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청년 멸시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팀 프리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50세 이상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고가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공존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6
  • [단독] “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습니다”

    [단독] “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습니다”

    1940년 3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한 청소년이 있었다. 외동아들로 평범한 10대였던 그는 일본 유학 생활 1년 만에 애국지사가 됐다. 생존 애국지사인 조성인(93)옹은 9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본 오사카 간사이공업학교에 들어간 그는 1941년 2월 정덕수 등 뜻이 맞는 유학생들과 항일결사 ‘개진대’를 결성했다. 조 지사는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며 “우리 동포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보다 못해 독립 쟁취를 마음먹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개진대는 미국과 영국 등이 참전하면 일본의 패망은 필연적이라 보고, 때를 기다려 일제히 봉기해 독립을 달성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8월에는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당’으로 바꾸고 당칙과 행동강령 등도 정했다. 조 지사는 “일본에 강제 노역을 온 동포와 유학생들을 계몽하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 무장봉기를 대비했다”며 “하부 조직으로 우유 및 신문 배달 모임 등을 만들어 동지를 포섭하는 데도 힘썼다”고 회고했다. 시련이 닥쳤다. 누군가의 밀고로 같은 해 10월 경찰에 끌려간 것이다. 일본 경찰은 배후를 알아내려고 1년 가까이 혹독하게 고문했다. 조 지사는 “매일같이 몽둥이로 얻어맞았다”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오사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당시 조 지사의 아내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조 지사는 “일제의 검열 때문에 수감 이유는 밝히지 못하고 편지로 감옥에 있다는 얘기만 전했다”며 “영문도 모르고 애태웠을 아내가 걱정됐다”고 전했다. ‘걱정 마시오, 건강하게 살아 나가 만날 것이니’. 자택에 보관 중인 편지 위의 눈물 자국이 아직도 생생했다. 연필 하나를 훔쳐 휴지에 글을 적으며 버티기를 1년 반. 출소 후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온 그는 동네 젊은이들을 모아 몰래 밤마다 계몽 활동을 했다. 고국 땅을 밟은 지 1년 3개월 만에 마침내 조국 해방을 맞았다. 조 지사는 1990년에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조 지사는 오는 14일 ‘서대문 독립민주축제’ 풋프린팅 행사에서 올해의 애국지사로 첫 발자국을 남긴다. 그는 “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의 핍박을 받았는데 국가가 부강해져 이런 예우도 받으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다. 조 지사는 후대에 다시는 나라를 잃는 수모가 없어야 한다며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다른 선진국을 부러워하거나 의지하려 하지 말고 각자 힘을 기르세요. ‘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겁니다.” 글 사진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나우! 지구촌] “차별 피하려”…IS로 떠난 성소수자들

    [나우! 지구촌] “차별 피하려”…IS로 떠난 성소수자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가입하길 원하는 청년들이 전 세계에서 속출해 각국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IS에서 탄압하고 있는 성 소수자인 청년 두 명이 IS를 찾아 시리아로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영국 일간지 미러 등 외신들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부의 발표를 인용, 트랜스젠더 남성인 빅토리아와 동성애자 남성 알렉세이가 IS의 신병 모집 광고에 현혹돼 시리아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캄차카 지역에 살던 이 22살 동갑내기 청년들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족 및 이웃들에게 멸시를 받는다고 여기던 중 IS의 신병모집 홍보물을 접하고 가담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빅토리아의 친척은 “빅토리아는 수술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으지 못했고 친척들에게 돈을 구하려 했지만 모두들 거절했다”고 설명했다.하지만 IS는 코란의 율법에 어긋나며 신이 정해주신 자연의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동성애자 남성을 고층 건물에서 추락시키는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성소수자들을 잔학하게 핍박해왔다.빅토리아의 친척 또한 “IS가 그녀를 살해하고 말 것이라며 경고했지만 그녀는 IS가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설명했다.현지 경찰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는 이번 사건을 두고 “국민의 테러리스트 조직 가담을 막는 것은 당연한 경찰의 책무이지만 이 경우에는 막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들의 성 정체성이 공개된 이상 IS에 가담할 경우 곧 처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IS가 비록 사회에서 외면 받는 계층을 유인하는 홍보를 계속하고 있지만 거기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을 포함시킨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다”고 말했다한편 러시아 또한 동성애자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가라는 점 또한 유념할 만한 사실이다. 러시아에선 지난 2013년에는 비전통적 성 가치관에 대한 교육을 금하는 일명 ‘반 동성애 법’이 통과됐는가 하면 극우주의 단체들에 의한 동성애자 테러가 종종 벌어지는 등 동성애자들에게 혹독한 환경으로 알려져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차별 피하려 찾은 곳이…IS로 떠난 성소수자 청년들

    차별 피하려 찾은 곳이…IS로 떠난 성소수자 청년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가입하길 원하는 청년들이 전 세계에서 속출해 각국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IS에서 탄압하고 있는 성 소수자인 청년 두 명이 IS를 찾아 시리아로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영국 일간지 미러 등 외신들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부의 발표를 인용, 트랜스젠더 남성인 빅토리아와 동성애자 남성 알렉세이가 IS의 신병 모집 광고에 현혹돼 시리아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캄차카 지역에 살던 이 22살 동갑내기 청년들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족 및 이웃들에게 멸시를 받는다고 여기던 중 IS의 신병모집 홍보물을 접하고 가담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빅토리아의 친척은 “빅토리아는 수술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으지 못했고 친척들에게 돈을 구하려 했지만 모두들 거절했다”고 설명했다.하지만 IS는 코란의 율법에 어긋나며 신이 정해주신 자연의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동성애자 남성을 고층 건물에서 추락시키는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성소수자들을 잔학하게 핍박해왔다.빅토리아의 친척 또한 “IS가 그녀를 살해하고 말 것이라며 경고했지만 그녀는 IS가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설명했다.현지 경찰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는 이번 사건을 두고 “국민의 테러리스트 조직 가담을 막는 것은 당연한 경찰의 책무이지만 이 경우에는 막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들의 성 정체성이 공개된 이상 IS에 가담할 경우 곧 처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IS가 비록 사회에서 외면 받는 계층을 유인하는 홍보를 계속하고 있지만 거기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을 포함시킨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다”고 말했다한편 러시아 또한 동성애자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가라는 점 또한 유념할 만한 사실이다. 러시아에선 지난 2013년에는 비전통적 성 가치관에 대한 교육을 금하는 일명 ‘반 동성애 법’이 통과됐는가 하면 극우주의 단체들에 의한 동성애자 테러가 종종 벌어지는 등 동성애자들에게 혹독한 환경으로 알려져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손성진 칼럼] 메르스가 별것 아니라고?

    [손성진 칼럼] 메르스가 별것 아니라고?

    과거를 받들고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守舊) 세력은 혼돈기가 되면 정의의 사도처럼 칼을 빼든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와도 같다고 할 수 없는, 이념도 정파도 아닌 이 세력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맹목적인 신념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 확신범들이다. 건전한 보수라면 필요할 때는 문을 열어젖힐 줄 안다. 꽁꽁 걸어 잠근 수구 세력이 보수의 탈을 쓰고 보수인 양 활개를 쳐도 양자가 뒤죽박죽이 된 혼돈에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구별해 낼 방도도 없다. 물론 진보에도 수구가 섞여 있다. 그들을 좌우 이념 논쟁의 장에 초대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고 불필요하다. 보수와 진보가 발전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그 속에 뒤엉켜 있거나 가면을 쓰고 숨어 있는 수구는 현실 안정과 과거 회귀만을 흔들림 없이 추구한다. 스스로 정한 원칙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표현과 행동은 늘 극단으로 치닫는다. 언뜻 보면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 즉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 메르스에 피로감을 느낀 수구 세력이 어김없이 ‘칼을 받으라’며 발호하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국가적 중대사안임에도 군중심리에 의한 호들갑쯤으로 이번 사태를 격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사안의 중요성과는 무관하게 안정만을 추구하는 기득권층의 보신 논리가 숨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세월호 희생자는 교통사고 사망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논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1년에 폐렴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1만명이 넘고 결핵으로도 수천명이 죽는데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목숨의 가치를 숫자로 따지는 이런 무리들에게 인권, 특히 소수의 인권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하다. 적어도 지식인이라고 자부한다면 의미를 숫자에서만 찾는 것은 사유(思惟)의 부족이라고 나무랄 수밖에 없다. 1000명이 넘어야 목숨의 가치가 있고 한 명은 무의미하다는 논리는 해괴하다. 그런 논리라면 겨우 3명이 희생된 송파 세 모녀 사건이나 골방에서 숨져 간 청년 실업자 자살 사건에도 주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대중의 속성과 언론 센세이셔널리즘의 문제점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부화뇌동으로 무시해도 될 만큼 현대 사회의 구성원은 몽매하지 않다. 수구 세력은 정보가 통제된 사회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억압된 대중을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십 년 전과는 다른 자유의 힘으로 대중은 군중심리가 아닌 혜안과 통찰력을 갖고 있다. 그런 대중의 힘 또한 여론이 철권정치를 무너뜨렸듯이 지금도 국가나 정부보다 더 중요한 발전의 한 축을 맡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고가 번지르르한 표피 속에 감춰져 있던 곪은 환부를 노출시켰듯이 메르스 또한 수많은 숙제를 국가와 사회, 또 국민 개개인에게 던졌다. 중국에서 전파돼 중세 유럽을 궤멸시킨 페스트에 메르스를 비교할 바는 물론 아니다. 전염병의 위험성보다는 정부의 무능함과 무사안일, 거대 조직(병원과 같은)의 무책임, 사회 구성원의 무신경 등 갖가지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구 세력에게는 파헤쳐진 더러운 속살이 거슬리고 눈꼴사나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결과들의 연원을 따져 보면 그들에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그래서 어떤 비리,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더라도 파묻고 외면하려만 드는 것일까. 지금까지도 세월호 사건을 단순한 정비 불량 사고 정도로 덮으려 하는 것일까. 메르스가 페스트와는 다르더라도 정부와 국민이 무관심하면 결핵 이상의 돌림병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대중과 대중의 생각을 반영하는 언론이 잠자코 있는다면 어떤 상황이 됐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나친 과민 반응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어렵잖게 극복할 수 있다. 재난 극복에 수구와 개혁, 보수와 진보가 따로일 수 있겠는가.
  • 하정우 “대중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 감독 입장에서 알고 싶었죠”

    하정우 “대중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 감독 입장에서 알고 싶었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스크린 속 멋진 몸뚱아리의 화려한 액션도, 가슴 먹먹하게 하는 절절한 눈빛도, 키득거리게 만드는 해학도 모두 배우들이 펼쳐 낸다.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의상팀, 음악팀, 소품팀 등 수없이 많은 이들의 열정과 눈물이 더해져야 겨우 영화 한 편이 완성된다. 그럼에도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중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 감독의 입장에서 알고 싶었습니다. 감독이 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웃음의 코드를 의심하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었지요. 저는 더이상 변명할 수 없는 감독이니까요.” 지난 12일 서울 중구 삼청동 한 찻집에서 하정우(37)를 만났다. 2013년 데뷔작 ‘롤러코스터’에 이어 새해 벽두부터 ‘허삼관’을 연출해 내놓았다. 이제 어엿한 ‘감독’으로 호명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의 첫 작품(롤러코스터)은 난해한 웃음 코드로 ‘마니아용 블랙코미디’라는 묘한 평가를 받았다. 관객은 27만명에 그쳤다. 첫 영화는 연출에 대해 갓 틔운 열망의 싹이었다. 그는 “사실 ‘롤러코스터’는 독립영화로 봐야 되는 것 아니냐”고 계면쩍게 웃으면서도 “첫 영화를 찍고 난 뒤 나 혼자만 웃긴다고 생각했고, 호흡이 빨랐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허삼관’을 찍으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을 찾으려 노력했다”면서 “이번 영화를 찍으며 많이 고민했고, 열정을 쏟았고, 최선을 다해 만들었던 만큼 어떤 평가가 나오더라도 이게 나의 한계일 것”이라고 말했다. ‘후회 없이 만들었다’는 하정우식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정우는 감독이기 전에 배우다. 꼬박 10년 동안 하정우는 강렬한 이미지로 늘 대중 곁에 있었다. ‘추격자’에서 평범한 이웃이자 끔찍한 살인마로 주변을 맴돌았는가 하면, 가난과 멸시가 서러웠던 ‘황해’의 조선족 청년이었고, ‘범죄와의 전쟁’의 조폭 두목이거나 , ‘베를린’의 버림받은 북한 비밀요원이었으며, ‘군도’에선 우직히 떨쳐 일어서는 민중들의 맨 앞에 선 순박한 도치였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감독 변신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막연히 영화감독이 되는 모습을 꿈꿨다”면서 “2012년 ‘베를린’ 촬영을 모두 마친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문득 영화를 한 번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감독 변신의 계기를 설명했다. “연기도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는 듯했고, 배우로서 제가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도 컸습니다. 영화를 찍어야 배우로서 계속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허삼관’은 피, 자체를 서사의 씨줄로 삼고, 가족의 의미를 날줄 삼아 풀어낸 작품이다. 중국 소설가 위화(余華)의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1953년, 그리고 1964년 충청도 공주로 시간과 공간을 틀었다. 원작 속 개인의 유장한 인생 흐름은 없지만, 피의 서사는 오롯이 남았다. 아버지 허삼관에게 피는 생존의 수단이었고, 힘겹고 가난한 시절, 가족을 이루게 해주는 필수적 요소였다. 영화 속 일락이는 11년 동안 듬직하게 첫째 아들 노릇을 했건만, 제 피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순간 허삼관에게 “사람들 없을 때는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아저씨라고 불러”라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영화 후반부 아버지는 피붙이 아닌, 아픈 일락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피를 판다. 하정우는 “단순한 복고적 정서 되살리기를 피하기 위해 인물의 관계와 갈등에 더욱 집중하고, 미술과 음악 등 감각의 차이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준비된 감독 하정우의 흔적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는 순천 야외 세트장의 잘 자란 옥수수를 표현하기 위해 봄에 미리 심어놓는 꼼꼼함까지 선보였다. 또 감독 의자와 카메라 앞을 바삐 오가는 와중에도 세 아들 일락, 이락, 삼락이를 연기한 남다름(13), 노강민(10), 전현석(9) 등 아역배우들을 살뜰히 챙겼다. 스태프들에게 “고함 치지 말고, 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우디 앨런이나 찰리 채플린처럼 진한 페이소스가 있는 웃음을 그리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세 번째 작품은 마흔 살 넘어서나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 봤자 2~3년 남았다. 감독 욕심이 크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24세 아랍계 독일청년은 왜 떠돌다 IS로 갔나

    24세 아랍계 독일청년은 왜 떠돌다 IS로 갔나

    11월 7일(현지시간)부터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법원에서는 81쪽에 달하는 죄목이 적힌 조서에 따라 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그 대상은 24세의 이스마일 잇사라는 이름을 가진 아랍계 독일인으로 어떻게 한 인간이 이슬람 테러단체 IS로 가는 예를 보여 주는 재판이 될 것으로 보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2013년 11월 잇사가 맨 처음 체포되었을 당시 그의 가방에는 싸구려 스포츠시계와 군용바지, 야간투시경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의복과 초콜릿, 그리고 영수증 등과 함께 쪽지엔 체온계, 혈압측정기, 의료용 메스와 약품 등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시리아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과 테러단체인 IS를 위해 쇼핑하여야 하는 리스트였던 것이다. 잇사는 독일 남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서 네 명의 남매와 함께 레바논 국적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집에 거의 없었으며 2000년 레바논에서 사망했다. 잇사는 17세 되던 해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시간제 일을 하다가 여자친구를 만나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으나 유산을 하게되자 둘은 헤어졌다. 그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되돌아 와 정규 학교과정을 마치려 했으나 때마침 마약을 접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이슬람 사원을 알게 되었고 정식으로 종교를 갖게 되었다. 그는 주로 극우 이슬람주의자들과 접촉했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과 의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2012년 말 잇사는 성전에 참전하기로 결심하고 시리아로 떠났다. 2013년 8월 그는 터키로 가려던 중 국경에서 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검사를 당했다. 검사가 끝나자 그는 한 달간의 교육을 받고 전선에 보내졌는데, 특히 알레포 지역 시가전이 펼쳐지던 지역에 투입되었다. 그는 독일출신이 상관으로 있는 부대에서 먼저 검문소에 배치되었다. 그는 수시로 "더러운 쿠파르(코란에 의하면 '불신자'라는 의미)"를 절멸시키는 일을 떠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 열혈청년은 손에 부상을 입었고 무기를 다루기가 힘들어졌다. 그 때 IS 군단 상사가 그에게 다가와 시계와 과자, 의약품 등이 적힌 쪽지를 내밀며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바로 새로운 미션, 쇼핑이 주어진 것이다. 2013년 10월 잇사는 다시 독일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독일 정보부 요원은 이미 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상황이었고 검찰 역시 그가 테러단체에 가입해 일을 한 경력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말 체포 후 조사를 받아 오다 지난 2014년 8월부터 정식 조서가 작성되어 11월 7일 재판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재판에서 그는 아마 최고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정보부는 2011년 시리아 전투가 시작된 이래 450여 명의 독일인들이 시리아에서 극보수 이슬람인들을 위해 싸우러 독일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 중 130명은 독일로 되돌아 왔으며 25명은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고 한다. 잇사는 그들 중 한 명인 것이다. 잇사가 쇼핑을 미션으로 되돌려 보내졌지만 그들 중 상당 수는 사회를 혼돈으로 몰고가도록 하는 임무를 지니고 되돌아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극우 이슬람인들을 정신적으로 세뇌시켜 이슬람 전사를 충원토록 하거나 테러를 준비하는 일 등. 잇사는 생의 갈림길에서 낯선 의무와 과제를 떠맡게 되는 길을 택함으로써 '낙오자'가 되는 길을 걸었지만 지하드에 참가한 젊은이들 중에는 성공적으로 학교 생활을 마치고 근로환경에서 인정 받고 사랑 받던 사람들도 있다. 사진= 출처 thinkstock 최필준 독일 통신원 pjchoe@hanmail.net
  • “실체없이 떠도는 소문은 파괴자… 한번 걸러 진실 보는 여유 가지길”

    “실체없이 떠도는 소문은 파괴자… 한번 걸러 진실 보는 여유 가지길”

    오랜 무명생활 끝에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여배우가 있다. 그런데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아 인기 가도를 달리려는 순간 일명 ‘증권가 찌라시’에 모 정치인과의 스캔들이 터지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결국 여배우는 목숨을 잃고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매니저는 찌라시(사설 정보지)의 최초 유포자를 찾아 나선다. 20일 개봉하는 영화 ‘찌라시: 위험한 소문’의 줄거리다. 사회문제로 대두돼 법적으로 유통이 금지되면서 찌라시는 더욱 음성적으로 만들어져 유포되고 있다. 영화는 누가, 왜, 어떻게 이 찌라시를 만들어 퍼뜨리는지를 사실적으로 접근해 촘촘히 풀어 나간다. 범죄 액션 장르를 빌린 영화의 한가운데 배우 김강우(36)가 있다. 극중 매니저 우곤 역의 그는 여배우를 파멸시킨 소문의 근원을 맹렬히 뒤쫓는 인물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개인적으로 저는 소문에 밝은 편이 아니에요. 아마도 배우들이 직장인들보다 소문을 더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가끔 단체 SNS 메시지로 찌라시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요. 잘 아는 동료에 대한 허위 사실이 떠돌아다닐 때는 정말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영화에는 “찌라시의 95%가 진실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우곤도 자신이 키운 여배우 미진의 스캔들이 근거 없는 소문이라 믿고 찌라시 유통 업체를 추적한다. 그곳에서 찌라시 유통업자 박사장(정진영), 불법 도청업자 백문(고창석)을 만나 찌라시의 정보가 생성되고 유통·소비되는 세계의 진상을 더듬어 간다. “감독이 찌라시 유통업자 등을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영화 내용처럼 회사의 홍보 담당자들이 낮에 밀폐된 장소에 모여 정보회의를 하거나 사우나, 당구장에서 잡담하듯 의견을 주고받는 얘기가 모여 찌라시가 된다고 하더군요.” 찌라시가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그 또한 직접 경험했다. 여배우 한혜진의 형부이기도 한 그는 처제가 축구 선수 기성용과 결혼할 당시 여러 소문 때문에 힘들어하는 과정을 곁에서 그저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정말 안타까웠죠. 다들 남의 이야기는 너무나 쉽게 하잖아요. 워낙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족끼리도 겉으로 드러내거나 표면화하기 힘들고 그냥 지켜보고 감내하는 수밖에 없죠. 영화 속 미진 역시 소문이 사실처럼 포장되고 그것에 대해 아무리 항변하고 부정해도 대중이 믿어 버리는 데 절망하거든요.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고통일 겁니다.” 영화는 후반부에 찌라시가 단순한 스캔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재계에 걸쳐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른 거대한 음모에 얽혀 있다는 사실까지 다룬다. 그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찌라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찌라시를 만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대중은 그것을 100% 믿지 않고 걸러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질 것 같다. 그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라고 했다. 2002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으로 데뷔해 ‘태풍태양’ ‘식객’ 등에 출연하며 열혈 청년의 이미지를 쌓은 그는 2010년 결혼 이후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에 출연했다. 현재 찍고 있는 영화 ‘카트’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고민한 작품이다. “주변에서 입당해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분도 있더군요(웃음). 물론 그럴 생각은 없고요. 저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허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대사를 했을 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건 싫거든요. 이번 영화를 한 것도 제 나이에 연기하면 캐릭터를 더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아직 대중이 기억하는 흥행작이 나오지 않은 것에 조급한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두 아이의 아빠다운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고작 연기생활 10년이 넘었고, 연기의 재미를 한창 깨닫고 있어요. 연기가 어떤 승부수를 띄우고 바둥거린다고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즘 40대 배우들의 수요가 크게 늘어 할 수 있는 배역의 연령 폭도 그만큼 커졌어요. 좋은 40대 배우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요즘 제 고민이자 목표입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불안’ 에 잠식 ‘괴물’ 된 20대

    ‘불안’ 에 잠식 ‘괴물’ 된 20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개마고원/240쪽/1만 4000원 도발적인 제목이다. 모든 종류의 차별을 타개하기 위해 수십년간 피땀 흘려 온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렇게 대놓고 부정하다니…. 부제는 더 섬뜩하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세대로 꼽혀 온 20대가 아니던가. 88만원 세대, 이태백,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 같은 자조적인 유행어만 봐도 이 시대 20대의 고통과 불안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암울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닐까 하는 게 책을 읽기 전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에는 지금의 20대가 승자 독식의 경쟁체제에 찌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돼 버린 ‘불편한 진실’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불안한 처지를 위로받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차별을 기꺼이 인정하는 20대들의 민낯은 안타까움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책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인 저자가 2008년부터 4년간 박사학위 논문으로 연구했던 주제를 대중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시간강사로 서울과 수도권 10여개 대학에서 강의한 저자는 2000장이 넘는 학생들의 에세이 과제물을 읽고 그중 100편을 간추려 집중 분석했으며 50여명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20대의 속마음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20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2008년 5월 한 강의에서 겪은 낯선 경험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당시 한창 이슈가 되던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주제로 ‘인권과 평화’에 대해 강의하면서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한 학생이 이렇게 답했다. “정규직을 날로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입사할 때 비정규직으로 채용됐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건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학생의 말에 저자는 당황했다. 지방대 출신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다룬 영화를 보고 ‘인 서울’ 대학생들이 보인 반응도 놀라웠다. 그들은 영화 속 주인공의 좌절에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학교보다 서열이 낮은 지방대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받는 것에는 불쾌해했다.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불합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비정규직이 바로 정규직이 된다는 사실에 박탈감을 넘어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수능 점수로 매겨진 대학 서열에 따른 차별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20대가 겪고 있는 극심한 불안이 그들의 사고방식과 윤리를 근본적으로 바꿨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자기 몫을 챙기는 데 예민해진 20대들이 차별의 벽을 쌓고 자기보다 못한 상대를 밀어내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학력 위계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섰다. 학벌, 학연의 폐해는 줄곧 있어 왔지만 학력 위계는 같은 대학 내에서도 수시생들을 ‘수시충’, 지역균형 입학생을 ‘지균충’으로 부르며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몇 년 새 대학과 학과 이름이 새겨진 야구점퍼가 유행한 것도 학교 수준에 따른 과시와 멸시, 우월감과 열등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20대들을 이처럼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자로 만든 배후로 ‘자기 계발 권하는 사회’를 꼽는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한 자기 계발서들은 경쟁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설파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희생할 것을 독려한다. 취업에 목맨 20대에게 자기 계발은 입사 지원서에 기재할 ‘스펙’의 다른 이름이다. 문제는 자신이 투자한 노력과 시간을 기준으로 그보다 노력이 부족한 이들을 가혹하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자신처럼 열심히 공부해도 정규직 되기가 힘든데 비정규직으로 입사해서 감히 정규직을 요구하고, 자신보다 수능을 못 보고선 취업 시장에서 똑같이 대우받길 원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는 게 그들이 생각하는 ‘공정’과 ‘정의’다. 책은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다만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할 때만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괴물이 된 20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괴물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구조적 원인을 따져 보고,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20대의 양면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영화관·학교 이어 공항까지 총성 덮친 美, 안전한 곳 없다

    영화관·학교 이어 공항까지 총성 덮친 美, 안전한 곳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공항 국내선 터미널에서 지난 1일(현지시간)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큰 혼란이 벌어졌다. 최근 쇼핑몰, 영화관, 초등학교에 이어 공항에서까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제 미국엔 맘 놓고 다닐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날 오전 9시 20분쯤 LA 공항 제3터미널 검색대 앞에서 폴 시앤시아(23)라는 청년이 갑자기 가방에서 공격용 반자동 AR15 소총을 꺼내 100여발을 난사했다. 검색을 진행하던 연방교통보안청(TSA) 요원 제라도 허낸데즈(39)가 총에 맞아 숨졌고 다른 요원 2명과 승객 등 모두 7명이 다쳤다. 시앤시아는 총기난사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총에 맞아 쓰러진 허낸데즈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가 확인사살을 하는 모습이 폐쇄회로TV에 담겼다. 그는 검색을 마친 승객들이 탑승을 기다리는 게이트 앞까지 진입했다가 출동한 경찰과 총격전 끝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얼룩 무늬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항공권을 끊은 뒤 검색대로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기난사에 혼비백산한 승객들과 공항 직원들이 황급히 대피하면서 터미널은 아수라장이 됐다. 활주로의 비행기 동체 밑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항공기 이착륙이 일시 중단되고 공항 인근 도로가 모두 폐쇄돼 극심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한 승객은 “줄을 서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누군가가 ‘총이다! 모두 엎드려!’라고 소리쳤다”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승객이 많은 LA 공항이 일시 마비되면서 1550개 항공편과 승객 16만 7000명의 여행 일정이 차질을 빚었다. 공항은 하루 뒤인 2일에야 정상화됐다. 검거 당시 시앤시아의 가방에는 “TSA 요원을 모두 죽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연방정부를 비난하는 글이 적힌 메모지와 수백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반정부주의적 편집증을 갖고 있는 시앤시아가 TSA에 특별한 원한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CNN 등에 따르면 연방수사국(FBI)이 시앤시아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메모에는 ‘뉴월드오더’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불만도 포함돼 있었다. 뉴월드오더는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은밀하게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비밀결사체를 뜻한다. 그가 음모론에 몰두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메모에 TSA를 ‘반역자’로 표현하고 재닛 나폴리타노 국토안보부 장관을 멸시하는 내용이 담긴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울진 보부상 비석, 30년 잠자던 ‘객주’의 열정 깨워”

    “울진 보부상 비석, 30년 잠자던 ‘객주’의 열정 깨워”

    “‘객주’의 등장인물들에겐 갖은 시련이 닥칩니다. 용감한 인물도, 비겁한 인물도 있죠. 가만 보면 또 나만큼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도 없어요. 아버지라고 하면 맞은 기억밖에 없지. 정부인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멸시도 많이 받았지요. 초등학교는 교과서 하나 없이, 월사금 한 번 못 내고 졸업했어요. 이런 시련에서 벗어난 게 10년도 채 안 됩니다. 하지만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히려 삶이 탄탄해지거든요.” 가난과 결핍이 자신의 삶과 글을 밀고 나가는 추동력이었다는 작가 김주영(74). 그가 소설 ‘객주’를 통해 청년들에게 건네는 충언이다. 19세기 말 조선 보부상들이 21세기의 현대인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장돌뱅이들의 땀내 밴 삶을 담은 ‘객주’가 서울신문 연재 34년 만에 완성됐다. 객주는 당초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1465회(1~9권)로 중단됐다. 사라졌던 주인공 천봉삼을 다시 불러낸 건 4년 전 우연히 발견된 보부상 길(경북 울진 흥부장~봉화 춘양장)이었다. “앞으로 내가 온전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4~5년쯤 남았다고 봐야겠지. 소설에 대한 열정이나 기량이 퇴색되지 않았을 때 못 다한 작업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죠. 하지만 계기가 없어서 30여년의 세월을 흘려보냈어요. 그러다 우연히 경북 울진에서 당시 보부상들이 남겨 놓은 비석, 서낭당, 숙소 등을 보고 가슴 속에 스러지지 않고 남아있던 객주의 싹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4월 1일 본지에 다시 연재를 시작한 보부상들의 삶은 21일 108회(10권)를 끝으로 그야말로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객주’를 교과서처럼 읽던 장년 세대뿐 아니라 청년 세대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신문뿐 아니라 인터넷 교보문고에서도 함께 연재된 데다 작가의 낭독 콘서트 등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교감했다. “남녀가 서로 정분을 나누는 회에는 온라인에서의 반응이 굉장합디다. 허허.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10권을 먼저 읽은 젊은 독자들은 ‘소설에 빨려들어 1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조선시대 막걸리 한 주발, 짚신 한 켤레 값까지 적시했더니 당시 민초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느꼈다는 젊은이들도 있었고요.” ‘객주’는 질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읽는 맛도 안겨줬다. 그러나 조선 말기를 실감 나게 전달하느라 요즘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당시의 어휘를 곳곳에 동원해야 했다. 작가는 “(젊은 독자들이 읽기 힘들 줄)알면서도 도리가 없었다”며 웃었다. “난해하고 말고. 하지만 소설의 현재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는 거지. 옛 사람들이 쓰던 말을 버리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1~9권과 30여년의 간극을 두고 쓰인 10권에는 현재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담겨 있다.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라는, 과거와 무섭도록 닮은 현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새 연재물에서는 지방 관리들이 어떻게 서민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부렸는지, 수령들이 어떤 식으로 뇌물을 주고받고 직책을 사고팔았는지 명확히 서술했어요. 요즘도 정부 관리와 기업인들이 주고받는 부정부패가 엄청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 70년 넘게 살아온 저도 ‘부정부패라는 우리 사회의 혹을 떼기란 참으로 어렵구나’ 하고 절실히 느낍니다.” 작가의 표현대로 ‘객주’는 “거창하게 떠들지 않은 이상향”으로 마무리됐다. 보부상들이 배곯는 농민들에게 땅을 사주며 정착을 돕는다. 가난과 결핍이 움츠린 곳에 늘 시선을 주었던 작가다운 결말이다. 지난 6월부터 기획분과위원장으로 합류한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도 그는 이런 소신을 폈다고 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혼자 낭떠러지에 서 있는 사람,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찾아내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공간을 내주자고도 했죠.” 유년 시절 저잣거리 풍경에 매료돼 문학 인생을 바쳐 ‘장터의 서사’ 대장정을 이어온 작가에게 대하소설이란 “견디는 힘으로 쓰는 것”이었다. 요즘 문단에서 그런 대하소설의 명맥이 끊기고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노 작가의 눈빛에서는 우려보다는 기대가 더 빛났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소재를 개발하는 능력이나 감성적인 호소력, 관계를 다루는 솜씨는 (우리 때보다) 뛰어나요.” 천생 이야기꾼 김주영의 다음 주제는 사람 이야기다. “고은 선생의 시집 ‘만인보’처럼 살면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나를 감동시키고 비난했던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봤으면 합니다. 내가 원래 장편 체질이잖아(웃음).” ‘객주’ 10권은 다음 달 25일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다 알지만 지구는 둥글다. 해와 달도 둥글다. 그리고 공도 둥글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모형은 둥근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원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수레바퀴를 이용해 힘의 균형, 힘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뉴턴의 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원은 힘의 균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도형으로 여긴다. 수박, 토마토, 사과 등 대부분의 맛있는 과일이 둥근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둥글기 때문에 이변도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더욱 그렇다. 야구 경기에서는 어떨까. 공도 둥글고 방망이도 둥글다. 파울도 많고 땅볼도 많다. 그러나 둘 다 제대로만 맞으면 큰 이변이 생긴다. 경기를 뒤집는 홈런이다. 까닭에 야구에 열광하는 팬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의 높아진 수준도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추신수나 류현진 선수의 경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기면 짜릿하고 지면 안타까워한다. 에라, 비오는 날 공통분모나 다름없는 야구 얘기나 실컷 해 보자. 전설의 타자가 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4할 1푼 2리.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주인공은 백인천(70)씨다. 그가 올해로 야구에 입문한 지 50년이 됐다.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여전히 영원한 야구 선수처럼 살아간다. 야구장을 직접 찾기도 하고 집에서 TV를 시청하면서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후배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한다. 우리나라 홈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1960년 6월 제15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서울시 예선에서 경동고와 휘문고가 맞붙었다. 경동고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 선수는 3회 초 휘문고 투수 이명우의 볼을 받아쳐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터뜨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홈런은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가 터뜨린 첫 홈런이 됐다. 이후 백인천 선수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쑹산(宋山) 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이 역시 쑹산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이었다. 주최 측은 홈런상으로 은 트로피를 수여했고 홈런공이 떨어진 지점에 기념패를 박아 백인천의 홈런을 기렸다. 이 대회 이후 백인천은 1963년 일본 프로야구계에 진출했고 곧바로 3할대를 유지하는 수위 타자가 됐다. ‘프로야구 일본 진출 1호’인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 프로야구 생활 18년간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40세 때에는 한국으로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어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 기록을 세웠고 아직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원년 최다 안타, 타격왕, 득점왕,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전설의 타자를 만났다. 아파트 입구에서 동호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백씨와 마주쳤다. 동네 헬스클럽에서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중이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건강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제가 프로야구 생활을 한 지 벌써 50년이 됐네요. 현역 선수로 뛴 20년 동안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습니다. 이제는 건강해지는 프로선수가 되려고 합니다. 1996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의료원에 입원했거든요. 그때 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삼 알았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절망 속에 허덕이다가 건강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야구에 미쳤듯 운동에 미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젠 보다시피 이렇게 다 좋아졌어요.” 그의 집 안에는 현역 시절 야구공이며 배트, 모자, 각종 트로피 등이 진열돼 있었다. 건강을 과시하듯 MBC청룡 시절 4할 타율을 기록했던 배트를 꺼내 왕년을 회상하면서 스윙 자세를 취한다. 과연 운동만으로 그의 건강이 회복됐을까. 물었더니 침과 운동 요법을 병행하면서 구운 소금을 꾸준히 섭취했단다. 1년 전에 다친 고관절도 다 붙었고 뇌경색으로 가물가물했던 기억력도 완전히 회복했다며 웃는다. 18년 가까이 건강 찾기에 공들인 끝에 지금은 골프도 치고 사그라졌던 근육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나이 70이지만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며 팔뚝 근육을 자신 있게 드러내 보인다. 야구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발전했지만 섬세한 면에서 아직 부족하고 프로답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현역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공의 반발력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이 때문에 번트를 잘 안 하고 한 방 날리는 것을 자주 노린다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출신 선수들에 대해서는? “외국에 나가면 길게 가는 선수가 있고 짧게 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는 밑바닥(마이너리그)부터 출발해 오래갈 수 있었고 추신수도 그렇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2군부터 시작했습니다. 밑바닥에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오래갈 수 있었지요.” 요즘 타율이 내려앉은 추신수 얘기를 꺼냈더니 “타율은 바뀌지만 타점과 홈런은 안 바뀐다”고 하면서 원 포인트 레슨을 한다. 추신수는 5월까지만 해도 타율이 3할 3푼 3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2할대로 떨어졌다. 백씨는 한국야구 최고의 이론가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타격할 때 발사 자세에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추신수는 전형적인 어퍼스윙 타자이기 때문에 밑에서 위로 퍼 올리는 타격을 합니다. 이런 유형의 타자들은 장타력을 지녔지만 체력적 부담이 크게 됩니다. 시즌 초반 체력에 문제가 없을 땐 홈런과 타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5월에는 3할대 타율과 7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수가 늘고 원정의 피로가 겹치면서 퍼 올리는 타격 자세는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 지나치게 넓은 보폭, 어깨가 먼저 열리는 자세에서는 결코 좋은 타격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살인적인 경기 스케줄을 잘 견뎌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홈런보다 정확도를 높이는 쪽이 추신수에게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트를 쥔 손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몸쪽 공을 좀 더 공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현진 선수에 대해서는 어떤 지적이 나올까. “류현진도 원정 경험을 잘 견디는 것이 관건이다. 팬들은 이기길 바라지만 상대가 있다. 프로는 냉정하며 그에 따른 정신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야구 중독자가 돼야 한다. 심한 중독자가 돼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뛰고 있는 이대호 선수에 대해서는 “성격도 좋고 비교적 적응을 잘하고 있다. TV를 통해 경기를 쭉 지켜보고 있다”면서 일본 감독들이 대부분 후배인데 만나면 힘도 좋고 수준이 높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의 수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본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야구 인생 50년을 회고한다. “처음 일본 갔을 때 일본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까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야구 중독자가 되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방망이에 무거운 쇠붙이를 붙이고 계속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그걸 개발했는데 요즘에는 많은 후배 선수들이 그렇게 하더군요. 결국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후회 없는 야구 인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4할 타자는 미국에 4명이 있고, 일본에는 없다. 그만큼 그의 기록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 투수의 대결에서 누가 유리할까 물었더니 “그건 모릅니다. 잘 맞은 공도 수비수가 잡아 버리면 아웃되는 것이 아니냐”며 웃는다. 그의 고향은 평북 철산이다. 아버지가 중국에 사업차 갔을 때 출생했고 3세 때까지 중국에 살다가 북한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해주를 통해 바닷길로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 때 피란을 갔고 졸업은 효제초등학교에서 했다. 중학교는 성동중학에 입학했다가 경동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친형의 권유로 전학을 했다. 그가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경동고에 진학하면서 야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광복 후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홈런을 친 선수가 됐다. “그때부터 야구에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질은 별로 없었어요. 스포츠는 반복 연습입니다. 집에서 타이어 매달고 연습하다 보니 팔에 힘이 생기더군요. 시간만 되면 공을 쳤죠. 나중에는 저절로 신 나더라구요.” 그는 1983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리고 2002년 롯데 감독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다. 지금은 건강 관리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앞으로 야구 아카데미를 만들어 야구팬, 그리고 야구 꿈나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1982년 당시 4할 1푼 2리를 기록했던 방망이를 들고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백인천은 누구 1943년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시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북한 철산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성동중학에 입학했으나 경동중학으로 전학하면서 야구 방망이를 잡게 됐다. 1960년 경동고 시절 서울운동장에서 개장 이후 첫 홈런을 쳤다. 196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쑹산(宋山)구장 개장 첫 홈런 타자가 됐다. 1963년 일본 프로야구 진출 1호 선수가 됐다. 일본에서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이때 기록한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80경기)은 현재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이후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9년과 2006년에는 각각 SBS와 tvN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건강 관리에 힘쓰면서 한국 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영민 타격상(1959년),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1962년), 일본 프로야구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1975년),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 출장(1967, 1970, 1972, 1979년), 한국 프로야구 최우수감독상(1990년) 등을 받았다.
  • 상처 극복한 성소수자의 삶, 1인 35역으로 그리다

    상처 극복한 성소수자의 삶, 1인 35역으로 그리다

    # 미국 록음악에 빠져 살던 동베를린의 청년 한셀은 미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다. 어느 날 자신의 ‘미모’에 반한 미군을 만나고, 그는 한셀을 아내로 삼아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미군의 뜻에 따라 이름을 ‘헤드윅’으로 바꾸고 얼떨결에 성전환수술을 받지만 여성의 몸 대신 그에게 남은 건 ‘성난 1인치’.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는 미군에게 버림받고, 한때 사랑했던 소년 토미에게도 버림받는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강렬한 록 사운드로 토해내는 그는 ‘로커 헤드윅’으로 미국을 누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의 소년 로다리는 15살 때 우연히 이모의 옷을 입으면서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여장을 하고 살아온 그는 유대인들이 베를린에서 쫓겨난 뒤 그들이 쓰던 가구를 모으고, 분단 뒤 동독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불태운 집에서 가구를 모은다. ‘샤로테’라 이름을 바꾼 그(그녀)는 이렇게 모은 가구와 시계, 골동품 등으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 매일같이 낡고 닳은 가구를 깨끗하게 닦는 게 그의 일상의 전부다. 2005년 국내 초연 이후 지금까지 1300여회 이상 공연됐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진 뮤지컬 ‘헤드윅’은 뮤지컬 마니아가 아닌 이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동베를린에는 헤드윅과 비슷한 삶을 산 ‘샤로테 폰 말스도르프’가 있었다. 더군다나 실존 인물이다. 그의 일생을 다룬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가 다음 달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2003년 뉴욕에서 초연된 후 퓰리처상과 토니상, 오비상 최고작품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연이다. 나치 독일과 구 동독을 지나 통일 독일에 이르기까지 여장 남자로서 멸시와 억압을 받으며 살아온 ‘샤로테’의 일생을 그렸다. 미국 작가인 더그 라이트가 그의 일생을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그의 박물관을 찾아 샤로테를 인터뷰하면서 시작되는데, 실제로 원작자 더그 라이트의 취재 내용을 기반으로 해 사실성을 더했다. 수녀처럼 검정색 모자와 원피스, 진주 목걸이로 몸을 꽁꽁 싸맨 샤로테는 화려하게 치장한 헤드윅과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특히 성소수자로서 아픔을 달래는 방식이 상반된다. 샤로테는 버려진 가구와 골동품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쌓인 먼지를 닦으면서 억압 속에 살아온 유대인과 성소수자 등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이들의 역사를 곱씹는다. 헤드윅처럼 부딪치고 싸우기보다 내면에 천착하면서 아픔을 승화한다. 그러나 샤로테는 연약한 듯 꿋꿋하다. 서슬 퍼런 구 동독에서도 성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이들을 달래고, 자신을 조롱하는 매체들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고물이나 마찬가지인 가구들을 지켜내며 억압적인 시대를 견뎌낸 샤로테는 음악과 사랑, 자유를 찾아 걸어가는 헤드윅과 결코 다르지 않다. 작품은 1인극이지만 ‘1인 35역’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샤로테를 인터뷰하는 더그와 그에게 성정체성을 확인시켜준 이모, 그를 감시한 슈타지 요원과 그를 취조하듯 질문을 퍼붓는 기자 등 모든 인물을 배우 혼자서 연기한다. 모노드라마인 데다 복잡한 액자식 구성 탓에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으나 독특한 형식과 탄탄한 대본 덕에 내용 이해가 어렵지 않다. 극단 동 대표인 강량원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고, 남명렬과 지현준이 샤로테로 열연한다. 전석 3만원. (02)708-5001.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법원 “민청학련 제정구 前의원 유족에 8억 배상”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의 유족에게 국가가 8억원을 배상하라고 법원이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한규현)는 제 전 의원의 부인 등 유족 8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수사관들이 제 전 의원을 체포·구속하면서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수사과정에서도 폭행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허위사실을 언론에 공표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국가배상법에 따라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민청학련 사건 조사 결과가 발표된 2005년으로부터 소멸시효 3년이 지났다는 피고 측 주장에 대해서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15일 TV 하이라이트]

    ●수요기획(KBS 밤 11시 40분) 일본 최고의 극작가 정의신은 일본 문화계에서 말 그대로 ‘핫’한 인물이다. 고향인 히메지의 조선인 부락 신작로는 ‘연극의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히메지 문학관에선 그의 육필 원고와 대본이 전시돼 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일본 문화의 자랑, 정의신. 하지만 그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거부하고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각시탈(KBS2 밤 9시 55분) 슌지는 온갖 멸시와 부당함을 견뎌내면서 경찰서에서 버티는 강토의 모습을 예사롭지 않게 느낀다. 라라를 찾아간 슌지는 각시탈을 놓친 경위를 조사하고 무언가 숨기는 듯한 라라의 태도에 석연찮음을 느낀다. 한편 아버지 담사리의 편지를 받게 된 목단은 담사리가 양백선생과 함께 곧 경성에 온다는 소식을 강토에게 전한다. ●일본을 춤추게 한 스님, 김묘선(MBC 오후 6시 50분) 일본 절의 주지는 단가를 관리하며 마을의 제사와 장례를 책임지는 일을 도맡아 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단 한 번도 여성이 주지가 된 적이 없다. 프로그램에서는 한국 무용가인 김묘선이 자신을 거부하는 일본 사회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며, 외국인 여주지로 마을의 존경받는 큰 어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도산 안창호(KBS2 오전 11시) 8·15 아침 도산 안창호의 말들이 가슴을 찌른다. 60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혁명가, 학생과 청년교육에 몰두한 교육자, 국민의 심금을 울린 탁월한 웅변가, 민족의 원대한 이상을 제시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도산 안창호. 민족 수난기 모든 애국애족 청년들의 정신적 멘토였던 도산의 삶을 되돌아본다. ●헬스 투데이(EBS 오전 6시)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를 이용해 골다공증 예방을 위한 근육 강화 운동을 준비했다.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면 무릎과 허벅지 근육이 강화되고 골다공증으로 척추가 굽어지는 증상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의자 뒷부분을 잡고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려 허벅지 뒤쪽 근육까지 강화할 수 있는 동작도 배워 본다. ●18세 이선경, 독립운동의 꽃으로 지다(OBS 밤 10시 55분) 독립운동가 이선경은 꽃다운 열여덟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동포의 아픔과 조국의 굴욕을 씻기 위해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국 광복의 초석을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그동안 구체적인 증언과 내용 등이 확인되지 않아 역사학계로부터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18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에마 보바리라는 여인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 발표되었다. 작품은 즉각 가족주의와 금욕적 도덕관을 내세우는 신흥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다음 해, 제2제국의 권위주의적 재판부는 풍기 문란과 종교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이 작품을 기소한다. 유부녀가 노골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불륜을 저지른 여인의 종부성사를 장님의 상스러운 노랫소리가 화답하는 등 작품 전체가 간통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마지못해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변호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마담 보바리’와 작가 플로베르는 예술 창작을 암암리에 규제해 오던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위를 폭로했다. ●아버지, 나는 부르주아가 싫어요 플로베르는 1821년 소도시 루앙의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장력 있던 조숙한 소년은 자신의 재능이 문학으로 꽃필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방 부르주아였던 닥터 플로베르가 보기에 이 똑똑한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딴 데 있었다. 파리의 법대에 들어가 입신출세하고 부와 명예를 얻는 것! 1820년 왕정복고시대에 태어난 플로베르는 1880년 죽을 때까지 왕정, 공화정, 제정이라는 각종 정치 체제의 변혁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떤 체제가 되었든, 사회의 주인공은 부르주아였다. 온갖 정치적 변혁의 한가운데에서 이 계급은 금융과 산업을 주도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소년 플로베르는 루앙의 시민들이 각자의 이권과 보신을 위해 질투에 찬 중상모략을 일삼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다들 온순하고 근면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비정한 야욕이 도시에 넘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부르주아거나, 부르주아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거나. 청년 플로베르는 부르주아라는 말을 특정한 계층에만 국한해서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은 하층계급 안에서도 의사나 변호사 같은 번듯한 직업을 갖고, 돈 있는 가문과 결혼하고, 사교계에 나가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부르주아의 삶이 하나의 꿈으로 확실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란 재정상태가 아니라 정신상태의 이름이어야 했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미덕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부르주아’라는 말에는 프록코트를 입은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작업복을 입은 부르주아들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써 보냈다. 플로베르는 1843년과 1844년 연이어 일어난 치명적인 신경발작을 겪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아예 부르주아적 삶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법대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포기하고 문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학계 안에서도 부르주아적 태도가 판 치고 있었다. 작가들은 기존의 문학잡지나 아카데미를 부와 명예를 향한 도약대로 삼아 그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의 격변기마다 부화뇌동하면서 사회문제, 대중의 교화, 진보, 민주주의 같은 판에 박힌 소리만 되풀이했다. 사실주의를 내세우면서 서민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하층민들을 동정할 뿐이었다. 플로베르는 이들을 보며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길은 분명했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버릴 것!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것! 플로베르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오직 문학에 자신의 삶을 다 바치기로 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이런 플로베르를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모시며 평생 그의 작품을 가까이 했다. ●“나는 보바리다”-자살 장면 쓰면서 구토 플로베르는 본격적인 첫 작품을 구상하면서 안토니우스라는 성인에게 끌렸다. 안토니우스는 250년 무렵 이집트 북부에서 태어난 기독교 초기의 성자다. 그는 사막에서 고행하며 각종 이교도의 신들과 자기 안의 탐욕, 질투, 회의에 맞서 신앙을 지켜냈다. 플로베르는 이 성인의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끊임없이 유혹을 마주하면서 수도해야 하는 성인처럼, 그 자신도 계속해서 부르주아적 태도와 취향을 마주하며 글을 써야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그런 적극적 대결이 필요한 일이었다. “진주는 조개의 병에서 생기는 것이라지만 문체는 아마 그보다 더 깊은 고통을 통해 나오는 것일 거요. 예술가의 삶, 아니 예술 작품의 완성도 그렇지 않겠소? 거대한 산을 오르는 일처럼 말이오. 얼마나 집요한 의지가 필요하겠소! 그 산 정상은 창공 속에서 순수함으로 빛나고, 그 엄청난 높이는 공포를 가져다주지. 우리는 더듬더듬 바위에 손톱들을 찢겨가면서, 외로움 속에 눈물을 흘리며 계속 걸어가지. 우리는 욕망의 백색 고통 속에서 소멸하는 거요. 정신의 격류가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얼굴을 태양으로 향한 채!”(편지, 1853년 9월 16일) 제목은 ‘성 앙투안의 유혹’. 그는 3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의 이야기는 서정, 인물의 움직임, 구성 어느 것도 새롭지 않았다. 초고를 본 친구들은 상투적인 반복과 무질서한 구도에 진저리를 쳤다. 플로베르는 성 앙투안을 쓴다면서 결국 자신의 의식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신도 타인의 삶, 다른 존재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여느 부르주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플로베르는 작가의 개성과 정념이 지배하는 문학은 예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플로베르는 예술이 제2의 자연과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불가해한 것. 숲 속에 살아 있는 수많은 나뭇잎과 초록의 속삭임처럼 무한하면서도 준엄하게 존재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작가란 자신의 경험과 정념을 지움으로써 이 제2의 자연을 창조하는 존재여야 했다. 플로베르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기술하는 글쓰기, 그것이 바로 작가 주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는 나밖에 모를 거요. 주제, 인물, 효과 등등 모든 것이 나의 바깥에 있거든.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오. 예술과 예술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편지, 1852년 7월 26일) 그렇게 해서 플로베르는 자신과는 출신도, 성(性)도, 교육 배경도 완전히 다른 시골 유부녀 에마 보바리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는 에마와 그녀 이웃들의 속물주의가 주는 혐오감을 견디며, 작품 속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6년 동안 쉬지 않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에마가 비소를 먹고 자살하는 장면을 쓰다가 구토를 하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종종 “나는 에마 보바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도승처럼 철저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소멸시키고 에마 보바리라는 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시대의 허위와 대결 생애 마지막에 플로베르가 도전한 것은 두 명의 필경사 이야기다. 최신의 근대 학문을 다 섭렵해 보기로 한 부바르와 페퀴셰. 하지만 저명하다는 원예학, 지질학, 의학, 고고학, 심리학, 교육학 안에는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각각의 지식들은 현실에 적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정보를 추상적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근대 지식의 한계에 대항하면서 진리와 미,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작품의 부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전서’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위해 1500권이 넘는 학술서들을 철저히 검토했다. 근대적 학문에 맹종하면서 인류의 진보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의 인생에는 그 어떤 극적 드라마도, 감동적인 사건도 없다. 오직 실험과 논증이 백과사전처럼 한없이 펼쳐진다. 오락으로 읽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논리적인 대화의 연속이었다. 한가한 부르주아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역사소설, 연애소설과 같은 소설의 전통적 구분은 이 작품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미완으로 붙이게 된 뒷부분 개요에서 서술 방법과 작품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다. 소설 안에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해석하다니! 상상물인 소설과 현실의 작가가 뒤섞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플로베르는 19세기 문학의 온갖 관습을 무너뜨려 버렸다. 이 최후의 싸움은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근대 학문의 어리석음과 부르주아 문학의 허위와 대결했다. 오선민(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1) 근대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1) 근대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근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불과 10년 전까지도 일본인들은 매일같이 1000엔권 속에 그려진 그의 얼굴과 만났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발표한 기간은 1905년 그의 나이 38세부터 49세가 되던 1916년까지 불과 12년 동안이다. 그는 천부적 재능으로 글을 썼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래의 강연에서처럼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을 썼을 뿐이다. 작가에게는 소세키다움을,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들 자신을 발견하기를 촉구하는 문학! 무엇이 소세키를 이런 자기 발견의 세계, 굴착(掘鑿)의 글쓰기로 이끌었을까. “여러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곡괭이로 광맥을 파낼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맞닥뜨릴 때까지 나아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 교육을 받은 사람의 평생의 임무로서 혹은 10~20년의 주요한 작업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아아, 여기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간신히 파낼 수 있는 광맥을 발견했다! 이와 같은 감탄사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토해낼 때,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자신감이 그 외침 소리와 함께 문득문득 머리를 쳐들고 오는 것은 아니겠습니까?”(학습원 강연 ‘나의 개인주의’, 1914년 11월 25일) ●‘런던의 원숭이’ 두 개의 유령을 만나다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에 태어났다. 이 해는 일본이 천황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국가 일본으로 거듭나던 해다. 소세키는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좋아해서 두루 한서를 읽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서양의 과학 지식과 사상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 고등교육을 시스템을 재편해 갔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소세키는 평소 문학을 좋아했던 장기를 살려 영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3세의 나이에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소세키는 처음부터 자신의 유학이 탐탁지 않았고 불안했다. 그가 받게 될 국비 유학은 청일전쟁(1895) 승리에 따른 배상금을 바탕으로 기획되었고, 일본 문부성은 유학생들이 최신의 제국주의 이론과 내셔널리즘을 습득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자신의 영국 런던 유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소세키는 1900년 9월 런던에 도착해서 두 가지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첫 번째는 영문학이란 유령이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학의 영문학과 수업을 들으며 최신의 영문학을 연구하려 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소세키는 영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지식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학의 수업에서는 영문법과 문학가의 약력을 겨우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영문학이란 읽으면 알 수 있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세키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문학이란 한문학의 ‘좌국사한’, 즉 ‘춘추좌씨전’, ‘국어’, ‘사기’, ‘한서’처럼 국가의 성쇠와 역사, 그안에서 활약했던 인간을 둘러싼 담론이었다. 소세키는 런던에서 한문학과 영문학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어느 곳에도 영문학이 한문학보다 낫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과 유럽의 영국은 각자 다른 필요에 의해 다른 식의 문학을 발전시켜왔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문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영국의 변두리, 영국의 식민지, 영국을 동경하는 비서구 지역 출신들뿐이었다. 영문학은 실체도 없으면서 이들 불쌍한 열등 민족들에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퇴화론’이라는 유령이다. 당시 런던의 학계와 신문기사들은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논리로 무장한 사회진화론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히 영국인들은 퇴화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가 떠나 온 일본에서는 오직 서양을 닮기만 하면 진화한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미 제국주의의 정점에 서 있던 영국에서는 몰락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했다. 막스 노르다우가 쓴 ‘퇴화론’이 1894년 영역되어 1895년에 크게 유행했는데, 이 책은 라파엘 전파나 상징주의 등의 세기말 예술이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인간종의 퇴화가 진행되는 징조라고 경고했다. 소세키는 강의실과 런던 거리 곳곳에서 자신을 흘겨보는 무수한 멸시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은 자신의 키 작고 노란 얼굴, 얽은 곰보자국을 퇴화의 증거로 보고 있었다. 소세키는 자신을 원숭이 취급하는 백인들 앞에서 서양의 최신 학문이란 특별한 지위에 있는 특정한 인종만을 위해 작동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연구와 글쓰기 - 유령들과 싸우는 방법 소세키는 사회진화론이 낳은 이 두 유령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소외와 열등감을 떨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런던의 하숙방 안에서 최신의 철학서와 과학서를 읽으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다움을 찾는 것에 출구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설사 그것이 세상에서는 인간사에서 퇴화의 증거로 받아들여질지라도! 소세키는 곧바로 두 개의 유령에 대적할 두 개의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첫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당대 최첨단의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달성한 성과에 비추어 근대 문학이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났고 발달했고 그리고 퇴화할 것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은 1년 여의 유학 생활을 오로지 하숙방 안에서 각종 과학, 철학 등의 서적을 읽는 데에 몰두했다. 덕분에 런던에 유학하던 다른 일본인들 사이에는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세키는 일본인들에게마저 퇴화의 상징이 된 것이다. 소세키는 이처럼 퇴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애쓰는 태도를 ‘자기본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에서 이 태도를 강조했다. 둘째 전략은 자기본위의 길을 모색하는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이다. 한문학도 영문학도 아니고 소세키만이 쓸 수 있는 문학!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귀국 직후 발표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1906.8)는 그가 품고 있던 위의 두 전략이 고스란히 표출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이름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고등 교육을 받았지만 별반 하는 일도 없이 집안에서 소일하는 주인 선생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1905년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 열도가 들끓었던 해다. 신문 저널리즘은 날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찬미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소세키는 한가하고 찌질한 선생들이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세계를 그려보임으로써 사회진화론의 승전보에 맞서려 했다. 1907년 5월 소세키는 ‘대학이 지식을 사고파는 것이나 소설가가 글을 사고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동경제국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장편을 연재했다. 대단한 집중력과 성실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후’(1909), ‘피안 지날 때까지’(1912), ‘행인’(1912~13), ‘마음’(1914), ‘유리문 속에서’(1915), ‘미찌쿠사’(1915), 그리고 미완작인 ‘명암’(1916) 등 작품 안에는 진화론적 고등교육 안에 갇혀서 자기 마음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나온다. ●근대인의 마음을 파헤치다 때때로 인물들의 얼굴에는 곰보자국이 있고, 또 많은 경우에 주인공들은 연애 후에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모두 퇴화의 증거다. 소세키는 이들이 자기 마음의 진실을 질문하기를 유도하면서 결국 거짓된 욕망과 비겁한 자아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소세키에게 자기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사회가 칭찬할 만한 대단한 개성이나 새시대에 맞는 모범적 인간성을 구축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자 자기만의 인생을 살라! 그 무엇보다 자기답게 살라! 소세키는 우리 각자가 지금 갖고 있는 부와 명예, 우정과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들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 자기본위를 위한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자신을 직시하는 일에 희망을 걸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제국주의와 같은 타인본위의 삶을 거부한 수많은 동아시아의 청년과 지사들에게 독립과 자유를 꿈꾸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오선민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민족성 지키는 재일조선인 이해를”

    “민족성 지키는 재일조선인 이해를”

    “재일조선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정대세 선수 때문에 재일동포의 현실이 일부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한 사람 있다. 나고 자란 곳은 일본, 본적은 제주도, 국적은 조선. 남한은 고향이고, 마음 속 조국은 북한이다. 재일동포 3세 리정애(35)씨 얘기다. 리씨는 최근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임소희 그림, 보리 펴냄)를 펴냈다. 2007년부터 2년 동안 월간지 ‘민족21’에 연재됐던 내용에다 못다한 얘기들까지 묶었다. ●한·일 모두 미귀속… 사실상 무국적 1945년 광복 뒤 일본은 재일동포를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정확히 조선적(朝鮮籍)이라 했다. 말이 좋아 조선적이지 실제는 무국적이나 다름없다.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고, 한국 국적을 얻지도 않는 동포들의 현실이다. 조선적에도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북한을 선택하고 싶지만 일본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못하는 경우, 그리고 통일된 조국을 바라며 어느 한쪽도 택하지 않는 경우다. 200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해마다 양국을 오가며 고향 땅에서 살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리씨의 기록은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리씨는 자신의 조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 말한다. 색안경을 꺼낼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그러나 리씨 역시 이 땅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인기 드라마 ‘추노’에 나오는 ‘최장군’ 팬이다. 일본인을 닮았다는 말에 상처받는다. 모국어는 일본어지만 우리말을 하는 게 더 좋다. 서툴다거나, 북한식 억양을 불편해하면 또 상처받는다. 조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어온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다. 차별과 멸시가 두려워 대부분 동포들이 ‘조선’이라는 말을 빼고 ‘자이니치’(재일)라고 줄여 표현하는 상황이 슬프다고 하는 리씨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조선적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재일동포들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인고의 세월을 체류기를 통해 접하다 보면 그가 국적을 바꾸지 않는다고 탓할 수 없는 까닭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리씨는 “(처음에는) 조선적을 지키는 게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제국주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해야 할 당연한 일로 생각했지만 정답 같은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조선-한국 국적 1호 부부 한편 리씨는 지난 10일 동갑내기 한국 청년 김익씨와 백년가약을 맺으며 ‘조선 국적-한국 국적 1호 부부’가 됐다. 통일이 되면 이룰 수 있는 여러 꿈 가운데 하나를 미리 앞당겨 성취한 그로서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 셈이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태풍 므란티, 중국 상륙…소멸시 국내 집중호우 예상

    태풍 므란티, 중국 상륙…소멸시 국내 집중호우 예상

    중국에 상륙하는 제10호 태풍 ‘므란티’가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MBC 뉴스는 “기상청은 9일 오전 타이완 부근해역에서 발생한 10호 태풍 ‘므란티’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며 “9일 밤부터 11일 오전 사이 중부지방은 천둥, 번개가 치고 시간당 30mm 안팎의 폭우가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기상청은 “므란티가 중국 내륙으로 상륙한 뒤 소멸하면서 우리나라 부근으로 많은 양의 수중기가 유입돼 오는 10일부터 국지적으로 집중호우가 내리는 곳이 있겠다”고 전했다. 이어 “12일은 중부지방, 13일은 남부지방에 비가 집중돼 총 강우량이 200mm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며 폭우에 대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사진 = MBC 뉴스 방송 화면 캡쳐 서울신문NTN 뉴스팀 기자 ntn@seoulntn.com ▶ 유리, ‘절친’ 백지영 란제리쇼 응원갔다 "찍혔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성기노출?…경호원이 성희롱 혐의 고소▶ 남규리, 교복사진 공개...네티즌 "인간방부제 인증" ▶ ‘용광로 추락사’ 용광로청년 추모시, 네티즌 눈물 ▶ 브래드피트, 22세 승무원 모델과 기내 ‘섹스스캔들’▶ 최은주 "쇼핑몰 사건 가해자 L씨, 현재 강남 무당"
  • [사설] 퇴직공무원 재취업도 공정잣대 들이대야

    정부 부처의 고위 공무원이 퇴직후 산하기관으로 옮기는 ‘낙하산식’ 재취업이 여전하단다. 국회 보건복지위 정하균(미래희망연대) 의원이 15개 부처로부터 자료를 받아 그제 공개한 내용을 보면 지난 5년간 장·차관을 비롯해 1∼3급 공무원 259명이 산하기관에 재취업했다. 이들 고위공직자들이 받는 평균연봉도 927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한해 50명이 넘는 고위공직자가 자리보전식 일자리를 받아 억대연봉을 챙기는 셈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과 실직자가 넘치는데 공직사회엔 제식구 봐주기와 철밥통 관행이 여전하니 부끄럽다. 낙하산식 인사의 폐해는 두말할 것 없이 조직의 기강·사기며 효율성 저하일 것이다. 국민혈세를 받아 살며 운영하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이라면 더욱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의 모범을 보여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우리 공직사회에 봐주기식 낙하산 인사며 회전문식 재취업이 만연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인정할 만한 전문성과 능력을 갖춘 고위 공직자의 산하기관 채취업까지 문제삼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으로 모셨던 공직자가 버티고 있는 산하기관에 대한 정부 부처의 관리감독이 제대로 될 리 없다. 부실·방만 경영과 줄서기 인사의 폐단에 대한 우려가 큰 것이다. 적자경영을 하면서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노조 입막음을 위해 타협을 일삼는 공기업·공공기관이 수두룩하다. 민간기업·업체들조차 고위공직자 모시기에 혈안이 된 것도 방패막이의 방편임을 부인키 어려울 것이다. 공정한 인사와 엄정한 감독·관리없는 정부·공직사회의 혁신과 경쟁력 확보를 기대하기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고위공직자라도 민간인과 투명하게 경쟁하고 공정하게 뽑을 수 있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퇴직 공무원들의 전문지식 활용이란 허울좋은 구색부터 버려야 공직사회의 인사원칙과 운영이 제대로 설 것이다. 먼저 고위 공무원의 유관기관 재취업 조건과 범위를 더 엄격하게 제한하고 공과를 냉엄하게 따져 묻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공무원의 제식구 봐주기식 온정주의와 철밥통의 안이한 자세는 공정한 사회를 앞당기기는커녕 멸시와 조롱만 더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민간인피학살 유족 ‘연좌제 고통’

    민간인피학살 유족 ‘연좌제 고통’

    1962년 1월29일 혁명재판소. 경주피학살자유족회 회장 김하종(당시 28세)씨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6·25전쟁 때 우리 국군과 경찰이 선량한 국민을 살해한 것처럼 왜곡하고 위령탑 건립 등을 주장해 북한 괴뢰의 목적사항을 찬양동조했다.”는 것. 김씨는 오른쪽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며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틀 후 징역 7년형이 선고됐다. 김씨의 고향인 경북 월성군 내남면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민간인 학살로 얼룩졌다. 46년 조선공산당의 선동으로 ‘대구 10·1 사건’이 터지자 대한청년단이 조직됐고, 이들은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며 민간인을 마구 살해했다. 49년 7월7일(음력) 김씨의 일가친척 22명도 잠을 자다가 총살당했다. 이 가운데 열살 미만의 어린이가 8명이나 됐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이모(당시 28세)씨가 소 판 돈을 약탈하고 죄를 은폐하려고 저지른 짓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은 청년단이 공비토벌을 돕는 터라 수수방관했다. ‘가해자’ 이씨는 이후 자유당의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4·19 혁명이 터지자 세상이 뒤바뀌었다. 60년 5월27일 국회가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조사를 벌이고 검찰이 살인죄로 이씨를 구속기소했다. 민간인 학살사건 재판이 최초로 열린 것이다. 검찰은 “이씨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독일 친위대 중령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에 버금간다.”고 밝혔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앉혀 놓고 총살했다.”는 목격자의 법정증언이 잇따랐다. 61년 3월6일 1심 재판부는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면서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진상 규명 활동은 ‘특수 반국가행위’로 바뀌었다. 경주유족회는 해산되고, 김씨는 불법 구금됐다. 경상남북도·경산·마산·창원·밀양·금창·동래유족회도 마찬가지였다. 유족 28명이 기소돼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경찰은 민간인 희생자가 묻힌 합동묘를 없애고 위령비도 정으로 지워 훼손했다. 살인죄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가해자’ 이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유족회 간부의 처벌을 지켜본 증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일부 유족은 허위 증언의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징역 7년형을 선고받은 김씨는 2년간 복역하고 63년 12월16일 사면됐다. 그 후로도 경찰의 감시가 이어졌다. 취업할 수 없어 농사를 짓고 살다가 78년 중등학교장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신원특이자’라고 교육청에서 승인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민간인 피학살 유가족은 김씨처럼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형사처벌을 받고 신원조회로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연좌제로 피해를 당한 301명의 사례를 발표했다. 공무원·사관학교 임용시험에서 탈락하고(73명), 취업이나 승진 때 불이익을 받았다(44명). 출국도 불가능했고(43명) 신원조회에 걸려 부당한 대우(91명)를 받았다. 김씨는 “집단학살된 가족의 생사 확인을 반국가활동이라고 사형까지 선고하고 ‘연좌제’로 수십 년간 감시해온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5년)가 지났다며 배상을 거부하는 게 상식에 맞느냐.”고 반문했다. 글 사진 대구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