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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전통예술” 경극 서울공연

    ◎대만 해광극단,27일부터 국악원극장서 중국대륙의 대표적 공연예술인 경극이 27일부터 29일까지 하오7시30분 서초동 국악당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국립국악원이 중화민국의 해광경극단을 초청해 이루어진 이번 공연은 한국의 창극,일본의 가무기와 함께 동양의 극음악을 대표하고 경극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서양의 오페라에 대비되는 동양종합예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평가되고 있다. 해광경극단은 이번 내한공연에서 3일동안 각기 다른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데 27일에는 고대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의도」,28일에는 역시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황금대」와 「삼국지연의」를 토대로 한 「김안교」,그리고 「수호지」를 바탕으로 한 「이규의 귀성」을 무대에 올린다.또 마지막날인 29일에는 「서유기」를 바탕으로 한 「손오공과 요괴」 그리고 당나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양귀비의 취주」를 공연하게 된다. 내한 공연을 갖는 해광경극단은 1949년 11월 창설되어 오늘날에는 중화민국 제일의 경극단으로 위치를 굳힌 중화민국 해군총사령부소속의 직업경극단이다. 해광경극단의 이번 내한공연에는 왕안락단장을 비롯한 4명의 스태프와 연원(배우)33명,음락조(연주자)21명 등 모두 6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나라말기 북경을 중심으로 발달해 「북경오페라」(Peking Opera)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는 경극은 긴 이야기를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대사 그리고 연기가 이어지는 극음악의 일종이다. 경극은 여러명의 배역이 등장함에 따라 많은 연기자가 등장하고 각 등장인물은 독특한 의상과 무대화장 무대장치 연기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경극은 노래와 동작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연출된 무술이 또 하나의 구경거리이다. 경극에 있어 배역에 따라 많은 연기자가 무대등장하는 요소는 1인극이었던 한국의 판소리를 1960년대 각 배역으로 세분화하고 무대위에서 공연하게 되는 등 창극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공연안내 585­3151)
  • 북경 한·중 외무회담 이모저모

    ◎국보전용 조어대서 1시간30분 대좌/전부장,“열렬히 환영”… 수교 적극자세 암시/이붕 만난 중남해도 당정핵심부 들어있는 곳 중국을 방문중인 이상옥외무부장관은 13일 북경의 영빈관인 조어대에서 한·중수교문제등 양국 현안문제를 놓고 외무장관회담을 가진데 이어 하오에는 이붕총리와 단독면담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특히 중국측은 비공식회담임에도 불구하고 국빈들의 경우에만 사용하는 조어대를 회담장소로 정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한국외무부장관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한 데다 미수교국의 영빈관에서 외무장관회담을 갖게되자 회담장으로 떠나기에 앞서 상당히 상기된 표정. 이장관은 이날 아침 일찍 중국외교부에서 제공한 독일제 아우디승용차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조어대로 향발,상오 11시30분(한국시간)한·중외무장관회담 장소인 조어대 제18각에 도착. 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은 미리 회담장에 도착해 회담장 옆방에서 왕영범아주국장등 배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가 현관에서 이장관을 영접. 이장관은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십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고 전부장도 『북경에서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한뒤 사진기자들에게 잠시 포즈. 이장관은 이어 노재원 주북경무역대표부대표를 비롯해 김석우아주국장등 배석자를 소개한뒤 전부장의 안내로 회담장에 입장. 전부장은 먼저 『이렇게 북경에서 이장관을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지난해 APEC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주최국으로서 환대해줘 감사했다』고 인사. 양국 장관은 1시간30분 가량 회담을 계속한뒤 같은 제18각에 있는 식당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회담을 계속. ○…역사적인 한·중외무장관 회담이 열린 조어대는 김나라 장종황제가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시 이름이 불리기 시작한 곳으로 원·명·청조의 황제들이 산행도중 쉬어가던 장소. 청나라 건륭제때 정식으로 휴가용 궁전이 됐으며 59년 외곽을 단장해 영빈관으로 사용되기 시작. 처음에는 중국의 국제지위상 주로 소련·북한등 사회주의국가 원수들이 공식 방문해 숙소로 사용했으며 70년대말 이후에는 서방국가의 귀빈들에게도 개방. ○…이상옥 외무부장관은 이날 하오3시15분 총리집무실인 중남해 자광각에서 이붕 중국국무원총리를 만나 노태우대통령의 안부를 전달. 이총리는 1층 홀에서 이장관 일행을 맞아 악수를 나누며 『반갑다』고 인사. 이총리는 홀 중앙 북쪽에 마련된 주빈석에 이장관과 나란히 앉아 환담. 이총리는 『환영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제47차 ESCAP총회는 서울에서 개최됐는데 제48차총회는 북경에서 열리게 됐다』며 총회 운영에 협조를 당부. 이총리는 『우리는 가깝게 있지만 서로 잘 모른다』며 『이웃이니까 자주 내왕해야 한다』고 교류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 ○…조어대회담에 이어 이날 하오 이장관이 이붕총리를 만난 중남해는 고궁옆 호수인 중해와 남해를 합한 명칭으로 청조부터 소궁으로 사용돼 왔다. 특히 원세개등 실력자들이 거주했으며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정부지도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유명. 중국공산화 이후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이 살았고 현재는 이붕 총리·강택민 당총서기의 거주및 집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당·정핵심부가 들어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곳이어서 이 지역에 한국외무장관이 들어가는 것 자체에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 주북경한국무역대표부 관계자들의 설명.
  • 일 대입입시에 「한반도침략」 첫 출제/게이오대 법학부서

    ◎일제의 한국합병 경위등 물어 관심/고교 근대사교육에 큰 영향 미칠듯 일본의 사학명문 게이오(경응)대학이 올해 입학시험 일본사과목에 일제의 한반도와 중국대륙침략에 관한 문제를 처음으로 출제,관심을 끌고 있다. 게이오대학의 이같은 일본사 시험문제출제는 일본의 아시아지역 침략에 관한 교육을 의식적으로 피해온 일본고교의 근대사교육에 큰 영향을 미칠것으로 보인다. 게이오대학은 지난달 16일 실시된 법학부의 일본사시험에서 일제의 한반도와 중국침략에 관한 내용을 담고있는 지문의 빈칸을 메우는 문제를 출제했다. 지문내용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해 구주열강의 중국분할이 가속화되었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국의 승인아래 한국을 합병했다는 것이다.지문의 일부는 『노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보했고 1905년 영국도 이를 승인했다.그후 얼마안돼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에 의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통감부를 두어 한국합병에 연결되는 조치를 취했다』라고 되어 있다. 게이오대학의 오코노기교수는 이같은 일본사문제 출제에 대해 『일본 근·현대사의 아시아침략부분을 충실히 가르치지 않고있는 현재의 고교 근대사 교육을 감안할때 이번 출제는 희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 주머니속의 양서/“문고본 인기 되찾자” 안간힘

    ◎대부분 세로짜기… 젊은 독자들 외면/「가로세대」에 맞게 가로짜기·판형 확대/을유·문예출판사등서 앞장… 명예회복 노력 국내에서 출간되는 도서들은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세로조판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80년대 접어들면서 가로조판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모든 책이 가로조판으로 나오고 있다.이는 활판인쇄의 시대에서 전산사식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빚어진 결과로 분명 출판형태의 발전된 모습이긴 하지만 이로인한 문제점 또한 적지않다.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구식판형의 책들이 서서히 사장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미 가로조판에 길들여진 독자들이 세로조판의 책을 꺼려하게 됐기 때문이다.특히 대학생 등 젊은 독자층의 세로조판 기피현상은 심각하기까지 할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따라서 과거 아무리 이름을 날렸던 양서라도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재판은 커녕 하나 둘씩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는 실정이다.이같은 현상은 당연히 우리의 독서의 폭을 좁히고 질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과거 명성을 날리던 30∼40년 된 출판사들이 많은 종수의 양서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근래에 와서 하나같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출판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서 양서의 사장을 염려한 노포출판사들이 새로운 독자층을 대상으로 몇몇 구판의 도서를 새롭게 조판하여 펴내고 있는 것은 크게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특히 을유문화사는 을유문고중의 일부를 골라 보통 크기의 일반 단행본으로 잇따라 출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지난해 초 「국화와 칼」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격몽요결」「문학개론」「예술이란 무엇인가」「부생육기」등 모두 5권의 문고본을 새 판형으로 펴낸 것이다.이어 곧 「택리지」「양화산록」「술몽쇄언」「용비어천가」등 30여종을 더 펴낼 예정이다.이 책들은 모두 세로조판에서 가로조판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판형의 확대와 함께 전산사식으로 글자도 커져 젊은 독자들의 취향에 들어맞는다.그러나 과거 문고본 시대의 영예를 만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와같은 작업은 최근 몇 년 동안 이따금씩 있어왔으나 문예출판사등 극히 일부 출판사에서 체계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특히 을유문화사의 경우와 같이 문고본에 대한 체계적인 작업은 아직 없었다.사장되어가는 양서의 명맥을 잇는다는 좋은 취지에 반해 신간을 펴내는 것 이상의 경비가 들어 출판사로서는 재정적으로 큰 모험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을유문화사의 다섯권은 을유문고 가운데서도 첫손꼽히는 명저들로서 문고본으로 20쇄이상의 출간기록을 갖고 있다.특히 가장 최근 선보인 「부생육기」는 지난 69년에 첫판이 나온 이래 20여년동안 다양한 독자층에 고루 사랑을 받아오던 책으로 유명하다.또한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자연스럽고 빈틈없는 우리말을 구사한 명번역으로 더욱 널리 사랑받아 왔다. 때문에 청나라 심복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며 생전의 일화들을 담담하게 그린 필기소설형태의 이 책은 지금에 와서는 중국보다도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더 잘 알려진 책이 되어버렸다.을유문화사의 고정기주간은 『아무리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런 양서들을 판형때문에 사장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면서 앞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보아 작업의 범위를 넓혀나가겠다고 밝혔다. 「부생육기」의 번역자인 지영재교수(단국대)는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이 세로조판의 책은 아예 들쳐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면서 이같은 움직임이 계속 확대되어 가길 기대했다.
  • 외언내언

    경상남북도를 합친것만한 넓이다.79개의 군소섬들을 거느리고 있다.중국 최대의 섬이다.3세기 무렵 중국사람들이 발견했다.본격적인 개척은 중세이후이며 근대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에 시달렸다.첫 식민지를 객척한것은 1624년 네덜란드인들.그들이 붙인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것이 포모사(Formosa)다.보물섬이란 뜻.◆그후 명나라 유신 정성공이 네덜란드인들을 항복시키고 「항청복명」의 피난처로 삼았다가 청나라에 망한후 1885년 대만성으로 복귀.그러나 기구한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청­일전쟁후 일제식민지 51년을 겪고 49년 국공내전에 패한 국민당정부의 피난처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대만의 약력이다.중국대륙의 3백분의1도 안되는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은 모두 2천여만.선주민족인 말레이·폴리네시아계의 고산주 25만을 제외하면 98%가 한주이다.그러나 이 한주의 84%는 남쪽해안의 복건·광동성에서 이주해 오래전부터 살아온 이른바 본성인이며 16%는 49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피난온 북중국계의 외성인들.◆그동안 대만을 정치적으로 지배해온것은 이 국민당정부와 외성인들이었다.이때문에 본성인들은 불만이 많았으며 심한 정치적탄압을 받기도했다.그러나 85년이후의 세계적인 민주화바람은 대만에도 정치적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본성인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었다.◆본성인출신이 국민당정부의 총통이 되고 「대만의 운명은 대만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한다」는 「자결강령」의 야당도 출현.민주진보당으로 89년 총선에서 30%의 지지를 획득했다.13일 대만정부는 물론 중국정부의 요란한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강령에 대만을 「독립된 주권공화국」으로 규정한 조항을 삽입키로 한것도 바로 그 민진당.2개의 중국정부가 모처럼 일치된 반대를 하고있다.독립 「대만공화국」은 탄생할 수 있을까.기구한 운명의 또한차례 향방이 주목된다.
  • 30년 불화요인 청산… “화해악수”/중·소의 국경조약 체결의미

    ◎미 독주 견제,신질서 형성에 공동보조 확인 중국과 소련은 16일 지난 60년대 이후 양국분쟁의 직접적인 요인이 돼 왔던 흑룡강(소련식 명칭은 아무르강) 주변 등 동부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종식시키는 국경 협정을 체결,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지난 57년의 모택동 이후 중국공산당 수뇌로서는 이번에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한 강택민 총서기는 16일이 협정 조인식이 끝난 뒤 『이번의 국경협정 체결은 두 나라 공산당 정부의 변함없는 결속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외교전문가들은 이번의 협정체결을 계기로 중소 두 나라가 걸프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과정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상호우의를 돈독히 다져나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양대 공산국가들이 지난 50년대의 동맹시대로 복귀할 것 같지는 않으며 중국측 견해대로 상호주권 및 영토존중,내정 불간섭 등의 평화 5원칙에 따라 실용주의에 입각한 협력관계를 심화시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은 또 이번 협정체결과 함께 동부국경의 소측 항구도시 하바로프스크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국경무역발전·국경지대 공동개발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양국 정상들에 의한 협정체결이 불가피했던 중소 국경문제는 지난 60년 8월 중국측이 과거 청나라와 제정러시아 시대에 힘에 밀려 맺었던 국경선 관련조약들이 불평등함을 이유로 내세우고 러시아에 빼앗긴 1백50㎢의 영토반환을 요구한 데서 비롯된 것. 1858년의 애혼조약이나 1860년의 북경조약은 당시 쇠약했던 청나라가 무력적인 남진정책에 굴복해서 맺게 된 것으로 흑룡강 이북지역을 모두 빼앗기게 됐다. 또 서부국경지역에서는 1864년의 타르바카타이조약과 1881년 이리조약으로 신강성 북부지역이 러시아에 편입됨으로써 오랜 분쟁의 불씨가 마련된 것이다. 중소 두 나라는 지난 60년대초 이념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69년 3월 흑룡강 지류인 우수리강 가운데 진보도에서 양국 수비대가 무력충돌,중국측 8백여 명,소련군 70여 명이 사망함으로써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그뒤 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북경을 방문하는 등 양국간 데탕트가 무르익으면서 국경지대의 감군이 시작됐고 이번 협정에 따라 그동안 미해결 상태로 남았던 흑할자도(아무르와 우수리강의 합류지점에 있으며 면적 3백㎢) 등 나머지 섬들의 중국 귀속도 이뤄지게 됐다.
  • 표류하는 조어대의 영유권/영토분쟁 왜 흐지부지 돼가나

    ◎페만파병 맞물려 파문 커지자 처리 보류 일/“53억불 대일 차관 교섭에 장애” 소극적 중/국력열세 한탄하며 뾰죽한 수 없어 관망 대만 대만 북쪽 해상에 위치한 조어대열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대만 및 중국이 첨예하게 맞섰던 영유권분쟁은 열기가 식은채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지난 9월29일 일본이 『우익단체 일본청년사가 78년 이 열도에 세운 등대를 공식항해표지로 정한다』며 조어대가 그들 영토임을 주장한 뒤 지난달 21일 무력행사위협으로 대만 어선들을 몰아냄으로써 날카롭게 표면화 됐던 영유권분쟁은 중ㆍ일간의 암묵적인 합의로 「유보상태」를 견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어대분쟁이 발생하자 대만에선 조야가 떠들석하게 거센 반발을 보였고 홍콩과 다른 지역의 화교들도 모두 들고 일어나 자위대 해외파병과 관련,일본의 군국주의적 행동을 비난했다. 중국은 외신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대해 『조어대는 중국 고유의 영토』라고 밝혔을 뿐 별다른 외교적 행동을 보이지 않다가 해외여론을 의식했음인지 지난달 27일 외교부 부부장(차관) 제회원이 북경주재 일본대사 히로시 하시모토(교본)를 불러 항의했다. 그러나 이 항의는 다분히 한계를 설정한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으로 『일본은 앞으로 중국 및 대만어선에 대해 무력시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그쳤다. 제 부부장은 또 조어대 영규권문제는뒷날 다시 논의키로 하고 그대신 이 열도의 석유 및 수산자원에 대한 공동개발을 제의했다. 일측은 구체적인 확답을 하지 않았으나 『열도의 등대를 공식 항해표지로 정하려는 방침을 유보하며 영규권문제는 후대들이 처리토록 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정도로 중국의 연성항의에 화답하듯 성의를 갖춘 반응을 나타냈다. 중국이 예상밖의 저자세를 보이는 것은 산업부장 호평이 지난 31일 도쿄를 방문,일본으로부터 53억달러의 차관을 들여오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데다 지난해 천안문 사태이후 일본이 서방세계의 대중 경제제재 해제에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한편 대만은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이홍장이 대만과 조어대를 일측에 넘겨줬던 외교방식과 다를게 없다며 『조어대는 대만영토인데 중ㆍ일 공동자원 개발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만으로선 추이를 관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일 뿐이다. 관측통들은 중국이 대만과의 통일시기를 기다린뒤 다시 일본과 조어대 영유권을 놓고 본격적인 한판 승부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해보더라도 대만에게만 유리해질 가능성이 많고 또 일본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는 입장에서 쓸데없이 분쟁을 가열시키기 싫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때 일본에 강점됐던 이 열도를 2차대전후 오키나와와 함께 관할하다 다시 일본에 넘겨줘 분쟁의 씨앗을 뿌렸던 미국은 공식성명을 통해 『당사국끼리 해결할 문제』라고 발뺌하고 있다.
  • 97년 중국 귀속 앞두고 투자확대(특파원수첩)

    ◎영,「홍콩 새 국제도시화」 은밀 추진/신시가지ㆍ새공항ㆍ해저터널 건설 서둘러/기득ㆍ운영권 등 획득,영구 식민지화 기대 홍콩의 신국제화(New Internationalization)전략이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다. 홍콩의 종주국인 영국이 이 지역의 중국 귀속시점인 오는 97년전에 모든 동원가능한 수단을 써서 새롭게 국제화된 모습을 갖추게끔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이같은 전략에 따라 홍콩정부는 올들어 대규모 항만 개발계획을 발표했고 홍콩섬 주변의 해안을 매립,신시가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중이다. 또 홍콩섬 옆의 란타우 섬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미국 벡텔사와 지난 4월 건설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홍콩과 구룡반도를 연결하는 세번째의 해저터널도 뚫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같은 주요 개발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은 1백63억달러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홍콩정청은 이 금액의 60%를 외국자본으로 충당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사업 이외에 홍콩에 보다 많은 외국상사ㆍ금융기관을 유치하려는 계획도 추진중이다. 오는97년 7월1일 중국에 반환될 홍콩에 대해 영국이 이처럼 투자를 확대하고 개발을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전략에는 먼 장래의 이익을 염두에 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같다. 영국으로선 현재 홍콩밖에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될만한 식민지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달러 박스격인 홍콩을 쉽사리 포기하기 싫어서 중국반환을 앞두고 오히려 개발투자에 열을 올린다는 얘기다. 새로운 첨단기술과 공정으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신시가지를 조성하며 금융ㆍ무역도시로서의 기능을 더욱 높일 경우 중국으로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별 도리없이 영국측에 홍콩의 운영권을 맡길 것으로 영국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영국은 97년 이후에도 홍콩의 계속적인 발전에 따라 생기는 과실을 항구적으로 챙길 수 있는 기득권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은 또 투자재원을 자국은 물론 미국 서독 프랑스 일본 등 여러나라로부터 조달하려 노력중이며 한국엔 건설인력을 요청하고 있다. 영국이 홍콩의 신국제화계획에 각국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이유는 장래의 이익과 관련,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즉 97년 이후 홍콩이 중국에 넘어 가더라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중국당국이 마음대로 홍콩을 다룰 수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난 19세기 중엽 서구열강들이 중국에 발을 디뎌 놓았을 때 공동으로 이권다툼에 개입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을 속수무책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을 써 보겠다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식민지확보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홍콩의 신국제화계획에 대한 중국당국의 반응은 그다지 흔쾌한 것 같지 않다. 중국측 입장에서도 앞으로 외화획득에 큰 몫을 하게될 홍콩의 발전이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지만 외세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이 달가울리 없는 것이다. 중국당국은 또 지난해 6.4천안문사건과 관련,홍콩이 자본주의와 민주사상을 대륙에 주입시켜 그들의 사회주의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전초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홍콩의 경제성을 너무 중요시한 끝에 정치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 바로 상해대개발 계획인 것으로 지적된다. 중국은 지난 6월 과거 국제무역ㆍ금융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상해가 옛 영광을 되찾고 홍콩을 능가하는 자유무역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빠른 시일안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7월에는 주용기 상해시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시장대표단이 각 도시를 순방,투자유치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화교실업인들을 대상으로 상해에 대한 투자를 적극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영국의 홍콩 신국제화전략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밝은 편은 아니다. 97년 이후의 공산정권지배에 대한 불안감과 6.4사건의 충격으로 연간 5만명 이사의 고급두뇌인력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상황에서 신국제화계획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외세와 오랜 투쟁경험을 쌓은 북경정권이 홍콩을 사실상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영국의 속셈에 호락하게 말려들지 않을 것이며 비록 97년 이후에도 홍콩의 현체제를 지속시킬 것으로 알려지고는 있지만 조만간 강력한 주권을 행사,외국의 영향력을 점차 배제시킬 것이란 예측을 하고 있다.
  • 「냉전의 벽」 허무는 만남/현지서 본 한ㆍ소 정상회담

    노태우대통령의 북방정책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사실은 국제정치사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소련의 대외진출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침략적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는 평화지향적이다. 우리의 북방정책은 처음부터 대공산권 화해정책이다. 때문에 두 「정책」의 만남은 평화이고 화해라는 도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둘의 만남은 매우 적절한 시기에,또 아주 적절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적절한 시기라 함은 동구의 대변혁으로 전유럽의 안보구조가 변질되고 있는 때에 동북아시아만이 구체제에 묶여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 장소가 적절했음은 한반도문제의 한 당사자인 미국땅이었기 때문에 상호 오해의 간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이곳의 권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4일 한소정상회담을 「역사적」이라고 표현했다. 크로니클지는 장문의 1면 기사에서 두 정상의 만남이 「역사적」인 이유로 한동안 적대국이었던 두 나라가 국교정상화를 이룩하게 됨으로써 한반도에서 긴장완화를 기할 수 있게 됐고 이는 남북한 통일에의 한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소정상회담은 실로 「역사적」이었다. 회담후 공동성명이 없었다느니,소련측은 기자회견을 하지않았다느니 하는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다. 외교절차상으로는 지적이 될지도 모르나 이번 모임에 그런 시비는 의미가 없다. 한소정상회담은 이미 외교적 차원이 아닌 때문이다. 외교적 절차가 문제가 됐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성사가 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린 4일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유난히도 좋았다. 섭씨15도 안팎의 쾌적한 기온에 하늘엔 구름 한점이 없었다. 대기는 투명했고 산들바람까지 불어 주었다. 그래서 이날 온종일 바쁜 일정을 보낸 고르바초프는 여기저기서 날씨칭찬을 하고 다녔다. 이 좋은 날씨에 가는 곳마다 박수갈채를 받았으니 제 아무리 초강대국 대통령이라해도 기분이 상기됐을 법도 하다. 노대통령의 숙소인 페어몬트호텔에 들어서는 고르바초프는 아주 유쾌한 표정이었고자신에 차 있었다. 회담을 끝내고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정상회담이 끝난후 기자회견장에 나온 노태우대통령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45년간이나 지속된 냉전체제에서 벗어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고 술회,한소정상회담의 안보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불행히도 한국과 소련 두나라 관계는 줄곧 적대적인 것이었다. 17세기중반 청나라의 출병요청을 거절치 못한 효종이 조선군을 흑룡강지역에 파견,동진하는 러시아군과 마지못해 대결하게 된 일로부터 20세기초엽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남진정책은 무던히도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후 한반도분할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6ㆍ25」를 사주한 일은 한소관계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오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이 변화하며 미래의 역사를 바꾸어 갈 수는 있는 일』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은 바로 그런 역사적 작업일 것이다. 유럽에 온 봄이 동북아라고 그냥 지나치고 말리야 없겠지만 세계의 봄은 자연의 봄과 달라 자칫하면 봄은 봄이로되 봄이아닌 봄일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맞아들이지 않으면 말이다. 한소정상회담은 바로 이런 적극적 사고의 소산이다. 아직도 우리주변엔 한국과 소련의 접근을 경제적 관계의 차원에서만 보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소련이나 우리 모두 경제적 실리를 쫓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속을 우려하고 제각기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소련의 접근은 경제적 이해보다 훨씬 더 큰 안보이해를 갖고 잇다. 그것은 너무 크기 때문에 시야에 쉽게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현재 스탠퍼드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슐츠 전미국무장관은 4일 연설을 위해 이곳을 들른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을 소개하면서 『먼 미래에 대한 역사적 개념이 더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아마도 그가 우리의 북방정책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대단히 진취적이고 전향적인 역사의식』이라고 평했을지도 모른다. 야심만만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즐겨 암송하는 영시 한토막을 이 글의 말미에 붙여 두고 싶다. 『역사의 배는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어떤 폭풍우도 그것을 파괴할 수는 없으며 어떠한 적도 역사의 배를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역사의 진실에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중략) 역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도 자유롭습니다. 역사는 정의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정의롭습니다. 역사는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항해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중략) 역사의 배는 짙은 안개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는 거친 파도도 이겨내야 합니다. 역사의 배는 항해를 계속 해야 합니다』
  • “중국공산당의 들러리”8개 민주당파/홍콩 명보가 밝힌 정당의 실태

    ◎“다당제”구색 맞추기 위한 「형식상의 야당」/당원 30만뿐… 문혁후 사실상 활동 중단 소련과 동구국가들이 공산당 일당전제 포기 방침을 밝히고 민주개혁의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는 가운데 강택민 당총서기를 비롯한 중국지도자들도 얼마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당제 실시를 강조하고 있다. 또 오는 20일 개막되는 올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의 주요의제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다당 합작정치제도 확립방안이 들어있다. 그러나 중국지도층은 『우리의 다당제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나 서방세계의 것과는 달리 중국현실에 맞는 공산당 영도의 다당제』라고 밝힘으로써 정치의 진정한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제도임을 쉽게 알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중국에는 공산당 이외에도 형식상의 야당격인 이른바 8개 민주당파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민주당파는 모두 중국정부수립(1949년) 이전에 결성됐고 당원들은 대부분이 지식인ㆍ소자본가들로 국ㆍ공내전당시 민주쟁취의 명분을 내걸고 활약했었다. 장개석이 이끄는 민주당의 부패에 반발,공산당편에 섰던민주당파 인사들은 중국정부 수립당시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그런대로 정치적 기반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 모택동의 반우파 운동으로 큰 타격을 받은 데 이어 문화혁명과정에서 또 한번 곤욕을 치른 뒤 사실상 활동이 정지됐던 것. 8개 민주당파의 당원수는 모두 30만명으로 공산당원 4천7백만명에 비하면 형편없는 열세이다. 89년말 현재 14명의 민주당파 인사가 행정부처 차관이나 부성장ㆍ부시장직 등을 맡고 있다. 중국당국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어느정도 순응하는 듯한 제스처로 향후 민주당파 인사들을 보다 많이 요직에 임명한다는 방침이다. 그렇지만 모든 분야의 주역은 공산당이어서 겉치레의 들러리 신세인 민주당파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론 믿어지지 않고 있다. 홍콩의 중립지 명보가 밝힌 중국내 8개 민주당파의 명세는 다음과 같다. ▷중국 국민당혁명위원회(민혁)◁ 손문의 삼민주의를 계승하기 위해 1948년 국민당에서 이탈한 인사들이 홍콩에 망명,결성했다. 손의 미망인 송경령이 명예주석이던 민혁은 문화혁명때 와해됐다가 78년 다시 조직됐다. 현재 전인대 상무위원회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주학범이 주석. ▷중국민주동맹(민맹)◁ 1941년 당시 중국청년당ㆍ중화민족 해방운동위원회 등을 규합,결성. 50년대 반우파운동에 따른 박해로 많은 인사들이 당직을 버리고 떠났으나 현재 당원이 10만명으로 8개 민주당파 가운데 가장 많다. 주석인 비효통은 중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이며 부총리 물망에 올라 있기도 하다. ▷중국민주건국회(민건)◁ 당원은 경제계 인사 및 경제학자들로 구성돼 있다. 1945년 중경에서 창당대회를 가진뒤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투쟁을 위한 자금공급에 힘썼으나 국ㆍ공 내전때에는 공산당을 도와 중국 정부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때문에 중국당국으로부터 박해를 적게 받은 편. 민건의 당원들은 공업ㆍ상업ㆍ운수등 경제 각분야에서 두드러지며 개방ㆍ개혁정책 추진 이후 외자도입의 공로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석 손기맹,당원 5만명 ▷중국치공당◁ 청나라 말기 미국의 중국인들이 결성했던 홍문치공당이 전신이다. 홍문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반대하던 한족의 비밀결사조직. 1925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고 일본의 중국본토 침략때 해외화교들로 부터 자금을 모아 중ㆍ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쟁을 지원. 중국공산당 정부수립후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석 황인초. ▷중국민주촉진회(민추)◁ 당원가운데 교육ㆍ문화ㆍ출판계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많다. 1945년 상해에서 일당전정 폐지ㆍ국민자유권보장 등을 내용으로 한 시국선언과 함께 창당됐다. 주석 뇌결경. ▷중국농공민주당(농공당)◁ 40년대 초반의 중화민주정치단체 연맹 구성원 가운데 의약ㆍ보건위생ㆍ과학기술관련 전문지식인들이 따로 떨어져 나와 결성. 주석 노가석. ▷구삼학사◁ 구성원은 대부분 과학기술ㆍ문화ㆍ교육ㆍ의학계통의 고급 두뇌들. 1944년 창설한 「민주과학좌담회」의 후신. 주석 주배원. ▷대만민주자치동맹(대맹)◁ 대륙에 거주하는 대만계 중국인들의 정당. 1947년 홍콩에서 결성된 뒤 처음에는 국민당을 지지하다가 공산당 노선에 참여했다. 중국내에서 대만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임을 표방.
  • 과소비의 역사적 교훈/강석진 국제부 기자(오늘의 눈)

    로마시 남쪽에는 아직도 카라칼라 대욕탕이 남아 있다. 3세기 카라칼라 황제때 지어진 이 욕탕은 당시 로마의 대욕탕들과 마찬가지로 냉온탕 한증실 경기장까지 갖추고 한번에 1천6백여명이 이용할 수 있는 사교장이었다. 대욕탕은 후세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를 남겼지만 그로 인해 「로마는 목욕탕에서 망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시민에게 과중한 세금부담과 물가고를 안겼다. 근대 중국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는 오욕의 역사를 겪었다. 바로 그 19세기를 맞이하기 직전 청조 태평성대 때인 건륭제시절 총신 화신의 호사는 유명한 이야기. 화신이 날마다 복용한 영약은 한 알에 백은 1만양에 해당됐으며 결국 사사된 그가 남긴 재산은 당시 청나라 20년분의 세수와 맞먹는 액수였다 한다. 또 하북성 회유땅의 학씨는 어느날 황제를 초대,한끼 식사를 대접하는 데 백은 10만냥을 소비했다고 전한다. 중국요리의 명성과 특권계급의 호사의 뒤에는 수백만 수천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유랑생활을 해야 하는 참혹함이 있었고 이것이 근대 중국이 오욕의 나락에 떨어진 배경의 하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과소비와 사치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제 일부에서는 마약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밖에서 보는 눈도 곱지 않다. 지난해말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한국경제가 아시아 4용이 아닌 「지렁이」로 전락했다고 보도,지렁이론을 회자시키더니 지난 9일에는 또다시 한국경제가 전례없는 곤경에 처해 있다고 보도했다. 그 원인으로 여러가지를 들면서 재벌의 족벌체제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지도 한국내 일부 부유층의 사치ㆍ과소비 풍조가 계속될 경우 경제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치ㆍ과소비에 대한 우려와 경제위기론이 점고되고 있는 이때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던 이 나라의 상부층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불어에 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귀족은 평소 명예와 이익을 누리는 대신 피와 땀이 요구될 때에는 희생의 선봉에 서야 하는 의무를 뜻한다. 족벌체제와 사치ㆍ과소비의이야기 대신 국민들의 희생과 인내에 상응하는 Noblesse Oblige이야기가 듣고 싶다. 이 「위기」를 진정 벗어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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