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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는일 안되는일이 분명해져야(박갑천칼럼)

    『되는일도 없고 안되는일도 없다』­그동안의 우리사회 생리를 자조적으로 표현해온 말 아닌가 한다.말이 되는것도 같고 안되는것 같기도 한 표현이다.그러나 우리사회의 실제가 그랬다.되어야 할일도 돈과 뒷줄이 없으면 힘이 들고 안될것 같은일도 돈을 쓰거나 뒷줄이 단단할때 되는것 아니었던가. 의사표시가 자유로워진 정부가 들어선 다음 집단이기주의네,지역이기주의네 하여 아드등거리는 사단이 많아진 맥락도 거기서 찾을수 있다.못이뤄낼것 같은 일도 목청을 높임으로써 이뤄내는 사례를 경험해오지 않았던가.제아무리 소리를 높이고 다수의 기세로 밀어붙여도 안될일은 안된다고 할때 악장칠 소지는 없어진다.그런데 그게 아니었다.안될일도 되는수가 있었기에 소리를 높여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것이다. 조선 인조조 정묘호란때 청나라군사가 평안도를 함락시킨다.평안감사는 윤훤이었는바 그가 지키지 못하고 도망간 죄를 군법으로 다스리자고 대간들이 청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그런데 윤훤의 조카 신지의 아내인 정혜옹주가 입궐한길에 시삼촌의 죄를 사하여주도록 임금에게 간청했다.그는 임금의 고모였다. 그게 역효과를 낸다.대간들의 청에 윤허를 내려 죽음에 이르게하기 때문이다.조정일은 공론에 부쳐야 하는데 고모가 나를 만난다음 윤훤의 죽음이 용서된다면 사정을 두었다 할것이 아니냐는게 이유였다.이를 두고 인선장대비는 공주들에게 경계하는 사례로 삼고있다(죽헌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안될일을 옹주가 들어 되게 할수는 없었다는 말이다.될일이라면 옹주가 나서지 않아도 되어야한다. 회재 이언적도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엄정한 강기가 중요한 것임을 뼈지게 강조한다.­『대저 어진자가 있는데는 은연히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있는 형세가 되고,공도가 게양된 곳은 일월이 중천에 밝은것과 같아서 여우와 삵이 넋을 빼앗겨 도망가 숨고 음예한것이 햇볕에 흩어져 없어지는것과 같으니…』(회재집 권12 홍문관상소중에서).확고한 기강을 세워 흐트러짐이 없게 해야겠다는 뜻이었다. 될일은 잔재주 안부려도 되고 안되어야 할일은 공주의 아버지가 들어도 안되는 사회기강을 세워나가야 한다.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질­.그래야 착하게 부지런하게 사는 보통사람들의 기가 산다.불신의 벽은 그때 헐린다.비로소 사람들은 참다운 주인의식을 갖게된다.지금 우리는 그길로 들어서고 있는가.
  • 광개토왕비(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0)

    ◎비문 「내도해 파」해석·날조설로 논란/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위가 석회 바르고 새글자새겨” 주장/“「후→위」「불공인」→「내도해」로 바꿔치기”/한국/“고구려가 바다건너 위격파” 해독/일본/“위가 백제·신라 지배했다” 억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멸망(668년)한 뒤 1천2백여년동안 세인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그러나 이 비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순간에 한국·일본·중국의 사학계를 뒤흔들어 놓고는 1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비의 베일을 벗지 않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왕의 사후 2년인 414년 세워졌다.자연석을 깎아 만든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1천7백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가 1880년 무렵 청나라 농부에 의해 발견된 뒤 맨 처음 비문을 연구,발표한 측은 일본 육군참모본부였다.참모본부 소속 사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중 광개토대왕 5년(396년)의 치적을 새긴 부분,흔히「신묘년기사」라고 부르는 32자를『백잔·신라 구시촉민 유래조공 이위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나 이위신민』(□는 해독불능)이라고 해독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백잔(백제)신라는 옛날부터(우리=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등을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즉 일본이 4세기말 한반도에 진출,백제·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발표는 당시 한반도및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 사회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이후 부분적인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일본 학계는 현재까지도 이 학설을 정설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 주장에 대해 국내 학자의 반론은 상당히 뒤늦게 제기됐다.1930년대 말 정인보가 일본측이 해독한「신묘년기사」32자의 정확성은 인정하되 그 해석을 전혀 달리하는 새 학설을 내놓은 것이다.그는 기사중「내도해 파(바다를 건너 격파하다)」부분에 대해,그 주체를 위라고 해석한 일본측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비문의 내용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것이므로「내도해 파」라는 동사의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로 봐야 한다』면서「이위…」부분을「왜가 신묘년에 쳐들어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를 쳐 백제·신라와 함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정인보설은 그 뒤로 남북한 학계의 비문 해석에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 사학계를 정작 놀라게 한 폭탄선언은 1972년 일본에서,한국인 학자에 의해 나왔다.재일사학자 이진희가「광개토왕릉비의 연구」라는 저서에서『비문을 처음 탁본한 일본참모본부가 비에 석회를 바르고 일부 글자를 바꿔쓰거나 새 글자를 새기는등 의도적으로 비문을 날조했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이진희설을 이어받아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81년『신묘년기사중「위」자는 비문에 새겨진 다른「위」자와 전혀 모양이 달라「후」를 변조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발표했다.그는 또「내도해」도「불공 인」을 바꿔치기한 것이라면서 전체내용을「백제·신라가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자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새롭게 해석했다. 한일 양국의 학설이 이처럼 맞서 있는 가운데 중국 학계도 이에 가담,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문 연구에 나서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지 1백여년.그러나 긴 세월의 무심이 섭섭했던지 광개토대왕은 후손들에게 마저 아직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
  • 중국에 첫 화가촌 탄생/북경 궁궐터… 2년새 50∼60명 입주

    ◎화풍 다양… 탈이념 순수예술 지향 북경 서북쪽 변두리 원명원이란 옛 궁궐터가 요즘들어 새삼 중국주민들의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개혁개방 바람을 타고 어느새 중국 최초의 화가마을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곳에 자리잡은 화가는 50∼60명.출신고향이나 출신대학도 대부분 서로 다르고 화풍마저 다양하다.어떤 사람은 서양화에 전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산수화만을 그리기도 하고 심지어 종교적인 영감만을 캔버스에 옮기는 사람도 있다. 이곳 원명원은 청나라 황제의 별장으로 1백46개의 크고 작은 건축물에 각종 교량과 화원·담장·회랑들로 연결되는 중국의 명물이었다.그러나 이 궁궐은 1860년 영·불연합군이 침략,보물들을 모두 약탈해간뒤 방화,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지금까지도 서구 열강침략의 생생한 증거물로 남아있다.이같은 원명원 옛터 부근에 화가촌이 생겨난 것이다. 이곳 화가들의 추천으로 화가촌 촌장이된 엄정학씨는 『우리의 화풍은 서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이상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돈벌이에 눈이어두워지는 경향에서 벗어나 순수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우리는 대학에서 어떻게 하면 이나라의 정치와 사회주의체제를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배웠고,사회에 나와서는 정치선전 그림이나 모택동초상화,광고물등을 그렸다.그래서 이름도 얻고 돈도 벌었다.대신 자기를 잃었고 예술을 잃었다.이제 우리는 여기에 모여 다시 예술을 찾고 자기자신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화가들중에는 광고회사를 차려 돈께나 만졌던 사람도 있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사람,관직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으며 돈과 명예가 보장됐던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들중에는 회사도 가족도 처자도 버린채 예술의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가출한 사람이 상당수에 달한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진정한 예술의 자유를 추구하면 할수록 부자유를 더 느끼게 되는 경향이 있다.이곳 화가들 역시 한동안 당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했으나 별다른 위법행위가 없어서 당국도 요즘은 방관하고 있는 것같다.이들이 어떤 정치적 반동그룹을 형성하지 않은채 그저순수예술에만 심취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촌의 원주인격인 이곳 농민들은 그들과 행동거지나 차림새,생활방식들이 전혀 다른 장발의 괴이한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상한 눈길을 보냈으나 요즘은 서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농민들은 이들이 들어오면서 집을 세놓아 월1백∼3백원 정도의 적지않은 돈을 만지게 되어 좋고 화가들은 이곳이 조용하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순박해서 더 좋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곳이 순수예술의 메카로 성장해갈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할것 같다.어느새 이곳에도 상업주의의 마수가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이곳에 화가들이 몰려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화랑가의 그림장사들이 자주 들락거리며 예술작품보다는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도록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4명의 여성화가중 한사람인 임목목은 『2년전 내가 이곳에 올때는 화가라곤 불과 3∼4명뿐으로 너무 조용했었다.요즘은 이곳이 유명해지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골치가 아플 정도다.차라리 이곳을 뜨고 싶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 재화는 재화될 수도 있나니(박갑천칼럼)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 것일까.세상의 어버이들 가운데는 그러나 무엇인가 물려주기는 커녕 오히려 빚만 안기고 눈을 감아버린 경우도 있다.여기서의 「빚」이란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하나는 돈같은 물질적인 빚이요,다른 하나는 불명예 같은 정신적인 빚이다.어느 것이 더 참기 어려운 것일까.사람에 따라 혹은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할 것이다. 물려주는 것도 물론 그 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동산·부동산 같은 물질적인 것과 삶의 영양소로 되어줄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이 그것이다.이 또한 어느 것이 더 값지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혹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하지만 오늘의 황금만능 시류에서는 아무래도 물질적인 것에 중점이 두어지는 것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한 우리 선인들의 가르침은 어떠했던가.정신으로서의 아름다운 덕목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쪽이었다.「명심보감」(명심보감:훈자편)부터 그러한 숨결은 느낄 수 있다.­『상자 속에 가득히 황금을 채워두는 것이 자식에게 경서한권 가르쳐 주느니만 못하고자식에게 천금을 물려주는 것이 오히려 한가지 재주를 가르쳐 주느니만 못하니라』 옛사람들은 스스로 땀흘려 벌지 않은 재화가 굴러 들어올 때 그것은 자칫 재화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진리를 외경했다.본디 부란 동전의 앞뒤 같이 부의 측면도 지니는 것이 아니던가.더구나 얻는 과정이 쉬울 때는 후자로 기울게 된다.그래서 천금을 물려주기 보다는 올바른 심성을 심어줘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실제로 심성이 성숙하지 못한 갑부2세의 가년스런 뒤끝을 적잖이 보아오고 있지 않은가. 조선조 정조때 호조판서로 있던 문신 김재찬의 어머니 윤씨가 보인 자세는 오늘에도 교훈이 된다.청나라에서 갑자기 백은 5천냥을 내놓으라 했을때 나라에서는 대책이 없었다.걱정하는 아들에게 윤씨는 2년 전에 판 집을 되사자고 한다.그집 부엌을 팠더니 명나라 연호가 새겨진 마제은 독 세개가 나왔다.그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가져왔던 것이다.윤씨는 이 집에 살때 부엌을 고치다가 이를 발견했으나 도로 묻어버렸다.어려운 살림을 꾸린 때였지만 그렇게 공짜로 얻은 부가 자식들의 정신을 해칠까 저어해서였다. 오늘의 우리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이와 다르다.코흘리개 아들·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어 놓고 있다.자식 사랑인지 재산도피 방법인지는 모르지만.많은 걸 생각케 한다.
  • 「이몽룡 양자문서」 발견/강원대 박한설교수 밝혀

    ◎조선 숙종때 작성… 예조직인 찍혀 있어/춘향전 출간시기와 비슷 “실화가능성” 조선시대 대표적 소설 「춘향전」이 실존인물을 근거로 집필됐음을 입증하는 「이몽용의 양자(양자)문서」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있다. 길이 1백11㎝,폭 73㎝의 한지에 행서체로 작성되어 있는 이 양자문서는 조선조 숙종조당시 진사인 이성구가 본부인은 물론 첩사이에도 아들이 없어 동생 이성익의 둘째아들 몽용을 양자로 삼기위해 예조에 이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강원대 사학과 박한설교수(57)가 찾아낸 이 문서는 청나라 연호인 「강희」30년 9월6일이 명기돼 있어 조선조 숙종17년(서기 1691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춘향전의 시대적 배경과 일치하고 있다. 이 양자문서에는 이성구와 성익형제 사이에 몽용을 대전에 근거해 합법적으로 양자삼는다는 서로의 진술과 집안어른 이기를 보증인으로 기록해 두고 있다. 또 이 문서에는 예조좌랑과 판서의 수결이 되어있고 7곳에 예조직인이 뚜렷이 찍혀 있는데다 마지막 부분에는 당시 동부승지 이운징이 이 일을 담당했다는 주석까지 달아 꾸며낸 문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춘향전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작품화한 것이라는 설과 근거없이 꾸며진 소설일 뿐이라는 양설이 있어 왔으나 그동안 증명이 될만한 문서가 없어 소설로만 인식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양자문서는 우선 시대적 배경이 일치하고 춘향전에서 이몽용이 외아들로 등장하며 구전설화에도 얻어다 키운 외아들의 얘기가 나오는점 등으로 미루어 문서상의 이몽용이 바로 춘향전에서 이도령으로 나오는 이몽용의 모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박교수의 주장이다. 박교수는 특히 학계에서는 춘향전의 출간시기를 영조에서 순조시대 사이(1725∼1834년)로 보고 있는데 이 이몽용의 양자문서가 그보다 조금앞선 숙종(1691년)때 작성된 점으로 보아 문서상의 이몽용이 바로 춘향전 이도령의 모델임에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보관중이던 고서(고서)더미를 지난달초 정리하다 이 양자문서를 발견했다는 박교수는 현재 춘향전을 연구하는 일부 사학자들과의 1차검증에서거의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방세옥/이연걸의 환상적인 쿵후액션(새 영화)

    쿵후무술영화의 백미로 일컬어질만큼 환상적인 액션으로 점철된 작품.특히 타이틀 롤을 맡은 이연걸의 무예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듯 전편에 걸쳐 화려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다뤄졌다.청나라 건륭황제 시절,반란을 도모하는 비밀결사인 「친지회」를 거세하려는 무인과 여기에 맞서는 무인가족의 숨막히는 결전이 무술영화감독 출신인 원규감독의 탄탄한 연출속에 펼쳐진다.남과 여,여와 여,남과 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통쿵후 대결에 유머와 로맨스를 가미,▦극의 가치를 십분 살린 이 작품에서 이연걸과 조문탁이 벌이는 일전은 압권을 이룬다.
  • 임오군란직후 창설 조선신식군대/「친군」 군복 113년만에 햇빛

    ◎한국자수박물관,학계 고증거쳐 첫 공개/두꺼운 청색모직천… 소매에 홍색띠/신분·소속 밝힌 원형 「장표」 앞뒤에 부착/“군복발전사 구명할 중요자료”로 평가 임오군란직후 창설된 조선신식군대인 「친군」병사가 착용했던 군복상의가 1백13년만에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한국자수박물관(관장 허동화)이 소장하고 있다가 9일 학계의 고증을 거쳐 처음 공개한 이 군복은 우리나라 군복변천사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청색바탕의 두터운 모직천에 홍색띠를 소매및 아래단에 댄 이 군복상의 앞·뒷면 중앙에는 지름24㎝의 원형 「장표」가 부착됐다.신분및 소속을 명기한 장표중앙에는 붉은 글씨로 「친군」,위쪽에는 작은 글씨로 「신건좌영」이라고 소속부대를 가로글씨로 표시했다.그리고 오른쪽엔 「우초F대」라고 표기했다.인쇄체인 다른 글씨와는 달리 왼쪽에 붓글씨로 「병정 김기원」이라고 군복의 주인공 이름까지도 밝혀 놓았다. 옷의 형태는 가장자리는 둥글린 깃에 앞길을 왼쪽으로 여며 겨드랑이에서 매듭단추로 고정시키도록만들었다.폼과 진동은 풍성하지만 소매부리는 진동에서 점차 좁혀 마무리해 실용성을 높였다.앞뒤 도련은 10㎝너비의 홍색모직으로 단을 둘렀는데 앞·뒷단 중앙과 옆단에는 여의무늬를 넣어 멋을 부렸다.제작방법은 대부분 손바늘질로 지어졌으나 덧붙인 부분은 재봉틀을 사용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이는 당시 궁중에 재봉틀이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이번에 발굴된 군복의 가치는 특히 「장표」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본래 군복을 소속부대별로 색깔로 구별하고 장표를 사용한 것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정도로 유서가 깊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 장표가 붙어 있는 군복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친군제도는 임오군란진압을 위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원세개(18 19∼19 16년)의 제안에 따라 고종이 조선군군제를 개편해 만든 군제.원세개는 18 82년8월 당시 조선장정 1천명을 선발,훈련시켰으며 이를 「신건친군」(약칭 친군)이라고 칭했다.이때 훈련받은 부대가 장표에 표시된 대로「신건친군좌영」이다.그러나 친군영제도는 당시 청·일양국을 중심으로한 열강의 부침에 따라 4년도 못돼 다시 개편되었고 18 88년이후는 종전의 고유군복으로 환원됨에 따라 수명을 다한 것으로 돼있다. 조선시대의 군복은 중앙군과 지방군, 군복색깔에 다른 구분법등이 사용되어 왔다.이 군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검은 두루마기에 붉은 소매를 달고 뒷솔기를 길게 째 붉은 안감을 댄 형태의 「동달이」군복에서 보다 간편하고 행동하기에 편리한 형태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 군복을 감식한 유희경한국복식문화연구원장(68)은 『지금까지 「친군」제도가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뿐 이들 병사가 입었던 군복에 관한 자료및 실물이 전무한 상태에서 발견된 것이어서 자료가치가 높다』고 말했다.또 문화재전문위원인 이강칠마사박물관장(67)은 『이번에 발견된 군복은 옷제작당시의 정치적 여건에 의해 비록 중국적 특색을 띠고 있지만 이 시대군복중 유일한 유물로서 우리나라 군복발전사를 규명할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어떻든 이 군복은 열강의 흥망에 따라 복제가 바뀌는등 정치적 곡절을 겪는 동안 우리나라 복식사에 비워져 있던 부분을 되찾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 공주 중호마을 반촌 탐방(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3)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기개가 첫 덕목” 3백년 이어온 선비정신/효종때 거유 이유태선생 후손 모여살아/“학문·덕 갖춘뒤도 때아니면 불출사” 일관/12대 종손 등 일제때도 한학공부… “학교교육보다 도리·예절이 중요” ○노인들은 상투 틀고 계룡산 산자락이 북으로 금강에 치달아 곰나루를 향해 넉넉하면서도 온화하게 팔을 벌린곳에 자리잡은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호마을의 용문서원.등용의 옛마을로 계룡의 서기를 이어받은 우리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조선 중기 당대의 거유로 명성을 높였던 초려 이유태(1607∼1684년)의 후손들이 오순도순 마을을 이룬지 3백년.반촌의 긍지를 이어온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20여가구가 모여 산다.공주시내가 지척이지만 아직도 노인들은 대부분 상투를 틀고 있으며 철저하게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선비의 기개를 가정교육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려정신의 핵심은 선비로서 불출사의 기개를 강조하는데 있다.선비는 우선 학문과 덕식을 갖추고 그 다음일단 나가면 때를 좌지우지 할수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정신이다.이를테면 진퇴를 분명히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이를 몸소 실천,인효현소종 4대왕에 걸쳐 능참봉부터 사조참판·대사헌까지 모두 39가지의 벼슬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관직생활을 한것은 28세때 5개월과 30세때 6개월이 고작이었다. 그같이 짧은 관직생활에도 불구,그는 학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 정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로서 당대 호서산림 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다.그는 금산 노동 태생으로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장년이 된후에는 사계의 아들 집과 교류하며 그들 부자로부터 예학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치국경세에 있어서는 율곡이이를 숭상했다.그에 학문세계를 율사연원으로 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초려는 병자호란후에는 덕유산중에 은거,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그후 효종이 북벌의 큰뜻을 품고 산림학자들을 불러모으자 결연히 상경하였다.그러나 조정은 시배들의 반목과 질시속에 온갖 주의주장만분분할뿐이었고 또한 청나라 사신의 위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그같은 분위기에서 친청파의 척결을 알리는 그의 논소는 조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그는 다시 낙향했다. ○대사헌벼슬 물리쳐 그후 효종이 말년에 다시 밀지로 초려를 부르니 그는 북벌을 위한 구체적 국정개혁안으로 2만여언의 장문상소인 「만언봉사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을 때였다.그러나 그해(1960년) 효종은 승하하고 뒤이어 즉위한 현종은 왕명으로 만언공사를 제출케 했다.그 내용은 위민정치를 근간으로한 군사및 내정개혁사상을 삼고있다.그후에도 현종은 초려의 경륜을 사기 위해 벼슬을 높여 불렀으며 숙종때는 대사헌에 제수됐지만 불출사의 뜻은 완강했다.『나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벼슬길 보다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공직관이었던 것이다. 초려의 강직한 정신은 오늘날 후손들에까지 그대로 전수돼왔다.노인들은 상투등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후손들에게는 현대식 학교교육도 애써 가르치고 있다.단지 일제때 일본식교육은시키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종손인 12대손 정우씨(52)와 그 또래의 집안 사람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그는 『우리 형제 다섯중 위로 셋은 학교를 가지 못했고 비슷한 나이의 사촌이나 육촌형제 가운데도 학교를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대신 그는 15세때 대학을 떼는등 한학을 공부했으며 초려의 책을 비롯,집에 보관중인 3천여권의 서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있다. 자식들에게는 초려가 남긴 유일한 친필족자글씨인 「징분항선 복례」(분한 생각을 경계하고,나쁜것은 고쳐 착하게 하고,예를 따라 좇으라)를 가훈으로 가르치며 학교공부를 시켰다.학교공부중에도 사서는 반드시 익히도록 했는데 이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큰아들 상익씨(30)는 철학교수로,둘째아들 상욱씨(28)는 한문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게 됐다. 공주향교의 전교를 지낸 정우씨의 당숙 종언씨(70)도 이웃에 산다.그가 해석하는 오늘날 선비정신의 의미는 이러했다. 『선비가 박력이 약하고 경제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고하고 고집불통으로 비쳐지는 것은 잘못입니다.현대식 교육을 받기는 받되 인간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잘살아야 하되 나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그것은 이웃과 국가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행동철학을 먼저 배우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부모나 국가지도자는 이신교자지종(몸으로 행해 가르치는 사람을 따른다)으로 자식과 백성을 가르쳐야 하고 숭조사상의 강조도 교육의 한 방편입니다.선비는 부자가 돼도 부자티를 안내고 빈궁해도 빈궁한 티를 안내야 하는 것이지요』 용문서원은 이같은 초려의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도장으로 오늘날 활용되고 있다.제사가 올려지는 사우인 명덕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에게 공개돼있다.강당인 중화당(17평)과 재실인 존성재(〃)는 초려학연구를 위해 강의실과 침실로 제공된다.연구활동을 돕기위해 현대식 입식 부엌도 설치돼 있고 이동식 화장실,난방도 완비됐다. ○내사책 등 유품 전시 또 유물전시관인 징원당(16평)에는 초려의 저서와 함께 임금이 내린 내사책,이씨 가문의 재산분금록,9대손 성암철영의 항일옥중일기등과 초려의 상아호패와 제사날을 기록해 놓는 기일첩,과거문제 요약집인 강경첨통등 많은 유품들도 전시,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용문서원 건립및 유지 보수를 맡고 있는 사단법인 이초로 기념사업회의 이종철회장(73·전공주교대회장)은 올해의 역점사업으로 장서각 건립을 꼽고 있다.현재 3천건에 달하는 책들이 그대로 창고에 쌓여있기 때문에 이의 분류,정리가 시급하기 때문이다.이를 위한 1억원의 충남도예산중 4천만원의 삭감으로 나머지 재원마련이 가장 큰 현안이기도 하다.국역작업등 서둘러야할 과제는 많지만 현재 1백66명의 회원들이 연회비 5천원씩 내는것으로 충당하는 기념사업회의 예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회장은 『많은 학자들이 초려사상에 대해 자발적인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그러면서 『지난 연말 부산대에서 다섯명의 교수·학생들이 와서 나흘동안 목록작업을 하고 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도 기념사업회측은 연구를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시설을 무료료 사용케하고 있다.3년째 겨울이면4,5일씩 초려학 연구를 위해 이 서원을 찾고 있는 20여명의 한남대 대학원생들이 이달 중순 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중화당과 존성재는 벌써 깨끗이 치워 놓았다.형편이 넉넉하다면 그들이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식사까지 제공했으면 좋겠지만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장손 정우씨의 마음을 늘 안타깝게 하고 있다. ◎「만언대사」 상소한 당대경세가/후손들이 서원열어 초려정신 대이어/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병자호란을 만난 것이 1636년(인조14년) 초려 이유태가 29세 되던 해였다.임진왜적이 물러나 대위국교가 재개된지 겨우 30년,또 다시 북쪽의 외적이 몰려와서 나라 안이 쑥밭이 되고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수모를 당하는 그런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국론은 크게 양분되고 당쟁의 고질병이 온 몸을 덮치는 그러한 시대이기도 하였다.치국경세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급한 때에 초려는 평소 품었던 뜻을 만언소라는 글로서 국왕에게 구민·구국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먼저 농촌경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농촌을 떠난 농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황폐화된 토지를 일구게 하여야 오늘의 정치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제의하고 고른 세제의 확립과 면세특권층의 일소를 역석하였다.또 농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여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고 오가작통으로 범죄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육제도의 일대쇄신을 주장하여 양반의 자제들만 교육하는 제도를 고쳐서 모든 양인의 자제를 학문기관에 보내게 하여 그 능력에 따라 직업과 신분을 선택하도록 하자는 획기적인 제언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고루한 지도층은 자신의 권익만을 생각하고 그의 개혁안을 묵살하였다.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탄핵하여 유배하고 말았다.이 유태는 그 뒤 스스로 초가집(초려)이라는 자신의 호와 같이 모든 관직(이조참판·요즘의 내무차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웅거하여 나가지 않았다.그 유명한 초려의 불출사 선비정신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초려집」 26권은 이유태의 선비정신을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오늘에 되살려야할 국민정신문화이다.다행히 최근 충남 공주 향리에 그 후손들이 용문서원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외래문화에 질식할 것도 같은 오늘의 세대에 이보다 더 참신한 청량제는 없다 할것이다.
  • “인천 닭소리 산동까지” 인접성 강조(노 대통령 방중여로)

    ◎“북방외교 북경서 매듭짓게돼 보람”/양 주석,「손에 손잡고」 연주맞춰 손뼉 ▷단독정상회담◁ ○…노태우대통령과 양상곤중국국가주석은 28일상오 단독·확대회담의 순서로 1시간45분간에 걸쳐 정상회담을 갖고 경제협력을 중심으로한 양국관계와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북아정세 그리고 국제정세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 이날 정상회담은 당초 상오 10시15분(한국시각 상오 11시15분)부터 10시45분까지 30분간 단독회담,10시45분부터 11시35분까지 50분간 확대회담의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두 정상간의 단독회담이 10시20분부터 11시40분까지 80분간이나 진행되는 바람에 확대회담은 11시40분부터 12시5분까지 25분만에 종료. 이 때문에 단독회담에서 양국관계,확대회담에서 동북아정세와 국제정세를 논의키로 했던 당초 계획과 달리 두 정상이 단독회담에서 이 문제를 대부분 논의하고 확대회담에서는 논의결과를 정리하는 형태로 마무리. 인민대회당의 복건청에서 열린 단독회담에서 노대통령은 중국방문초청에 사의를 표명하고 『북경시민의 역동적인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감을 피력했고 양주석은 『많은 북경시민들이 노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연도에 나왔다』고 소개하며 『이번 방문을 환영한다』고 언급. 노대통령은 『북방외교를 북경에서 매듭짓게 되어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두 나라간의 교류와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양국간에 분야별로 정기적 각료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의했고 양주석은 『바람직하다』며 찬성의 입장을 표시. ▷오찬연설◁ ○…노대통령은 28일 하오 숙소인 조어대 방▦원에서 한중경제인 1백여명과 오찬을 함께 하며 양국간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상기시키고 전통적 우호관계의 회복등 새로운 협력강화방안등에 대한 입장을 피력. 노대통령은 1시간30분간 계속된 이날 오찬에서 『산동지역에서 「이른 아침이면 한국의 인천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우스개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렇다면 한국의 서해안에서는 맑은 날이면 청도항의 공장굴뚝이 보일 것』이라고 두나라의 지리적 인접성을 강조한뒤 『이런 두나라 사이가 비행기로 1시간 남짓한 거리로 좁혀지는데 수십년이 걸렸다는 것은 역사의 모순』이라고 지적. ▷자금성 시찰◁ ○…노대통령은 28일 하오 부인 김옥숙여사와 함께 청나라말까지 5백년간 역대 중국왕의 거처및 집무실이었던 자금성을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간소복 차림으로 약1시간동안 시찰. 노대통령 내외는 고궁박물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자금성 제2문인 태화문앞에 도착,『한중수교가 이뤄지자마자 한국의 국가원수를 손님으로 맞게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인사를 받고 『세계적으로 위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에서 제일 잘 보관된 건축물을 보게되어 감회가 깊다』고 방문소감을 피력. 노대통령은 자금성내 옛왕의 집무실,연회장,침실등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곳곳에 얽힌 옛 얘기를 경청했는데 왕이 과거를 주재했다는 설명등을 듣고는 『우리 조선시대에도 똑같은 제도가 있었다』며 옛날의 인재등용방법에 깊은 관심을 표시. ▷만찬◁ ○…노대통령은 이날 저녁 8시30분(한국시각)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양주석 주최 공식만찬에 참석,양국 우의를다지는 것으로 방중 이틀째 일정을 마감. 노대통령과 부인 김옥숙여사는 이날 만찬장 입구에서 양주석및 진모화인민상무위원회부위원장(여)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뒤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 애국가와 중국국가의 연주에 이어 연단에선 양주석은 『본인은 노대통령 내외분의 중국방문을 환영하고 중한 양국 우호관계를 위해,노대통령 내외의 건강을 위해,이 자리에 참석한 숙녀신사 동지들과 함께 잔을 들 것을 제의합니다』며 건배. 이에대해 노대통령은 『양주석의 따뜻하고 성대한 환영에 감사하며 양국간 수교와 오늘 정상회담은 역사의 순리요 지도자를 위시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결단으로 생각한다』면서 『지금부터 양국의 번영과 동북아번영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해나가자』고 강조. 노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결코 불행했던 역사를 되풀이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양주석의 건강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합시다』고 답사. 이날 공식만찬은 취재가 허용된 적이 없다는 중국외교부의 주장과 한국언론은 모든행사를 취재해야 한다는 우리측 입장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진 끝에 5분정도 취재가 허용됐고 만찬사도 중국측은 관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명했으나 우리측 요구로 간략한 건배사로 대체돼 진행. ○…만찬이 끝날 무렵에는 88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가 연주되자 양주석이 박수를 치기 시작,참석자 전원이 박수를 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며 하진량 중국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과 장백발 북경시 부시장은 노대통령에게 잔을 권하며 2000년 올림픽의 북경유치에 대한 지원을 은근히 요청. 한편 중국국가의 작곡자는 정율성이라는 한국인으로 밝혀져 화제. 이 곡은 항일전쟁당시 작곡돼 애창되다 건국후 중국국가로 정식 채택됐다.
  • 범죄소굴 구룡성 공원으로 탈바꿈/홍콩(특파원코너)

    ◎영·중 재개발 합의… 보상비 지급 등 철거준비 끝내/명목상 중국관할… 양국 치안력 행사포기/“도박·매음 등 무법천국” 악명씻는 기회로 홍콩의 중심지 한 복판에는 구룡성이라는 범죄소굴이 자리잡고 있다.강도나 절도는 물론 도박이나 마약밀매가 판을 치고 온갖 사기사건이 난무해도 홍콩경찰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경찰이 무서워해서가 아니라 약2만평 규모의 이곳은 홍콩관할이 아닌 중국관할구역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중국이 홍콩땅 한복판인 이곳에 직접 행정력이나 치안력을 행사하지도 않아 완전히 버려진 땅이요,치안 사각지대가 돼온 곳이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이 구룡성근처를 서성거리다간 눈깜짝할 사이에 저세상 사람이 된다고 믿는 홍콩주민들이 많았다.그런가하면 이곳 성채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 몇명이 용감하게 성내로 들어갔는데 그뒤 나왔다는 얘기를 못들었다는 식으로 이곳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해주곤 했었다. 이같은 전설적인 범죄소굴이 오는 10월부터 철거작업에 들어가 3년후에는 아름다운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영국과 중국의 재개발 합의에 따라 이곳에 사는 1만여가구의 주택·상가등에 대한 보상 이주작업이 최근 마무리되고 폭파등의 방식으로 철거할 준비가 진행중이다.지금은 성채주위에 철망을 둘러쳐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채 단전·단수조치까지 취해 철거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당국은 이곳 건물들을 3∼10개로 구획,몇차례로 나눠 차례로 폭파시킨다는 방안을 검토해 왔다.폭파작업때는 15∼30분간 카이탁공항의 항공기 이·착륙을 금지시킬 계획이다. 구용성이 「암흑가」또는 「범죄소굴」이라는 악명을 떨치다가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은 영국과 청나라의 무책임때문이라 할 수 있다.두나라는 1898년6월 신계지역을 99년간 영국에 조차하는 「홍콩 확장에 관한 협약」을 맺으면서 막연하게 구룡성만은 중국관할로 남겨둔다고 합의했다.하지만 청조말의 극심한 혼란때문에 협약을 맺은지 1년도 못돼 중국측은 이곳 관할을 포기해 버렸다.그렇다고 홍콩당국이 중국측 의사를 무시한채 이를 떠맡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이곳은 중국도,홍콩도 그밖의 누구도 관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삼불관지대」라 불려왔다.주민들 스스로 치안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이란 홍콩시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피신해온 범인들의 인상착의만을 홍콩경찰에 알려주는게 전부였다. 홍콩내에서 철저히 금지된 도박이 이곳에선 아무 거리낌없이 성행하고 완전 나체쇼나 매음조직이 행인들을 유혹해도 홍콩경찰은 단 한발짝도 경계선을 넘을 수 없었다. 골목길이 지저분하고 두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울만큼 비좁다.1년내내 햇빛이 들지않는 곳도 수두룩하다.그래서 집세도 싸고 질병도 많다.특히 이곳에는 많은 돌팔이 치과의사들이 버젓이 간판을 내건채 영업을 하며 재미를 보고 있지만 간섭하는 사람도 있을리 없다.이때문에 무법자 천국이요,범인들의 치외법권지대일뿐아니라 가난뱅이들의 낙원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구룡성은 아편전쟁후 1846년 광동성 각 현의 관원과 주민들이 40만량의 은화를 모아 축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당시 쌓았던 성벽은 2차대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이허물어 해체한 후 부근의 카이탁국제공항 활주로 확장공사에 사용해 버렸다. 따라서 성곽자체가 사라진지는 벌써 5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재개발 공원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지난 84년 영국과 중국이 홍콩반환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할때 였다.홍콩정청은 그후 87년초부터 5년여에 걸쳐 29억 홍콩달러(약2천9백억원)의 보상비를 지불,이곳 주민들을 전원 이주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 「간도조선인」 호적원부 발견/구한말 작성/우리영토 입증 첫 사료

    【서울】 구한말 대한제국정부가 간도지방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작성했던 「간도변계호적」원부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됐다. 일제가 간도협약을 맺어 청나라에 간도를 넘겨주기 7년전인 1902년(광무6년)에 작성된 이 호적은 간도가 우리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가장 실증적인 역사자료이자 중국 조선족들이 본향등 자신들의 뿌리를 확인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공개된 호적원부에는 호주의 성명,본관,직업,나이밑에 남녀자녀수,부친및 조·증조부·외조부이름,처의 나이,본관등이 면단위별로 정리,기재돼 있어 가족사항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돼 있다.
  • 한·중수교 서명으로 교역기지 발돋움(대륙바람 부는 서해안:2)

    ◎“제2개항” 채비 분주/인천/황해경제권 중심지로 부상/최근접항 이점… 부두 앞당겨 확장/“신공항완공땐 제2의 국제도시” 기대 서해안시대의 새 장이 열리고있는 인천 앞바다는 황금빛 물결로 출렁인다. 항구도시 인천은 한·중수교를 계기로 서해바다 건너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이 한층 앞당겨지게 됐다는 사실에 「제2의 개항」을 맞는 잔치분위기이다. 특히 인천은 영종도에 신국제공항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바다와 하늘을 통한 명실상부한 국제적 도시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지난 1882년 우리나라와 청나라가 통상조약을 맺고 이듬해에 인천항이 개항된지 실로 1백10년만에 열리는 중국관문이기에 한·중수교 이후를 대비하는 인천항은 그 어느때보다 활기찬 모습들이다. 그래서 인천은 서해안 시대의 본격개막을 여느 지역 못지않게 가시적으로 국민앞에 드러내고 있다. 인천항 내외항엔 벌써 중국산 양곡과 시멘트 광석등을 실은 외국선박이 입항하기 시작해 25일 하룻동안 83척의 외국배가 정박해 수출입 화물을 싣거나 부리고 있었다. 또 항구내 한편에서는 중국배가 몰려들 것에 대비한 항만시설의 확충공사가 한창이다. 인천지방해운항만청은 현재 7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내항 미개발부두인 제5부두 축조공사를 올안에 완공하기위해 철야작업까지 하고 있다° 또 철재·광석등 전용부두로 쓰일 5만t급 1선석과 3만t급 2선석규모의 제6부두 축조공사도 현재 55%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나 완공시기를 앞당겨 93년까지 끝낼 방침이다. 인천항건설사무소 남대우공사과장은 『5,6부두가 완공되면 연간 4백40만t의 하역능력이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인천항을 국제무역항으로 변모시킬 이들 공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항은 한·중수교로 무역항으로 뿐만아니라 국제여객항으로도 각광받을 전망이다. 현재 월평균 6천여명에 이르는 한·중간 카페리여객선 이용객이 수교후에는 연 1만명선을 웃돌 것으로 보여 항만청은 연안부두 방파제에 1만∼1만5천t급 여객선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국제여객부두 건설공사를 94년 중반까지 마칠 계획이다. 이와함께 민자유치로 상가·전망대·연회장등을 갖춘 지상21층 지하3층 규모(연면적 1만6천3백18㎡)의 국제여객터미널 신축계획도 이번 수교로 인천지역내 기업들의 참여가 활기를 띨것으로 보인다. 또 인천해항청은 장기적으로 수도권교통 문제로 유보된 북항개발이 절실하다고 판단,이를 재추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함께 중국과 인천간 정기 카페리여객선을 운항하고 있는 위동항운·진천항운등 해운업계도 한·중수교에 발맞춰 여객선 확보와 다양한 관광상품 개발을 계획하는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천∼위해간에 4천3백t급 여객선 골든브리지호를 운항중인 위동항운 대표 김종순씨는 『그동안 양국간에 해운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운송비가 비싸게 지불되는등 차별대우를 받아왔으나 앞으로 그같은 차별이 없어질 것으로 보여 보다 싼가격으로 중국등지를 관광할 수 있는 상품개발을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또 인천∼천진간을 운항하는 천인호(6천8백70t급)선사인 진천항운은 현재 월 6항차의 운항횟수를 증회할 계획이며 대연항과의 정기항로개설도 추진중이다. 북방교역의 전진기지로서의 인천항 개발과 함께 서해안시대의 대동맥 역할을 맡은 인천∼목포간 서해안고속도로 공사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천에서 목포까지 총 3백53㎞의 서해안고속도로 가운데 수도권 구간인 인천∼안산간 27.9㎞는 6차선 도로로 당초 94년말 완공예정이었으나 공기를 1년 앞당겨 93년말 완공을 목표로 현재 4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덕택에 인천시 외곽지역인 문학·선학·연수동과 시흥시 월곶·거모동등 개발낙후지역이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인천시 당국도 이에 발맞춰 ▲송도앞 4천2백만㎡의 바다를 매립하는 송도신도시 조성사업과 ▲관광객유치를 위한 용유도 해양종합관광 휴양지 조성사업과 ▲총길이 82.1㎞의 인천도시 전철공사의 조기착공을 서두르고 있다. 인천상공회의소등 이 지역 경제계는 수교를 계기로 양국간의 무역규모의 확대는 물론 중국의 황해연안의 개방도시인 대연·천진과의 거리가 3백∼5백해리에 불과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중국 현지진출과 합작투자를적극 모색하고 있다.
  • 국내 대만재산 7천억 처리 관심/한중수교 앞두고 화교사회 술렁

    ◎서울 명동의 대사관터 등 포함/북경인도등 4개방안 저울질/공관직원들 정상집무속 침통한 표정 우리나라와 중국의 수교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1일 서울 중구 명동83 중화민국(대만)대사관은 비자발급등의 업무를 정상적으로 취급하면서도 보도진들의 출입을 통제하는등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나타냈다. 대사관의 대외창구인 신문참사처는 보도진들의 거듭된 면회요청을 끝내 뿌리쳤으며 전화통화에서도 『지금은 바쁘고 할말도 없다』고 공식입장을 표명하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대사관에는 이날 아침부터 『한·중수교로 대만과의 국교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고 한 직원이 귀띔. 대사관 직원들은 문의전화가 빗발치자 하오에는 아예 수화기를 내려놓아 외부와의 전화통화를 단절시켰다. 직원들은 또 시간이 지나면서 국교단절이 기정사실화되자 비자발급을 맡고 있는 영사부만 업무를 볼뿐 나머지 부서직원들은 일손을 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스레 논의했다. 한편 서울의 금싸라기땅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이 대사관 자리등 대만정부가 우리나라에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처리문제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만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사관터 2천9백73평과 이웃 한성화교학교자리 2천1백74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대 땅값이 한평에 1억원을 웃도는 것을 감안하면 시가로 5천억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또 서울·부산·인천 등 전국의 대도시에 있는 화교학교들과 서울의 대만출신 화교들에게 임대해주고 있는 중구 수표동11 3백10여평의 땅,대사관앞 화교도서관자리 2백여평등의 재산도 2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중국과 대만은 서로 유리한 선례를 우리정부에 내보이며 막대한 재산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중국은 통상적인 국가관례에 따라 국가의 대표성이 있는 정부에 재산을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대만은 한·중수교에 따른 외교단절 이전에 이들 재산을 대만의 민간단체에 매각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국제법상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 없으나 중국과 서방외국과의 수교및 대만과의 단교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을 보면 대만이 대체로 불리한 형편이다. 따라서 대만정부가 갖고 있는 대사관자리 등의 재산처리는 크게 네가지로 전망할수 있다. 첫째는 아무 보상없이 중국정부에 대만의 보유재산을 넘겨주는 것. 지난 64년 프랑스및 72년 일본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의 대사관등의 건물과 토지를 대만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국에 넘겨줬다. 두번째는 대만출신의 화교나 민간단체에 헐값에 넘겨 실질적으로 대만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경우. 지난 79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전 대사관저 등을 미국내의 화교들에게 단돈 10달러에 넘긴뒤 미국이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한 「대만관계법」을 통해 대만쪽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세번째는 중국과 대만이 수교나 단교전에 상호협상을 통해 매각하는 방법. 그러나 이 문제는 외교상의 자존심을 훼손당한 대만의 입장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의 처지를 보면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네번째는 대만과의 공식적인 외교는 단절됐지만 대사업무를 대신할 대표부등의 기관으로 명의가 변경되고 중국정부에는 새로운 대사관자리를 물색해 주는 방법이다. 대만정부는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더라도 중국측에는 재산을 넘겨줄 수 없다면서 민간단체나 대표부등을 통해 계속 재산소유권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의 대사관땅은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청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청나라가 상징적인 금액을 주고 구입한뒤 국민당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 조선시대회화전/고서화감상전/고미술명품전 “풍성”

    ◎조선/정선·이등 등의 진품90점 공개/고서/퇴계·율곡서간문·민화등 다채/당대의 화풍·변천사 본격 조명기회 하한기 화랑가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수준높은 고미술명품전이 인사동의 두 화랑에서 마련된다. 대림화랑이 15∼25일에 펼치는 「조선시대회화전」과 학고재가 매년 여름에 꾸미는 특별기획 「고서화감상전」(23일∼8월31일)이 그것들로 고서화에 관한 한 오랜 경륜과 식견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두 화랑대표가 자신있게 내놓는 전시회다. 이들 전시회는 양도소득세법 시행을 앞두고 고미술품들이 개인 수장고에 묻혀 그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처럼 마련된 명품전이어서 고미술애호가들의 갈증을 풀어줄 것같다. 대림화랑의 「조선시대회화전」은 화랑대표 임명석씨가 10년전부터 추진해 오다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대규모 기획전이다. 조선시대 명서화가들의 미공개작품을 조선왕조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망라하는 것으로 90점이 공개된다. 이중 왕실출신의 화가 이징의 「수묵화조도」,은호 이함의 「쌍응도」,동국진경산수의 대가로 평가되는 정선의 「해주허정도」,조희용의 「백매도」,장승업의 「영모절지도」,김규진의 「장생오우도」등 대부분이 미공개 진품들이다. 미술사가 안휘준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와 허영환교수(성신여대 동양미술사)의 고증을 거친 이 기획전은 당대의 화풍과 변천사를 학문적 토대위에서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하다. 대림화랑은 또 이 전시회와 함께 태조원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화가들의 교유기,작품일지등을 다룬 70쪽분량의 연표와 전시작품의 해설과 원색도판을 실은 2백10쪽의 대형화집 2천부를 발간했다. 학고재의 고서화 감상전은 「여름미술관­품위있는 글씨,소담한 옛그림」이란 제목으로 마련되는데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특별히 겨냥해서 꾸며진다. 어른은 물론 학생들도 관심있게 고미술을 접하게 하자는 취지아래 학고재대표 우찬규씨는 교훈적인 글씨와 재미있는 내용의 민화들을 주로 장만했다. 출품작은 여섯부류로 구성되어 조선중기에서 구한말,근대에 이르는 화가들의 그림과 조선후기 서예인들의 서예작품과 조선시대 명현 대신 문인들의 간찰,조선후기의 민화,무낙관그림,청나라의 서화등이 망라된다. 1백36점의 출품작중에는 퇴계와 율곡의 서간문에서부터 김옥균 박영효등의 작품,근대6대가인 청전,의재등의 작품,중국화가 장대천등의 작품들이 고루 있다. 옛정취 물씬 풍기는 품위어린 글씨와 소담한 그림속에서 모처럼 무더위를 잊을 수 있는 귀중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중국전통예술” 경극 서울공연

    ◎대만 해광극단,27일부터 국악원극장서 중국대륙의 대표적 공연예술인 경극이 27일부터 29일까지 하오7시30분 서초동 국악당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국립국악원이 중화민국의 해광경극단을 초청해 이루어진 이번 공연은 한국의 창극,일본의 가무기와 함께 동양의 극음악을 대표하고 경극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서양의 오페라에 대비되는 동양종합예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평가되고 있다. 해광경극단은 이번 내한공연에서 3일동안 각기 다른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데 27일에는 고대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의도」,28일에는 역시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황금대」와 「삼국지연의」를 토대로 한 「김안교」,그리고 「수호지」를 바탕으로 한 「이규의 귀성」을 무대에 올린다.또 마지막날인 29일에는 「서유기」를 바탕으로 한 「손오공과 요괴」 그리고 당나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양귀비의 취주」를 공연하게 된다. 내한 공연을 갖는 해광경극단은 1949년 11월 창설되어 오늘날에는 중화민국 제일의 경극단으로 위치를 굳힌 중화민국 해군총사령부소속의 직업경극단이다. 해광경극단의 이번 내한공연에는 왕안락단장을 비롯한 4명의 스태프와 연원(배우)33명,음락조(연주자)21명 등 모두 6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나라말기 북경을 중심으로 발달해 「북경오페라」(Peking Opera)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는 경극은 긴 이야기를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대사 그리고 연기가 이어지는 극음악의 일종이다. 경극은 여러명의 배역이 등장함에 따라 많은 연기자가 등장하고 각 등장인물은 독특한 의상과 무대화장 무대장치 연기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경극은 노래와 동작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연출된 무술이 또 하나의 구경거리이다. 경극에 있어 배역에 따라 많은 연기자가 무대등장하는 요소는 1인극이었던 한국의 판소리를 1960년대 각 배역으로 세분화하고 무대위에서 공연하게 되는 등 창극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공연안내 585­3151)
  • 북경 한·중 외무회담 이모저모

    ◎국보전용 조어대서 1시간30분 대좌/전부장,“열렬히 환영”… 수교 적극자세 암시/이붕 만난 중남해도 당정핵심부 들어있는 곳 중국을 방문중인 이상옥외무부장관은 13일 북경의 영빈관인 조어대에서 한·중수교문제등 양국 현안문제를 놓고 외무장관회담을 가진데 이어 하오에는 이붕총리와 단독면담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특히 중국측은 비공식회담임에도 불구하고 국빈들의 경우에만 사용하는 조어대를 회담장소로 정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한국외무부장관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한 데다 미수교국의 영빈관에서 외무장관회담을 갖게되자 회담장으로 떠나기에 앞서 상당히 상기된 표정. 이장관은 이날 아침 일찍 중국외교부에서 제공한 독일제 아우디승용차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조어대로 향발,상오 11시30분(한국시간)한·중외무장관회담 장소인 조어대 제18각에 도착. 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은 미리 회담장에 도착해 회담장 옆방에서 왕영범아주국장등 배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가 현관에서 이장관을 영접. 이장관은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십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고 전부장도 『북경에서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한뒤 사진기자들에게 잠시 포즈. 이장관은 이어 노재원 주북경무역대표부대표를 비롯해 김석우아주국장등 배석자를 소개한뒤 전부장의 안내로 회담장에 입장. 전부장은 먼저 『이렇게 북경에서 이장관을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지난해 APEC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주최국으로서 환대해줘 감사했다』고 인사. 양국 장관은 1시간30분 가량 회담을 계속한뒤 같은 제18각에 있는 식당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회담을 계속. ○…역사적인 한·중외무장관 회담이 열린 조어대는 김나라 장종황제가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시 이름이 불리기 시작한 곳으로 원·명·청조의 황제들이 산행도중 쉬어가던 장소. 청나라 건륭제때 정식으로 휴가용 궁전이 됐으며 59년 외곽을 단장해 영빈관으로 사용되기 시작. 처음에는 중국의 국제지위상 주로 소련·북한등 사회주의국가 원수들이 공식 방문해 숙소로 사용했으며 70년대말 이후에는 서방국가의 귀빈들에게도 개방. ○…이상옥 외무부장관은 이날 하오3시15분 총리집무실인 중남해 자광각에서 이붕 중국국무원총리를 만나 노태우대통령의 안부를 전달. 이총리는 1층 홀에서 이장관 일행을 맞아 악수를 나누며 『반갑다』고 인사. 이총리는 홀 중앙 북쪽에 마련된 주빈석에 이장관과 나란히 앉아 환담. 이총리는 『환영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제47차 ESCAP총회는 서울에서 개최됐는데 제48차총회는 북경에서 열리게 됐다』며 총회 운영에 협조를 당부. 이총리는 『우리는 가깝게 있지만 서로 잘 모른다』며 『이웃이니까 자주 내왕해야 한다』고 교류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 ○…조어대회담에 이어 이날 하오 이장관이 이붕총리를 만난 중남해는 고궁옆 호수인 중해와 남해를 합한 명칭으로 청조부터 소궁으로 사용돼 왔다. 특히 원세개등 실력자들이 거주했으며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정부지도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유명. 중국공산화 이후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이 살았고 현재는 이붕 총리·강택민 당총서기의 거주및 집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당·정핵심부가 들어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곳이어서 이 지역에 한국외무장관이 들어가는 것 자체에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 주북경한국무역대표부 관계자들의 설명.
  • 일 대입입시에 「한반도침략」 첫 출제/게이오대 법학부서

    ◎일제의 한국합병 경위등 물어 관심/고교 근대사교육에 큰 영향 미칠듯 일본의 사학명문 게이오(경응)대학이 올해 입학시험 일본사과목에 일제의 한반도와 중국대륙침략에 관한 문제를 처음으로 출제,관심을 끌고 있다. 게이오대학의 이같은 일본사 시험문제출제는 일본의 아시아지역 침략에 관한 교육을 의식적으로 피해온 일본고교의 근대사교육에 큰 영향을 미칠것으로 보인다. 게이오대학은 지난달 16일 실시된 법학부의 일본사시험에서 일제의 한반도와 중국침략에 관한 내용을 담고있는 지문의 빈칸을 메우는 문제를 출제했다. 지문내용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해 구주열강의 중국분할이 가속화되었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국의 승인아래 한국을 합병했다는 것이다.지문의 일부는 『노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보했고 1905년 영국도 이를 승인했다.그후 얼마안돼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에 의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통감부를 두어 한국합병에 연결되는 조치를 취했다』라고 되어 있다. 게이오대학의 오코노기교수는 이같은 일본사문제 출제에 대해 『일본 근·현대사의 아시아침략부분을 충실히 가르치지 않고있는 현재의 고교 근대사 교육을 감안할때 이번 출제는 희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 주머니속의 양서/“문고본 인기 되찾자” 안간힘

    ◎대부분 세로짜기… 젊은 독자들 외면/「가로세대」에 맞게 가로짜기·판형 확대/을유·문예출판사등서 앞장… 명예회복 노력 국내에서 출간되는 도서들은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세로조판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80년대 접어들면서 가로조판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모든 책이 가로조판으로 나오고 있다.이는 활판인쇄의 시대에서 전산사식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빚어진 결과로 분명 출판형태의 발전된 모습이긴 하지만 이로인한 문제점 또한 적지않다.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구식판형의 책들이 서서히 사장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미 가로조판에 길들여진 독자들이 세로조판의 책을 꺼려하게 됐기 때문이다.특히 대학생 등 젊은 독자층의 세로조판 기피현상은 심각하기까지 할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따라서 과거 아무리 이름을 날렸던 양서라도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재판은 커녕 하나 둘씩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는 실정이다.이같은 현상은 당연히 우리의 독서의 폭을 좁히고 질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과거 명성을 날리던 30∼40년 된 출판사들이 많은 종수의 양서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근래에 와서 하나같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출판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서 양서의 사장을 염려한 노포출판사들이 새로운 독자층을 대상으로 몇몇 구판의 도서를 새롭게 조판하여 펴내고 있는 것은 크게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특히 을유문화사는 을유문고중의 일부를 골라 보통 크기의 일반 단행본으로 잇따라 출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지난해 초 「국화와 칼」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격몽요결」「문학개론」「예술이란 무엇인가」「부생육기」등 모두 5권의 문고본을 새 판형으로 펴낸 것이다.이어 곧 「택리지」「양화산록」「술몽쇄언」「용비어천가」등 30여종을 더 펴낼 예정이다.이 책들은 모두 세로조판에서 가로조판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판형의 확대와 함께 전산사식으로 글자도 커져 젊은 독자들의 취향에 들어맞는다.그러나 과거 문고본 시대의 영예를 만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와같은 작업은 최근 몇 년 동안 이따금씩 있어왔으나 문예출판사등 극히 일부 출판사에서 체계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특히 을유문화사의 경우와 같이 문고본에 대한 체계적인 작업은 아직 없었다.사장되어가는 양서의 명맥을 잇는다는 좋은 취지에 반해 신간을 펴내는 것 이상의 경비가 들어 출판사로서는 재정적으로 큰 모험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을유문화사의 다섯권은 을유문고 가운데서도 첫손꼽히는 명저들로서 문고본으로 20쇄이상의 출간기록을 갖고 있다.특히 가장 최근 선보인 「부생육기」는 지난 69년에 첫판이 나온 이래 20여년동안 다양한 독자층에 고루 사랑을 받아오던 책으로 유명하다.또한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자연스럽고 빈틈없는 우리말을 구사한 명번역으로 더욱 널리 사랑받아 왔다. 때문에 청나라 심복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며 생전의 일화들을 담담하게 그린 필기소설형태의 이 책은 지금에 와서는 중국보다도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더 잘 알려진 책이 되어버렸다.을유문화사의 고정기주간은 『아무리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런 양서들을 판형때문에 사장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면서 앞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보아 작업의 범위를 넓혀나가겠다고 밝혔다. 「부생육기」의 번역자인 지영재교수(단국대)는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이 세로조판의 책은 아예 들쳐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면서 이같은 움직임이 계속 확대되어 가길 기대했다.
  • 외언내언

    경상남북도를 합친것만한 넓이다.79개의 군소섬들을 거느리고 있다.중국 최대의 섬이다.3세기 무렵 중국사람들이 발견했다.본격적인 개척은 중세이후이며 근대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에 시달렸다.첫 식민지를 객척한것은 1624년 네덜란드인들.그들이 붙인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것이 포모사(Formosa)다.보물섬이란 뜻.◆그후 명나라 유신 정성공이 네덜란드인들을 항복시키고 「항청복명」의 피난처로 삼았다가 청나라에 망한후 1885년 대만성으로 복귀.그러나 기구한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청­일전쟁후 일제식민지 51년을 겪고 49년 국공내전에 패한 국민당정부의 피난처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대만의 약력이다.중국대륙의 3백분의1도 안되는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은 모두 2천여만.선주민족인 말레이·폴리네시아계의 고산주 25만을 제외하면 98%가 한주이다.그러나 이 한주의 84%는 남쪽해안의 복건·광동성에서 이주해 오래전부터 살아온 이른바 본성인이며 16%는 49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피난온 북중국계의 외성인들.◆그동안 대만을 정치적으로 지배해온것은 이 국민당정부와 외성인들이었다.이때문에 본성인들은 불만이 많았으며 심한 정치적탄압을 받기도했다.그러나 85년이후의 세계적인 민주화바람은 대만에도 정치적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본성인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었다.◆본성인출신이 국민당정부의 총통이 되고 「대만의 운명은 대만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한다」는 「자결강령」의 야당도 출현.민주진보당으로 89년 총선에서 30%의 지지를 획득했다.13일 대만정부는 물론 중국정부의 요란한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강령에 대만을 「독립된 주권공화국」으로 규정한 조항을 삽입키로 한것도 바로 그 민진당.2개의 중국정부가 모처럼 일치된 반대를 하고있다.독립 「대만공화국」은 탄생할 수 있을까.기구한 운명의 또한차례 향방이 주목된다.
  • 30년 불화요인 청산… “화해악수”/중·소의 국경조약 체결의미

    ◎미 독주 견제,신질서 형성에 공동보조 확인 중국과 소련은 16일 지난 60년대 이후 양국분쟁의 직접적인 요인이 돼 왔던 흑룡강(소련식 명칭은 아무르강) 주변 등 동부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종식시키는 국경 협정을 체결,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지난 57년의 모택동 이후 중국공산당 수뇌로서는 이번에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한 강택민 총서기는 16일이 협정 조인식이 끝난 뒤 『이번의 국경협정 체결은 두 나라 공산당 정부의 변함없는 결속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외교전문가들은 이번의 협정체결을 계기로 중소 두 나라가 걸프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과정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상호우의를 돈독히 다져나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양대 공산국가들이 지난 50년대의 동맹시대로 복귀할 것 같지는 않으며 중국측 견해대로 상호주권 및 영토존중,내정 불간섭 등의 평화 5원칙에 따라 실용주의에 입각한 협력관계를 심화시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은 또 이번 협정체결과 함께 동부국경의 소측 항구도시 하바로프스크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국경무역발전·국경지대 공동개발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양국 정상들에 의한 협정체결이 불가피했던 중소 국경문제는 지난 60년 8월 중국측이 과거 청나라와 제정러시아 시대에 힘에 밀려 맺었던 국경선 관련조약들이 불평등함을 이유로 내세우고 러시아에 빼앗긴 1백50㎢의 영토반환을 요구한 데서 비롯된 것. 1858년의 애혼조약이나 1860년의 북경조약은 당시 쇠약했던 청나라가 무력적인 남진정책에 굴복해서 맺게 된 것으로 흑룡강 이북지역을 모두 빼앗기게 됐다. 또 서부국경지역에서는 1864년의 타르바카타이조약과 1881년 이리조약으로 신강성 북부지역이 러시아에 편입됨으로써 오랜 분쟁의 불씨가 마련된 것이다. 중소 두 나라는 지난 60년대초 이념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69년 3월 흑룡강 지류인 우수리강 가운데 진보도에서 양국 수비대가 무력충돌,중국측 8백여 명,소련군 70여 명이 사망함으로써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그뒤 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북경을 방문하는 등 양국간 데탕트가 무르익으면서 국경지대의 감군이 시작됐고 이번 협정에 따라 그동안 미해결 상태로 남았던 흑할자도(아무르와 우수리강의 합류지점에 있으며 면적 3백㎢) 등 나머지 섬들의 중국 귀속도 이뤄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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