한다면,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권한과 재원을 과감히 지방으로 이양해야 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서울집중을 막기 위해 백약을 다 썼으나 무효였다고 하고 그래서 수도이전을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실은 백약 중 가장 효험이 있을 약은 제쳐두고 있었습니다.그것은 대통령과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원을 지방에 나누어 넘겨주는 일,즉 진정한 ‘분권’입니다. 중앙집권의 낡은 틀을 그대로 둔 채,수도이전이나 수도분할을 한다고 해서 지방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균형발전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지방에 실질적인 결정 권한과 재원을 주면,지방정부는 지역특성에 맞는 발전을 이뤄 나갈 능력이 있습니다.세원이 많은 곳에서 세금을 더 거두어,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에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수도분할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의 일부를 지방에 지원해야 합니다.그러면 지역별로 특색에 맞는 발전을 이루어 지역균형발전은 빨라질 것입니다. 정부가 중앙행정기관을 인위적으로 강제 배분하는 방식은 구시대적 발상이며,지방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서울의 과밀은 해소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표방하는 수도이전 또는 수도분할의 가장 큰 이유는 수도권 과밀 해소 및 국가균형발전입니다.수도이전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경제·산업·교육의 기능을 분산시키고,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화와 개방화의 시대입니다.수도권의 기능을 억제한다고 해서,이것이 곧 비수도권 지역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왜냐하면 자본과 시설,사람이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지난날 수도권정책이 수없이 반복되었어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수도권 집중을 인위적으로 억제해서 그 반사이익이 상해,동경 등 다른 경쟁도시의 몫으로 돌아간다면,그것은 오히려 서울과 지방을 공멸시키고 국가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하겠습니다.수도권 집중을 억제해도 비수도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면,비수도권의 발전은 그 지역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수도분할의 이유를 들면서 국가균형발전보다 수도권 과밀을 걱정하셨는데,이것은 인식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현재 수도권은 과밀화 진행 단계를 지났습니다.서울의 인구는 줄고 있고,서울의 교통,환경,주거 여건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1970∼80년대에는 인구과밀을 걱정했으나,1990∼2000년대에는 인구의 과소를 걱정할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서울시는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실제로 구체적인 성과를 착실히 이뤄가고 있습니다.서울에 세계의 첨단기업이 모여들고 있는 것은 그 증거입니다. ●공장의 위치보다 일자리 창출이 더 중요합니다. 정부는 지금 수도권규제완화를 거론하고 있습니다.그렇습니다.일부 규제는 필요하겠지만,수도권의 경쟁력을 위해 불필요한 규제는 없애야 할 것입니다.그간 서울시는 수차례에 걸쳐 지나친 수도권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중앙정부에 건의했으나,반영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세계화 시대입니다.세계 각국이 자본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수도권에 공장을 짓지 못하게 하면,지방으로 가는 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갑니다. 공장의 위치가 수도권에 있느냐,지방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일자리 창출이 중요하고,청년실업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수도이전과 수도권규제 완화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수도이전과 수도권규제 완화는 별개의 사안입니다.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참여정부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전제로 공장총량제 등 수도권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대통령께서는 “행정수도이전 정책과 수도권규제 개선은 수도권과 지방의 정치적 빅딜로서 함께 윈-윈할 수 있는 정책”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는 수도이전과 수도권규제 완화를 “맞교환하자.”는 주장인데,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수도이전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국가대사로서,수도권규제 완화와는 그 성격과 비중이 다릅니다. 수도이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수도권의 규제 완화가 가능하다는 것은,마치 ‘정치적 흥정’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수도이전을 해도,지금의 수도권에 대한 규제가 합리적이라면 그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옳을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수도이전을 하지 않더라도,수도권 규제가 합리적이지 않으면 이를 철폐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 서울시가 수도권규제 완화와 수도권발전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지만,중앙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수도분할에 대한 수도권주민의 분노가 들끓자,이를 달래려는 ‘사탕발림’ 식으로 수도권발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국가경영에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시류에 따라,정치 분위기에 따라 오락가락해서는 안 됩니다.중앙정부가 진정으로 수도권발전을 원한다면,서울시가 꾸준히 건의해 온 방안을 검토하기를 바랍니다. ●서울은 지방이 아니라 세계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동북아중심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서울의 경쟁력은 필수입니다.국경 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대도시의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은 주변 강대국의 주요 도시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동경,북경,상해,싱가포르 등 경쟁도시들과 한판 승부를 벌어야 하고,이겨야 합니다.그래야 대한민국의 국력이 커질 것입니다.그런데 멀쩡한 수도를 두 동강낸다면,서울과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일본 도쿄도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적이 있습니다.오랜 세월 검토하다가,지난 2003년에 수도이전 논의를 중단했습니다.오히려 도쿄의 도시경쟁력을 키워주고 있습니다.2002년 7월 “수도권·기성시가지의 공업 및 제한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여 동경의 경쟁력이 곧 일본의 국가경쟁력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럽의 국가들도 20세기에는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분산정책을 취했습니다.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대도시의 경쟁력을 육성하는 새로운 국가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런던,파리,로마,프랑크푸르트,베를린,그리고 브뤼셀 등 유럽 각국의 수도들은 유럽연합(EU)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강력한 집중전략을 다시 펴고 있습니다. ‘수도이전이 국가균형발전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대통령께서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서울은 부산,대구,대전,광주 등 지방도시와 경쟁하지 않습니다.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도쿄,상하이,베이징,홍콩,싱가포르 등 대도시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아시아 주요 도시와의 경쟁에서 서울이 이겨야 중앙정부가 표방하는 ‘동북아중심국가’도 성공할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은 상호보완 속에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국가균형발전은 획일적인 형평성을 지향하는 ‘하향평준화’가 아닙니다.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상향일류화’가 되어야 합니다.그러자면,수도권과 지방이 상호보완을 이루어,나라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부는 서울과 지방을 분열시키지 않아야 합니다.서울과 지방은 서로 돕는 보완관계에 있습니다.예를 들어,전라남도의 관광단지가 발전하면 서울의 시민들이 가서 보고,지방의 무공해 농산물은 수도권시민이 이를 소비합니다. 수도를 약화시켜 다른 지방을 발전시킨다는 전략은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수도를 여러 개 만들어서는 안 되며,서울·대구·광주는 각자 특색 있게 발전시켜 상호보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도록 해야 합니다. ●수도이전에 쓸 재정이 있다면 통일비용으로 아껴 두어야 합니다. 수도이전은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과 통일한국의 장래를 염두에 두고 구상되어야 합니다.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고,경제난이 겹쳐 체제가 내구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이러한 정세를 감안할 때,통일이 언제 실현될 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그러나,정부가 수도를 분할하여,새로운 행정도시를 완성하는 시기 이전에 통일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도를 온전히 지키는 일은 “통일 다음으로 중요한 이 시대의 애국과제”라고 생각합니다.그 이유는 수도가 국정수행의 중심이자,국가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통일한국과 7천만 겨레,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생각한다면,수도를 두 동강내서는 안 됩니다. 국가경영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수도분할은 시급하지 않습니다.지금은 수도분할이 아니라,민족통일에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수도이전이나 수도분할에는 막대한 재원이 소요됩니다.남·북한이 통일 후 공동 번영을 이루려면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필요할 것인데,이렇게 한가하게 국력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수도분할에 사용할 재정이 있다면,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재원으로 아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100만 명에 이르는 젊은 실업자가 있습니다.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수도이전에 쓸 돈이 있다면,차라리 그 비용으로 1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게 더 현명합니다. ●국익을 위해 결심을 바꾸는 것은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입니다. 국가지도자는 결심을 하고 집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때로는 결정을 취소하고 결심을 바꾸는 용기도 필요합니다.개인적인 차원의 명분보다 국가의 명운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노 대통령께서 지도자로 높이 평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70년대 말에 추진했던 ‘행정수도이전계획’은 수도의 영구이전이 아닌 임시 행정수도로의 이전계획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언급하여 한미관계가 어려워지고 안보불안이 커진 상황에서,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기 위한 국가안보상의 필요에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재는 그 때와 모든 국내외 상황과 여건이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동서냉전 시대가 가고 남·북 긴장이 완화되었으며,이제 세계는 경제적으로 국경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북한의 기습공격을 대비해야 했던 30년 전에는 수도이전이 논의될 만 했을지라도,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 세계와의 경쟁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에 ‘제6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경제여력이 없다는 이유로,그리고 소요 재원을 국가적으로 더 시급했던 산업발전에 쓰기 위해 이를 반납했던 적이 있습니다. 행정중심도시는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일입니다.저는 젊어서부터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부터 동토의 시베리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일해 왔습니다.그러나,세계 어느 곳에서도 수도를 분할한 사례를 본적이 없고,브라질·호주·말레이지아 등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나라의 경우에도 수도이전에 성공한 사례를 본적이 없습니다.결국에는 정부가 추진 중인 수도분할도 국력낭비로 이어질 것이 명백합니다.사정이 이런데도 꼭 해야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국가지도자는 단순히 정책을 수립했다는 사실만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때로는 국익을 위해 기존의 정책을 바꾸거나 포기하는 지도자가 더 높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혜안과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결단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대통령께서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수도분할을 재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만약 생각을 바꾸신다면,우리국민들은 은퇴 후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것이라 믿습니다. 2005년 3월 24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 역사비평 겨울호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

    역사비평 겨울호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

    성웅 이순신이냐, 인간 이순신이냐. 너무 도식적인 구분인가. 그렇다면 합리적인 CEO로서의 이순신,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한 이순신은 어떤가. 역사적 인물로서 이순신은 한명인데 해석으로 구성되는 이순신은 여러 명이다.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KBS가 상영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이 크다. 이순신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거나 개정판을 내기도 하고 ‘충무공전’같은 컴퓨터 게임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이순신에 대한 소비방식은 예전부터 쭉 있어왔던 현상이다.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노영구 연구원은 계간지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린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이란 글을 통해 그 소비방식을 추적했다. 해방이후 독재정권이 이순신을 어떻게 이용했는가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의 한 축이었던 극우청년단체들의 은유로써 화랑도를 선호했다. 박정희 정권 때 비로소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이 기간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국가수호의 영웅에서 선견지명을 갖춘 탁월한 전략가로, 다시 정의·충성·용기를 갖춘 훌륭한 인격자로 다르게 정의되다 마지막으로는 ‘화랑도의 중흥’정도로 격하됐다. 이런 변화는 박정희 정권 초기의 반공주의, 중기의 성장제일주의, 말기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다.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바뀌었던 평가가 조선·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순신은 자신의 시대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전쟁영웅’은 외려 왕권에 대한 위협일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중용해 조선수군을 괴멸시킨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임진왜란 뒤 논공행상에서 원균과 똑같이 선무공신 1등의 녹훈을 받았던 것도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순신은 전쟁의 영웅으로 올라선다. 그러다 숙종 때는 중국과 함께 왜구를 물리친 ‘중화문명의 수호자’로 한번 더 업그레이드된다. 이는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확실히 장악하면서 이제 중화문명의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조선중화주의에 따른 것이다. 청나라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정조 때는 왕권강화와 복종을 요구하기 위해 충성의 상징으로서 이순신의 쓰임새가 바뀐다. 일제시대에는 다시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올라선다. 이 시기에는 영국의 넬슨제독보다 뛰어나다거나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이런 서술은 서구열강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우리민족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문화통치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완화된다. 민족개조론, 실력양성론이 힘을 얻으면서 이순신의 인격과 애국하는 마음이 강조됐다. 이런 평가의 변화에 대해 순천향대 손풍삼 이순신연구소장은 “정치적 상황에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만 영웅으로서의 족적은 분명하다.”고 강조한 뒤 “다만 성웅으로 ‘박제화’된 이순신이 상업적으로 이용될 위험만큼은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기고] 일자리 소멸과 직업 재활 훈련/박진서 코아컨설팅 대표

    금년 대졸 취업률은 겨우 50% 정도, 나머지는 절망 상태다.‘밀레니엄’ 졸업생으로 21세기 선두 주자로서의 희망찬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이 취업 탈락이라는 절망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뿐이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현재 세계노동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약 8억 5000만명이 실업자이거나 실업자에 가깝다. 더 놀라운 것은 해마다 5000만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기존의 일자리(Job)가 급속히 소멸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 노동부 전신애 여성국장은 “현재 직업의 90%는 머잖아 사라진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한국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 정부의 차관보급에 오른 그녀는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직종과 직업의 생성·소멸 속도가 예상할 수 없게 빨라지고, 특히 기존 일자리가 사라져 X세대(18∼35세)는 평생 5∼6번 직업을 바꿔야만 되며, 지금까지 일해 온 유사 직종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직종과 직무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미국의 저명한 경영컨설턴트인 윌리엄 브리디스는 “2000년대에 들어 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 30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 선용이란 장밋빛 꿈에 젖어 있지만, 그 반대로 머지않은 장래에 주 60시간 이상 일하게 되며 그 대신 전 세계 노동인구의 50%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IMF후 대기업 일자리가 무려 22만여 개나 줄었고 금년 1·4분기 중 기업의 78%가 채용계획이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노동부 집계). 이 때문에 직장의 중심이 되어야 할 30대까지 5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비롯해 2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못 얻거나 쫓겨나고 있다. 특히 e비즈니스의 규모가 기존의 상거래를 간단하게 능가하게 되는 2∼3년 후가 되면 엄청난 고용환경의 변화와 함께 직업이동(Job Shift)과 실업 공황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일자리 소멸 현상은 경기와 관계없이 영구히 지속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정부가 아무리 공권력과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고용안정을 추진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 이유는 IT의 세계에서 보듯 10년 주기의 변화가 바로 1년 미만으로 단축돼 능력(Career)의 영역을 직격하기 때문이다.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거의 모두가 지금까지 종사해 온 직종과 직업이 소멸되거나 축소되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오랫동안 고생하며 노력해서 이룩한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라 이들에 대한 직업 재활(Career Recycling)훈련이다. 이들이 새로운 직종과 직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키지 않으면 정부가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영구 실업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일자리 상담가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와 자기를 성장시킬 기회가 보이지 않는 직장은 주저없이 떠나라.”고 권고하고 있다. 다행히 IT산업은 다른 직종과 직업을 소멸시키는 반면에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980년 후반부터 쇠퇴산업과 부실기업을 과감히 퇴출시키고 정보산업을 비롯한 성장산업으로의 신속한 구조조정을 통해 놀라운 고용창출을 이룩했다. 이러한 고용창출의 주역은 기존기업이 아닌 새로 창업한 신생기업이었는데 정부의 적극적인 직업재활훈련 정책이 빛을 본 것이다. 우리 정부도 해마다 실업대책비로 수조원의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노사정이 협력해서 전체 근로자의 시장가치를 높여 새로운 노동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게 직업 능력을 높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박진서 코아컨설팅 대표
  • [日 열도에 뿌리내리는 신보수](1)일본의 신보수 탄생 배경

    21세기 일본의 첫 총선거(중의원)가 치러진 작년 11월 9일,하나의 키워드가 창조됐다.보수 양당제로의 재편,사민·공산당의 몰락이 일어난 열도를 읽어낼 새 흐름,풀뿌리 신보수이다.열도에 뿌리내려가는 신보수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간단하다.그 흐름이 주류가 되어가고,그 핵인 젊은 세대들이 일본의 주역으로 성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어떤 일본을 구상하고 있는가,그들이 주역이 되는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풀뿌리 신보수,침몰해 가는 사민주의,그들과의 새 한·일 관계를 3회에 걸쳐 제시한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세밑인 12월18일 게이오대학.강연에 나선 작가겸 와세다대 교수인 헨미 요(59)는 2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고 운을 뗐다. 그의 수수께끼는 이렇다.북·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심의관 집에 지난 9월 폭발물이 설치됐다.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는 ‘당연한 일”이라는 망언을 했다.“자기와 생각이 다른 인물을 암살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공인으로서 있을 수 있는 국가는 일본 밖에 없다.이런 발언을 하는데도 어떻게 300만표를 얻었는지,그리고 비인간적인,상식적이지 않은,있어서는 안될 발언을 한 그가 어떻게 도쿄도 지사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지.왜 이런 발언을 해도 인기가 있는 건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이렇게 호소한 헨미는 “자연발생적인 파시즘의 전조”라고 지금 일본의 현상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다나카 심의관 집에 폭발물을 설치한 범인들이 체포된 것은 12월19일이었다.조총련과 사민당,일본교직원노동조합 건물에 총격을 가하거나 정치인들에게 실탄과 협박문을 보냈던 이들은 ‘도검(刀劍) 벗의 모임’ 회원들이었다.전통적인 우익단체와는 다른 자생적 신보수다.면면을 보면 치과의사,미용실 경영자,주지 등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40∼50대 보통 시민이다. 2001년 한·일 역사교과서 파동을 일으킨 ‘새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일반 참가자들도 ‘보통’을 자처하는 시민들로 추정된다.이 모임의 가나가와현 지부에 2001년부터 4월부터 10개월간 참가해 회원들을 조사한 우에노 요코(25·당시 게이오대 학생)에 따르면 회원들은 스스로를 ‘침묵하는 다수’로서 보통시민의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한다.2차대전 패전 후 태어난 30∼40대가 주축인 이들은 좋아하는 정치가로 이시하라 도쿄도 지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침묵하는 다수”였던 야마모토 헤루미(37)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접하고 1999년 행동파로 변신했다.신보수 정치인의 산실인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인 그는 ‘청년의 모임’을 만들어 1인 시위를 해오다 지금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 간사를 맡아 가두서명 등 “행동부대”로 일하고 있다. 야마모토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실감한다.재작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기 전만 해도 술자리에서 납치,안보 문제를 꺼내면 시큰둥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진지하게 응해온다.군대보유,천황제,애국심을 강조하는 그는 납치 해결 전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해서는 안되는 대북 강경론자이다.그가 주도하고 있는 ‘청년의 모임’ 회원들은 주축이 1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산케이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도요가쿠엔대학 전임강사 사쿠라다 준(38)은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보수논객이다.그는 천황제,헌법 9조 개정을 통한 군대보유,야스쿠니(靖國)신사 존속,애국심을 강조하는 교육기본법을 주장하지만,북한의 핵 위협에 맞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과격보수와는 약간 다르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일본이 진주만 공격에 나선 것은 “미국의 석유금수 조치로 절망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비유하는 사쿠라다는 “북한을 만족시켜서도 절망시켜서도 안 된다.”고 대북 지원 필요성을 주장한다.그런 점에서 야마모토보다는 온건하다. 좌파 주간지 ‘슈칸긴요비(週刊金曜日)’의 다케우치 가즈하루(33) 기자는 이들을 “좌절을 겪으면서 경제대국의 재현,국제사회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군사력에 대한 갈망을 키워가고 있는 세대”라고 정의한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얻은 것은 내셔널리즘”이라고 분석하는 간사이가쿠인대학 아베 기요시(39)교수의 말처럼 풀뿌리 신보수는 1990년대 거품경제의 붕괴와 더불어 저변을 넓히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50)가 등장,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만화 ‘전쟁론’ 등을 통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군대 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해 군사 내셔널리즘의 토양을 다졌다. 이런 가운데 신보수의 지형을 넓히고,단결토록 만든 “패전 후 첫 퍼블릭 메모리”(헨미 요)는 역시 2002년 9월 북한의 납치 시인이었다는 데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일본 국회에서 지한파로 꼽히는 고바야시 유타카(39·참의원)는 일본의 최대 적을 “북한”이라고 꼽는다.그도 헌법 9조 개헌 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신보수 대열에 서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흐름이 “과거 히노마루(일장기)를 흔들던 군국주의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가네코(63·회사이사)는 올해 두 종류의 연하장을 만들었다.나이든 사람에게 “일본 안보의 위기감”을 주제로,젊은층에게는 “싸우는 일본은 어디로 갔는가.”였다.건설회사 간부로 20여년간 해외를 다니며 ‘강한 일본’을 체감했던 그는 지금의 ‘약한 일본’에 위기감을 느끼는 ‘보통 시민’이다. marry04@ ■ 오구마 게이오대 조교수 |도쿄 황성기특파원|게이오대 조교수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는 “영국,프랑스에서 경기가 좋지 않았던 70∼80년대 이민 배척 운동이 태동한 것처럼 지금의 일본이 그렇다.”면서 “네오나치즘을 했던 사람들이 과거의 나치즘을 알고 했다기보다 경제적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택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선진국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신 내셔널리즘이 탄생한 배경은. -1990년 전후 냉전 종언과 불황이 동시에 일본에 찾아왔다.지금은 가난하지도 않지만,과거처럼 고도성장이 되는 시기도 아니다.그런 점에서 첫째,목표가 없어졌다.과거처럼 가난을 딛고 풍부하게 된다거나 좋은 생활을 추구하는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둘째,냉전이 끝나고 미국 일극체제가 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요구가 강해졌다.미·일 가이드라인 수정,자위대 파병 요구 같은 것들이다.셋째,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사회에서 점점 물러나면서 전쟁기억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이 세가지가 현재 내셔널리즘으로 불리는 현상의 배경이다. 특징이라면. -패전 직후의 (전통적)우익과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는 분명 다르다.예전의 우익,보수는 전전(戰前)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지만 교과서 모임측은 전전을 모른다.그때를 살지 않았으니까.고도성장기 이후의 사람이 많다.전쟁 전을 몰라서 “전쟁이 좋다.”거나,“한·일병합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라든가 해도 그 말에 리얼리티가 없다. 이전의 보수,우익은 한국 중국에 대해 전통적인 멸시가 있었다.가난한 시절의 한국,중국밖에 모르기 때문이다.지금의 20∼30대들은 한국과의 우호나 한국 문화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얘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일병합은 옳았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목표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헤매고 있고,미국의 압력에 의한 군사요구의 흐름 속에서,자신 속에 전쟁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그래서 명확히 뭔가에 몰두할 수 있는 내셔널리즘이 필요한것이다.신흥종교를 추구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까.그들은 ‘천황'에 충성심을 갖지도 않고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 내셔널리즘을 가르치는 세력은 누구인가. -단순히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전통적인 우익들이 먼저 있다.자민당 지지 기반과 연결돼 있고,신도(神道)의식,야쿠자 조직과도 연결돼 있다.이들은 이익 기반과 연결돼 있다.‘새 역사교과서 모임’ 같은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이들은 조직과 연결돼 있지 않고,신도의식 같은 것도 없다. 2002년 북한의 납치 시인이 일본내 여론을 폭발시키고 보수진영을 단결시켰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오구마는 1962년 도쿄 출신.도쿄대 농학부를 거쳐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0년간 근무.도쿄대에서 박사학위 취득한 뒤 현재 게이오대 종합정책학부 조교수.저서로는 ‘민족과 애국-전후 일본 내셔널리즘과 공공성’,‘치유의 내셔널리즘’ 등.
  • 책꽂이

    ●안톤 라이저(칼 필립 모리츠 지음,장희권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37세에 요절한 독일 작가의 대표작.주인공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기에 이르는 동안 겪는 사회적 멸시·냉대 등을 다룬,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사회적 병리 현상을 사회·경제 구조적 차원에서 분석해 18세기 독일사회사를 반영한다.1만6000원.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김병호 지음,행복한책읽기 펴냄)시인이자 문학박사인 저자가 각시대를 규정짓는 주제별로 시사(詩史)를 연구.191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주제의식을 제시한 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8500원. ●통상 관념 사전(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진인혜 옮김,책세상 펴냄)‘보봐리 부인’의 작가가 쓴 개념 정의모음집.“질그릇:도자기보다 더 멋지다”“증권 거래소 직원:모두 도둑들” 등의 예처럼 통상적 해석을 뒤집는 작가의 창조성과 해학미가 돋보인다.4900원. ●토끼는 원숭이 궁둥이를 싫어한다(고사리 지음,답게 펴냄)선과 악의 대결에서 악의 승리를 주로 다뤄온 작가의 장편.세 남자에게 윤간당한 여성 작가의 복수극을 다룬 스릴러.마지막에 진짜 범인을 등장시키는 반전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 고발.9500원. ●소멸의 기쁨(허영자 지음,문학수첩 펴냄)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시인의 시조집.이우걸 시조시인은 “단순성의 미학을 추구하고 율감을 담는 등 전통시와 맥을 함께 해온 시인의 작품세계가 시조집으로 매듭을 지었다.”고 해설.6500원.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김철순 지음,모아드림 펴냄)95년 정지용 신인문학상 수상 시인의 두번째 작품집.일상에서 흔히 볼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삶의 진정성을 노래한다.표제시 등 68편.5500원. ●소설 갓바위(이룸 지음,맥 펴냄)심훈문학상 수상 작가가 대구 갓바위 약사여래불을 소재로 쓴 장편.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전설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 불전액(佛錢額)이 엄청난 이곳을 쟁취하려는 싸움을 소재로 했다.8000원.
  • [사설]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

    카자흐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몰매를 맞아 숨진 사건은 우리 한국인을 참으로 부끄럽게 한다.동시에 사회적약자에 대한 우리 인식 수준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언론보도에 따르면 숨진 카자흐스탄 출신 세르게이(39)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 5명과 함께 경기 시흥의 한 편의점에서 이쑤시개를 사려했다.그런데 술에 취한 한국 청년 4명이 “아무거로나 이를 쑤셔라.”라고 말하는등 시비를 걸다 그 중 한명이 경찰에 신고를 하려했다.그러자 불법 체류자였던 외국인들이 달아나기 시작했으며,세르게이는 500여m쯤 쫓아온 한국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아숨졌다.한국에 온 지 3년 된 세르게이는 고국에 아내와 네 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 사건은 우리의 배타성,남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지금 국내 노동시장은 외국인 노동 인력의 공급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없을 만큼 외국인 노동자의 역할이 대단히 커졌다.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이른바 ‘더럽고 힘들고위험스러운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저임금과 인권의 사각 지대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온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기업체 직원이나 기술자들의 안전 문제가 이같은 ‘한심한 사건’으로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해야 한다.불과 20여년전만 해도 우리들은 중동 근로자로 가서 오일 달러를 벌어왔고,최근까지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캐나다로 이민을 가지 않았던가.인권에는 국경이 없다.세상에 다른 사람을 얕보거나 멸시하고도 잘되는 사람은 없다.사법 당국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보호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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